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겁에 질린 나는 엉겁결에 루드비히를 끌어안았다.
“도, 도와줘, 루드비히!”
그러나 루드비히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아, 얘 10분 전에 나 죽이려고 했지.
나는 멋쩍게 루드비히를 놓았다.
도움을 청할 놈한테 청해야지.
기사들이 마티어스를 막는 이유는 여기가 황제의 침실이라서이므로, 여기를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는 일단 루드비히의 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꼬물거렸다. 그러나 루드비히는 내 손목을 쥔 채 놓지 않았다.
“뭐, 뭐야. 놔!”
“이제 마티어스에게 가서 사랑한다고 말할 건가?”
“……뭐?”
“그때까지 목이 달려 있을지 모르겠지만.”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루드비히가 내게 말했다. 나는 믿기지 않아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나는 그제야 모든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루드비히 이 새끼는, 처음부터 나를 믿지 않았다.
“아, 다 꺼지라고!”
마티어스가 귀찮다는 듯 팔을 흔들자 네 번째 기사가 저 멀리 날아갔다가 벽에 부딪혀 떨어졌다. 이제 마티어스를 붙잡고 있는 기사는 단 셋뿐이었다. 마티어스는 셋을 든 채 일반인이 달려오는 속도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악! 저리 가-!”
나는 빠르게 달려오는 마티어스를 밀어 내기 위해 손을 휘적였다. 그 순간 빛이 번쩍였다.
파앗!
침실을 태울 듯 강한 빛이었다. 섬광탄처럼 강렬한 불빛에 나는 물론 루드비히까지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긴박한 상황이 되어 나의 숨겨진 힘이 발동된 건가?
내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을 때 빛은 마치 번개처럼 쏘아져 마티어스의 위로 추락했다.
맞나 봐!
“억.”
마티어스에게 붙어 있는 기사 셋이 그 충격으로 인해 사방으로 날아갔다. 내 머리채를 잡기 직전, 마티어스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그 빛에 깔려 정신을 잃었다.
뭐지? 성령으로 잉태한 건가?
임신공이 된 걸 축하한다, 마티어스.
역시 신은 내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거대한 구 형태를 띠고 있던 빛은 점차 줄어들더니 이내 사람의 형체를 띠어 갔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뭐, 뭐, 뭐, 뭐야!”
나는 당황해 몸을 뒤로 뺐다. 그 바람에 처음으로 루드비히의 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너무 쉽게 벗어나 좀 당황하긴 했지만, 원래 사람은 죽을 위기에 처하면 괴력이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현-!”
사람 형태가 된 빛이 내 복부를 강타했다. 나는 고통에 눈을 홉떴다.
이, 이게 바로 오메가버스인가?
내게 BL 게임을 추천해 준 동기 덕분에 BL 용어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나는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허억.”
그러나 내 배를 깔고 앉은 그것은 이내 내 얼굴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에게서는 매캐한 실험 약품 냄새와 찝찔한 소금 냄새가 풍겼다. 얼굴 위로 체액이 떨어지는 기분에 영 찝찝해하고 있는데, 입에까지 한 방울 들어왔다.
“엑!”
퉤퉤거리며 뱉어 내려 하는데, 생각보다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소금처럼 짜면서도 희미한 단맛이 배어 있는 물.
“눈물?”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것이 온전한 사람 형태를 갖추었다. 눈에 익은 이였다.
“이, 이혀언.”
검은 똑단발과 푹 젖은 붉은 눈. 눈물을 쏟아 내느라 오만상을 쓰고 있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쩐지 익숙한 이목구비.
“아, 압실론……?”
압실론 디트크리프, 나의 친우가 나를 덮친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이혀언, 보고싶었어어.”
압실론이 내 목을 끌어안고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서럽게 우는 녀석을 보자 나도 덩달아 콧날이 시큰해졌다.
압실론은 ‘처음’이 많은 친구였다. 내 첫 친구이기도 했고, 처음으로 고백받은 상대이기도 했다. 물론 압실론의 공략 난이도가 가장 낮아 그런 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으허엉, 압실론.”
“이, 이현, 어, 어디 갔다 왔어어…….”
압실론의 맑은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났다. 그 슬픔은 내게 곧바로 전염되었다. 나는 압실론을 끌어안고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일찍 왔어야지이. 너 보기도 전에 죽을 뻔했잖아아.”
“이혀언, 미안해애애. 준비할 게 있어서 느, 늦었어어어.”
우리는 말꼬리를 늘이며 한동안 재회의 기쁨을 느꼈다.
근데 준비한 거라니. 환영 선물이라도 준비한 건가.
서럽게 울던 중에도 선물이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철컥, 무언가 손목에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눈을 떠 보자, 양 손목에 채워진 은색 브레이슬릿이 은은한 빛을 내며 내 손목에 맞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내가 코를 훌쩍이며 묻자, 지금껏 손목에 감겨 있던 밧줄을 무형의 칼로 풀어내며 압실론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 흐윽.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이야. 밧줄보다 훠, 훨씬 편할 거야.”
“…….”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제작자: 압실론 디트크리프)에 완전히 속박당해 스킬 사용이 제한되며 체력과 마력이 각 10%로 고정됩니다!>
<함부로 몸을 움직이거나 스킬을 쓰면 사망에 이를 수 있으니 격렬한 운동과 스킬 사용을 지양하세요.>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 효과로 씻지 않아도 청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 효과로 항상 쾌적한 상태가 유지됩니다.>
<마력 제어용 밧줄이 해제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준비했다는 게…… 이거?”
내 말에 압실론이 눈물이 고인 채 예쁘게 웃었다.
“응. 이, 이현을 생각하면서 5년 동안 주, 준비했어. 차, 착용하기 편할 거야.”
압실론은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설레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적을 공격하려고 수류탄을 던졌더니 열정적으로 달려가 기어코 수류탄을 내 앞에 물고 온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분노에 차 벌떡 일어나자 압실론이 기겁하며 나를 말렸다.
“이, 이현! 그렇게 겨, 격렬하게 움직이면 안 돼. 기절하거나 죽을 수도 있어!”
“……일어나는 게?”
“응. 항상 조심조심 움직여야 해.”
진짜 미친놈인가.
나는 정신 나간 놈을 더 보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돌린 곳엔 나를 바라보며 흡족한 낯을 띠고 있는 루드비히가 보였다. 저 미친놈도 보기 싫어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그곳엔 정신을 잃은 마티어스가 있었다.
“…….”
나는 가만히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보았다.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로그아웃할 수 없습니다.>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로그아웃할 수 없습니다.>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로그아웃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너무 절망하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너무 어이가 없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 * *
“바, 밥 먹어야지.”
“생각 없어.”
저 멀리서 압실론이 그릇을 가지고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호화로운 방에서 감금 생활 중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압실론의 반대쪽으로 돌아누우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바, 밥을 먹어야 힘을 내지.”
“체력도 마력도 네가 제한시켜 놨는데 어떻게 힘을 내냐?”
“이, 이현…….”
내 싸늘한 태도에 당황한 압실론이 침대 옆 협탁에 밥그릇을 내려놓고 나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는 그런 압실론의 팔을 매섭게 쳐 냈다.
“건드리지 마!”
“이, 이혀언. 그렇게 팔 세게 쳐 내면 죽을 수도 있어……. 진정해.”
그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팔 좀 친 것 가지고 숨이 찼다.
<체력이 8%까지 떨어졌습니다. 기절과 사망 확률이 올라갑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X바알.
나는 베개에 고개를 묻고 발등으로 침대를 팡팡 쳤다. 물론 체력 더 떨어지면 안 되니까 아주 가볍게. 보이진 않았지만 압실론이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꺼지라고! 너 존나 재수 없으니까.”
나는 압실론을 향해 매섭게 쏘아붙였다. 안 그래도 창백했던 압실론의 낯이 더 창백해졌다.
“…….”
말을 잃은 압실론이 자리에 망부석처럼 못 박혀 있었다. 코를 훌쩍이고 있는데 귓가에 압실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인형이 된 이현이라면…… 나에게 사, 상냥할 텐데…….”
“…….”
나는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지을 수 있는 한 가장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배가 고파서 잠깐 미쳤었던 것 같아. 밥 먹을게. 가져다줘서 고마워, 압실론.”
내 말에 압실론의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마, 맞아. 그러고 보니 이현은 밥을 안 머, 먹으면 조금 신경질적으로 벼, 변했어.”
“그치, 내가 미쳐서 그래. 와, 통닭이네! 너무 맛있겠다!”
오랜만에 보니 더 잘생겨진 것 같다, 보고 싶었다 등 나는 압실론에게 갖은 아부를 떨어 댔다. 갑자기 왜 이렇게 간신배처럼 구냐 하면, 압실론의 전적 때문이었다.
일전에 압실론이 처음이 많은 친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첫 친구, 첫 고백.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다.
압실론…… 이 새끼는 나의 첫 배드 엔딩 상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