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소소한 기대 (1)
어제오늘에 걸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서늘한 감옥에 와 갇혔다. 덕택에 갑갑하고 지루한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져서 심심한 마음을 덜었다.
구더기는 족쇄를 절그렁거리며 창살 주위를 살피는 코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종살이로 서른 해를 보내면서부터 뼈와 근육이 피로에 삭았으며 언젠가부터 나이를 실감하게 되고는 했다.
똑같이 거친 빵으로 식사하고 묵직한 족쇄에 묶여 방치되었는데 어린 코쿤은 저리도 쌩쌩하다니, 구더기는 아, 나이가 마냥 숫자인 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날 엣시아 용병단장 락샴의 특별한 지시로 감옥에 끌려와 갇힌 구더기는 코쿤이 흘려놓은 용인 검사, 니카에 관한 정보로 끈질긴 추궁을 당했다. 해칠 생각은 없다면서 시종일관 싱글벙글했던 락샴이지만, 하필 추궁을 하는 장소가 흉물스러운 고문도구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지하감옥이었다. 심적으로 압박하려는 술수가 엿보였다.
구더기는 니카가 비범한 인물이라는 점을 꿰고 있었다. 아직 그 정체를 명확히 밝혀내지는 못했으나 니카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운명의 별이 다른 어느 것보다 커다랗고 빛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중요한 위인이라 한들, 남 위해서 뒤지거나 다치는 건 이 구더기가 아니지.’
구더기는 냅다 락샴의 질문에 대답해 짧은 시간 함께 동행했던 용인의 인상착의를 전부 다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심 말하기 꺼려했었던 특징에 대해서도 말했다. 여타의 용인과는 구별되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렇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평범한 용인이라기에 그 새끼는 언제나 너무 별났어. 드디어 공감해주는 사람이 생겨서 기쁘다.’
락샴의 반응은 상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속셈이 정말이지 불투명한 남자였다. 구더기는 남자가 흥분과 즐거움에 못 이겨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니카에 관한 말을 쏟아내고 나니 둘 사이에 더 이상 교환할 만한 정보가 없어졌다. 락샴은 순순히 그녀를 더 괴롭히지 않고 일어섰는데, 단순히 깜빡 잊은 건지, 아니면 더 쓸모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건지는 몰라도, 자유를 주지는 않았다.
대신 감옥 안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로 모시라던 말은 그저 비꼬는 소리가 아니어서, 구더기와 코쿤은 감옥 안에서도 썩 넓은 공간에 단둘이 수감되었다. 흙벽돌을 두껍게 쌓고 지푸라기를 진흙에 이겨 굳힌 튼튼한 벽은 바깥의 냉기를 적절히 차단해주었다. 그리고 양이 조금 적기는 해도 용병들은 매일 그들에게 묽은 수프와 거친 빵을 넣어주었다. 덮거나 깔고 누울 얇은 헝겊 담요도 있었다. 철창 건너편에 있는 귀족 포로들에게는 제공되는 바 없는 편의였다.
구더기는 긴장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욱신대기 시작해서 여태 고통이 잦아들지 않는 발목을 주물렀다. 다급히 코쿤을 찾으려고 무리하게 층계에서 뛰어내리거나 달음박질을 치면서 접질린 것이었다.
“아줌마, 괜찮아요?”
뽈뽈거리며 널따란 창살 안을 누비던 코쿤이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옆으로 와 엉덩이를 붙였다. 자신이 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코가 쭉 빠지고 기가 죽었다.
“괜찮긴. 부은 거 안 보이니? 아주 아파 돌아가시겠단다.”
“아, 아줌마, 죽지 마요….”
구더기는 그 애를 굳이 달래려 하지 않았다. 실패를 거듭해서 배운다는 것은 절절한 통감이 뒤따라야만 가능한 말이었다. 의기소침한 모습이 마음 아프다고 어설프게 달래어 놓았다간 다음에는 또 무슨 소동을 벌일지 모른다.
“죽을 만한 일을 안 벌여야 안 죽지, 이놈.”
눈꼬리가 추욱 처진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손을 자연스럽게 깍지를 껴 뒤로 젖히고 머리를 받쳤다.
“이미 누가 있는데?”
“그래도 어떡해, 자리가 없잖아. 어이, 이 집시 누군지 알아?”
“아…. 내가 알기로 대공군이랑은 관계없는 여자야. 그냥 마음에 짚이는 게 좀 있는지 대장이 따로 가둬두라고 하셨어. 편의도 봐 달라고 하신 걸 생각하면 상관없을 거 같은데?”
“뭐, 자리가 없는데 우리가 더 이상 뭘 어떡하겠어. 귀족 놈들이랑 같이 두는 것보다 낫지. 대신 사슬을 좀 짧게 잡아서 묶어두자고. 어이, 문 열어.”
겁먹은 코쿤이 뒤로 날쌔게 달려와 구더기의 등 뒤로 숨었다. 구더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있는 곳에 박힌 견고한 창살 너머에서 떠들던 엣시아의 용병들이 마침내 결론을 낸 듯이 자물쇠를 열었다.
무거운 쇳소리를 내면서 창살의 일부분이 경첩이 달린 모양대로 접혔다. 이윽고 다부진 몸매의 용병 두 사람이 어깨에 메다시피 하고 누군가를 끌고 들어왔다.
“미안하게 됐수, 아줌마. 금방 나가요.”
용병들이 구더기에게 양해를 구하며 들고 온 남자를 구석에 내려놓았다. 그렇다, 그들이 어깨에 들쳐메고 있던 것은 어느 젊은 남자였다. 옷가지는 흙과 땀에 씻겨 꼬질꼬질했으며 갑옷 안에 받쳐입는 내의에 불과해 기온에 맞지 않게 얄팍했다. 그래도 평민들이 입기에는 어림도 없는 고급품이었다.
남자는 어릴 적에 생강이나 딸기라는 놀림을 듣고 자랐을 법한 붉은 빛이 도는 금발을 하고 있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 틈으로 보이는 새파란 눈이 구더기를 훑었다. 마찬가지로 남자를 파악하려고 훔쳐보던 구더기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는 그만 놀라서 쩍 얼어붙었다.
용병들이 팔과 다리를 단단히 구속하는 동안 남자는 얌전히 앉아서 그녀와 코쿤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낯가죽이 시선에 녹아서 흘러내리는 듯했다. 부담스러웠다.
“됐다. 거기 아줌마, 아주 악독한 놈이니까 이놈이랑은 괜히 얽히지 마시고, 여태까지처럼 쥐죽은 듯 지내쇼.”
여부가 있겠느냐고 빈정대는 대답은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코쿤을 뒤로 당겨 앉히고 일부러 남자가 있는 쪽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없는 존재인 것처럼 무시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눈길을 쏘아대니 숨을 쉬는 것도 의식이 되어 신경질이 났다.
심지어 코쿤은 호기심 많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하고 남자가 있는 쪽을 겁 많은 초식동물처럼 내다보고 있었다. 지적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아이들 호기심은 나무라는 것만으로는 막기 어려운 법이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구더기는 말을 높였다. 아무리 하찮은 개를 다루는 것처럼 묶어두었더라도 남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티가 났다.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풀릴지 일개 인간이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 이에, 일부러 정중히 말을 높였다.
“난 진짜 집시는 처음 봐.”
메마른 남자의 음성은 이미 다 갈라지고 쉬어 터졌다.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이 물을 달라고 애걸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구더기가 도울 수 없다는 게 유감이었다.
“북부 분이신가 보지요?”
“티가 많이 나?”
“집시를 처음 보신다니까요. 뭐, 억양도… 그렇고요.”
갈라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의 웃음소리에마저도 톡 쏘고 얌체 같은 북부 귀족의 억양이 있었다.
“하하. 집시들은 순 천박한 사기꾼들밖에 없다더니, 다 맞는 소리도 아니었네. 목줄 맨 개새끼한테도 예의를 차려주고….”
“사기꾼밖에 없다는 말,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발끈해서 반론하던 구더기는 사난타에서 남부음식점 주방장으로 일하던 집시 남자에게 된통 당한 일을 상기했다.
“…사기나 협잡을 일삼는 사람이 아예 없다는 건 아니지만요. 사실 그런 이들이야 어디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디든 있지. 네 눈앞에도 있잖아.”
머리카락이 거슬리는지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위로 턱을 치켜들었다. 불그스름한 금발이 뒤로 넘어가며 가냘픈 미소와 등등한 파란 눈이 드러났다. 등 뒤에 숨었던 코쿤이 쪼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난 그렇게 새카만 머리카락을 보면 늘 신기해. 집시들은 다 검은 머린가?”
“대개는요. 남부인들 중에도 검은 머리는 많잖아요.”
“남부인 많이 못 만나보고 자랐어.”
“…고향이 어디신데요?”
대화에 목마른 것처럼 잡다한 이야기를 차분히 늘어놓던 남자는 이 질문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공중을 훑더니, 절그럭대는 소리를 내며 불편한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탈타미오.”
구더기는 머리를 굴렸으나 이 요새와도 같은 도시의 이름을 듣고는 침엽수림과 황량한 들판, 양 떼를 제외하면 연상할 것이 없다시피 했다. 구더기가 종살이를 하던 북서부의 산골마을도 동북부의 탈타미오로부터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무슨 화제를 꺼내 들든 간에 남자의 의미심장한 대답 탓에 구더기는 꺼림칙해졌다. 그래도 남자는 유쾌하게 자꾸만 다른 질문으로 대화를 얼기설기 이어붙였다.
“너도 점 같은 거 볼 수 있나?”
“아, 점이요.”
구더기가 시큰둥하게 손을 허공에 내저었다. 남자를 경계하던 코쿤도 이어지는 대화에 마음이 많이 풀렸는지 몇 발짝씩 그 가까이로 가서 무릎을 세워 앉았다.
“점 보는 거야 집시의 기본 소양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집시 집단이 이른바 ‘천기누설 사업’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매년 얼마나 돈을 긁어모으는지 상상도 못 하실 겁니다. 연말연초에는 수익이 아주 그만이에요.”
“점괘가 잘 맞는지가 중요한 거 아냐?”
붉은 넝쿨 문신이 새겨진 이맛살이 움찔 떨었다. 눈썹 위로 나란히 달린 근육이 바짝 도드라졌다.
“저는 보통 별점을 봅니다만…. 애석하게도 해가 중천이고 하늘이 보이지 않아서 힘들겠습니다. 대신에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보죠.”
“카드나 꽃잎점 같은 거?”
“옥중에서 구할 수 없는 준비물인 거 아시죠.”
그러자 바란이 낄낄대며 웃었다. 용병들이 그에 대해서 어지간히 악독하다고 묘사한 것이 이상했다. 구더기는 볼을 긁적였다. 눈빛에서 어두운 일면이 언뜻 비치기는 해도 귀족들 중에서 이렇게 소탈하고 유쾌한 이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구더기는 나풀대는 치마폭을 손으로 휘둘러 감으며 바란에게 바짝 자리를 옮겨 앉았다. 점을 볼 때 쓰는 도구라고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니 관상과 손금을 통해 점을 봐주겠다고 했다.
“뭐가 궁금하신데요.”
“글쎄. 뭐든 물어볼 수 있는 거야?”
“감옥에서 빠져나갈 방법 같은 건 말씀 못 해드려요.”
“좋아. 하하, 그러면….”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 연애점을 봐줘.”
이상한 얼굴로 그러마 했던 것을 기억한다. 사슬에 묶이고 검 손잡이를 움키느라 그랬는지 빨갛게 쓸려 진물이 일어나는 손바닥을 엎어두고 닳아빠진 손금을 읽으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좋아하는 분이 이미 있으십니까?”
“손금에는 뭐라고 나오는데?”
“흔한 경우가 아닙니다만….”
구더기는 고개를 갸웃대며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온화하게 미소 짓는 남자의 입매를 보며 이 말을 구태여 꺼내도 될는지 가늠했다.
“감정이 목숨을 끊어놓을 운명입니다.”
“아… 무슨 연애점이 그렇담.”
“보통은 이런 식으로 안 나옵니다.”
“순 엉터리야.”
한숨을 내쉬고 난 뒤, 남자의 얼굴은 서서히 피로감에 찌들었다. 빈정이 상한 것은 구더기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눈 밑이 검고 이맛살이 찌푸려진 게 비로소 구더기의 눈에 들었다. 표정을 굳히고 나니 첫인상으로 짐작했던 것보다 나이가 들어 보였다.
“좀 쉴래.”
남자가 말했다. 옥 안에 함께 갇힌 처지에 저렇게 유려한 축객령을 내릴 수 있다니, 구더기는 남자가 아무리 소탈하게 굴더라도 흔히 말하는 깍쟁이 귀족들 성정에서 크게 빗나가지는 않노라고 재평가했다.
* * *
“어떻게 갖게 해주겠단 거예요?”
당돌한 물음이었다.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던 앙살라테 왕자가 비로소 고개를 돌려 간절한 눈빛을 마주했다. 구운 벽돌을 쌓아 만든 벽난로 안에서 잘 마른 장작이 타고 있었다. 어둑한 방구석에 불꽃 그림자가 넘실댔다.
“왜 화가 나 있지, 꼬마?”
“그 꼬마 소리 정말 질색이에요! 제가 아무리 어리고 경험이 없다지만, 저번에 말씀하신 대로 제 손에 탈타미오를 도로 쥐게 해주실 작정이라면 저에게 더 걸맞은 대우를….”
“니카 경이야? 니카 경이구나.”
불평을 잔뜩 쏟아내던 바란이 이를 사리물고 고개를 떨구었다. 침묵은 가장 온건한 긍정이었다. 왕자는 대거리했던 것을 두고 나무라지 않았다. 성마른 소년들이 성급히 핏대를 세우는 것은 유사 이래 언제든 있어왔던 일이다. 일일이 벌해두었다간 다음 세대의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 자식이야 원래 무신경하지.”
“저더러 꼬맹이라잖아요! 내가 분명 열여덟이라고 말했는데, 니카 경이 말로는 알았다고 하면서도 저를 볼 때마다 무슨 강아지 다루듯 하는 거 아세요?”
“알다마다.”
“난 그 사람 동생이 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 그렇겠지.”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면 대체 당신께서 저한테 약속하신 건 어떻게 믿겠어요?”
바란은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낡아빠진 목조바닥이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분에 못 이긴 어깨가 바람이 휘저어놓은 수양버들 가지마냥 을씨년스럽게 떨었다. 수척한 쇄골과 목빗근이 살결 위로 돋을새김을 한 것처럼 도드라졌다. 푸석푸석한 밀짚 색 머리카락이 설레설레 가로젓는 박자에 따라 흔들렸다.
“말씀해주세요. 왕자님께서 명령하신다고 경이 날 사랑하게 되나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임의 족쇄를 다는 것뿐이야. 사실 지도자가 하는 일이라는 게 결국 다 그짝이지. 책임을 분배하고 감독하는 일.”
“그의 마음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껍데기를 갖다 내 옆에 붙여두실 거란 뜻인가요?”
아이의 얼굴에 실망감이 잔뜩 번져나갔다. 투명한 물에 먹물이 번져나가 이윽고 물 전체가 다 새카맣게 물드는 것처럼. 좌절과 절망이 표정을 이루는 작은 근육 하나하나에 고르게 달라붙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원해요! 그가 날 사랑하길 바란다고요!”
“이봐, 꼬마. 벌써부터 결론 낼 거 없다고. 너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어른들에게 있어서 책임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야. 그 명예놀음에 더욱 환장하는 게 누군지 알아? 바로 기사라는 족속들이지. 넌 운이 좋은 편이야. 니카 경은 기사 무리 중에서도 유독 미덕에 대해 엄격하니까.”
앙살라테가 너무도 확신하는 투로 말했기 때문에, 바란은 빈정이 상한 와중에도 솔깃해졌다.
“껍데기라고 낮잡아 말하는 건 다 허물 좋은 헛소리야. 영혼이나 마음 따위는 그릇에 담겨있는 물과 같지. 그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제 발로는 너를 떠나지 못할 거고, 너는 그저 그 상황을 즐기면 돼.”
앙상한 몸으로 가쁜 숨이 드나들었다. 바란은 작은 목소리로 현기증이 난다고 했다. 왕자는 체력을 키우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상할 대로 상한 몸은 쉬이 돌이키기 힘들었다. 바란을 몰아칠 작정은 아니었던 앙살라테가 굳게 낀 팔짱과 교차한 발목을 풀었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앙살라테 드라코슨의 이름에 걸고 합당한 보상을 약속했다, 꼬마. 네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모든 것은 약속했던 대로 이뤄질 거야. 대신 너 역시도 너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해. 그걸 잊지 마.”
“그게 어른의 방식이니까요?”
“그래.”
책임 운운하던 앙살라테는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간자를 수뇌부에 심어 넣겠다는 막중한 계획을 내맡기기에 고작해야 약관도 넘기지 못한 여린 어깨가 너무 좁다랗게 보였기 때문일까. 유감의 고소가 서렸다. 아마 헬린 힐벤의 밑에서 환심을 사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오랜 인고를 필요로 할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던 게 분명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어, 바란 탈타미오.”
앙살라테 드라코슨에 대한 바란의 평가는, 삶 속에서 견주어볼 법한 대조군을 새로이 만날 때마다 변해왔다. 오랜 과정 중에서도 단 한 가지 변함없이 이어져 온 인상은 다음 왕이 되는 게 앙살라테여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비밀을 지켜. 그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돼. 아군과 적군을 가려서 어설프게 머릿속으로 진영을 나눠두지 마. 이 시간부로 너에게는 아군이 없어. 그저 모두가 적이라고 생각해.”
“모두가요?”
“그래, 모두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흘려선 안 돼, 명심해라. 자신을 가치 없게 만들지 마. 네 목숨은 온전히 나에게 맡겨. 나를 믿잖아?”
바란은 당시 이 말에다가 대고 뭐라고 대답했는지 떠올리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앙살라테는 어차피 이런 상황이 닥쳐올 줄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어금니가 굳게 맞물렸다.
살며시 눈을 뜨자 눈꺼풀을 투과해 시야를 온통 다홍색으로 물들이고 있던 오전의 빛살이 눈알로 들이쳤다. 강 인근의 차갑고 습기 찬 바람이 얄팍한 옷가지를 파고들었다. 겨울바람에 몸을 사리는 물새들이 목청 놓아 울었다. 그것 말고도 소란한 소음은 사방에 가득했다.
왕자군은 바란이 이끄는 군대와 부딪혀 승리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손쉬운 대승을 거둔 뒤에 최소인원만을 남기고 잣자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붙잡은 포로들 역시도 모자란 선박과 고깃배에다 틈틈이 배분하여 전부 잣자후로 옮겨두고 있었다. 사난타에 남은 인원이 저 많은 포로를 한번에 감시하기 힘들 것이라 여겨 내려진 결정이었다.
‘양동으로 수도를 공격했다고…. 완전히 이용당했군. 왜 몰랐을까? 기실 니카 건으로 대공은 신뢰를 완전히 잃었던 거야.’
부셨다. 눈을 도로 감았다. 손목을 결박한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주인의 발걸음을 따르는 가축처럼 아무런 반항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럴 기운이 없기도 했다. 사난타에 잔류한 왕자군에게는 적 지휘관 포로에게까지 살뜰히 식사를 챙겨줄 여력이 없었다. 요 며칠간 맑은국에 가까운 수프로 입술에 풀칠이나 했을 따름이었다.
‘잣자후까지 끌려간대도 왕자는 없을 것이다.’
붙잡힌 직후부터 간밤에 투옥되기 이전까지 휴식 없이 이어진 심문에서 바란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영문을 모르고 사난타에서 팽을 당한 처지에 잘난 듯이 누설할 정보가 있을 턱이 없었다. 놀라웠다. 명색이 정보원으로 대공의 수뇌부에 처박힌 몸이었는데.
‘이 새끼 뭐라는 거야?’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데요…. 털어놓게 하라시면 당장 고문관에게 지시하겠습니다.’
‘안 돼. 단장님 말씀이 이 좆같이 반반한 몸뚱어리 어디 하나 해치지 말라셨어. 퉤, 시팔. 이렇게 애새끼 궁둥이처럼 야들야들하게 생긴 놈은 십 분이면 눈물 콧물 질질 짜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아쉽게 됐지.’
바란은 앙살라테 왕자가 미리 경고했던 대로 스스로의 정체를 토로하지 않았다. 대신 욕지거리와 섞여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 자신의 상황을 유추했다.
붙잡혀서 이런 홀대를 받고 있을 때부터 아직 바란이 간자인 것이 들통나지 않았다는 상황만은 명백했다. 믿고 맡기라더니 앙살라테는 사난타를 바삐 떠나던 와중에도, 그의 수하들이 바란의 목숨을 위협하지는 못하도록 최소한의 조치를 취해두고 갔다. 체면은 지킨 셈이었다.
바란의 눈앞으로 손목이 묶이고 말린 생선처럼 바짝 포개어진 귀족 포로들이 도열해 있었다. 겉치장에 끔찍하게도 신경을 쓰는 족속들인데 파티장에서 폭도들에게 붙잡혀 끌려 나온 것처럼 화려한 파티복은 넝마가 되었고, 가느다란 목과 손가락마다 들어찼었을 귀중한 장신구들은 전부 다 약탈당했다.
“잔악후작이다.”
“한심한 패장 같으니라고!”
“신이시여….”
오입질이나 음주가무, 도박에 혈안이 된 도중 들이닥친 왕자군에게 붙잡힌 채로 벌벌 떨던 이 귀족 포로들은 대공이 특별히 파견했다는 바란 탈타미오에게 걸던 기대가 각별했다. 옥중에서 손과 입을 모아 아군의 승전보만을 기원했으나, 끝내 지휘관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부터는 한탄과 저주의 화살이 잔악후작을 향하기 시작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깟 남창에게 이 수많은 목숨을 걸게 만드시다니!”
강 나루에 정박 된 배를 향해 끌려가는 바란의 발치에 가래침이 날아들었다. 바란은 고개를 들어 모욕이 쏘아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풍채가 좋고 며칠간 씻지 못해 땟국이 흐르는 남자였다. 얼굴이 눈에 익었다. 무슨 남작이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지 봐라, 탈타미오 후작! 한심한 패잔병!”
패잔병, 패잔병! 박자를 맞춰 외치는 소리에 동조하는 목소리가 하나둘 달라붙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목소리가 하나의 표어를 외치자 통제자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달려들었다. 포로들을 배 위에 질서정연하게 태우던 엣시아의 용병들이 욕지거리와 명령조를 무기로 꺼내 들고 질서를 지키라고 소리쳤다. 겁먹어 회동그래진 눈동자들이 하나둘 땅바닥으로 가 처박혔다.
일련의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바란은 일정한 박자로 발걸음을 옮기고만 있었다. 간밤에 투옥된 동안 만난 집시가 심심풀이로 봐준 연애점 결과에 대해서 생각했다.
‘감정이 목숨을 끊어놓을 운명입니다.’
그러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집시의 점 같은 미신들을 다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꼭 자신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이 불안한 문장이 그녀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을 때, 바란은 하늘로부터 어떤 선고를 받는 기분이 되었다.
시작할 때부터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어차피 안 될 마음이었다고.
나루터 인근의 자갈길을 밟으면서 생각했다. 바란이 기실 앙살라테의 간자였음이 탄로 난다면 니카의 한결같은 증오는 분명 방향을 바꿀 것이다. 그러면 바란도 거리끼는 것 없이 그를 사랑하던 마음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 고백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날 사랑해주지는 않아.’
그래, 고작 아군의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니카가 바란을 증오하던 이유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니카는 첫째로 왕녀에 대한 끔찍한 사랑의 열병에 빠져있었고, 둘째로는 바란이 여태 쌓아 올린 갖가지 악행을 증오했다. 거기다 얼마 전에 그를 속여서 연인놀이를 하게 만든 수개월에 관해서는 말 그대로 살의를 품고 있을 정도였다. 배가 된통 찢어지면서 그 증오의 깊이는 몸소 체감했다.
살을 에는 바람이 육지에서 수평선을 향해 몰아쳤다. 사실 방향성이랄 게 없는 정도로 어지러이 뒤섞인 바람이었다. 가슴이 그만큼 소란스러워졌다. 무력감이 전신을 지배하며 모든 근육에 힘이 빠지게 만들었다.
왕자군 용병들이 성화를 부렸다. 손찌검이 허용되기만 했더라면 가축을 다루는 것처럼 채찍질을 수십 번도 더 벌였을 기세였다. 하릴없이 신발 뒤축을 질질 끌며 널빤지로 된 발판 위를 지났다. 손이 묶인 채로는 양옆에 팔을 뻗어 균형을 맞추기가 불가능했다. 그저 신중을 기해 천천히 올라타는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지휘관이오. 분리수감하는 게 원칙인데 마땅한 선실이 있겠소?”
“글쎄…. 식재료 창고로 쓰던 곳이 있는데 거기다 처박아두면 그것도 깐에는 분리수감이지 않겠습니까. 가시죠.”
배 위에서 포로의 인원과 수감을 담당하던 왕자군 쪽 담당자가 턱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 문간에다가 자물쇠를 걸어야 할 거라고 고집을 부리기까지 했는데, 바란을 이끌어 오던 용병은 괜히 번거로운 일을 늘리는 게 아니냐고 항변했다. 당장 자물쇠를 조달하려면 가뜩이나 인력이 모자란 틈에 특별히 차출하여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둘 사이에 의견 불일치로 인해서 바란의 발목까지 결박하여 던져두느냐 하는 것으로 두 번째 토의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들이 대화에 심취해서 잠시 감시가 소홀해진 틈이었다. 바란의 뒤에서 속살대는 소리가 들렸다.
“후작님! 탈타미오 후작님!”
돌아보니, 줄지어 갑판 위에서 아래층 선실로 자리를 옮기는 포로의 행렬이 바란의 좌측으로 걷고 있었다. 간절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좀 전부터 바란의 신경을 거스르고 빈축을 보내던 다른 이들의 심정과는 조금 다른 기색을 띠었다. 바란은 머릿속이 복잡하고 허망한 와중에도 궁금증이 들었다.
소년이라고 말하기에는 나이가 많고, 그렇다고 청년이라고 부르기에는 앳된 기색이 있는 남자였다. 허름한 내의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갑옷을 압수당한 기사일 것이다. 포로로 붙잡힌 귀족들은 대개 찢기고 긁히긴 했어도 본질적으로 고급품 의상을 걸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구분이 갔다.
“저 밀렌 아겐호프입니다, 션팟 경 아래에 종자로 있던….”
낯이 익긴 했었다. 션팟 경의 종자였다면 오고 가면서 몇 차례 마주쳤을 법했다. 바란은 납득해서 턱을 당겼다가, 곧 황망하던 전장에 홀로 남아 검을 휘두르던 때에 값싼 동정처럼 날아왔던 충고의 말을 기억해냈다.
‘뭐 하십니까, 후발대는 오지 않습니다!’
명령하지 않았던 퇴각 행렬이 이어지던 중이었다. 말고삐를 쥐고 우왕좌왕하던 바란에게 대고 의아하다는 듯이 외쳤던 이가 있었다. 당시에는 기사인 줄로만 알았다. 투구를 쓰고 있어서 착각했을 것이다.
션팟 경과 함께 퇴각한 줄 알았건만, 성문 바깥으로 뛰쳐나온 왕자군에게 붙잡혀 끝내 항복한 모양이었다. 종자들에게 교육하는 고리타분한 기사도에 입각하면 목숨을 보전하고자 항복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행위였다. 치기 어린 종자들 중에는 이런 윤리성에 목을 매 소중한 목숨을 내던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항복했나?”
“당연히….”
나무랄 생각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부끄러움도 내비치지 않는 반응을 기대한 적도 없었다. 너무도 당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겐호프의 모습에 바란의 눈썹이 살풋 찌푸려졌다.
“당연히?”
“후작님의 계획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뭐?”
“제 쌍둥이 동생도 포로로 잡혀있습니다. 아직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포로 명단에서 확인했으니 분명합니다. 아무튼 저는 그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 후작님의 비밀스러운 임무에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불명예를 감수하고도 일부러 붙잡혀….”
비밀스러운 임무, 계획, 이바지 같은 단어들이 비장한 속삭임으로 흘러나오자 건성으로 귀를 대고 있던 바란의 무표정에 금이 갔다. 주인 앞에서 꼬리를 치는 충실한 개처럼 아겐호프가 굳게 입술을 다물고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다그쳐 물으려던 참에 시시껄렁한 말싸움으로 시간을 끌던 용병과 포로 수감 담당자가 극적인 타협을 봤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렬을 처지게 만들고 있는 바란과 아겐호프의 수상쩍은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었다. 용병이 아겐호프를 향해 위협적인 쉭쉭 소리를 내며 손가락질했다.
“떨어져라, 이 개돼지 같은 것들아!”
그러자 느리게 움직이는 행렬 틈바구니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고 있던 밀렌 아겐호프가 바란에게 뜻 모를 소리를 속삭이며 멀어져갔다.
“잣자후에 도착해서 작전을 개시하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키가 작고 몸집이 왜소했기 때문에, 고개를 아래에 처박고 가는 아겐호프는 다른 귀족들과 비교했을 때도 전연 눈에 튀는 구석이 없었다. 의중을 떠볼 생각이던 바란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도 매서운 압박이 쏟아지고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창고로 쓰였다는 쪽문 너머에 발을 들인 순간에, 바란은 주먹만 한 쥐새끼 한 마리가 우다다 뛰어서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는 간밤의 지하감옥에도 쥐며느리가 여간 많이 기어 다니는 게 아니었다. 더 나빠진 것도 없는 셈이다.
“얌전히 처박혀 있어라.”
“윽!”
있는 거라고는 불결한 쥐새끼뿐인 먼지 구덩이 쪽방에 바란은 거칠게 던져졌다. 무릎이 뒤엉키며 바닥을 굴러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대로 매정하게 문을 닫는 게 아니라 드러누운 바란의 종아리를 오므려 붙잡는 것을 보면 결국 바란의 양 발목을 결박하자는 의견이 극적인 합의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말 하나는 잘 듣는군요.”
“그러게 말이오. 군대를 갖다가 사난타에 처박고 나니 제 주제를 알았나 보지. 지휘관은 염병, 이 새끼 듣자 하니 대공한테 다리나 벌리고 다니던 놈이라더군.”
경멸 섞인 비웃음에 어찌할 바 없는 모멸감이 내달렸다. 비역질과 관련한 농지거리는 대공 본인이 바란의 신경을 들쑤시고 싶을 때 가장 많이 꺼내 드는 카드였다. 익숙해질 법도 했는데 늘 이런 얘기만 들으면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고 귓불이 뜨거워졌다.
“그렇습니까? 과연 낯짝이 꽤 반반합니다.”
“그렇고말고. 힐벤 대공이 이렇다 할 연인이나 첩실도 두지 않고 지내는 것이 실은 다 이놈 구멍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소.”
남 부러울 것 없는 고위귀족으로 태어나 잘생긴 용모로 사교계 아가씨들의 마음을 빼앗고 다니던 바란 탈타미오가 차가운 비극 속으로 내던져진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해야 했던 현실이 바로 이것이었다. 탈타미오의 후계자가 아닌 탈타미오 후작 그 자체로서 섰을 때 바란의 가치는 그깟 몸뚱이로 판단 당하기 일쑤라는 점이었다.
경험도, 도드라진 실력이나 재력 따위가 없는 애송이에 불과한 젊은 후작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매료점은 고작해야 반반한 낯과 뽀얀 엉덩이 정도라는 얘기다. 그 시선을 벗어나려고 온갖 노력을 했고, 닥치는 대로 대공의 명을 따라 공을 세우고 다녔건만 결국은 이런 꼴이다.
저 불명예스러운 소문 한마디면 바란은 그저 전시된 고깃덩어리가 되어 품평과 추잡한 호기심, 동경과 탐욕 등의 갖은 양념에 절여진다.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든 인간들은 바란을 맛볼 수 있는 재화 취급하며 그 값을 부른다. 역겹다. 구역질이 났다.
“허어…. 그것참 궁금합니다.”
“킥킥, 그렇게 궁금하면 못 본 체할 테니 문 닫고 재미 좀 보시든가. 어떻게, 다리는 벌려서 묶어두는 쪽이 더 좋겠소?”
바란은 다리에 힘을 주고 바르작댔다. 피죽도 못 먹은 참에 의미 있는 반항은 나오지 않았다. 다 말라붙은 목소리로 위협했다.
“개자식들… 진짜. 죽여버린다.”
“이 새끼 이거 쫄았네. 찌질하긴.”
어깨를 털며 너털웃음을 지은 용병이 그 죽여버린다는 말을 두려워하느니, 지나가던 고양이 야옹 소리에 호랑이를 만난 줄 알고 고개를 처박는 일이 더 있을 법할 거라고 말했다.
“좀 꼴리는 구석이 있어야 세우든 말든 하지 않겠습니까. 땟국이나 흐르는 사내놈 낯짝으로 재미는 무슨 재미를 봅니까, 예?”
“궁금하다고 했잖소?”
“그쪽이야말로 이놈 구멍에 넣고 싶어서 그럽니까?”
“푸하하. 이리 와서 다리나 한 짝 잡아보쇼.”
바란이 발버둥을 치건 말건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의미 없는 움직임으로 혹사한 넓적다리 근육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용병이 권한대로 포로 담당자가 다가와 바란의 한쪽 다리를 꾹 가슴께까지 눌러 잡자, 그는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복부의 다 아물지 못한 상처가 무지 아렸다. 눈살을 찌푸렸다.
“비역질에는 취미 없지만 말이지, 그 대공 놈이랑 구멍 동서가 된다는 건 꽤 흥미로운 일 아니겠소?”
“윽, 씨발. 놔! 이거 놓으라고!”
“놓기는 뭘 놔? 어린 놈의 새끼가 물려받은 작위 좀 있다고 콧대 세우고 다니더니, 바락바락 악쓰니까 아주 보기 좋구만. 악!”
발등을 한껏 굽혔다가 휘젓듯이 걷어차는 움직임에 용병은 보기 좋게 턱께를 얻어맞았다. 꽤 묵직한 타격감이 왔으니 턱관절이 아찔할 것이다. 바닥에 무력하게 눕혀진 상태에서도 공격성 하나는 무뎌지지 않은 바란이 그들에게 온갖 도발을 날렸다.
“평생토록 돈 안 내고는 욕구를 풀어본 적 없을 게 분명한 원숭이가 주제를 모르는군! 너한테 걸맞은 구멍은 하나뿐이야. 네 배를 찢어 창자를 늘어뜨린 다음, 거기다가 네 손가락만 한 고추를 집어넣어 주마. 그러면 짝이 맞겠지!”
어둠 속에 가려져서 남자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모멸감에 이 가는 소리를 낸 것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대책 없이 불씨를 당겨놓고도 바란은 그저 만족했다. 어차피 꽁꽁 묶인 몸을 내맡기고 있어야 하는 처지라면 곧 죽어도 한 방 먹이고 싶었다.
“하하…. 그러면 앞으로 느낄지 후장으로 느낄지 궁금하군.”
빌빌대며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것은 그 헬린 힐벤으로 족했다. 이깟 잔챙이들을 상대로 그에게 오랜 불면을 선사해 온 무력감을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것은 사양이었다. 바란은 니카가 얼굴을 얻어맞고 층계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동안 입술만 짓씹어야 하던 순간들을 회상했다.
그러자 이 대책 없는 반항이 더욱 정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란이 잃을 게 무엇인가. 고작해야 몸뚱이 아닌가. 겁간을 당하든 발길질을 당하든 똑같다. 바란은 생각했다. 그런 폭력 따위로는 그를 부술 수 없다.
얼굴이 파리해진 담당자가 주먹을 움킨 채 바란을 노려보고 있는 용병의 귓가에 속삭였다.
“웩, 세상에. 잔악후작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건 아닌가 봅니다. 상상력도 저 정도면 무서운 수준 아닙니까?”
“좀 닥치시오. 아직도 잘난 줄 알고 입 놀리는데 부채질을 해주면 어쩌자는 거요?”
“그럼 어쩌시려고요?”
“버릇을 고쳐놔야지.”
바란은 하얗게 말라붙은 입술을 깨물었다. 물기가 없으니 찢어지는 것도 금방이다. 저번에 딱지가 앉은 자리가 다시 터졌는지 신선한 피 맛이 났다.
태연을 가장했으나 몸이 떨고 있었다. 삐걱대는 낡은 바닥을 밟고 다가서는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두개골 안쪽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쿵. 쿵. 쿵.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공간이 협소해서 금방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바란은 들끓는 눈으로 용병을 쏘아보았다.
“나는 앙살라테의 포로다! 손끝 하나 상하게 하지 말라는 소리 못 들었나?”
“들었고말굽쇼, 후작 나리.”
“들었으면? 군법으로 목 떨어질 배짱 없으면 썩 꺼지-”
“그런데 내가 맛을 좀 본다고 어디 상하는 것도 아니잖소.”
눈앞이 팽글 돌았다. 바란은 결박된 손목을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잡아당겼다. 손목에 새빨갛게 쓸린 상처가 났다. 그 위를 용병의 두터운 손이 덮었다. 기온이 차니 뜨거운 타인의 체온은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안 그래?”
“머엉, 청한, 놈.”
어떻게 몸을 꿈틀대도 용병의 손길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온갖 불결한 벌레들이 떼를 지어 온몸을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양 무릎이 접혀서 눌렸다. 먼지투성이 벽에 눌려 꺾인 무릎이 아렸다. 질끈 눈을 감았다가, 냄새나는 날숨이 얼굴로 쏟아지고 커다란 몸뚱이의 열기가 느껴지자 분을 못 견디고 다시 눈을 떴다. 새카만 턱수염이 돋친 턱께를 노려보았다. 찌든 내에 구역질이 올랐다.
“으, 흑, 우욱….”
“우는 소리 내니까 좀 꼴리는군.”
“꺼져, 저리… 치워!”
용병의 면전에 침을 뱉으니 머리꼭지가 홱 돌아서 바란의 목을 움켜쥐고 서서히 조여들기 시작했다. 숨을 빼앗긴 입술에서 꺽꺽대며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두터운 손가락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허리춤의 매듭을 끄르는 것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틀었으나 자칫 돕는 꼴이 될까 두려워 배꼽에 바짝 힘을 주었다.
“지금 그 안에서.”
눈앞이 아뜩하고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한 참이었다. 누군가 쪽문을 열어젖히면서 어둑하고 그늘진 창고 안에 빛살을 뿌렸다. 확장된 동공이 일시에 좁혀들며 눈이 부셔 도무지 눈꺼풀을 열고 있기 힘든 지경이 됐다. 바란은 눈물이 찔끔 묻어난 눈 주위에 팔뚝을 들어 눌렀다. 목을 비틀던 용병의 손아귀가 비로소 놓였다.
“콜록! 콜록!”
“뭘 하고 있는 거지?”
숨길이 트여 한 번에 공기를 들이킨다는 것이 급체한 듯 목구멍이 꺼끌거렸다. 바란은 황급히 문 바깥에 정신이 팔린 용병의 뱃가죽을 걷어차 뒤로 밀어냈다.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용병이 몸을 사리며 뒤로 물러났다. 용병의 커다란 덩치가 비켜나며 바란에게 드리운 그늘이 걷혔다. 햇살과 겨울바람이 들이쳤다.
젖먹던 힘까지 내어 용병을 떨구어낸 것이 탈력감을 불렀다. 바란의 어깨가 아래로 떨어지고, 벽에 어설프게 기대고 있던 몸이 점차 무너져 내려갔다. 바란은 눈꺼풀의 무게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턱을 치들고 묶인 손을 들어 흉한 손자국이 남았을 것이 뻔한 목덜미를 더듬었다.
정갈한 발소리가 꽉 틀어막힌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란은 상대의 반듯한 걸음걸이와 반사광을 하얀 테두리처럼 두른 신발코를 훔쳐보며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렇게 걷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꼭 이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도 알았다. 가슴 속에서 소란스러운 기대감이 부푼다. 감격에 들떠 불현듯 짧은 숨을 베어 물었다. 힘 빠진 몸에 공기의 압력을 넣어서라도 일으켜보려고 움틀댔다. 미약한 몸은 몇 번이고 무너졌다. 흐트러진 옷섶 사이로 찬 공기가 드나들어 절로 무릎이 붙고 움츠러들었다.
돌연 침묵에 잠긴 남자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바란도 그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꺼내 들기에는 그 이름이 얼마나 애달픈지. 너무도 무겁고, 입술 틈으로 새어나가면 다시는 머릿속에 가둘 수 없을 만큼이나 귀하고, 원망스럽고, 이름을 이루는 철자의 굴곡마다 뾰족이 가시가 돋친 것처럼 따끔거려서, 바란은 그냥 조용히 그 모든 감정을 삼켰다.
어떤 종류의 환희는 침묵 속에서도 완성된다. 바란은 잔잔히 눈을 접고 웃었다. 그러면 바란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도 부른 것이었다.
나의 니카, 하고.
* * *
정신이 들었을 때 니카는 이미 그 난장판을 가르고 뛰어들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더러운, 놈들, 더러운…!”
“흐억!”
뜨거운 숨결이 찬 공기와 만나 하얀 김을 올렸다. 니카는 날갯죽지를 들썩였다. 그는 마치 돌풍이 드나드는 텅 빈 통로와도 같았다. 시끄럽게 들이친 바람이 매끈한 벽면에 부딪혀 견딜 수 없는 소음을 자아내는 것처럼, 몸과 마음은 전부 다 속이 빈 껍데기처럼 느껴졌으며 머릿속이 갖은 아우성으로 요란했다.
추위로 언 손등에 새빨간 색채가 더해졌다. 손가락 마디뼈마다 핏자국이 묻은 까닭이었다.
발아래 엎드린 남자는 규격에 맞지 않는 가죽옷에 얼기설기 왕자군의 문장을 꿰매어 달았다. 엣시아 용병이리라 생각했다. 발끝으로 엎어진 몸을 뒤집으니 엉망으로 뭉개진 얼굴 가운데 두 눈이 살아서 끔뻑끔뻑했다. 낯이 익었다. 니카가 정체를 밝혔을 때 시험을 해보겠답시고 달려들어 도끼를 휘두르던 놈이었다. 지금은 신음소리나 내며 바닥에 박혀있다.
좀 전부터 들짐승이 가르릉대는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싶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그의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니카는 멈칫 자신의 목젖을 손으로 꾹 눌렀다. 마른침을 삼키자 손에 닿은 볼록한 목젖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아랫놈들 관리 좀 잘 해야겠어.”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니카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쓰러진 용병의 손목을 밟고 휘청였다. 그가 움직이는 대로 벽에 기대어 앉은 잔악후작의 몸뚱이에 드리우는 그림자가 모양을 바꿨다.
“안 그래? 용인.”
잔악후작은 얄팍한 옷가지의 바느질선이 다 뜯어져 맨 가슴이 반쯤 드러나고 사타구니의 여밈이 풀려있었다. 니카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입가를 틀어막았다.
포로의 운명이란 자명한 것이다. 붙잡혀 고초를 겪을 것은 진작 알았다. 다만 일개 개인의 상상력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니카는 결단코 이런 상황까지 치닫게 될 가능성은 염두에 둔 적 없었다. 더군다나 위로부터 해를 가하지 않도록 엄격한 명령이 떨어져 있었으니 무사하리라고만 여겼다. 미움 산 구석이 있다면 주먹이나 몇 차례 받아냈겠거니 했다.
“왜 그렇게 봐?”
오랜 시간 이어진 내전 속에서 자신의 욕정 하나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놈들은 꽤나 보았다. 니카는 낡은 쪽문을 열고 들어와 얽힌 채 공중에서 버둥거리는 다리 한 쌍을 보았을 때 속으로 골치 아픈 한숨을 머금었을 뿐이었다. 호통을 쳐 내보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밭은 숨을 내쉬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에는 시큰둥하고 시들하던 생각이 단번에 마음 밖으로 흩어져나가 사라졌다. 고통과 경악과 분노가 그를 온전히 지배했다. 낭패감에 젖어 흘끗 뒤를 돌아보는 용병의 얼굴에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고는 지금껏 일방적인 구타를 이었다. 곁에서 거드는 것처럼 서 있던 또 다른 왕자군의 병사는 진작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니카의 발아래로 혼절해서 시체처럼 널브러진 용병의 몸뚱이가 밟혔다. 그는 아랑곳없이 힘 빠진 사지를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잔악후작만을 멀거니 응시했다. 고작해야 한 치 앞에 앉은 사람인데, 그에게 이르기까지가 아주 먼 여정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후작의 앞에 섰을 때였다.
새파란 눈동자가 표독스럽게 따라붙었다.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해서 답답한 숨을 터뜨렸는데, 니카는 그제야 줄곧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고 깨달았다. 이맛살을 찌푸린 후작이 일갈했다.
“보지 마.”
잔악후작의 위명에 비하자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후작은 기다란 다리 두 짝이 천근만근이나 되는 것처럼 느릿하게 끌어모았다. 웅크린 것이 꼭 겁먹은 어린 짐승 같다.
“보지 말래도.”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못들은 셈 치면 이 말은 꼭 기억을 잃은 니카에게 상냥하게 굴던 시절의 바란과 비슷하게 들렸다. 니카는 합리화만으로는 더 이상 부정하기 어려운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스스로 상처받았다.
후작은 니카를 보고 무슨 원수를 만난 것처럼 좀체 진정하지 못하고 날뛰었다. 그는 맥없이 흐물거리기는 했으나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으로 거부의 의미만큼은 정확히 전달했다. 망설이던 니카는 다리를 바닥에 대고 앉아 팔을 뻗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바란의 몸이 주춤했다.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 당장 이빨이라도 세워 니카를 물어뜯으려는 것 같았다.
“뭐 하자는 거야? 저 새끼 다음엔 너야?”
이 말은 니카를 들쑤셔 놓았다. 여태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견디며 꿋꿋이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버티기 힘든 지경이 왔다.
“닥쳐. 나는 저런 쓰레기가 아니야.”
“왜 이래, 기억 안 나는 것처럼? 날 보고 발정하는 건 너도 매한가지면서.”
“성가시게 하지 마.”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뻗어 나간 니카의 손이 헤집어진 후작의 옷섶을 모으고 풀린 매듭을 묶었다. 후작은 웅크리고 앉아서 니카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화들짝 놀라서 몸을 경련하다시피 했다. 겁간당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구해진 형편이니 맨살이 닿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겠지…. 불덩어리를 삼킨 것 같았다.
바지춤을 정리하는 와중에 후작은 자꾸만 움찔대며 허공에 허리를 들었다. 니카는 이상야릇한 죄악감에 휩싸인다. 들춰진 튜닉 아래로 더러운 붕대가 감겨있었다. 어떤 상처가 나 있기 때문인지 잘 알고 있다. 니카는 눈살을 찌푸리고 아닌 척 상처를 가늠했다.
투박하기만 하던 움직임은 후작이 쪼그라들어갈수록 조금씩 누그러졌다. 소매의 구김살까지 펴놓으려던 니카의 울퉁불퉁한 손가락이 불현듯 후작의 손목 살갗을 온통 조이고 쓸어놓은 밧줄에 닿았다. 섬유질로 된 밧줄 표면에 붉은 피와 진물 자국이 남았다. 니카의 손가락은 두껍고 둥근 매듭 위에서 그네를 타듯 잠시 맴돌았다.
“왜 안타까워하는 건데?”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니카는 펄쩍 뛰듯이 놀라 떨어져 나갔다. 귀가 온통 뜨거웠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귓불을 매만졌다. 귓등을 부담스럽게 달아오르게 만든 주범인 후작의 지긋한 시선이 니카의 낯으로부터 손으로 감싼 귀까지 움직였다. 적잖이 당황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부지불식 간에 튀어나온 존대어에 당황한 것은 니카뿐만이 아니었다. 후작이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존댓말은 왜 하는 거고?”
“…….”
니카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말고 소맷귀를 잡아당기는 힘을 느꼈다. 니카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쉽게 떨쳐낼 수 있는 미약한 힘이었다.
바란 탈타미오의 애정은 전부 거짓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마음에 되새겼다. 흉하게 얽은 얼굴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올곧이 올려다보는 잔악후작을 보면서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넋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는 이토록 끊임없이 발버둥을 쳐야만 했다. 후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가 하는 말을 다 들었다간 또 그 간악한 술수에 놀아나서 진실을 보는 눈이 흐려질까 두려웠다. 입을 뻐끔대는 모양을 보면서도 얼른 그 손을 뿌리치고 물러났다. 허공에 뜬 손을 허망하게 거두며 잔악후작이 맥없이 입을 다물었다. 니카가 문밖으로 쓰러진 용병과 다른 병사를 끌어다 내놓은 뒤에 단호하게 쪽문을 거세게 닫아 자취를 감출 때까지, 후작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새파란 시선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문을 닫으면서 회색빛이 도는 겨울의 햇살이 점점 더 가느다란 직사각형으로 좁혀들며 후작의 몸 위로 늘어졌다. 이 광경이 니카의 뇌리에 아주 오래토록 남았다.
“니카 경. 이 자들은….”
“군법을 어겼으니 잣자후에 도착해 처벌하겠다. 포박해둬라.”
“경, 곧 출항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됐다. 여기에 있겠다.”
파랗게 질린 니카의 입술을 본 병사 하나가 걱정스레 말했다.
“갑판에 계시면 강바람이 아주 찰 텐데요.”
니카는 그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관여하지 말라는 의미로 사실상의 축객령이었다. 그러면 계급상에서 밀리는 병사 입장에서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다. 못마땅하게 구겨진 이맛살을 보면 혼혈인에게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처지가 그 딴에는 꽤 모욕적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병사를 물렸다.
잔악후작을 가둔 먼지투성이 쪽문 앞에 꼿꼿이 섰다. 출항을 위해 소란스러운 작은 배의 갑판 위에 이물질처럼 멈추어 서 있는 것은 니카가 유일했다.
* * *
지독한 멀미였다.
유속이 빠르고 강폭이 좁은 지점을 지나는 동안 배는 엉망진창으로 흔들렸다. 등을 벽에 기대고 배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목재가 짜맞춰진 틈바구니로부터 차가운 바깥공기가 새어 들어와 애써 가다듬은 옷맵시를 다시 펄럭이며 구겼다.
구토감이 목구멍 안에서 맴돌다가 뱃속으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는 산맥과 침엽수림을 끼고 있는 북부의 황량한 탈타미오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해안과 강변과 같은 물가를 늘 동경해왔다. 어지러운 시국에 고집을 부려가며 바다가 보고 싶노라고 억지를 부렸던 이유가 다 거기에 있었다.
바란은 어릴 적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 다르탈루 강을 건넜던 기나긴 여정을 떠올렸다. 동서에 걸쳐 있는 거인의 돌다리를 지나면 좋았을 일을 고집을 피워 처음으로 탔던 돛단배에 대한 기억에는 좋은 부분이 잘 없었다. 바란은 그 어릴 적부터도 뱃멀미가 무척 심했다. 신선한 공기를 쐬고 싶다면서 갑판에 나가 발을 헛디뎌 구르고 토악질을 하고 그랬다.
키가 훌쩍 자란 지금도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바란은 딱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선실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좁은 방 안을 뱃가죽으로 기었다.
“흐, 좆같은… 배.”
그러는 동안 존댓말을 하고 딱 혀를 깨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니카와, 그가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던 일이나, 주제를 모르는 용병이 자신을 힘으로 억압해 범하려고 했던 장면들이 어지럽게 섞여서 뇌리를 떠다녔다. 중간중간에 눈앞이 노래지면서 멀건 위액이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배가 끝내 멈추긴 했다. 바닥에 귀를 대고 있으면 왕자군의 소란한 발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흔들림이 잦아지고 이제는 배가 더 이상의 움직임 없이 물결을 따라 상하운동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좀 나아지자 바짝 힘이 들어가 수축하고 있던 전신의 근육이 서서히 늘어지면서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바란을 바깥의 세계와 막아두고 있던 쪽문이 열리고 두 명이나 되는 왕자군 병사가 들어와 바란을 끌고 나갔다. 한 명만 있어도 기운이 다한 바란을 제압하기는 충분할 텐데.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해가 떴을 때 출발했는데, 이제는 어느새 저물녘이다. 겨울이라 해가 짧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싶었다. 갑판 위는 이미 텅 비어있었다. 좀 전부터 소란스러웠던 것은 바란을 제외한 다른 대공파 귀족 포로들을 먼저 배 아래로 내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여기가…. 잣자후?’
비틀대며 걷는 걸음걸이를 보며 병사들은 곤혹스러워했다. 이윽고 바란의 양어깨를 붙잡고 이끌어 가기 시작했는데, 사실상 끌고 간다는 단어보다는 부축한다는 말이 더 맞았다. 목재로 이뤄진 바닥의 균일한 무늬가 이상하게도 구불대는 것처럼 보였다. 멀미가 남긴 여파가 생각보다 컸다.
바란은 갑판 너머의 거대한 나루터와 그 뒤로 이어진 광활한 대지, 눈 내린 흔적이 남아 있는 산등성이가 겹겹이 쌓여 이루어낸 한 폭의 그림 같은 경관을 감상했다. 잠시 상황을 망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잣자후의 성에 붉은 저녁놀이 물을 들이고 있었다.
양옆에서 어깨뼈가 아릿할 정도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바란은 감상에서 끌려 나왔다.
* * *
니카는 균형을 잡기도 힘들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는 풍랑 속에서 잔악후작이 수감된 선실 앞을 줄곧 지켰다.
지휘관급 포로였다. 누군가는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모자란 인력들 중에서 일을 맡길 만한 이가 고작해야 후작을 겁탈할 생각이나 하는 저 쓰레기 같은 용병 놈 수준이라면, 차라리 자신이 지키고 있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 니카의 생각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주로 잔악후작과 관련된 생각들이었다. 무슨 꼴을 당하든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속으로 못을 박았다. 그러나 잣자후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이나 그 널빤지와 다름없는 문을 열어젖히고 바란의 생사를 다시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니카는 더 이상 잔악후작과 서로 사랑의 마음을 나눈다든가 하는 그린듯한 환상에 빠져있지 않았다. 이 관계와 감정을 송두리째 뽑아다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을 극적인 진실의 존재를 믿고 있지도 않았다. 사랑도, 기대감도, 유약함도 그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현실의 비바람에 모든 감정이 전부 씻겨나갔으나 점성을 가진 찌꺼기만 여기 남아서 그와 후작 사이에 들러붙어 있다. 거미줄처럼 진득하게 늘어진 앙금, 청산하지 못했고, 영영 청산하지 못할 것. 니카는 그것을 미련이라고 불렀다. 곤충이 되지 못하고 번데기인 채로 죽어버린 감정, 그런 것. 니카를 영원히 고통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
그러나 지나치게 골몰할 필요 없다. 이러한 잡념과 미련 역시도 곧 사라지고 말리라. 뱃머리 방향에서 번화한 도시 잣자후와 유적을 품은 육지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수리 왕녀와의 만남이 코앞이었다.
니카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왕녀가 자신을 뒤로하고 멀어져가던 뒷모습을 회상했다. 먼지구름은 길고 굽실대는 왕녀의 머리채를 삼켜버릴 것처럼 피어올랐다. 수리 왕녀 본인은 드라코슨의 혈통을 증명하지 못하는 빨간 머리를 자신의 약점으로 여겼지만, 머리칼로 뒤덮인 왕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을 예로부터 니카는 썩 좋아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자기 자신에게 위안을 주려면 주어진 정보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니카는 왕녀를 비롯한 일행을 앞서 보내고 열다섯 기사들을 혈혈단신으로 상대하는 동안 수리 왕녀가 그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환상을 통해 동기를 부여했다.
‘왕녀님….’
사지로부터 살아 돌아온 그녀의 기사를 마주치는 순간, 왕녀는 뭐라고 말할까? 니카는 왕녀의 눈물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지. 왕녀는 결혼식 날 밤 부마를 잃은 후 수없이 오랜 세월을 눈물에 젖어 보냈다. 그녀의 눈물을 보기만 하면 니카는 자신의 생명을 짜서 만든 정수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기진맥진한 고통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그는 왕녀의 우는 모습을 단 한 순간이라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리도 이율배반적인 욕심이 들다니.
‘나를 위한 눈물을 보고 싶어.’
충심으로 가득찬 이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나오다니.
육지가 가까웠다. 잽싸게 달려 나온 선원과 병사들이 위아래로 밧줄 따위의 비품을 주고받으며 배를 정박시켰다. 고함소리에 귀가 다 먹먹했다. 니카는 갑판의 난간에 매달려 상반신을 내밀었다. 거센 바람에 뺨이 발갛게 얼고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니카는 나루터에 도열한 기사들 정중앙에서 불꽃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는 그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상이 조금씩 커졌다.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오는 군대를 환영하기 위한 우렁찬 북소리가 울렸다.
얼핏 훑어봐도 잣자후에 주둔하고 있던 왕자군은 그 수가 크게 줄었다. 보통 수리 왕녀가 마중을 나온다 하면 의장을 갖춘 기사들을 지금의 세 배는 더 데리고 있어야 맞았다. 강을 건넌 앙살라테가 잣자후에서 차출된 병사들과 합류해 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고 들었다. 사활이 걸린 전투이니만큼 전력투구로 부딪치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선실에 켜켜이 화물처럼 놓였던 귀족 포로들이 줄줄이 널빤지 발판을 타고 먼저 하선했다. 귀족으로서 최고의 영화를 누리고 있던 이들이 죄수와 전혀 다른 바 없는 몰골이 되어 비뚤어진 사각형 모양으로 줄지어 섰다.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얼마나.’
성급히 배에서 뛰어내리지 않기 위해 니카는 다리 근육을 단단히 긴장시킨 채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왕녀와 니카 사이의 거리는 오랜 여정 동안 아주 무한하게 느껴졌었다. 조금씩 가까워진다는 실감만을 가지고 버텨왔던 가운데, 니카는 드디어 도착지에 다다랐다. 드디어.
다른 기사가 다가와 포로들을 전부 다 하선시켰으니 이제는 바란 탈타미오를 호송하겠다고 알렸다. 이제 더 이상 이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을 필요가 없단 얘기였다. 니카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나 주었다.
끈적한 습기가 머리채를 헤집어 놓아 머리 모양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니카는 손빗으로 머리카락을 슬그머니 빗어내렸다. 정갈한 발걸음이 경쾌하게 얼어붙은 지면을 찼다.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과 힘이 들어간 등이나 배 때문에 자세가 뻣뻣했다.
거리가 점차 가까워 오고, 니카는 수리 왕녀가 입은 옷가지의 모양이나 무늬 따위에 깊숙이 몰입하기 시작했다. 넋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 태연히 걷고 있는 니카의 이마로부터 아주 기다랗게 빠져나온 넋이 벌써부터 왕녀의 발치에 부복하고 고결한 옷자락과 손등에 경애의 입맞춤을 바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리라.
목전에 그녀가 서 있었다. 특유의 서글픈 분위기와 드라코슨의 위풍당당함을 어깨에 얹고, 우편에는 니카가 여태 만나본 적 없는 노파를 거느리고 있었다. 니카가 아는 바 지금처럼 두 갈래로 머리를 굵게 땋는 것은 왕녀가 아주 기분이 좋은 날에나 치르는 그녀만의 의식이었다.
“왕녀님.”
니카가 볼품없이 떠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을 때, 왕녀는 의중을 꿰뚫어 볼 수 없는 알쏭달쏭한 표정이었다. 그린듯한 붉은 입술과 오밀조밀한 콧방울, 분칠로도 곧잘 감출 수 없는, 침착되어 거뭇거뭇한 눈두덩…. 정말이었다. 전부 다 상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예법에 따라 무릎을 굽혀 절하면서도 조마조마한 눈초리가 바닥으로 좀처럼 굽어지지 못하고 왕녀의 낯 위를 맴돌았다.
“일어나요, 경.”
주춤한 자세를 버리고 얼른 반듯이 일어났다. 아주 많은 갈래길이 뇌리에 펼쳐졌다. 맨 처음 왕녀가 보일 반응으로는 치하의 말이 가장 유력했다.
니카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왕녀가 부마의 죽음에 대해서 취하는 절절한 태도를 무한히 잘라낸 것의 한 조각만큼이라도 좋으니 감정을 내비쳐줬으면 했다.
이 기대감을 전혀 일어나지 않을 기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씁쓸히 덮어두려던 니카에게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어색하고 꼿꼿하게 서 있는 니카의 한 손을 왕녀가 붙잡아 끌어당겼다. 강력한 토룡혼혈인인 니카는 실바람에도 자리를 옮기는 하늘하늘한 비단 손수건처럼 끌려가 왕녀의 품에 안겼다.
“경이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어. 선물을 받은 기분이에요.”
길 잃은 손이 공중에 떴다. 니카가 워낙 훌쩍 키가 큰 편이었으므로 나란히 서면 수리 왕녀는 그의 가슴께에 미치는 정도였다. 짧은 포옹이 이어지는 동안 니카의 코에 수리 왕녀가 즐겨 찾는 화장수에서 나는 묵직한 장미 향이 풍겼다. 니카는 이 향기를 속으로 ‘집 냄새’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슴의 먹먹한 응어리가 풀어지는 내음이다.
니카는 장미 향기 사이에 슬그머니 숨어 있는 낯선 향기를 발견하고 멈칫 콧잔등을 찡그렸다. 톡 쏘는 데가 있고, 이름은 알 길 없는 허브 향이었다. 일국의 왕족에게서 맡기에는 지나치게 투박하고 토속적으로 느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왕녀는 원래 미용과 심신안정을 위해 온갖 약초를 달고 살았다. 지금 이 순간에, 사랑하는 여인의 보드라운 팔이 니카의 몸을 안고 있는 참에 그깟 허브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고생했어요.”
그 한마디와 함께 포상처럼 느껴지던 해후의 포옹이 막을 내렸다. 떨떠름한 감정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하고 눈썹을 떨어뜨렸다.
너무 짧다. 너무 짧았다. 이게 다인가? 니카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게 다라고? 불경스러운 생각이 자꾸만 그를 괴롭혔다. 가장 괴로운 것은 이 욕심 가득한 생각에 그럴싸한 반박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분수를 알고 감사해야 하는데.’
아무리 자신을 훈계하고 애를 써도 가슴 저린 실망감만이 니카를 사로잡았다. 고작 이것을 위해 이 머나먼 길을 달리고 멸시를 당하며 강을 건넜느냐 하는 절절한 의문이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쳤다.
왕녀의 시야에서 이미 니카는 떨구어졌다. 어깨너머 먼 곳으로 향한 시선을 뒤쫓으니 잔악후작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니카의 어금니가 서로 아득 맞붙었다.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이를 대라면 단연 가장 처음으로 꼽을 것이 저 탈타미오 후작이었다.
만일 이 주제를 모르는 열망의 이유가 저 남자라면 어쩌지? 후작과 함께 보낸 시간이 니카를 조금이라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라면?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두려움의 조각이 와르르 기포를 올리며 들끓었다. 한번 생각해내면 주체할 수 없다. 계속해서 끓어오를 뿐이다.
후작과 벌인 소꿉놀이가 너무도 달콤해서 왕녀님이 베풀어주신 포옹을 그깟 촌극에다 견주고 폄훼하느라고 감격하지 못한 게 아닌가? 더 이상 절실하지 않으니까?
일거수일투족에 벌벌 떠는 외사랑이 얼마나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인지 알아버렸으니까…?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간사해질 수 있을까.
“탈타미오 후작을 포로로 잡았다는 게 정말이었군요….”
자연스럽게 왕녀는 한 손을 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니카는 조심스럽게 왕녀의 팔꿈치를 가볍게 붙잡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불안증이 도지면 왕녀는 손톱을 다 물어뜯어 놓는 버릇이 있었다.
“알았어요. 놔줘요.”
“…….”
울퉁불퉁한 손가락이 꾸물대며 주먹을 쥐었다. 이내 니카는 손을 넓적다리 옆으로 늘어뜨려 갈무리했다.
“다치지 않게 하라는 앙살라테 전하의 명령입니다. 이유는 따로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아주 엄격히 지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왕녀는 심드렁히 콧소리를 냈다. 예쁜 구두에 둥글게 굽어서 들어간 작달막한 발등이 앞으로 종종걸음을 걸었다. 무용수가 무대 위에서 춤사위를 보이는 것 같이 우아했다. 이 걸음을 익히기 위해서 수리는 가정교사를 세 번, 회초리를 열두 번 바꾸었다.
니카는 버릇처럼 왕녀의 오른편으로 가서 서고자 했으나 이미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노파 때문에 하릴없이 왼편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상한 위화감을 달고 있는 노파로부터 좀 전에 맡았던 것과 꼭 같은 허브 향기가 났다. 노파는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를 바짝 당겨서 입었기 때문에 눈께까지는 음영이 져서 생김새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쭈글쭈글한 살갗에 넝쿨 문신이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집시인가.’
그러고 보면 앙살라테를 다시 만났던 때에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수리가 잣자후에 남은 지금, 곁을 지키는 이들 중에 집시 샤먼 출신의 인사도 있다고 했다. 니카가 없는 요 수개월 사이에 측근으로 들였다고 했으니, 그러면 당장 누군지 알아차릴 수 없었던 점도 이해가 갔다.
니카는 왕녀의 최측근 호위기사로서 그녀가 일상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모든 인물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니카의 정보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주변인이 등장했다.
가느다란 눈초리 사이로 새까만 눈동자가 번득였다. 새로움이란 다르게 읽으면 위험을 뜻했다. 안 그래도 집시들은 출신과 생업을 이어가는 방법 등이 수수께끼에 싸인 의문의 종족이었다. 니카는 마땅히 눈앞의 집시 노파가 누군지 알 권리가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시선을 노파가 먼저 알아차렸다. 뺨을 뚫을 지경이었다. 눈치채지 못하는 편이 이상했다.
깊숙이 내려쓴 후드에 가려 도통 보이지 않던 노파의 신비로운 회색 눈동자가 니카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을리고 주름진 피부에는 검버섯이 폈다. 본래 니카처럼 검었을 머리카락은 뿌리까지 세월에 흔들려 회색으로 바랬다. 나뭇결처럼 위아래로 주름이 졌으나 흉한 구석이 없는 노파의 입술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니카는 왕녀의 곁에 서서 많은 도시를 돌아다녔다. 자연히 아주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보통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왕녀에게나 관심이 있고, 그녀를 호위하는 니카의 존재는 길가의 돌멩이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첫인사에서 이렇게 상투적인 인사말 하나를 건네받는 건 드물다 못해 처음 겪는 일이었다.
“경에 관해 아주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파는 짧게 묵례했다. 묶이지 못한 잔머리가 아래로 흘러 후드 바깥에 비어져 나왔다. 공손하고 진솔한 인사를 받고 속없이 기쁨에 잠기기에 니카는 너무 의심이 많았다. 께름한 심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곁눈질했다.
“막쉬롭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보시다시피 집시이지요.”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니카는 그녀에게 구태여 자신이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다고 다른 이야기를 끌어올 정도로 말솜씨나 넉살이 좋지 않았다. 막쉬롭이 가만 입을 다물고 나니 둘 사이 대화의 물길도 함께 틀어막혔다.
구름 위를 딛는 것처럼 사뿐한 걸음을 옮기던 수리는 초라한 행색을 하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 귀족 포로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때와 악취에 찌들긴 했더라도 고급 직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이토록 값비싼 차림을 한 귀족들 가운데 서 있는 꾀죄죄한 집시 하나가 도드라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수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려 포로들 틈을 면밀히 살폈다.
“저건 누구죠?”
막쉬롭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느라고 주의가 산만해진 니카는 왕녀의 질문을 뒤늦게 되씹었다. 그리고 그녀의 구둣발이 멈춰선 곳을 보았는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존재가 생각지도 못하게 튀어나오는 바람에 목소리를 내어 “아.” 하는 탄식을 했다.
왕녀가 친히 손짓해 가리킨 저 집시는 치마폭 뒤로 그녀의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어린애를 감추고 있었다. 원래 어떤 색이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치렁치렁한 치마는 여기저기 얼룩이 져서 손걸레를 길게 늘여놓은 것처럼 보였다. 알록달록한 두건과 검은 피부, 검고 곱실대는 머리카락. 그래, 구더기였다. 뒤에 데리고 있는 것은 코쿤이겠지.
‘왜 여기에 있지?’
니카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저 둘은 한 눈에 보기에도 귀족이 아닌데 어찌 붙잡혀서 포로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니카가 왕자군의 기습 소식을 알고 너무도 흥분하여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뒤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구더기는 왕녀의 뒤편에 선 니카를 단박에 알아보고도 그저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킬 뿐 좀체 앞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구더기와 코쿤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원래 같았으면 니카는 그들을 데리고 잣자후까지 데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정 동안에 코쿤이 니카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쭈뼛댔는가 생각해본다면, 니카가 그들을 자유로이 놓아준다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닐 거라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니카는 더 이상 그들에게서 용인기사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갈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대체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니카는 부릅뜬 눈으로 구더기에게 신호를 보냈다. 구더기의 검은 눈이 팽글 돌아 니카가 아니라 왕녀와 그 옆의 노파까지 훑고는 무력하게 뚝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집시입니다, 왕녀님.”
니카가 씹어 뱉듯이 대답했다.
“그건 외관만 봐도 알아요. 내 말은 왜 저기에, 대공파 귀족 포로들 틈에 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왕녀가 왼손을 뾰족하게 들어 올리고 니카 쪽으로 살짝 돌아섰다. 아는 게 있다면 말해보라는 뜻이다. 애석하게도 니카 역시 아는 바가 없다. 왕녀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 배에 포로를 싣는 동안 관여했던 모든 관계자들에게 꼬리를 물고 질문이 이어졌고, 같은 배에 탔던 엣시아 용병들의 증언을 통해 구더기의 정체가 밝혀졌다.
“락샴의 포로라고?”
“예, 그렇습니다. 사난타에서 잡아두라던 명령 이후 따로 처분에 대한 언급이 없어 여기까지 같이 흘러든 것으로 압니다.”
그나마도 명쾌하지는 않았다. 니카는 용병들이 그의 신상명세를 들고 사람을 찾아 돌아다니던 미심쩍은 일을 회상하며 락샴이 구더기를 포로로 잡았다면 그 이유가 자신과 필연적으로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임감을 느낀 것은 그래서였다. 니카는 원래 같았으면 무심히 보아 넘겼을 일에 직접 보증을 서고 나섰다.
“사난타까지 이동하며 일행이었던 자들입니다. 대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놓아주시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동행했다는 것만으로 저들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나요?”
니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왕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락샴의 포로를 내 독단으로 놓아줄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이렇게 자초지종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
“정히 경께서 안타까운 마음을 거둘 길이 없으시다니, 제가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막쉬롭에 대해서 니카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백지장에 가까웠다. 좀 아까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불빛에 드러난 부분보다야 가려진 부분이 많았다. 사람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믿고 구더기를 맡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비록 두 사람 다 북쪽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집시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모든 집시가 착한 이들이 아니라는 것은 사난타에서 이미 겪어보았다.
“그러면 엣시아 단장에게서 정식으로 혐의를 부인 받을 때까지 포로의 신분을 벗기지 않은 채 외따로 관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니카 경께서도 그러면 만족하실 텐데요.”
만족? 그럴 리가…. 신경을 자꾸만 건드리는 책임감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괜찮은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흥미가 다했다는 듯 몸을 돌리는 수리 왕녀의 모습과 속을 알 수 없는 막쉬롭 사이에서 니카의 발언권은 좁아져만 갔다.
“아니면 그냥 포로들과 함께 관리하도록 지시할까요?”
최선의 조치를 해줄 수 없다면 차선이라도 택하라 했다. 어린애까지 딸린 구더기를 귀족들 사이에서 군계일학, 또는 군학일계와 같은 꼴로 혹독한 옥 안에 가둬놓는다니 못할 일이다. 결국 니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탈타미오 후작은….”
불분명한 이유로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구더기에게서 어렵사리 주의를 돌렸을 때, 왕녀는 늘상 우울함에 잠겨 어둡던 얼굴에 간만의 화색을 띄운 채로 활짝 웃고 있었다.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알고 있겠죠?”
그녀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깍듯한 태도로 명령을 실행했다.
* * *
지상의 모든 인간이 떠받드는 고대룡의 혈통.
수리는 드라코슨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형질도 물려받지 못한 채로 태어난 반푼이였다. 이 기분을 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천것이 아니되 천하다 여겨지고, 고귀하되 고귀하지 않다 여겨지는 기분을.
수리는 산골짜기의 평민 계집애나 타고날 것 같은 새빨간 머리카락과 주근깨를 가지고 있었다. 새미언 왕의 눈에 띄어 밤을 보내고 하루아침에 귀부인 자리를 얻은 평민 어머니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결과였다. 드레스와 리본을 곁들이고 멋진 머리장식을 얹어도 수리에게는 어딘지 어색하고 수수한 느낌이 있었다.
“기도 다 마치셨어요?”
“응.”
“오늘은 무얼 위해 기도하셨는데요?”
“왕국의 평화, 폐하의 안녕, 무탈… 풍요와 질서.”
시녀는 비틀대는 수리를 부축해 일으켰다. 쥐가 단단히 난 두 다리가 꼿꼿이 서서 경련했다. 맨바닥에 주저앉아 오랜 시간을 보냈던 까닭에 무릎께에 붉은 자국이 났다. 아주 작달막한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그리고, 금발.”
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왕녀라는 개살구 같은 감투뿐이었다. 외척세력이라고는 없는 평민 어머니는 후견인으로 나섰던 자와 눈이 맞아 외국으로 달아났다. 왕의 관심은 장자 앙살라테에게 머물렀다.
수리는 드라코슨이라는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용혈을 타고나지 못한 인간이었다. 격년으로 한 번 씩 바뀌어 온 시녀장이 귓가에 속삭이는 듣기 좋은 소리만을 위안 삼아 버텨왔다. 멋진 금발로 바뀌게 될 거라든가, 그녀가 장차 왕국 내에 견줄 곳이 없는 드라코슨의 숙녀로 성장할 거라는 소리.
변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 그러나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대로였다. 홀쭉한 발목과 올록볼록 드러나던 갈비에 그런대로 살이 올랐을 뿐, 시녀장이 속삭이던 사탕발림같이 극적인 변화는 결단코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인생에도 행복이 찾아와 닫힌 문을 콩콩 두드리던 순간이 있긴 있었다. 수리는 겨울이 드리워 낮이 무척이나 짧았던 그 계절을 기억했다. 어렸지만 스스로 어리다 여기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못해도 칠팔 년은 지난 일이었다.
뾰족한 발은 갈퀴에 비견될 정도로 가느다랗고 약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가 다반사였다. 수리는 이날도 어둑한 시야 탓에 모난 연석을 헷갈려 밟고 넘어졌다. 굳은살과 흉터로 엉망이 된 다리에 찧은 상처 하나 더해진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가씨, 맙소사!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까 이거… 놓으세요. 함부로 잡지 말아요.”
“앗, 죄, 죄송….”
태연하게 털고 일어나려던 수리에게 조심스러운 호들갑을 쏟아낸 이 소년은 사관학교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우왕좌왕하며 거절당한 손을 서둘러 등 뒤로 감추었다. 멋쩍은 얼굴은 적어도 수리의 기억에는 없었다.
넌지시 가문의 이름을 물었다. 소년은 남부의 대농장과 수많은 가신을 거느리고 있는 대귀족 사사바란 공작의 넷째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고위귀족 출신이면서도 그렇게 뻔하디뻔한 인상을 가진 사람을 수리는 정말이지 난생처음 보았다. 그래서 정체를 듣고 난 다음에도 도무지 그 낯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것이다. 늘상 풀이 죽은 듯이 아래로 뚝 떨어진 눈, 눈썹, 그리고 윗입술이 좀 더 통통한 입까지. 희멀건 피부를 비롯해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은 사관생도 하면 떠오를 법한 강인한 인상과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의 이름까지도 그랬다. 이오라고 했다. 시시하기가 어디 비할 데 없었다.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이오 사사바란….
그를 다시 만날 기회는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달빛이 내리쬐는 것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형형한 느낌이 있는 밤이었다. 수리는 뜻 모를 긴장감에 어깨를 떨다가, 연회에 헬린 드라코슨이 참가하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나서 이게 다 직감적으로 몸서리를 쳤던 게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헬린 드라코슨은 날 때부터 혈통으로 추앙받는 버릇이 들어 그런지 사람의 귀천을 유독 피로 가려내곤 했다. 서열을 매기지 않고는 못 배겨 했다. 수리 같은 서출은 아주 좋은 먹잇감에 속했다. 그래서 모처럼 도착한 초대장에 응해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한 연회라도 초대객 명단에 헬린 드라코슨의 이름자가 있는 것을 확인하는 날이면 인적이 드문 정원 산책로나 발코니에서 시간을 때우다 돌아와야 했다.
그날도 수리는 헬린의 뻔뻔한 낯을 먼발치에서 보고 나서부터, 날만도 저택의 멋들어진 장미정원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초여름의 열대야가 드리워 밤중에도 공기는 미지근했다. 낮 동안에 쏟아부은 소나기의 여파로 반질대는 잎사귀에는 이슬처럼 습기가 맺혔다.
정원에 하나 놓인 커다란 대리석 정자에는 이미 낭만을 좇는 연인들이 들어차 있었다. 갈 곳 없이 헤매던 수리는 젊은이들이 나누는 활기찬 대화를 훔쳐 듣고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태연히 웃으며 끼어들기에는 저번에 왕족모독죄까지 운운하며 거나한 말싸움을 벌였던 리링가 영애가 무리에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시기 질투와 자존심에 못 이겨 남 흠잡기를 취미로 아는 사람이었다.
‘유유상종이랬어. 다른 놈들 수준도 알 만하지, 뭐.’
수리는 언젠가 리링가 영애와 같은 악인에게 신의 천벌이 내리게 되리라 확신했다. 내심 그런 징벌을 기대하고 있기조차 했다.
‘내가 더러워서 피해준다.’
정자에 등을 돌리고 사뿐한 걸음을 옮겼다. 악행에 물든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아쉬워할 일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 조금도. 수리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볍던 구두코에 천근 만근한 무게추가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쿵쾅거리는 소리가 났다.
구슬픈 풀벌레 소리에 감흥이 생기다니 이상했다. 마치 외로움을 타는 것 같지 않은가.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나서 물끄러미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럴 리 없어.’
죄를 억누르며 신의 뜻에 따라 선하게 살겠다고 약속한 이 몸이, 고작 고독감을 견디지 못하거나, 저 철없는 십 대 소년소녀들 틈바구니에 끼고파 안달이 났을 리 없다.
“그럴 리 없다고!”
수리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은 새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움찔 어깨를 떨며 펄쩍 뛰었다. “신이시여!” 하는 비명소리를 용케 바깥에 흘리지 않고 참아냈다. 휘둥그레 커진 눈이 관목과 덤불 너머 산책로에 멈춰 서 있는 남자 둘을 향했다. 재학기간 동안 예복 대신에 입는 순백색 의장의 교복을 보면 사관학교 생도들이다.
“목소리가 너무 커.”
“네가 놀래키니까 그렇지!”
목소리를 낮추고 나서도 수리의 귀에는 그들의 대화가 훤히 들렸으니 결국은 이 입단속이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셈이다. 숨어서 남의 대화를 엿듣다니, 수리가 여태 배워 온 미덕들 중에 십수 개는 거스르는 짓이었다. 수치심이 낯에 은근한 열기를 올렸다. 뒤돌아 멀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이야. 국왕 폐하는 더 가망이 없으셔.”
“이봐, 친구. 대체 이런 말은 왜 하는 거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공공연히 알려진 얘기 아닌가? 어차피 주변엔 아무도 없고 말이야. 다들 백성들이 꿈도 꿔본 적 없는 그 값비싼 포도주나 강아지 불알보다도 작고 혀 꼬부라진 이름 가진 음식들에다 코 박느라고 정신이 없을 텐데.”
“하아…. 너는 진짜 비꼬는 거 하나는 선수야.”
“가서 고귀하신 분들이 연회장에서 뭐 하나 보고 오든가. 내가 말한 것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을 테니까.”
이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수리는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아무리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 욕도 나오기 마련이라지만! 장차 나라를 위해 싸우는 왕의 군대가 되기 위해서 수학하는 사관생도라는 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왕의 목숨에 대해서 시시한 술자리 안주나 되는 것처럼 지껄이다니….
“친구, 네가 신물이 난 건 이해해. 그렇다고 모든 왕족과 귀족에게 회의적일 필요가 있어? 예를 들어 새미언 폐하께서는 그래도 백성을 생각해주시는 분이시지. 그분을 흠결 잡자면… 신이시여, 불충을 용서하소서. 우유부단하고 유약하시지만, 그분의 마음은 선한 의지로 가득 차 있다고.”
“내 말 못 들었어? 그분의 시대는 곧 지나가. 진짜 문제는 이다음부터야. 다음 왕이 누가 될지 알잖아.”
수리는 턱을 높이 들어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군인의 일이 언제부터 팔이 아니라 입과 염려 많은 머리로 옮겨갔는가. 자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건방진 생도들에게 달려들어 따끔히 혼쭐을 낼 작정이었다. 왕족의 것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모자란 데가 있는 드레스의 상단 레이스를 양손으로 꾹 말아쥐었다.
“다음 왕은 헬린 드라코슨이라고!”
“너야말로 조용히 좀 말해, 친구. 정말 부탁이니까. 이러다 자칫 목이 달아난다고.”
“이번에 목이 졸려 죽은 영애 건도 실은 붙잡힌 시종 짓이 아니라더군. 비밀스럽게 도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연회에서 영애가 왕제와 대화 나누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는 모양이야.”
“뭐?”
분주하게 뒤섞여 있던 수리의 머릿속이 갑작스러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순간 얼어붙은 것 같았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은 두 손끝이 절로 가슴 위에 모였다.
최근 수도를 들썩이게 만든 티립소 영애 살인사건은 완벽한 대처와 빠른 범인 검거로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진범은 따로 있다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콧방귀가 나왔다. 그런데 곧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가설과 근거를 연관 짓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증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지. 그러면 최근 탈타르와 수도에서 비슷한 수법으로 귀족들 목숨을 앗아간 사건들이 다 누구 짓이겠어?”
“그 증언 하나로 왕제를 모든 사건의 용의자로 몰아가는 건 너무 큰 비약 아니야?”
대거리하던 생도는 이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수리는 숨겨진 대답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이미 충분한 심증을 가지고 있었다. 음침한 속셈으로 사람 골탕 먹이는 건 예로부터 헬린의 특기였다. 그와 같은 안하무인이 악질적인 의도와 특유의 쾌락주의에 힘입고 나면 어떤 짓을 벌일 수 있는지 무섭도록 짐작이 갔다.
겁을 잔뜩 집어먹는 바람에 실수를 했다. 어깨를 웅크리고 맥이 풀린 다리를 뒤로 물리던 수리는 높은 구두굽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넘어지고 말았다. 언제나처럼, 갈퀴처럼 마른 발이 너무도 약한 탓이었다.
“무슨 소리지?”
“오, 신이시여! 누군가 엿들은 게 분명해. 당장 도망쳐야 돼, 우리….”
“저쪽에서 났어. 네 뒤쪽 말이야.”
“내, 내, 내 뒤에서?”
당황한 수리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저들이 모르게 도망칠 방법은 없으니 당당하게 나서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엿듣게 된 것이야 의도한 바도 아니었으며, 다소 모양이 빠지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장 염려에 잠겨야 하는 쪽은 수리가 아니었다.
“앗, 당신은….”
그려둔 추궁의 청사진은 맥 빠지게 생긴 이목구비를 다시 한 번 마주쳤을 때 끝내 와장창 무너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풀이 죽다 못해 눈치를 보느라고 아래턱을 달달 떨고 있었다. 상황도 잊고 수리는 소년의 표정이 우스워서 웃음소리를 쏟아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을 맞추자 어쩔 줄을 모르고 일으키려고 달려들다가, 저번에 수리에게 한번 거절당한 일을 기억했는지 그녀의 곁에 서서 멋쩍게 양쪽 신발 뒤축을 부딪었다.
“어라, 또 넘어지셨네요, 하, 하하…. 이, 일으켜드려도 될까요?”
“이오, 누굴 봤길래 머저리처럼 웃고 있는 거야?”
“그, 그게, 클라텐….”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소년이 새파란 눈초리로 바닥에 주저앉은 수리를 훑었다. 반쯤 기름을 발라 넘긴 머리칼은 어두웠으나 살갗은 톡 쏘는 북방 억양에 걸맞도록 희었다. 이오는 그를 클라텐이라고 불렀다.
수리는 그 이름을 입안에서 몇 차례 굴려보다가, 그가 강동지역 출신 귀족영애들이 매번 잘난 듯이 간증하고 나서는 미남- 바란 탈타미오의 아우라는 것을 눈치챘다. 수도에서 만날 수 없는 바란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 소년을 통해 연서를 전하려고 시도하는 이들이 왕왕 있었다. 바란 탈타미오 덕택에 연회에 잘 나오는 일 없는 클라텐 역시도 사교계에서 유명인사였다.
“윽, 이거 야단났네.”
반푼이 드라코슨이라도 엄연한 왕족인 수리의 목전에서 모독죄를 거의 다발로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클라텐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꺼내 들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는 동안 이오 사사바란은 수리에게 정중한 예의를 갖춘 뒤 팔꿈치를 굽혀 에스코트하고 일으켜 세웠다.
“저기, 다치신 곳은요?”
“괜… 찮아요.”
이오가 불안감을 다 감추지 못해 와들와들 떠는 꼴로 수리의 안위를 물었다. 넘어질 때 바닥을 짚느라고 진흙이 묻은 수리의 손끝이 이오 사사바란의 순백색 예복에다가 얼룩을 남겼다. 당황한 수리가 두 줄기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젖히며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이오의 갈색 눈동자가 끔뻑거리다가 생긋 모양을 잡는 눈꺼풀 사이에서 가늘어졌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어, 비록… 저희 입장이야 괜찮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죠.”
이오는 얼굴을 당장 가리고 달음질을 쳐도 모자랄 판에 어리숙한 얼굴로 소개를 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옮긴 수리는 클라텐 탈타미오가 정말 금방이라도 혀를 깨물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목격했다.
“수리 드라코슨 왕녀 전하셔, 전하, 이쪽은 클라텐 탈타미오입니다.”
“…….”
“그리고 저는-”
“이오 사사바란.”
수리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이오는 눈썹을 평소와는 완벽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꺾으며 휘둥그레 왕방울 눈을 떴다. 뒤통수를 어쩌다가 툭 건드리면 눈알이 굴러 나올 것만 같았다. 콧잔등에 쑥스러운 홍조가 올라오는 게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서는 검푸른 주근깨가 더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오, 사사바란. 맞지요?”
괜히 그 이름을 한 번 더 힘주어 불렀다.
클라텐과 이오를 만난 것은 수리의 인생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을 가져왔다. 하루하루를 그저 지나치던 수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게 했다. 세 사람은 앙살라테 왕자와의 비밀스러운 접선을 통해 지지 의사를 밝히며 피가 섞인 것보다도 더욱 진한 형제의 연으로 맺어졌다. 이오와 클라텐은 어린 새싹들에게 앙살라테의 의지를 전했고, 신전과 인연이 깊은 수리는 구휼과 선행의 공로를 교묘하게 앙살라테의 이름으로 돌렸다.
“이념, 정의, 백성, 다 좋습니다! 클라텐이 말하는 바보같이 이상적인 국가도 좋아요. 나, 나, 나는 한때 이런 것들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내려놓아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수리의 턱이 파르르 떨었다. 자꾸만 혀 위로 끈끈한 침이 차올라 목울대를 꼴깍댔다. 이미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가, 빼냈다가, 다시 넘겼다가 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수리는 그저 그런 둔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당신을 알고 내, 내, 내 생각이 전부 다 바뀌었어요. 전부 다요. 죄, 죄송해요. 전하. 저는 클라텐처럼 유려한 말솜씨가 없어요. 준비한 말이 있었는데, 이젠 다 엉, 엉, 엉망이 됐어요.”
이오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시울로 벌써부터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수리는 그들의 신념과도 같던 목표를 뒤로하는 언사에도 분노가 치밀지 않았다. 아니, 실은 거기에 더해 아주 은근한 기대감이 자꾸만 어깨를 폈다. 자괴감을 느껴 마땅한데, 가슴은 기뻐서 쿵쾅거렸다.
“전하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배, 배가 울렁거리면서…. 마음에다가 망치질을 하는 것만 같았어요.”
이오의 얼굴이 온통 벌겋게 달아 있었다. 단어를 이루지 못한 음운들이 허공을 날아다녔다.
“처음부터 막중한 임무를 띠고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그렇지만, 나는 아니에요. 전하도 아니시죠. 그런데도 우리가 그 짐을 다 질 필요가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노력했어요. 왕국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이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예요?”
“전하를 만나고 내 세상이 바뀌었어요! 나는 이제 이 나라의 태평성대보다도 전하의 미소가 더 보고 싶단 말이에요!”
곤혹스럽게 입술을 틀어막은 이오는, 그러나 이 말에 담긴 진솔한 감정만은 부인하지 않았다. 씩씩대는 거친 숨소리와 간절한 눈빛, 긴장감으로부터 엷게 배어난 땀 냄새, 이런 것들이 수리의 오감을 공격했다. 사랑이란 감정에 모양과 향기, 그리고 소리가 있다면, 딱 지금 이 순간과 같았을 것이다. 떫은 과즙이 닿아 혀를 꾹꾹 눌러대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 팔뚝과 가슴팍을 뒤덮었다. 염려와 죄악감을 차치하게 만들었다.
신이시여. 수리는 이오의 속눈썹이 눈물에 젖고 손등에 아무렇게나 문질러진 눈꺼풀이 붉게 부어오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신이시여, 시험에 들게 마소서. 내가 늘 옳은 길에 설 수 있게 하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나는 아버지에게서 등을 돌릴 수가 없어요.”
사사바란 공작은 대공의 편에 선 수많은 귀족들 중에서도 유별났다. 대공이 앙살라테 왕자의 선전포고에 대해 대응하기가 무섭게 가문의 모든 것을 내걸고 강력한 지지를 표명했다. 왕국 내에서 손에 꼽히는 권력자였다. 정보력 역시도 무시할 바가 못 됐다.
여태 사사바란의 눈을 피해 은밀히 앙살라테를 위해 일해 왔다지만 발각당하는 것은 처음부터 시간문제였다. 그러니 이오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나타나서 수리의 앞에서 한동안 말을 더듬다가 어렵사리 이야기를 터놓았을 때, 수리는 처음에 그저 심약한 이오가 부친을 거스르지 못해 그러는 줄로만 생각했다.
“비겁한 남자라고 불러도 좋아요. 나는 당신과 나 사이에 펼쳐진 수없이 많은 가능성들을 보고 싶어요. 나의, 클라텐의, 그리고 당신의 정의를 배반한다고 해도.”
“…….”
“나와 약혼해주세요.”
그런데 아니었다. 이오는 다른 소리를 했다. 드라코슨의 기질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빼빼 마르고, 창백한 살결, 주근깨에 빨간 곱슬머리나 가진 황소고집 왕녀가. 사랑받을 구석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수리 드라코슨이, 그의 마음속 우선순위를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수리는 눈을 깜빡였다. 백일몽에서 깨어나려고 했다. 눈앞의 이오가 그녀의 온갖 발버둥과 의심을 방해하며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시궁쥐가 찍찍거리는 것처럼 하찮도록 작은 소리였다.
신경질이 나서 새빨개진 낯으로 이오를 노려보았다. 아래로 뚝 떨어진 눈썹, 홍조가 오르고 찌푸려진 콧잔등,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제발, 이라고는 말하지 않을게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나의 감정을 전하께서 짊어질 필요는 없- 으윽.”
“…꽃 한 송이 없는 청혼이라니 정말 최악이야.”
수리는 협탁 위 꽃병 안에 들어찬 신선한 장미를 몇 송이 뽑아다가 냅다 던졌다. 이오는 턱 끝과 가슴을 얻어맞으며 엉겁결에 장미를 한 다발을 안았다. 가시가 잘 다듬어져 있어서 망정이었다. 멀뚱거리던 눈동자가 샘솟는 물기에 젖어 반짝거렸다.
“그거 주면서 다시 한 번 말해요.”
“윽…. 조, 좋아해요….”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운 기도에도 불구하고 수리가 금발을 갖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빨간 머리 천덕꾸러기 왕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고 성장했으나, 있는 그대로 그녀를 사랑해주는 소년을 만나 행복의 빛깔을 어렴풋이 식별할 수 있게 되었다. 수리는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몇 번이고 되새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오의 통통한 윗입술이 콧방울 옆길을 따라 구른 눈물로 흠뻑 젖는 걸 보고 나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휩싸이고 말았다.
수리는 이오가 있다면 행복할 수 있었다. 이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 소중한 클라텐과 앙살라테를 배반할 용기를 냈던 것이리라. 죄악감은 불현듯 찾아와 가슴을 후벼 파거나 머리맡에 머무르며 간헐적인 악몽을 선사했지만, 그래도 수리는 견딜 만했다. 이오와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빛이 드리우는 바람에 그림자가 짙어진 거라면 감내하겠다는 것이 수리의 각오였다.
“아니야.”
그러나 살과 피로 이루어진 수리의 행복은 너무도 연약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눈물에 젖으면 볼록하게 부어오르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이오의 윗입술에 얼굴의 온갖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온 핏줄기가 붉게 뒤덮였다. 수리의 머리칼처럼 붉은 피가.
“안 돼, 눈을 떠요. 내가 명령하잖아. 내가….”
새하얀 예복과 면사포가 새빨갛게 피로 물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이오의 식어 빠진 사지를 주무르고, 흰자위에 온통 터져나간 붉은 실핏줄들을 돌이키거나 맥박이 다시 요동치게 만들기 위해서…. 수리는 홀로 고군분투했다. 니카를 비롯한 기사들이 들이쳐 수리의 몸을 이오로부터 떼어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거 놔, 무엄, 무엄한 것들 같으니…. 그리고 누가 이오를 좀 깨워요. 어서, 응?”
“왕녀님. 왕녀님! 진정하십시오. 부마님은 이미 맥박이 없으십니다.”
“이오는 죽지 않았어! 이 손에 반지를 끼우고 영원을 맹세했다고!”
작은 몸으로 믿을 수 없는 힘을 뿜어내며 니카의 손을 내팽개치는 수리의 머릿속은 놀랍도록 차가웠다. 가재와 사치스러운 탈타르제 장식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다. 누가 이오의 목숨을 노렸단 말인가? 어느 틈에 극독을 먹일 계획을 짰고 그 동기는 무엇일까? 그때였다. 밤중의 소란에 신방 안에 들이닥친 사람들 틈으로 수리는 헬린 힐벤의 그림자를 보았다. 사사바란의 넷째 공자와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 앙살라테 드라코슨을 배반하고 탈타르로 도망쳐 온 수리를 재밌다는 듯 눈감아주긴 했으나 그렇다고 호의를 내비친 적도 없었다.
만일 그가 수리와 이오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던 거라면? 한번 변심한 마음을 다시 돌이켜 앙살라테에게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던 거라면?
어렴풋한 심증은 시원스럽게 터져 나오는 대공의 웃음소리에 단번에 합당한 의심으로 변했다. 그래, 헬린 힐벤은 피를 토하며 고꾸라져 죽은 그녀의 부마를 시시한 농지거리처럼 취급하며 신바람이 든 웃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최근 대공의 곁에서 애동이라도 되는 것처럼 붙어 지내며 배알도 없이 이런저런 심부름 거리를 하고 다니는 젊은 후작에게 생각이 미친 것은 이때였다. 바란 탈타미오 후작은 클라텐의 손위 형제였다. 클라텐에게 가진 뿌리 깊은 죄의식 때문에 이오는 그 남자와 수차례 독대해 왔다. 함부로 만날 수 없는 혼례식 날의 부마에게 독배를 권하기 충분한 작자가 달리 있을까. 없다, 없고말고.
수리의 눈에 핏발이 섰다. 두 귀로 들이치는 힐벤의 웃음소리가 시끄럽고 역겨웠다.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감정의 정수가 되살아났다.
수리는 사랑하는 이오의 복수를 맹세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모든 이유들에게 마찬가지로 가슴이 미어지도록 끔찍한 죽음을 선사해주고 말 거라고….
* * *
“왕녀님, 괜찮으십니까?”
비로소 겨울바람이 뒤덮인 사난타로 그녀의 의식이 되돌아왔다. 수리는 가장 아름다운 나비의 날갯짓처럼 풍성한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떴다. 잿가루를 바른 것처럼 거무튀튀하게 착색된 눈두덩이 우아하게 감겼다가, 도로 열렸다.
“왕녀님….”
“괜찮아요. 잠깐…. 생각을 했어요.”
충성스러운 니카 경의 낯이 파르라니 질려 있었다. 원래부터가 마른 몸이긴 했지만 오래간만에 재회한 니카의 모습은 그녀의 기억보다 훨씬 여위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두 뺨에 광대뼈가 도드라지도록 움푹 우물이 패였다. 황폐하고 날 선 얼굴에서 새까만 두 눈만이 어리숙하게 빛났다.
사람을 거두는 일은 그저 어여쁜 재롱을 일삼는 짐승을 하나 부리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고작해야 꼬리를 치고 울음소리를 내어 애정을 표현하는 길짐승과는 다르게 인간은 감정적으로 이입될 수 있는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눈빛, 말투, 뜸을 들이는 것, 손가락을 바스락대는 행동까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니카의 연심이 대개 체념의 형태를 띤다는 점이었다. 구태여 단념시킬 필요 없는 데다, 니카는 스스로 애절한 마음에 못 이겨 매일 충심을 갈고 닦곤 했으니, 수리의 입장에서야 번거롭지 않아 잘된 일이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랑을 황송한 것으로 알아 지레 겁을 먹고 웅크리던 니카의 모습이 사뭇 달라졌다. 직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보호의 장벽을 굳게 치는 니카는 수리의 앞에서만큼은 연한 살을 곧잘 내보이곤 했으니 이 변화가 더욱 극명하게 다가왔다. 수리는 반듯한 아치를 이룬 채 미동도 없는 니카의 눈썹산과 구부정한 기색이 전부 사라진 어깨를 흘겼다.
“그런데 잔악후작은,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
때아닌 물음이었다. 수리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니카는 원래 무슨 일이건 간에 그녀의 말에 토를 달거나 질문하는 일이 잘 없었다. 사난타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온 엣시아 용병단을 비롯한 왕자군을 환영하느라 몰려들어 있던 인파가 거품이 꺼지는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가던 도중이었다.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하면서까지 넌지시 불편한 질문을 들고 오다니 니카 답지 않았다.
천천히 돌아보는 그녀의 눈짓을 니카가 곧게 마주했다. 원래 같았으면 사람 손에 붙잡힌 산새처럼 온갖 발버둥을 치며 손을 내저어 피하고 얼굴에는 온통 붉은 물을 들였을 니카였는데도 그랬다. 눈의 검은자위는 사방으로 떨었고 입술은 바짝 말랐으며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래도 니카는 긴장을 좀 집어먹었을 뿐 수리의 매서운 기세에 주춤하지는 않았다.
“방금, 기사들을 시켜 어디로 보내신 건지….”
모든 것이 전에 없던 모습이다. 적잖이 당황한 수리가 그녀의 외골수 기사를 떠보기 위해 가장 적절한 질문을 뽑아내는 동안, 여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막쉬롭이 나서서 상황을 환기시켰다. 늘 골골대며 늙고 인자한 목소리를 내는 그녀치고는 썩 공격적인 투였다.
“경께서 토를 달 일은 아닌 줄로 압니다.”
“하지만-”
“…많이 변했군요. 그러고 보면 넉 달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요.”
그러자 니카가 입을 다물었다. 단순히 겉껍질이나 성정을 일컫는 가벼운 말이 아님을 눈치챘을 것이다. 수리가 꼬집은 것은 그의 보잘것없는 연심이었다. 관절이 도드라진 니카의 손이 위로 올라가 목젖을 손바닥에 대고 궁 굴리더니, 이내 너른 가슴을 쓸어내리며 제자리로 떨구어졌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경은 알잖아요. 무엇을 위해서, 여태까지 버텨왔는지.”
수리는 입안의 연한 살을 빨아들여 깨물었다. 촘촘한 속눈썹으로 채워진 강렬한 눈매에 표독스러운 기색이 서렸다.
“잔악후작을 어디로 보냈는지 궁금하다고 했나요? 대단한 비밀도 아니에요.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장소로 옮겨둔 것뿐이죠.”
“다치지 않도록 하라는 왕자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몰아치는 바람에 묻혀 반절은 들리지도 않는 소리였다. 수리는 코웃음을 쳤다. 왕자의 명령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맥없는 반론에 불과한지는 니카 본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수리가 앙살라테로부터 등을 돌렸던 동안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탈타르에 머물었던 것이 대체 누구였던가. 대의보다도 수리의 뜻을 따르겠다고 맹세한 자가.
니카는 앙살라테의 기사가 아니라, 이 수리 드라코슨의 기사였다. 함박눈이 쏟아지던 날, 응달에 웅크린 청년에게 왕녀가 손을 내밀던 순간부터 그렇게 정해졌다. 그러니 설령 수리가 앙살라테의 명령에 불복한다 하더라도 니카는 조금도 토를 달지 말아야 했다.
“다치게 하지 말라니 우스운 소리로군요. 잔악후작이 왜 그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달게 되었는지 기억하나요?”
“…….”
“피를 쏟으며 죽어가던 형제자매들을 다 잊었느냔 말이에요! 코코탄, 란크쉬, 그 밖에 우리가 패배를 거듭해 빼앗겨야만 했던 그 모든 땅에서 죽은 이들을! 죽어가는 그들 앞에서 내 심장 위에다 손을 얹고 늘 이렇게 맹세하고는 했어요, 너희를 이렇게 만든 자들이 언젠가 맨발로 못길을 걷게 하겠다고. 그러니 조금이라도 편히 눈을 감으라고….”
수리는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굽 높은 구두를 신은 그대로 발판을 밟고 마차에 올랐다. 손을 내민 마부만 무안한 꼴이 되었다. 수리는 이오를 잃은 그 날 이후로 그녀의 가냘픈 발목이 실수를 범해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오랜 단련을 거쳐왔다. 더 이상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줄 사람이 하늘 아래 없으니, 그래야만 했다.
니카가 있는 편으로 난 마차의 창이 덜컥 열렸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망연자실해 있는 니카에게 수리가 쏘아붙였다.
“주제넘은 참견은 그만두세요, 경. 내가 벌이게 될 모든 일들은 내가 책임져요. 그게 이, 수리 드라코슨의 방식이에요.”
그녀는 환희 속에서 재회한 기사를 나루터에 홀로 두고 매몰차게 창을 닫았다. 나무로 된 창틀 관절이 접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자꾸만 움찔거리며 하얀 숨을 뱉는 니카를 제치고 왕녀의 마차 가까이로 바짝 붙은 것은 막쉬롭이었다. 후드 바깥으로 세월의 흐름이 드러나는 흰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막쉬롭은 뜸을 들이며 니카에게 말을 붙였다.
“니카 경.”
만일 여기서 꾸물대다가 왕녀의 마차를 놓친다면 저 번화가로부터 거리가 꽤 있는 잣자후의 대리석 성까지 홀로 말을 달려야 할 터였다. 그건 정정해 보이는 그녀에게도 고된 일일 텐데.
“…무슨 일이지.”
니카는 막쉬롭에게 느끼는 탐탁지 않은 감정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노력이 늘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었다. 니카는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편이었고, 막쉬롭은 집시로 살면서 남들 마음 읽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조합이 안 좋았다. 막쉬롭은 단번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녹이 슨 경첩을 굽혔다 닫았다 반복하는 것처럼 쇳소리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실제로 뵈니 정말 상상한 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경….”
“무슨 상상을 했는지 모르겠군.”
“아주 많은 상상을 했지요. 당신이 세상에 태어날 거라고 알게 된 순간으로부터, 좀 전에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계속. 당신이 어떤 존재일지 매일 밤 상상했답니다.”
이 말에 절절히 담긴 감정의 종류를 파악하려고 니카는 심혈을 기울였다. 칼바람에 얻어맞은 귓바퀴가 무진장 아렸다. 어쩌면 그래서 막쉬롭이 한 말을 잘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의 진의를 되물으려는 참에 니카는 막쉬롭이 앞으로 구더기와 코쿤을 맡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냈다. 괜한 적의를 보였다가 구더기가 뒤집어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지긋한 눈빛만 쏘았다. 막쉬롭은 위아래로 찢긴 파충류의 눈동자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주 보았다. 이에 당황을 삼켜야 했던 것은 오히려 니카였다.
“니카 경, 빨리 따라붙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왕녀 전하께서는 오래토록 마음을 예리하게 벼르고 계셨으니 아마 고된 문초를 당할 겁니다.”
“누구 얘기를 하는 거지?”
“그야 잔악후작 얘기지요.”
“…난 그치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형편없는 부정은 마차의 바큇살이 급히 굴러가는 소음에 묻혀서 힘을 잃었다. 니카는 모든 일을 다 내다보는 것처럼 오만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미래를 보는 집시들의 특징인가 싶었다. 마른세수를 하고, 잠깐 숨을 참았다.
* * *
사람은 누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맞는다. 추악한 마음이지만 바란은 왕녀의 미모가 시름으로 바싹 메말랐거나, 듣기 싫은 말버릇이 들었거나, 목소리가 갈라지고, 흉악한 체취가 배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간악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왕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전히. 아쉽게 되었다. 왕녀는 염색으로 얻어낸 것과는 견줄 수 없는 진짜 빨간 머리를 곱다랗게 땋아 내리고 입가에는 우아한 미소를 물었다.
비록 그 진의가 열렬한 증오에 닿아 있기는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왕녀의 부릅뜬 올리브색 눈동자와 바람에 터 발그레한 두 뺨은 얼핏 바란의 도착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성대한 환영을 준비하긴 했을 거야. 만찬 대신에 가죽끈이 칭칭 감기고 핏자국이 남은 의자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기름때가 끈끈하게 낀 머리카락이 거친 바람결을 따라 넘나들었다. 외부의 모든 힘에 무력하게 순응하고 있던 바란은, 왕녀의 곁에 꼭 달라붙어 있는 니카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실은 울고 싶었는데, 아마 눈물이 나오다 말고 칼바람을 맞아 날아가 버렸던가 그랬을 것이다.
입술을 꼭 다물고 상체를 비틀어서 어떻게든 흐트러진 옷자락이나마 단정히 하려 했다. 양팔이 단단히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맘처럼 쉽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니카와 눈이 마주쳤다. 눈발이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얀 얼굴 속에서 도드라지게 까만 눈길이 바란을 향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거친 입술이 조금 뒤틀렸다가,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바란은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니카에게는 뜻을 알 수 없는 버릇이 많았다. 의도와 감정이 불투명해서, 보는 이가 지레짐작하기 쉬운 표현들. 가령 입술을 비쭉이거나, 손가락으로 허공에 무얼 자꾸 덧그린다거나, 눈동자를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 바란의 머릿속에서만 그 의미가 거대해지는 것들.
맨 살갗에 닿지 않으려 애를 쓰며 옷맵시를 다듬어주던 투박한 손가락을 떠올렸다. 거기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까 생각했다.
‘아, 정말 최악이다.’
바란은 니카가 첫눈이 내리던 전장에서 그의 모든 거짓말을 어린애 소꿉장난같이 아무런 고뇌가 따르지 않는 것으로 치부한 뒤로 줄곧 진력이 나 있었다. 비참한 것에는 익숙했지만, 견딜 만하다고 없는 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비관의 그늘이 드리웠다. 이대로 더 나아가 본들 무엇이 달라질까 했다.
‘아직 좋아해.’
그런데도 니카를 바라보기만 하면 가슴이 제멋대로 두방망이질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가지라고. 저 사람만 가지면… 그러면 마침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코끝이 시큰하게 당겼다. 주저앉아버리고 싶던 마음을 참아냈다. 발목에 힘이 풀려 헛돌던 걸음에 기합이 들어갔다.
왕녀의 목전에 가 섰을 때 바란은 요 며칠 혹독한 추위를 고작 튜닉 한 장으로 버텨 온 사람 같지 않게 어깨를 곧이 펴게 되었다.
왕녀는 꼭 당장 목을 잘라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노려보면서도 바란을 향해 무어라 입을 열지는 않았다. 바란의 두 뺨을 날 선 눈초리로 따갑도록 고문하던 왕녀가 마침내 서슬 퍼런 목소리를 꺼냈다. 차가운 분노가 오래 키워낸 결정처럼 삐죽빼죽 들러붙은 목소리는 애꿎은 기사들을 향해 표독스러운 화살을 돌렸다.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 알고 있겠죠?”
바란은 ‘아니.’하고 속으로 대답했다. 의미가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천천히 설명을 곁들여주었다면 좋았을 일을 왕녀가 두루뭉술한 지시를 내리고 또 기사들이 거기에 과묵한 충성을 바치면서 점차 바란이 낌새를 챌 여지가 좁아졌다.
앞서서 귀띔해둔 계획이 있는 모양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좋은 쪽은 아닐 것 같았다. 마른침이 넘어가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이 치밀었다.
조심스레 좌우로 눈을 흘기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예측하려 했다. 왕녀 뒤로 빼꼼히 드러나는 니카의 얼굴이 와락 굳었다. 찌푸려진 눈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으윽!”
좌우에서 기사들이 바란의 팔짱을 끼고 철갑으로 무장한 딱딱한 몸뚱이를 바싹 붙였다. 힘없이 달랑대며 끌려가느라고 몸이 제멋대로 요동을 쳤다.
“혼자 걸을 수 있어. 이거 놔!”
“…….”
“저기, 내 말엔 대꾸하지 말래? 그것도 왕녀 명령인가?”
투구 밑 그늘진 얼굴에서는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바란은 투구 안쪽까지 들어갈 기세로 바투 다가가 기사의 무뚝뚝한 낯에 당황한 기색이 물들게 만들었다. 이윽고 만족한 듯이 쾌활하게 웃었는데, 얼마 안 가서 정강이가 기사의 정강이를 감싼 철 각반에 보복성으로 받히는 바람에 찔끔 눈물을 빼야 했다.
“개 같은 놈들.”
바란은 욕지거리를 하며 신음을 삼켰다. 옆구리를 뒤틀어 돌아보니 그가 몇 걸음 멀어지자마자 니카가 날씬한 허리를 접으며 왕녀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여간 친밀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배알이 뒤틀렸다. 바란을 구하고, 옷을 정돈해주거나 무심결에 존댓말을 하는 등 온갖 귀여운 재롱은 다 떨어놓고, 결국은 왕녀의 곁에 저렇게 서 있다니. 저렇게, 친근하게.
감정은 몸이 고통에 찌든 동안에는 누릴 수 없는 사치다. 이것은 오래 지나지 않아 증명되었다.
진짜 고난이 바란에게 닥쳤던 것이다.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배치되어 바란을 짜부라뜨릴 것처럼 압박하던 두 명의 기사가 그를 더 깨끗한 올가미로 다시 한 겹 결박하고, 변변찮은 탈것 하나 내주지 않은 채로 까마득한 언덕배기를 오르기 시작했다. 발을 땅에 디딘 것은 바란 한 사람뿐이었고, 그를 호송하는 기사들은 진작 말 등에 올라 바란을 묶은 밧줄을 욱여잡았다.
차가운 공기가 목구멍을 통하지 않고 폐 안에 직통으로 들이닥치는 것만 같았다. 바란은 폐렴에 걸려 피를 토하며 별세하셨다던 외할머니 이야기를 떠올렸다. 만일 이렇게 말 탄 기사들에게 힘없이 끌려가다가 병을 얻어서 피를 토하고 죽게 된다면 세상천지에 그런 허무한 죽음이 어디에 있을까.
악으로 버티고자 어금니를 꼭 악무는데, 말의 사뿐한 걸음걸이가 돌연 속력을 올렸다. 바란은 단번에 상체가 앞으로 이끌리면서 균형을 잃고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돌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은 지표의 울퉁불퉁한 면에 뺨이 부대껴 까졌다. 하필 얼굴을 처박다니 운이 나빴다.
“윽….”
처량한 꼴에도 굴하지 않고 기사들은 오히려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말이 뜀 걸음을 디뎠다. 엎어진 상태로 질질 끌려가느라고 무릎이 닳아 없어질 듯했다. 얼음에서 옮은 물기가 옷감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새겼다.
걷는 것도 기는 것도 아닌 꼴로 더러운 시장바닥과 질퍽하게 더럽혀진 눈밭 위를 굴러 잣자후의 새하얀 영주성에 당도했을 때, 바란은 그야말로 곤죽이라는 단어가 아깝지 않은 상태였다. 새빨갛게 얼어붙은 살갗은 찰과상과 타박상으로 뒤덮였고 넓은 부위가 쓸려 벗겨진 무르팍에서는 흥건한 진물이 솟아 나와 옷감에 들러붙었다. 따끔한 감각이야 참는다 쳐도 기괴하게 꺾이고 관절이 얻어맞아 부어오른 발목 상태가 심상찮았다.
종자들에게 말고삐를 넘겨준 뒤에야 두 기사는 바란을 돌아보았다. 바닥에서 벌레처럼 기는 모습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고 뾰족한 발끝으로 연약한 배 둘레를 헤집었다. 팔이 밧줄에 붙들려서 아무리 몸통을 허우적거려도 혼자 힘으로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도 이 두 명의 기사를 향한 바란의 거부감은 이미 최대치를 찍었다. 어떻게든 주군을 섬기는 이 기사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었던 바란이, 이대로 왕녀의 침대에 밀어 넣을 작정이라면 사양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런데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답이 돌아왔다.
“꿈 깨고 건방진 소리 좀 집어넣어라. 너는 참회의 방으로 가는 거다.”
“참회의 방…?”
심상치 않은 이름이었다. 바란은 그만 말문이 막혀서 먹먹한 파란 눈으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뭔데? 와, 왕녀한테 무슨 이상한 취미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알 필요 없다.”
기사는 왕녀에 대한 모욕에도 대단한 반응 없이 콧방귀를 뀌었다. 마치 값싼 동정에서 선심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곧 죽을 놈인데.’ 하는 식이었다.
“참회의 방에서 너는 문자 그대로 참회하게 될 테니까.”
참회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바란의 가슴이 위험신호로 빼곡히 차올랐다. 보통 신실하고 청렴결백한 단어에 목을 맬수록 제정신인 사람이 없다는 것이 바란의 철학이었다. 신전과 관련한 활동에 성실히 참석하기로는 아마 왕국에서 첫 번째 손가락에 꼽힐 수리 왕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추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관자놀이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참회의 방으로 가는 길은 그 입구부터 서늘했다. 한 발짝 조심스레 들어선다는 게, 바란은 그만 퉁퉁 부은 발목에 무심코 무게를 실어 가파른 계단에서 구르기까지 했다. 중간쯤 가다가 썩은 내가 진동하는 어느 남자의 손이 그를 붙잡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고꾸라져 정신을 잃었을 게 자명했다.
“이게 그놈입니까? 왕녀님이 잘 잡아두라고 말씀하신….”
“그렇다.”
“여기부터는 저희가 잘 맡아 데려가겠습니다.”
시장에서 팔려나가는 송아지가 된 것 같았다. 바란을 묶은 줄 끝이 방금 전에 바란을 잡아 일으킨 냄새나는 남자에게로 넘어갔다. 홱 당기는 힘에 굴복해 제자리에 엎어졌다. 가쁜 숨을 쉬고 핑그르르 도는 시야에 멀미가 나서 헛구역질을 했다.
“시작도 안 했는데 엄살은, 새끼.”
정신을 잃기 전에 바란은 얼핏 자신의 몸을 받쳐 들고 있는 강인한 힘과 코를 찌르는 냄새를 느꼈다. 남자는 어깨에 바란의 배를 대고 반으로 접은 채 들쳐안고 있었다. 바란은 위아래로 들썩이는 움직임에 멀미를 느끼면서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다음에 바란이 느낀 것은 심장이 멎어버릴 것같이 차가운 물세례였다. 화들짝 몸이 먼저 깨어나고 정신은 뒤늦게 따라왔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물을 끼얹어 강제로 깨어나게 했다는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약간 걸렸다.
“흐, 추, 추, 추워….”
이빨이 부딪치며 시끄러운 소음을 냈다. 가슴에 팔짱을 껴서 조금이라도 체온을 그러모아 보려던 바란의 시도가 좌절되었다. 옴짝달싹도 못하도록 양팔에 각자 수갑이 채워졌고, 거기에 쇠사슬이 연결되어 좌우로 팽팽히 내걸렸다.
당황해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바란은 속눈썹에 묻은 물방울이 활활 타는 주홍 불빛을 온통 산란시키는 바람에 시야가 희뜩희뜩하고 어지러웠다. 고개를 힘없이 돌려 물기를 털어내고 눈을 계속해서 깜빡였다. 그렇게 넋이 빠진 사람처럼 몸부림을 치는 바란의 뺨에 고운 손바닥이 날아들었다.
짜악, 하고. 커다란 마찰음이 들렸다. 주변은 온통 매끈한 돌벽인지 소리가 시끄럽게 반사되었다. 바란은 아찔한 머리를 가누지 못하고 아래로 떨구었다. 양팔이 벽에 팽팽하게 고정되어 몸을 완전히 바닥에 붙일 수 없었다. 공중에 상체가 애매하게 떴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흥분으로 떠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을 즈음에, 발가락을 기형으로 구부러지게 만드는 뾰족한 구두코가 눈에 와 박혔다. 의심할 여지 없는 수리 드라코슨이었다. 이런 곳까지 품위를 지켜 그 잘난 드레스와 구두를 챙겨올 만한 위인은 그녀 외에 없다.
“얼마나…. 당신은 짐작도 못 할 거예요, 후작.”
바란의 마음에 거대한 고민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비록 앙살라테가 기밀을 유지하라고 거듭 강조하긴 했다지만, 이런 수난마저 감수하고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한단 말인가? 세상에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이 있다. 더군다나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앙살라테가 굳이 내 정체를 알리는 게 아니라, 단지 해치지 못하도록 귀띔하고 사라진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머뭇대며 고개를 들었는데, 왕녀의 곁에 해가 기울어 동쪽으로 늘어진 그림자처럼 길고 가느다란 남자가 하나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니카였다. 질겁하여 모든 일을 털어놓을 것만 같던 바란의 입술이 절로 다물렸다.
왕자와의 계약에 무엇이 걸려있는지 기억해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널 얻기로 했었지.’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욕심 같으니라고! 불덩이 같은 울음이 목구멍을 홧홧하게 태웠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추레한지 생각하니, 바란은 그만 니카의 눈에 들지 않기 위해서라면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어졌다. 더 이상은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왕녀가 있는 앞에서는 더더욱.
‘잣자후에 도착해서 작전을 개시하실 때, 저를 기억해주십시오.’
대체 밀렌 아겐호프가 꺼내놓은 이 말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그저 대공의 눈 가리기 식 연막에 속은 순진한 청년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겐호프라고 하면 대공의 수뇌부 중에서도 신임이 두터운 날만도 남작과 인척 관계에 있는 가문이다. 거짓 정보에 놀아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대공이 정말로 바란을 아직 버린 게 아니란 말인가? 왕자에게 있어서 바란은 아직 이용가치가 있는 간자일까?
“이오 사사바란을 기억하고 있겠죠?”
“어디… 개 이름인가?”
눈앞에 별이 반짝였다. 반대쪽 뺨에 불이 난 듯 아팠다. 시야가 잠깐 온통 희뜩 했다가 돌아왔다. 쇠 비린내가 나고 볼 언저리가 간지러웠다. 왕녀의 오밀조밀한 섬섬옥수에는 섬세한 세공으로 빚어낸 뾰족한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왼손 약지에 꼈으니 물론 결혼반지이리라.
바란은 손이 묶여 있지만 않았다면 뺨을 몇 번이고 문질렀을 것이다. 픽 웃음을 터뜨렸다. 속이 빤히 보였던 까닭이었다.
“왕녀 전하, 지금 엄한 곳에다 화풀이 하고 있는 거야. 알아?”
수리는 대답 없이 뺨을 한 번 더 갈겼다. 소리가 아주 제대로 났다. 이빨에 짓씹어져 찢어진 입안 연한 살이 끈끈한 피를 냈다. 바란은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엄한 곳이라니. 착각도 유분수지, 자신이 무슨… 선량한 백성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요? 이오 사사바란, 이 이름을 후작이 모를 리가 없지요.”
나긋나긋하던 목소리가 대번에 영구동토의 칼바람처럼 변했다.
“후작이 죽였잖아요. 나의 이오를.”
“미치광이처럼 넘겨짚는 것 좀 그만할 수 없-”
“왕녀님을 모독하지 마라.”
매끄러운 금속성에 바란은 그만 숨이 턱 막혔다. 무정한 니카가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천천히 잡아당겨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아래턱이 떠는 것을 감추려 이를 사리물자, 턱이 빠질 것처럼 아려왔다. 가까스로 침을 한번 꼴딱 삼켰다. 침착을 가장하려고 입술 끝을 올렸으나 처절히 실패하고 말았다.
형편없이 일그러진 낯을 보고 승리의 웃음을 지은 수리가 턱을 계산된 각도로 치켜들고, 팔을 뻗어 니카의 가슴 앞을 가로막았다.
“됐어요, 경.”
“허나-”
“끼어들지 말아요.”
니카는 형형한 안광으로 바란을 겁주면서도 길들여진 맹수처럼 발톱을 잘 갈무리했다. 니카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다. 바란과 지냈던 시간, 잣자후로 오는 동안 배 위에서 바란을 구해주고 화를 냈던 일, 전부 다 마치 신기루 속에서나 일어났던 것처럼 의뭉을 떨고 있는 것이다.
니카의 가슴팍 앞에 드리운 왕녀의 가녀린 팔을 쳐다보았다. 미성숙한 소년이나 느낄 법한 투기가 끓어올랐다.
기만을 내세워 부당하게 독점했던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바란은 마치 그의 몫을 빼앗긴 것 같은 박탈감으로 죽어버릴 지경이었다. 배나 가슴 중간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모든 생각과 감정이 소용돌이를 그리며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오는 늘 클라텐에게 한없는 부채감을 느꼈어요. 후작에게도 같은 이유로 쩔쩔매더군요.”
니카에게 못박인 눈길이 비로소 왕녀에게로 옮겨갔다.
“…친한 듯이 부르는군.”
“정말로 친했으니까요.”
금시초문이었다. 휘둥그레 뜬 눈을 치켜든 바란은 당장이라도 사실 여부를 묻고 싶었지만, 질문을 우아하게 가다듬느라고 시간을 끌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왕녀는 실소하며, 파란 눈동자만큼은 형제가 아주 꼭 빼닮았다고 말했다. 말 속에 아련한 여운이 있어 바란을 고민스럽게 만들었다.
클라텐은 수도에 있는 사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바란은 가정교사를 고용해 영지에 틀어박혀 살았으니 두 형제의 생활에는 공유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방학 중에 탈타미오로 돌아온 클라텐은 곧잘 바란에게 수도에서 겪은 이야기를 풀어놓고는 했는데, 거기에 수리 드라코슨이라는 커다란 조각이 있었다면 바란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 그 애는 당신 얘기 한 적 없어.”
“그거야 당연히 비밀로 했겠죠. 반푼이 왕녀와 사관생도들이 함께 어울린다 하면… 온갖 추레한 말 나오기 좋으니까. 보통 나에게만 타격이 가는 추문들이긴 했지만요.”
“클라텐은, 내게 뭐든지 얘기했어.”
“그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거 알 텐데요.”
“…….”
클라텐이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것을 모른 체 내버려 두고는, 이제 와서 핏대를 세우며 혈육이라고 소리친 격이었다. 바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수리의 기분도 유쾌한 구석은 없어 보였다.
“우린 둘 다 클라텐을 버렸잖아요.”
왕족에게 무례한 어투로 일일이 대꾸하는 것을 너그러이 보아 넘기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왕녀는 짧은 경고를 내뱉으면서 투박한 탁자 위의 검은 가죽 채찍을 집어 들었다. 품위 있는 손에 보기만 해도 치가 떨리도록 흉악한 채찍이 들려 있는 건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주변을 곁눈질하던 바란은 축축한 습기가 들어찬 ‘참회의 방’ 안에 예상했던 대로 갖가지 고문 기구들이 반원을 그리며 늘어선 것을 발견했다. 끔찍한 예감이 소름으로 변하여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당신 얘기로 돌아가죠.”
수리의 험악한 채찍 끝이 바란의 턱밑 급소를 찌를 것처럼 우악스럽게 달려들어 얼굴을 받쳐 올렸다.
“이오를 죽이라고 명령한 것은 대공인가요?”
“내가 죽인 게 아, 아악!”
불시에 휘두른 채찍 끝에는 돌조각과 쇠구슬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채찍의 묵직한 술이 빠른 궤적을 그리며 파공음을 내더니, 그대로 바란의 왼쪽 팔뚝에 직격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쇠사슬이 절그렁거렸다.
“이오는 얼굴의 온갖 구멍에서 탁한 피를 뿜어냈어요. 혀가… 새카맣게 굳어 있었고요. 의원들은 전부 독에 당한 거라 말했죠. 그것도 남쪽 어느 촌락의 집시들이나 쓸 법한 아주 야만적인 독이라고요.”
“흐…아, 아파….”
“생각을 좀 해봐요, 그 예쁜 머리로. 장식으로만 달고 다니지 말고!”
조곤조곤 다그치는 게 얼마나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던지, 바란은 그만 속으로 이 여자 역시 틀림없는 대공의 혈육이라 인정하고 말았다. 드라코슨의 피에 근친혼으로 인한 광증이 흐른다는 소리는 익히 전해 들었다. 왕녀의 호흡은 불안정했고, 품위와 예의를 끔찍이 챙기던 것 치고는 거친 언사를 남발했으며, 눈빛은 약간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코코탄 전투로 감람골에 가기 전에 대공은 왕국 남부에 있었다고요. 알아요? 그런 독을 구하기엔 제격이죠. 게다가, 이오에게 대공 측 인사와 독대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뒀는데도 당신과는 따로 만났더군요. 클라텐에 대한 죄책감을 좀 덜어보려고 그랬는지.”
“답을 다 정해놓고 따지면, 내가 대체… 윽!”
다시 한번 채찍이 공기를 찢고 독사처럼 쇄도했다. 오른쪽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가슴 우리만 들썩거릴 뿐 숨이 좀처럼 쉬어지지 않았다. 바란은 꺽꺽대며 거품을 물 기세로 떨었다.
“너는 대공이 시키는 대로 전부 다 하는 도사견이잖아.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 그 증거 아닌가, 후작? 사난타에 앙살라테의 발을 묶어두려고 스스로 미끼가 된 거겠지?”
수리는 점차 파고를 높여 다가오는 분노에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가녀린 목줄기에 핏줄이 잎맥처럼 도드라졌고, 붉은 입술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채찍을 연거푸 휘둘러 바란의 옷가지에 핏물이 점점이 배어 나오는 모습을 감상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왕녀가 팔을 높이 쳐들었다. 니카가 서둘러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독살스러운 기세로 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니카는 움찔 어깨를 떨며 쪼그라들고 말았다.
“좀 전에는 내 말에 토를 달더니, 이제는 거역하겠다는 건가요?”
“흥분… 하셨습니다.”
수리가 뭐라고 쏘아붙이려는 참이었다. 뒤에서 무시무시하게 부푼 근육을 뽐내고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며 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간수 일을 오래 해서 고문에는 도가 튼 전문가들이었다.
“아,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께서 들고 계신 그 채찍은 자칫 잘못 휘둘렀다간 저런 말라깽이는 곧장 저승행입니다.”
“제대로 심문하시기도 전에 뒤져버린다면 곤란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만류보다도 효과적인 말이었다. 수리는 정말이지 바란 탈타미오가 그녀가 겪은 절망의 십 분지 일도 느끼기 전에 꼴깍 죽어버린다면 허탈해서 눈물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하릴없이 채찍 든 손을 내렸다.
바란은 수리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손을 치켜드는 것을 보고 채찍을 휘두르는 대신 뺨을 한 번 더 얻어맞으리라 예감했다. 눈을 질끈 감았는데….
“왕녀님.”
뜻밖이었다. 니카가 끼어들었다. 바란은 그를 더 또렷이 보기 위해서 시야에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얼른 치워버렸으면 했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왕녀는 물론 니카의 훼방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쇄골이 도드라지는 마른 상체를 들썩이며 심호흡을 했다.
“사난타에서부터 심문을 연이어 치르느라고 기력이 많이 쇠했을 겁니다. 간수들 말마따나 자칫하면 병을 얻어 제대로 추궁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참회의 방이 아니라 방으로 옮겨서, 회복하는 것을 기다린 뒤에-”
“감히.”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자초한 매였다. 분노와 원한으로 홱 돌아버린 수리의 귓가에다 마치 바란을 변호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쏟아냈으니, 아무리 니카라도 처벌 없이 넘어가기는 어려웠다. 뺨을 갈기는 것은 개중에 가장 온건한 체벌이었다. 특히 용인인 니카에게는 정말이지 간지럽지도 않은 정도였을 테니까.
잘 알았다. 그런데도 바란은 마음속 분노와 싸워야 했다.
사랑하는 니카는 왕녀의 작은 손바닥에 맞은 뺨을 감싸 쥐고 있었다. 뱃속에 천불이 나 들끓는 것을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다리에 조금 힘을 주려 했으나 연약한 몸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건방져요. 허락도 없이 되묻는 것, 잘난 듯이 나서서 충고하는 것, 감싸고도는 것, 전부다!”
“…….”
“경은….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군요. 내가 거뒀던 용인은, 이렇게 주제 모르고 나서는 얼간이가 아니었는데.”
그러자 니카는 세상을 다 잃어버린 것처럼 허망한 눈동자로 왕녀를 바라보았다가, 그마저도 황송하다 생각했는지 얼른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 어떤 상처도 남지 않았을 뺨 위를 울퉁불퉁한 손으로 뒤덮고 화난 주인 앞에서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수리 왕녀는 오랜 연심을 간직한 니카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방식이 외면임을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내저으며 간수들의 배웅을 받고 참회의 방을 홀로 나섰다.
니카는 이상하게도 왕녀를 곧장 뒤쫓아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바란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바란은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니카의 관심을 견디며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돌벽에 몸을 기댔다. 고개가 지친 반원을 그리며 위로 젖혀졌다. 씨근덕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핏자국이 얼룩진 거친 입술을 꿈틀거리며 빈정댔다.
“안 가고 뭐 해.”
말하는 즉시 ‘공연한 말을 했구나.’ 하며 후회하고 말았다. 눈살을 험악하게 찌푸린 니카가 정말로 곧 바란을 등지고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잠시 잠깐 비추는 얼굴도 아쉽기 그지없어 아껴 보던 마당인데, 이제 멀어지는 뒷모습만 보고 탄식을 삼키려니 참 제 꼴이 우습기도 했다.
* * *
모질게 앞서나가던 것과는 다르게 수리는 문턱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구태여 찬바람을 맞으며 멈춰 서 있었다. 눈발이 날려 빨간 머리칼에 들러붙었다. 처음 손을 내밀어주던 날의 기억이 워낙 강렬히 박혀 있기 때문일까, 니카는 그녀가 눈을 맞고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절로 가슴이 떨려오곤 했다. 황급히 니카가 다가가자, 왕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너무했다고 생각해요?”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이렇게 물어왔을 때, 니카는 즉각적인 부정 말고는 늘어놓을 말이 당장 생각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대답을 먼저 뱉어두고 뒤이어 고민했다. 너무했냐고? 니카에게 잔뜩 쏘아붙인 말들을 두고 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왕자의 명령을 어기고 잔악후작을 초주검이 될 때까지 팬 것? 강변의 어민들이 건어물 말리는 것처럼 후작을 쇠사슬에 걸어두고 서서히 말라 죽게 만든 꼴을 일컫는 건가?
돌이켜 생각하니 곧바로 속이 뉘엿거리며 부대꼈다. 도저히 눈 뜨고 봐주기 힘들던 바란 탈타미오의 모습을 떠올렸다. 체기가 오른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방금 내놓은 것과는 또 다른 대답, 그러니까 ‘예.’ 하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렁거렸다.
그러나 수리의 말이 맞았다. 니카는 왕녀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되어 있는 기사이지 앙살라테의 충신이 아니었다. 주군의 행동을 흠잡거나 간언하는 것은 주제넘었다.
“대답에 확신이 있는 것 같진 않네요.”
“정말입니다.”
수리의 뒤를 쫓아 성큼 걸어나가며 니카가 대답했다.
“그저 조금 놀랐던 것 같습니다. 전부터 전하께서는 피 보는 일을 꺼려하셨으니까….”
대강 넘기려고 했던 것 치고는 돌연 본심이 박차고 나온 셈이었다. 니카는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었다. 말을 돌려 하거나 솜씨와 눈치를 갖추고 지껄이는 데는 예로부터 쥐약이었다. 꼬리가 조금만 길어지면 곧잘 실수를 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사실인걸요.”
잣자후의 하얀 대리석 성안을 분주히 돌아다니던 시중인들이 왕녀에게 깊숙이 허리를 굽혀 절했다. 니카는 눈을 내리깔았다. 값비싼 붉은 융단 위로 니카의 더러운 신발에서 오물과 물기가 옮겨가 얼룩덜룩 자국을 남겼다.
“예나 지금이나 피바다는 못 견뎌요. 전에 내 물건을 소매치기해 간 아이가 매질 당하는 것을 못 견뎌서 그냥 못 본체 넘어갔던 일 기억해요?”
피 칠갑한 잔악후작을 참회의 방에 홀로 남겨두고 오는 길이다. 니카는 모순점을 짚지 않고 슬그머니 왕녀가 던져놓은 이야깃거리를 주워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고통스럽게 따끔거리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민스러웠다.
“벌써 팔 년이 다 되어가는 일이지요. 분명히 기억합니다.”
“아, 경은 가끔 아주 사소한 것에도 진지하게 굴어서 소름이 끼쳐요. 팔 년 전이라고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죄송합니다.”
“웃자고 한 얘기예요.”
니카는 애써 입술 끝을 당겨 웃었다. 그다지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었지만, 왕녀가 그의 웃음을 원한다면 어서 대령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입매를 이상하게 일그러뜨린 니카를 돌아본 수리가 동그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가 픽 한숨소리처럼 웃었다.
“잔악후작을 그 꼴로 만들었다고 입바른 소리나 할 줄 알았는데…. 전해 듣기로는 그게 경 특기라면서요? 분위기나 남들 시선에 아랑곳없이 옳은 소리로 맥 끊어내는 거. 내 앞에서는 토 다는 일이 없어서 몰랐지 뭐예요.”
“옳고 그름을 가려 상과 벌로 다스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셨습니다.”
“알아요. 내가 그렇게 가르쳤지요. 어쨌든 잔악후작도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잖아요, 안 그래요?”
니카는 더 물고 늘어질 거리가 있는데, 방금 들은 소리 때문에 참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 보였다. 왕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득한 기억에 닿았다.
그래도 빛나는 두 눈 만큼은 이미 죽어 없어진 부마가 아니라 니카의 낯 위를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보다 기대감이 앞서는 것을 보면 니카의 충성도 결국 이기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시선이 훑고 간 궤적이 붉게 달아올랐다.
“경은 가끔 보면 진짜 순진하네요. 이오도 그랬는데.”
니카는 그만 어쩔 줄 모르고 입을 앙다물었다. 바싹 메마른 가슴에 불씨가 당겨지는 것만 같다. 불길이 넘실대며 해묵은 감정을 장작 삼아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층계를 오르다 말고 일어난 일이었다. 원래도 과묵한 니카가 잠깐 난간에 손을 얹은 채 침묵을 고수했다. 왕녀는 그를 돌아보며 손을 내저었다. 부지불식간에 새어나간 실언을 철회하는 것처럼.
“방금 한 말은 잊어요.”
“왕녀님, 저는….”
니카는 여태 이런 식으로 왕녀가 끊어낸 감정조각을 들고 나아와 자기주장을 펼친 적이 없었다. 칠 년, 이제는 팔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니카의 은애란 그런 것이었다. 은밀하게 모셔두고 매일 닦아 빛내지만, 그것을 꺼려하는 왕녀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들이밀지는 않는 것.
‘겁쟁이셨지, 니카 경은! 어떤 여자가 너무 좋아서 칠 년 넘게 곁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입 한번 벙긋한 적이 없잖아.’
잔악후작의 말이 밟혀서였을까, 니카는 난생처음, 무례하게도 주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왕녀는 저잣거리 광대나 그 밖의 온갖 별난 것들을 보는 표정으로 녹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카는 자신이 낸 것이 용기인지 객기인지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정말로 유감입니다.”
“…….”
“부마님 일도, 그리고….”
수리가 탈타미오 후작을 앞에 두고 클라텐에 관해서 언급했을 때, 니카는 심장이 곤두박질칠 정도로 놀라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반문할 뻔했다. 입을 다무느라고 용을 써야 했다.
그 순간의 압박감을 다시 한번 느끼며 머뭇거리고 있자 왕녀가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클라텐 얘기라면 굳이 할 필요 없어요. 사실, 그를 죽인 것을 사죄한다면 오히려 반역에 동조하는 행위가 되는 셈이잖아요.”
수리는 니카의 간절한 호소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일방적인 감정이 부담스러우리라는 거야 예상했지만, 그래도 야속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는…!”
층계를 마저 올라가 어느새 융단 위를 사뿐히 거닐고 있는 수리의 뒤를 니카는 분주히 따랐다. 긴 다리가 성큼 계단을 두 단씩 건너뛰었다.
“저는 늘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공감하고, 가장 큰 위로가 되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제 팔 년이 되어가는 오랜 시간 동안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러 왔으니까요.”
“그 이상 말하지 마요.”
이 말은 그저 그런 거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니카는 아직 그의 마음에 관해서는 벙긋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낌새를 채고 말문을 틀어막다니, 니카를 단념시키기 위함이나 다름없었다. 어찌할 도리 없는 모멸감이 들어 니카는 손바닥에 얼굴 반쪽을 파묻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괜한 욕심 부리지 말고. 니카 경,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요. 누구도 날 위로하지 못한다고요. 시간이 아무리 쌓인들 그 밀도마저 같지는 않아요.”
차분한 말은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은 수리가 걸음을 조금도 늦추거나 니카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곱게 땋아 내린 붉은 머리카락과, 땋은 머리 갈래 사이로 보이는 뽀얀 목덜미, 하얀 가르마. 이게 니카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경이 앞으로 얼마나 더 나를 지키건 간에 이오와 같은 저울에 올라가진 못할 거예요. 영원히.”
이 말과 함께 니카의 세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세상을 이루는 알갱이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다 곱게 가루가 되어 부서져 바람에 날아다녔다. 괜찮아, 침착해. 어차피 원래도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잖아…. 자기최면을 걸며 최대한 눈앞의 모든 상황을 감당하려고 노력했다. 물기에 젖은 들숨을 쉬었다. 목젖이 꿀꺽 울음을 삼켰다.
왕녀는 방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몸을 반쯤 돌려 니카를 돌아보았다. 눈을 맞춰주지 않아 원망스럽다 생각했는데, 정작 그녀가 뒤를 돌아보고 나니 그러지 않는 편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통수를 보면서는 상상이나마 할 수 있었으니까.
“…알아들었으면, 이만. 혼자 있고 싶어요.”
수리는 채찍을 휘둘렀던 손을 뒤로 겹쳐 잡으며 니카에게 물러가라고 말했다. 그녀보다 키가 훌쩍 큰 니카는 위로부터 곁눈질을 조금 하면 등 뒤에 감춰진 손이 마구 떨린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아직 충실한 기사의 가면을 쓴 채였다면, 주군에게 바치는 위로인 양 위장해서 그 손을 슬그머니 잡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니카는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기사의 가면을 완전히 벗지도, 쓰지도 못한 채 덜렁거리며 턱께에 걸어두었다. 그래서 이 명령에도 얌전히 따라야만 했다.
“…….”
대체 무슨 과분한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니카는 잘 꾸며진 왕녀의 방을 뒷걸음질로 빠져나왔다. 수치심에 북받쳐 얼굴에 온통 열이 올랐다. 후회와 절망의 바다에 빠져 널빤지 하나 없이 허우적대는 것만 같다.
‘말하지 말았어야 했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그 잠깐의 욕심을 못 견뎌서 다 망쳐 놓다니. 이러다 만일 말조차 붙일 수 없는 관계로 추락해버린다면 정말 혀를 깨물어 세상을 떠나고 싶을 것이다. 니카의 삶에서 왕녀를 제하고 나면 유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까닭이다.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을까?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왕녀님 앞에 나아가 멍청한 표정으로 맹세하거나 철회하면, 적어도 가까운 기사로서는 남아있게 해주시지 않을까?’
왕녀의 품 바깥에 있으면 니카는 늘 갈피를 못 잡고 헤매었다. 갈 곳도,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길 잃은 어린아이에 빗댈 만했다. 눈발이 점점이 흩날리는 정원을 홀로 거닐던 니카는 같은 곳을 계속 맴돌았다. 흐린 겨울 하늘을 바라보는 눈에 초점이 없었다.
방문이 닫히는 틈으로 왕녀의 모습이 길게 가늘어지는 동안, 니카는 그녀의 어깨너머에서 막쉬롭의 모습을 봤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적어도 그 새카만 후드 안으로부터 뻗어 나온 새하얀 머리칼을 헷갈릴 일은 잘 없었으니까.
다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을 먼저 정돈할 요량이었다. 귀청까지 맥박이 뜀뛰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쿵, 쿵, 쿵…. 너무 시끄러워서 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머릿속이 틈만 나면 희뜩희뜩 어지러워졌다.
* * *
니카는 눈이 꽤 두껍게 쌓인 정원을 성큼성큼 가로지르고 있었다. 두터운 가죽신을 신고 있는데도 언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발가락 사이까지 스며들었다. 점점이 남겨진 발자국은 곧 몰아치는 눈발과 바람에 의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뒤덮여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쌓인들 그 밀도마저 같지는 않아요.’
자신이 그녀에게 있어서 큰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말을 듣고 나니, 니카는 그만 그의 모든 존재기반을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허무했다. 그러면 이제 그가 가진 게 대체 뭔가 싶었다. 그런데 또 한켠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비난이 목소리를 높였다. 왕녀를 향한 감정을 은애라고 일컫자 정했다면 마땅히 감정을 숨기고 웅크리고 있었어야지, 괜한 용기인지 객기인지를 부렸다가 파국을 맞은 게 아니냐고.
…좋을 대로 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네 감정의 책임을 왕녀님께 돌리려 하느냐고. 니카는 손을 까딱이며 주먹을 쥐었다. 외사랑이라는 게 실로 정신병이긴 한 모양이다. 혼자만의 사정과 감정에 취해 상대에게 올가미를 휘두르고 다니다니.
‘무엄하고 건방지기 그지없어. 나는, 나는….’
다닥다닥 맞붙어 소음을 만들어내는 이빨이 거슬려서 턱에 힘을 꾹 주었다. 어디를 향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걸음이 가는 대로 발을 놀렸다. 흉흉한 기세를 사방에 흩뿌리며 걷는 니카를 선뜻 멈춰 세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 생각에 지나치게 빠져들었을 때, 니카는 대책 없는 방랑벽을 발휘하여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발을 움직이곤 했다. 문득 제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신이 들지 않아 머뭇대며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이러저러한 일이 바빠 다듬지 않는 동안 니카의 검은 머리카락이 조금 자랐다. 바람에 멋들어지게 나부낄 정도는 되었다.
‘여기가 어디지?’
대답은 눈앞에 덜컥 놓여 있었다. 왕자군의 표식을 단 병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경비를 삼엄히 하고, 고문과 홀대로 인한 아우성이 메아리처럼 뿜어져 나와 지상에까지 들리는 곳. 포로들을 수용하고 죄인을 심문하는 곳.
잣자후 성의 외진 곳에 존재하는 감옥의 입구였다. 니카는 문득 생각해서는 안 될 사람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는 괜찮을까? 채찍을 맞고 나뒹굴 때 피가 번져 나오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의원에게 보이기나 했을까?’
그런데 이 생각은 꼭 안절부절못하는 걱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숙적의 상태를 염려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던 잔악후작의 목소리가 얼마나 그럴싸했는지 돌이켜보면, 결국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 자라난다. 그야말로 용납할 수 없는 그리움이.
더군다나 왕녀의 말 한마디에 꿰뚫려 가슴속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지금 이 순간에는 잔악후작이 거짓으로나마 내밀었던 사랑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추억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나의 니카.’
누구의 것이라고 불리는 게 얼마나 가슴을 충만하게 채웠었는지를….
니카는 이를 사리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깟 추억에 빠져 후회할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잔악후작이 그를 기만한 남자라는 점을 차치하고 생각하더라도, 왕녀에게 거절당해 처량해진 마음을 다른 이로 달래겠다는 사고방식은 정말이지 꼴불견이며 그의 순결한 연심에 대한 배반이었다.
‘안 돼. 생각하지 말자.’
입술을 깨물거나 주먹을 꼭 쥐어 초승달 같은 손톱자국을 내서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노력했다.
‘바보 같은 짓이야.’
하지만 사람이란 어쩌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늘 이렇게 간사하기만 할까.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니카는 지하 감옥으로 홀린 듯이 내려갔다. 층고가 높은 지하 감옥과 지면 사이에 교묘히 숨겨진 참회의 방으로 향하는 길목은 관계자와 수뇌부, 혹은 그 측근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기밀사항이었다.
‘괜찮은지만 확인하고 나오자.’
니카는 망설임이 묻어나는 손짓으로 벽인 양 위장한 출입구를 두드렸다. 울림통이 큰 소리가 났다.
‘아직 추궁할 것이 산더미인데 정말 이대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벽이 조금 이지러지는가 싶더니 네모난 윤곽을 따라 문이 쑥 들어가고 옆으로 젖혀졌다. 문틈으로 좀 전에 본 기억이 있는 간수 하나가 목을 쭉 뺐다.
“뭐 하는 놈이야? 여긴 출입금지… 기, 기사 나리.”
간수 역시도 니카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을 야무지게 붙잡은 솥뚜껑 같은 손이 슬그머니 떨어져 나갔다. 살살 문을 밀자 니카가 들어갈 만큼 문이 열렸다.
“무슨 일로 다시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요?”
바란 탈타미오를 꼼짝 못 하게 결박해두고, 그 앞에 앉아 무료하게 감시를 이어가고 있던 간수들이 니카의 등장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개중에 간사하게 생긴 자가 니카의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뭐라고 손을 비비며 아첨했다.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니카는 대강 손을 저어 이들을 뒤로 물렸다.
“직접 추궁할 것이 있으니 물러나 있어라.”
간수들 중 하나가 혼혈인에게 하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모욕감을 느껴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씨팔, 별 같잖은 새끼한테 이래라저래라 소리를 다 듣네.”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니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동료 간수가 기겁하여 입을 틀어막았다.
“야, 새끼야. 가만있어.”
“튀기한테 기고 들어가? 넌 배알도 없냐?”
“말귀를 몰라 듣냐, 좀 닥치고 있으라니까.”
니카가 돌아보기도 전에 다른 간수가 참으라는 식으로 제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과적으로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뒤로 물러나기는 했다. 앞에서야 기사 작위에 이렇게 설설 기는 시늉을 해도, 조금만 멀어지면 뒤에서 들먹이며 입방아를 찧어 니카의 이름이 가루가 되도록 빻을 게 안 봐도 뻔했다.
철창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니카는 문득 숨을 멈췄다.
녹슨 창살 너머로 힘없이 늘어진 금발이 보였다. 허공에 덩그러니 떠 있는 금색 머리채는 불그스름한 기름 등 불빛을 받아 붉은 녹을 입은 것처럼 보였다. 바란 탈타미오. 니카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입모양으로만 중얼거렸다. 주변의 자잘한 소음에 중얼거림은 완벽히 파묻혀 사라졌다.
‘그러면 빨간 머리 그만할래, 나는.’
애써 미뤄둔 기억이 고작 저 머리칼을 한번 쳐다보는 것만으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깨어났다. 난생처음 지독한 감기에 걸려 앓던 때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왔던 체온, 약간의 틈도 없이 바싹 붙은 단단한 몸, 더듬어 내려가면 울퉁불퉁한 갈빗대가 천천히 만져지는….
바란은 니카가 소란을 피우는 소리를 분명 들었을 텐데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왈칵 초조한 마음이 올랐다. 의식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오물과 피가 뒤섞여 묻은 까닭에 좀 전의 상처가 얼마나 크게 남았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의원을 불러 치료했느냐 물었더니 간수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따름이었다. 원칙상 참회의 방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심문자 외에는 접촉을 금한다고 했다.
“나가 있어라.”
“하지만 왕녀 전하의 명령으로는-”
“내가 책임지겠다. 이만 나가 봐.”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니카가 날카롭게 남자들 쪽을 돌아보았다. 매서운 기세에 움찔 놀란 이들은 하릴없이 방 바깥으로 나섰다. 밖에서 보면 돌벽과 다름없어 보이는 위장 철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깥세상과의 단절은 이 안에 니카와 바란 단 두 사람만이 남았음을 의미했다. 선실에서, 그리고 지하수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니카는 일순간 머리가 아찔하고 여기까지 찾아온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처량해졌다.
니카는 일부러 발기척을 크게 내면서 단 한 걸음이면 충분했던 것을 작은 걸음으로 쪼개고 쪼개어 잔악후작에게 다가섰다. 그렇게 걷는 동안 아주 오랜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
마침내 녹슨 철창이 신발코에 닿았다. 무심결에 툭, 하고 가볍게 쳤는데 금속 창살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깨갱거렸다. 힘없이 쇠사슬에 매달려 늘어져 있던 바란의 어깨가 멈칫 떨었다.
아직 의식이 남아있거나, 아니면 니카가 낸 소음 때문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는 치닫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니카는 안도감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놀라 즉시 입속말로 핀잔을 주었다가,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인지 깨닫고, 자신의 감정에 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엄숙한 표정을 내걸었다.
‘배 위에서 봤던 것보다 얼굴이 더 상했군. 그 짧은 사이에.’
하기는 잣자후에 도착하자마자 맨몸으로 끌려와 참회의 방에서 채찍질에 나뒹구는 수모를 겪었으니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니카는 눈살을 찌푸리고 바란 탈타미오의 낯을 살폈다. 여윈 얼굴에 전에 없던 옴폭 들어간 굴곡이 생겼다. 붉은 기름 등불에서 나온 불빛이 바란의 얼굴에 쨍쨍히 쪼였다.
탈타미오 성, 서재의 벽난로 앞에 함께 쪼그려 앉았을 적에 책에 집중하는 척하며 몇 번이고 훔쳐보았던 그 얼굴이다. 냉가슴이 사르르 녹는 듯했다. 그때와 견주어 보면 몇 가지 차이가 있긴 했다. 이를테면, 뺨이 홀쭉해지는 바람에 얼굴윤곽에 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각이 져 있다는 점.
바란이 가련하게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련한 속눈썹을 위아래로 떨며 깜빡이다가, 새파란 눈으로 니카의 모습을 식별해낸 다음부터 눈 깜빡이는 것을 멈추었다. 위아래로 구부러진 속눈썹 사이에 자리한 눈빛이 마치 니카를 잡아먹을 듯 강렬했다.
“…왜 혼자 왔어.”
다짜고짜 용건을 묻는다. 니카는 그만 할 말이 없어졌을뿐더러 차갑게 식은 냇물에 단번에 몸을 던지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적잖이 당황한 것이 드러나 보였던 것일까, 바란이 기세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매섭게 구김살이 자리 잡았던 미간이 반듯이 펴진 게 그 증거였다.
“왕녀의 명령으로 온 거야?”
맥없는 질문에 니카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럼?”
“대단한 건 아니다. 몸은-”
잔악후작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추켜올렸는데, 곧 끔찍한 두통이 그 반듯한 머리통을 덮치는 바람에 눈살을 엉망으로 어그러뜨렸다. 몸부림을 치는 대로 쇠사슬 뒤섞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미안. 방금 뭐라고 했지?”
경황이 없는 중에도 잔악후작의 목소리는 사근사근하고 다정했다. 마치 탈타미오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던 그 상냥한 남자가 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니카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몸을 뒤로 물렸다. 무슨 심산인지 유추해내고자 수십 가지의 이유를 떠올리고 재어보다가 그만두었다. 뱃속에서 뭔가가 북받쳐 올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니카는 이 짧은 말 하나에 폭풍 속 나뭇가지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후작은 잠깐 뜸을 들였는데, 니카는 그가 짧은 웃음과 함께 그 이유를 짚어주기 전까지 자신의 맥없는 실수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 자꾸 존댓말 쓰네.”
그리고 이렇게 지적을 받자, 너무도 놀라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무심결에 경어를 꺼내 든 것이 이걸로 벌써 두 번째였다. 물론 신분의 고저로 따지고 보면 일개 기사 중에서도 천출에 속하는 니카가 탈타미오 후작에게 경어를 쓰는 것이 옳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니카는 왕녀의 뜻에 따라 탈타르를 떠나 도로 앙살라테의 세력에 몸을 맡기면서부터는 바란에게 신분에 따른 존칭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레이디이자 주군인 수리 왕녀가 증오하는 인사였던 데다가, 어차피 이 기나긴 내전이 끝장을 본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테니까. 체면 차릴 사이는 아닌 셈이다.
“나의 열아홉 살 니카로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응?”
“입 닥쳐.”
단호히 대꾸하지만 잔악후작은 어쩐 일인지 빙그레 웃으며 즐거운 기색을 내비쳤다. 거의 저승길 문턱에서 기웃거리는 듯이 넝마가 되어서도 저렇게나 상쾌하게 웃다니. 니카는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늘이 드리워 있던 후작의 얼굴은 불빛을 받아서일까, 오래간만에 혈색이 담뿍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또 그 입술은 얼마나 잘 조잘대는지, 니카는 조금이나마 후작의 건강을 걱정했던 것이 다 허튼 생각처럼 느껴졌다. 미간을 살풋 찌푸리고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일부러 찾아와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리고 아까도… 참 감동이었고. 날 위해 나설 줄이야.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좀 전에 보니까 뺨을 참 모질게 때리던데. 왕녀 말이야.”
“전하라고 존칭을 제대로 갖추어 불러라.”
“그럼 너도 나한테 ‘후작님’하고 불러보든가.”
침묵을 지켰다. 후작은 니카가 대답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처럼 새파란 눈을 치뜨고 말없이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아주 오랫동안, 불편한 공기를 견디지 못한 니카가 슬그머니 몸을 틀어 긴장감을 깨뜨릴 때까지. 후작은 실없는 농담처럼 가벼이 말했다.
“아니면.”
“…….”
“그냥 바란이라고 불러도 되고.”
진의를 알 수 없었다. 니카는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이 창살 안으로 달려들어 잔악후작의 옷깃을 붙잡아 당기고 이를 드러낸 채 따져 묻고 싶었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고. 고작 토룡 혼혈인 하나를 마구잡이로 흔들어서 네가 얻을 게 무어냐고.
“괜찮냐고 물었지. 내 귀가 맛이 갔거나 상상력을 동원했던 게 아니라면, 분명 그런 말을 들었는데…. 나는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
“…….”
걱정했던 적 없다. 니카는 속으로만 대꾸했다. 바란은 “흐음.” 하는 콧소리를 냈다.
“긍정적인 면을 보면, 여기도 그런대로 운치 있고 아늑한 곳이야. 적어도 지하감옥보다는 형편이 낫지. 잘은 모르지만 이 방은 반 정도 지면 위에 있는 것 같던데, 그렇지? 간수들 앉은 곳 위로 작은 창이 하나 나 있는데, 거기로 밤하늘이 보이더라고.”
니카는 그만 아연해졌다. 잔악후작이 턱짓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멀거니 뒤돌아보았다. 과연 창살로 단단히 막힌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안에서 불꽃을 태우려니 환기가 필요한 까닭에 달아 놓은 것 같았다.
“밤하늘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네 생각을 조금 했어. 때마침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나와 밤하늘이 무슨 관계지?”
니카의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관절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 화법은 전에도 겪은 적 있었다. 탈타미오 후작은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마구 던져대는 편이었다. 가만 듣고 있다 보면, 이 ‘아무 말’들이 결국 잘 짜인 퍼즐처럼 들어맞아서 니카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곤 했다.
“네 눈과 머리칼이 꼭 그런 색이잖아.”
그래, 꼭 지금처럼.
니카는 참회의 방에서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 엉망이 된 표정을 갈무리하려 애쓰며 바란 탈타미오에게서 등을 돌리고,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간수들에게는 별다른 언질도 주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점차 두 발이 교차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새하얀 눈발이 날리는 길을 가로질러 뛰듯이 걸어나갔다. 마침내 하얀 숨이 공기 중에 뱉어졌다.
‘저건 다 속임수야. 말씨, 숨소리, 눈을 뜨는 방식이나 의미심장한 웃음까지, 전부다. 저 천진난만한 말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이미 겪어 봤잖아.’
심장이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았다. 니카는 주먹을 쥐고 체기와 같이 답답함이 느껴지는 가슴께를 마구 내리쳤다. 눈송이에도 다 묻히지 못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사랑스럽다 생각하면 안 돼.’
* * *
앙살라테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버텼다.
아랫것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연자약하게 팔을 꼬고, 눈썹이나 추켜올리면서 없는 여유도 긁어내 보여야 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패색이 짙게 내려앉은 왕자군을 북돋아 줄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마지막 희망까지 바닥에 내팽개치지는 말자는 것이 앙살라테의 생각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부하들을 다 물리고 나서야 앙살라테의 안색이 바뀌었다. 오랜 불면으로 날 선 눈매가 지형지물을 간략히 표시해둔 막사 안 커다란 탁자에 머물렀다. 대공군을 뜻하는 새빨간 말들이 등고선 중간, 수도 애틀턴에 둥글게 둥지를 치고 있었다. 수도를 둘러싸 남서쪽 야만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고자 세워진 세 개의 탑 중 두 군데에도 마찬가지로 붉은 말이 자리했다. 수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지나게 되는 협곡에다 화살비를 떨구어 대기 딱 좋은 위치다.
초조한 주먹질이 탁자 위를 두어 번 후리고 ‘쿵, 쿵.’ 하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붉고 푸른 말들은 용케 제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으나 진동을 타고 그 위치나 방향이 미세하게 변했다.
‘이깟 조잡한 양동에 당하다니. 탈타미오 꼬마를 너무 믿었어. 헬린 놈이 이미 눈치를 챘을 줄이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란 탈타미오가 문제였다. 요 몇 개월은 최전방에서 물러나 영지민들을 다스린답시고 탈타미오에 얌전히 처박혀 있더니만 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책을 잡혔단 말인가.
꼬마가 환장하는 용인 니카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그 근방에서 죽지 않고 실종이 되었다면 바란이 니카를 외면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었다.
‘니카 경을 감싸다가 멍청하게 자멸하게 되었다든가…. 하긴 꼬마는 전부터 용인이 관련되었다는 소리만 들으면 상황을 막론하고 몸부터 던지곤 했지.’
손톱 옆 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면서 다시 한번 탁자 위를 낱낱이 쪼개어 보았다. 전속력으로 거인의 돌다리를 건너온 대공군의 뒤로는 사사바란 공작을 비롯한 유력 귀족 가문이 줄지어 서 있었다. 완벽히 왕자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았던 강서지역 자스자하로의 영주가 변심하여 대공을 돕는 바람에 진군에 탄력이 붙었다.
그래서 사난타에 있던 앙살라테가 뒤늦게 상황을 눈치채고 강을 건너 수도까지 내려왔을 때,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수도 애틀턴의 성벽은 온통 붉은 용의 비늘을 묘사한 힐벤의 깃발로 뒤덮여, 바람이 한바탕 불 때마다 붉은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를 꼭 악물었다. 한동안 물 한 모금 적시지 못해 바짝 말라 있던 입술이 날 선 송곳니에 닿아 비틀려 찢어졌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잠식했다. 초조한 마음에 품위를 잠시 잊은 채 다리를 달달 거리며 떨었다.
‘막쉬롭이 여기에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만약 그랬더라면, 막쉬롭에게는 혜안이 있으니, 진퇴양난으로 물러날 곳 없는 형편이 된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과 적중률 좋은 예언으로써 분명 커다란 힘을 보태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자리에 없는 막쉬롭을 찾으며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려서는 안 되겠지. 앙살라테는 생각했다. 그녀는 앙살라테의 소질과 강대한 운명을 믿는다고 했다. 그러니 앙살라테는, 그 믿음에 부응해야 했다.
‘부응이라. 말은 쉽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잣자후와 사난타에 흩어져 있는 나머지 군대를 전부 모아서 칠 년여 간 이어져 온 이 전쟁의 마지막 전장에 쏟아붓는다고 해도 승산은 장담할 수 없었다. 장담할 수 없다는 말도 어쩌면 지나치게 온건한 표현이리라.
패색이 만연했다. 더는 의지와 눈 가리고 하는 아웅질로 상황을 덧칠하고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린애라도 유추할 수 있는 패배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높은 확률로 결전에서 지게 될 것이다. 자스자하로 영주의 배신과 이탈로 이것은 더욱 명백해졌다. 그러면 앙살라테는 왕이 되지 못하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전부 다 반역도로 변모하여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겠지.
‘그렇게는 안 돼.’
앙살라테의 곁에 남은 것은 전부 죽음을 각오한 충신들뿐이었다. 자신을 신뢰하여 죽음까지도 각오한 이들에게 그는 정말 죽음을 선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묘안이 필요해. 이 난관을 타파할 길이 있을 것이다. 오, 신이시여! 정녕 혈통 말고는 타고난 것이 없는 저 헬린 힐벤에게 면류관을 씌우시겠단 말입니까!’
앙살라테는 이를 갈았다.
‘왕위가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하는지는 이렇게나 명확하건만!’
예고도 없이 천막의 입구가 걷히고 얼굴이 새파랗게 된 전령이 들어섰다. 앙살라테의 서슬 퍼런 눈길에 전령은 뒤늦게 예를 갖췄다. 아주 형편없는 경례였다. 어지간히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짜증이 치민 앙살라테가 치우고 본론이나 말해보라고 손을 내저었다.
“대공군이 아군이 차지한 트넴바 탑을 마저 정복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트넴바 탑이라면 수도 애틀턴을 둘러싼 세 개의 탑 중에 왕자의 세력이 여태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이것마저 빼앗기고 나면 전초기지로 삼을 발판이 없어짐과 동사에 적군의 방어진을 더욱 공고히 하는 셈이 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주 안에 움직일 것으로 예상합니다.”
“당장 회의를 소집해.”
물러간 지 얼마나 됐다고 막사 안에 다시 불려올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기는 했다. 앙살라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잣자후와 사난타에 각각 긴급히 파발을 보내라.”
“예, 전하.”
“지금 상황을 상세히 알리고, 서한에는 이렇게 적어.”
막사 바깥에서 불려 와 앙살라테가 내리는 명령을 얌전히 듣고 있던 기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목구멍 움직이는 소리를 냈다.
“마지막 전투는 애틀턴에서 벌어질 거라고.”
* * *
“원하는 게 뭐예요?”
물끄러미 막쉬롭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다 말고 구더기가 말했다. 코쿤과 서로 떨어뜨려 방 안에 감금해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러서 구더기의 속을 헤집어놓는 막쉬롭의 의중이 궁금하다 못해 신경질이 치밀었다. 방 안에 오래도록 갇혀 있었던 까닭인지 구더기는 평소의 여유는 다 잊어버리고 불안한 마음과 짜증으로 속을 바짝 태우고 있었다.
“날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한껏 이죽거리는 이 말에도 막쉬롭은 대답하지 않았다. 분주한 모습을 감추지 않으며 방 안의 잡동사니들을 헤집고 다녔을 뿐이었다. 부지런히 움직거리는 노파를 바라보는 구더기의 표정이 어두웠다.
“내가 널 어떻게 죽이겠니.”
“어떻게 죽이겠느냐고? 누가 들으면 대단히 아껴주는 줄 알겠어요.”
헛웃음이 터져 나온다. 구더기는 밧줄로 꽁꽁 묶인 자신의 두 손목과 족쇄에 차인 발목을 차례로 들어 보였다. 이런 대우를 하면서도 생각해주는 것처럼 말하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는 핀잔이었다.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보다 훨씬 더 많은 막쉬롭은 이런 말에 기가 죽거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없다. 그녀는 그저 픽 콧방귀를 뀌고 예사로이 넘어갔다.
오히려 핏대를 세우는 것은 구더기였다.
“이거 참,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놓아달라고 애원을 해야 할지.”
“빈정대지 말렴.”
“아직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자격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왜 없겠니?”
막쉬롭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막쉬롭의 외동딸은 서른 해가 지나도록 변한 구석이 없다. 외관은 잔주름과 굳은살로 덮여 다소 변했을지언정, 강직하고 줏대 있는 성격만큼은 광야에서 구르는 동안 조금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쏘아보는 형형한 까만 눈을 마주하니 막쉬롭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당신이 날 체첼드롭의 제물로 바치려던 순간부터, 내 인생에 엄마는 없는 사람이 됐으니까.”
“일개 인간이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
“나는 거슬렀잖아.”
“그래, 그랬지. 그리고 그 대가를 치렀고. 딸아, 네 꼴을 좀 보렴. 젊은 시절은 다 가고 광야에서 일없이 헤매다가 나중엔 뭐, 기껏해야 종년으로 들어앉아서 갖은 수모나 당해 왔겠지. 너는 늙어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생겼고, 너의 팔다리에는 예전 같은 힘이 없으며, 네 곁에 남아있는 건 사람이고 물건이고 아무것도 없지. 꼬질꼬질한 왕국민 꼬마한테 같잖은 애착을 두고 근근이 연명하는 네 꼴을 좀 보려무나, 라락크쉬.”
“내 이름은 구더기야.”
막쉬롭은 눈살을 찌푸렸다. 샤먼의 자리를 세습해 마땅할 만큼 거대한 능력을 타고난 그녀의 외동딸은 막쉬롭의 태중에 들어섰을 때부터 산모에게 심상찮은 환영을 주었다. 범상한 이름을 줄 수는 없다 생각해 이름을 짓느라고 굉장한 노력을 들였다.
“알아들어요? 라락크쉬는 버린 지 오래라고요.”
‘라락크쉬’는 고대룡을 길들였다는 전설적인 여인의 이름이었다. 이 이름을 딸에게 내리기 위해서, 막쉬롭은 꿈에서 내려온 환상에 해례와 주석을 달아 널리 알리고, 고대룡을 숭배하는 다른 부족장들을 찾아가 애걸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토록 어렵사리 지어준 이름을 두고 어디서 흉한 미물의 명칭을 갖다가 자칭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구더기’라고. 막쉬롭은 자연히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왕녀를 완전히 구워삶았던데.”
“전하라고 불러야지.”
“예, 그 잘난 전하를 어떻게 뜻대로 부리고 계시느냐 이 말입니다.”
막쉬롭은 소리 없이 미소지었을 뿐, 시원한 대답을 내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방 안에 있는 온갖 가구를 전부 다 헤집은 다음에야 손안에 약첩 같은 것을 찾아 쥐었는데, 향이 어찌나 강한지 멀찍이 묶여 있는 구더기한테까지 폴폴 풍겼다.
구더기는 이상한 기시감 탓에 생각에 잠기느라고 막쉬롭이 의기양양하게 방을 떠나기까지 더 이상 다그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문이 활짝 열렸다가, 차가운 외풍을 한 움큼이나 안으로 밀어내며 ‘쾅’하고 닫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막쉬롭이 사라진 방향을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쳐다보고 있는 구더기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 * *
막쉬롭은 구더기를 가둬 둔 방을 나섰다. 바깥은 어둑한 밤중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원래 무슨 일이 있건 상관없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적막해야 할 복도에 “쿵, 쿵.”하고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터벅터벅 걷던 그녀의 작은 발이 갑자기 재게 교차하기 시작했다.
막쉬롭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복도 벽을 점점이 밝히고 있는 벽걸이 양초 빛에 불꽃보다도 더 붉은 머리채가 보였다. 시녀도 다 떨어내고 혼자 유령처럼 떠돌며 다니는 잠옷 차림의 수리였다. 벽을 향해 멀거니 서 있던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이마로 벽을 들이받았다. “쿵, 쿵.” 하는 소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막쉬롭은 다급히 뛰어들어 왕녀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다. 왕족의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다니 남들이 보았다면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라 여겼을 것이다.
“왕녀님.”
“…막쉬롭. 막쉬롭인가요?”
식은땀에 젖은 멀건 얼굴에 녹색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콧잔등을 찡그린 왕녀는 그때서야 자신이 하고 있었던 행동을 자각한 듯이 당황스러워했다.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붉은 자국이 남은 이마를 한번 문질렀다.
여전히 그녀의 몸에 올려둔 막쉬롭의 쭈글쭈글한 손이 살짝 떨어져 나갔다가 다시 붙기를 반복했다. 도닥거리는 손길에 수리의 꼿꼿한 등이 수그러졌다. 힘없는 물미역처럼 흐트러지는 가녀린 몸을 막쉬롭이 서둘러 받아 안았다. 수리는 막쉬롭의 어깨에 팔을 감고 거친 숨을 골랐다.
“몸이 찹니다, 전하.”
“막쉬롭…. 나 심장이 두근거려서 죽을 것 같아요. 시도 때도 없이 화가 치밀어요. 좀 전에는 벽 근처에 이오가 서 있는 걸 봤고요…. 내가 미쳐 가고 있는 걸까요?”
“잔악후작을 마주친 다음부터 증상이 악화된 겝니다. 걱정 마세요. 일단 안으로 드셔서 몸을 좀 녹이시고요. 따뜻한 차를 한 잔 드시고 나면 곧 씻은 듯이 나아질 겁니다.”
“응…. 그래요.”
수리의 등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밀어 방안으로 안내했다. 휘청거리면서도 용케 벽난로 앞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왕녀가 오들오들 어깨를 떨며 손톱을 씹는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보던 막쉬롭은 소매 안에서 얇은 기름종이로 싸인 작은 약첩을 꺼내 들었다.
* * *
밤을 지새운 직후의 피로감은 오랜 고뇌에 비하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니카는 달이 저물고 샛별이 빛났다가 여명에 묻혀 사라지는 것까지 전부 지켜보았다. 추위에도 면역이 생기는 것일까, 울루 고원을 지나며 오들오들 떨었던 것에 비하면 니카는 지난 밤 잣자후의 추운 겨울밤을 꽤 태연히 이겨냈다.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탓이다. 생각들은 뇌리를 둥둥 떠다니며 무작위로 움직이다가 다른 생각들과 맞닿아 충돌을 반복하며 열을 냈다. 그래서 추운데도 추운 줄 모르고 동틀 녘까지 서서 버틴 건 그 덕택일까.
‘네 머리칼이 꼭 그런 색이잖아.’
바란 탈타미오에게는 쉬운 말이다. 그가 잘생긴 눈썹을 조금 찌푸리고, 콧잔등을 씰룩이거나 호쾌한 웃음을 지으면서 아무런 말이나 던지고 나면 전부 다 그럴싸한 모습이 되니까.
‘그걸 알면서도 동요하고 있는 꼴이라니…. 또다시 바란 탈타미오따위에 골몰하느라 시간을 낭비했잖아. 한심하군.’
바윗덩어리처럼 한 자리에 반듯하게 버티고 서 있던 니카는 아주 오랜만에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리 근육이 온통 뻣뻣했다. 발가락이 얼얼하게 얼었다. 고통에 가까운 감각이 종아리까지 찌르르 타고 올랐다.
‘순진한 얼굴에 속으면 안 돼. 그날 스스로 다 털어놓았잖아. 클라텐 탈타미오의 복수, 나를 기만하여 마음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도록 가지고 놀았던 거라고….’
니카는 뜨거운 숨을 내쉬어 연기 같은 입김을 내뿜고 얼기설기 엮어진 추론 사이로 미심쩍은 구멍들을 낱낱이 찾아냈다.
‘하지만….’
만일 정말 아무런 감정 없는 기만에 불과했다면, 니카를 찾아 나서서 들개떼에 물려 사경을 헤맬 필요까지 있었나?
니카가 언질도 없이 외출한 동안에 발을 동동 구르거나, 얄팍한 튜닉 한 겹만을 걸친 채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성문 앞에 멀거니 서 있던 것은? 의심 많은 니카가 그의 사랑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사랑한다 속삭이던 것. 홀린 듯이 지켜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웃어주던 일들은 또 어떤가? ‘니카, 나의 니카.’하고 부르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떨쳐버릴 수 없었던 가정에 니카는 마침내 다시 한 번 도달했다.
‘잔악후작은 나를….’
언어의 형상으로 구체화 된 질문이 입안에 성마르게 감돌았다.
니카는 곧장 고개를 저었다. 이게 중요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잔악후작의 마음이 거짓이고 진실이고를 떠나서, 니카를 뿌리째 흔들고 있는 이 감정은 결국 그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죄악감에 물드는 것이 싫어서 캐내어 생각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었다.
‘…나는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도 그를 사랑하고 있나?’
무릎에 힘이 빠졌다. 얼굴을 손바닥에 대고 의미 없이 문질렀는데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니카의 마음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물이 난 줄 알고 황급히 눈시울을 훔쳤으나, 곧 이것이 손가락 틈에 걸린 눈송이였음을 깨닫고 마음이 좀 나아졌다.
‘고작 넉 달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다. 나에게는 맹세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고작 넉 달…. 견딜 수 있다. 그깟 애송이는 씻은 듯이 떨쳐버릴 수 있다.’
왕녀와 함께한 시간에는 8년의 무게가 있다. 잔악후작에게 속아 바보처럼 놀아난 넉 달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니카는 피로감에 시달려 눈을 잠깐 감았다.
‘온전히 왕녀님의 기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하필 이때 왕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시간이 아무리 쌓인들 그 밀도마저 같지는 않아요.’하고 말하며 지나갔다. 니카의 평화가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 * *
“경, 여기 계셨군요.”
니카가 막쉬롭의 존재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이 순간 복잡한 생각의 흐름을 방해해준 것만큼은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호위의 위치로 돌아오라는 왕녀 전하의 전언입니다. 시중인을 시켜 전달하기엔 경의 마음이 상할까 배려하신 모양이지요.”
“…너에게 맡기셨다고?”
막쉬롭은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뻐기는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는 모습이 마치 그녀가 왕녀를 위해 은밀히 전령 노릇을 하는 게 얼마나 평범한 일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니카는 삽시간에 배알이 꼬였다. 곁에서 심부름꾼처럼 은밀히 명령을 전하고 다니는 것은 넉 달 전까지만 해도 니카가 맡았던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일로 투기를 드러낼 수는 없다. 니카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노파의 입꼬리를 못마땅히 노려보며 어색하게 걸었다. 얼마나 오래 움직임 없이 서 있었는지 지면에 경직된 발바닥이 닿을 때마다 색다른 둔통이 찾아왔다. 그래도 니카는 뒤에서 막쉬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 어금니를 꼭 악물고 반듯한 자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왔군요, 경.”
여섯 시가 겨우 넘은 시간에 왕녀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허브차를 마시고 있었다. 톡 쏘는 향기가 독특한 것으로 짐작건대 저번에 니카가 맡아본 적이 있는 그 향이었다. 니카에게도 한 잔 권한 것을 예의 바르게 고개를 젓고 사양했다. 귀족들이 보통 해가 중천에 가서야 눈을 뜨는 습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리 왕녀는 앙살라테에 비견될 만큼 취침시간을 짧게 유지했다. 그래서 이렇게 이른 아침에도 완벽한 차림을 한 채 잘 꾸민 인형처럼 앉아 있는 것이 가능했다.
전날 둘 사이에 오갔던 격앙된 대화가 마치 꿈에서나 있던 일이라는 듯 왕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니카를 대했다. 신전에 몰래 나아 온 죄인처럼 식은땀을 빼며 떨던 니카도 그런 그녀의 태도에 점차 적응해 갔다. 넉 달의 간극이 생겨나기 전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왕녀의 뒷자리에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자리를 지켰다.
왕녀의 일과는 아주 길고 고단했다. 반푼이 드라코슨인 데다가 여자라는 이유로 일선에 나서지 않을 거라 여긴다면 오산이었다. 앙살라테가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직접 지휘를 하고 나서는 능동적인 군주인 까닭에 그가 출정하고 나면 본거지가 우두머리 없이 혼돈 속에 빠져들기 쉬웠다. 이것을 뒤에서 관리하는 역할을 도맡은 이가 바로 수리 드라코슨이었다. 그녀는 왕자가 없는 동안 불안감에 떠는 잣자후의 영주를 불안해하지 않도록 달래고, 성 안에 진을 치고 있는 왕자군의 군량과 노동량을 할당하는 등, 온갖 업무에 관여했다.
그래서 아침에 ‘왔군요.’ 하고 간단한 말로 니카를 맞아준 이후 그녀가 니카에게 제대로 말을 걸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강에서 육지 쪽으로 바람이 불기 시작한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왕녀는 대화의 전조로 깊은 한숨을 뿜어냈다.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졌고, 반대편에 자리한 다르탈루의 강물은 석양빛에 부서져 반짝거리는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검은 물처럼 보였다.
니카는 뒷짐을 지고 찬 공기 탓에 붉게 부어오른 양손을 맞대어 비볐다. 동행하던 일정 관리 시종이 왕녀가 공식적으로 일과를 마쳤음을 두 번 확인한 이후에야 온종일 부동자세를 유지하던 니카의 몸뚱이로부터 기합이 빠졌다. 니카는 팔을 부드럽게 돌려 우두둑 소리를 냈다. 소리가 지나치게 요란하게 나는 바람에 눈치가 보였다.
“경, 조금 걸을래요?”
왕녀는 대뜸 니카를 돌아보며 제안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했다. 복잡한 감정 덩어리가 한꺼번에 치솟아 올랐다. 니카는 잠시 길을 잃고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 배려가 황송하면서도, 같은 방식으로 거절당해야 했던 자신의 감정이 떠올라 처절해졌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니카는 말실수나 다름없는 고백을 섣불리 내뱉기 전 관계로 돌아갈 방법을 궁리했다. 실은 머리를 굴릴 것까지도 없었다. 장단에 맞춰 태연함을 가장하기만 하면 되었다. 목젖을 움직여 끈끈한 침을 삼켰다.
“이 저녁에 말씀이십니까?”
“경은 너무 꽉 막혔어요. 꽃이란 꽃은 전부 다 떨어지고 없는 이 시기에, 밝은 낮에 산책을 하든, 달빛을 받으면서 걷든 하등 다를 게 있나요?”
구석에서 불쾌한 기척이 따라붙었다. 암살자라도 되는가 싶어 곁눈질했더니 눈에 익은 검은 후드가 보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침에 말을 전한 후에 종적을 감췄던 막쉬롭이 어느샌가 돌아와 특유의 음침한 모습을 한껏 뽐내며 보란 듯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며 넌지시 묻는 왕녀는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는 눈치였다.
“가까이 두고 부리시는 겁니까?”
니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알아 온 시간이 짧습니다.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으시는 게-”
“막쉬롭은 전쟁도 예견한 적이 있어요. 혜안을 가진 진짜 예언자예요. 가까이 두면 얻을 게 많은 인재죠.”
“하지만 집시이지 않습니까?”
그가 자리를 비운 고작 넉 달 사이에 왕녀의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꿰찬 수완에는 믿음직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니카는 이것이 하찮은 독점욕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닌가 생각하느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래요! 그러는 당신은 용인이고요!”
왕녀가 공격적으로 답했다. 막쉬롭을 의심하는 한마디에 숫제 모욕감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독이 올랐다. 마땅히 반박할 만한 거리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 니카 역시 ‘은혜’나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고서는 왕녀의 측근까지 올라온 것을 설명할 방도가 없는 천출이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니카는 자신을 달래고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왕녀는 그에게 주제를 알라고 핀잔을 주려던 게 아니라 그저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
들숨이 아프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니카는 어떻게든 막쉬롭이 찜찜한 낌새를 풍긴다는 점을 들어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지만, 왕녀가 완강하게 입장을 내세우는 바람에 좌절하고 말았다.
“최근 경과 대화를 할라치면 항상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요.”
왕녀는 울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뜸을 들였다. 니카는 이상하게 볼이나 가슴이 간지럽다. 왕녀가 새된 소리로 불평을 종알거리는 것은 팔 년간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면 절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꼭 투정하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은애하는 이가 내밀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비록 그것이 썩 좋은 감정이 아닐지라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니카는 문득 외사랑에 혈안이 되어 왕녀의 언사를 전부 자기 좋은 대로만 해석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래서 얼떨떨하게 사과를 했다.
“…송구합니다.”
“경은 변했어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걸 느껴요. 가령 내가 이렇게 추궁하기 시작할 때, 원래의 경 같았다면 진땀을 빼고 말을 더듬었을 거예요.”
여전히 흥분에 들뜬 왕녀는 숨을 하얗게 흩뿌리고, 가녀린 어깨와 팔을 위아래로 씰룩이고, 흰 얼굴에 피가 몰려 낯빛이 붉었다. 왕녀의 감정적 요동이 니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니카가 물었다.
“봐, 지금도. 그거 알아요? 경은 원래 내게 무엇이든 먼저 묻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을요.”
“…….”
“대체 넉 달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탈타미오 인근에서 경이 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남았던 그때로부터,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왕녀가 아무리 그에게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라고는 해도 언젠가 이 질문을 던져올 줄 알고 있었다. 넉 달은 긴 공백이었다. 그의 존재가 죽은 셈 쳐지고 잊힐 만큼이나.
솔직히 대답해야지 생각했다. 사랑하는 하나뿐인 주군, 그의 레이디, 수리 드라코슨 왕녀에게 니카가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당연한 충성을 비집고 조금 다른 생각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겠다니? 잔악후작에게 마음을 빼앗겨 눈이 멀었던 그 시절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다 꺼내겠단 말인가?’
니카는 잔악후작의 거짓된 사랑을 받는 동안 놀라울 정도로 행복을 누렸다. 그 당시의 미숙한 열여덟 살 니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벽난로와 독서, 연인과 날 없는 검으로 재미 삼아 휘두르던 장난 같은 대련. 평화, 사랑.
입술을 꾹 악물었다. 어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왕녀가 안 그래도 상처가 깊은 마음에 안타까운 목숨 하나를 더 묻으며 이를 악물고 버텨 왔을 넉 달의 시간 동안, 니카는 숙적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실실 쪼개고나 있었다고.
‘말할 수 없어.’
올곧은 수리의 눈동자가 니카에게 있어서 처음으로 황홀함이 아닌 온전한 추궁으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거짓을 아뢸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니카는 거짓을 증오했다. 원래부터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선악을 가려내는 성실한 성정인 데다가, 잔악후작과의 일을 겪으면서 거부감은 더 강성해졌다. 우화에서 말하는 하얀 거짓말을 쏟아내 상대를 우롱하느니 칼날 같은 진실을 내던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은 것 같이 말을 떼기가 어려운 순간이 도래한 이 시점에 니카는 고민 속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모순된 마음이 왕녀에게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하고 편한 소리를 늘어놓도록 충동질했다.
“저는…. 적의 검에 맞아 사경을 헤매이면서 잠시 기억을 잃었던지라….”
“기억을 잃은 동안에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니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돌이키기엔 이미 방향타를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돌려버렸다. 사경을 헤매이다 말고 혼자 정신을 차려 여기까지 이르렀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 니카는 다급히 뭐라고 변명의 곁가지를 늘렸다.
“제 말은, 그렇습니다. 탈타미오… 인근이지 않았습니까. 마침 그 황무지 같던 골짜기를 잔악후작이 지나고 있어….”
“잔악후작이?”
“그가 저를 거둬다가 탈타미오 안에 가뒀습니다…. 기억을 잃은 저에게 제대로 정보를 캐내거나 몸값을 제대로 받아낼 수는 없다 여겼을 겁니다. 몇 개월간 영문도 모르고 성의 잡일거리를 노예처럼 거들다가 기억이 돌아온 대로 도망쳐 나온 겁니다. 사난타로. 사난타를 통해서 도망쳐 왔습니다.”
유창한 거짓이 니카의 부르튼 입술로부터 피어올랐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럴싸한 단어들이 서로 달라붙어 이야기를 꾸며냈다. 자괴감. 자괴감. 자괴감! 니카는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했는지 깨닫고부터는 혀를 깨물고 자결하거나, 혹은 그 전에 심장이 절로 멎어 제자리에 고꾸라질 것만 같이 현기증이 났다. 낯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니카의 반응은 왕녀를 미심쩍은 의심의 구덩이에 던져놓기 충분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거지?’
니카가 변한 만큼 수리 드라코슨 역시 넉 달 사이에 많이 변했다. 마음속에서 인내를 담당한 부분이 고장이 난 것만 같았다. 울화가 한번 치밀어 오르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터뜨려 표출해야 했다.
배신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는데, 반면에 분노는 차갑게 농축되어 더욱 단단해졌다.
알에서 갓 깨어나 처음 본 어미를 따르는 아기 새처럼 맹목적으로 그녀를 따르던 용인기사가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감추려 드는 순간에, 수리는 속으로 인내를 되새기며 모진 말을 참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왕녀는 최근 자신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거슬리는 일이 있거나 감정적으로 격한 상태에 이르면 평생 그런 적 없던 심장이 쿵쾅거리는 통에 눈앞에 뵈는 것이 없었다. 생각에 앞서 팔다리를 휘둘러 폭력을 행사하고, 해결책을 강구할 것이 아니라 순간의 감정에 휩싸이기 십상이었다.
토속 의학에 통달한 막쉬롭은 정신적으로 누적된 신경증이 몰아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적 있었다. 가능한 한 맑은 물이나 허브 우린 차를 자주 마셔서 경직된 근육을 유연하게 풀어주라고 했다. 과연 막쉬롭이 처방한 허브차를 음용한 후로 왕녀의 몸을 점차 가뿐해졌다.
차도를 보이던 중에 하필 잔악후작을 마주치는 바람에 진척이 더뎌졌을 뿐이었다. 막쉬롭 말이, 증오와 분노는 열을 내는 감정이라서 치료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하여간 도움 되는 구석이 없는 작자다. 왕녀는 심호흡을 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침착하자. 니카 경이 나에게 사실을 숨기는 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 차분히 물어보면….’
대책 없이 울분을 터뜨리는 것은 소인배나 하는 짓이다. 수리는 이성적으로 캐물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벌써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겁고 숨이 가빠졌다. 새빨간 분노가 점차 견딜 수 없는 온도가 되어 뱃속을 지지고 머릿속에 있던 모든 이성적인 생각을 한낱 연기처럼 날아가 없어지게 했다.
‘잔악후작, 잔악후작, 잔악후작! 왜 어딜 가든 그 이름을 들어야 하지? 내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고, 클라텐의 하나뿐인 혈육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해 그깟… 극단적인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방치하더니, 이제는 내 충성스러운 기사마저 끌어들여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잖아!’
수리에게서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니카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왕녀는 불꽃처럼 탁 튀어 오르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휘청이며 디딤발을 짚었다.
“왕녀님, 괜찮으십니까? 왕녀님.”
니카는 다급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들었다. 수리를 부축하고자 뻗은 손끝이 어깨를 다 감싸기도 전에 그녀가 풀썩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니카는 가까스로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아 안았다.
“왕녀님!”
“니카 경, 침착해요. 괜찮아요. 전하께선 간밤에 제대로 못 주무셔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좀 전부터 뒤를 따르던 막쉬롭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왕녀의 흐물흐물 늘어진 팔 한 쪽을 악착스레 쥐었다. 니카 더러 왕녀를 넘기라는 듯이 갈퀴 같은 손과 품이 넓은 로브 소매를 안팎으로 펄럭거리고 있었다. 니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왕녀를 당겨 안아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니카가 오래 근심한 끝에 왕녀가 도로 정신을 차리긴 했다. 그나마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헛것을 보기라도 하는 듯 녹색 눈에 총기가 없었으며 허공에 날갯짓하는 날벌레를 따라 움직이기만 했다. 수리는 눈꺼풀을 팔랑거리면서 갑자기 덧없는 이름을 꺼내 들었다.
“이오? 이오…. 당신이에요?”
육 년 전에 별세한 부마의 이름을.
니카는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밭은 숨을 콜록거린다. 막쉬롭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쳐 니카의 품으로부터 왕녀를 앗아가려 들었을 때, 니카는 더 이상 그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그녀를 넘겨주었다.
“막… 쉬롭.”
왕녀가 앓는 소리로 노파의 이름을 중얼거리자 니카는 그만 망연자실해졌다.
막쉬롭이 왕녀의 눈꺼풀을 까뒤집거나 그 밖에 비전문가로서는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상태를 확인한 다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니카는 자신이 떨고 있는 게 추위 때문인지 근심에 잠겼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릎걸음으로 흙바닥에 늘어진 왕녀 곁까지 기어가서 막쉬롭의 눈치만 보았다.
“무슨 일이야. 왕녀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영양실조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
“귀하신 분이 영양실조라니, 그게 무슨-”
“끼니를 잘 챙겨 드시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거지요. 최근 바쁜 일정을 소화하신 것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워낙 염려가 많은 분이시니까.”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꿈틀거리며 뭐든 더 물으려는 니카에게 막쉬롭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니카는 막쉬롭이 무엇이든 대답해주었으면 했지만, 막쉬롭은 앞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날씨에 관한 질문조차도 대답해주지 않을 것처럼 입에 자물쇠를 걸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왕녀님께서는 조금 휴식을 취하고 나면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막쉬롭은 노파라고 묘사될 만한 인물인 것 치고는 근력이 강했다. 아무리 수리 왕녀가 모진 자기관리나 업무에서 비롯된 갖가지 신경증 탓에 빼빼 마른 체형이라 근수가 안 나간다지만, 막쉬롭은 성인 여성인 수리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안을 수 있었다.
니카는 다급히 뒤를 쫓았다. 노골적인 한숨 소리가 막쉬롭의 마뜩잖은 감정을 드러냈다.
“제가 곁에서 간병할 테니 경께서는 밖에서 경비에 힘을 쓰시는 게 낫겠습니다.”
“나는 왕녀님의 호위다.”
“호위가 무슨 뜻인지는 저도 잘 압니다. 다만…. 검으로 지킬 수 있는 상황과 없는 상황이 있지요. 지금 왕녀님 상태는 후자입니다. 가만 계시는 것이 오히려 도움임을 모르지는 않으시겠지요.”
“…….”
니카가 그래도 침실까지 왕녀를 옮기는 일을 돕겠다고 나서자 그를 단념시키기 위해 막쉬롭은 가시 돋친 모진 말을 수 번이나 더 쏘아대야 했다.
마침내 좌절한 니카가 겨울바람을 받으며 우뚝 섰다.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꼭 저렇게 얼굴 근육 전체에서 힘을 쭉 빼버리는데, 그러면 니카는 꼭 심통 난 어린애 같은 얼굴이 된다.
그를 뒤로하고 멀어지면서 막쉬롭의 주름진 입술 사이로 고소가 흘러나왔다.
“저렇게 감정적인 분이실 줄 누가 알았겠어. 누가. …그러고 보면 저런 면은 꼭 그 아이를 빼닮았지.”
“빼닮아…?”
아기 옹알이처럼 힘없는 중얼거림이 막쉬롭을 상념에서 깨웠다. 추억에 잠겨 짙은 빛깔로 젖어 들어가던 막쉬롭의 눈동자에 번뜩 이채가 서렸다. 왕녀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린 막쉬롭이 무능한 생선처럼 깜빡이는 왕녀의 녹색 눈을 내려다보았다. 어조가 더없이 상냥해졌다.
“예, 아주 빼닮았더군요. 상상했던 것보다 더요.”
“상상했던 것.”
“뭐…. 왕녀님이 상관하실 바는 아닙니다. 그나저나 참으로 무례한 기사가 아닙니까?”
“무례한?”
“충성 운운하더니만 결국은 마음이 딴 데 가 있지 않습니까. 잔악후작에게 넋을 빼앗긴 게 뻔합니다.”
왕녀는 아무런 비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막쉬롭의 분노를 수용했다. 주근깨가 드러나는 새하얀 얼굴에 붉은색이 입혀졌다.
“무례해. 건방져.”
“되찾아 오려면 수고스럽긴 해도 손을 쓰셔야겠습니다.”
“손을 써?”
“잔악후작이요.”
줏대 없이 막쉬롭을 따르던 왕녀가 힘없이 침음성을 냈다. 흐리멍덩한 빛깔에서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던 녹색 눈동자에 일순간 망설임이 일렁거렸다.
“나, 난 그 자를 죄를 묻는 자리에 세우고 싶은 거지, 손수 죽이고 싶은 게 아니야….”
“아니요, 죽이셔야만 합니다. 니카 경을 위해서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왕자님께 저 기사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막쉬롭이 눈살을 찌푸렸다. 왕녀의 말이 복잡한 문장구조를 갖추어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하자 골치 아프다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지만….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그래야 해? 니카 경이 물론 성실하고 검을 잘 쓰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혈인에 불과하잖아. 그를 온전히 쓰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대체 앙살라테 오라버니는 무슨 생각으로 그를-”
“전하, 그냥 제가 말씀드린 대로만 하세요.”
“…….”
노호성을 받아 마땅한 건방진 말에도 왕녀는 기분 상한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일정하게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가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머리통의 움직임은 어느 순간 거의 꾸벅이는 수준으로 변했다.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처박히기 직전이었던 것을 막쉬롭이 잡아채 일으켰다.
* * *
잔악후작과 독대한 일이 왕녀의 귀에 들어갔다. 당연히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고, 추궁 당할 줄도 진작 짐작했다. 그런데도 왕녀의 입술에서 잔악후작 이야기가 툭 불거져 나왔을 때…. 니카는 식은땀이 벌벌 흐르며 당황하고 말았다.
‘하나뿐인 주군께, 내가 감히 거짓을 고하다니….’
왕녀가 갑자기 휘청이고 쓰러지는 바람에 전부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카가 이미 쏟아낸 거짓말들이 없던 셈 되는 건 아니었다. 니카는 뱃속에 무게추가 눌러앉은 것 같은 무거운 기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괜찮으실까.’
어스름이 내리고 저녁달이 뜨기까지 왕녀를 데려간 막쉬롭으로부터의 소식은 없었다. 일부러 문 앞까지 찾아가도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며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저 가벼운 영양실조로 피곤해하시는 것뿐이라고 달래던 막쉬롭의 말을 믿고 발이나 동동 구르는 것이 니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어두침침한 꿈을 꾸었다. 달가운 내용은 아니었다.
니카의 꾸는 꿈은 보통 형태를 갖춘 불안감이었다. 탈타미오에 있었을 때도 그랬고, 기억을 되찾게 될 때도 그랬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게 온갖 영상들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라 니카를 괴롭혔었다.
왕녀에게 거짓말을 쏟아낸 일로 다시 한 번 꿈자리가 사나워졌다. 힘겹게 잠에 빠져들었더니 곧장 거센 영상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귀신처럼 비척이며 걷는 왕녀와 피투성이가 된 잔악후작, 소름 끼치게 웃는 막쉬롭, 보육원과 여러 가지 영상이 머릿속에서 한데 섞여 흙 구정물처럼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해일이 일어나 니카의 의식을 휩쓸며 숨통을 틀어막았다.
“허억…. 허억….”
아침에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는 식은땀으로 모포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추운 실내 공기에 오한이 들었다. 목구멍이 껄끄러워 헛기침을 해 가다듬었다.
분노에 휩싸여 그를 다그치던 왕녀의 모습이 뇌리를 떠다녔다. 상상으로 이루어졌다지만 그 파괴력은 진짜에 견줄 수 있었다. 니카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입 바깥에 한 줌 흘렸다. 곧장 손바닥에 얼굴을 처박았다.
‘거짓말. 거짓말을 해서 이런 꿈을 꾼 거야. 벌을 받아 마땅하다. 주군의 질문에 고작 거짓을 꺼내 들고 모면하려 하다니…. 나는 정말 최악이야. 은혜도 모르는….’
연이은 자기혐오에 니카의 낯은 더욱 핏기가 사라져 말 그대로 바깥에 흩날리는 눈송이나 다름없이 창백해졌다. 기만당하는 고통에 대해 아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수리 왕녀가 느낄 배신감을 짐작할 수 있는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세력을 키웠다. 알고도 범하는 죄의 값은 더욱 무겁다.
어쩔 줄 몰라 짧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래서야 잔악후작을 나무랄 수 없는 꼴이 아닌가? 니카는 두려워졌고, 유약한 자아를 이기지 못하고 손을 달달 떨었다.
‘괴로워. 괴로워.’
거짓말 하나의 무게를 못 견뎌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던 니카는 점차 잔악후작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만 아니었더라면 왕녀와 니카의 사이가 소원해질 일이 없었다.
왜 그 빌어먹을 황무지에서 나를 구해서, 왜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거짓말로 나를 속여서, 왜. 왜!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들이 니카의 가슴 속에 생채기를 남기며 휘몰아쳤다.
후작은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복수심으로 속여먹으려면 이깟 거짓말을 보태는 것쯤이야 손쉽다고 생각했을까? 거짓말을 하는 일은 대단한 죄가 아닌가? 그러면 니카는 왜 이렇게 아파야 한다는 말인가?
‘나와 밤하늘이 무슨 관계지?’
‘네 눈과 머리칼이 꼭 그런 색이잖아.’
나는 잔악후작이 아무런 가책도 없이 저지른 거짓말에 언제까지 휘둘려 고통받아야 할까! …니카는 다시 한번 잔악후작을 찾았다. 대책 없는 충동을 이성으로 가로막기에 니카는 지나치게 지쳐있었다.
이미 허락 없이 잔악후작을 독대했던 일이 왕녀의 귀에 들어간 참이니 내심 출입이 막혀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간수들은 먼젓번처럼 아니꼽게 노려보면서도 자리를 비켜달라는 니카의 지시를 곧잘 따랐다.
참회의 방 안은 니카가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때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벽에 얼룩진 핏자국이나 불쾌한 냄새까지 전부 그대로였다. 니카는 여기까지 들이닥쳐 놓고 뒤늦게 망설임에 시달렸다. 잔악후작이 멈칫거리는 니카를 보고 웃었다.
* * *
‘다시 찾아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바란은 빛 가운데 걷는 길쭉한 그림자를 보며 몸을 움찔 떨었다. 제대로 된 치료가 뒤따르지 않아 덧난 등께의 상처는 시시때때로 자극받아 고통을 선사했다.
하지만 등골을 괴롭히던 성난 고통은 니카가 들어서는 순간 다 아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란의 새파란 눈동자는 그저 앞에서 창살을 휘감아 잡는 남자에게 가 박힌다. 바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빛에 번진 상을 하나로 모아 보려고 노력했다.
‘니카.’
저 입술도 가졌었고, 저 손가락도 분명 매만져 보았는데 왜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 감촉이 기억나지 않을까. 니카가 고파서 꼭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꺼내서 조금씩 핥아먹으려고 이 소중한 기억들을 고이 넣어두었는데, 너무 아껴만 두었던 탓인지 그 사이에 빛이 많이 바랬다.
“자꾸 오네, 경.”
그러니까 바란이 비록 퉁명스레 말하긴 했어도 실은 이 갑작스러운 방문을 무척 기꺼워하는 중이었다. 어제의 니카와 오늘의 니카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라서, 바란은 매 순간마다 새로워지는 그 모습을 알고 싶다. 항상 니카의 존재에 목이 마르다.
목소리에 들뜬 기운이 묻어나지 않게 하려고 주의했다.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다.”
‘왜 저렇게 기운이 없지?’
니카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어서 의아했다. 바란은 그의 마음에 근심거리가 가득한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니카는 말문 떼기를 어려워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주인 없는 고양이처럼 말없이 매서운 눈초리를 쏘아댔다. 뺨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
이대로 기다리다간 평생 마주 본 채로 있을 것만 같길래 불가피하게 바란이 먼저 말문을 텄다. 물론 평생 마주 보고 있기만 하더라도 바란은 썩 흡족할 것이다. 그러나 니카가 머무르다 갈 수 있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을 터였다. 이렇게 쌍방 노려보다가 저번처럼 훌쩍 사라져버리지 않았으면 했다. 니카와의 대면에서 되씹기 좋은 작은 대화나 진전을 얻고 싶은 자연스러운 욕심이 들었다.
이렇게 운을 띄워주었는데도 쉽사리 대답이 돌아오지 않길래, 바란은 무료하게 쇠사슬에 묶인 팔뚝으로 그네를 타듯이 휘적거렸다. 의미 없는 몸짓이지만, 덕택에 바란은 아직 몸통에 사지가 달려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바란은 문득 오래도록 씻지 못한 자신의 몸뚱이가 어떤 악취와 오물 때로 엉망인지 자각했다. 니카와 그의 사이를 나눠주고 있는 철창에게 고마워졌다.
“너도 왕녀처럼 부마를 어떻게 죽였느니 어쨌느니 물어보면 나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자살한다.”
“그 꼴로 재갈까지 물고 싶나?”
니카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시시한 농지거리를 주고받는 상황이 비현실적이어서 바란은 슬며시 웃었다. 귀여운 열여덟 니카 같았으면 혀 깨문다는 말에 벌써 낯이 백지장처럼 질려서 바란에게 극단적인 생각 말라고 설득했으리라. 반면 이 남자는 팔짱을 비뚜름하게 끼고 빈정거린다. 과연 눈앞에 있는 것이 철혈의 니카 경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게 아니면 대체 뭐가 궁금해서, 또 친히 여기까지 오셨을까.”
“…….”
니카의 입술이 서로 떨어졌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는 것으로 보면 심상한 얘기에 그칠 것 같지는 않았다. 바란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아무렇지도 않았나?”
“…뭐가 말이야?”
“나한테, 거짓말하고 나서.”
사난타의 전장에서 마주쳤을 때, “쉬웠겠더구나.” 하고 지껄여서 바란의 억장을 더 무너뜨려 놓았던 남자가 우물쭈물 또 다른 소리를 했다. 바란은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 같다. 왜 갑자기 이러지? 제 상처를 돌보기 바쁘던 피해자가 돌연 나에게 날붙이를 휘둘렀던 이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주목한 셈이었다.
“경 갑자기 왜 그래?”
“대답이나 해라.”
“대답이고 자시고….”
황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리고 부담스럽거나 면구스럽기도 했다. 바란은 간만에 꾸며내지 않은 감정을 니카에게 드러냈다.
니카가 성급한 발소리를 내며 걸음을 이리저리로 옮겼다. 철창을 손톱으로 건드려 튕기는 소리를 따라 바란의 눈길도 방향을 바꾸었다.
“이제 와서 이런 걸 왜 물어봐?”
“물어보러 왔다고 했지, 대답하러 왔다고 한 적 없다.”
“깍쟁이처럼 굴긴! 그러니까 지금 질문이 뭐야, 너한테 거짓말을 하고 나서 죄책감을 느낀 적이 없었냐고 묻는 거야?”
“그래. 가슴이 죽을 것 같이 답답하고 괴롭거나 도무지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 느낌 있잖아. 그런 느낌 알고 있기나 한가?”
바란은 단박에 왕녀가 관련되어 있음을 파악했다. 어려운 추론도 아니었다. 무뚝뚝하기가 바위에 비견되는 니카 경에게 이 정도의 감정적인 파동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이니까. 바란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너 왕녀한테 거짓말했어?”
“…아니.”
“맙소사. 알만하군. 그래서 날 찾아온 거였어? 존경하는 왕녀님께 난생처음 거짓말을 해놓고 혼자 전전긍긍 어쩔 줄을 모르겠으니까.”
“왕녀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다.”
“참수의 방인지 참회의 방인지에 갇혀서 홀로 말라 죽어가기 직전인 사람을 무슨 상담자 취급하다니. 경 대체 인성이 어떻게 되먹은 거야?”
악명이 온 왕국에 자자한 잔악후작에게 인성으로 책 잡힌 순진한 용인 기사는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초조하게 손톱을 깨무는 모양을 보니 바란의 질시도 조금 가라앉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바란은 니카를 밀어내겠다던 언젠가의 굳은 다짐을 잠시 곁으로 미루어 두고 투박한 위로를 건넸다.
“이봐, 기사님. 너무 유난 떨지 말고 진정해. 대단한 일도 아니야. 사람들은 다 거짓말을 하고 살아.”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 누가 몰라. 그래, 사람들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살지. 훔치고, 탐하고, 부수고! 그런데 나는 그런 자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나는 선을 행하는 왕국기사이고, 주군에게 충의를 다하는 신하로서-.”
“아! 경 피곤한 사람이네, 진짜.”
기껏 생각해서 해준 말에 니카가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바란은 고개를 비스듬히 가눈다.
“그럼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오, 네가 할 말인가?”
“아무렴.”
무슨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고집불통에다가 말솜씨가 서투르고, 생떼를 쓰고, 그리고 아주 화가 많이 나 있는 어린애. 결박된 죄수 처지에 멀끔히 차려입은 기사를 달래는 꼴이라니. 바란은 스스로가 너무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나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실은 그 자체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 사람을 상처입히는 진실도 있게 마련이니까. 반면에 하얀 거짓말이라고 들어 봤어? 가끔은 거짓이 배려가 돼.”
“배려와 충성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전 출신 아니랄까 봐 더럽게 고리타분하군. 내 말은, 거짓이나 진실을 선하고 악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도라는 거야. 네가 왕녀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무조건 네가 썩을 놈이 되는 게 아니고-”
“왕녀님과는 상관없다고 했잖아!”
니카가 불편한 태를 냈다. 너도나도 명백히 알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든 감추어 보려고 바르작대는 니카는 털을 쭈뼛 세워 몸집을 크게 불린 길고양이 같았다. 짝사랑하는 왕녀를 싸고도느라고 이를 세우는 저 모습이 귀엽기도 한두 번이다. 바란은 그만 질투와 짜증이 단번에 훅 치밀어오른다.
“자기학대로 피해자 놀이해서 기분이 나아지고 싶은 거라면 안 말려. 하지만 진실과 진심은 다른 거야, 경. 죄책감 운운하려면 거짓말했다는 것에 집착할 게 아니라,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걸.”
눈앞에 있지도 않은 왕녀의 존재를 덧그리는 저 니카에게 이 이상 말려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란은 뻐근한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바닥에 주저앉은 바란보다 늘 높은 위치를 고수했던 니카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바란과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그늘진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 구구절절 일러바칠 필요 없어. 정말이지…. 내가 대체 왜 숫총각 상담이나 해주고 있어야 하-”
“왕녀님을 저버리고 널… 사랑했던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교묘히 거짓을 고했다. 왕녀님을 위했던 것이 아니야. 그저 이기적으로 굴었을 뿐.”
바란은 투덜거리면서, 곧 자리를 털고 사라질 니카의 아쉬운 모습이나 곁눈질하던 참이었다. 니카의 삶 속에서 바란 탈타미오는 늘 뒷전이었을 테니까.
“아….”
그런데 맹세코 기대한 적 없는 일이 벌어졌다. 몇 번인가 난데없이 존댓말을 했던 것처럼, 이것도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실언일까 싶었다. 바란은 니카가 얼른 이 말을 철회하기만을 기다렸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칙칙한 벽돌 바닥으로부터 눈을 들지 못했다.
이 시점에 니카를 보려고 했다간 니카도 그를 마주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바란은 감격스러운 나머지, 엉망으로 뒤섞인 머릿속에서 고작해야 사랑한다는 말밖에는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런 뜬금없는 소리는 혼란이나 가중시키고 말겠지.
어쩔 줄을 모르겠어서, 바란은 유일하게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고개만 이리저리로 가누어 가로저었다. 의미 없는 부인을 반복했다.
“너는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지?”
고저 없는 니카의 음성이 물었다. 바란은 얼굴을 찡그렸다. 잘난 듯이 조잘대던 입과 혀가 딱 굳어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끝내 그 어떤 대답도 꺼내지 못했다.
니카는 바란이 알던 것보다 덥수룩하게 길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올렸다. 바란이 어물거리며 물었다.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말이 튀어 나갔는데, 바란은 그 질문을 제 귀로 듣고 세상에 그렇게 멍청한 질문이 또 있을까 생각했다.
“…경 괜찮아?”
“괜찮냐고?”
거친 숨소리가 났다.
“그래.”
얼마나 명백한 거짓말이었는지, 차라리 대답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믿음직했을 정도였다. 니카는 떠날 채비를 했다. 바란에게 굳이 시간을 내어 찾아왔던 것이 정말로 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함이었는지 우중충하던 기세가 좀 나아졌다.
바란은 기실 불길 같은 자신의 감정을 도려내어 아주 작은 표본만이라도 드러내 보이고, 니카의 절망에 공감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실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진실을 전부 밝히더라도 왕녀를 사랑할 것이 분명한 니카에게 죄책의 멍에를 씌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우유부단한 자기 자신에게 바란은 많이 화가 났다.
“좋아해서 그랬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뭐?”
그래서 무심코 심술을 부려 입을 뗐던 것이다. 니카에게나 자신에게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만에 하나 내가 경을 진짜 좋아해서 그랬던 거라면 어때? 실은 눈물 없이는 못 들을 사정이 밑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지. 왜, 경을 너무 좋아하는데 기억을 마침 잃었다길래 옳다구나 하고 같이…. 알잖아, 사랑을 나누려고 했다든가….”
“…….”
“어때, 먹힐 거 같아? 경은 아주 고질적인 애정결핍이니까 어쩌면 이 각본이 마음에 들지도 모르겠네. 때마침 왕녀 전하께 거짓말을 해서 사이도 소원해졌겠다…. 네가 날 데리고 도망치면 되겠다, 그렇지?”
실은 치졸하게 입에 올려보는 희망사항이었다. 바란은 자신의 행태가 우습고 아니꼬워서 잇새로 픽 웃었다. 얼른 무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거 웃겼잖아. 표정이 왜 그래?”
“농담 한 건가?”
“당연하지. 병신 곤죽이 된 내 몸뚱이를 모시고, 좆같은 드라코슨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도망을? 세상에 그런 개소리가 또 있겠어?”
“어디부터 농담이었지?”
“아, 재미없긴. 전부 다야.”
바란의 들뜬 마음은 자신이 내뱉는 말 한마디마다 스스로 상처를 입고 나가떨어졌다.
“아무튼 정신 차려. 나 찾아오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드라코슨 옆자리에서나 니카 경이지, 그들 손 바깥에선 너 그냥 미천한 용인이야. 시키는 일만 하고, 순순히 복종하고, 괜한 호기심에 질문이랍시고 제 무덤 파지 말고, 네 안위와 왕녀를 지켜.”
초연한 바란의 태도에 니카는 심통을 냈다. 사위가 어두워 니카가 드러내는 반응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바란은 단언할 수 있었다. 탈타미오에서도 그랬다. 예민한 성정의 어린 니카는 눈치를 보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신경질을 곧잘 부렸다. 그 기질이 나이를 먹고 기억을 되찾았다고 단번에 씻은 듯이 사라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네가 충고할 처지나 된다고 생각하나.”
니카는 섬뜩하게 이 가는 소리를 섞어 가며 바란을 다그쳤다.
“네가 한 모든 거짓말을 기억한다. 너는 복수를 원한다고 했었지. 그러나 증오를 사랑으로 위장하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미천한 용인에게 입을 맞추거나 죽고 못 사는 연인 노릇을 하는 게? 잔악후작, 네 어떤 변명도 날 납득시키지 못했다.”
“…….”
“나는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물었다.”
바란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겉으로는 가시가 잔뜩 돋쳤지만 바란에게 달콤한 꿈을 꾸게 하는 이 말은…. 마치 꽃봉오리를 가득 달고 있는 장미 넝쿨 같았다. 얼마나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는지 본인은 자각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정말 큰일이었다. 망상이 버릇이 된 머리통은 벌써 저 말의 시시콜콜한 허점을 다 찾아내서 니카와 그가 다시 한 번 사랑에 빠지게 될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
바란은 표정을 흐렸다.
“…왜 화를 내?”
“화낼 일이니까. 너는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멋대로 나를 연루시켜 두고, 정작 너 혼자 모든 진실을 독점하며 침묵하는데 화가 나지 않을 리 있나. 고상한 척 그만두고 할 얘기가 있으면 해라.”
“난 딱히 숨긴 거 없는데.”
째애앵! 니카가 홧김에 주먹을 휘둘러 쇠로 된 창살을 후려갈겼다. 정말 놀랍게도, 니카 본인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양 태연한 반면에 쇠창살이 거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굽어들었다.
바란은 가쁜 숨을 쉬며 가슴을 들어 올렸다. 날이 잘 선 도축칼만 같던 니카의 눈빛이 아주 오래간만에 상냥한 햇살처럼 느껴졌다. 당장에 바란을 썰어버릴 것 같이 살벌하게 노려보는데도 그랬다. 얼마나 따뜻하던지, 바란은 마음이 너무 뜨거워서 겹겹이 잘 여몄던 거짓의 옷가지를 벗어 던지기 직전이었다.
“어련하시겠어, 잔악후작.”
바란은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잔뜩 가슴에 모아두었던 언어를 실수로 바닥에 쏟아 잃어버렸다. 예쁜 두 눈이 눈꺼풀에 가렸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말을 잊은 것은 니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드물게 욕지거리를 속삭였다. 저번에 찾아왔을 적처럼 홀연히 나가버리려나 했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바람에 불었는지 산뜻한 인사말까지 남겼다.
“…다시 오겠다.”
이 말만 듣지 않았더라도 바란이 굳게 내린 결심이 흔들리는 일은 없었으리라. 니카는 마치 그들 사이에 앞으로도 얘기를 섞을 만한 거리가 남아 있다는 듯이 기약을 남겨두었고 그건 바란의 주책 없는 희망에 물기를 먹여 싹을 틔웠다. 바란은 쇠사슬에 묶여 부어오른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다시 오겠다고?’
희망의 불꽃이 끈질기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시 기회를 줄 거란 뜻이야?’
커다란 유혹이 닥쳐왔다. 바란은 무기력하게 기약도 없는 왕자의 협력만을 기다리고 죽지 못해 매달려 있던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걸로는 안 된다고…. 이걸로는, 니카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왕녀의 품으로 돌아간 니카 경이 다시는 그를 돌아봐 줄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니카 경이 한때 바란 탈타미오를 사랑했었다고 인정한 것이다. 한번 인정하기에 이른 감정이면 두 번 찾아올 수도 있다.
희망이란 망상으로 이루어진 도르래 기구이다. 약한 힘만 있으면 이 도르래 장치를 통해 아주 무거운 기대도 견인할 수 있게 된다.
바란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무력한 몰골을 하고서도 두터운 의욕이 생겼다. 자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카를 가지려면.
니카를 갖기 위해서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앙살라테와의 약속은 아직 유효해….’
대공이 첩자라 확신해서 바란을 팽했다면 소문을 막을 이유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심지어는 최측근의 인척인 아겐호프조차 바란이 버려진 게 아니라, 무슨 심오한 임무를 맡은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왕국 내에서 헬린 힐벤의 심내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란 조차도 이번에는 섣불리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만약에…. 잔악후작의 이름이 아직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이 아니라면, 바란에게는 아직 앙살라테를 위해 거들 만한 일이 남아 있을 터였다.
‘모두가 적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가치를 낮추지 마.’
앙살라테의 당부에는 일리가 있었다. 중요한 시점에 섣불리 간자 신분을 노출해서는 안 되었다. 왕녀의 고문도 그때의 채찍질이 마지막이었던 마당이니 아직은 이를 악물면 버틸 만했다. 버티면서 이 잣자후를 빠져나가 남쪽의 수도 애틀턴까지 달아날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조금 더 견뎌 보자. 왕녀는 어차피 내가 간자라고 토로해도 살려둘 생각이 없어.’
왕녀는 이오 사사바란을 죽인 게 바란이라고 이미 마음속에서 낙인을 찍어두었다. 어차피 대우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 생각했다.
니카를 얻기 위해서.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목표에 다시 불이 붙었다. 니카의 기억이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비난과 증오 없이 이어 간 대화였다. 의미가 컸다.
…결과적으로 니카는 약속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란을 만나러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셨습니까.”
간수들은 니카가 나간 뒤에 한 시름 놓고 저마다 할 일들에 집중하며 풀어져 있다가, 앉기가 무섭게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방문객을 맞아야 했다.
“아니, 씨팔! 가다 말고 왜 돌아오고 지랄이래?”
“낸들 아냐.”
“야, 조용히 해.”
그들이 감시테이블 위에 펼쳤던 카드놀이 판이 슬그머니 엎질러져 구석에 처박혔다. 막 패를 돌리던 참이라 다행이었지, 만일 점마다 얼마 씩 돈을 걷고 한창 승패가 갈릴 무렵이었다면 판을 엎으면서 누구 한 사람에게는 재수 옴 붙은 순간이 되었으리라.
곧이어 또각대는 발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렸다. 니카를 만만히 보고 소근소근 떠들던 간수들이 일제히 입을 딱 다물었다. 구둣발 소리였다. 따가닥, 따가닥. 거의 술에 취한 말이 뜀 걸음을 딛는 소리처럼 불안정했다.
“왕녀 전하.”
“전하, 이 밤중에 어찌….”
“잔악후작, 잔악후작, 잔악후작…을.”
머리를 산발한 데다가 잠옷에서 환의도 하지 않아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왕녀는 진언을 외듯이 중얼거렸다. 왕녀의 앞에서 문 열기를 거든 후에 니카가 참회의 방에 들어섰다. 니카는 바란과 눈을 마주쳤다. 바란은 창백한 니카의 낯빛에서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포착했다.
니카는 왕녀가 한번 크게 휘청일 때마다 그 곁에 달라붙어 부축하려고 했는데, 정작 왕녀는 매서운 힘으로 도움의 손길을 전부 후려쳐 떨구어냈다.
“잔악후작을 없애야 돼.”
수리 드라코슨이 주문을 외는 듯이 중얼거렸다. 바란은 그 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었다.
* * *
‘교활한 자식….’
갓 참회의 방에서 빠져나온 니카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충만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잔악후작이 본격적인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이리저리 내빼는 바람에 니카의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뻗쳤다. 흥, 하고 무심하게 내쉰 코웃음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기분 좋은 콧노래 소리로 변했다.
분노가 꼭 어두운 감정만은 아니었다. 그 덕택에 지금 니카는 증기가 가득한 주전자처럼 내부로부터 압력을 받아 힘찬 걸음을 딛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찾아오게 된다면 후작이 의미심장하게 감추고 있는 속내를 반드시 털어놓게 만들 거라고 다짐하면서.
그래, 니카는 이유가 알고 싶었다.
탈타미오에서 탈출해 지하수로를 벗어나 사난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사난타에서 참전하여 잔악후작과 검을 맞대고, 지금 여기 잣자후에 상륙하기까지. 결벽한 성정으로는 감당할 방법이 없었던 잔악후작의 거짓말은 별다른 진전없는 분노만 낳았다. 배신감과 미움으로 마음이 온통 할퀴어져서, 니카는 여태 제 상처를 보듬느라고 본질에 의문을 품을 겨를이 없었다.
잔악후작이 묶여 매달린 채로 죽어가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잔악후작이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인지 비로소 알고 싶어졌다. 요 며칠 찾아가서 만난 후작은 여전히 신경 거슬리게 툭툭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니카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말씨까지 다 숨기지는 못했다. 추레하게 매달린 포로에게서, 니카는 좋아해 마지않던 상냥한 바란 탈타미오의 존재를 시시때때로 느꼈다.
‘좋아해서 그랬다고 하면 어떡할 거야.’
그래서 그 말이 의심스럽다. 너무나, 너무나. 잔악후작의 심내를 유추해내는 시간 동안 니카는 왕녀에 대한 죄악감을 잠시 잊어버렸다. 니카는 불안감과 악몽의 영향력에서 잠시간 자유로워졌다. ‘덕택에’라고 표현할 만 했다.
그런 스스로에게 환멸이 났다. 진창에서 구르던 어린 니카에게 유일한 동아줄 같던 왕녀에 대한 사랑을 무슨 멍에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니. 간사하기가 어디 비할 바 없었다. 홀로 시작한 사랑이니 고통스럽다면 끊어내고 없던 셈 치면 될 텐데, 왕녀에게 기대어 살지 않으면 자신의 삶이 망가지리라는 공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만 질끈 감고 있다.
‘왕녀님…?’
마치 그 불성실한 충심을 꼬집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왕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니카는 너무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이곳은 왕녀의 거처와는 거리가 꽤 있었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왕녀가 정신을 차리고 홀로 눈밭을 헤매고 다니는 상황을 니카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왕녀님? 왕녀님. 왜 아무도 대동하지 않으시고…. 침의만 입고 나오신 겁니까? 맙소사.”
새파랗게 질린 니카는 겉옷을 벗어 왕녀에게 둘러주려고 했다. 왕녀는 꿈결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송구스러운 표현이지만 제정신 같지 않았다.
“언제 깨어나신 겁니까?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새카만 어둠이 내린 와중에 하얀 침의를 입고 어울리지 않는 구두를 끌고 나와서 눈길 위를 헤집고 다니는 여인은 어느 민간전승에 등장하는 불길한 유령 같았다. 니카는 자신이 어떤 사술에 걸려든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면밀히 주변을 살펴보거나 슬그머니 자신의 팔뚝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잔악후작.”
두 눈을 똑바로 뜬 왕녀는 영롱한 녹색 눈동자로 니카를 쳐다보았다. 거센 바람에 휘청이던 왕녀는 니카의 가슴팍에 손을 댄 채로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니카는 그녀를 방으로 이끌어 가려다 말고 흠칫 놀라서 왕녀의 안색을 살폈다. 너무도 또렷이 들었던 까닭에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무어라 하셨습니까?” 하고 되물으니 “잔악후작.”하고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를 보러 오셨습니까?”
“잔악후작.”
“전하, 날이 춥습니다. 지금은 방으로 돌아가셔서 조금 휴식을 취하시고, 잔악후작은 날이 밝고 나서 보셔도 늦지 않습니다.”
왕녀는 강경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니카가 어쩔 줄 모르고 버벅거리자 굳세게 버티고 서서 간헐적으로 “잔악후작.”하고 짧게 말했다. 수년간 왕녀를 모시면서 이렇게 억지 부리는 모습을 본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니카는 곤혹스럽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가 이상했다.
건물 뒤편에서 질퍽한 눈을 때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니카는 귀가 밝아 기척을 빨리 알아차리는 편이니 저 발소리의 주인공은 생각보다 먼 거리에 있을 것이다. 니카는 잠자코 그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아마 막쉬롭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대로였다. 집시 노파의 검은 로브가 나풀거렸다.
니카는 왕녀의 상태가 너무도 염려되었던 까닭에 막쉬롭과 눈이 맞는 순간, 다짜고짜 질문을 했다. 홀로 다니시도록 호위를 소홀히 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그치기보다도 왕녀의 상태에 대한 근심이 앞섰다.
“괜찮으신 건가?”
“예. 잠시 호위들이 서로 교대하던 틈에 벌어진 일입니다, 경.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곧장 쫓아오던 중이었습니다.”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영양실조라 하지 않았나. 그 외에 왕녀님께 다른 증상은 없었나? 좀 전부터 같은 말씀만 반복하시면서…. 어딘가 편찮아 보이시는데….”
니카는 질병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어서, 막쉬롭이 왕녀에게 접근해 상황을 살피는 동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왕녀가 멍한 표정을 하고 있기는 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 모양으로, 얄팍한 침의 너머로 윤곽을 드러내는 가녀린 어깨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니카는 그 바르작대는 움직임 하나에 쥐어짜는 듯한 연민에 휩싸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제대로 들여다보기나 했을까 의심스러운 짧은 간격을 두고 막쉬롭이 “괜찮으십니다.”하고 말했다. 니카의 속을 더 뒤집어 놓는 진단이었다.
‘괜찮다니? 구두에 침의만 입고 홀로 눈밭을 걸으며 잔악후작을 찾으시는 모습 그 어디가 괜찮은 축에 속한단 말인가?’
니카에게 조금만 더 말솜씨가 있어서 이 모든 의문을 왕녀의 안전에서 무례하지 않게 쏟아낼 수만 있었다면 즉각 막쉬롭을 다그쳤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니카는 원하는 답을 따져 묻기까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편이었다.
입 안의 연한 살을 씹으며 이미 속으로 돌팔이라 낙인 찍은 집시 노파에게 목소리를 높이려던 참이었다. 왕녀가 “잔악후작.”하고 이를 득득 가는 괴벽을 떠나 처음으로 말다운 말을 했다.
“괜찮아요.”
“홀연히 사라지시는 바람에 모두 왕녀님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 없으셔서 천만다행이에요.”
막쉬롭은 저 역시도 왕녀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못 박아 표현하고 싶은 것인지 겉으로 걱정을 드러내어 표현했다. 황당해진 니카가 붙박여 서 있는데, 막쉬롭은 손발을 휘둘러 다소 과장스러울 정도로 심려를 내비쳤다. 왕녀가 직접 자신은 괜찮다고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니카는 더 이상 주장을 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잔악후작은 대체 무슨 일로 찾아다니셨던 거지요?”
“잔악후작? 잔악후작은… 잔악후작을….”
“설마 이 시간에 그 자를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그래. 직접 찾아왔어요.”
왕녀와 막쉬롭의 대화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 이유를 얼른 눈치채지 못한 니카는 숨을 바짝 붙잡고 마음속 빈 공간을 물음표로 잔뜩 때웠다. 수차례 되새기고 나서야 막쉬롭이 교묘하게 물꼬를 트는 방향대로 왕녀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뒤늦게 왕녀를 따라잡은 막쉬롭이 여태 왕녀가 잔악후작을 찾아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왕녀의 말소리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으면서….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몸 위에 아주 작고 재빠른 발을 가진 난쟁이 여럿이 종종거리며 달리기를 벌인 것처럼 기이한 전율이 쫙 올랐다. 니카의 까만 눈에 길쭉한 동공이 좁혀들고 이채가 서렸다. 왕녀에게 겉옷을 넘긴 이후 닭살이 오르다 못해 붉게 언 팔뚝 살갗을 긁적였다.
니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들오들 떠는 왕녀와 그녀를 부축하는 강건한 노파를 번갈아 확인했다. 떠보듯이 권했다.
“하지만 날이 이미 저물었습니다. 사위가 너무도 어두워 계단 오르내리시기가 위험합니다. 어둠이 활개 치는 시간에는 운 나쁜 일이 생기기 쉽습니다, 전하. 그리고 자칫 침소에 드시는 시간을 지나버린다면 내일 일정에도 차질이 생길 것입니다.”
왕녀에게 건네는 말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실상은 막쉬롭을 겨냥한 말이었다. 막쉬롭의 눈은 밝은 곳에서는 회색이지만 어둠이 내리면 또 칠흑처럼 검었다. 하기사 집시에게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은 별난 형질도 아니었다. 그러나 평범한 그 두 눈이 니카를 정면으로 마주 보자, 니카는 그만 그 안에 담긴 거대한 공허와 직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경각심이 와락 치밀었다.
“…전하, 잔악후작을 만나고 싶으셨던 게 아닙니까?”
막쉬롭이 마치 네가 무얼 어쩌겠느냐는 식으로 도발했다. 보란 듯이 왕녀를 부추기려고 드는 게 그 증거였다. 최근 줄곧 왕녀를 독점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던 것이나, 니카가 없는 넉 달 사이에 달라붙어 측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온갖 정보들이 수상한 그림을 그리며 머릿속에 맴돌았다.
“잔악후작을 만나고 싶어요. 잔악후작에게 안내해요.”
다만 이렇게 말하는 왕녀의 말씨가 워낙 또렷했기 때문에, 몽유나 심신이 미약한 상황이라고 주장하며 자신 있게 들고 일어나기가 어려웠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주군의 진로를 막고 간언을 해야 하는가 고민스럽다. 망설이던 니카는 대신에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하고 다시 한번 묻는 쪽을 택했다. 물론 질문을 꺼내든 순간부터 니카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괜찮아요.”
상상했던 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니카는 불안 탓에 조마조마 뛰는 심장을 애써 모른 체하며 주먹을 쥐었다. 잔악후작의 등가죽이 다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던 것을 뜯어말린 것이 고작해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왕녀가 앙살라테의 명령에 더 이상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왕녀는 니카가 그녀의 기사이지, 왕자의 심복은 아니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었다.
“…그는 앙살라테 전하의 포로입니다. 전하, 아시지 않습니까. 앙살라테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멀쩡한 모습을 유지해야 합니다.”
머리가 어지럽다. 붙잡을 만한 동아줄이라고는 애틀턴 인근에 처박혀 수도 탈환에 여념이 없는 앙살라테가 다였다. 그 외에 더 할 말은 없느냐는 듯이 멀거니 그를 쳐다보기만 하는 왕녀에게 니카는 압도당했다. 입술이 벌벌 떨며 하찮은 자음과 모음을 쪼개어 흘렸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짓씹었다. 왕녀의 증오가 두려워 밤을 지새웠던 심약한 니카의 공포를 사랑하는 주군의 눈총이 후벼 파고 있었다.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니카의 확인절차에 구태여 끼어들지 않겠다는 듯이 태평한 미소를 띄우던 막쉬롭이 왕녀의 어깨를 슬그머니 감싸 안았다. 왕녀가 누구 손안에 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행동이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인지 몰라도 수리는 니카와 막쉬롭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했다. 니카는 불안한 왕녀의 뒷모습과 연이어 그를 스쳐 지나는 막쉬롭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여기 이 자리에 도살장에 끌려온 소와 같은 니카가 서 있다. 비밀스럽게 숨겨진 문을 열고 파고드니, 참회의 방 내부에서 밝힌 기름 등잔의 불빛이 새어 나왔다. 좀 전에 홀로 바란을 만나러 왔던 때 자리를 비켜주었던 간수들이 제자리에 고개를 조아리며 섰다. 이번에는 아니꼬운 기색이 씻어낸 듯이 없었다. 물론 돌아온 용인기사가 수리 드라코슨을 대동했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앞서 걷던 니카는 한 지점에서 멈췄다. 선뜻 걸음을 떼지 못했다.
창살 그림자 너머로 바란의 마른 몸뚱이가 걸려 있었다. 좀 전에 기이할 정도로 평화로운 대화를 나눴던 모습 그대로였다. 암흑 속에서도 니카는 바란이 적잖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감조차도 잡지 못한 채 바삐 눈을 굴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니카는 안타깝다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경악했다.
니카는 슬그머니 왕녀 쪽을 눈으로 훑었다. 수리가 잔악후작을 만나려고 고집한 구체적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이 바란 탈타미오의 신상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잔악후작, 잔악후작을….”
아니나 다를까 수리 왕녀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며 휘었다.
“잔악후작을 없애야 돼.”
무슨 수를 써서든 수리 드라코슨이 이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다는 절절한 후회가 니카를 덮쳤다. 그녀가 갑자기 고문기구가 놓인 탁자 위로 고운 손을 올려 헤집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고문관의 채찍을 낚아채어 요령 없이 휘두르던 왕녀의 억척스러운 모습에 기억이 닿았다. 니카는 탁자 위에 놓인 단검, 집게, 인두, 관절을 부수는 망치나 사지를 야금야금 찢어내는 고양이 발톱 같은 기구, 그 밖에 끔찍하고 해괴한 고문도구들을 혼란스럽게 훑어보았다. 저 수많은 도구들이 제각기 고유한 방법으로 잔악후작을 조각내는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가슴에서 거대한 북이 “쿵, 쿵, 쿵!”하고 울렸다. 니카는 다급히 달려들어 왕녀의 마른 어깨뼈를 그의 커다란 손으로 붙잡았다.
“왕녀님, 안 됩니다!”
“이거…! 놓으라고!”
힘의 차이가 워낙 커서 왕녀의 반항은 전부 다 무색했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안 됩니다.”고 간수들이 듣지 못하게 속삭인 니카는 팔에 힘을 주어 왕녀의 어깻죽지를 감쌌다. 남우세스럽게도 끌어안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니카는 미묘한 감정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심장이 바쁘게 울리고 있었다.
주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불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명백히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포로를 심문하는 그녀를 방치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니카가 알던 수리 드라코슨은 백성 개인의 목숨과 도덕을 중요시하는 선한 사람이었다. 이 순간 자신의 정의관에 반하는 선택을 내린 것은 전부 다 정신이 흐려진 탓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이런 분노에 휩싸인 행위는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왕녀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적어도 니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쓰러지기 전에 연거푸 막쉬롭의 이름을 부르던 왕녀의 의존적인 모습을 떠올렸다.
니카의 심증만큼은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저 집시가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이 틀림없다.’
니카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관전하는 자세를 취한 막쉬롭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서슬 퍼런 기운에 낯이 간지러울 법도 한데 긴장하기는커녕 씩 웃음을 짓고 있다. 바르작대는 움직임에 니카의 시선이 수리에게로 돌아왔다.
“이거 놔요, 니카 경.”
“먼저 진정하셔야 합니다.”
“명령 불복은 중죄예요…. 뺨을 맞는 걸로는 모자라서 그래요?”
“어떤 상황에서든 폭력은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 하셨잖습니까. 왕녀님, 제가 알던 당신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폭력으로 표출하던 분이 아니십니다. …저를 구해주셨을 때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수리 드라코슨은 고개를 들어 높은 곳에 자리한 니카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남자의 여린 뺨에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검고 광택이 서린 비늘이 붙었다. 불에 타 날아가는 기류처럼 횡행하던 정신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조금씩 맑아졌다.
<3권 끝. 다음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