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8화 (8/149)

#8

“그, 그치만 그 둘한테 아, 안 들키고 빠져나갈 수는 어, 어, 없을 것 같은데…….”

“왜 없어? 이동 마법 쓰면 되잖아?”

너도 이동 마법 써서 여기 들어온 거잖아. 너무 설레서 자기가 마법사인 것도 잊어버린 건가.

“화, 황궁 전체에 이동 마법 사용 그, 금지 마법진이 설계되어 이, 있어.”

“……아.”

“그, 그래서 들어오는 건 돼도, 나, 나가는 건 안 돼.”

이 무슨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나가는 건 아니란다 같은…….

나는 뒷골이 당기는 듯한 감각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다 생각 하나가 번득였다.

“그거, 마법진 설계한 마법사보다 클래스 높으면 그냥 무시할 수 있지 않아?”

5년 전 압실론은 이미 6클래스 중반에 들어서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적어도 7클래스, 혹은 8클래스까지 접어들었을 수도 있었다.

당시 제국 내에 5클래스 이상의 마법사가 10명도 없었던 걸 생각하면 나름대로 희망적인 이야기였다.

압실론은 잔뜩 기대에 찬 내게 찬물을 끼얹어서 미안하다는 듯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서, 설계한 게 나야…….”

이런 X발!

나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너무 절망하는 듯 보이자 압실론은 그런 나를 조심스레 토닥였다.

“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히, 힘내.”

그리고는 내가 오래전에 가르쳐 준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양 주먹을 꽉 쥔 압실론의 모습은 몹시도 깜찍했으나, 전혀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너 때문이잖아, 너!

나는 외치고 싶은 마음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소파에 고개를 처박고 우울해하는 나를 보며 압실론이 시무룩해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압실론의 상태 창과 내 상태 창을 동시에 오픈했다.

혹시 모르잖아, ‘재접속해 주셨으니 9클래스로 올려 드립니다.’ 이런 혜택이 있을지도.

[이름: 이현 (Lv. 153)

나이: 26

직업: 무직

체력: 10%

마력: 10%

*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의 효과로 인해 체력과 마력의 퍼센트가 고정됩니다.

*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의 효과로 스킬 사용이 제한됩니다.

클래스: 5클래스 익스퍼트

.

.

.

상태: 탈출을 원하고 있습니다.]

응, 그런 거 없구나.

나는 깔끔하게 포기한 채 고개를 돌려 압실론의 상태 창을 살폈다.

[이름: 압실론 디트크리프 (Lv. 221)

나이: 24

직업: 마법사의 탑 주인

호감도: ???

체력: 100%

마력: 100%

클래스: 9클래스 익스퍼트

.

.

.

상태: ‘이현’이 꿀케이크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 엿보기: ???]

“……9클래스?”

나는 너무 놀라 말을 더듬었다.

아니, 얘는 밥 먹고 마법만 익혔나.

믿기지 않아 압실론을 바라보자 그가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응. 마, 맞아. 9클래스야.”

“마법진을 설계한 것도……?”

“그, 그건 6클래스 마스터 때 하긴 해, 했는데…….”

희망의 불씨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크, 클래스 올라갈 때마다 유지 보, 보수했어. 9클래스 때 한 번 한 이, 이후로는 아, 안 했지만.”

희망의 불씨가 꺼졌다.

내 주제에 희망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것이던가?

어떻게든 압실론을 이용해 탈출해 보려던 나의 계획은 철저히 물거품이 되었다.

만렙 왕자의 가슴을 찔러야 인어로 돌아갈 수 있는 쪼렙 인어공주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나는 좌절한 게 역력한 기색으로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압실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토닥였다.

그래, 희망을 잃지 말자. 아직 하루도 안 지났잖아.

압실론 자체는 순진하니 어떻게 잘 꼬셔 보면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꿀케이크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이걸 먹으면 상황이 좀 나아지려나?

압실론의 소망을 이루어 주기 위해 꿀케이크를 푹 찍어서 한입 크게 베어 무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니 압실론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먹고 싶나?

꿀이 들어간 얇고 촉촉한 판을 켜켜이 쌓아 만든 꿀케이크는 달고 쫀득쫀득했다.

그러고 보니 압실론도 단걸 좋아했던가.

나는 꿀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압실론의 입가에 댔다.

“한 입 먹을래?”

“아, 아냐. 이현 먹어.”

압실론은 내가 그렇게 말해 준 게 기쁜지 수줍은 듯 두 뺨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으이그, 이렇게 순진무구해서야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나는 신입생을 바라보는 복학생의 마음으로 압실론에게 꿀케이크를 재차 권했다.

“괜찮아, 너 꿀케이크 좋아하잖아.”

“아, 아냐. 거기 수면제 드, 들어 있어서 난 괘, 괜찮아.”

“그렇다면야…….”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수, 수면제 들었다구.”

압실론이 말갛게 웃으며 내게 말해 주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짚었다.

넌…… 수면제 넣었다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순진무구한 낯짝으로 하니…….

압실론의 악의 없는 행동에 두통이 이는 것과 동시에 기억의 포말이 나를 덮쳤다.

‘뭐야, 나 주려고 음료수 가져온 거야?’

‘네, 주, 주인님.’

‘맛있다, 상큼하고. 내가 다 마셔 버려서 어떡하지.’

‘괘, 괜찮아요. 저는 아, 안 마셔도 돼요.’

‘응? 왜?’

‘거, 거기에 야, 약을 탔거든요.’

그날 나는 인형이 됐다.

싸아아,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나는 창백해진 낯으로 압실론을 노려보았다.

이 개잡놈의 새끼를 어쩌면 좋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 싶어 일어나는데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묵직했다.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먹고 취침해 보세요. 심호흡을 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편안하게 취침했다가 영원히 잠들게 생겼는데요.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는데, 요청할 사람이 없었다. 루드비히도, 마티어스도.

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놈들이지.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가 흐릿하게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다 앞으로 크게 휘청였다.

“……!”

그 잠깐 사이 정신을 잃었는지 바닥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손을 짚거나 낙법을 해야 하는데 몸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나를 일으키는 강한 손길이 느껴졌다.

“다, 다치면 안 돼.”

누군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쓰디쓴 약품 냄새가 진동을 했으니까.

나를 끌어안은 압실론이 땀에 젖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 잘 자, 이현.”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압실론의 말간 낯짝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자, 이제 누가 순진하지?

* * *

자색과 은색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매가 세나르도 왕국의 궁 위를 크게 원을 그리며 날았다. 삐이익-. 애타게 누군가를 찾는 듯한 울음소리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창공을 가르는 매를 올려다보았다. 매는 한 번의 날갯짓 없이 높은 곳을 날며 날카로운 눈길로 밑의 사람들을 살폈다. 그때, 무언가 발견한 매의 노란 눈이 번뜩였다.

삐이이익-.

목을 빼고 길게 운 매는 망설임 없이 밑으로 하강해 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의 어깨에 올라탔다. 반투명한 매는 웬만한 성인 남자의 상반신만 했다. 매의 크기에 압도된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꺄아악!”

오직 매를 어깨에 앉힌 남자만이 고요한 시선으로 매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요, 이자크.”

매는 반가운지 남자의 뺨에 제 얼굴을 비볐다. 부리를 가볍게 긁어 주자 기분 좋다는 듯 매가 다시 한번 울었다.

“돌아왔다. 돌아왔다. 돌아왔다.”

매는 돌아왔다는 말을 세 번 반복하고 남자의 어깨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한 번의 상승으로 수십 미터를 날아 올라가 이제는 창공 속에 찍힌 점처럼 보였다. 흘리고 간 보라색 깃털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잠시 지상에 내려왔다는 것도 믿지 못했을 터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용인들이 당황한 낯을 하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남자는 가만히 선 채 눈꺼풀을 내리고 있었다. 마치 선 채로 잠시 낮잠이 든 듯한 모습이었다. 햇살 가득한 정원에서 태양 빛을 그대로 맞으며 눈을 감고 있는 남자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얼굴에 살이 거의 붙어 있지 않아 다소 메마른 인상은 있지만, 입매 끝이 살짝 올라가 있어 묘하게 다정한 느낌이 났다.

바깥 세계와 유리된 듯한 남자를 사람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 남자가 웃는 낯으로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남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모든 이들이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붉은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가며 보기 좋은 미소가 만들어졌다. 잠에서 깨어나듯 남자가 눈을 떴다.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세공한 듯한 푸른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 광기 어린 이채가 떠 있었다.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남자가 보라색 깃털을 주워 깊게 입을 맞추었다.

“기다렸습니다, 이현.”

* * *

“헉!”

나는 오랜 시간 참아 온 숨을 터트리듯 잠에서 깨어났다. 등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파, 팔다리 제대로 붙어 있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요리조리 상태를 확인했다. 격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음이 뜨긴 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별다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속으로 빌긴 했다.

꼭 인형이 되어야만 한다면 기절한 상태에서 되게 해 달라고.

다행히 팔다리도 멀쩡했고, 생각하는 데도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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