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22화 (22/149)

#22

“그 재수 없는 낯짝은 여전하구나, 체자레!”

마티어스 크롬하트.

제 체격의 두 배는 될 법한 사람들도 휙휙 던져 버렸던 체자레가 처음으로 힘에 밀려 비틀거렸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마티어스가 체자레의 목을 노리고 검을 찔렀다. 체자레가 유연하게 몸을 휘어 피하며 마티어스의 옆구리를 살짝 베었다. 마티어스의 천 갑옷에 붉은 자국이 점차 진해졌다.

“감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군요.”

“헛소리하지 말고, 네 나라로 돌아가지 그래.”

“이젠 계속 여기 있을 겁니다. 제 제국이 될 테니까요.”

마티어스가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마티어스의 두꺼운 대검이 대리석 바닥을 산산조각 냈다. 체자레가 간발의 차로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면 몸이 반으로 쪼개졌을 터였다.

그러나 생채기가 나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는지 붉게 그어진 체자레의 턱 사이에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마티어스가 히죽 웃었다.

“네 묏자리가 되겠지. 가끔 한가할 때 가서 꽃이나 갖다 바치마.”

마티어스는 자신의 싸움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기사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국고로 지금까지 배때기 채워 놓고 비료라도 될 셈인가! 뒤질 때까지 검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다 뒈져!”

“예-!”

세나르도의 기사들과 싸우면서도 힐끗힐끗 마티어스와 체자레의 싸움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다시금 사기를 충전하고 제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싸움을 지켜보던 나는 다시금 루드비히에게 시선을 던졌다. 기사들이 벽을 만들고 있었기에 나와 루드비히가 있는 곳은 마치 태풍의 눈처럼 고요했다.

루드비히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져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내 앞에 선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압실론이 그런 루드비히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압실론, 루드비히 아직 치료 안 했어?”

나는 새파랗게 질려 물었다. 루드비히가 방금 독을 먹었음에도 팔자 좋게 싸움 구경이나 할 수 있었던 건 압실론이 루드비히의 독을 해독해 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법으로 경지에 오른 압실론에게 해독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2클래스 마법인 ‘해독’으로는 부족할지 몰라도 8클래스 마법인 ‘완전 치유’라면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아직 때, 때가 아니야.”

압실론은 내 질문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가 차서 인상을 쓰고 물었다.

“때가 그럼 도대체 언젠데? 뒤지고 나서가 때야?”

내 말에 압실론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현, 3년 전에, 잠깐 여기 온 적 이, 있었지.”

“무슨 소리야?”

“나, 난 느낄 수 있었어. 여기 어딘가에 네가 이, 있었어. 그래서 물어보기도 해, 했잖아.”

압실론이 말없이 입 모양으로만 글자를 만들어 보였다.

[거]

[기]

[서]

[뭐]

[해]

[?]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벼락같이 꽂혔다.

3년 전, 친구와 거나하게 마시고 가상 현실 게임 기계에 접속해 슈팅 게임을 한 날.

화면 가득 메워져 있던 붉은 글씨들이.

그게 압실론이 한 거였다고?

내 첫 친우였던 압실론의 얼굴이 더없이 낯설어 보였다. 인지하지 못하는 공포에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때는 처음이라 실수를 했어. 호, 혹시 네가 잘못될까 봐 힘 조절을 해, 했었거든.”

게임 기계에 스파크를 냈던 게 너라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그건 현실 세계의 일이잖아.

고작 AI일 뿐인 네가, 도대체 뭘. 어떻게.

“우, 우린 네가 이 세상에 제 발로 드, 들어올 날만을 기다렸어.”

압실론이 내 손을 덥석 쥐었다. 압실론의 붉은 눈동자가 광기에 젖어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그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덫에 걸린 토끼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 다신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그물을 친 뒤 마, 말이야.”

압실론이 희열에 차 나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압실론의 모습이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압실론의 목소리 뒤로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수많은 알람이 울렸다. 그것은 마치 만원 지하철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재난 경보음과 비슷했다.

[00:00]

[전쟁 유예 기간 종료.]

[세나르도국의 황제 ‘체자레 세나르도’가 그리체에 선전 포고를 선포했습니다! 전쟁 유예 기간 내에 사태를 수습하지 못해 전쟁이 발발합니다!]

[세나르도 국민이 그리체에 가지는 적대감과 호승심이 20% 상승합니다.]

[그리체 국민이 세나르도 국민에 가지는 적대감과 호승심이 20% 상승합니다.]

[현재 세나르도국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도시는 ‘0’개입니다.]

[현재 그리체국에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도시는 ‘1(수도 레드먼드)’개입니다.]

[전쟁 중인 도시에서는 자국민의 호승심과 적대감이 10% 증가합니다.]

[‘수도 레드먼드’에 거주하는 그리체 국민들의 불안감이 10% 증가합니다.]

[‘수도 레드먼드’에 거주하는 그리체 국민들의 충성심이 10% 증가합니다.]

[이제 도시 안에서 ‘민병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마지막 시스템 알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몰입감을 위해 전쟁 중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도시에서의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창, 보고 있는 거야?”

나는 화들짝 놀라 창을 종료했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여전히 압실론은 내 손목을 쥐고 있었다.

“너 뭐야.”

“…….”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5년 내내 매일 너와 함께한 세월들을 보, 복기했어.”

“…….”

“네, 네가 사는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전쟁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 가야 하지?”

압실론이 내게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준비는 끄, 끝났어.”

압실론의 또렷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곳을 전쟁터로 만들 거야.”

드물게 그가 더듬지 않고 말을 끝냈다. 나는 그로써 그가 이 문장을 긴 시간 동안 연습해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AI에 불과했던 게임 캐릭터들이, 내가 방치한 사이 괴물이 되어 있었다.

얘네는, 진짜 X발 개미친놈들이었다.

Chapter 2. 우당탕탕 감금일지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본 적 있다. 아름다운 신도 많이 나오고 아름다운 인간도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유독 예뻐서 인생이 기구해진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헬레네다. 파리스와 그녀의 구혼자들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는 걸 무척 흥미롭게 봤었는데…….

내가 X발 헬레네라니.

“너 그 말 연습했냐?”

“응…….”

압실론은 다시 수줍어져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 미친 새끼들을 어쩌면 좋지?

하필이면 다 계획이 있는 이 미친놈들을 어쩌면 좋냔 말이야.

게임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걸 응용해 로그아웃을 방해하는 AI라니.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혼란을 틈타 달리기 시작했다. 압실론은 나를 잡지 않았다. 그저 차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은 곳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복도를 향해 달리며 읊조렸다.

“맵 켜 줘.”

<‘맵’ 기능이 켜졌습니다. 10분간 ‘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은 캐시: 30,600원>

나는 맵을 힐끗힐끗 보며 기사들이 없는 쪽으로 달렸다. 다행히 맵은 삼천 원의 값을 해 줬다. 나는 정원까지 나가는 데 성공했다.

까마득한 벽을 바라보던 나는 인적 드문 수풀로 들어가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다. 공포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혀 왔다. 그래, 이게 공포 게임이지 뭐가 공포 게임이겠어.

맵을 터치한 채 손가락을 모으자 맵이 점점 축소되었다. 수풀에서 황궁 전체 맵으로, 황궁에서 수도로, 수도에서 제국으로, 세계로. 구 형태의 맵을 바라보던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수도를 중심으로 전쟁 중임을 뜻하는 빨간 점들이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해전도 일어나고 있는지 육지뿐만 아니라 해상까지 붉은 점이 알알이 퍼져 있었다.

진짜 작정했나 봐, 얘네…….

나는 더 볼 수가 없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어떡하면 좋지. 어떡하면…….

몸을 덜덜 떨며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

새파랗게 질려 뒤를 돌아보자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해사하게 미소 짓는 체자레가 보였다.

“어디 가려고요? 이현, 내가 보고 싶었다고 했잖아요.”

나는 턱을 덜덜 떨면서 그를 피해 점차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이번엔 다른 누군가와 몸이 부딪혔다. 타오르는 열기가 느껴지는 붉은 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화상을 입을 듯한 시선으로 마티어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핏방울이 튄 뺨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지르며 내게 퉁명스레 말했다.

“튀려고?”

“아, 아니. 그보다 너희…… 싸우고 있지 않았니? 계속 싸우게 난 비켜 줄게…….”

나는 소심하게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싸움을 종용했다.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마티어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하, 숨을 내뱉었다. 잘 갈린 도끼날이 빛을 받아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났다. 어디선가 불이 났는지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희미한 피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저 멀리서 검이 교차되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싸움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요.”

내 손을 잡아챈 체자레가 나를 훅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나는 체자레의 품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깊은숨을 쉬는 체자레의 행동에 소름이 일었다. 목덜미에 이를 세우고 잘근 깨무는 행위가 마치 뱀이 목덜미에 독니를 박아 넣는 것처럼 느껴져 소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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