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어, 어?”
긴장하는 바람에 삑사리가 난 나는 목을 큼큼 가다듬고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모두가 우리 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압실론은 조금 걱정하는 듯 보였고, 마티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참고로 체자레는 웃고 있었다. 얘네는 정말 날 좋아하는 게 맞긴 한 걸까.
“내가 왜 네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지 않는 줄 아나?”
“그, 글쎄?”
“지적하기 시작하면…… 널 죽일까 봐.”
“…….”
“잘하자.”
“응.”
“제대로 앉고.”
“응.”
끼이익, 나는 건들건들하고 있던 의자 다리를 얌전히 내렸다.
“식기도 제대로 쓰고.”
“응…… 네.”
“착하네.”
아냐, 루드비히. 이건 착한 게 아니야.
이건 누가 봐도…… 너한테 잔뜩 겁먹은 거잖아.
그러나 루드비히는 내가 그러든 말든 나머지 식사를 이어 갈 뿐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전술은 폭발 직전의 루드비히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었다.
* * *
“이현.”
“응.”
“저, 정말로 괜찮을까?”
“나 못 믿어?”
“믿어, 믿는데…….”
“그럼 됐지. 시작하자.”
와장창!
나는 어디선가 주워 온 검집으로 복도에 놓여 있는 도자기를 툭 쳤다. 장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도자기가 바닥에 떨어지며 조각났다. 나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세 걸음 앞에 있는 화병도, 일곱 걸음 앞에 있는 도자기도 전부 부쉈다. 압실론이 내 뒤를 따르며 걱정스레 물었다.
“루드비히 가, 감당할 수 있겠어……?”
아니. 못 하지. 그러니까 널 끼워 넣은 거란다.
“내가 알아서 할게. 시간 왜곡 마법 안 쓰기로 나랑 약속했지?”
“으, 응…….”
“좋아, 가자!”
나는 압실론과 어깨동무를 한 채 결연히 걸어 나갔다.
그랬다.
세 번째로 내가 시도한 전술은 깽판 치기였다.
복도의 모든 것을 때려 부수고 온 나는 루드비히의 재물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나름 기사들이 24시간 지키고 있는 데다 자물쇠로 잠겨 있었지만, 내게는 만능 오프너 압실론이 있었기 때문에 문제없었다.
정말 편리한 녀석이야.
나는 장정 둘을 깔끔하게 기절시키고 내 뒤를 따르는 압실론을 보며 생각했다. 창고 안에 들어온 압실론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말했다.
“저, 정말 이거 도와주면 오 분 동안 내가 하,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거지?”
“……그럼. 그래도 죽이거나 인형 만드는 건 안 되는 거 알지?”
“응, 알아.”
그런데 왜 그렇게 예쁘게 웃는 거니. 너무 예뻐서 오싹하잖아…….
편리함의 대가가 조금 두렵긴 하지만 5분으로는 뭘 못 할 거라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황제의 재물 창고답게 방 안은 귀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금괴와 유색의 보석들, 열을 맞추어 세워 둔 귀한 옷감, 갑옷과 보검까지.
나는 대충 보검 중에 단검을 골라내어 그것을 바로 옷감에 박아 넣었다. 북, 하는 소리와 함께 금사로 수놓은 옷감이 찢어졌다. 찌지직, 잘 찢어지는 옷감은 손으로 찢고, 안 찢어지는 건 단검으로 베어 냈다.
“압실론, 물!”
“여, 여기.”
마음이야 어쨌건 내 말에 압실론이 손 위에 물의 구를 만들어 냈다. 나는 적당한 크기가 되었을 때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에 쏟아부어.”
“으응…….”
압실론이 바닥에 물을 쏟자 연못 크기의 물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촤아악! 나는 그곳에 가차 없이 옷감과 고서들을 던져 넣었다. 불을 쓰는 것도 괜찮겠지만, 아무래도 이것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여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번 일은 압실론과 공모한 거니 루드비히라 하더라도 나를 진짜 죽일 순 없을 것이다. 페리도트와 루비 위로 단검을 콱콱 찍자 쩌적 소리와 함께 크랙들이 만들어졌다.
단검 진짜 좋은 건가 보네.
금괴는 따로 부술 수가 없었던 데다 모양이 좀 흐트러진다 해도 녹여서 다시 쓰면 그만이었으므로, 그냥 벽에 던져서 봤을 때 기분 정도 나쁠 정도로만 만들었다.
갑옷을 검으로 몇 번 내리치고, 검과 검을 부딪쳐 날이 상하게 하고 나자 손에 물집이 가득 잡혔다.
“허억, 허억. 체, 체력 딸려…….”
나는 금을 던진 벽에 기대어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들이켰다. 브레이슬릿 때문에 조금 움직인 거로도 몸살이 걸린 것처럼 온몸이 쑤시고 아파 왔다.
“이, 이현, 괜찮아……?”
“아, 안 괜찮아. 나머지는 네가 해결해 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내가 한 것처럼, 헉, 다 때려 부수면 돼.”
내 말에 압실론이 주위를 둘러보다 검을 하나 들고 금괴를 내리쳤다.
파아악!
모래를 벤 것처럼 금괴가 조각조각이 되더니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아연하게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이, 이렇게 하면 돼?”
“어, 응.”
압실론은 몇 번 부숴 보더니 파괴하는 데 재미가 들린 듯 아까의 나보다 더 열심히 물건들을 부수고 다녔다.
야, 너는 무슨 마법사가 이렇게 힘이 세냐…….
힘법 뭐 그런 건가. 아니, 마법도 잘하면서…….
아무래도 전쟁터를 전전했던 만큼 압실론 역시 격투기나 검술에 기본적인 소양이 있긴 했다. 그런데 이 정도로 출중했던가……?
“압실론, 너 원래 이렇게 힘이 셌어……?”
“이, 이현이 보고 싶을 때마다 뒤뜰에 세워 놓은 허수아비를 쳤더니 이, 이렇게 됐어.”
“…….”
나는 약간의 광기가 어려 있는 압실론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압실론의 소원은 도대체 무엇일까?
문득 두려워졌다.
신나게 뛰어논 결과 우리는 창고를 완전히 엉망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제야 좀 제정신을 차린 듯 압실론이 약간의 걱정을 안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그냥 다, 태울까……?”
뒤늦게 증거 인멸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안 돼.”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려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지. 나는 압실론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약속해. 시간 왜곡 마법은 쓰지 않겠다고.”
“아, 알았어…….”
나는 확답을 받아 낸 뒤에야 압실론의 손을 놓아주었다. 나와 손을 놓은 압실론이 혼자 몰래 뭔가를 꼬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번 내 눈치를 봤다. 너무나도 수상쩍은 느낌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숨겼어?”
“어, 어? 아니!”
너무 강하게 부정하니 더 수상했다. 나는 압실론의 손목을 잡고 내게 끌어당겼다. 예기치 않은 접촉에 놀랐는지 압실론이 중심을 잃고 내게 힘없이 끌려왔다.
툭, 압실론의 소매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뭐야, 이게?”
낡은…… 꽃반지?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것도 보석으로 꽃을 표현한 게 아니라 토끼풀로 엮은 조악한 꽃반지였다. 꽃잎 몇 개가 누렇게 뜬 게 오래된 것 같았다. 이게 왜 보물 창고에 있지? 나는 꽃반지를 톡톡 두들기고 만지작거리다 탈탈 털어 보았다. 그리고는 곧 어떤 사실 하나를 알게 되었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네?”
추궁하듯 물었다고 생각했는지 압실론이 뜨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너 이거 뭔지 알지.”
“기, 기억 안 나?”
“뭐가?”
“이거 이현이 루, 드비히한테 준 거잖아.”
“내가 이걸 줬다고?”
“으, 응. 그때 리츠본 전쟁터에서…….”
리츠본 전쟁을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 맞다. 기억난다!”
전쟁 후반 즈음이었나. 시나리오가 거의 끝나 가고 있는데 루드비히가 전혀 고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아, 호감도를 올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음식 만들어 주기, 어깨 주물러 주기 등등. 하다 하다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찾아 꽃반지까지 만들어 주었다. 나도 큰 걸 바라고 줬던 건 아니라 만들어 주고 금방 잊어버렸는데, 이걸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보물 창고에.
모든 물건을 아낌없이 부순 압실론이 따로 숨길 정도면, 제법 소중한 물건이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계산을 마친 나는 꽃반지를 손안에서 으스러트렸다. 그러나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꽃반지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부서져 주지 않았다. 나는 압실론에게 꽃반지를 쥔 손바닥을 내밀었다.
“보호 마법 풀어 줘.”
“이, 이현…….”
“왜?”
“이건 루드비히한테 지, 진짜 소중한 거야……. 정말 크게 화낼지도 몰라.”
“내가 만들어 준 거 내가 부수겠다는데 왜?”
내 말에 압실론이 어쩔 줄 몰라 하다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후회할지도 모, 몰라……. 이현.”
압실론이 씁쓸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꽃반지 위를 훑었다.
<‘꽃반지’의 보호 마법이 해제되었습니다.>
내가 바로 주먹을 쥐려 하자 압실론이 내 손가락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굳이 부술 필요도 어, 없을 거야…….”
압실론의 말대로였다. 보호 마법의 힘을 잃은 꽃반지는 형체가 뭉그러지더니 순식간에 가루로 화했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냉정하게 손을 털어 냈다. 압실론의 표정이 슬프게 일그러져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러는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 씨.”
나는 신경질적으로 금괴를 집어 던졌다. 압실론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 세계에 갇힌 뒤로 문득문득 화가 나고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여기서 나가면 한의원부터 가서 화병부터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반쯤 부서진 상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꼰 뒤 팔짱을 꼈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어, 어?”
“5분 동안 원하는 거 하겠다며. 여기서는 못 하는 거야?”
잠시 생각하던 압실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할 수 있어.”
“잘됐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던 압실론은 내가 실컷 찌르고 베며 가지고 놀았던 단검을 주워 들고는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