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21화 (21/149)

#21

“아니, 근데 진짜 급한 일이 있거든요. 내가…….”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잔을 비우기 전에는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끝납니다.”

아니, 그 한 모금을 마시면 안 된다고! 너네는 누구 편이야?

답답한 마음에 온갖 아니시에이팅을 시전했으나 그들의 태도는 강경했다. 루드비히에게 얘네 좀 치워 달라고 눈짓하려고 했지만, 기사들의 떡대가 너무 좋아 까치발을 들어도 눈 한 번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특히나 세나르도국의 사신단들은 전부 검은 로브를 입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 떼 같았다.

저게 외교를 하러 온 건지, 전쟁을 하러 온 건지.

없던 무대 공포증도 생길 것만 같았다.

“야, 루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루드비히에게 약에 대해 소리치려다 말을 멈추었다.

신하들이라면 몰라도 타국의 사신들까지 있는 연회장에서 배신자가 바로 황제의 옆에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게 괜찮은 걸까. 혹시나 얕보이지 않을까.

고작 게임인데 왜 이렇게까지 과몰입해서 생각하냐면, <소년들>은 원래 연애만큼이나 외교가 중요한 게임이었다. AI 수준이 높은 만큼, 그들에게 임하는 태도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했다.

나는 어땠냐고?

말해 뭐 해. 방송 당시 내 별명들이 살아 있는 정치외교학과요, 강동구 서희였다.

어차피 게임 속인데 자존심을 부리고 싶지도 않았고, 재밌게 방송하기가 모토다 보니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외교가 그런 것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괜히 중요한 자리에서 허세를 부리거나 쓸데없이 입을 털어 정보를 누설하는 일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이 망설여질 수밖에 없었다.

체자레 이 미친놈은 왜 나라를 만들어서 나를 이렇게 피곤하게 해.

여기만 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기사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루드비히가 비키라 명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루드비히가 내게 손짓했다.

“이리 와.”

나는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폐하, 안 됩니다! 연회 첫 술잔을 들기 전에는 상석에 아무도 들이면 안 되는 게 법도입니다!”

돌아볼 것도 없이 파블로 백작이었다. 자신의 공든 탑이 무너질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붙잡기 전에 잽싸게 루드비히에게 뛰어갔다.

더 이상의 고구마는 없었다.

이게 만약 방송이었다면 시청자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터였다. 작작 끌라고. 나는 망설임 없이 루드비히의 각 잡힌 셔츠를 잡아당겨 내게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겨우 루드비히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안과 파블로가 작당하고 네 술잔에 약을 탔어.”

내 말을 들은 루드비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못 믿는 건가?

“진짜야. 모함하는 거 아니고, 진짜라고. 내가 똑똑히 봤어.”

나는 억울함에 돌쇠 모멘트로 온 힘을 다해 어필했다.

“그게 탈출을 건 비밀이었나?”

“……그래.”

“그런데 왜 알려 줬지?”

나는 어이가 없어 루드비히를 노려보았다.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네가 불쌍해서 말해 줬다, 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루드비히에게 팩 쏘아붙였다. 루드비히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오늘따라 선명한 색을 띤 입술이 열렸다.

“……이현.”

“왜.”

“어쭙잖은 동정은 하는 게 아니야. 평생 애정도 구경 못 해 본 놈들한테 동정을 던져 주면 인생이 꼬이게 되거든.”

“……뭐?”

“하지만 넌 동정의 이상의 감정을 우리한테 적선하듯 던져 주고 떠났지.”

루드비히가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내려다보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얘 벌써 취했나.

술 처먹지 말라니까 뭔 개소리를 하고 있어.

며칠 내내 불면으로 고생하고 4층에서 뛰어내려서 와 줬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이런 거라니. 나는 한껏 가라앉은 기분에 혀를 찼다.

“뭐가 그렇게 개 같아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말해 줄 거 다 해 줬어.”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마시면 그게 등신이지. 그 등신에겐 더 이상 볼 일 없었다.

“넌 우릴 버렸지만, 우리는 널 버리지 못해.”

루드비히가 내 등에 대고 나직이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뭘 연구했을까.”

“아까부터 무슨 개…….”

인상을 찌푸리며 뒤돌아선 나는 그대로 몸을 굳혔다.

루드비히가 포도주 잔을 제 입술에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네가 이 세계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지.”

내가 막을 새도 없이 루드비히는 잔을 기울여 순식간에 포도주를 넘겼다.

“너 이 미친……!”

목울대가 몇 번 움직였다. 이제 은잔에는 약간의 포도주만이 고여 있을 뿐이었다. 언뜻 본 은잔의 안쪽이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루드비히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은잔을 떨어트렸다.

탕, 타앙, 탕…….

추락한 은잔이 계단을 타고 구르는 소리가 홀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잔 안에 남아 있던 액체들이 새어 나와 하얀 카펫을 붉게 물들였다.

20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두 침묵에 잠겼다. 숨 막히는 고요 속 루드비히가 거센 기침을 터트렸다.

“쿨럭…….”

손으로 애써 가리긴 했지만,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보았다. 새하얗게 질려 피를 토하고 있는 루드비히를.

“……!”

아니, 미약이랬잖아. 독약 아니랬잖아.

나는 무너져 내리는 루드비히에게 달려가 그를 받았다. 진짜로 독을 먹은 건지 평소에 기댈 때와는 달리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묵직했다.

“폐하께서 습격당하셨다-!”

“홀을 폐쇄해-!”

“신관을 불러!”

기사들이 동분서주하며 날뛰었다. 기사들 전부가 칼을 빼든 탓에 홀 안의 공기가 포도주의 단내와 비릿한 쇠 냄새로 가득 찼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불안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말투로 미루어 보아 루드비히는 분명 이 안에 독이 있는 걸 알고 있었다.

날 붙잡겠다고 이 독을 먹었다고? 대체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데.

파블로 백작이 슬슬 눈치를 보며 도망갈 채비를 했다. 나는 희게 분노해 파블로를 손가락질하며 크게 외쳤다.

“폐하를 시해한 범인이 도망간다! 잡아!”

내 말에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파블로를 향해 달려갔다. 파블로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훈련한 기사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 아냐! 난 아니야!”

기사 하나가 파블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어깨를 베어 내기 직전, 로브를 쓴 남자가 파블로에게 접근해 기사의 칼을 쳐 냈다.

“……!”

기사의 칼이 공중에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기사는 반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텅 빈 손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칼을 놓친 순간 기사의 자격은 포기한다고 봐도 되는 거지.”

남자가 칼의 손잡이로 기사의 가슴 부분을 콱 찍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은색 갑옷이 형편없이 우그러들었다. 기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파블로는 자신의 백마 탄 왕자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바라보았다.

“누, 누구십…….”

로브를 입은 남자가 파블로의 말에 키득거렸다.

“뭘 모르는 척하고 그러십니까. 이젠 그럴 필요 없는데요, 백작.”

“예……?”

남자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시원하게 올린 금색의 머리칼과 가을 아침을 닮은 푸른 눈동자. 호리호리해 보이지만 전혀 왜소하진 않은 길고 탄탄한 몸. 그는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체자레……?”

<소년들>의 네 번째 공, 체자레 세나르도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당황해 얼떨결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말에 답하듯 체자레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들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오랜만이에요, 이현. 보고 싶었어요.”

조금 전 파블로에게 보인 미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한 미소를 띠고 그가 말했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평소보다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아니, 나도 반갑긴 한데, 대체 왜 거기서 걔 편을 들고 있는 건데……?

내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체자레가 루드비히를 검 끝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약해져 있는 지금이 기회다-! 황제의 목을 쳐라!”

“예-!”

체자레의 명령과 동시에 사신단이 로브를 벗고 달려들었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나니 그들은 다 한체격 하는 기사들이었다. 그래서 로브로 가린 모양이었다. 그냥 옷을 입어도 몸이 좋은 사람은 티가 나니까.

“전쟁이다!”

“세나르도 국왕이 제국에 전쟁을 선언했다-!”

“봉화를 울려-! 젠장! 지원이 필요해!”

사교의 장이어야 할 홀은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체자레는 전장의 중심에 서서 자신에게 덤벼드는 기사들을 검째로 날려 버렸다. 하나씩 쓰러뜨릴 때마다 체자레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지고 있었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대체 루드비히랑 언제 그렇게 철천지원수가 된 건데?

체자레가 자신의 두 배는 될 법한 기사의 관자놀이를 팔꿈치로 가격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시하기 그지없네요. 그리고 이제 국왕 아니고 황제인데.”

“뭐 하는 거야, 이 버러지들아!”

돌연 벼락같은 고성을 외치며 누군가가 체자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즐리 베어 같은 몸을 하고는 민첩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저 몸에 저 민첩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을 딱 하나 알았다.

“오랜만이네요, 마티어스. 별로 반갑진 않지만요.”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