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소소한 기대 (2)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수리가 애틀턴에서 왕국 남단의 체첼드롭이라는 촌구석까지 내려간 것은 명분상 각지의 신전 구휼활동 현황을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뒤에 숨겨진 실상은 앙살라테의 비밀스러운 명령에 불과했지만.
수리는 클라텐, 이오와 어울리며 왕국의 미래에 관해 의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과 함께 앙살라테의 아래로 들어갔다. 이들의 의견이 다음 지도자가 헬린 드라코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데에서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는 성인식을 치른 이후 용병으로 생활하며 왕국 전역을 누볐다. 그가 애틀턴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용병 앙살라테가 쌓은 선행에 대한 미담이 온 왕국에 자자한 수준이었다. 이후로도 앙살라테는 백성들의 삶에 면밀히 신경을 써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는 데 지원을 퍼붓거나, 새미언 왕에게 간언을 해 억울한 처지의 소작농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왕자는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성군의 재목이라 불리며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새미언 왕이 정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앙살라테 왕자가 왕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것이라는 소문이 귀족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널리 퍼졌다. 수리를 비롯한 세 사람이 앙살라테를 찾아가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앙살라테는 “그래. 고맙구나.” 하며 이들의 가담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집무실에서 온갖 서류를 뒤적이면서 바쁜 티를 톡톡히 내던 앙살라테는 수리가 민망한 기분이 들 때까지 카우치 위에 홀로 앉아있게 뒀다. 한 시간이 조금 덜 지났을까, 비로소 앙살라테가 다가와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미안, 오래 걸렸지.” 하면서.
수리가 어릴 적부터 동경해 마지않았던 옅은 금발은 뒤로 질끈 묶여 있었고, 서류작업을 할 때 착용하는 굵은 안경을 쓴 채였다. 수리는 바늘 들어갈 틈조차 없는 이 완벽주의자에게 자신과 같은 피가 반쪽이나 흐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급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어. 네가 체첼그람에 좀 가줘야겠다. 중요한 일이야.”
“체첼그람이요?”
“그래, 수리. 신전 시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거기서 네가 찾아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어.”
앙살라테는 목소리를 낮춰 그것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전에 수리에게 침묵 서약을 먼저 받아냈다. 누구에게 그 정보를 흘리지 않겠다고 가슴 앞쪽에 ‘마음을 걸어 맹세한다’는 표시를 두 번이나 보태고 나서야 앙살라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인을 하나 찾아서 데려 와줬으면 해.”
매끄럽게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덜커덩대며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수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왕자의 부탁은 체첼그람 신전 보육원으로부터 용인을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용인이라면 왕국 남부로 밀려난 토룡이라는 파충류 마수가 인간과 교합하여 낳은 새끼로, 불결한 존재로 여겨지는 혼혈인이었다. 대개 낮은 지능과 흉측한 외관을 가진 이들은 인간과는 다른 존재, 마수나 짐승으로 여겨졌다. 수리는 그런 존재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표현하는 앙살라테의 심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착했습니다, 왕녀 전하.”
두 번의 노크와 함께 마차 문이 열렸다. 수리는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붉은 염료로 물들인 손뜨개 모자를 눌러썼다. 체첼그람은 다른 도시보다야 기온이 높고 겨울도 늦게 도래하는 편이었지만 해풍을 정면으로 받는 해안 도시였기 때문에 바람이 많았다. 옷차림을 두껍고 따뜻하게 해야만 했다. 평소 복사뼈 아래로 깎여져 있는 구두를 고집하는 하얀 발등이 따뜻한 털신에 뒤덮여 있었다. 체첼그람으로 떠난다는 소식에 이오가 선물한 신발이었다.
이오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짓무를 때까지 오물거리며 “굳이 거기까지 가실 이유가 다 뭡니까….”하던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수리는 짧은 웃음을 내쉬었다. 웃음소리가 하얀 김으로 탈바꿈해 공중으로 올랐다. 눈길 위에 발걸음을 디뎠다.
신전과 그에 딸린 보육원은 왕녀의 방문을 맞이하고자 적잖이 힘을 들인 태가 났다. 그녀가 한 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겨울철에 구하기도 힘든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걸어 나온 꼬마아이가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단정히 절했다. 아이의 입술이 얼마나 기괴하고 인위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던지, 수리는 자신이 상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하나 골라 구매하려는 손님이라도 된 것 같아 불쾌해졌다.
“그런데 보육원에서 돌보고 있는 건 지금 여기 모인 인원이 다인가요?”
“아… 거의 그럴 겁니다. 사실은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날이면 날마다 담벼락을 넘어 바깥으로 몰래 나갔다 오는 아이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 나잇대 아이들이 어른 말 안 듣는 거 아시지요? 허허, 필요하시다면 아이들 신상정보를 적어둔 서류를 가져올까요?”
앙살라테는 기밀을 유지하라고 당부했었다. 수리는 가만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런 지방 신전은 애틀턴의 중앙 신전보다도 토호들의 입김이 더 세기 마련이었다. 혹시라도 수리 드라코슨이 특별히 어떤 아이를 찾아다녔다는 말이 새어나가 대공 측에 전해지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플 것이다. 미소지으면서 “천만에요. 저는 그냥 신전 운영 현황을 살펴보러 나온 것뿐인데요”하고 어물쩍 넘겼다.
그때 창밖 풍경에 우연히 수리의 눈길이 닿았다. 흰 눈이 잔뜩 쌓여 있는 게 아니었다면 도무지 발견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웅크린 청년을 발견했다. 사실 처음에는 보육원에서 맡아 기르는 소년 중 하나이리라 생각했는데, 몸집을 어림해보니 그를 둘러싸고 돌팔매질하는 이들보다도 훨씬 기골이 장대했다.
“저자는 누구죠?”
“예? 아….”
수리의 곁으로 걸어 나와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샅샅이 살핀 사제가 떨떠름하게 혀를 찼다.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보육원에서 맡은 용인입니다. 신경 쓰실 거 없는 놈이에요.”
“용인이요?”
“예, 뭐…. 사실상 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마수의 혈육을 받아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신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것이 다 뭐겠습니까? 마을에서 어릴 적에 버려진 것을 우리 사제들이 거두어 먹이고 입혔습니다. 집시 여자가 토룡의 새끼를 밴 모양인데 이런 추악한 걸 누가 자진해서 맡으려고 하겠느냔 말입니다. 어느새 약관도 넘겨 장성하였지만, 과연 피는 못 속이는 것인지, 제 앞가림도 못 하는 한심한 놈입지요. 잡일이나 거들면서 줄곧 신전에 붙어사는 판입니다.”
정수리를 까마득하게 내려볼 수 있는 위층 창문으로부터 용인을 내려다보는 왕녀의 눈빛이 흐렸다. 앙살라테가 왜 하필 그녀를 지목하여 이 부탁을 내렸는지 단박에 눈치챈 까닭이다. 불덩이 같은 분노가 목구멍을 넘보았다.
앙살라테 드라코슨은, 자신이 결코 알지 못할 업신여김으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을 보냈던 수리가 저 용인을 잘 달래어 꼬여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거다.
‘동병상련이라 이건가, 진짜 재수 없어.’
영리한 것 하나는 인정할 만했다.
“더러워!”
“너도 씨발, 네 애비 찾아서 지협 아래로 꺼져버려. 어디 사람들 사는 데에 발을 붙이고 있어?”
“마수 새끼면 마수 새끼답게 얌전히 고개나 처박고 다닐 것이지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냐고, 그러니까. 이제 정신 좀 드냐?”
수리와 비슷한 정도로 키가 큰 남자아이들은 성인식을 앞둔 나이로 보였다. 신전 보육원에서는 열여덟까지 양육하고 그 위로부터는 밖으로 내보내서 장인의 도제로 들어갈 수 있게 돕거나 마을의 갖가지 일자리를 알선했다. 얼마 안 있어 보육원을 나가게 될 아이들은 어른 흉내 내기를 즐겼다. 어른의 모습을 따라 한다는 것은 그들의 판단하기 좋아하는 성미, 편견이나 증오, 떼 지어 주먹질하는 습관까지도 답습하는 것을 의미했다.
“도롱뇽 새끼.”
“용인, 더러운 용인!”
수리는 기척을 죽이고 멀찍이서 이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눈과 범벅이 된 커다란 자갈돌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용인에게 내던진다. 시끄럽게 명중하는 소리는 포근한 눈송이에 미처 다 파묻히지도 않았다. 수리의 귀까지 두개골에 명중해서 나는 “딱!” 소리가 닿았다.
이내 거칠게 움직이는 아이들의 소맷자락 틈바구니로 웅크려 와들와들 떠는 용인의 검은 머리칼과 하얀 가르마가 보였다. 시시하게 떨고만 있는 반응은 상대를 김새게 만들기 십상이었다.
“다음에 눈에 띄면 두 다리로 못 걸어 다니게 만들어주마. 퉤! 재수가 없으려니.”
“잘 알아들었냐? 퉤.”
가래침을 내뱉은 어린애들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비켜났다. 개중에 몇 아이가 수리의 존재를 보고 저희들끼리 쑥덕대며 주변을 다급히 돌아보았다. 사제들이 대개 이 꼴을 묵인하기는 했으나 익히 전해 들은 귀한 손님 앞에서 지저분한 꼴을 보였으니 경을 칠까 두려웠을 것이다.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나갔다. 달음질이 어찌나 빠른지 속으로 숫자 몇 세지 않아서 이들의 꽁무니도 볼 수 없었다.
“…무서워서 아무 말도 없이 떨고만 있었어요?”
수리는 바닥에 웅크린 용인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거두어 입히고 먹이고 어쨌다면서 생색은 다 내던 사제의 말에 비해 바닥에 주저앉은 청년의 행색은 지나치게 남루했다. 신전 보육원 예산이 모자라다지만 걸레짝으로도 못 쓸 얄팍한 튜닉을 입히는 것은 이 추운 겨울에 얼어 죽으라는 거나 다름없었다. 드러난 가냘픈 목덜미가 이미 찬바람에 빨갛게 얼다 못해 푸르딩딩했다.
“저 애들 겁나서 그랬냐고요.”
“…….”
“안 해쳐요.”
다 헤진 옷감은 물기에 젖고 맨땅을 구르면서 구멍도 송송이 나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수리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는데, 용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제 어깨와 몸을 문지르고 안았다. 아무리 기척을 내거나 물음을 던져도 대답이 없기에, 수리는 친히 용인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드라코슨인 그녀가 눈높이까지 맞추어주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촌구석 용인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다가온 애틀턴제 신발코 하나만으로 충분히 드문 경험일 터였다.
그것을 증명하듯이 용인이 낯선 고급 털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수리의 뒤로 햇살이 빛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이맛살을 찌푸렸다. 수리는 드러난 낯에 붙은 파충류의 검은 비늘과 남부 집시들에게서나 흔한 검은 눈, 그리고 그 안에 뾰족하게 선 동공 같은 마수의 형질들을 보고 놀라서 멈칫 뒷걸음질을 쳤다.
수리를 올려다보던 눈동자가 살그머니 다시 아래로 깔렸다. 어쩐지 나지막한 실망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하는 것 같이. 마음이 불편했다.
“다쳤어요?”
수리는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낯짝에 가득한 혐오스러운 비늘을 보고서도 자신에게 말을 붙일 거라 생각하지는 못했는지 용인은 과도하게 놀랐고, 어깨를 와들와들 떨었다. 윗니와 아랫니가 요란하게 달각거리면서 부딪쳤다. 왕족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넘어가려 하다니, 괘씸죄로 당장 목이 베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싶었다.
“상처 잠깐 봐요.”
엉덩이를 뒤로 꼼지락대며 물리는 용인이 감싸 안고 있는 팔 한쪽을 털장갑 낀 수리의 손이 붙잡아 번쩍 들었다. 용인은 거의 경련하는 것처럼 붙잡힌 팔을 떨었는데, 작살에 꿰인 물고기가 파드득거리는 움직임과 다름없었다. 정작 반항이 거세지는 않았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한 낡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타박상이 있나 살피는 데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뭐야?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네요. 다치지도 않은 거 같은데.”
“용인의 몸에는 쉬, 쉽게 상처가 나지 않습니다.”
어눌한 목소리가 마침내 터져 나왔다. 용인은 파랗게 언 입술을 꼬물거리며 움직였다. 물기 없이 바싹 말라 하얗게 껍질이 일어나 있었다. 윤활을 위한 수분이 아예 없으니 조금만 입술을 놀려도 찢어져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그런데 왜 겁을 먹죠?”
용인의 목구멍에서 흐느끼는 듯이 알쏭달쏭한 목 울림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높다랗게 불쑥 솟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몸을 웅크렸다.
“…몸이 튼튼하다고 마, 마음마저 성하진 않습니다. 저들의 모든 말이 저에게는 비수와 같습니다. 왜 겁을 먹느냐고요? 고통이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채, 채찍질에 겁먹고 몸 사리는 짐승들처럼…. 하기는 저 같은 요, 용인이 짐승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팔 한 아름으로 선을 긋고 가둔 자신의 세상으로부터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린 용인이 왕녀를 응시했다가,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수리에게는 그것이 마치 늪 안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천한 피와 섞인 잡종이라고 왕성에서 손가락질받던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그 위로 겹쳐 보였던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그들이 미운가요?”
한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남을 낮잡아 볼 때 생기기 마련인 우월감 대신에 가슴이 후벼 파이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왕녀는 용인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자신을 겹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완벽히 부정할 수 없었다. 넌지시 던진 질문에 용인이 당혹감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하고 답했다.
“…밉습니다.”
“화가 나요?”
“예.”
수리는 용인에게 팔을 뻗었다. 주먹질을 오래도록 받아내며 살아온 몸뚱이는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지레 움츠러들었다. 잠잠히 눈길을 주었더니 등을 슬그머니 쭈그리고 제 무릎을 안은 채 숨을 고른다. 장갑을 씌운 수리의 손가락이 용인의 얼어붙고 부르튼 손등 위를 두드렸다. 이내 손을 꼭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용인은 비척거리며 땅 위에 발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따라와요.”
드라코슨이되 드라코슨이 아닌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수리는 왕녀라는 감투를 적절히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다리를 꼬고 앉거나 손가락으로 암레스트를 두드려서 심기가 불편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면 주변에서는 절로 눈치를 봤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 원하는 바를 슬그머니 풀어놓기 시작하면 상황은 저절로 의도한 대로 흘러갔다.
“왕녀님, 말씀하신 아이들을 전부 붙잡았습니다. 기사들이 이리로 데려오는 중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곧장 대령하겠습니다.”
“그래요.”
“저희도 골치를 앓던 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녀님 안전에서조차 그런 불한당 짓을 했을 줄이야…. 다 우리 사제들의 불찰입니다. 사죄드립니다, 전하.”
사제가 무표정하게 올려다보는 수리의 눈빛을 비굴한 웃음으로 상대하며 슬그머니 자신의 목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보육원에 스무 해를 넘겨 기생하고 있는 용인에게 왕녀가 뜻밖의 관심을 기울이는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신전에 몸을 의탁하고 자질구레한 일을 맡은 하녀가 트롤리를 밀고 들어와 수리가 요청한 따뜻한 차를 두 잔 내려놓았다. 둘 중에 한 잔을 사제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내려놓으려는 것을 수리가 손짓으로 말렸다.
“용인에게 줘요.”
“예?”
“말귀를 못 알아듣나요?”
나긋나긋한 물음에 가득 담긴 단호한 뜻을 알아듣고 하녀가 얼른 분부대로 했다. 용인은 제 앞에 놓인 고급 찻잔과 컵 받침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수리에게 무언가 물어보려던 것 같았는데,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 고귀한 드라코슨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감히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윽고 숨죽은 침묵을 깨고 해안가 주택 처마마다 내걸린 건어물 꾸러미처럼 줄줄이 새끼줄에 묶인 소년들이 들어섰다. 눈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조아리는 이 소년들은 좀 전에 용인에게 모진 말과 폭력을 쏟아내던 장본인들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한 채로 겁먹은 눈만 왕방울처럼 커다랗게 뜨고 있던 이들은 왕녀의 곁에 나란히 앉아 있는 용인의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낌새를 챘다.
“돌팔매질을 할까요? 그걸 원해요?”
왕녀가 용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귀 뒤로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을 넘기면서 하는 목소리는 마치 저녁식사에 관해서 의논하는 것처럼 태연하고 여상했다. 조금 크고 앞으로 굽어 있는 독특한 모양의 귓바퀴가 드러났다. 용인은 잔뜩 굽은 어깨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가는 시선을 겨우 들어 올려 그 귓바퀴를 슬쩍 쳐다보았다. 얼른 다시 눈길이 아래로 처박혔다.
“아니면, 마음에 드는 사죄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매질하라 할까요?”
이 제안에도 용인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용인을 짐승 그 이상으로 대접한 적 없는 소년들이 간절히 애걸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말솜씨도 없어서 몸을 들썩이며 기껏해야 “제발….”하는 탄식이 전부이긴 했다.
수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턱수염을 매만지고 있는 사제를 방 바깥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호위로 붙은 기사에게 검을 달라고 지시했는데, 기사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분부를 거스르지는 않았다. 날이 잘 선 장검을 받아든 왕녀는 손목에 부담이 가는지 허공에서 이 날붙이를 몇 바퀴 돌렸다. 날을 세운 방향대로 내리그으니 쉭쉭 대는 소리가 났다.
어떤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직감한 아이들 중 하나가 다짜고짜 용인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달려들며 “잘못했어! 살려줘!”라고 외쳤다. 그 아이와 한 줄로 묶인 다른 아이들은 엉겁결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가 먼저 터뜨린 것인지 알 길 없는 흐느낌이 응접실 안을 가득 채웠다.
수리는 검신을 장갑 낀 손으로 살포시 눌러 잡고, 용인에게 손잡이를 겨누었다. 건네주었다는 표현 쪽이 더 알맞을 것이다. 용인이 새까만 눈을 들어 수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진폭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잡아요.”
“…….”
“밉다고 했잖아요. 화가 난다고 말했죠. 독 같은 감정을 계속 안에 담아놓는 것은 당신한테만 손해예요. 오늘 끝장을 보고 털어버리자고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저들의 마음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할 테니 대신 몸에다가 고통을 새겨주면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무서워서 그래요? 심약하기도 해라.”
용인은 왕녀의 부추김에 못 이겨 검 손잡이를 움켰다. 난생처음 잡아보는 전투용 장검의 묵직한 무게에 용인은 잠시 당황했으나 거뜬히 들어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수리는 그 모습을 보며 무표정한 낯 아래로 앙살라테가 어째서 이 자를 비밀리에 입수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을지에 관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쩌면 검에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에 문외한인 수리가 보기에도 용인이 검을 무척 안정감 있게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못하겠습니다.”
검을 들고 몇 발짝 다가가는가 싶었던 용인은 견디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왜요?”
“저들과 또, 똑같은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왕녀는 더 이상은 다그치는 일 없이 기사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주어 바닥에 엎드러져서 울부짖는 어린애들을 전부 내보냈다. 목청들이 어찌나 좋던지 귀가 다 먹먹했다. 용인은 왕녀의 명령을 어겼으니 죗값을 치르게 되리라 예상한 모양으로 죄인처럼 떨고 있었다. 검은 이미 고스란히 바닥에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살가죽을 뚫을 기세로 용인을 지그시 노려보던 수리가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용인은 영문을 몰라 처박은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어리숙한 용인은 난생처음 찬란한 미소를 목도했던 것이다. 매료당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미 그녀는 그의 천한 손을 붙잡거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옆에 앉히는 등 외로운 용인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갖은 행동을 수없이 많이 행한 참이었다.
“당신이 방금 누구든 한 사람을 결딴내려 들었다면 애틀턴에 데려가는 것을 재고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예? 절… 애틀턴으로요?”
“그래요. 마음에 들었거든요.”
자질구레한 설명은 전부 다 생략하겠다는 듯이 왕녀가 손을 내저었다. 용인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에, 마치 그 손가락이 마술을 부리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분노를 폭력으로 발산하는 얼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그런데, 당신 이름이 뭐죠?”
용인이 홀린 듯이 대답했다.
“니카. 니카입니다, 왕녀님.”
* * *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평화 속에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고…. 제가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니카는 앞으로 살짝 굽어 있는 독특한 모양의 귓바퀴에다 울음 같은 목소리를 토해냈다. 왕녀의 움직임이 둔해졌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소용없는 몸부림은 그만두기로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 날로부터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저는 당신에게 이미 매료되었으니 세상을 멸망시키고 싶어 하신들 그저 납죽 따라갔을 겁니다. 다만…. 당신은 내게 뭐가 옳고 그른지 전부 가르치셨습니다. 외로이 자랐어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본보기를 보이셨습니다. 지금 하시려는 행동은 왕녀님답지 않습니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하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절절한 말이 심금을 울리기라도 했을까. 수리는 녹색 눈을 들어 니카의 가늘어진 눈매에 물기가 차오른 것을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경이 나를 사랑한다고요?”
“…….”
“하하…. 우습다, 진짜. 경은 안 우스워요?”
수리는 품위도 잊고 뱃가죽을 팽팽히 당겨가며 파안대소했다. 반면에 니카는 머리 꼭대기부터 얼음물을 흠뻑 뒤집어쓴 것 같이 전신이 아릿하고 고통스럽다. 사자 굴에 머리를 디미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위험한 줄을 알면서도 구태여 반문했다. 수년 동안이나 간직해 온 마음이 저 냉소적인 웃음 한 줌에 전부 별것도 아닌 겉치레가 되어 무너졌다. 속이 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왕녀는 대답 대신 팔을 뻗었다. 흐물흐물거리는 가느다란 팔뚝이 니카의 목둘레를 휘감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이 몸통으로 솜씨 좋게 먹잇감을 둘러싸 다스리는 것처럼. 그리고 미적지근한 숨결이 얼굴 살갗에 훅 끼친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입술이 닿았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니카가 뒤로 내빼면서 떨어졌나 싶었던 따뜻하고 촉촉한 살덩어리가 다시금 다가와 니카의 건조한 입술 위에 담백하게 내려앉았다. 니카는 황급히 바란이 있는 철창 안을 돌아보았다. 은애하는 왕녀님께 꿈꾸는 듯 과분한 입맞춤을 받은 시점에 왜 잔악후작에 먼저 생각이 미쳤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니카의 심장은 설렘으로 내달리기보다 아주 차가운 심해에서 열을 모조리 빼앗긴 것마냥 차갑게 식었다. 보드라운 손에 끌어안긴 뒷목이 서늘하게 당겼다.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어서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솟아났다.
“지금 무슨 기분이에요?”
“…좀 쉬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왕녀님,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이오와 처음 입을 맞췄을 때…. 나는 내 영혼을 전부 빼앗긴 것만 같았어요. 사랑이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해요. 경도 그런 기분을 느꼈나요? 날아갈 것 같고 그래요?”
대답은 니카의 딱딱하게 굳은 낯이 말해주고 있었다. 우습다는 말을 또 중얼중얼 반복하면서 왕녀는 “하하, 그것 봐. 우습다니까.”하고 웃었다. 몸에 중심을 홀로 잡지 못해서 니카에게 한 팔을 여전히 두르고 잡아당겼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경은 어차피 내가 아닌 누구라도 좋았던 거예요. 손을 내밀어주기만 했다면 누구든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
니카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감정에 망치질이 때려 박혀 거대한 금이 갔다. 손을 내밀어줬다면, 누구라도 괜찮았을 거라고? 그럴 리가 있을까.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면서 왕녀에게 따지고 들 작정이었다. 그렇게 가볍고 쉬운 감정인 줄 아느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잔악후작의 존재와 그가 내민 호의에 열여덟 니카가 얼마나 열병 같은 연모에 빠져들었는지를 상기하고 나니 니카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질리고 말았다.
“누가 그런 걸 두고 사랑이라고 말해요? 당신 감정은 오히려 더 본질적이고 본능적인 단어에 가까워요. 욕망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네요. 젠장, 그런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수리는 눈을 끔뻑이다가 니카의 가슴팍에 정수리를 갖다 대고 꾹 눌렀다. 붉은 머리카락에 가린 턱관절이 한껏 벌어져 움틀 거리는 것을 보면 한바탕 하품을 했으리라.
니카는 막쉬롭의 의미심장한 눈짓이나 왕녀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해대는 일, 방금 기습적으로 당한 입맞춤부터 방금 들은 저 말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아서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는 왕녀를 부둥켜안고 길 잃은 아이처럼 서 있었다. 이내 지끈거리는 두통을 다스리면서, 우선 왕녀부터 방으로 모시자 생각한 참이었다. 니카를 붙들고 버티던 왕녀의 몸뚱이에 힘이 탁 풀리며 무너져내렸다.
“왕녀님?”
대답이 없었다. 목 언저리에 손가락을 대고 맥을 짚으니 정상적으로 콩콩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암만 체력이 약하다고는 해도 이렇게 자주 혼절한 역사가 없었다. 즉시 막쉬롭에게 의심의 화살이 향했다. 니카는 왕녀의 허리께를 추어올려 안다시피 하고 건너편의 집시 노파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글쎄요, 간밤에 보니 왕녀님께 감기 기운이 좀 있더군요. 정확한 건 진찰해 봐야 알겠지만 말입니다.”
막쉬롭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매끄럽게 대답하는 태도가 능구렁이 같아 치가 떨렸다.
* * *
빛을 알지 못했더라면 사위가 어두운 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니카를 알지 못했더라면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의 고통을 바란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그 날로부터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바란은 부둥켜안은 연인의 모습을 멀거니 보며, 여인에게 지독한 외사랑을 마침내 고백하는 니카의 애끓는 목소리를 들으며…. 바닥을 알 수 없는 비탄에 잠겼다.
바란은 오물 때와 악취와 그 밖에 한심한 패배자에게 어울리는 냄새나고 추악한 배경에 버무려져 무의식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참하고도 비참했다. 귀가 먹먹하여 기사 나리와 왕녀 전하가 저희들끼리 쑥덕이는 목소리도 바란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귀로 옮겨온 것처럼 시끄럽게 쿵쿵거렸다.
‘무슨 기대를 한 거야.’
낯부끄러운 망상을 혼자서만 주워섬겼으니 망정이었다. 만일 니카와의 황홀한 미래를 꿈꾼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표현했던 적이 있었더라면 지금 당장 혀를 깨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벌거벗은 것 같이 엄습하는 수치심은 견딜 방도가 없었다.
‘상대는 니카 경이라고, 니카 경. 내가 그를 사랑하기도 전부터 수리 왕녀를 지독하게 짝사랑해 온 그 남자. 이길 도리가 있겠어?’
사람은 사랑에 목도 멜 수 있는 신기한 동물이지만 그렇다고 감정이라는 이름의 우물 안에 물이 늘상 솟아나는 건 아니었다. 퍼주고 퍼주다 보면 갈증을 느끼는 날이 오게 마련이었다.
그러니 사실상 청춘과 그 이후의 삶을 내내 잃어버린 부마를 애도하느라 낭비하고 있는 저 애절한 왕녀도 언젠가는 니카를 돌아보지 않으려나 내심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그것은 바란의 가장 큰 우려였다.
니카의 빈틈을 파고들겠다는 바란의 비열한 계획은 언제나 왕녀가 니카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거라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왕녀가 니카를 돌아봐주기라도 한다면 그림은 바란이 끼어들 곳 없이 무척 간단해진다. 엇나간 두 조각은 맞물려 한 쌍을 이루고, 바란은 그저 혼자 손가락이나 빠는 외톨이로 남게 될 것이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라. 포기하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지긋지긋한 사랑놀음에 언제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칠 셈이야. 그래서 내가 얻은 거라곤 여기 이 빛나는 수갑과 창살밖에는 뭐가 있어?’
입을 다물고 웃으니 콧구멍으로 허탈한 웃음이 샜다. 바란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뻐근한 몸을 뒤틀었다. 태연하게 몸을 꿈지럭거리는 것에 비해서 가슴팍은 위아래로 바쁘게 요동을 쳤다. 이상하게 숨이 가쁘고 머리가 어지러운 까닭이다.
‘그만두면 되잖아. 깔끔한 대답이 이미 나와 있어. 니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해. 마침내 왕녀의 사랑을 받게 됐는데 내 존재가 괜히 그를 흔들어 놓는다면 따놓은 당상 같은 부마 자리가 위태롭게 될 거야.’
부푼 가슴을 가득 채웠던 행복한 상상을 전부 거두어들여 어두컴컴한 마음의 늪 속에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몸집이 워낙 가볍고 들뜨는 기질을 가진 상상력이란 놈들이 늪 아래 가라앉을 생각은 않고 자꾸만 위로위로 떠올라 바란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아니. 아니야. 착해빠진 헛소리는 다 집어치워. 내가 왜 포기해야 해? 이건 불공평하잖아. 니카를 얻기 위해서 저 여자가 포기한 게 뭐가 있어? 나는 내 가족도, 작위도, 자존심도, 명예와 부와 모든 것,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바쳤는데!’
꾀병을 가장해 소리쳐서라도 저 바깥의 니카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바란의 마음 속에 피어올랐다. 그럴 수 있다면 뭐라고 목소리를 높일까 잠깐 생각했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라고 따지면 대꾸를 받을 수나 있을까?
바란은 고개를 즉시 가로저었다. 정말 턱도 없는 상상이다. 바란과 니카의 사이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만, 명예, 권력, 진영, 내전 같은 거창하고 몸집 큰 방해물들이. 넉 달간 이어진 달콤한 시간은 그 공간을 뚫고 둘 사이를 완전히 이을 수 없는 연약한 끈 같은 감정에 불과하다. 그 얄팍한 감정에다 대고 호소하는 것은 콧방귀와 비웃음이나 안 사면 다행인 짓거리다. 차라리 무슨 치명적이고 전염성 있는 괴질에 걸린 것처럼 피거품을 물고 경련하면 이 상황을 파하고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죽어버려. 전부다. 엿 같은 드라코슨들. 가능하면 아주 비참하게. 니카만 남기고. 나의 니카만 남기고.’
왕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니카의 가슴께에 처박히고 우윳빛 손가락이 니카의 목줄기를 슬금슬금 더듬어 오르는 동안 바란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수리 드라코슨을 죽이거나 비명을 지르며 꾀병을 부리는 상상을 했다. 상상이 충동으로 자라날 때 즈음에 제 처지가 눈물이 나도록 한심해서 누군가 뭐라고 말이나 한마디 건네줬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났다. 거칠게 팔을 출렁여서 쇠사슬이 서로 부대끼는 소음을 내 보지만 그 누구도 바란의 존재에 주목하지 않았다, 누구도.
왜냐하면 이때 미천한 천출 기사에게, 고귀한 드라코슨의 왕녀가 가히 충동적으로 느껴지는 입맞춤을 선사했기 때문이었다. 흐릿한 눈으로 보기만 해도 어떤 감촉과 온기를 지녔을지 대강 예상할 수 있는 왕녀의 입술이 니카의 부르튼 입술 위에 가 닿았다. 그 입술 위에.
가만히 계십시오, 하고. 바란에게 수줍게 입 맞추던 그 입술 위에.
‘아….’
눈으로 들이친 빛과 코로 느껴지는 모든 냄새, 청각, 촉각과 고통까지, 바란이 세상으로부터 흡수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갑자기 색깔을 빼앗기고 그저 그런 무채색의 종잇장처럼 의미 없는 요소로 격하되었다. 몸뚱이가 하나의 심장으로 탈바꿈한 것처럼 아주 빠른 박자의 소음을 몸 안쪽으로부터 느꼈다. 왈칵 바란의 목구멍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태 세상의 그 어떤 폭력과 날카로운 말도 바란을 부수지 못했다.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니카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삶의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짧은 키스 한 번에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바란이 신념처럼 굳게 간직하던 목표가 송두리째 뿌리뽑혔다. 실신한 왕녀를 부축해 나가는 니카의 뒤통수를 끈질기게 쏘아보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돌아봐 달라고, 그래도 여기 네가 사랑했던 잔악후작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있다는 작은 표시를 보여달라고. 그런 생각들을 담아서.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채 일 분에 달하지 않는 시간은 마치 영겁보다도 길었다.
문이 닫히고….
어둠이 찾아왔다. 완전한 어둠. 마치 니카를 처음 만나던 날, 침엽수림을 헤매이면서 숙부 하란토의 용병들에게서 달아나려던 그때처럼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어둠이다. 그 당시 이미 죽었어야 마땅한 바란을 여태 삶에 이어 붙여주고 있던 단 한 가닥의 실이 문 바깥으로 나가 사라졌다.
‘아.’
바란은 고개를 떨구었다.
‘누가 날 좀 죽여줬으면 좋겠다.’
바란의 철창 앞에서 얼쩡거리던 막쉬롭이 간수들의 어리둥절한 눈초리를 받으며 니카의 뒤를 따라 빠져나갔다. 사뭇 여유로운 인사를 남기고 뒤돌아 바깥을 향해 걸어나가는 막쉬롭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쪼글쪼글한 주름살 사이로 집시답게 새카만 눈동자가 총총한 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 *
“오늘도 고마워요. 아야야, 그런데 여기 오른쪽 손목이 너무 쓸려서 그런데 다시 묶어주거나, 뭐…. 방법 없을까요? 번거로운 부탁 해서 미안해요.”
“으음….”
“알아요, 원래는 나하고 이야기하는 것도 규칙 위반이라는 거. 그런데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부탁 하나만 해요, 네?”
손목을 포개어 결박당한 구더기가 우는소리를 했다. 그녀의 수발을 맡은 입 무거운 시녀가 곤란한 침음성을 냈다. 지금은 그저 입안에다가 포도주에 적신 빵조각과 물을 먹이러 들른 참이었다. 구더기는 곤혹스러운 시녀의 얼굴을 한번 보고 즉시 새침한 기세를 꾸며냈다. 속으로 숫자를 10부터 거꾸로 세어나가기 시작했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뜸을 들이는 쇼맨십이 필요하다.
“저번에 자기 손금 보고 내가 아들내미 약관 넘기기 전에 왜, 겨울 음식 때문에 고비 한번 겪는다고 알려준 거….”
“으윽.”
“나는 정말 선의로 그런 거거든요. 아무런 대가 없이. 원래 집시들이 복채 얼마씩 받아 처먹는지 아시려나 모르겠네. 근데 얼마 전에 어디 밤중에 급체했는데 미리 약첩 지어다 놨다가 바로 먹여서 체기 내렸다고 그랬지요? 잘 넘어갔으니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뻔했잖아요.”
구더기가 뜸을 들였다.
“제가 지금요…. 지금 대단한 거 바라는 게 아니고 그냥 손목 살갗이 너무 까져서 따가우니까, 네? 조금 매듭을 다시 매줬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 하는 거예요.”
“…….”
“그런 말도 못 합니까? 우리 사이에, 서운하게.”
마음이 약한 시녀를 붙여준 것은 막쉬롭이 행한 실수 중에 가장 큰 조각이리라 싶었다. 구더기는 제게 필요한 바가 있으면 양심이니 도덕이니 따지고 드는 인간이 아니었다. 수십 년 신세를 지면서 미운 정도 들었던 여관 주인이 용인 기사의 칼에 갈가리 찢겼을 적에 뒤도 안 돌아보고 손바닥을 비볐던 것만 봐도 뻔했다.
구더기의 애원에 못 이겨 슬그머니 오른쪽 손목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조금 느슨하게 매듭을 늘여 안에 헝겊을 덧대주겠다고 시녀가 말했다. 구더기는 단 한 번의 기회에 마른침을 삼키며 의뭉스럽게 웃었다. 이윽고 시녀가 다가와 허리를 구부리고 매듭을 풀었을 때였다.
“그럼 조금 기다리, 아악!”
“…윽.”
구더기는 다가온 시녀에게 머리를 냅다 부딪쳤다.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부담감에 조금 과도하게 들이받았는지 눈앞에 별이 반짝했다. 어지럼증과 함께 구역질이 났다. 구더기는 뒤로 나동그라지며 밭은 호흡을 몰아쉬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구더기는 오른손목이 자유롭다는 것과 시녀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급히 오른손을 완전히 빼내고 왼손에 달린 밧줄은 그저 달린 대로 두었다.
상반신을 침대 아래로 떨구다시피 하여 시녀의 옷자락을 뒤졌다. 배변 때문에 족쇄를 풀어야 하는 일이 왕왕 있었으므로 어딘가에 열쇠를 가지고 있을 터였다. 처음에는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려고 했는데, 정작 시녀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속전속결로 작전을 바꾸었다.
‘코쿤을 어디로 빼돌린 거지?’ 복도에 지나다니는 시중인들의 눈을 피해 벽에 몸을 붙이며 전진했다. 대리석으로 지은 잣자후의 화려한 순백색 성은 내장까지도 흰색에 과도하게 집착한 경향이 있었다. 땟국이 질질 흐르는 꼴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중년의 집시는 마치 성안에 침입한 새카만 딱정벌레, 얼룩, 오점같이 한눈에 튀었다. 발각당하지 않으려면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멈춰!”
“거기 서라!”
주의가 꼭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썩 오래 걸을 때까지 발각당하지 않기에 잠시 방심한 것이 화근이었다. 발등이 장식물에 거세게 부딪혀 낸 소음에 결국 추격전을 벌이게 되고 말았다.
구더기는 끈질기게 뒤를 쫓는 기사들을 피해 달음질치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코쿤이 어디에 있는지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섣불렀다. 성안에 어디 쥐구멍이라도 숨을 곳이 있을까 생각하며 철갑을 걸쳐 몸이 무거운 기사들을 따돌리고 모퉁이를 돌았다.
“그 집시 잡아!”
‘씨발.’
어느 귀한 분이 묵고 계신 방이었던 모양이었다. 방문 앞에 호위기사가 넷이나 도열해 있다 말고 뒤로부터 구더기를 붙잡으라는 외침이 들리자 앞으로 나섰다. 덩치가 산만 하고 우락부락해서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구더기는 살살대는 아첨과 샐쭉 웃는 눈웃음을 전부 동원해서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 했으나 멱살을 잡혔다.
“쥐새끼 같은 게 어디서 튀어나왔지?”
“하하…. 배가 고파서 숨어든다는 것이 저도 모르게, 참…. 죄송합니다, 나리. 내보내 주시면 새사람 되겠습니다.”
“좀도둑이었군.”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기사가 혀를 차며 구더기를 내동댕이쳤다.
“잡아넣어.”
“예?”
“지하에다 적당히.”
귀찮은 시궁쥐를 자청하면 적당히 풀어주려나 기대했으나 결국 지하감옥에 처박히게 생겼다. 구더기는 입술을 말았다. 그나마 막쉬롭이 모르는 사이에 거취를 옮길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둬야 할까? 구더기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그때였다. 기사들이 등지고 있던 나무문이 덜컥 열리며 여러 인원이 구더기 하나를 잡겠다고 귀찮은 추격전을 벌인 참이니 방 안에서도 소란을 눈치챘을 법했다. 어떤 귀족 마나님이 튀어나오든 간에 그 다리 밑에 기어들어 가서 설설 빌어볼 작정으로 눈을 빛내던 구더기는 뜻밖의 낯선 인물과 조우했다.
“…나리?”
왕녀의 침실로부터 밖의 동태를 확인하려고 잠시 고개를 내민 기사가 당혹감을 드러냈다. 매일 거적때기 같은 차림이나 하고 사난타에서 삯일을 하던 때와는 다르게 신수가 하도 훤해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구더기는 반가운 얼굴을 보고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가, 니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막쉬롭에게 떠넘겨 여태 감금생활을 견디도록 자초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세를 바꿔 눈을 세모꼴로 떴다.
* * *
“무슨 일이에요?”
물수건을 가져다 눈 위에 얹어두고 있던 수리가 허공에 대고 물었다. 잠시 바깥을 내다보고 오겠다던 기사가 묵묵부답이니 궁금할 법도 했다. 니카는 잠시 고개를 방 안으로 돌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안심을 시키려다 말고 저번에 거짓말을 했던 일이 생각나 그만두었다.
“막쉬롭이 맡기로 되어 있던 집시입니다.”
“저런, 길을 잘못 들기라도 했나 보죠?”
수리는 침대에 누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최근 연이은 실신으로 생활습관은 엉망이 되었고 체력은 전부 바닥이 났던 것이다. 막쉬롭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니카는 이미 참회의 방에서 수리가 혼절했던 때 그녀에 대한 불신에 사로잡혔고 그 길로 왕녀를 침실에 눕힌 뒤에 성에 상주하는 의원들을 불러들였었다.
“뚜렷한 이유는 없는 듯합니다. 아마 과로로 인한 피로가 중첩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의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영양 결핍이나 과로와 같이 대충 얼버무리기 좋은 이유만 가져다 댔다. 몸이 단시간에 그렇게 약해진 이유를 찾아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막쉬롭은 왕녀의 침실 앞에서 몇 번인가 기척을 내었지만, 기면증에 걸린 것처럼 자꾸 잠들기를 반복하는 왕녀의 곁에 니카가 흉흉한 기세로 버티고 있는 바람에 출입하지 못했다.
“나리, 이거 참 오랜만입니다.”
좀 전에도 바깥이 시끄럽길래 막쉬롭이 와서 버티고 있는가 생각했는데, 샐그러지게 웃는 저 낯짝은 사난타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함께한 구더기가 분명했다. 늘 한 몸처럼 데리고 다니는 꼬마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니카는 눈썹을 살풋 찌푸리고 어찌 된 영문인지 물으려 했다. 그런데 구더기가 선수를 쳤다.
“저 좀 보호해주세요.”
“뭐?”
“빨리요. 그 마귀 같은 할멈이 눈치채고 쫓아오기 전에….”
“마귀할멈이라니 무슨 소리야?”
“아, 시간 없어요!”
다짜고짜 소리를 빽 지르자 상황을 두고 보던 기사들도 돌연한 하극상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니카가 설령 출신성분이나 비빌 언덕으로는 바닥을 친다지만 그래도 최측근으로서 왕녀를 모신 경력 만큼은 최장에 달하는 위치였으니 왕녀가 손 놓고 지켜보는 지금 상황에서는 니카의 명령이 아주 중요했다.
기사들은 어떻게 하겠냐는 듯한 눈빛으로 손 놓고 니카만 바라보았다. ‘어떡하나 보자.’ 식이기도 하고, ‘역시 천것들끼리 유유상종이군.’하는 마음이 반영된 부분도 있었다. 니카가 구더기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어떤 대답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니카 경.”
“예, 전하.”
열린 문틈으로 말소리가 흘러 들어가 휴식에 방해라도 되었을까 염려되어 니카는 얼른 왕녀를 향해 돌아섰다. 문을 살며시 당겨 열고 네모난 틈을 널찍이 벌린 다음, 침대 휘장에 가린 인영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침상에 누워 힘없이 바르작대는 왕녀의 그림자를 마주한 니카의 표정이 어두웠다.
참회의 방에서 영문모를 키스를 받은 이후로 수리를 대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색하고 괴로워졌다. 물론 당시 수리 왕녀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지만, 그래도 한번 시위를 떠난 화살이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그녀가 뱉은 니카의 어두운 그늘까지 낱낱이 까발리는 모진 말들도 이미 니카의 마음에 박혀 있었다.
왕녀는 니카가 하고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라고 말했다. 니카는 그녀에게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하찮은 용인의 마음이라고 쉽게 말하는가 싶어 원망스러웠다.
‘경도 그런 기분을 느꼈나요?’
사실 가장 화가 나는 건 왕녀의 입술이 닿는 순간에 문득 잔악후작을 떠올렸다는 점이었다. 영혼을 빼앗긴 것 같았냐고? 왕녀가 그렇게 물었을 때 니카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진부한 감상을 느낀 적은 니카의 인생을 통틀어서 단 한 번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 한 번, 보드라운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 가 닿았던 그때.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너에게 수백 번은 키스를 받았을 텐데!’
숨이 콧방울 위를 둥글게 돌아서 뺨으로 부서질 만큼 가까웠던 거리. 빨간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황금색으로 빛나는 속눈썹, 깜짝 놀라 별빛 같은 이채가 서리던 새파란 눈.
‘좋아해, 정말 좋아해.’
흐릿해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숨 들이쉬는 것을 멈췄다. 감상에 잠겨 있던 니카는 왕녀의 지친 목소리에 붙잡혀 현실로 끌려 나왔다.
“들어오라고 해요, 그 집시.”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리고…. 저 집시의 신원은 경이 보장할 수 있는 거 아니었나요?”
니카는 구태여 구더기의 신원을 보장하고 나서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 안에 남아 있는 죄책감 때문에 토 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니카가 구더기의 신변에 대해 조금만 신경을 써주었다면 여기 잣자후에 포로 신분으로 끌려올 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기다시피 방 안에 들어온 구더기는 니카가 그녀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왜요?’라고 입을 뻐끔대었다. 뻔뻔하게 입술을 쫑긋 비트는 모습에 니카도 두 손을 다 들었다. 왕녀가 침대의 캐노피를 걷어내라고 명령했다. 니카가 그 곁에 가서 왕녀의 시야가 탁 트일 수 있도록 거추장스러운 휘장을 걷어냈다.
“자비로우신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눈치 하나는 알아줘야 했다. 어설프게 귀하신 분이겠거니 짐작하고만 있던 구더기는 니카가 방 안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안에 있는 게 드라코슨의 숙녀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무슨 일이지?”
니카가 나서서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소란을 피우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구더기가 침통하게 눈을 질끈 감고,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무슨 일이기는요. 잔꾀를 부려서 달아난 참입니다만,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여기 밧줄 보이십니까? 그 미친 늙은이가 절 어떻게 다루었는지 알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정말로.”
“잠깐, 미친 늙은이라니?”
“나리, 지금 몰라서 물으십니까? 당연히-”
니카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묻는 것에 구더기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뭐라고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노크소리가 나서 주의가 분산되었다. 니카는 구더기가 더 안쪽으로 들어오도록 손짓해서 불러들이고 문을 열었다.
왕녀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된 구더기는 넋이 반쯤 나간 것처럼 보이는 왕녀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폈다. 그러다가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쳐서 겁먹은 거북이처럼 얼른 목을 움츠렸다. 그런데도 별다른 꾸중이 날아들지 않았다. 기실 구더기의 존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의식 하고는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구더기에게 뭐라고 말을 붙이는 대신 왕녀는 가느다란 숨을 쌕쌕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몰아쉬었다. 문외한이 생각하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냄새가…?’
구더기는 왕녀의 발치에 눈치껏 조아렸던 고개를 들고 코를 킁킁댔다. 콧잔등에 세로줄 무늬 주름이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녀는 머리칼이 휘날리도록 재빨리 뒤를 돌았다. 니카가 방문을 젖힌 사이로 트롤리를 밀며 시녀 한 사람이 들어섰다. 트롤리 위에는 뽀얗고 비취빛이 나는 다기와 김이 오르는 주전자가 얹혀 있었다.
구더기는 다시 한번 확인하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틀림없었다. 그녀가 맡은 냄새는 저 시녀로부터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리송했다. 어디선가 맡은 기억이 있었는데 얼른 그 정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시녀가 예를 표했다. 이윽고 그녀는 아주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신속히 기름종이에 싸인 찻잎을 덜어 주전자에 넣고 찻물을 우려내기 시작했다. 구더기로서는 알 도리가 없는 거추장스러운 예법을 지키느라고 그나마 우려낸 물도 대접에 한번 버렸다.
오래도록 뜸을 들여서 마침내 왕녀께 올릴 차 한 잔이 완성되었을 무렵이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눈치만 살피고 있던 구더기가 쏜살같이 달려들어 시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무릎을 냅다 내쳤다.
“어머!”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 시녀는 거센 힘에 저항할 겨를 없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시녀가 요란하게 넘어지면서 발에 걸린 트롤리도 거의 위아래가 뒤집힌 수준으로 엎어지고 말았다. 귀한 다기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사금파리로 깨지고, 뜨거운 물은 사람에게 닿지는 않았으니 망정이지만 훌륭한 카펫에 얼룩을 먹이며 엎질러졌다.
“구더기. 뭐 하는 거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니카가 구더기를 불렀다. 눈살이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시녀는 달달 떨며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니카가 “치워라.” 하고 할 일을 꼬집어 알려주자 주춤대면서도 곧 침착을 되찾았다. 무거운 수레 일으키는 것을 거들어준 니카는 비로소 구더기를 돌아보았다.
“변명할 일이 하나 늘었군.”
“저, 저한테 감사하셔야 할 겁니다!”
평소와는 달리 장난기나 능글거리는 기운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이상한 노릇이었다. 이 말이 너무도 의미심장해서 니카는 덩달아 수레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에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왕녀는 니카가 빈틈없이 모시던 사 개월 전에도 티타임을 무척 즐기는 편이었다. 달라진 점을 꼽아보자면, 보통 내킬 때마다 가지던 티타임을 엄격히 일과시간으로서 지정해두거나, 전담하는 시녀를 뒀다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미심쩍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차를 더 좋아하게 되셨겠거니 생각되었다. 귀한 분들 세상에서는 워낙 흔한 일이었다.
니카는 슬그머니 침대에 누운 왕녀를 바라보았다. 좀 전에는 간만에 이성을 회복하고 니카에게 명령을 내리나 싶었더니, 지금은 추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솜이불 안으로 입술까지 파묻고 오들오들 떨며 이 대화에 일말의 관심도 갖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안위가 너무도 걱정이었다. 막쉬롭에 대한 심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니카는 구더기가 꺼내든 의미심장한 말을 한번 들어볼 요량이 생겼다.
왕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구더기를 볶아쳤다.
“그게 무슨 소리지? 뭔가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군.”
“젠장, 시녀에게 이게 대관절 무슨 차인지 대답해보라고 하십시오.”
왕족 앞에서 험한 소리를 지껄이는 천민이라니 당장에 예법을 들쑤셔서 능지처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구더기를 나무라는 대신에 묵묵히 시녀를 노려보았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챈 시녀는 말 그대로 와들와들 떨며 바닥에 엎드려 절하고만 있었다. 이 자리의 다른 누구도 아닌, 니카를 향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왕녀가 지금 판단을 내릴 상태가 아니라는 걸 공공연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무슨 차인지 말입니다!”
구더기가 비명처럼 외쳤다.
* * *
구더기가 체첼그람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라락크쉬.”
“샤먼 막쉬롭의 심부름으로 왔어요.”
“심부름이요?”
“예식 전에 정화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향불을 피울 말린 약초를 긁어모아 오라더군요. 보이죠? 여기 이 바구니에.”
“아….”
구더기는 철통같이 관리되고 있는 곳간에 숨어 들어가기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 있었다. 집시 무리를 지휘하고 다스리는 샤먼 막쉬롭의 외동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어머니 심부름을 왔다고 둘러대고 곳간 안에 발을 들이면 그만이었다. 더군다나 라락크쉬의 악명을 전해 듣지 못한 어리숙한 신입이 곳간 앞을 지키고 있음에야. 그녀를 막을 자 누구인가.
말이 침입이지, 곳간에 발 들이기는 누워서 식은 죽을 삼키는 일보다 쉬웠다.
“이리로 들어가십시오. 저는 출입구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수고하시네요.”
구더기는 싱긋 웃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진한 놈. 자, 이제 어떻게 개판을 쳐 본담?’
고대룡 체첼드롭의 부활을 기린다면서 의식을 준비하는 막쉬롭의 모습에 어린 구더기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고대룡은 절멸한 생명체였다.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져 신앙의 대상이 된다고는 하지만 이미 멸종한 개체를 들먹여 가면서 무지한 백성들을 가지고 재림이니 부활이니 지껄이는 건 기만이고 대죄였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판을 뒤엎고 어머니를 엿먹일 계획을 짰다.
의식에 쓰일 약초나 풀떼기를 죄다 섞어서 엉망진창 만들어 놓는다면 막쉬롭도 골치를 깨나 앓을 것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널따란 곳간 안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헝겊 덩어리인 줄 알았던 커다랗고 검은 덩어리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너 그거 건드리면 언니한테 혼나, 라락크쉬.”
“깜짝이야!”
비명을 지르고 세 발짝 멀어지고 나서야 검은색 덩어리가 로브를 아무렇게나 휘감고 쪼그려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멘사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라락크쉬, 너야말로.”
멘사야가 창백한 얼굴을 새카만 옷자락 안에서 슬그머니 드러내며 씩 웃었다. 볕을 보지 않은 것처럼 창백하고 흰 저 피부색은 남부에서는 흔한 형질이 아니었다. 멘사야의 피부와 검고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카락은 놀랍도록 잘 어우러졌다. 서늘한 목소리와 껑충하게 큰 키까지, 그녀는 마냥 아리땁지는 않더라도 눈이 자꾸만 가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멘사야가 뭐야, 멘사야가. 이모라고 불러야지.”
저렇게 곱게 웃을 때면, 구더기는 막쉬롭이 왜 하나뿐인 딸보다도 막내동생을 그렇게 끔찍하게 싸고도는지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하기는 멘사야와 구더기 사이에 나이 차이도 몇 살 나지 않는 판이니 막쉬롭 입장에서는 멘사야가 귀한 딸처럼 느껴질 법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막쉬롭의 멘사야 사랑은 유별났다. 눈밭을 걷다 넘어지기라도 할라치면 아랫사람들을 시켜 부족의 천막 근처에 내린 눈을 전부 다 쓸어 없애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너네 엄마 말씀이, 분명 네가 곳간에 기어들어 와서 깽판 놓으려 들 거라고 미리 지키고 있으라시더라.”
“이런 젠장, 그런 것도 예언이 들어먹혀?”
“글쎄, 예언이라기보다는 그냥 네 성격을 잘 아시는 거 아니야?”
멘사야가 검고 쭉 뻗은 머리카락을 하얀 손가락에 돌돌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막쉬롭 언니는 사랑이 많아서, 가족한테 관심이 많으시잖아. 그렇지?”
정말 가지가지 하는 자매였다. 구더기는 보란 듯이 “웩.”하고 소리를 내며 토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나 마나 멘사야는 귓등을 붉게 물들이며 웃고만 있었지만.
이날 하는 수 없이 멘사야의 손에 붙잡혀 바깥으로 나서던 구더기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도 좋았을 의문점을 하나 꺼내 들고 말았다. 한숨을 폭 내쉬며 돌아서는 구더기의 시야에 눈처럼 새하얀 옷감이 걸려들었다. 얼른 나가자고 재촉하는 막내 이모에게 구더기는 잠시 기다려보라는 손짓을 해 보이며 구석에 잘 개켜진 옷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수의? 아니면 의복인가?’
“라락크쉬, 뭘 보는 거야? 아… 혼례복이네.”
“혼례복?”
구더기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응. 라락크쉬는 잘 모르려나? 전통혼례복 같은 거야. 나도 들어서 알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지만…. 막쉬롭 언니 세대까지는 실제로 사용했다고 들었어. 요즘은 혼례 의식 자체가 많이 간소화돼서 보기 힘들어.”
“흐음….”
“그런데 혼례복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네.”
“그러게… 그것도 관처럼 생긴 상자 위에 둘 이유가 다 뭐야? 꼭 수의 같이 보이잖아. 소름 끼치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었던 단서들이 이날부터 구더기의 머릿속 한구석을 맴돌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려운 퍼즐처럼 느껴지는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더기는 매일 밤 의식을 위한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곳간에 사용한 흔적이 없는 새하얀 혼례복이 자리한 이유를 궁리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내린 밤이었다. 이 시각에는 이미 침대에 들었어야 하는 구더기는 이틀 후에 고대룡 재림 의식이 벌어질 산 중턱의 돌 탁자까지 올라가 이곳저곳을 한참 들쑤시고 다녔다. 이미 며칠째 이 비밀스러운 탐험을 이어온 참이었다. 별다른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을 막을 방도는 전혀 없는 것일까 하고 반쯤 포기에 잠기고 말았다.
이날 밤만큼은 달랐다. 성큼 거리며 그 주변을 조심성 없이 나돌던 막쉬롭의 귓가에 사람들이 대화하는 말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이곳은 산 중턱에 있는 신성한 의식 장소였다. 집시 의식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이 굳이 산행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찾아왔을 가능성은 드물었다. 몸을 낮추고 어두컴컴한 나무와 관목 뒤에 숨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었다.
“내일은 어떻습니까?”
귀에 익었다. 막쉬롭의 오른팔처럼 일하며 사소한 주술을 배우고 있는 청년 집시의 목소리였다. 무언가 의욕에 찬 목소리로 “오늘이요, 내일이요?”하고 알맞은 날짜가 언제일지 자꾸만 제시하고 있다. 주어를 전부 빼놓고 말하는 판에 구더기가 제대로 알아듣기는 요원했다.
“모레는 너무 늦습니다, 막쉬롭.”
‘방금 막쉬롭이라고 했어?’
흠칫 놀라서 구더기는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마 며칠 후에 있을 의식에 앞서 자리를 살펴보러 나왔다고 하면 이해가 갔다. 보통 아랫사람을 시키기 마련인데 이번 의식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있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남부 집시들은 마수신앙에서 시작된 역사가 있어 각 부족마다 섬기는 고귀한 존재들이 꼭 있었는데, 막쉬롭이 다스리는 부족은 고대룡신앙에서 뻗어 나온 갈래였다.
“글쎄….”
“당신은 미래를 예견할 줄 아시잖습니까.”
“점성술은 복잡한 기술이야. 타고난 재능을 요하는 데다 공부한 만큼만 엿볼 수 있으니까. 성패와 같이 섬세한 결과를 점치는 것은 결국 확률놀음에 불과해.”
정말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구더기는 더욱 기척을 죽였다. 막쉬롭은 정말이지 감각이 예민한 축에 속해서 조금만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간 위치가 발각당하고 경을 칠 게 분명했다.
“혹, 아직도 망설이고 계신 겁니까?”
“아니.”
“혈육의 정에 앞서 대의를 위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막쉬롭.”
“날 시험하려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은 계획대로 이뤄질 거다.”
막쉬롭이 차가운 목소리로 청년의 염려를 잘라냈다.
“라락크쉬에게 그 이름을 주었을 때부터, 그 애를 언젠가 고대룡에게 제물로 바칠 결심을 하고 있었어. 처음부터 그 운명을 감당하기 위해 낳은 아이니까.”
“…그렇군요.”
“혈육을 잃는 것이 체첼그람의 멸망을 손 놓고 지켜보는 일보다 낫다. 체첼드롭의 노여움을 사기라도 했다간 그 몸뚱이 위에 지어진 도시가 전부 박살이 나고 용암이 들끓을 거야. 기록으로만 읽었으나, 처참하기 그지없는 생지옥으로 묘사되어 있더구나….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겠지.”
저게 다 무슨 소리일까? 입술을 덮은 두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구더기는 막쉬롭이 때때로 멘사야에 비해 자신에게 모질게 대한 적이 있긴 해도 그녀를 인자하고 멋진 어머니라 생각해 왔다. 막쉬롭이 구더기를 자식으로서 사랑한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품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고대룡의 제물? 운명? 혈육을 잃는 것? 이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부크쉬낙슈는 준비했나?”
“그렇습니다.”
“내일 밤으로 하자. 제물을 준비하는 것은 자네가 맡도록 해. 라락크쉬가 잠들었을 때 그 애 천막 안으로 부크쉬낙슈를 넣고 깜부기불을 피워. 의심이 많은 애니까 달여 먹이기보다는 잘 때 연기에 취하게 만드는 편이 더 쉬울 테니… 음? 왜 그러지?”
“별거 아닙니다, 그냥….”
막쉬롭은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두려워 쿵쾅대는 가슴을 붙잡고 거친 나뭇결에 등을 바짝 댔다. ‘인신공양도 숫처녀와 숫총각만 받으니까.’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막쉬롭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새어 나와 몇 번이고 메아리쳤다.
“산짐승 소리를 들었나 봅니다.”
* * *
구더기가 저 냄새를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크쉬낙슈. 입안에서 저 귀한 풀의 이름이 감돌았다. 막쉬롭이 구더기를 배신하고 고대룡의 산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사용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여기서, 그것도 드라코슨이 음용하는 찻물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본디 체첼그람 이남의 해안지대 원산인 이 신비한 풀은 인위적으로 기르면 약효가 나지 않고, 잎사귀를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십 년은 길러야 하는 탓에 아주 귀한 취급을 받았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집시 샤먼들이 부리는 신비로운 의식에서 부크쉬낙슈는 향을 피우거나 특별한 방법으로 달인 물을 마시게 해 환각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세계와 합일하여 교신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든다는 것이 이 약효의 핵심이었으나 정신을 흐리게 한다는 점에서 악용될 여지는 충분했고, 실제로 그런 사례도 몇 번인가 있었다.
“애틀턴 남부의 너른 평야에서 새로이 생산되는 특산 허브차로 알고 있습니다만….”
“구더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니카는 왕녀에게서 여태 느꼈던 위화감을 이해할 수 있는 가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몰아붙이는 듯 물었다. 구더기는 마음만 같아서는 그녀가 친어머니인 막쉬롭에게 배신당해야 했던 서른 해 전의 이야기를 전부 다 긁어내어 이 환각초의 정체를 일러바치고 싶었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리고, 다소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내버려 둔 막쉬롭이 들어서자 두 입술이 딱 붙어버리고 말았다. 흉흉한 눈빛이 구더기에게 명백한 협박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었다. 코쿤을 따로 수감했던 것이 다 이렇게 구더기의 자유를 묶어두기 위함이었다.
막쉬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왕녀에게 먼저 예를 갖추고, 그런 다음 니카를 바라보았다가 구더기에게 고개를 돌리기까지 줄곧 시선 한 가닥으로 구더기를 들쑤셨다. 구더기는 어쩔 줄 모르고 떨었다.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 예상하지 못했다. 언젠가 막쉬롭에게 붙잡혀 돌아갈지언정 그 전에 코쿤에 대한 작은 단서는 찾았어야 했다.
“다름이 아니라, 앙살라테 왕자 전하의 전령이 애틀턴으로부터 당도한 참입니다. 왕녀님을 당장 알현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서구가 당도하였는데…. 엣시아 용병들이 사난타의 강나루를 불태우고 철수했다 합니다. 오후쯤 되면 잣자후에 도착하지 싶습니다.”
과연 중대한 사안이었다. 니카는 막쉬롭에 대한 깊은 심증 탓에 그녀를 안으로 들이는 것이 탐탁지 않았으나 다른 수가 없음을 인정했다. 침대 위에 얌전히 누워 새근새근 숨을 쉬는 왕녀의 그림자를 흘긋 엿보았다. 보고를 받을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깥에 왕녀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 알리는 것도 꺼려졌다. 만일 그랬다가는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업신여김과 비아냥을 극복해야 했던 왕녀의 입장이 다시금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령은 어디에 있지?”
“문 바로 바깥입니다.”
막쉬롭이 대답했다.
니카는 막쉬롭의 대꾸를 한 켠으로 미루어 두고, 두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은 구더기를 흘끗 살폈다. 구더기는 찻물을 날라 온 시녀에게 그 차가 무엇이냐고 다그쳐 물은 뒤부터 갑작스레 말이 없어졌다. 막쉬롭이 들이닥친 이후로부터 두 입술을 꼭 맞물린 채로 침묵하기 시작했으니 기실 이유는 물어보나 마나였다.
‘막쉬롭의 눈치를 보고 있군.’
자신은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막쉬롭이 침착하고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전령이 가져온 게 무척 급한 사안이라 들었습니다. 당장 왕녀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니카는 태연하고 엄격한 표정을 가장했으나 사실 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먼저 나가서 응접실로 전령을 안내해. 곧 뒤따라 나가겠다.”
“왕녀님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을 묻기에 무례를 무릅쓰고 침실로 데리고 온 겁니다.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급박한 요청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니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왕녀 전하의 상태가 아직도 그렇게 나쁩니까? 잣자후 성의 의원들은 뭐라고 합니까?”
성안의 의원들 역시도 막쉬롭의 의견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영양실조 같은 소리나 늘어놓았었다. 그걸 알려주었다간 막쉬롭의 자신감을 더욱 의기양양하게 북돋아 줄 게 뻔했다. 니카는 안 그래도 차가운 목소리를 더욱 까칠하게 벼려 대꾸했다.
“네가 알 바 아니다.”
“제가 이 나이 먹도록 모르는 병증이 잘 없습니다만, 왕녀님의 상태는 뭐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렵더군요. 기력이 쇠했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증상을 전부 보이고 계시니 말입니다. 저번에 제가 기껏해야 감기 기운이라고 언급했을 때 경의 심기를 많이 어지럽게 만든 것 같으니 우선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에 진솔함을 더하기 위해서였을까, 막쉬롭은 늙고 마른 몸을 비굴하지 않을 정도로만 굽히며 니카에게 정중히 절했다.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흘렀다.
“허나 이 늙은이가 왕녀님을 걱정하는 마음은 경의 마음과도 비견될 정도의 진심이라는 것을 부디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 집시는 제가 다시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무서운 줄을 모르고 이리로 달아난 것을 보니 주선해준 일자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니카는 막쉬롭이 하고 있는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곁눈질로 구더기를 돌아보았다. 막쉬롭의 모든 언행이 언짢고 다른 속셈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므로, 만일 구더기가 아주 작은 신호만 보내준다면 그것을 근거로 삼아 강하게 다그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구더기가 바닥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하고 있음에야 니카의 눈짓이 전해질 리 요원했다. 약점이라도 잡힌 것일까? 아무래도 막쉬롭이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답을 얻기는 힘들 것 같았다. 좀 전에 차가 어떻다느니 하던 말이 무슨 뜻인지 본격적으로 묻기 위해서 막쉬롭을 바깥으로 내치려던 참이었다. 구더기가 한참 만에 목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잔뜩 풀이 죽은 사과 말이었다. 니카는 구더기를 꽤 안다고 자부했다. 뺀질거리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인데 한껏 쪼그라든 모습을 보자니 뒤가 구렸다. 막쉬롭이 그런 구더기와 니카를 번갈아 보면서 보란 듯이 씩 웃고 있었기 때문에 심증을 더한 것도 한몫했다.
“제 불찰입니다, 경.”
막쉬롭이 사과했다. 거의 솜씨 좋은 연극배우처럼 들리는 극적인 말씨였다.
“같은 집시라 어여삐 여겨 조금 선의를 베풀었는데, 경의 자비심에 기대어 난동을 부리고 왕녀님의 침실에까지 뛰쳐들어갔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다음에 전하께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면 마땅한 벌을 달게 받게 하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제가 데리고 물러가지요.”
“고작 일이 달갑지 않아서 살려달라 말하며 도망을 친다고? 그렇다면 손목에 남은 자국은 무엇이며, 얼굴은 왜 저렇게 수척해졌단 말이냐. 네가 하는 말에는 그 어떤 신빙성도 없다.”
일개 집시라고 무시하기에는 막쉬롭이 왕녀의 측근으로서 얻은 신임과 위치가 강대했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니카가 막쉬롭에게 대놓고 검을 뽑아 들어 겁박하거나 의심을 제기하여 반목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왕녀에게 무언가 술수를 부렸다는 심증은 있을지 몰라도, 결정적인 증거랄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구더기를 순순히 넘겨줄 필요도 없지.’
그러나 니카라고 멍청하게 손가락이나 빨면서 막쉬롭이 원하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휘둘릴 위인은 아니었다. 니카는 막쉬롭을 향한 적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구더기를 사이에 두고 신경전이 벌어졌다. 막쉬롭은 좀처럼 구더기의 신변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들었는데, 그것은 곧 구더기가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니카는 더욱 태도를 굳건히 했다.
“여기 남겨둬라. 내 보호 하에 두겠다.”
“글쎄요…. 본인도 그걸 원할까요?”
“무슨 뜻이지?”
막쉬롭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구더기를 가리켰다. 마치 구더기가 뭐라고 대답할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같았다. 니카가 모르는 사이에 둘 사이 어떤 대화라도 오갔던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구더기가 옅은 한숨과 함께 막쉬롭에게 순종적인 말을 꺼내 들기 시작했다. 좀 전에는 살려달라고 외치며 도움을 갈구했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협박당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갑자기 태세를 바꿀 리 없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일이 달갑지 않아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러니 저, 저는 이만 저 집시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죄송, 했습니다. 나리….”
“아니.”
만일 구더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막쉬롭의 약점이라면…. 그리고 그 정보로 말미암아 왕녀의 상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밝혀낼 수 있다면.
입지가 좁은 일개 천출 기사가 주관을 내세우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위험한 행위였다. 왕녀의 가벼운 총애와 동정심으로 유지하고 있던 이 자리를 최근 니카가 부적절한 감정을 토로했던 일들과 엮어낸다면 당장에 기사 작위를 박탈당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카는 한번 판돈을 걸어보기로 했다. 시선을 막쉬롭의 주름진 얼굴에서 떼지 않은 채로 손을 단호히 들어 올려 구더기의 걸음을 붙잡았다.
“여기 남아라. 내가 책임지겠다.”
“나리, 제발-”
“여기 있어.”
막쉬롭은 니카의 굳은 결심을 돌이키려고 속셈이 뻔한 여러 가지 권유들을 곁들였다. 그러나 목석같은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고쳐먹은 용인 기사를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니카 경, 왜 저를 의심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집시를 맡아 관리하는 것은 왕녀 전하께서 직접 제게 내리신 명령입니다. 이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곧 왕녀님에 대한-”
“알고 있다.”
“…후회하실 겁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 또한 내가 질 몫이다.”
적막한 불꽃이 튀는 실랑이 끝에 막쉬롭은 끝내 뒤로 한 발짝 물러나야 했다. 니카의 강경한 반응을 보면서 막쉬롭 역시도 그녀 나름의 결단을 내린 듯했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눈동자가 폭풍이 뒤집어 놓기 직전의 잠잠한 바다처럼 무섭도록 고요한 빛을 띠었다.
“…잘 알겠습니다.”
문을 나서기 전에 막쉬롭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서늘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구더기는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외진 방에 홀로 묶어 놓았을 때부터 코쿤의 신변을 붙잡아 협박하던 막쉬롭이었으니 저 순순한 한마디가 전부 다 협박처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아직 찾지 못한 코쿤의 안전을 위해서 막쉬롭이 요청하는 바를 전부 들어주려던 구더기는 뭣 모르는 니카의 고집이 야속해서 속에 천불이 났다.
곧장 코쿤을 잃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상상력에서 비롯된 공포였다. 그러나 모골이 송연한 그 어떤 공포도 곧이어 흘러나온 콧노래 같은 한마디의 파급력을 이기지 못했다.
“정말이지, 고집스러운 면까지 무척 빼닮으셨습니다.”
“뭐?”
구더기는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옆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니카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속으로 두 번인가 곱씹어 보았을 때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설마.’ 하던 마음이 자기 부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두려움으로 그 성격을 변화시켰다.
‘아…!’
구더기는 그만 흠칫 놀라서 몸을 경련하다시피 했고, 감당할 수 없는 추위가 심혈관을 타고 전신에 뻗쳐 그야말로 병증에 지배당하는 듯했다. 기존에 알고 있던 니카와 막쉬롭에 관한 정보들이 새로이 일렬을 이뤄 짜 맞춰지면서 아주 거대하고도 명쾌한 진실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번 깨닫고 나니 이렇게 명백한 조각들을 어째서 추리해내지 못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구더기는 아무 소용도 없는 자괴감에 지배당했다.
신이시여. 구더기는 속삭였다. 신이시여….
이 자괴감은 반성도 후회도 아닌… 공포였다. 공포. 구더기는 오래전에 죄를 지었다. 그 덕택에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눌리는 일은 피했다지만 그에 버금가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기실 그녀는 여태 그것으로 업보를 다했다고 생각했었다. 광야에서 노예로 보낸 서른 해는 아주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구더기가 치러야 할 죗값이 남아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하지만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어째서? 니카와 얽힌 모든 일들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니카가 다른 용인들과 다르다는 인식은 구더기도 확실히 하고 있었다. 사난타에 머물렀을 때 그녀 스스로 품었던 의문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신이 다른 용인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헛바람 넣지 마라.’
‘용인은 인간만큼의 지능을 가지기 힘드니까요.’
천한 혼혈인을 받아줄 리가 없는 신전의 보육원에서 니카가 자라났던 것이 과연 우연일까? 니카를 거둔 앙살라테의 세력 밑에서 지금 막쉬롭이 일하고 있었던 것은? 강서지역의 애틀턴과 잣자후에 둥지를 틀고 있었던 앙살라테의 지지자 수리 드라코슨이 굳이 왕국을 가로질러 거의 반대편에 달하는 체첼그람의 신전 보육원을 방문했던 건?
맙소사. 심장이 멈춘 것 같다가도 온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를 만큼 재빨리 뛰었다. 분명히 니카의 정체를 입증할 수는 없거니와 그가 그저 용인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할 근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용인 기사는 결국 용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구더기가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반면에 니카는 집시들은 어쩌면 이렇게 알 수 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다니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폭삭 힘 빠진 니카의 목소리가 막쉬롭에게 되물었다.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물론 지금으로써는 제가 드린 모든 말씀이 알쏭달쏭하게만 느껴지시겠지요.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을 충성스럽게 위한다는 사실 만큼은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니카 경. 결국은 저에게 감사하시게 될 겁니다.”
니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끝인사로 막쉬롭은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는데, 왠지 모르게 애틋한 감상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니카가 평생토록 겪어본 일이 없는 따스하고 끈적거리는 애정이 막쉬롭의 가느다래진 눈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당혹감을 감출 도리가 없었다.
“말씀하신 대로 전령은 응접실에서 기다리도록 조치하겠습니다.”
* * *
막쉬롭이 물러간 이후 방 안은 다시금 적막에 잠겨 들었다. 결정적인 증거라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었기 때문에 막쉬롭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걸 그대로 놓아주어야 했다. 석연찮은 허무함이 니카를 덮쳤다. 만일 뒤가 켕기는 일을 벌인 게 맞다면 구더기를 빼앗긴 것으로 궁지에 몰려야 할 텐데…. 막쉬롭이 여유롭게 빠져나가던 모습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 안은 폭풍우가 한바탕 휩쓸고 간 것처럼 엉망이었다. 엎어진 차 트레이를 완벽히 수습한 시녀는 이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발발 떨었고, 왕녀는 간헐적으로 앓는 소리를 냈으나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었다. 왕녀의 침대 인근에만 평화가 머물러 있었다.
“구더기. 저 차가 대체 무엇이지?”
“…….”
“왜 말이 없나?”
“…….”
“이봐, 구더기.”
구더기의 주름진 눈살 안쪽 총총한 까만 눈이 물기에 젖어 번들거렸다. 니카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구더기는 한껏 감상에 잠긴 듯이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앞에서 손을 팔랑팔랑 흔들기까지 했는데 대꾸가 없는 것을 보아하니 당장 대답을 얻어내긴 어렵게 생겼다.
‘미쳐버리겠군.’
니카는 집시라는 종족에게 완전히 신물이 났다. 일상 속에서 하는 말들도 어쩌면 그렇게 신탁처럼 의미심장하고 골치가 아픈지 모르겠다. 게다가 문제의 여지를 감수하고 월권을 하면서까지 막쉬롭이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더니, 정작 구더기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넋을 놓지 않았는가.
한동안 멀거니 입을 벌리고 있기에, 니카는 왕녀의 총기를 가시게 만든 막쉬롭의 음모가 구더기의 정신마저도 흐리게 한 줄 알았다.
“나리, 우선은 제 말을-”
“드디어 입을 여는군. 나는 네 명령을 받으려는 게 아니라 설명을 들으려는 거다. 구더기, 내 질문에 대답해라. 저 찻잎은 왜 걸고넘어졌지? 지금 왕녀님의 증상과 관련이 있는 건가?”
“…….”
“대답해!”
구더기는 순순히 정답을 알려주는 대신에 자신의 요구사항을 먼저 들이밀었다. 구더기의 입술에서 파랗게 핏기가 가셔 있었다.
“코쿤을, 먼저 되찾아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가 본데, 너는 지금 네 요구를 드러낼 입장이 아니다.”
“그럴까요? 나리께서 잣자후에 돌아오신 지가 고작해야 수일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막쉬롭은 내내 여기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고요. 집요한 작자예요. 사방 천지에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확실한 증거를 캐내어 막쉬롭이 가진 권한을 박탈하고 구금하려면 제 도움이 꼭 필요하실 겁니다.”
“…….”
니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심호흡을 했는데, 손가락이 허리춤에 걸린 검 손잡이에서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구더기는 니카의 짜증이 머리끝까지 뻗쳤으며 그의 검이 자신을 겨누기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눈치챘다.
“왕녀님이 만약 독에 당하신 거라면-”
“전하의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기력이 쇠하긴 했어도 이대로 두면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그러니 부디 막쉬롭이 사달을 내기 전에 코쿤을 되찾는 것에 집중해주십시오, 나리. 저를 여기, 나리의 손아귀에 남겨두고 갔으니 코쿤은 인질로서 가치를 잃었습니다. 쓸모없어진 볼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아이는 이런 일을 겪기에 아직 너무 어립니다….”
니카는 입술을 꾹 깨물고 대리석같이 차가운 낯으로 구더기를 내려다보았다. 급박한 상황에 몸 안의 피가 다 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제 잇속만 챙겨 어린애를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구더기가 철모르고 투정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니카는 갈라진 목소리를 드높여 분노를 토해냈다.
“어떻게 그리 여유롭게 말하지? 사건의 경중을 따질 줄 모르나? 잃어버린 어린애를 들먹이며 상황을 재고 있을 게 아니야! 그 집시가 만일 대공이 심은 간자라면 한시바삐 잘라내야 한단 말이다. 어서 네가 아는 걸 말해!”
“막쉬롭이 저지른 일이 누구를 위해서였는지는 명백합니다. 그러니 나리께선 지나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또 시작이군!”
대화가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을 견디다 못한 니카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바깥의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 중 믿음직한 이를 안으로 청했다. 니카는 기사더러 잠든 왕녀의 곁을 잘 지키고 있도록 지시했다. 안으로 불려 온 기사는 용인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에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으나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 분간할 줄은 알았다.
“집시가 여기서 도망치지 못하게 해. 묶어둬도 상관없다.”
니카는 구더기에게 한마디 남기고 등을 돌렸다. 기세등등해서 방 바깥에 나선 니카는 코쿤을 뒤로하고 막쉬롭의 행적을 뒤쫓을 요량이었다. 구더기가 어린애를 되찾고 기꺼이 입 열기를 기다리느니 막쉬롭을 정면으로 다그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애초에 사난타에서 잡은 귀족 포로를 전부 잣자후로 옮겨 온 마당이니 어린 꼬마애 하나 찾아내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왕녀의 이름을 빌려 뒷공작을 벌여 온 막쉬롭이 마음먹고 코쿤을 숨겼다면…. 니카는 복잡한 생각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내가 앙살라테 전하의 전령인데 왜 들어갈 수가 없단 말이냐!”
바깥에는 막쉬롭이 던져놓고 간 또 다른 골칫거리가 하나 남아있었다. 좀 전에 잣자후에 당도했다고 하는 앙살라테의 전령이었다. 분명 막쉬롭이 응접실에 앉혀두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 왕녀의 침실 앞에서 발을 쿵쿵 구르고 있는 꼴이 다 무언가. 하긴 이 성질 급해 보이는 치가 차 한 잔 대접 받는 여유도 없이 즉각 엉덩이를 털고 달려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급한 전갈이란 말이다!”
“왕녀님은 과로로 잠깐 휴식을 취하는 중이시다.”
손이 닿는 대로 멱살을 잡아가며 주변을 죄다 못살게 굴고 있는 전령이 씩씩대며 니카를 돌아보았다. 전령은 피로가 역력한 검은 눈가와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본래의 빛깔을 알아보기도 어려운 갑주를 입고 있었다. 아마 말을 달려 애틀턴에서 잣자후에 도달한 즉시 나아 온 것 같았다. 흥분해서 낯빛까지 온통 붉었던 이 전령은 태평한 니카의 말에 얼굴을 요상하게 구기고 홱 뒤를 돌았다.
“윽… 뭐, 뭐야!”
붉던 얼굴이 삽시간에 파리해졌다. 이유야 뭐 불 보듯 뻔했다. 니카는 짜증을 삼키며 제 가르마를 슬그머니 손봤다. 구부러진 손끝이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왼쪽 얼굴에 돋친 검은 비늘을 보면 어느 누구든지 간에 본능적인 혐오를 꺼내 들곤 했다. 왼쪽 얼굴 위로는 보통 머리카락을 덥수룩하게 늘어뜨리곤 했지만, 니카가 항상 신경을 쓸 수 없는 노릇이라 움직이다 보면 비늘이 바깥에 드러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낯선 이가 니카를 마주치고 불현듯 놀라 신음하는 일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군.’
“당신 혼, 혼혈인이요? 그 비늘…. 토룡 혼혈인가?”
“왕녀 전하의 기사 니카다.”
“기사?”
앙살라테 측에서 왕녀를 위해 검을 휘두르는 혼혈인 기사라고 하면 썩 유명한 이름이다. 전령은 속으로 의문과 대답을 두어 차례 주고받은 후에야 니카의 정체를 눈치채고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나더니 다시 호들갑을 떨며 니카에게 목청을 높였다. 기사라는 명칭을 듣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니카가 용인이라고 멋대로 낮잡아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른 어떤 사안보다도 중요한 일이오. 왕녀님을 만나게 해 주시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더는 기다릴 수 없소. 한시가 급하오. 나는 총력전에 대비해서 모든 병력을 애틀턴으로 소집하라는 앙살라테 드라코슨 전하의 동원령을 전하러 왔소!”
니카는 망연히 눈을 깜빡였다.
“총력전?”
“이래도 응접실에 먼저 처박아두겠소?”
물론 그럴 수 없었다. 애틀턴에서 교전 중인 앙살라테가 썩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 않다는 것은 흉흉한 소문으로 전해 들었으나 이 시점에 총력전 얘기를 들이밀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사난타에 남아있던 엣시아 용병단이 잣자후로 돌아오고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아마 이들도 앙살라테의 명령을 받고 애틀턴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다.
“엣시아 용병단은 잣자후를 거치지 않고 움직일 거요. 당장 보급품에 관해 토의하고 결론을 내려야 속도가 맞는단 뜻이오. 왕녀 전하가 안 된다면 당신이라도 나와 이야기해야 할 거요.”
전령이 몰아붙였다. 예민한 성정을 드러내듯이 니카의 눈매가 사납게 찌그러졌다. 질끈 감긴 눈이 원래 모양대로 번쩍 뜨여 돌아오던 때, 니카의 까만 눈 안에 손톱모양 동공이 더 가늘게 찢어져 있었다. 전령은 기겁하여 바삐 놀리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 * *
탁, 탁, 탁.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지만 늙고 가냘픈 어깨는 추위에 한번 움츠리는 법이 없었다.
‘라락크쉬가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적은 막쉬롭이지만 지금은 뭐라도 하나 때려 부숴야 마음속의 들끓는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삼십 년 전,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탈선해서 도망친 라락크쉬의 미래는 밤하늘의 어둠에 가리워져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샤먼인 막쉬롭에게 그런 라락크쉬의 존재는 단 하나의 변수였다.
배 아파 낳은 혈육이라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어서 따로 가둬두었던 것인데, 그게 화근이 되었다. 막쉬롭은 비로소 후회에 잠겼으나, 다시금 잣자후에 당도한 라락크쉬를 마주쳤던 때로 돌아간다 해도 외동딸의 목을 무감정하게 딸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광야에서 진작 죽어 나자빠진 줄 알았건만,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잣자후에 나타날 줄이야. 정말이지 질긴 목숨이야. 게다가 삼십 년 동안 는 거라고는 잔꾀밖에 없어 보였지.’
건조하게 웃었다. 라락크쉬에게 무슨 낯짝으로 잣자후에 왔느냐 물었더니 그 애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엄마도 늙었을 테니 나를 이 이상 미워할 힘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그 얘기를 들었던 당시에는 머리꼭지까지 열이 뻗쳐서 죽을 것 같았는데 정작 생각해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막쉬롭은 증오를 감당하기에 너무 늙었다.
‘…지치는군.’
사랑하는 막내동생 멘사야를 잃었을 때는 그게 평생토록 분노의 불길을 피우기에 충분한 장작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히 타오르는 땔감이 어디 있으랴. 멘사야를 사랑했던 마음은 이미 다 타고 시커먼 재로 남았다. 열띤 증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렇듯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은 막쉬롭을 여기까지 움직이게 했던 것은, 오롯이 아이의 존재였다.
‘멘사야. 나는 이 쪼그라든 손으로 네 아들이나마 지키려고 했는데, 정말이지 모든 것이 쉽지가 않구나.’
잣자후로 부족을 이끌어 온 뒤, 강서지역에서의 새 삶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던 막쉬롭은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린 지 기껏해야 스무 해가 지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별은 처음에 아주 하찮은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다. 공부가 깊은 막쉬롭조차도 처음에는 기분 탓이라 더 밝게 보이는 게 아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 별은 사람들의 관심 없이도 점차 빛을 더해 덩치를 불리더니, 올해쯤 들어서는 샤먼이라고 자신을 지칭하는 집시들은 대개 그 존재를 눈치챌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많은 집시들이 공통적인 해석을 내기 시작하면 그건 불가피한 진리가 된다. 고대룡의 재림과 관련해서 도는 말들은 예언이 아니라 간증이 되었다.
이번 여름엔가 드라코슨이 왕좌에 오르지 못할 거라는 입소문이 돌아 왕국을 한바탕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것도, 전부 이 집시들의 천기누설에 본을 두고 있을 것이다.
막쉬롭이 뒤집어쓴 후드에서 유일하게 뚫린 안면으로 시린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이 차가우면 차가웠지 공기 자체가 이렇게 얼어붙어 있는 것은 남부에서는 느끼기 힘든 추위였다.
잣자후로 터전을 옮기면서 막쉬롭은 추위를 난생처음 배웠다. 매년 겪어도 감흥이 남달랐다. 체첼드롭의 형질을 이어받았을 아이가 북쪽 도시를 전전하면서 겨울을 어떻게 났을지 생각하니 막쉬롭은 다 지난 일들을 떠올리면서도 안쓰러워졌다.
기적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만큼 귀한 아이였다. 막쉬롭은 생각했다. 수많은 운명을 등에 지고 태어났으니 마땅히 좋은 것만 누리고 보면서 살아야 했다. 추위 따위는 모르고 살아왔어야 했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보살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쓰럽고 속상했다.
막쉬롭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흙벽돌로 된 건물을 바라보았다. 대리석으로 지은 잣자후의 빛나는 성과는 구분되도록 칙칙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르던 담쟁이넝쿨이 있었던 모양인데 가을에 낙엽이 전부 지고 그 줄기만 노랗게 남아 벽돌 사이사이에 시체의 손가락이 들러붙은 것 같았다.
막쉬롭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소매 안에 넣어둔 철제 단검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때가 가까웠다.’
농익은 ‘나그네의 별’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판도가 뒤집힐 ‘그 날’이 임박한 것이다. 전령을 통해 전하기로 앙살라테는 애틀턴에서 총력전에 임할 작정이라 했다. 기나긴 내전은 결착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두 명의 드라코슨 중에 누가 명목상의 승리를 거머쥘지는 모르겠으나 왕좌는 둘 중 누구의 것도 아닌 니카의 것이 될 터였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아이는 왕이 되어야 했다. 멘사야를 위해서라도. 이 막쉬롭과 라락크쉬와 그 밖에 이 운명 놀음에 연관된 모든 이들을 위해서. 완벽한 대단원을 맺고, 그가 받아 마땅한 사람들의 애정을 한껏 받아야 했다.
막쉬롭은 주먹을 꾹 쥐고 포로들을 수용해 놓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영광의 가도를 달리기 전에 해결해둬야 할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근차근 준비해 왔던 일이지만 라락크쉬가 계획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더 이상 비싼 부크쉬낙슈를 써 가며 왕녀를 구슬릴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왕녀님의 집시 아닌가?”
“그렇습니다. 잘들 지내셨습니까.”
“무슨 인사치레인가, 왕녀 전하께서 들렀다 가신지 얼마나 지났다고 말이야. 혹 지금도 같이 오셨나?”
막쉬롭이 고개를 젓자 참회의 방 앞에서 문을 단속하고 있던 간수들이 막쉬롭의 뒤편을 곁눈질로 흘겼다. 막쉬롭 말대로 저편에는 칼바람 소리만 음울하게 울려 퍼질 뿐 뒤따르는 인기척은 없었다. 간수들은 바짝 힘을 주었던 등줄기를 누그러뜨리고 하품을 연거푸 했다.
“그거 다행이군.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들 오는 판에 여기가 참회의 방인지 참관의 방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옘병할…. 할멈은 뭐하러 왔는지 모르겠군 그래.”
“할멈, 그것보다 저번에 그건 어떻게 된 일이야? 용인 말이야, 용인! 왕녀 전하께서 그 용인을 기둥서방으로라도 쓰시는 거냐고? 왜, 그때 지키고 있던 놈들한테 전해 듣자 하니 남들 보는 눈 두려워하지 않고 부둥켜안은 다음에 치마를 활짝 들추셨다고-”
“미친 새끼야, 너 방금 드라코슨 모욕죄로 모가지 한번 잘린 줄 알아라!”
켕기는 발언을 한 참이니 간수들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막쉬롭의 눈치를 보았다. 막쉬롭은 왕녀의 집시라고 불리울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측근이었는데, 이 헛소리가 왕녀의 귀에 들어가 경을 칠까 봐 두려운 게 분명했다.
막쉬롭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노파로서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인 인자한 미소를 내건 채 종종 소리 내서 웃음을 흘리기만 하면 젊은 간수들은 적대감을 내려놓으리라. 인간이 비록 신분의 귀천을 무지하게 따지는 족속이기는 해도, 노인에 대해서는 누그러지기 마련이었다. 막쉬롭은 종종 그 덕을 보았다.
“저는 새로이 찾은 단서로 잔악후작에게 추궁할 거리가 생겨 왔습니다만…. 이것이 왕녀 전하의 사적인 일과 조금 관련이 있는 터라 듣는 귀를 물리라는 은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지금 참회의 방 안에서 잔악후작을 독대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같은 맥락이었다. 똑같이 왕녀의 이름을 들먹였더라도 그녀가 무해한 노파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소지품 수색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독대를 허락해줬을 리 없었다. 니카 경과는 달리 막쉬롭은 간수들보다 결단코 높은 직위가 아니라서, 이들이 확인과정을 철저히 거치겠다고 말하면 기실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꼴이었다.
“하아…. 오래는 못 기다려줘. 십 분. 바깥에서 문을 두드려 신호하겠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리들.”
잘 풀렸으니 망정이었다.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을 시에는 보조 수단으로 정말 값비싼 방법을 동원하려고 했으니까.
막쉬롭의 로브 안감에 꿰매진 주머니에는 부크쉬낙슈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녀에게 최면을 걸 때는 은밀히 진행하기 위해 아깝게 찻잎으로 우려 사용했지만, 기실 부크쉬낙슈의 가장 강력한 사용법은 연기를 내는 것이었다. 단시간 안에 장정의 의식을 잃게 만들기 위해서는 꽤 많은 양을 소비하겠지만, 지금 이 벽 너머 참회의 방에 들어가는 건 막쉬롭에게 있어 그깟 비싼 약초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든 지금 당장 잔악후작 바란 탈타미오를 만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막쉬롭은 라락크쉬가 사건의 전말을 털어놓고 그녀를 붙잡기 전에 계획을 완수해야 했다.
참회의 방은 지상 방향으로 환기창을 냈기 때문에 밀실이 아니었지만, 악취나 습기가 고여 있기에는 최적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저번에 왔을 적에는 경황에 없어 크게 신경 쓰지 못했던 오물의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함께 들어선 간수들이 무료한 카드게임이나 이어가고 있는 동료들을 불러 밖으로 끌어냈다.
“가시기 전에 철창을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뭐라고?”
태연하게 한 말에 화들짝 놀란 간수 하나가 나가다 말고 뒷걸음질로 막쉬롭에게 돌아왔다. 성난 얼굴과 급히 뿜어져 나와 콧수염까지도 들썩이게 만드는 콧김이 주는 압박감은 강력했다. 그럼에도 막쉬롭은 잘못된 요구 하나 내밀었던 적 없다는 듯이 빙긋이 웃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건을 보이고 반응을 관찰하려면 낯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로 접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저는 늙은이라 앞이 잘 안 보이고 헷갈리는데 가까이 다가가는 것 빼고는 방법이 없지 싶습니다.”
“하지만 저놈은…. 할멈, 저 새끼가 왜 잔악후작이라고 불리는지 알고는 있는 거요? 저 새끼가 죽인 목숨으로 애틀턴에서 탈타르까지 줄을 세울 수도 있을걸! 괜스레 가까이 다가갔다가 경 치지나 말고 멀찍이서 할 일 하는 게 나을 거요. 미친놈이 눈 까뒤집고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러오?”
막쉬롭은 기특한 청년에게 감사를 표하는 평범한 노파의 모습을 가장하고 웃었다. 간수는 제 병든 노모를 막쉬롭에게서 겹쳐 보면서 자기 위안이라도 얻으려는 건지, 또 뭐라고 한 소리 하려는 기색을 내비쳤다. 가만 듣고만 있던 막쉬롭은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냉큼 선수를 쳤다.
“달려들기는요. 저렇게 잘 묶여있지 않습니까. 쇠로 된 수갑을 차고요. 어차피 십 분 안에 끝날 일인데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을 겁니다.”
그 말이 맞았다. 사슬에 묶인 잔악후작이 그야말로 올가미에 갇힌 짐승처럼 옴짝달싹 못 한다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목격하고 체험했다. 간수는 막쉬롭의 온화한 부탁에 못 이겨 끝내 창살을 잠근 자물쇠에 열쇠를 먹여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있게 조치해주었다.
막쉬롭이 자리를 비워달라 말하는 순간까지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 것을 누누이 경고한 간수는 여전히 찜찜한 감정을 다 감추지 못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말 많던 간수가 사라지고 나니 참회의 방 안은 정말 쥐 죽은 듯한 고요에 휩싸였다.
막쉬롭은 눈살을 찌푸리고 기름때와 오물에 젖어 구릿구릿한 갈색처럼 변색된 금발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사지와 바람결에 나부끼는 듯한 고갯짓을 바라보았다. 방음기술을 잘 적용해서 바깥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 이렇게 버젓이 산 사람이 있는데 숨소리 하나 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한순간 ‘이미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잔악후작.”
생사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그렇게 불렀더니 응답이 있기는 했다.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니 대답이라 말하기엔 많이 모자랄지 모른다. 어쨌건 잔악후작은 새파란 눈동자를 드러냈다. 온몸이 땟국을 입어 더러워진 지금에 와서도 저 눈빛은 티 한 점 없이 청명했다.
“잔악후작.”
“…….”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결단코 떨어지지 않고 서로 붙은 채 버티던 입술이 꿈틀거리면서 무슨 말을 뱉었다. 잘 들리지 않았으므로 막쉬롭은 특기인 직감을 사용하여 반쯤 추리해냈는데, 그녀가 생각하기로는 “마침내.”라거나 “드디어.”라고 말한 것 같았다.
“죽이러 왔다는데 두렵지도 않습니까?”
살며시 황금색 속눈썹이 내려앉는 것을 보며 막쉬롭이 물었다. 후작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고요?”
막쉬롭은 저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젊은 사람이 삶에 의욕 없는 태도를 드러내면 안쓰러운 마음과 궁금증이 같이 치솟는데, 어쩔 수 없는 노인의 오지랖인가 싶었다. 세상에 이런 위선이 또 있을까. 죽이려고 왔다면서 생각해주는 척하다니.
“그러게.”
후작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상했다. 막쉬롭이 겪어온 바에 의하면 대개 사람 죽이는 맛을 아는 놈들은 자기 목숨만큼은 아주 귀하게 여기거나, 아니면 적어도 재미있는 일을 하는 데 바쳐야 한다는 철학 따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잔악후작은 그 두 가지 부류 중 어느 쪽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명성이 아깝게도 그저 아무런 의욕이 없는 것처럼 급소를 드러내고 어서 저승길로 보내달라는 듯이 몸을 늘어뜨렸다. 청년의 부르튼 입술이 미소 비스무리한 것을 물며 “빨리 끝내.”하고 재촉했다.
* * *
수리는 눈을 떴다. 즉시 지금 꿈을 꾸고 있음을 확신했다. 자주 꾸는 꿈이었다. 이제는 꿈이 맞는지 확신하기도 힘들었다. 눈을 감든 뜨든 어둑해서 자기 자신의 손발도 내려다볼 수 없는 공간에 수리는 둥실 떠 있었다.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걸까?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아.’
언젠가부터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가 무너져내려 서 있다가도 정신을 차리면 침대에 누워있는 등 기억이 뜀을 뛰는 경우가 많았다. 바쁜 업무에 경황이 없으면 종종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막쉬롭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의 말은 신뢰가 갔다. 경험이 최고의 배움이라 했던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막쉬롭은 온갖 분야에 박식했고 개중에도 의약학에 관해서는 전문 의원들도 혀를 내둘렀다.
넉 달 전에 니카 경이 탈타미오 인근에서 죽었다는 얘기가 기정사실처럼 돌던 때에, 앙살라테는 수리를 몹시 염려하곤 했었다. 아마 이오를 잃고 나서 오갈 데 없는 마음을 오래도록 함께 지낸 용인기사에게 두었으리라 여긴 모양인지 특별히 꽃을 보내며 위로하기도 했다.
막쉬롭을 수리의 곁에 붙여준 것도 위로의 일환이었다. 늘 대동하고 다니던 기사를 잃었으니 마음이 허전하지 않겠느냐며 아끼는 예언가를 말동무로 준 것이었다. 평소 앙살라테가 이 집시 샤먼을 어찌나 아꼈는지 생각하면 파격적이기까지 한 인사였다. 노파를 전장에 대동할 수는 없었을 테니 어차피 잣자후 영주성 안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겸 해서 내린 판단이었을 터다.
과연 세 치 혀 솜씨가 얼마나 좋던지 나름대로 거친 삶을 헤쳐 왔다고 자부하는 수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막쉬롭에게 마음속 어두운 고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막쉬롭은 좋은 이해자이자 조언자였다. 가끔 막쉬롭과 대화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면 수리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의존적일 수 있는 인간이었나 궁금해졌다.
‘왕녀 전하.’
메아리처럼 막쉬롭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도 현기증을 느낄 수 있다니 이상했다.
‘죽이셔야 합니다.’
누구를? 되물으려다 누군들 무슨 차이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미물의 생명이라도 소중하기는 매한가지인데…. 목숨을 빼앗는 것 말고도 방법이 있을 것이다. 왜 저 목소리는 수리에게 자꾸만 살생을 강요하는 걸까? 수리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실제로 막쉬롭에게서 들은 말일까? 그런 것 치고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아무래도 꿈을 꾸면서 무의식중에 지어낸 말들 같았다.
‘죽이셔야만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숨이 막히고 진저리가 났다. 낮고 갈라지는 노파의 목소리가 수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목소리는 귓바퀴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흡사 몸 안에서부터 바깥쪽으로 거나한 망치질을 반복하듯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다 시끄러웠는데 저항할 수도 없었다. 석고를 부어 팔다리를 굳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잔악후작을 죽이셔야 합니다.’
‘걸림돌이 될 겁니다.’
‘후회하실 때는 이미 늦습니다. 저 잔악후작의 별이 왕의 기운을 흩트리고 있습니다. 왕의 별에 기생하고 있는 별이 바로 잔악후작입니다. 불길한 붉은 빛깔이 보이십니까?’
‘왕자 전하를 위해서, 왕국의 정의와 부마님의 복수를 위해서….’
‘단 한목숨이면, 향후 일어날 참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거친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나중 가서는 귀청을 찢는 천둥소리처럼 커다래져 있었다. 하지만 정당한 심판도 없이, 그저 운명에 비추어 보면 이 자가 걸림돌이 될 게 확실하니까 목숨을 빼앗겠다니? 그런 건 수리가 고집해 온 방식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잔악후작을.’
‘이오 사사바란이 누구 손에 죽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답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복수를…. 정의를.’
싫다고 소리칠수록 목소리는 겹겹이 늘어나며 점차 말이 많아졌다. 소란을 이기지 못해 귀를 틀어막았다.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했다. 전혀 작아지지 않은 우레 같은 목소리가 어느새 하나로 합쳐져서 군중의 함성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죽여! 죽여! 죽여!
“…허어억!”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아서 화들짝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눈이 제대로 기능하여 주변의 빛을 빨아들였다. 수리는 실크로 된 베갯잇 위로 장미꽃잎처럼 펼쳐져 있던 붉은 머리카락을 공중에 흩날리며 덜덜 떨었다. 휘장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기사의 그림자가 수리에게 주목하고 다가섰다.
“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니카 경. 경이에요?”
“아닙니다, 전하.”
머리맡을 지키고 선 기사라면 당연히 니카 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목소리는 낯설었다.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노력했다. 이름이 제란딘인가 뭔가 하는 그녀의 기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 보통 니카 경이 제일 가까이에서 호위를 맡곤 하니까 이 기사는 문 바깥에서 문지기 노릇을 도맡은 사람이리라.
“그래, 그렇군요. 그래요. 그런데 차…. 차를 한잔….”
“따뜻한 차 말씀이십니까? 알겠습니다. 바로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오한이 들고 심장이 쿵쾅대는 통에 막쉬롭이 소개해준 허브차를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을 수 없이 갈증이 났으며 손끝은 바들바들 떨었다. 어쩔 줄 모르고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수리는 뒤늦게 휘장 너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잠깐만요! 왕녀 전하. 안 됩니다. 그 차는….”
“누구지?”
다급하게 말리고 드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는 수리의 기억에 없는 음색을 띠고 있었다. 수리는 가장 은밀하고 안전해야 마땅한 왕족의 침실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다. 시녀들을 부르겠다고 문틈으로 고개를 내뺀 기사를 다시 불러들였다.
“경,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누구죠? 휘장을 걷어줘요.”
“저는 구더기라고 합니다, 전하. 좀 전에 왕녀 전하께서 허락해주셔서 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내가 허락을 했다고요?”
금시초문이었다. 수리는 자신이 눈을 뜨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불빛을 받아 반들반들한 빛을 내던 감옥의 벽돌이나 눈송이 같은 짤막한 단상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누볐다. 맙소사.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 그렇고 말굽쇼. 저, 사난타의 포로들이 잣자후에 발을 들이던 날에 같이 섞여 들어온 집시입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때 막쉬롭에게 저를 맡기셨었는데요.”
“아….”
갈색 피부와 누더기 같은 옷차림, 속눈썹이 촘촘히 나서 강한 인상을 가진 눈매를 보는 순간 수리는 니카 경이 그녀의 품으로 돌아오던 날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귀족 포로들 중에 개밥에 도토리처럼 자리해 있던 집시 여인을 봤던 것 같았다. 어렴풋한 기억에 기대어 반겼다.
“그래요.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내가 침실에 당신을 들이도록 허락했다니, 이게 무슨 소리죠? 난 그런 기억이 없는데요. 그리고 니카 경은 대체 어디를 간 거예요, 막쉬롭은요?”
꼬리에 꼬리를 잇고 질문이 터져 나왔다. 의문은 불안감을 낳았다. 수리의 가슴이 처음에는 아주 작게 콩닥콩닥 뛰어다니다가, 의문이 늘어날 때마다 소리를 점차 키웠다. 수리는 갑자기 관자놀이 근처가 지끈거리는 바람에 이를 꼭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수리 왕녀를 바라보면서 구더기도 낯을 일그러뜨렸다. 왕녀는 고통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이나 신음했다. 구더기는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왕녀가 또다시 정신을 잃지는 않을까 재어보았다. 막쉬롭을 붙잡아 문초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이 성안에 아마 왕녀 한 사람밖에 없을 터였다.
‘왕녀에게 지금 그럴 여력이 있기는 한가? 나리가 코쿤을 찾아오는 걸 가만 기다리고 있는 게 나을까?’
구더기는 또래보다 왜소한 몸집을 웅크리고 어딘가에서 홀로 떨고 있을 코쿤을 떠올렸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왕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는 니카에게 막쉬롭을 붙잡을 권한이 없어 신중을 기했다지만, 왕녀가 눈을 뜬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니카가 코쿤을 찾는 것보다는 왕녀가 나서서 막쉬롭의 자유를 구속해 놓는 것이 훨씬 빠를 게 분명했다.
구더기는 결심을 굳혔다.
“으윽….”
“부작용이 나타나는 걸 보니 하루 이틀 마시신 건 아닌가 보네요. 차는 이제 끊으셔야 할 겁니다. 잠시만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뭐라고요?”
돌연, 사과 말을 내던진 구더기는 기사를 경계하더니 폴짝 왕녀의 침대로 허락도 없이 기어올랐다. 기사가 재빨리 검을 뽑았으나 왕녀가 힘 빠진 손을 들어 올려 제지하자 부동상태로 돌아갔다. 구더기는 기사를 향해 약 올리듯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 뒤에 다시 휘장을 풀어헤쳐서 차단막을 만들었다. 워낙 얇게 뽑혀 나온 천이라 방음에 별 소용이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낯을 심각한 빛으로 굳힌 구더기는 목소리에서 쉭쉭 대는 숨소리만 살려 왕녀의 귓전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부크쉬낙슈가 향도 맛도 그럴싸한 풀이기는 합니다만 오래 복용하면 의존성이 생깁니다. 무엇보다도 이 약효가 쌓이면… 몽롱한 무아지경에 이르러서 세뇌당하기 십상인 상태가 되지요.”
“세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왕녀님께서 줄곧 즐겨 음용하셨던 저 톡 쏘는 찻잎 말입니다! 그건 그냥 차가 아니에요. 집시들이 의식에 쓰는 풀이라고요.”
“잠깐만. 아니, 하지만…. 하지만 막쉬롭 말로는-”
“예, 압니다. 알아요, 전하. 배신감이 크시겠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그 미친 노인네가 검은 속내를 품고 당신을 이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진실을 아는 제가 자기 계획을 분탕질할까 두려워서 여태 쪽방에 몰래 가두었지요.”
집시들은 대개 사기꾼이다. 일국의 왕녀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 천한 집시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그녀가 폄훼하려 드는 막쉬롭은 비록 같은 천출이기는 하거니와 앙살라테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자였다. 수리 역시도 현명하며 통찰력 깊은 막쉬롭에게 조언을 몇 차례 받아 오며 깊은 신뢰관계를 만들어 온 당사자였다.
“최근 기억이 드문드문 끊기거나 꿈과 현실이 뒤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으십니까? 두통이나 구토 증세는요? 이상할 정도로 감정적이 되고 저 차를 마시고 싶어 안달이 난다든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신 적은 없습니까?”
그럼에도 이 집시가 면전에서 계속 조잘거리도록 놓아둔 이유는, 열거한 모든 증세를 수리가 최근 들어서 톡톡히 겪고 있는 까닭이었다. ‘설마.’하는 마음 뒤편으로 ‘혹시?’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마, 말도 안 돼요. 막쉬롭이 뭘 위해서 그런 일을 하죠? 그녀는 앙살라테 오라버니와 오래 알아 온 사이예요. 그녀가 대공의 간자라도 된다는 말인가요? 나를 세뇌해서 어디에 쓰려 했다는 거예요?”
“그건.”
구더기는 말을 멈추고 혼란스러워하는 왕녀의 녹색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삼십 년 전에 체첼그람에서 고대룡이 눈을 떴는데, 그때 인간과 교합하여 고대룡의 혈통을 지상에 남겼다고? 점성술로 미래를 내다본 막쉬롭이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위해 어떻게든 길을 닦으려고 이렇게 판을 벌인 것 같다고?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고 끌려나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구더기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이미 200년 전에 왕좌를 독점하기 위해서 다른 고대룡의 혈통들을 전부 숙청했던 드라코슨이 새로운 용혈의 등장을 반길 리가 있을까? 왕위 계승을 놓고 팔 년 가까이 첨예한 내전을 벌여 온 마당에. 아마 알려지는 즉시 공공의 적이 되어 매달려 죽겠지.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남 일인걸. 나와 코쿤 두 사람의 행복만을 생각하기로 했잖아.’
그러나 그 용혈이 누구의 아들인지를 생각하면, 광야에서 닳아 없어진 것 같던 죄의식과 애정이 뭉근히 피어올랐다. “라락크쉬!”하고 못 말리겠다는 듯 부르던 멘사야의 목소리는 특유의 서늘한 온도감을 아들에게 잘 물려주었다.
고작해야 한두 살밖에는 차이도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든 이모 노릇을 하겠다고 힘쓰던 사랑스러운 멘사야.
구더기는 크나큰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의 정체에 관해 함구하기로 결정했다.
“송구하오나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전하. 허나 확실한 것은 무엇을 하려 했든지 간에 왕녀님께 지속적인 암시를 해 왔을 겁니다.”
“지속적인 암시라고요?”
“약효가 돌아 무조건적인 수용상태에 빠졌을 때 계속 암시를 주었겠지요. 이 암시가 왕녀님의 깊은 무의식에 자리 잡을 수 있게 시간을 들였을 겁니다. 기억나시는 바가 없습니까?”
“글쎄요, 잘….”
구더기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왕녀는 아직 구더기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듣는 것 같았다.
“자주 떠오르는 단상이라든지 문장 같은 것이 있을 거예요. 냄새, 소리라든가….”
“소리?”
마음을 잘 가다듬어서 떠올려 보라고 부추기는 구더기의 재촉에 왕녀가 돌연 아, 하고 탄성을 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만상을 찌푸린 왕녀는 눈물만 없지 우는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간신히 쥐어 짜낸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 나왔다.
“잔악후작을 죽여야 한다는 막쉬롭의 음성을 들었어요…. 꿈에서 들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도 끈질겼죠.”
구더기는 입을 헤 벌렸다. 앙살라테 드라코슨의 앞길을 막기 위한 교묘한 세뇌이리라 생각했건만 정작 왕녀가 꺼낸 말에 따르면 사람 하나 없애려고 왕녀에게 부크쉬낙슈를 장기 음용하게 만드는 도박을 던졌다는 소리가 된다.
‘대체 잔악후작이 멘사야 아들의 운명이랑 무슨 상관이 있기에 죽이려고 했던 거지?’
잔악후작 바란 탈타미오라고 하면 여태 쌓아 온 악행으로 왕국 각지에서 그 악명이 드높았다. 산골짜기 마을에 사는 구더기도 그 이름을 들어보았으니 알 만한 명성이었다.
“잔악후작이요? 대공 아래에서 도사견 짓 하고 다닌다는 그 청년 후작 말씀이십니까?”
“이 성 안에 있어요, 지금은. 붙잡혀 왔으니까.”
“아….”
“그쪽 말에 따르면…. 막쉬롭이 잔악후작을 죽이기 위해서 이 사달을 벌였다는 건가요?”
왕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랗게 핏기가 가신 입술이 달달 떨었다.
“그러게요. 그자를 죽인다고 대체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말씀하신 잔악후작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포로들과 같이 수감되어 있겠지요?”
“…….”
“한번 확인해보실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잠깐 생각에 잠긴 것 같던 왕녀는 비단으로 된 침대 시트를 꾹 쥐어 구기고 휘장 너머로 빠져나왔다. 힘없는 발이 바닥을 딛고 잠깐 휘청거렸다. 불안한 눈으로 구더기와 왕녀의 대담을 엿듣고 있던 기사가 넘어질 뻔한 왕녀를 가까스로 붙잡아 세웠다.
“왕녀님, 일어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돌덩이처럼 단단한 팔뚝을 지지대 삼아 몸을 반듯하게 세웠다. 왕녀는 침의를 걸치고 머리칼은 헝클어진 데다가 얼굴도 상해서 엉망이었다. 왕녀는 침착하게 말했다.
“참회의 방으로 가 봐야겠어요. 지금 당장.”
“부크쉬낙슈를 오래 복용했으니 지금 당장은 막쉬롭을 직접 만나지 않으시는 편이 낫습니다.”
“무슨 뜻이죠?”
“막쉬롭이 여태 왕녀님의 무의식에 손을 써 왔다면, 그 영향력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구더기가 왕녀를 만류하고 나섰다. 납득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 들은 구더기의 이야기가 전부 다 사실이라면 이 충고 역시도 귀담아들을 만 했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수리 왕녀가 물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구더기의 검은 눈동자가 진지하게 빛났다. 수리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달뜬 마음이 점차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저 진중한 검은 눈은 수리의 곁을 수년간 지켜 온 용인 기사의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것 말고도 비슷한 특징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속눈썹이 바짝 올라붙은 것이나 반듯한 콧대, 강인하게 다물린 입술과 각진 턱선 같은 것들…. 하나하나 견주어 보다 말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우스워서 얼른 고개를 젓고 생각을 떨구어냈다. 전혀 관련도 없는 두 사람을 짜 맞추려고 하다니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이리라 생각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대동하죠?”
“그건….”
구더기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수리에게 허탈한 미소를 보였다. 사실 그녀를 믿을 만한 이유를 찾아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막쉬롭이 오랜 시간을 들여 이곳 잣자후를 제 꿍꿍이를 감출 만한 환경으로 만들어 두었는데, 굴러들어온 돌 처지의 구더기에게 유리한 단서가 있을 리 없었다.
“글쎄요. 그렇게 물어보시면 딱히 드릴 말씀이 없군요. 대신 제 이야기를 해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막쉬롭은….”
머쓱한 쓴웃음을 지었다.
“막쉬롭은 저의 어미입니다.”
* * *
“그런데, 너도 집신가?”
막쉬롭은 단검을 꺼내 들기 위해 널찍한 소매 안에 처박았던 손을 멈췄다. 줄곧 입을 다물고 전신을 이완한 채 있던 잔악후작이 급작스레 붙임성 있게 말을 붙여왔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목전에 닥친들 별로 두렵지도 않다는 듯이 눈가에 작은 주름을 접으며 웃고 있었다. 체념에서 나오는 듯한 여유로운 미소였다.
잔악후작의 속셈이 투명히 보이지 않아서 조용히 응시하기만 했다. 막쉬롭의 침묵을 곧 긍정이라고 받아들인 듯 후작은 홀로 말을 이었다.
“집시들은… 운명에 대해서 잘 알잖아, 그렇지?”
“죽이려 하는 이유도 묻지 않더니, 여기까지 와서 뭐가 궁금한 건지 모르겠군요.”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을까?”
잔악후작은 말문을 트고 나니 고작해야 앳된 청년처럼 느껴졌다. 한껏 가련함을 장비한 저 목소리 덕택일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미련인지 몰라도, 잔악후작은 그 비밀스럽던 입을 초면의 노파에게 잘만 움직였다. 그 순진한 체하는 모습에 늙은 마음은 또 특유의 오지랖이라도 부리려는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뭐라고 하는지나 들어보자.’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얼마나요.”
뜻 없이 거들어주는 듯 던진 막쉬롭의 물음을 잔악후작은 기꺼워했다. 속에서 홀로 앓아 온 감정을 누구에게도 꺼내어 보여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얼마나 좋으냐는 그 간단한 질문에도 입술을 짓씹고 눈두덩을 좁혀 시선을 천장 언저리에서 굴려대며 아주 멋진 비유를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 순간에 픽 웃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축 늘어뜨린다.
“나를 조각내어 다 줘도 좋을 만큼.”
막쉬롭은 어린 치기를 동경하면서도 혐오했다. 공격적인 어투가 절로 나갔다.
“어리고 열정적인 때야 그깟 사랑에 목숨도 건다지만, 나중 가면 어리석은 콩깍지 놀음이었노라고 깨닫게 될 겁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야.”
기억 속 어느 따스한 기억을 꺼내어 먹는 것처럼 잔악후작의 입술 끝이 점점 서로 멀어졌다. 부드럽게 풀린 눈매는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처럼 평온했다.
“그가 괜찮냐고 물어봐 주기 전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그런 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들어줬는데, 어떻게 탐내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런데 왜 그 대단한 사랑을 속삭이기는커녕 여기서 죄인 나부랭이가 되어 있습니까.”
“하하. 그러게. 난 그를 얻기 위해서라면 정말이지 뭐든지 할 수 있었는데…. 이상하지. 너무 절실했던 게 오히려 독이 되었을까?”
어느 시점부터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시간을 되돌려 달라는 상투적인 소원도 못 빌어, 나는. 잔악후작이 입속말로 지껄였다.
“너도 그때 거기에 있었지? 수리 드라코슨이 니카에게…. 입을 맞췄을 때. 처음에는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는데, 점점 무서워지더라. 내가 없는 니카의 인생은 완벽해 보였으니까. 그의 운명 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고작해야 날파리였다면 어떡해?”
“…….”
먼 곳을 내다보는 것처럼 아련했던 눈길이 막쉬롭에게로 돌아왔다.
‘니카 경을?’
놀란 입술이 딱 붙었다. 나뭇결같이 위아래로 난 입 근처 주름이 심란하게 깊어만 갔다. 막쉬롭이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했을까? 그녀는 이미 별하늘에서 잔악후작의 운명과 니카의 운명이 복잡스레 얽혀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지만 그것이 고작해야 시시껄렁한 애정 관계이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놀라웠고, 그다음에는 불같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짐승도 제가 접 붙을 수 있는 상대와 아닌 상대를 고른다는데…. 이 모자란 인간이 감히 ‘그 존재’의 아들을 탐하려 드는 것이 괘씸하여 막쉬롭은 당장 튀어나오려는 호통 소리를 간신히 억눌렀다.
“말해줘. 그 잘난 운명에는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이미 정해져 있어?”
잔악후작의 간절한 표정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부디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막쉬롭은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으므로 다시 한번 침묵으로 맞섰다. 침묵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곤란한 긍정이다. 어떻게든 버텨보려던 후작은 애써 짓던 웃음을 다 일그러뜨렸다. 호수처럼 새파란 눈에 물기가 어른거렸다.
“그렇구나. 니카는 영원히 날 좋아해 주지 않겠구나….”
그래, 그 말 그대로였다. 막쉬롭은 입술 한쪽 끝을 비틀어 올렸다. 멘사야의 아들이 철부지처럼 구는 금발 애송이를 좋아하게 될 일은 영영토록 없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는 보다 위대한 숙명이 있었다. 만일 아내를 얻는다면 드라코슨의 왕녀가 되어야 했다. 고대룡의 혈통에 걸맞은 모범적인 부부로서 왕국을 통치하며 그 우등한 피를 후세에 대물림하겠지….
“저기, 날 죽이는 김에 기왕이면 사지를 찢고 창자를 들어내 조각을 내줘. 니카가 살아가는 동안 한번도 본 적 없을 만큼 비참한 모습으로 죽여줘.”
바란 탈타미오가 단검을 든 집시에게 부탁했다. 부탁이라는 것이 너무도 수고스럽고 해괴망측한 말이라 막쉬롭은 어린애들 속사정을 이해 못 하는 보수적인 할머니처럼 눈살을 단단히 찌푸렸다.
“어째서요.”
“그냥…. 기억에 더 오래 남을 테니까. 끝까지 한심하지만.”
이렇게 말하고 나서 바란은 막쉬롭의 검날이 제 살과 뼈를 가르며 들이치기만을 고즈넉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막쉬롭은 멘사야의 희생이 낳은 기적의 아이가 저따위 사사롭고 같잖은 집착에 넘어가도록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작정이었다. 잔악후작이 니카의 마음속, 약한 부분에 대고 호소할 수 없도록 연막을 치고, 허무한 죽음을 선사해서, 둘 사이 관계가 얼마나 하찮은 미련에 지나지 않는지 증명해주리라.
“부탁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겁니까. 게다가 사랑 타령은 무슨…. 니카 경을 무슨 궤짝이나 시장판에 올라온 물건처럼 거래조건으로 걸고서 앙살라테와 계약을 맺은 주제에, 그걸 감히 사랑이라고 부릅니까? 자기연민의 구렁텅이가 마음에 든다면 제발 혼자 처박히든지 하시지요. 괜한 니카 경을 끌어들일 것이 아니라.”
잘만 조잘대던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지면서 바보 같은 탄성을 흘렸다. “아아아.”하고. 물음표가 붙은 것처럼 비스듬히 어조가 올라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뭘 말입니까.”
“방금 앙살라테와의 계약이라고 말했잖아!”
막쉬롭은 어떻게든 부정해보려 했다. 그러나 잔악후작의 마음 안에 타오르기 시작한 의심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실수를 돌이킬 수 없다면 더 나쁜 방향으로 끌어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막쉬롭은 혀를 입천장에 딱 붙이고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봐, 네가 앙살라테와 나 사이의 계약을 어떻게 아느냐고!”
그녀는 매섭게 눈썹을 세운 바란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떳떳이 턱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죽이려던 참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정보가 새어나간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막쉬롭은 날카로운 칼끝으로 땟국에 더럽혀진 후작의 마른 턱선을 훑었다. 날을 얼마나 잘 벼려두었는지, 살짝 긁힌 상처에서는 벌써 송골송골 아주 작은 핏방울이 점점이 이어지며 끝내 붉은 선을 만들어냈다.
적잖이 따끔했을 텐데, 후작은 얌전히 입을 앙다물고 막쉬롭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시퍼런 눈동자 때문에 꼭 재수 없는 길고양이 같았다. 막쉬롭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저런 눈을 뜨는 고양이들에게 정을 준 적이 없었다.
“꿰뚫어 보았다면 믿겠습니까?”
“뭐?”
“당신 같은 왕국민들은 잘 모르는 개념이겠지만 나는 일개 집시와는 구분되는 샤먼입니다. 내 종족들 사이에서는 나도 귀부인과 지도자로 통합니다. 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덕택이지요.”
“무슨 능력?”
바란은 집시가 말을 돌리는 것에 불가항력으로 어울려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내심 마음속에 불신으로 단단히 벽을 쌓은 채였다.
앙살라테에 대한 깊은 원망이 샘솟았다. 이 잣자후에, 미친 왕녀의 손안에서 고통을 당하도록 방치해 뒀을 때조차도 그를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니카를 걸고 한 거래가 새어나간 것을 깨닫고 나니 마치 치부를 드러낸 듯한 수치심과 분노가 절로 고개를 들었다.
기밀을 유지하라며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던 게 누군데! 앙살라테가 저 집시에게 계약에 관해 털어놓은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미래를 봅니다.”
“집시들이면 죄다 잘하는 일 아닌가? 점 보고 때려 맞추는 거 말이야.”
뼛속부터 고위귀족으로 길러진 바란은 천민을 배려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낯을 찡그리면서 비꼬는 그의 모습은 인색하고 엄숙한 늙은 귀족 같은 데가 있었다.
“그런 유치해 빠진 방법과는 다릅니다. 나는 저 별의 밝기나 빛깔, 궤도를 보고 과거에 있던 기록을 대조해서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을 계산해내지요. 아는 만큼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점성술입니다. 가령….”
막쉬롭은 보란 듯이 웃었다.
“바란 탈타미오의 별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게 많습니다. 부모가 죽은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거나, 어느 편에도 진실 된 충성을 바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읽을 수 있지요.”
멋대로 지껄여 보라고 여유로운 미소를 내걸었던 바란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되물으려 했을 때, 막쉬롭은 믿거나 말거나 다 당신 선택이라면서 말을 잘라버렸다.
“아, 좀 전에 니카 경의 운명에 관해서 물었던가요? 걱정할 것 하나 없습니다. 그 아이의 앞날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과 명예의 길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들여다보니 그 길목에 장애물이 하나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장애물?”
바란이 되물었다.
“바로 당신입니다. 바란 탈타미오.”
“뭐?”
“별 하늘에 나타나는 운명에 의하면 당신은 니카의 발길을 붙잡는 검고 끈적끈적한 늪 같은 존잽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니카를 같은 늪 안에 밀어넣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인데,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이 막쉬롭이 그를 위해 길을 미리 닦아놓은 지가 어언 십수 년…. 이제 당신만 죽여 없애고 나면 그 애는 제 어미가 미처 누려보지도 못한 영광을 마침내 손에 넣게 될 거란 말입니다!”
구더기는 거친 숨을 심호흡으로 골랐다. 침착함이 돌아왔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유를 떠올렸다. 더는 치기 어린 사랑의 송사를 들어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어서 잔악후작을 죽여야 했다. 왕녀의 허락도 없이 숨어들어 잔악후작을 암살한 것이 앞으로 수 분 후에 발각되면 막쉬롭은 자신의 목숨 역시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더구나 라락크쉬가 부크쉬낙슈에 취한 왕녀의 곁에 붙어 있지 않은가. 그 애는 어릴 적부터 무척 다혈질이면서 영리하기까지 했다. 부크쉬낙슈 얘기는 기회가 났을 때 진작 다 일러바쳤을 것이다.
‘보자, 그러면 이 목에 걸린 죄명이 몇 개가 되는 거지?’
못해도 왕녀를 기만한 것과 포로를 죽인 두 가지는 깔고 들어가리라. 아무리 그녀가 앙살라테 왕자의 총애를 받는 집시라지만, 여기까지 손을 댔으면 처벌 없이 넘어가진 못한다. 그리고 막쉬롭의 늙은 몸은 혹독한 환경에 수감 당하는 걸 견딜 만큼 강하지 않았다. 잔악후작에게 그랬던 것처럼 며칠간 쇠사슬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굶긴다면 저승 문턱 넘는 거야 순식간이다.
‘하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그래도 좋단다. 멘사야의 아들…. 나의 조카. 나는 사랑하는 동생이 산제물로 끌려가는 꼴을 한심하게 구경만 하고서도 꼴사납게 살기를 참 오래 살았다.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오히려 영광스러울 따름이야.’
니카의 별은 궤도에 올랐다. 잔악후작을 제거하고 나면 그의 피를 입증하고 왕좌에 앉기까지는 탄탄대로일 것이다. 막쉬롭이 더 이상 곁을 지켜줄 수 없더라도 내리막길을 달리는 수레바퀴처럼 정해진 길이 그대로 이어지리라.
총력전을 앞두고 있다 말들 하지만, 어차피 왕자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앙살라테 본인도 대공군과 정면승부로 부딪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오래 지나지 않아 신전에 혈통 입증 의식을 요청할 것이다.
이 의식은 오랜 전통에 의한 것으로, 수도 애틀턴의 왕성 지하에 자리한 용들의 무덤에서 진정한 용혈을 가려 왕의 자격을 판별하는 데 쓰였다. 지상에서 가장 용에 가까운 남자라 지칭되는 헬린 힐벤과 혈통으로 승부를 보다니, 겉으로만 봐서는 여간 멍청한 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앙살라테는 이 의식을 위해 벌써 십수 년을 준비해왔다. 용병 생활을 끝마치고 왕좌를 꿈꾸기 시작한 때부터 그는 각지로부터 고대룡의 유해를 긁어모았다. 고대룡 화석의 반발작용으로 혈통을 증명하는 의식의 빈틈을 파고든 수법이었다. 고대룡의 유해를 장식품처럼 두르고 가면 반발작용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영 치사해 보이기는 해도 이 방법은 역사 안에 공공연히 쓰였던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의식을 통해 신전 측에 적합한 왕위계승자라고 인정을 받고 나면 낡아빠진 명분을 챙길 수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헬린 힐벤 대공의 위치를 왕위찬탈차라고 끌어내리며 비난할 자격이 갖춰지리라.
연합국에서 찾아냈다는 고대룡의 꼬리뼈는 도적에게 빼앗겼다 들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오랜 시간을 들여서 잣자후의 고대룡 유적에서 고대룡의 심장을 발굴해낸 참이다. 반쯤은 화석화 되어 있어서 그 효력이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고대룡 연구에 의하면 고대룡의 심장은 반발작용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장신구를 걸친다 해도, 그 자리에 니카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터.’
막쉬롭은 마치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부나방과도 같았다. 단검을 굳게 쥐었다. 사람을 직접 죽여본 적이 없어 손잡이를 움켜쥔 모양이 아무래도 낯설었다.
“떠드는 건 이만하지요.”
“네가 정말 운명을 볼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줘. 니카는 내가 없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그게 네가 본 미래인가?”
잔악후작에 대한 괘씸함과 거부감으로 가득 차 있는 막쉬롭이지만, 이 말이 가진 간절함에는 그녀의 강철 같은 마음마저도 조금 녹아내렸다. 그래서 무시해도 됐을 것을 구태여 대답해주었다.
“그래요.”
동정이란 정말 위험한 감정이다. 아무리 튼튼한 강둑이라도 작은 구멍이 나고 거기에서 물살이 새어 나오면 무너지기 십상인 것처럼, 견고한 계획도 순간의 동정을 베푸는 바람에 산산조각으로 파투 나는 경우가 있었다.
“멈춰!”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막쉬롭은 짜증스럽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천천히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증오스러운 혈육 라락크쉬가 서른 해 전에 대들던 건방진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나이가 들고 낯이 쪼글쪼글해진 것을 빼면 정말 기억 속의 한 장면을 꺼내 보는 것처럼 익숙한 상황이었다. 라락크쉬는 전부터 막쉬롭이 하는 일에 잘도 훼방을 놓고 다녔으니까.
막쉬롭은 애써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칼질 한 방에 달성할 수 있는 과업이 멘사야의 아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고 나니 이가 맞붙어 갈렸고, 도무지 웃는 시늉을 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 * *
“왕녀 전하를 뵙습니다.”
“안에 누가 있나요?”
“왕녀 전하의 명을 받고 잔악후작을 심문하러 왔던데요. 그 늙은 집시 말입니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느냐면서 어리둥절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는 간수에게 수리는 손사래를 쳤다. 잣자후 성 안에서 늙은 집시라는 말이 알맞은 이는 수리가 알기로 단 한 사람뿐이다. 수리는 삐걱대며 돌아서서 구더기를 돌아보았다. 탄식하듯이 말했다.
“막쉬롭이 참회의 방 안에 있어.”
“제가 말씀드린 대로 말이죠.”
“맙소사.”
수리는 현기증을 이기지 못하고 멈칫 뒤로 몸을 기울였는데, 단단한 기사의 흉갑이 그녀의 등께를 받쳐 일으켜 세웠다. 괜찮느냐고 묻는 것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무슨 속셈인지 들어야겠어.”
“전하, 제가 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지금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은 피하시는 게 낫습니다. 우선 제가 안으로 먼저 들어가서-”
“진정들 하십시오. 이럴 때는 기사인 제가 나서는 게 낫지요.”
니카의 부재로 인해 대용품처럼 대동한 기사가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말을 끊긴 구더기는 새끼발가락을 거세게 찧은 사람처럼 눈과 입술을 전부 다 꾹 다물고 하늘을 향해 두 손바닥을 한번 뻗었다. 아마 그녀의 신분이 조금만 더 높아서 그럴싸한 발언권이 있기만 했더라도 “뭘 안다고 나서는 거야!”하고 소리쳤을 것 같았다.
“구더기라고 했나요. 경의 말이 일리는 있어요.”
수리는 아직도 이 기사의 이름이 제란딘인지 제라딘인지 헷갈리고 있었다.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 만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왕녀 수리 드라코슨은 모르는 이름을 대충 얼버무릴 정도의 주변머리는 있었다.
“아직 당신을 완전히 믿는다고는 하지 않았죠. 내 기사를 앞세워 들어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그런 다음에 막쉬롭을 뜯어말리든지 해요.”
“그러면 왕녀님은 누가-”
“걱정 말아요. 간수들이 왕국기사만큼 솜씨 좋은 검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 호위를 감당할 능력은 있을 테니까. 서둘러요!”
“잔악후작은 아마 족쇄를 차고 있겠죠?”
“양팔을 구속해뒀어요.”
“그렇다면 혹시 모르는 일이니 열쇠를 받아가겠습니다. 만약 심한 상처를 입었다면 재빨리 데리고 나와야 할 테니까요.”
수리는 기꺼운 눈초리가 아니었지만, 구더기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간수들을 시켜 열쇠를 들려주었다. 분노에 휩싸이지 않은 제정신으로는 잔악후작을 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이오를 죽인 놈이니 사지를 찢어야 한다고 날뛰던 게 언제인가 싶게 온순했다. 간수들은 아이러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좋아요. 하지만 명심해요. 막쉬롭에게 물을 것이 많아요.”
팔짱을 낀 수리가 당부했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전하. 목숨을 붙여서 데려올 수 있게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 말고 기다려 주세요. 저희가 괜찮다고 신호하기 전까지는 반드시 밖에 계셔야 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하의 잠재의식이 막쉬롭의 목소리에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 아시겠죠?”
심각한 당부에 수리도 마른침을 삼키며 가녀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작은 움직임에 온몸이 전부 다 휘청했다. 간수 세 명이 우락부락한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달려들어 수리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아주 우스운 광경이었다.
“그럼, 기사 나리. 들어가시죠.”
“건달 같이 부르는 것 품위 없으니 그만두시지. 천출인 거 굳이 드러내고 다니려는가?”
“…성격이 그렇게 꼬인 건 왕국 기사들 직업병입니까?”
니카가 얼마나 까탈스럽게 굴곤 했는지 상기해낸 구더기가 중얼거렸다.
“뭐?”
제란딘 경이 눈썹을 매섭게 올렸다. 한탄처럼 주절거린 걸 다 들은 모양이었다. 모욕을 당했다는 듯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낯을 애써 외면하고 구더기는 바삐 걸음을 놀렸다.
간수들이 아무것도 없는 같은 차가운 돌벽의 구석구석을 건드리자 비밀스럽게 숨겨진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턱이 쩍 벌어질 정도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법처럼 나타난 문턱 너머로 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시야의 왼쪽 구석에서 서슬 퍼런 반사광이 번쩍했다. 포로를 넣어둔 철창 안쪽으로부터 나온 빛이었다. 구더기는 그 빛줄기의 출처가 막쉬롭 손에 들린 단검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와락 소리쳤다.
“멈춰!”
구더기의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같이 들어선 제란딘 경도 깜짝 놀라 구더기를 바라보았다. 귀청을 찢어놓으려고 작정을 했느냐며 투덜거리던 그는, 자신이 누구 편인지 자각하고 난 뒤 서둘러 발검 자세를 취해 막쉬롭을 위협하려 했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철창 밖으로 나와라!”
늙은 집시는 목숨이 달아날까 식겁하기는커녕 제란딘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구더기에게 핀잔을 줬다.
“성가신 것 같으니라고.”
“이봐요, 대체 그 가엾은 남자는 죽여서 어디다 쓰려는 거예요?”
구더기는 막쉬롭을 몰아치거나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애를 쓰며 외쳤다. 이 질문을 던져 막쉬롭의 이목을 끈 뒤에 철창 너머에 묶인 잔악후작의 상태를 곁눈질로 살폈다.
정말이지 눈 뜨고 못 봐줄 꼴이었다. 잔악후작이란 작자는 위명이 부끄럽게도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사람처럼 보였다. 양팔이 쇠사슬에 결박당해서 마치 젖은 빨래가 널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엾은 남자라는 표현에 위화감을 느낀 제란딘이 귓전에서 말은 바로 하자며 속삭였다.
“저기 다른 누가 있었더라도 가엾다는 말에는 동의했겠지만, 저 새끼는 더 당해도 싼 놈이야.”
“토 달지 좀 말고 있어요! 가만, 그런데 왜 이렇게 낯이 익지?”
때마침 쇠사슬에 묶이고 턱 바로 밑 언저리에는 막쉬롭의 단검을 대고 있던 잔악후작이 눈을 들어 구더기를 올려다보았다. 몸을 축 늘어뜨리고 아주 체념한 듯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이 소란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구더기는 곱상한 얼굴에서 반 이상의 존재감을 독차지하는 새파란 눈동자가 드러나자마자, 이 남자를 어디서 보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파란 눈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분포한 북부에서도 저렇게 시리도록 파란 눈동자는 흔히 볼 수 없었다. 그래, 구더기는 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철창 안의 남자도 구더기를 보고 눈인사로 아는체했다. 이 기시감이 구더기의 착각이 아니라 정말이라고 증명해주는 듯했다.
“그래, 분명히 사난타에서….”
왕자군의 기습으로 붙잡힌 수많은 귀족 포로들을 수감한 사난타 성의 지하감옥은 말 그대로 포화상태였는데, 그 안에서 예외적으로 혼자 공간을 쓰던 자가 있었다. 구더기는 뒤늦게 락샴의 명령으로 수감되는 바람에 어디든 섞이지 못하여 불가피하게 저 남자와 한데 갇혔더랬다.
‘잔악후작이라는 게 저 남자였군! 그래, 사난타 성으로 진군했던 대공군 지휘관이 잔악후작이라고 들었으니, 그러면 저 남자를 외따로 가둬둔 것이 이해가 돼.’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구더기의 상념을 깨고 막쉬롭이 목소리를 냈다. 기사를 대동하고 들어와서 적지 않은 압박감을 느꼈어야 망정인데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다. 꼼짝 못 하는 잔악후작을 내려다보더니만 칼끝으로 예쁜 얼굴 위에 얕은 생채기를 내기도 했다.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단칼에 그의 명줄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구더기에게 과시하듯이 내보이는 것이다. 악취미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런다고 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다 저렇게 능구렁이 같아지는 것인지 궁금했다.
“전하의 포로를 건드리면 너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 엄마. 정신 차려요. 그놈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걔 죽이고 당신 목숨마저 끊는 게 뭐하는 짓이야?”
“엄마?”
제란딘 경은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늙은 집시를 위협하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생뚱맞은 정보가 귓속으로 들어와 그의 진지한 태도를 다 무너뜨렸다. 엄마라니? 이 안에 구더기에게 엄마라고 불려 마땅한 정도로 늙은 사람은…. 맙소사. 제란딘의 하관 근육과 입술이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 것처럼 좌우로 한껏 늘어났다.
“당신 저 여자 딸이었어?”
“오, 딸이라. 그랬던 적이 있었지.”
대답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막쉬롭은 인자한 할머니를 자처하는 것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는데, 사람을 절로 얼어붙게 만드는 저 차가운 시선 때문에 누구 하나를 죽이려는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여겼던 적이 있었어. 나는 너를 배 아파하며 낳아주었고, 이름을 주었고, 먹이고 입히며 장성할 때까지 길러주었지…. 그런데 네가 나에게 돌려준 것은 무엇이더냐? 라락크쉬.”
고귀한 이름을 발음한 막쉬롭은 질끈 눈을 감았다 뜨며 정정했다.
“아니, 구더기라고 했던가? 대단한 이름이구나. 아주 끔찍하도록 잘 어울려. 시체에 득달같이 달라붙는 것이 바로 구더기가 아니냐? 죽음을 몰고 다니는 불결한 생물. 네가 어떻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게 되었는지 저 잘난 기사 나리께 한번 고해 바쳐보려무나.”
“그건-”
“어서. 궁금해 돌아가시겠다는 표정 아니냐? 내 막내동생 멘사야를 네가 어떻게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한번 털어놔 보란 말이다.”
대화에 언급되는 것이 불편했던 제란딘 경이 눈치를 보다가 일보 후퇴하면서 속삭였다.
“이거 가족 싸움인가?”
구더기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랬다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결국은 이마를 짚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나 거친 비난을 가만 들어주고만 있을 정도로 구더기의 잘못이 많은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억울한 마음이 성대를 긁었다. 거친 목소리가 급하게 입술을 뚫고 나왔다.
“전부 다 내 책임으로 전가하는 건 억울하죠! 엄마. 아니, 엄마라고 부르지 말라 그랬던가? 그러면 주인님이라고 부르면 딱 맞으려나요? 왜냐하면 당신은 날 꼭 도축하려고 준비한 돼지처럼 키웠잖아요.”
“음…. 이거 영 내가 낄 판이 아닌 것 같은데-”
“이 돼지가, 죽기 싫어서…. 내가 도축 당할 차례에 다른 돼지를 좀 밀어 넣고 뛰쳐나왔기로서니 그것 가지고 책임을 물을 수가 있겠냐고요!”
* * *
충격적인 대화를 엿들었던 삼십 년 전의 밤.
구더기는 숨이 가쁘도록 빠르게 달음질쳐 그 길로 산을 내려왔었다. 어떻게 엄마가 이럴 수 있지? 내 엄마고, 나를 사랑하잖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구더기는 이게 다 나쁜 꿈은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들어버린 내용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인신공양도 숫처녀와 숫총각만 받으니까.’
‘인신공양?’
고대룡의 제사를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 분명 막쉬롭과 이런 대화를 했었다. 인신공양이라는 단어에 내심 소름이 쫙 끼친다고 생각했었다. 인간을 산제물로 바치는 것이 고왕국시대의 악습이라고만 여겼지 설마하니 구더기가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있는 이 시대에도 사람을 제물로 바치려는 시도가 일어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도 내 부족, 내 엄마가!’
의식에 사용될 물건들을 넣어둔 창고 속에서 발견했던 관짝 같은 갈대 상자와 새하얀 수의인지 혼례복인지 하는 옷가지의 정체를 구더기는 뒤늦게 깨달았다. 입안이 말랐다. 마찬가지로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내가 자는 도중에 그 부크쉬낙슈인가 뭔가 하는 풀로 연기를 피운다고 했던가? 그 연기를 맡으면 정신을 잃게 되기라도 하는 걸까?’
급한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렸다. 균형을 잃고 좌우로 한참이나 팔을 휘저었지만 심장이 쿵쿵대는 통에 균형을 잡기는 요원했고, 구더기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땅에 한번 엉덩이를 붙이고 나니 다리가 달달거리며 풀려서 일어나지도 앉아있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도망쳐야 해.’
엿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오늘 밤, 막쉬롭과 그 수하들은 구더기의 정신을 잃게 만든 뒤 의식의 희생양으로 구속해두려 할 것이다.
숫양을 잡아 그 피로 제단을 적시는 고전적인 방법조차도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구더기는 인신공양 제사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는 것조차 구역질이 올랐다. 심장을 갈라 고대룡에게 바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이미 다 절멸해서 지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그 고대룡을 위해 산사람을 죽이겠다고! 이게 맹목적인 신앙으로 일으키는 눈먼 살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구더기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당장 천막 안으로 들어가 돈이 될 만한 귀중품을 챙기자. 그리고 북쪽에서도 얼어 죽지 않으려면 썩 두꺼운 옷가지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집시 집단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체첼그람 바깥으로 향해야 했다. 평생 나가본 적 없는 이 도시 바깥으로 말이다.
‘말을 훔친다면 발각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젠장, 혼자서 상대하기엔 수가 너무 많아.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
초조한 절망의 파도가 어린 구더기를 덮쳤다. 손톱을 하염없이 물어뜯으며 제자리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달음질치던 구더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천막 앞에 다다랐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천막을 향해 다가섰다.
“멘사야 님!”
“아, 안녕하세요.”
그때였다. 뒤쪽으로부터 접근하던 도중에 사람 말소리가 들렸다. 여상한 대화에 불과했지만, 긴장감 때문에 심장이 급박하게 내달리던 구더기에게는 이 일상적인 말들조차도 위협으로 느껴졌다. 천막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몸을 숨겼다.
“라락크쉬 님을 보러 오신 건가요?”
“네. 시간이 너무 늦어서 아직 안 자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오늘 언덕 아래서 철 늦은 검불딸기를 꽤 모았는데, 입 심심하면 주전부리로 먹으라고 한 바구니 가져다주려고 왔어요. 뭐, 여자들끼리 수다도 좀 떨구요….”
“정말 자상하시군요. 라락크쉬 님은 멘사야 님을 가족으로 두셔서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멘사야가 쑥스럽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구더기의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멘사야도 막쉬롭이 그녀를 고대룡의 제사에 바치기 위해 키워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두 사람은 친밀한 사이니까 막쉬롭이 진작 귀띔을 해줬을 법도 했다.
‘아니야. 그렇다면 굳이 이 시점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만나러 올 이유가 있을까?’
그때, 비열하기 그지없는 묘책이 떠올랐다. 구더기가 달아난 줄 알아채고 나면 사람을 시켜 뒤쫓기 시작할 테니, 애초부터 혼란을 주면 어떨까 싶었다. 마침 멘사야가 저 안에 있다.
‘멘사야가 나 대신 내 천막에 있으면 돼. 그러면 시간을 벌 수 있어.’
희생의 굴레를 뒤집어씌우게 되는 건 아닌가 고민했지만, 막쉬롭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멘사야를 구해내리라 싶었다. 어지간한 우애였던가. 더구나 제 코가 석 자인데 더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곁눈질로 멘사야가 천막 안에 들어서는 것을 살폈다.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구더기는 재빨리 튀어나가서 멘사야와 이야기한 뒤 제 갈 길을 가던 집시를 붙잡아 세웠다.
“저기, 방금 내 막사에 들어간 거 멘사야 이모야?”
“라락크쉬 님! 밖에 계셨군요? 네, 방금 라락크쉬 님 만나겠다고 들어가신 건데요?”
“내가 지금 당장 볼 일이 있어서 조금 늦게 돌아갈 것 같은데, 천막 안에서 나 좀 기다려달라고 전해줄래?”
“네? 네…. 그러죠 뭐.”
몰랐다는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죄일까?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자기 자리에 나이 어린 이모를 대신 앉혀두고, 몇 번이나 엎어져도 아랑곳없이 내닫던 그 머릿속에서, 과연 최악의 상황을 떠올렸던 적이 없었을까? 부크쉬낙슈 연기를 천막 안에 피우고 출입구를 틀어막으면 그 안에서 무료하게 구더기를 기다리고 있던 멘사야가 어떤 꼴을 당할지 과연 정말 몰라서 그랬단 말인가?
헛소리다. 다 마음 편하자고 하는 변명에 불과했다. 정당화할 방법이 없었다. 천막 쪽에서 도움을 애걸하는 멘사야의 비명소리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구더기는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맙소사!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널 여기서 만나다니, 라락크쉬! 나 여기야. 날 좀 도와줘!”
어떻게 그놈들 손에서 탈출한 건지 몰라도 다리 없는 벌레처럼 흙바닥을 기던 멘사야가 그녀를 발견하고 목놓아 외치던 때…. 꼭 구해줄 것처럼 다가가서는 멘사야의 머리에 돌팔매를 날렸으니까.
“너, 너는 어차피 괜찮을 거야. 멘사야. 엄마가 너를 건드릴 리는 없으니까…. 근데 난 아니란 말야. 나는 도망쳐야 하니까…. 너도 이해하지?”
창백한 멘사야의 피부에 핏자국과 붉고 푸른 멍 자국이 묻었다. 눈꺼풀과 손등이 움찔움찔 떨었고 이상한 신음소리가 났다. 구더기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자마자 거대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불쌍한 막내이모는 완전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는지 간헐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도와줘….”
“내가 더 불쌍해.”
“라락크쉬….”
“내가 더 불쌍하다고! 알아? 그, 그렇게 보지 마….”
비겁한 구더기를 올려다보던 멘사야의 눈동자는, 그날 밤하늘보다도 더 새카맸다.
구더기는 그저 등을 돌리고 그 자리에서 달음질쳤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한다. 막쉬롭이 동생을 험한 꼴 보게 하지 않을 거라고 합리화하길 반복했지만, 기실 멘사야가 자신을 대신해 똑같은 일을 당하지도 모른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똑똑히 알면서도 그랬다. 잔혹한 운명에서 도피하기 위해 멘사야를 구렁텅이에 남겨두고 왔다. 그러니 마냥 피해자인 척 두려움에 떨어댈 자격은 없었다.
* * *
“네 운명이었다. 멘사야 그 아이는 아무런 책임이 없었음에도 무고하게 끌려가야 했어. 바로 두 달 뒤에 감람골의 집시부족과 혼사가 잡혀 있었는데! 멘사야는 사랑하는 사내와 가정을 꾸릴 생각에 늘상 신이 나 있었단 말이다…. 그런데.”
막쉬롭은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제 어깨를 끌어안았다. 깊은 원한에 잠긴 목소리가 다시 한번 구더기를 탓했다.
“너 때문에.”
입안에 감돌던 마른 웃음이 배출구를 찾지 못하고 끝내 콧김으로 빠져나왔다. 구더기는 어느새 주름이 한껏 늘어진 노인이 되어버린 제 어머니를 가엾게 바라보았다. 늙은 몸은 여기 머무르고 있지만 막쉬롭의 정신만큼은 과거나 미래처럼 영원히 겪을 수 없는 시간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그렇게 애틋하면 당신이 막았어야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이게 아직도 무슨 소꿉장난인 줄 알아? 고대룡이 깨어나리라는 건 지난 세대에 걸쳐서 이어져 내려온 예언이야! 내가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 온 과업이었단 말이다…. 체첼그람이 전부 다 뒤집어져서 그 위에 살던 선량한 백성들이 다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어.”
격한 감정을 속으로 다 갈무리하지 못한 막쉬롭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제물이 필요했어. 사람들이 다 뒤지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체첼드롭에게 바칠 산제물이 필요했다고. 체첼그람 샤먼의 직계후손이자 숫총각 숫처녀인 젊은이가 너와 멘사야 말고 누가 있었느냔 말이야!”
구더기가 그렇게 도망치고 나서 막쉬롭은 집시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잣자후까지 향하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구더기는 문득 이 이야기를 삼십 년 전 그 날에 나누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속에서 곪은 말들은 단어 하나하나가 죄다 고통이었다. 구더기는 힘없이 지껄였다.
“죽고 싶지 않았는걸. 나도 살고 싶었어. 나는 괜찮고, 멘사야는 안 된다? 그런 게 어디 있어.”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산다는 게 무엇이냐?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다. 라락크쉬.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네 이름 ‘라락크쉬’가 뜻하는 바가 무언지 말이다.”
라락크쉬는 옛 전승에서 고대룡을 길들였다 전해지는 전설적인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여타의 집시부족까지 찾아다니며 설득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 이름조차도 고대룡에게 정결한 제물로 바치기 위한 포석이었구나 싶었다.
“장기말처럼 사는 거 싫어.”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 구더기의 움직임이 점차 강해졌다. 언성도 그에 맞추어 점차 올라갔다.
“나는 줄 달린 인형 아니고 사람이야, 사람! 뒤에서 누구에게든 조종당하는 기분은 지긋지긋해!”
“무지렁이처럼 살더니 공부가 모자라졌구나.”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야. 배웠건 못 배웠건, 큰 뜻이 있건 없건 간에 사람들은 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선택할 줄 알고, 책임질 줄도 알아! 엄마야말로 그 공부에 미쳐서 삶은 바라보지도 않았잖아. 미래를 내다보는 집시? 웃기지 말라고 해. 인간은 평생 오늘만 살아.”
때아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좀 섬뜩하게 들렸다. 화들짝 놀란 제란딘 경이 눈치를 보며 구더기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나갔다. 구더기는 이내 수그렸던 고개를 위로 올렸다. 곧장 눈이 마주친 막쉬롭의 얼굴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구더기의 거친 얼굴은 결단력과 당당함으로 반듯하게 무장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멘사야를 돌로 치고 광야로 달아나 서른 해 동안 다시 기꺼이 종살이할 거라고. 진심이야. 운명에게서 달아난 자유의 대가치고는 값싼 편이지.”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두렵도록 거대한 인력을 가지고 있다. 제란딘은 입을 헤벌리고 있다가 자신이 꼬질꼬질한 집시 아줌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며 펄쩍 뛰었다. 그는 민망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고 괜히 자신의 아랫입술만 연신 깨물어 괴롭혔다.
“종알거리는 것 좀 그만하면 안 될까?”
그때 잔뜩 긴장된 분위기를 제치고 나른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돌벽으로 단단히 둘러싸인 이 참회의 방 안에서는 소리가 사방에서 반사되어 나오는 탓에 출처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톡 쏘는 듯한 귀족적인 억양이 들리는 즉시 설전을 벌이고 있던 두 집시는 물론이요 홀로 딴생각에 잠겨 들었던 제란딘 경까지, 그 목소리가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알아차렸다.
“이쪽은 지금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거든. 조금 집중해야 해서 말이야.”
바란 탈타미오가 눈썹을 들어 올려 이맛살을 찌푸렸다. 쇠사슬에 묶여 자유롭지 않은 손으로도 용케 그의 곁에 선 막쉬롭과 단검을 가리켰다. 거뭇거뭇한 땟자국에 더럽혀졌어도 여전히 예쁘장한 얼굴이 온화하게 눈치를 주듯이 찡긋했다. 더없이 귀족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구더기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초연한 저 낯이 무척 해괴하게 느껴졌다. 그녀와 제란딘 경이 지금부터 그를 구해낼 테니 안심하라고 말하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닫았는데, 제란딘 경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선뜻 후작을 호명했다.
“잔악후작.”
“아…. 늘 궁금했는데,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게 대체 누굴까?”
“뭐?”
“그렇잖아. 어린애 같은 호칭 아니야? 나를 언제 만나봤다고 내가 잔악하다느니, 사람을 잡아먹는다느니…. 사사바란 그 치하고 뭐가 다르다고 나만 대단한 별명을 받았는지. 안 그래?”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대공의 승전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학살자의 명성이 드높아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잔악후작은 왕자군을 숨겨준 귀족가의 씨를 말려 몰살하거나, 포로를 붙잡으면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다.
“전쟁에서 약한 놈들 죽이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잖아. 너 같으면 안 그랬겠어?”
“…씨발.”
잔악후작이 순진한 척 눈을 끔뻑이면서 빈정거리는 소리에, 같이 싸워 온 동료를 후작 손에 잃은 경험이 있는 제란딘은 열이 그야말로 머리끝까지 뻗쳤다. 콧김을 거세게 뿜으며 검을 소란스럽게 뽑아 들고 저 멀리 앉은 바란 탈타미오를 겨눴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줄은 알고 살아야지. 네가 저지른 죄가 부끄럽지도 않느냐? 인두겁 쓴 살인귀 새끼야!”
“저기, 경. 조금 조용히 해줄래? 나는 말이지…. 입바른 소리 하는 왕국 기사가 취향이라서, 그렇게 다그치면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해.”
“역겨워, 씨발. 헬린 힐벤이랑 똑같은 별종 새끼.”
“하하. 말이 심하잖아.”
본인은 키득거리고 말았다지만, 이 농담을 들은 구더기는 거리끼는 눈빛을 미처 다 감추지 못했다. 그녀와 공중에서 눈이 맞은 바란이 장난스레 웃었다. 새파란 호수 같은 두 눈은 마치 텅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능글거리는 말투에 손쉽게 도발 당해 잔악후작에게 웃음만 선사하고 있는 제란딘을 구더기는 재빨리 만류했다. 실핏줄 선 눈으로 불평 먼저 꺼내던 제란딘도 그가 왜 여기에 왔는지를 떠올리고 나자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를 빼고는 잠잠해졌다.
홱 몸을 돌린 구더기가 막쉬롭에게 삿대질을 조준하고 목청을 높였다.
“엄마. 어서 그 단검 내려놓고 투항해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뭐?”
막쉬롭은 픽 웃으며 잔악후작의 뒷덜미를 한 손으로 붙잡고, 단검을 붙잡고 있는 나머지 한 손을 공중에 높이 치켜들었다. 그대로 연약한 목덜미에 내리꽂기만 하면 잔악후작은 금방이라도 피 분수를 뿜으며 나자빠지고 말 것이었다. 구더기와 제란딘이 화들짝 놀라는 것에 비해 바란은 마치 남 일을 구경하는 듯이 태연한 낯짝을 유지했다. 지독한 남자였다.
“제정신이야? 여기에 검 든 기사 있는 거 안 보여요? 무슨 대단한 원한이 있다고 그 남자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는 거냐고요!”
“이 자를 살려두면 멘사야의 아들에게 방해가 돼.”
“그래서 목숨 걸고 없애시겠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시는군. 대단한 버릇이에요, 아주. 그렇다면 멘사야가 고대룡의 제물로 끌려갈 것도 진작 알았겠는데 왜 못 막았어요?”
“닥쳐!”
“알았어요! 진정해요!”
막쉬롭이 지금처럼 뜸을 들이는 과정도 건너뛰고 당장 잔악후작을 잡아 죽이려고 할까 봐 겁이 났던 구더기는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봐요. 엄마와 나는 별하늘에서 종종 다른 미래를 보곤 했었잖아요, 기억나요? 세상에 절대적인 예언이 없다고 가르쳤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당신이었어요. 미래를 꿰뚫어 보되 미래에 휘둘리지는 말라고 했었잖아요. 지금 당신 모습을 좀 봐요!”
단검을 쥔 막쉬롭의 손이 부들거리며 떨었다. 막쉬롭은 마치 이 선택에 대해 확신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해석은 항상 조금씩 어긋나게 되어 있어. 너 자신을 맹신하지 말거라. 별은 틀리지 않지만 인간은 틀리기 마련이거든.’
이렇게 말했던 게 바로 막쉬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가 결정적인 순간에 신중하게 망설이기 시작한 것이 꼭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원래부터가 신중한 사람이었다. 그 기질이 나이 좀 먹었다고 바뀌었을 리 없었다.
게다가 멘사야를 잃은 충격으로 앞을 내다보는 일에 대한 집착이 생겨 여기까지 내달려 왔겠지만,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은 충분히 알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을 고대룡에게 팔아넘기려 했던 최악의 어미 막쉬롭에게조차 애틋한 생각이 들어 구더기는 적잖이 고역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멘사야 이모의 아들은 자신의 숙명에 대해서 뭘 알고 있죠? 그에게는 곁에서 하나하나 다 일러줄 사람이 필요해요. 죽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
“이봐, 집시. 처음 그 기세는 어디 가고 갑자기 망설이는 거야? 날 죽이겠다고 했으면서. 설마 내가 죽여달라 애걸하게 만들 셈은 아니겠지?”
잔악후작이 끼어들어 막쉬롭을 자극했다. 누그러져 가는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죽고 싶어서 작정을 했나? 구더기는 생각했다. 구해주러 오기까지 했건만 대체 뭐가 불만이라고 저렇게 나오는지 알 도리가 없다. 구더기는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낮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보세요, 잔악후작.”
“이봐, 젊은 쪽 집시.”
똑같은 방식으로 바란 탈타미오도 구더기를 불렀다. 말을 낚아채 갈 줄은 예상 못했던지라 삽시간에 주도권을 빼앗기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친화력 좋은 웃음이 전부 다 걷힌 후작의 얼굴은 텅 비어있었다.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도화지 같기도 했고, 혹은 그 위에 새카맣게 덧칠을 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날 좀 내버려 둬.”
“순순히 죽어주겠다는 겁니까? 다, 당신….”
잔악후작은 픽 웃는 소리를 냈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살아갈 수 없다는 편이 더 맞겠지.”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아니었어요?”
“뭐?”
어떻게든 바란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꺼낸 말이었다. 구더기 역시도 이 말을 입 밖으로 낸 직후에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생뚱맞은 말을 꺼냈을 때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쑥스럽게 낯을 붉혔다. 그래도 기왕 꺼내 놓은 이야기로 승부를 봐야지 싶었다.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이미 쏟아낸 말을 어떻게든 바란과 연결지으려고 애썼다.
“왜, 저번에 손금으로 연애점 봐달라고 했던 걸 생각하면 모르긴 몰라도 마음에 둔 사람 정도는 있는 모양이던데…. 좋아하는 사람 두고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신 목숨 날리고 말 거냐고요.”
바란은 잘만 나불대던 입술을 꼭 다물었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란의 마음속에 박힌 가장 커다란 가시였으니까.
구더기는 두어 차례 헛기침하고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구더기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며 막쉬롭이 잔악후작을 바투 붙잡아 당겼다.
“윽….”
검날이 잔악후작의 목덜미에 바짝 붙어 신선한 붉은 금을 남겼다. 구더기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막쉬롭과 힘 싸움으로 붙는다면 젊은 그녀가 밀릴 턱이 없겠지만, 정작 이 거리에서는 손이 닿지 않았다. 닿는 게 있다면 목소리 정도였다.
조심스러운 눈길이 결박되지 않은 잔악후작의 다리에 가 머물렀다. 그의 두 팔은 앉은키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팽팽히 당겨진 채로 각기 벽에서 이어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다리였다. 상반신을 단단히 묶어뒀기 때문인지 다리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해두지 않았다.
‘내가 막지 못한다면…. 잔악후작이 스스로 팽개치게 하면 돼.’
비록 기력이 쇠진된 상태라지만 전장에서 구르던 장정이 노파 하나 뿌리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구더기는 왕녀의 명에 따라 잔악후작을 살려내고자 머리를 굴렸다. 꼭 왕녀의 명이 아니더라도 막쉬롭이 뜻하는 바 그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게 막고 싶었다.
잘만 나불대던 잔악후작이 갑자기 침묵에 잠겨든 것이나, 매력적인 눈웃음이 세모꼴로 변했다는 것은 구더기가 넘겨짚었던 말들이 어느 정도 정답에 근접해 있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세간에서 알아주는 악인이라더니 이건 뜻밖의 낭만주의자 아닌가. 하기는 구더기가 살아오면서 지켜본 바로는 낭만에 젖은 사람들이 꼭 저 후작처럼 자기파괴를 일삼고는 했다.
구더기는 공략할 부분을 알아냈다는 자신감에 차올랐다. 공격성을 전부 다 제거한 유약하고 간절한 목소리로 설득을 시도했다.
“이봐요, 후작 나리. 삶은 선택으로 가득 차 있어요. 아직 비관하기는 일러요. 아직 몇 번이고 상황을 반전시킬 선택의 기회가 남아 있다고요.”
“다 아는 것처럼 지껄이지 마. 내가 지레 겁 먹고 포기하는 얼간이처럼 보여? 그깟 어쭙잖은 희망으로 손쉽게 얻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진작 날 사랑해 줬을 거야. 그는 날 증오하다 못해 이 뱃가죽에다 칼침도 놓은 위인이라고.”
바란이 눈살을 구겼다.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았다. 사춘기 소년처럼 어눌하고 순진한 문장이 반듯한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왔다.
“달리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데다, 내가 있건 없건 상관도 없이 잘만 살아갈 무신경한 작자야. 이 집시 말로는 내가 없으면 그 사람 인생이 탄탄대로일 거라던데.”
“저 늙은이 말 다 믿는 거예요?”
“영검한 집시라잖아.”
“…….”
“그래. 이제 좀 끝내고 싶어서 핑계 삼았어. 그러면 안 돼?”
바란은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혔다가 돌연 아래로 꾹 당겼다. 당장 목줄기에 예리한 날이 붙어 있는데 힘주어 턱밑에 끼우려 하다니 마음을 굳게 먹은 게 분명했다. 막쉬롭이 정작 단검을 갖다 댔을 때는 고작해야 스친 상처만 하나둘 늘어났지만 이 무심한 고갯짓 한번에 붉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상처가 살며시 깊어 갔다.
낭패감이 순식간에 등골을 휙휙 내달렸다. 구더기는 몸서리를 치며 잔악후작을 만류하기 위해 노력했다. 몇 마디 조곤조곤 지껄였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모양에 와락 화가 치밀었다.
“전장에서도 꽤 굴렀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배짱이 없어요. 이렇게 겁쟁이라니, 상대가 좋아해 주지 않을 만도 하네요!”
“…뭐?”
“제대로 좋아한다고 얘기해 본 적이나 있어요? 혼자 비참함에 취해서 기회가 올 때마다 그 작은 구멍 같은 가능성들을 다 밀랍으로 꽁꽁 막아버린 건 아니고? 오해는 하지 말아요. 하지만 내가 아는 겁쟁이들은 다 그랬거든요.”
바란은 문득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 짜증이 치밀었다. 눈썹 위로 이어진 근육이 찌푸려지며 멋들어진 세로줄을 만들어냈다.
저 집시는 왕녀의 명령을 받고 온 것 같더니만 뭘 어떻게 해서라도 바란의 마음을 돌리려고 말 그대로 아무 소리나 내던지고 있었다. 어이가 없고 허탈해서 코웃음이 났다. 좋아한다고 말이나 해 봤냐고? 이걸 질문이라고 했을까.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바란은 숨을 멈췄다. 소란스러운 가슴의 충동을 참지 못하고 농담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서 ‘좋아해서 그랬다면?’하고 물었을 때, 사랑하는 니카 경이 어떤 표정을 보여주었는지 떠올리려고 했다.
‘어디부터 농담이었지?’
‘고상한 척 그만두고 할 얘기가 있으면 해라.’
‘…다시 오겠다.’
바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체념을 전제하고 나눴던 대화 속에서는 꽉 틀어막힌 말장난처럼만 느껴졌던 니카의 문장들이 되살아나서 가슴을 간지럽혔다.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이나 있느냐고? 건방진 질문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좋아한다고 얘기했던 게 언제였더라. 아마 탈타미오에서나 그랬을 것이다. 그때는 진심을 교묘하게 털어놓더라도 당장 들통날 리 없었으니까, 매일 같이 욕심을 잔뜩 부리곤 했었다. 귓바퀴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하게 갖다 대고 “좋아해!”하고 외쳤다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니카에게 어깨를 얻어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하지만 그 시절에 쏟아냈던 좋아한다는 말은 이제 전부 기만과 거짓, 헛소리, 속임수가 됐는걸.’
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니카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본 적이 있었나?
‘…없어. 없다. 무서웠으니까. 정체를 들킬까 봐 두려웠고, 내 삶의 한 가닥 희망이었던 앙살라테와의 거래를 잃어버릴까 두려웠고, 니카가 왕녀를 은애한다는 이유로 나를 거절할 것 같아서 두려웠어.’
바란은 고개를 뒤로 젖혀 늙수그레한 집시의 낯을 거꾸로 올려다보았다. 니카와 대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로 젖어 반짝이는 노파의 눈동자가 니카를 진심으로 위한다는 것만큼은 절절히 전해져 왔다. 그래서 바란은 니카에 관한 장밋빛 예언을 선뜻 헛소리라 부정하지 못했다. 바란이 니카의 삶에 있어 장애물이라는 말은, 이성과 합리를 떠나 바란이 평소에 생각해 왔던 바이기도 했다.
‘이기적으로 내 마음만 밀어붙여서 니카를 불행하게 만드는 건 저번에 탈타미오에서 겪었던 나날들로 이미 족해. 더구나 이제는 왕녀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니카를 굳이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내가 있는 진창으로 끌어내려야 할까?’
바란에게 마지막 안식을 선사할 노파의 단검이 눈언저리에 희끗희끗한 반사광을 뿌렸다. 바란은 눈이 부셔서 질끈 감았다가 잠시 뒤에 도로 떴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창살 근처에서 눈치만 보며 서 있던 집시가 나직한 소리로 오지랖을 떨었다.
“…지레 겁먹은 거 맞잖아요. 그래서 도망치려고 하는 거고요.”
아니라고 부정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스스로를 속이려고 해 보아도 이렇게 명백하게 결론이 나 있는 것을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 바란은 자신이 겁쟁이가 아니라고 지껄였지만 행동은 그 반대로 했다. 겁에 찌들어서 광주리 안에 머리를 처박은 닭마냥 소심하고 불안해했다.
니카에게 진실을 말하고 그에게 접근하거나, 아니면 고통을 감내하고 첩자 노릇을 계속하거나. 바란은 눈 앞에 펼쳐진 몇 갈래의 길을 곁눈질로 훑어보고 그 어느 쪽도 선뜻 선택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우물쭈물 우유부단하게 그 가운데에 서 있다가, 마침내 벼랑 아래로 몸을 던지려고 하는 참이었다.
구더기라는 여인은 바란이 죽음을 감내하려고 하는 모습을 일컬어 도망치려는 것이라고 칭했다. 반발심이 치솟는 것과는 별개로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내 말 잘 들어보세요, 후작 나리. 당신이 은애하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고명한 분인지는 모릅니다. 얼마나 비극적으로 갈라진 관계인지도 미처 알지 못하고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눈앞에 놓인, 남들이 만들어 놓은 대로를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간 언젠가 한계가 온다는 겁니다. 상황을 주도하면 문제는 풀리게 돼 있어요. 비록 자신이 내린 선택에 대한 책임은 불가피하게 져야겠지만.”
“…상황을 주도하라고?”
참지 못한 웃음이 픽 새어나갔다. 세상에 이보다 더 우스운 말이 있을까? 앙살라테 드라코슨, 헬린 힐벤이 주무르는 체스판 위 어디에서든 일개 장기말에 불과한 바란이 제 뜻대로 움직일 깜냥이 될 리 없었다. 그는 여태 그 무엇도 주도하지 못했다. 사랑마저도 여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살피며 향유하는 것이 바란 탈타미오의 방식이었다.
“그래요.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한 거라면 죽었다 생각하고 살아보란 말이에요. 미래를 걱정하느라고 달달 떨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배를 채우고, 그 대단하신 짝사랑 상대 앞에 나아가서 좋아한다고 지껄여요.”
“…….”
“당신이 변하면 뭐든 변해요.”
고작 천민 따위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듣다니 후작 직위가 다 우스운 지경이었다. 옛말에 이빨 빠진 사자는 사자라고 치지도 않는다더니만 이 집시에게도 악명 높은 동북부의 고위귀족 바란 탈타미오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지금 말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뒤지시라고요.”하고 천한 말을 명령처럼 던지기까지 했다.
미래의 가능성을 바삐 재어 보느라고 복잡하던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이렇게 간단한 욕심이었던가 생각했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과연 죽기 전에 한마디 뱉을 수 있다면 니카에게 아주 직설적인 고백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한 데다 상투적이지만…. 그래도.
불투명하게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던 바란의 욕심이 단 한 문장으로 정의되면서 불씨가 당겨졌다. 도화선이 탁탁 소리를 내며 타고 들어가 바란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어설프게 덮어서 가려둔 마음이었다. 급소라고 칭할 만한 구석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이까짓 상관도 없는 사람의 일침에 절로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한심하긴.’
바란은 동상으로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다리 한쪽을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얼마큼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했다. 고통이 있기는 했어도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광적으로 달려들어 목숨줄을 끊으려던 노파의 기세는 어쩐지 한 풀 꺾여 있었다. 눈을 내리깔고 노파의 갈퀴 같은 손가락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그의 목을 붙들었는지 가늠했다. 떨쳐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을 때였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바란의 다리가 매섭게 움직였다. 검은 로브에 휩싸인 깡마른 다리뼈가 돌연한 발차기에 얻어맞고 굽어졌다.
‘나는 사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바란은 생각했다.
* * *
“잠깐. 군량을 그렇게 대량으로 반출하려면 왕녀님 승인이 필요하다.”
“흥, 낮잠 주무시느라 바쁜 그 연약한 수리 드라코슨 전하 말인가?”
전령이 빈정거리며 내뱉고는 홀로 끌끌거렸다. 니카의 차갑게 굳은 표정을 인지하지 못한 것인지, 계속해서 박수를 짤깍짤깍 쳐 대며 자신의 농지거리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찬탄을 금치 못했다.
“왕녀님에 대한 모욕에는 결투로 대응하겠다.”
“결투? 이 시국에 말인가?”
“그분의 명예보다 중한 것은 없으니까.”
“맙소사. 바늘 들어갈 틈도 없는 작자로구만.”
혀 끌끌 차는 소리에도 기죽은 기색 없이 니카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온갖 근심이 들끓고 있었다. 구더기와 막쉬롭에 관한 것, 그리고….
잔악후작에 관해서도.
수리 왕녀가 들이닥쳤을 때 경황이 없어서 잔악후작에게 알은체를 하지 못한 것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니카는 말라붙은 입술을 혀로 슬쩍 핥았다.
워낙 시급한 사안이라는 전령의 재촉에 따라, 니카는 의식이 없는 왕녀를 대신하여 군량 조달을 논의하기 위해 응접실에서 간이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사실 회의랄 것도 없이 앙살라테 측에서 이미 군량을 지정해 뒀다. 성의 보관소를 열고 먼지 한 톨 없이 긁어모아야만 간신히 그 선을 맞출 수 있는 정도의 양이었다.
‘과연 총력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는군. 잣자후의 저장고를 다 털어서 애틀턴에 주둔시키려는 이 과감한 기세라니.’
“어쨌든 왕녀 전하의 승인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왜냐하면 앙살라테 전하로부터 승인이 먼저 떨어졌기 때문이지. 여기 직인이 찍힌 친서가 있으니 궁금하다면 확인해 보든가 하시오.”
니카는 촛농으로 잘 봉해진 봉투를 뜯어서 그 안에 든 친서의 내용을 재빨리 눈으로 훑어내렸다. 과연 전령이 알려준 대로 왕자의 친필과 직인을 담고 있었으며, 잣자후에서 군량을 챙기는 것을 허가하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왕녀가 잣자후를 맡아 다스리게 되어 있다지만 그 권한은 원래 잣자후의 영주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고 있는 왕자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었다. 그러니 왕자 측에서 먼저 군량을 챙기도록 허가했다면 의식이 없는 수리 왕녀를 깨워서 보고를 올리는 번거로운 절차를 건너뛰어도 괜찮았다.
“…….”
니카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친서의 앞뒷면을 한번 더 살폈다. 친서를 신중하게 상 위에 내려놓은 뒤에 눈치채기 힘든 정도로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감이 밀물처럼 몰려들어 눈 앞머리를 꾹 지압했다.
“흠흠. 그러면 이제 저장고로 가시겠소?”
“…나를 대동할 필요가 굳이 있는지 모르겠군.”
“전령인 내가 혼자 저장고로 가서 왕자님 이름을 대고 설치는 것보다야 여기서 잘 알려진 얼굴인 경이 명령을 내리는 쪽이 낫지 않소.”
당장 고개를 젓기는 했어도 이 전령이 니카가 비쭉이며 뱉었던 말의 의도가 무언지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니카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뭐, 기껏해야 용인인 당신을 사람들이 얼마나 따라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왕녀에 대한 모욕은 니카를 당장 불타오르게 만들었지만, 정작 니카 자신을 용인이라고 낮잡는 일은 그에게 어떤 영향력도 가지지 못했다. 첫째는 니카에게 너무도 익숙한 일인 까닭이었고, 그다음으로는 저 말이 어떻게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이 잣자후의 사람들은 니카가 왕녀의 심복이라는 감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충성을 바치긴 했으나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잔악후작을 만나러 참회의 방을 지키고 있는 간수들을 전부 물리고자 했을 때 벌어졌던 일이 아주 좋은 예시였다.
면전에서는 손바닥을 비비지만 조금만 눈길이 빗나가고 나면 곧장 침을 뱉고 얼굴을 구기는 것. 지지해주는 사람들이라곤 없는 외로운 용인기사가 절대다수의 사람들을 일일이 처벌할 수도 없으니, 이러한 경멸의 태도가 이제는 거의 관행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마구간에 신선한 짚을 옮겨두는 일을 담당한 성의 어린 하인이 그의 등 뒤에 침을 뱉은 적도 있었다. 그 애는 고작해야 빈스와 코쿤의 나이 사이 어드메에 있는 어린 소년에 불과했는데도 그랬다.
편견은 대물림된다. 강대한 권력이나 다수의 의지가 그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이를 악물고 덤비지 않는 이상은, 용인을 향한 야유가 이 세상의 끝까지 이어질 것이다.
“당장 병사들을 소집하고 잣자후 성벽 바깥의 군 주둔지까지 우마와 군량을 옮겨야겠소. 엣시아 용병단 중 보급을 도울 인원이 이리로 향하고 있다 들었는데…. 오전에 사난타 강나루를 불태우고 다르탈루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니 이제 곧 잣자후에 도달할 거요.”
전령은 이렇게 재촉하며 니카 이외의 한 왕국기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얻어낸 잎담배를 말아 피웠다. 응접실 안이 뽀얗고 매캐한 연기로 찼다.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나 사치품에 익숙한 몸가짐으로 보아서는 왕자가 전령이라고 보낸 이 남자도 예사 신분은 아닌 태가 났다.
“언제까지 신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얼굴로 털이나 바짝 세우고 노려볼 작정이오? 그것참. 급하다니까 말이야.”
니카는 왕국기사의 검을 괜스레 한번 매만졌다. 매끈하고 검은 검집 위로 손가락이 미끄러지듯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움직임에 거들먹거리던 전령은 멋쩍게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좋다.”
“이제 말이 좀 통하는군.”
무언의 기 싸움 끝에 니카가 카우치에서 먼저 몸을 일으켰다. 왕녀의 곁에는 제란딘 경이 붙어 있었고, 그녀의 문 앞을 지키는 수 명의 왕국 기사도 있었다. 구더기 역시도 방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해 뒀으니 얼른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된다. 막쉬롭이 데려갔다는 코쿤은 믿을 만한 시중인을 시켜 수소문하면 그만이다. 니카가 직접 나선다고 한들 성 안의 온갖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시중인들만 한 정보력에는 미치지도 못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마구간에서 짐말들을 꺼내라고 지시하겠다.”
니카는 불안하게 일렁이는 마음을 달랬다.
* * *
“으…. 으헉…!”
“하하, 미안.”
신음소리에 자연스럽게 딸려 나온 바란의 웃음소리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막쉬롭은 눈살을 구겼다. 주름투성이 얼굴을 의도적으로 구기고 나니 낯가죽이 구멍이 듬성듬성 난 싸구려 직물 같은 모양이 됐다. 척추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그녀의 등줄기는 차가운 바닥을 구르고 나자 어딘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기괴한 소음을 냈다. 나동그라지고 나서부터 몸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았다.
“나 변덕이 심하거든.”
막쉬롭의 귓가에 충분히 들리는 소리로 잔악후작이 말했다. 사과에 이은 당당한 변명이었다. 바닥에 뺨을 구기고 헛기침을 하는 동안 막쉬롭의 시야각이 어정쩡하게 흐트러져서 바란의 모습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막상 포기하려니까 잘 안 되네. 팔 년 습관이야. 이해해 줘.”
‘배알 없는 놈.’
속으로 욕이나 퍼부어주는 게 그녀의 최선이었다.
저 다리. 막쉬롭은 눈을 아래로 떠서 벽면의 쇠사슬이 절걱거리며 바란의 몸뚱이에 이어진 교점들을 살폈다. 두 팔. 고작해야 두 팔만 묶어둔 것이다.
어떤 머저리가 이딴 포박방법을 고안해낸 건지 모르겠다. 상반신을 철저하게 묶어둔 것과는 다르게 잔악후작의 두 다리는 반쯤 자유로웠다. 물론 애매한 쇠사슬 길이 때문에 그는 늘상 공중에 반쯤 떠 있어야 했고, 자연스레 두 다리에도 압박감이 실렸다.
그러나 이 한번 악물면 가까이에 방심하고 서 있던 노파 하나는 삽시간에 엎어 칠 수 있는 상태였다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몸을 갑자기 옆으로 무너뜨리면서 꽁꽁 묶인 두 팔과는 다르게 자유롭던 한쪽 다리로 막쉬롭을 걷어차 넘어뜨린 것이었다.
막쉬롭이 연약한 늙은이였다는 점도 이 단순무식한 작전에 한몫을 했지만, 방심했을 때를 노려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온 덕이 다른 무엇보다 컸다.
‘이 나이 먹고 젊은 애들을 떼거지로 상대하면서 방심하다니, 나도 참 구제 불능이야.’
막쉬롭은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마음을 놓았던 이유 그 첫 번째는 당연히, 체념한 기색을 짙게 풍기던 잔악후작이 이렇게 뒤통수를 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녀 딴의 고민에 빠져 있느라고 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마지막까지 치닫고 나서는 정말 아무런 소용도 없는 고민들에 말이다. 이 남자를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니카의 앞날에 끼칠 만한 해로움은 없을 것인가 하는 생각들. 불안감에서 비롯된 망설임이 막쉬롭을 우물쭈물하는 어린애처럼 만들었다.
‘꼴 좋게 됐군.’
그녀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팔꿈치를 위로 쭉 뻗었다. 반쯤 놓쳐서 요 앞에 나동그라진 단검을 다시금 바짝 쥐려고 했는데, 이번엔 다른 쪽에서 방해가 들어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구더기였다. 신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싸구려 가죽으로 덮인 발이 막쉬롭의 주름진 손등 위를 폭삭 밟아 문질렀다.
“으윽!”
막쉬롭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놓치고 말았다. 사람이 늙고 둔해지고 나면 금방금방 바뀌는 상황 전개를 따라잡기가 무척 벅차게 된다. 막쉬롭은 손 안에 있던 단검이 신발코에 솜씨 좋게 조준 당해서 저 멀리 벽에 부딪고 퉁겨나는 모습을 두 눈 똑똑히 보는 와중에도, 단검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그만 해요, 이제.”
구더기가 막쉬롭에게서 한 발짝 앞서 나가서 단검을 주워들었다.
무심코 단검을 불빛에 비추며 한 바퀴 살펴보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게 심상치 않았다. 집시 샤먼인 막쉬롭이 다루는 단검이니 모르긴 몰라도 어느 고왕국의 유물이라는 이름쯤은 우습게 달고 있겠거니 싶었다. 무심하게 날을 눈길로 한번 훑고 나서 구더기는 단검 쥔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막쉬롭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상하지. 오래토록 쌓아 올린 계획을 다 파투내고도 이렇게 평안한 기분이라니.’
자신의 심리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막쉬롭은 잔악후작이 그녀를 걷어차기까지 넋을 빼고 있게 만들었던 그 망설임을 떠올렸다. 이 남자를 죽이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하는 망설임.
‘세상에 절대적인 예언은 없다….’
마냥 어리고 객기 덩어리라고만 여겼던 외동딸 라락크쉬는 자라나면서 꽤 말솜씨가 좋아졌다. 막쉬롭이 강조하던 철칙을 꺼내 들고 제 어미를 가르치려 들었다. 버릇없는 년이라고 혀를 차며 넘겨버릴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서른 해 전, 막쉬롭은 멘사야의 돌연한 죽음을 예언하지 못했다. 죄책감에 시달린 그녀는 그 사건 이후로, 별하늘에서 보이는 모든 가능성의 싹을 내지르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 아주 사소한 가능성만 있어도 뿌리를 뽑아서 안전한 돌다리로 만들고자 했다.
멘사야가 고대룡 체첼드롭의 새끼를 잉태했고 그 아이가 살아서 이 왕국 어디엔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그 신중한 기질을 더욱 엄격히 들이밀었다. 가령 길 가다가 어느 오솔길의 돌부리에 걸릴 것 같으면 그 길 위의 돌을 전부 골라내려고 하는 수준이었다.
그녀의 완벽주의는 맹신과 오만함으로 이어졌다. 점성술을 공부할 때 가장 기본으로 치는 게 바로 모든 가능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흐름을 바꾸지 않는 관조적인 태도임을 생각하면 막쉬롭은 완전히 반대로 움직인 셈이었다.
그녀가 비록 깊은 지식을 동원하여 역사 속에 존재했던 사례들을 긁어모았고, 그 덕에 썩 괜찮은 예언의 정확성을 보여주기는 했다지만, 그것을 니카 한 사람을 위해 해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억측이 섞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막쉬롭은 문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허점을 찔린 기분이 원래 이렇게나 무력한 것이었나? 늘상 분노와 촘촘한 계략에 사로잡혀 있던 머릿속이 텅 비면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무식해진 것 같다는 탈력감마저 들었고 몸이 잘게 떨렸다.
혼자서는 도무지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가 없어서 뒤집힌 딱정벌레처럼 다리를 바르작거렸더니 말없이 지켜보던 구더기가 또 훈수를 놓기 시작했다.
“이제 엄마 계획 다 틀어졌어요. 그만 해요. 무슨 생각으로 왕녀님께 부크쉬낙슈를 먹여 왔는지 변명할 궁리나 하는 게 나을 거예요. 맙소사, 고작 잔악후작 한 사람 죽이려고 이 난리를 피운 건 아니라고 말해줘요.”
“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났군. 그런데 다른 무기는 없는 게 확실한가?”
뒤쪽으로부터 제란딘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말로 치고받는 상황에 낄 능력이 안 돼서 등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던 자신의 처지가 내심 부끄러운지 뒤통수를 멋쩍게 긁적이고 있었다. 터덜거리는 걸음걸이로 구더기에게 바짝 붙어 섰다.
“없는 것 같긴 하지만, 잠깐 기다려 보시죠, 기사 나리. 모녀끼리 이야기할 시간을 주시라구요.”
“여태까지도 한참 떠들었잖아. 왕녀님이 밖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그럼 가서, 상황 종료라고 전하시든가요.”
막쉬롭은 외동딸과 젊은 왕국기사 사이에 말장난처럼 오가는 대화를 귀담아듣지 않고 넘겼다. 그들 대신, 니카에게 자기 자신을 다 조각내어 주어도 좋다고 말하던 귀족 청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후작의 이름을 달기에는 지나치게 앳된 구석이 있는 낯을 샅샅이 살폈다.
‘나그네 별’, 그러니까 왕의 별 옆에 박힌 붉고 가느다란 별. 바란 탈타미오의 별이었다. 막쉬롭은 그 별을 기생충처럼 불결하고 진액을 빨아먹어서 니카에게 하등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존재라고 해석했었다.
그런데….
자신이 점친 미래가 오만함이 낳은 오류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로부터 자꾸 희미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깜빡깜빡했다. 뭔가 잊고 있는 게 분명히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출 것 같아서, 막쉬롭은 숨을 멈추고 그 잔상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왜 또 갑자기 말이 없어요, 엄마?”
이유를 알 길 없이 또 묵묵해진 막쉬롭 때문에 가슴이 온통 갑갑해진 구더기가 가슴을 치며 소리쳤다.
“이봐.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라락크쉬.”
“…그 이름은 이제 안 쓴다고 말했잖-”
“날 좀 일으켜다오.”
구더기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허리께에 얹었다. 제란딘이 달려가서 내가 붙잡는 편이 낫겟느냐 물었다. 그 딴에는 서먹한 사이의 모녀가 신체를 접촉하는 것이 필히 낯간지러운 일일 테니 배려심 넘치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구더기는 그저 고개를 젓고 말았다.
바싹 마른 침음성을 흘리는 막쉬롭에게서는 더 이상 그 어떤 야심이나 꿍꿍이속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정신이 팔린 것처럼 보이기는 했는데, 그것도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구더기는 입술을 앙다물고 공중에 손바닥을 두어 차례 휘두른 다음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이때였다.
이 참회의 방 안에 운명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별 읽는 집시가 두 사람이나 있었다. 그런데 이 점성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도록 모순적인 기술인지를 증명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두 집시에 의해서, 그리고 두 집시의 목전에서.
‘왕의 별 앞을 가로막고 있는 붉고 희미한 별…. 잠깐. 이걸 왜 장애물이라고만 생각했지? 사료에 따르면 단 한 번 나타났던 경우지만, 붉은 별은 분명….’
막쉬롭은 아주 많은 정보가 담긴 복잡한 머릿속을 낱낱이 뒤지며 다닌 결과 그녀가 원하던 대답을 얻어냈다. 그 순간의 호쾌함에 무심코 무릎을 탁 내리치기까지 했다.
“맙소사, 탈타미오 후작은…. 라락크쉬! 그를 살려 보내야 해!”
막쉬롭은 다급한 마음에 구더기와 저 사슬에 묶인 잔악후작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깡마른 몸이 토끼처럼 톡 튀어 올랐다. 잔악후작의 역할을 재정의하게 된 놀라운 마음 때문에 말을 안 듣던 몸이 순간적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던 막쉬롭은 곧장 발을 접질리면서 균형을 잃었다.
운이 나빴다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막쉬롭을 일으키려고 다가가던 구더기의 한쪽 손에 여전히 단검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작은 그 애를….”
단검은 막쉬롭의 눈을 관통하고 들어갔다. 말랑말랑한 살점에 철검을 박아넣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손쉬운 일에 속했다. 손안에 육고기를 가르는 진동이 전해졌다.
흠칫 놀란 구더기가 단검 손잡이에서 뒤늦게 손을 떼어냈을 때, 막쉬롭은 다치지 않은 쪽 눈을 홉뜨고 있었다. 구더기가 간신히 그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즉사였다.
피가 묻어나왔다. 새끼손가락과 그 아래쪽 표면에까지 붉은 피가 스며 있었다. 구더기는 그것을 대충 문질러 닦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잎맥처럼 세세하게 새겨진 살결과 주름 사이에 피 찌꺼기가 껴 말라붙기 일보 직전인 모습을 보고 “아.”하고 멍청한 탄식을 남겼다.
잔악후작이 낮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때서야 구더기는 화들짝 깨어나서 피투성이 손으로부터 바닥에 고꾸라진 제 어미에게로 시선을 옮길 수 있었다. 손잡이를 남겨두고 날렵하던 칼날이 전부 다 두개골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붉은 피가 칼날 주변에서 천천히 배어 나왔다. 울컥, 울컥하면서….
“이, 이봐. 괜찮은가?”
말이 없는 구더기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제란딘 경이 조심스레 말을 걸며 구더기의 어깨를 건드렸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다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돌연한 사고로 제 어미를 죽인 꼴이 되었으니 그 심내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사람을 달래는 데 재능이 있는 편도 아니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기울여 구더기의 낯을 들여다보았다.
‘…웃고 있어?’
더는 크게 뜰 수 없는 수준으로 확장된 구더기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말린 검은 속눈썹 아래로 총총히 빛났다. 제란딘은 구더기에게 닿은 손끝으로부터 순식간에 소름이 쭉 올라와서 화들짝 놀라 떨어져 나갔다.
한참이나 여운에 젖어있던 구더기는 태연스레 손을 뻗어 막쉬롭의 홉뜬 눈을 내리 감겼다. 스스로 움직이던 존재가 숨이 끊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웬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어미를 잃은 이 순간의 감상을 뭐라 불러야 할까 구더기는 고민했다. 대답을 얻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해방감. 그래.
키득이며 웃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구더기는 제란딘을 의식하며 덜 별종 같이 보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막쉬롭이었다. 그 막쉬롭. 온갖 거대한 일들을 손쉽게 예견하고 남들에게 운명이나 책임 같은 단어를 들이밀며 속박하던 그 예언가 집시 샤먼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허무한 사고로 죽은 것이다. 이 얼마나 역설적이고 우스꽝스러운가.
‘라락크쉬, 그를 살려 보내야 해!’
그런데 죽기 직전에 마음을 바꾸어 잔악후작을 살려야 한다고 소리친 이유가 다 무엇일까? 막쉬롭의 죽음에 도취해 있느라고 계속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던 구더기는 문득 그 의미심장한 말에 생각이 미쳤다.
‘후작은 그 애를….’
그다음 말이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를 꼭 물었다. 잔악후작이 니카의 앞길에 방해만 될 거라고 그러더니만 마지막에 가서 왜 놀란 표정을 역력히 드러냈을까?
제란딘이 막쉬롭의 시체를 뒤적이며 정말로 목숨이 떨어져 나갔는지 재확인하는 중이었다. 기사의 눈치를 보면서 잔악후작의 곁으로 다가갔다.
“뭐 하는 거냐?”
“다친 상처를 좀 봐야지 않겠습니까.”
“흠.”
어미의 죽음 앞에 태연히 웃은 일로 완전히 정신병자라 낙인이 찍힌 듯했다. 그녀가 잔악후작에게 접근하는 것을 매섭게 막아서려던 제란딘은 그럴싸한 이유를 듣고 나서야 물러섰다. 그나마도 미심쩍다는 듯한 콧소리를 흘린 뒤였다.
막쉬롭이 ‘그 애’라고 칭할 만한 인물은 멘사야가 없는 지금, 세상에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니카 경.
순진하고 고결한 성품을 가진 기사 나리. 그녀와 코쿤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끌어안고 사난타로 이동했던 용인기사. 그리고… 멘사야의 아들. 감히 부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제 어미를 빼닮은.
‘고대룡 체첼드롭의 아들.’
용인이랄 때는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다. 토룡 혼혈치고 형질이 우수하긴 했지만, 마수 혼혈의 존재가 흔한 것도 아니니 뭐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말았었다.
하지만, 고대룡의 아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면 구더기 대신에 제물로 바쳐졌던 멘사야가 체첼드롭의 아이를 배기까지 대체 무슨 일을 겪어야 했단 말인가? 멘사야는 집시부족이 전부 떠나고 없어진 황량한 체첼그람으로 배가 불러서 돌아왔던 것일까?
아, 가엾은 멘사야. 소리 내어 말하고 싶으나 동정마저도 위선이 될까 봐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멘사야의 이름을 한번 떠올리고 나서 구더기는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막쉬롭에게 죽음을 선사한 손이며, 동시에 멘사야에게 돌을 던졌던 손이기도 했다. 막쉬롭의 죽음에는 아무런 유감도 느껴지지 않았다지만, 멘사야에게 느끼는 감정만큼은 달랐다.
그도 그럴 게 멘사야는 구더기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아무런 악의도 죄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진무구한 사람이었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막쉬롭이 멘사야를 싸고돌았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멘사야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겼으니까.
그런 그녀를 희생해서 도망친 뒤로부터 한없는 부채감이 서른 해 동안 구더기의 뒤를 따라다녔다. 지금이라고 나아진 것은 없었다.
‘무슨 멍청한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일에서 손 떼. 지금 당장 코쿤이 어디 있는지 수소문해서 데리고 나가자고.’
구더기는 얼른 고개를 젓고 자기 자신을 다그쳤다. 오지랖 넓게 구는 것도 상황을 봐 가면서 해야지, 죄책감을 해소하겠다고 무작정 뛰어들면 다인가? 멘사야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그 아들을 도와주면서 풀어보겠다는 이상주의적 발상을 따라 움직이기에 구더기는 험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정신 차려.’
잔악후작의 머리채를 잡아 젖혔다. 제란딘에게 말한 그대로 상처를 살피려고 했다.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바란 탈타미오가 눈살을 찌푸리고 구더기를 노려보았다.
구더기는 긴장해서 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때를 좀 탔어도 북부인답게 불그스름하면서 하얀 피부는 여전했다. 그래서 목에 그어진 붉은 상처 두엇은 더욱 눈에 도드라졌다. 그래도 피는 멈췄다.
“내가 변하면 뭐든 변할 거라고 했지.”
잔악후작이 말을 걸어왔다. 예상 밖이었다. 구더기는 상념에서 깨어나 파란 눈을 마주 보았다. 갈라지고 터진 입술이 씩 웃었다. 역설적으로 아름다웠다.
“이따 연애점 다시 봐줄래?”
어이가 없었다. 절로 손금 봐줬던 일이 떠올랐다. 감정선이 생명선을 아주 처참하게 끊는 드문 손금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류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상대에게 온갖 헌신을 바친다. 생명선까지 건드린 모양으로 미루어 살아가는 동안에 그 감정 때문에 목숨을 맞바꾸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터였다.
구더기는 찜찜한 마음에 혀를 차며 핀잔주었다. 위명을 떨치는 무자비한 학살자를 대하는 것 치고 너무 허물이 없어졌다는 것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작이 여간 붙임성이 좋아야지. 구더기는 생각했다.
“이 상황에 그 말이 나옵니까?”
“네가 부추겼잖아, 집시.”
싱글벙글 웃으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붙어 온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구더기는 삽시간에 얼굴을 굳히고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누굴 그렇게까지 좋아하죠?”
“소문내지 않을 거라고 먼저 약속해.”
동네 아낙에게 연애 상담하면서 이웃에 입소문이 날까 봐 염려하는 풋내기처럼 잔악후작이 당부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처럼 느껴져서 구더기는 “하하.”하고 반쯤 억지로 웃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이때, 머릿속에 얼른 꽂히는 벼락같은 생각이 있었다. 구더기는 약속에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바꿨다.
“…니카 경이랑 무슨 사이예요?”
“오, 이제 보니 물어보려던 게 아니라 핀잔주려던 거였군 그래.”
가늘어진 구더기의 눈초리를 나무라는 것처럼 알아들은 모양인지 잔악후작은 불쾌한 티를 냈다. 털을 세우고 하악질하는 고양이 같았다.
“나는 정말 포기하려고 했어. 욕심을 다 놓아버리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니카의 행복을 위해서 이제 자제하려고 했었다고. 네가 마지막에 부추기지만 않았으면-”
“이봐요.”
잔악후작이 낮은 목소리로 투덜대는 것을 딱 끊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갈피가 안 잡히는 것은 구더기도 마찬가지였으나 몇 가지 단서를 합치고 난 다음에는 이 남자가 맡은 역할이 어느 정도 또렷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니카를 끔찍이 여기는 막쉬롭이 잔악후작을 살려야 한다고 말을 뒤집었던 이유.
상대에게 헌신적인 손금을 가진 잔악후작.
잔악후작이 좋아하는 상대.
밑그림은 나왔다. 구더기는 멘사야의 아들에게 적잖은 책임감을 느꼈다. 원래도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던 상대였는데, 니카가 그 대단한 혈통에도 불구하고 천애고아로서 핍박받으며 자라난 이유에 자신의 몫이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쿤과 함께 달아나자는 본능적인 의견을 잠시 억누르고 이 커다란 체스판에 잠시 끼어들기로 결정을 내렸다.
‘기사 나리는 곧 애틀턴으로 떠나겠지.’
구더기가 엿듣기로 앙살라테 왕자가 보낸 전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 애틀턴 인근에서 총력전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총력전. 기나긴 내전에 끝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애틀턴이 어떤 도시인가. 용들의 무덤이 바로 그 성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예로부터 왕위계승권자들이 자신의 피를 증명해 보이곤 했던 곳이다.
니카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애틀턴이었다. 구더기는 몸을 낮추어 후작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옆눈을 떠 제란딘이 막쉬롭의 시신을 뒤적거리고 있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
“로브 안에 무슨 말린 풀 같은 걸 가득 채워 넣었군. 이걸 왜 다 들고 다녔던 거지? 집시식 부적 같은 건가?”
제란딘이 구더기를 돌아보며 막쉬롭의 옷가지 안에서 비어져 나온 시래기 같은 풀을 보여주었다. 구더기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부크쉬낙슈였다. 그것도 저렇게 많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가지고 다녔던 것일까? 구더기는 마른침을 삼켰다. 놀랍게도 하늘이 구더기의 계획을 응원하는 것 같았다.
“살고 싶어요?”
구더기가 속삭였다.
“더없이.”
잔악후작이 대답했다.
“내 말대로 해요. 그러면 당신을 밖으로 빼돌려줄게요.”
“이봐, 왜 날 도우려는 거지?”
누군 마음이 급해서 심장이 두근두근 내달리고 있건만 잔악후작은 그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 못 참겠는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묻는다. 구더기는 뭐라고 변명할까 머리를 굴렸으나 결국 그럴싸한 말을 꾸며내지 못해서 진실을 토로했다.
“니카 경이 당신을 필요로 하게 될 테니까요.”
“이것도 그 빌어먹을 예언인가 운명인가 하는 얘기야? 대체 왜 모녀가 말이 다 달라?”
“글쎄요.”
구더기가 말했다.
“사람은 별이랑 달라서 궤도 밖으로도 뛰쳐나가곤 하거든요.”
* * *
“제란딘 경, 의원을 불러와 주세요. 빨리요!”
알 수 없는 집시의 장식품으로 가득 차 있는 막쉬롭의 로브 안을 들추어 보던 제란딘이 깜짝 놀라 구더기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한달음에 달려가려고 펄쩍 일어섰더니 구더기가 어서 밖으로 나가 의원을 불러오라고 다그쳤다.
“무슨 일이지?”
“아까 목에 난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던 모양입니다. 피가 멈추지 않고 자꾸만 울컥울컥 새는데, 이러다간 목숨이 위험해요.”
위험한 상태라는 말이 정말인지 잔악후작의 몸은 기운이 다 빠져나가서 젖은 빨래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상반신이 떠 있도록 구속하는 쇠사슬 때문에 몸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구더기가 그의 목 언저리를 두 손으로 강하게 지압하며 출혈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그녀의 손가락 틈새로 신선한 핏자국이 흐르는 것을 보니 오래 갈 것 같지 않았다.
“수갑을 끌러내고 의원에게 옮기는 편이 낫지 않겠나?”
“가는 길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의원이 멀리 있지 않을 테니 어서 데리고 와주십시오. 제가 여기서 잘 붙들고 있겠습니다. 어서요!”
제란딘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더기는 이후로도 몇 번이고 “빨리요!”하고 외치며 의식이 없는 잔악후작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초조한 기색이 묻어나는 그녀의 재촉에 제란딘 역시도 영향을 받았다.
재빠르게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구더기는 슬그머니 바란의 목에서 손을 떼어냈다. 구더기의 손바닥에는 길쭉하게 패인 검상이 있었다. 잔악후작의 출혈을 꾸며내기 위해서 자신의 손에 일부러 출혈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연기력 대단하군.”
“빈정거리실 시간 없거든요.”
“진심이야. 인상적이었어.”
미간을 찌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병약한 사람인 양 굴던 바란 역시도 제란딘이 고개를 돌린 뒤에 멀쩡하게 돌아왔다. 물론 며칠간 포박되어 고문을 견뎌온 사람이 아주 멀쩡할 리는 없다지만 적어도 의식은 남아 있었다. 구더기가 손안에 감추었던 수갑 열쇠를 꺼내 들고 바란을 풀어주었다. 끼깅거리면서 열쇠의 이가 맞물려 돌아갔다.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뒤지기 싫으면 걸으셔야지 방법 있답니까.”
“팔이 빠진 것 같아.”
“팔로 걸으실 거 아니잖아요.”
품위 없는 대꾸가 계속되자 바란이 미묘한 표정을 했다. 사난타에서 만났던 눈치 살살 보던 집시와 구더기가 동일인물이 맞는지 재어보려는 것 같았다. 금방 눈부신 웃음을 쏟아내며 구더기가 알아들을 길 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너 내 집사랑 되게 닮았네.”
시시껄렁한 농지거리인 것 같아서 구태여 대답도 하지 않고 입만 비쭉 틀었다. 쇠사슬에서 자유로워지자마자 바란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바삐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무력하게 꿈틀거리는 것은 정말 곤란했다. 구더기는 치맛단에 닿은 손가락을 분주하게 딱딱거리면서 말을 제외한 모든 수단으로 바란을 재촉했다.
“움직일 수 있어.”
듣던 중 다행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지?”
“일어나서 창가에 가 계세요. 저기 공기가 드나들 수 있게 파인 곳 말이에요.”
“저 작은 구멍으로 나갈 만큼 내가 깡마른 체격은 아닌데.”
바란이 툴툴거리면서 구더기를 올려다보았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는 뜻이, 굳게 다문 집시의 입매로부터 전해졌다. 동북부에서 알아주는 고위귀족이 되어서 천민 눈치나 봐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서글프면서 우습기도 했다. 바란은 유쾌한 미소를 내걸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걷는 감각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씩씩하게 대답은 했는데 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온몸이 볼썽사납게 무너지려고 했다. 발이 안쪽으로 삐끗대며 꺾였다. 고장 난 목각인형도 이것보다는 자연스럽게 걸을 줄 알 텐데. 바란은 다 터진 입술을 이빨로 짓누르며 숨을 참았다. 뱃가죽에 힘을 딱 주고 뻣뻣하게 굳은 걸음을 내디뎠다.
이윽고 구더기가 말한 대로 바란은 공기가 통하는 창가에까지 이르렀다. 감각 없이 얼얼한 통증만 가득한 손으로 창틀을 부여잡고 섰다. 잠깐 쉬고 싶다는 열망이 메마른 들판 위 불길처럼 마음속에 번졌지만, 기실 한번이라도 주저앉았다가는 탈출이고 뭐고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얼굴에서 무슨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움직이지 않는 팔뚝 대신에 고개를 어떻게든 기울여 옷가지에 문지르고 봤더니 비는커녕 땀방울이었다. 이 시린 겨울에 땀을 바가지로 쏟다니. 허, 하고 웃음 같은 탄식이 났다.
“집시, 뭐 하는 거야?”
가까스로 뒤를 돌아 구더기가 무얼 하는지 쳐다보았다. 죽은 노파의 시체를 뒤적거리더니 품 안에 무얼 가득 안고 돌아온다. 바란이 보니, 그와 같은 귀족들 입장에서는 이름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말린 풀 묶음이었다.
“이게 뭔데?”
대답하는 대신에 구더기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담긴 기름 등을 확 바닥에 엎었다. 심지 끝에서 뾰족하고 얌전하게 타던 불꽃은 기름이 흐르는 길을 타고 그대로 번져나가서 바란이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는 출입문 가까이에서까지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작 불을 질러서 밖에서 안으로 못 들어오도록 막으려는 작전인가 싶었다. 탈출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데 공성전처럼 적침을 막는 일차적인 생각만 하고 있을까. 탄식 소리와 함께 이마를 치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팔뚝이 아릿해서 그만두었다.
바란이 참다 못해서 무언가 따지고 들려던 순간이었다. 구더기가 한 아름이나 되는 말린 풀을 안아서 가져온 뒤에 바닥에 놓고 차분히 불을 붙였다. 기름기가 옮겨붙지 않도록 유의하며 마른 바닥에 이 말린 풀을 쌓아 태우고, 입김을 불어 불꽃을 거의 꺼뜨리기를 반복했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새카만 연기가 올라왔다.
구더기는 같은 방법으로 참회의 방 구석구석에다가 두세 더미의 말린 풀더미를 장치해놓고서는 때를 잔뜩 먹은 자신의 소맷부리로 입과 코를 가리고 바란이 있는 곳까지 달려들었다.
“바깥으로 코 내밀고 숨 쉬어요!”
* * *
“의원을 불러다오. 급한 일이다.”
제란딘은 다급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무척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냈다. 혹시라도 시녀가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다시 말해주려고 했는데, 왕녀를 위해 일해 온 시간이 긴 이 시녀는 눈치가 백 단이라서 구태여 말을 반복할 필요가 없었다.
시녀는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느냐고 왕녀의 허락을 먼저 구했다.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는 왕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짜고짜 심부름을 시킨 제란딘에게도 매끄럽게 예를 취하며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두 번 달려 본 솜씨가 아닌 듯 치마폭을 펄럭거리면서도 빙판 위를 칼날 타고 가르는 것처럼 날랜 움직임이었다.
“어떻게 됐죠?”
“전하, 그것이….”
제란딘은 좀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데 약 일 분의 시간을 사용했다. 왕녀는 끈기를 가지고 그가 입을 떼기까지 기다려주었다.
“전하의 늙은 집시가-”
“막쉬롭이요?”
“예. 그렇습니다. 잔악후작을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면서 젊은 집시하고 실랑이를 벌이던데요. 운명이 어떻느니 저희들 사돈의 팔촌이니, 고대룡이니 하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잘 없었습니다. 두 집시 사이가 안 좋았던 것만은 확실했지요.”
왕녀가 안에서 일어난 사건의 경과에 대해서 조금 더 간결히 말해보라고 지시했다. 제란딘이 다시 또 짧은 침묵에 빠지자 답답한 마음을 한숨으로 삭이며 어깨 위 모직 숄을 여몄다. 시녀가 의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감옥까지 나아 온 왕녀에게 가져다가 둘러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막쉬롭은 죽었습니다.”
“뭐라고요…? 내가 분명히 그녀를 살리라고-”
“사고였습니다. 의도치 않게 일어난 일인 것 같았습니다. 넘어졌다가 일어나면서 젊은 집시가 그녀를 일으켜주려고 다가갔었는데, 하필이면 빼앗은 단검이 머리를 관통하고 들어가는 바람에.”
머리를 관통한다고 상세히 설명한 대목에서 왕녀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수리 드라코슨이 나서서 험한 꼴을 보고 다닐 신분은 아니었다. 사람이 처참하게 죽은 상황에 대해 묘사를 듣는 것만으로 속이 더부룩하고 불쾌해졌다.
“거기까지만 하죠. 그래서, 막쉬롭이 다른 꿍꿍이를 갖고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군요.”
“…그렇습니다, 전하.”
“그 젊은 집시 말마따나 나에게도 줄곧 무슨 술수를 부려왔던 거겠지요. …이상한 기분이에요. 이 수리는 물론이고 앙살라테 전하께서도 막쉬롭을 무척 신임하셨는데.”
“배은망덕한 배신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율법에 따라서 껍질이 벗겨진 채로 그 시체를 성벽에 내걸어 까마귀밥으로 바쳐야 했다. 침울해진 왕녀의 병약한 낯을 보면서 제란딘은 조용히 타오르는 분노에 지배당했다.
“의원을 부른 건 어떻게 된 건가요? 같이 들어갔던 집시는 왜 아직 안에 남아 있고….”
“잔악후작이 크게 다쳤습니다. 막쉬롭이 목을 긋는 바람에 출혈이 심하더군요. 옮기는 동안 지혈이 힘들 것 같아서 의원을 데리고 오기로 정했습니다.”
“잔악후작이요?”
왕녀가 되물었다. 차분한 어투로 봐서는 못 알아들어서 되묻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제란딘은 그 물음에 긍정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번갈아 고민하다가. “예.”하고 싱거운 대답을 하나 바쳤다.
잔악후작에게는 확실히 왕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왕녀에게 있어서 가장 연약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이오와 클라텐에 관련된 기억이, 그 두 사람이 전부 죽으면서 잔악후작에게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바란과 클라텐은 각기 어머니와 아버지의 피가 짙은 바람에 정말이지 닮지 않은 형제였지만, 그래도 그 새파란 눈동자만큼은 두 사람 다 공평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것 말고도 악을 쓰고 버티는 표정이나 이죽거릴 때 눈썹을 일그러뜨리는 모양이 썩 닮은 편이다.
수리는 종종 바란 탈타미오에게서 클라텐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따금 과거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그가 이오를 죽였다는 심증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시야를 장악할 때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다. 막쉬롭이 사용했다는 그 찻잎 때문에 감정이 견딜 수 없게 증폭되었다지만, 기실 평소에 수리가 후작에게 느끼는 것이 단순한 분노는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지금 잔악후작이 위중한 상태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심장이 조마조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
“들어가서 직접 보겠어요.”
“예? 왕녀님, 하지만….”
“막쉬롭은 죽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란딘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사들이 곁에 있을 텐데 위험할 게 있나요?”
그 말 그대로였다. 막쉬롭의 죽음은 몇 번이고 맥을 짚어 가면서 제란딘이 확인했다. 논리적으로는 납득이 된다지만, 어수선한 참회의 방 안에 왕녀 전하가 몸소 들도록 방치해도 되는 것인지 확신은 잘 가지 않았다. 제란딘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왕녀는 이미 마음을 굳게 정한 것 같았다. 앞장을 서기까지 했다.
제란딘이 뭐라고 말릴 수 있었을까. 그냥 입술을 앙다물고 뒤를 따라 걸어야 했다.
앞장선 간수의 도움으로 그 독특한 출입문을 다시 열고 짧은 통로를 지나서 이중 문에 다다랐다. 안쪽 문은 제란딘이 열어두고 나왔기 때문에 진작 열려 있었다. 문 바깥에까지 겨울에 걸맞지 않은 온기와 톡 쏘는 듯한 향기가 전해졌다.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목이 좀 껄끄러웠다.
“콜록, 콜록! 아니. 이게 무슨 연기지?”
아무 생각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선 간수가 코를 킁킁대면서 기침을 시작했다.
후끈한 열기가 코끝에 전해진다 싶더니만 어두운 방은 매캐한 연기와 바닥에서 군데군데 타오르는 불꽃으로 차 있었다. 벽의 한 귀퉁이에 안정적으로 받쳐두었던 기름 등잔이 어쩌다가 바닥에 나뒹굴면서 기름을 여기저기에 흩뿌리게 됐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불은 크지 않았다. 쏟아진 기름이 타는 것뿐이었다. 기름 등잔에 새로 기름을 보충해두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대체 시야를 뿌옇게 가린 이 연기들은 다 뭐란 말인가? 간수는 코끝에 일렁거리는 연기를 부채질로 물리려 했다
대관절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뭐가 타올라서 이렇게 연기를 가득 채워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재로 발생한 연기라면 독성이 있었다. 왕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서 동행한 기사들이 수리를 복도 쪽으로 남겨두고 각자 입을 가리며 방 안에 진입했다.
“웬 불이죠? 잔악후작은, 집시는요?”
수리가 소리쳤다. 왕녀가 적잖이 놀라 보이긴 했거니와 제란딘 만큼 놀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자리를 아주 잠깐 비운 게 다였다. 시녀에게 의원을 불러오라고 지시한 뒤에 왕녀 전하께 간략한 보고를 바친 게 다였으니까 고작해야 십여 분이나 지났든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참회의 방이 불과 연기로 가득 차 있고, 철창 안에서 잔악후작을 돌보고 있어야 하는 집시는 자취를 감추다니.
“등잔이 엎어진 안쪽으로 인영이 보입니다!”
“창가에 매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왕녀는 제란딘에게서 찜찜한 시선을 거두고 선두에 선 기사와 간수에게 그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 아무래도 불의의 사고가 한번 더 이어진 모양이었다. 창가에 매달려서 사지 멀쩡히 살아 있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으윽!”“악…!”
“경, 괜찮, 나….”
방 안으로부터 시끄럽게 구르는 소리와 신음이 뒤섞였다. 울림통이 좋은 방이라서 한동안 요란스러운 소음이 저잣거리 소동보다도 시끄러운 정도로 울려 퍼졌다. 수리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방 안에 들어선 제란딘 경의 거대한 등판이 시야를 가로막은 터라 그저 불길한 기류만을 느끼고 떨어야 했다.
“제란딘 경, 무슨 일-”
수리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제란딘의 튼튼한 몸이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깜짝 놀라서 그의 단단한 어깻죽지를 손가락으로 찌르거나 흔들며 깨워보려고 했다. 뺨을 갈길 즈음에 그가 눈을 번쩍 뜨기는 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경! 정신이 들어요? 이봐요.”
“…….”
“맙소사.”
넋이 나간 것 같은 시선을 마주한 수리는 그때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리고 팔꿈치 안쪽 옷감으로 코와 입을 막고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마른침을 삼키는 입안에 어떤 낯익은 향기가 감돌았다. 혈관이 쿵쾅거리는 느낌이 귀와 눈 안의 핏줄에서마저 느껴졌다.
‘이건….’
톡 쏘는 향기가 어느새 수리가 있는 곳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막쉬롭이 권하던 찻잎….’
* * *
톡. 톡.
바란은 자신의 손등 위에서 구더기의 손가락이 까딱이는 것을 느꼈다. 어쩌자는 건지 모르고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구더기가 주먹 쥔 바란의 손을 강제로 반듯이 폈다. 그것만으로도 바란은 손목이 나갈 것처럼 뻐근하게 아렸다.
말끔하게 준비된 바란의 손바닥 위로 구더기가 뭐라고 글자를 썼다. 얼마나 갈겨쓰던지 처음엔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셋 세고.’
제정신으로 하는 말일까? 귀가 달렸다면 방금 전에 갑주를 걸친 왕국기사 나리들께서 ‘척, 척.’하는 금속성을 내고 떼거지로 들어섰다는 점을 잘 알 텐데. 여기서 셋을 세고 나서겠다니.
‘나갈 때까지 숨 쉬면 안 돼요.’
바란은 복잡한 머릿속으로 고민했다. 지금 코와 입술 위쪽까지를 창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환풍 창에 처박은 참이라서 구더기에게 뭐라고 반박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구더기가 손바닥에 글자를 쓴 것처럼 바란도 구더기와 필담을 나눠보려고 생각했다. 손가락을 주섬주섬 뻗어서 구더기의 손을 붙잡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
그런데 구더기는 바란이 그녀의 손을 잡자마자 반대로 더 강하게 붙들더니, 손가락 하나를 붙잡힌 바란의 손등에다가 대고 까딱, 했다.
하나.
‘뭐 하는 거지?’
둘.
‘이런 씨발.’
두 번 두드리는 감촉을 느끼고 나서는 그 의미가 명확해졌다. 바란은 이 집시가 너무도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혀를 깨물고 싶은 지경이었다. 셋. 마침내 세 번째로 손가락을 까딱인 구더기가 즉시 바란의 손을 꾹 욱여잡은 채로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아직 경직된 바란의 근육이 걸음마도 제대로 못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여간 무모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그래도 둘을 셌을 때 구더기가 곧 튀어나가리라고 인지했던 덕택에 숨을 크게 들이쉬기는 했다. 바깥에 나가기 전까지 숨이 모자라지면 곤란하니까 이를 악물고라도 빠르게 뛰어야 했다. 부러지거나 접질린 게 안 봐도 뻔한 발목이 덜렁거리면서 바란에게 미쳤다고 소리쳤다. 정말 죽도록 아팠다.
뿌연 연기 틈에서 바란은 바닥에 시체처럼 널브러진 기사들의 몸뚱이를 보았다. 아리송한 낯으로 얼어붙었다.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숨을 쉬지 못하게 한 것이나, 이름 모를 말린 풀로다가 연기를 피워낸 일, 사람들이 나자빠진 것…. 저 연기로 사람들을 잠재울 수 있는 모양이었다.
바란은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촌뜨기처럼 두리번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리만큼은 구더기의 속도에 맞추어 재게 놀려야 했다. 문턱에서 썩 우아한 모양새로 정신을 잃은 수리 드라코슨의 새빨간 머리채를 보았을 때, 바란은 지시를 어기고 구더기의 등께를 두드려 멈춰 세웠다.
“왕녀가 여기 있잖아!”
“숨 참으랬죠, 내가!”
구더기는 곧 죽어도 연기를 들이마시지 않겠다는 의사 표명을 확실히 했다. 대답이라고 목소리를 내면서도 숨 한번 들이켜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바란의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우웁, 읍!”
바란이 숨 막혀 죽겠다는 것을 그녀의 팔뚝을 긁어내며 표현했다. 그런데 구더기는 그 불쌍한 모양을 보고도 바란을 놓아주는 대신 코끝을 손잡이 삼아 잡아당겼다. 바란이 살았다는 실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참회의 방 입구까지 튀어나온 이후였다.
“콜록, 콜록! 왕, 녀, 후욱, 가…!”
밭은기침을 뱉으면서 바란이 무어라 말했다.
“후우…. 심호흡하고 말해요.”
“하아, 왕녀가, 후, 저기 있다는 건, 니카가-”
“아, 그 소리였군요. 니카 경은 여기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뭐 어차피 저 안에 공기가 안 통하는 것도 아니고, 불은 곧 꺼질 테고, 연기도 독성이 있는 종류는 아니라 걱정할 필요 없지만요.”
“대체 그 풀은-”
“수다 떨 시간 없어요. 듣자 하니 성 서쪽 옆구리에 있는 작은 마구간에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도 않는다더군요. 거기로 갑시다. 저들이 깨어나서 당신 수배하기 전에 잣자후를 빠져나가야 해요.”
바란이 대체 그런 정보는 어디서 얻는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구더기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묶여있는 동안 이 주둥이 솜씨로 시녀에게 정보를 좀 얻었죠. 내 나이 또래더군요. 나이 어린 애들끼리만 금방 친해지란 법은 없죠.”
“거짓 정보일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 시녀 첫째 아들이 거기서 일한답니다. 푸념하다 나온 소리니까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는 아닐 거예요. 애초에 그렇게 약아빠진 여자도 아니고.”
구더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바란이 좀체 따라오지 못하고 절뚝대는 모습을 골칫거리 바라보듯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축해주겠다고 팔을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잔악후작은 의아한 눈치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줘?”
“니카 경을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럼 니카랑은 무슨 사인데?”
질문이 이 스무고개 같은 대화의 취약한 접합부를 제대로 찌른 모양이다. 구더기가 눈썹을 꿈틀 떨었다. 바란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툭 대답이라고 던졌다.
“사촌이요.”
“뭐? 농담도.”
“…….”
바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같이 웃어넘기거나 핀잔을 줄 거라 생각했던 구더기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걸음을 척척 옮긴다. 바란의 웃음에 금이 갔다.
“진짜야?”
“수다 떨 시간 없다니까요.”
“사촌? 어느 쪽 사촌인데? 니카의 부모를 알아? 니카도… 집시야?”
궁금증이 부풀어 올라서 온갖 질문을 던져대자 구더기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폭발적인 호기심에 괜히 대답해줘서 불씨를 키우기보다는 땔감이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제풀에 지치고 말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있잖아, 네 말대로 애틀턴에 가고 나면….”
키가 더 작은 구더기에게 부축을 받느라고 허리가 반쯤은 수그러진 바란이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말머리만 설설 기어 나오다 말고 얼버무리는 바람에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바란은 생각에 잠겼다.
‘애틀턴에 가고 나면. 어쩔 작정이지, 나는?’
불확실했다. 머릿속에 뽀얀 안개가 낀 것 같다. 총력전이라고 하면 일견 명쾌한 상황인 것 같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여태 쌓아 온 공든 탑이 기기묘묘하게 서로 인과의 끈으로 얽어져 있다. 바란은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앙살라테는 여태껏 바란을 정보입수나 교란을 위한 간자로 심어두고 원할 때 지시를 하달했다.
제멋대로 판단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란의 원칙이었다. 힐벤이나 앙살라테가 이렇게 하거라, 하고 던져놓은 명령을 고스란히 따라왔을 뿐이다. 바란은 적진에 숨어 오래토록 간자로 활동하면서도 자신의 의도에 따라 움직였던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힐벤의 눈 밖에 날 겨를이 없어 오랜 시간 안전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아니, 정정하자.
한 번, 단 한 번은 바란도 자기가 내키는 대로 행동했던 적이 있다.
‘나는 너의 연인이야.’
한 번의 욕심. 한 번의 거짓말. 한 번의 이탈.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리고 변화. 그래, 변화. 요즈음 바란은 절망에 빠져서 거짓말로 니카를 넉 달간 탈타미오에 붙들어 놓았던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라고 폄훼하곤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어떤 행동에 결과가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오겠다.’
니카는 변했다. 바란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조금 웃었다. 이 쉬운 걸 왜 몰랐지? 원래의 니카 경 같았으면 바란에게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을까 생각했다. 힐벤 대공에게 들켰던 그 날, 바란은 니카를 살려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니카를 위해서라고 자신을 달래면서, 정작 니카가 일그러진 얼굴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솔직해지자. 죽 쑤는 꼴이 되더라도 대공의 정예가 식탁에 둘러앉았을 때 암살의 승부수를 띄우는 방법도 있었다. 정말 많은 방법이 있었을 텐데도, 바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앙살라테가 안배하고 대공의 무서운 눈초리가 다져 놓은 길에서 이탈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누군가 앞길을 정해주지 않고는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애송이라니.
‘애틀턴에 가면, 헬린 힐벤을 죽이자.’
결심이 섰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앙살라테의 승리를 넋 놓고 바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바란이 만일 이 잣자후에서 탈출할 수만 있다면 애틀턴의 높으신 나리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패가 될 수 있었다.
‘나불거리다 말고 왜 이렇게 조용해?’
구더기는 바란이 침묵에 잠긴 것이 수상해서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바란의 반듯한 얼굴이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어서 움찔 놀랐다.
‘그런데 어딜 보는 거지?’
구더기의 고개가 슬그머니 돌아갔다. ‘설마’하는 마음과 함께 마른침이 넘어간다. 바란의 날카로운 눈길이 향하는 방향 때문이었다. 괴물의 아가리 같이 허름하고 흉흉한, 지하감옥으로 향하는 계단…. 울림통이 큰 건물구조 때문에 저 아래 수감자들의 아우성이 이곳까지도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누구 하나 데려갈 사람이 있어.”
“맙소사.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그럴 여유 없어요! 게다가 저긴 감옥이라고요, 감옥! 지금 개고생해서 빠져나온 판에 제 발로 감옥에 들어가서 어디에 수감됐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나오겠다는 거예요? 어디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 약초 더 남았잖아.”
“무슨 소리-”
“아까 연기 피운 풀 말이야. 무척 강한 수면 향인 것 같던데.”
“씨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버텨보려던 구더기가 상스러운 욕을 뱉었다. 바란은 고작해야 천민인 집시에게 욕지거리를 듣고 나니 생경함이라고 해야 할지, 분노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얼떨떨한 감정의 파도를 느꼈다.
“간수들 어차피 몇 사람 없을 거야.”
“당신이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내가 간수들이랑 밤낮으로 부대끼며 보낸 시간이 자그마치…. 가만있자, 며칠이나 지났는지 확신이 안 서는군. 그래도 나흘은 충분히 됐을 거야.”
바란은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놈들도 무료해 죽을 것 같았는지 온종일 수다 떨고 카드나 치더군. 덕택에 주워들은 얘기가 좀 있어. 이 감옥에 열쇠를 관리할 수 있는 간수는 의외로 몇 사람 되지 않아. 나머지는 잔챙이지.”
“그렇다고 해도 십수 명은 있을 거예요.”
“넷.”
“뭐라고요?”
바란이 일곱 손가락을 폈다가 그중 세 개를 접었다.
“간수 인력이 얼마 없어서 참회의 방과 근무표를 짜서 돌린다고 했어. 참회의 방에서 내가 봤던 놈들이 총 일곱 명이었고, 그중 저 안에 기사들이랑 같이 드러누워 있는 게 셋.”
“일곱밖에 없을 리가 있나요?”
“이 건물이 얼마나 허름하고 좁은지 생각해봐. 애초에 잣자후는 전쟁을 자주 겪은 성이 아니야. 썩 비옥하고 안전한, 풍요로운 성이라고. 포로를 수감할 공간이 작으니 간수들 수라고 남아돌지는 않겠지.”
그래도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바란 말마따나 아직 태우지 않고 남겨둔 부크쉬낙슈가 손안에 한 아름 들었다. 하지만 지하에 있을 일백 명에 가까운 포로를 고작 이걸로 잠재운다고? 참회의 방은 좁은 밀실이었고, 사람도 얼마 없었으니 시도해 볼 만했지만 없는 시간을 쪼개어 지하로 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래도 안 돼요.”
“애틀턴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잖아. 집시.”
바란이 구더기의 손목을 붙잡았다. 간절한 파란 눈에 깃든 확신이 그녀를 침통하게 만들었다. 죽어도 고집을 꺾지 않겠다는 것이 느껴진 탓이다.
“몸뚱이가 애틀턴에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내게는 힐벤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한 구실이 필요해. 나를 위해서, 그리고 잘 이해는 안 가지만 너희 집시들 말에 따르면… 니카를 위해서도 그렇겠지.”
“…….”
“대공은 사난타에서 나를 한번 등졌어. 하지만 완전히 등진 건 아닌 모양이더군. 아겐호프를 꺼내다가 족쳐서 정보를 좀 얻은 다음에, 그놈의 신변도 내 위치를 되찾는 카드로 이용할 수 있어. 값진 놈이야.”
이렇게까지 말하고 나니 구더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겐호프를 데려가야 하는 이유에는 충분히 납득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저 아래에 내려가는 건 자살행위라고 했다.
시간이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간수가 고작 넷밖에 없다고는 하더라도 그들의 업무를 거들고 있는 병사들이 존재할 수 있으니 사실상 인력이 얼마나 있을지는 짐작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도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입을 다물 법도 했는데, 바란은 그의 주장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는 지금에 와서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자빠진 간수 셋. 열쇠와 옷가지. 연기를 내는 풀.”
“…….”
구더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친절한 설명을 덧붙일 생각은 없는지 잔악후작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우리는 굳이 지하감옥의 간수나 병사들 상대로 맞서 싸울 필요 없어. 잠입해 들어간 다음, 아겐호프를 찾아서 빼내면 돼.”
* * *
밀렌 아겐호프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탈타미오 후작님은 작전을 시작하셨을까?’
비록 탈타미오 후작이 대공에게 하달받은 비밀 임무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와 같은 말단 입장에서야 짐작도 할 방법이 없었지만, 어쨌든 아겐호프는 그를 믿었다.
‘내가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여기에 갇히고 난 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빛이 새어들어 오지 않아서 밤낮이 바뀌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며칠은 흘렀겠거니 어림했다. 이젠 옆 사람이랑 지껄일 얘깃거리도 뚝 떨어졌다.
그가 찾아 헤매던 쌍둥이 동생 이벨롭 아겐호프는 원 모양을 하고 있는 감옥 둘레를 따라 배치된 방 중 그의 맞은편에 수감되어 있었다. 얼굴을 마주 볼 수는 있으나 말을 전할 방법은 없는 거리. 마음만 같아서는 머리를 냅다 쥐어박으며 “그러게 도박은 작작 손 떼라고 했지!” 하고 꾸중을 하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이봐! 이봐, 간수. 내 아버지에게 연락해. 난 랜턴모어 백작가의 외동아들이다. 내 이름을 대면 몸값은 네가 원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지불하실 거라고!”
“변방 애송이가 나대기는! 이보게. 나는 고위귀족에게 줄이 있어. 간수 생활 지겹지 않은가? 날 여기서 꺼내준다면 내 꼭 좋은 자리를 약속함세.”
간수들이 무시와 비웃음으로 응대하는데도 아직 그들을 말로써 어떻게든 꼬드겨보려는 귀족들이 많았다. 이따금 간수는 신경질을 내며 철창을 쾅쾅 찧어서 위협적인 소음을 만들기도 했다. 딱딱한 검은 빵과 묽은 수프마저도 배급을 끊는 수가 있으니 신경을 거스르면 안 됐다. 간수의 공격적인 반응에 거드름 피우던 귀족들도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숙였다.
“킥킥, 지들 피는 파란색인 것처럼 나대더니 묶어놓고 보면 귀족도 쥐새끼나 다름없군.”
귀족들은 점점 간절해졌다. 사난타에서 포로로 잡힌 대공파 귀족들은 대개 잔챙이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는 진짜배기 고위귀족도 몇 있었다. 대공이 처음에 은괴를 가지고 와서 사난타를 점거한 왕자 세력에게 거래를 요구했던 이유도 이것이리라.
그러나 최초의 협상 시도 이후로 대공으로부터는 어떤 메시지도 없었다. 귀족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바깥의 소식으로부터 차단되어 싸움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잔악후작은 사난타에서 패퇴해 그들과 함께 잣자후에 잡혀 있었다.
이들이 기억하는 대공군의 마지막 행보는 사난타의 패배였다. 왕자군을 다르탈루 이서지역까지 몰아넣었던 대공군의 무패신화가 사난타에서 처참히 깨지던 모습은 병적인 불신을 낳기 시작했다.
밀렌 아겐호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대로 씻거나 쉬지 못해서 엉망이 된 몰골들을. 퀭하게 빛을 잃은 눈동자들을.
‘구하러 오실 거야. 분명히.’
사촌인 날만도 남작은 대공의 최측근이자 수뇌부 안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평소 청렴하고 무게감 있는 행실로 신용이 높았는데 이번에 이벨롭이 사난타에서 도박에 열중하다 붙잡힌 일로 체면이 많이 상했다. 션팟 경의 종자로서 밀렌 아겐호프가 출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귀띔을 해줬다.
“잔악후작이 포로들을 구출할 테니 이벨롭은 안전할 거다. 걱정하지 말고 션팟 경의 지시를 따르거라.”
그래서 아겐호프는 어떻게든 그 비밀스러운 구출 임무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유명세가 드높은 잔악후작이라지만 혼자서 백 사람에 가까운 포로를 구출할 수 있을지 확신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눈에 무슨 이상이 있는 줄 알았다. 아겐호프는 제 옆자리 앉은 사람도 같은 이유에선지 몇 차례 눈을 부비는 모습을 보았다. 연기가 차올랐다. 그다지 짙지는 않았고 물안개가 낀 것 같았다. 사람 그림자를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 연기는 뭐야?”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
“계단참까지 한번 내다봐.”
“흠, 알겠어. 다녀오마. 포로들 입 좀 닥치게 시키고 있어.”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이 연기인지 안개인지 분간 안 가는 것 때문에 간수들도 의아해진 모양이었다. 분주한 발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적은 간수 인원으로 효과적인 감시를 하기 위해 간수들이 위치한 원의 중심부는 원래가 어두컴컴했다.
그 안에 누군가 섞여들어도 혼란을 틈타면 쉽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겐호프.”
사람들 수군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그때였다. 멀찍이서 누군가가 아겐호프의 이름을 불렀다. 주위의 소음에 비해서 작은 소리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그 누군가는 아겐호프가 대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케 그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간수는 수감자들을 쭉 돌아보며 속삭이는 것 같은 소리로 연신 아겐호프를 찾았다.
“밀렌 아겐호프가 누구지?”
희끄무레한 불빛에 기대어 보니 간수의 옷을 입은 남자였다. 그런데 처음 보는 체격이다. 우락부락한 놈들만 보다가 늘씬하고 기다란 몸을 봤으니 위화감이라는 게 물씬 치솟는 것도 당연했다.
“밀렌 아겐호프, 여기 있나?”
게다가 저 억양. 심장이 두근거리며 날뛰었다. 밀렌 아겐호프는 저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를 구해 큰 계획의 보탬으로 써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애써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해도 강서사람과는 확실히 다른 억양 때문에 아겐호프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여깁니다!”
밀렌 아겐호프는 그림자가 다가왔을 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뚝 일어선 그의 머리통에 간수의 눈길이 꽂혔다. 이윽고 열쇠꾸러미 짤랑대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철창 한구석이 삐걱대며 열렸다.
“…나와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던 귀족 하나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잠깐! 지금 저 아겐호프 가의 애, 애송이를 빼내 주려고 하는 건가?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두 배. 아니, 네 배를 주지! 나는 랜달 상단에 지분이 있어. 심심찮게 챙겨주겠-”
“나도! 나도 빼내줘!”
“난 열 배를 주겠어! 으윽!”
“네놈들을 심문할 차례는 곧 돌아올 테니까 보채지 말아라.”
아겐호프의 머리채를 거칠게 욱여잡고 끌어낸 간수는 코웃음을 치며 철창 밖으로 걸어나갔다. 애걸하며 매달리던 귀족들이 그의 한손에 들린 장검, 그리고 그 검날에 끼인 피 찌꺼기를 보고 더럭 겁을 먹어 입을 다물었다. 소란은 침묵으로 바뀌었다.
“벌써부터 뒤지고 싶지 않으면.”
* * *
‘계단 좆같네 정말.’
“후, 후작님…. 괜찮으십니까?”
인기척을 살펴서 조심스레 계단을 짚고 올랐다. 온몸이 엉망인 상황에서 이렇게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다니. 실은 아직도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바란은 생각했다.
“비밀 임무를 위해 언젠가 절 꼭 필요로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럴 줄 알고 저 지하감옥에서 머무는 동안 포로들의 인원과 배치를 전부 파악했어요. 절 찾기 위해서 이런 위험도 무릅쓰시고, 정말이지 너무나 감격….”
밀렌 아겐호프가 옆에서 계속 뭐라고 종알종알 떠들었다. 다 착각과 콩깍지의 산물이었다. 찬물을 끼얹지 않고 멋대로 착각하게 내버려 두었다. 바란이 뜬금없는 짓을 해도 무슨 의도가 있겠거니 생각할 테니 한동안은 말대꾸 없이 뒤쫓아 올 것이다. 일일이 설명을 달아주기도 피곤한 상황이니 잘 됐다 생각했다.
“조용히 하고 날 따라와. 발각되기 전에 여길 나가야 해.”
대신 서둘러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종자 출신이라서 이따금 상황에서 동떨어진 것처럼 군다.
“얼른 올라와요!”
저 위에서 구더기가 손을 뻗었다. 새침하게 도움을 거절하고픈 마음은 있었으나 몸 상태가 어찌나 개판인지 고작 계단 좀 오른 걸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이 겨울에.
“생각보다 시간이 아슬아슬해요. 지하감옥에다 연기를 더 자욱하게 내려고 참회의 방에 피워뒀던 부크쉬낙슈를 좀 옮겼으니 정신을 더 빨리 차릴 겁니다.”
“집시, 아까 서쪽 마구간이랬나?”
구더기가 앞서 뛰쳐나가서 텅 빈 복도를 확인하고 차분하게 긍정했다.
“길은 알아?”
“알 리가 있나요. 하지만 서쪽이 어느 방향인지는 눈 감고도 알죠. 별자리 찾던 지식이 어디 가진 않으니까요.”
“그것참 믿음직스럽네.”
아겐호프 역시 가혹한 상황에서 며칠간 제대로 된 식사도 없이 지낸 것은 매한가지였을 텐데, 그는 의외로 쌩쌩하게 굴었다. 바란은 이게 나이의 차이인가 싶어 어설프게 웃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를 교차해서 뻗어내는, 그 간단한 ‘걷기’라는 행위가 이다지도 벅찬 것이었나.
그래도 운이 좋았다. 아무리 빨리 움직였다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왕녀 일행은 아직 참회의 방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에 취해 있었고, 간수들은 지하감옥 밖으로 빠져나간 바란과 아겐호프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갈 수 있어.’
바란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을 추슬렀다. 어쩐지 성을 감시하는 병력도 많이 축소된 듯했고 무작정 서쪽으로 향하는 동안에 딱히 위협을 받은 것도 없었다. 대리석 건물 기둥에 등을 바짝 붙이고 동태를 살폈다. 고작해야 시녀가 두엇 짝을 지어 빨랫감을 나르고 있었다.
“행운의 여신은 우리 편에 있는 모양입니다.”
밀렌 아겐호프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걸음이 느린 바란이나 구더기보다 며칠 굶은 밀렌 쪽이 발이 훨씬 빨랐다. 결국, 그가 선두에 서고 나머지 두 사람이 쫓아가는 형국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구간을 지키는 병력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사각지대까지 살핀 거 확실한가?”
바란은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가슴을 들썩이며 말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아겐호프를 곁눈질했다. 목을 쭉 빼며 망을 보던 아겐호프가 마침내 대답했다.
“아무렴요.”
아주 믿음직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겐호프는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는 기대보다 발이 잽싸고 은밀했다. 덕택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바란이 짐짝이 된 이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종자 노릇 하면서 전장을 다녔던 경험 덕분인가 싶었다.
“몇이나 있는데, 다섯? 셋?”
“우리 셋으로는 세 명 상대하기도 어려워요. 반병신 된 후작님이나 무기 없이 날뛰는 저 꼬마, 그리고 나까지…. 누구든 한 사람 몫 하기엔 버거울 테니까 말입니다.”
바란의 질문에 구더기가 초를 쳤다. 그것도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해서 받아칠 거리도 없었다. 아겐호프는 귀를 서쪽 마구간을 향해 쫑긋이 세웠다. 짧다고도 길다고도 단언하기 힘든 시간이 지나갔다. 몇 번의 확인절차를 거친 아겐호프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 명입니다.”
“…한 명이라고?”
아무리 작은 마구간이라지만 보초를 서며 돌아다니는 인원이 이 근방에 단 한 명일 리가 있을까 싶었다. 아겐호프가 너무 늦지 않게 첨언하며 정정할 것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확언이었다.
“네, 한 명. 확실합니다. 그리고, 저어…. 집시 숙녀분께 그 검 한 자루 빌렸으면 합니다만.”
“이거요?”
구더기는 바란의 눈치를 흘긋 살피고는 좀 전에 간수들에게서 챙겼던 단검 하나를 검집째로 던졌다. 숙녀 소리를 들은 게 영 얼떨떨하다는 표정이었다. 안정적인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단검이 아겐호프의 손에 안착했다. 아겐호프는 고맙다는 표시로 검집의 좁은 부분을 세 손가락으로 붙잡아 공중에서 팔랑거리며 흔들었다.
“검은 왜?”
“시간이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겐호프는 뻐기는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다음에 그는 신속한 몸놀림으로 마구간을 향해 뛰쳐나갔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놓인 앙상한 관목 등의 은신처에 맞추어 몸을 웅크렸다. 앞을 향해 척척 나아가는 아겐호프는 무척 믿음직해 보였다.
구더기가 뿌듯하게 “쓸만하네요.”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란이 저 치을 구해서 지하감옥 바깥으로 나왔을 적에 눈에서 질책을 쏘아대던 그 집시가 맞는가 싶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기대감, 기쁨…. 불안감. 그래, 바란은 불안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겐호프의 행동력과 판단을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바란 같았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한 놈만 잡아서 말을 얻을 수 있다면 기습과 협박이 아주 좋은 방법이 될 테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할까? 혼자서 마구간을 지키고 있다는 그 병사의 모습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란은 조심스레 걸음을 떼고 앞으로 나아갔다. 좀 전에 밀렌 아겐호프가 마구간을 염탐하던 명당자리에 도달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스름이 내린 가운데 저만치서 마구간에 근접한 아겐호프의 모습이 모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수 있도록 발꿈치를 공중에 들고 세 손가락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추진력을 살려 단숨에 왕자군의 목줄기에 칼을 들이댈 작정일 것이다.
시선이 조금 더 앞으로 옮아갔다. 과연 아겐호프가 알렸던 대로 시야에 드는 사람 그림자라고는 단 하나뿐이었다. 어깨가 널찍하고 위풍당당한 인영이 바란을 등지고 서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겨울이라고 양모로 된 두터운 옷을 껴입은 게 보였다. 기사들은 보통 추위나 더위에 아랑곳없이 판금갑옷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일반 병사가 아니라면 성 안의 마구간지기인 것 같았다.
가끔 이성보다도 직감이 더 많은 것을 알아맞히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상황도 그랬다. 바란은 머릿속으로는 지금 이 상황에 그 어떤 문제도 없다는 데 동의했지만 어쩐지 심장은 쿵쾅대면서 말하고 있었다. 당장 멈추라고, 아겐호프가….
저 남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라고!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건 끝났나 보군.”
하지만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바란은 입을 벙긋대는 모양 그대로 멈추어 섰다. 자신의 몸을 사각지대에 미처 숨기지도 못한 채로. 새카만 밤하늘에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녹아들었다. 구더기가 얼어붙은 바란의 몸을 끌어당겨 벽면에 붙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골치 아프게 됐다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포로인가? 어떻게 감옥에서 빠져나왔지?”
“으윽…. 이거 놓-”
아겐호프는 손안에 든 단검을 휘둘러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덤벼든 상대가 왕국에서 제일로 쳐주는 검사라면 승리는 요원한 단어였다. 남자의 억세고 울퉁불퉁한 손가락이 아겐호프의 목을 휘감더니, 어느 한 순간에 단단한 팔근육이 머리를 붙잡아 고정했다. 아겐호프는 그야말로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커다란 뱀에게 휘감긴 쥐새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냥 귀족 포로가 아니라, 대공군의 일원이었군.”
남자는 아겐호프의 낡은 옷가지에 수놓아진 대공군의 표식을 보고 낮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살려두고 심문하는 것도 좋겠지.”
“놓아줬으면 좋겠는데.”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남자가 아겐호프에게서 눈을 뗐다. 뒤틀려 있던 몸이 천천히 풀어지며 바란을 향했다. 그럼에도 아겐호프를 붙잡은 손에 악력은 아직 풀지 않은 채였다.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저항하는 아겐호프의 안쓰러운 사정은 여전했다. 바란이 조금 뜸을 들이다가 남자에게로 두어 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니카.”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아겐호프에게 흉흉한 기세를 내뿜던 남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란을 돌아보았다. 참회의 방에서 봤던 니카의 가느다란 체격이 두터운 옷가지 덕택에 보기 좋게 불어나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서 갑옷 대신에 누비옷을 입었으리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니카, 놓아줘.”
이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가 깃털 덩어리처럼 나긋나긋해지는 것은 딱히 의식하지 않고도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입안에서 “니카, 니카.”하고 굴릴 때마다 점점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마음이 간질거리나 궁금했다.
떠올리고 보니 이 이름을 소리 내 부르는 것은 아주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탈타미오에서 바란의 배를 찢던 그 니카가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목놓아 외친 이후로….
‘그렇게 부르지 마… 잔악후작!’
그 날 이후로 니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의식하고 나니 마음이 봄바람에 스치운 수면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헛기침을 해서 어떻게든 나비가 들어찬 듯한 뱃속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바란은 쫓기는 신세에 여유를 부렸다. 아니, 실은 의도적으로 여유를 부리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자기 몸 가누기가 버거워서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나간 것이었다. 그런 바란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몰라도 니카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침내 바란이 니카의 세세한 이목구비나 표정까지도 능히 알아볼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니카가 여태 꼭 틀어쥐고 있던 아겐호프를 흙바닥에 팽개쳤다.
질식하기 직전까지 가서 꺽꺽거리던 아겐호프가 자신의 목을 두 손으로 붙잡고 바닥에 엎어져서 헛구역질했다. 그가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거리며 솟아 나오는 듯한 소음을 낼 적마다 멀건 위액과 하얀 입김이 솟았다.
“익숙한 상황이네. 그렇지?”
바란이 입술 끝을 당겨 미소지었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무심하게 살피던 니카가 “그렇군.”하고 짧게 긍정했다.
* * *
“동쪽 마구간에서 말을 전부 풀었소.”
“서쪽은?”
“몇 마리 묶여 있지도 않을걸. 시설이 엉망이라 다른 마구간이 포화상태가 아니라면 이용하지도 않는 곳이니까 말이오.”
니카는 군량을 옮길 수 있는 우마를 융통하기 위해 잣자후성의 서기관을 만났다. 서기관은 앙살라테 왕자의 친서와 함께 이름을 들먹이자 순순히 요청에 응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왕국기사에게 말을 낮출 위치는 아닐 텐데 한껏 거드름을 피운다. 하나하나 꾸짖고 넘어가기도 힘에 부쳤다. 니카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안에 급하게 군량을 다 챙기려면 한 마리가 아쉬운 상황이오.”
니카의 수긍과는 다르게 전령이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서기관이 비로소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기는 이 전령은 긴 여정으로 꼴이 구질구질하긴 했어도 귀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그쪽으로 보낼 인력은 없는데….”
서기관은 곤혹스러운 눈치로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 말대로 갑작스러운 소집령에 의해 병사들이 그들이 속한 사단으로 전부 돌아간 상황이었으니 말을 끌어낼 사사로운 심부름에 배치할 인력을 할당하기에는 여의치 않았다. 워낙 번잡하고 어수선했다.
“…내가 가겠다.”
“오, 니카 경.”
걸쩍거리면서 니카 방향으로 눈치를 주는 것이 원하는 바가 투명해 보였다. 니카는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에, 자진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전령은 그래도 니카 정도의 위치에 있는 왕국 기사가 자진해서 잔심부름을 하러 나선다는 것이 다소 의아한 눈치였지만, 니카의 명예를 위해 나서는 번거로움을 자처하진 않았다.
그렇게 왕국 기사이자 제일의 검사, 수리 왕녀의 최측근이라는 온갖 화려한 수식어가 붙은 니카 경이, 기껏해야 노쇠한 말이 두어 필 묶여 있는 서쪽 마구간으로 말을 끌러 가게 된 것이었다. 허드렛일 거드는 시종 아이나 할 법한 일이었다.
그는 그저 한숨만 폭 내쉬며 지끈대는 이마를 짚었다. 수치심을 느낄 겨를이 없기 때문이었다.
‘애틀턴, 구더기, 왕녀님과 막쉬롭에 코쿤 그 꼬마까지….’
생각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 낯이 흩날리는 눈발의 빛깔처럼 희게 질렸다. 얼굴 근육이 추위에 못 이겨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잔악후작과도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군량 건은 최대한 빨리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신속하게 움직이는 것 말고는 방법이 달리 없어.’
니카는 서쪽 마구간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말을 잡아끌고 성문 밖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서기관이 귀띔해준 바에 따르면 이곳에 수용된 말은 얼마 없을 터였다. 기껏해야 두 필. 말 등에 올라타서 나머지 한 마리의 고삐를 쥐고 달리면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 같은데 이깟 시시껄렁한 잡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는 이런 식으로 방해를 받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니카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잔악후작.’
밝은 불빛 아래로 걸어 나오는 그의 몰골은 아무 연고 없는 사람의 심장도 꾹 쥐어 터뜨릴 만큼 처연했다. 참회의 방 안에 드리운 그늘 탓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얼굴이 훤히 보였다.
생채기와 흙먼지, 땟국으로 거뭇거뭇하게 더럽혀진 얼굴. 순금을 뽑아놓은 것 같다는 감탄이 자자하던 머리칼도 이젠 기름지고 빛이 바랬다. 입술은 갈라져 터졌고, 핏자국으로 물든 넝마 셔츠와 겨울바람을 버티기 불가능한 수준의 찢긴 바짓단….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건너편의 바란 탈타미오가 니카의 시선이 자신을 훑는 것을 느끼고 머쓱한 듯이 웃었다.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었던 니카의 두뇌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녹슨 고철과도 같이 삐그덕거리면서 천천히 몇 가지 단어를 떠올렸다. 잔악후작, 참회의 방, 탈출… 그런 말들을.
‘바란 탈타미오가 왜 여기에 있지?’
단어가 어느 순간 문장으로 바뀌면서 수없이 많은 의문을 자아냈다. 새카맣게 칠해진 마음속에 다발적으로 의문이 샘솟았다.
‘어떻게?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알고서 찾아온 것일까?’
“니카.”
고작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 니카는 움찔 온몸을 떨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는 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리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탈타미오에서 바란의 뱃가죽을 찢고 탈출한 이후에, 니카가 저 입술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감히 친한 듯 이름을 지껄이지 말라고 다그쳤더니, 잔악후작은 곧이곧대로 니카를 ‘경’이라 품위 있게 지칭하기 시작했다. 니카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실감할 수 있게 금을 그어주는 것처럼.
‘꽃봉오리와 골짜기…. 바닐라 맛 입술?’
니카는 질끈 감은 눈을 도로 가늘게 떴다. 저치의 목소리와 니카의 이름 사이에는 허울 좋은 추억이 얽혀 있었다. 기만에 대한 분노는 끝내 미화된 기억을 이기지 못했다. 멍청하기도 하지. 니카는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한심하도록 바삐 뛰는지 깨달았다. 낮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니카, 놓아줘.”
니카는 왜소한 체구의 대공군 꼬마를 순순히 내팽개쳤다. 두 명의 탈옥수들 중에 누가 대장 격인지 눈에 빤히 보이는 판에 더 이상 잔챙이를 붙잡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게 이유라고 믿었다.
바닥에 내던진 꼬마는 헛구역질을 하더니 재빨리 대리석 건물의 그늘 아래 숨어들었다. 그래봤자 니카의 관심 밖 일이다. 니카는 더 이상 어린놈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잔악후작을 꿰뚫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대체 그 방에선 어떻게 빠져나온 걸까?
조력자가 있나?
자꾸만 다리를 절뚝거리는데 어디가 잘못된 걸까. 다시 잡혀 들어가서 본보기로 매질을 당하거나 처우가 나빠지면…. 그때는 멀쩡하게 걷는 것조차 요원해질 텐데.
“익숙한 상황이네, 그렇지?”
니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벌어진 입술이 공중에서 덧없이 경련하다가 끝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다물렸다. 샐쭉 웃는 바란 탈타미오의 눈매가 얄미웠다. 오뚝한 코나 부르튼 입술도 전부 다 얄밉기는 매한가지였다. 어금니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렇군.”
속 시원하게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은 그저 마음에 머물렀다. 손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니카는 암만 노력해도 잔악후작을 해칠 수가 없었다. 두 번 다시는 그 끔찍하고 불가해한 죄책감에 시달릴 용기가 없었다. 니카는 사난타를 향하는 여정 도중에 잔악후작이 배에서 피투성이 창자를 쏟아내며 달려드는 악몽을 수십 번이나 반복해 꿨다.
여우 새끼처럼 얄미운 얼굴을 한 잔악후작이 얼마나 손쉽게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남자인지 이제는 알았다. 그래서 두려웠고, 선뜻 해칠 수가 없었다. 잔악후작의 나약함이 니카를 불안하게 했다.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꼴을 한 지금은 더더욱.
비겁한 잔악후작 놈이 옴짝달싹 못 하는 니카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교묘하게 달라 붙어왔다. 썩 좋은 냄새는 나지 않았다. 며칠이나 묶여 있던 남자였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니카의 가슴팍을 아쉬운 듯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얼른 눈치를 보며 떨어져 나갔다.
그 손은 아주 느릿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원한다면 재빨리 떨쳐내거나 뿌리칠 수 있었다. 니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리라 여겼다. 옛 감정의 찌꺼기. 고작해야 그런 정도.
그 머리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괜한 니카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신경성 두통인 것 같았다. 니카가 원래도 곧잘 예민해지는 성격이긴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신경질이 치솟는 일이 무척 잦았다. 날카롭게 벼린 말투로 잔악후작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는 게 낫겠군. 자진해서 돌아간다면 조금은 선처를 바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하…. 우스운 말이야, 니카. 내가 돌아가려고 탈옥을 했겠어?”
“지금보다 처우가 더 나빠질 거다. 저번에 묶인 건 손목 둘 뿐이었겠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그때가 좋았다며 울부짖게 되겠지.”
바란이 배실배실 웃었다. 목숨을 판돈으로 걸고도 진지하지 않은 저 태도는 여전했다. 오히려 명치가 꼭 억죄며 침이 자꾸만 마르는 것은 니카 쪽이었다.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어떻게든 이 멍청이를 설득해서 돌려보내야겠다는 사명감이 솟았다.
“지금 내가 농담하는 줄 아나? 그런 식으로 쇠꼬챙이에 어깨를 꿰뚫린 전쟁 포로를 내가 여태 한두 사람 봐 왔는 줄 아느냐고. 너처럼 며칠 매달려 있는 것만으로 비실거리는 나약한 작자는 금방 열이 들끓고 죽어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내가 너를 손수 다시 그 ‘참회의 방’ 안에 처박기 전에 자진해서-”
“걱정해주는 거야?”
니카는 움찔 얼어붙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곧장 질책을 던졌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걱정해주는 거 맞잖-”
“내가 언제-”
“저는 이쪽 방향을 살펴보겠습니다!”
“마구간 방향에 인기척이 있습니다!”
그때였다. 적군의 지휘관이 탈옥한 판에 성이 너무 조용하다 싶더니만 소란스러운 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질퍽한 눈 위에 복수의 발걸음이 처박히며 쿨쩍대는 소리를 냈다. 절반 정도는 바람 소리에 파묻혀 흩어졌다.
말을 뚝 멈춘 니카와 바란의 시선이 마주쳤다.
추격자들이었다. 니카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생각들이 삽시간에 빛을 잃었다. 그리고 잔악후작에게 겁을 먹이기 위해 내뱉었던 처참한 단어들이 머릿속에 생생한 풍경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갈고리에 어깨가 꿰뚫리고 시뻘겋게 달군 인두가 새하얀 피부를 지져놓는다. 가련한 입술이 피를 토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니카의 머릿속이 온통 새하얗게… 변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니카는 바란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낡은 마구간 안으로 처박아 넣는 중이었다. “자, 자, 잠깐.” 하면서 잔악후작이 허공에 팔을 휘저었다. 포로 생활 탓에 남은 기력이 없는 후작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니카의 손에 종이 인형처럼 이끌려 왔다. 마구간 안의 말들이 낯선 기척을 경계하며 짤막하게 울었다.
니카가 어찌나 거세게 던졌는지, 바란은 썩은 짚과 말똥냄새로 가득한 마구간 바닥에 내팽개쳐지다시피 했다.
새파란 시선이 어리둥절한 마음을 드러내며 니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니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거세게 마구간의 문을 닫고 그 앞을 지키고 섰을 뿐이었다. 마치 잣자후로 향하던 선상에서 바란이 갇힌 선실 앞을 가만히 지켰을 때처럼.
니카는 자신의 행동에 합리적인 이유를 붙이려고 수없이 노력했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를 여럿 거느린 갑옷차림의 기사가 니카에게 다가와 알은체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하기에 니카도 턱을 한번 끄덕였다. 기사가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군.”
“그래.”
“잔악후작을 보지 못했나?”
“잔악후작을?”
태연하게 되물으려고 노력했다.
“이 방향이 아닌가 보군. 그 미친놈이 배짱도 크지, ‘참회의 방’으로부터 도주했어. 이상한 연기를 써서 간수고 기사고 할 거 없이 다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단 말씀이야…. 이봐, 경.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그 표정 좀 풀라고. 왕녀님은 별 탈 없으시니까 말이다.”
“왕녀님?”
니카는 아주 낯선 이름을 발음하는 것처럼 물었다. 잘만 나불대던 기사가 입을 딱 다물고 의심스레 눈을 가늘게 떴다. 영문을 모른다는 것처럼 구는 용인기사가 과연 그가 알아온 왕녀 바라기가 맞는지 헷갈린다는 눈치였다.
“경 괜찮은가?”
니카는 많은 고민을 거듭한 후에야 비로소 눈에 익은 이 기사의 이름이 제란딘이며, 그가 전령을 따라나서기 전에 왕녀의 신변 보호를 맡겼던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선한 충격이 니카를 휩쓸었다. 왕녀에게 거짓을 고해바치고 죄책에 앓아누웠던 때와 닮은 충격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런 의미도 담기지 않은 부정을 제란딘 경은 그 좋을 대로 알아듣고 낮게 혀를 찼다.
“쥐새끼 같은 잔악후작 놈.”
제란딘은 몸을 힘겹게 비틀었다. 수면향 같은 것에 당했다더니 아직 그 영향력이 남은 모양이었다. 검집째로 뽑아 든 왕국기사의 검이 노인들 지팡이처럼 바닥에 처박혀 그 몸을 지탱했다.
“분명 꼬리가 이 근방에서 끊겼는데, 대체 어디로 도망쳤는지 모르겠군.”
“…이 방향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왕녀님 침실에 들어왔던 그 집시 여자는 못 보았는가?”
구더기 얘기였다. 니카는 이를 콱 악문다. 잔악후작을 추격하는 기사가 그녀를 찾을 이유는 한 가지뿐이다. 코쿤은 알아서 찾아올 테니 침실에 가만 박혀 있으라고 누누이 말해두었건만. 제 딴엔 뭐라도 해보려고 이 어수선한 판국에 성안을 돌아다니며 잔악후작과 접촉한 것 같았다. 골치가 아팠다.
“바깥에 내보낸 줄도 몰랐군.”
“끄응…. 그 여자가 잔악후작과 함께 사라졌어.”
‘그럼 그렇지.’
니카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려 마른세수를 했다. 구더기가 후작의 조력자였던 것이다. 잔악후작은 결단코 홀로 참회의 방을 탈출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운명 운운하는 집시 구더기가 잔악후작을 구해야 했을 이유가 뭐지? 수십 가지의 가설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죄다 신통치 않았다.
“경이 못 봤다니 서쪽으로는 안 갔는가 본데. 다른 방향으로 수색을 넓혀야 할 모양이야. 그래도 성 바깥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통에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망정이구만.”
제란딘은 결국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 채 찜찜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분주하게 뒤따라오는 병사들을 반대 방향으로 물리는 것을 보면 니카의 말을 믿는 것 같기는 했다. 시시하고 벽창호 같은 그 용인기사가 감히 거짓을 입에 담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거겠지.
“아, 그런데….”
제란딘이 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뭐지?”
니카는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목젖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거짓말이 얼굴에 드러나 보이는 편이라는 사실은 스스로도 잘 알았다.
제란딘의 의심을 피하고자 최대한 눈을 피했다. 솔직한 낯에서 그가 뭐라도 읽어낼까 봐 불안했다. 심장이 콩닥거리며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어서 물러가 준다면 좋겠는데 끈질기게 말을 붙인다.
“경이 여기선 뭘 하고 있는 거지? 왕자 전하의 전령을 만나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야기는 끝났고, 마구간에는 말을 가져가려고 왔다.”
제란딘이 이상한 표정을 했다.
“뭐?”
“사정이 있어. 인력이 없어서 불가피하게 돕는 중이다.”
“음, 도움이라. 종놈들이나 하는 일을…. 말 그대로 돕는 데서 그치기를 빌겠네.”
니카가 변명처럼 덧붙인 말을 듣고 제란딘이 헛기침을 했다. 엄격하게 쏟아낸 말이 가관이었다. 만약 그가 스무 살만 나이를 더 먹은 강퍅한 늙은이였다면, 늙은 사내들이 못마땅한 심기를 표현할 때 주로 그러듯이 “에잉.”하는 묘한 소리까지도 냈을 것이다.
“뭐. 경도 말 끄는 시종 노릇이나 하려고 기사서임을 받은 건 아닐 테니까 말이야.”
아무리 제란딘 경이 왕국기사들 중에 니카를 존중하는 축이라지만, 그래도 내심 니카가 왕국기사의 격을 떨어뜨리는 존재라 인식하고 있는 게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편견은 온 왕국과 조직에 가득해서 어지간한 개인의 노력으로는 떨쳐낼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 니카 역시 기대조차 하지 않는 편이었다.
“…명심하지.”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니카는 이래서 순탄하게 기사의 자리에 오른 귀족 도련님들이 질색이었다. 천민의 꼬리표를 파충류의 비늘로 늘 입증하고 다닐 수밖에 없는 용인의 입장이, 그 자체로 얼마나 거대한 고충인지 짐작도 못 하는 주제에…. 니카의 창백한 이마가 세로줄 무늬를 새기며 구겨졌다.
“이쪽이 아니라면 건물을 끼고 돌아 성 가장자리를 따라 돌았을 테니…. 북쪽 방향을 눈여겨봐야겠군.”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매몰차게 등을 돌린 제란딘이 병사들을 뒤로 물렸다. 지금의 니카에게는 분노에 못 이겨 장갑을 내던질 만한 정신머리가 없었다.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사실을 제란딘이 알아야 할 텐데. 니카는 생각했다.
* * *
‘날… 찾고 있는 거로구나. 참회의 방 안에 잠들었던 사람들이 깨어났어. 아겐호프를 구하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까 그럴 법도 하지.’
바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녀도 깨어났을 거야.’
막막한 마음에 코를 훌쩍댔다.
‘그런데 니카는 왜 날 숨겨준 거지? 당장 끌고 가든가 저들에게 신병을 넘기면 편했을 텐데.’
만약 다른 이들이 니카처럼 행동했다면, 바란은 아마도 포로를 붙잡은 공적을 독차지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니카 경이다. 왕녀가 아닌 것에는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남자. 태생적으로 기사가 되기에 마땅하지 않았기에, 누구보다 기사의 덕목에 가까워진 남자.
머리통이 두 쪽이 날 정도로 고민하던 차에, 판자로 된 마구간 문 너머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바란은 차가운 흙바닥에 귀를 대고 침착하게 숨을 멈췄다. 발울림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팔꿈치를 짚고 상반신을 간신히 끌어올렸다.
고작 그것 움직였다고 숨이 가쁘고 가슴 우리가 절로 들썩거린다. 좀 쉬었다 하면 안 되겠느냐고 몸뚱이가 간청했다. 달콤한 휴식에 입안이 바싹 마를 정도로 동하긴 했지만, 지금 적진 한복판에서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바란은 이를 악물고 끄응 신음하며 자리에 두 발을 딛고 섰다.
그가 몸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닫혔던 마구간의 문이 열렸다. 거세게 열린 것에 비해 대단한 소음은 없었다. 겨우 떠나보낸 추격자들이 소란을 듣고 다시 돌아올까 염려한 듯했다.
손잡이를 잡고 있는 사람은 언급할 것도 없이 니카 경이었다. 화가 나서 어깨를 씩씩대는데도 문만큼은 살그머니 닫는다. 웃음을 참느라 바란의 아랫입술이 터지고 피가 배어 나왔다.
“풋.”
결국 참지 못한 웃음 한 조각이 새어 나왔다. 적막 가운데에서는 그 한 조각조차 이목이 쏠릴 만큼 컸다. 아차 싶어서 올려다본 니카는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바란은 그 기세에 기죽는 일 없이 따지고 들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래도 무시무시한 니카의 낯을 보고 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바란은 찔끔 겁을 먹었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숨길 방도가 없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리라. 결국 눈치나 살살 보면서 비위를 맞추어 샐쭉 웃었다. 파란 눈이 바쁘게 굴러갔다.
“나와라.”
억눌린 목소리로 니카가 명령했다. 불빛을 등지고 있어서 얼굴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바란이 여태껏 봤던 중에 가장 불퉁한 축에 속한다는 것만큼은 명백했다. 바란이 얼어붙어서 어쩔 줄 모르고 눈만 회동그래 뜨고 있자, 그는 더 기다려줄 수 없다면서 팔짱을 꼈다.
“당장 나와.”
“…저기, 왜 날 도와주려는 거야?”
“시간 없다.”
“니카.”
습관이라는 것이 무섭다. 아주 오래간만에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해서 내심 신이 나 있었던 것일까. 바란은 탈타미오에서 니카를 부를 적에 애교를 부리던 입버릇 그대로 맨 뒤 음절을 늘여서 니카아, 했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승마 장비를 널어놓은 옆 선반에서 적당한 안장을 찾던 니카가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는 사나운 눈매로 바란을 노려보았다.
바란은 따가운 뺨을 괜스레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니카의 집요한 눈길은 선단을 뾰족하게 갈아놓은 꼬챙이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은 너무도 집요했고, 바란은 이 눈빛이 쏘아질 때, 곧장 작살에 꿰인 물고기 꼴이 나기 십상이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전신이 그 시선에 꿰여 수면 위로 끌려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도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꼬물거리면서 입술을 앙다물어야 했다.
‘아마 내가 살갑게 부르는 모양을 보아 넘기기 어려웠던 거겠지. 기만자, 숙적씩이나 되어서 애인처럼 나긋하게 구는 게…. 마음에 안 들 법도 해.’
바란은 생각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맛이 무척 썼다. 니카아, 하고 부르면 귀를 쫑긋대는 강아지처럼 열렬히 반응하던 열여덟의 니카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서 바락바락 대들지 않고 눈치를 살폈던 것이다.
“이봐.”
그때 바란의 팔에 무언가가 닿았다. 닿았다기보다는, 그것이 바란의 팔뚝을 꾹 움켜쥐었다. 풀 죽어서 하염없이 떨구어지던 바란의 고개가 단번에 위로 솟구쳤다. 놀란 마음에 탄성이 절로 났다.
“아.”
거칠고, 울퉁불퉁하고, 차가운 이 감촉. 긴가민가하며 불신과 싸웠다. 한쪽 눈썹이 높은 아치를 그렸다.
용기를 내어 손 위에 닿은 그것을 한 차례 쓸어보았다. 손. 바란은 생각했다. 틀림없는 니카의 손이었다. 이 손을 바란이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어릴 적에 그 어두컴컴한 침엽수림에서 마주쳤던 상냥한 손이었다. 겨울의 전조가 드리우던 날에, 탈타미오 인근 들판에서 억센 들꽃을 꺾어 온 바로 그 손이었다.
바란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슨 말인가 꺼내려고 노력했는데, 머릿속에 들었던 단어들이 다 증발해 사라지는 바람에 바보처럼 어리바리했다.
“니, 카….”
“그만 좀 불러라.”
눈 깜짝할 새에 니카는 바란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아쉽게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애초에 바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담백하고도 사무적인 접촉이었다. 니카는 모든 일을 서두르려고 했다. 정작 탈옥수 본인인 바란이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며 어수룩하게 굽어진 동안 말이다. 역설적인 광경이었다.
마구간에서 콧김을 뿜는 두 마리 말에게 다가간 니카는 말 등 위에다 안장을 얹고, 고삐를 채워 조정했다. 뱃가죽 위에다 옹골찬 매듭을 지으며 숙적에게 결코 흘려서는 안 되는 정보를 꺼내 들었다.
“마구간 뒤편으로 돌아 나가면 사용인들이 쓰는 통로가 있을 거다. 마을로 향하는 길이지. 추격자는 북으로 향했고, 잣자후 외성 남쪽 벌판에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으니 번거롭더라도 동쪽으로 가로질러서 나가.”
니카가 말을 멈추고 묵묵하게 바란의 뺨 언저리를 쳐다보았다. 불길 같은 눈빛이 닿는 시간이 길어지자 기분이 이상야릇하게 달아올랐다.
“이상해. 니카.”
얼굴이 불에 타는 것처럼 뜨겁다는 사실을 눈치채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불현듯 니카의 눈길이 닿은 곳에 손가락을 댔다. 겨울바람을 맞아 차게 식은 체온에 걸맞지 않게 뜨거운 낯가죽이 만져졌다. 바란은 민망하다 못해 혀를 깨물 지경이었다.
“네가 날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없다마다.”
니카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얼마 안 있어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궁금증이야 셀 수 없게 많았다. 다만 무슨 질문을 통해 해소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어서 불가항력으로 입을 닫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는데, 네 성격에 날 놓아주고 나면 자책에 잠겨서 한참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거야. 왕녀 얼굴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할 거면서. 후회할 일 하는 거라고, 지금.”
“아는체하지 말고 빨리 꺼지기나 해. 애송이 후작이 두려울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없다. 이건 그저 변덕으로 베푸는 한순간의 자비다.”
바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멋대로 해석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온갖 개연성을 늘어놓고서,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라고 수십 번 지껄이며 심장을 설득해야 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가슴은 계속 시끄럽게 뛰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니카는 열린 문틈으로 상반신을 기울여 빼냈다. 바깥 어느 방향인가를 향해 낮은 휘파람 소리를 냈다.
누구의 주목을 얻기 위해서였는지는 금방 밝혀졌다. 낡은 마구간 문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경계하는 기색의 아겐호프가 들어섰다. 용케 저 바깥에서도 추격자들을 피하고 숨어 있었다. 니카가 추격자들을 반대 방향으로 따돌려준 덕택이 컸다.
아겐호프의 뒤로 어미 소의 꽁무니를 쫓는 송아지처럼 집시 구더기가 졸졸 따라 들어왔다. 니카가 눈살을 구겼다.
“구더기.”
이름을 한번 호명하자 제 발 저린 구더기가 파드득 떨었다.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했다. 바란은 자신에게 한마디 안 지고 투덜거리던 구더기가 니카 앞에서 설설 기는 모습을 보면서 먹이사슬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실감했다.
“사정이 다 있습니다. 사정이요, 나리. 다 당신을 위한 일인 것만큼은 확실하지요.”
“시시한 얘기는 됐다.”
니카가 말고삐를 건넨다. 니카에게 가까이 서 있던 아겐호프가 선뜻 나서서 고삐를 움켜쥐고 바란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묻는 눈치다. 니카는 구더기하고만 말을 섞었다.
“저것들 데리고 내 눈앞에서 꺼져.”
“글쎄요, 나리. 저는 코쿤과 함께 남고 싶은 마음입니다만….”
“내가 그 알량한 목숨을 지켜줄 거라고 자신하는 건가.”
“후작님. 이… 이거 함정 아닐까요? 왕녀의 용인기사가 뭘 위해서 우릴 도와준단 말입니까?”
둘이 티격태격거리는 동안 아겐호프가 바란의 귓가에 속삭였다. 뭘 위해서. 바란은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바란은 침묵을 고수했다. 니카의 입술로 그 이유를 직접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그 예민한 청각으로 아겐호프의 말소리까지 전부 다 들었을 텐데 니카는 반응이 없었다.
니카는 묵묵히 등을 돌려 걸어나갔다. 언뜻 매몰차 보이기까지 했다. 저벅이는 발소리에 바란의 심장이 아래로, 더 아래로 처박혔다. 그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바란은 니카를 붙잡았다.
“잠깐. 잠깐만, 니카.”
“멍청하긴! 정말이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더는 할 얘기 없다. 남아서 뒤지든지, 이 길로 달아나든지 해라!”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 여유를 부린다고 니카는 무척 거세게 화를 냈다. 그가 화를 낼 적에 종종 느꼈던 위협적인 맹수의 기세가 전신의 땀구멍을 죄이고 머리털이 쭈뼛대며 일어서게 만들었다.
니카는 벌컥 마구간의 문을 열고 널찍이 벌린다. 금세 말을 몰고 지나야 할 통로가 만들어졌다. 의심을 다 버리지 못한 아겐호프는 영민한 들짐승처럼 종종걸음으로 바깥의 경계까지 달려가 좌우를 유심히 둘러보았다.
“우, 우선 여길 빠져나갑시다. 후작님. 어서 타세요, 어서요!”
그리고 확신이 서자 바란에게 말을 타도록 재촉하기 시작했다. 열화에 못 이겨 바란은 할 얘기를 겨울나기 장작처럼 잔뜩 쌓아놓은 심정으로도 하릴없이 안장 위에 올랐다. 싸구려 안장에 엉덩이가 벌써부터 배기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순한 말이라 일면식 없는 도둑에게도 별다른 반항이 없어 다행이었다.
“너는 수없이 많은 죄를 지었지, 잔악후작. 네 손에 불탄 마을과 잔인한 처사로 목숨을 잃은 자들이 강을 이룬다.”
말의 뱃가죽을 발등으로 건드리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다그닥거리는 가운데 바란은 니카의 으름장을 들었다. 동공이 뾰족하게 선 검은 눈은 바란을 겁박한다기보단 스스로에게 다짐을 아로새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숙적을 도우려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는 거겠지. 바란은 생각했다.
“…이 평화로운 땅은 너의 무덤이 될 수 없다. 너와 같은 기만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곳이다. 하지만 나의 자비를 애틀턴에서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니카의 오롯한 시선이 점차 가까워진다. 바란은 불빛에 홀린 나방처럼 다가오는 파멸에 대한 무력감을 느낀다.
“명심해라. 마지막 전장에서, 이 손으로 널 죽일 테니까. 그때까지는 죽지 마라.”
“…낭만적이네. 꼭 사랑고백처럼 들려.”
바란은 시큰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네 손에 죽을 수 있다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 최후일 거야.”
“야망도 배알도 없는 남자로군.”
“너는 나를 비난할 자격이 없어. 난 너와 똑같거든.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했기 때문이야. 그건 권력도, 돈도, 알량한 자존심이나 충성도 아니지.”
웃었다. 바란은 자신의 얼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언제나 자주 웃어대는 편이었지만, 지금처럼 얼굴 근육이 절로 이완되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내걸어본 지는 꽤 오래되었다. 말 고삐를 한 손으로 감아 바짝 붙잡고 니카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까만 눈은 한번 깜빡이지조차 않았다.
바란의 따뜻하고 안타까운 눈길이 니카의 얼굴을 한참이나 헤맸다. 그 누구도 바란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하지 않은 채 애타는 표정을 구경하기만 했다.
“네가 왜 나를 구해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니카의 생김을 각막 속에다 충분히 아로새겼을 무렵에 바란은 부르튼 한 손을 들어 니카의 입술 위를 덮었다. 무슨 생각에선지 니카는 바란이 하는 양을 가만 지켜보기만 했다. 꽁꽁 얼어붙은 손에 입술의 감촉과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너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도, 너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거야.”
바란은 확신에 차올랐다. 절망에 빠져 있느라고 신포도처럼 여겼던 니카의 감정이 이토록 절절하게 밀려든 적이 없었다. 눈앞의 니카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몸을 간헐적으로 떨었고, 확신이 없어 말을 절었다. 무엇보다 그는, 바란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을 미워하리라고 여겼다.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 니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카의 감정은 순전한 증오 따위가 아니었다. 바란의 사랑이 어둡게 물들었던 만큼 니카의 감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복잡하고 혼탁해졌다.
니카는 바란에게 사랑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혼합된 수없이 많은 감정 사이에 연모의 정이 껴 있지 않다고 대체 누가 장담할 수 있나.
바란은 가느다란 가능성이 점차 짙어지는 것을 본다. 마치 늘 투명하게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석양빛에 반사되어 희게 빛나는 거미줄을 본 것처럼.
‘니카도 나를 사랑할까?’
비로소 뒤틀려 있던 감정의 골조가 맞춰졌다. 경이로운 기분이었다. 바란은 니카의 어린 짐승 같은 까만 눈과 길 잃은 표정에서 아주 많은 것을 읽었다.
이윽고 바란의 상반신이 더욱 기울어지며 니카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바란은 니카의 입술 위에 덧댄 자신의 손등에다가 입을 맞췄다. 언젠가 고뿔을 옮기고 싶지 않았던 열여덟의 니카가 입 맞추던 방식이었다. 바란도 니카도 서로가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새파란 눈동자는 한번 깜빡이는 일 없이 니카를 마주 보았다.
“나의 니카.”
니카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바란은 거두지 않은 손등 위에다 다시 한 차례 입을 맞췄다. 입술의 감촉을 느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무거운 한숨을 터뜨렸다. 지나친 욕심을 낼 수는 없었다.
“네 말대로 죽지 않을게. 약속해.”
“…읏.”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너 한 사람뿐이야.”
바란은 천천히 손을 떼어내고 몸을 원위치했다. 니카가 떨어져 나가는 손을 갑작스럽게 붙잡은 것은 의외였다. 바란은 눈을 회동그랗게 뜨고 왕녀의 기사를 응시했다.
“너는…. 넌….”
가슴을 가쁘게 들썩이는 니카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뭉클대며 피어오르는 게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낯을 온통 찌푸리고 있었다. 만면에 가장하고 있던 침착한 가면이 전부 다 무너져내렸다. 금이 가고 파편이 되어 떨어진 니카 경의 알껍질 속에 바란이 익히 알아 온 연약한 니카가 숨어 있었다.
“넌 비겁하다….”
“응. 미안해.”
“개자식. 약속을 어겼다가는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토막 내줄 것이다. 지옥에 떨어졌다면 다시 한번 지상으로 끌어올려서 온갖 고통을 맛보게 한 뒤에 더 낮은 지옥으로 떨구어주마.”
“그러니까, 안 죽겠다고 했잖아….”
니카는 잘 여며서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그것을 붙잡은 바란의 손에 쥐여준 다음 냅다 밀쳤다. 바란은 반동으로 툭 튕겨 나가 말 위에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어리둥절해서 건네받은 누비옷을 이리저리 살폈다. 니카는 더 할 얘기가 없다는 듯이 구더기와 아겐호프를 천천히 노려보았고, 이내 마구간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바란은 그 휘청이는 걸음걸이를 지그시 쳐다보며 굳어 있었다. 아겐호프가 어색하게 입을 뗄 때까지, 계속.
“어…. 저기, 일단 출발할까요?”
긍정이나 부정을 하는 대신에 바란은 말을 출발시켰다. 꿈결로부터 차가운 현실로 천천히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신이시여. 감탄과도 같이 신의 이름을 불렀다. 바란의 뇌리에 이성적인 판단을 담당하는 부분이 가동을 멈추었고 그 안에는 대신 환희의 감탄사가 무수히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