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 - 7. 지평선에 걸린 해 (2) (10/12)

7. 지평선에 걸린 해 (2) 


“정말 쉽군.”

무료한 한마디에 벼락같은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좌중은 구강 깊숙이 썩은 이빨이 보일 정도로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헤헤 웃었다. 밧줄을 당기면 와르르 쏟아지는 종소리처럼 작위적이었다.

“정말 너무나, 쉬워. 모든 게.”

“잘된 일입니다, 헬린 힐벤 전하. 아니, 대관식이 곧 있을 터이니 이제부터는 ‘폐하’라 불러 마땅하겠군요.”

왕좌에 앉아 있던 갑옷 차림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삐죽빼죽 멋대로 잘린 새하얀 머리칼이 그가 움직이는 대로 살랑거렸다.

헬린 힐벤, 지상에서 가장 용에 가까운 남자.

약간의 눈속임을 곁들인 진군으로 애틀턴을 가로채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요 몇 년간 비등한 듯 보였던 전세가 다르탈루 강 전투 이후로 대공에게 승기를 들어준 듯했다. 계속된 무패행진에, 끝내 애틀턴까지 차지했다.

“시시하기 짝이 없네요.”

그런데도 헬린은 전혀 만족스러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앙살라테가 재미있는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형편없는 전쟁 상대이긴 했어도, 내전이 이어져 온 팔 년간 이렇게 매사에 싫증이 나고 시시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헬린 힐벤의 일생에서 가장 지루하다고 꼽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요즈음이었다.

이유는 찾지 못했다. 힐벤은 불편한 심기를 주위에 톡톡히 드러내며 테이블에 돌연히 주먹질해 금을 만들고 신하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우게 만들었다.

“지루함은 결국 압도적인 차이에서 오게 마련입니다. 이게 다 용혈의 위대함을 다시 알리는 역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

“…시끄럽네요. 난 헛소리 들어줄 기분이 아니라고요.”

어떻게든 그의 기분이 나아지게 도우려던 주변인의 입에 발린 아부는 실패로 돌아갔다. 헬린이 검을 빼 들고 이가 다 나가도록 바닥을 내리치기 시작한 탓이다.

캉! 카강! 캉! 소음이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대공은 원래도 기분에 따라 주위의 아부에 반기거나 벌하거나 변덕스럽게 반응하곤 했는데 오늘은 상황이 안 좋아 보였다. 다들 게 눈 감추듯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시선이 내리깔린다.

“전하, 반대 진영 방향으로부터 알현을 청하는 자가 나타나-”

“아, 가까이 와서 말해요.”

병사 하나가 다급히 수뇌 회의를 가르고 나타나 바닥에 부복했다. 남루하고 조잡한 갑옷으로 미루어 외곽을 지키는 말단 병사다. 직접 보고 올릴 것이 있어 파격적으로 성안까지 발을 들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보고이기에 천한 것을 수뇌 회의에까지 올렸을까, 모두의 호기심이 자라난다.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대공이 손짓을 했다. 바짝 긴장하여 다가선 병사의 발걸음이 멈출 생각을 않았다. 헬린 힐벤이 끊임없이 손짓하는 까닭이었다. 이윽고 귓속말을 조잘거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대공은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었다.

“으윽!”

그리고 병사의 목줄기를 잡아챘다.

“반대 진영 쪽으로부터 알현을 청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크, 큽, 으윽…!”

“적군이 보이면 쏴 죽이는 게 임무일 텐데, 그 놈이 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나요? 주군을 알현하겠다고 목청 높여 빼액질하면, 그저, 옳거니. 여쭤보고 연락주리다…. 그런 허술한 태도로 괜찮은가 모르겠네요.”

병사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제자리에서 다리를 마구 놀린다. 대공은 변명을 듣고 싶은 기분도, 들어줄 여지도 없었지만 그저 못생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싫증이 났다는 이유 하나로 틀어쥔 목을 내팽개쳤다. 병사의 새빨간 손자국이 존재감을 뽐냈다. 과연 대단한 힘이었다.

“컥, 켁, 커헉! 자, 자, 자신이, 타, 탈타미오 후작이라고….”

왕좌로 돌아서던 대공의 발걸음이 멈칫 굳었다.

“…탈타미오 후작?”

병사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다. 죽음이 예정된 전장에 앞세웠던 어린 후작이 어떻게 그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걸까.

헬린 힐벤은 지나치게 고민에 골몰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이 사지에 처박아 내친 바란 탈타미오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썩 나아진다는 사실을 굳이 캐내지 않았다. 그저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등골에 짜릿하게 내달리는 전율만을 만끽했다.

들뜬 목소리가 뱉어졌다.

“들라고 해요.”

천천히,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다. 대공은 쉽게 흥분했던 만큼이나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맞았다. 흙먼지 틈을 구르다 온 게 분명한 몰골로 핼쑥해진 바란 탈타미오가 들어서자, 대공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손가락을 거칠게 까딱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헬린 힐벤은 고민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 누누이 말했건만 저 앙큼한 것은 매번 만날 때마다 깍듯이 군다. 이마가 맨바닥에 닿았다. 대공은 흐트러진 머리칼에 주목했다.

시뻘겋게 물들이고 다니면 싸구려 같아 보여서 좋았는데, 이제는 멍청한 짓을 그만뒀는지 본래 타고난 빛깔 그대로의 금발이었다. 헛웃음을 지었다.

‘남창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사방에 꼬리를 치더니, 머리가 노래지니까 그런대로 정숙해 보이는군.’

그리고 대공은 자신이 무엇에 화가 나 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탈타미오 후작이 용인 기사와 부둥켜안고 비밀리에 지내던 수 개월간의 기만에 대해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처벌의 명목으로 사난타에 미끼로 내걸었으나 처벌이 감정을 삭이진 못했다.

헬린 힐벤은 아직 화가 나 있었다.

힐벤이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바란은 수그린 고개를 결코 먼저 쳐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 기다렸다.

이윽고 참다못한 대공이 달려들어 바란의 어깻죽지와 머리통을 걷어찼다. 거센 힘에 저항하지 못한 바란은 바닥을 맨몸으로 나뒹굴며 끔찍한 신음을 흘렸다.

어깨를 걷어찬 것에 아물어 가던 상처가 터졌다. 팔을 경련하듯이 절었고 피가 흥건하게 옷감에 배어 나왔다. 대공은 가슴을 들썩이며 다가가 다짜고짜 바란의 옷을 벗겼다. 희멀건 몸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채찍이 할퀴고 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찢어져서 너덜너덜하던 피부가 간신히 서로 붙었다. 상처는 크지 않았으나, 관중의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는 되었다.

더구나 헬린 힐벤은 제 소유물에 티가 묻어나는 것을 병적으로 꺼리는 남자였다. 바란은 꿈틀거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애썼다. 제자리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졌다.

“…사난타에서 당한 상처인가요?”

바란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사난타에 바란을 팽개친 것은 대공 본인이었다. 이렇게 화낼 것이 다 무언가 싶었다. 그러나 섣부른 언사로 계획을 망쳐서는 안 된다. 바란은 사뭇 가련하게 눈을 끔뻑이며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대공의 파란 눈 안에서 동공이 세로로 바짝 섰다. 갑자기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딴생각이 들었다. 저런 식으로 움직이는 동공을 알았다.

“다시 묻죠. 누구에게 당했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바란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입니다.”

대공의 심내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앙살라테와 바란 사이에 유착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 분명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왕자 측에서 이런 상처를 입고 돌아오다니, 훌륭한 반례를 보여준 셈이다. 수리 왕녀의 눈먼 채찍질에 감사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바란은 생각했다.

“왕자의 명령을 받은 놈들이 저를 포로로 잡아두고 밤낮으로, 괴롭히더군요. 제가 아는 것을 다 말하라고 했죠. 하지만 전하의 선견지명으로 저는 애틀턴 탈환전에 대해 아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다행인 일이지요. 고통에 못 이겨 정보를 흘렸다면 저와 전하의 명예를 더럽히고 말았을 테니까요.”

바란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대공이 그의 옷깃을 잡아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귓바퀴에 입술이 거의 붙을 지경이었다. 입김이 뜨겁게 뿜어졌다.

“…후작은 적군과 내통했었어요. 나의 신뢰를 저버렸고, 더는 후작을 믿을 이유가 없지요.”

“나의 전하.”

별것도 아닌 호칭이 대공을 사로잡았다.

팔근육이 움찔 떨렸다. 헬린 힐벤의 머릿속에서 본능에 가까운 목소리들이 덩어리를 이루어 소리쳤다. 승리하는 데 있어서 저 어린 후작은 끝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고. 바란 탈타미오를, 당장 내쳐야 한다고.

“그때도 말씀드렸었지요. 저는 그저 기억을 잃은 용인에게 흥미를 느꼈을 뿐입니다. 정보를 얻으면 좋고, 아니어도 갖고 놀면 그만… 그렇게 생각했지요.”

짐짓 서글픈 눈치로 더듬거리며 말을 잇는 모습이 가증스럽기까지 했다. 아니, 실은 믿어보아도 좋지 않으냐는 솔깃한 마음이 생겼다. 마음이 두 갈래로 찢어져 전쟁을 반복한다. 한 측에서는 뱀의 혀를 가진 자라며 가시를 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만한 이해자를 일생 어느 때에 만나보겠느냐고 목청을 돋운다.

‘이해자. 나는 내심 바란 탈타미오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던가.’

그 누구도 헬린 힐벤에게 틀렸다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얄렌의 성녀는 도덕의 잣대를 들이밀고 헬린의 본능을 억눌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늘 자신이 어긋난 존재인 탓이라 여겼다. 앳된 티가 역력한 바란 탈타미오가 선뜻 그의 주먹질을 받아내던 날 전까지는.

“제가 즐겨 쓰는 게 미남계라고, 자서전에도 그런 내용 쓰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읽었을 줄은 몰랐군요.”

“그냥 전해 들었습니다. 사난타에서 붙잡힌 귀족들 사이에서 화제였더군요. 저에게도 한 권 보내주지 않으시고요.”

“말이 늘었네요. 후작.”

바란은 씩 웃었다. 대공이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식으로 세 치 혀를 놀리다간 곧 주먹이 날아오리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한 대 더 맞는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주먹은 어쩐 일인지 허공에서 밋밋한 손바닥으로 바뀌었다. 대공을 안다고 자부하는 바란조차도 이것만큼은 예상하지 못했다. 공기를 찢는 짜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바란은 홀로 어리둥절해서 붉게 달아오른 뺨을 매만졌다.

“…차를 한 잔.”

대공이 이마를 짚으며 회의 테이블에 자리했다. 시중을 겸하는 달틴 사사바란 경이 대공의 지시대로 차를 한 잔 따랐다. 다과 트롤리에 따뜻한 찻주전자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눈치가 없고 우직한 기사는 이다음에 대공이 허공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해서 우왕좌왕했다.

힐벤의 눈썹이 팍 구겨졌다. 모신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데 주군의 마음 하나 눈치채지 못하느냐며 꾸짖는 듯했다.

이때 뒤편에서 태연히 걸어온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트롤리에서 설탕을 덜어내 대공의 찻잔 안에 척척 집어넣기 시작했다. 정확히 대공이 원했던 그대로였다. 대공이 빈정이 상해서 그를 노려보자 샐쭉 웃는 것이 귀족가 고양이처럼 의뭉스러웠다.

“전하. 하나 더 넣는 편이 낫겠습니까?”

“…두 개 더 넣어요.”

“알겠습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왕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선물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전하의 마음에 꼭 드실 겁니다.”

바란이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긴가민가하며 눈치를 보던 병사들은 최종결정권자인 대공에게 명령을 청했다. 바란의 명령을 따라도 좋을지 간을 보는 것이다. 탈타미오 후작이라고 자칭하며 나선 자가 대공의 인정을 받았다기엔 방금 살벌한 주먹질이 오갔고, 그렇다고 아예 내친 것처럼 보이지도 않은 탓이다.

“들이세요.”

대공이 입을 뗐다. 만사가 시시하기 짝이 없다던 무료한 기색은 그의 낯에서 가신 지 오래였다. 바란이 전에 없이 알랑거리며 수없이 눈웃음을 쳤다. 방싯방싯 웃는 걸 보니 대공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 바란의 낯짝에 주목했다가, 절그럭거리는 발소리가 시끄러워 거대한 출입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구의 사내, 그러니까 바란 탈타미오가 가져 왔다는 ‘선물’이 절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대공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꽤 오랜 세월 저자에게 이를 갈았으니 당연했다.

배신자 갤리거.

대공이 아끼던 사사바란의 장자를 코코탄 전투에서 죽였을 뿐만 아니라, 충성서약에 반하여 옛 주군을 배신한 남자. 무력하게 양 손목이 칭칭 밧줄로 감겼고, 힘없이 비틀거리며 걷는 모습을 보니 뱃속이 흥분으로 들끓었다.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의 기분이 이럴까 생각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전하.”

“아.”

대공은 손을 등 뒤로 뻗었다. 비스듬히 상체를 숙여 귓가에 속살거리는 요망한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기름때에 더러워진 금색 머리카락이 붙잡혔다. 대공은 천천히 그 머리카락을 비비고, 문질렀다. 손속이 투박하기는 해도 바란의 머리털을 애견 다루듯 쓰다듬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씨발, 정말. 기특하기도 하지.”

칭찬이 바란의 귓가에 꽂혔다.

* * *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트넴바 탑의 왕자군에게 간만의 희소식이 전달되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그것도, 군량을 가득 싣고서.

“하하. 경은 아직 여기 붙어 있겠다니 다행이네. 전세가 불리해지니까 얼른 좆 빠지게 도망친 놈들이 꽤 있거든. 근데 우리의 아름다운 왕녀님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상태가 그렇게 안 좋으시대?”

“…….”

“쓰으발, 목석을 상대로 대화해도 이 정도 말 붙였으면 이미 사람이 다 되었겠다. 아니, 간만에 만났는데 반갑지도 않은가? 경 입안에 거미라도 키워? 입 열면 큰일 나?”

“시끄럽다.”

“와, 나. 그 시끄럽다 소리만 벌써 스물 한 번째 들었어.”

락샴은 말을 놀랍도록 잘 다뤘다. 행군 내내 목소리로는 니카를 괴롭히면서 다른 한 켠으로 솜씨 좋게 장애물을 피해 말을 모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찬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말야. 듣자 하니 잔악후작이 혼란을 틈타 도망쳤다면서?”

이 화제에도 용인기사가 침묵을 지키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락샴은 속으로 옳거니 싶었다. 니카가 귀를 쫑긋 세우고 마침내 이렇다 할 초점이 잡힌 눈으로 락샴을 마주한 까닭이었다. 하여튼 전부터 니카 경은 잔악후작의 ‘잔’ 자만 들이밀어도 관심을 갖곤 했었다. 미운 정이 들기라도 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영리한 놈이란 말이지. 왕자군이 사방에 깔려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배짱을 부리면서 탈출했는지 모르겠어. 우리 내부에 첩자가 있는 게 분명해. 도움을 받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번 잡히는 일 없이 달아났겠냐구.”

“시끄럽다.”

“와! 이걸로 스물두 번째다!”

잔뜩 몸을 경직시켰던 니카는 태평한 탄성이 터져 나오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내가 풀어줬다는 건 정말 아무도 모르고 있군.’

다행히도 포로를 풀어준 니카의 만행은 발각되지 않았다. 나중에 보니 제란딘에게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말았던 내용이 진실로 둔갑해 있었다. 니카에게 혐의를 돌리기에 잣자후는 진군준비로 분주했고, 왕녀의 급격히 악화된 건강상태와 막쉬롭의 돌연사로 충격이란 충격은 한 번에 다 얻어맞은 상황이었다. 일개 용인기사에게는 그 어떤 화살도 돌아올 겨를이 없었다.

홀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 보니 시간이 그 일을 묻었다. 마치 잔악후작의 탈출을 신경 쓰거나 기억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니카 한 사람뿐인 듯했다. 니카는 요즘도 멍하니 공기 중을 쳐다보며 고민에 잠기곤 했다.

‘내가 왜 그를 도와줬지. 왜 귀한 외투는 내어주었고, 왜….’

입술을 손바닥에 묻었다.

‘왜 입 맞추도록 가만 기다리고만 있었지?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게 아니었나. 그에게 남은 감정은 떫은 미련뿐인 게 아니었던가.’

간절하게 불타오르던 파란 눈동자. 겨울바람처럼 시린 빛깔로도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품을 수 있다는 게 기묘했다.

그 눈을 알고 있었다. ‘나의 니카’하고 부르던 목소리도. 탈타미오에서 니카가 한때 가졌던 연인의 눈빛이며 목소리였다. 마구간에서 마주친 바란 탈타미오는 너무도 익숙한 것투성이였다. 니카가 사랑하던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잔악후작 안에 혼재하고 있었다.

‘너에게 줄 수 있는 진실은 한 가지뿐이니까.’

거짓으로 점철된 존재에게서 진심을 본다는 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하지만, 니카는 바란의 견고한 애정이 결코 꾸며낼 수 없는 종류임을 실감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니카는 흉측한 용인에다 지고지순하게 왕녀만을 바라봐 왔고, 말씨도 거칠고 재미도 없다. 좋아할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남자이자 매번 칼부림을 내던 숙적. 후작이 어떻게 자신에게 뜨거운 감정을 품을 수 있는지, 니카로서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네가 왜 날 구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 거야.’

후작이 쏟아낸 말들이 전부 다 기만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납득했다.

‘나의 니카.’

바란이 뱉어놓은 말들은 마음 한구석에 기생하다가 이때다 싶으면 치솟아 올랐다. 그것들이 고막 안쪽에서 형체도 없이 앵앵 울리며 머릿속을 다 헤집어 놓았다. 신경질이 났다.

어떻게든 다른 답을 찾아보려던 니카의 노력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는 더 이상 반박하거나 부정하고, 외면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직시했다.

‘…짜증 나는군.’

그래, 니카는 바란 탈타미오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착했어. 경. 이만 정신 차려.”

락샴이 입술 사이로 숨을 뱉어서 니카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왕자군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였다. 견고한 트넴바 탑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앞에 주둔한 왕자군 막사에서 환영의 의미로 옷가지와 손을 어지럽게 흔들며 함성을 내질렀다. 와아아———. 이 환대에 응답하여 잣자후로부터 온 원군들이 시끄럽게 발을 구른다. 쿵, 쿵, 쿵. 지축이 흔들리는 듯했다.

“대공군 새끼들 조질 만반의 준비를 해뒀다구.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리는군.”

“…만약 우리가 패배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니카는 이전 같았으면 결코 물어보지 않았을 질문을 꺼내 들었다. 락샴은 니카가 먼저 말을 붙였다는 사실과 그 내용이 어찌나 비관적인지에 관해서 동시에 생각하느라 잠깐 넋이 빠졌다. 휘둥그레 뜬 눈을 깜빡거리다가 손을 들어 올려 니카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갈겼다.

“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손이 올라갈 적에 대충 짐작했지만, 아프지도 않을 테니 한 차례 맞아주자 생각했다. 막상 요란한 소리를 내고 얻어맞으니 짐작대로 아프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니카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뚱한 눈초리를 보냈다.

“이 엣시아의 락샴은, 질 싸움은 안 한다고.”

“…….”

“시작도 안 한 싸움 가지고 벌써부터 코 빠져 있지 마. 경 그거 안 어울리거든.”

락샴은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나갔다. 니카의 고민에 그 어떤 보탬도 되지 않는 으름장이었다.

간만에 재회한 앙살라테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니카가 알던 앙살라테 왕자는 쉽사리 절망에 잠기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군대를 환영하고 곧장 탑 안으로 자취를 감춘 왕자는 어두컴컴한 분위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홀로 침울하게 앉아 있었다. 니카와 락샴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거 왕자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니카 경.”

무시당한 락샴이 콧김을 뿜어내며 이를 꾹 악물었다. 니카가 뭐 잘못한 게 있다고 매섭게 노려보기까지 한다.

“막쉬롭이 죽었다는 게 사실인가?”

주목하지 않았던 이름을 왕자가 꺼내놓았다. 잔악후작을 도망시키고 급박하게 잣자후를 빠져나오느라 니카는 그녀를 장사지내는 모습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앙살라테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니카의 대답을 주시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나에게 남긴 말이 있을 거야.”

“…….”

“막쉬롭이 나에게 무언가 남겼을 거라고.”

막쉬롭이 죽던 장소에 니카는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무슨 말을 남기고 죽었는지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상황을 수습한 제란딘 경에게서 이것이 돌연한 사고사였다고 들었다. 유언을 전할 틈이나 있었을까 의심스러웠다.

니카의 대답을 기다리던 앙살라테의 눈동자가 불신에 젖었다. 애시당초 늙은 집시의 부재에 왜 왕자가 커다란 부담감을 느끼는지, 고작해야 좀 전에 왕자군에 합류한 말단 인사가 아니었는지, 궁금증은 끝이 없었다. 왕자가 막쉬롭을 직접 등용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평정을 잃을 정도의 집착은 이상했다.

“전하! 왕자 전하!”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체통이라고는 전혀 없는 외침이 탑 내부에 울려 퍼졌다. 니카는 저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다는 데 소중한 검조차 걸 수 있었다. 다만 그게 누구 목소리인지에 대해서는 뾰족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이걸 얼른 읽어보셔야 합니다. 대공 측에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서신을?”

깨진 안경을 걸친 남자가 허락도 아뢰지 않고 다급히 왕자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아 흔든다. 니카는 남자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재킷 안쪽에서 조심히 운반한 서신을 꺼내든 남자의 눈이 무심히 니카를 훑고 지나가다가 쩍 얼어붙었다.

“…레이먼드?”

니카가 반신반의하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하하…. 이거 오랜만이네요, 경.”

탈타미오에서 일하던 바란의 집사. 얼굴은 그 당시에도 눈에 익다 생각했었다. 아마 왕자 측의 인물이 숨어든 것이리라 짐작했었고, 그 가설을 입증하듯이 레이먼드는 마구간 소년 빈스를 보내 니카에게 도움을 주었다. 눈앞에서 왕자의 측근임을 확인받고 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렇다는 건 결국, 이 자도 바란 탈타미오를 기만해 가며 곁에 있었다는 뜻이군.’

니카는 가라앉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여 레이먼드의 인사를 받았다. 같은 편임이 판명 난 순간에 왜 호감이 땅에 떨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끔 대공이 우리 측 성질 돋우려고 헛소리로 가득 찬 편지 보내곤 하던 거 기억하시죠? 이번엔 한층 더합니다. 이거 초대장입니다.”

바삐 손사래를 친 레이먼드가 고급 종이에 반짝거리는 특수 잉크로 적어 내린 초대장을 내밀었다. 그 어떤 심리전을 가져왔든지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은 없었다. 앙살라테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눈짓했다. 표지를 넘기라는 것이다.

“…대관식 초대장?”

쾅! 앙살라테가 거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거나한 소음이 귀를 때렸다. 그러나 그 자리의 사람들은 모두 초대장의 정체에 경악하느라고 소음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락샴이 “허.”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아연한 눈을 굴렸다. 분노로 시작된 앙살라테의 반응은 최후에 가서는 이 초대장을 하찮은 것 치부하는 헛웃음으로 변모했다.

“헛소리. 왕국대관식은 대신관이 허락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 원칙주의자인 대신관이 왕위계승권자인 내 존재를 무시했을 리도 없고.”

“그것이 말입니다, 왕자님. 실제로 대신관이 공표한 대관식이라고 그러던데요…. 왜, 그 증표로 여기 인장이 찍혀 있잖아요.”

레이먼드의 말 그대로였다. 초대장의 겉봉은 물론 안쪽 서명에 헬린 힐벤이 조작해서 보낸 게 아님을 증명하는 대신관의 인장이 보란 듯이 찍혔다.

“…무슨 비겁한 수를 쓴 게 분명해. 헬린 힐벤,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레이먼드!”

“예, 전하.”

“잣자후에 급히 전서구를 띄워. 그밖에 이용할 수 있는 연락수단은 전부 취해도 좋다. 가서 수리에게 트넴바 탑으로 급히 이동할 것을 명해라. 잣자후 유적에서 찾은 물건을 가져오라고, 전해.”

“계획이 있으십니까?”

“믿어볼 만한 바람구멍은 있지.”

내가 지금 왕국어로 대화하고 있는 게 맞냐? 락샴이 니카의 귀에다 속삭였다. 니카는 목석같이 들어넘기며 마주 속삭여주었다. 시끄럽다. 락샴에 헤아리기 시작한 이후로 스물세 번째 ‘시끄럽다’였다.

“대관식을 연다고. 그렇다면 이쪽도 최악에 상황에는 원칙대로 나서는 수밖에. 나 역시도 드라코슨이니, 용혈의 권리를 통해 대관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

“하지만…. 대관식은 용혈이 짙은 헬린 힐벤 대공이 먹고 들어가는 게임입니다. 굳이 거기 맞춰 뛰어드실 필요가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어. 게다가, 잣자후에서 발굴한 고대룡의 심장이 있다면 필패도 아니야.”

왕자는 고대룡의 피가 옅다는 점을 상쇄하기 위해 꽤 오래전부터 용의 유해를 긁어모아 왔다. 전국 각지에서 뼛조각을 사 모으다가, 가장 큰 고대룡 유적지가 있는 잣자후에 수리를 비롯한 세력 일부를 남겨 ‘심장’ 발굴에 힘쓰게 했다. 발굴이 성공적이었다는 소식은 니카도 들었다.

왕자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대관식에 권리를 주장해 대공과 나란히 설 작정으로 보였다. 니카가 보기에는 전부 도박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가만 입을 다물었다.

“경들은 진군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하시오. 초대장에 써진 그대로라면 앞으로 닷새 후엔 이 근방이 온통 전쟁터로 변할 테니까. 친절하게도 초대장까지 보내주었으니 그 기대에 보답해야지 않겠소.”

* * *

트넴바 탑과 애틀턴 외성의 경계, ‘너른 평야’는 대공과 왕자의 세력이 마주 보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미 몇 차례의 충돌이 있었으나, 왕자군이 열세에 못 이겨 크게 후퇴한 뒤로부터는 폭풍전야의 평화가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선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팽팽하던 균형을 무너뜨릴 만큼 왕자 측 병력이 증강된 탓이었다. 화려하게 등장한 원군은 왕자군 주둔지를 까맣게 뒤덮었다. 애틀턴 성곽에서 경계를 서던 보초병들이 긴급히 경종을 울렸다.

바란은 고개를 들어 지평선을 내다보았다. 세세한 것을 제하면 모든 것이 계획에서 크게 빗나가는 일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갤리거 경을 코코탄 전투 이후로 처음 마주한 아비, 사사바란 공작과 옛 주군인 헬린 힐벤은 바란의 예상 그대로 갤리거를 완벽하게 마련된 무대에서 처형하고 싶어 했다.

“네가 그렇게 목매달던 왕자가 어떻게 패배하는지 여기서 지켜보고 후회하도록 해라. 고얀 놈 같으니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당분간은 갤리거의 안전이 보장된 셈이었다. 더구나 뜻밖의 행운까지 찾아왔다. 사사바란 측에 맡겨두었다간 워낙 다혈질인 공작의 손에 언제 목이 따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지, 대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날만도 남작을 불러 갤리거의 신변을 보호하라고 지시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그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주변인들이 이미 ‘폐하’라고 연거푸 불러가면서 한자리 얻어내려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판이었다. 담백한 ‘전하’ 소리가 오히려 튀었다. 날만도 남작은 평소에도 명성이 드높은 청렴한 성정을 십분 발휘하면서 조용히 갤리거를 연행했다.

날만도 남작은 대공에게 대어 준 병력의 수로만 따지자면 사사바란 공작에게 버금가는 수뇌 세력이었다. 청년 시절부터 돈의 흐름에 밝은 것에 비해서 강박적인 의리와 청렴함 탓에 수완은 없다고 소문 난 남자였다. 그래서 대공도 이 남자에게 갤리거 경을 믿고 맡겼을 것이다.

날만도는 계획의 또 다른 열쇠였다. 바란은 간절해져서 무심결에 자신의 손톱을 물어뜯었다.

앙살라테가 부디 귀띔한 대로 움직여야 할 텐데. 그 자존심에, 그 철저한 성격에 허술하게 짜인 계획을 따라와 주긴 하려나 걱정이 되었다.

“공격하지 않는군.”

성벽에서 최초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던 레널드 백작이 혀를 찼다. 전에 바란의 처벌을 두고 참수해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주장하던 원리주의자였다. 대공에 대한 충심으로는 한 손에 꼽힌다더니 과연 이 번거로운 성곽에서 지휘를 도맡고도 눈빛이 부리부리하게 번쩍인다. 바란은 그가 자원해서 나섰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언이 있는 모양입니다.”

“혹시 모른다. 비열한 앙살라테의 심복들 아니냐. 궁수를 대기시켜.”

“사격 준비!”

“준비!”

“대기하라!”

목청 큰 전령이 말 달려 애틀턴에까지 오는 모습을 보니 사난타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바란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다. 하여튼 꼰대들에게서 내려온 관습은 써먹을 데가 없다는 게 바란의 의견이었다. 좋게 만나서 조곤조곤 대화하면 될 것을 굳이 목이 나갈 때까지 소리 지르는 이유가 다 뭘까? 무슨 짐승이 포효하는 흉내라도 내려는 걸까.

“우리는 날만도 남작의 후계를 포로로 잡고 있다!”

바란은 귀를 쫑긋 세웠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날만도 남작을 운운하는 것은 바란이 그려놓은 밑그림 그대로였다.

“우스운 소리다! 날만도 후작은 후사가 없어.”

“밀렌 아겐호프가 우리 수중에 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레널드 백작 당신도 잘 알아들을 테지.”

“쯧….”

이때 전령이 손을 치들어 대공 측의 병사 하나를 불러다가, 무엇인가를 들려 보냈다. 레널드 백작에게까지 올라온 것을 확인해보니 다름이 아니라 한 움큼 잘려나간 금발이었다. 바란은 속이 거북해졌다. 포로, 밀렌 아겐호프의 머리칼이리라. 머리카락을 자르도록 왕자에게 아이디어를 준 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메스꺼웠다.

“너희들이 억류하고 있는 왕자의 기사 갤리거를 풀어준다면, 기꺼이 교환할 용의가 있다. 이틀의 시간을 주겠다.”

‘시간을 주겠다’는 말을 철저히 지키며 전령은 뒤로 물러갔다. 바란은 레널드 백작의 눈치를 살폈다. 비장한 얼굴로 나아와서 요청한 것이 고작해야 포로 교환이라는 점이 마음에 짚이는 듯했다. 그것도 대공에게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이 아닌, 일개 아겐호프를 협상 카드로 가지고서.

갤리거 경을 맡고 있는 것은 날만도 남작이다. 레널드 백작은 이 제안의 위험성을 곧장 이해했다. 주변을 향해 엄중히 함구령을 내렸는데, 물론 그런다고 막을 수 있는 소문은 아니었다.

바란이 약간의 시간을 두고 날만도 남작을 찾아갔을 때, 이미 이 제안은 그의 귀에 들어가 있었다. 당연했다. 외곽을 지키는 병사들 중에는 날만도의 사병도 있었다. 사사바란과 대공에게도 이 제안이 들어갔을 것이다.

대공은 아마 안전을 위해 최종적으로는 갤리거 경을 다른 수하에게로 옮기려 하겠지만 당장 서두를 생각은 없을 것이다. 날만도 남작의 충심을 떠보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날만도의 고지식한 충성에는 바늘 꽂을 틈도 없음을 익히 알고 있을 테니까.

이런 신뢰야말로 가장 큰 약점이 된다. 바란은 날만도가 결단코 자신의 손으로 갤리거 경을 해방할 리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날만도 남작이 의리를 잊지 않는 사내이며, 밀렌 아겐호프를 상상 이상으로 아낀다는 것도 알았다.

“괜찮으십니까?”

다 안다는 듯이 걱정 서린 목소리가 날만도 백작을 위로하고 나섰다. 외부인을 들이면 안 된다고 누차 얘기해뒀건만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밀고 들어서서 인기척을 낸다. 태연자약한 미소까지, 전부 다 거슬렸다.

“저런,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표정이 왜 그럽니까? 남작.”

고양이들은 제멋대로 구는 동물이라 가끔 같은 짐승인 개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특권을 당연한 것처럼 누리는 일이 있었다. 음식 다루는 부엌에는 예로부터 짐승을 들이는 게 아니라 했지만, 눈알이 왕방울만 한 고양이는 시침 뚝 떼고 아웅 거리며 들어오는 것처럼.

날만도에게 있어서 바란 탈타미오의 이미지가 꼭 그랬다. 주군이 기르는 앙칼진 고양이. 총애를 받다 말고 저번엔 어쩐 일로 거하게 미움을 사 사난타의 촌극에 앞장 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애틀턴에 있는 대공의 우편으로 돌아왔다. 신통한 귀소본능이었다.

“후작. 멋대로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긴 아직 위험할 줄 압니다.”

날만도 남작은 평생의 라이벌이라 일컬어 마땅한 레널드 백에 비해 교묘한 말솜씨가 모자랐다. 인자한 성품 덕에 꼴사나운 십 대 소년처럼 들리지는 않는다지만, 그래도 바란에게 쏘아붙인 말에서 퉁명스러운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아직 대공 전하의 노여움이 다 걷힌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 날만도 남작. 제 걱정을 다 해 주고, 정말이지 다정다감하셔라. 하긴 전에 탈타르에서 열렸던 회의 중에 내 편 들어 줬던 것도 남작 한 사람뿐이었지요. 내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란은 콧노래를 부르며 몇 발짝 더 다가섰다. 갤리거를 지키고 있던 날만도는, 바란을 들이는 것을 대놓고 꺼려했다. 약간의 움직임에도 숱 많은 눈썹이 왈칵 일그러졌고 목울대가 움찔 떨며 바란에게 주의를 주려 만반의 준비를 했다.

“감사 인사를 꼭 전해야지 생각했어요.”

“편을 들다니, 어린애들이나 쓸 법한 말입니다. 나는 후작의 편을 든 적 없습니다. 그저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의견을 냈을 뿐.”

“아무튼, 은혜를 입은 건 사실이죠. 당신은 내 은인이에요.”

바란의 눈은 반짝였으며 매끈한 피부와 미소에서는 광채가 났다. 애틀턴에서 아주 오래간만에 따뜻한 물로 귀족 대접을 받으며 몸을 씻은 덕택이었다. 향유를 발라 몸에서 좋은 냄새도 났다.

“그런 은인이 곤경에 처했는데도 도울 방도가 없으니.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

날만도는 진의를 확인하려는지 잠깐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매와 같이 날카로운 눈매가 바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의뭉 떨기를 즐기는 바란의 파란 눈이 깊은 호수처럼 잠잠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자 퉁명스럽던 기색이 많이 가셨다.

“…감정적으로 굴어 미안합니다.”

“미안해하실 거 없습니다. 저라도 가족을 저당 잡힌 상황에서는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들이 포로 교환을 제안했다 들었습니다. 아겐호프 영식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기사 갤리거를 넘기라 했다고요.”

“밀렌에게는 갤리거만큼의 가치가 없습니다.”

“왜 없겠어요. 남작이 피붙이로 생각하는 아이라는 걸 누구든 다 압니다.”

밀렌 아겐호프가 교환 대상으로서 가치를 갖는 유일한 이유는 날만도 남작이 가진 애착이었다. 만일 대공이 남작에게 때마침 갤리거를 맡겨 두지만 않았더라면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할 수나 있었을 텐데. 바란은 진심으로 이 남자가 안쓰러워졌다. 남작은 제 손아귀에 아겐호프의 목숨을 살릴 방법을 틀어쥔 채로 고민을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그 경황 없는 고통 덕택에 바란의 관심을 순전한 위로로 여기는 듯했다.

바란은 못 할 짓을 한 것처럼 갑자기 양심이 쿡쿡 쑤신다. 친아들도 아니라더니 멍청하도록 순진한 것은 아겐호프나 날만도나 꼭 닮았다.

“남작,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보고만 있지 않으면 어떡하겠단 말입니까? 나는 헬린 힐벤 전하께 나의 심신과 가문, 그리고 명예를 모두 바치겠다는 충성의 서약을 칠 년도 전에 읊었습니다!”

남작의 잔뜩 경직된 어깨가 거친 숨소리를 따라서 들썩인다. 바란은 살그머니 눈치를 보며 방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걸 날만도도 분명히 인지했지만 바란을 막아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하니 수동적인 출입 허락이 분명했다.

애틀턴의 왕성은 작은 방 한 칸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꾸며놓은 사치스러움이 특징이었다. 고시대의 미술품으로 우아하게 장식된 방 안에 웬 살벌한 말뚝이 박혔고, 그 말뚝엔 잡종견 다루는 것보다 못한 모양새로 갤리거가 결박되어 있었다. 조롱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입마개와 족쇄, 사슬 등은 전부 튼튼한 철제다.

“전하의 지시입니다.”

“아, 어쩐지….”

날만도가 직접 이런 조치를 취했다면 그에 대한 바란의 평가가 완전히 뒤집어질 뻔 했다. 갤리거 경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고 두 눈은 두려움이라고는 모르는 시큰둥한 상태 그대로였다. 마음이 놓였다.

“가만 생각하니 내가 후작이 어리다고 무척 얕보기는 했던 모양입니다. 저 기사 갤리거를 단신으로 잡아 왔단 말을 듣고 내 두 귀를 의심했지요. 아직까지도 썩 믿음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화의 맥이 끊어졌다. 날만도가 상념에 잠겨 한눈을 판 탓이었다. 바란은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심기를 상하게 했다간 여기서 바로 쫓겨나게 될 테니까. 남작의 마음의 짐에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속눈썹을 천천히 팔랑였다. 길어진 데다 염색물이 빠져 붉은 기가 사라진 금발을 귀 뒤에 꽂았다.

“고민해 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밀렌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그 애도 나를 잘 알고 있으니 이해할 것입니다. 나는, 주군을 저버리지 못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바란은 날만도의 결론에 마주쳤다. 예상 대로였다. 의리를 제하면 시체와 같은 남자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이맛살을 내려다보면서 바란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만도 가의 충성스러운 가신들이 그들의 남작과 똑같이 침통한 기색으로 곡소리를 냈다. 침음성이 얼룩덜룩 나붙은 적막 탓에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정작 도사견처럼 말뚝에 묶인 갤리거 경은 어항 속 물고기처럼 내면이 평화롭건만, 그 감시자들이 통곡 속에 휘청거린다. 우스운 광경이었다.

“안타깝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후작. 밀렌은…. 아주 어릴 적부터 내 아들처럼 컸습니다. 아겐호프 쌍둥이 전부가 내 자식 같았지만, 그중에서도 밀렌은 유난히 정의롭고 용맹해서 걸음마를 뗄 적부터 내 마음을 꼭 사로잡았죠.”

“…조금 걸으시겠습니까?”

바란은 천장의 샹들리에, 그리고 붉은 벨벳 커튼 사이로 시선을 어지럽게 돌렸다. 이마를 짚고 휘청이는 중년의 남작을 친절하게 부축하며 팔뚝을 내밀었다. 가신들의 시선을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는 각도를 계산해 가면서, 바란은 날만도 남작에게 산책을 권했다.

“신선한 바람을 쐬며 이야기하시면 기분이 좀 나아질 테니까요.”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아, ‘잔악후작’ 말씀이신가요. 우스꽝스러운 호칭이지요.”

“밀렌이 들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반박하며 나섰을 겁니다. 후작을 꽤 좋아하곤 했거든요.”

허허로운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날만도 후작은 약관이 넘긴 아들을 둔 사람처럼 말하기에는 애매하게 나이가 젊었다. 문득 닥치는 위화감을 이겨내면서 바란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고엽이 나뒹구는 을씨년스러운 애틀턴 왕성을 함께 거닐며 곧 두 손 놓고 잃어버려야만 하는 밀렌 아겐호프에 대해 말을 나눴다. 바란은 중간중간 “그 녀석이 좀 그런 면이 있더군요.”하고 맞장구 치며 나서지 않도록 유의해야 했다. 납득이 가는 이야기가 튀어나올 때마다, 바란은 생각보다 밀렌 아겐호프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적에는 기도한다는 말처럼 짜증 나는 게 없었습니다. 하등 도움도 안 될 거면서 오지랖을 부리느라고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죠.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가 갑니다. 그저 무력감에 잠긴 채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로군요. 아겐호프 영식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후작.”

날만도 후작은 바란의 진지한 말 몇 마디에 홀랑 넘어가서 내면 가장 부드럽고 약한 곳을 슬그머니 노출했다. 바란이 그 빈틈을 놓칠 리 없었다. 밀렌 아겐호프가 남긴 커다란 상흔을 상냥한 말을 두르고 한껏 뒤집은 다음에 다시 다독여주면서, 온 마음을 다해 위로하는 척 의뭉을 떨고 눈알을 축축이 적셨다.

“정말 고마워요.”

적어도 날만도가 바란 탈타미오 후작에게 가진 인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 * *

약속한 이틀의 기한이 다 지나기 전에 사건은 벌어졌다. 잘 묶여 있던 갤리거 경이 저녁에 감시조의 교대가 바뀐 사이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사사바란 공작과 대공이 눈에 불을 켜고 벼르던 인물이니 만큼 그 반향은 컸다. 재빨리 사라진 갤리거 경의 자취를 수색하기 시작했으나 성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애틀턴 왕성 한가운데에서 중요한 포로가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목소리 좀 낮추시오.”

“아니, 이게 지금 진정할 수가 있는 상황입니까? 왕성 한가운데에서 말뚝에 묶여 있던 포로가 사라졌다는데요!”

내부의 협력자 없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의심의 화살은 서로를 겨누었고 대공파 수뇌회의는 곧장 말싸움으로 뒤덮였다. 그들 가운데 가만 입을 다물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커다란 명분과 심증을 가지고 있는 날만도 남작이었다. 그가 갤리거의 감시를 맡은 당사자이기도 했던 까닭에 의심의 눈초리는 점차 짙어져만 갔다. 날만도 남작은 당장 고꾸라져 죽어도 이상할 것 없이 낯빛이 안 좋았다.

“저, 저, 전장에서 새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왕자군이 갤리거 경이 돌아왔으니 붙잡고 있던 밀렌 아겐호프를 죽이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대신 놓아주지도 않겠다는데, 갤리거가 홀로 도망쳐 나온 경우이니 교환 조건에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저자들 주장입니다.”

탁자에 둘러 앉은 귀족들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날만도를 향한 소리 없는 야유가 빗발쳤다.

“결국은 아겐호프 꼬마를 구하려고 충심을 저버렸군. 날만도 남작.”

다들 상호 간에 눈치를 보고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입 밖으로 내지 않던 의심이었다. 저수지 둑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한번 이 말을 누군가 입에 담고 나니 거대한 물살과도 같은 의심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양심도 없군.”

바란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자리는 귀족들의 고리타분한 예절에 의하면 말단에 해당했다. 목청을 아무리 키워도 저 상석 가까이 앉은 사사바란 공작의 늙은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을 위치다. 자리 배치에서부터 다분히 느껴지는 멸시에 구태여 대항하지 않았다. 바란은 그저 입을 다물고 사건의 경과를 관찰할 뿐이었다.

대관식 의상 준비로 부산스럽게 구느라고 대공은 회의에 자리를 비웠다. 때문에 균형을 잡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회의가 점차 난장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날만도 남작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더욱 안쓰러운 빛깔로 물들이며 무슨 말인가 꺼내려고 했다. 솔직한 낯에 여러 가지 감정들이 오갔다. 억울한 마음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원리주의에 지배당해 선뜻 구해낼 수 없던 소중한 밀렌 아겐호프의 목숨이 죽다 살아나지 않았는가. 바란은 날만도의 마음에 억울함을 가뿐히 누르는 거대한 안도가 가득 차 있음을 알았다.

일순 공중에서 눈이 마주쳤다. 날만도는 바란에게 눈으로 묻고 있었다. ‘왜 풀어줬습니까?’ 하고. 오래 상단을 굴렸다더니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힌다. 갤리거 경을 풀어준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란 탈타미오라고 확신하고 있는 성싶었다. 그러나 원망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바란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만도의 두 눈이 살포시 내리 감겼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는 곧 알게 되었다. 의자 삐걱대는 소리가 났으며, 시끄럽게 수군거리던 귀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날만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좌중을 천천히 훑었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였소.”

자신의 것이 아닌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며 날만도가 근처에 선 기사에게 눈짓했다. 자신을 포박하고 끌어내 죄인 취급을 하라는 듯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내민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침묵이 이때 깨어졌다.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발을 구르며 날만도의 모든 것을 헐뜯고 저주했다. 세력 내에 가장 충성스럽고 청렴한 것으로 알려진 남작의 추락에 그것 보라고, 어차피 알량한 협박에 무너질 충심이었다고, 귀족들은 내심 고소해 했다.

바란은 날만도가 자신의 만행이 올곧이 그와 밀렌 아겐호프를 돕기 위함이었다 생각할지 궁금해졌다. 긴급히 공수한 밧줄로 묶이는 와중의 날만도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털어낸 듯이 시원한 미소를 내걸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입을 뻐끔대며 뒤를 돌아 나간 날만도의 모습이 밀렌 아겐호프와 겹쳐 보였다. ‘믿을게요.’ 하던 어린애의 모습이 저 남자 안에 분명히 남아있었다. 직계혈족도 아니면서 참으로 빼닮은 자들이다. 바란은 미소지었다. 어차피 탁자에 둘러앉은 귀족들 중 태반은 비스듬하고 껄끄러운 미소를 짓고 있던 참이니 별달리 눈에 띌 것도 없었다.

그날 저녁엔 대공으로부터 연락이 와 있었다. 아마 수비구역과 관련해 전할 말이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바란이 사난타에서 패장의 꼬리표를 화려하게 달았다지만, 대공파에서는 그 수가 많지 않은 젊은 장수였다. 곧 벌어진 결전에서 아무런 임무도 맡기지 않고 노닐게 방치할 리 없었다. 게다가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날만도가 맡았던 수비구역 지휘관 자리가 휑하니 비었다. 어떤 식으로든 인사이동은 필연적이었다.

“대공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가져와.”

예의라고는 살라 먹은 헬린 힐벤 답게 막 침의로 갈아입고 침상에 누우려던 깊은 밤 돌연히 시종 편으로 화려한 연미복을 전했다. 포장까지 된 물건을 열어보았을 때 예상치 못한 옷가지가 튀어나와서 얼마나 황당한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화려한 보석이 알알이 박혔고 최고급 염료로 물들인 붉은색 의상이었다. 바란은 평생 이런 졸부 같은 디자인은 입은 적이 없다.

“입고 오라십니다.”

“오.”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헬린 힐벤이 이렇게 괴짜처럼 굴 때 이유를 따지고 드는 건 제 무덤 파는 일이다. 입을 딱 다물고 아닌 밤중에 나풀거리는 연미복에 구두까지 갖춰 입었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향한 곳은 왕성의 지하였다. 애틀턴 왕성은 지하에 개미굴보다도 복잡한 구조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로 유명했는데, 바란은 동부 사람이라서 왕성에 온 것도 이번이 고작 두 번째라 육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촌뜨기처럼 둘러보고 있으려니 포도주 저장고 같은 장소까지 시종이 바란을 안내했다. 아담한 오크통이 여럿 포개져 있었다. 바란의 구둣발이 또각이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안에 계십니다.”

시종은 납죽 고개를 수그리며 물러갔다. 바란은 재빨리 사라지는 시종의 뒷모습과 마냥 텅 비어 보이는 오크통 저장고의 모습에 아리송해졌다. 나란히 줄지어 선 오크통 선반 사이로 걸음을 딛던 때였다. 누군가 바란의 몸을 홱 낚아챘다.

“으윽!”

깜짝 놀라서 일단 주먹을 휘두르고 봤다. 오른쪽 주먹이 확실히 들어갔다. 바란의 손목을 붙든 힘이 쭉 빠졌다. “누구냐!”하고 외치려던 마음은 습격자의 정체를 발견한 후에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헬린 힐벤이 야릇한 표정으로 바란의 주먹에 얻어맞은 한쪽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바란은 식은땀을 흘리다 말고 바닥에 슬그머니 부복했다.

“아프네요.”

“…….”

바란의 눈동자가 힘없이 떨린다. 헬린은 바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는데, 어둑한 횃불 조명에다 바란이 걸친 연미복을 비춰 보고는 썩 만족스러워진 눈치였다. 소매의 러플을 층층이 손가락으로 뒤지고 타이를 반듯하게 잡아줬다.

그런 다음, 바란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 게 분명한데 여태 엄살 부리느라고 손바닥 안에 꼭 부여잡고 있던 한쪽 뺨을 바란에게 돌려 댄 것이다. 바란이 어정쩡하게 서서 눈만 굴리고 있자 벼락같은 짜증을 냈다.

“아파 죽겠다고요. 호 불기라도 하든가, 미안하면 성의를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입김을 불라는 말씀이십니까?”

“불충으로 뒤지기 싫으면 그래야지요.”

아마 바란을 가지고 남창이라 비꼬던 버릇과 궤를 같이하는 괴롭힘일 터다. 과민반응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바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악물며 생각했다. 시답잖은 일로 일일이 모멸감을 느껴서는 대공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꼴밖에 못 된다. 결심 끝에 속눈썹을 팔랑이며 들었다.

눈을 뜨면 대공이 여느 때처럼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란을 노려보았다. 대공이 웃음을 띠고 있다면 이 우스운 행위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가 이어져서야 바란은 대공의 한쪽 뺨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다 대는 수밖에 없다. 시킨 대로 떨리는 숨결을 훅 불었다.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은 자괴감이 불어닥친다.

“읍.”

헬린 힐벤은 바란의 입김이 볼 언저리와 삐죽빼죽한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동안 상념에 잠겨 말이 없었다. 그러다 또 갑작스레 바란의 양 볼을 꾹 욱여 잡는다. 물고기가 뻐끔대는 것처럼 뺨이 움푹 파이고 붉은 입술이 튀어나왔다.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만들어 놓고 헬린은 지긋한 눈빛을 쏘았다.

“내가 후작을 어쩌면 좋을까요.”

“으읍.”

“이 머리통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 두개골을 쪼개서 내용물이나 보면 마음이 시원할까. 하지만 그런다고 후작의 생각이 눈에 보이진 않을 거야. 괜히 죽어버리기나 하겠죠.”

희멀건 낯이 천천히 다가온다. 바란은 깜짝 놀라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입맞춤? 아리송해서 발버둥 치려는데 바란의 상상력을 나무라듯이 이마에 단호한 충격이 가해졌다. 콩 찧었다. 대공의 뾰족이 선 동공이 아주 가까웠다.

“내가 무섭나요?”

바란은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이미 알고 있었다. 헬린 힐벤은 자신이 평범한 인간과는 다르다는 것을 두려움으로 확인받곤 했다. 대공도 바란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듯이 질문을 바꿨다.

“그런데도 이 내가 왕이 되길 원해요?”

“신이 우둔하여 전하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억센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대공은 바란의 입 안쪽 연한 살들이 다 짓눌릴 정도로 거세게 뺨을 압박했다.

“내가 왕이 된다면 왕국은 공포로 들끓게 된다고요. 나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즐겨요. 피바다를 여흥쯤으로 여긴다는 건 다들 공공연히 알고 있겠죠. 나는 이 전쟁에서 앙살라테와 수많은 포로들을 붙잡은 뒤에 돼지처럼 먹여 살릴 거예요. 훗날에 내가 취기가 오르고 기분이 좋을 때 한 놈 씩, 아껴 피우는 연초처럼 숨겨뒀다 꺼내 들어 죽일 거야.”

“…….”

“용인기사도 거기 있겠죠.”

대공이 떠보듯 말했다. 바란은 조곤조곤한 음성이 불러준 대로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을 느낀다. 무기력하게 눈을 깜빡였다.

대공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썩 애처롭게 눈을 깜빡거리는 것에 비해서 바란의 볼을 붙잡은 손가락은 인공 보조개를 만들어줄 의향이 있기라도 한 양 거칠다.

“아프, 으….”

뒀다간 짧은 손톱이 볼 살갗을 뚫고 들어올 성싶어서 바란은 살며시 대공의 손등을 제 손으로 감쌌다. 눈길이 따라붙는 게 느껴진다. 입을 뻐끔거리자 무슨 잘난 이야기를 하려는지 들어나 보자는 듯이 헬린이 바란을 놓아주었다. 바란은 싱긋 웃다 말고 얼얼한 입가를 곤혹스레 문질렀다.

바란이 고통 탓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자, 대공은 콧방귀를 뀌며 바란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억센 손짓으로 바란의 금발을 마구 뒤섞어 놓거나 어깨를 스치듯이 만지는 것까지, 죄다 멋대로 행동했다. 바란은 제자리에서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았다.

“후작은 사람 갖고 노는 걸 즐기지 않죠. 꽤 오랜 시간 생각했어요. 왜 용인기사를 탈타미오에 소중히 붙들어 놓고 소꿉놀이에 정신이 팔렸던 걸까.”

“…….”

“나는 후작의 충심을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다행스럽게도 후작은 등짝이 너덜너덜하도록 채찍질을 당하고 내게로 돌아왔지요. 그래서 묻는 거니까, 대답 똑바로 해요.”

대공의 유한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가셨다.

“그 새끼랑 잤어요?”

바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투박한 손길이 바란의 엉덩이를 그러쥐었다. 너무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이 구멍으로 그 새끼 걸 물었냐고요. 그게 아니고서는 그깟 도롱뇽 튀기한테 후작이 쩔쩔 맬 이유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말해 봐요, 여기로 먹었어요?”

“잠깐, 전하-”

“아님 여기?”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던 대공의 손이 가슴을 은근히 타고 올라서 바란의 붉은 입술 위까지 옮겨갔다. 손가락을 튕겨 말랑거리는 입술을 한 대 때렸다. 바란은 움찔 물러나며 헬린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쉴 새 없이 음담패설을 내뱉는 것에 비해서 성적인 의도라고는 읽을 수 없는 담백한 얼굴이었다. 평소처럼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유한 표정이 자취를 감춘 것만으로 엄청난 분노를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눅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대공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휘저어 놓았다가 싫증이 나면 얼른 등 돌리는 평소와는 달랐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심의 무게만 쌓임을 알기에 바란은 납죽 기었다. 모멸감에 파리하게 질린 얼굴이 그늘 밑으로 숨었다.

“오해십니다.”

“뭐가요.”

“비역질엔 취미가 없습니다. 이 입술을 묻을 곳이라면.”

바란은 연미복을 걸친 만큼 익살스러운 예의를 차렸다. 잘 꾸며진 연극을 보는 것 같다. 대공은 가만히 바란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키스를 청하는 손짓 위에 순순히 자신의 손등을 내밀어주었다. 바란의 입술이 내려앉는 순간에 기세가 누그러졌다.

“전하의 손등밖에는 또 어디가 있겠습니까. 이제 며칠만 더 기다리고 나면…. 왕국의 인장을 넣은 국왕의 반지에 입 맞출 영광 역시도 주실 테고요.”

“…나의 통치를 고대하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물론입니다. 탈타르에서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저는 한결같습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나의 왕.”

헬린 힐벤은 그 대단한 혈통과 지긋지긋한 성미에 비해 단순한 결핍증을 앓고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 온전한 아군을 가져보지 못했던 남자이기에, 대꾸 없이 보듬어주는 위로에 사족을 못 쓴다는 점이 그 증거다.

그냥 입에 발린 말이어서는 안 된다. 절대적이어야만 한다. 대공의 어미인 얄렌의 성녀가 사사건건 대공에 대한 불신과 강경한 교정을 내세웠던 것의 영향이다.

자존심을 버리고 대공의 발아래에서 손을 비빌 위인들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대공이 폭력적인 기질을 터뜨릴 때에 반대쪽 뺨을 돌려대며 변함없는 충심으로 추켜세워줄 만큼 배알도 없는 작자는 많지 않았다. 바란만 해도 목이 졸리거나 뱃가죽이 찢어지는 등 대공의 손에 죽을 뻔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악착같이 곁을 지켜왔다. 그러니 대공 입장에서 바란의 대체품을 찾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란을 휘둘러 살피던 헬린 힐벤이 어느새 이렇게나 바란의 존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마법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한 주문이 무엇이었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개살구 같은 도덕입니까?”

입맞춤 받은 대공의 손이 불쑥 그 아래 놓인 바란의 손가락을 꾹 붙잡아 당긴다. 우악스러운 힘에 못 이겨 바란은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 말도 선뜻 이어지지 않았으며,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에 바라본 대공의 낯이 얼마나 먹먹한 표현을 머금고 있었는지, 바란은 순간 눈앞에 있는 게 ‘그’ 헬린 힐벤이 맞는지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날만도 남작의 군대가 성의 남서쪽 방어를 맡았습니다. 다만 그가 불미스러운 일로 구금되었다는 점은 후작도 알고 있겠지요.”

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지휘를 맡으세요.”

대공은 할 말은 끝났다는 듯이 바란의 손을 놓았다. 아쉬운 기색이라고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음속에 팽팽하게 당겼던 긴장의 끈을 갑자기 칼로 끊어낸 것 같았다. 대공이 이런 식으로 변덕을 부려 돌변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무언가 느낌이 달랐다. 대공의 파란 눈이 먼 곳을 응시했다. 일부러 바란에게서 멀찍이 떨어지려는 것처럼.

“지휘관 자리를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쪽도 꽤 인력난이거든요. 전투에 나서지 않으려는 겁쟁이 늙은이들이 태반이라 거동이 불편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는 수비 구역을 할당받지 못한 자가 없어요.”

바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순순히 “명을 받듭니다.”하고 말했다.

“…왕좌에 오르고 나면 저에게 포도주나 한 잔 내려주시렵니까.”

겉치레처럼 한 인사에 대공이 멈칫 웃는다. 이상야릇한 웃음이다. 바란이 주위에 가득한 오크통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이자 이번엔 숨소리까지 터뜨리면서 웃었다.

“포도주라, 귀엽긴.”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대공은 삐딱하게 서서 오크통을 통통 두드렸다.

“이건 다 폭약이에요.”

“폭약… 말입니까?”

“애틀턴 왕성은 복잡한 지하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 중에는 성 외곽 바깥으로까지 이어진 비밀스러운 통로도 여럿 있죠. 앙살라테는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 알고 있는 통로들이 꽤 있을 겁니다. 수틀리면 이쪽에서 길을 막아버릴 작정입니다.”

바란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얼른 제 할 일을 다 했다. 대공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아첨했다는 뜻이다.

“영명하십니다.”

“아, 그렇게까지 애써 칭찬할 필요는 없는데.”

손이 천천히 뻗어왔다. 대공을 알아 온 바란은 내심 이 손이 뺨을 갈기거나 내키는 대로 목을 조를 것이라고 예상하며 한껏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가벼운 감촉이 머리칼에 닿았다가 툭 떨구어졌다. 접촉은 잠깐이었다.

“이젠 안 그래도 돼요. 후작.”

눈을 들었을 때 헬린 힐벤은 이미 바란을 뒤로 하고 걸어나가는 중이었다. 바란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거칠게 입술을 소맷부리에 문댔다. 머리를 갈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열어보고 싶다고 말했던가. 바란의 마음이야말로 딱 그 짝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주변의 오크통들을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나 싶었다. 바란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직접 헬린 힐벤을 죽일 작정이었으니까.

* * *

니카는 웅장하게 지어진 애틀턴 성의 그림자를 멀찍이에서 감상했다. 왕녀를 보좌하는 입장에서 몇 번이고 드나들었던 왕성인데 왜 이리도 색다르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네 말대로 죽지 않을게.’

낯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모르겠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 니카는 싱숭생숭하게 뛰어대는 심장께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걱정이 되는 탓이었다. 손수 도망시킨 잔악후작이 저 애틀턴 어딘가에서 니카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진 거다.

‘걱정할 게 다 뭔가. 헬린 힐벤을 위해 일하는 놈이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책임지고 걷는 것이 마땅하다. 알량한 감정… 따위는….’

고개를 아무리 내저어도 서글서글한 눈웃음이나, “니카아.”하고 말꼬리를 늘이는 교태로운 목소리는 기억에 눌어붙어서 도무지 긁어낼 수가 없었다. 문득 후작에 대한 자신의 미련, 아니, 감정을 깨닫고 난 이후로부터 니카는 계속 신경질이 나 있었다. 평소보다 배는 예민해진 니카의 밝은 귀를 자꾸만 거슬리게 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아, 빨리 피 터지는 전쟁. 전쟁!”

“…….”

“전쟁! 전쟁.”

“좀 닥쳐라.”

“악!”

니카가 내던진 장갑을 얼굴에 정통으로 맞은 락샴이 요상한 비명을 내질렀다. 요즘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느냐며 떽떽거리다가, 니카가 장갑을 던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이거 결투 신청이냐고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니카는 그저 모른 척 작전 테이블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바란 탈타미오가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이 나서 안 그래도 바쁜 마당에 저 피곤한 싸움광까지 상대하다간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락샴의 소란은 앙살라테가 갑옷을 갖춰 입고 작전 테이블 앞에 나타날 때까지 이어졌다. 그나마도 계속 떠들다가 앙살라테가 참다못해 조용하라며 일갈했을 때 반쯤은 토라진 채로 입을 다문 것이었다.

“애틀턴에 심은 정찰병에게서 신호가 왔다. 외곽에 뚫린 동굴 안에 왕성의 지하구조와 이어진 통로가 있어. 우리 측 세력이 지키고 있으니 길을 비켜줄 거야. 동쪽과 서쪽에서 시선을 끈 뒤에 그리로 돌격대를 보낸다.”

“잠깐. 갤리거 경이 없는데 누가 지휘합니까?”

토라졌던 것도 까맣게 잊은 락샴이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왕자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기사 갤리거가 자취를 감춘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은근한 물음에도 왕자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어 주변인들은 그저 비밀스러운 임무를 하달받았겠거니 했다.

하지만 진군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도 갤리거 경이 돌아오지 않아 지휘관 자리가 불투명해졌다. 앙살라테의 묵직한 시선이 니카를 향했다.

“엣시아 용병단은 동쪽, 그리고 나는 서쪽에서 공성을 도맡는다. 그러니….”

“저더러 돌격대를 지휘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되물었지만, 실상 물음조차도 아니었다. 니카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앙살라테는 더 말을 잇는 일 없이 그 자리에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왕녀가 왕자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으므로 니카는 왕자 휘하의 기사이기도 했다. 형식 상 여태 왕녀의 승인이 있어야만 전장에 참가해 왔던 니카이지만 앙살라테가 이렇게 묵직한 역할을 안겨 와서야 대놓고 고개를 저을 수도 없다.

왕녀를 위해 거듭해 온 맹목적인 전투. 니카는 문득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지 헷갈리며 어리숙해진다. 모든 믿음의 골조와도 같았던 단단한 애정이 잔악후작이라는 녹을 입어 살그머니 무너지기 시작했으니까. 니카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왕녀가 그의 은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만일 왕녀를 위해서 바란 탈타미오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치닫는다면? 그러면 니카는 잔악후작의 목에 검을 겨눌 수 있을까? 그가 또 번득이는 새파란 눈을 치뜨며 ‘나의 니카’하고 불렀을 적에 감히 칼을 들이밀 용기가 니카의 안에 남아있을까?

“…명을 받듭니다.”

니카는 혼란 속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민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다. 앙살라테가 왕좌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되는 인물이라면, 결정을 내리는 데 한 치의 감정도 고개를 디밀게 만들어선 안 된다.

바란 탈타미오를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 * *

애틀턴의 성곽은 각 구역마다 단단한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산맥을 등에 업어 너른 벌판보다 미세하게 고도가 높은 애틀턴은 요새라는 말에는 조금 못 미치더라도, 왕국 수도에 걸맞은 방어력을 자랑했다.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한 가지 변수랄 것은 앙살라테가 어려서부터 애틀턴에서 자라난지라 공식적인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왕실의 통로를 훤히 꿰고 있다는 점이었다.

앙살라테가 어느 방향을 공략할지 짐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공에게 있어 꽤나 커다란 걸림돌로 다가왔다. 까닭에 그는 군사의 양적인 우세를 내세워 전방위의 방어진을 두텁게 짰다.

애틀턴 왕성을 중심으로 성곽 안팎을 통틀어 여덟 개의 구역을 나누고, 각 위치에 지휘관이 배치되었다. 그중에 바란이 날만도 남작으로부터 이어받게 된 위치는 성 바깥의 남쪽 구역이었다. 잣자후에서 남하하는 왕자군의 진행 방향과는 완전히 반대쪽이니 즉각적인 전장이 될 확률은 낮았다.

하지만….

애틀턴은 본디 왕자의 본거지 중 하나였다. 성 밖을 나돌며 이야기를 전할 만한 끄나풀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바란의 계획대로라면 갤리거 경은 풀려난 뒤에 왕성의 지하수도를 생쥐처럼 누비며 성 안에서 잠복해 정보를 얻어냈을 터였다.

이처럼 갖은 첩보가 앙살라테의 귀에 들어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만일 앙살라테가 바란이 지휘하는 군이 성 남부에 있단 것을 알아챘다면 바란을 통로로 삼아 성 안에 진입할 계획을 짰을 것이다. 앙살라테는 남문으로 행군할 것이다. 바란은 알 수 있었다.

“후작님.”

부르는 소리에 바란은 고개를 들었다. 허벅지 사이의 말이 고개를 앞뒤로 가누며 푸르릉 입술을 떤다.

“북문에서부터 앙살라테 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합니다.”

전황을 보고한 남자는 본디 날만도 남작의 가신 중 하나로서, 날만도의 병력을 지휘하도록 임명된 바란의 보좌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날만도의 성품을 빼닮아 충성스러운 이 남자는 바란이 입에 발린 말로 날만도를 위로하던 때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당시 상황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지 바란에게 무척 공손하게 대했다.

바란이 떨어진 물건을 주워주는 척 이 남자에게서 열쇠를 훔쳐 갤리거 경을 도망시킨 장본인임을 알게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북쪽에서 좌우로 군을 양분하여 애틀턴을 포위하며 남하하는 중이라 합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성곽 쪽으로 최대한 붙어서 좌우로 밀고 올라간다. 내가 신호하면 동굴에 남겨둔 병력에게 햡류명령을 내리고, 지금부턴 방어태세를 단단히 하자고.”

“예, 후작님.”

정성스럽게 발송한 초대장에 적힌 대관식 날, 지평선에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한 이른 시각이었다. 애틀턴에서 정시를 알리는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곽 바깥에서 듣자니 거의 귓바퀴 위를 간지럽히는 수준의 작은 소음에 불과했다. 폭풍전야의 적막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오늘이 모두가 기다려 온 결전의 날이란 사실을 알았다.

왕자와 대공 중 한 사람에게는 지금 떠오르는 이 태양이 삶 속에 마지막으로 보는 일출 장면이 될 터였다. 바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부터 바란이 수행할 역할은 단 하나….

앙살라테의 군대가 진입할 길을 뚫는 것이다.

우렁찬 함성이 귀를 때렸다. 생각보다 대공군의 진군이 빨랐다. 사방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이나 경종소리로 미루어 있는 병력을 전부 다 긁어모은 왕자군이 마지막 승부수를 띄운 모양이었다. 바란은 좌우 두 방향에서 진격하는 왕자군을 보고, 날만도의 가신에게 신호했다.

“준비시켜.”

시끄러운 뿔피리소리. 이견 없이 자신을 신뢰해주는 이 날만도의 병사들에게 바란은 순간 미안한 감정을 품는다. 이 집안 사람들에게나 병사들에게나 지독하게도 죄를 짓는 마당에 마음 편할 리 없었다. 서로 등을 맞댄 군 배치를 젊은 장수가 고안한 창의적인 병법이라고 여기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무겁다.

부관에게는 최남단을 맡은 만큼 왕자군을 위로 밀쳐내기 위함이라 설명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바란은 두 무리로 나눠 둔 날만도의 병사들 가운데에 공동을 만들 작정이었다. 바로 왕자군이 파고들 틈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후방의 성곽으로부터 지원이 뒤따를 테지만, 난전이 이어진다면 성 안에서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때 갤리거가 애틀턴 안에 남은 왕자의 세력을 모아 분탕질을 치며 틈을 만들 테니, 운이 좋으면 남쪽 성문이 열릴 것이다….

그러면 계획대로 왕자의 군대는 애틀턴 안에 진입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청사진을 잔뜩 그려 두고서 앙살라테의 계획을 꿰뚫어 보았다고 자신한 바란에게도 예상치 못한 순간이 찾아왔다. 바란이 일부러 지휘를 어물쩍거리면서 전세를 조금씩 기울게 만들고자 애를 쓰던 참이었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말 달려온 앙살라테의 정예기병들이 날만도 병사들을 아랑곳 없이 건너 뛰거나 말발굽으로 걷어차며 뛰어들었다. 그들이 진행하는 방향은 남쪽 성문이 아니라 그 가까이에 비스듬하게 뚫린 동굴께였다.

‘니카?’

시린 겨울바람에 시달려 핏발이 잔뜩 선 눈을 가늘게 떴다. 왕자군 정예 돌격대는 대개 말을 빨리 달리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엣시아의 용병들 출신인지 몰라도 정체를 훤히 드러내는 경갑차림이었고 투구는 생략한 채였다.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를 확인하고 나니 심장이 얼어붙었다. 홀린 듯이 바란의 시선이 못박힌다.

“니카….”

“후작님! 왕자군이 남쪽으로 밀려들고 있습니다! 후방에 지원을 요청하셔야 합니다!”

검을 휘두르며 잔챙이들을 쳐내던 날만도의 부관이 목청을 높인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전부 알아들었으나 바란은 뜸을 들였다. 니카가 이끄는 돌격대가 성문이 아닌 동굴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린 까닭이었다.

‘애틀턴 왕성은 복잡한 지하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그 중에는 성 외곽 바깥으로까지 이어진 비밀스러운 통로도 여럿 있죠.’

‘수틀리면 이쪽에서 길을 막아버릴 작정입니다.’

‘이건 다 폭약이에요.’

대공의 비릿한 웃음이 바란의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처음에는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성벽 인근에서 폭약을 쓸 리가 없으니까. 그랬다간 성벽이나 그 아래 지반에 타격이 가서 방어에 차질이 생길 게 뻔했다. 더구나 여기에서 폭약을 거하게 터뜨렸다가는 난전에 휘말린 대공군, 그러니까, 날만도의 병사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 바란은 고민할 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한편으로는 입술을 짓씹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과 직감의 사이에서 헤매던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니카가 지금,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니카가 정예들을 이끌고 동굴 방향으로 향한 것은 아마 숨겨진 통로가 있기 때문이리라. 대공이라고 가만 보고 있지만은 않을 터였다. 오크통처럼 보이던 수없이 많은 폭약들을 미리 어디에 설치해 놓았는지는 미지수였다.

만약 니카가 들어간 뒤에 동굴에서 폭약이 일제히 터진다면? 용인이라서 인간보다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지만 무너지는 돌더미에 깔리고 매장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안 돼.”

“후작님! 지금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바란은 단번에 말머리를 틀었다. 부관이 뭐라고 소리치며 다급히 바란의 팔뚝을 잡아 비틀었는데, 이상하게도 바란은 그의 말소리 한 마디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왜 날 방해하는 거지? 왜, 왜, 왜! 니카가 위험하단 말이야.’

“도망치시는 겁니까!”

‘난 이럴 시간 없어.’

“후작님!”

바란은 거세게 팔을 흔들어 부관의 손을 떨구어냈다. 부관의 홉뜬 눈동자에 배신감으로 불이 붙었다. 부관이 ‘비겁한 배신자’를 비롯한, 귀족의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모욕들을 바란에게로 던진다. 반면에 바란은 그저 앞길을 가로막는 게 성가실 뿐, 저깟 모욕 따위는 모래알이 피부 위에 튀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이, 당장 뛰쳐나가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니카.”

진공 안을 부유하는 것 같았던 몽롱한 의식이 현실의 인력에 훅 끌려왔다.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대며 뛰었다. 니카.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입속에서 발음했다. 연이은 무시에 부관이 주먹을 휘둘러 바란의 턱께를 맞춘다. 정신이 잠깐 나갔다가 돌아온 것처럼 머리통 전체가 얼얼했다.

“으으….”

낙마하기 직전에 말머리를 끌어안고 버텼다. 바란은 짐승의 포효소리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부관의 분노를 뒤로하고 얼른 말의 옆구리를 찼다. 고삐를 바짝 당겨 쥐고 엉덩이를 들며 차가운 칼바람이 볼을 빨갛게 얼릴 때까지 달렸다.

날만도 군사들의 시선이 비겁하게 도망치는 지휘관에게 향했다. 사기가 바닥에 떨구어진다. 부관은 감히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고 바란이 했어야 할 일을 대신해 목소리를 높이고 뿔피리를 힘껏 불었다. 성곽 쪽에서 화살이 빗발쳤으나 동굴 입구가 애매한 사각을 만들어 니카의 돌격대를 구했다.

바란의 사정은 달랐다. 바란의 말이 화살 비를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맞고 나뒹군다. 바란도 함께 지면으로 굴러떨어졌다. 등께를 세게 부딪혔다.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가던 와중에, 궤도를 잘못 타고 떨어진 화살에 어깻죽지를 꿰뚫렸다.

“아아악!”

끔찍한 불덩이가 근육을 단숨에 태우는 것 같은 홧홧한 고통이었다. 바란의 몸이 흙바닥을 굴렀다. 성대를 긁는 초라한 신음은 하룻강아지가 깨갱거리는 소리나 다름없이 울렸다.

‘안 돼. 안 돼. 니카에게 저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알려야 한단 말이야. 움직여라, 제발. 어깨를 좀 맞았다고 두 다리까지 말을 안 들을 건 없잖아.’

간절한 바람이 온몸에 주술이라도 건 걸까, 바란은 간신히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비척이는 걸음을 옮긴다.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간 듯한 첨예한 고통을 어금니를 맞붙이고 참아냈다. 아, 아, 아…. 입안이 바싹 마르고 흐느낌 같은 신음이 터졌다. 그래도 걸어나갔다, 그래도.

“니…카!”

바람이 시끄럽다. 형체도 없는 주제에 가녀린 바란의 목소리를 전부 다 파묻어버린다. 그저 한마디만 전하면 되는데 그게 왜 이리도 어려울까.

“…니카!”

이번엔 조금 더 크게 불렀다. 그런데 니카는 이 목소리를 듣기엔 이미 너무 멀었다. 뒤쫓아야 한다. 동굴 안으로 돌격대의 자취가 찰랑이는 말총과 함께 사라지는 게 보였다. 바란은 바닥을 기는 시체처럼 간신히, 걸음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움직임으로 꿈틀거리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흐르는 피로 칠갑이 된 한쪽 팔이 고통스럽고도 무거웠다. 남은 한 팔로 검을 뽑아 들었는데, 이건 고작해야 지팡이의 기능으로밖에는 쓸 수가 없었다.

서늘한 어둠이 짙게 드리운 동굴 안쪽에 바란은 발을 들였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공동에 시끄럽게 울렸다. 눈앞이 까무룩 하게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는 게 없다. 바란은 문득 독약 탓으로 눈이 먼 채 침엽수림을 헤매이던 그 날을 떠올렸다. 어둠은 바란의 모든 감각을 곤두서게 했다. 몸이 파르르 떨었다. 고통 탓인지 두려움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니카를 찾아야 하는데. 위축된 가슴에서 비롯된 목소리가 염소울음처럼 덜덜 떨었다. 

“니, 니, 니-”

“쥐새끼가 따라 들어왔군.”

“일반 병사인가?”

“아니.”

아주 굵고 울퉁불퉁한 팔뚝이 바란의 머리채를 잡고 일으켰다. 머리칼이 온통 뒤엉키고 두피가 당겼다. 손에 든 장검을 휘둘러 저항하려 해보지만 힘이 다 빠졌다. 누군가 혀를 차며 바란의 검을 쳐내자 실수로 검을 놓치고 말았다. 바란을 붙잡은 이들은 가느다란 광선이 닿는 자리에 바란을 옮겨두고 얼굴을 확인했다.

“대공군에 가담한 금발의 젊은 귀족이라 하면…. 이거 잔악후작인가?”

“글쎄. 잣자후에서 도주했다는 소문은 들었지.”

“하지만 그놈이 애틀턴으로 도망쳤다 한들 전방에서 싸울 턱이 있나? 힐벤 놈 침대에 숨어있기 바쁠 텐데.”

“야. 그냥 직접 물어보면 될 걸 무슨 토론을 그렇게 해.”

바란을 둘러싼 그림자가 하나둘 수를 늘렸다. 저희들끼리 바란의 정체에 관해서 떠들며 소란을 피운다. 기강이 잡혀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엣시아 용병들인 것 같았다. 바란의 파란 눈이 바쁘게 사람들 사이를 누빈다.

‘니카는? 니카는 어디에 있지?’

“거기 모여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시간이 없다. 안으로 진입한다.”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니카의 목소리였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멀찍이서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스치듯이 보았더라도 바란이 니카의 모습을 잘못 알아볼 리 없었다. 감격스러운 심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용병들이 성질 예민한 용인기사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비로소 니카는 어둑한 동굴 안에까지 따라 들어온 바란을 식별해낼 수 있었다. 니카의 동공은 인간의 것보다 훨씬 탄력적으로 변화하는 까닭에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도 시력이 대단했다. 그러니 니카가 갑자기 말을 잃은 것은 바란을 못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마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바란의 모습을 마주하고 당황한 게 분명했다.

“…….”

“니카.”

부르는 소리에 움찔 니카가 몸을 떤다. 눈에 띌 정도였다.

바란은 어깨를 찢는 고통도 잠깐 잊어버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그들은 짧은 키스를 했었다. 엄밀히 말하면 키스라고 부르기 애매하지만, 아무튼. 덕택에 바란에게는 니카의 안에 자신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런데, 바란의 몸이 얼어붙을까 염려하여 얼른 누비옷을 던져주던 때와 사뭇 다른 태도로 니카가 입을 열었다.

“잔악후작인가.”

“…니카?”

차갑다. 너무 차가워. 바란은 생각했다. 목소리 전체에 서리가 껴 있는 것만 같았다. 귓구멍을 따라 머릿속으로 니카의 목소리가 타고 들어오면서 주위의 혈관을 죄다 꽁꽁 얼린 모양이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온몸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갑자기 겁이 치민다.

“니, 니카, 동굴 안에 폭약이 설치돼 있어.”

중요한 용건을 꺼내 들었다. 니카에게 완전히 외면당하기 직전에, 그래도 무턱대고 널 방해하려고 나타난 건 아니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주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바란의 시선은 얼어붙은 듯이 니카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니카는 손을 들어 용병들을 진정시켜 보이고 천천히 바란을 내려다보았다.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난타에서 살갗을 때리던 싸락눈과, 또 그것보다도 더 차갑던 니카 경의 눈빛이 떠올라 바란을 괴롭혔다. 영문을 모르겠다. 잣자후에서 도망칠 때 바란은 둘 사이 관계에서 희망을 보았는데, 니카는 반대로 마음을 정리해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건 싫어.’

조마조마하면서 니카의 대답을 들었다.

“갤리거 경이 사전에 조사를 끝냈다. 이 동굴은 안전하다.”

생각보다 왕자군과 갤리거 사이의 대화 통로가 활발한 모양이다. 진군 경로를 미리 예측해서 답사까지 끝내 놓다니. 하지만 바란이 대공에게서 폭약의 존재를 귀띔받은 것이 고작해야 며칠 전이었다. 갤리거의 정보가 얼마나 최근에 얻은 것인지는 몰라도 전달책을 통해 얘기를 전달하는 사이에 대공이 비밀스럽게 폭약을 준비해뒀을 확률은 충분했다. 바란은 그 사실을 환기시키려고 했다.

“하, 하지만-”

“대공의 지시인가?”

“뭐?”

아연하게 되물었다. 주변을 지키던 용병 중 하나가 니카의 심문을 돕기 위해 바란의 머리칼을 멋대로 잡아당겨 위로 일으켜 세웠다. 두피가 떨어져 나가는 아픔에 어쩔 수 없이 후들대는 다리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를 잘 구슬려서 혼란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왔나? 너는….”

니카는 한 박자 쉬었다.

“너는 대공 밑으로 돌아가는 대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바란 탈타미오. 나는 너에게 기회를 줬고, 애틀턴에서 만나면 자비를 기대할 수 없을 거라고도, 분명히 경고했었지.”

“…….”

“그런데도 결국은 애틀턴에서 다시 만나는군.”

니카가 노여움에 말꼬리를 떠는 것을 듣고서야 바란은 비로소 그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이건 책망이었다.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었을 텐데 왜 다시 돌아왔느냐고 묻는 것이다. 왜 제 발로 진창에 도로 기어들어 왔느냐고. 왜, 자신이 끝내 검을 겨누게 만드느냐고.

“잠깐….”

니카가 무심결에 나온 듯한 말 부스러기를 중얼거렸다. 니카는 불쾌할 때 보통 미간과 콧잔등에 작은 주름을 만들면서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지금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궁금했다. 사위가 너무 어두워서 니카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 모습밖에는 인식할 수가 없었다. 새카맣게 보이는 낯가죽에다 머릿속으로 눈코입을 덧그려 보는 게 고작이었다.

“피 냄새가 나는군.”

오래지 않아 용인기사는 들짐승처럼 예민한 후각으로 냄새의 원천을 파악했다. 바란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용병의 손을 거칠게 쳐내고 바란의 앞까지 한달음에 나아왔다. 망설이지 않고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에 바란이 오히려 주눅 들었다. 몸이 저절로 뒤편으로 기울어진다.

차갑게 들끓는 목소리로 니카가 다그쳤다.

“너 다쳤나?”

“뭐? 나 말이야?”

“그래.”

“그렇긴 한데….”

희미한 빛이 내리쬐는 아래로 니카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 것보다도….”

바란은 지금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니라고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니카의 표정이 구겨져 있는 모양을 보니 온갖 생각이나 언어까지도 다 머리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걱정에 사로잡힌 게 분명한 눈동자가 낱낱이 바란을 살핀다. 니카가 화살이 박힌 어깨를 심각하게 내려다볼 동안 바란은 멍청하게 서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화살을 맞은 거로군, 그것도 아군의 화살을….”

“니카, 좀 전부터 계속 말하지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 윽!”

“멍청하기 그지없어!”

니카는 바란의 어깨에 박힌 기다란 화살대를 중간에 꺾어 질렀다. 그 잠깐의 손길에 화살촉이 살 속에서 살짝 뒤틀리며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바란은 혀를 깨물어 참았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꺾인 화살이 바닥에 떨구어졌다. 대공을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칠해진 대공군의 화살이었다.

화살을 향해 용병들의 눈길이 고인다. 대체 왜 잔악후작이 아군의 화살을 맞고 나타났는지가 궁금한 눈치였다. 그들 중 성질이 가장 급한 용병 하나가 사람들 어깨를 내치며 앞으로 나섰다. 니카와 바란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에 찬물을 끼얹으며 침을 튀겼다.

“이봐, 튀기 대장. 이럴 시간 없다고. 잔악후작이랑 뜻밖의 친분이 있다니 재밌긴 한데, 임무는 수행해야지 않겠어. 얼른 죽이고 통로로 진입하지?”

이런 다음에 바닥에다가 가래침을 요란하게 뱉기까지 했다. 니카에 대한 충성이나 존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태도였다.

비록 니카가 지금 돌격대의 대장 격에 해당하는 인물이지만, 저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기대하기에는 니카의 출신이 변변찮기 때문이었다. 마수 혼혈인이라는 위치가 대장으로서의 권위를 깎아 먹었다. 거기에 더해 엣시아 용병들은 워낙 격이 없는 걸로 유명했다. 그중에서도 저 남자는 유별났다.

니카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바란 탈타미오가 심상찮도록 차가운 낯을 하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눈치를 좀 보는 편인 다른 용병들이 끼어들어 무마하려 들었다. 니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괜히 저희들끼리 소란을 피운다.

“하하. 저 새끼 말 원래 거칠게 하는 거 아시죠. 대장.”

“너무 노여워 마십쇼. 뭐 튀기 대장이 꼭 틀린 소리가 아니기도 하고….”

“야.”

“그냥 애칭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수. 애칭.”

시끄러운 말소리는 못들은 체 하면 그만이었다. 니카는 생각에 잠겼다. 가래침을 뱉은 남자 말마따나 계획대로 동굴에 있다는 통로로 진입하기 위해선 우선 잔악후작을 처리해야 했다. 적의 지휘관이다. 저번처럼 순순히 놓아줄 수는 없었다. 동행한 용병들에게 무척 의심을 살 테니까.

‘다시 만날 때 살려 보낼 수 없으리라는 건, 잣자후에서부터 예상했어.’

니카는 깊은숨을 삼켰다. 명목상이라도 이들의 우두머리인 니카가 어떻게든 결론을 제시하고 작전을 진행해야 했다. 니카는 물끄러미 잔악후작과, 그 주변에 둥글게 모여든 엣시아 용병들을 훑어보았다. 등골이 곤란하게 찌르르 울렸다.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뭘 망설이는 거지?’

바란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렸던 오른손을 천천히 늘어뜨려 허리춤에 가져갔다. 검 손잡이가 익숙하게 달라붙는다.

‘바란 탈타미오를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잖아.’

다리에 힘이 풀린 잔악후작이 돌바닥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어깨의 고통은 어깨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마 악을 쓰고 버티다가 고통에 잠식당한 순간 전신에 힘이 탁 풀렸을 것이다. 

기분 탓일까? 니카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물기에 젖은 듯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숨이 막히도록 예뻤다. 후작은 눈을 한번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새파란 눈이 마치 ‘날 죽일 수 있겠느냐’고 잘난 체 묻는 듯했다. 그래서 니카는 괜스레 기분이 상해 못 죽일 것 같으냐고, 윽박을 지르고 싶었는데….

손끝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덜덜 떨렸다. 얼마나 뜸을 들였는지 모르겠다. 용병들이 하품하거나 귀를 후비며 느려 터졌다고 조롱하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다.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목적의식보다 먼저 니카의 뇌리를 점령한 것은 개떼에게 물려 나자빠지던 순간의 바란 탈타미오였다. 그리고, 니카가 배신감에 못 이겨 뱃가죽을 검으로 베던 순간의 바란 탈타미오이기도 했다. 잣자후로 향하는 선상에서, 그리고 ‘참회의 방’에서 니카가 애써 외면하던 남루한 행색의 포로 바란 탈타미오이기도 했다.

‘나는 이 남자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순간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검을 천천히 내렸다.

‘매번 끔찍한 기분이었지. 아니, 끔찍하다는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하는 절망과 악몽에 시달렸다.’

솔직해지자. 니카는 생각했다. 그는 바란 탈타미오를 죽일 수 없었다.

니카는 자기부정을 일삼던 지난 시절과는 사뭇 달라졌다. 지금의 니카는 왕녀에게 바치는 충성에 목을 매달며 바란을 억지로 외면하던 피도 눈물도 없는 기사가 아니었다. 바란을 향한 복잡한 감정 때문에 경애하는 왕녀에게 거짓을 고하고, 그의 아군을 배반하고 바란을 도망시키면서….

니카는 점차 변했다. 이 변화를 타락이라고 불러야 마땅한지 고민스러웠다.

탁. 타악.

용인기사가 검을 거두는 미심쩍은 모습에 용병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동굴 안쪽에서 나는 듯한 돌멩이 부딪는 소리가 긴장감 넘치는 적막을 깬다. 니카의 예민한 귀에는 남들보다 더 커다란 소음으로 들렸다. 코로 미약한 탄내가 올랐다.

“무슨 소리지?”

“잠깐, 저쪽에서 무슨 불꽃이 튀었는데-”

“가서 확인해.”

“이상한 냄새 안 나?”

그리고 동굴을 짐승의 아가리로 비유했을 때, 목구멍에 해당하는 시커먼 소실점에서 갑작스러운 불씨가 탁 튀었다. 주황색으로 또렷하게, 하지만 금방 사라졌다. 머리 회전이 딱 멈췄다. 밑에서 큼직한 손이 하나 뻗어지더니 니카의 팔을 붙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 힘에는 꼼짝 않고 서 있을 수 있었지만, 경황이 없던 참이라 니카는 힘없이 이끌려가 동굴 벽면에 옴폭 들어간 넉넉한 틈바구니에 몸을 숨겼다.

“모두 엎드려!”

“도망쳐!”

“폭발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귀청을 찢을 듯 거대한 굉음이 시뻘건 화염의 혀와 함께 터져 나왔다. 지진이 난 듯 동굴 전체가 흔들렸고 고왕국 시대의 멸망 예언에 기록되어 있다는 ‘암석의 비’가 떨구어지기 시작했다. 비명도 남기지 못하고 저편에서 비틀대던 용병 하나가 짜부라져 죽음을 맞았다. 폭발은 연쇄적이었다. 화염이 기세를 불리며 공기를 거세게 밀치고 흙먼지와 열기를 뿜어냈다.

“…카.”

천둥보다도 시끄러운 굉음 때문에 귀가 다 먹먹했다. 그래도 조금 들어 보니 아래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온 성싶었다. 니카는 눈살을 찌푸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흙먼지와 희미하게 새어든 빛, 폭발의 여파 사이로 파란 눈이 빛났다. 니카는 바란의 손이 자신의 팔을 피가 안 통할 정도로 세게 붙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니카를 잡아당겨 폭발의 영향을 피할 만한 작은 공동으로 밀어 넣은 건 다름 아닌 바란 탈타미오의 공로였던 것이다. 니카는 생채기로 가득한 바란의 뺨과 피가 점점 줄기를 이루어 새어 나오고 있는 어깻죽지의 부상을 혼란스럽게 번갈아 보았다.

“네가 날 구했어….”

넋이 빠진 듯한, 그리고 형편없이 갈라진 니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바란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짧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네가, 나를 구했지.”

뜻 모를 얘기였다. 니카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바란 탈타미오는 언제나 꼭 이렇게, 불가해한 사람이었지.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용인 니카라는 존재에게 알쏭달쏭한 애정을 퍼부어주곤 했으니까. 구역질도, 싫증도, 짜증이나 신경질조차 내지 않고서. 그 어떤 이유로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에게 그 아무런 이유도 없는 사랑을 주었다. 잔악후작이라는 이름을 단 주제에,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모아서 니카에게 선사했다.

니카는 바란의 대답이 너무 아리송했던 까닭에 무슨 질문인가를 생각해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입 밖으로 내어보지도 못하고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붙어 있던 폭약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전에 없던 위력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커다란 소음과 화염기둥이 공기에 엄청난 압박감을 넣어 바깥방향으로 내쳤다. 흙먼지와 잿가루로 이뤄진 풍압이 바란과 니카의 몸을 후들겼다. 잠깐 동안 정신을 잃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니카는 튼튼한 신체 덕택에 어떻게든 버텨냈지만, 바란은 까무룩 눈을 감고 말았다.

* * *

바스락거리는 흙먼지와 돌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몸을 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니카는 잔기침을 했다. 입안이 텁텁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닥쳐왔다. 사방은 빛 한 점 들이치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이명이 한참이나 니카를 괴롭혔다. 멍하니 휘청거리고만 있다가 화들짝 바란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아… 아….”

허겁지겁 움직이자 신발이 지면에 닿아 미끄러졌다. 저도 모르게 뜻도 없는 신음소리를 흘렸다. 니카는 가슴을 들썩이고 무릎을 거세게 바닥에 찧어가며 주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울퉁불퉁한 표면이 손 가죽을 스쳐 옅은 생채기를 냈다. 니카는 아랑곳 없이 한참이나 손끝의 감각에 의존해서 바란을 찾아다녔다.

“바란!”

단단한 가죽 섬유와 거추장스러운 판금 견갑의 감촉이 손끝에 잡혔다. 그때의 환희를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니카는 비명처럼 잔악후작의 이름을 부르며 얼른 길쭉한 팔뚝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런데 손에 이상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멈칫 몸이 굳었다. 비릿한 냄새의 정체가 무언지 떠올리고 싶지 않아 속으로 무수히 부정했다. 아니야. 아니야.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바란? 눈을 떠. 눈 좀 떠봐요.”

끙끙대며 바란의 몸을 잡아당겼다. 품에 온전히 안으려는데 몸이 좀체 끌려오지를 않았다. 니카 정도의 힘으로 못 옮길 리 없는데 이상했다. 니카는 바란의 전신을 더듬다가 한쪽 다리가 커다란 바윗덩이에 짓눌렸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손가락을 바위와 지면 틈에 밀어 넣고 실핏줄이 터져나갈 정도로 힘을 주었다. 얼굴이 뜨겁고 이가 빠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한 발로 무게중심을 두고 남은 한쪽 발끝으로 바란의 몸을 살살 밀어 빼냈다. 니카가 고된 인내 끝에 돌덩이를 놓았더니 무게감 있는 ‘쿵’ 소리가 났다.

경황이 없는 중에 인간은 온갖 불가능한 일을 해낸다. 그것도, 자각이 없는 채로. 니카가 바란의 짓눌린 몸을 수습해낸 것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힘을 발휘한 덕택이었다.

“제발… 제발…!”

얼른 바란의 몸에 달라붙어서 까다로운 갑옷을 주섬주섬 벗겨내고 가슴팍에 귀를 갖다 댔다. 쿵, 쿵. 귓등까지 펌프질하는 요란한 피가 자신의 심장박동인가 싶어서 바란의 가슴에 얼굴을 의도찮게 부벼가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숨을 꾹 참고 귀를 기울였다. 쿵…쿵…. 느리지만 확실히 뛰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살아있다! 죽지 않았다!

하지만 목숨이 붙어있다 해서 상태가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어깨에 화살을 맞아 출혈이 있던 상처는 그대로였고, 거기다 한쪽 다리는 바윗돌에 짓뭉개졌다. 아마 니카를 구한다고 그 작은 공동에 두 사람을 구겨 넣다가 깔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휘를 팽개치고 화살을 맞아가며 동굴에 들어온 것도 애초에 니카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니카가 아니라면 어깨도 다리도 다칠 이유가 없었다.

‘네가, 날 구했지.’

비겁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란 탈타미오가 만약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저 허무맹랑한 감사의 말이 된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한 따스한 눈길로, 니카가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고백하던 말….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말일까. 니카가 구하긴 뭘 구했단 말인가!

제 가치관과 영예와 정의를 못 이겨서 늘상 바란 탈타미오를 팽개치고 살아온 자신인데. 애정과 신의 중에 한 가지를 저버릴 수 없어서 오랜 줄다리기로 바란을 괴롭히던 자신인데! 그렇게 고맙다는 듯이 파란 눈을 끔뻑거릴 게 다 뭐란 말인가!

니카는 결국 단 한 번도 바란을 구한 적이 없다! 이건 불공평하다. 언제까지 바란은 아름다운 희생으로 타들어가고, 니카는 남은 잿더미와 찌꺼기 속에서 자기혐오만 갖고 울부짖어야 한단 말인가?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진실은 단 한 가지뿐이니까.’

굼뜨게 애걸하던 잔악후작의 모습이 떠올랐다. 화가 치민다.

“단 한 가지로는 안 돼! 비겁한 자식….”

시원하게 주먹이라도 날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니카는 물기로 더럽혀진 얼굴을 바란의 옷가지에 거칠게 비비며 생각했다. 이 멍청하고 오만한 자식이 다시 뻔뻔한 얼굴로 웃으며 일어나 준다면. 그 낯짝에다 한 방 먹일 수 있게 해준다면, 니카는 당장 악마에게 영혼도 팔 수 있었다.

“이딴 게 네가 말하는 사랑인가? 진실을 혼자서 독점한 채 그럴싸한 말로 눈을 가리고, 결국엔 매번 나 혼자 고통 속에 남겨두는 게?”

울컥 북받치는 게 있었다. 말이 길어질수록 깊숙한 곳에 가라앉았던 감정의 응어리가, 마치 태풍에 뒤섞이는 것처럼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니카는 바란을 향한 원망과 증오와 배신감을 마주했다.

“눈을 떠.”

지긋지긋했다. 의존성이 뒤따르는 독액을 먹은 것 같다. 니카는 이 사랑의 공급이 끊기면 말라 죽을 자신을 알았다. 이따위 사랑 방식으로는 언젠가 바란 탈타미오가 그를 미치게 만들 것도 알았다. 선택을 내릴 수 없어 갈팡질팡했다. 방법이 없다. 바란은 그에게 출구 없는 미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처음에는 기분 탓인 줄 알았다. 좀 전부터 바란의 심장박동에 지나치게 과민하게 반응하던 중이었으니까. 움찔하고 바란의 전신이 경련하듯이 떠는 것을 느끼면서도 기분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멍하니 넋을 놓은 것은 잠시였다. 같은 느낌을 두어 번이나 받고 나니 부정할 이유도 없어졌다. 니카는 바닥에 누운 바란의 매끈한 뺨을 다급히 후려쳤다.

“바란. 바란, 정신이 듭니까?”

“…으.”

“대답해요. 정신이 드냐고요.”

“어두워. 아무것도 안 보여. 아, 아, 아….”

정신을 차리라며 몸을 붙잡고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바란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며 온몸을 뒤틀고 경련했다. 왈칵 겁이 나서 니카는 가는 듯한 허리를 팔로 둘러 안아 끌어당겼다. 저항하듯 몸을 배트는 바란을 힘으로 제압해 굳세게 안으며 귓가에 “쉬이.”하고 숨을 내쉬었다.

“진정해. 진정해, 바란. 괜찮아요.”

“흐…. 목소리. 이 목소리.”

추위에 식은 몸뚱이는 처음엔 차가웠으나, 니카와 맞붙은 곳으로부터 체온이 더해지고 있었다. 맞붙은 뱃가죽에 열이 올랐다. 니카는 정신이 나간 듯 중얼거리는 바란의 혼잣말을 전부 다 들어주면서 한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젖 빠는 갓난애보다도 절실한 손짓으로 바란이 니카의 목 둘레를 안았다.

“니카 목소리인데….”

숨이 턱 막혔다. 아무런 의도 없이 흘러나온 말에 질식할 정도로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제정신이 아닌 바란 탈타미오는 굳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니카는 뻣뻣하게 굳어서 바란의 등께를 매만졌다.

“니카?”

부드러운 날숨이 코끝을 쓰다듬었다.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는 않지만 바란의 입술이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둘 사이의 긴장감은 그대로 유지한 채, 시간은 흘렀다. 할딱거리던 바란은 점차 진정되어 갔다. 그가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을 니카가 알아차린 건, 바란이 뒤늦게 아픔을 인식하고서 앓는 소리를 낸 때였다.

“잠깐, 니카라고? 좀 전에 분명 폭약이 터져서… 아악!”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입을 틀어막은 바란이 니카의 어깨에 이마를 꾹 눌러 붙였다. 니카는 뒤늦게 두 사람이 얽힌 자세를 자각했다. 그는 무릎 위에다 상처 입은 후작을 올려두고 허리에 팔을 둘러 받쳐 안고 있었다. 비록 바란이 니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장정이라 불려 아쉽지 않은 체격을 가졌다. 팔다리가 아담하게 안기는 맛 없이 바깥에 마구 비어져 나왔다.

“…….”

밀쳐낼까 생각했다. 생각을 꺼내자마자 바란이 신음소리를 내는 통에 저 멀리 던져버리고 말았다.

“많이 아픈가?”

“아프….”

즉각 고통을 호소하다 말고 바란이 이를 악물었다.

“내… 걱정을 해?”

“뭐?”

“하하, 내 배에 칼침도, 윽…. 놨으면서. 뭐 이런 거 갖고 걱정을 해. 나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잠깐만. 우리 지금 왜 끌어안고 있는 거야?”

태평하게 말을 잇다가 바란은 곤혹스럽게 니카를 밀쳐냈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이 니카의 뒷덜미를 실수로 스쳤다.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것처럼 오싹했다. 바란은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을 피력하려고 별 관련 없는 말까지 수다스럽게 늘어놓기를 계속했는데, 맥락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 정신이 붙어있는 게 용한 정도로 느껴졌다. 바란은 꿈틀대며 니카의 무릎 아래로 내려가려고 수를 썼다.

도중에 열이 뻗친 니카에 의해 저지당하고 말았지만.

“바란 탈타미오, 지금 이 꼴을 하고도 잘난 척 날 밀쳐낼 생각이 드나?”

“밀치려는 게 아니라…. 일단 놓고. 놓고 얘기하자.”

“놓고 얘기하자, 라….”

그건 안 되겠는데. 니카가 엄격하게 말했다. 허리를 감아 당기자 바란은 반쯤 공중에 들린 둔부를 흠칫 튕기며 목젖을 울렸다. 간신히 고통을 견디고 있는 듯해서 애석하지만 그래도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넌 크게 다쳤다. 부축을 받는 편이 나아.”

대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바란이 색색 대는 숨소리를 참았다가, 몰아쉬었다가, 도로 참았다가를 반복하면서 침묵을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시끄럽게 조잘대는 입이 다물리고 적막이 감돌자 니카는 긴장에 시달리던 마음을 조금 내려놓을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불편한 듯 몸에서 긴장을 아주 풀지 않고 낑낑거리던 바란 탈타미오가 화제를 바꿨다.

“주변…. 한번 살펴봤어? 나갈 수 있는지.”

“아직.”

“너 대체 왜 이렇게 태평해?”

거친 숨소리와 뒤섞인 목소리에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니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평하다고? 우스운 말이었다. 좀 전까지 바란 탈타미오가 정신을 차리지 않아서 숨을 죽이고 흐느끼던 게 누구였는데. 하지만 대놓고 ‘네가 죽었을까 두려워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광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신경질적으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니카의 뚱한 낯짝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바란은 난동을 부렸다.

“죽는 게 무섭지도 않아? 이러다 우리 둘 다 여기에 갇혀서 뒤지면 어떡할 거야. 개죽음도 그런 개죽음이 따로 없을 거다! 그러게 내가 폭약이 설치됐다고 일러줬을 때 얼른 빠져나가거나, 경계를 하기라도 했어야지! 내 말이 우스웠어? 아니면, 배신자는 두 번 다시 믿을 가치도 없으니까 그저 들어 넘기려던 거야?”

비명을 내질러 부상의 고통을 산화시키는 대신에 목청을 키운 것 같기도 했다. 악의가 담기지 않은 말임을 알기에 입 다물고 얌전히 들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귀가 어찌나 따갑던지, 한계는 찾아왔다. 니카는 난색을 표하며 손으로 더듬어 바란의 입술을 찾아냈다. 손바닥으로 적당히 틀어막는다는 게 한발 늦었다. 잔뜩 화가 난 바란이 이를 세워 손날을 꾹 깨물었다. 피는 안 나도 잇자국은 깊게 팰 정도였다.

“사람이 말하면 좀 들어, 멍청아!”

“멍청…?”

“너 죽게 생겼다고!”

답답한지 제 가슴을 쿵쿵 내리친다. 어깨에 화살을 맞아 생긴 부상과 가까운 부위를 저렇게 함부로 다루다니. 흥분이 전신에 감도는 덕택에 고통을 당장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가슴우리의 울림통이 정직한 ‘쿵’ 소리를 수 차례 만들어내는 걸 들으며 니카는 바란의 눈치를 보았다. 눈이 보이지도 않는 통에 눈치를 본다는 게 이상한 말이기는 했다.

“…네가 죽는 거 싫단 말이야.”

바란이 코를 훌쩍인다. 니카는 갑자기 공기 중으로 붕 떠오른 것처럼 비현실적인 감상에 잠겼다. 꼭 억죄이던 가슴이 녹아서 사르르 흘러내린다. 물을 먹인 해면처럼 질퍽거리고 말랑말랑한 질감으로 변했다. 억눌리고 쉰 니카의 목소리가 체면 없이 훌쩍거리는 후작의 이름을 불렀다.

“너나 몸 간수 잘 해라. 지금 둘 중에 누가 거동이 힘들 정도로 다쳤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깨에는 화살, 다리는 짓뭉개졌고. 아주 봐줄 만하군. …바란.”

좀 전에도 흔들어 깨워보겠다고 수십 번 연호했던 이름이지만 맨정신으로 들으니 느낌이 또 다른 모양이다. 바란의 전신이 경련하듯 풀쩍 떨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니카에게 휘말려서 이 이상한 자세로 얽어져 있지 않겠다는 듯이 꼼지락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니카의 단단한 가슴을 밀치며 그 힘으로 어떻게든 바닥에 몸을 내려두었다. 니카는 저렇게까지 열심히 꾸무적거리는데 김 새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가만 놓아주었다.

대신 악의 없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날 좋아하지?”

“콜록, 콜록! 갑자기 무슨 소릴….”

“계속 갖고 논다느니, 이용하겠다느니 말했지만 결국 넌 나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으니까. 머리가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가 일부러 감정을 숨기고 있다는 걸 알 거다. 멍청하긴.”

효과는 이상하리만치 커다랬다. 바란은 바싹 마른 목구멍에 갑자기 사레가 들러 콜록거린다. 곤란한 화제를 꺼내든 것 만큼은 분명했다.

“사람의 진실을 보는 방법을 알아?”

“…….”

“들은 얘기다. 그냥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면 된다더군.”

“…지금 웃는 거야?”

바란이 되묻는 소리를 한참 곱씹고 나서야 니카는 자신이 소리내어 웃고 있음을 자각했다. 작고 날숨을 뱉는 듯이 초라한 웃음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었다. 제가 웃는 소리에 스스로 놀라서 흠칫 입술을 만진다. 바란 탈타미오 말마따나 잘못하면 여기에 갇힌 채로 생매장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뭐가 좋다고 킬킬대며 웃을까. 자신이 낯설고 이상했다. 하지만….

‘이 해방감이라니.’

어깨 위에 날 적부터 짊어지고 살아왔던 굴레를 벗어던지면 이렇게 몸이 가벼워질까. 죽음에 한 발짝 다가온 지금에서야 자유롭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왕자와 왕녀, 대공이나, 전쟁 같은 것들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곳에 니카는 바란 탈타미오와 함께 있다. 세상에 단 둘만 남아서.

바란이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두리뭉실한 표현이었다.

“싫어하진 않아.”

“왜 날 좋아하는 거지.”

“그건, 그냥…. 말해야 돼?”

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대답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고개를 젓는 움직임을 느꼈던 건지, 아니면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다. 바란은 다급히 부시럭대며 화제를 돌렸다.

“나 엄청 어지러워. 춥고.”

“발이랑 어깨는 괜찮나?”

“그럭저럭. 아프긴 한데, 이젠 감각이 별로 없어. 머리도 조금 몽롱하고.”

출혈이 너무 컸기 때문일까. 눈썹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이 절로 구겨졌다. 니카는 얼른 외투를 벗어다가 바닥에 깔았다. 돌격대 중에서 제대로 된 외투를 챙겨 입었던 건 니카가 유일했다. 움직임이 굼떠진다고 니카에게 일침하던 엣시아 용병들은 그저 가죽경갑 안쪽에 헝겊을 채워 넣어서 체온을 올리려고 했다. 그들이 잘난 체 지껄이는 말을 안 들어서 망정이었다. 바란을 끌어다가 외투 위에 눕혔다. 동굴의 냉기가 덜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여전히 다정하네….”

“헛소리를.”

“다 너 때문이야. 내가 이렇게 꼴불견으로 뒹굴고 있는 것도, 여기 갇혀서 꼼짝없이 죽게 된 것도, 전부 다. 애초에 네가 너무 상냥하게 굴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그러게 내가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라 그랬잖아….”

니카는 가벼운 입술을 꼭 다물려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저토록 쉴 새 없이 떠들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입술에 관해 생각하던 건 니카 혼자만이 아닌 모양으로 아래쪽에서 날렵한 팔이 뻗쳐 올라와 니카의 입술 위를 덮었다. 화들짝 놀랐다. 입술을 틀어막은 손바닥 안쪽에 습기가 차오른다.

“있잖아, 왕녀랑 키스할 때 기분 어땠어?”

“…….”

“계속 궁금했어. 나랑도 키스했었던 거 기억 나? 나랑 했을 때보다 더 좋았어?”

집요하게 묻지만 손에나 말에나 힘이 죄다 빠져나가고 없다. 좀 전부터 두통과 몽롱해진 정신을 호소하더니 아무래도 취한 것처럼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 같았다. 그런 것 치고 왕녀를 걸고넘어지다니, 어벙한 척 하면서 다짜고짜 정곡을 찔렀다. 들을 자신이 없다며 니카의 입을 눌러 막고 제 할 말만 쏟아놓으니 억울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은 가중되었다.

‘너랑 했을 때보다 좋았냐고.’

니카는 생각했다. 바란에게 들릴 리 없는 대답이 입 안을 성마르게 감돈다.

‘아니.’

이 느낌을 곧이곧대로 전해주면 어린 후작이 얼마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일까 궁금했다. 능글거리는 성미 탓에 어지간한 일로는 평정을 깨뜨리는 법 없지만, 니카가 알아낸 바 바란의 약점은 니카의 감정표현이었다. 니카가 피하지 않고 솔직히 부딪히면 놀라서 한 발 뒤로 뺀다. 모르긴 몰라도 이 말을 듣고 나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서 “아아.”하는 이상한 소리나 낼 것이다. 그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니카아.”하는 애원조로 변할 거고….

망상에 잠겨서 대답을 못했던 것뿐인데 니카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줄 착각한 모양이다. 바란은 실망스러운 콧방귀를 뀌었다. 펌프질해 기운을 잔뜩 쏟아두었던 폐부에서 공기가 빠져나왔다.

“그치…. 그랬겠지. 안 좋았을 리가 있나. 넌 수리 드라코슨을 아주 오래 전부터 좋아했으니까. 왜, 그때 저택에서도 네가 수리를 좋아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잖아. 넌 심지어 나더러 왕녀가 머무는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라고 그랬었는데….”

횡설수설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다. 니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조각을 찾아냈다. 저택? 처음에는 탈타미오 성을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란과 왕녀가 한 자리에 모일 법한 일은 수년 내에는 일어난 적이 없다. 눈을 가늘게 뜬 니카는 제 입 언저리에서 팔랑거리는 큼지막한 바란의 손을 붙잡아 걷어냈다. 비로소 발언의 자유가 생긴다.

“그게 무슨 소리지?”

“으응?”

“내가 언제 너더러 방에 박혀 있으라고 했어.”

“아, 뭐야. 벌써 까먹었나? 하긴 넌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고, 그냥, 나, 나, 나만 신경 썼던 일이니까. 내 머리카락이랑 똑같아. 너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린 말인데 나는 계속 고민하고, 기억하고.”

바란이 다시 코를 훌쩍거렸다. 니카는 그가 우는지 궁금해서 바란의 낯 위를 손으로 훔쳐보았는데 겨울바람을 맞아 차갑고 건조한 그대로였고 눈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만 좋아하고.”

“…….”

“니카한테 키스할래.”

당당한 선언에 니카의 몸이 흠칫 굳는다. 그래도 말릴 생각은 못 했다. 일으켜달라고 투정하기에 니카는 바란의 허리께를 지탱해주었다. 기껏 당당하게 키스한다고 입에 담은 것 치고 바란은 예의 그 치사한 방법을 답습했다. 손으로 니카의 입술 위를 덮어놓은 뒤 제 손등 위에 입술을 부비는 일이다. 쪽, 하고. 익살스럽기까지 한 소리가 들렸다. 쪽, 쪽. 김이 다 샌다.

웃음소리. 바란은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잘 웃는다. 심지어 죽기 십상인 지금도 이렇게 말갛게 웃는 소리를 들려주다니 정말 대단한 위인이었다. 가짜 뽀뽀 몇 번에 마음이 흡족해졌는지 곧 몸을 늘어뜨렸다. 다시 니카 냄새가 잔뜩 묻은 외투 위에 눕겠다고 했다.

니카는 싱겁고 허무한 마음에 코웃음을 쳤다. 아직도 제 입술을 가로막고 있는 바란의 손을 욱여잡고 옆으로 밀쳤다. 맨 입술을 때리는 찬 공기에 열감이 확 가신다. 이윽고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천천히, 마주할 입술의 위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입김이 닿았다.

뜨거운 키스였다. 싱겁게 입술을 깨물거나 혀를 섞다 말고 기분이 식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놀라울 정도로 섣부른 걱정이었다. 바란의 맨 입술에 부르튼 자신의 입술을 갖다 붙이는 순간, 알맞게 맞물기 위해 꿈틀대며 턱선을 입맞춤으로 뒤덮고, 이를 드러내 도톰한 살덩어리를 깨무는 순간.

‘그래, 이런 느낌이었지.’

바란 탈타미오에게 처음 입 맞췄을 때 느꼈던 거대한 환희가 차올랐다. 배신감이나 충성, 전쟁처럼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정들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이성적인 사고를 불태워 무너뜨리는 뜨거운 열정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추운 공기가 홧홧해지고, 머리는 어지럽다. 눈앞의 남자를 원했다. 니카는 자신의 잇새로 짐승의 으르렁소리가 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다.

“으, 응… 천천히. 천천히.”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니카는 바란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붙잡고 적극적으로 입 안을 탐하며 생각했다. 달다. 사람한테서 단맛이 날 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달았다. 고른 치열을 혀끝으로 훑으며 단단한 입천장을 건드렸다. ‘어린 니카’로서 입 맞췄을 때는 몰랐는데 바란은 입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점이 있다.

연한 입천장에서부터 잇몸까지 역방향으로 간지럽히면 오스스 몸을 떤다. 깊숙이 닿고자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약간 뻣뻣한 감이 있는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바란이 의도치 않은 콧소리를 흘렸다. 고작 입맞춤인데 버거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니카가 열여덟일 때는 어른인 척 구워삶더니 이제는 어린 소년처럼 어쩔 줄 몰라한다. 이 차이가 니카에게 커다란 쾌감으로 다가왔다. 도취되어 있는데 바란의 뜨거운 혀가 감겨 오는 바람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니카는 잡아먹을 듯이 달려들어 뜨거운 살덩이를 휘감아 당기고 문댔다. 등골에 벼락이 친 듯 짜릿한 기운이 흐른다.

도톰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겨우 놓아줬다. 오뚝한 콧대끼리 스치는 감촉이 좋았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마 빨갛게 달아 있을 텐데. 아주 봐줄 만할 것이다. 바란은 요령껏 숨도 쉬지 못했는지 숨을 급히 몰아쉬었다.

아니, 보이지 않는 편이 나은 건지도 모른다. 니카는 시커먼 자기혐오에 잠겨들어간다. 아마 빛이 들고 잔악후작의 아름다운 얼굴과 타고나기를 고귀한 혈통을 증명하는 금발이 뚜렷이 보이는 상황이었다면, 감히 입 맞출 엄두를 못 냈을 테니까.

바란은 입술을 다시 한번 부딪어 달라 졸랐다. 의식하지 못하는 새 매정하게 쳐냈다. 당황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온다.

“…미안하다. 입 맞추지 말았어야 했어.”

“도망치는 거야? 니카, 아무것도 없는 이 동굴 속에 갇혀서조차도 네 마음을 부정하려는 거냐고.”

먹먹한 기운이 차오른 음성이다. 책망당하는 성싶었다. 심장이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날 좋아하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나는 용인이다.”

“…….”

“천출에, 흉측하고, 성질은 사나워. 매력적인 점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래도 없다. 말솜씨도 별로고. 무슨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난 네가 말하는 것처럼 그다지 다정하지도 않아. 오히려 주변에 불행과 구역질만 몰고 다니지. 난 사랑 받을 가치가 없어.”

“니카, 누가 너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했든 간에-”

“다 안다는 듯이 얘기하지 마! 이제 난 어린애가 아니다. 이상론적인 말장난은 됐다. 난 너의 가치까지 좀먹을 거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종내엔 너도 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고 말 거다.”

적막은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니카는 본능적으로 숨 쉬는 것을 잠깐 멈춘 바란 탈타미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아챘다. 입술이 덜덜 떨린다. 격정적인 입맞춤으로 달아오른 입술은 그만큼 빨리 차갑게 식었다.

“…봐, 지금도 널 상처입혔잖아.”

아이러니다. 바란을 밀쳐낼수록 니카는 자신의 마음속에 이 금발의 남자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바란을 슬그머니 들어내자 나타난 공동은 밑바닥을 감히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텅 비어있다.

“상처 같은 거 안 무서워. 네 말에 상처 입은 건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니까. 대체 내가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몇 년째 견뎠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

“니카 경. 당신이라면 잘 알겠지? 별 것 아닌 친절이 사람의 평생을 바꿀 때가 있다는 거.”

알다마다. 왕녀의 호의로 니카의 삶이 탈바꿈했을 적의 기억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그 순간으로 니카는 기사가 되어 검을 휘두르게 되었고, 그 순간으로 지독한 외사랑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니카가 살아 온 처절한 혼혈인의 삶과 거리가 먼 탈타미오의 장자가 왜 뭐라도 아는 것처럼 이런 이야기를 꺼낼까.

바란은 할 말이 많은 것처럼 입을 뗐다 말았다 했다. 입술이 뻐끔거리면서 벌어지고 붙는 소음이 귀에 들렸기 때문에 그 망설임을 알 수 있었다. 기다림 끝에 바란이 말했다.

“넌 내 삶을 바꿨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니카는 생각했다. 그건 수리 드라코슨 같은 타고나길 대단하고 고결한 사람들이나 행할 수 있는 이적이다. 니카와 같은 천한 용인은 세상에 그런 선한 영향력을 한번 발휘할 리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게 마련이다.

“…그러니 날 내치지 마.”

‘절 내치지 마세요.’

환청인가? 방금 같은 말이 겹쳐 들린 것 같다. 온 얼굴이 근지럽다. 니카는 바란의 강렬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예상했다. 얼굴이 꿰뚫릴까 두려워 마른세수를 했다. 이상한 목소리를 들은 것도 기분 탓이려니 넘기려는 참에, 불현듯 그것이 귀로 들린 게 아니라 기억 속에서 떠오른 목소리임을 깨닫는다.

‘니카 경, 제발요.’

누구 목소리지? 누가 저런 말을 했었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괴롭다. 마치 누가 깃털로 뇌를 간지럼 태우는 것 같았다. 니카는 기억의 출처를 파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미 어두운 곳에 있건만 더 컴컴한 갱도를 파고 내려가는 것처럼 막막하다. 바란이 훌쩍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흐느낌이 기억을 들쑤신다. 뭔가 가닥이 잡혔다.

‘꽃을, 보려고요….’

말라빠진 지푸라기 같이 푸석거리는 금발. 어색한 태도. 이름도 묻지 못했는데 어느 날 앙살라테의 본거지를 떠나 사라져버렸던 아이. 니카는 그 애를 중요한 인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몇 번 위선자처럼 마음을 썼던 적은 있었다. 그가 흔치 않게 오지랖을 부려서 살려 데리고 온 아이였으니까. 호명할 줄도 몰라 앙살라테나 저택의 사용인들이 지칭하던 말을 빌려 와 이렇게 부르곤 했었다.

“…꼬마?”

그 호칭을 아주 오래간만에 입에 담았을 때, 처음 몇 초간은 머리가 아찔했다. 흐트러진 퍼즐 조각들이 천천히 제 자리를 찾아 가 맞춰졌다. 이윽고 드러난 그림을 보기가 두려워졌다. 니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감으나 마나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음은 똑같았는데도 그랬다.

* * *

“절 내치지 마세요.”

“그런 뜻이 아니다.”

밀짚색 실타래가 휘저어진다. 아이가 고개를 저은 것이다. 동북부의 겨울은 혹독했다. 니카는 혀가 내둘러지는 성실함으로 버티고 검을 수련하러 나온 거지만 이 어린아이는 구태여 겨울바람을 변변찮은 옷가지로 견디면서까지 나올 필요가 있었는가 싶다.

니카는 그저 겨울을 지내는 동안, 그리고 탈타르에서 돌아 온 수리 왕녀가 잠시 저택에 머무는 동안 방 안에 있으라 권했던 것뿐이었다. 이렇게 배신감에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울먹거릴 일이 결코 아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린애의 감수성이라 그런지 따라가기가 힘이 들었다.

“날이 춥잖아.”

또 도리질. 말도 아끼던 녀석이 나불거리면서 논리를 잔뜩 전개하기 시작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것은 오히려 니카 경 쪽이면서 왜 자신만 밖에 얼씬 못 하게 하려느냐고 항의했다. 톡 쏘는 듯한 억양 탓에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화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

“왕녀 전하 때문이죠? 나 바깥에 못 나오게 하려는 거. 저 들었어요.”

“뭘 말이지?”

“니카 경이 왕녀 전하의 기사라는 거요. 다른 누구보다 왕녀님한테 충성을 바치는 기사요. 왕녀님 외에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지만, 경은 나를 데려왔잖아요.”

깡마른 꼬마가 휘청거리면서 제 가슴팍을 연거푸 내리쳤다.

“날 데려왔으면, 날 책임져 줘야죠.”

“…호의에 책임까지 요구하는 건 철모르는 욕심이야.”

“하지만.”

“네 말대로 난 왕녀의 기사다. 지금 왕녀님은 부마를 잃은 고통에 식음을 전폐하고 계시지. 너처럼 어린애가 사방을 휘젓고 다녀서는 그분의 안정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퍼렇게 질린 핼쓱한 얼굴을 무심히 훑었다. 니카는 그 애를 염려했던 감정만큼은 제대로 기억해냈지만, 그 아이의 얼굴 생김이 어땠는지는 명확히 그릴 수 없었다. 그만큼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핼쓱하고 피로해 보이는 인상에 구체적인 이목구비 따위는 다 삼켜져서 대단치 않게 느껴졌던 탓이리라.

“앞으로 닷새다. 연무장은 물론이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일 없이 네 방에서 근신해라. 네가 정말로 나를 네 은인이라 생각한다면, 이런 간단한 명령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겠지.”

“…….”

“꼬마, 왜 그러지?”

니카는 짧게 숨을 삼켰던 걸 기억한다. 입술을 꾹 앙다물고 볼을 부풀려 숨을 참은 꼬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유가 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눈시울 역시도 붉었다. 골격이 드러날 정도로 마른 얼굴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새파란 눈동자가 물기로 그렁그렁했다. 삐죽하게 비어져 나온 부르튼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울음을 참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울렸다.’

낭패였다.

“니카 경은 바보야. 무신경하고… 벽창호이기까지 해.”

배운 집 자제답게 제대로 된 욕지거리 하나 모르는 꼬마는 그 자리에서 같은 말만을 반복했다. 니카는 그런 단어들이 꽤 신선하기까지 했다.

바람결에 볼이 붉게 틀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이의 손끝이 하얗게 질린 것을 곁눈질로 내려다보면서 니카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건성으로 듣는 것을 들키면 더 열불을 낼라 싶어 말을 끊지는 않았으나 얼른 따뜻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으면 했다.

“경 같은 거 진짜 질색이라고요.”

씩씩대며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더라. 까마득한 기억이라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의 니카 같았으면 씁쓸한 미소를 지었을 것 같았다.

* * *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이를테면, 말을 더듬는 거라든가. 바란은 생각했다.

처음엔 괜한 이야기를 했나 싶었다. 앙살라테와 수년간 유지해 온 기밀인데 이렇게 쉽게 털어놓다니….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막쉬롭에게 새어나간 걸 보면 기밀유지는 앙살라테 쪽에서 먼저 팽개친 꼴이었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못 할 말이 다 뭔가. 그들은 무너진 동굴에 단둘이 갇혔다.

“그 애는 키가 훨씬 작았어.”

우울에 잠겨서 눈앞의 바란을 돌아보지도 않던 고고한 니카 경을 당황하게 만들 만한 비장의 카드는 많지 않다. 실은 ‘꼬마’ 시절 바란에 관해서 많이 기억하고 있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기억이 나는 모양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바란은 적잖이 감동을 받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툴툴거렸다.

“남자 키는 스물이 지나서도 커. 난 그때 열여덟이었다고.”

“너보다 체격도 가늘었고….”

“피죽도 못 먹은 꼴이었으니까. 더 할 말은?”

“…….”

니카의 표정이 궁금했다. 눈으로 볼 도리가 없어 손을 앞으로 뻗은 뒤에 둥그런 눈두덩과 홱 올라간 눈썹 근육까지 더듬어 만졌다. 바란의 손이 닿는 궤적대로 얼굴 근육이 질끈 경직됐다. 바란은 손끝 감각에 의존해서 어느 정도 니카의 표정을 유추해냈다. 배실배실 웃음이 터진다.

“놀랐나 봐, 니카.”

“…….”

“당신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꼬마가 당신 좋아했던 거라고는 상상 못 했어?”

“넌… 꼬마였잖아.”

“내 나이가 열여덟이었어. 성인식도 끝난 남자애한테 꼬마라고 부르던 게 이상한 유행이었을 뿐이지. 니카 경은 그 사람들 중에서도 날 애 취급하는 덴 으뜸이었고. 어린애랑 키스한 거 같아서 죄책감 느끼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넌…. 꼬마. 아니, 바란. 후작….”

“호칭은 하나로 정리하는 편이 편하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바란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콕 찔렀다. 니카 못지않게 바란 역시도 여러 가지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털어놓게 된 김에 괜한 경 타령은 그만두고 슬그머니 ‘니카’라고만 불러야지 생각했다.

“우리 둘이 처음 만났던 순간이 당신 머릿속에서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만큼 극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때부터 계속이야. 언제나, 니카를 좋아했어.”

처음 몇 분, 아니, 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는 시간 감각이 모조리 망가진 것만 같으니까 아마 한 시간 가까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체감상 길게 느껴지는 텀을 두고서 니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천정이 생각보다 낮아서 머리를 심하게 찧었는지 매서운 소리가 났다. 짧은 신음. 그리고 단단한 손톱이 동굴 내벽을 더듬는 것, 발소리가 들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니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려내기는 충분한 단서가 주어졌다.

“니카?”

니카는 바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바란의 목구멍 안에서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감정이 있었다.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니카를 뒤따르고 싶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바란은 니카의 기척이 멀어짐에 따라 환희 대신 차가운 현실감이 몸을 지배하는 것을 느꼈다. 무디게만 느껴지던 어깻죽지나 발의 통증이 예리하게 되살아나서 감각점을 긁었다.

바란은 공중에 머리통을 겨우 두어 차례 치들고 도로 내려놓았다. 니카의 이름을 시끄럽게 외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니카, 어디 가는 거야!”

“…출구를 찾겠다.”

“뭐?”

“출구를 찾아서, 너를 내보내 주겠다. 조금만 참아.”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린다. 바란은 어찔하게 덮쳐오는 현기증을 두 눈 질끈 감고 견디며 니카가 방금 되돌려준 대답을 곱씹었다. 그러는 사이 벽이란 벽은 다 더듬고 다니던 니카가 방향을 바꿨다. 내구성에서 따를 게 없다는 귀한 왕국기사의 검을 들고 이가 나가도록 휘둘렀다. 무너진 돌더미가 투박한, 작은 돌 튀기는 소음으로 뒤덮였다.

“좀 전까지 태연하다 말고 왜 그래? 갑자기 공황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그래, 너 때문에!”

누운 자세 그대로 바란은 팔짱을 척 낀다. 나 때문이라니? 바란은 당장에라도 쏘아붙일 기세로 입술을 움틀거렸다. 니카의 괜한 탈출시도는 꾸준히 이어지는 중이었다. 이제는 맨 주먹으로 벽을 때리려는 모양이다. 금속이 쨍쨍 대는 소리는 사라졌다.

“만약 그 꼬마가 정말, 너였다면-”

“만약이라고 할 거 없어. 그거 나였어. 경이 가져다준 산양젖이나, 경이 수련하던 곳에서 두 번째로 가까운 검불이 내 관중석이었던 것까지 얘기해야 믿겠어?”

“…앙살라테 전하께선 너를 특별취급하며 독방을 내어주고 이따금 독대하기도 하셨지. 그러던 어느 날은 너를 데리고 사라진 후, 혼자서 저택으로 돌아오셨었고. 너의 행방을 물어도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만 하셨어. 이상했지. 이상했지만, 단 한번도 의문을 품었던 적은 없다. 나는 그 정도의 위치였으니까.”

니카가 침 삼키는 소리까지 이렇게 크게 울린단 말이야? 바란은 멍하니 딴생각을 했다. 니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렸고 그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바싹 마른 입술을 핥는 쩍쩍대는 소리가 여러 번 났다.

“바란 탈타미오, 넌 처음부터 대공에게 충성한 적 없었던 거야.”

“…….”

“내 말이 틀린가?”

바란은 침을 삼켰다. 잠깐의 공백이 있었고, “젠장.”하는 낮은 목소리가 났다. 니카가 욕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코 훌쩍거리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는데, 혹시 니카가 울음을 참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른의 모습으로는 눈물이 메마른 남자였다. 이렇게 무너지다니 당혹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그마치 팔 년 동안이나. 어떻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널 손가락질했어. 널 박쥐 같은 작자라고 불렀고, 조롱하고, 면전에서 모욕을 뱉었다. 배를…. 너를 직접 검으로 베기까지 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그 모든 게….”

“니카, 화가 났어?”

“화를 내는 게 아니야!”

그 말과는 다르게 우렁찬 목소리엔 분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바란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니카가 진정하면 다시 물으려 했다. 그런데 연신 벽을 내리치는 주먹질 소리가 거세게 이어질 뿐 그가 진정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쿵, 쿵, 쿵!

“…윽, 젠장! 열려! 열리라고! 신이시여!”

지독한 현기증이 바란을 덮친다. 니카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어떻게든 기어가 보려고 전신을 들썩거렸다. 고통이 한기에 힘입어 더욱 거센 파도처럼 세력을 키워 밀려온다. 눈앞이야 한참 전부터 이미 검었던 마당이니 눈앞이 까무룩 했다는 표현은 이상하지만, 아무튼 머릿속이 어둠으로 온통 흐려지는 듯한 감각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대로 기억이 끊어졌다.

* * *

앙살라테의 허무한 시선이 언덕배기를 응시했다. 먼지구름이 거세게 오른다. 폭발이 거대하지는 않았으나 인공적으로 뚫어놓은 동굴 속 가느다란 통로는 전부 틀어막혔을 것이다. 그 안으로 보낸 돌격대가 목숨이라도 건사했다면 좋으련만!

“맙소사! 돌격대는?”

“나오지 못했습니다, 전하! 애틀턴의 동문과 서문에서 각기 남쪽으로 지원병력을 보냈다 합니다. 지금도 아군이 겨우 버티고 있는 실정인데 대공군 추가병력이 도달하고 나면 한 시간도 채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가 악물렸다. 앙살라테의 주위에는 화살비에 꿰뚫리거나 몸이 동강난 시체 여럿이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전부 다 앙살라테의 푸른 문양을 붙이고 있었다. 레이먼드가 속 부대낀 표정으로 곁에서 말을 진정시켰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승산이 없습니다!”

“대관식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해가 저무는 시간에 맞춰 식을 거행하겠다고 초대장에 써둔 것을 보면…. 길어봐야 세 시간.”

“갤리거 경에게 신호해. 돌격대가 실패했으니 한 시간 안에… 애틀턴 남문을 연다.”

레이먼드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품속에서 거울조각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에 든 거울로 비스듬한 햇빛을 반사시켜 남문의 도르래와 벽돌 사이로 길고 짧은 신호를 보냈다.

“고대룡의 심장에 과연 그 집시 말대로 대단한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막쉬롭은 내가 아는 한 틀린 예언을 했던 적이 없다.”

“…왕자 전하, 제가 집시를 맹신하는 버릇은 고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앙살라테는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레이먼드의 찜찜한 눈길이 아직도 먼지구름이 채 다 가라앉지 못한 동굴 인근에 못 박혀 있었다. 돌격대를 지휘하며 가장 먼저 나아가 저 폭발 가운데에 휘말린 용인기사에게 마음이 쓰인 탓이다.

“…바란 탈타미오에게 약속하셨던 보상은 저 밑에 짓뭉개져서 명을 달리했겠군요.”

레이먼드가 애송이에 불과했던 바란 탈타미오의 집사 자리를 맡게 된 지 어느덧 예닐곱 해가 지났다. 레이먼드는 오랜 시간 붙어 다니며 바란의 개인사나, 사사롭고 구체적인 사정 역시도 낱낱이 알게 되었다. 용인기사를 향한 바란 탈타미오의 집착이 얼마나 절박한지 역시 잘 알았다.

“지금 꼬마의 보상이나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승리가 있어야 영광도 있으리니…. 우선은 이기는 것만 생각하자고, 레이먼드. 움직이지.”

레이먼드는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앙살라테는 레이먼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변하셨습니다. 그 집시가 나타난 뒤로 저한테 말씀하셨던 이상보다는 결과론에 치우쳐 온갖 더러운 수단으로 아랫것들을 쥐어짜고 계시지 않습니까. 탈타미오 후작의 감정을 이용하거나, 민간인을 미끼로 쓰고, 비밀리에 무고한 청년을 독살하고 혐의를 숨기거나 유적이란 유적은 죄다 이 잡듯 뒤지고 다니시는 등 말입니다. 제가 알던 전하답지 않으십니다.”

“무례한 지적이다, 레이먼드. 왕좌를 마음에 품고 나서부터 내 열정과 품성은 추호도 변한적 없다. 나에 대한 네 충심이 변했다면 몰라도 말이다.”

“뭐라고요?”

“그렇잖아, 레이먼드. 너는 탈타미오 꼬마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내 곁을 떠나 강동지역을 돌며 어느덧 칠 년을 꼬박 보냈어.”

“당신의 명령으로 갔던 겁니다!”

“시작이 어쨌건, 사람 하나 바뀌기엔 충분한 시간이야.”

귀족가 차남들로 뒤덮인 신학교에서 아득바득 버티며 도덕을 논해 온 레이먼드가 용병 생활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다니던 열여덟의 앙살라테 드라코슨을 만나 충성을 맹세한 것이 어언 십삼 년 전 일이다. 입바른 소리로 귀족의 미움을 사 교수형 당하기 직전에 밧줄을 잘라내 주었던 것이 바로 앙살라테였다.

“…저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거 잘됐군. 우리 관계는 여전히 돈독할 거라는 뜻이니까 말이야.”

왕자가 씩 웃어 보이며 레이먼드의 허벅지를 노리고 파고들던 대공군을 검으로 찌른다. 호쾌한 내지르기였다. 기습을 노리던 병사는 급소가 찔려 단숨에 나동그라졌다.

갤리거를 안에 잠입시킨 효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약 십여 분이 지난 이후였다.

상황이 점점 난전으로 뒤엉켜 가는 중이라, 후방 성곽에서는 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멈추고 전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원군이 필요하다 판단되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올 작정인 게 뻔했다. 그나마도 동서로부터 원군이 남하하고 있는 참이니 독 안에 든 쥐를 철저히 몰살시키기 적절한 시점에 백병전을 시작하리라.

“성문이 열린다!”

“전방을 경계하라!”

그런데 너무 일찍 성문이 열렸다, 너무 일찍.

왕자 역시도 주변에 경계명령을 내리고 긴장한 눈초리로 성문이 열리는 것을 살폈다. 철을 입은 두터운 문짝이 웅장한 소음을 내면서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기선제압을 위함일까 싶은 시끄러운 함성소리가 들렸다.

“앙살라테 왕자 전하 만세!”

“만세! 만세!”

“전하, 아군입니다.”

아연해진 레이먼드가 놀라서 말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남문의 수비를 맡은 레널드 백작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였다. 애틀턴에 잔재한 왕자의 지지세력이 내부로부터 균열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은, 기사 갤리거였다. 얼마나 오래 씻지 못했는지 오물인지 진흙인지 구분되지 않는 시커먼 것을 얼굴부터 손끝까지, 노출된 살갗에 전부 칠했다.

“왕자 전하를 뵈앱습니다.”

“갤리거 경, 해냈군!”

“그저 며엉령대로 완수하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다만 귀띔해주셨던 돌격대가 왕성 방향에서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새앵겼다는 생각이 들어, 부울가피하게 공격을 시이작했습니다. 독단을 용서하소서.”

“하하, 전쟁 중에는 즉석에서 판단해야 하는 일이 많게 마련이지.”

짧지만 신뢰가 가득 담긴 치하가 이어졌다. 앙살라테가 흡족함을 숨기지 않으며 웃었다.

“이제부터 왕성을 향한다!”

* * *

“열려, 열려. 열리라고!”

벼락같은 통증이 손등을 친다. 그래도 니카는 멈추지 않고 돌벽에다 거센 주먹질을 했다. 피 냄새가 올랐다. 까진 살갗에 오른 진물과 피, 동굴 안의 습기가 뒤섞여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숨이 가쁘도록 주먹질을 해도 꿈쩍하지 않는 벽이 원망스럽다.

그렇다고 무력한 분노나 짓씹으면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럴 수는 없다. 죽음이 두려워서는 아니다. 검을 들고 수많은 전장에서, 마찬가지로 수많은 적의 목숨을 빼앗아 온 남자다. 조금 더 시간을 뒤로 돌려보면, 괴물의 아이를 견디지 못한 어미에 의해 썩은 생선 더미 위에 버려졌고, 돌팔매와 가래침, 폭력과 고독을 견뎌 온 남자이기도 했다. 니카의 삶은 단 한 순간도 생존이 아니었던 적 없으므로, 죽음이란 언제나 무척 가까운 개념이었다.

‘바란은 아직 어려. 어리고, 아름답지. 그리고 필요 없는 고통을 지나치게 많이 겪었다. 그것도 별 가치도 없는… 토룡 혼혈 때문에. 이런 곳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바란 탈타미오는 니카와 달랐다. 그는 여기서 죽어서는 안 됐다. 니카는 가슴을 꿈틀거리며 호흡을 다잡았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려 최선을 다했다.

바란이 그 꼬마였다니. 그 꼬마, 니카를 동경하는 듯 초롱거리고 빛나는 눈동자로 늘 그를 뒤쫓았던 어린애. 그건 벌써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서 니카는 꼬마에 대해 간직한 기억이라고는 번지기 기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어렴풋한 것이 다였다. 머릿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버석거리는 밀짚색 머리카락과 굽어진 어깨, 뼈다귀가 드러나도록 바싹 마른 몸집 같은 것들.

‘날 구한 거, 후회해요?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아, 물론 그 목소리도. 니카는 살풋 웃는다. 거대했던 충격이 간질간질한 딱지만 남기고 아물어 간다.

저택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니카에게 있어서 그저 흘러가는 일상과도 같았던 기억일 뿐이었지만, 바란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니카와 함께했던 순간순간을 모두 소중하게 간직하고 사랑해왔던 것이다. 니카가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해 혐오와 자기비관의 늪에서 발버둥치는 동안, 계속.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란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용인을 사랑해왔다. 아마 팔 년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햇수로 팔 년이었겠는가. 바란에게 있어서 저 시간은 니카의 경멸과 무시를 견뎌 온 세월의 합이었다.

니카는 잔악후작을 상처입히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낱낱이 끄집어냈다.

‘그의 하나뿐인 혈육조차 죽였다.’

아무리 왕자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지만, 니카가 죽인 게 맞았다. 고수머리를 한 손에 욱여 잡고 신선한 피를 떨구는 목을 들어 올렸다. 온몸이 서늘하게 식고 핏기가 가신다. 동화책 말머리에 유려한 글씨체로 쓰여 있던 ‘사랑하는 클라텐 탈타미오에게….’하는 문구에 돌연 생각이 닿는다.

니카의 이가 서로 부딪혔다. 죄책감, 아주 지독한 죄책감이 달라붙어 니카의 정신을 빨아먹었다.

‘난 사랑받아선 안 돼.’

잔악후작이 왕자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관계의 모순이 다 해소되어야 마땅한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물이 마르면서 육지가 드러나듯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죄의식과 열등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 당시에는 니카가 정당한 대응책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폭력들이 니카에게 고통이 되어 돌아온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니카는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벽을 거세게 쳤다. 퍽, 퍽. 말랑말랑한 살덩이가 무기력한 소리를 내며 터지고 짓물러 간다. 다 까지고 짓이겨진 손등이 축축한 소음을 더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적어도 날 위해서 또 더러운 구정물을 뒤집어쓰려던 바란에게 칼을 박아넣지는 말았어야 했다.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었는데, 자기 상처를 핥느라 급급해서 돌아보지 못했어. 습관이 된 지독한 자기연민과 내 슬픔에 빠져 있느라고 바란을 돌아보지 못했던 거다.’

주먹을 조금 더 뒤로 후퇴했다가 더 강하게 내리꽂혔다. 돌조각이 떨어진다. 귓등까지 시뻘건 핏기가 몰린 게 뜨끈뜨끈한 체온으로 느껴졌다.

‘내겐 그를 가질 자격이 없다.’

니카는 덧없는 반항을 계속했다. 별 성과 없는 무리한 움직임에 지쳐 나자빠질 법도 했는데 이상하게도 힘은 점차 강해졌다.

‘그와 함께 죽을 자격 역시, 없어.’

거친 숨소리 틈으로 흐느낌이 흘러나온다.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개가 할딱이며 짖는 소리 같기도 했다. 니카는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집중하며 무아지경으로 난동을 피웠다. 바란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 니카를 지배했다. 바란에 대한 연민, 동정, 안타까움, 사랑, 죄책감과 열등감이 마른 장작처럼 효과적으로 이 감정의 불꽃을 키웠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신이든 악마든 좋으니까 제발 바란을 여기서 꺼내줘! 내 목숨을 대신 가져가도 좋다!”

얼마나 지났을까. 증거를 디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썩 오랜 시간 그 상태로 보냈음은 분명했다.

벽을 향해 내지른 두 손에는 이미 감각이 날아가고 없었다. 갑자기 찌르르한 전류가 통하는 것 같더니만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처의 통증인 줄로만 알았는데 점차 통증과는 구분되는 열감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흥분감이 고조되고 심장으로부터 뜨거운 혈류가 펌프질하며 손끝에까지 열화를 전달했다.

몸이 뜨거웠다. 혈관을 타고 용암이 흐르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열기가 맥박쳤다. 그러나 고통은 없었다. 처음 겪는 이상 현상에 니카는 화들짝 놀라 발을 뒤로 뺐다. 균형을 잃어 체중을 지탱하려고 우연히 돌벽을 짚었는데,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다.

쩍, 쩌억.

“무슨…?”

니카는 불안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뜨겁게 달아오른 손끝이 손바닥에 반복적으로 닿았다.

‘내가 한 건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슬그머니 갖다가 균열이 생긴 위에 얹었다. 짐작이 확신으로 변하는 데는 많은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다. 니카가 손가락으로 꾹 밀자마자 돌덩이 사이에 생긴 균열이 점차 지름을 넓히며 와르르 떨었다. 니카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무너진 바윗돌에 거미줄 모양의 금이 벌어지며 틈새로 희미한 빛이 들었다. 그리고 차차 그 금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어떻게 된 거지?’

어렴풋이 위험성을 알아챈 니카가 뒷걸음질 칠 즈음 되어서는 돌더미가 또 “쩌어억.”소리를 내면서 돌 파편을 툭툭 떨구어냈다. 그리고 진로를 틀어막고 있던 벽이 붕괴했다. 덕택에 이 공간 자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고 길을 텄다. 훌륭했다. 흙먼지가 훅 올라 매캐한 냄새로 콧구멍을 간지럽혔다.

먼지가 가라앉자, 니카의 앞에 시커먼 어둠이 내린 동그란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두리가 묘할 정도로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군. 이건….’

아직 사위가 어두운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주위를 식별할 수 있고 아니고의 차이는 컸다. 적어도 어디엔가 바깥과 통하는 구멍이 뚫렸다는 의미니까.

‘왕자님이 말씀하신, 왕성으로 향하는 통로.’

침을 꿀꺽 삼켰다. 니카는 방금 전처럼 알 수 없는 일이 다시 일어나 이 벽을 전부 무너뜨려서, 그나마 붕괴에서 살아남은 공동마저도 없앨까 봐 두려웠다. 조심스럽게 손을 갈무리하면서도 통로로부터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바란…. 바란!”

입술만 움직여서 재차 바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니카는 벽이 움직이거나 다시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는 않는지 유심히 살폈다. 약간의 빛만 있어도 탄력적으로 변화하는 토룡의 동공 덕을 보았다. 물체를 식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혼혈인으로 태어나서 좋았던 순간은 잘 없었지만, 지금은 예외적인 그 순간들 중 하나에 속했다.

사방에 짜부라져 피에 절은 엣시아 용병들의 팔다리와 폭약의 파편으로 추정되는 쓰레기 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바란! 듣고 있나?”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설마.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홱 뒤를 돌아 바란을 눕혀두었던 위치로 향했다. 눈이 보이자 그의 걸음걸이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어졌다.

바란은 바닥에 니카가 벗어 둔 겉옷과 뒤엉켜 늘어져 있었다.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바삐 다가가면서 살펴보니, 바위에 깔렸던 바란의 발목 한쪽이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어두운 동안에는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저런 상태인 줄은 몰랐다. 저러고도 태연히 대화를 이어나갔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깨의 상처도 심각하기로는 매한가지였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숨을 들이켰다. 때마침 니카를 진정시키기라도 하듯이 바란의 가슴께가 들썩이며 숨을 쉬었다. 적어도 평온해 보이는 날숨이었다. 그저 탈진하듯 잠이 든 게 다였으면 좋을 텐데.

‘데리고 나가야 한다. 데리고 나가서…. 젠장! 돌격대까지 실패했으니 왕자 전하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지금 여기서 바란을 데리고 나가 봤자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탄식처럼 한숨을 내쉰 니카는 불현듯 자조 섞인 바란의 혼잣말에 생각이 닿았다.

‘날 데리고 도망쳐주기라도 할 거야?’

“…….”

천천히, 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거센 숨이 콧바람으로 드나들며 색색거렸다. 너른 가슴이 들썩였고, 긴박해진 심장박동이 니카의 온몸을 두드렸다.

방금 돌벽을 무너뜨렸던 자신의 두 손이 썩 믿음직하지 않아서 바닥을 콕콕 건드리는 등 수없이 많은 시험을 거쳤다.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지만 마음속의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니카는 자신의 겉옷으로 두 손을 감싸고, 그 위로 바란을 들쳐 안았다.

* * *

“이거 놔라, 무엄한 것들 같으니라고! 왕족의 몸에 손을 대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앙살라테는 몸을 뒤틀어 좌우에서 자신의 팔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대공의 기사들을 떨쳐내려고 했다. 투구가 벗겨져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정갈하게 묶였던 드라코슨 블론드가 풀어 헤쳐진 채로 칼바람을 맞아 휘날렸다.

“죄송합니다, 왕자 전하. 하지만 반역자를 붙잡아 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앙살라테는 독기 오른 눈으로 기사의 얼굴을 훑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이름은 달틴이고, 사사바란 가의 둘째인가 몇째인가 그랬을 것이다. 갤리거 경과 언뜻 닮은 엄숙한 입매를 가졌다.

“반역자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 왕위서열 상 헬린 힐벤 대공에게 가야 했을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는 분이시잖습니까. 반역자라 지칭하는 게 당연합니다만…. 이봐, 거리 유지해. 귀하신 몸에 상처 나는 게 싫다면.”

예리한 날붙이가 앙살라테의 목줄기에 달라붙었다. 달틴 사사바란의 협박은 효과적이었다. 요 앞에서 앙살라테를 빼돌릴 기회만 엿보고 있던 갤리거 경이 양손을 공중에 들어 올리며 쪼그라들었다. 달틴은 당장 달려들어 갤리거를 공격하지 않는 것이 용한 수준으로 잔뜩 흥분하여, 이마 가죽이나 목에 이미 울퉁불퉁한 핏대를 세우고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갤리거의 도움으로 애틀턴 남문을 열고 성안으로 진입한 왕자군은 곧장 성 내부에서 공격을 받았다. 은밀하게 움직이려던 계획은 갤리거 경이 조사한 군사 배치가 어긋나면서 전부 무산되었다. 방위별로 군사를 두었다 했건만, 성 내부 역시도 앙살라테가 침입할 것에 대한 완벽한 대비를 해두고 있었다.

이 악물고 덤비면 대공의 빈틈을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런 꼴이다. 치열한 혈전 끝에 남문이 닫혀 왕자군의 허리가 끊어졌으며, 진입한 병사들은 사방에서 포위되어 몰살당하거나, 심약한 가담자들은 항복을 선언하며 무기를 던졌다.

갤리거 경은 태산 같은 덩치 여기저기에 혈흔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좀 전부터 다리를 절고 왼팔이 부자연스러웠다. 부상을 입은 것이다. 더구나 왕자가 달틴 사사바란에게 붙잡힌 바람에 꼼짝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제 첫째 형님을 코코탄에서 죽이고 충성서약을 배반한 갤리거에게 이를 갈고 있는 달틴 사사바란이 지나치게 잠잠하다 싶었다. 앙살라테는 그의 성격을 돋구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도발을 날렸지만 돌아온 것은 묵묵부답이나, 당연한 소리를 묻는다는 듯이 무뚝뚝한 대꾸가 다였다.

“이거 귀한 얼굴 오래간만에 뵙는군요, 앙살라테 드라코슨.”

그리고 그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야 했던 이유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왕성 방향에서 가도를 따라 말을 달려온 청년이 시야에 들자 앙살라테는 속으로 깊은 탄식을 했다. 유순하게 생겨서는 열을 돋구는 그 미친놈이었다.

“헬린 힐벤.”

“그래요, 내가 바로 헬린 드라코슨 힐벤이 맞고, 나도 간만에 만나서 반갑답니다. 그런데 왕자, 이게 무슨 꼴이람? 전속력으로 달려가면 왕성을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무슨 달리기 시합인가.”

영롱한 웃음소리가 앙살라테의 모멸감을 무럭무럭 키웠다.

“하하, 내가 저희들 같은 병신인 줄 알아! 허점을 찾았다고 기뻐서 날뛰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네요. 미안하게 됐어요, 진심으로.”

앙살라테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울수록 헬린 힐벤은 앓던 이가 빠진 듯이 세상에 이렇게 개운한 일이 없다는 미소를 지었다. 승리감에 도취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체크메이트. 대공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내가 이겼어요.”

간단한 논리다. 앙살라테를 잡았으니 이 지독하게 오래 끌었던 내전이 종막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장기판 위의 말들이 앙살라테를 둘러싸고 섰다. 주변에 앙살라테를 구하기 위해서 얼쩡거리던 유일한 나이트, 갤리거 경은…. 앙살라테는 그를 곁눈질했다. 이미 두 손이 뒤로 묶였고 무릎이 꿇려 무력화되었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 헬린 힐벤의 모습은 마치 앙살라테 더러 다음 한 수에 목을 베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 같았다. 앙살라테는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최후의 한 수를 떠올렸다. 헬린 힐벤의 성격상 준비된 무대에서 자신의 목을 자르고 싶어 하리라 짐작이 갔으니 도무지 두려울 게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여전히 앙칼지네요. 앙살라테, 걱정 말아요. 대관식에서는 무슨 벌레 씹은 표정을 할지 궁금하니까, 내 특별히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 몸이 왕좌에 오르는 것을 지켜보게 해 줄게요.”

“네가 대신관에게 무슨 짓을 해서 대관식을 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텐데, 헬린?”

“문제라. 무슨 문제를 말하는 거죠?”

“네 즉위를 반대하는 왕위계승권자가 있으면, 원칙상 대관식은 일어날 수 없다. 나 앙살라테는 여전히 헬린 힐벤의 즉위에 반대함을 표명하는 바-”

“원칙, 원칙, 원칙! 나는 고리타분한 그 원칙쟁이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단 말씀이야.”

힐벤은 제자리에서 설레설레 고개를 젓다가 웃음을 머금었다. 기사들이 도열한 뒤편을 향해 은근한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새 대신관은 무척 젊은 분이라서 고지식하지가 않고, 응? 말이 잘 통하더란 말이죠. 아차, 내가 대신관님을 소개해드렸던가요, 앙살라테?”

“새 대신관이라고? 너 설마….”

앙살라테는 자신의 가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설마라는 말 안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의심이 포함되어 있다. 앙살라테는 본능적으로 대신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힐벤이 고대하던 사탕을 얻은 어린아이처럼 흥분한 얼굴로 손짓했다.

“인사해요.”

앙살라테는 힐벤의 손에 끌려 나와 자신감 없이 벌벌 떨고만 있는 청년을 훑었다. 분명 청년이 걸치고 있는 황금색 실로 수를 놓은 진줏빛 견직 로브는 대신관의 법복이 맞았다. 단지 그 안에 든 사람이 앙살라테가 기대하던 인물이 아니었을 따름이다.

“비겁한 놈! 대체 대신관에게 무슨 짓을 했지?”

“무슨 짓이라니요? 그렇게 오해받기 십상인 표현을 쓰면 안 되죠. 게다가, 왕자도 잘 알겠지만, 전 대신관은 언제 황천길을 가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늙은 영감탱이였다고요.”

“대신관을 죽였군! 이 살인마!”

충격에 몸서리치며 앙살라테가 목놓아 소리쳤다. 그의 움직임을 봉쇄한 달틴 사사바란의 울퉁불퉁한 팔뚝이 바싹 긴장하여 더욱 단단해졌다.

“너무 흥분하지 마요, 앙살라테. 그렇게 원숭이처럼 날뛰면 내가 인간인지 원숭이인지 분간하지 못해서 무심코 목을 칠지도 모르잖아요.”

“큭….”

대신관을 죽이고 제 입맛에 맞는 겁쟁이 놈을 새로이 대신관 자리에 앉히다니. 앙살라테는 감히 일어날 수 없을 거라 상상했던 상황 앞에서 좌절에 휩싸였다. 대신관은 율법주의자인 데다 왕 앞에서도 고개를 수그리는 법 없는 꼬장꼬장한 늙은이였다. 칼을 들이밀어도 입바른 소리로 타협을 멀리하리라고는 진작 알았지만, 그 까닭에 벌써 죽음으로 치닫고 말았을 줄이야….

‘헬린 힐벤의 양심을 과대평가했다.’

앙살라테는 아득 이를 갈았다. 대신관은 헬린과 앙살라테가 어렸을 적부터 알아 온 사이였으며 왕족에게 의무적으로 주어지는 혈통교육을 주 몇 시간 담당하여 사제의 관계를 맺기도 했었다.

그래서 설마하니 죽였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자식.’

앙살라테의 원망은 아주 미묘하게도 선망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비참한 사실이었다. 왕자는 혈통에서 언제나 열등감을 안고 살아왔던 까닭에, 헬린 힐벤이 타고난 대로 온정 없이 권력을 휘두르면 그게 꼭 맞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따금 진정한 드라코슨이라면 매사에 저렇게 냉랭히 굴어야 마땅한 것일까 싶어졌다.

‘휘둘리지 말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왕자가 이글거리는 눈을 다시 떴을 때, 대공은 시큰둥하게 손톱을 내려다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앙살라테는 비장히 마지막 남은 희망을 꺼내 들었다.

“나는 고왕국 시대로부터 내려온 율법에 따라서, ‘혈통의 증명’을 요청하겠다.”

“…뭐라고요?”

“그 결과 네가 승리한다면, 그때는 깨끗이 승복하겠어.”

‘혈통의 증명’이라면 헬린 힐벤도 익히 알고 있는 의식이었다. 왕위계승서열을 정함에 있어서 혈통을 절대적인 요소로 치던 이백 년 전부터 잔존한 율법 중 하나로서, 왕위에 뜻을 둔 계승권자들의 동의 하에 혈통으로만 승패를 가린다.

애틀턴 왕성 지하에 있는 ‘용들의 무덤’에는 사슬에 묶인 고대룡들의 화석이 남아 있었다. 화석이래 봐야 온전히 형태를 유지한 것은 없고, 거대한 앞발이나 날갯죽지, 아가리로 나뉜 부위들이 풍화되기 직전의 낡은 백골 상태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이들의 역할은 간단했다. 바로 후보들 중 누가 더 고대룡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는가를 가려내는 지표였다.

고대룡은 극단적으로 독립적인 영역생물이기 때문에, 기록에 따르면 동족을 만났을 때 서로 죽이기 시작한다. 죽일 각오로 덤벼든다거나 하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로 죽인다. 싸움은 최후의 생존자가 가려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미 죽어서 뼈만 남아버린 고대룡 화석에게도 이 신비한 동족상잔의 성질이 남아 있었다. 대신관이 주문을 외워 중화 과정을 완수하고 나면 화석은 중앙 제단에 오른 대상을 향해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그 반발력의 정도를 통해 용혈의 농담을 판단하는 것이 ‘혈통의 증명’이었다.

초연한 척 가장했지만 앙살라테의 관자놀이는 식은땀으로 이미 축축하게 젖었다. 오래전부터 최후의 한 수로 준비해 온 ‘혈통의 증명’이라는 카드는 대신관이 대공의 사람일 경우를 상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공이 평소 자신의 혈통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풋….”

입술을 떠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앙살라테는 빈정이 상해서 눈썹을 찡그렸다.

“아, 미안. 웃음이… 킥킥. 안 나올 수가 있어야지, 아하하! 이 헬린 힐벤을 상대로 ‘혈통의 증명’을 벌이겠다고요?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지상에서 가장 용에 가까운 남자라 불리는 헬린 드라코슨 힐벤의 눈에 이 요청이 얼마나 우습게 보일런지는 진작 예상했다. 앙살라테는 굴욕감을 견디고자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이나 데굴데굴 굴러다닐 기세로 웃어젖히던 힐벤은 눈시울의 물기를 손가락으로 떨구어내며 말을 이었다.

“푸흐흐…. 새 대신관이 그딴 의식을 허락할 리가 없잖아요. 대가리가 그렇게 안 돌아가서 어떻게 왕좌를 노렸는지 몰라.”

“저자에게 요청한 게 아니야.”

앙살라테가 헛기침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골랐다. 힐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눈 색이 옅어서 까만 동공이 미세하게 가늘어진 게 드러나 보였다.

“헬린 힐벤 대공, 너에게 요청한 거다.”

“내가 뭘 위해서 교활한 왕자 말을 듣겠어요? 그 입씨름 솜씨만으로 진작 끝났어야 하는 전쟁을 팔 년 끌어온 사람이 당신인데 말이야.”

“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내가 ‘혈통의 증명’에서 너보다 짙은 혈통을 보여주고 상황을 반전시킬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뭐라고?”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다.”

헬린 힐벤의 대단한 자존심을 살살 건드리며 냉철한 이성이 작동하지 않도록 훼방을 놓았다. 대공은 불같은 성질머리 탓에 주위에 딱히 책사라고 할 법한 직책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직성이 풀리는 대로 행동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너를 지지하고 나선 토호들은 그 고리타분한 고대룡의 혈통을 내세워 설득했던 놈들이 아니었나? 이렇게 소심하게 나와서야, 신뢰가 바닥에 처박힐지도….”

“닥쳐.”

“본색을 드러내는군, 헬린 힐벤. 공격성? 그게 바로 불안함의 전조야. 나한테 한 방 먹을까 봐 겁이 나나?”

헬린 힐벤은 바람에 앙살라테의 뺨이 전부 붉게 터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동공이 찢어진 눈길은 마법적인 압력을 행사했다. 살갗이 찌릿찌릿하고 온몸이 뻐근했다.

“…좋아요.”

한참 만에 승낙이 떨어졌다.

* * *

애틀턴 왕성의 지하에는 거미줄처럼 뒤엉킨 통로와 다양한 용도의 공간들이 존재했다. ‘용들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은 대개 고위 신관 급 이상이 아니면 찾지 못했다. 미로와 같은 구조 탓이었다.

‘적어도 아예 문외한을 대신관 자리에 앉힌 건 아닌 모양이군.’

알아서 척척 길을 찾아가며 안내하는 새 대신관의 뒷모습을 흘겨보며 앙살라테는 생각했다. 그는 걷는다고 말하기에는 이상한 자세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지하를 횃불로 훤히 밝혔는데도 앙살라테가 무슨 수작을 부려 수중에서 벗어날까 두렵다는 듯이 대공은 엄중한 호송을 맡겼다. 달틴 사사바란이 또 진득하게 달라붙어 앙살라테의 발을 묶었다. 지독한 인연이었다.

몇 번이나 나타나는 갈림길에서 개미굴 같은 옆 통로로 비스듬히 빠져나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오래지 않아 숨소리마저도 귀청 시끄러운 수준으로 감돌게 만드는 천장 둥근 공간이 나타났다. 울림이 아주 좋았다. 그리고 다른 곳과는 달리 천장 가장 높은 곳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어서 바깥으로부터 햇빛이 제단에 정확히 내리쬈다.

“그러면…. 의식을 시작할까요?”

“글쎄요, 대신관이 신성한 의식에 관해 일개 대공의 의견을 구하면 쓰나요.”

“죄, 죄, 죄송합니다. 그러면.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율법서를, 율법서를 여기에 두고….”

반듯하게 깎인 제단 위로 대신관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또각이는 발소리에조차 긴장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신경줄이 곤두섰다.

“유, 율법서에 나와 있는 의식 절차를…. 절차를 따르겠습니다. 우선 국가를 제창하며 왕국에 대한 숭고한 충성을 입증하는, 서, 선서를-”

“생략해요.”

“생략하, 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가엾은 대신관 같으니. 앙살라테는 속으로만 혀를 찼다. 주변에 소리가 너무 울려대고 있어서, 무심코라도 혀를 찼다가 자칫 대공의 눈에 불이 튀게 만든다면, 기껏 준비해놓은 판이 엎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럼 바로 본 의식으로 들어가서…. 고대룡 화석의 중화를 시, 시작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전해져 내려온 대신관의 지식은 다행스럽게도 이미 저승으로 간 늙은이의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게 아니었다. 성문화된 율법서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거대한 지식의 집약체였다. 별다른 인계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신관직에 올랐음에 분명한 이 청년이 난생처음 ‘혈통의 증명’ 의식을 집전할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택이었다.

“대공 전하, 잠시….”

누군가의 정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무지 의식에 대해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가 없다. 앙살라테는 대공에게 몸을 기울이고 말을 전하는 이름 모를 기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대신관 청년은 얼마나 목숨을 걸고 알랑거리는 위인인지, 대공이 볼 일을 안전히 마칠 수 있도록 의식을 일시중단하기까지 했다.

“그것참 재밌게 됐군요.”

대공은 수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고여있는데도 그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태연히 굴었다. 그는 이내 입술을 가늘게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반푼이라도 드라코슨이니 의식에 참여할 자격요건은 충분히 갖춘 셈이죠. 게다가 그쪽에 대관식 초대장을 보냈던 것도 사실이니….”

“들이라 전할까요?”

“그렇게 해요.”

반푼이 드라코슨이라는 냉소적인 표현에 어울리는 인물이라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앙살라테는 수리 드라코슨이 잣자후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개 마차로 이동하는 왕녀의 여정은 말을 달리는 이동속도와 비교하면 두 배 이상 걸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왕자는 애틀턴으로 오라는 연통을 넣어놓고도 전쟁이 마무리 지어지기 전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용들의 무덤’으로 안내되어 들어오는 붉은 머리의 초췌한 왕족은, 분명 수리 드라코슨이 맞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얼굴이 거칠고 예민해졌으며 몸이 비쩍 말랐다. 거기에 정말 직접 말을 타고 오기라도 했는지 평소에는 한번 입은 적이 없던 평민 소년으로 가장한 옷차림이었다.

“오래간만이군, 왕녀-”

“앙살라테 전하.”

대공이 능구렁이같이 의뭉을 떨며 왕녀를 반겼다. 그러나 그 인사의 마침표가 찍히기도 전에 수리 드라코슨은 툭 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명백히 무례한 처사였다. 미끈한 대공의 낯이 움찔 일그러지고 동공이 확 줄었다.

“하하, 왕녀에게는 분명히 겨울의 황야를 가로지르는 게 고단한 여정이었겠지요. 머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모양인데…. 이해해요. 이해한다고.”

무례를 무마하며 두 번째 기회를 줬지만 수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번에도 예를 갖추는 대신 성큼성큼 걸어들어오며 왕자를 찾았다. 머리가 헝클어진 수리의 곁에는 집시인 게 분명해 보이는 수행인과 아둔한 인상의 왕국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앙살라테는 저 심각한 표정과 이상한 일행 조합에 한 눈이 팔려 예를 갖추라고 즉시 나무라는 것을 잊고 입만 어버버했다. 은혜를 베풀어 출입을 자비롭게 허락해준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왕녀에게 완벽히 무시 당한 대공이 “오, 그러시겠다?”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어디 한번 마음대로 작당해 보라는 듯이 앙살라테를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달틴에게 수신호까지 했다.

왕자의 곁에 가서 반듯하게 선 수리는 허벅다리 언저리에서 손을 달달 떨고 마른침을 삼킨 뒤에 시선을 들었다. 눈 아래 새카맣게 내려앉은 그늘부터 수전증까지, 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두 눈만은 투명한 총기가 돌아와 있었다. 수리가 왕자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갖다 대고 속삭였다.

“전하의 집시가 죽었다는 연통은 이미 받으셨겠죠.”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막쉬롭은 뒤에서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었어요.”

“헛소리하지 마라. 말할 땐 상황과 장소를 좀 가리고 말이야.”

왕자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 수리의 어깨를 두어 차례 두드렸다. 더 이상 소란을 일으켜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대공을 자극하지 말고 물러나라는 의미였다. 이마에 돋아난 힘줄은 그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한지를 반영했다.

“그 집시가 요 몇 주간 저에게 기이한 독초를 먹여 교묘히 조종했어요. 잔악후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죠. 왜 하필 그 치를 노려야 했는지, 이유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집시에게 다른 꿍꿍이속이 있었던 한, 그녀에게서 얻은 예언들을 재고하셔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해요. 고대룡의 심장으로 ‘혈통의 증명’에서 이길 수 있다던 막쉬롭의 예언까지, 실은 다 헛바람인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앙살라테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을 수리는 단번에 깨달았다. 답답해서 가슴을 쿵쿵 내리찧었다. 한시라도 더 빨리 달려와 앙살라테를 말리기 위해서 아직 ‘부크쉬낙슈’라는 풀의 의존성에서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몸이건만 평생 타지도 않던 말을 달리고 달려 애틀턴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무 늦었다.

왕자의 깃발은 짓밟혔고 아군의 피가 사방천지에 흩뿌려져 있었다. 더 이상…. 승기는 없었다.

고대룡의 심장 발굴을 주관했던 수리 왕녀는 왕자가 지금 상황에 ‘최후의 증명’을 요청했으리라 직감했다. 반쪽 드라코슨의 피와 대공의 잘난 초대장을 들이밀어 의식이 벌어지는 ‘용들의 무덤’에 입장할 권리를 주장해 여기까지 왔다.

“배신자 집시의 말 한마디 껌뻑 믿고 도박하지 마요. 혈통싸움으로 헬린 힐벤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의식 따위 그만두고, 당장 뒤로 빠지셔야 해요. 뒤로 빠져서, 훗날을 도모하라고요. 여기서 우스운 꼴로 개죽음당하지 말고!”

수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전부 다, 앙살라테를 말리기 위해서였다. 속 모르는 왕자가 들끓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막쉬롭은 날 위해 십사 년을 충성했다.”

“그러니까 그게 다 거짓 충성이라고요, 전하!”

“거짓이라니? 막쉬롭은 날 위해서 불구덩이에도 들어갔던 적 있어. 내가 용병 생활 중에 감옥에서 배를 찢겨 죽을뻔했을 때 넉넉하지도 않은 재산을 전부 털어 내 목숨을 구한 게 누군지 아나?”

수리는 이를 악물었다. 앙살라테는 동료에 대한 진득한 의리를 가진 남자였다. 자신이 인정한 사람과 쌓아 온 정에 약한 면모가 있어 가끔은 멍청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막쉬롭이라는 미래를 보는 집시가 왕자군에 합류한 것은 고작해야 몇 개월 된 일이지만, 그녀가 앙살라테와 만났던 것은 벌써 십수 년 전의 일이라고 들었다. 천민 집시 노파 막쉬롭은 어리고 미약했던 사춘기 왕자의 열정에 기름을 들이 부어준 대모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수리가 막쉬롭의 배신을 알리자, 앙살라테는 그 말을 듣기는커녕 콧방귀를 뀌며 화살을 수리에게로 돌렸다.

“반면에 수리 드라코슨, 너는 어땠지? 남자에 눈이 멀어 날 배반하기까지 했었지! 탈타르에서 그 사사바란 자식과 멋대로 혼인을 하겠다며 망명했었어!”

“…전하께서는 내 말을 듣지 않으시겠군요.”

“시시비비는 나중에 가린다. 다만 이 정의로운 앙살라테가 너를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시 천민보다 맹목적으로 신뢰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야.”

두 명의 드라코슨이 각자 씨근덕대는 숨을 몰아쉬며 마주 보던 시선을 각자 찢었다. 수군대는 꼴을 답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지켜보고 있던 헬린 힐벤이 어깨를 으쓱이고 입술을 말았다.

“남매간 대화는 끝났나요?”

남매라고 지칭하면 앙살라테와 수리 두 사람 중 누구도 기꺼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뱉은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앙살라테도 수리도 살풋 얼굴을 찌푸렸다.

“이름에만 드라코슨이라고 써 붙이고, 기껏해야 예쁜 금발만 물려받은 놈과…. 그 금발마저도 못 물려받은 놈.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르고 설쳐대는 꼴이 아주. 봐줄 만해요, 그렇죠?”

그 누구도 대답할 자격이 없어 고개만 처박았다. 부글부글 들끓는 속을 다스리느라 앙살라테는 입술이 닳을 정도로 짓씹었다.

“흠, 대신관?”

“예, 예, 전하-”

“이만 의식을 재개하죠. 쟤네들 떠드는 소리 더는 못 들어주겠으니까요.”

허리를 꺾어 절한 대신관은 의식의 아주 핵심적인 부분으로 질러 들어갔다. 좀 전에 허례허식 같은 예식절차를 설명하자 대공이 얼마나 따분한 얼굴을 했는지 염두에 둔 탓이었다.

사실상 핵심으로 들어가면 ‘혈통의 증명’은 아주 간단한 세 단계의 절차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대신관이 진언을 외워 ‘용들의 무덤’에 가득한 고대룡 화석을 중화하고 그것들 안에 잠들어 있던 마법적인 힘을 깨운다. 둘째, 증명의식에 참여하는 각 후보가 제단에 올라 고대룡 화석의 반발작용을 보인다.

셋째로, 마지막 단계는, 반발작용의 차이를 측정하여 혈통의 우열을 매기는 일이었다.

의식에서 대단한 움직임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현대에 와서 피가 연해진 왕족들은 이 의식에서 화석의 꼬리뼈를 들썩거리게 만들면 용한 수준이었다. 그나마 앙살라테처럼 금발을 타고났다면 적어도 ‘움직인다’는 표현이 민망하지는 않은 수준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용에 가까운 남자’라고 자칭해 마지않는 헬린 힐벤이라면….

‘생각하지 말자. 주눅 들지도 마. 막쉬롭의 말을 기억하자. 내가 왕이 되는 미래를 봤다고 했어.’

앙살라테는 고개를 저었다. 품 안에 넣어둔 ‘고대룡의 심장’을 매만지며 꺼끌꺼끌한 감촉에 집중했다. 유적에서 오랜 고생 끝에 발굴한 이것은 막쉬롭의 설명에 따르면 고대룡이란 생물체의 마력의 원천이 되는 장기로서 반발작용을 이끌어내는 핵심 결정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아무리 용에 가까워 보았자 인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헬린 힐벤보다 큰 반발작용을 이끌어낼 수 있을 터였다.

“중화 과정이 끄, 끝났습니다. ‘용들의 무덤’에 묻힌 모든 고대룡의 유해들은 지상의 먼지를 떨어내고 본래의 정결한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헬린 힐벤은 짧은 치하의 말을 남기고 또각이는 발소리를 내며 제단 방향으로 걸어갔다. 앙살라테의 자신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 긴장감을 깰까 봐 그 누구도 숨 한번 삼키지 못했다. 적막 속에서 대공이 제단 위로 발을 옮겼다.

앙살라테의 눈에 핏발이 섰다. 여태 혈통을 등에 업고 의기양양한 채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던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너도 별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노라고. 턱을 치들고 인간과는 다른 존재인 양 거드름피우던 모습을 비웃어주리라고….

그러나 앙살라테의 기대는 끝내 꼴사나운 질시로 끝나고 말았다. 헬린 드라코슨 힐벤이 제단 위에 발을 올리기가 무섭게 거대한 반발작용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발 디딘 땅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헬린 힐벤은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소리치는 듯이 재수 없는 낯짝으로 빙글 웃었다.

크롸라라라!

벼락같은 포효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제 두 귀를 틀어막았다. 소리의 진원지는 동그란 공동의 테두리를 따라 널브러져 있던 거대한 두개골이었다. 소리를 내는 기관이라고는 썩어 문드러져서 남아있지도 않을 터인데 거대한 두개골은 이빨을 씰룩대며 포효소리를 반복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힐벤이 나머지 한쪽 발을 올려 제단 위로 완전히 올라서자 사슬에 묶인 고대룡의 무릎뼈와 날갯죽지가 펄럭이고 온갖 작은 뼛조각이 달달 진동했다. 이 뼈들은 하나같이 굵직한 사슬에 꿰여 벽면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각자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대공이 있는 제단 방향으로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 같았다.

“지상의 용!”

그 누구도 경악의 바다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달틴 사사바란이 목청을 높였다. 지상의 용이라는 구호를 누가 제일 먼저 따라 외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앙살라테가 공황상태에서 어렵사리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는 그 자리에 있는 대공의 수하들, 그러니까 수리 드라코슨과 그 일행을 제외한 전원이 헬린 힐벤을 더러 지상의 용이라 연호하고 있었다.

신관들도 한 패였다. 놀랄 것도 없다. 신관들이야 원래 고대룡 신화에 환장하는 족속이었다. 힐벤 대공이 저렇게 압도적인 혈통을 입증해 보였으니 첫눈에 반한 듯 헤롱헤롱해지는 것도 알 만한 일이었다. 앙살라테의 불편한 눈길과 마주친 헬린 힐벤이 빙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입을 벙긋거렸다.

‘네가 졌어요, 개살구 드라코슨.’

뜨거운 불꽃이 갈비뼈를 안쪽으로부터 쿵쿵 두드리는 것 같았다. 앙살라테는 열이 머리끝까지 뻗쳐서 제단 가까이로 다가갔다. 더 이상 입증할 게 뭐가 있겠냐는 듯이 힐벤은 자리를 내주었다. 그가 제단의 높은 턱으로부터 아래쪽으로 내려오자마자 달달 거리던 화석은 힘을 잃고 툭 나뒹굴었다.

“앙살라테, 교수형인지 참수형인지 생각해 둬요. 그래도 사촌지간인데 어떻게 삶을 마감할지 선택할 권리 정도는 줄 수 있으니까요.”

“닥쳐, 헬린. 아직 승부는 안 났어.”

“그러시든가요. 진 게임 어떻게든 끌고 가려는 모습, 꽤 추하네요. 어릴 때부터 악다바리로 고집부리는 건 똑같았죠.”

앙살라테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오만상을 찌푸린 수리 드라코슨 쪽으로 시선을 한번 주었다. 수리는 지금에라도 앙살라테가 이 도박을 그만둬야 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막쉬롭을 믿지 않으니 앙살라테가 ‘고대룡의 심장’을 가지고도 ‘혈통의 증명’에서 이길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거겠지.

‘혈통의 증명’에서 지고 나면, 앙살라테는 정당성을 잃는다. ‘혈통의 증명’을 요청한 순간부터 보수적인 혈통주의 사상에 기반해 왕을 정하는 데 동의한다는 뜻이 되니까. 앙살라테는 여태 낡은 가치에 대항해 낮은 자를 위해, 그리고 대공의 도덕성을 빌미로 싸워 왔다.

‘혈통의 증명’을 요청하고, 더구나 거기서 진다는 것은, 왕자파의 완벽한 파멸을 뜻했다. 이건 앙살라테가 단순히 목숨을 잃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적의 가치에 동의하고 정당성을 잃는다는 것은, 그가 팔 년 가까이 이끌어 온 이 싸움이 처음부터 무용지물이었다고 소리치는 일이다. 앙살라테 드라코슨은, 처음부터 왕이 될 수 없었노라고.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 제단에 오르세요.”

대신관이 헛기침했다. 앙살라테가 옷 안에 손을 넣고 ‘고대룡의 심장’을 굴리며 뜸을 들이는 동안, 대신관은 눈치를 주겠다고 헛기침을 연거푸 오십 번은 족히 했다. 앙살라테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만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수리의 말대로, 고대룡의 심장이 소용없으면? 애초에 고대룡의 심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분간할 수 있는 것은 막쉬롭밖에 없었다…. 수리 말마따나 막쉬롭이 나를 배신했던 거라면?’

더 이상 대신관의 재촉을 이길 수 없었던 앙살라테는 휘청거리며 발 한 쪽을 제단 위로 슬그머니 올려두었다. 대공이 이런 식으로 한 발을 가까이했을 때는 저기 힘없이 얹혀 있는 두개골이 뻐끔거리며 포효소리를 냈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포효소리는커녕 뼛조각이 쇠사슬을 절그럭거리며 움직이는 작은 변화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한쪽 발을 제단 표면에 완전히 디딜 때까지, 문자 그대로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소름이 쭉 돋았다. 앙살라테의 파랗게 질린 입술이 떨었다.

쿵, 쿵!

바로 그때.

적막을 깨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좀 전의 포효소리나 진동과는 성질이 다른 소음이었다. 그래도 시점이 시점인지라 앙살라테를 비롯한 관중들은 죄다 마른침을 삼키며 소리의 원인을 찾아 헤맸다.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던 이들은 연신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다가, 저만치 어둠이 내린 한쪽 구석에서 쿵쿵거리는 굉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콰앙!

“뭐, 뭐야!”

“무슨 소리지?”

웅장한 파열음과 함께 흙먼지가 휘날린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눈과 코를 가리고 먼지가 가라앉기까지 기다렸다. 흐릿한 시야에 사람 그림자가 비쳤다. 키가 크고, 두 팔에 사람으로 보이는 것을 짐짝처럼 들쳐 안았다. 정체를 알 수 없어 모두가 눈만 끔뻑거리는 가운데, 왕녀가 대동해 온 집시, 구더기만이 인영을 알아보았다.

“나리…?”

흉흉한 기운을 전신에 내두르고 벽을 무너뜨리면서 나타난 남자는, 다름 아닌 왕녀의 용인기사 니카였다.

* * *

붕괴 이후 드러난 통로가 정확히 왕성 안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니카는 이 길로 바란을 성 바깥으로 빼돌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어디든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머나먼 땅에 바란을 숨길 것이다. 바란은 태생이 귀족이라 거친 땅에 적응을 잘 못 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서둘러 도망치지 않는다면, 바란은 전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비참한 꼴이 될 테니까. 전쟁이 끝난 후 바란이 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악명 높은 잔악후작이 실은 앙살라테의 간자였다고 밝혀진다 한들, 그를 향한 왕자군의 원한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직접 저지른 잔혹행위가 없던 셈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대공의 곁에 남아있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탈타미오에서 바란이 그에게 어떤 장난감 취급을 받는지는 충분히 목격했다.

‘미련하기 그지없는 놈.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려고 제 남은 인생을 통째로 바치다니.’

품 안의 몸뚱이를 고쳐 안았다. 세게 안으면 부서질까 두려웠다. 살살 추어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려고.’

문득 온기를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옷감 위를 슬그머니 쓰다듬는 데서 그쳤다. 니카는 좀 전부터 비정상적인 힘을 내고 있는 자신의 손바닥이 바란의 맨 살갗에 닿으면 무슨 사달을 낼까 두려웠다.

우선 어떻게든 지상으로 나가야 했다. 좀 전에 했던 것처럼 벽을 마구잡이로 무너뜨렸다가는 다시 생매장을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다른 선택지가 보이기 전까지는 눈 앞에 난 길만 따라가기로 했다.

바란을 안아 들고 손등에 닿는 벽면의 감촉에 의존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지점까지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침묵의 행군이 이어졌다.

…살다 보면 가끔 탄식이 절로 나올 만큼, 의도와는 정반대로 일이 진행될 때가 있다. 니카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빠져나가려던 계획과는 정반대로, 사람이 바글바글 모인 의식 현장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통로를 따라 완만한 오르막길을 쭉 걷던 니카는, 막다른 통로 끝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을 찾아냈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요란법석을 부리다가, 좀 전에 맨손으로 돌벽을 무너뜨렸던 가공할 만한 힘을 다시금 발휘했다. 이번엔 벽면 무너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다 싶더니, 무너진 돌벽 인근 사방에 흙먼지가 눈도 못 뜰 만큼 거하게 날렸다.

품 안에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어 있던 바란의 몸이 움찔 떨었다. 잠에서 깨어난 성싶어 유심히 바란의 창백한 낯을 뜯어보느라 바쁜 와중이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낯익은 호칭으로 반신반의하여 니카를 부른다.

“나리…?”

“니카 경?”

먼지가 가라앉으면서 하나둘 씩 아는 얼굴이 보였다. 우선은 수리 왕녀였다. 니카는 곤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뒤이어 이름을 능히 댈 수 있는 각 진영의 주요인물들이 속속들이 눈에 띄었다.

니카는 적잖이 당황하여 우선 뒤편에 바란의 몸을 비스듬히 뉘여두고 일어섰다. 니카의 삶에 있어서 그 자체로 목적이자 의미였던 수리 왕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니카의 이름을 읊조렸다. 잣자후에 남겨두고 온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아리송하기도 하고, 창백한 낯빛을 보자 안쓰러운 걱정이 절로 밀려들기도 했다.

‘바란을 도망시키려면 아무튼 이 상황이 정리되어야 한다.’

복잡한 마음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제자리에 버티고 섰다. 누구나 애틀턴에서 기나긴 전쟁의 종지부가 찍히리라 예상했지만, 그 종지부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직관적으로 다가오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왕자와 대공이 한자리에 모여서 알 수 없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광경은 언뜻 보면 평화적이기까지 했다.

니카는 대공의 앞잡이들을 주시하며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검을 뽑지 말아요, 경.”

왕녀의 한마디에 머뭇거리며 머릿속으로 주산알을 튕겼다. 어차피 이 인원을 혼자서 전부 상대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더구나 왕자와 대공은 저희들 딴에 어떤 합의에 다다랐던 모양인데, 중요하신 분들의 협약을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은 정말이지 추호도 없었다. 어렵게 갈 것 없다. 적당히 눈치를 봐서 감시의 눈이 소홀해졌을 때 바란 탈타미오를 빼돌리거나, 함께 뒤따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왕성에서 내보내거나….

끝내 왕녀의 지시대로 검은 뽑지 않았으나 배반할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명령을 따르는 니카의 모습에 만족한 듯, 왕녀는 칭찬을 함의한 나긋한 미소를 던졌다. 가슴이 뜨끔했다. 그녀의 미소가 껄끄럽게 느껴지다니, 그가 정말 많이 변하긴 했다. 니카는 문득 아직 자신이 왕녀의 기사로 불리울 자격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본디 니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왕국기사가 한껏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낯이 익었다. 저번에 바란 탈타미오가 도망했다며 잣자후를 헤매고 다니던 그 기사였다. 이름은 제란딘이었던 것 같았다.

거기다 드라코슨들 사이에 집시를 거느리는 게 무슨 유행이 되기라도 했는지, 구더기가 수리 왕녀의 우편에서 보란 듯이 뒷짐을 지고 서 있다. 눈을 찡긋하며 알은체하는 그녀는 결국 코쿤을 찾는 데 성공했는지 얼굴에 어둑어둑하게 드리웠던 근심걱정의 그늘이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니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 발짝 다가갔다. 이번엔 보다 가까이에서 환영인사가 터져 나왔다. 주목이 홱 앞으로 쏠렸다.

“니카 경. 살아있었군.”

“앙살라테 전하.”

왕녀보다 니카 가까이에 서 있던 앙살라테 드라코슨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게도 식은땀으로 번들번들 젖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니카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아득 갈았다. 어린 바란 탈타미오를 무어라 구슬려서 적진 한복판에 처넣고 팔 년을 대공의 남첩 소리 들으며 살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인간이 아니고서야 고작 열여덟 먹은 아이를 오래토록 육수로 고아서 이용해먹을 계획은 감히 고안해내지 못한다. 니카는 왕자가 가진 자질과 인성마저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잣자후에서 바란이 지독한 포로 대우를 받아 썩어갈 때도, 전장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때도, 왕자는 제대로 바란 탈타미오의 방패가 되어준 적 없었으니까.

‘잘 막아줬다면, 내가 그를 그렇게까지 상처입힐 필요는 없었을 텐데.’

어느 정도는 책임 전가였다. 니카는 어렵사리 인정했다. 그래도 마음에 이글거리는 불꽃은 잠잠해질 뿐 쉽게 꺼지지는 않았다.

크와아아아——!

니카의 적대감에 반응하듯이 우렁찬 포효소리가 지축을 뒤흔들며 터져 나왔다. 니카는 멈칫 놀라 검을 뽑아 겨누었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님을 상식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거대한 짐승이 토한 울음소리 같았다. 무언가 자극할 만한 행동을 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앙살라테가 차지하고 있는 제단 방향으로 니카가 한 발짝 내디뎠을 뿐이었다.

니카는 검을 들고 주위를 한 바퀴 뱅글 돌았다. 포효는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울음소리만 들리는 것도 아니었으며, 특정한 방향성도 없었다. 들짐승으로 가득한 동물 우리 한가운데에서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사방으로부터 소음이 쏟아졌다. 끽끽거리는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그것보다 조금 더 사나운 타격음까지.

“…힐벤 전하 때보다 훨씬 강한 반응이오.”

“그런데 좀 전에 앙살라테 전하가 제단 위에 발을 올렸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 않았는가?”

“시간이 좀 걸린 거겠지.”

“그럴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방계혈족일 가능성은?”

“모를 일이오. 하지만 만일 저 정도로 짙은 혈통의 드라코슨이 태어났다면, 금발을 타고나지 못했을 리는 없어. 기록에 따르면 흑발은 분명 남부의 용에게서 시작된 형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드라코슨 이외의 고대룡 혈족이 씨가 마른 건 벌써 이백 년 전 일이라고.”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니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놀란 표정을 했을지언정, 니카처럼 아예 영문을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특히 한켠에 모인 신관들은 저희들끼리 의견을 나누며 쑥덕거렸는데, 그들의 눈길이 니카를 자주 스쳤으며 이야기 속에서 니카의 이름이 심심찮게 언급되기 시작했다. 니카는 경계태세를 풀지 않고 팔을 긴장시켰다.

“나리! 제단 위로 올라가요!”

어수선한 틈을 타 구더기가 목소리를 냈다. 천민 집시 출신이 애틀턴 왕성까지 들어와 왕족들 면전에서 큰소리를 낸다는 건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잔뜩 신바람이 난 구더기는 두 번이나 더 같은 말을 외쳤다.

“제단 위로 올라가 보라고요!”

“헛바람 넣지 마요, 구더기. 니카 경은 용인이에요.”

수리 왕녀가 재빨리 구더기를 말렸다. 사실 그녀 역시도 무언가 심상찮은 기류를 느꼈던 까닭에 그 말린다는 말도 온전히 비웃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수리는 겁먹은 사슴처럼 동공을 떨고 있었다. 눈을 아주 많이 깜빡였다.

“니카 경은…. 왕국 남부로 몰아낸 마수가 인간과 교접하여 낳은 혼혈이라고요. 토룡, 토룡의 새끼….”

“궁금했던 적 없어요, 나리?”

궁금했던 적?

“왜 다른 용인들과는 다른지, 토룡의 비늘은 암녹색인데 왜 나리 얼굴에 얽은 비늘은 죄다 검은지! 힘은 또 왜 그리도 강하고 감각이 예민한지. 자신의 유능함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나요?”

그의 정체나 과거뿐만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도 궁금했던 건 많았다. 그래서 늘 사난타의 밤하늘에서 구더기가 읽은 미래가 무언지 궁금했었다. 떠보듯이 질문을 던졌던 적도 몇 번 있었다. 알쏭달쏭한 말들은 니카가 기대했던 직관적인 대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니카는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했다.

‘용인은 나리처럼 못 해요.’

구더기가 그에게 용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미약한 단서를 남겨주긴 했거니와 니카가 그 당연한 대전제 대신 어떤 가설을 채택해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 상상력은 제 주제에 맞게 발휘되는 힘이었다. 우물 속에서 자기혐오와 뒤엉켜 살아온 개구리는 고작해야 손바닥만 한 하늘을 상상하는 게 힘에 부쳤다.

“올라가요.”

니카가 망설임을 다 떨쳐내지 못한 상태로 앙살라테가 있는 제단에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명백히 정체 모를 소란은 심해져만 갔다. 화석들은 발을 얹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공중을 붕 날고 사슬을 끊어낼 듯 힘주어 절그럭거렸다.

왕자의 낯빛이 희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구더기의 벼락같은 재촉에 홀린 듯이 발을 옮기면서, 니카는 문득 앙살라테가 당황한 듯 보이는 것이 단순히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까닭일까 생각했다. 앙살라테는 제단 아래에 선 니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니카의 키가 워낙 커서 그가 턱이 높은 곳에 발을 딛고 있음에도 장단은 전복되지 못했다. 왕자는 시선을 들었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전부 드러났다.

“경.”

“예, 전하.”

“…정체가 뭐야.”

혼란스럽게 미간을 구긴 건 니카도 마찬가지였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는 별반 도움이 안 되는 대답 대신에 제단 위에 발을 얹었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툭, 툭, 툭.

쇠사슬의 이음매가 끊어지며 작은 뼛조각들이 니카의 살갗에 튀었다. 작은 뼛조각은 날카로웠고, 그게 니카에게로 쇄도하자 꼭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화살 같은 관통력을 지니게 되었다.

“나리!”

“으윽….”

하나는 보기 좋게 옆구리를 찢으며 스쳐 지나갔다. 다른 몇 개의 파편은 솜씨 좋게 피했는데, 다만 파편을 피하느라고 급급해서 생각지도 못하게 제단 위에 몸을 전부 올려놓고 말았다. 쉭쉭 대며 날아오는 화석의 기세는 더 흉악해졌다.

그리고 거대한 두개골과 이름도 알 수 없는 온갖 괴상한 부위의 고대룡 뼈화석이 공중에서 시끄럽게 떨어대다가 쇠사슬을 고정판까지 통째로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으아악!”

“위험해! 공격한다!”

상황 파악이 늦은 사람들이 벌벌 떨며 낮은 비명을 토해냈다. 지금이라도 진작 목숨을 도모하며 줄행랑을 놓으면 좋을 걸, 다들 흥미진진한 장면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와르르 떨면서도 차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아직 조각조각 나뉘어 있는 화석들에게 큰 위협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화석들이 저희끼리 들러붙어 괴상한 모습을 갖춰 조직적으로 니카에게 덤벼들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 * *

“새로운 왕위 계승권자야.”

누군가 홀린 듯이 시작한 말이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흥미진진한 ‘혈통의 증명’ 의식에 관객으로 온 사람의 수는 꽤 되었다. 대공이 잡다한 직함을 가진 신관들과 왕성에 머물던 늙은 귀족들도 몇 사람 대동한 까닭이었다. 혈통으로 벌이는 경쟁이라면 질 리 없으니 잘 구경을 시켜두었다가 간증꾼으로 활용하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계승권자.”

“대공보다도 더 짙은 용혈!”

수많은 입술을 빌린 말은 맨 처음 출처를 특정해내지 못할 정도로 널리 퍼졌다. 현대의 왕국민들은 지금은 전부 소실된 고왕국시대의 마법에 환장하는 신비주의 경향이 짙었다. 방금 전부터 목도한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빼앗긴 듯 수군거렸다. 그들 중 몇몇 열정적인 신관은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기까지 했다. 헬린 힐벤의 낯에서 웃음이 가셨다.

“입증된 의식이라더니 진행이 형편없군요. 대신관….”

“예, 예, 전하.”

“일을 똑바로 해야지…. 고작해야 저런 도롱뇽 튀기랑 내가 같은 취급을 받아야겠어요?”

“주, 중화 과정은 예식서에 나온 그대로 자, 잘 거쳤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저 병신이랑 같은 취급을 받아야겠냐고 물었잖아!”

노호성이 터지자마자 겁을 집어먹고 대신관은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며 흐느꼈다. 어찌나 비굴한 얼간이처럼 구는지 하찮은 벌레를 상대로 목청을 높이는 듯 허탈하기만 했다. 대공은 대거리를 집어치우고 신관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방향에 눈길을 주었다. 대개 젊은 놈들이었지만 드문드문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의 신관들도 보였다. 이름만 이어받은 쭉정이 신참 대신관보다야 머리에 든 게 많을 것이다.

손가락으로 몇 사람 지명해서 끌어낸 뒤에 의식을 바로잡으라고 지시했다. 하나같이 난색을 표하는 모습이 수상쩍었다.

“예식은 그 어떤 실수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중화에 사용한 광물이나 암염도 신전 측에서 관리하는 정결한 재료입니다. 게다가 만일 중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고 해도 마수를 상대로 이 정도의 착오는 나오지 않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룡과 토룡은 둘 다 파충류의 모습을 띠고 있는 까닭에 유전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상 아무런 연관 없는 독립된 개체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백 년도 더 된 고대룡 화석이 두 개체를 분간하지 못해서 착오를 일으켰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헬린이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아니고말고. 멍청한 신관들은 의식에 오류가 없다는 둥 헛소리만 지껄일 뿐 시원한 대책을 꺼내 들지 않았다. 흡족한 소리가 나올 때까지 하나씩 모가지를 그어 볼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지반이 뒤흔들리며 머리 위의 건물까지 불안하게 균형을 잃고 바스락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제단 방향을 살폈다. 용인기사가 얼결에 제단 턱 위로 올라서서 사면을 경계하며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뼛조각들이 서로 들러붙어 더 거대한 적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 커다란 반발력을 해결하기 위해서 작은 반발력끼리 하나의 개체로 뭉치는 드문 사례다.

‘그렇게 커다란 반발력을 일개 토룡 혼혈이 만들 수 있을 리가?’

한심하고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저 멍청한 용인기사가 자신이 평생토록 공들여 쌓아 온 탑을 마지막에 입김을 불어 무너뜨리려 하는 행색이나, 또 그 헛수작에 정신이 팔려서 손가락만 빠는 이 멍청한 구경꾼들이나.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에게 전부나 다름없는 혈통이 웬 굴러들어온 용인 새끼에게 빛을 잃는 하찮은 것일 리 없다. 나는 누구보다 용에 가깝게 태어났다. 피와 공포, 살육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생물로….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헬린은 용이어야 했다. 지상에서 가장 용에 가까운 이로 남아야 했다. 지나친 흥분 탓에 대공은 좀 전부터 지나치게 공기를 가쁘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몸은 경직되었고 손끝은 차갑게 식었으며 동공이 뾰족이 섰다.

신관들은 입을 모아 의식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러면 저 하찮은 용인기사가 어떻게든 고대룡의 혈통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새미언 왕의 사생아인가? 아니면, 캐멀롯 왕인가? 어느 예시를 들든 용인기사는 나잇대나 출신성분이 들어맞는 구석이 없었다. 더구나 만일 저 기사가 선대 왕의 사생아 핏줄이어서 드라코슨의 피를 짙게 타고났다면, 그 시조인 ‘지혜로운 황금룡’의 형질대로 드라코슨 블론드를 가졌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대신 용인기사의 머리카락은 칠흑같이 검다.

이 정도 추리해 보면 가장 유력한 답이 무언지는 누구든 알 수 있었다. 이백 년 전 용혈을 전부 숙청한 드라코슨 가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남은 용혈이 있었던 것이다. 왕국은 원래 용혈을 이은 여러 가문이 돌아가며 왕좌를 차지하던 부족공동체의 성문법을 계승했다. 혈통만 증명이 된다면 드라코슨이 아니어도 계승권은 주어졌다.

‘이제 와서, 새로운 왕위계승권자라고?’

퍼즐을 거의 다 맞춘 시점에서 그 어느 구멍에도 들어맞지 않는 해괴한 조각 하나가 툭 불거져 나온 셈이다. 헬린은 검 손잡이를 매만졌다.

‘…쓸모없는 조각이라면 없애는 수밖에 더 있나?’

* * *

붕괴의 전조였다. 니카는 신발코 앞에 툭툭 떨구어지는 돌 부스러기를 보며 생각했다.

애틀턴 왕성 지하에 있는 ‘용들의 무덤’에는 건물의 하중이 잔뜩 실린 돌기둥이 위치해 있었다. 취약부위가 많다는 뜻이었다. 천둥소리와 비슷한 소음을 내며 금이 쩍쩍 갈라졌다. 니카는 어쩔 줄을 모르고 검을 들어 허공을 휘젓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뼈가 무쇠로 돌벽에 박은 고정핀을 강제로 뜯어내며 니카가 있는 방향으로 팽팽히 곧추섰다. 작은 놈들은 저희들끼리 뭉쳐서 이미 한 몸을 이룬 양 니카에게 덮쳐들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엎드리세요!”

앙살라테의 밑에서 일해 온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니카는 그를 얄밉게 여기던 마음도 차치하고 감싸 안은 채 바닥을 굴렀다. 속에 동료애와 충성 말고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앙살라테도 마찬가지였는지 다급히 니카의 어깨를 붙잡고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낸다. 무언가 마음속에 짚이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니카 경. 대체 막쉬롭을 언제부터 알고 지냈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엉덩이를 댄 앙살라테가 체통을 지켜 일어서며 신음처럼 말했다. 긴박한 마음이 녹아든 목소리였다.

“일, 이주일 정도 됐습니다.”

“그 전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젠장, 경이 지금 이 모든 일의 정 가운데 있건만 정작 경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단 소리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상황이야!”

정확히 니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백골 화석들이 난리를 일으켜 왕성 지하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백일몽으로도 안 꿀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니카는 황당함이 일단 가시고 나니 구석에 내려둔 바란이 붕괴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헐레벌떡 제단 바깥으로 내려서는데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검이 번득이며 날아들었다.

“크읏…!”

째애앵!

검과 검이 맞물려 공기를 찢는 무시무시한 금속성을 터뜨렸다. 니카의 예민한 귀가 쨍하니 아팠다. 뿐만 아니라 공격 그 자체에도 대단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팔이 덜덜 떨렸다. 인간과는 구별되는 근력을 타고난 니카와 무식하게 힘으로 맞붙었을 때, 이렇게 한 합에 나가떨어지지 않는 상대는 흔치 않았다. 니카의 눈에 이채가 서린다. 탈타미오의 지하수도에서 도망쳐 나오던 밤 꼭 지금과 같은 경험을 했었다.

“힐벤 대공…!”

“잡종이, 어딜 감히, 주제를 모르고!”

그날 밤보다 대공의 검은 훨씬 무거웠다. 그러나 매서움은 덜했다. 니카는 실핏줄이 곤두선 대공의 눈알과 불끈 오른 힘줄, 악문 입술 따위와 쉴 틈 없이 쏟아내는 혐오의 말들을 통해 그의 현재 상태를 짐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공이 이성을 잃었다.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해서 검이 무뎌졌다. 아무리 타고난 힘이 우수하다고 해도, 날카로움을 잃은 검사는 니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눈살을 어그러뜨리고 힘을 주었다. 힘의 평형 때문에 가운데에서 맞붙어 있던 검날 두 개가 서서히 앞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니카가 힘으로 밀어붙이자 더 이상 정면으로 버틸 수 없어진 대공의 선택지는 단 한 가지였다. 비스듬하게 검을 흘리고 몇 발짝 물러서서 자신의 수비 범위를 확보할 것이다. 니카는 대공이 검을 흘리는 틈을 타서 안쪽으로 한 발짝 파고든 뒤에 급소를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용에 가장 가까운 남자’라고 칭송받던 인간 같지 않은 기민함과 순발력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재빨리 뒤로 도약하면서 치명상이 될 수 있었던 공격은 기껏해야 생채기만 남겼다. 니카는 아쉬움에 혀를 찼지만 대공 전하께는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홱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났던 모양이다. 생채기에서 배어 나온 피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훔쳐내곤,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감히, 감히, 감히 토룡 잡종 따위가 드라코슨의 적자에게 상처를 내다니——!”

“나리는 토룡 혼혈이 아니에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덜덜거리면서 불안하게 진동하는 돌벽에 부딪혀 울렸다. 니카가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나리, 잘 들어요. 이미 짐작했겠지만, 당신은 토룡 혼혈 아니에요. 토룡과 그 어떤 관계도 없어요. 나리는….”

니카는 움찔 몸을 굳히고 저 건너편의 살갗이 검은 집시를 응시했다. 구더기는 기괴하게 서로 붙어서 니카를 향해 덜그럭거리며 기어가는 뼈다귀 화석을 처리하느라고 분주했다. 니카가 제단 아래로 내려간 뒤부터 화석들이 날뛰는 힘은 분명히 약해졌지만, 그래도 그들이 아예 움직임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구더기는 제란딘의 검을 뺏어다가 검집째로 쿵쿵 내리찧어서 뼈다귀 화석을 관절단위로 부수다가 고개를 쳐들었다. 구더기가 짤막하게 말했다.

“당신은 마수 따위가 아니라, 화룡 체첼드롭의 아들이에요! 손자나 후손, 혈통처럼 겉으로만 그럴싸한 먼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고대룡의 직계자식이라고요.”

“그게 무슨-”

“내 얘기가 안 믿기겠지만 잘 들어요! 용들이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 게 벌써 수천 년 전이에요. 우린 그저 절멸했다고만 표현했었죠. 하지만 체첼드롭은 고대룡들이 한날한시에 황혼을 맞이했던 때부터….”

뜸을 들였다.

“삼십 년 전까지, 오랜 동면에 들어 있었어요. 운 좋게 죽음을 피했던 거죠.”

“사이비야. 야만인들 말은 들을 것도 없어. 그런 내용은 ‘용의 신전’에도 전해 내려온 적이-”

“야만인이라고? 위대하신 신관 나리, 죄송하지만 집시는 원래 고왕국의 주인이었어요. 기억하나요? 당신네들 민족이 상륙해서 나라를 건국하고 주권을 빼앗기 전부터 여긴 우리의 땅이었다고요. 덕택에 우리 족속의 공동체는 그 잘난 ‘신전’보다 훨씬 방대한 지식과 역사를 자랑하죠.”

“이 고얀…!”

신관 하나가 역정을 내며 구더기를 향해 이단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자신의 일생을 바쳐 고대룡에 대한 문건과 신비한 신앙에 관해 연구한 사람이라 반발이 컸다. 다른 사람들도 황당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를 곱씹느라 말을 잊었을 뿐, 저 신관과 뜻을 같이하는 듯 보였다. 헛소리를 나무라는 따가운 눈총이 구더기에게 날아들었다. 이런 반응을 능히 예상했다는 듯이 구더기가 혀 차는 소리를 낸다.

“인정하기 싫을 뿐이겠지. 그 정도 공부한 사람이면 이미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 의식이 도롱뇽 마수의 피 따위에 움직일 리 없다는 걸 말이에요.”

신관이 못마땅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면서도 힘없이 입을 다문다.

“하…. 하하.”

니카와 몇 합 주고 받은 대공이 헛웃음을 지었다. 숨소리가 가쁘게 들렸다. 검 끝이 니카가 아닌 구더기를 향해 겨누어진다.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한 마디만 더 헛소리를 지껄이면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듯이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그래서, 삼십 년 전에 고대룡이 잠에서 깨어났었다고요? 그게 저 집시가 주장하는 바인가요?”

“대공 나리. 주장이 아니에요. 그래요, 실제로 깨어났었죠.”

“이거 봐. 이것 보라고! 제 거짓말에 결국은 발이 걸려 넘어지는군. 대공 전하, 심려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방금 저년이 지껄이는 거짓말의 맹점을 찾아냈으니 말입니다.”

신관이 갈피를 잡았다는 듯이 일어나 구더기를 삿대질한다. 반면에 구더기는 일말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동면에서 깨어난 고대룡은 자는 동안 축적된 힘을 발산하게 되지. 화룡 체첼드롭이 수천 년 간 쌓은 힘을 뿜어냈다면 인근 도시는 불바다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그 정도는 예상했어요. …그래서 오랜 세월 준비해 왔죠. 제물을 바쳤어요. 삼십 년 전 그 날.”

니카는 여태 들은 말이 다 괴상하기만 하다. 자신이 용인이 아니라 눈앞의 저 드라코슨들과 다름없는 진짜 ‘용’의 자식이라고?

‘헛소리.’

아주 어릴 적에는 그런 상상 속에서 살아왔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현실 앞에 나동그라질 때마다 그런 볼품없는 공상은 니카의 아픔을 더 극적으로 만드는 장치에 불과했다. 꿈에서 깨어난 지는 오래되었다. 왕자가 거인을 사랑하게 된다는 식의 허튼 행운은 소설 속 세계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진지해지기 위해서 억지로 표정을 굳혔으나 입술은 이미 살짝이 떨리며 숨소리로 가장한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푸흐…. 그 웃음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고 만 것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이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이 좋으나 싫으나 니카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고 있는 탓이었다.

구더기는 니카를 힘주어 바라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다 비웃고 만다고 해도, 니카만큼은 들어줘야 한다는 듯이….

니카는 그녀가 이 얘기를 당장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쌍한 용인을 혼자 내버려 뒀으면, 하고. 일생 니카가 겪은 적 없던 형태의 관심으로 가득 찬 무쇠솥에 던져넣을 게 아니라. 그냥 늪에 빠져 진흙투성이가 된 그대로 내버려 둬 줬으면, 하고.

“막쉬롭의 부족은 체첼드롭이 깨어나리라 예정되었던 순간에 제물을 바쳤습니다. 용이 인간제물을 받아들여서 제물의 몸 안에 여분의 마력을 쑤셔 넣으면, 비록 그 제물은 고통을 감당하다가 몸이 터져서 죽어버리지만 도시는 지킬 수 있죠.”

이야기는 더 남아있었다. 인신공양과 고대룡의 아이 사이의 연결고리가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구더기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돌조각과 고대룡의 화석이 소란을 피우며 이 공간을 지탱하는 돌기둥을 박살 내고 다니는 일촉즉발의 순간에도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기는커녕 하나같이 쥐죽은 듯한 침묵을 지켰다. 신관들이 목소리를 빽빽 내지르며 이야기를 끊지 않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이미 승기가 기울었음을 깨달은 구더기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체첼드롭은 다른 방법을 택했더군요. 인간제물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생산하게 했어요. 고대룡이 인간에게 아이를 품게 만드는 방법은 알려진 게 없지만, 확실한 건 그 이종족간의 재생산만으로도 많은 힘을 소모하는 모양입니다. 제물은 니카 경을 잉태했고, 덕택에 체첼드롭은 남아도는 재앙 같은 힘을 처리했겠죠.”

구더기는 이다음에 말을 덧붙일까 말까 썩 시간을 들여 고민했다.

“…막쉬롭은 나리의 존재를 깨달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당신을 왕위에 앉히고 싶어 했어요. 이유야 많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리의 어머니를 정말 사랑했거든요.”

“어머니, 라고…?”

“멘사야.”

멘사야? 이상한 이름이다. 괴상한 발음으로 미루어 아마 왕국민들 사이에서는 낯선 집시식 이름일 것이다. 니카는 소리 없이 입술로 그 이름을 덧그린다. 구더기의 목소리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게 나리 어머니 이름이에요.”

아. 니카는 탄식처럼 소리를 냈다. 무거운 한숨이 워낙 벌벌 떨며 목구멍 밖으로 뛰쳐나오다가 성대를 울리면서 낸 소리였다. 니카는 멘사야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한참이나 굴렸다.

의식의 수면에 잠겨 모습을 감췄던 기억이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으킨 썰물에 점차 수면 위로 올라온다. 니카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존재였을 때 태중에서부터 들었던 어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대개는 저주하는 말이었고 가끔은 기도 소리이기도 했다.

기도와 저주의 차이가 뭘까? 니카는 생각한다. 아마 격식에 맞는 우아한 단어를 사용하는가, 아닌가의 차이이리라 싶었다. 어미가 바친 기도에 담긴 악의는 저주의 말과 하등 다른 바가 없었으니까.

‘태중의 존재를 위대하게 하시고.’

입버릇 같던 어미의 기도를 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중에서 비인간적인 속도로 나날이 성숙해 가던 니카 만큼은 분명히 그 기도를 들었다. 애초에 신이 아닌 니카에게 보내던 기도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위대함으로 하여금, 이 년의 눈물에 걸맞도록 불행하게 하옵소서.’

니카는 숨을 들이켠다.

어깨에 무거운 추가 들러붙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시선과 기대감과 경멸이 모두 저마다 무게감을 갖고 니카의 맨 살갗을 가렵게 건드렸다.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수리 왕녀의 홉떠진 눈과 입술을 틀어막은 고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놀라서 파랗게 질리고 아래턱을 뚝 떨군 제란딘 경의 표정도 스치듯이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선 구더기의 간절한 눈빛.

니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젓는다. 그럴 리 없다. 집시들은 다 사기꾼이다. 구더기가 또 특유의 말솜씨를 발휘해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는 게 뻔하다. 모두들 속아 넘어가려는 것일까? 왜 저 신관들은 붉으락푸르락해지면서 점점 무릎을 꿇기 시작한단 말인가?

“오, 신이시여.”

거대한 경이를 마주한 인간이 압도감을 느껴 하는 고백처럼, 누군가 신을 찾았다. 니카는 관객 앞에서 단박에 신과도 같은 존재로 둔갑한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변하지 않았는데, 추악한 비늘과 날 선 동공까지, 털끝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니카의 모든 수식어를 지우고 새로운 호칭을 덧씌운다.

“용의 자손.”

헬린 힐벤을 칭송할 때 쓰이던 호칭이 니카에게로 옮아붙는다. 소름이 쫙 끼쳤다. 아주 많은 동글동글한 눈들이 부담스러운 빛깔로 번득이며 일제히 니카를 향한다. 한 발짝 걸음을 물리면 그 걸음에 달라붙고, 눈썹을 살짝 찌푸리면 얼굴 위를 기어 다닌다.

오들오들 몸이 떨린다. 니카는 불현듯 바란 탈타미오를 생각했다. 단 한 순간도 그를 미천한 용인이라 내친 적이 없던 청년을 떠올렸다. 아마 니카가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잡한 존재일 때도 기댈 가슴을 내어줬던 남자이니, 니카가 돌연 가장 위대한 존재로 탈바꿈했다 해서 저 치들처럼 단박에 태도를 뒤집지는 않으리라. 다 집어치우고 그 품 안에 들러붙어서 이 들썩이는 숨소리가 진정될 때까지만 귀를 틀어막고 버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다급히 바란을 눕혀둔 석벽을 향해 발을 뗐던 것이다.

그런 니카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니카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검을 쥐지 않은 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고 신음하듯 말했다.

“잠깐 비, 비켜….”

“얌전히 들어줬더니 개소리가 지나치잖아. 정말, 이 개미만도 못한 놈들 지껄이는 게… 어쩌면 하나같이…. 너무 우스워서….”

헬린 힐벤은 미친 사람 같았다. 원래도 미친놈이라고 정평이 나 있긴 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존재가 무너진 것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었던 적은 니카가 아는 한 없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흉악하게 굴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인간들과 구분되는 우월한 존재라는 자존감이 바탕이 되기 때문이었다. 니카의 검과 대공이 휘두른 검이 부딪힌다. 헬린은 그 나름대로 악을 쓰고 덤비지만 니카는 이상하게도 두통 가운데 힘없이 팔을 휘적거리는 것만으로 남자를 떨쳐내는데 성공했다.

“으윽!”

검을 놓친 힐벤 대공의 손바닥이 다 찢어져서 피로 물들었다. 이상했다. 니카는 자신의 손을 멍청하게 내려다본다. 그렇게 큰 힘을 준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타격을 입혔지? 마음에 짚이는 데가 있다. 무너진 동굴을 맨손으로 무너뜨리게 해주던 알 수 없는 그 힘. 그 힘이 다시 한번 발휘된 모양이다. 바란을 구해내려고 간절해서 죽을 것 같았을 때 마법처럼 솟아난 이 힘의 정체가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내가 고대룡의 피를 이었기 때문인가?’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해진다.

‘내가 원한 적도 없는 이 빌어먹을 피를 이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얼굴이 검은 비늘로 얽은 채 태어나, 썩은 생선대가리 위로 버려져서 썩은 괴물이라는 이름을 받고, 신관에게 몽둥이찜질을 받으며 흙먼지를 긁어모아 주린 배를 때우고, 애정에 목말라하며 자라야 했는가?’

이쯤 되면 어미의 기원이 그대로 이어진 셈이다. 니카는 그의 위대함으로 말미암아 불행했다. 이런 힘 따위를 원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는데. 절망에 잠겨 무거운 숨을 몰아쉬는 니카의 뺨에 거센 주먹이 꽂힌다. 검을 놓치고 나서도 힐벤의 사나운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과는 달리 매섭기 그지없는 파공음을 냈다.

니카는 주먹을 맞고 휘청이다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맞은 곳의 통증은 없었다.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는 힘에 관해 골몰하고 인정할수록 점차 그의 몸은 기민하고 강해져만 갔다. 자신의 잠재력이 느껴졌다. 몸이 거대한 물항아리이고 그가 가진 능력이 그 안에 든 물이라면, 여태 그 안에 가득히 담긴 열 길 물속을 모르고서 맨 위의 뜬물만 살그머니 걷어내어 사용했던 셈이다. 헛웃음이 났다. 뭐야.

‘평생토록 멸시당하고 얻은 게 고작 이건가?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힘, 혈통, 명예, 그런 것들?’

특별해지고 싶다던 어린 니카의 욕망은 이런 무거운 왕관을 겨냥한 게 아니었다. 니카는 그저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경멸 대신 온화한 웃음으로 니카의 뾰족한 동공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특별하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뱃속을 뜨겁게 만드는 오롯한 애정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고작 이거? 날 바라보는 저 놀란 눈빛들, 흥분한 신관들의 경배, 앙살라테 드라코슨의 모멸감, 열등감에 돌아버린 헬린 힐벤 같은 거?’

반대쪽 뺨에 주먹이 날아온다. 아무런 저항 없이 얻어맞았다. 니카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돌바닥에 누워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기사들이 검을 뽑고 전방으로 나서서 움직이는 고대룡 화석을 부러뜨려 저지하는 소음, 신관들의 열띤 토론, 천천히 붕괴하기 시작한 ‘용들의 무덤’에서 빠져나가는 분주한 발소리 같은 것들이 귀청 시끄럽게 울렸다. 그리고 미친놈처럼 들뜨고 벌겋게 익은 헬린 힐벤의 얼굴이 시야에 그늘을 드리운다.

“너 같은 게, 너 같은 게, 너 같은 잡종 새끼가…!”

주먹은 솜방망이처럼만 느껴졌다. 아무런 방어 없이 몸을 내맡기고 있는데도 제대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니카는 우스워서 부스스 웃음을 내걸었다. 그런 면이 헬린 힐벤의 머리를 핑글 돌게 만들었다. 열이 뻗친 대공이 무얼 잘난 듯이 웃느냐며 열등감으로 차오른 비명을 내질렀다. 명치를 두드려 패고 니카의 몸 위로 올라와서 머리통을 마구잡이로 꺾어댄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속은 차분히 비어만 갔다. 누구를 위해 싸워 왔는지, 왕좌에 얽힌 복잡한 알력관계나 내전 같은 것도 하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느껴졌다. 빛이 꺼진 니카의 눈동자에는 어떻게든 니카를 위협하려고 갖은 노력을 거듭하는 헬린 힐벤의 모습만이 왔다 갔다 비쳤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헬린 힐벤의 자신만만한 경갑을 뚫고 날붙이가 관통하며 머리를 디민다. 니카는 관조적인 눈으로 그 상처부위를 흘겨보았다. 눈을 회동그래 뜬 힐벤은 낮은 소리로 욕설을 읊으며 상처 부위에서 울컥 솟은 핏줄기를 훔쳐낸다. 분노에 가득 차 뒤를 돈다.

“바란.”

니카는 입술을 달싹였다. 자신이 그 이름을 발음했음을 제 두 귀를 통해 똑똑히 전해 듣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래, 대공의 등 뒤에는 제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부상을 입은 바란이 서 있었다. 찌그러진 두 눈을 불안하게 치뜨고, 가쁜 숨으로 어깨뼈를 위아래로 떨어대면서, 쉭쉭 소리를 낸다.

* * *

바란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니카가 가진 진실된 가치를 탐구하고 고민해 본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바란은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집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설득되고, 납득했다가, 종내에는 동조했다. 니카는 물론 그럴 수 있는 존재였다. 선하고 아름답고 특별했다. 강하고 순수하기까지 했다. 바란이 연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단어들은 니카와 잘 어울렸다.

“당신은 마수 따위가 아니라….”

그런데 이 선언이 있고 나서 니카와 자신 사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지게 될까? 짧은 순간 바란을 지배한 생각은 이토록 시시한 것이었다. 니카의 인생이 송두리째 양지로 이끌려 나오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조차, 바란은 앞으로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얼마나 대단한 입지에 설 수 있는지 하염없이 계산하고 재어보는 중이었다.

“화룡 체첼드롭의 아들이에요!”

어떡하면 좋지. 바란은 눈을 감고서 멍청히 생각했다.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저 몽롱한 머리가 온갖 불안감으로 뒤덮인다. 니카가 사람들의 경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이제는 더 이상 구원자 노릇을 일삼으며 니카의 애정을 독점할 수 없을 텐데.

수리 왕녀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오래토록 바쳐왔던 것도, 바란에게 사랑한다 말했던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니카는 사랑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다정하게 기름칠한 말에 쉬이 이끌린다. 바란이 아니라도 그에게 특별하다 속삭여주는 사람이면 누구든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니카에게 특별하다고 말해주기 시작하겠지. 왜냐하면, 니카가 정말로 특별하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으니까. 니카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정말로 사랑스러운 이를 찾아내면 어떡하지? 장밋빛 뺨과 굽실대는 붉은 머리를 늘어뜨린 아름다운 왕녀가 니카를 상냥하게 대하기 시작하면, 바란에게 기회가 주어지기나 할까?

바란이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은 용인인 니카를 그 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단 하나였다. 그마저도 비교우위를 잃고 나면 니카가 구태여 같은 남자인 데다 악명 높은 ‘잔악후작’에게 끌릴 이유는 없었다.

알량한 동정심에 기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나마도 지속 가능한 전략은 못 되었다. 무엇보다 니카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지워 자신의 행복과는 반대되는 선택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바란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단순히 가지고 싶었던 게 아니라,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단 말이야.’

바란은 살그머니 눈을 뜬다. 많은 인간들이 저마다 할 일에 골몰한 소란 속에서 홀로 멈춰 있는 것 같은 니카를 보았다. 니카는 웃고 있지 않았다. 차라리 우는 것처럼 보였다. 행복해야 마땅한 위대한 서사의 주인공이 무대 위가 어색한 어린 소년처럼 허공을 눈으로 헤집고 있다. 그 어깨가 어쩐지 가녀려 보여서 바란은 마음이 내려앉았다.

헬린 힐벤이 광인처럼 덤벼들어 니카를 바닥에 때려눕혔다. 바란의 몸이 튀어 올랐다. 니카가 얼른 바닥을 박차고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바란에게는 니카가 힘없이 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일어나. 뭐하는 거야. 니카….’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니카는 두 다리로 바닥을 딛는 대신 넘어진 그대로 바닥에 뻗어서 무방비하게 헬린 힐벤의 공격을 맞아주었다. 광대뼈가 내려앉는 매서운 소리가 나고 헬린의 찢어진 손에서 흐르는지, 아니면 니카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피가 시끄럽게 묻어나온다. 힐벤의 주먹이 붉게 물들수록 바란의 낯에서 핏기가 가셔 없어졌다.

힐벤이 놓친 검은 바란의 발치까지 굴러와 있었다. 바란은 꼭 떨어져 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운 팔을 꿈적이며 바닥을 더듬었다. 멍청하게 날을 건드려서 손을 한번 크게 베였다. 아랑곳할 틈은 없었다. 서둘러 검을 돌려 손잡이를 잡고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끔찍한 고통이 발을 타고 올라와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으흐윽…!”

입술을 꼭 깨물고 신음했다. 바란은 기어가다시피 대공에게로 다가갔다. 시끄러운 기척을 냈음에도 주위가 워낙 소란스러워서였는지, 아니면 본인이 지나치게 흥분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대공은 바란에게 주목하지 않은 채 부스러기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느라 바빴다. 집중하지 않는 상대의 뒤편에 칼을 꽂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바란이 처음 만났을 적의 헬린 힐벤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상처가 투명히 드러나 보이는 야수였다. 대공은 얄렌의 성녀가 겉핥기식으로 가르친 결벽증투성이 양심과 타고난 괴짜기질 사이의 모순에서 고통스러워 했다. 그의 메마른 눈동자를 보는 순간, 바란은 대공의 결핍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저는 전하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얼간이들과 다릅니다.’

‘전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셔도 됩니다.’

그다음은 쉬웠다. 대공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그저 달콤한 혀를 놀려 가장 바깥쪽에 흐르는 진물을 핥아주면 되었다. 대공 안에서 상처가 곪아 고름투성이로 썩어가든 말든, 겉으로 봤을 때는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봉합된 상처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대공의 불편한 양심을 없앤 대가로 그가 내켜 할 때마다 두들겨 맞는 모래주머니 신세가 되어야 했지만, 목숨만 붙여준다면 바란은 기꺼이 맞아줄 용의가 있었다. 바란은 요령 좋게 맹목적으로 대공의 편을 들고 옆을 지켰다. 가만 지켜보고 긍정하고 동조해주었다….

“하아, 하아, 하아….”

바란의 칼끝은 대공의 어깨를 뚫고 들어가 있었다. 정말? 이렇게 쉽게? 바란은 꿈을 꾸는 듯이 몽롱하고 믿기지가 않는다.

널리 퍼진 소문에 의하면 대공은 인간과 달리 가죽이 너무 두꺼워서 어지간한 철검은 튕겨낸다고 했다. 용혈을 짙게 타고난 헬린 힐벤 대공에게 사람들은 이처럼 우상화로 범벅된 소문을 내며 지레 겁을 먹곤 했다.

우스운 건 헬린 힐벤 역시도 그런 말들을 스스로 믿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지껄이는 것처럼 자신은 그 어느 검에도 끄떡없고, 어떤 명장 앞에도 무릎 꿇지 않는 불패의 신인 것처럼 포장했다. 자기최면에 가까웠다. 대공은 배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연극배우 같았다.

그래서일까? 

심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린 힐벤은 비명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헝클어진 금발로 뒤덮인 그의 뒤통수는 좀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뻣뻣하게 버틴다. 바란은 벌거스름한 남자의 뒷목과 또 옆으로 비스듬히 보이는 뺨 근육이 움찔 경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란.”

니카가 바싹 마른 음성으로 바란을 불러 일깨운다. 현실감이 없다. 몽롱한 눈을 두어 차례 깜빡였다. 그럴싸한 대답이랄 것 대신에 바란은 그저 물기로 젖은 침음성을 흘렸다. 이어진 거친 들숨소리 역시도 습기로 가득해서 끈적거렸다. 

“흐….”

타인의 무른 살을 가르고 날붙이를 박아 넣는 감각이 손안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바란은 그저 멍하니 그 느낌을 되풀이해 떠올렸다.

검이 꽂힌 상처에서는 피가 생각처럼 많이 흐르지 않았다. 검신이 그 자체로 지혈을 돕는 까닭이었다. 대공의 어깻죽지를 관통해 반대편에서 삐죽 튀어나온 검 끝으로 핏방울이 조용히 굴러떨어졌다. 바란은 덜덜 떠는 손을 검 손잡이에서 떼어냈다.

이제 곧 자신을 돌아보면서 저주와 욕설을 쏟아내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바란은 수년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그를 보좌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머릿속을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얼굴을 하고 헬린 힐벤이 천천히 바란을 돌아보았다. 마음속에 단단히 굳혀두었던 믿음이 셀 수 없이 많은 파편으로 부서져 버린 것처럼 상처받은 표정으로. 상처라니? 바란은 둘 사이에 대단한 신뢰라도 있었던 것처럼 구는 대공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후작, 죽지 않았군요.”

그 말이 전부였다. 배신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태연했다. 바란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으리라 진작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한 투였다. 이 뒤에 이어서 특기인 얄미운 말을 덧붙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 밀려오는 고통을 미처 견디지 못한 대공은 그 이상 이죽거리기 전에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고 말았다.

작은 돌조각이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 파고든다. 바란은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는 기분으로 니카를 쳐다보았다. 니카가 입을 반쯤 벌리고 동공을 확 좁힌다.

“바란, 조심해!”

그러나 공허한 외침만으로 경각심을 일깨우기엔 너무 늦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머리채가 잡혀 몸이 끌려간다. 두피가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호소하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뜨니 공포에 질린 니카의 얼굴이 저만치로 멀어져 있었다. 순전히 악력만으로 사람 목을 태연히 꺾을 수 있는 대공의 손아귀가 바란의 목을 끌어안듯이 쥐었다.

당장은 참을만했다. 그런데 점차 악력이 강해졌다. 숨이 막혀서 몸부림을 치면 관통상으로 피칠갑이 된 어깨를 씰룩이며 검 끝으로 바란을 갉작갉작 긁어댔다. 잘 조준해서 처박으면 이대로 바란의 두개골까지 한 검에 꼬치구이처럼 겹겹이 꿰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턱께와 목선에 더운 숨결이 닿는다. 목소리를 내기가 힘에 부쳐서 그런지 대공은 어울리지 않게 힘없이 중얼거렸다.

“사난타에는…. 죽으라고 보냈던 거예요. 수비구역을 남문으로 정해준 것도…. 폭약이 터지면 용인기사와 함께 죽여버리려고 그런 거고요. 알고 있었죠?”

“…….”

“그런데 내 실수예요. 잘못 생각했어요.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내 손으로 직접 목을 잘라내야 했어요.”

바란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주 천천히 긴장감으로 가득 찬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대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니카가 구해주길 기대할 수 있을까 잠시 머릿속으로 거리를 재어보았다. 니카는 그를 엄중히 경계하는 대공 때문에 좀체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그가 전속력으로 달려들더라도 대공이 마음먹고 바란의 머리통에 단번에 검날을 박으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멍청하게 망설이는 게 아니었는데.”

씁쓸한 기운이 배어 나오는 혼잣말이었다.

* * *

사난타에 선봉장으로 세웠을 때는 괜찮았다.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전하.”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헛소리 나불대지 말고 보고나 계속하죠.”

수발을 드는 달틴 사사바란이 자꾸만 그에게 주제넘은 오지랖을 부리며 걱정하긴 했어도, 헬린 힐벤은 객관적으로 괜찮은 상태였다. 그때는 버틸 만했다.

이따금 피로할 때, 바란 탈타미오가 그에게 쓸데없이 ‘고생 많으셨겠다.’는 심심한 안부인사를 건네는 유일한 인간이었음을 상기하는 습관만 제외하면, 별로 후작의 존재를 떠올릴 기회조차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 많은 전투를 겪고 왕국을 승리로 이끌어 오시다니…. 여태, 어,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전하.’

그나마 저 말마저도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바란 탈타미오가 스물도 되지 않았을 때 아랫사람으로 받아달라며 청하러 온 날 어색한 분위기를 못 이기고 아무렇게나 지껄인 소리였다. 그게 아니라면 환심을 사려고 상냥한 척 꾸며낸 말이었을 것이다.

첫인상 그대로 애송이 얼간이 같은 언사였고, 대공은 듣자마자 별종처럼 웃었던 기억이 있었다. 하찮은 존재가 그에게 공감하려 하는 모습이 우스웠고, 또 저가 열등하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도 웃겼다. 거기에 당장 주먹을 박을 게 아니라 마주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우스웠다.

바란을 사난타의 지휘관으로 임명함으로써 그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쯤은, 헬린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게 목적이었다. 적장과 후작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발각된 이상 괜히 위험한 싹을 안고 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레널드 백작 말마따나 적당히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위험한 전장에 내다 버리면 왕자군이 알아서 처리할 터였다. 그는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되고, 의심이 가는 장기말은 폐기처분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잣자후로 끌려가 이미 죽었어야 할 후작이 돌연 눈앞에 툭 튀어나왔을 때 언짢고 얼떨떨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이미 주군을 한번 저버린 전과가 있는 놈이 주제를 모르고 그 이전과 동일한 신임을 받으려고 애쓰다니, 염치가 있기나 한 걸까? 헬린은 그 뻔뻔한 낯짝을 보고 화가 치밀어, 그 자리에서 이번에야말로 기강을 바로 세우려 했었다. 머리를 걷어차고, 마음이 내킬 때까지 비명소리와 피칠갑을 즐긴 다음에 서서히 목을 그어버려야지 생각했는데.

‘나의 전하.’

속에 능구렁이를 열 마리쯤 품은 것이 분명한 비겁한 개새끼의 입술 놀림에 그만, 알면서도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미련하기 그지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헬린 힐벤은 저 여우처럼 샐샐대는 낯짝과 이상한 호칭을 듣고 나서부터 바란을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겠다는 온건한 생각을 잠깐 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몰라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꼼짝 못 하게 포박해두면…. 그냥, 아까운 얼굴이니까. 그의 손에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도 샐쭉 웃어주는 낯짝을 벌써 잃어버리긴 아쉬우니까.

그러나 이 결정은 다시금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었다. 전부터 변덕스럽기로는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성미였다. 굳이 변명하자면 하잘것없는 변덕 때문은 아니었다. 정의감이나 변별력이 되살아났던 것도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개살구 같은 도덕입니까?’

고초를 겪어 홀쭉해진 후작의 뺨을 내려다보던 중이었다. 너울에 휩쓸려 익사하는 것 같은 감상이 찾아왔다. 말이 막히고, 그다음으로는 숨이 막혔다. 탈타미오 후작이 그에게 생각보다 끔찍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깨닫고 나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던 헬린은 손끝이 얼어붙는 경험을 했다.

살려두어서는 안 되겠구나 깨달았다. 두고 볼 것도 없이 걸림돌이 될 테니까. 헬린 힐벤이라는 남자를 존재를 스스로도 예측할 수 없게 바꿔놓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멍청히 사지에 밀어 넣고 운명에게 맡길 게 아니라, 보이는 곳에서 확실히 목을 베어 사살해야지, 뿌리를 뽑아야지 생각은 했는데….

‘자꾸 같은 실수를 하는군.’

끝내는, 죽이지 못했다. 죽기 직전까지 뱃가죽을 헤집고 애써 꿰맨 살갗을 다 터트리거나 괴롭히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는데 이상했다. 정작 마음먹고 죽이려니까 두려웠다. 후작이 다시 저 새파란 눈을 못 깜빡이게 될까 봐.

“바란을 풀어줘!”

“…살다 살다 이젠 천출한테도 명령을 듣다니.”

용인의 벼락같은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다. 꽤 화가 난 모양인데, 제깟 게 화를 내봤자 평생 유일하게 가져 본 영예를 굴러들어온 돌에게 빼앗기기 직전인 헬린 힐벤에 비할 바 있을까 싶었다.

헬린은 팔을 뒤로 돌려 제 몸에 꽂힌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심호흡을 하고, 잠깐 텀을 두었다가, 단번에 뽑아냈다. 피가 울컥대며 뿜어져 나왔고 상처는 겉으로만 봐도 너덜거렸다. 입술을 악물더니 끝내 참아내지 못한 고통스러운 신음을 살짝 흘린다.

“윽… 결정, 해요, 용인! 스스로 목 따고 뒤지든가, 아니면 이 걸레가 뒤지는 거 손 놓고 구경하든가.”

극단적인 조건으로 협박을 일삼으면서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다. 용인에게 있어 바란이 갖는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어렴풋이 짐작한 까닭이었다. 용인기사는 정말 세상에 그런 멍청이가 둘 없다 싶을 정도로 간곡하게 굴었다. 눈썹 사이가 엉망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헬린은 설마 자신도 탈타미오 후작을 위해서 저런 표정까지 짓는 얼간이 수준까지 추락한 건 아니겠지, 생각했다. 불안함을 감추려고 과장되게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진작 내 것이 되었어야 했을 자리예요. 굴러들어온 병신이 주제 모르고 탐낼 만한 게 아니라-”

“그 손 떼.”

용인이 말 허리를 끊고 으르렁거리며 명령했다. 비웃고 한 발짝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데 돌연히 현기증이 치밀어 헬린 힐벤을 한바탕 뒤흔들었다. 평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가 붙잡는 건지 밀치는 건지 모르게 바란에게 하중을 기댔다. 처음에는 어깨의 상처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운가 싶었다. 강철로 된 몸이라 칭송을 받을 정도로 맷집 하나는 강한 대공이지만 무방비로 당한 관통상은 웃어넘길 상처는 못 되었다.

비틀거리는 사이에 용인이 거리를 좁히며 쇄도했다. 천둥소리 같은 음성이 우르르 쾅쾅 머릿속을 시끄럽게 때렸다. 눈앞이 희뜩희뜩 껌뻑거렸다.

“손 떼라고!”

“…으, 윽! 무슨 짓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들짐승처럼 가르릉거리는 용인의 목소리를 들으니,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공포가 샘솟아 대공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등줄기를 타고 불꽃이 흐르는 듯 화한 감각이 느껴졌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꼼짝하지 않았다. 공기가 뾰족한 바늘로 이뤄진 것처럼 털이 곤두서고 살갗이 죄다 따끔거렸다.

* * *

바란은 화들짝 눈을 감았다 떴다. 천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꽤나 묵직한 돌조각이 발치에 소란스럽게 떨어졌다.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면 그대로 두개골이 깨져 고꾸라졌겠지.

침을 꼴딱 삼켰다. 목젖이 위아래로 살그머니 떨리는 박자를 따라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헬린 힐벤이 목줄기에다가 예리한 날붙이를 밀착해둔 탓이다. 설마 자신을 인질 삼아서 니카를 겁박하기 시작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공이 다짜고짜 엉덩이를 움켜쥐면서 니카에게 뒤를 대줬느냐고 물었을 때 진작 눈치를 챘어야 하는 건데. 바란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었군. 허접스런 변명에 속아 넘어간 적 없었던 거야. 그래서 계속 날 죽이려고 했던 거고….’

니카와 대거리하고 있는 대공의 기색을 살폈다. 희끗한 속눈썹 밑에 숨은 눈알이 섬짓할 정도의 분노로 번득거렸다. 정면에서 대공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몸을 일으키는 니카의 표정이라고 태연하지는 않다. 좀 전에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충격이라고는 전부 겪어두고도, 그 모든 일이 당장 눈앞에서 위기에 처한 바란에 비하자면 하잘것없다는 양 핏기 하나 없이 파리하다.

바란은 아연하다 못해 송구스러워질 지경이다. 살인마의 팔 안에서 칼날을 가까이 들이대고 있음에도, 니카의 동요를 마주하자 그저 꿈꾸는 듯이 몽롱한 기쁨이 앞선다.

“손 떼.”

들끓는 분노를 담아낸 니카의 목소리는 어딘지 이상하게 들렸다. 단순히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솜털까지 바짝 곤두서고, 소름이 쫙 돋았다. 바란은 니카의 목소리를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런 식으로 으르렁거리고 깊숙이 잠긴 목소리는 낯설었다. 둥근 천정을 가진 ‘용들의 무덤’이 워낙 좋은 울림통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목소리가 이 정도까지 변조될 수 있나?

변화를 보인 건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니카의 눈 안에 뾰족한 동공이 유독 칼자국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홀연한 바람은 또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르겠다. 니카의 검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펄럭거리더니 그 밑에 늘 감춰져 있던 왼쪽 얼굴의 검은 비늘을 드러냈다. 비늘은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바짝 일어서 있었다.

여기에 남아있으면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용혈들의 싸움을 관망하고자 자리에 남은 신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니카가 뿜어내는 흉흉한 기세를 관찰하며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고대룡의 증거….”

“그러고 보면 기록에 고대룡의 모습을 일부 가지고 태어나는 용혈들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히 나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고왕국 시절의 3대 왕은 용의 발톱을 가지고 태어났었다고요.”

“그렇다는 건, 저 비늘이야말로 저 기사, 아니, 저분이 용혈을 이었다는….”

니카가 비늘을 드러내 보이면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놓고 낯짝을 찡그리곤 했었다. 편견이 없다던 레이먼드도 그랬고, 니카가 썩 아끼는 것처럼 보이던 마구간 꼬마, 이름이 빈스였던가… 그 애조차도 처음에 니카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라 찌그러졌었다.

그런데 고대룡 혼혈이라는 간판만 바꿔 달았더니 손바닥 뒤집듯이 반응이 바뀌었다. 니카를 용인으로 간주할 때와는 사뭇 다른 경탄의 시선이 고인다. 어이가 없었다. 간사한 인간들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설을 퍼부어주고 싶었다. 아마 니카는 그렇게 하지 않을 테니까, 대신 그리 해주고 싶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정의로운 가면을 내려놓고, 바란은 쓴웃음을 짓는다.

‘비늘 따위에 아랑곳없이 니카를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라고 소리치고 싶어. 그래. 결국엔 그런 심리야.’

“그 손 떼라고!”

니카가 제 영역을 침범당한 야수처럼 분개한 기색으로 대공에게 일갈했다. 그 대공조차도 몸을 움찔 떨었다.

‘…이 압박감은 대체 뭐지?’

감히 입술을 떼기가 무서워지는 두려움이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바란을 붙잡은 대공 역시도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바란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기세에 대항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니카의 적의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었으니까. 바란을 둘러 안은 대공의 단단한 팔뚝이 뻣뻣하게 굳어서 경련했다. 팔뚝에 돋아난 힘줄을 눈여겨보았다.

바란은 폐부를 짓누르는 이 정체불명의 압박감에 그런대로 대항할 수 있었던 반면에 대공이 맥을 못 추고 비틀거렸다. 강대함을 뽐내던 진짜배기 드라코슨이 말 한마디에 빌빌대는 꼴이라니.

“으….”

어깨가 뚫릴 때조차 흐느끼지 않았던 남자에게서 흐릿한 신음이 들렸다. 귓가에 이 신음소리가 잡히고, 자신에게로 대공의 하중이 얼핏 쏟아졌다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바란은 대공의 손아귀를 벗어날 유일한 기회가 지금임을 깨달았다.

항복의 표시로 공중에 들어 올렸던 손 하나를 벼락같이 움직여 검을 붙잡은 대공의 손 위로 얹었다.

“건방진 것.”

인질이 일으킨 반란을 재빠르게 감지한 헬린 힐벤은 검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이 손에 악력을 더했다. 니카의 목소리나 기세 따위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대공은 바란에게 반항을 허락할 만큼 약해져 있지는 않았다. 니카에게 유효한 인질만 아니었더라면 괘씸해서 이미 목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 목을 자르려는 건가? 공격을 준비하는 듯, 대공의 손등에 핏줄이 바짝 돋아났다.

‘젠장, 너무 쉽게 생각했나….’

바란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다. 기지를 발휘했다고도 표현할 수 있었다. 검을 놓고 대공의 품 안에서 반 바퀴 뱅글 돌아 얼굴을 마주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오래 얼굴을 알아 왔으니, 그 안에 미운 정이라도 싹트고 있었던 걸까. 바란으로서는 대공의 심내를 정확히 짐작할 수 없다. 그래도 살의로 일그러져 있던 사나운 표정이 잠시간 망설였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전하.”

망설임은 잠시였다. 바란은 조용히 대공을 부르며 그가 좀 전에 검으로 바람구멍을 뚫어 놓은 어깨의 상처를 있는 힘을 다해 헤집었다. 마치 언젠가 바란의 뱃가죽이 겨우 꿰매어 졌던 때 대공이 심술을 부려 그 실밥을 뜯어내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피와 떨어져나온 살점이 너덜거리며 갑옷 표면이나 섬유에 진득하게 묻었다.

“아아악!”

그 대단하신 헬린 힐벤 전하도 예상 못한 고통에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다친 쪽 팔로 버릇처럼 검을 들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물론 조금 더 직접적인 원인은 바란을 보고 머뭇거리느라 멍청하게 틈을 내어준 것이겠지만.

시끄러운 금속 소리가 나자마자 니카의 매서운 검이 바란의 팔과 몸뚱이 사이 틈으로 찔러 들어가 대공의 몸뚱이를 관통했다. 어둑한 줄무늬로 얼룩덜룩한 대공의 푸른 홍채가 물기에 젖어 빛났다. 바란은 그 눈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대공은 참다못한 핏덩이를 입술 밖으로 쿨럭이며 뱉어내기까지 그저 그렇게 말없이 바란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바란은 대공에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 보였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대공의 아래에서 신임을 얻기 위해 견뎌야 했던 무수한 폭력의 굴레가 천천히 떠올랐다. 허망하게 뜨인 대공의 두 눈에다가 대고 무언가 통쾌한 말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지상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선사할 수 있는 말을, 최후의 고통을. 뭐라고 해야 하는지는 대공을 연구해 온 오랜 세월이 절로 알려주었다. 바란은 수줍게 웃었다.

“니카는.”

“…읏.”

“흐르는 피의 절반이 용의 것인데도 당신처럼 괴짜였던 적이 없답니다. 그는 피에 굶주린 마귀처럼 굴지도, 그 책임을 피에 돌리지도 않아요. 반면에 당신은 어땠던가요?”

허리에 둘러진 대공의 팔뚝이 천천히 떨어졌다. 대공은 바란의 마지막 말을 귀에 담으며 황망히 뒤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전하. 어떤 사람은 쓰레기로 태어나나 봐요, 그렇죠?”

억센 그의 팔 대신에, 보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그래, 정말이지 관절 마디가 울퉁불퉁하게 도드라진 손이 뻗어져 나와 바란의 몸을 받아낸다. 바란은 저항 없이 몸을 맡긴다. 익숙한 체취가 뒤편으로부터 바란을 보듬어 안았다. 너른 가슴의 굴곡이 느껴진다.

외로운 죽음이었다. 대공이 거느리고 있던 그 많은 혈통주의 지지자들은 이미 니카의 존재에 마음을 빼앗긴 까닭에 오래토록 따라 왔던 헬린 힐벤의 죽음에 주의를 기울여 원통해하지 않았다. 그저 놀라움에서 비롯된 탄식소리를 흘렸을 뿐이다. 바란이 힐벤을 조롱하려고 뱉은 두 마디 말이 그가 목숨이 끊어진 전후로 들은 말 중에 가장 상냥한 반응인지도 몰랐다.

그나마 대공을 마음 깊이 경외하고 따르던 달틴 사사바란이 허망한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그는 난리통에 결박에서 풀려난 기사 갤리거의 주먹질에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다시 이를 악물고 싸움에 임해야 했다.

바란은 생각했다. 그런데 저 싸움이 다 무슨 소용일까?

대공이 죽었는데, 내전이나 대공의 지지세력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바란은 앙살라테가 흙먼지를 떨어내며 몸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앙살라테는 마냥 기뻐 보이지만은 않는 매서운 눈초리로 바란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실은 바란을 뒤에서 부축하는 용인기사… 이 ‘혈통의 증명’ 의식에서 가장 적법한 후계자임을 입증한 니카를 바라보고 있던 것일 터다.

바란만 해도 얼굴이 닳을 것 같아 멋쩍어졌는데, 정작 니카는 저 앙살라테의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이 굴었다. 그래서 바란도 조금은 태연해지기로 했다. 난리통을 헤집던 바란의 눈길은 헬린 힐벤의 차갑게 식은 몸 위에서 멈추었다.

“죽었다, 바란.”

“으응.”

“괜찮은가?”

흙바닥에 먼지와 뒤엉켜 쓰러진 주검에게서 바란이 눈을 떼지 못하자, 니카는 살며시 바란의 눈 위를 너른 손바닥으로 덮었다.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바란은 위로받을 필요가 하등 없었다. 그래도 눈도 감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은 대공의 모습이 보기에 기꺼운 것은 아니어서 눈을 가려주는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나 괜찮아.”

바란은 조금 멋쩍게 말했다. 긴장의 끈을 놓고 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살점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손발 끝이 시려웠다. 도무지 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이 아래로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니카는 바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허리를 꽉 붙들어 안고 젖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귓가에 간질간질한 숨소리가 마음을 뭉클하게 건드렸다.

“너… 전부… 들었나?”

목적어는 하나도 챙기지 않은 반쪽짜리 질문이었는데, 바란은 그 의미를 똑똑히 알아들었다. 상황을 여기까지 꼬아 온 니카의 혈통과 관련한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는지 묻는 것이다. 바란이 정신을 잃은 채 잠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얼떨떨하게 얼어붙은 니카의 목소리는 기쁘기는커녕 침통하게까지 들렸다.

“들었어. 들었는데…. 니카!”

측면에서 괴상망측한 포효소리가 쏘아졌다. 바란은 화들짝 놀라 니카의 이름을 외쳤다. 니카가 어떻게 대항하기도 전에 슬개골과 늑골이 삐죽빼죽 들러붙어 만들어진 망치모양의 뼛덩어리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서는 니카의 몸뚱이를 거세게 후려갈겼다. 급습에 속절없이 당하면서도, 니카는 바란의 몸을 부드럽게 밀쳐내 공격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냈다.

“너…!”

“…난 걱정 마.”

그 말대로 니카는 말짱했다. 콩닥거리며 놀란 바란의 가슴이 민망해질 수준으로 아무렇지 않아 했다. 대공의 매서운 주먹질에도 아무런 영향 없이 몸을 건사했던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좀 전부터 전에 없던 흉흉한 기세를 전신에서 뿜어내는 니카는 마치 무패의 화신이나 불사신과 같이 화려한 칭호에 꼭 들어맞게 어울렸다. 니카가 고대룡 체첼드롭의 아이라고 목놓아 주장하던 집시의 말이 절로 납득이 갔다. 불가사의한 힘을 목도한 인간들은 전부 하릴없는 경외에 잠겼다.

“맙소사. 이게 전부 다 어떻게 된 거야….”

바란은 니카가 검으로 고대룡 화석뭉치의 이음새를 때려 부수는 모습을 보고 나서 바쁘게 눈을 굴렸다. 주변에 벌어진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 사이의 난전에 탄식이 절로 나왔다.

돌 부스러기가 우스스 눈발처럼 휘날렸다. 벽면과 기둥을 부수고 다니는 고대룡의 뼛조각들이 계속 이대로 날뛰는 한 ‘용들의 무덤’이 곧 무너지리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했다. 니카를 제외한 기사들 역시도 분주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처음에는 손가락만 하던 뼛조각에 불과했지만 점차 거대한 덩어리로 뭉쳐 몸집을 불린 화석들을 상대해야 했던 까닭이었다. 뭉치면 뭉칠수록 고대룡의 화석은 경도가 높아지고 있었고, 장정 몸집의 절반 정도 크기가 되어서부터는 검이 들어 먹히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 * *

‘남부 도시 체첼그람에서 귀인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전하에게 가장 큰 협력자가 될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아주 낮은 자입니다. 고아이고…. 용인이군요.’

앙살라테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막쉬롭의 예언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그 체첼그람의 용인이 왕자를 위해 대단한 위업을 달성하게 될 거라고 했다.

‘수리를 보내 찾아오도록 하겠다.’

한 치의 의심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막쉬롭의 예언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은 셈이다. 체첼그람에서 찾은 용인이 눈엣가시 같은 헬린 드라코슨 힐벤을 죽이지 않았는가.

하지만.

‘…용인의 정체 역시도 알고 있었겠지. 막쉬롭.’

배신감이나 서운함으로는 미처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앙살라테를 괴롭힌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 때문이다. 막쉬롭은 여태 앙살라테가 왕좌에 올라야 한다는 정당성을 오래토록 주장하고 뒷받침해준 앙살라테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런데 실은 그녀가 왕좌에 올리고자 했던 인물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니?

앙살라테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막쉬롭을 만난 것은 십사 년 전의 일이었다.

헬린 드라코슨이라는 어마어마한 적통을 숙부로 두고 있는 까닭에, 앙살라테는 어릴 적부터 왕권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힘 없는 왕자였다. 성인식을 통해 왕국을 유람하며 용병 신분으로 살아가던 중에 만난 것이 막쉬롭이었다. 그때도 그녀는 이미 노파라는 말이 걸맞은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지금 갖고 있는 신비로운 분위기 역시도 그대로였다.

용병 생활을 하던 앙살라테가 소작농의 아이를 희롱하고, 유희거리 삼아 별 같지도 않은 죄목으로 잔혹한 처형을 집행하려던 지주에게 대항했을 때였다. 그녀를 처음 만났다. 앙살라테의 행동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누더기 같은 군중 속에 그 늙은 집시가 섞여 있었다.

앙살라테는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왕자의 신분을 밝히면 간단히 끝날 문제였지만, 헬린 드라코슨의 눈을 피하며 세상을 돌아보던 와중의 앙살라테는 철저히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만 했다. 애틀턴을 벗어났다는 것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살수에게 당해도 사건이 조용히 묻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날이 밝으면 참수형을 집행한다고 했다.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던 컴컴한 새벽에 녹슨 창살을 밀고 막쉬롭이 홀연히 나타났다. 처음에는 그 신비로운 분위기 때문에 환상을 보고 있다거나, 뭔가 영적인 계시라도 받은 줄 알았다.

‘앙살라테 드라코슨. 당신은 정의롭고 강합니다.’

다 허튼소리였다. 정의로우면 뭘 한단 말인가? 아무리 강한들 그 강한 검을 대체 어디에 쓸 수 있단 말인가? 새미언 왕의 첫째이자 왕자로 태어났건만 상놈이나 서출들과 다름없는 출세의 한계가 앙살라테에게 꼬리표처럼 붙어 있었다. 왕이 될 수 없는 왕자는 숙청의 대상이 될 뿐이다. 언젠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애틀턴에서 도망쳐 나와 타국에 망명하거나 해야 할 것이다. 헬린 드라코슨이 자신 이외의 계승자를 살려둘 정도로 자비로운 남자는 아니니까, 더더욱.

‘당신은 왕이 되어야 합니다.’

‘이봐, 대체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 헛바람 불어넣고 이용할 생각 마라. 왕이 누가 될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어.’

막쉬롭이 그때 창살 너머로 손을 잡았었나? 기억이 영 헷갈렸다. 아무튼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앙살라테 왕자, 저는 당신의 별에서 선한 왕의 모습을 봅니다. 선한 의지와 고통에서 해방된 백성들을요.’

‘….’

‘위대하게 태어난 분이십니다.’

난생처음 듣는 말이었다. 어느 부분이 심금을 울렸던 건지는 아직까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앙살라테는 남들이 알려준 궤도를 벗어났다. 왕국의 각지를 돌며 의로운 일을 행하고, 당시 부패한 지주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이었던 가난한 신학생 레이먼드를 측근으로 거뒀다.

마침내 용병으로서 이름이 드높아졌을 때 그의 정체를 극적으로 밝혔다.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의로운 왕자 앙살라테 드라코슨의 이름을 드높여 왕권에 대한 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해두었다.

‘그 오랜 세월 왕좌를 위해 달려왔다. 더 나은 왕국을 만들기 위해서, 왕좌에 합당하지 않은 저 잔악한 헬린을 멀리 내치기 위해서. 막쉬롭이 내게 순수한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고 한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어.’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전투에 다들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앙살라테는 입을 헤 벌린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주변을 향해 소리 질렀다.

“전방을 경계하며 후퇴하라!”

앙살라테의 지시에 대공의 기사들이 멈칫 몸을 떤다. 그들을 지휘할 주군 헬린 힐벤이 주검이 되어 흙바닥을 나뒹굴고 있으니 당장 어쩔 줄을 모르고 헤매는 것이다. 앙살라테는 같은 지시를 반복해서 외쳤다. 날카로운 위압감으로 벼려진 왕자의 명령에 기사들은 홀린 듯이 순종하기 시작했다.

“부숴도 소용없습니다! 다시 저희들끼리 들러붙어 더 큰 덩어리를 만듭니다!”

왕녀의 곁을 지키던 제란딘이 목청을 높였다.

“그래도 붙을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다! 곧 ‘용들의 무덤’이 완전히 무너질 테니 그때까지만 견디면 돼. 기사들은 각 출입구를 사수하고, 나머지는 지상으로 안전하게 대피해라. 화석들을 화석답게 흙 속에 파묻어 주자!”

“예, 전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우렁찬 대답을 바쳤다. ‘용들의 신전’의 둥근 테두리를 따라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서서 중심 방향을 향해 화석들을 몰아넣었다. 과연 앙살라테가 예측한 대로 용들의 신전은 천천히 돌조각을 위에서 아래로 떨구며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남은 문제는…. 앙살라테는 날카롭게 탈타미오 후작을 응시했다. 그 뒤에서 후작의 몸을 반쯤 안다시피 하여 지탱한 기사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저들이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대룡의 화석들을 뚫고 출입구까지 가로질러 와야 했다. 대피 행렬에 끼지 못한 두 사람은 아직도 중앙의 제단 근처에서 교전 중이었다. 니카는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대룡의 뼈를 쳐내어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무생물에게 영구적인 타격을 입힐 수는 없었다. 감싸야 할 사람이 있으니 움직임은 둔했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땅과 벽이 천둥소리처럼 우르릉하고 울었다.

앙살라테가 소리쳤다.

“전원 후퇴한다!”

“전하! 탈타미오 후작님을….”

레이먼드는 후작과 지내라고 붙여둔 몇 년 동안 정이라도 붙였던 모양인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급히 말을 꺼냈다. 후작을 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간곡한 눈동자를 보면서 앙살라테는 말을 골랐다. 덜 잔인하게 들리기 위해서.

“후작은.”

“전하?”

“후작은 구할 수 없어. 다치기 전에 물러나라, 레이먼드. 우리도 여길 빠져나간다.”

“안 돼요. 으깨져서 뒤질 걸 알고도 어떻게 못 본 체합니까! 아직 시간이 있어요. 버릴 순 없습니다!”

“정신 차려, 레이먼드. 네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알아? 괜한 목숨까지 저승길 동무로 보내는 거다!”

“팔 년이에요! 팔 년!”

레이먼드는 앙살라테의 무정한 언사를 믿을 수 없어 했다. 화가 난 듯한 말씨를 믿을 수 없는 것은 앙살라테 역시 마찬가지였다. 앙살라테는 레이먼드가 더 이상 그의 마음속 우선순위에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를 새겨넣은 충신이 아니라는 점을 눈치챘다. 입맛이 썼다. 막쉬롭에 이어서, 이제는 레이먼드까지? 이 두 사람은 앙살라테가 왕좌의 꿈을 품은 뒤로 가장 신임하는 이들이었다.

“후작이 당신을 위해서 헬린 힐벤한테 장난감 취급 당하고, 온갖 오명을 무릅쓰고 살아온 게 팔 년이나 됐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버릴 수가 있죠?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제가 아는 앙살라테 전하시라면, 절대로 그러실 수 없어요. 당신은 신의가 있고 용감하고, 그리고….”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기대하기까지, 아주 숨이 다 막히는군! 탈타미오 그 촌구석에서 애송이 수발이나 드는 편한 임무를 맡았으면 염치를 알고 굽신거리기나 해야지, 대체 네가 날 위해서 뭐 대단한 일이나 했다고 내 결정에 왈가왈부-”

“뭐라고요…?”

레이먼드의 입술이 벌벌 떨었다. 앙살라테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었다.

“말실수야, 레이먼드. 그런 게 아니다.”

“전하는 변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변해.”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 목숨 귀하게 여기던, 내가 알던 의로운 용병 앙살라테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군요. 대체 언제부터였죠?”

“모든 사람의 목숨이 대의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어떤 목숨은 값어치가 달라져. 레이먼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어떤 목숨은 더 중요하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배신감에 숫제 사시나무 떨듯이 레이먼드는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백지장처럼 혈색이 전부 창백하게 질렸다.

“중요하지 않은 목숨이요? 세상에 그런 목숨도 있습니까? 오, 그래…. 이오 사사바란처럼 말이지요?”

“그건….”

수리 드라코슨이 돌덩이처럼 굳어 있던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지 잠깐 숨을 멈췄다가, 발걸음을 휘청거리며 구더기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버티고 섰다. 레이먼드는 분노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도무지 말을 멈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꼬마 사사바란이 당신을 위해 일하던 게 몇 년인데, 왕녀 전하를 꼬여 사라지자마자 당신은 살수를 보내서 곧장 죽여버리셨죠. ‘잔악후작’ 소리를 팔 년이나 버텨 온 바란 탈타미오도 그런 식으로 토사구팽할 작정이군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내가 알던 앙살라테는 그런 사람 아니었어요. 내가 충성을 맹세한 앙살라테 드라코슨은 정의가 뭔지 고민하고 백성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남자였지, 이렇게 재수 없는 이기주의자가 아니었다고요!”

* * *

퍽, 콰광, 파스스!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뼈다귀가 부서지고 깨어져 나뒹굴었다. 살아 있을 적의 흉내를 내는 게 고작인 화석들이 암만 떼로 덤빈들 니카는 전부 다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이깟 뼈 무덤에 질 리가 없었다. 일말의 다른 가능성조차 허락하지 않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느껴졌다.

전에 없던 유능감이 니카를 지배했다. 원체 신중한 성격을 타고난지라 어린아이를 상대로도 잘 방심하지 않는 니카에게 있어서는 낯선 변화였다.

오만이냐고 물으면,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저 당연했다. 질 수가 없었다. 유연한 팔다리 근육은 머릿속으로 그린 궤적을 완벽하게 따라 움직였고, 전신의 그 어디로부터든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폭발의 잔해에 스쳐서 생겼던 크고 작은 생채기마저도 이미 절로 아물어 가는 듯이 간질거렸다.

‘아, 정말로.’

니카가 흘린 탄식이 바란의 목덜미에 부딪혀 부서졌다.

‘나는 용인이 아니구나.’

한숨 이후에 도로 들숨을 쉬었는데, 코와 입으로 찬 바람이 들이치면서 얼결에 딸려 온 익숙한 체향을 맡을 수 있었다. 바란 탈타미오. 그 이름을 떠올린 다음에 무심코 허리께를 바투 끌어당겨 안았다. 바란은 “아.”하고 낮고 의미 없는 음절을 흘렸다. 그것만으로 쿵쾅거리던 심장이 진정하고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던 복잡한 걱정들이 녹아 없어지다니 정말이지 이상했다. 지면에 내리꽂히는 거대한 장딴지뼈를 피해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전원 후퇴한다!”

앙살라테가 전장에서 고수하는 목소리 톤이었다. 멀찍이서도 카랑카랑한 울림이 전해졌다. 니카는 즉시 고개를 치들고 주변을 휘 돌아보았다. 니카를 노리고 있는 고대룡 화석들은 여전히 그가 있는 제단 방향으로 짓쳐들어오는 와중이었으며, 아직 결박에서 풀려나지 못한 화석덩어리들이 하중을 견디는 주요 기둥까지도 박살 내지 못하도록 막아서서 끙끙거리는 기사가 여럿 있었다. 그 기사들은 그나마도 왕자의 후퇴명령에 따라 황급히 발을 빼기 시작했다. 비난을 던질 이유는 없었다. 신전이 정말로 무너지고 있었으므로.

니카는 어린 들짐승처럼 하악질을 하는 작은 새끼고대룡 뼈를 쳐내고 왕자가 서 있는 출입구까지의 직선거리를 파악했다. 가깝다고는 입이 비뚤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잠깐 멈칫한 사이에 뒤편의 기둥이 바삭한 크래커처럼 부스러기를 잔뜩 만들어내며 가라앉았다. 니카가 검을 내팽개치고 그 손으로 바란의 다리를 바짝 당겨 위로 추어올린 것은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린아이를 부둥켜안은 것 같은 꼴로 바란의 발목이 지면에 끌리지 않도록 한 뒤에 니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을 쳤다.

지면에 한번 발이 닿기만 하면 놀라운 힘과 탄력으로 지표를 밀치고 멀찍이까지 쇄도한다. 겅중겅중, 멀리, 그리고 빨리 뛰는 모습은 인간의 형상을 한 고양잇과 맹수처럼 보였다. 원래도 니카의 힘은 비인간적인 구석이 있었지만, 그건 마수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라고 참작하면 대개 수긍을 살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니카는 그런 어쭙잖은 용인 타령으로 눈 감을 수 없을 만큼 명백히 초인적인 속도와 힘, 지구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닿을 수 있을까? 니카는 푹푹 꺼지는 돌바닥과 뭉개진 찰흙처럼 서서히 무너져 가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썩 커다란 돌덩이가 요란법석을 떨며 떨궈지더니만 하필 니카의 발가락 옆을 거세게 때렸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지만 요는 붕괴 진행선이 니카의 달리는 속도를 따라잡았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빨라도 붕괴의 영향권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거기에 더해 출입문 가까이까지 다 와서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출입문 아래의 야트막한 경사로를 타고 올라가야 출입문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바란의 몸이 축 늘어지고 질질 끌리는 바람에 니카는 그만 발이 걸려 휘청했다.

“전하, 바란을!”

니카에게는 적어도 앙살라테가 바란을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니카의 경우와는 다르다. 대공이 죽고 앙살라테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이 없어졌나 싶더니만 니카가 하필 위대한 혈통이라고 튀어나왔다. 다 된 식사에 재를 뿌린다거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식의 허탈한 관용표현이 꼭 알맞았다. 앙살라테의 낭패감을 충분히 짐작하기에, 니카는 그가 자신을 구하기를 꺼리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란은 아니잖아. 대공을 위해서 오래토록 희생하고 일했잖아. 바란은 그의 사람이야. 바란의 손만큼은 붙잡아서 끌어올려 줄 거야. 그러면 바란은 구할 수 있어….’

그런데 성큼 가까워진 앙살라테의 낯은 니카가 기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지독한 빛을 띠고 있었다. 니카가 아는 눈빛이다. 수뇌부에서 흔히 맞닥뜨리는 고귀한 귀족들이 저런 식으로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경멸. 허탈한 웃음이 났다. 앙살라테의 심산이 투명하게 보였다.

니카는커녕 바란조차도 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누구든 그 이유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어린 후작이 목격해 온 갖가지 뒷얘기가 저 밝은 곳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치졸하게 외면하고 손을 뻗어주지 않겠다니?

“빨리, 제 손 잡아요!”

니카가 매섭게 앙살라테를 노려보는데, 그 옆에서 홱 뻗어 나온 손이 있었다. 희멀건 손이었다. 누군지 확인할 것도 없이 바란을 밀어 올렸다. 힘없이 덜렁거리는 바란의 몸체가 완전히 출입구 바깥으로 밀려난 것을 보며 니카는 비로소 손을 뻗은 남자가 바란의 집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도를 머금었다. 입꼬리가 절로 웃음을 띠던 바로 그 순간에 거대한 돌덩이가 떨어져 니카의 왼쪽 어깨를 강타하며 거친 옆면으로 귓바퀴의 피부를 찢었다. 흐리멍덩하던 바란의 파란 눈이 저 출입구 너머로 멀어지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마 그다음에는 내 이름을 불렀겠지.’

니카는 출입구의 아치형으로 쌓인 벽돌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바란의 목소리는 그것이 가진 힘에 비해서는 너무도 가냘픈 까닭에 지금처럼 소란으로 뒤덮인 지하무덤에 처박혀서는 도무지 들을 수 없었다.

‘분명 내 이름을 불렀을 거야. 나의 바란….’

그게 아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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