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 - 5. 만약 꿈속에서 (2) (6/12)

5. 만약 꿈속에서 (2)


“어, 어땠습니까? 후작님. 혹시 몸뚱이하고 머리통이 분리돼서 실려 나오실까 봐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의외로 다친 곳 하나 없이 나오셨네요.”

바란이 태연히 회의장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쉴 틈 없는 여정에 이어 영주성으로 끌려오기까지 하느라 거지꼴을 못 면하기는 마찬가지인 레이먼드가 옆구리로 달라붙었다. 레이먼드가 끊임없이 조잘대는 것에 바란은 답해줄 기운도 능력도 없었다.

“나도 모르겠어.”

끈적이고 기름때가 낀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기며 한마디 대꾸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 탈타르 시내에 마련해둔 저택으로 달려가 뜨거운 물로 목욕하고 침대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아직 바란에게는 할 일이 남았다.

대공은 바란에게 사난타 성으로 이끌고 갈 노예병을 오백 할당했고, 당장 이들이 진을 치고 머무는 서쪽 연무장 근처의 공터를 방문하라고 조언했다. 말이 조언이지, 명령과 다를 바 없었다.

빠른 걸음에 숨을 헐떡이며 따라붙은 레이먼드가 불평했다.

“무슨 대답이 그래요?”

“레이, 다 사정이 있어.”

대공이 바란에게 사난타 성으로 진군하도록 명을 내린 후부터 수뇌 회의는 그저 피상적인 방향으로만 흘렀다. 사난타 성을 사수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대공에게 맞서 용기 있는 간언을 내뱉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그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거기에 더해 발언권이 가장 강대한 사사바란 공작이 호탕하게 그를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사난타 성을 뺏겼다는군.”

“아, 안 그래도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대공은 어떻게 하겠답니까?”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목을 빼고 확인하며 레이먼드가 물었다. 여태 칠 년을 내리 함께해 온 레이먼드는, 이렇게 한 번씩 바란의 안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서 바란이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앙살라테에게 목숨도 갖다 바칠 열렬한 추종자였다. 바란은 레이먼드의 눈동자가 번쩍이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보내겠대.”

“뭐라고요?”

“충심을 증명할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더군. 사난타에 붙잡힌 귀족 볼모들의 몸값을 제시하고, 만약 거래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성을 치라고 했어.”

바란이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레이먼드가 비명처럼 대꾸했다.

“설마 그 양반, 사난타를 되찾을 생각인 거예요? 괜한 소모전이 될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게다가 후작님한테 성을 치라고 하다니, 나가 죽으라는 소리잖아요!”

“사난타가 탈타르와 그다지 멀지 않으니 마냥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하지만…. 그러면….”

바란이 지휘관으로서 전쟁에 서게 된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투는 주로 평야에서 벌어졌고, 바란은 어린 나이로 인해 단독으로 지휘관 자리에 발탁된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경험이 공성전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개죽음이나 당할 거예요.”

“상황 돌아가는 것을 보고 후발대를 보내겠다고 했어. 대공이 보통 방어적으로 구는 작자는 아니지만 자기 것을 눈 뜨고 코 베이는 격으로 빼앗겼으니 울화가 터질 만은 하지.”

“그렇다고 한 세력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곧 레이먼드는 입을 다물고 바란이 움직이는 대로 얌전히 따라 걸었다. 의아하게 살펴보니 레이먼드는 당장이라도 와르르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바란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동정하면 가만 안 둬.”

“…어디 가는 거예요, 우리?”

레이먼드가 멋쩍게 화제를 돌렸다.

“내 병사들 보러.”

“병사들? 우리네 사병들 말고도 더 붙여줍디까?”

“응, 노예병 천 명.”

“천?”

이 말을 들은 레이먼드가 기가 차다고 난동을 피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했다. 대공이 바란에게 지시한 모든 일들은 마치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핑곗거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노예병단은 연좌제에 가족을 저당 잡힌 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삶을 애초에 포기한 이들인지라, 탈영하는 일 없이 곧이곧대로 돌진한다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그만큼 대단한 의욕이 없었으므로, 전투에서 그야말로 오합지졸 고기 방패나 다름없이 쓰였다.

“공성전을 노예병으로 시작하라고, 대공이 그래요?”

“어차피 돌격대는 다 죽으니까 그런가 보지.”

“다 죽죠, 그럼요! 천 명이면 한 시간 안에도 다 죽어 나자빠지겠는데요, 후작님까지도요!”

“벌써부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직 못 이룬 뜻이 있어서 곱게 죽어줄 생각 없거든, 나는…. 사병까지 해서 오천을 데리고 갈 생각이야. 우마와 마차, 투석기와 대포.”

전령에 의하면, 왕자 휘하의 용병단을 비롯해 사난타 성을 탈취한 왕자군의 크기가 이천 명이었다. 오천은 너무 적은 숫자였다. 공성의 이점을 따진다면 적어도 그 세 배에서 다섯 배는 되는 병력을 보내야 맞는 투자일 것이다.

아무리 당장 공격이 아니라 거래를 위해 보낸다지만, 바란을 사지로 내모는 것 같은 그림은 확실했다. 승리를 확신한다느니 듣기 좋은 말로 얼버무리기 힘들었다.

“탈타미오 후작님. 어서 오십시오.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노예병이 주둔하고 있는 서쪽 연무장 인근에 다다르자, 대공의 명령을 하달받고 미리 마중 나와 있던 관리인 청년이 친절한 웃음으로 바란을 맞이했다. 그는 곧 바란과 레이먼드를 안내해 낡은 헝겊 막사가 가득한 틈바구니로 들어갔다.

“질서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들군요!”

레이먼드가 악취를 견디다 못해 질색을 했다.

흙바닥에 피란민과 진배없는 모양새로 깡마른 노예병들이 일렬로 쪼그려 앉아 있었다. 움푹 들어간 광대 위로 도드라진 큼직한 눈망울들이 바란의 뒷모습에 슬그머니 달라붙었다.

이들이 줄지어 앉은 모습을 시선으로 좇던 레이먼드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의문을 표했다.

“저 붉은 막사들은 다 뭡니까?”

“음? 이 분은….”

“내 집사.”

관리인은 레이먼드에 물음에 당장 대답하는 대신, 눈치를 보며 신원을 물었다. 바란은 손을 휘저으며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탈타르까지 집사를 대동하고 다니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튼, 붉은 막사는 매춘부들 막사입니다. 출장비 주고 고용한 창녀들이 한 달에 몇 번 노예병 주둔지에 머물다 가거든요.”

과연 그 말대로 붉은 천막 앞에서 살랑이며 걸어 다니는 여자들이 즐비했다.

“마침 오늘이 방문일입니다.”

여상히 그들을 둘러보던 참이었다. 굽실대는 갈색 머리칼의 매춘부를 발견한 순간, 바란의 뒷목에 서늘한 기운이 끼쳤다. 이국적으로 휜 화살코 밑에 붉게 칠한 입술이 씩 웃었다. 그 입술 두 쪽이 뻐끔대자 갑자기 바란 주변의 모든 소란스러운 일들이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왕자, 정보, 보고.’

세 가지 단어가 눈 안에 들어왔다. 바란은 그녀가 왕자가 심어둔 간자 중 한 사람임을 은밀한 수신호를 통해 깨달았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가 골반을 살랑이며 다가와 바란에게 싱긋 눈을 접어 보이면, 바란은 오랜 여정에 지쳐 여인의 살결을 필요로 하는 여느 사내들처럼 잔뜩 안달 난 얼굴로 양해를 구하고 막사 안쪽으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잠자리를 가지는 척 그녀의 성기 안쪽이나 목구멍 속, 혹은 입 속 어금니를 뺀 빈자리 등의 전형적인 장소에다 암호문을 은닉해야 하리라.

“저기 탈타미오 후작님, 괜찮으십니까?”

관리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바란은 거듭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관리인은 이 행동을 어차피 매춘부의 육감적인 매력에 홀려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해석할 것이고, 그러면 개연성 하나는 그만일 터였다.

예상했던 대로 매춘부 간자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란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뜨인 눈꺼풀 사이에서 짙은 빛깔로 물들었다. 대화 도중에 끼어드는 그녀가 달가울 리 없는 관리인이 일갈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내버려 둬라.”

붉게 칠한 입술이 도드라지는 이 간자는 의뭉을 떨며 고개를 갸웃댔다. 이윽고 미끈한 손등이 바란의 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뱀의 비늘 같이 낯설고 이질적인 감촉이 뒷목을 오르내렸다. 바란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크흠, 후작님. 아랫것들이 찾는 저급 창녀인데요. 보는 눈이 많은데 이런 년을 침상에 들이셨다간 망신당하기 십상입니다. 여자가 필요하시다면 제가 따로 물색해서-”

“됐다.”

헛기침으로 무마해보려던 관리인은 그런대로 바란의 명예에 신경을 써 조언했다. 하지만 명예라니. 이미 무저갱에다 이름값을 처박은 탈타미오 후작에게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바란은 아랑곳없이 손을 뻗어 그녀의 옴폭 들어간 허리를 받쳐 안았다. 귓전에 구슬이 구르는 듯 영롱한 웃음소리가 부서졌으며, 매춘부들이 자주 지니고 다니는 짙은 향이 끼쳤다. 어느 것 하나 니카와 닮은 구석이 없는 부드럽고 말랑한 몸이 품에 감겨들었다.

타인을 이 품에 끌어안아 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나마 가장 최근 이렇게 다정히 부둥켜안고 체온을 나눈 상대가 누구였는지 떠올렸다. 허탈한 숨소리가 마치 웃음소리처럼 들렸다.

‘니카는 이것보다 좀 더 딱딱하고… 거칠고….’

기억을 꺼내 들고 옹이 자국처럼 남은 니카의 자취를 더듬었다. 곧 끔찍한 깨달음이 바란을 덮쳤다. 니카의 감촉을 기억하려고 그렇게나 애를 썼음에도, 벌써 그 흔적이 허무할 정도로 희미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체취와 온기, 단단한 근육과 살의 탄력, 모두 다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렇게나 새겨 보았는데도, 전부 희미해지네.’

니카를 잡종이라 조롱하고도 멀쩡했던 낯이 이번에도 견뎌줬으면 좋겠다고 바란은 생각했다. 이를 꼭 악물었고, 가슴은 들숨을 따라 위로 들썩이며 올라갔다. 오뚝한 콧날이 매춘부의 머리칼 사이로 파묻혔다.

현기증이 나도록 강렬한 머릿기름과 향유 냄새에 지배당한 채, 바란의 몸이 파드득 떨었다. 레이먼드와 관리인은 입을 헤 벌리고 그를 보고 있었다.

“싸구려 욕정에 대단한 출구를 찾는 게 더 사치 아니겠나. 이 정도면 됐다. 잠깐 실례하지.”

여자의 손목을 끌고 앞장서 걷는 바란의 나직한 말은 탄식처럼 들렸다. 고작 여자와 즐기려고 걷는 걸음걸이가 저렇게 초연하고 비장해야 할 이유가 다 뭐란 말인가? 노예병단 관리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만 좌우로 저었다.

* * *

‘그래, 앞뒤 안 가리고 뛰어들긴 했군.’

니카는 겸허히 인정했다. 발코니에서 지면으로 몸을 내던지며 튼튼한 몸을 자랑하기 전에 생각이란 것을 먼저 하고 작전을 짜뒀다면, 지금 이렇게 고역을 치룰 필요는 없었을 텐데.

“다시 한 번 말해봐.”

숱이 많고 못생긴 눈썹을 잔뜩 어그러뜨린 남자가 길바닥에 침을 찍 뱉고 물었다. 겁을 잔뜩 먹여서 진심을 재어 볼 작정인지 자꾸만 허리춤의 검을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니카고, 왕국기사라고 말했다.”

니카는 침착하게 신원을 밝혔다. 이미 이 진술을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크흡….”

“푸하하!”

면전에서 웃음을 터뜨리는 이 용병들을 나무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지는 니카 스스로도 잘 알았다.

니카에게 최소한의 정신머리가 붙어있었다면 숙소에 처박아 둔 왕국기사의 검을 가져다 보여주고 호소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다짜고짜 왕자군이 점령한 사난타의 영주성 정문으로 들이닥쳐 왕자에게 안내해달라는 억지를 부렸다. 이제 와서 발을 빼기는 늦었다. 니카는 왼쪽 얼굴이 헝겊 밑에 가려진 상황에서도 능력껏 주변을 곁눈질로 확인했다. 같은 패거리로 보이는 덩치 좋은 용병들이 설렁설렁 걸어 와 니카의 퇴로를 모두 막았다.

“풉, 킥킥. 기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왕자님을 뵐 수 있게 해줘. 하다못해 이 니카가 살아있다고 아뢰기라도 해다오.”

“와앙자님을 뵙겠다고? 네가? 네 주제에?”

왕녀에게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서 있었을 때는 ‘왕녀의 기사’라는 감투가 있었지만, 왕녀 없이 그는 한낱 용인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걸인과 다름없는 행색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신뢰를 주기 어려웠다.

“존나 웃긴 새끼…. 껄떡대는 게 웃기긴 해도 이제 슬슬 질린다.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돼?”

“아서라, 대장님이 민간인 건드리다 걸리면 성벽에 모가지 걸어준다셨다.”

“안 걸리면 되는 거잖아?”

“빙신, 나는 눈 없냐?”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치밀었다. 지금 이렇게 허튼 논쟁과 의심으로 소모할 시간적, 심적 여유가 니카에게는 없었다. 니카는 조용히 왼쪽 얼굴을 가리고 있는 헝겊을 들어냈다.

사방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토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동공 위로 사방을 밝힌 횃불의 빛살이 쏟아졌다. 빛을 조절하느라고 동공이 순식간에 좁혀들었다. 괴기스러움이 한층 더해졌다.

“씨발, 깜짝이야! 눈깔이 왜 저래? 보, 볼에 돋친 건 다 뭐고?”

“용인? 용인 아냐?”

“인간 아닌 건 확실하지.”

“내가.”

니카는 힘주어 말했다.

“수리 왕녀의 검이자 왕국기사로 서임 받은 니카라고 했다. 윗선에 아뢰어준다면 도움을 반드시 기억하겠다.”

“잠깐만. 수리 왕녀의 검? 용인기사?”

“탈타미오에서 뒤졌다던 그 용인기사가 너라고? 별 개 같은 소리를 다….”

“…….”

사칭이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에 관해 엄포를 놓다가도 용병들은 ‘설마’하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본디 용인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니거니와, 이렇게 올곧이 정체를 밝히는 데야 자라나던 의심도 뚝 꺾여 고꾸라지고 말았다.

“형님, 우리 선에서 다룰 문제는 아니지 싶은데요.”

“…….”

체계를 갖춘 왕자군의 용병들이 적절한 합의에 이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들 이 말에 수긍했다. 당장이라도 니카를 거세게 조여서 터뜨릴 것만 같던 눈빛들이 수그러들었다.

“말인들 누가 그럴싸하게 못해?”

그래도 변수는 존재했다. 어느 집단에나 암묵적 합의를 거스르고 횡포를 부리는 이가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하필이면 이 용병들 사이에서도 ‘형님’이라 불리며 의사결정에 큰 몫을 맡은 이가 도끼눈을 떴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던 니카의 시선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선 용병의 신발코에 닿았다. 아래로부터 모습을 훑었다. 목에 선 핏대에 눈길이 미쳤을 때는 이미 남자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해 있었다.

“퉤! 저런 비실이 말라깽이가 그 용인기사라면 내가 헬린 힐벤 할아버지겠다.”

“사칭은 중죄라고 하지 않았나?”

농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니카의 대꾸에 지켜보던 용병들이 하나둘 실소를 흘렸다. 무더기로 날아든 웃음소리는 상황에 따라 비웃음으로 왜곡되어 스스로를 압박하기 쉬웠다. 머리털을 깔끔히 면도한 용병 남자가 콧김을 뿜으며 도끼를 치켜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니카는 짐작했다.

용병이 도끼날로 니카를 겨누었다.

“간단한 판별법이 있지! 저놈이 정말 그 용인기사라면 내 도끼에 맞서 살아남을 거고, 아니면 목이 따일 것이다.”

“형님, 저놈은 손에 무기도 하나 없는데….”

“왕국 제일의 검사라는 놈 유언이 ‘내 손에 검만 있었다면.’ 하는 코맹맹이 소리라면 그것참 우습겠군.”

니카는 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셋을 세기 직전에 용병이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용병은 몸집이 크고 단단한 근육질로 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종종 왜소해 보이기까지 하는 니카와 견주어 본다면 승패는 명명백백해 보였다.

‘왼쪽 팔.’

니카의 눈에 도끼의 궤로가 단번에 꿰뚫렸다. 승리를 확신하던 상대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좁아졌다. 일격필살로 달려들던 용병이 무게중심을 잃고 짧은 순간 휘청거렸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니카가 발을 걸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용병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형님!”

“바, 발을 걸다니…비겁한….”

“아군끼리 칼부림은.”

잠깐 눈을 깜빡이던 니카가 고쳐 말했다.

“도끼부림은. 무의미하다.”

“…….”

“왕녀님은 무의미한 피를 흘리는 것에 질색하시지. 계속 덤비겠다면야 나로서는 하는 수 없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다치게 하고 싶지 않군.”

입만 산 허세가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이해했다. 거대한 덩치의 용병이 달려드는 동안 니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옆으로 살짝 비껴나 발을 거는 것뿐이었다. 경제적인 움직임으로 실리를 취하는 것은 말 그대로 고수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세상에 이렇게 싸움에 능한 용인이 용인기사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더라면 입소문이 진작 났을 것이다.

“이봐들! 다 여기 모여 있었구만. 단장님 명령이야. 사람을 하나 찾으라고 하시던데….”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한 와중에 헐레벌떡 달려든 날쌘 용병 하나가 목청을 돋웠다. 어깨를 맞대고 둥글게 모여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느라 초겨울에도 진땀을 뺐다. 

“다들 뭘 하는데 이렇게 조용한 거야? 단장님 명령이라니까. 검은 머리에 얼굴 반쪽을 가리고 다니는 젊은 남자를… 찾으라고….”

누가 듣더라도 니카를 지칭하는 신상정보였다. 그 자리의 모두가, 심지어는 방금 당도해서 숨을 고르고 있던 용병까지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니카가 눈길을 주자 혀라도 깨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에 같은 말을 반복했다.

“차, 찾으라고….”

“안내해.”

앞장서서 걷는 니카를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두로부터 이어진 대로를 타고 흩어져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길을 왕자군이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 마치 약을 삼키면 그 효능이 잎맥처럼 뻗친 혈관을 타고 사지로 흩어지는 것과 같았다.

거리에 즐비한 대공군의 살과 피가 신선하고도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이미 영주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으니, 뭐, 이제 잔당들 처치하는 것만 남았지.”

“잔당이라. 싸움이 무서워서 도망친 쥐새끼들이 무슨 배짱이 있겠어? 방금만 해도 갑옷을 벗다가 대갈통이 낀 채로 씰룩거리는 대공군 놈들을 셋이나 죽였는데.”

심장을 뛰게 만드는 시끄러운 행진 북소리는 그날 밤이 지나기까지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니카는 그 박자에 따라서 발을 디디니 신기하게도 기운이 솟아났다.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뜬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저기, 천천히 좀 가십쇼.”

“웬 존댓말이야?”

“아니. 용인기사인 게 정말이라면 우리랑은 짬이 다르잖냐. 미리 조심해 놔서 나쁠 거 없지.”

“와 씨, 잔머리 하나는 훌훌 돌아가는 새끼….”

“아, 기사님. 천천히 가시라니까요.”

느려터진 용병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다 내팽개치고 혼자 달려가려는 충동을 억누르느라 니카는 무수한 노력을 했다. 잔뜩 부푼 가슴이 벌렁거리며 평소보다 더 많은 숨을 삼켰다.

‘왕녀님도 여기까지 오셨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리가 없었다. 수리 왕녀는 검에 솜씨가 없는 축인 데다 명목상 드라코슨 혈통의 귀부인이었으니 위험한 전장에 행차할 이유가 없었다.

니카로서는 다행이었다. 왕녀가 만일 사난타 성의 전장까지 따라나섰다면 기쁜 것은 잠시고 곧 걱정이 들끓어 제정신으로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왕녀님. 어서 뵙고 싶어.’

수리 왕녀의 존재는 니카에게 있어 다양하게 정의되었다. 혼자서 간직하는 마음이기는 했어도 대개 그녀는 니카의 안에서 연인이었고, 때때로 인자한 어머니, 거기에 더해 그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니카는 죄를 지었다. 숙적과 동침하여 몸을 더럽혔고,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값싸게 홀려 왕녀를 향한 연정을 흙탕물처럼 만들었다.

물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이미 진흙이 섞여든 마음은 여전히 흙탕물이나 다름없었다. 천성이 순결한 그는 아무리 거듭 이 죄를 씻어내려 노력해도 멍에에 목을 내걸고 있는 듯한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서.’

코끝이 매웠다. 살을 에는 추위 때문이리라.

용병들의 안내를 따라 걸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영주성의 층계로 바로 안내받지 못한 채 성의 옆구리 방향으로 틀었을 때였다. 니카는 자신의 목적지를 확실히 해둬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장 엣시아 용병단장에게로 가는 건가?”

서로 눈치를 보던 용병들의 등줄기가 곱아들었다. 니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쁘게 오고가는 시선 속에서 긍정의 의미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예, 찾아오라고 지시한 건 단장님이시니까. 단장님께로 먼저 가는 겁니다.”

“왕자 전하께는 알리지도 않고 말인가?”

앙살라테 왕자 밑에서 수족으로 일하고 있는 엣시아 용병단은 왕국기사들보다도 서열체계가 잘 정돈된 집단이었다. 그들의 충성은 피보다 끈끈한 의리로 얽혀 있었으며 확실한 방향성을 가졌다.

바로 수많은 전쟁을 이끌어 온 단장 락샴을 향한 충성이었다. 사실상 상위자를 향한 충성은 여느 귀족가의 사병들도 마찬가지였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락샴이 왕자에게 항상 고분고분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 니카가 생각하는 구린 점이었다.

“단장님 말씀이, 먼저 얼굴 보고 확인을 하셔야겠다고….”

용병 하나가 말문을 여는가 싶더니 도로 입을 꾹 닫았다. 시선이 니카의 등 뒤를 향해 쏠려있었다. 니카는 용병들이 제 어깨너머를 향해 슬그머니 “안녕하십니까. 단장님.” 하는 건들거리는 인사를 바치자, 곧장 미간을 구겼다

.“오냐, 수고했다. 명령 내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잘도 찾아왔구나.”

예상했던 대로 등 뒤에서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만 해도 몇 번째 내뱉는 한숨인지 모르겠다. 니카는 또다시 폐를 털어내는 수준의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일단 뒤통수는 비슷하게 생겼네. 어디 앞 통수도 한번 보여줘 보시지.”

“락샴.”

니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한껏 거드름을 피우던 남부인 청년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눈썹을 따라 얼굴의 크고 작은 흉터가 춤을 추었다.

“뒤졌다더니.”

간만에 보는 얼굴이 낯설었다. 물론 락샴이 느끼기에는 더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락샴은 용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니카는 먹을 것도 줄여가면서 고생을 해 오느라 얼굴이 많이 상했다.

“와. 이 용인 상판대기 좀 봐라, 얘들아. 피골이 호형호제하면서 서로 달라붙은 수준이구만. 안 그러냐?”

아니나 다를까 얼굴을 맞대기 무섭게 락샴이 빈정댔다. 낄낄대며 주변 용병들이 따라 웃도록 부추겼는데, 아무래도 반응이 따라 나오지 않았다.

“아, 씨팔. 너네 이 새끼랑 같이 싸운 적이 없으니 면상이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리가 없구나?”

“싸운 적이라면…. 이 용인, 이 사람, 아니, 이 분이 그럼 정말로 왕국기사라는 말씀이십니까?”

“대답이 더 필요하냐. 이 바보천치 같은 새끼들아.”

썩 당당한 태도로 니카를 이끌던 용병들이 잔뜩 기가 죽어서 뒷걸음질을 쳤다. 말라깽이 용병 하나가 곁에 선 다른 용병을 팔꿈치로 쿡 찌르면서, “거 봐, 존댓말 쓰는 게 맞는 투자였어.” 하고 속삭였다.

니카는 왕녀의 직접적인 명령을 통해서만 파견되는 기사지, 지휘관이 아니었다. 총력을 동원하는 전장이 아니고서야 같이 출전하는 일이 잘 없었다. 또 투구를 쓰고 있노라면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니 엣시아 용병단의 일개 용병들이 니카의 얼굴을 알 일은 요원했다.

“너 같은 새끼도 살아있었다니까 반갑긴 하네. 요즘 같은 시기엔 애새끼 손도 아쉽기 마련이거든.”

“너한테 환영인사를 다 듣는군.”

“존나 의외라는 표정이네. 보고 싶었다는 말까지 하면 아주 기절하시겠다?”

같잖은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이 곧장 니카가 진저리를 냈다.

“와아, 하하. 하! 그렇게까지? 나도 마찬가지거든, 인마. 그냥 승부도 보기 전에 네놈 자식이 칠칠찮게 뒤졌다길래 아쉬워했을 뿐이야.”

락샴은 니카와 궁합이 안 좋았다. 예의, 가치관, 도덕이나 그 밖의 모든 측면에서 그랬다. 심지어는 니카의 절륜한 검 솜씨가 뜻밖에 락샴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을 때는 대련을 하자는 명목 아래 수도 없이 괴롭힘을 당했었다.

“자, 받아라.”

락샴은 곁에 선 용병의 허리춤에서 다짜고짜 장검 한 자루를 끌러내더니 니카를 향해 검집째로 던졌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검을 피하거나, 잡거나의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다.

“이건 왜…?”

피로에 찌든 니카는 락샴의 속셈을 헤아려 보면서 그 검을 붙잡았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왜긴 왜냐. 아직 실력이 쓸 만한지 이 몸이 미리 확인하려고 그러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은 락샴은 구불구불하게 생긴 두 자루의 검을 천천히 뽑았다. 잘 손질된 검이 검집에서 미끄러져 나오며 길게 울었다.

“그 부하에 그 단장이로군.”

말로 타일러서 이 괴벽을 그만두게 할 자신이 없었으므로, 니카는 한탄 속에 조용히 검을 고쳐 잡았다.

* * *

랜달 백작이 쓰던 의자는 참으로 좋았다. 최고급 무두장이가 무두질한 사슴 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살갗을 대면 비단결 같이 보드라웠고, 등을 기대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안 돼.’

하지만 아직 회의를 비롯한 무수한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아직 잠들어서는 곤란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앙살라테는 뻐근한 콧잔등을 엄지 두 개로 지압했다. 이렇게 하면 뻑뻑한 눈의 피로가 가신다고 어느 누군가가 알려줬는데, 사실 그게 효과가 있다고 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버릇이 되었을 뿐이었다.

‘삼 일 지났나?’

그보다 더 되었는지도 몰랐다.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 물살을 거슬러가며 사난타로의 여정을 시작한 이후, 앙살라테는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중첩된 피로가 근육마다 달라붙어 온통 몸을 뻐근하고 둔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귀도 자꾸만 헷갈렸다.

“왕자 전하!”

‘누가 왔나? 아니면 공연히 들리는 환청인가?’

바깥에서 들리는 노크소리에 앙살라테는 제 귀의 기능을 먼저 의심했다.

“전하!”

‘두 번까지는 잘못 들을 수 있지.’

“앙살라테 왕자님!”

‘…세 번은 아니지만.’

노크소리가 점차 거세게 문짝을 두드렸다. 앙살라테는 그 목소리가 엣시아 용병단장 락샴이라는 것을 깨닫고 부쩍 더 피곤해진 표정을 지었다.

“들어와.”

“거 참, 빨리 대답하시지 않고요.”

“내가 네 상전이지, 대답해주는 사람이냐? 그런데 뭘 데리고 온 거야?”

락샴의 뒤를 이어서 넝마조각에 가까운 헝겊을 옷이라고 걸친 멀대 같은 인사가 들어섰을 때, 앙살라테는 그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성질 급한 락샴이 어쩐지 토라진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빠져버렸다.

앙살라테는 단번에 골치가 아파졌다. 워낙 정의감이 불 같은 인물들을 측근으로 거두다 보니, 때때로 동정심에 못이긴 부하들이 신원도 확인되지 않은 피란민을 성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는 불상사가 생기곤 했다. 그런 일과 가장 거리가 멀던 락샴이 사사로이 사람을 들이다니 놀랍기도 했다.

“오, 락샴. 왜 너답지 않은 짓을 하고 그래? 우리 측에 사람 거두고 다니는 성인은 수리 하나로 족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야 인마, 도롱뇽 새끼야. 내가 뭐랬어. 못 알아볼 거라고 했지.”

그것 보라는 듯이 구석에 기대어 손가락을 까딱이던 락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앙살라테가 아연해져서 되물으려는데, 락샴이 데려온 남자가 때마침 그 무거운 입을 뗐다.

“전하. 접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앙살라테는 이 목소리를 잘 알았다. 홀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인간과는 다른 특징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 창백한 저 피부까지….

왜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비록 그 충성의 대상이 자신은 아니었더라도 내전이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곁에서 함께해 온 그의 사람이었다.

남부에서 찾은 보물 같은 인재. 왕녀의 용인기사. 바란 탈타미오를 묶어둔 말뚝. 앙살라테의 두 눈이 흐려졌다.

“…니카 경?”

사사바란의 기사에게 당해 목숨을 잃었다고 보고 받은 게 벌써 수개월 전의 일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가 사지 멀쩡하게 앙살라테의 앞에 서 있었다. 앙살라테의 머릿속에 놓였던 체스판이 작은 변화에 힘입어 재배열되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럴 수가!”

숨길 수 없는 웃음이 왕자의 입매에 감돌았다. 그는 니카의 양손을 반갑게 맞잡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꼴이 정말 말이 아니잖아. 고생 좀 했겠는데. 어떻게 된 거야?”

“얘기가 깁니다,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왕녀님은….”

죽은 줄 알았다가 상봉한 순간인데도 니카는 왕자에게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왕녀를 찾기 시작했다. 왕자는 슬쩍 고개를 돌려 락샴에게 입 모양으로 ‘뭐 이런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 다 있냐.’면서 흉을 봤다.

“그래, 뭐, 중요한 건 경이 살아있다는 거니까. 수리한테도 이 사실을 어서 알려줘야 하겠군. 정말 기뻐할 거야, 경.”

니카는 자신이 원하던 대답이 나올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았으므로 앙살라테는 얼른 그 강렬한 눈빛에다 대고 수리의 거취를 알려주어야 했다.

“수리는 잣자후에 남았어. 막쉬롭이랑 같이. 아, 경은 잘 모르겠군. 이번에 새로 동료로 맞은 사람인데, 집시 샤먼이야. 잣자후가 가진 비밀을 잘 알고 있을뿐더러 통찰력이 좋지.”

니카는 잠시 눈을 깜빡이기만 하며 말이 없었다.

“잣자후에서의 발굴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무렴. 잘만 하면 고대룡의 심장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그럼 이제 대관식에서 헬린 힐벤한테 꿀릴 일은 더 이상 없는 거지. 좀… 앉을래?”

앙살라테가 니카에게 자리를 권했다. 손바닥이 가리키는 의자를 적당히 찾아서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돌아오자마자 일 들이밀면 너무 가혹한 사람처럼 보일까봐 무섭네.”

“전하께선 옳은 일에 따라오는 나쁜 평판에는 아랑곳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니카는 상 위에 차려진 다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렇게 입바른 소리 해주는 기사가 한동안 없었는데 말이지. 낯설구만. 그래, 아무튼 딱 좋을 때 왔어. 방금 힐벤 측에 심어둔 간자로부터 전언을 하나 받았거든.”

“전언이라고요?”

락샴이 이 말에는 흥미를 보이며 달려들었다. 니카의 맞은편 의자를 잡아당겨 요란한 소리를 내고 앉았다. 탁자에 올려둔 팔꿈치가 예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아는 니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고 한 소리 쏘아붙이기도 전에 왕자가 입을 열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군대를 보내겠다는군. 볼모들을 은괴 일백 상자에 넘기지 않는다면 공성을 시작하겠다는데? 맙소사. 타협이라고는 제 사전에 없다던 그 헬린 힐벤도 귀족들 눈초리가 따갑긴 한가 보네.”

“귀족놈들 모가지를 따다 주면서 반값만 받겠다고 하면 되겠군요. 누가 지휘한답니까?”

“…….”

신이 난 락샴의 말에 왕자는 급작스럽게 상 위에 턱을 괴고 침묵을 지켰다.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이 니카의 얼굴을 훑었다. 무슨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잔악후작.”

목석같던 니카의 어깨가 움찔 떨었다. 주의를 기울이고 보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준의 아주 작은 변화였다. 왕자는 천천히 고개를 드는 까만 눈 안에 타오르는 알 수 없는 불꽃을 느꼈다.

왕녀의 용인기사 니카 경은 본디 왕녀와 무관한 것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혐오하는 두 가지 감정 중 한 가지만을 가졌다. 그러니까 그 종류가 무엇이든 간에 이렇게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아직 분위기를 읽지 못한 락샴이 큰 흉터 좌우로 반씩 쪼개진 숯검댕이 같은 눈썹을 신이 나서 들어 올리며 킬킬 웃었다.

“바란 탈타미오? 그 새끼랑은 저번에 끝장을 제대로 못 봤었는데 아주 잘 됐지 뭡니까. 킥킥, 이번에 그놈 목을 딴 다음에 그 곱상한 상판을 아주 갈아버리려니까 저만 믿고 맡기십쇼, 왕자님.”

“그 자식은 내가.”

앙살라테와 락샴은 처음 듣는 들끓는 음성에 놀라 잠깐 서로를 마주 보았다. 심장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드는 음색이었다.

곧 이상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며 니카를 돌아보았는데, 그는 피죽도 못 먹어 더욱 서늘하게 된 얼굴 정중앙에서 새까만 눈을 치뜨고 분노를 태우고 있었다. 락샴은 놀라 얼어붙었다.

살벌하게 움킨 니카의 주먹이 탁자 위로 올라왔다. 손가락뼈가 울퉁불퉁 도드라졌고 핏줄이 우두둑 돋아 있었다.

“내가 맡는다.”

앙살라테는 전언에 적혀있던 사과말에 관해서 떠올렸다. 적진에 매춘부로 심어둔 유능한 간자를 통해 전달된 암호문에는 단 세 가지 정보가 실려있었다.

앞선 두 가지는 대공의 사난타 탈환에 대한 의지 표명, 그리고 바란이 지휘관으로 서게 된 일이었으며, 마지막은 영문 모를 사과말이었다. 바란은 욕심으로 인해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앞으로나마 힘써보겠다며, 아직 거래가 돈독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싶어 했다.

맥락을 몰라 여태 머릿속에 감돌던 의문들은 니카를 마주하는 순간 자연히 풀렸다. 하필이면 바란이 있던 탈타미오 인근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안 그래도 마음속에서 거치적대곤 했었다.

‘꼬마가 살렸겠군. 넉 달간 묶어뒀다가 이제야 풀어줬나 보지. 니카 경이 저렇게 화가 난 건 그것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고…. 구해주고 나서도 저렇게 철천지원수 같은 관계로 남다니, 걔는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야?’

어떻게 생각하면 잘된 일이었다. 바란은 왕자가 가진 장기말 중에서도 맡은 역할이 꽤 컸다. 퀸은 못 되어도 비숍 정도는 될 것이다. 니카라는 한 가지 미끼에만 광적으로 반응하는 만큼 다루기는 쉽지만 니카가 없을 때는 제어를 완전히 잃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것에 대비해 일방적인 정보책으로 조금 모질게 취급하고 있기는 해도, 대공의 손에 들어갔을 때 잃을 것이 아주 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니카가 살아있다면 아직 바란 탈타미오 역시도 그의 손안에 있었다. 앙살라테는 쓴웃음을 지으며 머릿속 체스판 위에다가 비숍 하나를 도로 올려두었다.

‘꼬마에겐 늘 미안한 마음뿐이군.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대공에게 있어서도 사난타는 아쉬운 전략지였다. 그러니까 이런 시점에도 굳이 난공불락의 성을 탈환하려고 무리하게 나서는 것이다. 이거면 수도를 치려던 대공의 발걸음을 잠시 묶어두고 잣자후의 발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아직은 희망이 있어.’

수많은 희생으로 열린 길 끝에 그를 기다리고 있을 영광과 정의를 떠올렸다.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서. 헬린 힐벤의 손아귀에 나라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 * *

‘살아있다.’

니카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모든 이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더 이상 얼굴을 헝겊 밑에 감추지 않은 니카는 어딜 가든 단연 눈에 띄었다. 그것이 결단코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해도.

허리춤에 찬 검 손잡이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 추위에 약해 몸을 떠는데도 손에는 자꾸만 땀이 찼다.

‘살아있다. 죽지 않았다.’

걸음에 점차 속도가 붙었다. 가슴이 소란스럽게 뛰었다. 시끄러운 칼바람이 두 뺨을 스쳤다. 애써 꺼내지 않으려던 바란에 관한 기억이 하나둘 고개를 들고 그 거대한 존재감을 니카에게 확인시켰다.

니카가 사랑해 마지않던 웃는 얼굴, 상냥한 말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보았던 피를 토하던 입술까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내달렸다. 모든 영상이 속도감을 못 이겨 이지러진 채 한 덩어리로 합쳐졌다.

‘나의 니카.’

눈가가 경련했다. 눈꺼풀이 어그러지고, 이내 고통스럽게 내리 감겼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아니, 온몸에. 더 이상은 나아갈 힘이 없었다.

탈타미오를 떠난 그 날 이후 거듭된 악몽 속에서 피칠갑을 한 채 니카를 뒤쫓던 바란의 형상이 떠올랐다. 지레 겁을 먹는 것도 잠시, 니카는 곧 가만히 앉은 바란의 뒷모습이 악몽 속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백일몽 속의 바란은 그저 희끄무레하고 눈부시기만 했다.

니카는 두 가지 색깔이 뒤섞인 뒤통수에 대고 감히 말을 붙이지는 못했다. 대신 말간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죽은 줄 알았어?’

가슴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죽은 줄 알았느냐고? 그래, 당연히 그랬다. 니카는 바란의 배를 거의 찢다시피 베어놓았다. 인간은 용인과 달라서 온통 말랑말랑하고 언제든지 죽기 십상이다.

상상 속 바란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아서, 오래 뜸을 들인 끝에 니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정말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만약 바란이 그런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니카가 그런 대답을 하고 나면, 또다시 바란이 어떤 반응을 할지, 가장 그럴싸한 반응을 유추했을 뿐이었다.

그는 아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니카에게로 다가왔을 것이다. 후작의 두 눈은 호수를 담은 듯이 반짝이고, 저희들끼리 뒤엉켜서 매일같이 모양을 달리하는 어지러운 머리칼은 바람결을 따라 흘러내렸겠지.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흰 치아가 빛날 것이고, 그는 나른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돌연 사과를 안겨 왔을 것이다.

‘걱정하게 만들었네. 미안.’

그게 아니라면 조금 더 온순하게, ‘잘못했어, 니카.’ 라고 말했을까. 니카의 마음은 갖가지 가능성으로 눅눅히 젖어 들어갔다. 여러 가지 상상의 갈래길 중 대부분에는 따뜻한 포옹이 있었고, 그 끝에서 바란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니카에게 마법 같은 입맞춤으로 사랑을 맹세했다.

“…아.”

그 품 안이 얼마나 따스했는지를 떠올리고 나니 비로소 손발을 에는 이 사난타의 추위가 실감이 났다. 니카는 돌연 달콤한 상상으로부터 차가운 현실로 내팽개쳐졌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니카는 어느새 자신의 걸음이 멈춰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대로 한가운데에서 정체되어 서 있는 것은 니카뿐이었다.

니카는 자신에게 모여든 수없이 많은 시선을 살폈다. 보통 빛을 한 점에 모으면 뜨겁고 연기가 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이토록 열렬한 눈빛들이 한 점에 모여들었는데도 마음, 분위기, 날씨, 모든 것이 이렇게나 차갑다니 이상했다.

‘원래대로 돌아온 거야.’

단 한 순간도 따뜻했던 적이 없는 삶 속으로. 니카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그 어떤 미련도 가져선 안 돼. 바란 탈타미오는 저주의 이름이고, 배신자의 이름, 숙적의 이름이다. 사사로운 감정 같은 건 전부 다 왕녀님을 모욕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죄를 지었다. 더 이상의 변절은 나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다.’

* * *

바란의 출정은 외롭고도 무거웠다. 그에게 주어진 노예병 오백, 사사바란과 탈타미오의 병사로 이루어진 또 다른 오백 명을 비롯해 공성무기를 잔뜩 끌고 겨울의 세력이 미친 사난타로 진군하는 일은 비록 그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해도 힘겨운 일이었다.

바란은 레이먼드에게 탈타르에 남겨진 탈타미오의 병사들을 통솔하도록 부탁했다. 레이먼드는 본디 앙살라테의 권속으로 바란의 곁에 꼭 붙어 다니면서 그가 탈선하지 않게 일일이 보고하는 게 주된 임무였다.

바란이 처음 그 부탁을 했을 때, 레이먼드는 물론 바란을 혼자 보낼 수 없다며 크게 반발했다. 바란의 짐작과는 달리 레이먼드는 그게 인간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바란이 자신을 남겨두고 출정한다면 그가 밑에 거느린 기사들은 전부 사사바란이 내어준 이들일 텐데, 콧대만 높은 말단 기사들하고 오합지졸인 노예병을 가져다 상황을 헤쳐나가는 동안 누가 바란의 편을 들어주겠느냐고 했다.

‘죽으러 가는 거 아니잖아.’

‘죽을 수도 있긴 하잖아요. 후작님. 잊고 계신가 본데, 난 후작님이 운이 나빠서 죽게 될 때 유산을 내게 상속하겠다는 유언을 꼭 곁에서 들어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거기서…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약속할 수 있겠어요?’

‘….’

‘못 하면서. 진짜 못된 고용주네. 걱정하다가 말라 죽으라는 거냐고요.’

바란은 고개를 들었다. 행군에 어느새 일주일을 소모했다. 저 끝에서 사난타 성이 엄지손톱만 한 크기로 보였다. 사난타. 바란의 건조한 입술이 꿈틀거렸다. 클라텐의 몸을 수습하러 마지막으로 사난타에 들렀던 것이 벌써 오 년 전이었다. 봄철 아지랑이처럼 서글픈 감상이 피어올랐다.

뒤를 돌아보았다. 혹독한 바람에 지친 병사들이 빨갛게 언 손을 겨드랑이에 끼우고 몸을 웅크린 채 멍하니 걷고 있었다.

“앞으로 조금이다! 사난타가 눈앞에 있다!”

바란의 곁에 서 있던 사사바란 수하의 기사 션팟 경이 뒤에 도열한 병사들을 독려하며 소리쳤다. 그래도 노예병들이 바닥에 죽은 듯이 고개를 처박고 걷는 것은 전과 다름없었다. 바란은 속으로 죽으러 가는 고난길이 저런 위안 하나로 즐거워질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틀 녘부터 자정 너머까지 이어진 피곤한 행군이 마침내 그 끝을 본 것은 그로부터 만 하루가 꼬박 지난 시점이었다. 대낮인데도 먹구름이 잔뜩 껴서 사위가 무척 흐렸다. 바란이 이끄는 대공군은 성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평지에 진을 쳤다.

성벽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있다는 것은 멀찍이서 사람 그림자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왕자군은 바란이 이끌고 온 초라한 숫자의 군대를 보고 내심 당황했을 것이다.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왕자군은 하염없이 이쪽을 응시하고 화살로 경고사격을 몇 차례 했을 뿐, 먼저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바란의 접촉만을 기다렸다.

바란은 뿔피리를 불게 시켜 시끄럽게 예를 차리고 대공의 제안서를 든 전령을 성으로 보냈다. 왕자군은 성문을 열어 전령을 들이기는커녕 말을 타고 있는 그대로 활로 쏴 죽였다. 흥분한 말이 등 뒤에 이미 죽어 고꾸라진 시체를 태우고 머리를 돌려 뛰어왔다. 시끄러운 투레질 소리가 고요를 깨부쉈다.

“저들은 지휘관이 직접 얘기할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합의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볼모를 잡은 왕자 쪽이었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바란이 숙이고 들어가야만 했다. 션팟 경이 모멸감을 숨기지 못하는 일그러진 얼굴로 거칠게 말고삐를 끌었다.

“우리가 오라 가라 하면 움직이는 개새낀 줄 아는가 봅니다.”

“션팟 경이라고 했나?”

지저분하게 수염을 기른 기사가 그게 갑자기 무슨 상관이나 있냐는 듯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성깔이 좀 있군그래.”

말 그대로 성격이 불같은 축에 속하는 션팟이 이 의미심장한 말에 뭐라고 더 대꾸하기 전에 얼른 바란이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튼 성벽 뒤에서 우리네 아들딸을 인질로 잡고 하시는 말씀인데 곧이들어야겠지. 말을 준비해줘. 내가 직접 가서 얘기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후작님.”

“또 뭐야?”

“대공 전하께서 보내시기로 한 후발대 말입니다. 이미 탈타르를 떠났답니다.”

“우리 전서구를 기다리기로 한 거 아니었어?”

“뭐, 일찍 출발할수록 제시간에 맞추기 좋을 테니 어떻게 보면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저들이 거래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바란은 눈을 찌푸렸다. 북부에 내린 겨울의 추위와 잘 어울리는 새파란 눈동자가 황금색 속눈썹 밑으로 반쯤 숨었다. 그 잘생긴 얼굴을 보며 션팟이 아랫입술을 수염 밖으로 내밀고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우리는 대공 전하의 뜻에 따라 사난타를 수복하면 되는 일입니다. 볼모들을 되찾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게 최우선이 아니란 사실은 후작께서도 아시겠지요.”

‘정말 말은 쉽게 하는군.’

바란은 다듬지 못해 지저분하게 길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붉은 염색약이 점차 빠져나가면서 생강 빛이 어지러이 뒤섞인 금발이 되었다. 말끔히 넘기고 션팟이 넘겨준 투구를 잘 눌러썼다. 갑옷의 이음매를 살펴 가다듬어준 션팟은 곧 바란의 어깻죽지를 두어 차례 거세게 두드렸다.

“다녀오십시오.”

“보호자처럼 굴지 마. 역겨우니까.”

말의 옆구리를 차며 힘차게 내닫았다.

“거 참, 저놈이야말로 어린 게 성깔 좀 있다니까.”

멀어져가는 바란의 뒤통수를 보던 션팟 경이 구시렁대는 소리는 바란의 귓가에 닿지 않았다.

무거운 금속에 머리통이 짓눌려 목이 반 뼘은 어깨 안으로 쑥 들어간 느낌이었다. 바란은 투구에 뚫린 구멍으로 짓쳐들어오는 겨울바람에 맞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마침내 성벽 근처까지 이르렀을 때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이 더 이상의 접근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고함을 질렀다.

바란은 고삐를 당기고 말을 진정시켰다.

“신분을 밝혀라!”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는 고상한 방법을 놔두고 꼭 이렇게 목청싸움을 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도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바란은 머리 위의 거추장스러운 금속 투구를 벗어 가슴에 안았다. 여전히 얼룩덜룩한 감이 있는 화려한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거리가 좀 있긴 해도 눈을 찌푸리면 상호 간에 얼굴 정도는 식별할 수 있는 거리였다. 바란은 자신의 얼굴에 내리꽂히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탈타미오의 바란이다! 너희들은 합의를 위해 지휘관이 직접 오기를 요구했지.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다.”

“대공군에 정말이지 인물이 없는가 보군. 아니면 대공 그놈이 비역질에 취미를 붙였다던데, 어떤 반반한 놈의 베갯머리 송사에 놀아나서 한 자리를 턱 내줬든가 말이야!”

성벽 위로부터 야유가 날아들었다.

‘그 용병 놈이로군. 사난타에 있을 줄 알았다.’

바란은 생각했다.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성난 망아지처럼 날뛰면서도 용케 왕자 밑에서 착실히 싸우고 있는 그 용병단장일 것이다. 매번 바란만 봤다 하면 신이 나서 이상하게 구부러진 검을 들고 설치는데, 늘 그게 번거롭고 귀찮았던 바란은 그의 이국적인 이름자도 잘 외우지 못했다. 냉랭하게 말장난을 무시한 채 다그쳤다.

“말단의 싸구려 도발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나는 지상의 마지막 용, 진정한 드라코슨, 유일하고 합당한 왕, 헬린 힐벤 대공의 대리인으로 왔다. 그러니 그쪽도 마찬가지로 우두머리가 나서서 제안을 경청해야 마땅하다.”

“오, 그러셔. 근데 어쩌냐.”

락샴의 얼굴에 비릿하게 번진 웃음은 끝이 뾰족하게 깎인 쐐기가 되어 바란을 겨누었다. 그는 성벽 바깥으로 몸을 반쯤 빼내고 아슬아슬 매달려 있었다. 고래고래 목청을 돋울 때마다 락샴의 튼튼한 몸이 박자에 맞춰 출렁거렸다. 마치 거기서 뛰어내리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이쪽도 그깟 대공 새끼보다 자애롭고 정의로우신 앙살라테 드라코슨 전하께로부터 지휘권 위임받았단 말씀이야! 할 말 있으면 나랑 하시지?”

“…위임?”

바란은 불안하게 되물었다. 대공 쪽 첩보에 따르면 앙살라테 왕자는 사난타 점령을 직접 주도했다고 했다. 당연히 성안에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지휘권을 저 용병에게 넘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머리가 바쁘게 돌았다.

‘설마 이미 성을 떠났단 말인가?’

자칫 앙살라테와 사생결단을 내야 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바란이 태연을 가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왕자에 대한 신뢰감 덕이었다. 만일 바란이 이끄는 대공군이 패배하게 되더라도 성안에 왕자가 버티고 있는 이상 바란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자가 없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수틀려 잘못된다면 바란을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진다. 간자라는 사실을 밝힌다고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바란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왕자는 어디에 있지?”

“어쭈. 하대한다 이거야?”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걸 내가 왜 알려줘야 하는데?”

햇살이 잘 드는 바란의 얼굴이 잔뜩 구겨진 채 망설임을 머금었다. 락샴은 그가 머뭇대는 것을 속으로 숫자 몇 개를 세는 동안 기다려주었다가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제안을 가져왔다고 해서 바쁜 시간 쪼개어 귀를 기울여주고 있었더니, 순 헛소리만 하네. 할 말 없으면 난 이만 돌아가지.”

“…….”

신경전을 통해 왕자군이 아쉬운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톡톡히 전달하려던 게 락샴의 의도였다면 훌륭하게 먹혔다. 바란의 완벽한 얼굴에 금이 갔다. 

“잠깐.”

정말로 흥미가 달아난 듯 사각지대로 내뺀 락샴을 불러 세우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던 참이었다. 엄숙한 목소리가 성급하게 달려들던 바란을 진정시키며 지상에 내려앉았다. 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이지 성벽 위 높은 곳에서부터 바란이 두 다리를 딛고 선 지표까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뜻이다.

“우리 지휘관이 실례를 좀 했군. 너그러이 봐 넘기게.”

이 한마디에 침통하던 바란의 낯빛이 곧장 밝아졌다.

매서운 찬바람에 뒤섞여 흔들리는 드라코슨 왕가의 금발과 시원스럽도록 부리부리한 눈, 입술이 끌어올려 질 때마다 잡히는 손톱자국 같은 보조개 한 쌍이 바란의 시야에 빼꼼히 드러났다.

저 남자가 바로 백성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등에 입은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였다.

자신만만한 함박웃음을 내건 앙살라테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겉보기에 훨씬 성숙해져 있었다. 그 변화 덕택에 대공과 왕자 사이에 존재하던 무게감의 간극이 확 좁혀져서, 힐벤 대공과 그가 혈연이라는 것을 그럭저럭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물론 둘 중 어느 쪽에게 이것을 얘기하든 바란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터였다.

“앙살라테 왕자….”

왕자의 얼굴을 보고 나니 바란은 마음 깊이 안심이 되었다. 한숨처럼 낮게 터지는 말씨에서 앙살라테는 바란의 본심을 읽은 듯 굴었다. 전쟁통 속 도발에 대답하는 왕자의 목소리가 의아하게도 부드러웠다.

“그래, 후작. 자네가 원하던 대로 내가 나왔으니 이만 말해보게. 헬린 힐벤 대공이 뭐라고 제안하던가?”

‘후작’이나 ‘자네’하고 격식을 차려 부르는 호칭이 무척 낯설었다. 왕자는 기실 칠 년 전부터 바란을 꼬마라고 부르던 버릇을 아직까지도 못 고쳤다. 심지어는 기밀 서신에서도 꼬마라고 바란을 지칭했으니, 지금은 꽤 애를 써서 호칭을 조절하고 있는 것이리라.

바란은 왕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왕자를 마주치고 나니 지금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자신의 제어 하에 있다는 무모한 용기가 차올랐다.

“헬린 힐벤 전하의 자비로운 제안은 이렇소. 왕자군이 부당하게 억류하고 있는 볼모들을 전부 돌려보내는 대신 몸값으로 은괴 일백 상자를 가져왔소. 볼모를 넘기고 사흘 안에 성을 비우기만 하면 그러는 동안에는 피를 보지 않겠다고 하셨소. 그러나 만일 제안을 거절하겠다면 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풀뿌리 하나 살려두지 않을 것이오.”

“하하, 불바다라! 네가 끌고 온 저 오합지졸로 말인가?”

“대공께서 보내신 이만 명의 후발대가 이미 탈타르에서 출발했소.”

“…이 만이라. 흥미롭군.”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단 사흘이오. 나흘째 되는 아침에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오.”

“그래, 볼모들과 은괴 백 상자라니. 확실히 아주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야. 사실 내가 더 좋은 거래조건을 알고 있는데, 후작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성벽 위에서 왕자와 락샴이 바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왕자가 턱을 끄덕여서 알 수 없는 허가를 내리자 락샴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냥 평범한 휘파람이었다. 아무래도 사전에 계획해 준비해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전쟁터에서는 기이하고 잔인한 엄포를 통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의 사기를 꺾는 전략이 흔했다. 아마 그런 것들 중 하나이리라 생각했다.

“이거, 이거 놔라! 으아악!”

용병들에게 끌려온 것은 사난타 성에 유곽을 세운 장본인이자, 대공의 자금줄을 후원하는 랜달상단의 주인, 랜달 백작이었다. 유곽에서 붙잡혀 항복했다는 소리를 바란도 전해 들은 바 있었다.

“후작도 알겠지만 은괴 일백 상자는 양이 좀 많은 감이 있지. 그런 목돈이 단번에 들어오면 제대로 관리도 할 수 없을 것 같거든. 그러니 조금씩 주고받는 게 어떨까 하는군. 우선은 은괴 반쪽만큼을 돌려주겠네.”

왕자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두려움에 와들와들 몸을 떠는 랜달 백작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은괴 반쪽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락샴.”

“갑니다요.”

신이 나서 입이 귀에 걸린 락샴이 날카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퍽. 얼마 안 있어 바란의 발치에 고깃덩이 하나가 요란스레 떨구어졌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공중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어 바란의 머리칼과 얼굴까지도 더럽혔다.

“으악! 으아악! 내 손, 내 손!”

바란은 흙바닥에 떨궈진 살덩이를 보았다. 귀로 들리는 랜달 백작의 끔찍한 비명과 바닥에 떨어진 잘린 손을 함께 생각하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명백했다.

“네 주인에게 가서 제안할 때와 꼬리 말고 부탁할 때를 분간하라고 전해라, 탈타미오 후작. 이만이 아니라 이십만 명을 끌고 오더라도 너희는 사난타 성을 수복하지 못할 것이다.”

앙살라테가 강경한 의사를 굳은 표정으로 표현하는 것에 비해서 오른편에 선 락샴은 신이 나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몸을 움찔거렸다. 곧 바란을 향해 이죽거리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얘를 백분지 일 조각씩 잘라서 넘겨주면, 그때마다 은괴 한 개를 성문 안으로 들여놔 주는 거냐, 응?”

“…미친놈.”

“키킥, 그래! 돌아가서 이 미친놈 말 네 주인한테 똑똑히 전해라, 이 개새끼야. 그 잘난 군사 끌고 와서 우리가 눈이라도 깜빡하는가, 보라고 한번!”

그렇게 앙살라테가 합의의 단절을 선언하며 망토를 펄럭이며 돌아선 이후로는, 바란이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왕자의 묵인 아래 락샴은 번번이 다른 볼모를 데려다가 신체 일부를 도려내 불구로 만들었다.

“흐, 흑…. 살려주, 살려주세요.”

“이봐,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쇼. 아래에 서 있는 게 누군지 보이나?”

볼모로 잡혔던 중년의 귀족 하나가 눈을 질끈 감고 벌벌 떨다가 락샴의 부추김에 어쩔 수 없이 눈을 열었다. 바란이 올려다보니 잘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대공에게 줄을 댄 중소귀족이거나 사난타에서 재미를 좀 보려다가 재수 없게 발목이 잡힌 남부귀족일 것이다.

바란이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과는 달리 이 귀족은 바란을 알고 있었다. 

“탈타미오, 탈타미오 후작이요….”

“그거 말고 다른 이름 있잖수?”

“자, 자, 잔악후작.”

“자알했어.”

락샴은 과장된 어조로 제 팔 안에 들러붙다시피 붙잡힌 말라깽이 영식을 칭찬했다. 그의 홉뜬 눈이 바란의 새파란 시선과 마주쳤다가 하염없는 눈물에 가리웠다.

“영감님 근데, 잔악후작이 코코탄 전투에서 내 동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모르겠네?”

“모, 모릅니다….”

“그래? 모를 것 같더라니. 괜찮아. 그럼 내가 가르쳐주지. 뭐 어려운 일이라구.”

“제, 제발.”

“보채지 않아도 천천히 잘 가르쳐줄 테니까 진정하쇼. 저 잔악후작이 코코탄 전투에서 사로잡은 엣시아의 형제들에게 어떤 짓을 했냐면 말이오.”

“으아아악!”

목근육이 뻐근하도록 성벽 위를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바란의 두 눈이 흐려졌다. 허공을 초점이 비껴나간 눈으로 응시하며 끔찍한 비명을 견뎌냈다. 곧 광대뼈부터 포를 떠 솜씨 좋게 피부를 벗겨낸 끝에 두 귀가 두툼한 살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턱을 먼저 으스러뜨리고, 볼에다 구멍을 낸 다음 좆을 옆으로 넣고 흔들었다 그러더라고. 비위도 참 좋지 않수?”

소문의 진위 여부는 락샴의 분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란은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말이 가슴에 이미 묻혀있는 탓에 새로이 묻을 공간을 찾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 귀족이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처절한 비명소리가 멎고 잠잠해졌을 무렵이었다. 성벽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선 락샴이 단단한 구릿빛 팔뚝으로 모욕적인 동작을 했다. 논쟁의 여지도 없이 바란을 향한 것이었다.

“귓바퀴까지 제대로 오렸으니까 더 지껄일 말이 있거든 거기다가 대고 하라고, 잔악후작! 우리 좀 그만 괴롭히고!”

결국은 왕자군의 철옹성 같은 강경함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 채로 약속한 사흘이 다 흘렀다. 나흘째의 아침은 바란이 이번 겨울에서 겪었던 것 중에 제일 추웠다. 입김이 부서졌고 병사들은 해가 짧아 의욕도 없이 꾸역꾸역 기상했다.

“약속한 사흘이 지났습니다. 저들의 잔혹행위와 대공 전하에 대한 조롱은 이미 도를 넘었습니다. 반역자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후작님, 돌격명령을 내리십시오.”

션팟이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란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말했다. 호기롭게 팔을 좌우로 펼치며 이렇게 주저앉아 있는 것은 대공의 체면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군을 얕보이게 만들어 사기에도 좋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메마르고 갈라진 땅 위에 우뚝 솟은 대공군의 막사를 한 차례 돌아보던 바란이 맥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공 전하의 명령을 거역하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다.”

같은 자리를 서성이면서 바란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왕자가 바란이 죽도록 내버려둘 리 없었다. 

‘그런 게 두렵다는 말도, 아니야.’

바란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지자 어깨가 안으로 둥글게 굽었다.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바란은 대량살상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소문 속의 그 잔악후작이 아니었다. 개죽음이 될 것이 명약관화한데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다 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후발대는 어디까지 왔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어제 온 전령이 한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오늘 아침쯤 된다면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로 좁혀진다 했습니다. 지금 공격을 개시하면 머지않아 후발대가 합류하며 성을 포위할 것입니다.”

“하지만 후발대를 위해 길을 여는 동안 이 병사들은 다 죽고 말 거다.”

바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뭐, 그러라고 보낸 노예병이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사바란 경이 자신의 병사를 내어주면서 그런 각오 하나 안 했겠습니까. 병사를 잃는다고 해서 후작님을 탓할 리는 없을 겁니다.”

“만지지 마라.”

어깨를 도닥이는 투박하고 커다란 손을 쳐냈다. 바란이 이를 드러낸 고양이처럼 앙칼지게 구는 것에 션팟도 적잖이 신경질이 났던 모양으로 그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둘 사이의 신경전은 곧 대공의 깃발을 단 후발대의 전령이 당도하면서 뒤로 미뤄졌다. 전령은 바삐 지휘관 바란 탈타미오를 찾아 후발대의 상황을 보고했다.

“후발대는 사난타의 남동쪽과 북동쪽을 반원형으로 포위해 좁혀들고 있습니다. 돌격대가 공격을 개시하면 언제든지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공성병기 백여 기가 뒤에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자그마한 성 따위는 금방이라도 작살낼 수 있을 겁니다.”

“…….”

그런데도 찜찜한 기분이 들다니 이상했다. 바란은 이 말을 듣고 잠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우연히 션팟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하겠거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션팟의 얼굴은 무척 경직되어 있었다. 심장박동이 온몸에 공명해 귀에 들릴 정도로 아주 깊이 뛰었다.

바란이 뭐라고 묻기도 전에 션팟이 먼저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이제 시작할 때가 됐습니다, 후작님.”

“…전군.”

불가항력이었다. 잘 짜인 체스판에서 놀아나는 장기말이 된 기분을 버릴 수 없었다. 종자가 잘 닦아 광낸 바란의 투구를 가지고 왔다. 그것을 뒤집어쓰고 말 위에 오른 바란은 이미 이른 오전부터 대열을 갖추고 도열해있던 병사들 사이로 말을 몰았다.

“전투준비.”

“전군 전투준비!”

“준비!”

바란의 명령이 다양한 목소리로 변하여 소란스럽게 메아리쳤다.

* * *

잔악후작이 멀쩡히 살아서 병사를 이끌고 공격해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니카는 줄곧 이 재회를 상상해왔다. 성벽 위에 선 니카가 잔악후작을 내려다보면, 그는 니카에게 시린 파란색 시선을 던져올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 왕자군의 기사 신분으로 돌아온 ‘니카 경’의 두 다리로 굳건히 버티고 서서 당당히 그를 마주해야지 생각했다.

조금의 미련도, 두려움이나 후회도 없이. 함께 허송세월했던 기억들은 충성스러운 니카 경을 추호도 타락시키지 못했다고 알려주리라.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손수 잔악후작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씻을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안긴 후안무치한 악인 바란 탈타미오에게 죗값을 묻고 그의 목을 베어 효시하는 일은 반드시 이 니카의 손을 통해 이루어져야 했다.

“나는 탈타미오의 바란이다!”

붉은 염색물이 많이 빠져서 금색으로부터 주홍색까지 오묘한 빛깔이 된 잔악후작의 머리칼이 황량한 먼지바람을 타고 휘날렸다. 

‘잔악후작.’

진군의 북소리는 멎은 지 오래건만 니카의 심장은 꼭 북소리가 그 안에 갇혀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시끄럽게 뛰었다. 온몸으로 그 진동이 낱낱이 전해졌다.

니카는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 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 까마득히 아래에 하찮은 개미처럼 작게 보이는 잔악후작의 상이 보다 또렷이 가다듬어졌다.

이 성벽 위에 올라 바란 탈타미오를 내려다보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사난타 성벽이 붉은 피로 뒤덮였던 때, 목이 잘린 클라텐 탈타미오의 시체를 나무토막에 묶어 까마귀에게 쪼아 먹히도록 두었던 때.

잔악후작은 지금과 같이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유일한 형제의 유해를 수습하러 사난타에 방문했었다. 

“너희들은 합의를 위해 지휘관이 직접 오기를 요구했지.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다.”

못 본 사이에 잔악후작의 머리칼이 꽤 길어졌다. 미끈한 목소리는 조금도 변함없이 여전했다. 얼굴은… 좀 여윈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갑옷 아래의 체격도 품이 작아졌을까 궁금증이 들었다. 그런데 손등에 잎맥처럼 올라오던 핏줄은 그대로일까 싶다. 보조개는? 촘촘한 속눈썹과 손톱에 봉긋하게 올라온 하얀 손톱산은….

그리고 상처는? 니카가 깊숙이 찔러 생명을 위험하게 만들었던 그 상처는 어쨌단 말인가? 일개 인간이 뱃가죽을 뚫리고도 벌써 후유증 없이 나을 수가 있을까? 혹시 아직 몸이 온전하지 않은 건 아닐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잠깐 숨을 삼켰다.

‘원수의 안부가 궁금한 건 당연하다. 복수를 하려면 저놈이 우선 멀쩡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리고 또….’

니카는 이것저것 자기합리화와 변명을 늘어놓았으나 끝내 환멸이 밀려와 입을 틀어막았다. 속에서부터 구역질이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견뎠다.

“입덧? 용인은 수컷이 애를 배냐?”

“닥쳐.”

“아휴, 맨날 닥치래.”

니카가 입가를 가리는 모습을 곁에서 유심히 쳐다보며 락샴이 물었다. 입을 다물라고 익숙하게 일갈했다. 락샴은 기가 죽는 일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를 갈며 생각해왔던 그림과는 다르게, 니카는 가까이 나서서 바란과 시선을 맞댈 자신이 없어졌다. 그는 걸음을 물려 바란의 머리꼭지가 보이되 반대로 바란이 그를 볼 수는 없는 지점에 멈추어 섰다.

아주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니카의 두 뺨을 붉게 할퀴었다.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다. 숨을 내쉴 때 하얗게 입김이 오르면, 니카는 그게 마치 목구멍 안쪽의 온기를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나서기 좋아하는 락샴이 지휘권을 등에 업고 신이 나서 날뛰는 것이나, 앙살라테 왕자가 랜달 백작의 손목을 잘라 교환을 파투내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서 있었다.

“그 간자라는 놈 소개 좀 해주십쇼, 왕자님. 아주 입술이 닳을 때까지 입을 맞춰주든가 해야겠습니다. 솜씨가 아주 기가 막히네요. 거의 저 잔악후작놈이 똑같은 말 두 번 보고한 격인데.”

“그래, 그렇군.”

잔악후작에게 한 방 먹였다는 만족감에 말 그대로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던 랜달이 허공에 대고 게걸스레 입 맞추는 시늉을 했다.

니카는 추잡스러운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격식에 크게 신경 쓰는 일이 없는 앙살라테 왕자는 그게 익살스럽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웃음을 흘리고는 눈 근처를 지압하며 피곤한 하품을 했다.

“아, 아, 하아암. 아주 유능한 간자거든. 너희에게 알려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앙살라테는 니카를 지그시 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쉬워.”

기분이 이상해졌다.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기사 된 도리를 잘 아는 니카가 윗선에 사사로이 반문하는 일은 없었다.

정체 모를 이 간자가 썩 유능하다는 말에는 니카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전달받은 정보대로 잔악후작이 선봉장이 되어 대공의 볼모 교환 제안을 들고 나타나기도 했고, 또한 교환 조건에 관한 정보 역시 한 치의 엇나감이 없었다.

잔악후작은 그가 가져온 은괴 일백 상자와 그들이 붙잡은 귀족 칠십여 명을 맞바꾸자 했다.

나쁜 조건이라고 치지는 않겠지만 그 볼모들 중에 대상단의 주인인 랜달 백작이나 날만도 남작의 사촌 동생 같이 거물급 인사들이 몇 끼어있다는 것을 참작하면 그다지 볼모 교환에 대한 강한 의지가 엿보이는 값도 아니었다.

반면에 성을 수복하겠다는 대공의 의사표명은 아주 강력했다. 잔악후작은 이만 명의 후발대가 탈타르를 떠났다고 했다. 첩보에 의하면 과연 수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헬린 힐벤이 탈타르를 나선 것은 진실이었다.

‘귀족들의 빈축을 사지 않게 대강 달래어두고, 끝내 피를 보려는 심산이군.’

니카는 대공의 이러한 행보가 결국 무력충돌로밖에 이어질 수 없을 것임을 예상했다.

앙살라테라고 해서 비굴한 화해의 입장을 취하면서까지 이 시원찮은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난타 성의 나루터는 강서지역과 연결되어 왕자군은 언제든 추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전쟁이 될 것이었다. 니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 며칠간 단 하루도 맑게 갠 하늘을 보지 못했다.

* * *

상황이 변한 것은 그로부터 만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긴급한 첩보가 도착했을 때 앙살라테 왕자는 아주 오래간만에 눈을 붙이고 있었다.

사난타 성의 기습 이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적 없던 앙살라테는 그의 시중을 돕는 종자들이나 호위를 맡은 기사들에게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주고 잠들어 있었다.

“왕자 전하! 전하!”

무엄하게도 앙살라테의 침전에 아뢰는 말도 없이 난입한 기사 하나가 우렁찬 목청으로 그를 깨웠다.

앙살라테의 의식이 포근한 암흑만이 가득하던 꿈결에서 현실까지 강제로 끌려 나왔다.

“으… 씨발.”

수면방해가 괜히 죄인을 고문할 때 쓰는 방법이 아니었다. 구토감과 현기증이 뒤섞이고 무기력증이 나서 앙살라테는 문자 그대로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핏발이 벌겋게 선 눈으로 앙살라테가 신경질을 쏟아냈다.

“아… 대체… 뭐야!”

“전하! 급한 보고가 있어 무례를 범했습니다.”

“오, 무례인 줄은 아는가 보지?”

용병생활로 쌓은 그의 단단한 체력으로도 이 이상 잠을 자지 않고 버티는 것은 무리였다.

앙살라테는 그가 신신당부를 해두었던 이상, 이 기사가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그를 깨웠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임을 잘 알았다.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짜증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그는 자신을 달래며 침대에 걸터앉으려다가, 그것만으로 잠에 빠져들 것 같아서 번쩍 일어나 서성거렸다. 거의 죽은 자가 무덤을 뚫고 일어나 걸어 다니는 것처럼 비척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재기능을 하는 것 같으니 왕자가 보고를 올리라고 눈짓했다. 목소리가 쇳소리에 가까울 정도로 잠겨 있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엊그제 겨우 탈타르를 떠났다던 대공군이 벌써 성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헛웃음이 섞인 이 말은 마치 그 정도로 다급한 사안이 아닌데 그의 휴식을 방해한 거라면 각오하라는 엄포처럼 들렸다.

“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전하. 탈타르에서 출정한 대공군이 글쎄 남쪽으로 향했답니다. 아무래도 거인의 돌다리를 건너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뭐라고? 후발대를 보낸 거라 하지 않았어?”

“그게, 어떻게 된 건지는 저도 잘….”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사난타 성 전투의 후발대로 가장해 놓고는 이 무슨 비겁한 기습이란 말인가! 아득득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얌전하게 굴어서 이상하다 싶었지! 헬린 힐벤, 이 개자식.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앙살라테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숙부 헬린 힐벤이 헬린 드라코슨이었을 적을 회상했다.

이 둘은 서로 가까운 가족인 것 치고는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헬린 힐벤이 워낙 귀중한 혈통을 타고나 어린 시절을 왕성이 아닌 신전에 틀어박혀 지냈던 까닭이 그 첫째였고, 둘째는 그의 어머니가 예법교육을 이유로 아이를 데리고 저택에서 두문불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두 사람이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들이 각자 여덟 살, 그리고 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그 날은 앙살라테의 팔촌인가 하는 귀부인의 마흔 아홉 번째 작명일 연회가 있었다. 드라코슨의 개족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어린 앙살라테에게는 새로이 벼락 같은 충격이 내린 날이기도 했다.

“아들아, 잘 듣거라. 오늘 너는 처음으로 네 숙부 되는 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저기 저 아이 보이느냐?”

“누구요?”

“저기, 아주 어린애 말이다.”

“쟤요? 아버지, 저 땅꼬마가 내 뭐라고 하셨어요?”

“숙부라고 했다.”

앙살라테의 낯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창 자신보다 어린애들에게 배꼽을 내밀며 뻐겨댈 나이였다. 또래보다 몸집이 조그맣고 순하게 생기기까지 한 헬린 드라코슨에게 초면부터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마음은 쉽게 들지 않았다.

왕자는 새미언 왕에게 떼를 써 가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왜 저렇게 조그마한 애한테 존댓말을 써야 돼요?”

“너 진짜 혼나고 싶느냐? 그럼 네 아비의 하나뿐인 아우에게 조카인 네가 예의를 차리지 않고 반말을 쓰겠다는 것이냐!”

이를 악문 부자간의 대화에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물론 대화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헬린 드라코슨이었다. 새하얀 금발을 빛내며 인형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민 모습이었다.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침울한 눈빛이 눈에 띄었다.

“격조하였습니다, 형님.”

어린애의 혀짧은 소리로는 ‘격조’보다 ‘교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그래. 아우야. 몇 년 전에 걸음마 뗐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처음 만나는구나.”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 건데 죄송합니다.”

“괜찮다. 걱정 말거라.”

헬린은 풍성한 수염을 기르고 있는 중년의 국왕에 비하면 고작해야 며칠 전 세상에 태어난 수준이었다. 그런 아이에게서 어린애다운 어리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니 이상했다.

‘쟤는 왜 어른인 척하지?’

그러나 이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앙살라테뿐인 듯했다. 오밀조밀한 입술로 점잖은 어른 흉내를 내는 헬린의 모습은 당시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넋을 모조리 빼앗았다.

“어쩜 저리도 귀여우실까!”

“총명한 두 눈은 어떻고. 아까 ‘격조’라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하신 거 들었어?”

“용의 피가 어디 안 가지.”

귀족들이 사방에서 시끄럽게 수군댔다. 다음 대 왕좌에 앉을 것이 확실시된 지상의 용 헬린 드라코슨에 관한 기대감 넘치는 잡담이 대다수였다.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벌써 진검을 쥐거나 고전 시가를 읽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능히 대담을 할 능력이 있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범재들은 보통 압도적인 상대가 나타났을 때 경합을 포기하고 경외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앙살라테도 지금 같았으면 분수에 맞지 않는 시기질투는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앙살라테 드라코슨, 인사드려라. 네 숙부이시다.”

“싫거든요!”

한 가지 문제라면 여덟 살의 앙살라테는 아직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아는 애송이에 불과했고, 제 아버지 국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자라도 되는 줄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투정을 부리고 있는 것을 능히 알면서도 면전에서 어린 숙부를 모욕하는 대담한 짓을 벌였던 것이다.

“너한테 존댓말 안 할 거거든. 키도 도토리만큼 작은 게!”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례한 말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어린애들 신경전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 중 누구도 이 귀엽기까지 한 어휘가 대단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앙살라테는 이다음에 일어난 일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바깥공기 한 점 들지 않는 연회장에서 돌연 헬린의 가지런한 금발이 두어 차례 나부꼈다. 파란 눈동자 안에 인간의 것과 구별되는 뾰족한 동공이 섰다. 헬린은 뭐라고 말했는데, 이상하게도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아무튼 그는 앙살라테 더러 새미언 왕 옆에 숨지 말고 아래로 내려오라고 말했다. 낯이 새파랗게 질린 아버지가 궁둥이를 밀며 재촉하는 통에 불가항력으로 뒤꿈치를 끌며 내려섰다.

똑같이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니 눈높이 차이가 확연해졌다. 또래보다 한 뼘이나 큰 앙살라테는 일곱 살의 헬린과 비교하면 머리통 한 개 만큼이나 컸다. 도토리라고 빈정댄 값은 되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의견만큼은 달랐던 모양이다.

“이렇게 하면.”

헬린 드라코슨은 그 자리에서 앙살라테의 무릎을 걷어차 나자빠지게 만들었다. 거센 발길질은 단번에 무릎뼈를 으스러뜨렸다. 놀라움에 숨 삼키는 소리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일국의 왕자가 맞아 널브러져 있는데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는 우스운 경관이 연출되었다.

“더는 건방진 소리 못하겠죠. 반대쪽 무릎도 으스러뜨리면 무릎걸음으로 다녀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할 적에 헬린은 빙긋이 웃고 있었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어떤 놀이에 열중했을 때와 같이 두 뺨이 붉게 상기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헬린 드라코슨의 말처럼 두 다리가 한번에 부러져 못쓰게 되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맙소사!”하고 탄식하며 얄렌의 성녀가 다가와 그녀의 어린 아들을 꾸짖고 끌어냈기 때문이었다.

앙살라테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래, 헬린 힐벤은 그 어릴 적에도 누가 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기는커녕 묶어두고 돌팔매를 던질 위인이었다.

사난타 성에 볼모가 수십 명 잡혀있다고 해서 그 힐벤이 순순히 앙살라테가 깔아놓은 판에 어울려줄 리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안일하게 대처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난타에 눈이 모인 틈에 벼르고 벼르던 수도공격을 감행하려는 수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탈타미오 후작이 보내온 정보들은 다 어떻게 된 것일까?

앙살라테는 잠시 골을 짚었다가, 기사에게 손짓했다.

“지금 당장 강서로 돌아간다.”

“그럼 성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저 잔악후작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간자인 것이 발각당해서 대공 쪽에서 먼저 꼬리를 끊었거나, 아니면 바란 탈타미오가 변절을 했거나…. 앙살라테는 고개를 저었다. 바란이 애초에 간자노릇을 시작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엣시아 용병단은 사난타에 남는다.”

“채비시키겠습니다.”

두통이 이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던 앙살라테가 다급히 문 너머로 사라지는 기사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락샴을 좀 불러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 * *

개미떼 같은 인간의 무리가 대열을 갖춰 성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메아리치는 지휘관의 지시가 니카의 예민한 청각을 괴롭혔다.

천지사방에 전운이 감돌았다. 수많은 인간의 의식이 모여들어 자아낸 팽팽한 긴장감이 장수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척추를 당기는 팽팽한 힘줄에 더욱 힘이 들어가 고개를 뻣뻣이 세우게 만들었다.

잔악후작이 예고했던 후발대가 기실 수도 기습을 위한 힐벤 대공의 수작이었던 게 밝혀지면서 왕자군 수뇌부는 분노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앙살라테 왕자는 수도를 사수하기 위해 서둘러 병사를 이끌고 강서지역으로 향했다.

그게 하루 전의 일이었다. 잔악후작이 이끌고 온 군대가 여전히 사난타 앞의 벌판에 주둔하며 약속한 사흘이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왕자는 락샴이 이끄는 엣시아 용병단에게 성을 지키라는 임무를 하달했다.

이 상황 속에서 지휘권을 넘겨받게 된 것은 당연한 소리지만 엣시아 용병단장인 락샴이었다. 

“여우 같은 놈. 연극 한번 그럴싸하게 벌이는군.”

경갑을 갖춰 입은 락샴이 구불구불한 쌍검을 양손에 솜씨 좋게 꿰고 돌렸다. 그가 고개를 뒤틀 때마다 시원하게 뼈마디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소식은 들었겠지, 용인?”

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 집어넣어라.”

“지휘관한테 명령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이냐? 킥킥….”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성벽 위에서 검을 빼들 일이 뭐가 있을까? 니카는 생각했다. 니카가 반문하기만을 기다리며 락샴이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락샴이 이것을 일종의 놀이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뭐라고 대꾸할 마음이 싹 가셨다. 대강 손을 내젓고 말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랜만에 걸친 갑옷과 투구가 니카의 어깨 위로 묵직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대공군은 끌고 온 노예병을 앞세워 성문을 부수고자 했다. 약한 부분을 공략하려는 것이다. 적은 병력으로 괜히 사다리를 들고 성벽에 기어올랐다가, 뒷사람과 같이 나란히 꼬치에 꿰이듯 검을 맞는 것보다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사난타 성문은 오 년 전 왕실군대가 민란을 진압했던 당시에 한번 부서졌던 전적이 있고, 그 뒤로 나라가 어지러워지면서 제대로 된 보수를 하지 못해 무척 연약한 축에 들었다. 고작해야 탈타르의 위성도시 역할이나 수행하는 게 다인 폐허도시였다. 이해타산에 밝은 랜달 백작은 오로지 전쟁에서나 빛을 발할 견고한 성문을 세우기 위한 비용이 불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노예병이 구성인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것만 보아도 잔악후작이 이끌어 온 대공군이 오합지졸에 가깝다는 것은 명백했다. 엣시아 용병단은 불화살이나 기름, 돌멩이 세례만 가지고도 오랜 시간 방어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뭘 믿고 계속 공격하는 거지?’

니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탈타미오 후작은 그래도 전쟁에 나온 경험이 풍부했다. 지휘에 재능이 없다손 치더라도 불리한 전황을 읽지 못하고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은 의문이었다.

계속된 돌격명령에 대공군의 사기가 바닥에 떨구어졌다.

제대로 된 무기나 방어구도 갖추지 못한 채, 등록번호를 새긴 나무패만 목에 감은 노예병들은 죽음이 다가오면 제 목걸이를 손안에 쥐고 눈을 꾹 감고는 했다. 니카는 이상한 기분으로 그들을 쏘아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 앞에 노예병의 죽은 몸뚱이가 잔뜩 쌓였다. 노예병과 견주어보면 이른바 자유민 병사라고 불릴 수 있는 나머지 인원은 뒤에서 기회를 엿보며 노예병을 고기 방패로 활용하고 있었다.

쿵! 쿵! 통나무를 들고 달려든 병사들이 박자에 맞춰 성문을 때렸다. 하나둘 엣시아 용병단이 쏘아낸 화살에 맞아 무릎을 꿇고 몸을 뒤틀며 통나무를 떨구었다.

“쟨 왜 저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거지?”

“…….”

“내가 알던 여우 같은 새끼는 어딜 가고!”

락샴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굳이 니카가 있는 곳까지 와서 신경질을 부릴 필요가 있었을까? 니카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무튼 락샴의 질문에는 니카도 동의하는 바였다.

“부나방처럼 계속 돌격명령만 반복하고 있잖아! 마치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후발대.”

니카는 문득 생각이 미치는 구석이 있었다.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락샴이 얼굴을 이상하게 찌푸렸다.

“후발대라니? 이보쇼, 용인기사. 대공이 이미 며칠 전에, 우리 왕자님이 지금부터 좆빠지게 달려가셔도 못 따라잡을 정도로 전에, 수도로 출발했다는 말 못 들었어?”

“…모른다면?”

“뭐?”

락샴이 혼란스러운 심기를 내비쳤다. 니카는 투구를 벗었다. 싸울 의지도 없는 노예병들 상대로 필요도 없는 것을 왜 유난스레 쓰고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잠시 들었다.

용병들이 코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대공군을 하나둘 씩 쏴죽이는 게 이렇게나 쉽다고 광고하기 위해서였다. 여태 니카가 전장을 누비며 얻어 온 그 어떤 승리도 이렇게 쉬웠던 적이 없다.

“잔악후작이, 후발대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락샴은 다짜고짜 코웃음을 쳤다. 대공이 잔악후작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 몰라서 지껄이느냐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니카의 가정에 한 표를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후퇴! 후퇴하라!”

대공군의 대다수를 이루는 사사바란과 힐벤의 깃발을 든 세력이 돌연 뿔피리를 불며 일사불란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신속한 움직임이었다.

대공의 기사들이 앞장서서 말을 몰며 적극적으로 공격을 중단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나자빠진 시체들 가운데 탈타미오의 병사들과 살아남은 노예병들만이 우왕좌왕 서 있게 되었다.

지휘관 바란 탈타미오의 휘하에 있던 기사들이 독단적으로 군대를 돌렸다는 것 외에는 저 엉망진창인 그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면 저 새끼가 대공한테 팽을 당했단 말이야?”

락샴이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적을 속이려면 아군을 먼저 속이랬다지만…. 저렇게 자기 아랫사람을 적진 한복판에 버리는 게 제정신으로 할 생각인가?”

“그 작자는 제정신이 아니니까.”

니카가 속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잔악후작이 저지른 대공의 미움을 살 만한 일이라면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니 시커먼 사람 그림자가 물결을 이루어 사난타 바깥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잔악후작은….

바란 탈타미오는 뒤늦게나마 상황을 눈치채고 이에 대처해 퇴각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를 등에 태운 군마가 분주하게 너른 벌판을 누볐다.

‘답지 않게 미련한 짓을 하는군.’

퇴각 명령을 내렸으면 앞장서서 도망가기라도 할 것이지. 니카는 생각했다. 잔악후작은 갑자기 자비심이라도 치솟았는지, 최전방에 잔류한 노예병사들에게 직접 신호를 보내느라 시간을 끌었다.

‘어떤 비열한 짓을 한들, 더 이상 그 악명에 누가 될 리는 없을 텐데.’

“얘들아, 성문 열어라! 힐벤 새끼들 목 못 따오는 놈은 오늘부로 엣시아에서 제명인 줄 알아라!”

락샴이 소리쳤다. 시끄러운 함성소리가 뒤를 이었다. 니카가 돌아보니 좀 전까지 락샴의 만면에 가득하던 놀란 표정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잔악후작은 내 몫이니까.”

대신에 그의 두 눈은 아주 흥미로운 놀이를 발견한 어린애처럼 장난기로 빛나고 있었다.

“건드리지 마라?”

검집에 얌전히 꽂혀 있던 락샴의 두 자루 검이 뽑혔다. 락샴은 하늘로 그 구불구불한 칼날을 쳐들었다가, 보란 듯이 니카를 한번 겨누었다. 불길한 미소가 뒤따랐다.

* * *

‘뭔가 잘못됐어.’

바란의 모든 감각이 불길함을 감지하고 단번에 몰아쳤다. 일순간 모든 소음과 움직임이 아주 느리게 펼쳐졌다. 등줄기의 오목한 틈을 따라 땀방울 하나가 굴러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퇴각! 퇴각하라!”

새로이 나타난 후발대의 전령과 얘기를 나누며 보다 적극적인 공격을 요구하던 션팟 경이 어느샌가 앞장서서 뿔피리를 불며 퇴각을 외치고 있었다. 경황이 없는 중에 뺨을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지휘관의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해야 할, 최소한 엇갈린 명령체계가 빚어낸 혼동에 어리둥절한 모습이라도 보여야 마땅한 바란의 병사들은 사전에 무슨 말이 오가기라도 했던 것처럼 아주 신속하게 걸음을 뒤로 물렸다.

“자리를 지켜라! 탈영하는 자는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겠다!”

다급히 소리를 질러보지만 바란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춰 세우는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잠시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처럼 비현실적으로 붕 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리해보았다. 수십 갈래로 쪼개진 바란의 의식이 저희들끼리 토론을 반복하며 가장 유력한 가설을 뽑아내려고 열을 올렸다.

그럴싸한 이유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의심이 갈 만한 증거의 조합은 있었다. 지금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물리는 저들은 모두 사사바란 공 측에서 내어 준 병사들이었다.

‘사사바란 공작이 꾸민 일이라면, 대공이 모를 리 없다.’

바란은 다급히 고개를 돌려 나머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공성무기를 제자리에 내팽개친 그들은 바란이 있는 곳에는 눈길 하나를 주지 않은 채 말을 냅다 재촉했다.

‘나를 버리는 것인가?’

사난타 성까지 와서?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투구의 면갑을 위로 걷어올렸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곁을 지나가는 말 탄 기사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바란의 곱상한 낯짝이 파리하게 질린 게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행렬의 맨 뒤에 있던 이름 모를 기사 하나가 다급히 외치며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뭐 하십니까, 후작님! 작전대로입니다. 후발대는 오지 않습니다!”

“뭐라고?”

얼른 되물었으나 기사의 친절은 거기에서 멈췄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또 바란을 제외하고 돌아가는 어떤 비밀스러운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이 난장판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은 물론 일반 병사들이었다. 바란은 서둘러서 퇴각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선 채 성벽 위로부터 쏟아지는 화살세례를 받고 있던 탈타미오의 병사들과 노예병들이 황급히 걸음을 뒤로 물렸다.

‘너무 늦었나?’

성벽 가까이까지 파고든 병사들이 눈에 밟혔다. 저 안까지 밀고 들어가 그들에게 퇴각 명령을 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했다. 노예병사가 태반이었다. 어차피 죽으려고 마음 먹고 전쟁에 끌려 나온 자들.

잔정이나 인도주의에 이끌려 제 안위를 포기하는 건 잔악후작의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머뭇대며 고민하는 시간이 다 허투루 낭비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퇴각하라!”

고뇌에 빠져 어영부영하느니 어리석은 일이라도 행동으로 옮기고 보는 게 더 나았다. 바란은 바삐 퇴각하는 사사바란 병사의 방패 하나를 빼앗아 들고 말머리를 성 쪽으로 돌렸다.

“퇴각!”

목놓아 소리쳤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홀로 외치는 목소리는 어찌나 가냘프던지 입을 나오는 순간에 곧장 공기 중에서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그래도 누군가는 바란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는 고개를 들고 홀로 고군분투하는 지휘관의 모습을 보았고, 또 누군가는 덕택에 걸음을 뒤로 물려 목숨을 보전했을 것이다.

지휘관이 사정거리에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고 사난타 성벽으로부터 장대비 같은 화살세례가 쏟아졌다. 바란은 이를 악물고 싸구려 나무방패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화살에 맞은 말이 펄쩍 뛰며 무너져내렸다. 말목을 끌어안고 버티려던 바란은 자연히 아군의 시체가 즐비한 흙바닥을 굴러야 했다.

온몸에 빼곡히 붙은 판금갑옷이 절그럭대며 바란을 지면으로 잡아당겼다. 가까스로 이 무게감에 저항해 몸을 일으켰다. 곁에는 신선한 시체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결국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을, 괜한 수고를 했구나 싶었다. 화가 났다. 다리가 부러지고 옆구리에 몇 대나 화살이 박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군마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검이 잘 들지 않았다. 고통스럽게 보냈을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간자인 걸 알았을까?’

그래. 정체가 들통난 게 아니고서야 이리도 모진 방법으로 내쳐질 이유가 또 있을 리 없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바란은 의욕 없이 검을 바닥에 대고 질질 끌었다. 앙살라테 왕자가 그를 거둘 것이다. 이 성벽 너머에 있는 앙살라테가.

수고했다고 북돋아 주겠지. 정의를 신봉하는 무르디무른 성격상 바란이 결과적으로 일을 망쳐두었더라도 그의 노력까지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란에게 드리웠던 모든 오명이 단번에 금빛 면류관으로 탈바꿈하고 영광의 광채를 드리우리라….

‘니카는 그러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바란은 비록 땅에 시선을 처박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이것이 성문의 도르래를 감는 소리라고 알아차렸다. 희미하던 함성이 성문이 열림에 따라 가로막는 것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 나왔다. 귀청이 먹먹했다.

‘뭐라고 말할까?’

제각기 통일성 없는 무기를 움켜쥔 엣시아 용병들이 성 밖으로 밀고 나왔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용병들은 분주히 대공의 표식을 단 병사들을 베거나 찌르고, 또 터뜨려 죽였다. 대다수가 노예병으로 이루어진 대공군은 의미 있는 반항 한번 못 해보고 떼로 고꾸라졌다.

위화감이 들었다. 퇴각한 대공군을 쫓아 들판을 가로지르면서도 엣시아의 용병들은 바란을 교묘히 피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휘관은 바란이다. 주목이 모여야 마땅했다. 바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끝에 뭔가 차가운 게 닿았나 싶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 겨울이 되고부터 늘상 먹빛에 뒤덮여 있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었다. 올해 들어 첫눈. 빈말로라도 예쁘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눈은 ‘내린다’라는 표현보다는 ‘휘몰아친다’는 표현이 더 알맞은 수준이 되었다.

“그 맥아리 없는 표정은 다 뭐냐? 후작.”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쫓는 쪽이나 쫓기는 쪽이나 모두 분주하기 그지없는 와중에 누구의 말씨가 이리도 여유에 젖었나 했더니, 엣시아 용병단장 락샴이었다.

성미가 이상야릇하기로는 대공과 우위를 다투는 작자였다. 그는 전부터 바란과 전장에서 맞닥뜨릴 때마다 박살을 내고 싶다며 안달복달했다. 서로 안 본 지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잘 벼려진 적의감은 여전했다.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고 있는 락샴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바란을 동강 낼 것 같은 살의가 느껴졌다. 그래도 실은 아군인데, 이렇게 진심으로 이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그가 앙살라테에게 무슨 귀띔을 듣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바란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락샴은 검을 들라고 볶아치며 독특하게 생긴 남방계 쌍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직 내 정체를 모르고 있나? 연기, 아니면 독단으로 벌이는 일인가?’

혼란에 빠진 바란의 대처는 한 발 늦었다. 뒤늦게 왼팔에 붙은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으려 했지만, 방패는 너무 작았고, 눈으로 좇아야 할 검로는 두 가지였다.

숨을 한껏 들이 삼키고 곧 들이닥칠 검을 각오했다. 이를 질끈 물었다. 그런데 방패를 내리치는 검의 압력 대신 의외의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검과 검이 맞물리는 소리였다. 귀청을 찢는 듯했다.

다급히 몸을 뒤로 굴려 거리를 두고 상황을 살폈다. 두 구의 시체를 타고 넘어야 했다. 바란의 앞을 막아선 남자의 가죽군화가 보였다. 날씨가 많이 춥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남자는 구하기도 힘든 털가죽을 과하게 두른 감이 있었다.

“아….”

고통스럽게 벌어진 바란의 입술이 뻐끔거렸다. 그 박자대로 하얀 김이 올랐다. 바람이 거세어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흩날리듯 사라졌다.

‘너는 잣자후에 있어야 하는데.’

눈이 하늘로부터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바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곡식 낟알 같은 눈 부스러기가 남자의 까만 머리칼에 하나둘 달라붙었다. 그런대로 총총한 별하늘처럼도 보이는 조화였다.

“지금 뭐하는 거야!”

“잔악후작은 내가 맡겠다고 말했지 않나.”

락샴의 불평에 남자가 대꾸했다. 그가 목소리를 내고 가장 첫 번째 음절을 발음하기도 전부터 바란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남자가 그를 돌아보기 전까지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 했다. 벅찬 심경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짧은 순간 속으로 무수히 많은 연습을 거쳤다.

마침내 니카가 바란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태연히 니카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으니 결국은 이 모든 것이 다 괜한 연습에 불과했다. 입술을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였다가는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바란은 견뎌냈다. 여태 해왔던 것처럼.

“살아있었군.”

“응.”

“배를 찢어놓았는데.”

“그랬지.”

바란은 맥락 없이 중얼거렸다.

“보고 싶었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시하거나 놀리는 발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곧이어 다짜고짜 검격이 날아왔으니까. 바란은 검을 들어 막았다. 단 한 합을 섞는데 어깨뼈까지 욱신거렸다.

“더는 허튼소리로 내 눈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아쉽게 됐네, 경. 귀여운 맛이 없어졌어.”

니카의 검이 바란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락샴의 검에서 구해준 것이 무색했다. 하기는 바란에게 받은 모멸감을 설욕하려면 직접 나서서 목을 베어야 했겠지. 락샴의 검을 막아선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고, 도우려던 의도는 추호도 없었을 터였다.

열여덟 살의 니카와 검을 섞었을 때와 견주어 보자면, 바란은 그런대로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죽을 둥 살 둥이었다. 무자비한 검날에 싸구려 방패가 동강 나면 시체를 들어 올려서라도 몸을 건사했다. 물론 니카는 눈살을 찌푸렸을 뿐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발걸음이 자꾸만 뒤로 빠졌다.

니카는 탈타미오를 나서던 밤에 달틴 사사바란 경에게서 빼앗은 왕국기사의 검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본인의 검을 돌려받지 못한 형편에서는 개중에 가장 쓸 만한 검이었다.

이토록 잘난 왕국기사의 검과 몇 번 부딪고 나니 바란의 검은 이가 나가서 날이 무디고 울퉁불퉁해졌다. 제 기능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도 뒷걸음질을 쳐서 더는 몸을 물릴 구석이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에게 마지막 여유라도 선사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죽음을 앞에 둔 숙적에게 조롱의 언사를 던지고 싶었던 건지. 이유야 어쨌든 니카 경이 무거운 입술을 뗐다. 파르라니 질린 빛깔이었다. 바란은 그가 추위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입술이 달싹였다.

“네 아우가 죽었을 때-”

“말은 바로 하시지. ‘네 아우를 죽였을 때’ 겠지.”

“네 얘기를 했다.”

“…….”

쪼그려 앉아 숨을 몰아쉬던 바란은 흙을 움키고 위로 튀어 올랐다. 빨갛게 언 손이 새하얗게 될 때까지 검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땅에 검 끝이 질질 끌리면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널 증오한다고.”

니카는 어렵지 않게 길게 이어진 검의 궤적을 틀어막았다.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니카의 입술로부터 나오는 말도 듣기 싫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바란은 내심 니카가 그를 상처입히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정말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닥쳐. 아무것도 모르면서.”

“네가 가족과 작위를 맞바꿨다고 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클라텐의 얘기를 꺼내 들고 대거리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닥치라고!”

그것도 하필이면 그 애를 죽인 사난타에서.

클라텐의 이름을 들으면 바란은 당장이라도 아주 좁고 깊은 구멍 안으로 숨어들어 신과 유령의 시야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억과 그리움을 가슴에 묻었다. 인두겁을 쓴 짐승으로 살아야 했다.

니카는 그런 고뇌를 모른다. 동생의 살해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몇 년 동안이나 가슴 속에서 거쳐온 비겁한 합리화를, 그 고통을, 알 리가 없으니 저리도 쉽게 말하는 것이다. 바란은 악에 받쳐 검을 휘둘렀다. 얼굴에 열이 뻗치고 질끈 악문 잇새로 거친 기합성이 흘러나왔다. 침착해서 덤벼도 승산이 없는 상대였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움직임은 방향을 바꾸어 시도하기가 무섭게 니카의 검에 틀어막혔다.

“고작 악명으로 더럽혀지고 말 작위에 하나뿐인 혈육과 왕자 전하에 대한 의리를 팔아넘긴 너에게…. 나 하나를 기만하는 일이 얼마나 시시껄렁한 심심풀이로 느껴졌을지 생각했다.”

숨이 차서 더는 공격을 퍼부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턱 끝까지 찬 숨을 간신히 몰아쉬었다. 차디찬 공기가 가슴까지 들어차 왔다 갔다 하면서 폐부를 된통 얼려놓았다. 갈비뼈 사이사이가 아렸다.

“쉬웠겠더구나.”

니카가 검을 들었다. 도저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바란은 그래도 어떻게든 검을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손아귀 힘이 충분하지 못해 일격에 검이 공중을 날았다. 목에 이깟 겨울 공기보다도 더욱 서늘한 기운이 끼쳤다.

‘쉬웠을 거라고?’

목구멍이 뜨겁게 들끓었다. 너야말로. 바란은 생각했다. 너야말로 모든 게 다 쉬워 보이나?

“죽여.”

바란은 다급히 투구와 연결된 목가리개를 벗어던졌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쇳덩어리가 바닥에서 한 차례 튀었다. 대공군의 지휘관 바란 탈타미오가 피로 이겨진 진창 위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다.

“죽여, 죽여. 죽이라고! 죽여! 이젠 지긋지긋해!”

빨간 염색물이 빠진 바란의 머리칼은 그런대로 금발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빛깔이었다. 다듬지 않고 길러내려 덥수룩한 감이 있었다. 바란은 언젠가 클라텐이 그랬던 것처럼 니카의 앞에서 머리칼을 그러모아 연약한 목덜미를 드러냈다. 볕에 타지 않아 허여멀겠다.

“이 목을 베어다가 꼬챙이에 꿰어 걸어두라고. 나의 클라텐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 거 좋아하잖아, 경. 안 그래?”

“어허, 안 되지. 뭘 부추기는 거야?”

흥미롭게 싸움 구경이나 하던 락샴이 끼어들었다.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당장이라도 바란의 목을 베어낼 것 같은 니카의 손을 툭 건드렸다. 니카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바란에게 겨눈 검 끝을 거두어다가 그대로 락샴에게 들이댔다.

“끼어들지 마.”

“허이구, 무서워서 아주 오줌이라도 지리겠습니다요. 나리. 가끔은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으십니다 그려. 지금 누가 지휘관이고, 또 누가 일개 기사인지 영 파악이 안 되시는가 본데….”

니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단 이 무식쟁이 말에 따르셔야 하는 위치이시걸랑요, 나리께선. 게다가 말이다. 잔악후작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

“왜 그렇게 봐? 정말이야. 전하께서 떠나기 전에 하신 말씀이라구.”

비로소 검이 거두어졌다. 락샴은 낄낄대며 눈썹을 올렸다. 니카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거리는 락샴을 노려보다가 잠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바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눈길마저도 짧은 찰나에 사라졌다.

니카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 안에 검신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니카가 바란을 상대하는 시간 동안에 이미 사난타 성 전투는 일단락되고 있었다. 퇴각하지 못하고 잔류했던 대공군은 전부 죽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락샴이 주위에 혀를 차거나 손가락을 튕겨서 간단한 신호를 주니 용케도 그 뜻을 알아차리고 우락부락한 용병 두엇이 달라붙어 바란의 팔짱을 끼고 일으켜 세웠다. 어떤 대우를 받게 될지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바란은 지친 머리로나마 앙살라테가 바란의 간자 신분을 락샴에게 알려두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보았다.

“손님 잘 모셔라.”

익살에 가까운 비꼬는 어투와 양어깨를 잡아당기는 우악스러운 힘을 가지고는 어떤 상황인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바란은 용병들에게 이끌려 성안으로 들어서면서 락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무리하게 고개를 돌린 채 있었다.

사난타의 황폐한 바람이 바란을 반겼다. 클라텐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방문했던 이후로 오 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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