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24화 (24/149)

#24

“이현, 모, 몸은 좀 괜찮아?”

압실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를 걱정하는 듯 보이는 눈빛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압실론의 어이없는 점은 나를 박제하고 싶어 하는 것도, 아픈 나를 걱정하는 것도 모두 진심이라는 거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압실론의 손을 가볍게 쳐 냈다.

“됐어, 건드리지 마.”

“마, 많이 아파? 의원을 부를까?”

“…….”

누굴 부를 게 아니라 너희만 사라지면 나을 것 같은데.

할 말은 많았지만 차마 할 수 없어 나는 입맛만 쩝쩝 다셨다. 하나도 부담스러운데 넷의 시선이 모이자 어제 먹은 저녁이 얹히는 기분이었다.

“쟨 그냥 네가 꼴 보기 싫은 거야.”

“……아니지?”

나는 압실론의 시선을 피했다. 마티어스가 그것 보라며 낄낄거렸다.

“괜찮아, 너만 싫어하는 거 아니고 여기 있는 사람 다…….”

“…….”

압실론이 주제 파악을 잘하는 마티어스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그의 뺨-사실 눈을 노린 것 같았다-에 물을 찍 쐈다. 그리고는 새침하게 돌아섰다. 말 한마디 했다고 실명할 뻔한 마티어스가 잔뜩 화가 나 압실론을 향해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이 새끼, 죽여 버린다!”

파지직, 마티어스의 주먹질에 압실론을 겹겹이 둘러싼 무형의 보호막이 부서졌다. 보호막이 파괴되며 방 안에 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스파크가 튀었다.

“이, 이 미친놈들이…….”

나는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일단 피하죠.”

일어나자마자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뻔한 나를 루드비히와 체자레가 끌어안고 구석의 테이블로 대피했다. 우리가 대피하는 사이 결국 마티어스가 압실론의 보호막을 뚫었다. 백과사전만 한 마티어스의 손이 작은 압실론의 얼굴을 강타했다.

짜악! 압실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마티어스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얘는 뭐 맨날 뺨 때리고 당황하냐.

서서히 고개를 돌리는 압실론의 모습이 마치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마티어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우물쭈물했다. 당혹감에 마른 입술을 핥던 마티어스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미, 미…… 미친놈아, 네가 잘못했잖아!”

사과 같은 건 없었다. 결국 2차전이 시작되었다.

쿠당탕! 이 세계에서는 제법 값나가는 물건일 화병이며 고서들이 깨지고 찢겨 나갔다. 깨끗한 맨발로나 디뎌야 할 것 같은 하얀 카펫이 흙탕물과 짓이겨진 꽃에서 배어 나온 물에 엉망이 되더니, 기어이 피로 물들었다.

압실론이 날린 예리한 무형의 칼날이 마티어스의 이마를 얕게 베어 낸 것이다. 툭 불거진 눈썹뼈를 타고 얇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니냐.”

“신경 쓰지 마요, 이현. 차 마실래요?”

체자레가 우아하게 테이블에 앉아 내게 차를 권했다. 으지직, 의자며 테이블이 공중에 날아다니는 게 보였지만 생각하기 귀찮았던 나는 얌전히 체자레가 준 차를 마셨다.

그래, 어차피 내 방도 아닌데 마음껏 망가트려라.

맞다. 여긴 내 방이 아니었다. 루드비히의 방이었다. 둘은 황제의 방에서 싸우고 있는 거였다. 어쩐지 일어났을 때 침대가 편하더라니. 차를 마시며 루드비히를 슬쩍 바라보았는데 워낙 세상사에 욕심이 없어서 그런지 별로 반응이 없었다.

나는 마음을 놓고 있기로 했다. 여차하면 압실론이 만들어 준 빌어먹을 브레이슬릿도 있었고, 넷이서 똘똘 뭉치면 능히 나를 산 채로 박제 만들 놈들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 분열되어 싸울 때는 나를 자기들 목숨보다도 먼저 지켰기 때문에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조심해.”

……라고 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길쭉한 의자 다리 한쪽이 내 귀 옆을 스쳤다. 루드비히가 내 귀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래, 이렇게.

나는 루드비히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겨 차를 홀짝였다. 정말이지 웃기는 놈들이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턱을 괴고 싸움을 구경했다. 예전엔 더 재밌게 구경했던 것 같은데, 요즘엔 너무 현실 같다 보니 재미는 예전만 못했다.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둘을 바라보았다. 체자레는 그때마다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루드비히는 내가 볼 때마다 나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냥 계속 나를 보고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여러모로 관심을 받고 있다 보니 맵을 켜 보기에도 여의치 않은 환경이었다. 사실 켜는 게 무의미한 것 같긴 한데.

눈 뜨기 전이랑 똑같겠지, 뭐.

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자 체자레가 고개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무슨 걱정 있어요?”

너희들. 너희들이 문제고 걱정이다, 이 자식들아.

표정이 읽혔는지 체자레가 싱긋 웃었다. 나는 그 반반한 낯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전쟁은 도대체 어떻게 일으킨 거야?”

“어떻게라뇨?”

체자레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는 말없이 체자레를 노려보았다. 기절하기 전, 나는 전 세계가 빨갛게 물들어 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맵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체자레는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긴 했지만- 조심해서 말을 돌렸다.

“이 세계의 모든 곳을 전쟁터로 만들 거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거야?”

사실 이런 건 압실론한테 물어보면 줄줄 뱉을 텐데, 그는 여전히 마티어스와 싸우고 있었기에 체자레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히한테 묻는다 한들 녀석이 내 말에 대답해 줄 성정도 아니고. 체자레는 얄밉게 빙글빙글 웃더니 말했다.

“키스해 주면 얘기해 줄게요.”

……뭐?

나는 당황해 찻물을 머금은 채로 콜록거렸다. 루드비히도 당황했는지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가는 게 보였다.

“부담스러우면 내가 해도 되고요.”

“됐어, 싸움 끝나고 압실론한테 물어보지 뭐.”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팔짱을 낀 채 둘의 싸움이 끝나길 기다렸다. 둘은 방이 박살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엉망진창으로 싸우고 있었다.

“보호 마법이 걸려 있다.”

“어?”

“내 방 전체에 보호 마법이 걸려 있어서 웬만한 거로는 무너지지 않아.”

루드비히의 대답이 너무 자연스러워 나는 내가 혹시 생각을 밖으로 내뱉었나 했다. 대답한 게 루드비히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터였다.

“그렇구나.”

루드비히는 내 생각을 굉장히 잘 알아챘다. 종종 내 생각에 맞추어 대답도 해 줬는데, 그런 게 편하기도 했고 속을 전부 읽히는 것 같아 소름 끼치기도 했다. 나는 얘 생각을 전혀 못 읽어서 좀 억울하기도 했고.

“어떻게 전 세계가 전쟁 중일 수 있는지 궁금한가?”

“말하려고요?”

“이현이 알게 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달라지는 게 왜 없지? 내가 키스를 못 받는데요.”

체자레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조금 툴툴대긴 했어도 아주 진심은 아니었는지 의자에 늘어져 다소 지루한 낯으로 관망했다.

“궁금해. 말해 줘.”

“간단해. 각 도시에 서로의 병사를 둘씩 심어 두면 된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세나르도랑 그리체의 각 도시에 각 나라 병사를 둘씩 심어 두면 된다는 거야?”

“그래.”

“잠깐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승부가 갈릴 거 아냐?”

어떻게 계속 전쟁 중일 수 있다는 거지?

의아해하는 내 뒤로 압실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건 내가 설명해 줄게.”

뒤를 돌아보자 엉망진창이 된 압실론이 먼지가 묻은 뺨을 손으로 훔치며 숨을 헉헉대고 있었다. 더 뒤에는 카펫 위에 대자로 뻗은 마티어스가 보였다.

이겼구나, 압실론.

졌구나, 마티어스…….

아니, 얘는 넷 중에 레벨도 제일 높으면서 왜 진 거야? 역시 싸움은 힘보단 기술인가 봐.

“어, 어떻게 하는 거냐면…… 시스템을 수정하면, 돼.”

압실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는 연속해서 눈을 깜빡였다.

“뭐라고?”

“시스템.”

압실론이 엉망이 된 얼굴로 수줍게 웃었다.

“규, 규칙이라고 하는 편이 더 이, 해하기 쉬우려나? 이현도 시, 스템이라는 말을 썼던 것 같아서.”

아니, 그 말이 왜 거기서 나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여, 연구 많이 했다고 해, 했잖아.”

방 안의 온도가 빠르게 하강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 품 안에서 비비적거리는 압실론이 몹시도 낯설어졌다.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태어나더군.”

루드비히의 낮은 목소리가 내 위에서 들려왔다.

“태어나는 곳은 보통 그들의 집, 혹은 본적이지.”

“그 보, 본적을 각 도시로 옮겨 놓으면, 돼.”

그럼 죽더라도 다음 날이면 다시 태어나게 되니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하나를 더 둔 거고.

나는 내가 목도한 진실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유도 모르고 싸우고, 죽고, 다시 태어나 전쟁터로 나가는 거네.

끊임없이 리젠되는 게임상 몹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세상 속 이야기라 생각하니 두려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소름 끼쳐.”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당황해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루드비히와 압실론, 체자레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당황한 나를 보며 체자레가 쓰게 웃었다.

“이현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만들긴 뭘 만들어.

“아니 내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냥 접속 좀 안 한 것뿐이잖아…….

벌어진 일들이 너무 어이가 없어 나는 한동안 허탈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는 눈가를 문지르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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