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다 나가 줘. 혼자 있고 싶어.”
그들은 내 말에 나를 보는 대신 서로를 응시했다. 무언의 의견이 내 앞에서 교환되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나는 입가에 삐딱한 웃음을 건 채 그들에게 물었다.
“아니면, 이제 난 그런 요청도 할 수 없어?”
내 말에 압실론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울고 싶은 게 누군데. 나는 매정하게 압실론의 시선을 피했다. 짝짝, 두 번의 박수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체자레가 손을 마주한 자세로 미소 짓고 있었다.
“일단 이현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한 것 같으니까, 나가 주죠.”
쉬어요, 이현. 체자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제일 먼저 방을 나섰다. 루드비히가 어깨에 마티어스를 가볍게 둘러멘 채 그 뒤를 따랐다.
“넌 왜 안 나가?”
뾰족한 말투에 압실론이 움찔했다.
“이현이 좀 편히 쉴 수 있게 마, 만들어 주려구.”
압실론이 엄지와 중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사물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이내 같은 재질인 것끼리 붙기 시작했다.
파아앗. 흙탕물이 묻어 있던 카펫이 갓 태어난 새끼 양의 털처럼 희게 변하고, 산산조각이 났던 도자기가 금 하나 없이 매끈하게 붙는 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수리 마법이야?”
“아, 아니. 시간 왜곡 마법이야.”
“너 이제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이 정도면 이제 거의 신 아닌가.
그러자 압실론이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으응, 일부 사물에만 하, 할 수 있는 정도야. 게다가 이 방엔 원래 복구 마법도, 걸려 있거든. 원본을 보고 따라 하는 건, 쉬워.”
하긴 여긴 루드비히의 침실이니까.
말끔해진 방을 보며 나는 혀를 내둘렀다. 압실론이 내 눈치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얘는 대체 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다른 애들은?
궁금했지만 오늘은 이미 한계였다. 더 이상의 애먼 정보를 받아들였다간 머리가 터질지도 몰랐다. 내가 말없이 압실론을 빤히 바라보자 그의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네가 무슨 애덤 스미스인 줄 알아.
“안 나가?”
내 말에 압실론의 꼬리가 대번에 가라앉았다. 눈꼬리가 축 처진 모습이 동정심을 자극할 법도 했지만, 지금의 나에겐 아니었다.
“치, 칭찬 안 해 줘?”
“무슨 칭찬?”
“이현이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전부 나가게 만들어 준, 건데.”
아, 그래서 괜히 마티어스한테 싸움을 건 거구나. 어쩐지 평소의 압실론 같지 않다 했다.
“그러니까, 나 혼자 있게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둘이 연기를 한 거라고?”
“방을 더럽히면 쫓아낼 며, 명목이 생기잖아. 그리고 여, 연기는 나만 했지.”
마티어스한텐, 그럴 머리가 없어.
잔뜩 부어오른 뺨으로 단호하게 답하는 압실론의 태도가 기가 막혔다.
“고마워. 이제 너도 나가.”
압실론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압실론의 가증스러운 뒷모습을 보던 나는 불시에 말했다.
“아, 부탁할 게 있는데.”
“뭔데?”
압실론이 눈을 반짝이며 대번에 총총 걸어왔다. 나는 브레이슬릿을 흔들며 말했다.
“클린 기능 좀 해제해 줘.”
“왜, 왜? 마음에 안 들어? 이현, 씻는 게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고 했잖아.”
그래. 씻고 난 후의 상쾌함을 좋아하지만, 씻는 건 사실 너무 귀찮은 일이지.
“응, 마음에 안 들어. 그러니까 해제해 줘.”
단호한 태도에 압실론은 더 토 달지 않고 브레이슬릿을 매만졌다. 가까이서 보니 압실론의 낯이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
“너 어디 아파?”
“아, 아니, 안 아파. 해 줄게.”
압실론이 주문을 외우자 브레이슬릿 안에 박힌 복잡한 문자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좀 대충 외우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제작자: 압실론 디트크리프)이 제작자의 의지를 받아 변화합니다.>
<클린 기능이 해제되었습니다.>
“됐어, 이제 가 봐.”
볼일을 다 본 나는 냉큼 압실론을 내쫓았다. 문을 닫기 전 압실론이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았지만 나는 가차 없이 손을 내저었다. 압실론이 나가고 복도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 볼까 하다가 귀찮은 마음에 도로 침대에 누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온 뒤로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다.
* * *
루드비히의 침실 문을 걸어 잠근 뒤 사흘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식사는 꼭꼭 챙겨 먹었지만, 그들의 방문은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뭐 예쁜 놈들이라고 본단 말인가.
다행히 그들도 전쟁을 시작해 처리할 게 많은지 자주 찾아오진 않았다. 아니면 내게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한다고 결론지었거나.
“하아…….”
이 방에 있는 것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집에 있는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내 옆에 있을 때에 한해서였다. 그 네모 상자들만 있으면 이런 자체 감금 생활이 훨씬 더 풍요로워질 텐데.
하도 심심해 레벨을 올려 보고자 윗몸 일으키기 같은 걸 해 봤지만, 들이는 힘에 비해 경험치가 너무 안 올라 그만두었다. 레벨이 세 자릿수를 넘어가면 사실 웬만한 일로는 경험치가 오르지 않는다. 해 보지 않은 일을 할 때나 확확 오르지.
내가 안 해 본 게 뭐가 있더라. 요리나 농사, 검술 정도 있겠네. 그것들은 지금은 시도할 수 없는 거였다. 무료함에 괜히 이불이나 신경질적으로 차고 있을 때였다.
툭.
유리를 작고 단단한 걸로 치는 듯한 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창문엔 아무것도 없이 푸른 하늘만 비칠 뿐이었다. 뭔지 추측하고 있는데 작은 돌멩이가 다시 한번 유리를 가볍게 때리고 떨어졌다.
나는 서서히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밑을 내려다보자 마티어스가 조경수 꼭대기를 딛고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나는 당황해 창문을 열었다.
“뭐 해, 미친놈아!”
“심심해서.”
심심하다고 황궁 정원 조경수 꼭대기에 서 있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아니, 그것보다 왜 황제의 방 창문 앞에 조경수가 이렇게 높이 자라 있는 건데? 암살당하기 딱 좋은 환경 아닌가? 베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루드비히가 암살당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또, 또 딴생각한다.”
마티어스가 그런 나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마티어스를 향해 외쳤다.
“야, 너 그러다 떨어져.”
“웬일로 네가 내 걱정을 해? 난 여기서 저글링도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
하여간 운동 신경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
괜한 걱정 같아 나는 더 이상 가타부타 거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창문 손잡이를 쥐었다.
“그럼 거기 오래 서 있어.”
“뭐? 야!”
“왜.”
“하, 할 말 있어.”
내 단호한 태도에 발을 헛디딜 뻔한 마티어스가 다소 꼴사납게 균형을 잡은 채 말했다. 내가 보냈던 사흘 중 가장 재밌는 볼거리였기에 나는 대화 시간을 조금 더 할애해 주기로 했다.
“뭔데.”
“압실론 걔 지금 요양 중이다.”
“엥? 압실론이 왜 요양 중이야.”
내가 걔 나가는 것까지 다 봤었는데?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마티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년처럼 씩 웃었다.
“내가 대련이 끝나기 전에 걔 마나를 뒤틀어 놨거든. 일어나는 데 일주일은 걸릴걸.”
아, 그래서 브레이슬릿 고쳐 줬을 때 그렇게 하얗게 질려 있던 건가. 그 상태로 클린 마법까지 해제했으니 상태는 더 안 좋을지도 몰랐다.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했으면 되는 걸, 하여간 자존심 세다니까.
“그래서 루드비히 방에서 나가자마자 쓰러졌대. 네 앞이라고 허세 부린 거야, 그 자식.”
참고로 나는 두 시간 만에 일어났어. 완전 멀쩡하게.
의기양양한 마티어스의 태도에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너 건강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사실상 무승부였단 거지.”
너 그때 어지간히 쪽팔렸구나.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지금도 사실 좀 쪽팔린지 마티어스가 괜스레 볼을 긁적거렸다.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마티어스가 지금껏 한쪽 손에 숨기고 있던 걸 내밀었다. 그가 내민 건 꽃이었다. 한 송이만으로도 아주 호화스럽고 아름다운, 금색의 이름 모를 꽃.
“오다 주웠어.”
“온실 들렀다 왔니?”
숨기고 싶었던 진실이었는지 마티어스의 미간이 깊이 패었다.
“오다 주웠다니까.”
아니, 딱 봐도 누군가 온실에서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비주얼이잖아.
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나는 입을 다물고 순순히 그가 내민 꽃을 받아 들었다. 모란과 장미를 섞은 듯한 금색 꽃에서는 깊고 진한 향기가 났다.
“야, 근데 너…….”
나를 바라보며 마티어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 왜?”
턱을 문지르며 내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마티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세수는 했냐?”
“아니, 안 했어.”
“그럴 줄 알았다. 꼴이 뭐가 이렇게 지저분해.”
질색이라는 듯 마티어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들은 나름 연애 게임 캐릭터들이라고 위생에 예민했다. 잘 씻지 않으면 호감도가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전쟁터에서도 얼음장 같은 강물에 몸을 담그고 박박 씻어야 했다.
“하나 더 알려 줄까?”
“뭘?”
“나 양치도 안 함.”
나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괜히 클린 기능을 꺼 달라고 했던 게 아니거든.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당장 내가 낼 수 있는 패는 오직 비호감 작전뿐이었다.
“미친 거 아냐?”
다행히도 내 말에 마티어스의 눈동자에 경멸이 차올랐다. 특히나 마티어스는 넷 중에서도 가장 깔끔을 떨었다. 몸을 씻지 않은 병사가 있으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 그 병사에게 날아 차기를 날릴 정도였다. 그래서 마티어스의 직속 부대는 인기가 좋았다. 다른 소속의 병사들보다 훨씬 깔끔하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