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
#1
Chapter 1.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와. 세상에, 이게 뭐야.”
나는 게임팩에서 먼지를 훌훌 털어 내며 작게 탄성을 질렀다.
게임팩 표면에는 붉은 리본에 눈이 가려지고 몸이 묶인 채 의자에 속박되어 있는 수와 수를 둘러싼 네 명의 공들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소년들은 어른이 된다>라는 타이틀이 필기체로 박혀 있었다.
“진짜 오랜만이네…….”
나는 감상에 젖어 한동안 게임팩을 바라보았다.
<소년들은 어른이 된다>, 통칭 <소년들>은 BL 게임계의 전설 아닌 레전드로 불리는 가상 현실 게임이었다.
사양 낮은 데스크톱은 오프닝도 못 볼 정도로 화려한 그래픽에, 모든 캐릭터에 고급 AI를 적용해 정말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까지 느낄 수 있는 혁명적인 게임이었다.
스토리가 워낙 장대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요약하자면 주인공인 내가 살짝 돌아 버린 공 네 명을 공략하는 게임이었다.
애들이 다 조금씩, 아니 조금 많이 돌아 있어서 하나 공략하는 것도 힘들다며 플레이어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죽고, 잘해 봤자 메리 배드 엔딩이었다.
나 역시 공 캐릭터 중 하나인 루드비히를 공략할 때, 즉위 직전에 그가 돌연 “황제 따윈 필요 없어. 내 세상엔 너만 있으면 족해.”라며 나를 지하실에 감금시켰을 땐 정말 울면서 플레이를 리셋해야 했다.
수십 번의 시도와 분석 끝에 나는 네 명의 호감도를 전부 99.99%까지 올려 넷 모두에게 청혼을 받았다.
남자인 내가 왜 이렇게 BL 게임을 열심히 했냐 하면, 스무 살 때 자취방 월세 벌어 보겠다고 게임 BJ를 잠깐 했었기 때문이다.
원룸의 반을 차지하는 비싼 가상 현실 게임 기계까지 야심 차게 들여서 방송을 시작했는데, 안타깝게도 방송업계에는 나만큼 게임을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월세는커녕 게임 기계를 사느라 생긴 카드 빚도 못 갚아 허덕이고 있을 때 여자 동기가 내게 추천해 준 게 이 게임이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워 보이는 점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방송도 할 건데, 굳이 BL 게임이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가 BL 게임을 하는 건 아직 블루 오션이니 팬층 확보에 도움이 될 거라는 동기의 제안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BL 게임 방송이…… 대박이 났다.
무려 천만 원을 정산받은 달도 있었다. 덕분에 방송 장비며, 게임 기기를 살 때 들었던 돈들을 한 번에 갚을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탄탄대로가 펼쳐질 것 같았지만…… 빌어먹을 군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1학년 때 말아먹은 학점을 메꾸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짬이 없었다. 물론 취업은 실패했지만.
젠장.
이래저래 졸업하고 본가로 들어가기 전, 오늘이 자취방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삿짐을 싸다 발견한 졸업 앨범이며 만화책을 보느라 한참 낄낄거렸다. 그렇게 이것저것 정리하던 도중 발견한 게 바로 이 게임팩이었다.
게임팩을 발견한 나는 묘한 향수에 휩싸였다.
“이때 진짜 즐거웠는데.”
스무 살 때의 나는 정말 이 게임을 위해 살았었다. 현실 세계의 하루와 게임 속 하루가 똑같이 흘러, 일정 시간대에 발생하는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수업도 빼먹기 일쑤였다. 덕분에 학점을 시원하게 말아먹어 고생 좀 했었지.
“흠, 한번 해 볼까.”
나는 게임팩을 든 채 뒤에 있는 게임 기계를 바라보았다. 군대 다녀와서 해 보려니까 엄두가 안 나기도 했고, 다른 게임을 튼 지 30분 만에 스파크 튀면서 타는 냄새도 나길래 그만뒀었다.
잠깐은 괜찮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게임 기계의 코드를 꽂아 넣었다.
[<소년들은 어른이 된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첫 접속일로부터 2,196일째]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다 싶더니 이내 그 위로 검은 글자들이 동동 떠올랐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접속 일수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스물하나에 그만두고 지금이 스물여섯이니까, 그새 약 5년 정도 지난 거네.
애들은 얼마나 삭았으려나.
이 게임이 아직까지도 갓겜이라고 회자되는 건, 시간이 지나면 세월에 따라 애들의 외모가 변한다는 거였다. 또한 결투나 전쟁으로 흉터가 생기면 그 흉터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나는 킥킥거리며 5년이 지난 공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루드비히는 황제 됐으니까 약간 근엄해졌으려나. 마티어스 걔는 워낙 애새끼 재질이라 안 늙었을 거 같고, 압실론은…… 모르겠다. 워낙 인상 자체가 희미한 놈이라. 체자레는 노안이었어서 지금은 오히려 좀 젊어 보일 수도 있겠네.
넷의 얼굴을 상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황궁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오…….”
황궁을 올려다본 나는 감탄을 터트렸다. 긴 전쟁 때문에 폐허에 가까웠던 황궁이 거짓말처럼 수도에서 가장 화려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뭐야, 진짜 애썼잖아…….”
코끝이 찡해지며 감동이 밀려왔다. 1950년대의 서울과 현재의 서울을 비교해 놓은 사진을 본 느낌이랄까. 여기까지 재건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아서 더 감동적이었다.
황궁 앞에는 각 다리 앞마다 경비대가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장창을 든 채 서 있었다. 화려한 황궁답게 감시도 삼엄했지만, 마법사인 내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5년 만에 왔는데, 좀 화려하게 등장해 볼까?”
나는 손 위에 작고 까만 구를 만들어 냈다. 구는 회전을 반복하며 금세 손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의 이상 행동에 걸음을 멈추고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을 향해 슬쩍 웃어 주며 구를 위로 던졌다. 수정 구슬 크기만 했던 구가 구름 높이까지 훅 떠올랐다.
“신성한 밤.”
후우웅-. 구가 터지며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던 정오의 하늘이 순식간에 밤처럼 새까맣게 물들었다. 신기하다는 듯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놀랐는지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도 있었다.
짜샤, 울지 마라. 형아가 멋진 거 보여 줄게.
나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어두워진 하늘 위로 불꽃을 쏘아 올렸다. 퍼엉-! 형형색색의 불꽃은 별보다 아름다운 글자를 수놓은 뒤 산화해 흩어졌다. 불꽃은 이 나라의 언어로 쓰여 있었지만, 대충 해석하자면 이랬다.
“형님 왔다, 새끼들아-!”
워낙 개인주의적인 녀석들이다 보니 황궁에 박혀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 그래도 다들 황실에서 한가락씩은 하고 있을 테니 수도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을 터였다.
수도 전체의 낮을 밤으로 물들여 놨으니 자기들이 눈치가 있다면 찾아오겠지.
흠, 체자레는 공작이니 공작령에 있으려나.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의 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 열리기 시작한 문 사이로 저 멀리서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누굴까.
나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내게 달려오는 남자가 누구일지를 가늠했다.
그런데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속도보다 말을 탄 남자가 달려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어어?”
이러다 사고 날 것 같은데.
“야! 천천히, 천천히 와!”
당황한 내가 천천히 오라며 손을 휘젓자 남자가 말을 탄 채 검을 빼 들었다. 그 기세가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콰지지직! 검기에 새까맣게 물든 검이 궤적을 긋자, 무쇠로 만들어진 두꺼운 문 세 개가 남자가 휘두른 칼에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그 힘이 어찌나 셌던지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내 머리칼이 뒤로 거세게 날릴 정도였다.
“…….”
아, 저건 루드비히다. 저 성질머리는 루드비히일 수밖에 없어.
그래도 황궁에서 막 검기를 날리던 놈은 아니었는데, 무엇이 저 아이를 저리도 각박하게 만들었는지.
쯧쯧 혀를 차고 있는 와중에도 루드비히는 빠르게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와 점차 가까워지며 루드비히의 얼굴 윤곽이 점차 선명해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엥?”
루드비히…… 엄청 삭았네.
5년이 아니라 10년은 지났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루드비히의 얼굴은 많이 삭아 있었다. 수줍게 웃던 소년 시절이 있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완연한 성인 남자가 된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나와 점차 가까워지는 루드비히의 몸을 콕 찍었다. 상태 창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름: 루드비히 폰 그리체 (Lv. 268)
나이: 25
직업: 그리체 제국 황제
호감도: ???
체력: 54% (상태 이상 ‘중독’)
마력: 98%
.
.
.
상태: 스킬 ‘포박’(Lv. 72)을 준비 중입니다.
마음 엿보기: ???]
레벨 열심히 올렸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뭐야, 포박 스킬 레벨이 왜 72나 돼? 밥 먹고 포박술만 연구했어? 나 없을 때 다른 애들이랑 BDSM이라도 했니?
나는 어이가 없어 이젠 나와 채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볼 땐 몰랐는데 루드비히는 왼손에 밧줄 뭉치를 들고 있었다.
뭐야, 설마 저걸로 나 묶으려고?
“…….”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다. 나를 보는 시선은 강렬하긴 했지만, 어쩐지 반가움은 전혀 없고 분노와 광기만이 가득해 보였다.
뭔가 불안한데…….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음 엿보기를 꾹 눌렀다.
스케일이 크긴 하지만 연애 중심의 게임답게 <소년들>에는 공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캐시 아이템 ‘돋보기’가 있었다.
비싼 데다 하루에 한 캐릭터에게만 쓸 수 있는 아주 귀한 아이템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내 예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돋보기’가 1개 소모되었습니다. ‘루드비히 폰 그리체’의 마음을 엿봅니다.>
마음 엿보기 옆에 있던 ‘???’이 희미해지며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음 엿보기: 죽인다.]
“……?”
하얗게 질려 앞을 바라보니 루드비히가 나를 노려보며 밧줄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밧줄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나오고 있었다.
저거 마나 차단용 밧줄 같은데. 고위 마법사한테 쓰는…….
뭔진 모르겠지만 뭔가 많이 잘못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