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훌쩍 나가 정신없이 뒷골목을 뒤지시기도 하셨습니다. 찾아야 한다고 계속 중얼거리시면서요. 그래도 아침이면 돌아와 다시 정무를 보셨습니다.”
지금이랑 하나도 안 비슷하잖아!
나는 황당함에 입을 헤 벌렸다. 제삼자의 입에서 듣는 루드비히의 상황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그렇게 살았을까. 나는 어디 있는지도 모를 게임 개발자를 원망했다.
“어…… 그렇구나. 너도 고생이 많았겠네.”
“수습하기가 복잡해 좀 번거롭기는 했지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때를 상상하기라도 하는지 이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떠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 이제 넌 자유의 몸이잖아.”
“글쎄요, 황궁에 들어온 게 저의 의지가 아니었듯 나가는 것도 저의 의지가 아니라서요.”
“무슨 소리야? 백작 죽고 자유 된 거 아니었어?”
“원래는 나갈 생각이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노예 계약 때문에 그래?”
“아뇨, 노예 계약은 폐하께서 말소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몸이 되니 여길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돌아가고 싶었던 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돌아가고 싶은 거라니?”
내가 계속 질문을 던지자 이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화난 건가?
“내가 질문이 너무 많았나? 미안. 그냥, 궁금해서.”
“아뇨.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던 이안이 결국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괜찮습니까?”
“어? 그, 그럼. 앉아서 이야기할래?”
나는 침대 옆의 스툴을 내밀며 말했다. 자연스레 그 자리에 착석한 이안이 다소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제 일족은 몽마와 비슷합니다.”
“엥?”
몽마? 꿈에 나타나 사람의 정기를 빼 간다는 그 몽마?
“어떠한 사람이 간절하게 원하는 존재의 얼굴과 체형을 똑같이 구현할 수 있습니다. 어린 소녀의 얼굴이든, 노인의 얼굴이든요.”
나는 이안의 말에 입을 쩍 벌렸다.
“너, 그냥 나랑 닮은 게 아니었어?”
“아닙니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런 게 진짜 된단 말이야……?”
“예. 상대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확인한 뒤 만드는 방법도 있고, 초상화와 최대한 비슷한 외모를 띨 수도 있습니다.”
“신기하다.”
“그런가요? 이러한 능력 때문에 우리 일족들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엥, 왜? 그렇다고 진짜를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순진한 애송이를 다 보겠다는 듯 이안이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인데도 어쩐지 거기엔 쓸쓸함이 배어 있어 따질 수 없게 만들었다.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부모에게 똑같은 외모를 가진 아이를 보여 주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
“대체품이라도 가지고 싶어 미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지요. 중요 인물을 죽인 뒤 그 자리에 일족을 첩자로 넣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우리 일족이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노예상입니다.”
“노예상?”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또한, 싫어하는 사람을 밤새 괴롭힐 수 있는 기회기도 하고요.”
“세상에…….”
너무 끔찍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성인 버전에선 이런 식으로 온갖 것들을 다 할 수 있었지만…… 이런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인간에겐 너무나 탐나는 재화이기에, 공동체를 위해 모든 일족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아이에게 주술을 걸어 놓습니다. 인간에게 잡히는 순간, 살아온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주술을요.”
“모든 걸…… 잊어버린다고?”
“예.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지만, 내가 살던 곳, 나의 이름, 나의 가족,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생각하려 하면 전부 희미해집니다.”
“그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일족을 위해서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긴 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에게는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
“그건 너무…….”
“괜찮습니다. 이젠 옛날 일이기도 하고요.”
“기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야?”
“하나 있긴 합니다만…….”
“뭔데?”
“이름을 찾는 겁니다. 태어날 때 제일 처음 부여받은 이름을요. 하지만 그 이름은 오직 아이의 부모만 알고 있으니, 불가능하다 보면 됩니다.”
저는 이미 부모님도, 제가 살던 곳도 잊어버렸으니까요.
씁쓸한 이안의 태도에서 나는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 이상한 느낌.
“……어?”
“왜 그러십니까?”
“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싱거운 대답을 다 보겠다는 듯 이안이 이내 흥미를 잃었다. 흥분감에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몸이 얕게 떨렸다. 이런 상태가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는지 이안이 미간을 얕게 찌푸렸다.
“많이 아프십니까?”
“음…… 조금?”
흥분감을 감추기 위해 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보탰다. 다행히 이안은 얌전히 속아 넘어가 주었다.
“제가 아픈 분을 붙잡고 이야기를 길게 했군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내 표정이 좋지 않자 이안이 몸을 일으키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나는 그의 옷소매를 잡고 다급히 물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거야?”
“그냥…… 지금까지 제 얘기를 궁금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저도 한 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낯엔 쓸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얼마나 오래 끙끙 앓았으면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까. 그것도 나에게.
“너는…… 내가 밉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 때문에 여기랑 얽히게 된 거잖아.”
“글쎄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황궁이 아니었다면 제가 갈 곳은 노예상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옳지 않을까요.”
“아, 그런가…….”
나는 스르르 옷소매를 놓았다. 묵례하고 나가려는 이안에게 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있잖아.”
“예.”
“……만약에 누군가 네 이름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네게 이름을 알려 주는 조건으로 아주아주 어려운 걸 걸었어.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뭐든지 할 겁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답이었다. 이안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로 인해 ……도요.
내가 잠시 멍하니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이 이안은 내게 묵례한 뒤 떠나갔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멀어져 전혀 들리지 않을 때 즈음에야 나는 이안이 내게 한 말을 곱씹어 볼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고 해도요.’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린다는 건 공 네 명을 적으로 돌린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그러니 적어도 그 넷을 아는 사람이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안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것도 몹시 절박하게.
아주 얇게 꼰 심지에 미약한 불이 붙은 기분이었다. 이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루드비히가 준 물건을 헤집었다. 누군가 보았다면 미친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다행히 내 방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마룻바닥 위에 떨어진 물건을 하나 주웠다. 붉은색과 흰색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섞인 사탕이었다. 3초도 아니고 3분도 넘게 지났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내 승전보를 알리는 듯한 달콤함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다.
* * *
몸이 멀쩡해지고 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문병 역시도 받지 않았다. 대신 압실론에게 예전에 루드비히에게 받았던 사탕이 맛있었으니 또 가져와 달라고 말했다.
압실론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루드비히에게 그 말을 전했고, 이안은 하루가 지나지 않아 다시 나의 방을 방문했다. 전에 전달받은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사탕 병을 들고.
“나, 알고 있어.”
나는 사탕을 한 알 입에 넣고 녹이며 말했다. 알아듣지 못했는지 이안의 미간에 미미한 주름이 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 진짜 이름, 알고 있다고.”
“……놀리지 마십시오.”
“정말이야. 비록 이렇게 갇혀 있는 몸이지만…… 이런저런 잡기가 많아. 개중에는 세상 사람들 이름을 다 알 수 있는 능력도 있지.”
세상 사람들이라는 게 이 게임 내에서긴 하지만.
내 당당한 태도에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기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차마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이안의 모습이 조금 짠했다.
“거짓말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멍하니 서 있는 이안의 상태 창을 눌렀다.
[이름: 이안 (라이시안 헬리오스 루튼 카디날 벨라트리체) (Lv. 48)
나이: 19
직업: 그리체 제국 황제의 시종
호감도: ???
체력: 98%
마력: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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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혼돈
마음 엿보기: ???]
상태 창을 열자 일전에 맵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긴 이름이 나를 맞이했다. 이안이 이 상태 창을 볼 수 없는 게 다행이었다. 함께 봤다면 너무 억울했을 테니까.
“……엥?”
“왜 그러십니까?”
“너 열아홉 살이었어?”
상태 창을 훑던 나는 당황해 그에게 무심코 나이를 말했다. 처음 봤을 때에는 상태 창 안의 이름에만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두 번째로 보자 나이가 눈에 띄었다. 이안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모릅니다.”
아, 맞다. 모른다고 했지. 그나저나 진짜 어리네.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