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그의 말마따나 이미 몇 초 전에 브레이슬릿은 변화해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브레이슬릿의 상태 창을 눌렀다.
20% 정도 해 줬으려나? 어쩌면 30%일지도 몰라.
한껏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태 창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소원을 이루어 주듯 눈앞에 상태 창이 떴다.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제작자: 압실론 디트크리프)에 완전히 속박당해 스킬 사용이 제한되며 체력과 마법이 각 13%로 고정됩니다!>
<함부로 몸을 움직이거나 스킬을 쓰면 사망에 이를 수 있으니 격렬한 운동과 스킬 사용을 지양하세요.>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 효과로 씻지 않아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 효과로 항상 쾌적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정화’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모든 독에 대해 90% 이상 저항할 수 있게 됩니다.>
<‘1%의 축복’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사망할 정도의 물리, 정신적 피해를 입었을 때 죽음이 아니라 빈사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13%요?
“…….”
나는 말없이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마, 마음에 들어? 다른 능력도 좀 너, 넣어 봤는데.”
“…….”
내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자 당황한 압실론이 조용히 다른 효과를 추가했다.
“조, 조금 더 넣을까?”
<‘오늘은 내가 점쟁이!’ 기능이 추가되었습니다. 브레이슬릿을 교차해 세 번 흔들면 오늘의 점괘가 나옵니다.>
“…….”
점입가경이 이럴 때 쓰는 말이었나. 나는 나를 보며 수줍게 웃는 압실론의 멱살을 잡고 딸딸 흔들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내리눌러야 했다.
10%도 아니고, 5%도 아니고, 겨우 3%라니.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그…… 뭔가 실수가 있는 것 같은데.”
“무, 무슨 실수?”
압실론의 낯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참, 얘 실수에 예민하지.
“체력, 마력 제한이 너무 적게 풀린 것 같아서…….”
“으응, 아니야. 제대로 한 거 마, 맞아. 원래부터 13%로 고정하려고 루드비히랑 얘, 얘기했어.”
압실론은 그렇게 말하며 가만히 내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왜 자꾸 아까부터 나를 빤히 보는 거야. 그럴 시간에 퍼센트나 올려 주지.
“……아, 그래?”
화려한 이펙트로 별 지랄은 다 떨어 놓고는 겨우 3% 오른 이 상황에 나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나는 이불을 덮고 침울하게 눈을 감았다.
“……나 피곤해. 잘래.”
“그, 그럼 나는 이만 나가 볼게. 푸, 푹 쉬어, 이현.”
그냥 가기는 아쉬운지 압실론이 내 머리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잔머리를 넘겨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문 앞에 선 압실론에게 말을 걸었다.
“압실론.”
“어, 으응?”
“너 오기 전에 내 방에 들어왔던 사람 누군지 알아?”
압실론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 아니. 잘 모르겠어.”
나는 말없이 이불을 뒤집어썼다. 압실론이 그런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압실론이 나가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아…….”
모르긴. 루드비히겠지, 뭐.
아니이, 목을 쥐고 있던 거야 실제로 조르진 않았으니 그렇다 치고, 입술 만지작거린 건 나 좋아한다는 뜻 아니야?
압실론도 좀 또라이 같긴 해도 나 좋아하고.
좋아한다는 새끼들이 이런 거나 채워 놓고 감금하는 게, 어? 맞는 거야? 이게 나라냐!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이불을 마구 찼다. 침대 주변이 빛 먼지로 가득해졌을 때야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며 그 행위를 멈추었다.
그러면서도 3% 올랐다고 진작 떴어야 할 체력 경고음이 뜨지 않아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의 압실론을 떠올렸다.
그런데 압실론이 원래 퍼센트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가? 브레이슬릿 설계할 때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건가?
나는 잠시 거기까지 고민하다 이내 대자로 다리를 벌리고 몸을 축 늘어트렸다.
에이, 몰라.
“짜증 나 진짜…….”
죽어도 로그아웃하고 만다.
그놈들 앞에서 로그아웃해서 피눈물 흘리는 거 본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 * *
마티어스가 완전히 갇혔으니 나는 며칠이라도 좀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배운 게 없어서 포크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겁니까?”
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은 개뿔. 지옥 같은 나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주범은 의외로 루드비히도, 압실론도 아니었다.
“수프를 마실 때 소리를 낸다니, 천박하기 그지없군요.”
바로 나랑 마주칠 때마다 뾰족한 말을 꺼내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듯한 파블로 백작이었다.
백작은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나를 통제하고 관리하려 들었다. 알고 보니 황궁 내에서 그의 직업이 궁내 예의범절을 담당하는 거라나 뭐라나.
내무부 관련해서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예의고 뭐고 저 반짝이는 대가리를 후려치고 싶었다. 나는 그를 노려보다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타코야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
“나주평야.”
“……그건 또 무슨 뜻이죠?”
“그런 게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힘도 권력도 없는 소시민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화를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 방법은 파블로에게 꽤 유효하게 작용해, 그를 열 받게 만들기 충분했다. 덕분에 파블로와 나의 사이는 점차 앙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아.”
파블로를 노려보며 샐러드를 찍다 보니 작은 양상추 조각 하나가 흰 테이블 위로 뚝 떨어졌다. 파블로가 잘 걸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하아, 정말이지 가르치는 보람이 없는 분이시군요.”
말이야 우아하게 하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개쓰레기 예법.’
발전 없는 내게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파블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럼 가르치지 마시든가요.
내가 그런 파블로를 무시하자 그는 급기야 내게 다가와 검지로 내 관자놀이를 기분 나쁘게 밀기 시작했다.
“정말, 머리가, 있긴, 한, 겁니까?”
어절에 맞추어 파블로가 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기분 나쁘게 툭툭 미는 행동에 애써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나는 파블로의 손을 거세게 쳐 내며 쏘아붙였다.
“내 머리카락은 잘 있는데. 그쪽 머리카락은 어딨죠?”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파블로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물러나기엔 나 또한 뇌가 있긴 한 거냐는 질문을 받았던지라 바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도 진짜 뇌도 없는 AI한테! 나는 나의 숱 많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물론 의도된 행동이었다- 그를 비웃었다.
“머리카락만 없는 줄 알았는데, 청력도 부족하신가 봅니다.”
비꼬는 말에 타코야끼, 아니, 파블로의 머리가 정말 삶은 문어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대머리는 머리 전체가 붉어지는구나.
나는 신기한 걸 보는 듯한 시선으로 파블로를 관찰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나를 때릴 것처럼 한참을 씩씩거리다 이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출산할 듯이 분만 직전의 임산부처럼 라마즈 호흡법을 운용하던 파블로가 이내 감정을 가라앉힌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제 교육이 싫으시면 받지 않으시면 그만 아닙니까. 그리 비꼬실 것 없이 저와의 식사가 싫으시면 폐하께 고하시지요. 직접.”
윽.
“……하.”
이번에 한 방 맞은 건 나였다. 내가 말없이 파블로를 노려보자 그가 득의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내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이 교육을 받고 앉아 있는 건 전부 루드비히와 압실론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과의 식사를 거부하기 위해 파블로를 이용하고 있었다. 황제와의 식사 시간을 교육 시간으로 쓸 수는 없었기에 자연히 우리는 시간대를 달리해 떨어져 식사하게 되었다.
루드비히가 내 목을 쥐고 있다가 갑자기 입술을 만지작거린 날 이후로 나는 그가 조금 어려워졌다.
그때 그렇게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보니 너 왜 내 목 조르다가 입술 만졌냐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러니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최대한 루드비히를 피해 다니는 것뿐이었다.
압실론은 죄가 없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는 브레이슬릿을 만든 시점부터 내게 대역죄인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둘 다 지금은 별로 보고 싶지가 않았다. 다행히 루드비히와 압실론도 뭐 때문에 바쁜지 굳이 같이 식사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파블로도 내가 그들을 불편해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건방지게 구는 거였다.
정말, 여기 있는 놈들 중 마음에 드는 놈이 하나도 없었다.
관심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궁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까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찰싹! 포크를 쥔 손등 위에 따끔한 감각이 번졌다.
“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렸다. 순식간에 손등 위로 붉은 선이 생겼다.
나는 어이가 없어 파블로를 노려보았다. 파블로가 항시 가지고 다니는 지시봉을 팔 사이에 끼우고는 마뜩잖은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식사 중에는 다른 생각을 하시면 안 되지요.”
지금 이 새끼가 나 때린 건가?
“진짜 어이가 없네.”
나는 포크를 내팽개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스 그릇에 포크가 닿으며 파블로 백작의 흰옷에 소스가 튀었다.
머리 툭툭 밀어 댔을 때도 참았는데, 이번에는 진짜 못 참겠다.
“야, 너 내가 아주 만만한가 보다.”
나는 백작을 내려다보며 차가운 어조로 물었다. 옷을 내려다보던 백작의 옆얼굴이 불쾌감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