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애들이 물을 안 줘?”
한참을 고민하던 마티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왔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씻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귀찮아서.”
녀석의 표정이 대번에 날아 차기를 갈기고 싶다는 듯 변했다.
그래, 이대로 호감도 뚝뚝 떨어트려 주라. 아예 지긋지긋해져서 얼른 날 놔주라고!
나는 한술 더 떠 꽃을 쥐고 있었던 손도 마티어스 보라는 듯 쫙 폈다. 창밖으로 꽃이 수직 낙하했다.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던 꽃은 수풀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 실수.”
전혀 실수가 아니라는 듯한 말투에 마티어스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티어스의 상태 창을 켰다.
[이름: 마티어스 크롬하트 (Lv. 289)
나이: 24
직업: 그리체 제국 장군
호감도: ???
체력: 95%
마력: 9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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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당황과 분노의 상태입니다.
마음 엿보기: ???]
나는 호감도 옆 물음표를 눌렀다. 호감도는 하루에 한 번 무료로 볼 수 있었고, 이후로는 캐시를 써야 볼 수 있었다.
[호감도: 335.9% (▼ 1.2%)]
“……?”
……뭐?
나는 괴상한 숫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감도의 만렙은 분명 99.99%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300%가 넘는 이 호감도는 뭔데? 설마 다른 애들도 그런 건가? 계획이 예상대로 안 풀릴 것 같아 당황해하는 내 시야에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는 마티어스가 보였다.
“너 기분 안 좋아 보이니까 다음에 다시 올게.”
“안 와도 되는데.”
“……올 거라고.”
마티어스는 그새 사람이 된 건지 뭔지 생각보다 순순히 내게서 물러났다. 다짐하듯 마지막 말을 내뱉은 마티어스는 마치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나무를 타고 내려갔다. 저 덩치로 저렇게 가벼운 움직임이라니, 언제 봐도 신기했다.
“하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려움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씻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야!”
돌아서는데 마티어스가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마티어스는 마치 공을 던지는 투수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푸엑!”
왜 저런 포즈를 취하고 있지, 하고 생각하기도 전 나는 이마에 정통으로 꽃을 얻어맞고 비명을 질렀다. 어이가 없어 이마를 문지르며 밑을 내려다보자 마티어스가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너 얼굴 진짜 웃긴다.”
또 올게.
마티어스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떨어진 꽃을 주웠다. 그가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건진 모르겠지만, 꽃은 정원사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그대로 꽃잎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걸 확 던져 버려?”
그러기엔 마티어스는 이미 너무 멀어져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손바닥 가득 차 있는 꽃송이를 내려다보다 그걸 책 사이에 몰래 끼웠다. 그리고는 침대 밑에 잘 숨겨 두었다.
화병에 꽂아 두면 받아 줬니 뭐니 얄밉게 굴 테니까. 나중에 물어보면 도로 던져 버렸다고 해야지.
“호감도는 올리는 것도 어렵지만, 내리는 것도 어렵구나…….”
나는 침대에 누워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식사입니다.”
“놓고 가.”
큰일을 치른 것처럼 배가 고팠던 참이라 나는 반갑게 식사를 맞이했다.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문을 열자 평소와는 달리 음식을 든 사용인이 여전히 자리에 서 있었다.
“너, 너 왜 안 갔……!”
깜짝 놀라 문을 닫으려는데 사용인이 문 사이로 제 발을 콱 끼워 넣었다.
뭐야, 이 악덕 방문 판매상 같은 행동은……?
“전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이가 없어 사용인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그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사흘 뒤 폐하와 마티어스 장군님, 압실론 님, 그리고 한 분의 객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있을 예정입니다.”
한 분의 손님이라면 분명 체자레겠지. 체자레라고 하면 다른 이들이 반응할 테니까 그냥 손님이라 말한 모양이었다. 시스템을 손안에 쥐고 거침없이 사용하는 이들의 행보를 보자니 저절로 한숨이 났다.
“그래서?”
“폐하께서 그 식사에 이현 님이 함께하시길 원하십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박에 거절하려던 나는 눈앞의 음식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언제까지 황제궁 침실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끌어내려면 언제든지 끌어낼 수 있지만, 그냥 봐주는 거겠지. 부처님 손바닥 안 손오공 같은 신세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이제는 내가 이 판을 주도해 볼 차례였다.
“그래, 간다고 전해.”
“예. 그럼 새벽에 방문해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준비는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게.”
사용인의 낯에 미심쩍은 눈빛이 들어찼다. 나는 개의치 않고 방긋 미소 지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참, 나 먹고 싶은 게 있는데.”
* * *
사흘 후.
전쟁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던 황제궁도 오늘만큼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사실 전부는 아니고 아주 일부만 시끄러워졌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만.
나와 복도에서 마주친 사용인들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다소 경악한 눈치였다.
그래, 이해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해한다는 눈빛을 한 번 던져 주었다. 사용인 하나가 흠칫하더니 저 멀리로 사라졌다. 조금 머쓱해진 채로 나는 초대받은 연회장 앞에 섰다. 나를 발견한 경비병들이 당황한 기색을 띠었다.
“이대로…… 들어가시는 겁니까?”
“응.”
경비병들이 난감하게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고작해야 중급 기사인 그들에겐 나를 막을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평소보다 문을 좀 더 느릿느릿하게 열었을 뿐.
조금 늦게 자리에 등장했기에 넷은 이미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내가 좀 늦게 왔나 보네.”
내 말에 넷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으로 굳어진 그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약간의 쾌감을 느꼈다.
‘참, 나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분부하십시오.’
‘수르스트뢰밍, 있지? 매 끼니마다 가져다줘.’
그랬다.
그날 나는 사용인에게 두리안의 40배의 악취를 가졌다는 삭힌 청어 요리를 요구했다. 사용인은 미심쩍어했지만, 다음 끼니부터 수르스트뢰밍을 계속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것을 차곡차곡 모았다.
그리고 오늘, 여기 오기 10분 전, 모아 온 수르스트뢰밍을 뒤집어썼다. 음식 컬렉션과 생화학 무기 컬렉션에 동시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 만큼 지독한 냄새가 났다. 하여간 개발자도 악취미라니까.
나는 그 상태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내 코에도 지독하게 느껴지는 냄새였지만, 애들의 표정이 가관이라 냄새는 잠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이게 무슨 꼴이야?”
예상과 한 치의 다름도 없이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마티어스였다. 나는 안내된 자리에 앉아 씩 웃었다.
“초대에 부응하는 복장으로 온 건데.”
“이게 초대에 부응하는 복장이냐?”
“내 패션에 왈가왈부하지 마.”
“이, 이현, 난 멋지다고 생각, 우욱, 해…….”
나름대로 나를 포장해 보려던 압실론조차 그 굉장한 냄새에 헛구역질을 했다. 체자레는 역시 이현은 재미있다니까요, 라고 말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마치 냄새 따위는 전혀 나지 않는다는 듯. 루드비히는 준비한 술을 마시며 역겹군, 이라고 나직이 내뱉었다.
아무래도 내 작전은 대성공인 것 같았다.
“눈치 주지 마. 눈칫밥이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거 몰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식전 빵을 양손에 쥔 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못 배워 먹은 행동에 루드비히가 짧게 혀를 찼다. 압실론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내게 물었다.
“저기, 이현. 너만 괘, 괜찮다면 내가…….”
“시어.”
“응?”
나는 옥수수로 만든 노란 식전 빵을 꿀꺽 삼키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싫다고, 클린 기능. 오늘 이 패션은 내 소울이야. 그 기능을 발동시키는 건 내 영혼을 말살시키는 행위야.”
“그런……!”
내가 강하게 나오자 압실론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 안 할게.”
“그래. 아, 음식이 다 떨어졌잖아. 사람 초대해 놓고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가져와? 고기 가져와, 고기!”
나는 텅 빈 접시를 은제 포크로 탕탕 치며 불만을 토해 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사용인들이 흠칫하며 음식을 가지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빨리빨리 가져와. 감질나니까 디저트까지 싹 다 가져와!”
내 말에 사용인들이 파랗게 질려 네, 하고 다급히 달려갔다. 그렇게 달려 나간 사용인들, 스무 살이나 됐을까. 이 세상에 인터넷이 있었다면 난 분명 진상 고객으로 인터넷에 박제됐을 거다.
죄송해요……!
진상 되기가 이렇게 어렵다. 양심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지만, 대의를 위해서라 생각하기로 했다. 눈앞의 모든 음식을 먹어 치우는 나와 달리 애들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그 이유가 내 옷과 머리에 묻어 있는 수르스트뢰밍과 무관하지는 않을 거다. 특히나 마티어스의 표정은 내가 음식을 쩝쩝거리며 먹을 때마다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는 밥을 먹는 척하며 마티어스의 상태 창을 켰다.
[이름: 마티어스 크롬하트 (Lv. 289)
나이: 24
직업: 그리체 제국 장군
호감도: 330.9% (▼ 5%)
체력: 95%
마력: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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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식사 중입니다.
마음 엿보기: ???]
만세!
호감도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5%나 내려가 있었다. 청결의 아이콘답구나, 마티어스. 다른 애들도 보고 싶지만, 이후부터는 캐시 써야 하니까 자정 지나고 확인해 봐야겠다.
호감도를 확인하고 보니 밥이 더욱 꿀맛이었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레몬주스를 들이켜다 생각난 듯 말했다.
“체자레.”
“네, 이현.”
“너 저번에 키스 받고 싶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