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내가 자리에 앉자 사용인들이 식사를 하나씩 가져왔다. 의외로 오늘의 식사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감자수프와 토마토카프레세, 버섯과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 안에 뜨거운 초콜릿이 든 컵케이크까지.
분위기는 살얼음판이라도 음식이 맛있으니 예상외로 음식이 제법 넘어갔다. 사실 대화 한 마디 없다 보니 식사에 열중하는 수밖에 없기도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초콜릿케이크를 먹는 데 열중해 압실론이 한 말을 놓치고 말았다.
“……로 했어.”
“…….”
“들었어?”
“어, 뭐라고?”
“…….”
“먹느라고 못 들었……. 아니, 케이크가 맛있어서!”
나는 포크를 문 채 다급히 변명했다. 그 바람에 발음이 살짝 뭉개져서 나왔다. 압실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말해 주었다.
“별거, 아니야.”
“뭐, 뭔데?”
“널 가두기로, 결정했다고.”
“그래…… 뭐?”
웬만한 말은 다 좋게 넘어가려고 그래, 라고 대답했던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나를…… 가둔다고?”
이미 가둔 거 아니야?
“그래. 널 위해 준비한 곳이 있긴 했지만, 반대하는 의견이 있, 어서 처음부터 거기 두진 않았었으니까.”
대체 어디길래. 어디 지하 감옥쯤이라도 되나.
“농담이지?”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압실론에게 말했다. 압실론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농담일 리가 없지.
나는 일단 튀고 보자는 생각에 의자를 뒤로 끌었다. 끼기긱, 의자가 끌리기도 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압실론이 내 손목으로 손을 뻗었다. 시체처럼 서늘한 체온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어디 가? 위, 위험해.”
“이, 이거 놔!”
나는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압실론의 손을 뿌리쳤다. 압실론은 생각보다 순순히 내 손목을 놔주었다. 나는 새파랗게 질려 이 미친놈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얘네 다 제정신이 아니야.
좀 숨었다가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쯤 다시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흔들리는 선상에서 중심을 잃은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점차 졸음이 쏟아졌다.
“위, 위험하댔잖아.”
압실론이 굳어 가는 내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케이크가 든 접시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케이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케이크에, 약 탔냐?”
“으응. 슬립은 강제로 재우는 거라, 몸에 별로 좋지 않거든.”
약으로는 재워도 되고?
“이건, 순해.”
압실론이 아이처럼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순하긴 지랄.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압실론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조차도 곧 두 개의 잔상으로 변해 어딜 노려봐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는 안 돼. 깨어나면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게 되는 걸까.
어떻게든 설득해야 해. 내가 완전히 잠들어 버리기 전에.
나는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에 있던 마티어스를 좀 설득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소맷자락을 쥔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룻바닥에 무릎이 닿아 서늘했다. 과음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고 눈을 감으면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어 가물가물해져 가는 정신을 억지로 깨웠다.
“뭐 하는데.”
마티어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가치한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에 숨이 턱 막혀 왔다. 휘청거리다 그의 허벅지 위에 턱을 괸 나는 그를 애타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 내가 어제 빠져나간 것 때문에 그래? 당황해서 그랬어. 너희도 알잖아. 갑자기 가고일이 나타나서…….”
“우리 곁이 더 안전하다는 걸 너도 알았을 텐데.”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날, 네가 아무 사고도 안 치고 돌아왔다면 우린 널 조금 더 풀어 줄 생각이었어.”
마티어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새벽녘 칼바람처럼 차갑게 말했다.
“사냥도 가고, 바다에도 가고, 예전처럼 모닥불에 둘러앉아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그렇게 살려고 했어.”
“그, 그렇게 하자. 나 이제 도망 안 갈게. 아무 데도 안 갈게. 정말이야…….”
“먼저 믿음을 깨트린 건 너야. 넌 다시 믿어 보려 했던 우리를 전부 기만했어.”
그리고, 이젠 그 대가를 치러야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뒤로 넘어가는 나를 누군가의 손이 받아 주었다. 시스템 창 경고음이 뜨는 걸 마지막으로 의식이 까무룩 어둠 속에 잠겼다.
* * *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건 나를 노려보고 있는 마티어스였다. 그의 뒤로 보이는 광활한 대지와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본 나는 이게 곧 꿈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가두려는 곳이 바깥은 아닐 테니까. 아주 긴 꿈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자, 왜들 그렇게 싸우고 그래요. 애들처럼.”
“애지 뭐. 새파랗게 어린데.”
“너랑 한 살 차이밖에 안 나거든? 그리고 쟤가 내 신발에 개구리알을 넣었다고!”
나는 체자레의 뒤에 숨어 혀를 내밀었다. 물론 내가 한 건 아니고 과거의 내가 한 행동이었다.
“네가 어제 내가 따 온 산딸기 다 처먹었잖아!”
“먹으라고 따 온 거잖아!”
“난 맛도 못 봤거든?”
그 무렵의 우리는 사사건건 싸워 댔다. 루드비히가 유배당한 마을에서 태어난 마티어스는 한 살 위의 루드비히를 친형처럼 따랐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튀어나와 루드비히에게 친한 척하는 내가 영 마뜩잖았던 모양이었다. 압실론을 들이는 일로 갈등이 깊어져 지금은 작은 꼬투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사실 나는 별 감정은 없고 마티어스가 혼자 약 올라 하는 거긴 했다. 툭 건드리면 화르르 타오르니 반응이 재밌는 편이라 자꾸 놀려 대고 싶기도 했고.
“그만 싸우고 회의 들어가지.”
루드비히가 앙알대는 마티어스를 얼렀다. 마티어스가 분한 듯 나를 노려보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는 첫 영지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죽으라고 보낸 전장에서 계속 대승을 거두고 있으니 황제도 당황해하고 있을 터였다.
황제야, 이게 바로 주인공 버프라는 거란다.
나는 조만간 목이 떨어져 나갈 황제의 명운을 미리 빌어 주었다.
제국의 옆에 위치한 소국 네이번은 이제 영지 두어 개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우리는 그중 대평원을 가진 에이버린 성주와 기나긴 대치 중이었다.
“이미 에이버린은 약해졌어. 그냥 뚫고 들어가는 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평원에 뭐가 있을지 몰라요. 세 팀으로 나눠서 A 팀을 먼저 진입시키는 게 나아요.”
“그러다 그 적은 인원으로 적군이랑 맞붙게 되면? 그건 개죽음 아니냐?”
“의미 있는 희생이죠.”
“난 내 애들 그렇게 희생하는 꼴 못 봐.”
작전 회의는 끝을 모르고 길어졌다. 마티어스와 체자레의 실랑이가 길어졌고, 압실론은 이 전쟁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루드비히는 그들의 대화를 죽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 역시 그 회의에 참여 중이었다. <소년들>은 난이도가 높은 게임이라 주인공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됐다. 물론 이따금 시청자들이 주는 달풍선을 넙죽넙죽 받으며 그들이 원하는 캐릭터들을 한 번씩 비춰 주기도 했다.
혀니S2루드비히: 루드비히보여주세요루드비히보여주세요루드비히보여주세요
이금현: 저 회의에 집중한 마티어스의 옆모습…… 섹시해……. 얼굴과 근육과 약간 부족한 인성…… 그 모든 걸 가졌지만 충정공파 40대손 나 이금현은 가지지 못했지.
압실론포에버: 압실론조는거봐ㅠㅠ너무귀여워
[‘압실론포에버’ 님이 달풍선 100개 선물!]
[‘혀니S2루드비히’ 님이 달풍선 30개 선물!]
[‘자전거탄솟대’ 님이 달풍선 70개 선물!]
오늘 목표치까지 쑥쑥 차오르는 달풍선을 보며 나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가리고 있는데 루드비히가 나를 바라보았다.
[‘혀니S2루드비히’ 님이 달풍선 500개 선물!]
“콜록.”
때를 놓치지 않고 강타하는 달풍선에 나는 다시 헤벌어지는 입을 다물고 헛기침을 했다.
“어디 아픈가?”
“아, 아니……. 괜찮아.”
“아프면 들어가서 쉬어도 된다.”
그러고 보면 이때의 루드비히는 날 참 잘 챙겨 줬다. 생사가 오고 가는 와중에도 피곤하면 가서 쉬라니.
“뭘 들어가서 쉬어. 쟤는 뭐 내일 실패하면 안 뒤진대?”
까칠한 마티어스의 말에 나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청자들은 이 싸가지를 왜 좋아하는 걸까. 고백 4관왕에 도전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평생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이현은 내가 지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체자레가 내 손 위에 제 손을 얹으며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압실론은 차마 손은 못 얹겠던지 내 소매를 쥐고 수줍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나도 지켜 줄게, 이현.”
“놀고들 있네.”
기가 막힌다는 듯 마티어스가 코웃음을 쳤다. 그들의 팬이 달풍선을 선물했기에 나는 마티어스의 말을 무시하고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고마워, 얘들아.”
여러모로.
“네 생각은 어떤가?”
루드비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런 걸 묻는 거지.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난 별생각 없는데.”
“거봐, 얘 별생각 없이 산다니까. 죽을 때도 별생각 없이 죽을걸.”
이 새끼가 진짜…….
나는 새벽에 마티어스의 텐트 위로 물벼락을 쏟아 주리라 굳게 다짐했다.
“글쎄,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정곡을 찌르는 루드비히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계획이 있긴 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너무 달라 얘기하지 않으려 했을 뿐.
이걸 말할까, 말까.
에라, 모르겠다.
“내 말 끝날 때까지 마티어스가 입 다물고 있으면 얘기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