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
압실론? 너 뭐 하니?
잠깐 났던 화도 사그라들 만큼 흉흉한 기세였다. 출구는 압실론의 뒤에 있었다.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더럽힌 하얀 벽만 있을 뿐.
나는 경계하듯 압실론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나 죽이거나 인형 만들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
“응, 알아.”
“그런데 왜 칼 들고 오는 건데?”
내 말에 압실론이 독을 품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이현도 약속 안 지켰잖아.”
이런, X발!
나는 벽에 찰싹 달라붙어 소리를 질렀다.
“사, 살려 줘……!”
서걱, 무언가가 잘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목을 움츠린 채 덜덜 떨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자 압실론이 내 머리칼을 쥔 채 밝게 미소 짓고 있었다.
“노, 농담이야.”
무슨 농담을 이런 식으로 하는데!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압실론이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조금씩 다가왔다.
“그런데…… 사아실 피도 좀, 필요하긴 해.”
“……!”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단검으로 내 검지를 콕 찍은 압실론이 상처 밑에 병을 가져다 대었다. 아주 미세한 상처라 손가락을 쥐고 꽉 눌러야 겨우 핏방울이 맺혔다. 두세 방울을 짜낸 압실론이 이내 내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미약한 흡입이 느껴지더니 손가락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나아 있었다.
“끝.”
“……이제 끝난 거야?”
“응.”
그런데 내 머리카락이랑 피는 대체 뭘 하려고 가져가는 걸까. 가끔 보이는 압실론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행동에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그걸로 뭘…… 할 건데?”
“궁금해?”
병을 조심스레 품속에 갈무리하던 압실론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안 궁금해졌어.”
괜히 파 봤자 내 피만 더 볼 것 같은 기분에 나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압실론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안 물어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창고를 빠져나왔다.
“피곤하다…….”
“버, 벌써?”
“그러게. 왜 벌써 피곤할까.”
나는 브레이슬릿을 찬 손목을 흔들며 말했다. 압실론이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시선을 피했다.
“저녁 같이 머, 먹을 거야?”
“아니, 방에 가서 먹을래.”
혹시나 저녁 식사를 하다 우리가 보물 창고의 물건을 때려 부순 걸 들킬 수도 있었기에 나는 안전을 택했다. 식당부터 내 방까지는 거리가 조금 되니 오는 사이 분노가 좀 가라앉을 수도 있잖아.
“넌 먹으러 갈 거야?”
“으응, 오늘 후식 사과파이라고, 해서…….”
그러고 보면 압실론은 사과를 참 좋아했다.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하나의 사과파이를 먹고 있을 녀석이라 한 적도 있는데, 정말 온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고도 사과를 먹는구나.
나는 문득 든 불안감에 압실론에게 되물었다.
“그 방 들어가기 전에 내가 뭐라고 했지?”
“우리는 함께 사, 살고, 함께 죽는다.”
“맞아. 그러니까 루드비히가 열 받아서 내 방 오려고 하면 너도 뒤따라와서 나 구해 줘야 해. 알았지?”
“응. 나, 그 말 정말 마음에 드, 들어. 같이 죽는다는 말…….”
압실론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갑자기 불안해지는 건 왜일까. 나는 다소 미심쩍은 눈으로 압실론을 바라보다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시, 식사 맛있게 해, 이현…….”
나는 피곤함에 목을 주무르며 내 방으로 향했다. 방에는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워 침대 위를 유영하는 빛 먼지를 더듬었다.
“아아, 피곤해…….”
며칠 새운 것처럼 뻑뻑한 눈을 감고 눈두덩을 문지르고 있자니 저절로 루드비히의 화난 표정이 떠올랐다.
“많이 화낼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극형은 물론 삼대를 멸족시킬 일이었다. 황제의 보물 창고를 완전히 망가트린 거니까. 심지어 지금은 이름뿐이라고는 해도 전쟁 중이라 물자가 중요한 시기였다.
가끔 이벤트성으로 스파이가 궁 안에 들어와 군수 물자를 헤집어 놓고 갔을 때가 있었는데, 걔네가 어떻게 됐더라.
체자레와 텐트에서 좋은 시간 보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오싹해지는 기분에 나는 소름이 일어난 팔뚝을 매만졌다. 화는 안 내고 호감도만 쭉쭉 떨어졌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래도 이번엔 압실론이랑 같이 했으니까 죽이지는 않겠지.
나는 공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이러다 내부 분열이라도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의심하면서 피 터지게 싸우다 죄다 자멸해 버려라.
누구로 분열을 일으킬까 고민하고 있던 나는 저 멀리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놀라 생각을 멈추었다. 나는 서늘한 손끝으로 입술 끝을 매만졌다.
조금 전, 거울 속의 나는 분명……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망가트릴 계획을 짜면서 웃고 있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아냐, 근데 걔넨 나쁜 놈들이잖아.
그래도 내가 좋아서 한 행동들인데……. 이현, 미친놈아. 넌 그래서 여기 계속 갇혀 있을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을 했는지 두통이 일었다. 지압하듯 이마를 문지르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모니터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입영 통지서라도 받은 날이었을까. 날아다니는 자동차가 있는 시대에 군대에 가야 한다니. 틈만 나면 방송을 켜고 삶의 부조리에 대해 일장 연설을 했던 기억이 난다.
군대 가기 너무 싫어서 한 달 전부터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가끔은 블랙아웃까지 왔었다.
와, 나 진짜 진상이었네.
그래도 시청자들이 착해서 내 꼴사나운 모습을 클립을 따 풍선을 쏠 때 쓰는 정도에 그쳤었다. 지금 생각하면 실언으로 인해 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술기운이 올라 흐릿해진 시야에 사람들의 대화가 쭉쭉 올라가는 게 보였다. 꿈속의 나는 눈을 깜빡이며 사람들의 대화를 줄줄이 읊었다.
“‘형, 그래도 나 때는 군대 안 가겠지?’ 저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봤겠습니까?”
나는 시청자가 귀엽다는 듯 웃다가 갑자기 빌기 시작했다.
“아, 여기 계신 분들 저 대신 복무 일주일씩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럼 저 훈련소 갔다가 바로 퇴소하면 될 것 같은데. 안 된다고요? 저도 알아요. 안다고요. 아악!”
키보드 샷건을 치는 나를 보면서 구독자들이 연신 ㅋ을 치며 즐거워했다. 내가 저랬었구나. 모니터를 앞에 두고 군대에 가기 싫다며 징징거리는 모습이 제법…… 꼴사나웠다.
꿈속인데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못 보겠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신기하게도 점차 시야가 모니터에서 멀어져 갔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화면이 점차 에이포용지 한 장 크기에서 태블릿만큼 작아지더니 이내 휴대폰 액정보다 더 작아졌다. 그때 누군가의 메시지가 하나 더 올라왔다. 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그 메시지에 집중했지만, 모니터가 이미 작아진 상태라 전문을 보기 쉽지 않았다.
“……가, ……게요?”
뭐라는 거야. 무슨 꿈이 이렇게 불친절해.
그렇게 투덜거리며 설핏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잠들었던 사이 해가 졌는지 어둠이 방 안에 가득히 들어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강렬한 분노를 맞닥뜨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쐐애액!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무언가가 나를 향해 쇄도했다. 매트리스를 꿰뚫는 둔탁한 소음이 났다. 발치에서부터 올라오는 선득한 감각에 전신에 소름이 일었다.
아닌 밤중에 이딴 짓을 할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나는 눈에 익어 점차 드러나는 인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루드비히.”
“계속 자지, 왜.”
“……뭐 하는 짓이야.”
“잘 쓰는 것 같아서 돌려준 건데, 문제 있나?”
“무슨 소리 하는…….”
나는 인상을 쓰며 되물으려다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오늘 내가 사용했던 단검이 매트리스에 꽂힌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문제 있지, 많이 있지. 검집째 공손하게 준 것도 아니고 방금까지 내 다리가 있던 매트리스를 꿰뚫었는데 문제가 없겠냐?
“이거 내 거 아닌데.”
나는 한번 발뺌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네가 썼을 텐데.”
“아냐, 압실론이 썼어.”
나는 소심하게 압실론을 팔아먹었다. 루드비히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적어도 같이 있었겠군. 걱정 마. 그쪽도 처리하고 오는 길이니까.”
“…….”
뭘 처리했다는 걸까. 나는 잔뜩 긴장해 경계의 눈빛을 띤 채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널 상처 입히는 건 간단해.”
어둠 속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낮게 읊조렸다.
“그리고 널 치유하는 것도 간단하지.”
다리 많은 벌레를 코앞에서 마주한 것처럼 피가 차갑게 식었다. 사실이었다. 루드비히의 옆에는 압실론이 있었다. 나를 죽을 만큼 다치게 하고도 상처 하나 없이 낫게 할 수 있었다. 일단 브레이슬릿 자체가 죽음만은 피하게 하는 만큼, 나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널 좋아한다 해서 뭐든지 참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
하고 싶은 말을 끝냈는지 루드비히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 쪽에서 화가 났다.
“어떻게 그딴 말을 해.”
나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세계는 송두리째 빼앗아 가 놓고, 네 물건 좀 건드렸다고 이렇게 나오는 게 맞아?”
“전부 망가트려도 상관없었다. 물건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말이 안 맞잖아. 그럼 여기 왜 온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