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아챘는지 루드비히가 목소리를 살벌하게 내리깔았다.
“개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짐승을 달래듯 그의 팔을 살살 쓰다듬었다.
“무슨 소리야, 나 지금 너만 바라보고 생각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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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발.
“기억이 안 나나 보지.”
루드비히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그의 팔을 끌어당겨 내 뺨에 가져다 대었다.
“아니, 너무 미안해서 목이 메어서 그래…….”
나는 최대한 처연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드비히의 낯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나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다 최대한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미안한 게 한둘이 아니라 그런데 힌트 좀 주면…….”
으득. 입술을 짓씹는 살벌한 소리에 나는 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내가 알아서 찾아야지. 그것이 약속이니까.”
“정말 기억나지 않는 건가.”
“아냐, 기억나. 기억나는데…….”
“넌-!”
루드비히의 격렬한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나는 잔뜩 움츠러들어 그의 눈치를 보았다. 긴장감에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것처럼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다음 날 답해 주겠다고 했어.”
“으, 응?”
“다음 날 답해 주겠다고 했다고.”
루드비히는 나를 내려다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의 눈가가 경련하듯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 고백을 들은 다음 날 사라져 버릴 만큼…… 내가 그렇게 싫었던 건가?”
“…….”
그제야 나는 깨어나기 직전에 꿨던 꿈을 떠올렸다.
‘이현, 나의 반려가 되어 줘.’
그때 내가 했던 대답도 떠올랐다.
‘나는…… 예상도 못 한 일이라…….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데, 하루만 시간을 줄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수줍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승낙할 것처럼. 내내 긴장하고 있던 루드비히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당연하지.’
‘고마워, 루드비히.’
다음 날, 나는 군에 입대했다.
* * *
미친. 미친. 미친.
기억났다. 전부 기억나 버렸다.
나는 사색이 되어 루드비히의 시선을 피했다.
그때 간 보지 말고 그냥 거절했어야 했는데. 과거의 나야, 미친놈아, 대체 왜 그랬니…….
“아, 이제 기억이 났나 봐.”
나를 내려다보던 루드비히가 짧게 조소했다.
“일주일 정도는 네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제국의 어버이가 되는 일이니 그만큼의 고민이 필요할 거라고.”
“…….”
“한 달이 지나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그때만 해도 네게 무슨 일이 있어서 사라진 거라 생각했어. 한숨도 자질 못했지.”
“루드비히…….”
“매일같이 뒷골목을 뒤졌다. 노예상과 별의별 곳을 뒤지며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어! 잠 한숨 자지 못하다 눈만 감으면 네가 보였다.”
네가 울면서 내게 살려 달라고 말하고 있었어.
“나는, 네가 떠난 이후 단 하루도 편히 자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하는 루드비히의 입매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는 듯 루드비히가 고개를 떨구고 길게 호흡했다.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루드비히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루드비히는 움찔하긴 했지만 내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뺨은 안쓰러울 정도로 움푹 패어 있었다. 매끈하던 얼굴엔 수염이 자라 있었고, 나지 않은 부분도 전혀 관리하지 않은 것처럼 거칠었다.
전쟁터를 구를 때에도 항상 깐 달걀처럼 반질반질했던 그의 얼굴을 떠올려 보면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루드비히에게 미안해졌다. 솔직히 군대에 입대하고 나는 게임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훈련병 때는 고된 훈련에, 그 후에는 적응하느라, 그다음엔 현실에 치여 그들은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당시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을까, 생각해 보니 그 후에도 방송을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날 진짜 사랑한다면 2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겠지. 하지만 거절하면 다른 놈한테 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미적지근한 상태로 사라지는 게 좋겠어.
그래야 나중에 재회 콘텐츠 찍을 때도 편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말 개쓰레기였네, 나…….
그렇게 5년을 기다린 애한테…… 뭐라고 했더라?
‘형님 왔다, 새끼들아!’
불꽃에 새긴 문장을 생각하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으로 죽이고 싶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납치가 아닐 가능성에 대해 인정했다. 너는 원래도 훌쩍 사라졌다 돌아오곤 했으니까.”
“…….”
“그리고 오늘, 납치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군. 내가 네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도.”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닐 리가…….”
“그렇다면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
……할 말이 없네요. 무슨 AI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
“내내 생각했다.”
“뭐, 뭘?”
“도대체 이유가 뭘까. 네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아니면 황제인 내가 부담스러워서? 네가 원한다면 이따위 자리는 전부 내려놓을 수 있었는데.”
“…….”
“나를 포함한 넷에게 전부 고백을 받고 이 세계에 흥미가 사라져서라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했지.”
정답에 가까운 지적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루드비히가 의혹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콜록콜록 억지 기침을 하며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끌었다.
“콜록, 아까 잡힌 목이 너무 아파서…….”
루드비히가 나를 빤히 응시하다 이내 피식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이대로 모르다 죽겠구나 생각했는데, 다행히 살아서 알게 되는군.”
“어, 어?”
“말해. 왜 나를 떠났는지.”
날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여야 할 거야.
다시금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이 들어왔다. 루드비히의 흰자위에 새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나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잣 됐다.
“노, 놓아야 얘기를 할 수 있다니까. 지금은 너무 당황스러워서 할 얘기도 못 해.”
나는 그의 팔을 탁탁 치며 말했다. 미심쩍어하면서도 루드비히는 생각보다 순순히 내 목을 놔주었다. 나는 목을 감싸 안고 기침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거 알고 있나?”
“뭐, 뭐 말이야?”
체온이 낮은 그의 검지가 내 콧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넌 개수작을 부리기 직전에 콧잔등을 찡그려.”
“……하하.”
“내가 지금까지 널 살려 두고 있는 건 네가 진실을 말하리라 믿어서가 아니야. 네 개수작이 얼마나 내 마음을 동하게 만들까가 궁금해서지.”
그거 아니?
난 너같이 감이 좋은 AI는 싫어해…….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AI 기반 게임은 평생 쳐다도 안 보리라 결심했다. 루드비히가 삐딱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내 인내심이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군.”
“너, 너 지금까지 나만 기다려 왔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 기다렸댔잖아. 그런데 어떻게 보자마자 죽이려 할 수가 있어.”
내 말에 루드비히가 비웃음 섞인 헛숨을 내뱉었다. 그가 내 목을 비스듬히 쥐며 말했다.
“내가 수많은 뒷골목을 뒤지면서 했던 생각이 뭔 줄 아나?”
“뭐, 뭔데…….”
“제발 시체라도 찾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빌었다. 그도 아니라면 손톱이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
머리카락은 그렇다 치고 손톱은 너무 무서운 거 아닌가요.
“놓치고 후회하는 것보다 죽여서 내 곁에 두는 편이 낫겠어서.”
“그, 그래도 죽은 이현이보다 살아 있는 이현이가 좋지 않을까요?”
나는 같잖은 3인칭 애교를 부리며 루드비히의 기분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나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루드비히가 픽 웃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아. 안타깝게 됐군.”
전혀 가상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죽이는 게 아쉬우면…… 안 죽이면 되지 않을까요?
그때, 적막한 방을 울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루드비히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향했다.
“폐하, 크롬하트 장군께서 방문을 원하십니다.”
“금방 끝내고 가겠다고 전하라.”
뭘요? 뭘 끝내는데요?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소동물처럼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예.”
시종이 물러나고 루드비히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루드비히에게서 느껴지는 최상위 포식자의 기운이 피식자인 내 숨통을 죄어 왔다. 루드비히가 호랑이나 사자라면 나는 노루조차도 못 되고 그냥, 개미나 진딧물 정도…….
정말 죽음이 코앞에까지 왔다는 걸 느낀 나는 루드비히의 목을 쥔 채 내게 끌어당겼다.
“……!”
불시에 내게 안긴 루드비히의 등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 목덜미 부근에 루드비히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며 팩 내버릴 거라 생각했는데 루드비히는 의외로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내,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모르면서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루드비히.”
나는 슬픈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종알대었다.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