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이렇게 몸 닦아 주고 있으니까…….”
“있으니까?”
“꼭 말 닦는 기분이다.”
“뭐, 임마?”
열이 나는 중에도 눈매를 뾰족하게 좁히자 마티어스가 소년처럼 해맑게 웃었다.
“왜, 말이 얼마나 깨끗한 동물인데.”
“깨끗해 봤자지.”
“아냐, 말은 뛰고 나면 거품 나는 거 알아?”
“뭐? 거품이 왜 나.”
“땀에 거품이 나는 성분이 들어 있는 거 같더라고. 어떤 병사가 그러는데 그걸로 빨래하면 빨래도 잘 된대. 난 해 보진 않았지만.”
“그래? 신기하네.”
실제로도 그런지 궁금했다. 굳이 말 땀에 판타지 요소를 섞을 필요는 없으니 아마 그럴 것이다.
참…… 설정 정말 디테일하게 넣었구나.
<소년들은 어른이 된다>의 회사 자체는 큰 편이 아니었지만, WZ소프트라는 모체가 되는 게임 회사가 있었다. <소년들>의 대표가 WZ소프트 회장의 딸이라나.
WZ소프트는 20세기 말부터 사람들을 폐인으로 만들었던 전설의 가챠 게임도 내고, 직접 병사와 기사, 성주, 왕이 되어 판타지 세계를 운영하는 게임들도 내며 게이머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먹었다. 지금도 그 게임 회사는 판교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판교의 꺼지지 않는 등불로 유명했다.
최근 20여 년간은 게임뿐 아니라 로봇 관련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게임에서 보이스나 행동들을 수집하는 일로 대국민 사과를 했던 때도 있었다.
그 후 그러지 않겠다고는 말은 했지만, 대부분의 게이머들은 자료가 수집되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관련 자료를 다 받아 놓고 기기의 인터넷을 끊어 버리거나 자료를 수집할 수 없는 버전만 사용하는 게이머들도 있었다. 나야 방송을 해야 했기에 항상 최신 버전을 유지했지만.
<소년들>의 경우 스토리는 독창적이나, AI 구성이나 맵, 물건을 여러 게임에서 따왔다. 그러다 보니 단순한 BL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구성이 디테일하고, 가끔은 다른 게임 유저가 개발한 물건이 뒷골목에서 이스터 에그 형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런 걸 위주로 찾는 BJ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렴풋하게만 기억 나는 걸 보니 그리 잘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게임 BJ 정말 많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고.
“……그런데 왜 하필 나였을까.”
“뭐가?”
“어?”
“네가 말했잖아. 왜 하필 나냐고.”
“아, 내가 그랬어?”
나는 당황해 뒷머리를 긁적였다. 같은 게임을 하는 BJ와 사용자가 수두룩했는데, 왜 하필 나만 갇힌 건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혼자 생각하다가.”
“싱겁긴.”
마티어스가 피식 웃으며 수건을 물통에 넣고 가볍게 헹구었다. 땀이 닦여 몸이 보송보송해지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상쾌하다. 고마워.”
“아직 안 끝났는데?”
“어?”
“바지 벗어. 마저 해 줄 테니까.”
“뭐, 뭔 소리야. 싫어!”
“이제 와서 뭘 빼? 저번에 목욕도 시켜 줬는데.”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그, 그래도 싫어!”
나는 몸을 버둥거리며 싫다는 의사를 피력했지만, 마티어스는 위생 앞에선 한 치의 자비도 없었다. 막 바지가 끌어당겨지는 순간, 나는 퍼뜩 루드비히에게 당했던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하지 말라니까!”
찰싹. 불시에 뺨을 얻어맞은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라 때려 놓고도 마티어스의 눈치를 보았다.
“미, 미안…….”
멍하니 제 뺨을 어루만지던 마티어스의 얼굴이 이내 아차 싶은 표정으로 변했다. 보아하니 다른 녀석에게 어젯밤 일을 들은 모양이었다.
아주 비밀이 없구나. 그냥 머릿속까지 공유하지, 왜.
“아, 아냐. 싫은 건 싫다고 해야지.”
마티어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물수건을 건네준 후 몸을 일으켰다.
“다리는 알아서 닦을 수 있지?”
“으응. 내가 알아서 닦을게…….”
“그럼, 가 볼게. 쉬어라.”
마티어스는 내게 갈아입을 옷을 건네준 뒤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마티어스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티어스.”
“어, 말해.”
“그…… 네가 아침에 말해 준 거 있잖아.”
죽으려고 했다던 그 둘 말이야.
“만약에…… 내가 이대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둘은 어떻게 됐을까?”
“…….”
“의, 의외로 잘 먹고 잘 살았다거나…….”
나는 애써 웃으며 희망 사항을 이야기했다. 마티어스는 내 말을 듣고도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한참 뒤에야 마티어스는 입을 열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생각해 보지 않아서.”
“그, 그냥 상상해 보자는 거지. 재미로.”
“재미로?”
내 말이 마티어스의 무언가를 건드렸는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노기 띤 마티어스의 눈동자가 나를 혐오하듯 응시했다.
“너는 그게 재밌나 보네.”
“아니, 그게 아니라…….”
마티어스가 무어라 말을 더 하려다 나를 한 번 보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작은 촛불에도 입술이 하얘진 게 보여 그가 얼마나 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실언을 했다는 생각에 당황해 그에게 다가가려 몸을 일으키는데, 마티어스가 먼저 선수를 쳤다.
“죽었겠지.”
“……어?”
“죽었을 거라고.”
마티어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자씩 씹어뱉듯 답했다. 거대한 짐승이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어쩐지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마치 약한 짐승이 맹수의 겉껍질을 뒤집어쓰고 발악하는 듯 보여서.
“…….”
“그리고…….”
이어진 마티어스의 말에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헤아릴 수 없는 어둠과 침묵 속에서 한참이나 나를 응시하던 마티어스가 이내 인사도 없이 돌아서더니 그대로 방을 나섰다.
나는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두려울 만큼 고요하고 새카만 정적을 압실론의 숨소리가 겨우 막아 주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까지 마티어스가 한 마지막 말이 좀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둘만 죽지는 않았을 거야.’
* * *
둘만 죽지는 않았을 거라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다음 날, 열은 내렸지만 생각이 많아서인지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나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체자레와 압실론이 한 번씩 더 문병을 왔지만 이번에는 받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아픈 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지 조용히 물러갔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여전히 한 번도 내 방에 오지 않았다.
분명 내가 아프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오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이틀 전 그날의 일 때문이겠지. 나 역시 온다 해도 받아 줄 생각은 없었기에 오히려 번거롭지 않아 좋았다. 그저 조금 괘씸했을 뿐.
몸이 나으면 다시 주변을 탐색하고 다녀야지. 그들이 죽으려고 했다고 해서 내가 계속 갇혀 있어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나가서도 몇 달 정도 마음이 쓰일 일일 뿐일 것이다. 아마도.
그때, 상념을 깨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고 문을 응시했다.
“이안입니다.”
루드비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인물이 방을 방문했다. 다른 애들과 같이 거절할까 했는데, 문득 궁금해져 입장을 허락했다.
“들어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은 항상 묘한 감상을 자아냈다.
“폐하께서 건강을 기원하신다며 이것을 보내셨습니다.”
이안의 품 안에는 각종 약재와 영양제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상등품의 물건이었다. 나는 고민하다 그것을 얌전히 받아 들었다. 이안으로서도 의외였는지 나를 닮은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쳤다. 약병의 코르크 마개가 빠져 동그란 알약들이 카펫과 마룻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제 나가 봐.”
“……예.”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건조한 낯을 한 채 뒤를 돌았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우려다 몸을 일으키곤 그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하실 말씀이라도?”
건방진 말투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생각하는 거지만, 이름만 시종이지 참 남 앞에서 굽힐 줄 모르는 녀석이었다.
지금은 저세상에 가 있을 백작에게도 그렇고, 루드비히에게도 딱히 고분고분한 태도가 아니었지. 내게도 마찬가지고. 이런 점이 오히려 루드비히가 곁에 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없으시다면…….”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내가 없을 때 넷은 어떻게 살았어?”
몸을 돌려 나가려는 이안을 질문으로 다급히 막아 세웠다. 이안은 대놓고 귀찮다는 눈빛을 했다.
이야, 내 얼굴이 저런 식으로도 쓰일 수 있구나.
“저는 폐하의 시종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이 어떻게 사셨는지는 모릅니다.”
“그, 그렇겠네. 그럼 루드비히는? 루드비히는 어떻게 살았는데?”
“그냥 지금이랑 비슷하셨습니다.”
“아, 그래?”
마티어스에게 들은 말과는 사뭇 다른 반응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못 떠나게 하려고 거짓말이라도 한 건가 싶었는데, 이안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낮에는 지금과 비슷하셨습니다. 정무를 보시고, 대신들을 만나고, 외교를 하셨죠.”
뭐야, 잘 지냈잖아.
“그럼 밤에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던 이안이 대수롭지 않게 남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냈다.
“그냥 술과 약에 찌들어 사시고, 잠을 잘 못 주무시고 악몽을 꿔서 난동을 부리시고, 물건을 부수시고, 갑자기 몬스터를 토벌하러 가시고. 소국 하나를 홀로 복속시키고 오신 적도 있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