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7화 (17/149)

#17

파블로 백작이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나는 당장 뛰쳐나가 파블로의 얼마 없는 머리를 다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내리눌렀다.

“……위대하신 내무대신 각하께서도 못 하시는 걸 제가 어찌하겠습니까.”

“흥, 아주 주제 파악만 수준급이지.”

아무리 봐도 비웃는 것 같은 말투였는데, 파블로는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3년간 너는 쓰레기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도리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얻은 게 있지.”

“뭘 말씀하시는 건지…….”

“멍청하긴. 황제의 신뢰 말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파블로가 비열한 미소를 띠고 있을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파블로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안에게 건네주었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무색의 액체가 찰랑찰랑 잠겨 흔들리고 있었다.

“네 타액을 섞은 뒤 황제의 잔에 이걸 타라.”

“……독약인가요?”

“힘들게 구한 묘약이다. 최면 상태가 되어 일정 기간 동안 네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지. 미약으로 구분되니, 독에 내성이 있는 황제에게도 먹힐 거다.”

“……들킬 겁니다.”

이안이 바로 반박해 왔다.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파블로가 이안의 머리칼을 쥐었다. 고통스러운지 이안의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윽…….”

“들키지 않는 게 네가 할 일이지. 안 그런가?”

“……네. 죄송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제야 파블로는 이안의 머리채를 쥔 손을 놓았다. 그사이 머리를 잔뜩 뽑았는지 파블로의 손에서 이안의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나며 낙하했다.

저 새끼, 저거 지가 당하면 개지랄 떨 거면서.

작게 한숨을 쉰 이안이 약병을 들어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로 쏙 들어온 유리병이 햇빛을 받아 화사하게 빛났다.

“그런데 왜 하필 제 타액입니까?”

“뭐라?”

“황제의 복종이 필요한 거라면 각하의 타액을 섞는 게 더 나을 텐데요.”

“그건 네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예.”

나중에 꼬리 밟혔을 때 자기는 빠져나가려고 그러는 거겠지. 어차피 이안이야 자기 손아귀 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좋은 물건인데 진작 쓰시지 않고요.”

유리병을 몇 번 흔들어 보던 이안이 병을 자신의 품 안으로 갈무리하며 말했다. 파블로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백치가 될 확률이 있다.”

“……제가 말입니까?”

“멍청하긴. 황제가 말이다. 확률이 높진 않지만, 아무래도 정신계를 건드리는 거다 보니.”

“…….”

할 말을 잃었는지 이안이 꽉 다물었던 입을 슬쩍 벌렸다. 이안에게 위험 요소가 너무나 큰 일이었다.

“제가 말려도 소용없겠지요.”

“흥, 당연한 소리를.”

“……언제쯤이 좋겠습니까?”

“조만간 세나르도의 왕이 방문한다더군. 환영식을 준비한다 하니 그날이 좋겠어. 정신없을 테니 잔에 음료를 섞는다 해도 눈치채지 못할 거다.”

“……알겠습니다.”

“먼저 가 보도록 하지. 30분 뒤에 나와.”

“예, 들어가십시오.”

파블로가 멀어져 작아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안이 작게 읊조렸다.

“개새끼가…….”

나무 벽 뒤에 숨어 있던 나조차 흠칫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정도로 살벌한 음색이었다.

원랜 성격 좀 있나 보네.

다시 눈을 나뭇잎 사이로 가져다 대자 이안은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손등으로 문질러 식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든 이안이 고개를 들고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정확한 시선이었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하나?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수풀로 만든 벽 너머에서 나를 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금방 떠날 겁니다.”

“……?”

“그러니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망설이다 다시금 나무 벽으로 다가갔다. 혹시 눈동자끼리 마주치는 건 아닐까 겁에 질렸으면서도 나는 나뭇잎 틈새로 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안이 있던 자리엔 서늘한 바람만이 자리할 뿐,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귓가를 울리던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저는 금방 떠날 겁니다. 그러니 경계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말이 지금 떠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방금 백작은 이안을 제물로 삼아서 오래오래 해 먹을 생각이 만만인 것 같던데. 뭐라도 있는 건가.

설마 백작을 죽이려고? 아니면 루드비히를……?

온갖 막장 드라마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나는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루드비히에게 말해야 해.

* * *

황제궁 앞 정원에 다다른 나는 발걸음을 늦추었다. 체력 경고음이 떴던 것도 있긴 했지만, 다른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가 저 약을 먹는 게 과연 내게 나쁜 일일까?

만약 성공한다면, 나를 향한 루드비히의 관심은 자연히 떨어지겠지.

그렇다면 압실론을 꾀어내서 브레이슬릿을 빼고 궁 밖으로 나간다는 계획의 가능성이 생긴다.

만에 하나 잘못되어서 정말로 바보가 된다고 해도…….

“사실 나에게 나쁠 건 없지.”

정말이지 내게 나쁠 건 없었다.

오후 내내 고민하던 나는 석양이 가라앉고 어둠이 드리운 초저녁, 루드비히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아직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않은 채.

황제의 집무실 앞에는 가신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적어도 예닐곱 명은 되어 보이는 인사에 나는 당황해 쭈뼛거렸다.

“더 이상의 손님은 받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산처럼 쌓인 서류에 서명하며 가신들의 말을 듣던 루드비히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동시에 집무실 안에 있던 모든 가신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계속 나가지 않고 우물쭈물하자 루드비히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현?”

쭈뼛거리며 서 있던 게 나라는 걸 알아챈 후 루드비히의 안색이 확연히 달라졌다.

쓴 약을 먹고 사탕을 입에 문 아이의 표정이 이러할까.

한순간 루드비히의 주변까지 전부 밝아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민망함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띠고 루드비히를 향해 인사했다.

“아, 안녕, 루드비히.”

내가 집무실까지 제 발로 찾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루드비히가 눈두덩을 비비더니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내가 못 올 데 온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는데, 바빠 보이네. 나중에 올까?”

“……아니. 기다려.”

루드비히가 만년필을 툭 내려놓고 가신들을 돌아보았다.

“나머지는 내일 하지. 나가 봐.”

“……예.”

기다림이 무색해지는 축객령에도 가신들은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어지간히 무서운 황제인가 보네.

가신들의 태도로 루드비히의 인성에 대해 가늠하고 있는 새 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집무실에는 나와 루드비히만이 남게 되었다.

“어…….”

집요한 시선이 어쩐지 민망해 나는 팔뚝을 쓸어내렸다. 저녁이 되어 선선해진 집무실 공기가 어쩐지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자리를 정리한 루드비히가 이내 넓은 책상에 앉아 느른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꼭 맹수나 폭군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나는 괜스레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새 안색이 진짜 좋아졌네. 몸도 관리하는 것 같고. 내가 와서 그런 건가.

“요즘 마, 많이 바쁜가 봐.”

“체자레가 방문하기로 했다.”

“어, 그렇구나. 그런데 왜 바쁜 거야? 공작을 맞이해야 해서 그런가?”

“세나르도국의 왕이 되었으니까. 국빈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지.”

“와, 왕이 됐다고?”

“그래. 얼마 전에 칭제했으니 이젠 황제겠군.”

“…….”

넌 그런 말을 무슨 편의점에서 과자 사 먹듯이 하니…….

“아니, 걔가 어쩌다가 황제가 된 거야? 원래 공작이었잖아?”

“……사정이 있어서.”

“무슨 사정?”

“넌 몰라도 된다.”

무시하는 듯한 말에 나는 인상을 홱 찌푸렸다.

“……그것 때문에 온 건가?”

루드비히는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보고 싶었다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나.

이런 브레이슬릿 끼워 놓고 뭘 기대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루드비히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딱 맞는 기장의 바짓단이 위로 올라가며 발목이 드러났다. 루드비히가 내 발목을 빤히 응시했다.

“뭐야, 뭘 봐.”

“……그냥. 거기에도 뭘 더 끼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랄하지 마라.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나는 양손에 찬 브레이슬릿을 들어 보였다.

“이걸로 충분해.”

“흠.”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발목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루드비히의 태도에 나는 조용히 바짓단을 내렸다.

“아, 아무튼, 저기, 내가 아주 중요한 비밀을 알아 왔거든?”

“……무슨?”

“그냥 알려 주면 중요한 비밀이 아니겠지. 하지만 정말, 정말 중요한 비밀이야.”

나는 몸을 뒤로 빼며 고고한 체를 했다.

아무렴, 중요하지.

무려 네가 등신이 되거나 백치가 될 수도 있다는 정보인걸.

“뭔가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루드비히는 눈치 빠르게 내게 물어 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라는 게 뭐지?”

“……날 내보내 줘.”

“거절한다.”

방금 내가 한 말이 뇌를 거치긴 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빠른 거절이었다. 나는 인상을 팩 쓰며 쏘아붙였다.

“내 말 뭐로 들은 거야? 진짜 중요한 비밀이라니까?”

“어떤 것도 너보단 중요하지 않아.”

“……그게 네 목숨과 관련된 일이라고 해도?”

“그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전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로그아웃하고 싶어서 개수작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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