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아마, 맞을지도 모릅니다.”
“어?”
“백작이 종종 성년도 안 된 걸 노예상에 팔려고 하기에 거금을 주고 데려온 거니 자신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했었거든요. 그러니 대략 연수가 맞습니다.”
진짜 고인을 욕하기도 참 뭐하지만, 살아 있을 때 여러 의미로 진상이었구나, 파블로 백작.
“어느 정도 능력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름을 안다는 말을 쉽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시험해 보든가. 내가 모르는 사용인을 데려와서 맞추게 해 보면 되잖아?”
“아뇨, 황궁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외우고 계실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럼 어떡해? 난 황궁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이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일주일 후 황궁 앞에서 야시장이 열립니다. 그때 사람을 준비해 놓을 테니 그 사람의 이름을 맞추어 주세요.”
“전쟁 중인데 야시장이 열린다고?”
시장과 달리 야시장은 약간의 축제 분위기가 가미되어 있다. 아무리 이름뿐인 전쟁이라지만 이 시국에 야시장을 열어도 되는 건가?
“전쟁 중이라도 유희거리는 필요하니까요. 야시장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시민들의 불만과 불안을 줄이는 데 유용하다는 사실이 이미 보고된 바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내 얼굴 한 애가 하도 똑 부러지게 말하니까 신기해서.”
나는 신기하다는 듯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비슷한 얼굴을 했는데도 사람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가 있구나.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원해서 나의 대체재가 된 것도 아닌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 건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이안의 표정은 그리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저도 신기합니다.”
“어? 뭐가?”
“맨 처음 저는 당신이 저를 보고 조금 더 불쾌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같은 외모를 하고 있으니까요.”
“아……. 물론 처음엔 좀 그랬는데, 그것도 루드비히한테 화난 거지 너한테는 별생각 없었어. 네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잖아.”
내 말을 들은 이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쩐지 좀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왜 그분들이 당신에게 집착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엑.”
갑작스레 나온 넷의 이야기에 내가 싫은 표정을 짓자 이안이 옅게 미소 지었다. 처음 보는 이안의 미소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웃을 땐 또 나랑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해서.
“당신의 목표는 그들에게서 벗어나는 거겠지요.”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압니다. 거울로 항상 봐 왔으니까요. 어디론가 돌아가고 싶은 자의 눈동자를.”
이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고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같은 색의 눈. 원래는 어떤 눈이었을까. 그가 더 궁금하겠지.
그랬구나, 너는 계속 돌아가고 싶었겠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정보로 이안에게 목숨까지 걸게 하는 게 어쩐지 미안해졌다. 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절박함을 이용해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기에.
“탈출에 정말로 성공하면 바로 네 이름을 알려 줄게. 약속이야.”
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 진심이 이안에게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예.”
“자, 새끼손가락 걸어.”
“……이건 왜 해야 하는 건가요?”
“그것이 약속이니까. 얼른.”
내가 보채자 이안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순순히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엄지를 맞댄 채로 우리는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탈출하시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켜 주신다면 기꺼이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어젯밤부터 미약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던 희망의 불씨가 점점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나는 나갈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 * *
‘그런데…… 어떻게 야시장에 가지?’
‘그런 건 스스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천 년의 동료라도 된 것처럼 굴던 이안은 문제에 당착하자마자 나를 두고 나가 버렸다. 나는 묘한 배신감에 차 이안이 떠난 방문을 노려보았다.
여기 온 뒤에 성 밖을 나간 적도 없는데, 그들이 허락해 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 속에서 북받쳐 올랐다.
아니, 내가 왜 허락을 구해야 해? 어차피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는데, 적어도 즐길 수 있는 건 다 즐겨도 되는 거 아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리라. 가서 당당하게 말하리라.
복도를 걷는 내내 나는 완전히 분기탱천해 있었다. 그래도 한 가닥 이성은 남아 있어서인지 그 와중에 누구에게 가는 게 최선일지에 대해 생각했다.
체자레는 항상 생글생글 웃고 있어 긍정해 줄 거라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이런 녀석이 마지막까지 버티는 법이었다. ‘후후, 안 돼요.’라고 말할 가능성이 너무 농후했기에 체자레는 아예 배제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안 될 놈은 루드비히였다. 걔는 내가 만나기가 싫었다. 압실론 역시 후보에는 있었지만 뭘 요구할지 몰라 불안했다. 저번에는 피와 머리카락이었으니 이번에는 살점 정도는 내놓으라고 할지도 몰랐다. 마지막 만남이 좀 찝찝하긴 했어도 결국 가장 만만한 건 마티어스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훈련장으로 향했다.
* * *
“나, 야시장 갈 거야!”
훈련장에서 기사단을 훈련시키고 있던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기사들 몇몇이 훈련하다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는 무언가 또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는지 훈련을 재개하라 말하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30회 반복!”
“예!”
기사들이 우렁차게 답했다. 훈련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기사들의 답에 어쩐지 분노가 살짝 사그라들고 주눅이 들었다.
“일단 이리 와.”
마티어스가 나를 잡고 훈련장 뒤편에 난 수풀로 자리를 옮겼다. 한적한 수풀가에 자리를 잡은 마티어스가 팔짱을 낀 채 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나뭇잎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날 선 콧대에 맺힌 마티어스의 땀방울을 비추었다.
“무슨 소리야, 야시장이라니.”
“일주일 뒤에 야시장 열린다며. 나 거기 갈 거야.”
“갈 거라고?”
“가, 가고 싶어…….”
갈 거라는 말에 갑자기 인상을 쓰는 바람에 나는 단박에 주눅이 들어 말을 더듬었다.
“화내는 거 아냐. 그냥, 못 들어 본 얘기라.”
내가 움츠러들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는지 마티어스가 표정을 풀고 뺨을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마티어스와의 거래는 내가 강하게 나갈 때보다 불쌍하게 나갈 때 더 성공할 확률이 컸다. 그러니 내가 택한 방법은 틀리지 않았다. 절대 마티어스의 기에 눌린 게 아니었다.
“야시장이 열린다는 말은 어디서 들었어?”
마티어스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나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마티어스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며칠 내내 방 안에만 처박혀 있었으면서 그런 사실은 어디서 들었는지 떠보려는 태도였다. 대답을 잘해야 했다.
“사용인들이 말해 줬어…….”
“사용인들이 말해 줬다고? 너와는 되도록 대화하지 않는 거로 알고 있는데.”
너희가 온 세계 전쟁터로 만들고 나서 그것도 좀 유하게 풀렸거든?
나는 뾰족해지려는 눈매를 마른세수하는 척하며 도닥였다. 그리고는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처연한 척을 했다.
“아니이, 말소리가 들려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까 사용인들이 모여서 야시장 얘기를 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문 열고 나가서 정말 야시장이 열리냐고 물어보니까 입을 다무는 거야. 그런데 내가 요즘 계속 열나고 우울했었잖아……. 그래서 불쌍해 보였는지 얘기해 주더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불쌍한 척을 한 게 통했는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한술 더 떠 촉촉이 젖은 눈으로 마티어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지금 몇 주가 넘도록 계속 황궁에만 있었잖아. 좀 나가서 물건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러고 싶어……. 내가 축제 구경, 시장 구경 얼마나 좋아하는지 마티어스 너도 알잖아…….”
“하…….”
내 공격이 잘 들어갔는지 마티어스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마티어스의 소매를 쥔 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마티어스가 멋대로 반죽한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이내 제 가슴 부근을 쥐었다.
“응? 마티어스…….”
“으,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 이상한 표정 좀 그만 지어!”
이 새끼가?
“아니,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보는 사람 마음 이상하게 만들잖아. 하아…….”
뭐야, 설레면 설렌다고 할 것이지. 어쨌든 원하는 목표는 이뤘으므로 나는 마티어스의 옷소매를 놓고 상큼하게 웃었다.
“정말? 정말 야시장에 가도 돼?”
“……아직 몰라. 애들한테 얘기해 볼…… 설마 다른 애들한테도 다 이런 식으로 허락받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 너한테 가야겠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은 못 했어. 너만 생각났어…….”
“……그렇게까지 안 해도 최선을 다해 설득해 볼 테니까 그런 낯간지러운 말 그만해.”
가린다고 가렸지만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마티어스의 목덜미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이 일이 어쩌면 쉽게 성공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 * *
……분명 그랬었는데.
“이, 이거 맛있겠다. 이현, 먹을래?”
“뭐 오자마자 디저트를 먹어. 고기부터 먹어, 고기부터.”
“저쪽에 격투 대회가 열렸다네요. 이따 가 보죠.”
왜 나는 넷과 야시장을 구경하러 온 건지.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앞서 나간 그들의 뒤를 터벅터벅 뒤따랐다. 마티어스와 압실론 정도 함께할 줄 알았더니, 체자레와 루드비히까지 따라붙었다.
다행히 루드비히는 저 멀리서 암행으로 따라오고 있다고 했다. 아마 따라오고는 싶은데 내가 질색할까 봐 이런 선택을 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