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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20화 (20/149)

#20

나는 이안 때문에 결심했던 말을 좀처럼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해.”

“그러니까, 음…….”

나는 고민 끝에 이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둘이 얘기하게 잠깐 자리 좀 비켜 줘.”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안의 미간이 삽시간에 찌푸려졌다.

“싫은데요.”

“그래, 잠깐이면 되니까……. 뭐?”

“싫다고 했습니다.”

내 낯짝을 뒤집어쓰고 있는 녀석은 생각보다 더 뻔뻔한 놈인 듯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혀를 차고는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내 명령은 듣지 않아도 루드비히의 명령은 듣겠지.

그러나 루드비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안은 괜찮으니 그냥 이야기해.”

“…….”

바보 같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잘 정돈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뭐?”

“네 옆의 걔가 배신자인데 괜찮긴 뭐가 괜찮냐고.”

루드비히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

“걔 배신자라고. 안 믿기면 품 뒤져 보든가. 파블로가 준 약물이 있을 테니까. 어쩌면 벌써 먹였을지도 모르겠네.”

네가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 걸 보니까.

신랄한 비꼼에 루드비히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어.”

“폐하, 저 말을 정말 믿으시는 건 아니지요?”

이안이 루드비히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루드비히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총기 있던 눈빛이 점차 흐려지는 걸.

“……아니. 믿지 않는다.”

아, 이미 먹었구나.

이제 그 눈동자는 빛이 들어찬 자수정처럼 아름답게 빛나지 않는다. 구운 생선처럼 희게 변했을 뿐.

막지 못했다는 허탈감이 차올랐다.

“그러시겠지요.”

이안이 며칠 전의 나처럼 책상에 걸터앉아 손끝으로 루드비히의 턱을 쓸었다. 루드비히는 멍하니 그런 이안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밀림을 유영하는 맹수처럼 패배를 몰랐던 루드비히는 이제 없었다.

“사랑하는 건 나뿐이라 말하세요.”

“사랑하는 건 너뿐이다.”

“잘했어요.”

만족스럽다는 듯 이안이 눈을 휘었다. 그리고는 표독스러운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나는 그 시선에 몸을 움찔했다.

“저를 모독한 저 사람을 처리해 주세요.”

“그러지.”

그 말에 루드비히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당황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아, 아니. 야, 루드비히. 정신 차려 봐.”

“난 제정신이다.”

루드비히가 성큼성큼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얼마 가지 못해 루드비히에게 멱살을 잡혔다.

“컥. 야, 미, 쳤어?”

루드비히가 한쪽 손으로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나는 허공에 떠서 다리를 버둥거렸다.

뒤늦게 압실론을 불러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지만, 숨이 막힌 탓에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았다. 정말 죽을 것 같아 나는 루드비히의 가슴 중앙을 세게 찼다.

“윽…….”

갑작스러운 반동에 루드비히가 비틀거리며 나를 놓쳤다. 나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루드비히의 뒤에 서서 하임리히법을 행했다. 이미 약이 흡수되어 소용없을 수도 있겠지만, 뭐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뱉어! 약 뱉어, 미친놈아!”

루드비히는 반항하지 못한 채 나의 하임리히법을 받아 내었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옆에 이안이 하얗게 질려 내 행동을 말리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팩 뿌리쳤다.

“꺼져!”

그러자 이안은 정말 종이 인형처럼 팔랑이며 저 멀리로 날아갔다. 계속해서 루드비히의 명치를 세게 치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걸 하나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강했었나.

나는 시체처럼 축 처져 있는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드비히가 이렇게 약했었나?

나는 루드비히의 창백한 뺨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파스스, 내가 만진 곳부터 루드비히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처럼.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던 이안도, 황궁도 무너져 내렸다. 나는 모래 속에 파묻힌 채 비명을 질렀다.

모래가 코와 입으로 마구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짜고 단 맛이 났다. 모래가 눈까지 뒤덮기 직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허어억!”

오랜 시간 잠수한 것처럼 폐가 공기를 마시기 위해 크게 부풀었다 수축하길 반복했다. 어느 정도 진정한 후 보인 건 압실론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이, 이현, 괜찮아? 무슨 꿈을 그렇게 허, 험하게 꿔.”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아야 했다.

꿈을 꾸며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는지 아직 다 굳지 않은 팩의 일부가 흘러내려 코와 입을 적시고 있었다. 그래서 모래 꿈을 꾼 모양이었다.

하녀들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하며 뜨끈한 수건으로 팩을 닦아 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데리러 와, 왔는데 팩을 하다가 자, 잠들어 있다고 해서. 요, 요즘 이현 잠 못 잤잖아. 그래서 조금 자라고 놔, 놔뒀어.”

“연회는, 연회는 시작했어?”

내가 다급하게 묻자 압실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아, 다행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아주 잠깐 잠든 모양이었다. 꿈을 너무 버라이어티하게 꿔서 오래 잔 줄 알았는데.

“그런데 고, 곧 시작할걸.”

“뭐?”

압실론이 벽난로 위의 자명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계의 분침은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미친……!”

나는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압실론도 얼떨결에 같이 옆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 이현, 왜 그래? 조, 조금 늦어도 돼.”

안 돼, 이 새끼야……!

“허억, 아, 압실론. 포도주는 언제쯤, 헉, 마시지?”

“보통 연회가 시, 시작할 때, 마시지……?”

그래.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띠링! 띠링! 띠링! 나는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울리는 체력 경고음을 무시하고 내 최대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연회장 어디야?”

“1, 1층. 홀 전체.”

“더럽게 머네!”

여기는 4층이었고, 황궁 복도는 끔찍하게 넓었다. 심지어 내 체력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 못 막으면 어떡하지.

“빠, 빨리 가 봐야 하는 거야?”

“어. 돌겠네 진짜! 어떡하지.”

“그럼 자, 잠깐만.”

압실론이 내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넣어 단숨에 나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혼잣말처럼 주문을 읊조렸다.

아, 맞다. 얘 마법사지.

순간 이동이라도 해 주려나 싶어 얌전히 안겨 있는데, 압실론이 나를 꽉 끌어안은 채……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꽈, 꽉 잡아.”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나는 불분명한 비명을 지르며 압실론을 더 꽉 끌어안았다. 자이로드롭을 타는 것처럼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나는 듯도 했다.

압실론은 나비가 꽃 위에 내려앉듯 정원 풀밭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그사이 나는 사흘은 늙어 버린 기분이었다.

“고마워. 이제 내려, 줘…….”

압실론은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 나를 안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달리기 시작했다. 신속의 장화 주문이라도 걸었는지 내가 홀로 달리던 것보다도 빠르게 시야가 이지러졌다.

“아냐. 내, 내가 데려다줄게.”

“아, 아니. 잠깐……!”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빨리 도착할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이런 공주님 안기 자세를 한 채로 신하들 다 모인 연회실에 가는 거야?

달풍선 천 개를 준다 해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미션이었다. 이걸 돈도 안 받고 해야 한다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날 듯이 가볍게 달리는 압실론의 옷을 붙잡고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이동은 안 되는 거야?”

“제한 마법, 걸려 있어서.”

아, 맞다.

압실론에게 안겨 있는 사이 연회 홀이 훅 가까워졌다. 나는 내려 달라는 표시로 압실론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척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내려 줘. 제발……!

“다 왔어.”

그러나 압실론은 기어코 나를 안고 연회 홀 안으로 들어섰다. 200명이 넘는 신하들과 사신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우리들의 기행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지금이 방송 중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상석에 앉아 있던 루드비히 역시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은으로 된 포도주 잔을 입에 댄 채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상석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루드비히의 모습을 보자 조금 전 꿨던 꿈이 생각났다.

나는 쪽팔림이고 뭐고 버둥거리며 압실론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루드비히를 향해 달리며 소리쳤다.

“루드비히! 멈춰!”

“물러서십시오!”

내가 거침없이 달려가자 루드비히의 밑에서 그를 지키던 기사들이 나를 막아섰다. 암살 위험 때문인 듯했다.

“아니, 진짜 위험한 애는…….”

“물러나십시오. 경고했습니다.”

나보다 머리 한 통은 더 큰 남자 서넛이 나를 둘러쌌다. 다급했던 나는 잠시 발끈했지만 그들의 모습이 생각보다 위협적이라 나는 순식간에 물 빠진 해파리처럼 쪼그라들었다.

아니, 진짜 위험한 애는 황제 옆에 있는 쟤라고요!

“아니, 나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더는 안 됩니다.”

“아니, 왜요?”

“황제가 연회를 시작하기 위해 술잔을 들었을 때 상석에 다가가는 행위는 황권에 대한 기만으로 간주됩니다. 황족 모욕죄로 즉결 처형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권위고 기만이고 지금 너네 황제가 위험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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