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패왕의 기운이라니, 이딴 사기 스킬은 어디서 배워 온 거야.
나는 조금이라도 호흡하기 위해 목을 부여잡고 헉헉거렸다. 사방에 묵직한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공기가 무거웠다.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감에 감긴 눈매를 비집고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허억…….”
“어딜, 간다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내 뒤에 서서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두려우면서도 화가 났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이런 식으로 굴복시키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힘 있고 권력 있으면 다야? 나 좋아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옭아매고 강압적으로 대하는 게 맞냐고. 나 닮은 애랑 실컷 물고 빤 주제에……!
개자식.
누군가 나를 프레스기로 누르는 듯한 묵직한 감각 속에서도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억울해서라도 한마디는 해야겠다.
여차하면 강제 종료밖에 더 하겠는가. 기껏해야 AI다. AI에게 쫄아 한마디도 못 하고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래! 갈 거야!”
나는 악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내 루드비히에게 소리쳤다.
“사, 산책 갈 거라고! 밥 먹었으면 혈당 조절을 위해 산책을 하는 게 장수를 위한 지름길이니까.”
“…….”
“화, 황궁에만 있어야 하나? 정원은 못 가면 그냥, 복도만 걷고…….”
“…….”
“아니면, 그냥 방에서 쉴 수도 있구…….”
……나도 이런 내가 싫다.
루드비히에게 변명하는 모습이 눈 뜨고 못 볼 지경이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뒤돌았을 때 나를 바라보던 둘의 눈빛을 보고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내게 돌을 던지라고 하고 싶다.
한마디 해 주기 위해 뒤돌았던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나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맹수처럼 눈을 빛내는 루드비히와 압실론을.
공포란 인식 가능하나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생긴다고 했다. 헤아릴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나를 둘러싼 순간, 나는 죽음보다도 두려운 공포를 느꼈다.
어두운 숲속에서 혼자 걷고 있는데 등 뒤에서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이러할까. 아니면 거대한 독사의 쉿쉿 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낙엽밖에 안 보일 때의 기분이 이러할까.
걸음을 잘못 내딛는 순간 끝없는 무저갱으로 추락할 것만 같은 감각에 나는 다시금 휘청였다.
절대 이길 수 없을 듯한 아득한 격차. 나는 그제야 내 삶의 목표가 떠올랐다.
길고 가늘게 살기.
자존심이 뭐가 중요한가? 목숨이 중요하지.
나는 절대 이런 곳에서 죽을 수 없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이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쉬었다. 패왕의 기력인지 기운인지는 조금 전에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린 뒤였다.
“정원에 나가는 건 상관없다.”
“그, 그래?”
“응. 정원부터 후원에는 아예 마력 제한 마법을 거, 걸어 놨거든.”
압실론이 친히 설명해 주었다.
정말 고맙다, 이 자식아.
“그, 그럼 나는 이만 산책하러 가 볼게…….”
“잠깐.”
아니, 왜 또.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좀 그만 괴롭혀라.
속으로 강아지 송아지 욕을 하던 나는 환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무슨 볼일이라도……?”
루드비히가 식탁 위 내 자리를 톡톡 건드렸다. 개라도 부르는 듯한 행동에 조금 열이 받았지만, 개보다 못한 처지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얌전히 그쪽으로 향했다. 영혼이 나간 듯 휘청이는 나를 압실론이 걱정스레 응시했다.
“식사, 마저 하고 가.”
“그, 그래. 이현 물바, 밖에 안 마셨잖아.”
“…….”
너네 같으면 너희들이랑 밥 먹고 싶겠니?
압실론은 그렇다 치고 루드비히는 눈치가 없는 놈도 아니었다. 내가 그들과의 식사를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이러는 거였다.
그가 내린 명령을 얼마나 잘 이행하는지 테스트해 보려고.
좀 너무한 거 아냐?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보자기로 보이나. 내가 밥 먹으라면 먹고 자라고 하면 처자는, 그런 시키는 대로 다 하는 사람인 줄 알아?
“야…….”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압실론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 저 사람은 어떻게 하, 할 거야?”
조금 전 식사 시간을 방해한 그 남자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처리해야지.”
루드비히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심히 답했다. 파일을 휴지통에 넣는 듯 간단한 말투였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는 원래부터 다물고 있었던 것처럼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이, 이현, 아까 뭐, 뭐라고 말하려고 하지 아, 않았어?”
압실론이 말을 끊어서 미안하다는 듯 내게 눈짓해 보였다. 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으응.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먼저 권해 줘서 고맙다고. 잘 먹을게.”
“이, 이 정도 가지고 뭘……. 맛있게 먹어…….”
압실론이 수줍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기분이 좋은 듯했다. 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다시 식사를 재개한 나는 스푼을 입에 문 채 압실론의 그릇과 내 것을 바꾸었다.
“왜, 왜 바꾸는 거야?”
압실론이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토끼같이 귀여운 얼굴이었지만, 이미 녀석의 실체를 알고 있기에 하나도 귀여워 보이지 않았다.
“내 접시 안의 음식이 더 맛있어 보여서. 많이 먹어, 압실론. 먹기 좋게 콜리플라워도 잘라 놨어.”
“이혀언…….”
압실론이 몹시 감동받은 듯 붉은 눈을 반짝였다. 사실 또 음식에 약 탔나 싶어 바꾼 거였지만, 온화한 분위기를 위해 하얀 거짓말도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루드비히는 압실론 이 새끼가 어제 나한테 수면제 먹인 거 아나?
압실론이 독단적으로 행한 일인지 아닌지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독단적으로 행한 일이면 정말 자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박제될 수도 있으니까.
“압실론.”
“웅.”
밥을 먹느라 압실론이 뭉개진 발음으로 내게 답했다. 나는 망설이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냅다 질렀다.
“……너 어제 왜 나한테 수면제 먹였어?”
음식을 꿀꺽 삼킨 압실론이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눈알을 굴렸다.
“어, 그게…….”
당황해 어물거리는 걸 보아하니 정말 압실론의 단독 행동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골이 아팠다. 그럼 난 어쩌다 오늘 아침을 맞이하게 된 거지.
“내가 시켰다.”
“……뭐?”
답은 루드비히에게서 나왔다.
“단둘이 있을 때 브레이슬릿을 언급하면 수면제를 먹여 재우라 했어.”
“…….”
아, 그러니까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거네.
“브레이슬릿 얘기 좀 할 수도 있지, 왜 수면제를 넣어?”
“그냥 브레이슬릿 얘기만 할 게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 그냥 브레이슬릿 얘기만 할 거였거든?”
귀신같은 놈. 나는 루드비히의 눈길을 피하며 꾸역꾸역 음식을 입에 욱여넣었다.
“다 먹었다! 가 볼게.”
나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리를 냅다 빠져나왔다. 물론 달리면 또 경고 뜰 테니까 경보로 살살.
한없이 긴 복도를 빠져나가자 햇살 쏟아지는 정원이 보였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걸음을 옮겼다.
날씨 하난 끝내주네…….
나는 차분하게 정원을 돌며 내가 빠져나갈 구석을 살폈다. 아니, 무슨 궁 담벼락이 이렇게 높아? 심지어 위에는 살벌한 철조망까지 쳐져 있었다.
왜, 아주 소주잔 깨서 사금파리도 박아 놓지.
“이게 교도소야 황궁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불시에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궁 교도소다, 새끼야.”
“으악!”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어디서 들려오는 거야?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꽃과 나비만 보일 뿐, 그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괜스레 소름이 돋아 팔뚝을 쓰다듬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밑이야, 등신아.”
한 마디 한 마디가 욕으로 이루어진 걸 보면 이건 분명 마티어스의 말투인데…….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밑이라고!”
마티어스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디 있다는 건데. 어디 있는지 알아야 도망을 칠 거 아니야.
더욱 빠르게 고개를 돌려 찾아보았지만 튤립 잎사귀 위에 앉아 있는 무당벌레 한 마리만 보일 뿐, 아무것도 뵈질 않았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 칠점 무당벌레를 빤히 바라보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무당벌레에게 속삭였다.
“……혹시 마티어스니?”
“…….”
무당벌레는 어이가 없다는 듯 포르르 날아가 버렸고, 나는 뒤통수를 긁적이다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엉?”
“일찍도 찾는다.”
쪼그려 앉자 서 있을 땐 보이지 않았던 지층의 철창 사이로 맹수처럼 빛나는 두 개의 눈이 보였다. 저 핏발 선 붉은 눈은 분명 마티어스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 왜 하수구에 갇혀 있니?”
내 말에 마티어스의 근사한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하수구 아니고 황궁 교도소라고.”
마티어스는 잔뜩 열 받은 기색으로 외쳤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안을 살펴보자 두 평도 되지 않는 방 안에 갇혀 있는 마티어스가 보였다. 워낙 덩치가 큰 녀석이라 방은 더 비좁아 보였다.
아하. 이 녀석, 황제의 침실에 침입한 죄로 감옥에 갇혔구나.
정말 잘됐다.
내가 기분 나쁘게 히죽히죽 웃자 마티어스의 눈매가 대번에 뾰족해졌다.
“재밌냐?”
“아니이, 재밌기는. 그냥 네가 거기 있는 게 너무 안쓰러워서.”
응! 재밌어!
나는 입을 가리고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말에 마티어스는 개처럼 짖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