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평선에 걸린 해 (1)
용의 신전.
고왕국의 토속신앙에서 이어진 왕국의 국교는 고대룡의 무한한 힘을 숭상했다. 종교는 승리한 왕가의 신화다. 용의 신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용’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것이 고작해야 하등한 파충류 마수들밖에는 남지 않은 현대에 이르러서 고대룡 신앙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단지 드라코슨 왕가에 대한 충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적어도 그것이 헬린 힐벤의 생각이었다.
“히, 히익….”
“대신관. 우리 어렵게 가지 말자고요. 대관식 열자는 게 대단한 부탁 아니잖아요.”
힐벤이 공중에서 검을 훅훅 휘둘렀다. 위협적인 파공음이 귀를 찢을 듯했다. 실제로 힐벤은 노인의 귓불을 슬쩍 검날로 건드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넓적한 소매에 두 손을 교차해 집어넣은 노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뭐가 그리 힘들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이 몸이 지상에 존재하는 드라코슨 중에 가장 고대룡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대신관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말이죠. 내 군대가 애틀턴을 이미 장악했고,”
“아직 모든 왕위계승권자의 동의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앙살라테 왕자가 트넴바 탑에서 항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앙살라테?”
힐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그저 픽, 하고 입술에서 바람이 빠져나오는 소리에 불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뱃가죽을 와르르 떨어댈 정도로 웃음소리가 커졌다. 대신관을 보좌하던 신관 하나가 오들오들 떨면서 걸음을 두어 발짝 뒤로 물렸다. 대공의 기사가 검 끝을 세워 신관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앙살라테 그 병신은 또 왜 들먹인담. 그 새끼 얼마 안 가서 내가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예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신전의 법을 따를 뿐입니다.”
“…꼬장꼬장한 늙은이 같으니.”
온화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표정이 망가진 것은 잠시 잠깐의 일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헬린 힐벤은 그가 자랑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도로 머금었다. 그는 팔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무언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촤아악! 바닥을 긁으며 검이 상방으로 쇄도했다. 변덕스러운 성미에 걸맞게 예고도 없이 검을 휘두른다. 대신관의 뼈와 살이 날붙이에 당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이었다. 피가 분수를 이루어 뿜어져 나왔고, 고집스러운 대신관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영혼을 잃은 고깃덩어리로 전락하여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법 좋지, 다 좋다고요. 그래도 왕좌가 누구의 것인지 분명한 상황에서 괜히 절차 지킨다고 개죽음당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잖아요. 참 불쌍하게 됐지.”
헬린의 기사들은 익숙하게 박장대소하며 분위기를 맞췄다. 눈물을 쏙 뺄 정도로 웃던 기사들은 대공이 공중에 손바닥을 올리자 언제 웃었냐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대신관의 시체 뒤에서 발바리처럼 가엾게 떨고 있던 보조신관이 신관복 가랑이를 축축하게 적셨다. 뒤에 선 기사가 익살스럽게 코를 틀어막았다.
“…다음 대신관은 날 실망시켜선 안 될 텐데 말이에요. 왜냐면 이 헬린 힐벤에게는 정말 나쁜 버릇이 있어요. 오, 나쁜 버릇. 이렇게 말하면 엔간한 사람들은 모두 다 알아듣는답니다. 부끄럽지만, 저에 관한 소문은 왕국 전체에 아주 파다한 편이거든요.”
피로 흠뻑 젖은 은색 검이 보조신관을 겨누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정말이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할 겁니다.”
보조신관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가엾은 소동물을 보는 것처럼 헬린 힐벤이 입술을 비쭉였다.
“아시겠죠? 대신관님.”
* * *
수도 애틀턴 남쪽의 너른 평야엔 치열한 싸움이 한바탕 할퀴고 간 흔적이 크게 남았다. 바닥에 흩어진 부러진 병장기와 신선한 피와 내장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시체들 틈바구니에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여정을 겪은 남자 하나가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딱딱하게 경직되어 생전보다 배는 무거워진 시체들을 밀치고 일어나, 뻐근한 허리를 두드렸다.
“씨발….”
나이는 서른다섯, 한창때의 건강한 장정처럼 보이지만, 기실 수년 동안이나 심신을 바쳐 서류업무에 매진하다 보니 체력이 수준 이하로 떨어져 버린 약골. 흙먼지를 뒤집어썼으나 그런대로 고급품이라 쳐줄 만한 옷을 걸치고, 쨍하니 금이 간 시력보조 안경을 걸쳤다. 추해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바지 안쪽 주머니에 쑤셔 넣은 회중시계는 용케 약탈당하지 않고 남았다.
“씨바알.”
남자의 이름은 레이먼드였다.
바란이 사난타를 수복하기 위해 지휘관으로서 출정했을 때, 레이먼드는 등골이 다 오싹한 불안감을 느꼈다. 그 직감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잔악후작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레이먼드는 탈타르에 있는 탈타미오 후작 저택을 깨끗하게 청소하던 중이었다. 용역업체에 돈 두둑하게 주고 고용한 하인들이 거미줄을 떨어내는 것을 감독하던 중, 길거리에 한바탕 소란스런 호외가 돌았다.
‘사난타 탈환전 대패, 탈타미오 후작 하옥.’
소문은 금세 온 탈타르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그 싸움에 패배하게 된 경위는 제대로 입소문을 타지 못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한 채로 결착이 났다는 소식은 탈타르 귀족들의 분노를 사기 딱 좋았다. 탈타미오 후작의 무능함을 탓하는 탄식부터 시작해서 온갖 악의적인 소문이 한바탕 들끓었다.
‘좆 되기 전에 도망치는 게 좋겠군!’
레이먼드가 탈타르에서 도망쳐 나오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믿을 만한 정보통에 따르면 잔악후작을 남겨두고 전 군대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고 했다.
만일 레이먼드의 추측이 맞다면, 힐벤 대공은 애초에 바란을 팽하려고 작정했던 것이리라. 겸사겸사 원성이 자자한 귀족들의 입을 다물리려고 지휘관 자리를 맡긴 것이다. 그의 지지 기반인 고위 귀족들이 대거 포로로 잡혀 있는 사난타를 못 본 체 넘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바란을 보내어 귀족 포로들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라고 확실한 메시지를 남기는 한편, 이 연극으로 발생한 비용은 전부 바란에게 전가했다. 영리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바란의 명성에 금이 갔고, 만약 바란이 왕자의 첩자로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발각당하기라도 하면….
레이먼드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칫하면 그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탈타르를 빠져나가 왕자군이 주둔하고 있는 사난타, 강 건너 잣자후나 수도 애틀턴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레이먼드처럼 아무런 직책도 없는 일개 평민이 합법적으로 전선을 넘나들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레이먼드는…. 평민을 그만두기로 했다.
“빨리빨리들 움직여!”
전선을 지나기 위해서 노예병단에 섞여든 것이다.
극단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주워든 나무패 목걸이를 목에 걸고 옷에 지저분한 흙먼지를 비빈 다음에 행렬에 숨어들었다. 천출로 태어나 박투꾼으로 살아온 경험이 자연스럽게 태도에 녹아 나왔다.
“너 쟤 누군지 아냐?”
“아니, 나도 본 기억이 잘 없는데.”
“눈빛 봐라, 어휴…. 분명 살인죄로 잡혀 왔을 거다.”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에는 콧방귀도 나오지 않았다. 레이먼드는 값나가는 안경을 일부러 주머니 속에 갈무리하고 맨눈으로 행군을 이어나갔는데, 시력이 맞지 않으니 사람 하나 죽일 것처럼 거센 눈매를 갖게 되었다.
안락한 환경과 그를 고질적인 신경증으로 빠뜨리던 서류업무에서 벗어나니 신체적인 고통은 차라리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노예에 걸맞은 대접을 받으며 겨울철의 황야를 지났고, 이내 선발대가 이미 뚫고 지나갔다는 ‘거인의 돌다리’를 건너기까지 했다.
사난타를 치려던 것처럼 가장해서 양동으로 수도 애틀턴을 친다. 대공의 전략은 먹혀들었고, 레이먼드는 그 행군의 끄트머리에서 왕자군의 칼을 맨몸으로 받아내는 위치에 있었다.
“으윽, 씨발. 옆구리 찔렸었네.”
사실은 그 전장에서 시체인 척 가장하고서라도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이깟 스친 상처는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액운을 털어버리려는 듯이 어깨를 위아래로 움직인 뒤에 레이먼드는 자리에서 풀쩍 일어났다.
죽음의 낫이 한바탕 이 주변을 휩쓸고 나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실은 어찌나 피곤했던지 그대로 눈을 붙인 것 같기도 했다. 하늘은 피같이 붉은 석양이 내리는 와중이었고, 피로 젖은 들판에는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레이먼드는 금이 간 안경을 쓰고서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찢어진 깃발이나 말발굽이 남긴 흔적으로 미루어 봤을 때, 대공군에 쫓겨 도주한 왕자군의 자취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대공군의 진행방향과 반대되는 쪽으로 소수의 흔적이 이어졌다. 대공군은 사난타에 있는 왕자군이 원군을 보내기 전까지 애틀턴으로 진군하느라 시간적인 압박이 있었다. 그래서 잔당이 흩어져 도망가는 것을 구태여 뒤쫓지 않고 애틀턴으로 바로 이동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레이먼드는 석양이 내린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왕자군의 잔당을 만난다.’
주위에 널려 있는 시체들 중 가장 온전한 것을 가려내 명복을 빌어주고 옷을 벗겼다. 끊어내지 않고서는 벗길 수 없는 왕자군 갑옷의 매듭은 이들이 어떤 각오로 ‘거인의 돌다리’를 사수하려 했는지 알려주었다. 입맛이 썼다.
갑옷을 걸치고 나니 그럭저럭 패잔병처럼 보이는 모습이 완성되었다. 레이먼드는 어깨를 앞뒤로 잡아당겨 견갑을 편한 위치로 조정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왕자군의 무리에 뒤섞이는 것도 요원할지 몰랐다.
바위산을 맨몸으로 기어오르고, 폭이 고작해야 발등의 폭밖에 되지 않는 벼랑과도 같은 가도를 지났다. 며칠간 고생은 계속되었다. 중간에 왕자군의 흔적이 끊겨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골치가 아프게 되었다. 애틀턴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태양이 뜨고 지는 방향에 의존해서 길을 찾던 레이먼드는 결국 그가 목표로 했던 곳에 다다랐다. 사흘하고도 한나절이 더 걸렸다. 왕자군이 주둔한 트넴바 탑에 다다른 레이먼드는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레이먼드의 눈 뜨고 못 봐줄 몰골이 동정표를 얻어 당장의 추궁은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소속은?”
그렇다고 의심이 완전히 거두어진 건 아니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레이먼드의 손은 결박되어 있었고, 감시마저 붙어 있었다. 지휘관이 몸소 찾아와 소속을 묻는 말에 레이먼드가 웃었다. 안도감이 섞인 미소였다.
“앙살라테 드라코슨.”
드디어 그의 왕이 있는 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 * *
“그 집시 말인데요. 이름이 뭐랬지? 애벌레랬나. 그 사람 거기 남겨두고 온 게 잘한 선택일까요?”
“본인이 거기 남겠다고 그랬잖아.”
밀렌 아겐호프는 잠시도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니카’와의 해후로 온화해졌던 바란이 어느 순간 짜증으로 무장하게 될 정도였다. 밥도 굶어가면서 지냈을 텐데 저렇게 신이 나서 조잘댈 힘이 왜소한 몸 어디로부터 뿜어져 나오는지 궁금했다.
“아니, 아들이 잣자후에 있다니까 차마 떠나지 못하는 엄마 마음은 이해하겠는데요. 그래도 앞장서서 후작님 도와준 사람인데 거기 그대로 뒀다가 당장 머리가 뎅겅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렇게 된다고 해도 겸허히 받아들이겠지.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까.”
“아….”
무한히 이어지는 대화를 끊어내려고 일부러 차갑게 일갈했던 것인데, 아겐호프는 어쩐지 눈을 반짝 빛냈다.
“진짜 멋지다….”
‘아겐호프 가에서는 애들을 대체 어떻게 기른 거지. 둘 있는 자식 중에 하나는 사난타에서 놀아대다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 하나는…. 이렇고 말이야.’
그럴싸한 외모 덕택이었을까, 잔악후작의 악명이 드높아질수록 대공파의 젊은 귀족들 측에서는 바란을 동경하는 무리가 등장했다. 탈타르에 못 봐줄 꼴로 입성하던 때에 잔악후작을 연호하며 소리치던 젊은이들이 바로 그런 부류였다.
아겐호프도 그들 중 하나인가 싶었다. 짧은 여정을 함께하는 동안 바란이 뭐라고 한마디 하면 곧장 눈을 빛내기를 반복했다.
바란은 잔악후작의 이름 아래 자행한 무수한 악행에 무뎌졌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옳은 행동이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대공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뿐. 그래서 누군가가 잔악후작의 위명을 황금면류관처럼 취급하려는 낌새를 보이면 바란은 소스라치게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파란 눈이 형형한 빛을 내며 아겐호프를 노려보았다. 결단코 가까이 하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눈빛으로 쏘아낸 얼큰한 경고에도 밀렌 아겐호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취급이 더 달갑다는 듯이 두 손을 꾹 말아쥐고 흐뭇하게 씩 웃는다.
“역시 눈초리만으로 전운을 제압하신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정신이 제대로 박힌 놈이야?’
바란은 더 말을 섞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굴을 이상하게 찌푸렸다가 그저 못 들은 척 전방을 응시했다.
늙은 말이 지쳐서 기침소리 비슷한 것을 냈다. 날이 추우니 제대로 옷도 두르지 못하는 짐승 입장에서는 더 견디기 힘이 들었을 것이다. 바란은 칼바람에 맞서 외투를 꽁꽁 여몄다. 니카가 까칠하게 내던진 누비옷이었다. 알량한 말 한마디보다 많은 것이 전해졌다.
‘추위는 더 타면서 내 걱정을 했단 말이지.’
상황도 잊고 입이 헤 벌어졌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니카의 체취가 물씬 올랐다. 니카에게는 독특한 살내음이 있었다. 아마 다른 종족의 피를 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니카에게 내어준 후작부인의 침실에 몰래 숨어 들어가 그의 팔을 머리에 받치고 누웠을 적에나 맡을 수 있던 내음이었다. 간만에 맡으니 온몸의 긴장이 다 풀어질 정도로 안정이 되었다. 바란은 갑자기 우스운 기분이 들어서 홀로 킥킥거렸다.
‘이래도 날 안 좋아해?’
얄미운 소리만 골라서 꺼내려는 니카의 입술은 그가 행한 모든 행동과 상충되었다. 왕녀의 품에까지 돌아왔으면서, 왜 왕녀에게 매진하지 않고 자꾸만 바란을 찾아오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쩌면 니카에게 왕녀를 사랑하게 된 계기보다 바란과 함께한 넉 달의 기억이 더 강렬하게 남았던 건지 모른다. 이 작은 상상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바란의 세상을 비추는 작은 등불로 자라났다. 자포자기의 늪에서 바란을 끌어내고 한 송이 희망을 들려주었다. 아직 해볼 만해. 아직은, 걸어볼 만하다고.
‘애틀턴에 도착하면, 헬린 힐벤을 죽인다.’
바란은 손을 꾹 쥐었다.
‘전쟁을 끝내는 것도, 니카를 쟁취하는 것도. 이 손으로.’
놀랍게도 왕자의 지시만을 기다리며 자리에 움츠리고 있었을 때보다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바쁘게 오가는 뜨거운 피가 몸에 긴장감을 주었다. 팽팽한 긴장에 사로잡힌 몸은 놀랍게도 상태가 좋았다. 수 없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고통이나 피로감은 없었다.
“그런데 후작님. 대공 전하께서 맡기셨던 비밀스러운 임무 말입니다. 저는 사난타의 포로를 구출하실 작정으로 일부러 몸을 던지셨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겁니까?”
“아니야.”
“아, 앗. 그러면 어떤 임무가-”
“넌 ‘비밀’이 무슨 뜻으로 쓰는 말인지 몰라?”
말을 멈춰 세웠다. 뒤따르던 아겐호프도 영문을 모르고 말을 도닥여 멈췄다.
“비밀 임무가 뭔지는, 말해줄 수 없다. 포로를 당장 구할 거냐고 묻는다면,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질문이 더 있나? 표정을 보니 묻고 싶은 게 아직 많이도 남은 모양인데, 다 털어내고 가자고. 나는 남은 여정은 평화롭게 즐기고 싶어서 말이야.”
바란이 추측한 그대로였다. 아겐호프는 그가 온갖 호기심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나 싶더니만 다짜고짜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가져왔다.
“더 궁금했던 건…. 어, 우리를 도왔던 그 용인이랑 무슨 관계이십니까?”
“…그건 신경 꺼. 네가 알아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 그렇군요. 조금 놀랐습니다. 순애보로 유명한 용인기사마저도 후작님의 미남계가 먹히는 상대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미남계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바란은 황당한 마음에 눈을 끔뻑끔뻑했다.
“아, 물론 이용할 수 있는 건 뭐든지 이용하는 게 후작님 좌우명임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빛나는 외모로 상대를 사로잡아 평화롭게 싸움을 끝낼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최고의 승리라고….”
“대체 그런 소리는 어디서 들은 거야?”
“예? 대공 전하 자서전에서요.”
“…전하의 자서전?”
“모르셨어요? 틈틈이 집필하신 내용을 두 달 전엔가 책으로 엮어서 내놓으셨는데, 탈타르에서는 아직까지도 화제의 중심이에요. 후작님에 관한 내용도 한 챕터를 통째로 할당해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제 친구들 중에 그거 읽고 후작님의 열광적인 추종자가 된 애들이 더러 있어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넉 달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을 적에도 대공은 밤마다 일기를 쓰겠다면서 한참이나 글을 끼적이곤 했었다. 그걸 가지고 책을 낸 게 틀림없었다.
“그런 거 읽을 시간에 검술 수련이나 더 해.”
“예에? 하지만.”
“사람이 얼마나 순진하면 그걸 돈 주고 사서 읽는 거야.”
“네? 무슨 뜻이에요, 그게? 후작님?”
바란은 대꾸하지 않고 말을 몰았다.
그들은 서쪽으로 산등성이를 끼고 애틀턴을 향해 계속 남하했다. 혹여라도 잣자후에서 이어지는 행군과 뒤섞이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번화한 애틀턴과 잣자후 사이의 길목에는 촌락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도중에 들러서 말을 쉬게 할 수 있었다. 종종 마을 주민의 호의도 기대할 수 있었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데다 붙임성 좋은 어린 소년인 아겐호프가 잡일을 거들고 아주 하잘것없는, 그래도 목숨을 연명하는 데 도움은 될 법한 먹거리를 얻어왔기 때문이었다.
마을을 일부러 여럿 경유한 것은 식량충당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아겐호프가 신이 나서 뛰어다니며 노동력을 팔아 음식을 동냥하는 동안 바란은 특유의 능글대는 솜씨로 빨래터 아낙들에게 말을 붙였다.
백성들은 소문에 민감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늘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어도, 얻을 수 있는 정보량은 많았다. 바란은 탐욕스럽게 정보를 모아나가기 시작했다.
여태 바란은 ‘참회의 방’에 갇혀 있었고, 그간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고작해야 간수들끼리 지껄이는 시답잖은 음담패설이 다였다. 니카는 애틀턴에서 만나자는 기약을 남겼으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였다.
수도 애틀턴을 둘러싼 전쟁이 코앞에 닥쳤다는 것이다.
바란은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신중히 정보를 그러모았다. 그러면서도 군대가 행군하는 길목을 교묘하게 피해 다니며 애틀턴 방향으로 남하했다. 짧게는 한나절, 길게는 사나흘까지 한 마을에 머물러 가면서 움직였다.
마을을 거칠 때마다 아겐호프는 영리하고 살뜰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어떻게든 물자를 더해나갔다. 아겐호프를 데리고 온 것이 뜻밖의 방면에서 성과를 내자 바란은 그저 신통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후작님, 다녀올게요.”
“이렇게 일찍?”
마구간 지푸라기 틈으로 얼굴을 내비친 바란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아겐호프는 씩 의젓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한 마음이 물씬 솟았다. 코 묻은 돈 쥐어짜는 형국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나도 뭐든 할까 봐.”
“그런 소리 마세요. 후작님 씩이나 되시는 분이-”
“너도 귀족가 자제이긴 매한가지야.”
“저는 조금 다르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션팟 경 종자로 있었잖아요. 모시는 기사님의 뒷담화를 하는 게 좋은 일이 아니긴 한데, 신이여 용서하소서. 아무튼 션팟 경이 어찌나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시키는지 알고 나면 이 정도 일은 저한테 믿고 맡길 맘이 드실걸요.”
“…….”
“탈타미오 후작님은 남 구두 닦아주거나 쇠똥 치우고 빨랫감 조물락거리는 일 해본 적 없으실 거 아니에요.”
그 말이 맞았다. 구구절절 맞는 말인데 어쩐지 바란은 불퉁하게 볼이 붓는다. 이래서야 누가 연장자인지 알 수가 없다. 밀렌 아겐호프는 웃었다.
“왜 웃지?”
“그냥…. 말로만 듣던 평민의 삶이 이런 걸까 생각했더니 재미있게 느껴져서요. 친하던 병사 중 하나가 잠 덜 깬 마누라를 뒤에 놓아두고 무거운 어깨로 대문을 나서는 게 입대 전 아침 일과였다고 그랬거든요.”
바란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아겐호프는 뒤늦게 제 실언을 눈치채고 토끼 눈을 떴다. 바란이 뭐라고 한마디 꺼내려 했더니만 전에 없이 호들갑을 떨며 신발 뒤축을 쿵쿵거렸다. 끝내 시뻘게진 얼굴로 뛰쳐나갔다.
“다녀올게요!”
‘…건방진 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바란은 걱정을 다 제쳐두었다. 아겐호프 말마따나 야물딱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솜씨로 삯일을 거들 생각은 들지 않았으며, 아겐호프도 귀하신 분이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렇게 기꺼이 섬겨주는데 그 자리에 앉아 가만 빛을 내는 것도 일종의 배려이리라. 마음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후작 신분에서 챙김 받는 건 일상적으로 겪던 일이라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까닭에 공식적으로 바란은 밥벌이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게 되었다. 대신 이따금 아겐호프가 벌어 온 푼돈을 들고 동네 주점에 잠입해서 남들 하는 말을 엿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결판이 난 거나 다름없지.”
“그 말이 맞아. 뭐…. 왕자님께는 안 된 일이지만 말이야. 애초에 귀족 놈들이 죄다 힐벤 똥구멍에 붙어서 알랑거리는데 승산도 없는 싸움이었지. 팔 년씩이나 이끌어 온 게 대견해.”
“킥킥, 지가 뭐나 된다고 드라코슨을 대견해 해?”
“새끼. 말도 못하냐.”
제일 싸구려에 속하는 물 탄 맥주를 홀짝였다. 바란은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데다 외지인이라서, 맥주를 마시는 동안 시비를 피하려면 넝마 같은 외투 깃을 세우고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게다가 바란이 가진 억양 때문에 이틀 이상 머무를 예정인 마을에서는 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바란은 혼자서 조용히 신경질을 냈다. 아겐호프에게 탈타르 인근의 소탈한 사투리를 교육 받아 보았지만 다 헛수고였다. 바란은 이 여정 중에 정말 추호의 도움도 안 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서서히 무력감에 시들어갔다.
복잡한 머릿속을 다스리려고 니카의 품 넓은 누비옷을 잡아당겨 코끝을 묻었다. 이제 니카의 체취인지 자신의 것인지 헷갈리는 내음을 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정제를 삼킨 것처럼 마음의 응어리가 쓱 풀어진다. 마법적인 효과였다.
“그런데 그 소식 들었어?”
감겼던 파란 눈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귀가 쫑긋했다. 수염이 어지럽게 난 푸줏간 주인이 맥주잔을 카운터에 쿵 내리찧었다. 거품 섞인 물방울이 한껏 튀었다.
“무슨 소식 말이야?”
“앙살라테 왕자가 결판을 낼 모양이야.”
“결판이라니?”
“말 그대로, 결판.”
침통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저 높으신 양반들 소문에 대해 얘기하는 것 치고는 민심이 어느 쪽에 이입해 있는지 확연히 보였다. 하긴 앙살라테는 언제나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었다. 언젠가의 전투에서는 그를 도우려고 마을 전체가 나서서 대공군을 적대시했다가 불타 없어졌던 전적도 있었다.
바란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 마을을 불태웠던 게 자신임을 잘 기억하고 있었기에.
철들 적부터 신전과 협력하여 온갖 구휼활동을 펼쳐온 수리 왕녀가 앙살라테 왕자를 강력히 지지하고 나선 덕에 그녀의 공적이 옮아붙어 이름에 금칠이 될 대로 됐다. 게다가 앙살라테의 대척점에 선 헬린 힐벤이 어디 보통 인물이던가. 그는 남들 눈에 ‘절대악’이나 ‘변덕스러운 악마’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앙살라테가 선한 명성을 챙긴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잣자후와 사난타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전부 애틀턴으로 남하하고 있다더군. 대공군과 왕자군의 주된 세력이 전부 애틀턴의 너른 평야에 집결하면 거대한 전투가 벌어질 거야.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 표명이겠지.”
“고작해야 트넴바 탑 하나를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친 승부수를 띄운 게 아닌가? 난 이해할 수가 없어. 그냥 항복하고 목숨이라도 보전하는 게-”
“멍청한 사람일세, 이거. 대공이 왕자가 항복한들 살려줄 리가 있나?”
“글쎄. 모로 가도 죽는 게 매한가지라면 주변 사람들 목숨은 구할 수 있지 않겠어?”
애틀턴인가…. 결국 바란이 예상했던 대로다. 잣자후를 빠져나가는 동안 겪었던 어수선한 분위기와 수가 확연히 줄어든 병력, 마구간에서 말을 살피던 니카의 모습까지, 목격했던 모든 모습이 점차 이해 되었다. 잣자후 남쪽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우회하라던 니카의 당부도 그랬다. 아마 그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던 군대가 애틀턴에의 출정명령을 하달받았던 거겠지.
‘나의 자비를 애틀턴에서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니카의 입술이 발음하던 이 말의 무게감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란을 거기서 놓아주고 나면, 언제 어느 상황에서 다시 조우할 수 있을지 니카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이 닥치고 나면 두 사람이 서로 칼을 겨누고 목숨을 앗아야 하리라는 것도 예견했겠지. 그래서 그 눈이 더 없이 어둡고 슬픔에 젖어 있었던 것일까 생각했다.
바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가 된다 해도 바란은 니카를 죽일 수 없었다. 니카는?
니카도 그를 죽일 수 없다. 그럴싸한 근거도 챙기지 못한 채로 그저 확신했다. 그러자 기분이 무척 나아졌다. 난관이 그저 난관처럼만 느껴지지 않았다.
‘트넴바 탑.’
이다음에 다시 눈을 떴을 때, 바란의 마음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시뻘건 불꽃의 혀에 달궈져 단단해지는 도자기처럼, 바란의 마음 역시 니카에 대한 열망을 거쳐 어느새 굳건한 의지로 변모해 있었다.
‘거기서, 앙살라테를 만난다….’
기실 그것이 계획의 전부이기도 했고, 고작 서두에 불과하기도 했다.
여비가 모자라서 혁대를 팔아치운 바란은 바지가 자꾸만 한 움큼씩 아래로 내려가서 고역이었다. 바지춤을 어떻게든 매듭지어서 다스린 뒤에 아겐호프를 불렀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어.”
“네? 이렇게 갑자기요?”
아겐호프는 당황해서 왕방울만 한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말에게 싸구려 여물을 먹이다 말고 화들짝 일어났다.
“트넴바 탑으로 간다.”
“애틀턴의 트넴바 탑 말씀이시죠?”
“그래.”
잣자후에 있는 동안 소식이 끊겼기는 아겐호프도 매한가지였을 터다. 그런데 이 마을 저 마을마다 삯일을 다니면서 트넴바에 왕자군 마지막 항전세력이 자리하고 있다는 얘기는 잘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아리송한 낯으로 바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거긴 앙살라테의 세력이 아직 남아있는 곳인데….”
“비밀 임무 기억하지?”
“아앗, 저한테는 말씀해줄 수 없으시다던 그 임무요?”
영리하고 살뜰한 건 좋은데, 밀렌 아겐호프는 지나친 충성심과 동경으로 인해서 순진하게 굴 때가 많았다. 바란은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애를 뒤에서 등쳐먹으려고 준비하고 있는 못된 어른 꼴이었다.
“그래. 뭐 하나만 물어보자, 밀렌 아겐호프.”
미안한 마음에 무게추를 더하며 순진한 아겐호프가 귀를 쫑긋 세웠다. 바란은 일부러 무심한 기색을 가장했다.
“넌 나를 믿지?”
깊은 감명을 받은 아겐호프의 눈동자가 축축한 윤기로 물들었다. 위아래로 곱상한 속눈썹이 팔랑팔랑했다. 이윽고 고개가 한 차례 무겁게 끄덕여졌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
아겐호프는 바란의 새하얗고 고른 이가 그리는 시원스러운 미소를 난생처음으로 마주했다. 후작이 변덕 심한 고양이처럼 제 마음 내킬 때나 살갑게 군다는 사실은 이제 익히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대답이 그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는 것일까? 귓등이 화르륵 불탔다.
온 왕국에 공포와 살육을 들끓게 만들었다는 장본인인 잔악후작이 이렇게 예쁘게 웃을 줄 안다는 사실을 자신을 제외하면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지 어림해보았다.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용인기사가 뇌리에 떠올랐다가 금방 스쳐 사라졌다. 고개를 가로젓고 벌써 저만치 앞서 말을 모는 후작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 * *
트넴바 탑을 목적지로 잡은 이후로 이들의 여정은 탄탄대로였다. 잠입에 대한 계획을 짜는 대신에 정문을 박차고 들어갈 방법을 고안해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들 눈에 은밀하게 행동할 필요 없다는 것은 상당한 정신력의 절약을 의미했다.
…물론 이건 다 바란 입장에서 누릴 수 있는 편익이었고, 미끼 쪽의 의견은 다른 것 같았다.
“저기요, 후작님.”
하고 속살거리며 부르는 소리에 바란이 무심히 시선을 주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밀짚색 머리칼의 어린 청년이 간절한 눈빛을 쏘았다.
“그래서 제가 뭘 하면 된다고요?”
아겐호프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씰룩대며 엉거주춤해 있었다. 바란은 말없이 손아귀에 쥔 밧줄을 끌어당겼다.
“으악!”
아겐호프는 균형을 잃고 바란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무너졌다. 바란은 꾸준한 운동 끝에 이제 겨우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된 팔뚝을 들어 올렸다. 쓰러지는 아겐호프의 몸뚱이를 단단히 붙들어 올리며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연출한 뒤에 귓등에 속삭였다.
“넌 그냥 얌전히 있으면 돼. 후작님이라고 부르지도 말고.”
“그, 그, 그럼 뭐라고 불러요?”
시답잖은 말까지 맞출 필요 있나 싶었다.
“이, 이름으로 부를까요…?”
“뭐?”
못 들은 체하려다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바란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압하며 “그냥, 잔악후작이라고 해. 안 부르는 편이 제일 낫고.”라며 귀띔해두었다. 아겐호프는 알아들은 눈치는 아니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긴 했다. 애초에 잔악후작이라는 말을 멸칭이 아니라 무슨 ‘전장의 신’과도 같은 멋들어진 칭호라고 여기는 아겐호프였다. 알아듣기를 기대하는 것이 우스웠다.
“다시 한번 말해봐라.”
바란에게 전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왕자군은 미심쩍은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사방에서 활시위를 겨누고 있었다. 조금만 수상스러운 움직임을 보인다면 당장 여기서 화살받이가 되어 비명횡사할 지경이었다.
바란은 침착히 목소리를 높였다.
“왕자님께, 선물을 가져왔다고 했다.”
“선물이라?”
“밀렌 아겐호프. 아겐호프 가의 장남을 포로로 데려왔다. 헬린 힐벤의 최측근인 날만도의 가까운 인척이야.”
“…여기서 기다려라.”
대문으로 들이닥쳐 다짜고짜 왕자를 알현하게 해달라 난동을 부린 까닭에 바란을 향한 왕자군의 눈초리는 무척 매서웠다. 눈빛으로 구멍을 뚫을 수 있다면 이미 바란은 구멍이 송송 난 채반처럼 되고 말았을 터다.
“이걸 가져가서 보여드린다면 날 알아보실 것이다.”
왕자에게 신원을 알릴 수 있도록 제 금색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서 보냈더니 연결책으로 나선 병사가 정말 기묘한 표정을 했다.
“머리카락을 말인가?”
“부탁하지.”
“…….”
주기적인 염색을 거치지 않으니 머리카락에 한껏 먹였던 붉은 염색물이 다 빠져서 원래 빛깔대로 돌아와 있었다. 백금에 가까운 드라코슨 블론드까지는 아니더라도, 바란의 금발 역시 흔한 형질은 아니었다. 금발 귀족이라고 하면 그 이름이 손에 꼽힐 지경이었으니까. 더군다나 때가 좀 타기는 했어도 저렇게 다른 빛깔이 섞이지 않은 황금색 터럭을 보낸다면 앙살라테 정도의 눈치로는 금방 바란의 정체를 알아볼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입성 허가가 떨어졌다. 그래도 검문은 거치라는 명령이 떨어진 모양으로 병사 수 명이 달려들어 바란과 아겐호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더듬으며 조금이라도 단단한 것이 만져지면 정체를 확인하려 들었다. 그런 식으로 마른 빵과 물주머니도 빼앗겼다.
“예쁘장하게 생겨서 계집앤가 했더니 뭐가 달리긴 달렸군그래.”
바란은 사타구니를 집요하게 더듬는 어느 병사의 손길을 느꼈음에도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입을 다물었다. 기껏해야 사내놈들 특유의 짓궂은 장난질일 테니까 반응하지 않는 편이 최선의 대책이었다.
“이익, 변태 새끼! 주제를 모르고 어딜 만져!”
“뭐? 푸하하. 넌 가서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든지 해라. 쥐방울만 한 게 악을 쓰네.”
아겐호프가 대신 덤벼든 건 의외였다. 병사들이 와하하 파안대소하는 중에 홀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분노를 터뜨린다.
바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겐호프가 순수하게 바란을 감싸고 돌수록 죄책감이 고개 들었음은 물론이요, 이 청년의 순진무구한 호의를 가만 받고 있기에 자기 자신이 너무 엉망진창인 것처럼 느껴져 자괴감조차 들었다. 더구나 아겐호프를 포박해 온 포로로 위장해놓은 판에 유들유들한 투로 말을 걸어 달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란은 그저 손안에 욱여 쥔 밧줄을 잡아당겨 아겐호프가 행동을 그치게 만들었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눈물을 매달고 어깨를 씩씩거린다.
“후작, 잔악후작, 잔악후작님은 바보야.”
‘그냥 후작님이라고 부르게 두는 편이 나을 뻔했군. 잔악후작님이라니.’
다용도 날붙이라고 가지고 있던 작달막한 주머니칼까지 몸수색 끝에 전부 빼앗기고 바란은 완전한 비무장상태가 되었다. 바란은 사실상 적진에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편하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잣자후에서 왕자군에게 된통 고문을 당했던 역사가 있어 몸이 먼저 반응하는 듯했다.
트넴바 탑은 애틀턴을 감싸고 있는 세 개의 탑 중에서도 가장 견고하며 오래된 탑이었다. 네모진 벽돌은 지금은 소실된 특수한 방법으로 구워낸 덕택에 내구도가 무척 높았다. 많은 전투에서 애틀턴을 지켜냈으나 외관에 그을린 자국만 조금 남았을 뿐 이 빠진 벽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단단한 탑 안쪽에 마련된 간이승강기와 나선형 계단을 연달아 타고 오르면 최상층의 감시대와 이어진 평탄한 계단참이 나왔다. 삼면에 벽을 세워 놓은 탓에 방이라고 불러도 어폐가 없다.
그곳에서 바란은 그가 목적했던 사람을 마주쳤다. 양팔이 단단히 붙들린 채 뒤따라 오던 아겐호프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바란의 등께에 코를 찧었다.
“아야야.” 하는 신음소리가 싱겁게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란은 눈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사난타 전장, 먼발치에서 본 이후로는 처음이었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했던 전적만 치자면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를 재회였다. 색소 옅은 드라코슨 블론드가 흙먼지에 부대껴 많이 탁해져 있었다.
전황이 불리하다며 백성들 사이에 파다하게 난 소문은 과연 진실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이렇게 핼쑥해질 이유가 더 있을까. 앙살라테는 그의 충신으로부터 막 보고를 받던 도중이었으므로 바란에게 곧장 알은체하지 않았다. 군대의 재배치에 관해서 알아듣기 힘든 복잡한 지시를 내리느라 수십 분의 시간을 썼다. 아겐호프가 무료하게 몸을 뒤틀 즈음 되어서야 비로소 바란을 쳐다보았다.
“잣자후에 붙잡혀 있어야 할 사람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찾아와준 건가 궁금하군.”
파란 눈이 바란의 손에 들린 밧줄을 따라 아겐호프에게까지 이동했다.
“그것도 한 손에는 선물까지 들고 말이야.”
만일 앙살라테가 “꼬마.”하고 바란을 지칭하며 서두를 열었다면 바란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탈타미오 후작.”이라고 알맞은 호칭을 부르기만 했어도 이렇게 고민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앙살라테는 바란이 어떻게 대답할지 떠보겠다는 듯 말을 멈췄다.
각오했던 일이었다. 언제나 앙살라테의 세심한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이던 바란이 처음으로 그의 독단에 따라 잣자후를 탈출해 애틀턴으로 움직였다. 치밀한 계산을 취미 삼는 앙살라테가 장기말이 자기 멋대로 움직여대는 상황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잣자후에서의 환대로 손목이 다 나갔습니다.”
“뭐?”
역시 왕녀의 독단이었나. 놀라울 것도 없었다. 바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다였으나 앙살라테의 반응은 조금 더 거칠었다. 그는 짐짓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앙살라테의 색이 옅은 눈썹은 인상이 강하지 않아서, 이맛살을 조금만 구겨도 극적인 감정변화가 드러났다.
“잠깐 사람들을 물리게.”
“예.”
“…그리고 그를 데려와.”
듣는 귀가 너무 많다고 판단한 것일까, 주위의 사람들을 저 아래층으로까지 물렸다. 탑 내부에는 소리가 울리기 쉽지만 속살대는 소리까지도 전해지지는 않는다. 바란은 바싹 다가선 앙살라테에게서 모래흙의 냄새를 맡았다. 누굴 데려오라고 지시한 건지도 궁금했는데, 앙살라테는 자신이 상념에 빠져있을 때 아랫사람이 산통 깨는 일을 안 좋아했다.
바란의 계획은 앙살라테를 잘 구슬리는 것이 절반을 넘게 차지했다. 괜히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좋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헛기침이나 하면서 앙살라테가 다시 바란에게 말을 붙일 때까지 기다렸다.
앙살라테가 바란에게 말을 거는 것보다 좀 전의 지시로 미지의 발소리가 다가오는 편이 더 빨랐다. 앙살라테의 명령에 따라 어떤 남자를 위쪽 층계참까지 호송한 기사가 납죽 고개를 숙여 부복하고 섰다. 앙살라테가 손을 내젓자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기사는 아래층으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충성스러운 기사였다. 사난타 전에서는 보지 못한 인물이었는데, 아마 그 당시에는 잣자후에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기사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바란은, 저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밀렌 아겐호프와 함께 바란이 지닌 계획의 가장 귀중한 재료가 되어 줄 이름이었다.
‘기사 갤리거.’
“대애…령했습니다. 저언하.”
바란은 털레털레 걸어 들어온 기사의 수더분한 얼굴을 엿보았다. 진한 남부 사투리와 반쯤 내리감긴 두 눈.
기사 갤리거.
사사바란 공작의 삼남이자, 가족살해자. 대공을 배신한 자. 왕자의 충견. 저 이름에 뒤따르는 칭호는 무척 많았다. 세간에 알려진 갤리거의 사연이 워낙 극적이었던 탓이다. 공작이 자신의 다섯 아들을 대공에게 헌정하였던 때에 갤리거 역시도 아비의 뜻대로 순순히 충성서약을 해 대공의 기사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앙살라테에게 감화되어 스스로 신성한 약속을 깨부쉈다.
코코탄 전투에서 친형제를 도륙하고 충성을 증명한 무시무시한 남자였다. 사사바란 공작은 갤리거의 이름을 가문의 계보에서 불태워 없애버렸고, 갤리거 사사바란은 그 일 이후 그저 ‘기사 갤리거’로 불리게 되었다.
장자의 원수를 갚겠다고 이를 갈고 있는 사사바란 공작 측에서는 군침을 삼킬 만한 먹잇감이었다. 대공의 산하에 다시금 숨어들기 위해서, 바란은 이 미끼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건…. 레이먼드잖아?’
심각하게 굳어있던 머릿속에 낯익은 얼굴이 나돌며 분위기를 다 망쳐놓았다. 그런데 레이먼드의 꼴이 대체 왜 저럴까? 마치 전쟁은 혼자 다 치른 것처럼 낯이 핼쓱해졌고 값비싼 안경에는 금이 가 있었다. 바란은 반갑게 인사를 붙일 뻔했으나 곁에 선 아겐호프를 의식하여 의뭉을 떨었다. 사뭇 아연한 척 눈살을 찌푸렸다. 알은체 던지지 않은 것은 레이먼드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 비밀을 공유해 온 세 사람은 눈빛만 섞어도 의미가 통하는 편이었다. 지금의 경우에 감돌고 있는 분위기는, ‘일단 외부인은 내보내고 이야기하자.’ 하는 뜻이었다.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킨 앙살라테가 먼저 운을 뗐다.
“우선 선물은 받아두지. 갤리거 경.”
앙살라테는 무료한 황제처럼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그 작은 움직임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두에게 투명하게 전해졌다. 갤리거 경이 성큼 다가와 바란의 손아귀에서 밧줄을 건네받았다. 홱 잡아당기는 거친 손속 때문에 여리여리한 아겐호프는 날아가다시피 했다.
“윽, 잔악후작, 님…!”
낮게 바란을 부르며 신음했다. 애처롭지 않았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온 이상 바란이 아겐호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기실 바란은 무엇 하나 강요했던 적이 없다. 거칠게 표현하면 밀렌 아겐호프는 스스로 믿을 사람을 잘못 선택해서 구덩이에 빠진 것뿐이었다.
‘미련하도록 순진한 놈.’
바란은 생각했다.
밀렌 아겐호프에게는 그를 포로로 바쳐 앙살라테와 만난다는 일련의 계획을 미리 설명해뒀다. 바란에 의해서 한번 구출된 적 있는 아겐호프는, 일이 끝난 뒤에 구해주겠다는 막연한 기약에도 신뢰를 주었다. 동행한 며칠 사이에 마음속에서 홀로 친밀감을 키워낸 것 같았는데, 바란이 짐작하기로 신뢰의 바탕에 그런 감정적인 애착이 깔려있는 것 같았다.
‘트넴바 탑에는 어떻게 들어가시려구요? 거긴 왕자의 본거지인데….’
‘밀렌 아겐호프. 너를 선물로 내세울 거야.’
‘저, 를요? 저 같은 거 데려가신다고 왕자가 만나줄 턱이 있을까요?’
‘너는 날만도 남작의 사촌이니까. 그것도, 거의 유일한 사촌이지. 후사가 없는 남작이 각별히 아끼는 너희 쌍둥이들 중 하나를 후계자로 입양할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야.’
자살행위에 가까운 선택. 쉽게 결단이 설 리 없었다. 바란은 밀렌 아겐호프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려고 마음먹었다. 아겐호프가 곧장 고개를 끄덕인 것은 의외였다. 바람이 잦은 창가에 둔 촛불처럼 흔들리던 그는 이내 심지를 곧게 세웠다.
‘믿을게요, 후작님.’
결심을 굳혔던 그때와 똑같은 음색, 똑같은 박자를 가진 똑같은 단어가 아겐호프의 입술을 비집었다.
“…믿을게요.”
숨이 막혔다. 바란은 그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아겐호프가 이를 사리물고 끌려간 뒤에 남은 것은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바란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에 형성된 관계의 권력구도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바란은 앙살라테를 처음 만났을 때 가진 것 하나 없는 멀대 꼬마에 불과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앙살라테의 앞에만 서면 연장자에게 폭삭 훈계 당하는 어린아이가 되곤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꿈틀거리며 마른 침을 넘겼다.
계단참의 숨 막히는 적막을 깨부수고 왕자의 긴 한숨이 쏟아졌다.
“내 명령 없이 자리를 이탈하는 건 달갑지 않아, 꼬마.”
“꼬마 아닙니다.”
“사사로운 얘긴 됐어.”
단호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왕자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앉았다.
“본론부터 말해라.”
“갤리거 경을 빌려주세요.”
“…잠깐만. 지나치게 본론부터 말하는군, 꼬마. 전후 사정을 좀 설명해 봐.”
“저 아직 쓸모 있습니다. 전하. 절 이용해서 걸어볼 수 있는 기회가 남았습니다.”
부스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 웃음의 크기가 커다랗게 변할수록 바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 갔다. 바란이 벌레 씹은 듯 기분이 상했던 건 왕자 곁의 레이먼드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왕자에게 한마디 간언을 올리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바란에게는 건방진 말을 잘도 던지곤 했으면서.
아무리 오 년여 동고동락했다지만 충성을 바치는 상대는 이 바란 탈타미오가 아닌 앙살라테 드라코슨이라는 것일까. 바란은 잡념을 어렵사리 털어낸다.
“아직 탈타미오 후작의 명예는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제가 가진 발언권이 남아있을 겁니다.”
“대공은 사난타에서 너를 버렸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왕자의 웃음이 일시에 가셨다.
“너는 실패했어, 바란 탈타미오.”
“밀렌 아겐호프는 대공의 최측근, 날만도의 후계자인데도 제가 배신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 정체가 발각됐다고 판단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아마 사난타의 귀족 포로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네 정체를 알고도 침묵했던 거겠지. 남들 시선이야 잘 신경 안 쓴다지만 세력기반까지 흔들면 곤란하지 않겠어?”
앙살라테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구구절절 합리적인 판단투성이라 바란은 얼른 받아치지 못하고 더운 콧김을 씩씩 뿜었다. 상대가 자신을 어린아이, 혹은 이용해먹기 쉬운 순진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면서 나서려니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본들 헛소리로 치부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공이 저의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니카를 숨겨준 일로 저에게 적잖이 화가 났으니 심통을 부리고 있는 것뿐인지 모른단 말입니다.”
“그런 근거 없는 추측에다가 내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의 목숨을 걸 순 없다. 헬린 힐벤은 변덕이 심하지. 그 심내를 감히 네가 유추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만을 부리는 거다.”
“오만이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이 세상에 저만큼 힐벤 대공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바란이 헬린 힐벤의 곁에서 목숨을 부지하며 버틴 지가 어언 칠 년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첫 만남 때는 목에 칼을 들이대던 대공은 만남을 거듭할수록 바란에게 기묘한 흥미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앙살라테는 바란이 최측근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을 즈음에 크게 기뻐하며 그것을 우연히 굴러들어온 복이나 바란의 곱상한 낯짝 덕택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바란의 생각은 달랐다. 바란은, 대공의 안에서 고통과 모순을 낳는 소용돌이가 무언지 꿰뚫어 보았다. 대공 역시도 바란이 그를 직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간단한 논리였다. 헬린 힐벤은 이해자를 원했고, 바란은 남들보다 그의 원초적 욕망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 호감을 샀다.
이것이야말로 헬린 힐벤이 바란 탈타미오를, 남들 말을 그대로 옮겨 표현하면, ‘총애’하는 이유였다.
혹자는 그것을 집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남첩이니 뭐니 하는 헛소문도 대공의 비정상적인 언행과 바란에 대한 친밀감이 함께 촉발시킨 감이 있었다. 앙살라테도 그것을 알기에 쉽사리 반박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바란이 세워놓은 계획의 첫째 관문은 앙살라테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만성적인 수면 부족으로 인해 신경증에 시달리는 앙살라테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선 무척 조곤조곤 말해야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앙살라테의 눈매는 왈칵 어그러져 있었다.
“…난 도박을 싫어해.”
“트넴바 탑에서 마지막 전선을 사수하고 계시지만, 그마저도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꽃입니다. 뒤로 남은 배후도시는 잣자후가 전부이니, 애틀턴을 빼앗기고 나면 왕자님의 세력은 초전박살이 날 테죠. 왕자님, 뚜껑을 덮어 가둬놓은 불꽃은 곧 꺼집니다.”
멋대로 떠들어도 한마디 언질이 없는 것을 보면 상황이 심각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대공의 세력을 전복시킨다거나, 대단한 꿍꿍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시면 됩니다. 불길이 다시 타오를 수 있게, 제가 앞장서서 바람구멍을 내겠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틈이라도 파고들기는 충분할 겁니다. 더구나 갤리거 경과 같이 솜씨 좋은 기사가 내부로부터 공격할 기회를 갖춘다면.”
“…….”
“견고한 성일수록 작은 약점 앞에 굴복합니다. 약점은 곧… 기회가 될 겁니다. 왕자님의 기회가요.”
평소 같았다면 들어먹히지도 않았을 제안에 앙살라테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린다. 바란의 말솜씨가 발전한 덕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만큼 왕자가 처한 상황이 절박하기 때문이겠지. 어느 쪽이든 바란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대공에게 보내면 갤리거 경은 정말 죽을 수도 있어.”
바란이 씩 웃었다.
“누군 안 그런가요?”
구석에 치워둔 장기말이 스스로 체스판 위에 뛰어든 꼴이 달갑지만은 않았던 모양으로, 왕자는 바란을 한참이나 못마땅히 흘겨보았다. 아무리 소탈하단 평가를 받아도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주도권을 쥐고 살아온 드라코슨이었다. 심사숙고를 거쳐 앙살라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후작.”
바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꼬마’가 ‘후작’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무던히 생각했다. 말이 무게추가 되어 바란의 심장 위에 자리 잡았다.
“다만, 괜히 욕심부리다가 목숨을 구덩이에 처박는 꼴 안 나도록 조심해. 네 것이든, 갤리거 경 목숨이든.”
태연한 낯을 꾸며두고, 속으로만 ‘해냈다. 해냈어.’ 하고 때 이른 축배를 들었다. 고작해야 이제 계획에 착수할 권리를 얻은 것일 뿐인데도 들뜬 기분을 갈무리하기 힘들었다.
고문 후유증을 앓는 몸으로 긴 여정을 헤쳐 온 바란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긴장감이 한층 녹아내렸기 때문인지, 대화가 일단락 된 그 자리에서 바란은 술 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바란에게 펄쩍 뛰며 달려든 건 레이먼드였다.
“후작님. 후작님?”
“아…. 괜찮아.”
앙살라테는 약골 보는 듯한 눈빛으로 시작해서 시시각각 표정을 바꿨다. 레이먼드가 바란의 양 손목에 아직도 가시지 않은 시퍼런 멍 자국을 발견해서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후작님!”
“아…. 별거 아냐, 그냥. 감옥에 며칠 매달려 있는 바람에 손에 멍 자국이 남은 건데-”
“어디 봐요. 어디. 어깻죽지에 이 흉터랑 피딱지는 다 뭐예요? 맙소사. 진물 엉겨 붙은 것 좀 봐! 왕자님, 의원이 필요해요!”
레이먼드의 배짱은 왕자 앞에서도 여전했다. 바란은 몽롱한 머리로도 우왕좌왕하는 앙살라테의 표정이나 누가 윗사람인지 알 수 없게 윽박을 질러대는 레이먼드의 목청이 얼마나 우스운지 생각했다. 레이먼드는 앙살라테가 용병 시절에 만나 수하로 들였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일반적인 위계질서에 영향을 덜 받는 감이 있었다.
“감옥에 매달려 있었다는 게 무슨 말이지? 꼬마, 누가 널 매달아? 난 분명 락샴 편으로 네 취급을 잘 전달해두었는데….”
잣자후에서 왜 그의 뜻에 반한 가혹행위가 일어났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바란이 씁쓸하게 웃었다. 미처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기도 전에, 앙살라테의 영민한 머리가 돌아가 가장 있을 법한 이야기를 추리해냈다.
“잠깐만. 수리 짓이야?”
“…….”
“수리 녀석 짓이군. 맙소사.”
“제가 부마님을 죽인 범인이라고 생각하시더군요.”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에요. 바란이 덧붙였다. 왕녀가 주장하는 대로 클라텐이 그들 부부와 친밀한 사이였다면 가장 먼저 바란에게 의심의 화살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원망도 미움도 다 가신 초연한 바란의 태도에 비해서 앙살라테는 빈정이 많이 상한 듯했다. 물론 바란의 노고가 아닌 수리 드라코슨의 명령불복이 원인이었다.
“젠장. 아직도 그 사사바란 놈을 못 잊어서 내 명령까지 어기려 들었단 말이야?”
“…….”
레이먼드는 어쩐지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레이먼드가 설설 길 때는 정말 위험하단 뜻이다. 바란 역시도 세로줄 무늬를 그리며 어그러진 앙살라테의 이맛살을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거들었다. 어떻게든 노기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너무 왕녀님만 탓하실 일 아닙니다. 자세한 상황을 모르긴 하지만 돌아가는 꼴로 짐작하니 어느 늙은 집시…. 그 집시가 왕녀에게 줄곧 분노 조절을 방해하는 약물을 써온 것 같던데요.”
“집시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반전되었다. 왕자는 물론이고 레이먼드까지 백지장처럼 질려서 바란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막쉬롭 얘긴가? 응?”
“그, 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바란을 처치하려고 단검을 품에 숨긴 채 ‘참회의 방’까지 찾아왔던 늙은 집시. 그녀 이름이 아마 막쉬롭이었나 그랬던 것 같았다. 젊은 쪽 집시 손에 사고처럼 목숨을 잃었을 때는 얼마나 허무했던지 혀 차는 소리도 쉽사리 나오지 않았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적막함이 돌연히 의식되었다. 두 사람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바란의 말소리가 결론으로 뚝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바란은 이상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죽었습니다. 사고였는데, 단검이 눈에 박혀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더군요. 연락을 이미 받으셨을 줄 알았는데…. 그녀가 중요한 인물입니까?”
“…레이먼드.”
“예, 전하.”
“꼬마를 데리고 나가.”
더는 말없이 고개를 팔뚝에 묻는 앙살라테를 뒤로하고 레이먼드가 바란을 재촉했다. 의원에게 적절한 진찰을 받고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레이먼드가 이끄는 대로 계단참에서 벗어났다. 절망에 빠진 왕자의 모습이 기묘하게 여겨져 자꾸만 뒤를 돌았다.
“그래서….”
바란이 어렵사리 말문을 텄다.
“레이, 여긴 어떻게 왔어?”
“눈물 없이는 못 들을 여정을 거쳤죠.”
“놀랍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탑 내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좁다란 방이 몇 군데 남아 있었다. 남다른 크기와 모양의 창문으로 짐작하건대 평범한 방이라기보다는 전시에 포문으로 사용하던 것 같았다. 딱딱한 군용 침상이 펼쳐져 있었다.
레이먼드는 폐 밑바닥에서부터 한숨을 꺼내놓았다.
“…그러게 제가 느낌이 안 좋다고 말씀 분명히 드렸잖아요. 사난타에서 닭 쫓던 개 꼴 났다는 거 다 전해 들었어요. 탈타르에서는 상세한 정보는 다 제하고 탈타미오 후작이 대패했고 붙잡혔다, 이 정도가 다였지만요.”
탈타르의 귀족사회에서 보나 마나 바란에 대한 원성이 높았을 것이라 깨닫고 나니 레이먼드가 먼 길을 떠나 여기까지 나아온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왕자님께서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할 문제가 생긴 모양이니까 그동안 여기서 쉬면서 체력을 회복하세요. 의원은 제가 알아봐서 방으로 불러다 드리겠습니다.”
레이먼드도 몰골을 보면 여기에 도달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 보였지만 안내만큼은 썩 능숙했다. 집사로 살아온 세월 덕택이었을까. 바란은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누웠는데, 좀 전까지 멀쩡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갑작스레 잠기운이 쏟아졌다. 긴장의 맥이 풀리며 피로가 해일처럼 덮쳐든 것이었다. 레이먼드가 낮게 혀를 차면서 바란의 이마를 도닥거렸다.
“좀 쉬고 있어요. 후작님.”
끈적끈적한 꿈결에 빠져들기 전 바란이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레이먼드 말마따나 조금쯤은 휴식을 취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는 앞만 보고 달려야 할 테니까.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앙살라테는 약속했던 대로 기사 갤리거를 바란에게 내주었다. 배웅은 초라했다. 그나마 부족한 군마를 바란에게 내어줬다는 점에 감사해야 했다.
바란은 씩씩 콧김을 뿜는 짐승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옆에 선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기사는 검을 빼앗겼음은 물론이요, 자유를 박탈당하고 양 손목이 밧줄에 묶였다. 아겐호프가 끌려왔을 때와 비슷하지만, 더 견고하게 포박되어 있다는 점이 달랐다.
바로 갤리거 경이었다.
더벅머리와 듬성듬성 오른 수염 자국, 흐리멍덩한 눈과 순한 입꼬리 덕택에 갤리거 경은 동네에서 흔히 보이는 평민 청년 같은 인상이 있었다. 진한 남부 사투리도 걸쭉한 나무꾼을 연상시켰고, 귀족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공의 개와 동행하게 되다니, 미안해서 어쩌지. 경.”
바란이 먼저 말을 붙였다. 바란의 정체를 사방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 갤리거 경 입장에서는 모든 일이 갑작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상황 돌아가는 것으로만 보아서는 아겐호프와 교환되어 잔악후작에게 팔아넘겨진 거나 다름없었다. 바란은 그가 불편하게 생각할 것을 각오해 일부러 유들유들한 낯짝이나 말투를 준비한 참이었다.
“그쪽이 미안해할 거 어없소. 나는 내애 주군의 명령을 따를 뿐이니까아.”
적어도 신경질 부릴 정도는 감안하고 있었는데, 갤리거 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송아지 같은 눈망울을 끔뻑이며 곁으로 비켜났다. 포박당한 양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으니 말 위에 올라탈 수 있게 도와달라는 듯 바란을 돌아본다. 아무런 사감이 없는 맑은 시선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바란이었다.
“명령이 원망스럽지는 않나? 그쪽이 코코탄 전투에서 형제를 죽인 이후로 사사바란 공작도 힐벤 대공도 경한테는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잖아. 이대로 사자 우리에 던져지는 거랑 똑같다고.”
“대단한 일도 아아니오. 그리고 명령은 명령. 원망을 품는 것은 기이사 답지 못하오.”
“죽을지도 몰라.”
“그러면 그게 운명이겠지.”
거기까지 말하고 갤리거 경은 입을 딱 다물었다. ‘그’ 니카 경보다도 더 융통성이 없는 기사다. 이런 우직한 성격은 확실히 차남인 달틴 사사바란 경과 닮았다. 바란은 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이 올곧은 눈으로 잘도 충성서약을 배반하고 왕자에게로 돌아섰군 싶었다.
<4권 끝. 다음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