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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2/12)

외전


애틀턴은 어수선했다. 왕자는 오랜 세월 뜸을 들였던 만큼 냉큼 왕좌를 차지하기보다는 공을 들여 그것을 갈고 닦으려 했다. 즉위하기 전에 적대 세력들을 한바탕 숙청하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거기다 최근에는 달리 신경 쓸 일까지 생겼다. 대신관으로 내세울 만한 위인을 골라내야 했던 것이다. 앙살라테는 바쁜 시간을 쪼개어 신전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과로는 습관이 되기 쉽다 했던가. 앙살라테는 전쟁이 끝난 뒤로도 전혀 나태해지지 않은 채, 자신을 수십 갈래로 나누어서 온갖 일을 동시에 진행시키고 있었다. 열과 성을 다한 덕택일까, 대공의 죽음 이후로 고작 한 달이 흘렀을 뿐인데 애틀턴은 많이 회복되었다. 지금도 곳곳에 남은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어 가는 중이었다.

다만 ‘혈통의 증명’ 의식이 있었던 폐허는 복원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앙살라테는 의도적으로 손을 대지 않는 듯 신전의 복원 착수 요청에서 고개를 돌렸다. 수리는 그것이 열등감의 표출이면서 동시에 니카에 대한 견제라고 여겼다.

“새로운 시대가 되었으니까, 필요한 작업을 하는 거야.”

달변가 앙살라테는 그게 무슨 고결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말이다. 앙살라테가 한 말도 일견 일리는 있었다. 언제까지나 고리타분한 신비주의에 놀아나 왕을 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악습처럼 이어져 온 혈통에 대한 맹신을 끊을 때가 되었다….

하지만 드라코슨의 금발을 가진 건 앙살라테도 결국 마찬가지다. 새 시대, 새 주인? 대체 뭐가 바뀌었단 말인가. 왕좌에 금발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똑같다.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소중한 것을 아랑곳 없이 처부수고, 어쩔 수 없었다면서 시치미를 떼는.

수리는 그런 놈들에게 질릴 대로 질렸다.

뜨거운 차가 한 김 식을 때까지 코끝에 더운 김을 쐬며 뜸을 들였다.

문간에 선 시종이 혹시 왕녀님께서 좀 전에 아뢴 말씀을 듣지 못하셨을까 염려되었는지 “왕녀님, 뵙기를 청하는 자가 있사온데….”하고 반복했다. 같은 말을 세 번째 올리는 중이었다.

“들라 하세요.”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수리는 시선을 주지 않고 입술에 찻물을 댔다. 정갈한 발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마저도 무척이나 귀에 익었다. 하기는 수리는 이 남자와 오래도 함께 했다. 새해를 보냈으니 함께한 시간에도 숫자가 하나 더해져서 이제는 만 팔 년이었다.

“…왕녀님을 뵙습니다.”

왕녀의 일상을 이루던 기사. 니카였다. 눈밭에서 돌팔매질 당하며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던 청년이 이제는 썩 의젓해졌다. 수리는 간만에 유쾌한 마음으로 활짝 웃었다. 의지로 굳어진 창백한 낯이 영문을 몰라 의아한 빛을 띄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니카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입을 앙다물었다. 왕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반대로 연인을 두고 전 짝사랑 상대를 독대하러 온 것에 대한 거리낌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요.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군요. 니카….”

“미천한 신분으로 알현하는 게 큰 실례일 줄 압니다.”

“그러니 오자마자, 이만 물러가 보시겠다? 그가 꼴사나운 투기라도 부리던가요?”

“…….”

수리는 일부러 삐딱한 말씨를 고수했다. 눈앞의 고지식한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게 간만의 유희거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송곳처럼 뾰족한 질문을 툭 던졌다.

“나한테 한 충성 서약은 다 뭐였죠? 이런 식으로 돌아서버릴 거라면요.”

“…기사의 작위가 원래부터 없던 것으로 되어 사라지고 말았으니, 왕녀님께 충성의 맹세를 바쳤다는 사실 역시도 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좋은 변명거리를 얻었군요.”

“저는 그 맹세를 한때 나의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겼었지요.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에 송구할 따름입니다, 왕녀님.”

“멋대로 깨고말고 할 거면, 맹세라는 말은 뭐하러 있는 건가요?”

“…….”

“결국은 잔악후작 때문이군요. 그렇지요?”

“…그렇게 부르실 수 없습니다.”

“무섭기도 해라.”

클라텐의 형제. 수리는 진상을 알게 된 이후로도 탈타미오 후작더러 잔악후작이라 지칭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부크쉬낙슈로 부추김 당해서 앞뒤 사정도 따지지 않고 바란을 고문하고 몰아붙였던 것이야 자의가 아니었다 해도, 그녀는 원래부터 바란을 좋아한 적이 없다.

책임전가라고 불러도 좋다. 하지만 어쨌거나, 바란 탈타미오는 클라텐을 구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놓친 장본인이었다. 수리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만큼이나 바란이 미웠다.

종내에는 왕녀의 기사까지 빼앗아 가지 않았는가. 미워하지 않기도 힘들었다.

“송구합니다.”

니카는 바란 탈타미오의 영향력을 그야말로 담백하게 시인했다. 수리는 도리어 떨떠름해졌다.

“뭐, 송구해 할 필요까지 있나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그런 거죠. 믿었던 주군과 진리에게서까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이렇게 말하면서 수리는 넷째 손가락에 낀 손때 묻은 결혼반지를 살며시 매만졌다. 니카의 시선이 반지에 물끄러미 따라붙었다. 무슨 상념에 잠기는가 싶더니, 부지불식간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냉랭한 인상이 대번에 온유하게 풀렸다.

수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이런 면에서 감이 아주 좋은 편이었다. 더없이 우아하게 운을 띄웠다.

“…예쁘지요? 이런 반지는 요즘에도 잘 없어요. 가까이서 봐요.”

니카의 온몸이 두드러지게 움찔 떨었다. 회동그래 뜬 검은 눈에서 놀라움과 당황이 넘실거린다. 수리가 냉큼 소중한 반지를 빼서 들여다보라고 건네주었을 때 니카의 난색은 극에 달했다.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이에요. 귀부인들이 몇 번이나 누구의 작품인지 물었지만 나는 말해준 적이 없죠. 반지를 끼워줄 적에 이오가, 힘들게 찾은 장인이니까 우리끼리만 알자고 그랬거든요. 유치한 심보지만.”

수리가 제안했다.

“알려줄게요. 이 반지 만든 장인.”

“저는 별로 반지에 관심 가졌던 게-”

“죽고 못 사는 사이에 반지 하나 없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지참금이나 혼수도 없이 맨 몸으로 탈타미오에 들어가기보다는…. 그래도 반지 하나 준비하는 게 나을 거예요. 체면은 차려야지.”

니카와 바란이 곧 결혼이라도 하려는 줄 아는지 수리는 심각한 얼굴로 조언을 쏟아냈다. 니카는 실례를 무릅쓰고 이 이상한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저는 그와 결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신부지참금을 준비해야 할 이유는 더욱….”

“그치만 후작부인이 되는 건 경 쪽이잖아요?”

“예?”

‘후작부인’이라는 표현에 떨떠름해지는 게 먼저인지, 아니면 신분의 벽을 상기하며 서글픔에 잠기는 게 먼저인지 모르겠다. 니카는 혼란스러움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대답했다. 질문 못지않게 엉뚱한 대답이 나갔다.

“천민은 귀족의 첩실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경이라 부르는 것도 그만둬 주십시오.”

“아, 적응이 안 돼서 그러니 이해해요. 그리고 천민, 첩실…. 뭐 그런 걸 정말로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니겠죠? 바란 탈타미오는 경이 결혼의 ‘결’ 자만 꺼내 들어도 옳거니 하고 당장 계획에 착수할 사람이라고요. 관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걸요.”

수리는 문득 자식을 결혼시키는 어미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와서야 어리숙한 용인기사가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존재였는지 알 것 같았다. 수리가 뜬금없이 옥구슬 구르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내자 니카는 소리내어 그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눈빛으로만 궁금해했다.

“그때 말이에요. 나는 경을 우연히 만난 게 아니에요. 체첼그람으로 시찰을 갔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어요. 전부 다 앙살라테의 명령이었죠. 그도 막쉬롭에게 귀띔을 받았을 거예요.”

니카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크게 동요를 내보이지는 않았다. 왕녀에게 어떤 운명적인 인연과 책임을 전가하던 일이 다 언젯적인지 아득했다. 왜냐하면, 니카는 이미 ‘진짜’를 찾았으니까. 더는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었다.

“앙살라테가 경을 구슬릴 사람으로 날 선택했던 건, 반푼이 왕족인 내 처지가 용인과 비슷하다 여겼기 때문이었을 테죠.”

“…….”

“인정하기 싫지만 앙살라테가 옳았어요. 우린 조금 닮은 것 같아요. 불행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이나, 행복해지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는 모습까지도.”

왕녀는 니카에게 행복해진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축하인사 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했고, 부러워하는 것 같이도 들렸다. 그래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맹세라면 원하는 대로 거두어 가요.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어요. 후작의 안전을 위해서도, 반드시 해결 지어야 할 문제죠.”

“…그게 무엇입니까?”

니카가 신중히 물었다. 범상한 부탁이 아니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수리가 암울하고 아름다운 낯으로 방싯 미소지었다.

“복수요.”

* * *

천민으로 신분이 곤두박질치게 된 이후 니카는 왕성에 발 들이기가 쉽지 않아졌다. 오늘은 볼일이 있다던 왕녀가 친히 도움을 줘서 간신히 뒷구멍으로 출입한 예외적인 경우다.

명예가 진창에 나뒹군 바란 역시도 성에 머무르기 곤란한 처지인 건 마찬가지였다. 단두대에서 살아나온 후 바란과 니카는 곧장 탈타미오로 돌아갈지 궁리하다가, 결국 바란의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 장거리 이동을 삼가기로 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강 건너 탈타르로 가는 배편을 구했는데, 강동으로 도피하는 대공파세력들의 행렬이 어찌나 붐비던지, 그래도 선실이라 할 만한 게 딸린 표를 잡자 출발일까지 삼 주나 공백이 생겼다. 때문에 애틀턴에 잠깐 머물게 되어 숙소를 잡아야 했다. 어느 예술가가 지내던 작은 이층집에는 서재와 침실이 하나씩 딸렸다. 창문간에는 예술가가 두고 간 누렁잎이 지는 제라늄 화분이 하나 있었다. 둘이서 지내기엔 복닥거리는 감이 있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었다. 간병인을 고용하고 그 안에서 노닥거리며 책이나 들춰 보는 것이 요즈음 바란의 일상이었다.

아는 귀족집안이 지천에 널렸는데도, 그가 반역죄에 연루되었다는 말이 자자해지자 이제는 알은체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찾아오는 이도, 그 흔한 티파티 초대장마저도.

‘그러게 레이먼드가 하던 잔소리 말마따나 평소에 인덕을 쌓았어야 했나….’

바란은 무료한 시간을 독서와 낮잠으로 때우며 싱겁게 생각했다.

평민들 사는 건물에 세를 내고 들어가는 건 바란의 스물 여섯 인생에서 난생처음이었다. 불편할 법도 했는데, 바란은 니카와 함께한다는 사실만으로 늘상 즐거워했다. 귀족으로 태어나 여태 겪어본 적 없는 허름한 주거지에서도 불평이라곤 한마디도 늘어놓은 적이 없었다.

…좀 전까지는.

“이게 누구야아.”

딱딱한 침대에 누운 바란이 불퉁하게 니카를 맞았다. 늘씬한 다리를 한 번 꼬고 계속 발끝을 까딱거린다. 단단히 심통이 난 모양새다. 니카는 이 근사한 고양이를 도대체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겠어서 침대 앞에 우두커니 섰다. 엄격한 얼굴에 고민이 묻어났다.

“왕녀 전하 만나러 간 내 무정한 연인 아니야?”

“바란, 가서 이야기 나누고 오라고 한 건 너잖아.”

“그건 그때 얘기고.”

바란처럼 넉살이 좋지 않은 니카는 적당히 애교를 섞어 상황을 얼버무릴 줄 모른다. 주변머리가 없는 그에게는 변명조차도 먼 나라 이야기다. 니카는 좀처럼 그럴싸한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곤란한 침묵을 지켰다. 바란의 새초롬한 파란 눈 한 쌍이 점차 사나운 투기에 물들었다. 눈동자가 니카에게로 도르륵 굴렀다.

“뭐하러 일찍 들어왔어? 보고 싶어 마음에 사무치던, 그 소중한 왕녀님 곁에서 회포나 더 풀다 오지. 그게 뭐 대수라고. 안 그래?”

출입문 근처에서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고 바란의 눈치만 살피던 니카가 넌지시 물었다.

“지금 심술을 부리는 건가?”

“심술이라니.”

“그게 아니라면, 혹시…. 질투인가?”

바란은 니카의 물음에 발끈해서 평정을 잃었다. 여유롭게 빈정거리던 태도를 단숨에 집어치웠다. ‘질투’라는 단어에 더없이 정곡을 찔려 신경질이 난 까닭이었다. 바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어지럽게 뒤엉켰다.

“지금 질투라고 했어?”

“…….”

“아는 사람이 그래? 당신이 수리 드라코슨이 좋다고 못 배겨 하던 게 아주 먼 옛날 일도 아닌데, 대체 나더러 어떻게 견디라는 거야? 내가 가라고 했다고? 그래. 그랬지. 그렇게 여러 번 호출을 하는데, 뭔가 중요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었을 테니까.”

연인의 잠잠한 반응을 참다못한 바란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겨 가며 불평했다.

“그래서 죽도록 싫었는데도 보내줬어. 너는 옳거니 하면서 가버렸지.”

둘 사이에 있어서 왕녀는 청산되지 못한 문제였다. 바란은 어떻게든 이 대화로 끝장을 보려 하며 적극적으로 덤벼들었다. 그런데 니카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 듯이 또 그 묵묵한 눈을 했다. 천천히 바란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이런 젠장. 열여덟일 때는 내가 말하면 곧이곧대로 듣더니. 네가 도로 어른이 되고 나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울컥 서러움이 치밀었다. 바란은 입술을 일자로 꼭 물고 나직하게 말했다.

“나 장난하는 거 아니야. 네가 왕녀한테 빠져 지낸 세월은 너무 길어. 매일 불안해. 자칫하다간 널 뺏길 것 같단 말이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응…. 미안하다.”

니카는 바란의 왼손을 잡아당겨 그 위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조금 더 화내 줘.”

불덩이를 품은 듯이 열을 내고 화를 쏟아내던 바란이지만, 이 말을 듣고 나니 김이 다 샜다. 바란은 날카롭게 동공이 선 니카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모든 불안을 가시게 만드는 거대한 애정이 눈동자 밖에까지 넘실거렸다. 바란의 씩씩대던 어깨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뭐야, 진짜….”

“오늘 가서, 맹세를 철회했다.”

“왕녀한테 한 맹세?”

“그래. 평생을 두고 한 충성서약 말이다. 앞으로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은 전하가 아니니까…. 확실히 해두려고.”

이토록 말솜씨가 없는 남자가 연애에 썩 능숙하게 구는 게 이상했다. 아마 유려한 미사여구 없이도 환히 빛나는 애정을 가졌기 때문이겠지.

“으읏….”

바란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떻게든 관리하려고 했는데, 낯빛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생각처럼 바꿀 수 없었다. 결국 달달 떨던 오른손으로 침대시트를 끌어다가 되는대로 머리 위에 뒤집어썼다. 니카가 목을 울리며 웃었다. “사랑스러워.”하는 중얼거림이 얼핏 들렸다. 바란은 제발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니 내 마음 때문에 불안해 할 필요 없다. 바란. 나는 이미 너를 선택했으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니카는 침대시트를 살며시 들추고 바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바란이 대뜸 말했다.

“키스해 줘.”

어른이 된 니카는 부끄럼을 타며 빼지도 않는다. 그는 곧장 입술을 디밀었다. 오뚝한 바란의 코끝에 니카의 건조한 입술이 짧게 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바란은 두 팔을 들어 니카의 목 둘레에 들러붙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얹혀 있던 얄팍한 침대시트가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바란이 입술을 삐죽였다.

“이런 키스 말고.”

“하아, 바란…. 이 얘기는 이미 했던 걸로 아는데….”

붉은 입술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는 주제에 니카는 무뚝뚝함을 가장했다. 바란을 밀쳐내려는 듯이 꿈틀거렸지만 결코 적극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바란은 그게 너무 우습고도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니카는 걱정이 너무 많다. 완력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 흥분해서 바란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며 야릇한 분위기가 흐를 때마다 산통을 된통 깨버렸다. 그래서 연인이라고 도장을 쾅 찍은 지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 혀 한번 섞기가 요원했다. 몸 사정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바란의 몸이 다 안 나았으면, 그리고 용의 힘을 자각한 니카가 힘 조절을 좀 못하면,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래서 날 평생 독수공방 시킬 거야? 아니잖아…. 자기랑 나랑 서로 빨아줬던 거 기억해?”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바란이 그와 연인관계로 발돋움한 뒤부터 버릇 들인 호칭 중 하나였다. 저 호칭에 니카가 움찔거리는 것을 몇 차례 관찰하더니만, 자꾸 남발해서 효력이 다하면 곤란하다며, 필살기가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쓰곤 했다.

“…….”

“난 기억나는데. 아직도 그걸로…. 혼자 빼기도 한다고. 알고 있었어?”

손톱모양마저도 잘생긴 바란의 손이 니카의 가슴팍을 살금살금 간지럽혔다. 빨간 입술을 도톰하게 내밀고, 촉촉하게 젖은 눈이 깜빡거린다. 사람을 유혹해 동하게 만드는 건 바란이 타고 난 많은 재주 중 하나였다.

“니카. 귀 빨개졌다.”

“…너 때문이잖아.”

“상상했어?”

킥킥대는 웃음소리는 허겁지겁 부딪은 입술 사이로 삼켜졌다. 니카는 바란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뉘여 깊숙이 파고들었다.

“날 다치게 만들까 봐 걱정돼?”

“크, 읏….”

“으음…. 그러면, 아…. 내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기는 움직이지 말고 있으면 되잖아, 그렇지?”

안달을 내던 바란이 입을 맞추며 은근슬쩍 니카를 침대로 끌어들였다. 늘씬한 다리를 니카의 허벅지에 감아 당기자 하반신이 밀착되었다. 아직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이미 한껏 부풀어 오른 물건이 느껴졌다. 묵직한 부피감에 등골이 다 오싹거렸다. 드디어. 바란은 반쯤 돌아버린 것 같은 니카의 눈빛을 보며 기대감에 찬 콧소리를 흘렸다.

“응? 으응, 얼른…. 읏, 차가워!”

체온이 낮은 커다란 손바닥이 상의 안쪽으로 들어와 단단한 복부를 쓸어올렸다. 바란은 화들짝 놀라 몸을 떨고 눈을 찌푸렸다. 진한 욕정으로 목울음소리를 낼 만큼 흥분해 있던 니카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바란이 가슴 우리를 들썩이며 은근히 재촉해 보아도 거기까지였다. 차가운 손끝은 바란의 뱃가죽에 난 울퉁불퉁한 흉터를 살며시 더듬고 있었다.

“안 아파.”

바란은 음울한 니카의 낯을 견디지 못하고 얼른 달래는 소리를 했다.

“정말이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기에만 그래.”

“…….”

“아아, 젠장. 텄네.”

결국 오늘도 글렀다. 바란은 유혹하던 태도를 다 내려놓고 심드렁하게 드러누워 마른세수를 했다. 천천히 바란의 위에서 물러난 니카가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바란의 심통 난 발길질에 팔뚝을 두어 차례 걷어차였다. 억눌린 목소리가 나왔다.

“또 널 다치게 하느니, 이 자리에서 죽겠다.”

“어련하시겠어.”

“나는 진심이야.”

건조한 입술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바란의 동그랗고 반듯한 이마에 한 번, 코끝에 한 번, 그리고 입술 위에까지 쪼는 듯이 입을 맞춘다. 바란은 꽁해 있다 말고 그 작은 키스에 마음을 풀고 말았다.

“배고파아.”

“그래. 뭐라도 먹자.”

니카는 벌떡 일어나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동굴이 붕괴할 때 짓이겨졌던 바란의 발목은 아직도 기능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다. 의사는 다 낫더라도 바란이 다리를 절게 될 거라고 말했다. 당사자인 바란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니카는 아니었다. 목발을 디디면 못 오르내릴 것도 없는 계단을 혼자서는 못 다니게 했다.

잘못하면 부서지는 유리조각상을 다루는 것처럼, 니카는 바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원래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남 거느리며 살아 온 귀족 도련님 바란 탈타미오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칠 정도였다.

아래층에 있는 멀쩡한 다이닝테이블에서 식사를 해본 적은 당연히 손에 꼽았다. 식사 때가 되면 고용한 간병인이 침상으로 음식을 올렸다. 저녁 때는 퇴근한 간병인 대신 니카가 자리를 대신한다 뿐이지 취급은 똑같았다. 아니, 물컵 하나까지 수발을 들려고 하는 니카이니까 오히려 더 극성이 된다는 말이 맞겠다.

처음엔 불편한 내색을 하던 바란이지만 지금은 아기 새처럼 잘만 받아먹었다. 그는 니카가 원한다면 무슨 일이든 장단을 맞춰줄 수 있었다. 이런 인형놀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란. 할 말이 있다.”

약속된 균형을 유지하던 둘 사이의 평화가 깨어진 것은 식사 뒤 니카가 꺼내든 이야기 때문이었다. 니카는 이 말이 낳을 반응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망설이며 입을 뗐다. 기분 좋은 저녁 시간을 보내던 바란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뭐? 나 혼자 탈타르로 가라고?”

“그래.”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배편 구하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 이제 와서 날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바란은 불신에 잠겨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건지 궁금하다며 일부러 소리를 내고 웃었다. 미동도 없이 버티던 니카는 “그런 게 아니다. 미안해.”라고 재차 사과했다.

“농담이…. 아니구나?”

“미안하다.”

간헐적인 웃음이 잦아들었다. 바란은 니카가 이 뒤를 이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를 기다렸다. 사정을 한번 들어나 보겠다는 마음으로 가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런데 니카는 발설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사과만을 반복했다. 연거푸 다그쳐 물으니 결국 얘기를 꺼내놓았다.

“앙살라테가 나를 놓아줄 리 없다. 아무리 이제는 내가 승계권한을 완전히 잃었고, 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철저히 입막음 했다지만…. 사사바란을 비롯한 혈통주의 세력이 내게 들러붙으면 상황이 달라질 테니까. 선수를 치지 않으면 앙살라테는 언젠가 분명히 내 약점을 잡을 텐데, 그런 걸 원하지는 않는다.”

앙살라테 드라코슨을? 몇 문장을 듣는 것만으로 바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가능성이 태어나고 생생히 재생되었다. 상상의 끝은 이따금 죽음으로 이어졌다.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오늘 왕녀를 만나 무슨 제안이라도 들은 거겠지. 왕국기사작위를 내려놓고도 조금도 변함없이 우직한 남자였다. 위험이 감지되자마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판에 선뜻 뛰어들어버리다니.

“둘이 떠나기로 했었잖아. 여기서 벌어진 좆같은 일들 다 뒤로하고, 탈타르에서 요양하다가…. 둘이서 또 탈타미오로 가자고. 그렇게 약속했잖아.”

“왕국령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앙살라테의 손 안에 있는 거야. 내 말뜻을 모르겠어?”

바란은 듣기 싫다는 듯이 말없이 몸을 웅크렸다. 얼굴이 거의 파묻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니카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바란. 내 약점은 너야.”

찰나의 침묵이 감돌았지만 니카에게는 꼭 영원처럼 느껴졌다. “혼자 있고 싶어.”라고 바란이 말했고 니카는 식기구를 정리해 들고 방을 나가는 것 말고는 해줄 게 없었다. 문을 닫기 전에 뭔가 달래는 말을 꺼내고 싶어서 입을 뻐끔거리다가 도저히 그럴싸한 말을 떠올리지 못해 돌아섰다.

* * *

‘복수, 말씀이십니까? 헬린 힐벤은 이미-’

‘앙살라테가 만행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 생각하나요?’

‘…….’

처음 왕녀의 제안을 들었을 때 니카는 내심 기가 찼다. 어떻게 끝낸 전쟁인데…. 그녀의 뜻대로 앙살라테를 끌어내렸다가는 또다시 온 나라가 사공을 잃은 배 꼴이 되어서 외내부의 적에게 먹히고 말 터였다. 그러나 수리는 이 일이 결국 바란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말했다. 

앙살라테가 비록 지금은 바란을 얌전히 놓아준 척 군다지만, 그가 니카에 대한 경계태세를 허물지 않는 한은 계속 바란의 존재를 인질 잡을 거라고 했다. 니카가 겪어 본 바 앙살라테는 충분히 수틀리면 자신의 말을 무르고 비겁하게 굴 만한 위인이었다. 신전에서, 그리고 사형장에서 몇 번이나 그 증거를 목도했다.

이제부터 그가 떠안게 될 위험부담을 바란에게도 지울 수는 없으니 마음이 조금 아프더라도 이렇게 먼저 보내는 게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바란이 염려하고 속상해하는 것은 어떡하면 좋을까? 니카는 달래는 데 솜씨가 없다. 잘못한 게 있으니 쉽사리 마른 어깨를 감싸 안지도 못했다.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바란의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바란이 “됐어.”라고 말할 때까지.

됐다는 말은 괜찮다는 말과는 어감이 판이하게 다르다. 심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바란이 피곤하다며 축객령을 내렸다. 말투를 보니 아마 앞으로 수일간은 냉전을 이어가야 할 성싶었다.

하지만 결국은 니카의 선택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오히려 더 마음이 불편했다. 임자 있는 몸이라는 것을 망각했는지, 옛 버릇 못 버리고 여전히 몸 사릴 줄 모르는 니카의 행태에 바란은 단단히 화가 났다. 침묵은 그 다음 주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결국은 승선권에 쓰인 날짜가 도래했다.

니카는 사람을 사서 탈타르로 향하는 여정 동안 바란의 시중을 맡겼다. 바란이 아주 오래간만에 말을 건넸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니카의 안색이 온통 환히 변했다.

“…빨리 와야 해.”

“약속한다. 바란.”

“미워 죽겠어.”

니카는 못 견디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많이 미운가.”

“…아, 진짜.”

니카는 풀이 한껏 죽은 채 멋쩍게 손톱을 매만졌다. 그는 평소 침착하기 그지없고 냉철한 성격을 가진 남자이지만, 바란의 마음 앞에서는 문간을 기웃거리는 어린아이 같았다. 바란은 그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다. 치졸하고 불안에 시달리는 건 애정의 증거였다.

“미워질 리가 없잖아. 나의 니카.”

돌연 뒷목을 휘감아 홱 잡아당기는 힘에 니카는 순순히 몸을 맡겼다. 바란의 파란 눈이 가까워졌다. 말캉한 것이 입술에 닿았나 싶은 순간에 곧장 떨어져 나갔다. 밖으로 드러난 귓등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바란은 손끝으로 니카의 귓바퀴를 툭 건드렸다.

“보고 싶을 텐데. 정말이야.”

목발에 기대 절뚝거리며 승선하면서도 바란은 자꾸만 니카가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눈빛이 니카의 마음을 온통 미어지게 만들었다. 이토록 먼 거리에서 서로 쳐다보는 게 바란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익숙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란을 먼저 탈타르로 떠나보내고 나서, 니카는 곧장 왕녀가 부탁한 ‘일’에 착수했다. 머릿속은 일을 가능한 한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밤에 돌입한다. 퇴로를 다시 한 번 확인해.”

“경,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닙니까?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니 조금 더 지체하더라도 신중을 기해야 한단 말입니다. 암만 생각해도 후작님 보고 싶어서 무리하시는 거 같은데요.”

“…말이 많군.”

딴지를 건 것은 왕녀의 복수를 거드는 또 다른 인물이었다. 까탈스러운 말투는 무척이나 귀에 익었다. 레이먼드였다. 그는 본디 둘도 없는 왕자의 충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왕녀에게 붙어 모반을 꾀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앙살라테가 더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내전이 길어지는 바람에 왕관을 너무 오래 찾아다녔어요. 목적과 수단이 완벽히 뒤바뀌어버렸죠.”

“그래서 십수 년 모신 주군을 단번에 저버리겠다?”

“지금 절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취급하려는 겁니까?”

니카는 부정하지 않았다.

“비난은 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여기까지 오려고 이미 많은 것을 저버렸으니까…. 하지만 네 남은 평생토록 누구에게든 신뢰 받지 못하리라는 건 명백한 사실 아닌가. 발끈할 게 아니라 충분히 각오해야 할 일이다.”

“누구에게든, 말입니까.”

레이먼드는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뭐라고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니카는 그만 기가 차서 선수를 쳤다. 날카로운 두 눈이 가늘게 뜨였다.

“바란은 내 거야.”

“…누가 뭐랍디까?”

“그에게 괜한 짐이 되지 마라. 나 한 사람 견디는 것도 이미 벅찰 테니까.”

“이보세요. 전 남자한테 취미 없거든요.”

* * *

탈타르에는 바란의 조부가 생전에 구매해 둔 저택이 있었다. 동부 고위귀족들 사이에서는 수도와 다름없는 위명을 자랑하는 풍요의 도시 탈타르에 저택 하나 얻어두는 것이 관례였다. 다만 바란의 아버지인 선대후작 때부터는 탈타르로 겨울마다 피한 오는 일이 줄어, 저택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바란은 마차에 달린 동그란 창 밖에 시선을 주었다. 내성에 들어오고 나서도 또 다시 한참 마차를 몰아 달려가는 중이었다. 귀족들 거주구역은 내성 안쪽에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탄탄하게 포장된 도로 좌우로 으리으리한 대저택들이 늘어섰다. 그중에 유독 관리되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저택이 눈에 띄었다. 백조무리에 섞인 까마귀 같은 자태였다.

검은 창살 너머로 드러난 분수대는 물이 말랐고 주변에 파묻은 값비싼 장미들은 지난 해 흑반병이 돌아 다 말라 죽었다는 보고를 얼핏 전해 들었다. 저택을 이루는 벽돌마다 거무죽죽한 땟국이 꼈고 잎을 떨구어 그물망처럼 보이는 담쟁이 줄기는 외벽에 지나치게 무성했다. 앞에서 바삐 달리던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마차 문을 열고 고용된 시종 한 사람이 다급히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탈타르인가….’

바란은 한참 뒤에야 결심이 선 듯 마차에서 내렸지만, 시종의 성의 넘치는 손은 붙잡지 않았다. 대신 목발을 짚어 천천히 걸어나갔다. 다리의 부상으로 몸을 잘 가누지 못하면서도 귀족답게 고압적으로 구는 건 여전했다.

오랜 여정 끝에 다다른 저택은 외견상 엉망이었다. 특히 정원은 길가의 거지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 되었다. 사람을 시켜 내부를 적당히 정리해두도록 했지만 정원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첫째로, 좀 있으면 탈타미오로 떠나는 마당에 괜한 돈 쓰는 꼴이기 때문이었고, 둘째, 바람이 쌀쌀하고 정원수가 나뭇잎을 다 떨군 이 겨울에 정원사를 고용하는 건 수지가 안 맞았다.

탈타르의 삭막한 저택에 처박혀 두문불출하는 바란은 이웃에서 그야말로 조롱거리였다. 대공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내전 중에도 잔악후작에 대한 여론은 원래가 안 좋은 편이긴 했었다. 단두대에서 왕자의 마음을 사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 이후로는 신의도 없는 작자라고 뒷소문이 나돌았다.

새벽마다 저택의 창살문 앞에 괜스레 오물을 쏟아놓는 유치한 수법으로 이웃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바란은 저택에서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밖으로 나서는 즉시 구정물을 뒤집어쓸 게 뻔한데, 괜히 저 자들 흥을 돋구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우울한 기분으로 애틀턴에서 출발한 배편들을 보고 받을 뿐이었다.

뜻밖의 손님이 바란을 찾아온 건 니카가 없는 사흘을 보내고 나서였다. 나흘째 되던 날 오전에 대충 멀건 수프로 마른 입술이나 적시고 있는데 고용인이 기별도 없이 방문한 손님이 있노라고 언질을 주었다.

“뭐? 손님이라니 무슨 소리야. 날 찾아올 사람이 대체 누가 있어.”

“아겐호프의 장자라고 합니다.”

“…아겐호프?”

바란은 그 이름을 천천히 되뇌인다.

‘믿을게요.’

밀렌 아겐호프, 저항 없이 이용만 당하던 멍청한 꼬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란은 시종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꽤 오랜 시간 망설이고 뜸을 들였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밀렌 아겐호프가 이만 포기하고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그 애는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고집을 부려서라도 이루고 마는 악착 같은 기질이 있었다. 돌연 소나기가 쏟아지려고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바란은 밀렌을 안으로 들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겐호프와 기타 날만도 남작과 연관된 친족들은 대공파 귀족 중에서는 대단히 너그러운 처우를 받은 편이었다. 날만도가 전쟁범죄로부터 민간인을 보호하고자 내전 내내 꾸준히 펼쳐 온 노력이 크게 참작된 결과였다. 이들 역시 숙청과 재건으로 소란스러운 애틀턴을 떠나 탈타르로 건너왔다고 전해 들었다.

바란은 밀렌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궁금해졌다. 바란이 저 어리고 순진한 꼬마를 여태 어떻게 대했던가? 거짓말로 한껏 달래어 이용하고 착취한 다음, 끝내는 왕자의 품에다 전리품처럼 안겨주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니 밀렌은 아마 그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누구나 학을 떼는 바란에게 온갖 호의를 보여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는데도, 바란이 그에게 돌려준 것은 기껏해야 배신감이나 짐 덩어리 취급이 다였으니까.

울퉁불퉁한 틈새마다 먼지가 낀 문짝이 밀려나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들어섰다.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다. 밀렌 아겐호프였다. 멍청하도록 선량한 낯짝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새 마음고생, 몸 고생으로 살이 쏙 빠져 핼쓱해져 있었다.

“…후작님.”

그 애가 바란이 알던 것보다 깊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했다. 깍듯한 존칭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의아했다. 궁금증은 입술을 달싹거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뭐라고 운을 떼어야 할지 모르겠다.

너 괜찮으냐, 이건 바란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너무 양심이 없는 서두고. 잘 지냈느냐, 이건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이라 구태여 꺼낼 필요가 없다.

“전 괜찮아요. 잘 지냈어요.”

뒷목을 긁적이며 아이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바란의 속을 전부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티 없이 환한 웃음에 부딪힌 바란은 허를 찔린 것처럼 숨이 턱 멎었다. 그는 누가 봐도 한 방 먹은 것 같은 표정을 황급히 감추며 괜한 윽박을 질렀다.

“안 궁금해. 물어보지도 않았고.”

“앗, 죄송합니다….”

“너, 여긴 왜 왔어.”

“그냥, 일이 전부 끝난 듯하니 한번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고…. 탈타르로 오셨다는 소문이 쫙 돌았습니다. 뵙고 인사라도 드려야지 싶었어요. 게다가 저번에, 책 이야기를 드렸었지 않습니까?”

밀렌은 뒤로 감춘 손을 앞으로 꾸물꾸물 꺼내보였다. 그런대로 두께가 있는 책이었다. 손때 묻은 가죽 커버가 번들거렸다. 바란은 복잡한 감정을 미뤄두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의 삶, 나의 싸움’이라고 적힌 책등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저건 한동안 대공파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던 헬린 힐벤의 자서전이었으니까. 머뭇거리던 밀렌이 책을 펼쳤다. 끄트머리가 너덜거리도록 닳은 페이지다.

…제 6장. 바란 탈타미오 후작.

바란은 펼쳐진 책을 한번, 밀렌을 한번 보았다. 밀렌이 멋쩍게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여기다 사인을 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난리 통도 이젠 끝났으니까, 해주시려나 싶어서….”

“너….”

꾸짖을 만한 점은 많았다. 대공이 죽고 나서도 그의 자서전을 들고 길거리를 활보하다가 무슨 꼬투리라도 잡힌다면 크게 경을 칠 텐데. 바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말자….”

가볍게 마른세수를 한 바란이 우아하게 손을 뻗었다. 밀렌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헐레벌떡 달려 와 바란의 손아귀에 책을 꼭 쥐여주었다.

* * *

부둣가에는 보부상들이 출항시간에 맞추어 나타나 좌판을 폈다. 심심풀이로 즐길 만한 물건들도 그들이 취급하는 품목이었다.

“책도 있나?”

“있기야 있지만….”

보부상은 니카를 곁눈질하며 뜸을 들였다. 니카가 혼혈인인 것은 분명한데 옷맵시가 천하지 않아, 머릿속으로 치밀한 계산을 거치는 듯했다. 장사에 보탬이 되는 사람인가, 하고. 니카는 돈주머니를 일부러 짤랑대었다. 보부상의 눈빛이 변했다.

“제가 가진 건 여기 이 세 권이 전부입니다.”

책은 글을 알아야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잘 팔리는 놀잇감이 아니었다. 별 잡동사니가 다 있는 좌판에서도 책이라곤 몇 권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드문 책 중에 하필 헬린 힐벤의 자서전이 있었다. 모서리가 한껏 닳아빠진 초라한 꼴이었다. 니카는 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 주워들었다.

죽어버린 왕통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차가웠다. 사람들은 헬린 힐벤의 존재에 더 이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고, 그저 그대로 잊어만 갔다. 아마 이 책도 그런 식으로 헐값에 넘겨져서 보부상 좌판 위까지 흘러들어왔겠지. 서글픈 이야기다.

제 6장. 바란 탈타미오 후작에 관하여. 굵은 글자 아래로 깨알 같은 서문이 붙는다.

[…말투는 북부 귀족답게 톡 쏘는 구석이 있어 이따금 건방지다 느껴질 수 있다. 걸핏하면 파란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드는데 윗사람 된 도리로 매번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곧잘 순응하니까 다루기 어렵지는 않다. 드라코슨에게 이처럼 입바른 소리를 디밀며 대드는 건 어지간한 배짱으로는 못할 일이다. 바란 탈타미오는 습관적으로 해낸다.]

니카의 이마에 주름이 진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그는 현자를 얼간이로 만든다.]

챕터를 시작할 때마다 가볍게 늘어놓는 개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페이지를 들추자 서문 뒤쪽으로는 바란 탈타미오의 ‘미남계’와 전장에서의 활약에 대해 기술하고 있었다. 그 내용마저도 황당할 정도로 부풀려진 게 많았다. 일부러 익살스럽고 과장되게 꾸며낸 듯했다.

‘바란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을까.’

그렇다면 미성숙한 관심표현이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쌌다. 니카는 대공이 바란에게 단순한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았다. 꼬집어 말하자면 의존증에 가깝다. 얄렌의 성녀가 헬린을 과하게 엄히 키운 것은 유명한 얘기였다. 자신을 정당한 존재라고 느끼기 위해서 바란의 감언이설이 꼭 필요했겠지. 바란은 미친놈들 꼬여내는데 특출나니까.

천하의 헬린 힐벤이 측은한 멍청이처럼 느껴지는 날이 다 오는군. 니카는 생각했다.

‘…바란이 못 보게 해야겠다.’

니카는 책을 무심히 갑판 밖으로 내던졌다. 아직 못 읽은 페이지들이 거센 강바람에 나부끼며 펄럭거렸다. 책의 최후를 지켜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너른 강물 어드메에 처박혀 물기에 젖어 들었을 것이다. 니카는 실없이 웃었다. 헬린 힐벤의 이야기는 앞으로 이렇게 녹아 없어져서 끝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겠지.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니카의 완승이었다.

물살이 거친 밤이었다. 강을 건너는 데 보통 소요되는 시간보다 반나절을 더 물 위에서 보냈다. 니카가 탈타르에 도착한 것은 승선한 이튿날 점심 때 즈음이었고, 바란을 앞서 보내고 난 뒤로부터는 정확히 일주일하고도 세 시간 삼십 분 지난 시점이었다.

탈타르에는 이미 한바탕 호외가 돌아 어수선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축축한 공기를 뒤집고 강풍이 휘몰아쳤다. 종이 몇 장이 요란스레 나부끼며 구르다가 니카의 다리께에 와 붙었다. 니카는 그것을 끄집어 올려 굵은 글씨체로 찍어낸 머리글과 부제만 간략히 훑어보았다.

[애틀턴, 여왕을 위하여 들고 일어나다.]

신전 복구를 차일피일 미루고 헬린 힐벤의 흔적 지우기에 나선 앙살라테는 용혈이 갖는 정통성을 옛 관습 취급하며 깨부수기에 이르렀다. 그게 자충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헬린을 증오하느라고 그 자신 역시도 기득권층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까닭이리라.

‘복수라니. 저더러 그를 죽이란 말씀이십니까?’

‘죽인다고요? 아하하…. 아니에요. 고작 그거 하자고 위대하신 체첼드롭의 아들을 불러냈겠어요? 죽음은 안식이고 평화예요. 살생이 복수가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죠. 나는 앙살라테가 손아귀에 움켜주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을 거예요.’

‘…그게 무엇입니까?’

수리 드라코슨은 그렇게 왕좌를 겨누기로 결심했다.

‘뭐긴요. 그 잘난 권력이죠.’

왕자의 그림자에 숨어서 선행과 봉사를 일삼아 온 수리 드라코슨은 참으로 영명한 여자였다. 웅크린 채로도 왕자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백성들 뇌리에 똑똑히 새겨 왔던 것이다. 백성을 섬기는 왕녀, 신전과 협력하여 내전과 기근에 대비해 구휼식량을 비축한 장본인이라고.

헬린 힐벤의 죽음과 신전건물 붕괴 이후로 ‘용혈’의 정당성이 크게 무너진 드라코슨 왕가의 처지를 생각하면, 수리 드라코슨에게 있어서 가장 큰 트집거리인 혈통문제도 큰 논란이 되지 못했다.

[…한편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는 대관식을 앞두고 독물에 당하여 며칠째 시력을 잃었다. 회복이 가능한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눈먼 왕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그가 왕좌에 오르는 것이 굶주린 백성을 위한 최선의 방법인가 다시 생각할 시점이 왔다. 시대가 바뀌었고 왕성 내 대신전이 붕괴한 이 땅에서 더 이상 고리타분한 장자계승을 주장할 이유는 남지 않았다. 일례로 소왕국연합은 여왕의 통치 아래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 않은가.]

귀족들은 오륙 년 전 강동지역을 휩쓴 민란이 우두머리인 클라텐 탈타미오의 죽음으로 허망하게 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위로 두터운 흙과 얼음이 덮였을지언정, 만인평등에 대한 열망은 알뿌리처럼 힘을 비축한 채로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앙살라테는 백성들이 원하는 그런 세상에서는 결단코 적임자가 아니었다.

니카는 다르탈루 강을 돌아보았다.

‘탈타르는 애틀턴과 지나치게 가까워.’

변화의 돌풍이 밀어닥친다면 애틀턴과 가까운 탈타르는 아마 영향을 크게 받을 것이다. 탈타미오로 돌아가는 여정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앙살라테의 포도주에 독을 탄 혐의가 언제 니카를 겨눌지 모르는 상황이니 더욱 서두르는 편이 좋았다.

탈타르의 마차들은 유독 콧대가 높았다. 열심히 손을 흔드는 니카를 보고도 콧방귀를 훅 뀌며 모른 체 지나가버리기 일쑤였다. 콧등이 붉은 주정뱅이 마부 한 사람을 붙잡고 보통 삯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웃돈을 얹어주겠다고 사정사정을 한 뒤에야 마차를 잡아 탈 수 있었다. 내리려는데 천한 용인이 앉았던 자리에 어떻게 손님을 받겠느냐면서 하루 치 일삯을 전부 요구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니카는 급한 마음에 끝내 그렇게 해주고 말았다.

멸시와 경멸. 과연 앙살라테가 당부했던 대로 니카의 초라한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니카는 생각했다.

‘나의 태양.’

바란이 있었으니까.

외투 안쪽에 꿰매어 둔 주머니에서 두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니카는 외투 바깥에서 손으로 툭툭, 주머니께를 건드려 각진 부피감을 느꼈다. 마음에 조급증이 내달렸다. 어서 만나고 싶어.

‘…내 세상을 온통 밝아지게 해.’

니카는 바란의 존재를 곧잘 별이나 태양 따위에 비유하곤 했다. 너무 가까이 했다가는 니카를 깡그리 태워버릴 것 같고, 눈이 부시는 빛을 뿜어낸다는 점, 그리고 그의 존재에 니카가 무한한 경외를 느낀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여태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말라죽은 스탠다드 장미가 잡초와 어우러져 자라는 형편없는 탈타미오 저택 정원을 가로질러, 니카가 직접 고용한 사람의 눈인사를 받으며 들어서서, 웅장한 층계를 두 칸씩 쿵쾅대며 올라, 마침내 바란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을 때.

“누가 이렇게 소란을…니카?”

그리고 사랑하는 그의 연인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과 침대 위에 나란히 앉아 무언가에 오붓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때서야 니카는 이 비유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순정놀음이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니카! 돌아왔구나!”라며 밝은 목소리로 반기는 연인을 마주하고도 니카의 심장은 서늘하게 타들어갔다.

내리쬐는 햇살을 독점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니카가 품은 감정은 햇살을 사랑하는 인간의 따스하고 보드라운 마음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추레한 독점욕이고 시기이고 질투였다. 진창과 시궁쥐와 무저갱 따위에 비유하는 게 어울렸다. 

니카는 바란에 대한 신뢰를 차치해두고 온갖 추잡한 상상력을 먼저 동원해 저 어린 청년과 바란이 어떤 관계인지 추리해내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은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다.

“처음 뵙습니다. 밀렌 아겐호프입니다. 경.”

청년이 먼저 알은체를 했다. 재수 없는 금발과 미끈한 낯짝이 주위에서 미남 소리 좀 들었을 법 해 보였다. 상대를 가늠하듯이 가느다란 눈으로 훑던 니카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밀렌 아겐호프라고? 정말이지 기나긴 이름이다. 반면에 자신은 어떤가. 이름 뒤에 이어지는 저런 든든한 성씨 하나 없다.

원래 같았으면 이젠 기사작위도 없는 마당이니 ‘경’이라 지칭하지 말라고 짚을 터인데, 니카는 구태여 꼬집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다. 그 호칭마저 사라지고 나면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금발의 귀족 청년과 견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게 비참해서.

“밀렌. 이만 돌아가.”

바란이 끼어들었다. 니카는 괜히 속이 꼬였다. 저토록 격식 없이 이름으로 부르다니? 뒤틀린 심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고 주먹을 꾹 쥐었다.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 건강 챙기시구요.”

밀렌 아겐호프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모르는 애송이들이나 지을 수 있는 말간 웃음을 내보이며 다음 방문을 기약했다. 점점 더 마음에 안 들었다.

“자주…. 자주 만나는 건가.”

문이 닫히자마자 급히 질문을 던진 것도 그래서였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목구멍을 갉작갉작 긁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갔다. 말씨는 더듬거렸고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누굴 말이야?”

바란이 느긋이 반문했다. 니카가 생각하기에는 시치미를 떼는 것 같았다. 거리낄 게 없다면 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었다. 니카의 가슴 한 켠에 불안감이 내달리고 심장이 꼭 조여들었다.

“저 꼬마.”

“밀렌?”

“친한 듯이 부르는군.”

“뭐?”

침대 위에 걸터앉은 바란은 비스듬히 다리를 꼬았다. 고개를 뒤로 살그머니 젖히고 한참이나 니카를 뜯어보았다. 가느다래진 눈이 저의를 알 수 없는 장난기로 빛났다. 멀뚱히 선 니카가 무안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지경에 이르러서야 바란이 웃음소리와 함께 말을 텄다.

“아, 몰랐어…. 의젓한 우리 니카도 질투란 걸 하네.”

니카의 두 귓불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처음엔 고개를 가로저어 부정했는데, 바란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니카 더러 투기가 많은 연인이라 놀려대자 결국은 의미 없는 저항을 멈췄다. 대신 큼지막한 손으로 얼굴 반쪽을 가리고, 차양 같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워 바란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추잡하기 그지없는 감정의 단면을 엿보여 수치스럽다는 듯이.

“너 없는 동안 내가 저 애송이랑 붙어먹기라도 했을까 걱정했어?”

바란은 일부러 그의 연약한 속을 살살 긁었다. 파렴치한 단어들을 골라 귓등에 더욱 붉게 불을 붙이고, 눈썹을 움찔거리게 하고, 결국엔 니카가 도로 입을 떼게 만들었다.

“바란! 난 그런 추잡한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고? 맞을걸. 질투라는 게 원래 상상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일이잖아. 나도 일전에는 네가 왕녀랑 뒹굴었을까 봐 노심초사 했었으니까 잘 알지.”

니카는 그 말이 가진 위력에 눌려 천천히 입을 다물었지만 불편한 마음을 완벽히 감추지 못했다. 사나운 눈빛을 아래로 내리깔고 들뜬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난 그런 상상 안 했다.”

“했든 안 했든 상관 없어. 중요한 건 아겐호프 애송이 고추에는 내가 정말 요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니까.”

“바란, 제발!”

“넌 무슨 어른이 돼서 이깟 단어들에 수줍음을 타?”

“부탁이니까 그렇게 저렴하게 말하지 좀 마라. 아랫사람들이 우습게 알기 십상이니까….”

“아, 까다로워 죽겠네.”

“바란!”

짧게 혀를 찬 바란이 팔을 좌우로 뻗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하며 골치 아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귀족신분에 걸맞은 어투로 니카를 맞아주겠다며 익살을 부렸다. 섬세한 어깨가 상완과 이어져 매끄러운 곡선으로 뻗었다. 누워서 회복에 집중하는 동안 근손실이 많아 바란의 몸선은 전보다 둥글고 부드러워졌다.

“무척 보고 싶었으니, 내 사랑. 부디 이리로 와 주시오.”

웃고 말아야 하는 장난질이다. 그런데도 니카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바란이 예쁜 눈을 반짝이면서 썩 비장한 미소를 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사랑’이라는 고풍스러운 호칭이 니카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취향에 꼭 맞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니카는 목이 바짝 말라오도록 달콤한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리고 바란 탈타미오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생각했다. 썩은 생선더미에서 태어난 이후 니카가 겪어 온 황량한 세상은 바란의 존재가 있어 환히 빛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다행이다.’

절절히 생각한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쌀쌀한 겨울바람이 들이쳤다. 좀 있으면 봄인데도 여전히 날씨는 따뜻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니카는 스며든 바람결에 뒤엉킨 금발을 나풀대는 바란을 눈여겨 보았다.

바란은 가끔 니카에게 한 폭의 미술품 같은 감상을 주었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똑 떼어다 소장하고 싶은 그림 말이다. 지금도 그런 순간들 중 하나였다. 니카는 바란의 머리칼이 뻗친 방향이나 붉은 입술이 비뚜름해진 각도, 공중을 떠다니는 금색 먼지, 구김이 간 융단 커튼, 조금 싸늘한 기온과 침대시트의 누리끼리한 색깔, 협탁에 놓인 말린 허브가 어떤 향을 내는지 한 톨도 빠짐없이 완벽히 기억하고 싶다는 욕구에 휩싸였다.

“니카, 왜 멍하니 있어? 애인이 오래간만에 한번 안아보자는데…. 팔 떨어지겠다.”

니카는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동문서답했다.

“…좋아한다.”

“어?”

깜짝 놀란 토끼처럼 바란의 눈이 둥글어졌다. 언제나 새침하게 내빼기 바쁜 니카가 초장부터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드물었다. 곧 바란의 눈매가 가늘어지고 두 뺨에 볼록한 웃음이 솟았다.

“어떡하지. 너무 행복해서 무서워….”

“무섭다고?”

“그냥, 그런 생각들 때문에….”

바란이 괜스레 손톱을 매만졌다.

“만약에, 하고 시작되는 나쁜 상상들. 가령 네가 나한테 질려서 다른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린다거나, 으읍-”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무섭게 달려든 니카의 입술은 허기진 야수 같았다. 내숭은 전부 집어치우고 입 안을 멋대로 헤집으며 두꺼운 혀로 민감한 부분을 쑤셨다. 바란은 기세에 못 이겨 침대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를 찧지 않도록 재빨리 뒤통수를 받친 니카의 커다란 손바닥이 기세를 바꾸어 뒷목을 살금살금 어루만졌다.

“응, 아…잠깐만, 천천히….”

“우리가 하고 있는 게 무슨 십 대 애송이들 연애놀음인 것 같나? 착각하지 마. 우리는 서로를 반 씩 나눠 가졌다. 질렸다는 시시한 감정으로 떨구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야.”

진한 한숨에 욕정이 묻어나왔다. 니카는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손으로 빗어 넘겼다.

“넌 내가 평생토록 찾아온 안식이다. 그리 쉽게 놓을 리가 없잖아.”

“…키스로는 모자라.”

바란이 애걸했다. 속으로는 잘 들어먹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니카는 어차피 또 그 대단한 절제심 덕택에 뱃가죽만 좀 어루만지다가 말 것이다.

“응? 나랑 하자. 지금….”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음이 동하니 과연 바란이 최근 욕구불만이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수도자마냥 금욕하는데 속 편히 허허 웃을 위인이 세상에 대체 몇이나 있을까.

바란은 여전히 등께를 간지럽히고 있는 거친 손가락을 꾹 붙들어 잡았다. 그걸 앞으로 끄집어 가져와 튜닉 안으로 이끌었다. 니카의 손은 저항 없이 끌려 와 따뜻한 살갗을 매만졌다. 간지러움을 참느라고 바란의 뺨에 붉은 물이 들었다.

“앗…. 차가워, 니카!”

니카의 손은 지난번에 만지며 사색이 되었던 흉터 위를 지났다. 니카의 눈썹이 약간 찌푸려졌다. 손은 그대로 더 깊이 기어올라 얄팍한 상의를 가슴 위까지 걷어올렸다. 이토록 대담하게 구는 건 오랜만이다. 하긴 못 보는 동안 애가 닳았던 것은 바란 혼자만이 아니었을 테니까.

바란은 고개를 들어 튜닉을 완전히 벗어냈다. 옴폭하게 패인 예쁜 쇄골과 붕대에 감긴 어깻죽지가 전부 드러났다. 니카는 조심스럽게 흉터들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찬 공기에 놀라 솜털을 세운 뽀얀 살갗이 니카의 손길에 반응해 파르르 떨었다.

“흐읏….”

흉터마저 그림처럼 아름답긴 했으나 그럼에도 단단한 무인의 몸이었다. 기실 바란은 또래 귀족 중에 검을 잘 쓰는 축이었다. 비록 검사로서의 명성이 미모에 묻힌 바 있긴 했으나 전장에서 그가 싸우는 모습을 본 자들은 바란의 검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일이 없었다. 오래토록 누워있느라 비교적 근육이 줄고 몸이 말랑말랑해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납작한 아랫배나 갈라진 가슴에는 단련의 흔적이 엿보였다.

벗은 몸을 낱낱이 훑는 니카의 눈빛은 열기를 띠었으나, 또 반쯤은 서글픔에 절어 있기도 했다.

“상처가 많군.”

“대단한 거 아니야. 대부분 전장에서 입은 상처고.”

“나머지는?”

바란은 약간 눈치를 보며 실토했다.

“헬린 힐벤.”

“…그 개자식.”

니카는 뭐라도 깨부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잠깐 바란의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을 정도의 압력이 공기 중에 짙어지다가 말끔히 없어졌다. 처부술 놈이 벌써 명을 다한 마당에 괜한 바란을 앞에 두고 화를 내서 분위기를 망칠 건 뭔가 싶었던 까닭이었다.

대신에 그는 바란의 몸 위에 남은 모든 상처 위에다 남김없이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부서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이 살그머니 다가와 경애로 가득한 입맞춤을 남긴다. 낮은 기온에 익숙해진 바란의 살갗에 뜨거운 혀가 닿아 할짝거렸다. 바란은 끓는 물에 살갗을 데인 듯했다가, 입술이 떨어지고 나면 반대로 오한이 들어 죽을 맛이었다. 니카는 장난을 거는 어린 짐승처럼 가끔 이를 세우기도 했다.

“아, 흣….”

창부처럼 할딱거리는 목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바란은 평생토록 이런 교성 따위는 내 본 역사가 없었다. 제 귀로 듣기에도 괴상했다. 손가락을 입술에 물고 숨을 죽였다.

“니, 카, 응…!”

“쉬이…. 놀라지 마. 괜찮아.”

“사람 살을, 아! 왜 자꾸 물어. 이 식인종….”

볼멘소리에 니카가 웃는다. 유쾌한 웃음소리가 쏟아지자 바란도 이윽고 따라 웃고 말았다. 하지만 평화로운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추위에 놀라 바짝 선 분홍빛 돌기에 니카가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희고 보드라운 가슴 위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젖꼭지를 니카가 스치듯이 건드렸다.

“앗! 뭐, 뭐야….”

바란의 표정이 일변하고 몸이 뒤틀렸다. 도드라진 갈비뼈가 들썩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예민한 반응이었다. 니카는 죄를 지은 듯한 표정으로 곤혹스레 입을 다물었다. 침대를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킨 바란은 덫에서 빠져나가려는 가련한 사냥감처럼 바르작댔다.

“아, 아, 아니야…. 니카. 거기, 가슴 이상해….”

간지럼과 생경함이 뒤섞인 이상한 감각 탓에 바란은 왈칵 겁이 치밀었다. 잠시 적막에 잠겼던 니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하고. 왜 대뜸 사과를 하는 걸까? 바란은 니카의 검은 머리통이 가슴팍에 매달리는 것을 보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붉고 뜨거운 혀가 니카의 입술을 적시며 밀려 나와 꼿꼿이 선 바란의 젖꼭지를 핥았다. 

“아으읏!”

니카는 혀끝을 뾰족하게 세워 젖꼭지를 몇 번 뭉갰다. 꾹 누를 때마다 새된 비명이 새어 나왔다. 바란은 온 몸이 뻣뻣해질 때까지 힘을 주었다.

발그레한 혈색을 온 얼굴에 물들이고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가로저으며 애걸하는 바란의 모습은 전에 없던 가학심을 부추겼다. 금색 속눈썹이 물기에 젖은 것을 보니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달아올라 거의 아무런 자극 없이도 진한 정을 토해낼 수 있을 듯했다. 니카는 참지 못하고 바란의 유두를 입 안 깊이 빨아들였다. 젖 빠는 아이처럼 오물거리며 탄탄한 가슴 살을 한껏 맛봤다.

“아, 으응! 하앗!”

볼록한 돌기가 오목해지도록 혀끝으로 누르고 지분대다가 이를 세웠다. 발버둥 치는 바란의 허리에 단단한 팔을 두르고 한껏 밀어붙였다. 정신없이 빨다가 아쉬운 듯 입술을 뗐을 때, 니카가 빤 쪽은 반대 쪽 젖꼭지보다 더욱 붉고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너, 하아…. 대체 왜 남자 가슴을 빨아?”

바란이 밭은 숨을 할딱이면서 간신히 불평했다.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묻어나 흡사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주먹을 말아쥐고 그대로 니카의 등을 쿵 내리쳤다. 매서운 소리가 났지만 니카는 간지럽지도 않다는 표정을 했다.

“너도 좋아했잖아.”

“내가 언제.”

니카는 대답 대신 한껏 민감해진 바란의 유두를 살짝 꼬집었다. 한편으로는 태워 죽일 것 같은 시선으로 바란의 표정이 수치심에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붉은 기운이 흰 피부를 삽시간에 물들이는 모습을 보았더니 니카는 그만 머리가 아찔해졌다.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인사불성으로 취한 듯했다.

“으윽! 아, 아흐…. 놔 줘….”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 거잖아. 안 그런가?”

“아, 알았으니까….”

울망거리는 눈으로 바로 꼬리를 내린다. 바란이 애걸하는 꼴이 오히려 보기 즐거운지, 니카는 쉽사리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바란의 붉은 입술을 취해 진한 입맞춤을 남기며 양손으로 젖꼭지를 마음껏 지분거렸다.

“으, 으음! 아…!”

조물거리다가 꼬집고, 잡아당기기까지 했다. 바란이 참다못한 신음을 토해내는 족족 니카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입천장을 무자비하게 공략해대는 혓바닥을 견디지 못하고 생리적인 눈물을 흘렸다.

“우웁….”

“바란. 괜찮아?”

눈물에 약한 니카는 바란을 얼른 보듬어 안고 뺨을 적신 눈물자국을 천천히 닦아내주었다. 정작 바란은 헛기침 몇 번 하고 나서 곧장 웃겨 죽겠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섹스하다가 느껴서 눈물 좀 글썽였다고 달래주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냐는 것이다. 바란은 거기에 더해 한마디 더 지적했다.

“나 혼자만 헐벗고 있는 거 불공평해.”

“별 게 다 불공평하군.”

니카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결국은 바란이 원하는 대로 했다. 외투의 매듭이 풀리고 팔에 꿰인 소매가 전부 벗겨져 나가는 동안 순종적인 태도를 지켰다. 그는 사람 사이 접촉에 익숙하지 않아 자꾸 꼼지락거렸는데, 바란은 니카에게서 이런 서툰 면을 발견할수록 점차 기분이 좋아졌다.

추위를 많이 타는 니카는 옷을 여러 겹 껴 입고 있었다. 니카의 두 번째 외투를 벗겨내면서 바란은 작명일 선물 포장 벗기는 어린애가 된 거 같다고 말했다. 그리 말하기가 무섭게 손등에 무언가 묵직한 게 채였다.

“어? 이거 뭐야?”

니카의 외투 안주머니에 작고 각진 육면체가 만져졌다. 궁금증이 도진 바란은 옷 벗기던 것을 잊고 옷감 위로 그 물건의 부피감을 재어보며 호기심 많은 고양이처럼 눈을 빛냈다.

“궁금해?”

말간 웃음에는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꺼내 봐도 된다. 어차피 네 거니까.”

“내 거라고?”

이번엔 대답 없이 고갯짓이 뒤따랐다. 바란은 머뭇거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니카의 따스한 눈빛이 햇살처럼 쏘아져 마음을 달궜다. 막상 자신의 것이라 듣고부터 좀체 움직이지 않는 바란의 손 안에 니카는 작달막한 상자를 손수 건네주었다.

딱딱한 상자 귀퉁이를 만지는 순간이었다. 바란은 이 작은 선물의 정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말았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리고 뱃속이 불편했다.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어. 바란은 생각했다.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연인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한껏 긴장한 태를 내며 상자를 쥔 바란의 손 위를 살그머니 감싸 잡았다.

“저번에 내가, 제대로 된 반지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했었지.”

멋쩍은 헛기침소리가 났다. 바란은 이를 악문다. 선물을 받았으니 입술 끝을 잡아당기려고 노력했는데, 억지로 짓는 웃음은 결국 어떻게든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바란은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왜 그러는 거지. 뭔가 잘못된 거라도…. 마음에 안 드나?”

“아…아니야.”

상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니카는 잠시 말을 골랐다.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기뻐. 그런데.”

바란의 새파란 눈이 니카를 직시했다.

“무슨 의미로 주는 거야?”

묵직한 무게감이 담긴 질문이었다. 니카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왕녀에게 솜씨 좋은 장신구공을 소개 받고 나서, 니카는 그저 이 반지가 바란에게 가야 마땅하다는 생각만 했지, 이것을 어떤 명분 아래에 내밀어야 할지는 고민한 적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반지에 어떤 말을 붙여 건넬까? 어떤 의미, 어떤 감정으로? 잠시 생각했다. 기실 정답은 나와 있었다.

“흡족한 상대는 될 수 없을 거다. 후계자를 생산할 수도, 지참금을 가져올 수도 없는 한낱 천민 신세니까…. 비역질에 미쳐 명예도 재산도 잃었다면서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테고.”

“계속해.”

“나는 잃을 게 없지만 너는 여전히 탈타미오지. 그러니 선택은 네가 해라. 반지를 받으면…. 이제 탈타미오에 안주인은 들이지 못하겠지.”

“…….”

“그래. 지금 청혼하는 거야.”

바란은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거렸다. 긴장감에 젖어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바란이 원하던 정답을 정확히 맞췄다는 뜻이다. 이윽고 큰 미소가 이어졌다. 황금색 미소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그래봤자 한 사람의 얼굴에 불과한데 어쩌면 저렇게 많은 사랑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그저 경이롭다. 그 따스한 기운에 전염되어 니카도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했는데, 내일과 모레, 글피에 바란과 함께 할 만한 일을 떠올렸더니 그 생각도 결국은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을 멈출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을 터였다.

“뭘 기다려?”

바란이 물었다. 니카는 그럴싸한 대꾸를 생각해냈다.

“네 대답.”

“하하…. 물어보나 마나 아니야? 내 사랑. 어서 이 예쁜 예물을 남편 손가락에 끼워주시지요.”

바란이 시원스러운 손가락을 쭉 펼쳤다. 니카는 후들후들 손을 떨면서 은과 금강석으로 세공된 아름다운 반지를 넷째 손가락에다 쑥 밀어넣었다. 꼭 들어 맞았다. 게다가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렸다. 팔을 쭉 뻗고 손등을 들어 올려 반지를 살피던 바란이 헤죽 웃으며 니카의 손에다가도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러면서 손등에다 엄청나게 많은 키스를 퍼부었다.

키스는 점점 짙어졌다. 바란의 촉촉한 입술은 니카의 손등과 팔뚝, 벗은 가슴과 배꼽 근처까지 넘나들었다. 눈치를 보는가 싶던 바란은 여우 같이 샐쭉이 웃으며 니카의 앞섶을 은근히 건드렸다. 부풀어 오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읏, 바란…. 지, 지금 어딜 만지는-”

“내 거잖아.”

불평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심통을 부리면 니카는 꼼짝하지 못한다. 용의 아들이라도 사랑 앞에서는 무력한 남자에 불과했다. 바란이 앞섶을 풀어헤치고 속옷을 멋대로 벗겨내리는 동안에도 니카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손등으로 입을 막을 뿐 그럴싸한 저항을 하지 못했다. 입으로만 “안 돼.”라고 몇 번 종알거려서 바란의 흥이나 돋운 게 다였다.

“여, 전히 커다랗네….”

속옷을 끌어내림과 동시에 툭, 튀어나온 성기는 전에 봤던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커다랬다. 기분 탓인지 조금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눈앞의 남자가 기억을 잃은 어린 니카랑은 다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하…벌써 이렇게 단단하게 서다니. 엄청 쌓인 거 같은데? 평소에 자위는 하고 있는 거야?”

“…….”

“이런 질문에 어울려주느니 혀라도 깨물겠다는 표정이네. 우리 고지식한 기사님. 너무 많이 쌓여서 고추가 썩기라도 하면 어쩌려구요.”

“안 썩는다.”

“아, 어쩔 수 없이 내가 도와줘야겠네.”

“도와준다니 무슨 소릴…으윽!”

붉은 입술을 할짝이며 망설이던 바란은 니카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려 사타구니에 숨을 불어넣었다. 숨결이 긁고 지나가자 성기는 더욱 힘을 얻어 꼿꼿해졌다. 벌써부터 귀두에서 액이 흘렀다. 훌륭하게 휘어진 물건에 입맛을 다시던 바란이 돌연 혀를 내어 기둥을 핥았다. 단단한 허벅지가 움찔 떨었다.

“하…읏, 바란.”

제지하려던 움직임은 바란이 본격적으로 입 안에 남근을 밀어넣어 빨아들이기 시작하자 쑥 들어가 사라졌다. 바란은 서툰 입놀림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닳고 닳은 남창처럼 굴고 있었다. 사내의 물건을 입 안에 담아서 기쁘다는 듯이 연신 눈웃음을 치며 니카의 남근에 매달려 쪽쪽 빨아댔다.

“추웁…으음, 음, 으으음….”

“멈춰, 바란. 흣…! 아, 아아….”

볼이 움푹 패이도록 강하게 빨아들였다. 조금 빨아줬더니 못 참고 얼른 토정해버렸던 전과는 달리, 어른 니카는 꼿꼿이 선 물건을 마음 먹고 자극하는데도 잘만 버텼다. 돌연 거친 힘이 바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끌어당겼다.

“그만.”

정욕에 들끓는 목소리로 니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 명령투를 듣자 전신에 찌르르한 쾌감이 타고 흘렀다. 니카가 거친 손길로 바란의 바지 여밈을 거의 찢다시피 해서 벗겨내자 쾌감은 한층 강렬해졌다.

“다리 벌려, 바란. 보여줘.”

“흐윽…. 으….”

흐느낌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내며 바란이 오므린 두 무릎을 천천히 벌렸다. 손 한번 대지 않았는데도 반쯤 일어서서 꺼덕거리는 분홍색 성기가 드러났다. 금색의 굽실거리는 음모와 더불어 분홍색 고환까지…. 손가락을 내밀어 툭 건드렸더니 얼른 탄력적으로 튀어 오르는 게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네 말대로라면 이건 내 거겠군.”

“아, 응…. 니카….”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 내 것. 그렇지?”

애태우는 데 재능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바란은 생각했다. 굳은살이 딱딱하게 배긴 니카의 손이 살금살금 기둥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감질나서 죽을 지경이었다. 허리가 저절로 움찔거리고 앞뒤로 흔들렸다.

“가만히 있어.”

짜악. 탄탄한 볼기에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꽤 매서운 소리가 났는데도 아픔 대신 쾌감만 느껴졌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올랐다.

“아, 아…. 아흐…. 어, 엉덩이….”

턱을 벌벌 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니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란의 양쪽 볼기를 힘주어 주물럭거렸다.

“아프, 아, 아앙….”

“맞는 걸로도 느끼나?”

“벼, 변태 취급하지…마…. 아, 아!”

짝. 짜악. 손바닥이 연신 날아들어 탄탄한 엉덩이를 붉게 물들였다. 바란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왜, 엉덩이를 맞는 것만으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고개를 치들고 신음도 내지 못한 채 몸을 바르르 떨었다. 발갛게 상기된 뺨에 니카가 연거푸 입맞춤을 남겼다.

대체 열여덟 살 이후로 무슨 일을 겪으며 살아왔기에 사람이 이렇게 다를까? 바란은 순진하고 정직한 움직임으로 바란의 성기를 빨아올리는 게 고작이던 어린 니카를 떠올렸다. 그때 분위기를 주도하던 건 바란 쪽이었는데…. 반면에 바란의 엉덩이를 한껏 주무르고 있는 눈앞의 남자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부끄러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대로 주도권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바란은 얌전히 사랑받는 쪽 취향이 아니었다. 니카의 가슴을 밀쳐 침대에 드러눕혔다. 버티려면 버틸 수 있었을 텐데도 니카는 순순히 등을 깔고 누워 자신의 배 위로 올라탄 바란을 올려다봐 주었다.

“무슨 속셈이지?”

“내가…. 위쪽 할 거야. 니카는 가만히 느끼기나 해.”

선전포고였다. 니카는 픽 웃었는데, ‘어디 한 번 해 봐.’하는 허락의 표시였다. 오만한 허락에 심통이 난 바란은 엉덩이를 천천히 뒤로 물리며 상체를 낮췄다. 혀를 내밀어 니카의 갈라진 흉근 사이 가슴골을 천천히 핥아 내렸다. 니카가 그랬듯이 젖꼭지를 살살 만지며 괴롭혔는데, “으음.”하는 침음성을 듣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반응은 아니었다. 괜히 억울한 마음에 쪽쪽 빨며 매달렸더니 니카가 웃었다. 그리고 바란의 젖꼭지를 꾹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한마디 했다.

“난 너처럼 가슴으로 못 느껴.”

“아, 아앗…! 누, 누르지 마!”

“평소에도 만져? 그래서 이렇게 잘 느끼는 건가.”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거….”

유두를 비트는 짓궂은 손을 피하려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그러자 갈라진 엉덩이골 사이로 굵고 뜨거운 기둥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거대한 크기였다. 어쩐지 얌전해진 니카는 들짐승이나 낼 법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목구멍에서 삼키고 있었다. 바란은 슬그머니 위아래로 엉덩이를 옮겨 성기를 문질렀다. 반응을 살피려 내려다 보니 니카는 흥분할 대로 흥분해서 동공을 세웠고 인간과는 다르게 뾰족이 날 선 송곳니가 드러나 있었다.

“좋아? 니카. 이렇게 비벼져서….”

“…크읏.”

“뭐…어야, 갑자기 거긴 왜…. 읏!”

니카가 바란의 엉덩이를 터뜨릴 듯이 그러쥐었다. 마음껏 주물러대다가, 바란이 꼿꼿한 허리를 바르르 떨기 시작했을 즈음에 천천히 볼기를 벌리고 예민한 안쪽 살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화들짝 놀란 바란이 저지하려 했을 때 이미 투박한 손가락은 회음부에서 뒷구멍까지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다.

“돌아 봐.”

무릎에 힘이 빠진 바란은 니카가 요구하는 대로 힘없이 몸을 돌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사랑하는 니카의 눈앞에 엉덩이 사이를 한껏 벌린 채로 엎드려 있었다. 수치심을 자각하고 화들짝 몸을 일으키려는데 니카의 무지막지한 힘에 저지당했다. 너무 부끄러워서 우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보, 보지마…. 부끄러워. 부끄럽다고….”

“키스가 모자라다고 한 건 너잖아.”

“그 말이 왜 그 뜻이 돼….”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엉덩이를 세운 채로 묻는 모습이 스스로 볼품없게 느껴졌다.

“그런데 내, 내가 박히는 쪽이야?”

니카는 좀 어이없어 했다.

“괴롭힘 당하는 거 좋아하잖아.”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아니야. 안 좋아해.”

이 말은 곧장 취소해야 했다. 니카가 손가락 하나를 세워 구멍을 살살 문지르는데 망측한 신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시트를 짚은 두 손으로 입술을 다급히 틀어막았다.

“으응….”

“안 좋아한다고?”

“시끄러워….”

손가락이 천천히 구멍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끔찍하게 기분이 나빴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끄응, 신음했다. 손가락 하나 정도는 견딜 만 했는데, 단단한 손톱이 내벽을 긁자 불편하고 묵직한 감각이 엉덩이 안을 괴롭혔다. 바란이 이만 빼라고 한마디 하려는 참이었다. 눈치도 모르는 손가락이 하나 더 밀고 들어왔다. 입구의 주름이 팽팽하게 펴졌다.

“아, 이상해. 거기….”

니카는 결의에 차 있었다. 바짝 조여든 엉덩이가 눅진거릴 때까지 내벽을 여기저기 눌러 가며 문질러댔다. 뒷구멍 안쪽에 쾌감점이 있다는 사실은 추잡한 뒷이야기로 몇 번 접한 적이 있었지만 직접 느껴보기로는 처음이었다. 니카의 단단한 손가락이 내벽 어딘가를 꾸욱, 눌렀다 떼었다 하며 함부로 다루었을 때 눈 앞에 돌연 별이 반짝 했다.

“흐으읏!”

“…오늘은 끝까지 할 거다.”

끝까지? 그게 무슨 뜻일까? 바란은 녹슬어 고장 난 쇠붙이처럼 삐걱거리며 멍청히 생각했다.

“우, 우리 자기가 왜 갑자기 적극적이지…?”

“애지중지 아껴 뒀더니, 웬 금발 애송이랑 있었잖아…. 너무 뻑뻑하군.”

“아, 흐앗…. 걔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여기는 단념한 걸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란은 홀랑 니카의 정조를 받아갈 생각으로 근 한 달간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정작 이렇게 뒷구멍까지 내어주게 되리라고 예상한 적은 없었다. 거기다 그걸로 느끼기까지 하다니…. 남자들끼리는 어떻게 하는 거다, 하는 음담패설이야 수도 없이 주워들었지만, 바란의 비루한 상상력으로는 그런 삽입행위가 자신과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었다.

풀어 놓지 않으면 다친다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남긴 니카가 천천히 상체를 낮췄다. 이상하지. 저 각도대로라면 엉덩이에다 얼굴을 갖다 대는 꼴이 될 텐데. 바란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한껏 민감해진 입구에 뜨거운 살덩이가 할짝거리는 것을 느끼는 즉시 펄쩍 뛰어올랐다.

“뭐, 뭐, 뭐야! 어딜 핥는 거야, 지금!”

“가만 있어. 이렇게 안 하면 다치니까….”

“앗, 혀 넣는 거 아니야. 거기, 거기엔…. 너, 흣, 아흐…. 으앗!”

발버둥을 쳤지만 니카의 손아귀에 골반이 단단히 붙잡힌 채였다. 뜨겁고 오톨도톨한 감촉의 살덩이가 구멍 안쪽까지 밀려 들어와 붉은 속살을 한껏 맛봤다. 타액으로 밑이 온통 눅진거렸다. 마치 한껏 꿰뚫리기를 기대하며 스스로 윤활액을 흘린 것처럼….

“응…읏, 으흐, 아….”

쪼옥. 낯부끄러운 입맞춤을 남기고 니카는 고개를 들었다.

바란은 그만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그런데 여전히 골반을 붙들린 참이라 엉덩이만큼은 높게 치들고 있는 자세였다. 괴롭힘에서 겨우 벗어난 입구에 단단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닿았다. 얼핏 느끼기에도 묵직한 부피였다. 놀라서 움츠러든 그때, 니카가 바란을 뒤집어 눕혔다. 그리고 공중에서 휘적거리는 날씬하고 뽀얀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어깨 위로 들쳐 메었다.

“이제 네 안에 넣을 거야. 싫으면 지금 말해.”

“여기 넣겠다는 소리야? 네…그걸?”

곁눈질로 크기를 재어보는 것 같던 바란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찢어질 거야.”

“안 아프게 하겠다. 약속한다.”

“이렇게 큰 게 들어갈 리 없어.”

“다 들어가. 날 믿어라. 여기엔 네 상상 이상으로 큰 것들이 전부 들어갈 수 있어. 이것도, 물론.”

굵직하고 긴 육봉이 움직임을 따라 휘적거렸다. 니카의 귀두가 바란의 고환과 그 아래 회음부를 긁으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공중에 뜬 흰 발가락이 곱아들고 날씬한 다리가 파르르 떨었다.

“응? 바란.”

저렇게까지 간절한 목소리와 눈빛으로 무장한 니카를, 바란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어떻게든 되리라 하는 태평한 생각으로 팔뚝을 눈두덩 위로 덮으며 허락하고 말았다.

“아…안 아프게 해야 해.”

니카는 허리를 숙여 목께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 간지럼 태우는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상냥하게 구는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랫도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굵은 기둥이 천천히 입구를 문지르고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은 구멍은 뭐든지 받아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부드러웠다. 니카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헤집어 벌리고서 벌건 살이 드러난 가운데에 귀두 끝을 맞춰 밀어넣었다. 손을 치우자 입구가 쪼그라들며 귀두에 들러붙었다. 허겁지겁 먹어치우려고 달려드는 것처럼.

“크윽….”

“지, 진짜로…들어오잖아….”

“쉬이…. 힘 빼. 이렇게 자꾸 조이면 다친다.”

“뜨거워, 너무…. 너무 뜨거워서…. 니카앗….”

니카는 아주 천천히 공들여 성기를 밀어넣었다. 눈에는 정욕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는데도 단번에 밀어넣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낸 듯했다. 내벽이 무지막지한 크기의 성기가 삽입되면서 안으로 한껏 쏠렸다. 불쾌하기도 하고, 달군 꼬챙이에 꿰인 것도 같은 생경한 감각이 바란을 괴롭혔다. 고작 엉덩이 안쪽을 괴롭힘 당하고 있는 것뿐인데 온몸에 힘이 노곤하게 빠져나가고 등골까지 덜덜 떨렸다.

“추웁…. 춥, 쪽….”

“아, 아흐…. 흐읏….”

삽입이 점차 깊어지면서 니카는 상반신을 바짝 낮춰 바란의 가슴을 핥았다. 신경을 분산시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것이다. 바란은 그 장단에 맞춰주었다. 이상하리만치 민감한 유두를 빨아대니 정신을 차리기 힘들기도 했다. 쾌감에 익숙해져 머리가 온통 무뎌진 틈을 타고 니카가 거세게 허릿짓을 했다. 천천히 밀고 들어오던 성기가 단번에 몸 안에 쑥 꽂혔다.

“흐끅!”

화들짝 놀란 바란의 입술에서 딸꾹질이 터져 나왔다. 공중에 들린 엉덩이가 바르르 떨었다. 접힌 채 있던 뱃가죽이 작게 경련했다. 가슴을 할딱거리며 숨을 고르던 바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다 들어왔어?”

침묵에도 종류가 있는데, 이때 니카가 침묵을 지킨 것은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의아해진 바란이 눈물에 젖은 속눈썹을 달싹이며 니카를 내려보았다.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표정으로 니카가 눈두덩 위에 짧은 키스를 했다. 뒤늦게 대답을 했다.

“그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거짓말이었다.

“아, 그렇구나…앗, 흐아악!”

거짓말로 바란을 안심시키자마자 거센 허릿짓이 잇따랐다. 다 들어왔다더니 여태 들어온 만큼이나 더 남아 있었다. 고환이 엉덩이에 부딪히면서 ‘철퍽’하는 야한 소리를 냈다. 바란은 고개를 젖히고 비명을 질렀다. 머리까지 꿰뚫린 듯했다. 뱃속이 빈틈없이 가득 찼다. 기다란 기둥에 마찰한 입구가 아릿했다. 

“이제, 다…. 들어갔다. 바란. 흐윽…. 너무 조여. 힘을 조금, 빼라….”

“아, 아흐…. 여, 여기 다아…. 들어왔어어…. 배, 배가 터질 것 같아….”

“힘 빼라니까.”

“미쳤, 어…, 어떻게 힘을 빼!”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안 아프게 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만…. 바란은 니카의 돌덩이처럼 단단한 어깨에 대고 주먹질을 했지만 별로 들어먹힌 거 같지 않았다.

“많이 아파?”

“그걸 말이라고….”

바란은 말꼬리를 흐렸다. 기실 아픈 것과는 궤가 다르긴 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덕택에 찢어져서 피를 본다거나 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이물감이라고 하면 좋을까? 아니면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평생토록 아무것도 집어넣은 적 없는 뒷구멍에다 남자의 물건을 배가 터지도록 품고 있는 기분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이 이상했다.

“뱃속이…가득 차서…. 이거 이상하다고…. 흐으윽…. 으응? 아, 안에서 꿈틀거려….”

“네가…큿, 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니까….”

“으흡! 우, 움직이지 마!”

처음엔 아주 살짝이었다. 니카의 물건이 뒤로 살그머니 움직였다가 도로 처박혔다. 아주 미미한 진폭이었기 때문에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점차 뒤로 물러났다가 되돌아오는 폭이 커지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말라는 말은 씨알도 안 먹혔다. 니카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아랫도리에 찰지게 달라붙는 내벽에 열중해 있었다. 바란이 아무리 칭얼거리고 신음한들 기분만 더 북돋울 뿐이었다.

“아! 아앗, 아! 흐…앗! 잠깐만!”

철퍽, 철퍽, 철퍽…. 고환이 축축한 엉덩이에 부딪히면서 박자에 맞춰 소리를 냈다. 바란더러 지금 남자의 그것에 박히고 있다고 확인시켜주는 것 같은 소리였다. 성기의 움직임에 내벽이 딸려나갔다가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온몸의 장기가 그 박자대로 쏠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더니 빠듯하게 품고 있던 커다란 물건에 바란은 점차 익숙해졌다. 구멍이 그 모양대로 늘어났는지도 모르겠다. 숨 돌릴 틈이 생겼나 싶었는데 니카가 허릿짓에 박차를 가했다. 바란이 상체를 반쯤 들어 내려다보니 흉악하게 생긴 물건이 자신의 엉덩이 사이에서 쑥, 하고 반쯤 빠져나왔다가 단숨에 처박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니 더 숨이 가빠왔다.

“아, 흐앗! 자기, 살살…. 너, 너무 빨라!”

“흐읏…. 크…. 바란. 나의 바란.”

엇박으로 할딱거리는 소리에 니카는 잠시 허릿짓을 멈추었다. 도무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살 부딪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무슨 생각일까? 한껏 긴장한 사이 니카가 뿌리 끝까지 삽입된 성기를 한 바퀴 휘저었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처럼. 안으로 굽어진 내벽 어딘가를 귀두가 찌르고 지나갔다.

“자, 잠깐만…. 흐으응!”

“여기?”

“으응, 아니야…. 앗! 그, 거기…. 흐흣!”

허리를 둥글게 돌려 내부에서 휘저어대다가 느끼는 곳을 꾸욱 찔러주니 소리도 못 내고 입을 헤 벌리며 까무러치게 몸을 뒤틀었다.

붉은 혈색이 하얀 몸뚱이를 물들였다. 니카는 장밋빛으로 물든 뺨에 입을 맞췄다. 바란은 입술을 꾹 악문 채로 쾌락의 여운에 젖어 몸을 잘게 떨고 있었다. 눈이 그렁그렁한 물기에 젖어 있다가 이윽고 눈물을 뚝 떨구었다.

“조…. 좋아아….”

“그렇게 좋았나?”

“니, 카아…. 좋아해….”

힘없이 공중을 휘젓던 두 팔이 니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바란이 훌쩍거리면서 자꾸만 좋아한다고 중얼거렸다. 니카가 보답하듯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단숨에 처박으며 좋아하는 곳을 찔러주었다.

“흐아아앙!”

음란한 교성이 연신 터져 나왔다. 거기, 거기…. 졸라대는 목소리에 니카는 잠시 정신이 아뜩해진다. 바란의 두 다리가 니카의 허리에 단단히 감겼다. 움직임이 점차 거칠어졌다. 추잡한 교합소리가 질꺽, 질꺽… 하고 방 안을 달궜다.

“바란…. 바란. 나의 바란.”

“아흐…읏! 거기만! 자, 자꾸! 누르며언…!”

“네가 있어서, 모든 게 변했다. 너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살아, 나는…. 윽, 나는….”

절정이 가까웠다. 퍽, 퍽, 퍼억…. 지친 기색 없이 때려 박아대는 니카의 기세가 흉악했다. 니카는 손을 뻗어 꼿꼿이 선 바란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이 지나쳤다. 바란은 넋을 잃고 몽롱한 눈을 했다. 절로 들썩거리며 엉덩이를 움직였다. 절정의 순간 니카는 바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너를 사랑하고 있다.”

“아…읏…. 흐아아….”

끝까지 처박힌 우람한 기둥에서 울컥 뜨거운 액체가 쏘아져 나왔다. 두, 세 번에 나뉘어 방사된 정액이 뱃속 아주 깊은 곳에 고였다가 내벽을 타고 굴러떨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바란은 몸서리치면서 부지불식간에 입구를 강하게 조였다. 그러자 니카의 정액이 또 한 차례 울컥, 뱃속을 더럽혔다.

쪽… 쪽… 쪽…. 무수한 키스가 얼굴과 목과 가슴께에 내려앉았다. 니카는 바란의 몸을 처음으로 완전히 가졌다는 감격에 잠겨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바란은 그 귀여운 표정을 확인한 다음에는 하려던 말도 전부 까먹고 허탈하게 웃음이나 터뜨리고 말았다. 흐릿한 눈동자를 굴렸다. 빈틈없이 맞물려 깍지낀 손에 은빛 반지가 빛을 내고 있었다. 입술이 천천히 올라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렸다.

“나도 사랑해.”

완벽한 날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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