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23화 (23/149)

#23

“그, 그만……. 하, 하지 마!”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해야 하네요.”

체자레는 내 손바닥에 깊게 입을 맞추더니 이내 손을 떼고 싱긋 웃었다. 갑작스레 자유를 되찾은 나는 어리둥절해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체자레, 황제 됐다더니…… 분신술 배워 왔어?”

“그럴 리가요.”

내 말에 체자레가 킥킥 웃더니 검지로 반대쪽 손바닥을 톡톡 건드렸다.

손을 보라는 건가?

나는 흐릿한 시야 속에서 어느새 두 개가 된 내 손바닥을 살폈다.

……침?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아주 작은 침이 손바닥에 콕 꽂혀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한 것처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침 끝에 마비나 수면 약이 묻어 있던 모양이었다. 뒤로 넘어가는 나를 마티어스가 단단히 받쳐 주었다. 나는 흐릿해지는 머릿속에서 체자레가 황제가 되기 전 주로 했던 일을 떠올렸다. 책사, 추적, 그리고…… 암살과 고문.

그래, 너 독 잘 썼지…….

“나, 죽어?”

가물가물해져 가는 정신 속에서 나는 힘겹게 물었다. 이제는 넷으로 증식한 체자레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암전된 귓가에 체자레의 웃음기 띤 낮은 저음이 흘러들어 왔다.

“박제가 된 이현도 예쁘겠지만…… 아무래도 저는 살아서 몸부림치는 걸 더 좋아하는 편이라.”

아, 맞다. 너 정말 개새끼였지…….

그렇게 나는 이곳에 와서 세 번째로 기절하게 되었다.

* * *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석양이 가라앉은 언덕. 언덕 사이로 조금은 서늘하면서도 부드럽게 부는 바람. 나는 체자레에게 고백받은 날의 꿈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과거의 내가 식사가 담긴 그릇을 들고 오두막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체자레, 일은 다 끝났어?”

오두막에서 막 나온 체자레가 피 묻은 장갑을 벗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며칠 전까지 군에 숨어들어 있던 적국의 첩자를 심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일단 필요한 건 다 얻었어요.”

체자레는 마티어스나 루드비히처럼 힘이 센 것도, 압실론처럼 마법적 재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지만, 타고난 외교적 재능이 있었고 암살과 고문에도 뛰어났다.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맺고 끊기에 능했으며 상대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알아내는 데 특출난 능력이 있었다.

“고생했어. 밥 가져왔는데! 같이 먹자.”

“둘이서요?”

“어……. 압실론이 같이 먹자고 했는데.”

“둘이서 먹어요.”

“응?”

“둘이서 먹자구요. 좋은 데 알아요.”

“어어……!?”

그렇게 말하며 체자레가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당황해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치던 나는 터지는 달풍선에 반항을 멈추었다. 막 첫 달 정산을 받았던지라 나는 요즘 이 게임에 영혼을 걸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체자레가 싱긋 웃었다. 나 또한 체자레에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현은 참 재밌어요.”

석양이 내려앉은 언덕에 나란히 앉아 빵을 우물거리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그냥 빵 먹고 있는 건데.

“빵만 먹어도 재밌니, 내가……?”

“재밌다기보다는 귀엽죠, 이 모습은.”

그렇게 말하며 체자레가 내 입술 옆에 묻은 빵 조각을 털어 주었다.

“내가 말하는 건 평소의 이현이에요.”

“평소의 나?”

“네.”

“평소의 내가 어떤데?”

AI가 말해 주는 평소의 나는 처음이라 나는 제법 기대하며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시청자들도 고백 각 아니냐고 두근거리며 체자레의 반응을 살폈다. 체자레가 길게 찢어진 눈이 사라지도록 휘었다.

“사실 나한테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잘 보이고 싶어 하잖아요.”

“…….”

“…….”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우리 체자레한테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나는 철렁하는 가슴을 내리누르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체자레가 바람에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요. 난 그런 이현이 좋은 거니까.”

뭐지? 이거 진짜 고백인가. 이렇게 쉽게 고백받는다고?

나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던 체자레 공략법들을 떠올려 보았다.

‘걔 앞에선 좀 신비로워 보여야 해요.’

‘속내를 보여 줄 듯 말 듯 굴면 성공!’

그런데 내가 그런 적이 있던가. 신비주의만큼 힘든 것도 없어서 반쯤 포기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얻어걸린 걸 놓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귓가에 파파팡 풍선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저번에 압실론한테 고백받았을 때 터진 달풍선이 몇 개더라.

“이것 봐.”

“응?”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데 체자레가 내게 말을 걸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지금도 다른 생각 하고 있죠?”

“아, 음……. 미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건 사실이었기에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멋쩍게 볼을 긁적이는 나를 체자레가 빤히 바라보았다.

“이현은 꼭 작은 신 같아요.”

“……신?”

신이면 신이지 작은 신은 또 뭔데.

“약한 듯 보이지만 이 세계의 흐름을 이끌어 나가고 있죠.”

날카로운 지적에 나는 뜨끔해 시선을 피했다.

“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데…….”

체자레가 그런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 미소는 꼭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모르긴 개뿔.

다행히 체자레는 교양 있는 참된 AI였고, 다른 주제로 대화를 옮겨 주었다.

“아마 난 평생 이현의 속내를 알지 못할 거예요.”

“그래……? 나 생각보다 단순한데.”

“그래 보이는 거겠죠.”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체자레나 압실론은 BL 게임 AI치고는 가끔 이렇게 섬뜩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당신이 나와의 관계로 뭘 얻고 싶은진 모르겠어.”

체자레가 내 턱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콩, 제 이마를 내 이마에 가볍게 댔다.

“어쨌든 나는 계속 당신이 궁금할 테고, 당신은 또 제법 귀여워서…….”

“…….”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어요.”

띠링!

[‘체자레 세나르도’에게 고백을 받았습니다. 승낙 시 연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1. 승낙 2. 거절 3. 보류]

“어…….”

나는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말꼬리를 늘였다. 역시나 채팅 창이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내 망설임이 느껴졌는지 체자레가 이마를 떼더니 내 코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마치 강아지의 축축한 코에 입을 맞추는 듯한 행위였다. 허락 없이 이루어진 스킨십에 나는 약간 얼이 빠진 상태로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답변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

체자레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며 말했다.

“당신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체자레 세나르도’의 고백이 자동으로 보류됩니다.]

나는 그저 지켜보고 싶은 거예요. 당신이 어떤 길을 갈지. 궁금하긴 해요. 의도하지 않은 상황이 왔을 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체자레의 목소리가 조각나 잘게 부서지고, 점차 다른 소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게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라는 걸 알아챘다.

“어, 언제 일어나?”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가깝고도 익숙했다. 나는 혼몽 중에도 차츰차츰 밖의 정보를 수집했다. 스모크 향과 스파이시한 향이 섞인 냄새, 내 이마를 짚은 손의 온기, 시선에서 느껴지는 뭉근한 감각, 두런두런 들려오는 특색 있는 목소리들.

“일어날 때가 됐는데……. 피곤했나 보네요.”

“지금 이현은 체력이 야, 약해. 약을 너무 도, 독하게 쓴 건 아니야?”

“지켜보지. 상태 자체는 나쁜 것 같지 않으니.”

“아니. 그냥 한 대 쥐어박으면 일어날 것 같은……. 아, 알았어. 안 해. 안 한다고.”

“…….”

나는 현재 요주의 인물 네 명이 내 침대를 둘러싸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눈을 뜨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조금 더 자는 척하기로 했다.

일어났다가 ‘일어났니? 이제 할 일을 하자.’라면서 나를 덮치거나 하면 어떡해. 자기들 사는 곳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었으니 분명 내게 원하는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이 게임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성인 모드에서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였는데, 그것도 현생에 타격 없을 때의 얘기지 지금의 내 경우는 아니었다. 분명히 설정해 놓았던 청소년 모드는 물 건너간 것 같고 자연스레 모든 제한이 풀린 성인 모드가 된 것 같은데…….

일단 계속 자는 척하다가 애들 다 가고 나면 그때 일어나야겠다. 그렇게 결심했을 때였다.

“그, 그런데 보다 보니까 계속 자, 잠들어 있는 이현도 괜찮은 것 같아.”

“……흐음, 제 생각도 그래요.”

“뭐, 일어나서 쫑알거리면서 신경 긁는 것보다 낫긴 하네.”

“동감이다.”

“……!”

아, 진짜 미친놈들아…….

이대로 있다간 잠든 박제가 될지도 몰랐다. 나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으음…….”

나는 다소 어색한 비음을 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트러져 있던 그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 나를 쳐다보는 네 쌍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조, 좋은 아침…….”

나는 서서히 넷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루드비히, 고민에 빠진 듯한 압실론, 왜인지 모르겠지만 화가 나 있는 마티어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체자레.

다행히 저 중에 진심으로 말한 사람은 압실론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내가 일어나 있다는 걸 알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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