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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9화 (19/149)

#19

셔츠를 쥔 루드비히가 서슬 퍼런 눈길로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역시 다 거짓말이었군, 하며 내 목을 조를 기세였다.

“아니, 했는데! 하긴 했는데! 사람이 진도라는 게 있는 법이잖아. 어? 나는 원래 천천히 하는 게 좋아.”

“5년으로 부족했나.”

“아니, 부족하진 않았는데…… 아! 잠깐만!”

나머지 셔츠 단추까지 뜯어 버릴 기세에 화들짝 놀란 나는 셔츠를 쥔 루드비히의 손을 덥석 감싸 쥐었다. 그러자 손은 더 내려가지 않았다. 장애물을 넘는 뱀처럼 구불거리며 몹시도 자연스럽게 셔츠 사이로 들어갔을 뿐.

미친……!

갑작스러운 정조의 위기에 나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처럼 뻐끔대는 사이, 쇄골을 지분대던 손가락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 사이의 선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가슴을 막 덮으려던 찰나였다. 브레이슬릿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나 싶더니 이내 방 안을 환히 밝힐 만큼 밝은 스파크가 튀었다.

파지지직!

“……!”

스파크는 점차 작아지더니 이내 루드비히의 손안으로 스며들었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뭐지?

청소년 모드의 철퇴인가?

<소년들>은 청소년 모드와 성인 모드의 선택이 가능했기에 내 생각은 제법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저번에 내가 본 건 분명 피였는데. 성인 모드에서만 나오는.

대체 무슨 모드가 적용되고 있는 건지 파악할 수 없어 고민하는 사이 스파크가 세 번 더 튀었다. 루드비히가 날 만지려고 세 번 더 시도했다는 소리였다. 타는 냄새와 비릿한 쇠 냄새가 진동했다. 루드비히가 입술을 짓씹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바, 반칙은 안 돼.”

어둠을 뚫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동시에 목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압실론이 루드비히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리 비켜.”

나는 민망한 마음에 루드비히를 팍 밀치며 일어났다. 꿈쩍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루드비히는 생각보다 순순히 나를 놓아주었다.

“약속, 했잖아.”

“……알고 있어. 잠시 흥분했을 뿐이야.”

나는 애써 셔츠를 추스르며 뒷걸음질 쳐 루드비히와 간격을 뒀다. 대화로 미루어 보아 시스템의 영향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브레이슬릿의 영향인 듯했다.

정말 괴상한 기능은 다 넣어 놨구나.

그 덕분에 목숨 한 번, 정조 한 번을 지키게 되긴 했지만, 별로 고맙지는 않았다.

애초에 브레이슬릿이 없었으면 될 일이었으니까.

“치, 치료는 아, 안 해 줄 거야. 약속을 어긴 건, 루드비히니까.”

“……상관없어.”

“나, 나가자, 이현.”

압실론이 내 셔츠 깃을 잡아끌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나가기 직전, 나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의 불빛에 루드비히의 윤곽이 아까보다는 더 선명히 보였다.

어둠 속 루드비히는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놓친 사냥감이 떠나간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는 포식자처럼.

* * *

무섭진 않냐, 같이 자 줄까 수작을 거는 압실론을 보내고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단추가 떨어지고 죄 구겨진 셔츠를 보고 하녀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내가 씻고 돌아온 사이 원래대로 꿰매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말끔하게 꿰매진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다 푹 한숨을 쉬었다.

어떡하면 좋지.

오늘 하는 짓을 보니 이대로 루드비히가 약을 먹게 놔두는 게 최선의 선택처럼 느껴졌다. 이안에게 마음을 빼앗기거나 백치가 된다면 나를 건드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뭔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주 작은 거스러미들이 끝부분만 살짝 올라와 있는 기분이었다.

힌트라도 줘야 하나. 파블로를 조심하라고? 아니면 이안을 조심하라고?

그렇게 하면 루드비히는 망설이지 않고 이안을 죽이겠지. 사실 이안은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았는데…….

물론 황제를 조종하는 일에 동참한 이상 죽어 마땅하긴 했다. 한데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이가 평생 이용만 당하다가 죽는다는 게 어쩐지 찜찜했다.

“하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하고 침대에 털썩 누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밤새도록 고민하다 수면에 도움을 주는 향이 다 타고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물들 때가 되어서야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결국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체자레의 환영 연회 날이 밝았다.

집무실에 다시 찾아가기에는 좀 그래서 [정말 알고 싶지 않냐]라고 서신을 몇 번 보냈는데 그때마다 [알고 싶지 않다]라고 적힌 답장만 받았다.

그사이 나는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첫날에는 그래도 푸르스름해진 새벽하늘을 보고 난 뒤 잠들었다면, 이제는 아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파블로와 함께 식사하지 못하게 된 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식사를 한 번이라도 같이했다면 경멸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해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을 테니까.

하녀들은 말은 안 해도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는 듯했다. 오후여도 내가 잠든 것 같으면 굳이 깨우지 않았고, 새벽에 깨어 있는 내게는 간단한 간식거리나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대화는 없어도 내적 친밀감은 쑥쑥 차올랐다.

그사이 나는 압실론과 체스를 두거나 마티어스에게 간식을 가져다주었다. 입맛도 없어서 내 식사며 간식을 거의 전부 다 가져다주었더니 여전히 발끈하고 툴툴거리긴 해도 가끔 먼저 말을 거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허 언헤하히 해햐 해혀?”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해요?

나는 내 얼굴 위에서 단단하게 굳은 팩을 가리키며 물었다. 하녀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3분이라는 걸까. 30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원래 하녀들은 내가 오후까지 자도록 내버려 두는 편이었으나, 오늘은 칼같이 새벽녘부터 들어와 나를 욕실에 집어넣었다.

따뜻한 물에 온갖 꽃향기가 나는 입욕제를 넣어 몸을 박박 닦고, 향유로 온몸을 마사지하고, 밀기울과 꿀을 개어 넣어 얼굴에 팩을 했다.

많은 이들이 달라붙어 오랜 시간 공들인 만큼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하도 자지 못해 퀭했던 눈 밑의 검은 자국도 많이 옅어졌고, 눈 밑에 브러시가 몇 번 왔다 가자 그것도 곧 감쪽같이 사라졌다.

머리 인두로 머리칼을 곧게 펴고 평소보다 화려한 옷차림을 하자 내 모습도 제법 봐 줄 만했다. 나는 신기해하며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문이 열렸다.

“어, 왔어?”

압실론이 문밖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오, 오늘 정말 멋지다, 이혀언.”

“…….”

그렇게 말하는 압실론의 외모는 나를 압도하고 있었기에, 나는 녀석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압실론은 평소와는 달리 난색의 아이보리 셔츠와 초록색 바지를 입고 칼라가 긴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차갑고 냉정한 인상이 옅어지고 숲속의 엘프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압실론이 너무 근사했기에 오늘은 나도 좀 괜찮은 편 아닌가 생각했던 수 초 전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 어떻게 AI를 이기겠어.

나는 낮게 한숨을 쉬며 압실론이 열어 주는 문 사이로 몸을 빼냈다. 복도를 걷는데 내 옆에 따라붙은 압실론이 물었다.

“여, 여기 파티 홀 가는 길 아, 아닌데.”

“나도 알아. 그 전에 루드비히 좀 만나려고.”

“루, 루드비히는 왜?”

“만나서 할 얘기가 좀 있어서.”

“으응. 그, 그렇구나.”

나는 기나긴 복도를 걸어 루드비히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후우.”

나는 문 앞에 서서 크게 두어 번 심호흡을 했다. 언제 봐도 압도당하는 높이의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루드비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지 자연스레 주먹이 쥐어졌다.

“가, 같이 들어가 줄까?”

“아냐. 고마워, 압실론.”

내 긴장감을 알아챘는지 압실론이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이윽고 기사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집무실 안의 환한 빛이 앞다투어 내게 쏟아졌다.

나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빛을 정면으로 받아 내며 집무실 안으로 발자국을 디뎠다.

고민은 끝났다.

이제 결판을 낼 시간이었다.

집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나는 불시에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

루드비히는 그날처럼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라면, 그 곁에 이안이 있다는 것일까.

나는 당황해 이안을 손가락질했다.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시종이니까.”

이안에 대해 물었는데 루드비히가 대신 답했다.

“시종이라고?”

“그래.”

“어, 언제부터 시종이었는데?”

“처음부터 내 시종으로 들어왔다. 그건 왜 묻는 거지?”

“어?”

계속되는 질문이 의심스러웠는지 루드비히가 대답은 않고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일정 당겨져서 이미 약 먹은 거 아니야?

나는 나도 모르게 성큼성큼 다가가 루드비히의 뺨을 쥐었다. 그리고는 햇빛에 그의 눈동자를 비추어 보았다. 눈꺼풀을 당기고 요리조리 살피는 행위에 루드비히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지?”

“하, 하하.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 같아서.”

다행히 눈동자는 평소처럼 맑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은 음모 같은 건 모른다는 맑은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뻔뻔스럽긴.

아니, 얘랑 파블로가 계략 꾸몄다는 거 알려 주려고 들어왔는데 집무실에 같이 있으면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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