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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32화 (32/149)

#32

“야, 그냥 농담한 거야. 별거 아니야, 이 정도는.”

물론 그런 것치고는 시스템 창이 좀 시끄럽긴 했지만, 어쨌든 이젠 다 낫기도 했고…….

나는 괜스레 마티어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해 주었다.

“괜찮다니까. 뭘 그렇게 의기소침해 있어.”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잔뜩 풀 죽어 있는데.

따뜻한 한마디를 더 건넬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마티어스가 감금 생활의 장본인 중 하나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병 주고 약 주고인데, 뭐. 나는 위로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나한테 미안하긴 해?”

“……어.”

그래, 그래 보인다.

귀와 꼬리가 축 늘어져 있는 환영까지 보일 정도니.

“진짜 미안해?”

“어, 미안해.”

“정말로?”

“이제 별로 안 미안해지려고 하는데.”

“그럼, 내 부탁 하나 들어줘.”

기회를 놓치지 않는 내 발언에 마티어스가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탈출하는 건 안 돼.”

“생각도 안 했어.”

“그거 푸는 것도 안 돼.”

마티어스가 내 손목에 단단히 고정된 브레이슬릿을 가리키며 말했다.

“압실론 아니면 풀 수도 없어, 이거.”

압실론보다 고위 마법사가 되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이 세계엔 그런 마법사는 없었다.

“그것도 아니니까 걱정 마.”

“그럼 뭔데.”

“간단해. 오늘 있었던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왜?”

“쪽팔리잖아. 아침 산책 나왔다가 괜히 첩자로 오해받아서 귀 찢어진 게.”

귀가 찢어졌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다시금 마티어스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알았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진짜다?”

“그래, 어차피 말할 생각도 없었어.”

날 발견한 게 마티어스라 천만다행이었다. 안심이 된 나는 마티어스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좋냐? 다쳐 놓고.”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던 마티어스가 결국 나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마티어스의 붉은 머리칼이 햇살에 점점이 반짝이며 빛났다. 태양 아래 서 있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아침 먹으러 갈래?”

마티어스의 물음에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방에서 혼자 먹을래.”

“혼자 먹으면 무슨 재미야.”

“밥을 재밌으려고 먹는 건 아니잖아.”

“뭐…… 그래.”

할 말이 없었는지 마티어스가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어쩐지 같이 머쓱해지는 바람에 나는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나 간다.”

“길은 알아?”

“당연히…… 모르네.”

안겨서 오느라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같이 가, 바래다줄 테니까.”

어쩐지 녀석의 반응이 너무 달착지근해 괜스레 민망해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위기를 읽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마티어스 역시 귓바퀴가 벌게져 있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우리 사이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마티어스는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아주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어…… 요즘은 잘 씻냐?”

“다, 당연하지. 안 그래도 압실론이 클린 기능 다시 걸어 줬어.”

“그래, 사람이 씻고 살아야지.”

“어어.”

“우리 집엔 큰 목욕탕 있어. 루드비히 것보다 클걸.”

“황제 목욕탕보다 크다고?”

너 진짜 목욕에 진심이구나.

내 말에 마티어스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다음에 한번 목욕하러 와.”

그리고는 바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얼굴이 해를 한 입 삼킨 색으로 변했다.

“아니, 진짜 별생각 없고. 그냥 목욕만 하러 오라고.”

“어? 어어.”

라면 먹으러 오라는 정도도 아니고 목욕을 하러 오라는 너무나 심도 깊은 플러팅에 나까지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마티어스는 이런 분위기를 도무지 견디지 못하겠는지 저 혼자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걸으며 마티어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티어스는 넷 중 가장 덩치가 큰 편이었는데 흉곽이 커서 더 그래 보이는 듯했다.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와 천 갑옷 위로 보이는 등 근육, 날씬하게 떨어지는 허리의 뒤태, 군마를 닮은 엉덩이와 허벅지…….

끝내주네.

나는 부러운 마음으로 그의 몸을 샅샅이 훑어본 뒤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티어스 또한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

“오, 오늘 날씨가 참 좋지?!”

“그, 그러게!”

그 말과 동시에 회랑 밖 하늘이 번쩍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히 좋았는데! 우리는 민망한 마음에 아예 서로를 시야에서 차단한 채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언뜻 보았을 때 마티어스의 살짝 숙인 목이 붉게 물들어 있던 것 같았다. 도무지 이런 상황엔 면역이 없는지 성큼성큼 홀로 걸어가던 마티어스가 폭탄 발언을 내뱉었다.

“이 앞이 루드비히 방이니까 걔도 같이 아침 먹겠냐 물어보고 올게.”

“그, 그래……. 뭐? 안 돼!”

사태를 파악한 내가 당황해 안 된다고 외쳤지만, 마티어스는 코너를 돌아 이미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마티어스는 루드비히와 나의 미묘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나름대로 최선의 수를 둔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악수 그 자체였다.

“마티어스, 멈춰. 야, 멈춰!”

나는 빠르게 걸으며 애타게 마티어스를 불렀지만, 브레이슬릿을 찬 내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루드비히, 밥 먹으러 가자.”

결국 마티어스는 내가 따라잡기 직전 루드비히의 방문을 열고 뻣뻣한 목소리로 외쳤다. 기계음도 이보다는 자연스러울 듯했다.

나는 어떻게든 마티어스의 뒤로 몸을 숨겨 보려고 했지만 마티어스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 버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루드비히는 상의를 벗은 채 침대 끝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AI한테도 저혈압이 있는지 루드비히는 아침에 특히 약했다.

“밥 먹으러 가자니까.”

방을 울리는 마티어스의 목소리에 루드비히의 나른한 낯에 엷은 실금이 갔다.

“머리 울려.”

“뭐야, 너 술 마셨어? 끊은 줄 알았는데.”

“그럴 일이 있었…….”

머리칼을 쓸어 올리던 루드비히가 이내 나를 발견하고 말을 멈추었다. 아침부터 나를 볼 줄은 정말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실상 내 표정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나는 심란한 마음에 시선을 피하다 방 안에 루드비히가 아닌 다른 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야, 쟤도 있었네.”

나와 닮았지만, 내가 아닌 이. 이안이 루드비히의 침대맡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 간밤의 서사가 상상이 가기 시작했다.

나한테 거절당하고 잔뜩 술 마시다 대체품을 찾았구나.

마음 한구석이 거멓게 물드는 듯한 감각에 나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루드비히도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뭘 상상하는진 모르겠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그렇게 쏘아붙인 뒤 나는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정말 상관없었다. 정말로.

오히려 내 이런 반응에 더 당황한 마티어스가 내 뒤를 허둥지둥 따라왔다.

“뭐야, 왜 그래. 아침 같이 먹기 싫어서 그래?”

야, 마티어스. 넌 정말 눈치라고는 국 끓여 먹을 정도도 없구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마티어스는 잠시 고민하다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혹시 둘이 같이 있어서 그래? 아무 일 없었을 거야. 쟤 루드비히 직속 시종이라 침실에도 들어갈 수 있고 그래.”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니까!”

결국 죄 없는 마티어스에게 감정을 쏟아 내고 말았다. 마티어스는 잠시 멈칫하더니 난감하다는 듯 입술을 핥았다. 나는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서서 마티어스를 노려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오해 생겨서 루드비히를 내가 싫어하는 쪽이 너한테는 더 잘된 일 아니야?”

왜 끼어드는 건데?

내 말에 마티어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머리가 편하기 위해 몸을 쓰는 녀석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네가 뭐 때문에 화가 난 건진 모르겠지만, 난 그런 식으로는 생각 안 해.”

“…….”

“그냥, 루드비히 황제 되기 전에 우리 즐거웠었잖아.”

“뭐가 즐거웠는데. 고생만 했지.”

“난 신분 고하 상관없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서 입 까매지도록 음식 나눠 먹고……. 그런 게 즐거웠어. 그립기도 하고. 그래서 그렇게 돌아갔으면 좋겠어.”

“날 가두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그럴 수 있었겠지.”

“하지만 널 가두지 않았더라면…… 넌 지금 여기 있을까?”

마티어스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의표를 찔린 사람처럼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디선가 유리가 깨지는 듯한 작은 소리가 들렸다. 마티어스가 여기서 멈추자는 듯 손바닥을 펴 내 쪽으로 내보였다.

“여기까지만 하자. 너와 싸우고 싶은 게 아냐.”

“……난 여기 있어도 행복하지 않아.”

날것의 감정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뱉는 것과 동시에 이 말이 우리 둘 다에게 상처를 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마티어스의 붉은 동공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흔들렸다.

“……알아.”

“하, 안다고?”

“하지만 네가 없는 5년 동안…….”

마티어스는 실수했다는 듯 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말을 줄이려는 마티어스의 태도에 나는 다시 한번 대답을 종용했다.

“말해 봐. 날 가둬 놓은 대단한 이유라도 한번 들어 보게.”

혹시 내가 납득할 수도 있잖아?

전혀 납득 가지 않는다는 듯 비꼬는 말투에 마티어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눈가를 문지르며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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