#42
<따스한 온천수가 몸을 감쌉니다……. 체력과 마력이 2배 더 빠른 속도로 차오릅니다.>
“하, 좋다.”
온천욕이 이런 거구나. 현실에서도 온탕에나 가끔 몸 담가 봤지 온천은 한 번도 안 가 봤던지라 신기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풀 냄새도 좋고, 물에 섞인 유황 냄새도 새로웠다.
“완전 한겨울에 와도 좋겠다. 애들이랑 쌓인 눈 보면서 계란도 먹고.”
“그러지.”
“네이번에서 우리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하겠지? 사실 싫어하겠지.”
“그렇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뭘 걱정하나.”
“그건 그래.”
권력 좋다는 게 뭐겠어. 이런 거지.
나는 발끝을 세워 작게 물장구를 쳤다. 다리 위로 보글보글 물거품이 일었다.
“애 같군.”
루드비히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애는 너란다, 루드비히. 넌 실제로는 고작해야 2년도 안 살았어. 나는 나름 20년 넘게 살았다구.
나는 루드비히에겐 차마 하지 못할 말을 삼키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나른하게 눈꺼풀을 내린 루드비히의 모습은 제법 관능적이었다. 루드비히가 숨 쉴 때마다 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들이 잘 짜인 근육을 타고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거기에 시선을 두고 있자니 저절로 뺨이 홧홧해져 왔다. 나는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생각했다.
역시 방송을 켤 걸 그랬어.
“얼굴이 빨갛군.”
“어?”
“어디 아픈가?”
“아, 안 아파. 그냥 여기가 좀 더워서 그래.”
“먼저 나가겠나?”
“아냐. 아직은 견딜 만해.”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루드비히도 더 묻지는 않았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마티어스는 잘 지내고 있을까?”
“황자가 우리 쪽에서 대우받는 만큼은 대우받고 있겠지.”
황자가 오늘 어땠더라. 그나마 내가 권해서 먹은 저녁 몇 입도 토하러 뛰쳐나갔던 것 같은데.
“으음…….”
“걱정하지 마라. 쇠심줄보다 더 질긴 녀석이니.”
내가 영 마뜩잖아하자 루드비히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참방, 손가락과 손목뼈를 지난 물줄기가 팔꿈치를 타고 물속으로 낙하했다.
“하긴, 전쟁터 한가운데서도 항상 여유로워 보이는 녀석이니까. 잘 살고 있겠지.”
“보고 싶나?”
“뭐? 아니! 절대!”
내 격한 반응에 루드비히의 미간에 골이 패었다. 기분 나빠 하네? 설마 질투하는 건가.
“아니, 그으냥…… 내 의견으로 거기 가 있으니까 쪼오끔 신경 쓰이는 거지이.”
“그렇군.”
나는 루드비히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왜? 내가 보고 싶어 할까 봐 신경 쓰여?”
“헛소리.”
그렇게 말하는 루드비히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나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짜식, 너 나 좋아하지? 좋아하면 빨리 고백해.
역시 방송을 켜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루드비히가 나를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아니, 진도에도 순서가 있는 법인데, 이건 너무 빠르지 않니?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하고 있는데 내 바로 뒤에서 뜨거운 물 분수가 2m가량 솟구쳐 올랐다.
“뭐, 뭐야. 공격인가?”
“아니.”
루드비히의 긴 손가락이 내 이마와 코, 한쪽 눈꺼풀 위를 뒤덮었다. 긴장감으로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 게 느껴졌다.
[‘간헐천’을 보았습니다. 신비한 자연 현상으로 인해 매력이 10 증가합니다.]
[‘신비한 자연 현상’ 컬렉션에 ‘간헐천’이 등록되었습니다. 54/200]
아, 간헐천이구나.
여전히 놀라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드비히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니, 이건 놀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루드비히의 따뜻한 숨결이 목덜미에 와 닿았다. 한밤중에도 루드비히의 자안은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어쩐지 루드비히가 점차 가까워진다는 기분이 들었다. 잔뜩 긴장해 몸을 굳히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 황자 전하께서 살해당하셨다-!”
짧은 침묵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을 박차고 나와 다급히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황자가 살해당했다니, 대체 누구에게?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적군 사이에서 애써 의연한 척하던 황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게임 속에서 사람을 죽여 보지 않은 건 아니다. 내 마법에 누군가는 분명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황자는 오로지 내 선택 때문에…….
“조심해.”
바지를 입던 나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어느새 옷을 전부 챙겨 입은 루드비히가 나를 뒤에서 받아 주었다.
“천천히 해. 괜찮으니까.”
“아, 응. 그래…….”
나는 괜스레 코를 훌쩍이며 다시 옷을 꿰입었다. 루드비히가 내 젖은 머리칼을 큰 수건으로 털어 주었다. 부츠까지 챙겨 신은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됐어. 가자.”
“그래.”
우리는 동시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신속의 장화!”
마법을 걸자마자 주변 풍경이 빠르게 이지러졌다. 루드비히는 따로 마법을 걸지 않아도 나와 비등하게 뛰었다.
삐이이이- 펑!
펑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노란 불꽃이 수놓았다. 그걸 본 루드비히가 혀를 찼다.
“젠장.”
“왜 그래?”
“저 불꽃, 황자가 죽었다는 걸 네이번에 알리는 불꽃일 거다.”
상황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곡식이며 고기를 저장해 둔 식량 창고는 불타고 있었고, 병사들은 무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싸우고 있었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아군이 될 수 없다는 걸 절절히 보여 주는 듯한 풍경에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저쪽이다! 황자를 잡아-!”
네이번의 병사 하나가 루드비히를 가리켰다. 우리 쪽 기사와 네이번 쪽 기사가 동시에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당연하게도 우리 쪽 기사는 루드비히를 지키기 위함이었고, 적 측의 기사는 루드비히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루드비히, 뒤!”
네이번의 기사 셋을 상대하고 있던 루드비히의 뒤로 기사 하나가 더 접근해 왔다.
“파이어 볼!”
나는 망설일 새도 없이 기사의 머리에 주먹만 한 둥근 구체를 날렸다. 기사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으윽!”
기사가 신음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루드비히가 셋의 검을 한 번에 날려 버리고 네 번째 기사의 팔을 깊이 베어 냈다.
상황은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다. 체자레와 압실론도 저쪽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암살자에 마법사 조합이다 보니 근거리 공격에 취약한 편이라 더 그런 듯했다. 나는 루드비히에게 보호막을 걸어 주고 뒤로 물러났다. 이렇게 근거리 전투를 할 때엔 마법사까지 가까이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있어 봤자 인질이나 되지.
나는 텐트에라도 숨어 있을까 싶어 뒷걸음질 치다 물컹한 무언가를 밟았다.
“……!”
밟은 순간 직감했지만 그건 사람의 손이었다. 다른 기사들보다 작고 창백한 손. 황자의 손이었다. 나는 기사들의 눈치를 보다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황자는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깨끗했다. 흙바닥이 아니라 침대 위에 있었다면 자고 있구나 착각할 만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자의 코밑에 손을 대어 보았다.
[신체 반응 없음.]
정말 죽었구나.
아마 독살을 당한 듯했다. 죽기 전 제법 저항했었는지 텐트 안의 물건들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생각하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면 마티어스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텐트를 박차고 나갔다. 네이번의 기사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어딜 감히 들어가-!”
잔뜩 분노해 쉰 목소리로 기사가 내게 소리쳤다. 주문을 외려고 했지만 기사가 더 빨랐다. 팔을 들고 눈을 질끈 감는데, 기사의 검과 부딪혀 얄팍한 보호막이 부서지기 직전 어디선가 날아온 단검이 기사의 가슴에 깊숙이 꽂혔다.
“커억…….”
기사가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이내 그의 머리가 흙바닥에 닿았다. 나는 단검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체자레가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친 낯으로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조심해요, 이현.”
“고, 고마워.”
나는 체자레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체자레가 물었다.
“찾는 사람 있어요?”
“루, 루드비히 어딨어?”
“아마 제일 높은 곳에서 지휘하고 있을 거예요.”
“그럼 루드비히한테 전해 줘. 나 지금 마티어스한테 간다고.”
“안 돼.”
“어?”
“위험해요.”
체자레가 내 소매를 쥔 채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가야 해.”
“지금 가도 이현은 별로 도움이 안 돼요.”
“그래도 가야 한다니까!”
나는 체자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그는 아예 내 어깨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상황이 정리되면 같이 가요.”
“……이거 놔, 안 놔?”
“안 간다고 하면 놔줄게요.”
“……안 갈게.”
“거짓말.”
믿지도 않을 거면서 왜 말하라고 하는 건데!
내가 몸부림칠수록 체자레의 손이 나를 사슬처럼 꽁꽁 동여맸다. 그때, 순간 체자레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체자레의 반지에서 푸른 보호막이 쏟아져 나와 얼음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화살을 막아 냈다.
“이현! 어, 체자레……?”
상처투성이인 압실론이 나를 끌어안은 체자레를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적인 줄 알고 공격했다가 체자레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비틀어 체자레로부터 벗어났다.
“고맙다, 압실론!”
“어, 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