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6화 (16/149)

#16

“내가 만만하니까 이따위로 구는 거 아냐. 그렇지?”

“저는 교육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가르침을 주는 입장과 받는 입장에 위아래가 있는 건 당연한 겁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의무 교육 10년 가까이 받은 사람 앞에서 주름잡지 마시고요. 내가 거쳐 간 선생님들만 스무 명이 넘는데 넌 그중 최악이야.”

“……그렇다면 그분들께 좋은 가르침을 받지는 못하신 것 같군요.”

못 배워 먹었다는 말을 고상하게도 하는구나.

어차피 식사는 글러 먹었다. 나는 냅킨으로 거칠게 입가를 닦아 냈다.

“백작은 지금 내가 존나 만만하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아주 만만한 개, 아니, 쥐새끼 같겠네. 백작 입장에선.”

“……그럴 리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백작의 얼굴엔 ‘알고는 있나 보네.’가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마음먹는 순간 쫓겨나는 건 당신이야.”

“…….”

“5년 동안 루드비히가 결혼도 안 하고 나 닮은 애 하나만 지금까지 곁에 둔 이유가 뭐일 것 같아?”

백작은 대놓고 시선을 회피했다.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걘 아직도 나 좋아해.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백작일 텐데.”

“…….”

“전국 뒤져서 나 닮은 애 찾아다가 기어코 루드비히 옆에 앉혀 놨으면 상황 파악도 할 줄 아셔야죠.”

나는 파블로의 매끈한 머리를 툭, 밀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정말 머리가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럽네요.”

조금 전 제가 했던 말과 행동을 똑같이 돌려주자 파블로의 안색이 모욕감에 새하얗게 질렸다.

내가 받아친 말을 돌려주지도 못하겠지. 난 머리카락이 풍성하거든. 입술을 짓씹는 파블로를 보며 나는 승리자의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꾸르르륵.

“……?”

나는 고개를 숙여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다시금 배에서 큰 소리가 났다.

꾸르르르르륵.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양손으로 배를 감쌌는데 이번엔 더 큰 소리가 났다. 아니, 아까 라마즈 호흡은 백작이 했는데 왜 내 배에서 소리가 나는 건데.

게다가 이상하게도 살살 배가 아파 오는 게…….

“아, 아윽…….”

장이 꼬인 것처럼 배 속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배를 감싸 쥔 채 앞으로 몸을 숙였다.

사흘 밤낮을 굶다가 빈속에 고량주와 마라탕을 들이부은 듯한 감각에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아……!”

뭐야, 왜 이렇게 아픈데.

나는 아까와는 달리 창백해진 낯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숨을 크게 쉬는 것도 어려웠다. 온몸의 내장이 녹는 듯한 감각에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파블로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그의 앞에서 쓰러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 나가 봐야겠어.”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도중에 나가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파블로가 무어라 쫑알거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더듬더듬 벽을 짚다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그사이 배어든 식은땀을 식혀 주고 있었다.

나는 위태로운 걸음걸이로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걷다 코너를 돌자마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조금 전 떴던 상태 창을 다시 살폈다.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이 독을 감지했습니다.>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이 ‘정화’를 시작합니다.>

<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

나는 발랄한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했다. 창자가 녹는 듯 끓어올랐던 고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독이라니. 내가 독을 먹었다니. 그것도 이 브레이슬릿의 정화 효과가 아니면 저세상 갈 뻔한 독을.

머리끝까지 열이 받아 부들부들 떨던 나는 이내 뒤에서 들려오는 문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파블로가 무어라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쾅 닫았다.

닫힌 문에서 불어온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리며 눈을 찔렀다. 나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백작이 나간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후원이 있는 쪽으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몰래 그의 뒤를 따랐다.

후문을 박차고 나간 파블로는 옆과 뒤를 슬쩍 돌아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미로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정말 수상하군.

나는 간격을 두고 그를 미행했다. 그러나 미로가 워낙 구불구불하고 복잡했기에 나는 얼마 가지 않아 파블로를 놓치고 말았다. 끝없이 이어진 초록색 나무 벽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옆에 압실론이라도 있었다면 떠오르기 스킬이라도 쓰라고 멱살 잡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브레이슬릿만 없었어도 충분히 들키지 않고 추적할 수 있었다.

“아 씨…….”

누가 봐도 수상한 짓을 하려는 모양새였는데, 여기서 놓치는 건가.

나는 작게 혀를 차며 나무로 만들어진 수풀에 몸을 기댔다. 뭔가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주름진 미간을 꾹 누르며 고뇌하던 나는 이내 기쁨에 젖어 손뼉을 쳤다.

“아!”

방법이 있었다.

약간 피눈물 나는 방법이긴 했지만.

나는 잠시 망설이다 눈을 질끈 감고 단어를 내뱉었다.

“‘맵’ 켜 줘.”

<‘맵’ 기능이 켜졌습니다. 10분간 ‘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은 캐시: 33,600원>

내 말과 동시에 내 시선 옆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맵’은 나를 중심으로 주변의 지도를 볼 수 있는 기능이었다. 캐시 아이템으로 10분에 3,000원이라는 악랄한 금액이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긴 했다.

반경 30m 안의 모든 캐릭터의 위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해X 포터’에 나오는 비밀 지도처럼 말이다.

맵 위의 파블로라고 적힌 푸른색 동그라미가 깜빡이며 미로를 부지런히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들키면 안 되니까 천천히.

캐시 더 쓰고 싶진 않으니까 제발 10분 안에 목적지에 도착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의 뒤를 밟을 때였다.

푸른색 동그라미가 라이시안이라고 쓰여 있는 노란 동그라미를 만나며 겹친 부분이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라이시안은 또 누구야?

인상을 찌푸리며 길을 따라 걷는데 나뭇잎 사이로 누군가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싶어 나무 벽에 귀를 기울이는데,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와 고함이 벽을 타고 들렸다.

“몸뚱어리라도 팔아서 그 자리를 보전하란 말이다!”

……뭐지?

뭐, 몸을 팔아?

예삿일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갑자기 연령대가 올라가는 소리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몸을 낮춰 나뭇잎 사이로 소리가 난 쪽을 엿보았다.

‘뭐야, 이안이잖아?’

지도에 라이시안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파블로 백작의 맞은편에서 뺨을 문지르고 있는 이는 분명 이안이었다.

가명을 쓴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이안을 주의 깊게 살폈다. 자세히 보니 이안의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조금 전에 들었던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는 파블로가 이안의 뺨을 때리는 소리였던 모양이었다. 호감은 없었지만 나와 닮은 이가 파블로에게 맞고 고개 숙인 모습을 보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상사에게 털리는 브이로그를 편집하는 느낌이 이러할까. 뺨을 문지르던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선 서지 않으십니다. 각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뭐요? 걔가 고자라고?

충격적인 이안의 고백에 저절로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와 동시에 다시 철썩 소리가 나며 이안의 반대쪽 고개가 돌아갔다.

“시체도 세울 세월에, 그깟 잠자리 데우는 일 하나 못 해서 상황을 이따위로 만들어!”

“…….”

파블로는 뺨을 날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연신 씨근덕거렸다. 양 뺨을 붉힌 채 입술을 깨문 이안의 모습이 처량하고도 처연했다.

그럼 정말로 루드비히랑 쟤는 뭐 없었겠네. 그럼 굳이 왜 데리고 있던 거지. 뭔가 다른 능력이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와중에도 머리는 소중했는지 파블로가 얼마 없는 머리를 손으로 소중히 감싸 쥐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그 버러지가 왔으니 우리는 끝이다. 폐하께서도 더는 우리를 봐주지 않으실 거라고!”

파블로가 울분에 차서 외쳤다. 이안이 그런 파블로를 무감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내가 있는 쪽을.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다.

뭐야, 들킨 건가?

어떻게 안 거지?

나뭇잎 틈새로 바라보고 있어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어도 그들은 나를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안의 시선은 정확히 나뭇잎 사이에 있는 나의 눈동자에 꽂혀 있었다.

“…….”

당황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이안이 시선을 돌리며 다시 파블로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서, 처리하실 겁니까?”

안 들킨 건가……?

나는 조심스레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안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금 찝찝하긴 해도 그저 우연인 모양이었다.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식사에 약한 독까지 넣어 보았는데 별 소용이 없더군. 이미 손을 쓴 모양이야.”

아, 식사가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수단이었어?

브레이슬릿 업데이트 아니었으면 그냥 죽었겠네. 저 또라이가 진짜……!

나는 잔뜩 열이 받아 이를 으득 갈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백작이 내 존재를 하도 눈엣가시처럼 여기기에 떠날 테니 도와 달라고 해 볼까 생각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음식에 독도 탔다는 걸 보니 성 밖으로 무사히 나갔어도 바로 암살당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너는 이대로 수저질도 못 하는 그 버러지에게 황제의 옆자리를 빼앗길 셈이냐?”

뭐,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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