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37화 (37/149)

#37

“예전에 가 본 야시장보다 사람이 훨씬 적네. 전쟁 중이라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차 있어 발 디딜 틈도 없었던 예전과는 달리 오늘은 사람들이 그때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듯했다.

“신원이 확실한 평민들과 일부 귀족들만 입장이 가능하게 했어.”

“아…… 전쟁 중이라서?”

“아니, 네가 야시장에 왔잖아.”

그렇게 말하며 마티어스가 내 브레이슬릿을 콕 찍었다. 내가 브레이슬릿을 차고 있어 체력이 떨어진 상태니까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만 야시장에 오게 했다는 소리였다.

“아까 우리 들어올 때 그런 검사 안 했잖아?”

“우리는 권력이 있잖아요.”

체자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재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저 멀리서 손가락 사이사이마다 꼬치를 두 개씩 끼우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척 봐도 어마어마한 양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걸 누가 다 먹는다고 가져와?”

“너희들 건 하나씩밖에 없으니까 걱정 마.”

“아, 그래.”

마티어스 얘 대식가였지. 나는 마티어스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꼬치를 뽑아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닭고기와 대파, 방울토마토를 철판에 구운 뒤 달달한 소스를 발라 만든 꼬치는 야시장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소문날 정도로 맛있었다. 게 눈 감추듯 하나를 먹어 치우고 옆을 돌아보자 마티어스의 앞에는 벌써 꼬치의 산이 무수하게 쌓여 있었다.

“나 하나만 더 줘.”

“더 달라고 할 거면서 타박은 왜 해?”

“아, 됐어. 내가 사 먹을 거야.”

“너 돈도 없잖아.”

“…….”

“이거 먹어.”

너 야시장 꼬치가 맛있단다. 점순이 톤으로 말하는 마티어스가 얄미웠지만, 내심 더 먹고 싶었던 나는 얌전히 그가 주는 걸 받아 들었다.

두 번째 꼬치는 버섯꼬치였는데, 큼직한 버섯을 먹기 좋게 잘라 매콤달콤한 소스를 바른 거였다. 씹는 식감이 좋은 데다 쌉쌀하면서도 희미하게 나는 단내가 일품이었다.

“뭐야, 이거? 진짜 맛있다.”

“그래? 저기서 이 버섯으로 만든 볶음밥도 팔던데, 사 올까?”

“어어.”

볶음밥도 끝내주게 맛있어 결국 나는 원래의 목적도 잊고 오자마자 꼬치에 볶음밥까지 포식을 하고 말았다.

‘이 멍청아! 정신 차려!’

다시는 먹을 것에 회유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이안을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압실론이 딸기를 설탕 코팅한 꼬치를 가져와 내밀었다.

“입가심해.”

나는 못 이기는 척 딸기 설탕 코팅 꼬치를 받아 들고 한입 깨물었다. 파삭하는 소리와 새콤달콤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아, 맛있다!”

달콤한 향에 흐물흐물하게 몸이 풀어졌다. 꼬치를 다 먹고 나서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체 여기 음식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정신 차리자, 이현!’

나는 양 뺨을 가볍게 두들긴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안은 대체 어디쯤에 있을까. 즐기고 있으면 자기가 알아서 찾아오겠다고는 했지만, 괜스레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후에도 돌아다니며 야시장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이름은 야시장이지, 음식도 팔고 장신구도 팔고 대회에 연극까지 열리다 보니 거의 축제 분위기에 가까웠다. 게다가 밤에는 불꽃놀이까지 한다고 했다. 압실론이 귓속말로 내가 온다고 해서 자신이 준비한 거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낭만적인 분위기에 빠져 실컷 놀다가 품에 인형 두 개를 안고 머리띠까지 쓰고 나서야 나는 진한 현타를 맞게 되었다. 이대로 즐기기만 해도 괜찮은 걸까. 나는 점차 높게 떠오르고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심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이현. 곧 야외무대에서 연극을 한대. 보러 갈래?”

“연극? 그럴까.”

연극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궁을 나온 뒤로 지금까지 계속 돌아다니고 있어서 마주치지 못했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계속 한 자리에 앉아 있으면 그래도 찾아오기가 더 수월하지 않을까.

“그러자.”

내 승낙에 압실론이 신이 나 앞서가기 시작했다. 괜찮은 연극인지 관객석에 관중들이 가득했다. 우리는 이곳에서도 상석에 앉았다.

배우의 숨소리도 들릴 듯한 앞자리에 자리를 잡자, 무대 주변의 조명이 점차 어두워졌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누군가 과자며 음료수를 마시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막이 오르고, 여자 배우와 남자 배우가 무대 위에 섰다. 여자가 부채를 부치다 탁, 접더니 이내 남자 배우의 가슴팍에 콕 가져다 댔다.

“난 알고 있어.”

“뭐, 뭘 알고 있단 말입니까?”

“너, 나를 좋아하지?”

당황하던 남자는 이내 피식 웃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하. 잘못 짚으셨습니다.”

“더 이상 널 속이려 들지 마. 그렇지 않다면 내가 남편 옆에 있을 때마다 왜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는 거지?”

“그건……! 사실 제가 좋아하는 건 당신의 남편이니까요!”

“뭐, 뭐라고?!”

놀란 여자 배우가 과장스러운 포즈로 뒷걸음질 치다 발을 헛디뎌 뒤로 넘어지기 직전, 남자 배우의 셔츠를 잡았다.

“어어엇!”

당황한 남자 배우는 여자 배우가 끌어당기는 대로 종잇장처럼 팔랑 넘어갔다. 어느새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를 덮치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당황해 벌떡 일어나려는 남자의 셔츠를 여자가 다시 힘 있게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네가 누굴 좋아하건 상관없어. 난 지금 네게 끌리고 있으니까. 그러니 얌전히 내 노예가 되도록 해!”

“싫습니다!”

“네가 거부한다면, 나는 당장 남편에게 달려가 네가 나를 덮쳤다고 말할 거야. 그럼 넌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목이 베이겠구나! 호호호!”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순해 보였던 여자의 얼굴이 더없이 표독스러워져 있었다. 배우가 천직인 듯했다.

“제발, 그것만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오늘부터 내 노예다. 어서 내 발등에 키스해!”

여자가 뾰족한 구두를 신은 발을 남자의 앞에 내밀었다. 남자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엉금엉금 다가와 여자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호호호, 내일 보자꾸나. 앞으로의 삶이 아주 즐거워지겠어!”

여자가 목청을 높여 웃으며 무대 옆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남자의 위에 조명 빛이 씌워졌다. 남자는 더러운 것에 입을 맞췄다는 듯 손등으로 거칠게 입술을 비볐다.

“젠장! 아직도 그 발등의 감촉이 남아 있어.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일어난 걸까?”

남자는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회상에 젖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니, 어찌 된 걸까? 그 감촉, 그 박력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해. 그래, 어쩌면…… 난 새롭게 사랑에 빠졌는지도 몰라.”

무대의 뒤편에서 달콤한 음색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아노 솔로로 시작해 첼로와 바이올린의 음색이 더해졌다. 그는 손가락에 깍지를 낀 채 더 없이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 마음을 숨겨야만 해. 아아, 아름다운 밤의 장막이여! 나의 마음을 숨겨 주소서.”

세상에.

나는 막장 오브 막장을 달리는 스토리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스토리는 대체 누가 생각해 내는 걸까.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건 분명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겠어.

나는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이안을 찾았다. 그러나 워낙 무대가 밝고 관객석이 어두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앉은 곳이 앞자리 상석이다 보니 계속 뒤를 돌면 시선이 끌릴 것 같았다.

“이, 이현, 누구 찾아?”

결국 압실론이 물어 왔다. 뜨끔했던 나는 괜스레 루드비히의 핑계를 댔다.

“어어, 루드비히 걘 어디 있나 싶어서.”

“아마 이현이 보이는 데에 아, 앉아 있을 거야.”

“어쩐지 시선이 느껴지더라.”

“지, 지금 이현은 나약하니까. 지켜 줄 사람이 많은 건 조, 좋지.”

“수도 정중앙에서 일이 일어나면 뭐가 일어난다고.”

그리고 나약하게 만든 건 너 아니냐? 나는 압실론을 슬쩍 째려보았다. 압실론이 내 손등을 톡톡 두들기며 말했다.

“호, 혹시 이현이 위험에 빠지면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사, 살려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 고맙다.”

그사이 극은 새롭게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편에게 둘의 사이를 들켰는지 여자가 당황해 옷을 추스르고 있었다. 대로할 줄 알았던 남편은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너희는 사실 남매란 말이다!”

몰아치는 막장 드라마에 사람들은 무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 역시 잠시 눈을 떼는 사이 휙휙 바뀌는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20년 전 겨울, 너희는 성 앞에 나란히 버려져 있었단 말이다. 꼭 데리러 오겠다는 편지와 함께. 추위에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너희를 나의 아버지가 키우게 되었단 말이다!”

남자 배우가 혼란스레 남편과 부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입술을 깨문 남자가 부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남매라도 상관없습니다!”

“내가 상관있다. 너와 남매이기 이전에 글리비엔은 내 부인이니까! 넌 나의 명예를 짓밟고 글리비엔을 모욕했다. 이렇게 된 이상 결투로 승부를 가리자.”

“아, 안 돼요, 트리스탄!”

“당신은 빠져요!”

“어떻게 빠져요, 내 이야긴데! 이렇게 된 이상 나도 결투에 참여하겠어요.”

부인의 말을 마지막으로 막이 내려갔다. 막이 다시 올라오자 침실에서 평원으로 배경이 바뀌어 있었다. 싸움을 시작하자 조명들이 어지러이 빛나며 무대 이곳저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

나는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볐다. 무대 천장 부근에 거대한 무언가가 앉아 있는 형상이 보였다. 그냥 장치라고 하기엔 아까는 없었던 것 같은데……. 눈매를 가늘게 뜨고 상황을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압실론이 나를 끌어안았다.

“뭐, 뭐야.”

당황해 뒤를 돌아보자 압실론의 머리칼이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하늘거렸다. 마나를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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