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뭐, 뭐지?”
압실론의 마법인가. 보호막을 유지하면서도 저런 고위 마법을 쓸 수도 있다니. 압도적인 위력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다행히 이안은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다. 나는 이안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 나와 비슷한 머리 색의 뒤통수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키이익!
“……어?”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내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았다가 망부석처럼 얼어붙었다. 보고 말았던 것이다. 조악한 손도끼와 이 빠진 검을 들고 있는 고블린 세 마리를. 영원한 RPG 게임의 호구 몬스터지만, 지금의 나에겐 드래곤만큼 무서운 존재였다. 그도 그럴 게 내 체력은 지금 딱 6%였으니까.
“키이익, 인간!”
나는 뒷걸음질 치며 뒤로 물러났다. 하필이면 지금 이럴 때 몬스터를 맞닥뜨릴 게 뭐람. 예전엔 너무 잡몹이라 상대하지도 않았던 몬스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가 막혔다.
<‘고블린’이 자신 앞의 인간을 만만하게 봅니다.>
<‘고블린’이 공격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체력이 6%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이 빌어먹을 브레이슬릿을 깨 버리는 상상을 하는 와중에도 고블린들은 착실하게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 저리 가!”
나는 담벼락 옆에 놓인 돌을 쥐어 고블린을 향해 던졌다. 딱 소리와 함께 고블린이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키이이익! 아파!”
<‘이현’이 ‘고블린’을 도발했습니다!>
아냐, 도발이 아니라고!
“인간, 죽인다!”
“아악!”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결국 체력은 5%로 내려가 버렸다.
<체력이 5%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기절’ 상태로 돌입합니다! 즉시 행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세요!>
물약이라도 인벤토리 안에 좀 넣어 둘걸. 나는 고블린들을 피해 달리는 와중에도 혹시나 숨겨 놓은 공격 마법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싶어 브레이슬릿을 마구 치고 흔들었다.
“어?”
어쩌다가 무언가가 먹혔는지 삐로롱, 발랄한 소리와 함께 브레이슬릿 안의 룬 문자가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고블린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뒤따라오던 고블린들이 당황해 달리던 걸 멈추고 뒷걸음질 쳤다.
<‘오늘은 내가 점쟁이!’ 곧 오늘의 점괘가 나옵니다…….>
“키익!”
“……?”
<오늘의 운세는 ‘대흉’입니다.>
“이런, X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자 고블린들이 더욱 맹렬하게 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죽진 않는다지만, 뛰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몸살에 걸린 것처럼 아픈데 맞는 건 얼마나 아프겠는가. 심지어 맨손으로 맞는 것도 아니고 칼 맞는 건데. 나는 현실에선 커터 칼에조차 안 베여 봤다.
“으아악!”
“인간, 죽인다-!”
아까는 사람이 많아서 독침 맞을 뻔했는데, 이번에는 인적이 너무 드물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누가 들을까 싶어 나는 목청을 높여 소리 질렀다.
“도와줘요-!”
내 말을 들었는지 앞서가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앞서가는 사람은 심지어 이안이었다. 너무 반가워 손을 흔들려고 하던 차에, 어디선가 내 손을 잡아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몬스터인 줄만 알고 마구 몸부림쳤다.
“시, 싫어. 하지 마!”
“가만히 있어.”
눈을 떠 보니 어딘가 익숙한 인영이 나를 반겼다. 물론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표정은 전혀 반갑지 않아 보였지만.
“……루드비히?”
루드비히가 나를 품에 안은 채 고블린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루드비히 쪽으로부터 응축된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듯 훅 퍼져 나갔다.
<‘루드비히’가 패시브 스킬 ‘패왕의 기운’을 사용했습니다. 시전자의 레벨과 30레벨 이상 차이 나는 모든 생명체가 그에게 압도적인 두려움을 느낍니다.>
<‘패왕의 기운’ 스킬 범위는 10m입니다.>
<체력이 5% 이내로 떨어졌습니다. 아주 약한 자극에도 기절 혹은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보호받고 있는 나조차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격렬한 분노였다. 30레벨도 안 되는 고블린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었다. 고블린들이 무기를 버리고 우왕좌왕 도망치기 시작했다.
“감히 버러지 따위가…….”
나를 감싼 루드비히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분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 새빨간 불덩이가 고블린들의 몸을 덮쳤다. 높은 고온에 고블린들은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불덩이가 날아온 어둠 속에서 서서히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현.”
압실론. 주변의 기온이 내려갈 것처럼 서늘한 표정을 지은 그가 천천히 담벼락 뒤에서 걸어 나왔다. 나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지만, 루드비히에게 몸이 붙잡혀 있어 몇 걸음 가지 못했다.
어쩐지 내게 다가오는 고블린들보다 압실론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아…….”
“내가 다 설명할게.”
“무슨 설명.”
압실론의 목소리가 한없이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사실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내가 여기서 탈출하려면 이안이 준 미션을 성공해야 했거든. 그래서 그랬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압실론이 슬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설명, 못 하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어?”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어.”
평소의 조급하고 높은 목소리가 사라지고, 느릿하고 낮은 말투가 되자 압실론은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낯설어 괜스레 눈치를 보게 됐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도 물어보기가 좀 그랬다.
“돌아가자.”
그러나 압실론은 더 설명하는 대신 내 다른 쪽 손목을 쥐었다. 입술을 꾹 다문 옆모습에서 잔뜩 화가 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 나는 둘과 마차도 같이 타야 했다. 체자레와 마티어스는 뒷수습을 하고 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마티어스는 장군이니까 그렇다 쳐도 체자레는 나름 전쟁 중인 타국 왕인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내 코가 석 자인지라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마차 안은 몹시도 적막했다. 분위기를 풀려고 섣부르게 말을 꺼냈다간 더 어색해질 것 같아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랴, 마부가 말을 모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황궁에 돌아가자마자 나는 내 방으로 향했다. 나는 정말로 지금은 떠날 생각이 없었기에 여전히 내 팔을 끌어안고 있는 압실론에게 말을 걸었다.
“저, 압실론. 나 진짜…….”
“피곤할 텐데, 쉬어.”
압실론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이런 압실론의 모습이 낯설었던 나는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방에 틀어박힐 수밖에 없었다. 문을 닫기 전 루드비히와 압실론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아마도 내 이야기인 것 같았다. 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게 무슨 일이든 조금만 견디면 된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창문 너머로 막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를 응시했다.
‘다르반 페리아네스.’
이안의 옆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까.
* * *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는 새벽부터 장대비가 되었다. 창문을 따갑게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뜨기도 전, 물씬 풍겨 오는 비 냄새가 콧속을 간지럽혔다.
“아…….”
이런저런 잡스러운 꿈을 너무 많이 꾼 탓에 두통이 일었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미 방 안에는 사용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시자고 합니다.”
“누가?”
누구냐는 말에 사용인은 대답이 없었다. 넷 중 하나겠지 뭐. 그들의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더 고민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이안에게 그 이름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다.
고블린과 만나기 전, 이안의 이름이 떴을 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맵에 떠 있는 이안의 옆 사람의 이름을 터치해 보았다.
[이름: 다르반 페리아네스 (Lv. 125)
나이: 43
직업: ‘붉은 달이 뜬 밤’의 수장
호감도: ???
체력: 85%
마력: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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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태: 도주 중입니다.
마음 엿보기: ???]
나는 그 순간 신이 나를 아주 버리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맵 안의 캐릭터 이름을 누르면 상태 창이 뜬다니. 5년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후로 고블린과 엮여 좀 곤란해졌지만, 그때도 그 이름은 절대 잊지 않았다.
식사장 안으로 들어가자 넷 모두가 모여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그들이 동시에 나를 응시했다. 오늘은 체자레조차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공기만으로도 체할 것 같은 기분에 도로 뒤돌아 식사장을 나가고만 싶었다.
“앉지.”
“으응.”
루드비히의 말에 나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원활한 탈출을 위해선 그들의 기분을 좀 풀어 주는 게 나을 테니까. 절대 쫄아서 그런 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