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
나는 당황해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루드비히가 더 빨랐다. 우악스레 내 손목을 틀어쥔 루드비히가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한 품 안에서 숨을 훅 들이쉬자 옅은 술 냄새와 약 냄새가 풍겼다.
“뭐, 뭐야!”
사력을 다해 루드비히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늪에 처박힌 것처럼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땅바닥에 놓여 있던 밧줄이 고개를 세운 뱀처럼 나를 향해 쇄도했다.
작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던 나는 황당하다는 듯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루드비히의 입가에 삐딱하게 걸려 있는 저건 분명, 비웃음이었다.
“잘 속네.”
이…… 개새끼가!
스파앗!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던 밧줄이 순식간에 나를 결박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마나가 급속도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 안 돼!”
나는 다급히 손을 휘저으며 스킬을 시전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사용자의 상태 이상으로 스킬 사용에 실패했습니다.>
<사용자의 상태 이상으로 스킬 사용에 실패했습니다.>
<마력 제어용 밧줄에 완전히 속박당해 스킬 사용이 제한됩니다!>
<지금은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지금은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지금은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아니, 포박 스킬이 72레벨이면 밧줄이 자동으로 움직이기도 하는 거야? 언제부터 이 게임 장르가 BDSM으로 바뀌었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나는 여전히 내 손목을 끊어질 듯 쥐고 있는 루드비히를 노려보았다.
“너, 날 속였어…….”
내 말에 루드비히가 다정한 손길로 내 뺨과 귓바퀴를 지나쳐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것 같지 않은 차가운 손끝의 온도에 목의 솜털이 빳빳하게 섰다. 이내 루드비히의 손날이 내 목덜미를 가볍게 내리쳤다.
“……!”
<‘수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체력이 20% 이하라 30분간 기절합니다.>
<남은 시간 29:58…….>
저 멀리서부터 시야가 암전되었다. 어둠이 시시각각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개새끼야…….”
나는 멀어지는 정신 속에서도 그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귓가에 루드비히 특유의 느릿하면서도 서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여전히 순진하구나…….”
* * *
오랜만에 꿈을 꿨다.
루드비히의 임명식 날이었다. 꽃가루와 환호가 가득했던 낮이 끝나고, 죽은 자들을 위한 안식 같은 조용한 밤이 시작되었다.
벌써 20시간이 넘게 게임만 했던지라 슬슬 로그아웃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종이 루드비히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후원으로.]
아, 나 이제 자야 하는데.
하지만 루드비히의 말을 어겨서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이 없었던지라 나는 결국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후원으로 향했다.
달맞이꽃의 은은한 꽃향기가 후원을 뒤덮고 있었다. 완연한 밤이었지만 달과 별이 유난히 밝아서 그런지 밤길을 걷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루드비히는 후원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루드비히의 등에 대고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드비히.”
내 목소리를 들은 루드비히가 천천히 돌아섰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그의 결 좋은 은발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무슨 일이야, 불렀다며.”
“이거…… 주고 싶어서.”
루드비히가 부스럭거리며 손에 쥐고 있던 걸 내게 건넸다.
“……꽃?”
루드비히가 내게 건넨 건 꽃다발이었다. 진주 가루를 뿌린 검은 장미가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장미네?”
“네 머리 색과 같아서 골랐는데…….”
꽃다발에서 꽃을 뽑아낸 루드비히가 내 귀 위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꽃을 꽂았다. 꽃을 꽂은 채 멀뚱거리며 루드비히를 바라보자 그가 드물게 눈을 휘며 웃었다.
“네가 더 아름답군.”
와, 닭살 돋아.
나는 애써 입술 끝을 끌어당기며 화답했다. 내내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 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사이즈의 푸른 벨벳 상자. 나는 그게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설마.
심장이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마 너도 고백하니!?
나는 그동안 세 캐릭터에게 고백을 모두 받아 냈다. 그러나 가장 공을 들였던 루드비히가 지금까지 한 번도 고백하지 않아 이대로 군대를 가야 하나 아쉬워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나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슬쩍 옆을 돌아보자 게임 기계와 연결해 놓은 채팅 창에서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채팅이 올라오고 있었다.
[요굴팅: 가보자GO
노란스탠드: 왔다왔다왓다ㄸ와싸왔다!!!!!!
창문형에어컨: 설마고백인가요?설마고백인가요?설마고백인가요?설마고백인가요?설마고백인가요?설마고백인가요?설마고백인가요?
현이네주막(매니저): 창문형에어컨님 도배로 1분간 채팅 정지입니다.
기쎈병아리: 하 나 너무 설레ㅠㅠㅠㅠㅠㅠㅠ메리배드엔딩 말고 서버 통틀어 첫 정석 고백 아님?
닉네임얼마까지늘어날수: 아모른직다 루드비히 성격상 저러다 우리 현이 감금길만 걷자 ㅇㅈㄹ할수도있음
심각: 호모나 세상에 게이뭐야 ㄹㅇ 루드비히한테까지 고백 받으면 최초 4관왕임
이금현: 마성의 게이 클라스 어디 안가죠...우리 현이...앞으로도 게이길만 걷자...
절대지켜: 형...군대에서 엉덩이 조심해...
압실론포에버: 거절시 달풍선 천 개 미션갑니다
혀니S2루드비히: 승낙시 달풍선 삼천개 갑니다
기쎈병아리: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혀루님 클라쓰]
채팅 창은 아주 난리가 나 있었다. 각 캐릭터 빠들이 승낙과 거절을 두고 달풍선 미션을 마구잡이로 걸었다. 보다 못한 열혈 구독자가 승낙 시 만 개 미션을 걸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앞으로도 너는 쭉 내 곁에 있겠지. 이제는 네게 그에 걸맞은 자리를 줄 수 있다.”
이현, 나의 반려가 되어 줘.
루드비히가 반지를 내밀며 올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띠링 소리와 함께 상태 창이 켜졌다.
[‘루드비히 폰 그리체’에게 고백을 받았습니다. 승낙 시 황비가 되어 함께 국정을 꾸려 나가게 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1. 승낙 2. 거절 3. 보류]
최초의 황비 엔딩이라니.
저 멀리서 달풍선 터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승낙을 누르려는 손을 다른 쪽 손으로 감싸 쥐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 나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나는…….”
그때…… 내가 어떻게 말했더라?
* * *
“허어억!”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눈을 떴다. 우리 집 천장일 리 없는 화려한 천장화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점차 선명해졌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긴…….”
“내 침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저음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루드비히가 긴 다리를 쭉 뻗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루드비히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 너, 날 속였어!”
루드비히를 향해 빽 소리를 지르자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
“왜에에?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거 부모님한테 안 배웠냐? 가정 교육 어디로 받았어?”
내 말에 루드비히가 눈을 내리깔고는 처연하게 중얼거렸다.
“부모님…… 돌아가셔서 배운 적이 없네.”
미친 새끼……. 슬픈 척은 왜 하는데.
한 명은 네가 없앴잖아.
무릎 꿇고 싹싹 비는 황제의 목을 가차 없이 날리던 루드비히의 서슬 퍼런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청소년 모드를 적용해 놓아 온 황궁이 분홍 꽃으로 물들었었지…….
물론 그놈이 루드비히를 몇 번 암살하려고 들었기에 정당방위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처연하게 말하는 거랑은 좀 별개 아닌가.
진짜 골 때리네.
나는 푹 한숨을 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이현.”
나를 빤히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가만히 내 이름을 불렀다.
“왜.”
“거짓말은 나쁜가?”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뭔 어린애도 알 만한 얘기를 하고 있, 억!”
나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타앙! 루드비히가 앉아 있던 의자가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조금 전만 해도 의자에 앉아 있던 루드비히는 어느새 내 배를 깔고 앉아 있었다.
루드비히가 한 손으로 내 목을 쥐며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루드비히의 숨결이 느껴졌다. 등골이 서늘했다.
“컥…….”
“그래, 거짓말이 나쁘다는 건 어린애들도 다 아는 얘기지.”
막혀 오는 숨에 마구잡이로 루드비히를 밀어 냈지만, 루드비히는 미동도 없었다. 내 목에 뿌리내린 듯 강하게 옥죄는 팔에 정신이 아찔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랬지?”
목을 쥐는 손길이 더욱 강해졌다. 벗어나기 위해 하는 모든 시도들이 무색했다. 새파랗게 질린 낯이 보일 텐데도 루드비히는 무감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계까지 숨이 차오른 내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놔아……!”
“말해 봐. 내게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놔야 말을 해 주지, 이 새끼야!
저 멀리 강 건너에서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짓하고 계시는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 손주, 어쩌다 이 젊은 나이에 여기까지 왔누.
할머니, 손주는요. BL 게임을 하다가…….
그건 안 돼!
“커헉!”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자 목을 죄는 힘이 살짝 풀렸다. 열린 숨통 사이로 거센 기침이 흘러나왔다.
“개, 새끼야. 허억. 놔, 줘야 말을, 할 거, 헉, 아니야.”
“……실수.”
전혀 실수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여전히 루드비히의 손은 내 목 줄기를 쥐고 있었다.
아니,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물론 밥 먹듯이 하긴 했지만, 이 경우엔 루드비히에게 들킨 거짓말을 말하는 거겠지.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되살려 보았지만, 여전히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나는 다른 해결 방안을 찾아보았다.
<구속구에 묶여 있을 때에는 로그아웃할 수 없습니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