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나는 안도의 한숨을 푹 쉬며 침대에 다시 대자로 뻗었다. 아침부터 잔뜩 긴장한 채 진을 뺐더니 녹초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잘까 고민하고 있는데 브레이슬릿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뭐야?”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이 주인의 기상을 감지했습니다. ‘목욕’을 시작합니다.>
브레이슬릿 안쪽에 박아 놓은 룬 문자가 반짝이며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곧이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물이 내 몸을 감쌌다.
몸이 따끈따끈한 물속에 잠겨 있는 느낌이 드는데도 옷과 시트는 전혀 젖지 않았다. 팔다리 구석구석을 닦던 물이 어느새 증발하고, 젖은 머리와 몸을 따뜻한 바람이 보송보송하게 말렸다.
<‘목욕’이 완료되었습니다.>
입 안은 양치한 것처럼 상쾌해졌으며, 머리에는 상큼한 민트 향이 감돌았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해진 몸을 보며 나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꼈다.
2클래스 마법 ‘클리닝’이었다.
이 마법을 쓰면 굳이 목욕을 하지 않아도 하루 종일 몸을 보송보송하게 유지해 준다. 지하실에 있다 나온 압실론에게 제일 먼저 써 줬던 스킬도 이거였다.
이 스킬 좋다고 몇 년 전에 지나가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브레이슬릿에 이 스킬을 담아 놓을 줄은 몰랐는데.
압실론은 특이하게도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한 기억력이 좋았다. 항상 나를 지켜봐서인 것 같긴 했지만,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까지 잘 알아서 편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루드비히는 나를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는 대신 이 방 안에 가둬 두었다. 브레이슬릿까지 채워 놓았으니 헛짓거리는 못 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어차피 황실 전체에 이동 마법 사용 금지 마법진을 깔아 놨으면, 이 브레이슬릿은 필요 없는 거 아닌가? 내 체력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닌데.
나는 압실론을 살살 구슬려 브레이슬릿을 빼내는 걸 다시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삿짐센터는…… 안 오나?”
침대에 몸 편히 누워 뒹굴거리고 있자니 문득 밖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을 내 몸이 떠올랐다. 벌써 접속한 지 12시간이 훨씬 넘어 있었다.
진작 누군가가 깨웠어야 하는데, 왜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지.
안에서 로그아웃이 불가능하더라도 바깥에서 강제 종료를 한다면 나는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 게임 속에 있다는 건……. 이삿짐센터가 혹시 사기였나.
그게 아니라면…….
나는 생각하기 싫은 가정을 떠올렸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때 누군가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엉겁결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한 명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여럿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는 척도 점차 힘들어 실눈을 뜨자 사용인 둘이 코앞에서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으악!”
나는 베개를 끌어안으며 소리를 질렀다.
“일어나셨군요. 기다렸습니다.”
“왜, 왜요?”
사형대로 가실 시간이거든요.
이런 말을 할까 봐 솔직히 긴장됐다. 사용인 중 하나가 말없이 내 머리칼을 만지고 가까이서 냄새를 맡았다.
뭐지, 이 개 같은 행동은?
정말로 강아지 같은 행동에 당황해 몸을 움츠리는데 사용인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씻으실 필요가 없으시군요. 그럼 목욕은 생략하겠습니다.”
“지금부터 환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용인이 내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잠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누가 입힌 거지?
잠시 압실론의 얼굴이 생각났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애써 그의 얼굴을 지워 냈다.
순식간에 옷이 벗겨지고, 춥다 느낄 새도 없이 새로운 옷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단추를 채우고 칼라에 리본을 매는 손길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나는 사용인들의 전문가다운 손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지금 여기에 정신 팔려 있을 때가 아니지.
“저, 저기.”
다이아가 섬세하게 세공된 커프스단추를 꿰어 주던 사용인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 어디…… 가나요?”
“…….”
왜 말을 안 해 주시나요?
“……혹시 저 사형당해요?”
“…….”
사용인들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 속에서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저기요?”
“…….”
“말씀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
“너무 무서워서 그러는데…….”
구두 끝을 마른 헝겊으로 닦아 윤을 낸 사용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면 알게 될 겁니다.”
뭘요? 뭘 알게 되는데?
당황한 나는 복도를 걷는 내내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사용인들은 티베트 여우처럼 넋을 놓은 듯한 표정으로 내 말을 무시했다. 영혼 나간 눈깔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더 물어보기도 그래서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복도를 걸으며 나는 내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기름을 발라 차분하고 단정한 머리칼, 둥근 칼라 밑에 자리 잡은 검은 리본 끈, 무늬 없이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군청색 재킷과 바지, 아가일 패턴의 양말과 헝겊으로 닦아 윤을 낸 구두.
이 정도로 때깔 좋게 입혀 놨으면 그래도 바로 죽이지는 않지 않을까. 그럼 혹시 인형 엔딩일까.
‘다치면 안 돼…….’
갑자기 잠들기 직전 들었던 압실론의 속삭임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박제하려면 멀쩡한 상태인 편이 그에겐 좋을 터였다.
상처라도 낼까…….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다. 안 그래도 체력 떨어져 있는데 상처까지 나면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묘하게 진짜처럼 아프단 말이야.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소름이 오돌토돌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각이 너무 생생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건지 진지하게 알아볼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마주하게 될 진실이 무서웠으니까.
사용인들이 문 앞에 멈추어 섰다. 덩달아 멈춰 선 나는 까마득히 높은 문을 올려다보았다.
여는 데만 해도 상당한 힘이 들어갈 듯한 두꺼운 문 겉면에는 풍성한 갈기를 뽐내는 사자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갈기가 은색인 걸 보니 루드비히를 뜻하는 듯했다.
사용인들이 문 앞에 선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기사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끼이이-.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문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긴 직사각형 형태의 식탁에 익숙한 인영들이 앉아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루드비히와 압실론이었다.
마티어스는 어디 갔는지 안 보였다. 어제 황제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온 죄로 감옥에라도 갇혔나.
최소 근신이긴 했겠지.
내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 어서 와, 이현.”
압실론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강아지 귀가 있었다면 쫑긋거렸을 것이요, 꼬리가 달렸다면 흔들렸을 법한 반김이었다. 사람의 마음이 사르르 풀어질 듯한 미소였지만 난 어제 압실론이 한 짓을 알고 있었다.
아는 척하지 마, 이 자식아.
사용인들이 나를 압실론의 맞은편 자리에 안내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루드비히의 맞은편엔 누군가 앉아 있었다는 거였다.
검은 머리에 흰 피부. 힐끗 옆을 바라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
당황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끼기긱, 의자가 뒤로 끌리며 기분 나쁜 소음을 냈다.
<체력이 1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아주 약한 자극에도 기절 혹은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고작 자리에서 일어난 거로 경고가 뜨는 시스템에 혀를 내둘러야 하는 상황임에도, 내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못 박혀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너…… 뭐야?”
왜냐하면 그 녀석이 기분 나쁠 정도로 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
내 물음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앞에 있는 절인 채소를 포크로 푹 찍어 먹었을 뿐이었다.
“너, 너 누구냐니까!”
인형인가? 압실론의 작품?
그렇다기엔 너무 현실감 넘치는데. 봉제선 같은 것도 안 보이고.
나는 당황해 그의 뺨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뺨에 온기가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인상을 찌푸린 녀석이 내 손등을 찰싹, 내리쳤다.
체력을 보충하라는 경고창이 한 번 더 떴다. 나는 얼얼한 손등을 매만지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성질머리를 보니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뭐지?
나는 거북이처럼 고개를 쭉 빼고 녀석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미묘하게 달랐다. 녀석의 눈꼬리는 나보다 더 새침하게 올라가 있었고, 키와 덩치도 조금 더 작았다. 나보다 좀 더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당황스러워 혼잣말을 내뱉는데, 녀석이 냅킨을 들고 신경질적으로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황제에게 내뱉기엔 다소 건방진 어조였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허락받을 생각도 아니었다는 듯 자리를 박찬 녀석이 성큼성큼 걸어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 방금 쟤 뭐야?”
나는 떠나가는 녀석을 손가락질하며 루드비히에게 물었다. 루드비히는 나를 보지도 않고 스테이크용 칼로 버섯을 썰었다. 영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나는 포기하고 옆을 돌아보았다.
비록 뒤통수를 치긴 했으나 결국 내게 가장 만만한 건 압실론이었다.
“압실론.”
“으, 응?”
“쟤 뭐야? 네 인형이야?”
“아, 아니야. 사람이야.”
“나랑 저렇게 닮았는데, 사람이라고?”
“하, 하나도 안 닮았어. 이현이 훠, 훨씬 더 예뻐.”
압실론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고맙긴 한데…… 썩 도움은 안 되는구나.
다행히 녀석의 정체는 곧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남자가 곧 녀석을 다시 데리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