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진성 변태 같은 발언에 저절로 두통이 몰려왔다.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체자레를 노려보았다. 나를 바라보던 체자레가 수줍게 두 뺨을 붉히며 말했다.
“그리고…… 이현만 싫지 않다면 셋이서 하는 것도 전 괜찮거든요.”
“나가, 이 변태 새끼야.”
나는 체자레를 가차 없이 내쫓았다. 루드비히도 의외로 순순히 방을 나섰다. 둘을 쫓아낸 뒤 문을 닫고 잠금쇠까지 채운 나는 한동안 문에 머리를 쿵 박고 서 있었다. 다리가 아직도 후들후들 떨려 왔다. 나를 만지던 그 생생한 감촉이 아직도 선연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렇게 있다간 분명히 뚫릴 거야.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다.
그렇게 되면 나는 매일 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소름이 인 팔뚝을 쓸어내리며 결연히 중얼거렸다.
“탈출해야 해.”
그들의 인내심이 끝나기 전, 나는 무조건 이곳을 탈출해야 했다.
* * *
다음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방을 나섰다. 옛말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적진을 잘 살펴야 탈출도 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이 주변을 샅샅이 탐색해 머릿속에 지도를 그린 뒤, 틈을 봐 성을 탈출해서 전쟁터가 되지 않은 곳을 찾아내 로그아웃하는 게 나의 현재 목표였다.
바다 한가운데라든지 전쟁을 할 수 없는 자연환경이 갖추어진 쪽으로 가면 어떻게든 로그아웃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회는 딱 한 번이었다. 탈출에 실패한다면, 앞으로 남은 삶은 지하실에서 보내게 될 확률이 컸다. 황궁 안에서라도 자유롭게 운신이 가능한 지금이 제일 적기였다.
다음날, 꼭두새벽에 일어난 나는 정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성벽을 살폈다. 혹시 의심을 살까 성벽에 완전히 가까이 다가갈 순 없었지만, 다행히 시력이 좋아 근처에서 보는 거로 충분했다.
열심히 돌아다닌 결과, 찾던 개구멍은 없었지만 내구도가 좀 떨어져 보이는 성벽 두어 군데를 찾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종종 교전이 일어나다 보니 평소보다 신경을 쓰지 못한 듯했다. 제발, 적군이 투석기 같은 거 하나 가져와서 성벽 시원하게 뚫어 주면 좋겠다.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흠씬 두들겨 맞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새벽부터 누가 싸움질이라도 하는 건가. 황궁에서 그런 간 큰 짓을 하는 애가 있다니.
이 나약한 체력으로 괜히 엮였다가 뼈도 못 추릴 것 같아 자리를 피하려는데,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나는 풀숲에 숨어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살펴보니 거기는 기사들의 훈련장이었다.
그곳에는 허수아비를 치는 기사들과 목검으로 서로 대련하는 기사들이 이백여 명쯤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마티어스가 삐딱하게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본 마티어스는 선이 조금 더 날렵해져 있었다. 윗머리를 전부 올리고 옆머리는 시원하게 밀어 버린 모습은 마치 예전의 마티어스를 보는 것 같았다.
압실론한테 듣기로는 장군이긴 해도 명예직이고 거의 집에 틀어박혀 지낸다고 했는데……. 다시 기사단장직이라도 맡은 건가.
하긴,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전쟁이 일어났으니 아무리 마티어스라 해도 한 사람 몫은 해야 했을 터였다.
막 뜨기 시작한 태양을 정면으로 올려다보던 마티어스가 돌연 외쳤다.
“연마장 끝까지 뛰었다가 돌아온다. 실시.”
“실시!”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세 놈은 연무장 50바퀴 돌고 식사다.”
“예!”
“잔머리 굴리는 놈들은 200바퀴니 똑바로 해!”
“예-!”
마티어스의 말에 기사들이 헐레벌떡 뛰기 시작했다. 근엄했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체통 없이 달리는 모습을 보자 그들이 조금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가혹하게 굴리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나는 흐린 눈을 하며 마지막으로 들어올 셋의 안녕을 빌어 주었다.
“어떤 쥐새끼지?”
쇄애액-!
마티어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검 하나가 수풀 옆에 내 귓바퀴를 스치며 아슬아슬하게 나무에 깊숙이 박혔다.
“……!”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살짝 베였는지 귓불이 화끈했다.
“칼날에 독이 묻어 있으니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몸을 움직이는 순간 독이 빠르게 돌아 네 심장에 닿을 테니까.”
마티어스가 낮게 읊조리며 내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나는 꼼짝하지 못하고 다리만 후들후들 떨었다. 마티어스의 인기척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내 신발과 정강이를 타고 올라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기어들어 온 건지 순순히…… 이현?”
호승심이 가득하던 마티어스의 낯이 수풀을 헤치고 나를 보자마자 다소 맹하게 바뀌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마티어스한테 물었다.
“도, 독 묻어 있어?”
당황한 마티어스가 검과 나를 떼어 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 독 없어. 거짓말이야.”
나는 그제야 귀를 감싸고 마음껏 화를 낼 수 있었다.
“이 미친놈아,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바로 검을 날려!”
“아니, 상식적으로 너일 줄 알았냐고! 넌 아침잠 많아서 절대 새벽엔 안 일어나잖아!”
마티어스가 내 귀를 감싸 쥔 채 걱정스레 내려다보았다.
“피, 피 많이 나?”
“좀?”
“씨이…….”
“아, 어떡하냐. 많이 아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진짜 많이 나나 봐. 갑자기 요 며칠간의 설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떨어지기 무섭게 계속해서 차올랐다.
“흐엉, 미친놈아…….”
“아니, 왜 울어? 그렇게 아팠어? 야, 미안해.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마티어스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바닥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거칠고 딱딱한 손바닥이 뺨에 닿자 더 화끈거렸다.
“더, 아-프-잖-아-!”
“어? 아, 손이……. 기, 기다려 봐. 이러면 안 아프지?”
“어헝…….”
제 손을 내려다보던 마티어스가 당황하며 셔츠 끝자락으로 마저 눈물을 닦아 냈다. 원래 누가 달래 주면 더 서러운 법이었다. 나는 아예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 나쁜 새끼야-. 이러다 죽으면 어떡해…….”
“진짜 미안하긴 한데 이런 거로는 안 죽어.”
“모르는 일이잖아. 나 지금 너무 나약하단 말이야…….”
“그래, 맞아. 나약하긴 하지.”
“긍정하지 마, 이 나쁜 자식아-.”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다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모인 기사들이 마티어스의 뒤에서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나를 보고 있었다. 마티어스 역시 눈치챘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뭘 봐. 눈 안 돌려? 전부 50바퀴씩 더 돌아!”
그 말에 일정을 끝내고 막 아침을 먹으려 했던 기사들의 낯빛이 순식간에 거멓게 죽었다. 그러나 명령을 불복종할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는지 순순히 훈련장을 뛰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에 울음을 그치고 훌쩍대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위로 쑥 들렸다.
“뭐, 뭐야.”
“치료하러 가야지.”
역주행하듯 휙휙 바뀌는 풍경에 나는 당황해 밑을 내려다보았다. 마티어스가 나를 안은 채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티어스, 어디 가……?”
“의무실. 치료해야지.”
아, 의무실……. 나는 마티어스의 품에 안긴 채 한숨을 푹 쉬었다. 함께 훈련했는지 마티어스에게서 희미한 땀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의 체향과 섞여 그리 나쁘게 느껴지진 않았다.
마티어스의 걸음이 빨라서일까, 의무실엔 금방 도착했다. 드르륵, 의무실 문이 열리고 놀란 표정의 기사 하나가 마티어스를 맞이했다. 의무병인 듯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아니. 내가 다친 건 아니야.”
“아, 부상자를 데려오신 거군요. 치료를…….”
“내가 치료할 테니 신경 꺼.”
민망할 정도로 딱 잘라 말한 마티어스가 의무실 매트리스에 나를 앉혔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마티어스는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갔다. 약이 든 찬장을 열었는지 유리병끼리 달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고급 포션인데. 많이 다치셨나 봐요.”
“심각하지.”
“…….”
나는 침대 옆의 거울로 귀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주 약하게 긁힌 거라 이미 피가 멎고 딱지가 지고 있었다. 커튼을 젖힌 마티어스의 손에는 소독약이며 포션들이 가득 들려 있었다.
호들갑은…….
괜스레 민망해지는 기분에 낯이 달아올랐다.
“봐 봐.”
포션을 한쪽에 내려놓은 마티어스가 내 귓불을 쥐고 살폈다. 까슬까슬한 손가락이 귓불과 귓바퀴에 닿자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피는 멎었네.”
마티어스가 솜에 소독약을 듬뿍 묻혀 내 귓바퀴에 가져다 대었다.
“따가워…….”
“이게 뭐가 따가워?”
나약하다며 연신 툴툴거리긴 했지만, 마티어스의 눈에는 죄책감 비슷한 것이 한가득 어려 있었다.
하여간 이상한 데서 마음이 여리다니까.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윽고 고급 포션이 아낌없이 쏟아부어지고, 상처는 흔적도 없이 나았다. 내 귀를 요리조리 돌려 보고 나서야 마티어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보이네. 십 년은 감수한 것 같다.”
“더 감수하고 싶지 않으면 앞으로 생각 없이 행동하는 버릇 좀 고쳐.”
여태껏 젖어 있는 귀를 매만지며 내가 톡 쏘아붙였다. 붉으락푸르락해져서 무어라 한마디 할 것 같았던 마티어스는 이상하게도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알았어.”
“……?”
기가 팍 죽어서 꼬리를 만 모습을 보자 기분이 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