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만약 꿈속에서 (1)
헬린 힐벤의 찻잔에서 비스듬하게 뜨거운 김이 올랐다. 대공은 어금니에 알갱이가 아삭거리며 씹힐 적까지 홍차에다 값비싼 설탕을 때려 부었다. 그는 어떤 음식이든 간에 늘 극단적으로 조미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달틴 사사바란, 전하의 자비로움에 감복하였습니다. 과연 합당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힐벤은 바닥에 부복한 충실한 사사바란을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차가운 눈길이 한 차례 기사의 몸뚱이를 훑었다. 이건 입조심 하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용인기사를 놓치고 배가 찢어진 탈타미오 후작을 하수도로부터 끄집어낸 이후 대공의 기분은 줄곧 저기압이었다. 곁에서 조금만 더 부채질을 했다간 그가 아끼는 목숨이라도 단박에 위태로워지기 십상이었다.
“입조심해요.”
냉정한 충고가 날아들었다. 대공은 지체 높은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단골처럼 등장하는 이 ‘자비’라는 단어를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다. 그것은 고대룡의 본질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말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 힐벤은 아랫것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자신을 자신이 아닌 존재로 꾸며내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할 말이 뭐죠?”
“그 뱀의 혀를 가진 간사한 자를 왜 아무런 처벌 없이 두고만 보시는지 이 미진한 머리로는 미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에 힐벤은 자연스레 바란 탈타미오를 떠올렸다. 며칠 전에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했다는 말을 의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한 자리에 가만 붙어 있는 법이 없는 바란이니 지금쯤 또 어딘가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앙큼한 것.’
가소로워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얀 속눈썹이 가느다란 눈 위로 내려앉았다. 점차 불쾌감에 물드는 대공의 낯을 보면서, 사사바란 경은 그의 의중을 헤아리느라 진득한 침묵 속으로 잠겨 들었다.
용인의 도주에 관해 긴급한 보고를 받았을 때, 헬린 힐벤은 탈타미오 성에 다다랐을 때부터 줄곧 그를 괴롭히던 불쾌감의 정체를 알아내고자 성 안을 정처 없이 헤매던 중이었다. 그가 별다른 수확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용인기사는 대공의 정예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지하 감옥으로부터 감쪽같이 빠져나왔다고 했다. 누가 생각해도 성의 지리를 잘 아는 이의 손길이 닿은 게 분명했다.
과연 공작의 방에 용인이 난입했던 부분을 시작으로 하여 탈타미오 성의 투박한 겉모습과는 달리 섬세하게 이어진 비밀통로가 조금씩 밝혀졌고, 그 중 한 갈래가 지하 감옥에 이어져 있다는 사실도 보고되었다.
바란 탈타미오는 물론 용의 선상에 제일 먼저 올라갔으며 포로를 허락 없이 풀어준 반역죄인으로서 왕국의 법도에 따라 의식이 회복되지도 않은 상태로 처형을 당하기 직전이었다. 다만 그의 집사와 시녀장이 직접 힐벤의 발치에 엎드려 자비를 구했다.
원래 같았으면 대공은 천한 것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일이 없었겠지만, 그들이 반박하기 힘든 의문점을 들어 정의를 호소해오자 듣는 시늉을 하긴 했다.
‘후작님이 만약 포로를 풀어주려 했던 거라면, 용인이 사병들 앞에서 벌인 그 인질극은 무엇이며, 또 기껏 도움을 준 용인기사의 검에 맞아 사경을 헤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말대로 바란은 의식을 잃은 것은 물론이요, 배가 찢겨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상황이었다. 헬린 힐벤이 비록 정의롭지는 않거니와 수하들에게 상벌을 내리는 기준에 있어서는 공명정대함이 하늘에 닿는 인물이었다. 군주의 재목이라 불리우는 만큼 제 사람들에게 신뢰를 쌓을 줄 알았다.
“안타깝지만, 달틴. 즉결처형까지 끌고 가기엔 증거가 모자라다.”
교묘하게 짜인 상황 속에서 하나 둘 씩 드러나는 정황증거는 바란 탈타미오의 혐의를 입증하기엔 모자란 면이 있었다.
얼마 뒤, 의원과 시녀의 극진한 수발 덕택에 의식을 찾은 바란 탈타미오가 모든 상황의 전말을 아뢰겠다며 파르라니 여윈 몸을 이끌고 대공을 찾았다.
‘지하수로에 끌려간 뒤였습니다. 마구간지기의 어린 아들이 용인기사에게 감화되어 몰래 길 안내를 하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단검을 빼앗아 찔러 죽였습니다. 제가 어찌나 잘해주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요.’
말이야 못 믿을 구석이 없었다. 용인이 달아난 이튿날, 아들을 잃은 탈타미오 성의 마구간지기가 스스로 목을 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미리 정해진 퍼즐 조각들이 단번에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마구간지기의 거처에서 앙살라테의 친서의 조각으로 보이는 수상한 종잇조각들이 발견되어 바란 탈타미오의 결백에 물증을 더해주었다. 국법대로 죽은 마구간지기의 시체는 껍질이 벗겨져 성벽에 걸렸다.
‘클라텐 탈타미오의 복수라고 했던가.’
그 안에 얽힌 미심쩍은 진실이 어떻든 간에, 탈타미오에서 숨죽여 보낸 넉 달간 바란이 적진의 기사와 시시덕거리며 놀아났다는 정황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니 그 과묵한 달틴 사사바란 경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주제넘게 처벌에 관해 첨언하며 나서는 것이다.
힐벤은 설탕 결정이 씹히는 차로 입술을 축였다. 그는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이 느낌을 몹시 좋아했다. 비록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 샐쭉대는 눈과 비굴한 성정이 괘씸하긴 해도, 탈타미오 후작은 아직 버리기에는 쓸 데가 많은 장기말이었다.
탈타미오 전승의 검법으로 잘 교육된 사병과 가문에 걸린 두터운 신임, 명예. 지속성 있는 튼튼한 조세구조까지.…그리고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후작은 그가 꽤 애틋하게 여기는 부하이기도 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개살구 같은 도덕이겠습니까?’
그 말을 전할 적에 바란은 마치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 같았다. 대공의 타고난 폭력성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감동적인 말이 평생토록 고뇌 속에서 살아 온 헬린 힐벤의 심금을 어떻게 울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힐벤은 용이지만 완전히 용일 수는 없는 남자였다. 전설 속의 고대룡이 그랬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단단한 소굴 속에 웅크리고 언제까지나 홀로 버텨낼 수 있는 초월자는 못 되었다.
그러니 힐벤에게 있어서 그가 타고난 괴벽스러운 기질을 결점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일 줄 아는 바란은 쉽게 대체하기 힘든 존재였다.
“그, 그, 그러나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의 전하….”
힐벤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사사바란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연한 이목구비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 얼굴에서 노한 기색을 읽은 사사바란의 낯가죽이 시퍼렇게 질렸다.
“내 선택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따를 것.”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랗고 닳아빠진 손이 우직한 기사의 뺨을 투박하게 건드렸다. 점차 뺨을 갈기는 마찰로 그 성격이 변했다. 짝, 짜악. 사사바란의 고개가 완전히 돌아갔다.
“토를 달지 말 것, 내 기사여. 방 안에서 얌전히 감시만 했다면 좋았을 것을, 이번에도 주제넘게 나섰다가 일을 다 망치지 않았느냐?”
“그, 그건…. 정말이지 면목 없습니다, 전하.”
“그 귀중한 검도 빼앗기고.”
엉망진창으로 잘린 머리칼이 움직임을 따라 어지럽게 움직였다. 사사바란은 가슴 속에 솟아나는 용맹한 충성심으로 대공의 폭력을 모두 달갑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질리는 기색 없이 순해 빠진 반응에 대공은 김이 샜다. 힐벤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체벌을 그만두었다.
대공은 머리칼을 곱게 귀 뒤로 넘기고는 말갛게 웃었다. 달틴 사사바란은 유약한 꽃 한 송이처럼 섬세한 이목구비 안에 굳건한 왕의 재목이 버티고 서 있다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사사바란이 용서를 애걸하며 바닥에 이마를 찧으려 했다. 대공의 손이 다가와 그것을 저지했다.
“달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후작의 처벌에 관해서는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요.”
사사바란이 송아지처럼 우직한 눈망울을 굴렸다. 힐벤이 그 모습을 보고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신뢰를 주지 않으면서도 이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하죠. 고삐를 쥔 건 내 쪽이니까. 내 말 알아듣나요?”
* * *
“저치 이름이나 기억하십니까?”
바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레이먼드는 바란의 귓가에다 대고 바란 이상으로 끔찍한 사람은 아마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폭언을 했다.
레이먼드는 화가 났을 때는 곧잘 눈에 뵈는 게 없이 말하곤 했다. 대공에게 마틸다와 함께 무릎을 꿇어가며 사정을 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홧김에 대공에게 덤벼들었다가 모가지가 달아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바란의 새파란 눈동자는 성벽의 꼬챙이에 끼워져 붉게 드러난 살갗을 들새들에게 파먹히고 있는 늙은이를 향했다. 마구간지기였다. 늘그막에 아내 목숨과 바꿔 얻은 아이 하나만 바라보며 바란을 위해 말을 돌보던 홀아비.
“당신처럼 끔찍한 사람은 난생처음입니다. 고작 왕녀의 기사 하나를 사지 멀쩡하게 도망 보내려고 어린애 목을 베고 그 아비를 첩자로 몰아 저 모양 저 꼴로 만들다니요?”
레이먼드가 이를 갈았다.
“당신은 그 애가 갓난이였을 적부터 보지 않았습니까!”
“늘 해왔던 일이야. 네가 죽고 못 사는 그 앙살라테를 위해 문자 그대로 갓난애도 죽인 적 있어, 나는. 면식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갑자기 죽일 놈을 만드는군.”
“그건…!”
레이먼드는 성곽을 끼고 돌아오는 인영을 발견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속에서 들끓는 울화가 잦아드는 일은 없었다. 곧 산만한 덩치에 험악한 인상을 가진 기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사사바란 공작의 둘째 아들이자 대공에게 충성서약을 한 달틴 사사바란 경이었다.
바란이 우아하게 귀족적인 인사를 건넸으나 돌아오는 것은 조금의 장식도 없는 용건이 다였다. 그는 니카에게 탈출의 기회를 제공한 데 있어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애초에 밖으로 나가자고 그를 꼬여낸 바란에게도 신경질이 나 있었다.
‘얼굴에 뭐라고 생각하는지 다 쓰여 있군.’
바란은 생각했다. 순진한 구석이 있고 벽창호 같은 작자였다. 대공의 의견에 무분별하게 찬동하는 인물이기는 해도, 그런 사사바란이 바란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왕국의 기사라는 주관 없는 작자들에게서는 사랑하는 니카와 닮은 분위기가 조금씩 풍기기 때문이었다.
니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낯설게 감돌았다. 퀭하게 가라앉은 바란의 예쁜 눈이 파르르 떠는 속눈썹 아래에서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수리 왕녀는 니카가 가진 명백한 맹점이었다. 바란은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거의 거품을 물 것 같았던 니카의 반응을 회상했다. 잔악후작이라고 부르는 입술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바란은 어떻게든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발톱으로 할퀴어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싶은 생각에, 니카의 맹점을 단박에 찔러버렸다.…그러니 결과가 이런 것도 알만한 일이었다.
바란은 니카의 검에 찔렸던 상처 부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얼기설기 꿰매어 상처가 벌어지는 것을 막아두었다. 손이 닿자 고통이 한층 더해졌다. 몸서리를 쳤다.
‘언젠가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 니카가 나를 죽이려 들거나 경멸하게 될 줄은 진작 예상했잖아. 난 그냥, 충격을 좀, 받았을 뿐이야….’
“하달할 명령이 있으니 바삐 알현하라는 대공 전하의 명이십니다.”
바란이 감상에 젖어 있건 말건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피력하는 표정으로 사사바란이 말했다.
* * *
“탈타르로 함께 가줘야겠어요.”
그다지 놀라울 게 없는 소식이었다. 니카 건으로 크게 꼬투리를 잡혔으니 사지 중 어디 한 군데는 멀쩡히 보전하지 못하리라 내심 각오했던 참이었다. 선뜩한 가슴을 달래며 각오를 다지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평이한 말이 나왔다.
바란은 무심코 여태 풀이 죽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힐벤이 너그러이 웃었다. 그렇다, 너그러이. 그게 어디 대공과 어울리는 구석이 있는 단어였던가? 바란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놀란 것 같네요. 탈타미오에서 더 몸을 요양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 측에서도 더 이상 노는 전력을 늘릴 수는 없거든요. 곧 겨울이 다가오니 여기 오래 발을 붙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물론입니다, 전하….”
“흠. 상처는 괜찮아요?”
힐벤이 보는 것만으로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달큰한 차를 들이키며 바란에게 눈짓했다. 바란은 뭐라고 말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싱겁게 괜찮다고 했다. 대답에 믿음직한 구석이 없으니 대공은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다며 친히 바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니카만큼은 아니더라도 서늘한 손길이 바란의 옷가지를 들춰냈다. 반사적으로 옷깃을 여며 막았더니 힐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역.”
‘트집을.’
결국 바란은 이를 악물며 옷가지를 붙잡던 손을 뚝 떨어뜨렸다. 단추를 끌러내고 나서 맨살에 여며진 붕대까지 풀어헤친 힐벤은 연고가 발리고 실과 바늘로 꿰매진 자국을 손가락으로 슬금슬금 타고 올랐다.
상처가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시점이라 진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가슴골부터 배꼽 옆까지 비스듬하게 내려오는 무척 큰 검상이었다. 드문드문 곪아서 염증이 올라온 부위도 있었다.
“그래도 목숨은 보전해서 다행이군요. 나는 말이죠, 그 튀기 새끼가 후작을 죽이려고 했다면 결딴을 내기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용케 이렇게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후작을 과소평가했었나 봐요.”
말 속에 뼈가 있었다. 니카가 정말로 바란을 죽이려고 들었다면 이깟 검상으로 끝났을 리 없다는 소리였다. 바란 역시도 동의하는 바였다.
바란이 짐작하기로 니카는 아마 혼란스러워서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명사수라도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화살을 빗맞힐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그 자리에서 바란을 단번에 베어 죽일 수 있었는데,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라면?
어쩌면 니카는 기억이 돌아오고, 또 바란에게 배신을 당하고 나서도….
‘말 같지도 않은 희망.’
자책 속에서도 척박한 바위틈으로 고개를 내미는 새싹처럼 희망이 싹을 틔웠다. 바란은 그 위로 뚜껑을 덮어 의식의 빛이 닿지 않도록 했다. 빛이 없으면 새싹이 안간힘을 쓰며 오히려 더욱 웃자라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했다.
“얼마나 아프던가요?”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말장난이라고 생각한 듯 대공이 웃으며 그 말을 몇 번 되뇌었다. 성가신 어린애처럼 그 말을 수차례 반복하며 점차 웃음을 키워나갔다.
“하하! 아하하… 흐음.”
어느 순간에 다다르니 그 안에 담긴 재미를 다 빨아먹었다는 듯 다시 입매가 뚝 떨어진다.
“전하, 으윽!”
“아파요? 미안해요. 그런데 기껏 봐줄 만한 상처가 났는데 빨리 붙어버리면 재미가 없잖아요.”
용의 발톱처럼 흉악하게 웅크린 손아귀에 아물어가던 상처가 쥐어 뜯겼다. 실밥이 터져 나오며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란의 온몸이 경련하는 것을 면밀히 뜯어보며 힐벤이 물었다.
“그 용인이 두려웠나요?”
“흐, 어, 언제나요.”
바란이 대답했다.
* * *
왕국 북쪽의 탈타미오 영지로부터 다르탈루 강 동쪽의 탈타르 영지까지는 밤낮없이 말을 달려 일주일이 걸렸다.
대공 본인은 고대룡의 혼혈이고 그가 거느리고 온 다섯의 기사들은 대공군에서도 손에 꼽는 체력을 가졌으니 피로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생각해도 탈타르로 돌아가는데 열흘 이상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부상에서 채 회복하지 못한 바란과 그를 보조하기 위한 집사가 일행으로 끼어들면서 계획이 조금 달라졌다.
“말의 피로를 고려하면 강행군으로도 이 주는 걸립니다. 게다가….”
힐벤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사사바란은 창문 너머로 바란이 있는 쪽을 눈짓하며 일행에 부상자가 있는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상처가 다 터져서 다시 깨끗한 실로 드문드문 봉합 과정을 거친 바란은 진통과 소염 작용이 있는 탕약을 마시고 나서부터 지친 얼굴로 피로와 싸우고 있었다.
성문 앞에 힘없이 버티고 선 바란을 물끄러미 눈짓하던 사사바란이 다시 바삐 손을 움직였다.
“그것도 가장 빨리 이동했을 때 얘깁니다.”
“앙살라테 그 여우에게 뒤통수를 맞기엔 충분한 시간이군요.”
힐벤은 그에게 갑주를 하나둘 입혀주는 사사바란의 귓가에 대고 이죽거렸다.
“열흘. 그 이상은 안 돼요. 후작이 만약 그 정도로 나가 뒤질 만큼 나약한 놈이라면, 이번에야말로 자연의 법칙에 따라 도태되게 놔두자고요.”
더 이상 숙련된 마구간지기가 없는 탈타미오의 마구간에서 선발된 일곱 마리의 늠름한 말들이 발을 굴러 흙먼지를 구름처럼 일으켰다. 다급하게 대체된 새 마구간지기에게 미처 익숙해지지 못한 말들은 불안하고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고삐를 잡고 버티고 있던 새 마구간지기가 거칠게 고개를 젓는 말의 드센 힘에 이끌려 휘청거렸다.
바란은 그 성난 말을 몇 번인가 타고 달렸던 기억이 있었다. 말발굽에 잘못 채이면 새로 뽑은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신입 마구간지기의 갈빗대가 나갈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바란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쉬이.”
말의 목을 두드려 진정시키려고 했는데, 의도와는 정반대로 말을 더 질겁하게 만들고 말았다. 말이 눈에 흰자를 선명하게 드러내며 입술을 떨고 온몸을 휘적거렸다.
“후작님, 물러나세요!”
제 신변이 더 소중하다는 가치관을 역력히 반영한 채 레이먼드가 발길을 뒤로 물리며 목청을 돋웠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바란은 그만 어이가 없어서 신물이 난 표정으로 레이먼드를 돌아보았다.
말 한 마리가 날뛰자 그 영향으로 나머지 말들도 하나둘 식겁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도열한 대공의 기사들에게 도움을 청해보아도 그들은 바란에 대한 경멸을 드러낸 채 가만히 관조하고만 있었다. 바란은 그만 쓴웃음이 났다.
“후작이 언제부터 내 종자가 됐죠? 왜 말을 다루고 있담.”
멀리서부터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갑옷을 갖춰 입은 대공이었다. 뒤에 덩치 큰 사사바란 경을 달고 성채로부터 팔랑이며 걸어 나오는 대공의 모습은 누가 봐도 백면서생에 불과했다.다만 전신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존재감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 모든 소란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일순간에 잦아들었다. 바란은 곁눈질로 말을 돌아보았다. 말들은 평화에 잠잠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대공이 뿜어내는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 탓에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순종적으로 구는 것이었다.
“말 등이 좀 높군요.”
바란의 곁에 선 대공이 싱그럽게 웃으며 눈짓했다. 저 미소의 한 가닥만 닿아 와도 기력을 온통 뺏기는 듯이 피로감이 엄습했다. 바란은 눈을 질끈 감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원하는 대로 깍지 낀 손을 대주니 목젖을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대공은 바란이 저자세로 굴어야 하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이를 악무는 걸 유달리 좋아했다. 거기에 더해 약간의 고통을 권력으로 휘두를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군홧발이 손 마디마디를 짓이길 것처럼 비벼 밟았다. 살가죽이 다 까지며 뾰족한 흙 알갱이가 피부를 긁고 박혀 들어와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고맙기도 해라. 진짜 신사다워요. 후작.”
대공이 말 위에 올라탄 뒤에 낄낄대며 웃는 소리가 기사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안타까운 신세였다.
바란이 레이먼드로부터 전해 들은 식량과 식수 및 물품의 재고에 관해 간략히 보고를 끝마치자 곧장 명령이 떨어졌다. 바란과 레이먼드가 마지막으로 말 등에 올라탔다.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행이 하나둘 말을 몰아 성문 너머로 열을 지켜 빠져나갔다.
소란스러운 진동이 지축을 흔들었다.
* * *
니카는 홀로 말을 달려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그렇게 달리는 동안 헤아렸던 별빛보다도 더 많은 두려움이 니카를 시시때때로 덮쳤다. 이슬을 피하며 눈을 붙일라치면 니카의 배반에 유감을 표하는 아리따운 왕녀의 잔상과 바닥에 죽어 늘어진 바란 탈타미오의 모습이 그를 번갈아 괴롭혔다.
마치 눈알을 덮은 눈꺼풀이라는 뚜껑의 안쪽에 그들의 얼굴이 선명히 새겨져 있어서, 눈을 감은 동안에는 그들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는 것만 같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바로 고독감이었다. 빛이 없는 세상에서는 어둠을 칭할 단어가 나올 이유가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였다. 니카는 충만감을 알기 전까지는 그것의 부재에 고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의식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 바란 탈타미오의 술수에 놀아나 연인놀음을 하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서 그런지, 니카의 정신은 자꾸만 온기와 대화와 감정이 모자라다며 소리를 질렀다.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만한 곳에 바란의 온기가 있던 때를 회상했다.
그다지 오래된 기억도 아니지만 아주 뿌옇고 흐리게 느껴졌다. 머릿속을 헤집으면 헤집을수록 니카는 그 시절에다 지금을 견주어 보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외롭고 초라한 상태에 있는지를 의식하게 된 이후에 몰아치는 것은 박탈감이었다.
‘정말 죽었을까?’
새빨갛게 얼어붙은 손가락으로는 주먹을 쥐기도 어려웠다. 설원을 지나던 니카는 잡념에 사로잡혔다.
‘내 옷가지가 다른 색으로 물이 들 만큼 피를 많이 흘리기는 했다. 만일 대공이 빨리 그를 발견하고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면….’
겉옷 안쪽에 아직도 남아 있는 바란의 혈흔이 죄의 흔적처럼 늘 니카에게 바란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그에게 매달려 입 맞추던 바란의 입술과 상처에서 터져 나오던 신선한 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뜨거웠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건 니카는 쪽잠이 들 때마다 셔츠에 남은 바란의 핏자국이 달군 인두처럼 달아올라 그 모양 그대로 피부에 시커멓게 탄 자국을 남기는 이상한 꿈에 시달렸다. 마치 죄인의 낙인을 받은 것처럼.
니카는 점차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공군이 깔린 탈타르 인근에 발을 들일 수는 없으니 자연히 험한 길을 골라 북쪽에 있는 소규모 성으로 향하는 방법밖에는 남지 않은 까닭이었다.
갈고리자리 별과 북극성만이 방향을 가늠하게 했다. 건량과 식수를 아무리 아껴도 이미 목숨을 부지하기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왔다. 먹구름이 뜯을 만한 풀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바란이 죽여 없앤 선량한 소년 빈스로부터 충고받은 대로 폭이 좁은 누비옷을 껴입고 영구동토로 뒤덮인 울루 고원의 산등성이를 얄팍하게 파고들어 지났다.
토룡의 혼혈이라 인간처럼 체온을 조절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니카는 추위를 많이 탔다. 하얗게 흩어지는 숨결의 온기마저 아쉬워 옷깃을 바짝 세워 입술을 덮었다.
유일한 이동수단인 먹구름의 상태를 살피며 이동하는 동안 니카는 갖은 고생을 했다. 노잣돈이 암만 넉넉하게 있더라도 사람 사는 마을에서나 들이밀어 볼 수 있으니 황무지를 달리던 한동안은 영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도중에 가죽이 두꺼운 순록을 치며 사는 주민들에게 젖과 물자를 살 수 있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그나마도 혼혈인이라 하여 상종하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사정을 해 가며 값을 터무니없이 쳐주어야만 했다.
먹구름은 강한 정신력으로 이끼를 핥아 먹는 궁핍함을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었다. 갖은 고생에서 목숨줄을 부지하며 고된 행로를 밟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니카는 날을 헤아리는 것을 깜빡 잊어 속으로 아흐레나 지났을까 생각했다.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인근의 기온은 더 이상 새벽녘에 속눈썹에 서리가 내리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고원을 지나 산골짝에 있는 작은 마을에 이르러 여관에서 식사다운 식사와 잠자리를 챙기는 행운도 있었다. 물론 용인인 니카가 다른 이들과 같은 값을 내고 방을 잡는 것은 어림도 없었으므로 남들 눈을 피해 주인장에게 금빛 동전을 조심스레 찔러주어야 했다.
돈주머니가 한껏 얄팍해지긴 했어도 고원 아래쪽의 기후는 상대적으로 온화했다. 거기다 이제 곧 사난타 성이 가까우니 노숙과 사냥으로 허기를 달랜다면 노잣돈 없이도 견딜 만 하리라.
니카는 사난타 성에서 다르탈루 강을 건너 잣자후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잇따른 패퇴로 다르탈루 강 이서 지역으로 몰린 앙살라테 왕자는, 대관식에 도움을 줄 만한 유물을 찾기 위해 수도와 가까운 영험한 유적도시 잣자후를 거점으로 삼고 모든 병력을 끌어모은 상태였다.
왕자의 거점인 왕국 서쪽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탈타미오에서 니카가 바란에게 사로잡혔던 것은 대공의 보급줄을 끊으려던 작전 때문이었다.
롱가든 동쪽의 연맹국 상단과 계약하여 힐벤 대공의 물자 공급선을 끊으려던 수리 왕녀는 빛나는 수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설득에 실패했다. 불리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사활을 걸었던 한 수가 흐지부지되었으니 니카가 잘 모르기는 하거니와 현재 왕자군의 상황이 밝지만은 않을 것이다.
니카는 건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묽은 스튜를 한술 떴다. 이 안에 침을 뱉었는지 쓰레기를 넣고 휘저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게 독만 아니라면 됐다는 생각이었다.
“이봐. 용인.”
니카는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모른 체 넘기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오래간만에 먹는 음식다운 음식이라 기실 간이 싱겁고 탈타미오 성에서 대접받던 음식들에 비하면 쓰레기 수준도 못 된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의 니카에게는 이깟 고기 우린 국물이 세상에 둘도 없는 진미처럼 느껴졌다.
여관 안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으나 외지에서 왔다는 토룡 혼혈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그 혼혈인이 검으로 보이는 긴 막대를 훌훌 감아 차고 있다면 더욱 그랬다. 시비가 걸려오는 것도 당연했다.
“용인 새끼야…. 귓구멍이 막혔나.”
니카는 묵묵부답이었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처지에 입소문이 돌게 만들었다간 곤란했다.
사난타 성은 탈타르에 비하면 전략적으로 홀대 받는 처지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공의 세력이 점령한 영토였다.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니카의 행적이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었다.
“씨발, 대가리 확 돌게 만드네. 좋게 부를 때 돌아봐, 이 씹새끼야.”
숟가락을 다시 한 번 그릇에 담가 따뜻한 스튜를 떠내려는 시점이었다. 니카가 수 차례 말을 무시했다는 것에 열이 뻗친 남자가 다가와 상 위에 놓인 그릇을 엎어버렸다.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이 바닥에 나뒹굴며 상황에 맞지 않는 청명한 소리를 냈다. 반의반도 미처 다 먹지 못한 스튜가 엎질러져 니카의 성대한 만찬을 파투냈다.
“어이구, 이 새끼 눈 뜨는 거 보게.”
들이댄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가 역겨워서 니카는 문득 숨을 참았다. 최대한 온화하게 문제를 풀 심산으로 물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볼일 있으시냐는데. 킥킥킥…. 퉤. 야, 역겨워서 원. 도마뱀 새끼가 옆에서 날름거리고 처먹는데 내가 술이 넘어가겠냐? 넘어가겠냐고?”
이깟 어설픈 패악이 니카를 들끓게 만들 일은 요원했다. 하지만 배를 곯으며 온갖 고생을 하다가 겨우 한 그릇 얻은 스튜가 나뒹구는 모습을 보니 니카의 차분한 낯도 노기를 띠었다.
니카는 검을 힘주어 움켰는데, 그 순간 빈스의 목을 일말의 망설임 없이 베어내던 잔악후작의 모습이 돌연 떠올라 그만두었다. 괜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니카는 주변에서 낄낄대는 소리에 아랑곳없이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때 뜻밖의 방해가 들어왔다. 식탁에 앉아 눈치만 보던 다른 남자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니카의 앞길은 물론 퇴로마저도 차단했다. 곧 야생동물을 위협하듯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들며 니카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 남자들 중에는 니카의 스튜를 끓인 주방장도 끼어 있었다.
‘실수했군.’
웃돈을 얹어주었던 것이 결국 니카를 표적으로 만든 거였다. 니카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백성들 삶이 하나 같이 힘겨운 시기이니 돈을 드러내 보이며 다니면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멍청한 실수를 했다.
“허리춤에서 돈 꺼내던데. 주머니 두둑하더라고.”
“이, 이, 이래도 정말 괜찮을까?”
무리 중 하나가 망설이는 기색을 드러냈다. 사방에서 닭대가리처럼 겁이 많다느니 다리 사이의 물건을 떼라느니 하는 폭언이 날아들었다.
“가, 강도질은 가벼운 죄, 죄가 아냐.”
남자도 항변했다. 주방장은 남자가 모멸감을 느끼도록 뺨을 가볍게 갈기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야, 씨발 새대가리 같은 새끼야. 괴물 튀기 새끼가 무슨 수로 저런 고급 외투에 돈주머니를 달고 다녀? 저 새끼도 어차피 다른 놈 주머니를 털었을 텐데, 강도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 그런가….”
돈주머니라는 단어가 대화에 섞여들자 남자들은 빗속에서 피 맛을 보고 덤벼들던 들개 떼와 비슷한 눈빛을 했다. 혼혈인을 이성이 없는 마수의 피가 섞였다 하여 경멸하는 인간들이 정작 이렇게 짐승 같은 모습을 보일 때면 니카는 늘 아연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 도덕이나 교리 찾던 시절 까마득히 멀다, 얼간아. 그딴 게 밥을 먹여주냐?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대체 뭐냐?”
거칠게 맥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한 남자가 벽난로 옆 벽에 걸린 두툼한 장작용 도끼를 집어 들었다. 팔뚝에 부풀어 오른 근육과 실지렁이처럼 도드라진 핏줄이 무시무시했다. 검을 뽑아 들지 않고 상황을 모면할 방법을 궁리하는 참에, 장작용 도끼가 예고도 없이 니카가 선 자리로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어쭈, 도마뱀처럼 잘 피하는군.”
이 농담은 남자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웃음소리가 한바탕 고요하던 여관 안을 휩쓸었다. 니카는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넘기고 소란을 피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생존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속으로 셈했다.
먹는 것과 잘 곳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가 많았다. 사난타 성문을 지키는 경비대에게 뒷돈을 먹이고 몰래 숨어 들어가거나 나루터에서 뱃삯을 내려던 계획이 전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왕녀님께서는 이 상황에서 돈을 전부 넘기더라도 살생은 피하라고 하셨을 것이다. 고작 돈주머니에 침을 줄줄 흘려야 하는 가난한 백성들이 애달프다 느끼실 테니까. 반면에….’
그리고 조금 다른 생각도 떠올랐다. 남자의 도끼가 하마터면 발등을 찍어 두 동강 낼뻔한 것을 피하며 니카는 잔악후작을 떠올렸다. 눈빛이 흐려졌다.
‘그라면 진작에 여기 있는 인원을 전부 죽여 없애버렸을 테지. 잔악후작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그래, 바란을 생각하는 일에서 멀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니카는 의식적으로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니카는 잔악후작처럼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성격, 행동양식, 사소한 버릇이나 삶 속의 모든 모습 속에서 바란 탈타미오의 영향력으로 인해 변화한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불로 지져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타고 남은 재가 온전히 왕녀에게 온 마음과 충성을 바치는 예전의 ‘니카 경’일 수 있도록.
“…이게 전부다.”
니카는 조용히 돈주머니를 끌러내 바닥에 떨궜다. 무거운 금속이 바닥에 달라붙으며 무게감 있는 소음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얼굴에 탐욕과 이채가 서리는 가운데 도끼를 휘두르던 남자가 호탕히 웃으며 다가왔다.
“주제 파악은 빠르구먼.”
“돈을 넘겼으니 이만 보내줘.”
“글쎄, 옷이나 홀딱 벗겨 보지 않고서야 네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나?”
눈살을 찌푸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니카의 어깨를 거세게 두드리던 남자가 시퍼런 도끼날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얌전히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행동이었다.
이 이상으로 니카를 화나게 하는 상황은 더 없을 것이다. 결국은 ‘잔악후작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으니까.
니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옷가지에 싸인 검을 끄집어냈다. 기사의 검을 쥔 손아귀에 거센 힘이 들어갔다. 검은 처음 뽑아낼 때만 망설이게 되지, 정작 뽑고 나서부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학살이라고 이름 지어 마땅한 일방적인 살육이 펼쳐졌다.
뒤늦게 자신의 입장을 파악한 뒤 자리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며 애걸복걸하는 이들을 니카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였다. 가능한 한 고통 없이 보낸다는 것은 니카만의 사정이었고, 대개 여관의 남자들은 니카가 목을 노리고 휘두른 검을 막아내려다가 사지가 차례로 잘린 뒤에야 비로소 고꾸라지고는 했다.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끌었다. 니카는 검을 허공에서 짧게 휘둘렀다. 송골송골 맺힌 핏방울이 단번에 떨구어지며 매끈한 검신이 본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윽….”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는 것은 꽤 상투적인 표현이었으나, 이 냄새가 말 그대로 선단이 뾰족한 흉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에 니카는 동의했다. 고깃덩어리로 변모한 육신들이 쏟아낸 온갖 액체 탓에 콧구멍이 아릿했다.
바닥을 뒹구는 죽은 몸뚱이의 수를 하나씩 헤아렸다. 일곱. 일단 검을 뽑은 이상은 목격자를 살려두지 말아야 했다. 니카는 그가 이 여관에서 본 사람들의 수가 일곱이 맞는지 거듭 고민했다.
발기척을 죽이려고 노력하며 낡은 층계를 올라 마찬가지로 낡은 방문을 일일이 젖혀 확인했다. 외지인이라고는 잘 없는 작은 마을의 여관인지라 매춘으로 대실을 하는 게 아니고서야 객실을 사용할 일이 잘 없었다. 이곳은 주로 동네에서 알음알음 알고 지내는 사내들이 밤마다 모여 외상을 달고 맥주를 걸치는 공간에 불과했다.
확인을 거친 바, 객실에 묵는 사람은 니카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고, 주방에서 일하던 것도 주방장이자 여관의 주인인 저 남자 혼자였다. 패물을 보아 아내 되는 사람이 어디든 있을 것 같아 찾아 헤매던 도중, 아내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서 아랫마을에 다녀오겠다는 내용을 확인했다.
니카는 바닥에 떨구어 뒀던 핏물이 얼룩덜룩하게 든 돈주머니를 다시 허리춤에 붙들어 매었다. 화적떼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 검을 검집째로 휘둘러 여관의 가구를 부수고 쓰러뜨렸다.
“…아.”
여관에 도착했을 때 먹구름의 고삐를 넘겨받고 마구간으로 걸어가던 어린 소년에게 생각이 미친 것은 그때였다. 죽여야 할 목숨이 하나 더 남아있던 것이다.
* * *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위협하는 악랄한 존재로 비춰질 수 있다고 깨달을 때마다 쓴웃음이 났다. 세상의 가장 아래 계급이던 용인 니카는 검이라는 권력이 손에 있을 때는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격상되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나리.”
‘꼬마,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군.’
니카는 발치에 엎드려 살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손을 비벼대는 평범한 소년에게서 시선을 옮겼다. 그 앞을 막아선 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살갗이 검은 이방인 여자였다.
여관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있었는지 잡일로 때가 낀 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피부 안에 붉은 염료를 찔러넣어 만든 독특한 문신을 보니 여자는 보통 남부인이 아니라, 집시였다. 주름살이 깊은 것을 보면 이미 나이를 꽤 먹었고, 부르튼 손발로 짐작하건대 오래토록 종살이를 한 것 같았다.
니카가 한 발짝씩 다가갈수록 그들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니카에게도 측은지심은 있었다. 다만 한번 살생을 저지른 이상 뒷마무리는 확실히 지어두어야만 나중에 후환이 없었다. 어쭙잖은 자비를 베풀어 살려두었다가 말이 돌아 미리 경계령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사난타 성에 다다랐을 때 검문으로 곤욕을 치를 것이다.
위선에 불과한 미안하다는 말은 뱉지 않았다. 검을 한번 고쳐 잡았다. 소년을 뒤로 숨기며 집시가 손을 번쩍 뻗었다.
“나으리, 잠시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쫓기고 계시지요!”
대답하지 않으려는데 집시가 겁도 없이 니카의 발목을 움켰다. 반사적으로 손목을 잘라낼 뻔했으나, 뒤로 두 걸음 물러나는 것에 그쳤다.
“서쪽으로… 가시는군요.”
니카는 삿된 것들과 토착 미신이 가득한 왕국 남부 출신으로서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에 익숙했다.
“별 읽는 재주가 있나?”
“혈통 덕택에 타고난 재주입니다. 어머니가 우두머리 샤먼이셨거든요.”
지금에야 멸시받으며 왕국 남부에서 웅크리고 살아가는 게 다이지만, 과거 마수들이 인간을 지배하던 마법과 야만의 시대에는 그녀의 민족이야말로 이 땅의 주인이었다. 그래서인지 집시들은 지금까지도 신비로운 직감과 통찰력을 타고났다. 혹자는 용의 신관들이 가진 주술과 신성한 힘들이 모두 집시 샤먼들에게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말했다.
“당신은 천성이 고귀한 분이십니다. 하는 수 없이 살인멸구 하셔야 했음을 저는 이해합니다.”
허튼소리로 비위를 맞춰서라도 목숨을 도모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니카는 그를 추켜세우는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도 않았다. 집시의 새까만 눈동자가 침묵 속에서 니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니카도 저 집시의 것과 같이 새까만 눈동자와 흑발을 가졌다. 어렸을 때부터 홀로 그의 어미가 남부의 집시이겠거니 유추하곤 했었다. 니카는 결국 짧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늘어뜨렸다. 이런 식으로 머리칼을 견주어 보며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였다.
“저는 젊을 적에 어미를 따라 서쪽으로 유랑하던 도중에 노예상단에 붙잡혔습니다. 어미가 강 건너 잣자후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 한번 치지 못하고 줄곧 왕국민들의 잡일이나 거들었지요.”
“네 사정이나 듣고 있을 시간이-”
“이 아이도 기구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천애고아로 태어나 걸음마를 뗄 적부터 머슴살이를 했으니까요. 마구간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청해온 지가 오 년이 넘었답니다. 그야말로 갈 곳 없는 자들이지요. 나리.”
다 쓰러져가는 마구간 안에 매여 있는 짐승이라곤 먹구름과 늙은 노새 한 마리가 다였다. 노새는 숨을 내쉴 때마다 쉭쉭 거리는 소리를 냈다. 소음 사이에서 집시가 또렷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집시들 특유의 마법적인 직감 덕택인지 그녀에게는 더 이상 니카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리도 미천한 목숨들입니다만, 죽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나리께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녀는 어미가 있는 잣자후까지 함께 가기를 청했다. 그녀는 목숨을 살려 잣자후까지 데려가 준다면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향후 니카의 잡일을 거들고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맹세했다. 꽤 오랜 대화였다. 어떻게 냉정히 내치고 목을 벨 수 있었을까? 저 어린 마구간 소년에게서 죽은 빈스가 겹쳐 보이던 참이었다.
니카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당장 짐을 꾸리도록 지시했다. 달틴 사사바란에게서 앗아 온 왕국 기사의 검이 멋쩍게 검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시는 제 이름을 구더기라고 소개했다. 니카가 그게 원래 이름이냐고 물으니 원래 이름이야 따로 있지만 왕국민들은 잘 발음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예쁜 이름들은 악한 존재들의 미움을 사기 쉬우니 노예 생활을 하면서 구더기라고 불리운 것에 있어서 별다른 반감도 없다고 했다.
“니카…요? 느, 이카?”
오히려 구더기는 니카의 이름을 듣자마자 얼굴을 이상하게 구겼다.
“그래.”
“아… 잘 알겠습니다. 추격자가 있는 상황에서 존함을 함부로 여쭈다니 제가 어리석었군요.”
구더기는 니카가 그녀의 이름을 듣고 생각했던 것과 똑같이 이 이름이 가명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가명은 직접 생각해내신 겁니까?”
“…….”
심지어는 대체 그런 이름을 누가 생각해낸 거냐고 심각하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니카와 마찬가지로 남부 출신이니 니카의 이름이 갖는 혐오스러운 어감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꽃봉오리와 골짜기.’
듣는 것만으로 녹아내릴 것같이 달콤한 웃음소리가 귓전에서 어른거렸다. 니카는 얼른 고개를 휘저어 상념을 털어내려 했다. 쉽지는 않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바란을 연상하는 생각의 흐름은 마치 잘 닦여진 길과도 같았다. 조금만 방심을 하면 생각은 어느새 대로를 달려 잔악후작에게로 향했다.
‘바닐라 맛이 나는 입술?’
지금처럼. 바란 탈타미오에 대해 깊숙이 생각할수록 니카는 약해져만 갔다. 제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왕녀가 있는 잣자후로 향해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니카를 붙들어 세워주었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에 신경 끄고 아이나 고쳐 안아라. 그러다가 굴러떨어지겠구나.”
니카는 궁금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구더기에게 핀잔을 주듯이 말했다. 늙은 노새는 걸음이 느린 대신 지구력이 좋아 구더기와 소년을 같이 태우고서도 지친 내색을 잘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은 구더기에게 안겨있는 것이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파르라니 수염이 나지는 않더라도 슬슬 남녀를 분간해가며 내외를 할 나이다.
“몇 살이나 되었지?”
“아직 쉰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아이 말이야.”
그러자 구더기가 푸스스 웃었다. 니카 더러 더 냉정한 사람일 줄 알았다고 했다. 여관에 있던 사람들을 단칼에 다 죽여버리고는 입막음을 위해 마구간 소년까지 찾아 죽이려던 니카이니 틀린 감상도 아니었다. 넉살을 부리는 구더기가 이상한 것이지, 저 소년은 아직도 니카에게 겁을 먹어서 눈을 피하고 목소리도 내지 않으려 들었다.
“얘, 코쿤. 겁내지 않아도 된다. 결과적으로 보면 결국 우리를 거기서 구해주신 분이니까.”
“…여관 아저씨는 우리한테 잘해줬어요. 아줌마는 내가 죽게 내버려 둬야 했어요.”
“쉿!”
마을에서 멀어져 동이 터오기 시작할 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아이의 첫 마디는 이랬다. 그냥 죽도록 거기에 뒀어야 했다는 것이다. 구더기는 이 말에 불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니카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을 때, 구더기는 혼자서라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마구간으로 가 아이를 챙겼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리.”
구더기는 니카의 심리가 상하기라도 했을까 눈치를 보았다.
“안 쓴다.”
니카는 어린애의 치기에 성을 내지 않을 만큼은 나이를 먹었다.
“어린아이들은 가끔 죽음이라는 게 무슨 명예로운 감투인 줄로만 알죠.”
때때로 그런 순간이 있다. 기억 속 아주 깊은 곳에 존재하던 것이 대수롭지 않은 연결고리를 타고 올라와 번쩍 떠오르는 경험 말이다. 니카는 슬픔에 잠긴 코쿤의 눈동자에서, 수년 전, 동정심을 발휘해 왕자의 은신처까지 데리고 왔던 아이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 * *
그 날 니카가 탈타미오에서 노스월로 향하는 북서쪽의 침엽수림을 지나던 것은 더 없이 우연이었다. 정탐 임무를 나갔다가 눈에 띄지 않도록 우회해 왕자의 은신처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서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숲속에 개 짖는 소리가 처음 울려 퍼졌을 때 니카는 그것이 사냥꾼들이 풀어놓은 사냥개인 줄로만 알았다. 곧 남자들의 웅성대는 말소리와 밝게 타오르는 횃불이 나무들 틈을 지났다.
“얼마 못 갔을 거야.”
“하란토 경이 눈머는 약을 먹이셨다더군.”
니카가 거친 나무기둥 뒤에 기대어 횃불 그림자로부터 몸을 숨기고 엿들은 것은 단순한 사냥꾼들의 대화로 보기는 어려웠다.
‘괜히 얽혔다간 골치 아프겠군.’
얼른 숲을 벗어나려다가 하필 사연이 많아 보이는 소년을 맞닥뜨렸을 때, 니카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던 것을 기억한다. 니카는 용인의 시력을 통해 어둠 속에서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는 맥없이 달리다 말고 발이 접질리는 바람에 제법 거나하게 비탈길을 굴렀다. 바짓부리를 걷어 보지 않아도 복사뼈가 불룩하게 부어올랐을 것이 분명했다.
아이는 죽어 나자빠진 개구리처럼 연약한 배를 내보였다. 질끈 눈을 감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니카는 그 아이가 기절해서 의식이 없는 줄 알고 망설이듯 몇 발짝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돌연 아이가 번쩍 눈을 떴다. 깜짝 놀란 니카가 뒷걸음질을 치는데, 아이가 사방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었다.
코앞에 니카를 두고서 부산스럽게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앞이 보이지 않는 듯싶었다. 좀 전에 주워듣기로는 누군가 눈머는 약을 먹었다고 했다. 그러면 그 남자들이 너른 숲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 비쩍 마른 소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소년은 처음에 니카가 자신을 죽이려고 사냥개를 몰아 온 저 남자들 중 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겁을 냈다. 그리고는 초연히 숨을 죽였는데, 니카가 어서 숨통을 끊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것 같았다.
니카는 아이에게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리라고 이해했다. 죽음을 쉽게 말하는 입술이 가엽기도 하고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당시 니카는 어렸고, 또 왕녀의 산하에 몸을 의탁하면서 세상이 생각보다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여기는 낙관론자 기질이 좀 생겼다. 그리고 핍박으로 가득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에, 불행한 어린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다짜고짜 아이를 자리에서 안아 일으켰던 이유도 이런 싸구려 동정에서 시작되었다. 진창에서 태어나 괴물로 자라난 자신이더라도, 더 낮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놔! 이거 놓으라고!”
처음에 아이는 반항하면서 화를 냈다. 니카의 어깨에 몸이 얹혀서 반으로 접힌 채 한껏 발버둥을 쳤다. 주먹을 쥐고 니카의 튼튼한 몸을 마구 때리기도 했다. 그래 봤자 용인인 니카와 깡마르고 배를 곯은 소년 사이에는 너무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실랑이를 했을까, 아이가 지쳐 나가떨어졌다. 사지에 힘을 쭉 빼니 안아 옮기기에 더 수월했다. 니카는 아이를 바짝 고쳐 안았다. 줄곧 고집을 부리던 게 다 거짓말인 것처럼, 아이는 니카의 가슴팍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왜 울지?”
옷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을 눈치채고 나서 니카는 무척 당황했다. 니카에게 안긴 소년의 깡마른 가슴우리가 들썩이며 숨을 뱉어냈다. 니카는 한 손으로 짓이길 수 있는 연약한 생명체를 다루는 거인과도 같이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어디 한 구석을 다치게 할까 봐 힘을 한껏 뺀 투박한 손길로 요령 없이 아이의 어깨를 문지르기만 했다. 제 딴에는 서툰 배려를 해보겠다고, “울 수 있는 곳으로 가자.” 하면서.
이날 니카가 구한 소년은 사실 아이라는 호칭이 걸맞지 않은 나이였다. 갓 성인이 되었다고 했다. 또래보다 키가 좀 큰 아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으나, 나중에 보니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서 나이를 잘 짐작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법적으로 성인이든 뭐든 간에 그 아이는 여전히 안쓰러운 소년처럼 보였다. 좀처럼 살이 붙지를 않아서 평소에도 광대뼈가 볼록하게 드러나 있었다. 앙살라테 왕자의 은신처 저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지푸라기처럼 볼품없는 금발을 가진 소년을 ‘아이’나 ‘꼬마’라고 불렀다. 그 누구도 이 아이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 아이가 말을 섞으려 들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아이는 평소에는 무심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도 니카만 지나가면 마치 인간에게 관심이 생긴 길고양이처럼 굴었다.
눈에 떡하니 보이는 것을 저 혼자 감추려고 무진 애를 써 가며 니카의 주변을 얼마나 맴돌았는지, 나중에는 앙살라테 왕자도 아이에 관해 닭 쫓는 병아리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 모습이 성가시면서도 못내 귀여워서 니카는 한번 아는 척을 했었다.
‘니, 카아, 경.’
대체 무엇에 그렇게 집중을 하고 있는지, 아이는 니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안에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니카는 다가서서 보았다. 아이는 김이 서린 창문에 손가락을 뽀득거리며 그의 이름을 적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나?”
아이는 뒤에서 니카가 말을 붙이자 화들짝 몸을 떨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시울에 눈물마저 매단 채였다. 용인을 겁내는 아이들은 세상에 많았다.
니카는 본의 아니게 겁을 준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이다음부터는 멀찍이서 눈인사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이가 별안간 고개를 힘없이 끄덕거렸다. 안부 질문에 대한 대답임을 눈치채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이는 과묵했다. 말을 아예 꺼내지 않는 날도 잦았다. 앙살라테 왕자의 의원 중 한 사람은 아이가 실어증을 앓고 있다는 진단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니카와 있을 때만큼은 조금 달랐다. 종종 마음이 내키면 뭐라고 대답을 했다. 그나마도 단답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앙살라테는 아이가 명망 있는 귀족가 자식이라 억양을 감추려 드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를 처음 만났던 어둠이 내린 밤, 숲속에서 들었던 목소리를 되짚어 떠올리면 그 말에 수긍이 갔다. 얼핏 되짚어 생각하기에도 아이의 목소리에는 북부 귀족의 교과서 같은 억양이 있었다.
“산양 젖을 가져왔는데.”
“…….”
이미 니카가 창문에 쓴 글자를 다 읽었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니카의 시야로부터 글자를 감추려고 애를 썼다.
“마시기 싫다면 어쩔 수 없다만.”
아이가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하께서 너에게 방을 하나 따로 내어주셨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봐줄 만 하구나. 너를 많이 배려해주시는 모양이다. 반드시 보은하거라.”
니카는 모르는 척 제 몫의 산양 젖에 입술을 대고 방을 한 바퀴 둘러보며 시간을 주었다. 아이는 얼른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으로 창문을 할퀴듯이 문질러 글자를 전부 지워버렸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언제부터였을까. 앙살라테가 무언가를 입 안에서 중얼거리며 이상한 기색을 내비치던 날이 있었다. 그 날 이후, 아이는 앙살라테 왕자와 단독으로 대면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매일 같이 아이와 대화를 마치고 방을 나서는 왕자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니카는 그 방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으나, 기사의 위치에 걸맞은 점잖은 행동을 고수했다. 그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왕자의 은신처에서 갑자기 자취를 감췄다. 니카의 황망한 질문에 왕자는 단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아이를 돌려보냈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실 은신처를 떠나기 전날 밤 아이는 니카를 찾아왔었다.
니카는 여느 밤처럼 검을 수련하던 도중이었다. 아이는 거의 매일 밤 정원 한구석에서 니카를 훔쳐보곤 했다. 니카가 그 기척을 알고도 모르는 척 넘겨주었더니 언젠가부터 이 시간은 두 사람의 일과가 되었다.
아이의 시선이 없으면 니카도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안 그래도 최근 며칠간 찾아오지를 않아서 마음 한 구석에 호기심이 차오르던 참이었다.
“니카 경.”
열여덟이라던 얘기는 정말이었다. 수줍음을 타 곱아 들어가지 않는 반듯한 음성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변성기가 지난 아이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낮고 진중했다. 니카가 들은 적 있는 북부 귀족의 억양으로 아이가 물었다.
“날 구한 거, 후회해요?”
“글쎄. 그런 건 왜 묻지?”
“경이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라고 알려주고 싶어서요.”
“널 구한걸?”
“아니요…, 응. 그것도 그렇고. 그 왕녀라는 여자 좋아한다고 말 안 한 거, 나한테. 욕심부리게 한 거.”
니카의 처절한 짝사랑이야 세상이 다 알았다. 어디서 놀릴 만한 이야기를 주워듣고 뜻 없이 입에 올리는 것뿐이리라. 니카는 아이를 걱정했던 마음이 다 물거품이 된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는 다소 모질더라도 왕녀의 기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했다.
“왕녀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고요, 잘 알겠어요.”
“왕족모독죄는 즉결처형이다. 방금 네 목을 벨 수도 있었다.”
“그러셨겠지.”
“건방지게 말투가 그게 뭐야.”
아이가 웃음 섞인 투로 가볍게 대답했다.
“아, 어른들처럼 말하네.”
“어른이니까.”
“그래도 경이 꼰대처럼 굴 거라고는 생각 못했거든요. 마냥 조용한 사람일 줄 알았으니까. 그게 억울하면 평소에 말 좀 걸어주지 그랬어요.”
꼰대 소리에 움찔 몸을 떠는 니카에게 아이가 말간 웃음을 지었다. 생기를 머금은 아이의 얼굴은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예쁘장했다.
“하긴 말을 걸어줬다면 나중 돼서 그것도 후회했겠지요.”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빛살에도 쓰러져버릴 것 같은 연약한 체격은 여전했다. 얄팍한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아이가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보내지 말아 달라는 말을 배배 꼬아 좁은 보폭으로 전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니카는 아이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화가 다 가시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런데요. 경이 한번이라도 내 이름 물어봤으면, 난 대답해줬을 거예요.”
뭐라고 불러야 아이가 멈춰 설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아이를 만난 적은 없다. 뒤숭숭한 작별이었다.
* * *
마수혼혈인에게 표출되는 감정은 단순한 혐오보다 뿌리가 깊었다. 남쪽 영토에서 마수들의 습격으로 북상한 왕국민들에게는 마수에 대한 증오가 내재되어 있었다. 혈육과 친구를 마수의 이빨에 먹잇감으로 내어주었던 역사가 있기에 이 증오는 두려움을 바탕으로 하기까지 했다.
집시와 고아는 멸시받는다는 점에서 용인과 비슷했지만, 니카처럼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적어도 용인인 니카와는 달리 구더기와 코쿤은 마을에서 식량을 제값에 거래해서 들고 나르는 일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택에 그나마 있는 돈을 쇳덩이로만 치부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장점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아이와 중년 여성이 일행이니 남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랜 종살이로 왕국민들 기분을 살살 띄워주는 것에 특출한 재주가 있는 구더기는, 남들에게 니카를 어릴 때 주인집에서 삯 받아 일하며 불을 때다가 얼굴 반을 녹여 먹은 늦둥이 동생이라고 소개해 위장신분을 만들어주기까지 했다.
니카도 집시들처럼 흑발인 데다가, 용인의 비늘이 돋친 왼쪽 얼굴까지 옷가지로 칭칭 둘러싸고 나니 이 모든 이야기가 무척 그럴싸해졌다. 니카가 눈을 내리깔아 파충류처럼 특이한 동공을 잘 감추기만 하면 별문제가 없었다. 사난타 성에 들어가는 것도 이것과 비슷한 작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남쪽 원숭이 새끼들이 사난타까진 무슨 볼일이신가?”
“일을 구하려고 왔습죠, 나리.”
멀뚱히 버티고 선 니카의 머리채를 구더기가 꾹 눌렀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같이 조아리게 되었다.
“아서라, 아줌마. 젊은 애들도 벌이가 별로라는데 아줌마 같은 늙다리는 돈 줘도 안 먹어.”
“예, 예, 그럼요. 그럼요.”
“안 먹긴? 또 별식이야.”
“킥킥, 더러운 새끼.”
구더기는 니카의 머리 위에 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정작 본인은 듣고 넘기는 희롱에 오히려 더 심한 모멸감을 느낀 니카가 눈을 세모꼴로 뜨고 입술만 움직여 욕설을 뱉었다.
‘이거 치워라, 구더기. 저 더러운 놈들이….’ 까지 말하는 것을 눈으로 헤아리던 구더기는 웃음이 나는 것을 참았다.
“아가씨들 시중 들 늙은이도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이불빨래하고, 청소하고, 네?”
“이 멀대랑 저 조그만 건 뭐고?”
“저 아이는 전쟁고아인데 마음이 아파서 거둔 놈입니다. 제가 잃어버린 아이도 지금껏 살아있었다면 저만큼 컸을 겁니다….”
눈가에 침이라도 바르시지. 니카는 생각했다. 얼마나 청산유수였던지 음담패설이나 일삼던 경비병들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리고 시선은 하염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이놈은 제 동생입니다. 저와 같이 머슴살이하며 입에 풀칠해야지 별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 얼굴 반이 불길에 녹았고 태어나기를 바보천치라서 어디 장가보내기도 글렀습니다. 제가 데리고 살아야죠.”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거야?’
“안 그러니, 모모.”
구더기의 팔꿈치가 니카의 옆구리를 쑤셨다. 니카는 이게 대체 무슨 놀음인지 몰라 주변의 눈치를 한번 살폈는데 그 어리숙해 보이는 시선이 오히려 구더기의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모모 이놈은 할 줄 아는 말이 없답니다.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게 아니라, 이 나이가 되도록 말을 배우지를 못해서요.”
이목이 니카에게로 모였다. 집시 혈통으로 보이는 검은 눈과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 더러운 헝겊으로 칭칭 감긴 왼쪽 얼굴.
“…….”
도통 욕지거리를 하는 일이 없는 니카는 간만에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했다. 뒤통수를 긁적이던 경비병들이 저희들끼리 눈치를 보다 손짓했다. 상처를 한번 들여다보자고 했으면 단번에 들켜버렸을 것인데 싱겁게 끝났다. 구더기는 연신 감사하다며 손에 쥔 동전을 몇 닢씩 그들 손에 쥐여주었다.
“흠, 뭐 집시치고는 경우가 있구만.”
구더기는 허리를 꾸벅이고 각 손에 니카와 코쿤을 이끌며 걸음을 옮겼다. 얼떨떨하게 그녀를 따라가는 니카에게 안쓰럽다는 시선이 달라붙었다. 경비병 중 하나가 “야, 병신. 잘해라. 우리 누나 생각나게 하네.” 했다. 니카는 기분이 상했다.
“…인상적이군.”
“칭찬으로 들을게요.”
구더기가 킬킬 웃었다.
“그런데 강 건너 잣자후에 가시겠다면서 왜 사난타로 오셨습니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편하게 갈 방법이 수도 없이 많은데요.”
“묻지 마.”
“말씀하실 수 없는 이유 때문이군요. 알아듣고말고요.”
그녀 말대로 강서지역의 수도로부터 강동까지 놓인 ‘거인의 돌다리’를 통하면 행로가 훨씬 수월했다. 그러나 그곳은 오랜 내전으로 경계 태세가 삼엄해서 니카처럼 얼굴이 알려진 인물에게는 너무 위험했다. 대공이 얼마 전 다르탈루 강 서쪽으로 왕자의 세력을 몰아내고 진영을 강줄기 기준으로 양분한 시점부터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돌다리를 넘어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돌다리가 아니더라도 강변에는 크고 작은 성들이 즐비했다. 훨씬 나은 선택지들이 많았다. 니카는 대공군을 만날 염려 탓에 북쪽으로 우회해야 하는 상황이라 사난타를 떠올리게 된 경우였다. 사난타는 다르탈루 강의 강폭이 좁고 유속이 빠른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대공 측의 감시는 탈타르 이남과 돌다리 인근에 비하면 무척 덜한 편이었는데, 이것은 사난타가 공공연한 무법지대인 영향이 컸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군….”
“전에 사난타에 와본 적 있으십니까?”
단순히 와본 적이 있다기엔 애매했다. 잠깐의 고민을 거친 뒤에 대답이 나왔다.
“그래.”
“민란 전에요? 민란 이후부터 바뀌기 시작했거든요. 기억하고 계신 게 그때 모습이라면 놀라울 수밖에요.”
그 민란을 진압한 것이 바로 니카였다. 클라텐 탈타미오로부터 시작된 생각이 바란에게 이어지지 않도록 갖은 애를 쓰는데, 위로부터 색종이 조각이 날아들어 눈꺼풀 위로 붙었다.
“많이 변했다고들 하더군요.”
구더기가 웃으며 색종이를 떼어냈다. 입김을 불어 날리니 가벼운 종이는 곧 바람을 타고 하염없이 위로 날았다. 니카는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얼뜨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귀족인가?”
2층의 테라스로부터 던지는 구슬과 색종이 조각이 거리를 어지럽게 물들였다. 니카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남자였다. 황금을 녹여 바른다 해도 저렇게 부자 태가 나기는 힘들 것이다.
“가면을 쓰고 있군.”
“나리, 그렇게 티 나게 쳐다보지 마세요.”
니카는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예. 귀족 맞을 겁니다. 가면 쓴 사람들은 대개 탈타르에 상주하는 대공파 귀족이든지 그 이남의 촌 동네에서 놀 거리 찾아 올라온 시골 놈들이니까요.”
민란 이전에 사난타는 탄광촌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며 벌목업자들이 많아서 거칠고 활기찬 분위기였다. 반면 지금은 탈타르의 귀족들을 겨냥한 환락의 위성도시가 되어 있었다.
대공 세력의 금전적 주축인 랜달 상단이 사난타에 도박장과 유곽을 세우도록 허가를 받고 성내에 집창촌을 형성하면서부터 사난타 성 전체가 환락가처럼 변한 지는 고작 이 년이 되었다고 했다.
“내전이 길어지면 다들 긴장감에 익숙해져서 경계심을 잃기 마련이죠. 암만 정신이 나간 것들이래도 대공이 있는 탈타르 안에서 흥청망청 놀 수는 없을 테니 배출구를 찾은 거 아니겠습니까.”
니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손익을 헤아리는 상인들에게는 전쟁이 커다란 수익 창출에 불과하다 했던가. 누군가의 고통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일을 니카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안쪽으로부터 내다본 성벽에는 오 년 전 클라텐 탈타미오가 주축으로 있던 민란과 그 소탕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니카는 가려지지 않은 오른쪽 눈으로 성곽을 올려다보았다. 불에 타던 흔적과 핏자국이 아직도 완전히 씻기지 않았다.
반동분자의 뿌리를 뽑아 본보기를 보이라는 명령에 따라 민란에 가담한 자를 전부 죽였던 탓에, 사난타의 인구구조는 기형적이었다. 검을 들 수 있을 법한 남자들을 전부 꼬챙이에 꽂아 걸어놓고 나니 성안에 산목숨이라곤 어른 무릎에 키가 못 미치는 어린애와 여자, 몸도 못 가누는 노인이 다였다.
남은 백성들은 돈이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저 물살이 빠른 강가의 어민들도 돈을 쥐여주면 위험을 무릅쓰면서 서쪽 강변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 * *
울퉁불퉁한 손가락이 나무로 짜인 협탁을 거칠게 두드렸다. 자칫하다간 그렇게 협탁을 부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유곽 외로는 관광객이 없는 사난타 성에서 민박을 구하기만도 힘들었는데, 없는 주머니를 털어서 협탁 값을 물어낼 생각을 하면 아찔했다.
구더기는 힐끔대며 니카의 눈치를 보았다. 니카의 입술 밑으로 질끈 수축한 근육이 흉흉한 기세를 더했다. 노성을 내지르기 일보 직전이었다. 코쿤은 게걸음을 걸어 구석진 벽에 등을 대고, 이내 거기 처박혀서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구더기는 코쿤의 앞을 어미닭처럼 가로막았다.
“나리, 어쩔 수….”
“어쩔 수 없다고?”
니카가 고개를 홱 들었다. 분노에 좁혀든 동공이 오줌을 지리게 만들 만큼 서늘한 기세를 뿜어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도 강을 건널 수 없다는 것은 니카가 고려한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뱃삯이 터무니없잖아! 여기까지 와서 발이 묶이다니!”
“그…. 어민들도 목숨값은 챙겨야지 않겠습니까.”
구더기가 어민들 입장을 대변하려 들었다. 니카가 신경질을 냈다.
“물살이 아무리 빨라 봤자 목숨값이랄 게 뭐 있나. 배나 빌려주고 노나 저으면 될 것을.”
“몰라서 그러십니까?”
구더기는 냉철하다가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청년처럼 구는 니카를 볼 때마다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기 어려웠다.
“뭘 말이냐.”
“순찰을 돌던 대공군이 밤중에 출항했다는 이유만으로 간자로 몰아 불화살을 쏴대는 일이 비일비재하답니다. 당번을 맡는 병사들에게 특별히 뒷돈을 먹이지 않고서는 강 건너기가 불가능해요.”
니카도 매한가지로 구더기를 이해하지 못했다. 분명 사난타 성에 발을 들인 게 처음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데, 성안에 발을 들인 후 만 하루 동안 갖가지 정보를 물고 돌아왔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알아오는 거지?”
“집시들만의 방법이 있지요. 저야 뭐, 집시 중에서도 혓바닥 수완이 좋은 편이고요.”
“아, 그러시군!”
“나가 있겠습니다. 흥분하신 것 같네요.”
“대단하시군, 모르는 게 없어.”
코쿤을 일으켜 방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구더기는 의뭉스럽게 웃었다. 제 발로 밖으로 나서주니 다행이었다. 지금은 구더기의 손때 묻은 두건이나 묶어 늘어뜨린 검은 곱슬머리까지도 니카 눈에 전부 다 거슬렸다. 니카는 꽁무니를 빼는 그녀의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또 별이라도 읽었나 보지, 안 그래!”
손바닥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넘겼다. 걸음이 어지럽게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수리 왕녀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일분일초가 지날 때마다 가슴이 급히 뛰고 피가 차갑게 식었다. 목표를 눈앞에 두고 좌절하는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니카는 수리 왕녀와 이렇게 오래토록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었다. 불안증이 시시때때로 도졌다. 니카의 손톱은 수없이 깨물려 벌써 닳아빠졌다.
여관 안에 있던 인원을 저 둘 빼고 몰살하고 빠져나온 이후, 니카는 간신히 청한 쪽잠마다 똑같은 악몽을 꾸었다. 피로 된 늪에서 발버둥을 칠수록 깊이 빠져들어 익사하는 꿈이었다.
마지막에 머리채를 붙잡혀 바깥으로 끌어내지고 숨을 몰아쉬면 귓가에 잔악후작의 목소리가 ‘안녕.’하고 속삭였다. 뱃가죽이 갈라져 내장을 쏟아내는 괴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경, 날 좋아한다며?’
대공이 바란에게 했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꿈속 바란은 사랑스럽다는 듯 웃으며 니카의 머리채를 피의 늪 안쪽으로 꽂아 넣었다. 니카가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스스로 진정시키기까지는 수 분이 걸렸다.
어떤 신비한 방법을 쓴 건지 몰라도 구더기는 그 순간을 정확히 알아냈다. 얄밉게도 냉정함을 되찾았을 때 즈음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문틈으로 구더기의 주름진 눈매가 한껏 웃으며 니카를 엿보았다.
“여관에서 챙긴 물건들이 좀 있지요. 그 댁 마나님이 쓰던 싸구려 목걸이와 장식용 단검 말고는 대단한 게 없지만, 내다 팔면 그것도 다 돈 아니겠어요.”
* * *
“정지!”
선두에서 가볍게 손바닥을 들어 보이자 바닥을 차던 말 떼가 일사불란하게 멈추어 섰다. 대공은 제일 먼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투구를 벗었다.
“오늘은 여기서 노숙한다.”
기사들은 하나 둘 씩 흩어져 물자를 확인하거나 말의 건강을 살폈다. 일부는 노숙을 위한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남서쪽으로 탈타르를 향해 말을 달린 지 닷새째 되었다.
‘아니, 일주일이 됐나? 잘 모르겠군.’
입술이 하얗게 말라붙은 바란의 얼굴에는 땟국이 줄줄 흘렀다. 레이먼드라고 상황이 더 낫지는 않았다. 강행군에 익숙한 정예기사들 사이에서 부상자와 집사, 두 사람은 늘 눈에 띄게 뒤처지곤 했다.
“후작님, 피. 피.”
“아…. 어쩐지 축축하더라니, 젠장. 오줌이라도 지린 줄 알았네.”
뱃가죽을 감싼 복대에 도끼 자국처럼 피가 배어 나왔다. 이젠 정말 고통스럽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몸 앞쪽에 감각이 없었다. 자신이 아픈 것도 아니면서 레이먼드는 눈살을 찌푸리고 펄쩍 뛰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더러워서 내가 진짜.”
“이거 꿰매야 돼. 윽…. 터졌어.”
“알겠어요. 알겠어요! 근데 뭘 어떡해야 하죠?”
“바늘과 실.”
“바늘과 실, 그래요. 알겠어요. 이제 진짜 알겠어요.”
레이먼드는 제자리를 황망히 돌다 말고 번쩍 정신이 들어 제 봇짐을 맨 말에게로 달려들었다. 바란이 밭은 호흡법으로 간신히 숨이 넘어가지 않도록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지 대공이 또 해맑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커다란 손안에서 사과를 굴리더니 한 입 깨물어 먹었다.
“그간 운동 소홀히 했나 봐요.”
바란의 이맛살이 수 겹으로 접히고 숙인 고개에서 파란 눈만 쨍하게 빛났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말 좀 탔다고 숨이 차 보이길래. 그래서 내가 평소에 늘 얘기했잖아요. 침대 위에서 허리 흔드는 것 말고도 운동을 좀 하라고 말이야. 뭐, 물이라도 줘요?”
“괜찮습니다.”
“정말요? 좆물 아니고 진짜 물 얘기였는데.”
‘개새끼. 언젠가 가만 안 둔다.’
얌체처럼 빈정대며 물이나 권하는 주제에 저깟 농지거리를 하니 순간적으로 꼭지가 홱 돌았다.
“후…욱, 레이먼드.”
분노를 겨우 참아낸 바란은 대공의 말을 무시하고 집사를 찾았다. 양가죽 물주머니를 손에 든 대공의 턱 아래 근육이 질끈 수축하는 게 보였지만 이 역시도 무시했다.
“레이먼드!”
“네, 후작님. 갑니다.”
와락 소리를 지르자 레이먼드가 풀어둔 짐들 중에 반짇고리를 들고 헐레벌떡 돌아왔다. 얼른 갈고리처럼 휜 바늘귀에 실부터 꿰는 레이먼드를 보니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바란은 벌어진 상처를 무식하게 짓누르며 손을 허공에 둥글게 휘저었다. 정신 차리라는 뜻이었다.
“불, 불. 먼저 달궈.”
“아차.”
레이먼드의 실수에 뭐라고 더 핀잔을 주고 싶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느라고 말을 못 했다. 레이먼드는 다시 부싯돌을 찾겠다고 허둥지둥 사라졌다. 완벽주의에 빛나는 레이먼드도 안 해본 일 앞에는 장사 없었다. 곁에서 상황 돌아가는 걸 지켜보던 대공이 레이먼드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같았음 해고했어요.”
“해고만 하셨겠습니까.”
“저 친구 눈, 귀, 팔, 다리를 잘랐겠죠. 고환도요.”
농담의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워 눈을 부릅떴다. 대공은 오히려 자신이 더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걔넨 다 두 개씩 달렸잖아요. 하날 없애는 건 채찍, 하나를 남겨주는 건 당근. 엄격하면서도 자비로운 제왕의 모습…. 이해가 가려나요?”
턱을 괴고 바란의 신음소리를 감상하던 대공이 먹다 남은 사과를 홱 던졌다. 대수롭지 않게 손을 휘두른 것 치고는 포물선이 길게 이어졌다. 과즙에 더럽혀진 손을 바지춤에 대충 닦고는 레이먼드가 두고 간 바늘을 집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린 바란이 고개를 저었다. 슬쩍 앉은 자리에서 몸을 뒤로 물렸다. 대공의 억센 손이 바란의 목덜미를 붙잡아 안으로 당겼다.
“괜찮습니다.”
“안 괜찮으면서. 또 거짓말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아윽!”
“조금 따끔해요.”
‘조금? 조금이라고?’
바란은 눈을 아래로 굴려 뱃가죽을 깊게 뜨고 나온 바늘을 보았다. 과장 좀 보태서 거의 내장을 찌를 뻔했다. 대공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늘을 연신 처박아 이상한 모양의 바느질 기법을 살가죽에다 실험했다.
“아하하…. 이상한 표정 하고 있네요?”
상처를 후벼 파 만들어낸 하트 무늬까지 확인하고 바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앓는 소리를 내봤자 좋아할 것이 분명하니 애써 어금니를 꼭 붙였다.
‘개같이도 꿰매는군.’
다급히 제자리로 돌아오던 레이먼드가 바란이 당하는 꼴을 보고 성호를 그으며 두 손을 꼭 맞잡았다.
* * *
니카는 앞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이좋게 걷는 구더기와 코쿤을 흰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건지 구더기가 뒤를 돌았다. 그녀가 눈썹을 들썩일 때마다 이마의 어지러운 문신이 모양을 바꾸며 춤을 추었다.
“따라오실 줄 알았습니다.”
“모든 일을 내다보는 것처럼 말하는군.”
“별을 읽으니까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중천이었다. 집시들의 신비주의에는 이골이 났다. 니카가 못마땅해하자 구더기는 어깨를 으쓱이며 태양이 떴다고 별이 자리를 아예 비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잘난 재주를 갖고 노예 노릇이나 하며 살았나?”
“다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편리한 재주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퉁명스럽게 말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어쨌건 걱정이 돼서 쫓아 나오신 거 아닙니까.”
구더기는 종종 니카가 그녀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니카는 그것이 신경에 못내 거슬렸다.
“사람의 진실을 보는 방법을 아십니까?”
“아쉽게도 누구처럼 눈이 밝지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나리.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지요. 그냥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면 돼요. 꾸며낸 것은 오래 가지 못하지요. 입술은 머리통과 너무 가까워서 자꾸만 영악한 재간을 부리지만, 몸은.”
주름지고 거친 손길이 니카의 등 뒤로 다가왔다.
“몸은 계속 신호를 보내요. 나리께서도 암만 칼을 디밀고 죽인다 하셔도, 걱정이 돼 이렇게 따라 나오신 걸 보면 상냥한 분이십니다.”
“…내 돈 걱정일 뿐이다.”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서도 그들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이유는 도시 안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환락가의 화려함에는 항상 그늘이 있기 마련이었다.
지금 수중에 돈을 벌 구석이라고는 구더기가 품에 안은 저 물건들밖에 없었다. 중년 여자와 빼빼 마른 어린애 단둘이 물건을 지키도록 해서 내보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정당한 값을 받아 거래를 끝마친다 해도 돈주머니를 들고 민박까지 돌아오는 길에 열 번도 더 강도를 당할 것이다.
골목골목마다 들어찬 늙거나 아주 어린 거지, 그리고 부랑자들이 발목을 잡아서 곤욕을 치르기 쉬웠다. 크고 작은 말다툼과 강도, 소매치기가 니카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얘야, 한 푼만 다오.”
“나리…. 젖이 말라 갓난애가 굶주리고 있습니다요. 이봐요. 나리! 나리! 그냥 지나가지 마세요. 씨발, 같이 좀 살자고요. 내 말 안 들려요? 신이여, 저 이기적인 자를 저주하소서!”
니카는 만만한 집시 여자와 어린애에게 쏟아지는 저주의 말을 뒤에서 가만히 듣다 말고, 결국 자리를 옮겨 그들의 옆에 버티고 섰다. 킥킥대는 구더기의 웃음소리를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니카는 그녀에게 험악한 시선을 보냈다.
“내가 너희를 살려두는 건 알량한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농담하는 걸로 들리나, 집시?”
장검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기 때문에 지니고 다니려면 꾀를 써야 했다. 니카는 서툴게나마 절름발이 행세를 하며 검으로 땅을 짚고 다녔다. 곰팡이와 때가 낀 헌옷으로 둘둘 감싸서 흙먼지를 뒤집어쓰면 수상스럽더라도 당장 눈길이 향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마지막 경고다.”
지팡이 끝자락이 허리의 옴폭 들어간 곳에 닿자 구더기가 침을 꼴깍 삼켰다.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참에 니카가 검을 또 한번 바짝 힘주어 밀었다. 니카가 원하던 대답이 튀어나왔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리.”
침묵 속에 걸음이 이어졌다. 구더기는 조악한 판자와 악취로 뒤덮인 골목을 한참 누볐다. 사난타 성에도 초겨울이 다가오는 건 마찬가지였다. 휑한 바람이 몰아쳐 옷자락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누비옷은 귀티가 나 시선이 몰린다며 숨겨두는 바람에 추위를 타는 니카는 더 죽을 맛이었다.
“잠깐 맡아주련.”
“응, 아줌마.”
구더기는 허름한 판자로 때워진 골목의 대문 앞에 멈춰섰다. 패물이 든 자루는 코쿤에게 넘겼다. 키가 작은 코쿤은 이 무거운 자루를 들기 위해서 두 팔을 공중에 쳐들어야 했다. 니카는 자루를 들어줄 테니 넘기라는 눈짓을 해 보였다. 아이는 그래도 요지부동이었다.
“고집을 부리는군.”
“남이사…. 고집을 부리든 말든….”
투덜대는 소리가 귀에 다 들렸다. 들리는 줄 알고도 객기로 그리 가시를 세워 말했던 것이었다. 막상 말을 뱉어두고 나니 니카의 보복이 두려운지 코쿤의 낯빛이 안 좋았다. 니카가 어린애에게까지 해코지할 위인은 아니었으나 아이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구더기의 손등이 규칙성 있는 리듬을 만들어내며 대문을 두드렸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볼 뿐 니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다. 니카는 손때 묻은 검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했다.
이윽고 대문이 열렸다. 길바닥에 널린 썩어빠진 널빤지와 다름없는 생김새인데 녹슨 경첩이 박혔다고 문이 되다니 니카는 어쩐지 우스웠다. 문이 열리자마자 맥주잔 절그렁대는 소리, 술주정뱅이들의 웃음소리와 높고 째지는 매춘부의 목소리 등의 소음이 시끄럽게 뒤섞여 흘러나왔다.
널빤지 대문 안쪽으로부터 집시 남자가 고개를 빼고 바깥을 내다봤다. 니카와 가장 먼저 눈이 마주쳤고, 그런 다음에 점차 시야를 앞으로 당겨 구더기를 바라봤다.
“왔군.”
남자는 구더기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아마 여관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던 때 접촉했던 모양이었다. 구더기의 말에 따르면 집시들은 같은 민족끼리 끈끈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니카가 집시에 대해 아는 것은 그들 중 절반은 신비로운 일에 종사하고 또 나머지 반은 사기꾼들이라는 것뿐이었다. 상부상조 정신 같은 것은 들은 바 없으니 미심쩍었다.
“그때 말했던 일행이에요.”
“사내라는 얘긴 안 했잖소.”
남자는 좁다랗게 열린 문틈으로 애써 빠져나온 뒤에 땅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키가 작고 왜소한 남자는 남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시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꾀죄죄하고, 볕에 탄 살갗과 신비로운 먹색 눈.
그는 껄렁이는 태도로 니카를 흘겨보았고 니카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니카가 지팡이인 척 바닥에 짚은 검을 턱짓했다.
“다리병신인가?”
“보면 모르나.”
니카가 멀찍이서 대꾸했다.
“뭐, 상관없겠군. 물건은 가져왔소?”
코쿤이 이미 높게 치든 자루를 까치발을 들어 더 높이 들고 흔들었다.
“여기요!”
입에다 거미줄을 친 줄 알았는데, 코쿤은 빠릿빠릿하게 말을 잘했다. 제 딴에는 겁을 먹고 기가 죽어 있느라 그랬을 것이다.
니카는 그들을 살리면서 감시하고 단속할 입을 두 개나 늘리는 번거로움을 감당해야 했지만, 코쿤에게 니카의 노고는 정말 알 바 아니었다. 니카는 빈정이 상했다. 빈정이 상한 것은 집시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대감 서린 눈으로 자루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 한숨을 훅 내쉬었다.
“아, 유리로 만든 가짜 보석 장신구, 머리빗, 날 없는 검? 정말로?”
“민물진주 목걸이도 들었는걸요.”
“이보쇼, 아줌마. 이거 보이나?”
낯선 목소리가 섞였다. 굳게 닫혀 있던 판자문이 열리며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 하나가 더 나왔다. 남부인처럼 생기긴 했어도 집시는 아니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 구더기 쪽을 보았는데, 그녀 역시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니카의 눈치를 보았다.
“이거 보이냐고, 이 손가락. 내 귀여운 새끼손톱. 응?”
남자가 집시 사내를 뒤로 물리더니 혀를 찼다. 니카는 지금 당장 칼부림을 내는 게 좋을지, 아니면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할지 고민했다.
“진주는 이것보단 커야 돼. 이런 모래알처럼 짜잔한 놈들? 어림도 없지. 아무도 돈 주고 안 사. 돈 얹어줘야 생각 좀 해 보고 가져갈 수준이라고.”
“돌려주세요. 거래는 없던 일로 할 테니까.”
바람결에 펄럭이는 치마폭을 뒤로 감아 넘긴 구더기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 봐도 빤하군.’
니카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공중에 손을 탁 내저었다. 약 올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자는 슬금슬금 걸음을 뒤로 물렸다. 집시 남자가 낄낄대며 보조를 맞췄다. 니카는 구더기의 낯빛이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일족을 저버리다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일족’? 요즘은 그런 단어 안 써. 고리타분한 샤먼 노인네처럼 말하는 구만. 어느 미친놈이 집시임에 자부심을 느끼고 서로 돕는단 말이오? 순진하기 짝이 없기는.”
“이런 멍청한 년을 다 보네.”
니카는 냉소했다. 집시만의 비결이니 어쩌니 늘어놓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 알았다. 구더기가 집시의 질서 사이에서도 상류 계급에 속하는 여자라는 것은 진작 예상했다. 상류층에서 내려다 본 민족성과 인간군상이 현실과 가까운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구더기가 들려준 이야기 중 젊을 때 어머니인 우두머리 샤먼을 따라가다 납치됐다는 대목에서부터 그녀가 일반적인 집시로 자라나지 못했음은 명약관화했다.
북부의 작은 마을에 노예로 팔렸으니 수십 년 다른 집시는 만나지도 못하고 살아왔을 터였다.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노예생활의 반작용으로 강해졌을 것이고, 그 결과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결과가 이것이리라.
‘물론 다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표면적으로야 동행이지만 그들은 결국 니카에게 억류되어 입막음을 당하고 있었다. 특히 코쿤은 밤중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니카를 겁내니까. 그 아이에게 끔찍하게 상냥한 구더기라면 탈출을 위해 갖가지 꿍꿍이를 궁리했을 법했다.
“나, 나리.”
구더기와 코쿤이 주먹을 꼭 움키고 식은땀을 매단 채로 니카를 올려다보았다. 니카는 조용히 검을 감싼 천을 끌러냈다. 목숨을 앗지 않고 해결 볼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사난타까지 와서 용인기사에 대한 소문이 돌아서는 곤란했다. 환락의 도시에 시체가 굴러다니는 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돌려줘요!”
찬찬히 검을 풀어내던 중이었다. 저놈들이 킬킬대며 자루를 들고 사라질까 조바심이 났던 코쿤이 제 분수를 모르고 그 앞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낡은 천으로 된 자루를 잡아당기자 삐뚤빼뚤한 바느질이 뜯어졌다. 남부인 남자가 코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건방진 놈의 새끼가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그 손 놔라.”
“하하! 별 좆같은 경우를 다 보겠네?”
오랜 경험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대화가 흘러가는 순간 언어는 힘을 잃었다. 세상에는 주먹이 아니면 소통이 안 되는 종류의 사람들도 있다. 니카는 눈가를 살풋 찌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악!”
맨 손등인데도 건틀렛을 낀 것처럼 강력한 충격이 남자의 관자놀이를 후렸다. 단번에 맞은 곳이 부어올랐다. 니카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방금 전까지 머리가 버티고 서 있던 위치에 집시 남자의 주먹이 지나갔다. 실로 놀라운 수준의 무위였다.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하찮고 흔한 박투에 불과한데도 정교한 무술이 엿보였다.
“아…. 아줌마….”
코쿤은 구정물이 가득 고인 더러운 길바닥에 나앉아 멍하니 니카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말을 하려고 그대로 구더기를 올려다보았는데, 구더기의 표정은 어쩐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니카의 움직임을 쫓아 바쁘게 움직였다.
“이익, 이 병신이!”
동작이 너무 커서 무게중심이 주먹과 함께 쏠렸다. 유연하게 허리를 젖혀 남자의 커다란 주먹을 피한 니카는 무릎뼈로 고간을 걷어찬 뒤에 그를 무릎 꿇렸다. 절제된 동작이었다. 니카가 줄곧 손에 들고 있었던 검을 끌러내 남자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할 때였다. 이변이 일어났다. 니카는 멈칫 검을 내렸다. 그는 뒤에서 집시 남자가 벽돌을 집어 든 것을 보았으나 피하지 않았다.
“맙소사!”
니카의 머리통을 비스듬하게 때리는 벽돌을 보고 구더기가 비명을 질렀다. 다시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니카의 이마에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였다. 기절하거나 뇌진탕을 겪어야 마땅했을 니카는 두 눈을 멀뚱거리며 판자 대문을 나서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공의 표식.’
그래, 그곳에서 벅적하게 걸어 나온 이 남자들은 대공의 병사들이었다. 십 수 명의 병사들이 단번에 쏟아져 나오지만 않았더라도 니카는 남자 둘은 아무런 문제없이 해치워버렸을 것이다.
“이야, 잘 먹었다.”
“역시 고향의 맛을 내는 데는 여기밖에 없다니까. 북부 놈들처럼 싱거운 생선에다 흑맥주 걸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남부의 정통요리가 언제나 그리웠다고.”
“여기 있었군, 우리 집시 주방장! 자네 덕에 오늘도…. 저 비렁뱅이들은 뭐야?”
갑옷을 갖춰 입은 이 병사들은 다들 키가 작고 머리칼 색이 어두운 남부인들이었다. 니카는 다급히 다시 검을 천으로 덮어 쥐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남부인이 니카를 무릎 꿇리고 팔꿈치로 광대뼈를 갈겼다. 피하거나 막으려고 했다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니카는 저항 없이 얻어맞으며 검을 슬그머니 그들의 시야 멀리로 치우는 편을 택했다.
씩씩대는 숨을 몰아쉬며 남부인이 삿대질을 했다. 그가 퉤 하고 뱉은 침이 뺨에 철썩 붙었다 흘렀다. 니카는 질끈 이를 악물어 참았다. 달달 떨면서도 코쿤을 챙겨 구석으로 달아난 구더기에게 시선을 주었다.
‘집시? 상부상조?’
“씨팔, 좆만 한 게 누구 앞이라고 나대?”
‘헛소리를 믿는 게 아니었는데.’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고개를 얼른 아래로 처박고 눈만 데구르르 굴렸다. 남부 출신에 대공군의 갑옷을 입은 것을 보면 사사바란의 병사들일 것이다. 다 죽여 없애기엔 수가 너무 많았으며 정말로 그랬다간 시선이 모이기 십상이었다. 손가락만 빨며 집시 남자가 패물이 든 자루를 들고 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 *
“잠깐 괜찮으십니까?”
노크 소리. 반쯤 먼지가 된 죽은 파리들을 먼지떨이로 떨어내던 니카는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구더기이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과연 때 묻은 두건을 동여맨 구더기가 살랑살랑 손짓했다. 못 본 척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저 그런 집 거미도 아니고 손바닥 반만 한 크기의 거미들이 구석마다 쳐놓은 집, 썩은 고기 냄새와 찢겨진 커튼, 구릿구릿한 땀 냄새, 곰팡이, 어디서 새는지 모를 빗물이 고여 이룬 웅덩이, ‘향수’라고 이름 짓기 민망한 수준의 싸구려 향수, 깨진 유리와 잘게 찢긴 종잇조각, 인간의 온갖 구멍에서 쏟아져 나온 체액과 분뇨의 냄새.
“지금?”
난장판을 휘 돌아본 니카는 어깨를 으쓱하며 되물었다. 할 일이 그야말로 태산이었다. 그 날, 니카는 대공군이 난입하는 바람에 눈 뜨고 코 베이는 격으로 패물을 빼앗겨야 했다. 선금으로 지급한 숙박비를 빼면 빈털터리가 된 셈이었다.
병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검을 뒤로 감추고 나서, 니카는 한참이나 맨몸으로 주먹을 받았다. 남부인은 분이 오른 만큼 오래도 때렸다. 깨진 이마의 핏줄기를 닦아낸 니카는 텅 빈 골목길에다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눈을 부릅떴다. 배신감과 죄책에 몸을 떨던 구더기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아직 방법이 하나 남았다고 입을 뗐다.
‘제가 일자리를 좀 알아보겠습니다….’
그 결과 왕국 제일의 검사, 왕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셔 온 용인기사, 왕자의 검, 기타 화려한 수식어를 어깨가 무겁도록 단 니카 경이 고작 유곽에서 삯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티끌이라도 모아보려는 심산으로 구더기와 코쿤도 저희들 나름대로 할 만한 일을 구했다. 장정인 니카보다는 다들 삯이 대단치 않았다. 머릿속으로 셈하길 이대로라면 강을 건너기까지는 삼 주일은 더 일해야 할 성싶었다.
‘먹는 것을 아낀다면, 이 주.’
니카는 생각했다. 먼지가 많아 잠시 눈을 꾹 감고 입을 막거나 코를 틀어쥐었다. 영문을 모르고 니카가 하는 양을 바라보던 구더기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마침내 니카가 재채기를 했다. 왼쪽 얼굴의 비늘을 가리느라고 두건처럼 질끈 동여맨 더러운 헝겊이 순간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니카가 오묘하게 콧잔등을 찡그린 것을 보고 구더기가 한마디 했다.
“…재채기를 이상하게 하시네요. 보통 재채기가 온다 싶으면 다들 질끈 순응을 해버리는데. 재채기에도 반항을 하시는군요.”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붙인 말이었을 것이다. 니카는 이것을 매끄럽게 무시했다. 벽에 대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 여쭤볼 수 있다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리?”
근 칠 년여 간 손에 잡은 적 없는 자질구레한 잡일들은 원래부터가 그의 일이었던 것처럼 손에 착 들어맞았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하던 일이니 어색할 것도 없었다.
“말해.”
습관이라는 게 이래서 무서웠다. 니카는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구더기에게 용건을 묻는 순간에도 손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뜸 들일 거면 이만 가라.”
“정말 대단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남들이 들어서 좋을 것도 없는 얘기예요.”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봐?”
빗물에 썩어 내려앉은 지붕과 구멍 난 바닥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니카가 말했다. 유곽 건물의 가장 붐비는 중앙동으로부터 나무로 된 난간을 따라 복도를 한참이나 거닐어야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당연히 인적이 드물었다. 가당찮은 조심성이었다.
“여기서 말인가?”
“유곽에는 벽에도 귀가 있다고 하지요. 그게 신소리가 아니거든요. 이런 곳은 보통 정보를 팔아서 부수적인 이득을 올리곤 하니까요. 뭐,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겠습니까.”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마음이 컸다. 한숨을 쉰 니카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강 쪽으로 나 있는 낡은 발코니를 가리켰다. 니카가 청소해야 할 구역 중 하나였다. 거의 다 뜯어진 커튼을 잘 치면 그럭저럭 허공중의 밀실을 만들 수 있었다.
“저기서 얘기하지.”
집시 인맥을 통해 장물을 팔아넘기려다 실패한 이후로 니카의 안에는 구더기에 대한 의심이 싹텄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집시들 중에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구더기가 그 집시 주방장과 편을 먹고 니카를 물 먹여 떨어뜨려 놓으려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확실히, 니카는 구더기와 코쿤을 풀어주게 된다면 그에 관한 말이 돌게 될까 봐 밤낮으로 수고스럽게 그들의 행적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세간에서는 이것을 두고 납치나 억류 같은 살벌한 단어를 사용했다. 니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그런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 불쾌하리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연극을 벌이고 있는 건가?’
구더기같이 싹싹하고 잔머리가 좋으며 별까지 읽을 줄 아는 사람이 그깟 민족적 자부심 때문에 일을 망쳤다는 것보다는 훨씬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니카는 난간에 너무 기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자리를 잡고 섰다. 발코니는 다르탈루 강을 향해 나 있었다. 저녁이 되면 뭍을 향해 부는 강바람이 물비린내를 몰고 와 온몸을 서늘하게 후려쳤다.
입술을 두어 차례 벙긋거리던 구더기가 검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시선을 어지러이 굴렸다. 추위를 견디는 것만으로 적잖이 신경질이 나 있던 니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데.”
구더기가 망설이며 입을 뗐다.
“일은 좀 어떠십니까.”
“시시껄렁한 것 말고 본론부터 얘기하지.”
“아무렴 나리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니카가 평소처럼 차갑게 나오니 오히려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더기는 웃음 부스러기를 물고 난간에 기대어 섰다. 제정신이라면 저렇게 위태롭고 썩어빠진 목재에 무게를 실을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류하는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모른 체하는 것인지 몰라도 구더기는 느긋하게 난간에 어깨를 대고 두건을 고쳐 매는 여유를 부렸다.
“남부 출신이시죠?”
“그래.”
어릴 적 얘기는 니카가 좋아하는 화제가 아니었다. 니카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 겉으로는 이 대화의 효용성을 따지는 무시무시한 모습이지만 그 실상은 강바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체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구더기는 겁먹은 생쥐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혹시….”
뜸을 자꾸 들이면 이대로 다시 청소하러 돌아갈 생각이었다. 니카가 살며시 몸 방향을 트는 것을 보며 구더기가 다급히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여태 사, 사는 건 평안하셨습니까?”
“무슨 뜻이지?”
“용인, 그러니까 토룡 혼혈인은 흔하지는 않아도 남부 국경 근처에 가면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동네에서 나고 자라셨다니 그래도 북쪽 동네에서보다야 덜 박대당하셨을까 궁금해서….”
고작 이런 헛소리를 하려고 불러세웠을까? 속으로는 다른 속셈을 두고 떠보는 게 틀림없었다. 과연 곧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는 구더기의 안에는 불씨 같은 확신이 살아있었다. 니카는 그가 하는 대답이 저 불씨를 살려낼 숨인지 아예 꺼뜨릴 숨인지 알 수가 없어 망설였다. 구더기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바깥 사정은 모른다. 나는 갓난아이일 때 신전에 맡겨져서 자랐다.”
“예? 신전이 마수혼혈인을 받아줄 리 없습니다.”
“아, 받아줬다. 그리고 개돼지 취급을 했지.”
너무 많이 드러낸 상처는 언젠가부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상처가 아물었기 때문이 아니라 늘 아파 와서, 끝내 고통에 무뎌진 탓이었다.
니카에게 자신의 종족은 바로 그런 종류의 상처였다. 니카는 이것을 구태여 열어서 들여다보고 낱낱이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아픈 줄 깜빡 잊었던 것을 도로 상기해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할 얘기가 아직 남았나?”
이 말은 대화를 끝마치고 구더기를 내쫓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구더기는 니카를 그대로 보내주기는커녕 소매를 붙잡아 당기고 버텼다.
“무슨….”
노예생활을 오래토록 해온 여자였다. 니카의 심정을 그 대단한 눈치로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니카는 열이 확 뻗쳤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구더기가 고개를 저었다.
“나리, 제가 당신을 만나게 될 줄 썩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맹신도들 끌어모으려는 사이비처럼 말하는군. 안타깝지만 싸구려 선동에 넘어가 줄 수는 없다.”
“아, 그런 게 아니라요.”
니카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만큼이나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용인이었고 삿된 존재였다. 토룡의 비늘과 인간의 육을 동시에 입은 혼혈종이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종 간의 교배를 통해 태어난 생식능력도 없는 것….
‘너는 특별해.’
이 말을 갈망하던 철 들기 전 어린 니카의 심리가 어땠던가. 결함투성이인 스스로의 존재를 미처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군가 나타나서 그가 완전한 존재라 일컬어주기를 한없이 바랐었다. 그래서 잔악후작의 사탕발림에도 홀딱 넘어갔던 거겠지. 이 집시가 알랑거리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맥락이다.
구더기는 두리뭉실한 점괘를 던져서, 니카에게 ‘너는 특별한 존재다’ 하고 암시를 걸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교묘한 솜씨였다. 니카는 마음의 방벽을 단단히 쌓아올렸다.
“나는 나리의 별을 봤습니다. 미약하고도 밝은 별이 다가오는 걸 봤단 말입니다! 점성술에서는 그런 별을 두고 나그네 별이라 부릅니다. 그 별은 아주 먼 곳에서 미약하게 시작되면서부터 여행을 시작하지요. 유사 이래 이 별이 출현했던 때에는 매번 하늘의 판도가 크게 뒤집히곤 했습니다.”
‘무슨 속셈이지?’
불현듯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솟구쳤다.
“나리, 정말 평범한 용인이신 겁니까? 거대한 원한을 사거나 업보를 등에 진 기억은 없습니까?”
니카는 자신을 이야깃거리 삼는 구더기에게 끝내 이를 드러냈다. 그녀의 말이 얼마나 형편없는 헛소리인지 입증하려고 콧방귀를 뀌며 사납게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를 믿으라고 들이미는군. 집시를 믿는 건 얼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제가 사기꾼이라면 다른 집시 놈한테 사기를 당했겠습니까?”
“단 한번의 피해가 너를 온전히 결백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나마도 꾸며낸 것인지 모르는 일이고.”
구더기는 숨을 삼켰다.
“제가 그 얼어 뒤질 놈들하고 한 편이라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나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테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의심은 아니지. 너는 그 어린애를 끔찍하게 아끼니까 다소 위험을 감수했을지도….”
니카는 말을 하다 말고 뚝 끊었다. 눈이 크게 뜨였다. 예민한 코끝에 타는 냄새와 재가 된 목재의 향기가 실려 왔다. 번쩍 고개를 들어 강변을 내다보았다.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또렷이 보려고 노력했다. 높다란 목조건물…. 대공군의 초소였다. 초소가 불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코쿤이야 소중하지요, 제 아들 같은 놈인데. 제가 그놈을 몇 살 때부터 알았는데…. 하지만 그런 심산으로 당신의 자비를 배반하지는 않았습니다. 절대로요, 절대.”
아직 불길이 이는 것을 보지 못한 구더기는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 니카는 발코니 아래쪽, 또 유곽 중앙으로부터 흘러오는 소음과 수군거리는 말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냥 제가 나리께 해 드리고 싶은 말은…. 당신이 회오리바람 한 가운데 서 있다는 거였습니다.”
“…….”
“나라가 난장판 난 지도 시간이 꽤 흘러서, 사람들에게서 은혜, 자비, 도움, 그런 것들을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어졌죠. 하지만 나리는 다르세요. 나리께선 저희들을 살려준 데다가 동행으로 삼아주시기까지 했어요.”
“…….”
“당신은 선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나리, 왜 그러십니까?”
소란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구더기 역시 위화감을 눈치챘다. 말에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니카가 주변에 한눈을 판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구더기는 니카의 시야를 따라 주변을 서둘러 살폈다.
저 멀리서 불타고 있는 강가의 감시 초소는 이미 회복이 불가능하게 타오르며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이 가득 있던 유곽의 중앙에서는 아래로부터 비명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북소리가 니카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북소리는 점차 거대한 고동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살결이 떨렸다. 니카의 심장이 점차 저 북소리의 박자에 맞춰 뛰었다. 온몸에 전율이 일고 니카의 새카만 눈동자가 환희에 타올랐다.
니카는 곁에서 계속 뭐라고 말을 걸고 있는 구더기의 존재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며 난간에 바짝 붙었다. 머리칼이 강바람에 휩쓸려 흩날렸다. 구더기가 난간에 붙었을 때는 위태로워 보여서 눈살을 찌푸리던 니카인데 지금은 앞을 내다보느라 상반신을 바짝 빼기까지 했다.
사난타 인근은 강폭이 무척 좁아 날씨가 좋은 날이면 강 건너편이 보였다. 그렇게나 가까웠다. 여태 건너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던 수평선을, 니카는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 널따란 강의 물안개 낀 수평선 너머로부터…. 붉게 타는 횃불과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점차 구더기도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가까워졌다.
“왕자군이야.”
니카가 홀린 듯이 말했다. 구더기는 아래층의 소란에 집중하던 와중에 그 메마른 목소리를 확실히 들었다. 가쁜 숨으로 가슴 우리를 들썩이며 니카를 쳐다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겁에 질려있었다.
“코쿤, 코쿤을 찾아야 해요! 나리!”
“왕녀님.”
니카의 입술이 달싹이는 참에 발코니의 썩은 목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지끈 부러졌고, 구더기는 본능적인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뭐라고 소리쳐 부르든 간에 니카는 제자리에 붙박인 듯이 서서 저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탈타미오 성을 나서면서부터 잠깐이라도 미소지은 적 없는 니카의 입술이 서서히 기쁨을 머금었다.
“왕녀님….”
환희에 찬 탄식이 흘러나왔다.
* * *
“이봐, 이게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 나한테도 귀족의 품위라는 게 있다고.”
“…….”
“벌써 몇 시간 째 묵묵부답이야? 어린애처럼 잔뜩 골이 났군.”
사사바란은 험상궂게 찌푸린 얼굴로 바란의 몸통에 묶인 밧줄을 거칠게 당겼다. 엄살 부리는 것 같이 넉살 좋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바란 탈타미오는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 매를 버는 경우가 잦았다. 대공에게 험악하게 꿰매진 상처가 정말 고통스러울 것을 아는데도, 달틴 사사바란은 그에게 동정은커녕 얄미운 마음만 들었다. 피식대며 웃는 소리에 신경질이 날 대로 난 사사바란이 바란을 모질게 이끌었다.
기실 속에 쌓인 것이 있기도 했다. 사사바란은 충성스럽게 심지가 곧은 기사인 반면에 그 사고회로와 자부심의 원천이 단순했다. 교활한 여우 같은 바란이 곁에서 꼬리를 살랑대는 것에 넘어가 탈타미오에서는 큰 실수를 범했다.
그 탓에 사사바란은 대공의 심복이 되어서 왕녀의 용인기사를 놓치는 데 일조한 꼴이 되지 않았던가. 밧줄을 끌어당기는 움직임이 거친 것 정도는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도착하긴 했군. 탈타르에.’
이미 예고된 바 있던 강행군이었다. 대공에게 뱃가죽이 누더기처럼 기워지던 날 이후로 이 주가 채 안 되는 시점에 대공의 일행은 탈타르의 성문 앞에 당도했다.
‘무슨 도살장 끌려가는 소도 아니고. 남들 보기 부끄러워서, 원.’
여정 중에 줄곧 남창이나 장난감 취급을 당했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나름대로 후한 대접이었던 듯했다. 더 나빠질 여지가 있었다니 놀라웠다. 탈타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바란은 죄인의 신분을 드러내기 위해 초라한 모습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대공과 그 정예기사들이 맨 앞에 나서 말을 몰았고, 바란은 사사바란 경과 함께 행렬의 끝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귀족에 대한 예우라고 말은 타게 해 주니 눈물 나게 고마운 심정이었다.
물론 예우라고 해봤자 몸통에 밧줄을 두른 채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는 게 남들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는 뻔했다. 아마 이런 입소문을 타리라.
‘잔악후작 바란 탈타미오, 대공의 장난감에서 가축으로 그 직위가 향상되어 코뚜레만 안 뚫은 송아지 취급을 받기 시작하다.’
오래토록 이어진 내전에서 단 한번도 강서지역에 있는 수도를 차지하지 못했던 대공에게 있어서 탈타르는 정통성만 없다 뿐이지, 사실 상의 수도나 다름없었다. 대공의 거점으로서 번영해 온 탈타르는 귀족들이 다수 머물고 있는 만큼 다른 어떤 성보다도 잘 닦인 기반시설과 화려하고 다소 사치스럽기까지 한 분위기가 있었다.
행렬의 좌우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깨끗한 옷과 혈색 좋은 얼굴을 한 이들이었다. 아름답게 치장한 아가씨와 치기 넘치는 젊은 귀족 청년이 쌍을 이룬 모습이 자주 보였다.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칠 년간의 전쟁이 전부 거짓인 것처럼 느껴지는 두터운 평화가 탈타르 안에 꽃피고 있었다. 귀족들이 벌이는 전쟁에 정작 죽어나는 것은 아랫것들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였다.
“헬린 힐벤, 지상의 용!”
“만세!”
“합당한 왕!”
주변에서 환호와 박수소리, 지상의 용을 연호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성군이라도 맞이하는 듯한 열렬한 환영이었다. 바란은 냉소했다.
“잔악후작!”
가끔 저렇게 바란의 이름을 연호하는 낭만에 젖은 아가씨들이 하나둘 정도 있었다. 미끈한 얼굴이 칙칙한 사정을 입으면 그런대로 멋을 갖추기 마련이었다. 지친 표정으로 말을 타고 지나던 바란은 군중 속 그의 이름을 부른 여자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란의 반응에 힘입어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아, 후작님! 탈타미오 후작님!”
등을 돌리고 나니 바란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소만이 남았다.
‘아쉽지만 그 잔악후작이 실은 남색가거든. 참한 신랑감은 다른 데서 알아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볼을 뚫을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달틴 사사바란 경이었다. 바란이 왜 그러냐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자 한심하다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란도 억울한 마음이 차올랐다.
“아직 그거 갖고 토라져 있어? 밖에 나가게 충동질했던 걸로? 경, 정말 이럴 거야?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덩치 큰 기사는 우락부락한 팔뚝으로 꼭 욱여 잡은 새끼줄에 힘을 더 강하게 줬다.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다시는 바란의 혀 놀림에 넘어가지 않으리라 마음속으로부터 바짝 경계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바란은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도 타고나기를 사교적인 성격인 만큼 상대가 무시로 일관하는 것에는 질색을 했다. ‘니카 경’에게 줄곧 무시당했던 경험이 일종의 아픈 기억으로 작용하는 것도 있었다.
달틴 사사바란이 그의 말에 대해 짧은 대꾸도 없이 무시하자, 바란은 곧장 서운한 기색을 드러냈다. 새파란 눈을 뜨고 올려다보며 따지듯이 말했다.
“그런 일이 생길 줄 난들 어떻게 알았겠어? 나는 그냥 당신이.”
“달틴 사사바란입니다.”
“그래, 달틴 경이.”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바란은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사바란 경이 말이야. 잘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귀띔해주려다가 일이 틀어진 거지. 하필 그 시점에 용인기사가 거길, 지나가던, 중이었을 줄이야….”
점차 말끝이 흐려지다가 목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가시를 삼킨 것처럼 목 안이 따끔거렸다. 가시, 그래. 바란의 온갖 기억의 연장선에 니카라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듣든 간에 사랑하는 니카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라 마음을 헤집고 바람구멍을 냈다.
니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잊어버려서, 바란은 니카의 검에 맞아 나뒹군 뒤로 얼마나 되었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약 스무날이 걸렸으니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니카는 이미 강을 건너 왕녀가 있는 잣자후에 도달했을 것이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바란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실 진짜 고민은 이런 게 아니었다.
니카가 그들이 함께한 시간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고 태연하게 넘겨버릴까 두려웠다. 미워하게 되어도 괜찮다던 그 간절함은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바란은 간사한 조바심을 냈다.
‘이제 내게는 아주 작은 가능성이나 여지도 남기지 않았을까? 나를 좋아하게 될 일은 영영 없을까?’
바란은 욕심과 의무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덩어리였다. 시인들이 아름답다고 추앙하는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바란의 안에서는 늘 이기적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이것이 욕망인지 사랑인지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사사바란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았다. 바란은 그때 입은 부상 위를 한 손으로 매만지며 돌연 정신을 팔고 있었다. 숨을 참고 있는지 어깨가 들썩이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
“이보세요.”
“아파.”
정말이지 곱상한 얼굴이었다. 처음 후작위를 잇고 나서 사교계에 발을 들였을 때 영애들 사이에서 곧장 화제가 되었다던 얘기 값을 했다. 그냥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술을 꾹 물고만 있어도 어지간한 것은 다 얻을 재간이 있었다. 그 이목구비 위로 처연한 분위기가 얹히고 나니 사사바란은 저 군중 속에서 잔악후작에 열광하던 사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서 그래. 신경 쓰지 마.”
탈타미오 후작은 그런 다음에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게 목을 펴고, 어깨를 바깥으로 당긴 다음,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말에서 돌연 굴러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었다. 사사바란은 곁에서 내심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가도를 지나 말을 몰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오는데, 여기부터는 행인이 드문 대신 잘 치장한 마차가 위아래로 자주 오갔다. 전세가 압도적인 수준으로 대공에게 기운 이후부터 영주성에서는 작은 연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귀족들이란 본래 서로 어울려 사교하기를 본능으로 아는 종족이었다.
대공의 검붉은 갑주를 본 마차들은 다 길가로 비켜나 대공에게 경의를 표하며 길을 내주었다. 덕택에 행렬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영주성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섬세한 양각의 넝쿨무늬가 인상적인 영주성의 아치형 입구에 도착하자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바란이 사사바란을 돌아보았다.
“경은 내가 저 안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아?”
“…….”
“알면 미리 귀띔 좀 해줘. 저 늙은이들이 여간 꼬장꼬장해야지, 정말. 일단 머리를 베어야 한다는 의견부터 나올 것 같은데,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대공 전하께선 당신이 아직 쓸모 있다고 여기시는 모양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대공을 맞이하는 수많은 가신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뒤에 도열한 종자들이 하나씩 달라붙어 기사들의 갑옷을 끌러내고 말을 끌었다.
“이 정도면 도움이 되었습니까?”
바란이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도무지 말에서 내릴 기색이 보이지 않자 사사바란이 그를 노려보았다.
“도움이 됐고말고.”
바란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 * *
그렇게 남 눈치를 안 보는 힐벤 대공조차도 마냥 제멋대로 굴지 못하는 상대들이 있었다. 물론 이 왕국의 권력을 제멋대로 갈라 나누어 먹은 대공파 고위귀족들 얘기였다.
사사바란 공작을 필두로 하는 늙은 귀족 집단은 대공의 의사결정에 의견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각기 대공에게 유의미한 전력을 제공하고 있었다.
대공은 승전축하연회에서 돌연 정예들을 모아 비밀리에 탈타미오 영지로 출타했다. 물론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이해타산에 밝은 귀족들에게 있어 전쟁은 주판알 튕기는 긴박한 게임판이었다. 대공에게 판돈을 건 이들 입장에서는 이런 식의 돌발행동이 달가울 리 없었다.
회의장에 내려앉은 분위기는 심란함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으로 간밤에 왕자군이 사난타 성을 기습해 점령했다는 전령이 당도한 참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긴 하셨습니다만….”
레널드 백작이 잘 다듬은 콧수염을 신경질적으로 가다듬었다. 그는 수염에 기름을 발라 모양을 냈는데, 중간중간에 손끝으로 뾰족하게 해주어야 길이 들기 때문에 저런 버릇이 있었다.
“전선을 비우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지도자 된 사람이 그렇게 즉흥적으로 굴어서야 어떻게 마땅히 한 나라를 다스린단 말입니까?”
“위험한 발언일세, 백작.”
날만도 남작이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나 백작의 말에 다들 동감하는 바가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회의가 소집된 홀 안에 미리 자리 잡고 있던 귀족들은 각기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위험하지, 암. 당장 그 자리에서 모가지가 비틀어져 고꾸라지고 싶지 않음에야 어느 신하가 주군의 흠을 잡는단 말인가?”
“사, 사사바란 공.”
“자네도 똑같아, 아주. 레널드 백 저놈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걸 가만 보고만 있었다는 건, 결국 놈한테 동의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한소리 들은 데덴포 남작이 앓는 소리를 내며 꼬리를 말았다. 나이가 지긋한 사사바란 공작은 다리를 절면서도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와 착석했다. 그를 부축하는 것은 넷째 아들인 티렌 사사바란 경이었다.
사사바란 공이 위풍당당한 위엄이 넘치는 갈색 눈으로 좌중을 쭉 훑었다.
“생각 없는 분이 아니시라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일세.”
“크흠….”
기실 대공이 돌연 동쪽으로 떠났다는 보고에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느냐며 시종을 다그쳤던 것은 사사바란 공작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귀족들과 그 사이에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대공에게 바치고 있는 신뢰였다.
“내가 사사바란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는데, 헬린 힐벤 전하는 항상 깊은 뜻을 가지고 움직이시는 분일세. 응?”
“대공 전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마침 오셨군그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중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대리석으로 된 매끈한 바닥을 울렸다. 시종이 매끄럽게 붙잡고 열어 둔 문 너머에서 빙글대는 웃음을 지으며 힐벤 대공이 들어섰다. 뒤에는 사사바란 경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백성들이 처마에 매다는 건어물처럼 밧줄에 얽힌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태연히 걷고 있었다.
“전하.”
“아주 오랜만이에요. 그간 잘들 지내셨나 모르겠습니다. 수 주 만에 보는 건데 어쩐지 낯빛들이 별로군요.”
“어서오십시오, 전하. 그런데….”
모두가 눈치를 보며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사사바란 공이 하얗게 센 숱 많은 눈썹을 씰룩이며 가늘어진 눈으로 바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탈타미오 후작은 왜 저런 꼴인지요?”
“오, 마침 잘 물었습니다.”
힐벤 대공이 허공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뒤에 얌전히 서 있던 달틴 사사바란 경이 앞으로 나서며 길게 늘어진 밧줄을 조금씩 당겨 잡았다. 자연히 바란의 몸뚱이가 휘청거리며 그 곁으로 끌려 나갔다.
“안녕들 하십니까.”
자리에 멈춰선 바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먼지와 기름때로 끈적끈적해진 데다, 색깔까지 볼품없이 얼룩덜룩한 머리칼이 뒤로 젖혀졌다. 긴 여정 탓에 땟국이 끼었으나 반듯한 얼굴이 드러났다. 고개를 쳐들고 좌중을 훑은 바란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이거 오랜만에 뵙는군요. 데덴포 남작, 가운데 계신 이름 모를 신사분, 날만도 남작, 레널드 백작, 그리고….”
바란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꼴통을 보는 듯한 시선과 함께 체면 차리는 헛기침이 날아들었다. 바란과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사사바란 공작이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공작과 바란은 예로부터 사이가 나빴고 늘 서로를 교활한 능구렁이라고 까내리곤 했다.
“쯧…. 영지에 한참 처박혀 있나 싶더니만 왜 그런 꼴로 돌아온 겐가? 아주 봐줄 만도 하구만.”
“사사바란 공. 비꼬지 말고 보고 싶었다고 그냥 말씀을 하시죠.”
바란이 푸스스 웃었다. 밧줄을 쥐고 있던 사사바란 공작의 둘째 아들 달틴 사사바란 경이 슬그머니 밧줄을 당겼다. 여위고 허약한 몸뚱이가 밧줄이 출렁이는 대로 중심을 잃으며 휘청거렸다.
그 꼴을 흐뭇한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던 대공이 사사바란 경에게 손짓을 했다.
“경, 다들 어리둥절하신 모양인데, 자초지종을 좀 알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시선이 모이자 우직한 기사는 부담스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냈다. 바란에게 내보이던 험악한 기세가 누그러진 것이 우스워서, 바란은 제 상황도 잊고 킥킥대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코코탄 전투에서 전사한 형 쪽에 비해서 차남인 달틴 사사바란은 아주 숫기가 없는 벽창호라고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났다.
달틴 사사바란 경이 앞뒤를 다 잘라먹고 뱉었다.
“그것이, 반역죄입니다.”
“뭐라고?”
사사바란 공작이 다시 말해보라며 그의 아들에게 대고 손짓했다. 늙어서 귀가 먹어서 그런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했다.
“반역…. 입니다. 탈타미오 후작은 왕녀의 기사를 성안에 숨겨두고 있다가 발각됐습니다.”
“왕녀의 기사라니? 그 용인은 죽었다지 않았나?”
사사바란 공작이 의견을 구하려 다른 귀족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하나같이 경악해서 안색이 좋지 않았다. 개중에 가장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레널드 남작이 마찬가지로 의문을 표했다.
“공작님의 기사 열다섯을 혈혈단신으로 상대하여 다 죽인 대신에 자기 목숨 역시도 부지하지 못한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더군요. 정신이 조금.”
상석에 앉아 길쭉한 두 다리를 테이블 위로 올린 대공이 늘어지는 투로 말을 이었다. 탁자에 둘러앉은 것은 어차피 괴벽에는 다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예의를 주구장창 따지고 드는 고위귀족들 중에서도 아무도 뭐라고 언질 주는 이가 없었다.
“조금, 훼까닥, 큭큭…. 돌아버린 것 같았지만 말입니다. 글쎄요, 후작 말로는 정신착란으로 기억을 잃었다고 하던데요.”
“그러면 저 잔악… 탈타미오 후작이 마음을 돌려 왕자 세력에게 빌붙으려 했단 말입니까? 고작 그 천것의 목숨으로 환심을 사서?”
“비열한 놈!”
사사바란 공작의 얼굴에 시뻘건 분노가 올랐다. 대공은 다 떠나서 상황 돌아가는 것이 재미있는지 다리를 내리고 탁자 위로 몸을 바짝 기울여 턱을 괴었다.
“아니면, 그 용인한테 단단히 빠졌든지요. 어때, 재미있는 가설 아닌가요?”
당장이라도 탁자에 둘러앉은 모든 이가 칼을 빼 들고 목을 치려고 덤빌 것 같은 상황이었다. 줄곧 입 다물고 있던 바란이 말문을 텄다.
“기억을 잃고 열여덟 살 애송이가 됐더군요. 그 용인기사 얘깁니다, 여러분. 그래서 제 딴에는 좀 갖고 놀면서 아는 바를 실토하게 만든다는 것이…. 뭐,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된 겁니다. 생각이 짧았던 건 인정하겠습니다.”
바란이 흠잡을 데 없는 웃음으로 태연히 자신을 변호했다. 어렸을 때부터 언변은 꽤 타고난 편이었다. 말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게도 침착한 호흡과 일정한 음률이 더해지는 것만으로 신뢰도가 대폭 올라가고는 했다.
“하지만 그것에게 빠져서 나의 왕을 저버리다니요? 오, 제발. 유일하고 합당한 왕, 지상의 용, 헬린 힐벤 전하.”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는 듯 점점이 허튼 숨을 터트렸다. 대공의 얼굴에서 그럴싸한 웃음이 거두어졌다. 그 안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분노가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올라 바란의 눈에 띄었다. 배신감일까? 바란은 생각했다. 조금 놀랍기도 하고 등골이 서늘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제 마구간지기가 대공 측과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저도 충격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제가 평소에 아끼던 그 아들놈까지 말입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하지만 어린 것까지 확실히 잡아 죽여 본보기를 보였으니 그건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란이 새파란 눈동자를 굴려 대공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일순 대공의 눈가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여전히 바란의 말에서 어떤 허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란은 혐의를 벗기 위해서 정말로 하고 싶지 않았던 말까지 꺼내 들어야 했다.
“전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제 아우를 죽인 놈입니다. 비록 피로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해도 제 아우였지요.”
“…….”
“용인의 목을 베는 것만이, 제 평생의 숙원입니다.”
가식적인 말 한마디마다 구토감이 북받쳐 올랐다. 그것을 드문드문 참아내는데, 다행스럽게도 남들 귀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식히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들렸다.
잠시 바란에게 타오를 듯이 강렬한 눈길을 주던 대공은 홱 고개를 돌렸다.
“이처럼 내가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웠던 것은 다 후작의 불온한 움직임을 막기 위해서였음을 다들 양해해주기 바라요. 오늘 의회에 죄인의 자격으로 참석시킨 이유는 다들 짐작하겠지만.”
잠깐 뜸을 들였다.
“마땅한 벌을 협의하기 위해섭니다.”
“반역에는 죽음뿐입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레널드 백작 말이 맞습니다, 전하. 선례를 만들면 날뛸 놈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방에서 의견이 튀어나왔다. 사형 쪽에 무게를 싣는 자가 대다수였으나,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치명적인 정보를 빼돌리거나 피해를 입힌 게 아니라는 정황이 보이는 한은 여태까지의 전공으로 참작하자는 말이었다.
“전하, 목숨을 빼앗는 것은 너무 가혹한 줄로 압니다. 후작과도 같이 젊은 전력은 우리 측에 많지 않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날만도 남작이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무거운 입술을 뗐다. 그는 대공파 귀족들 중에는 드물게도 백성으로부터의 평판이 괜찮은 영주이기도 했다. 바란은 이 남자가 썩 마음에 들었다.
“후작은 당장 우리 측에 피해를 입힌 것이 없습니다. 마구간지기가 간자로 밝혀져서 껍질이 벗겨졌다니 켕기는 구석이 있긴 있지만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 딴에는 충심으로 벌인 일이었겠지요. 그러니 제 생각으로는 그의 충심을 증명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날만도 남작의 말에 다들 어느 정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사형에 관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던 레널드 백작만큼은 이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가 새빨갛게 분기로 얼굴을 물들이고 콧수염을 다듬으며 헛기침소리를 냈고, 좌중은 또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충심이라! 그것참 우스운 얘깁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였다면 독단으로 이런 불경스러운 일을 벌이기 전에 제대로 주군께 보고를 올렸을 겁니다. 전하, 자고로 군주는 상벌이 분명해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반역자를 처단하고 기강을 세워야 합니다.”
달틴 사사바란은 곁에 선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영 관심이 없는 화제를 들어주고 있기라도 한 것 마냥 손톱을 들여다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흠흠.”
주의를 환기하고자 헛기침을 했으나 한눈을 팔고 있는 바란은 이 신호 역시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이마를 탁 치고 싶은 정도의 무신경함이었다. 달틴 사사바란은 불같은 논쟁이 오가는 탁자의 분위기를 살피며 슬쩍 발을 옮겨서 바란의 정강이를 건드렸다.
“아. 뭐야.”
바란이 눈치도 없게 큰 소리로 놀라며 사사바란 경을 올려다봤다. 사사바란 경은 조용히 하고 앞 좀 보라고 눈짓을 줬다.
다행인 것은 테이블 위가 이미 충분히 소란스러워서 바란 쪽에 신경을 두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 사람, 대공 본인을 제외하고는 말이었다. 대공이 바란 쪽을 보면서 입술을 뻐끔댔다.
‘집중, 좀, 해요.’
그때서야 비로소 바란이 눈치를 좀 보기 시작했다. 달틴 사사바란은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저 전령은 왜 저기에 세워뒀나요?”
논쟁이 한창 무르익던 와중이었다. 대공은 문간에서 줄곧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병사에 관해 언급했다. 대공이 지루한 듯이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떼자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에 잠겨 들었다.
이 이상한 기류에 대공도 자리를 고쳐 앉았다.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보자, 앙살라테 그 겁쟁이 같은 게 그간 먼저 칼을 들고 쳐들어오기라도 했을까? 그건 정말 드문 일인데. 걔는 어릴 때부터 성질이 유약해서 내 장난감 하나를 못 뺏었거든요.”
조용히 눈치만 보는 귀족들을 보고 대공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나긋하던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뭐야. 정말로?”
“전하, 간밤에 일어난 일입니다. 안 그래도 대책 회의를 소집해 의견을 강구하던 중이었습니다.”
날만도 남작이 일렀다. 어쩐지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성격 급한 구석이 있는 레널드 백작이 뒤를 이어 상황을 전했다. 침통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누가 저 북쪽의 사난타 성을 침략하리라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허를 찔렸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병력을 남쪽으로 집중시킨 참이니 속수무책으로 당할밖에요.”
“사난타라고?”
대공이 차분히 되물었다. 남부의 거부로 유명한 라고늄 자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촌뜨기라는 것에 홀로 마음의 응어리를 가져서 늘 북부 귀족 사이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렇습니다, 전하. 다름 아닌 그 폐허 같은 유곽의 도시 사난타입니다. 하하, 그 많은 도시 중 사난타라니. 그쪽 책략가 놈 대갈통에 든 건 창녀들 약탈할 생각밖에 없나 봅니다.”
“끄응…. 모르면 가만히나 있으시오, 자작.”
앙살라테의 행마를 우둔함과 객기로 치부해 넘기기엔 확실히 허점을 찔렸다. 대공의 수뇌부는 젊을 때 참전 경험이 있는 무인 출신이 대다수였다.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나서야 아뿔싸 싶어 돌아보면 사난타는 참으로 그늘에 가렸던 요충지였다.
“우스갯소리나 할 상황이 아닙니다. 사난타는 강을 끼고 있는 성입니다. 작고 형편없지만 나루터가 있습니다. 왕자가 있는 강서지역으로부터 성을 완벽히 고립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난공불락이 될 것입니다….”
“잠깐.”
대공이 손바닥을 단호히 들어 레너드 백작의 말을 가로막았다. 데덴포 남작이 좀 전부터 조바심을 내더니만 이제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 될 때까지 가만 앉아서 당했단 말인가요? 사난타 성이라면 암만 찬밥이라도 접경지역인데. 랜달 백작과 펠라젤 경이 지키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전하, 그것이…. 안에 잠입해있던 선발대가 초소를 불태우고 성문을 걸어 잠, 잠갔답니다. 성을 빼앗겼고, 그리고….”
데덴포 남작이 헛기침을 했다. 바란은 전에 저런 식으로 말을 질질 끌었다가 대공에게 이명이 들릴 정도로 거세게 따귀를 맞은 적이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억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공은 나이가 지긋한 데덴포 남작에게는 따로 손찌검을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뭐요.”
“랜달 백이 유곽에서 붙잡혀 투항을 했답니다. 성 안에 머물던 귀족들이 대거 포로로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당장 성을 치기가 곤란한 상황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바란은 슬그머니 상황 돌아가는 꼴을 보았다. 원래 같았으면 대공은 이미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래도 제 수뇌 세력 앞에서는 위엄을 지키려는지, 상 위를 옹골찬 주먹으로 한 대 때리는 것에 그쳤다. 소리로도 누구 하나를 혼절시킬 만큼 요란했다. 파르라니 빛나는 눈동자는 그가 적잖이 열이 뻗쳤다는 사실을 역력히 드러냈다.
“전하, 진정하시고… 헉.”
“진정?”
레너드 백작이 대공을 진정시키려고 뭐라 입을 여는 순간 때마침 대공의 주먹이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같은 자리를 때렸다. 원목으로 짜인 널따란 테이블의 한가운데가 단단한 것으로 얻어맞은 듯이 움푹 패였다.
탁상공론이나 즐기는 늙은이들은 종종 대공이 가진 초월적인 용혈의 힘을 간과할 때가 있었다. 물증을 통해 심리적인 압박을 더 하는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석 구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패인 부분을 보며 좌중은 대부분 마른침을 삼키고 몸서리를 쳤다.
그 상황에서 드라코슨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사사바란 공이야 원래가 별종이었다.
“그 새끼들이 내 뒷마당에 와서 난장판을 만들어놨는데, 지금 진정하라고 했어요?”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극도로 공격적인 기세를 뿜어내며 대공이 탁자를 시끄럽게 두드렸다. 바란은 그가 손가락만으로도 저 튼튼한 탁자에 구멍을 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힐벤은 제법 오래토록 시간을 끌었다. 경솔하게 결정할 문제도 아니었거니와 쉽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시간이 가는 동안 괜히 늙은 귀족들이 목 가다듬는 소리나 흘러나왔다.
“…아시다시피 받은 것의 사백 배, 사천 배로 돌려주는 것이 내 철학입니다.”
대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안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뒤에 한다는 말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는 공격을 감내하겠다는 결정이었다.
“교활한 앙살라테 이 새끼가 지금 목숨 몇을 가지고 이 몸과 협상을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다 어림없는 소리죠.”
보통 서로 입장이 상반되지만 각자 입바른 말만 지껄이곤 하는 레널드 백작과 날만도 남작이 처음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두 사람은 모두 난색을 표했다.
“전하, 하지만 사난타 성을 공격했다간 승패가 무용지물인 소모전이 되고 말 것입니다. 당장 많은 군사를 동원하기엔….”
“벼룩 같은 앙살라테의 수하들입니다. 무리해서라도 초반에 잡아 족쳐놓는 게 훗날을 위해서는 더 나을 겁니다. 이 새끼들이 강동지역에 발붙일 곳을 줘선 안 된다는 소립니다.”
“과연 진정한 드라코슨이십니다, 허허. 전하!”
사사바란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박수를 쳤다. 그는 대공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공격성과 투박함을 용혈의 증거라고 쳤다. 그래서 매번 상황을 불문하고 저렇게 앞장을 서서 박수를 치고 나섰다.
경계할 대상이 생겼다 해서 여태 수도를 공격하기 위해 차근차근 모아둔 병력을 북쪽으로 돌리면, 오랜 시간을 들인 수도 탈환전이 죄다 무산될 터였다. 좌중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누가 먼저 날 위해 검을 들겠습니까?”
대공이 빙그레 웃으며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날만도 남작?”
“송구하오나….”
“전하, 그의 사촌 동생 되는 이벨롭 아겐호프가 사난타 성에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차가운 눈빛이 한참 그에게 머무르다 비껴나갔다. 바란은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군.’ 정도이리라 생각했다.
“데덴포 남작, 그대는?”
“크흠, 제 아들놈도….”
“아주 봐줄 만 하군요. 대단해, 아주. 오입쟁이들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대공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화가 나서 거칠게 탁자를 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앙살라테 앞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자 이 말입니까? 사랑하는 아들딸과 사돈과 그 팔촌까지 놓아달라고? 그러면 그놈이 놓아줄 거라고 생각해요?”
“하, 하지만 이대로 출정한다면 귀족들의 반발이 거셀 겁니다, 전하. 말씀하신 대로…. 사난타까지 나가 유희를 즐기는 귀족들은 쌔고 쌨으니까 말입니다.”
“몸값을 합의하셔야 합니다. 성을 수복하는 것은 포로들을 안전하게 되찾고 난 다음에도 늦지 않습니다.”
“합의? 저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자들과 합의라니!”
대공은 자신보다 열등한 혈통을 가지고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앙살라테 왕자에 대해 뿌리 깊은 증오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선왕 새미언에 대해 좋은 감정도 없었으니 그것이 대물림된 부분도 분명 있었다.
합의라는 단어가 대공 안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다. 이성적인 판단에 앞서 불꽃 같은 분노가 표출되었다. 대공은 한참이나 진정하지 못하고 어깨를 씰룩였다. 그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탁자 주변을 도로 거닐기까지 했다.
“그래. 좀 진정이 되는군요. 이 나를 지지하며 뜻을 같이한 형제들이 앙살라테의 손안에 장난감처럼 떨어지는 것을 가만 앉아 두고만 볼 수는 없지요.”
그러다 홱 돌아 빙긋 웃고 나섰다. 아무리 평소에도 변덕이 죽 끓듯 한다지만 급격한 변화는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데덴포 남작이 슬쩍 물었다.
“저어, 그러면…?”
“시도라도 해봐야지요. 나와 가깝고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공들 중 한 사람이 이 어렵고도 고결한 역할을 맡아준다면 좋겠군요.”
지원자가 있을 턱이 없었다. 자진해서 포로가 되거나 목을 바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복잡한 침묵이 불어닥쳤으나 대공의 표정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싱긋대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마치 미리 짜 놓은 각본을 읽는 것처럼 헬린 힐벤의 손가락이 바란을 지목했다. 기분 탓이 아닐 것이다. 바란은 생각했다. 대공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일부러 바란을 위한 덫을 궁리했던 것이다.
“바란 탈타미오 후작의 처벌을 논의하던 중이 아니었겠습니까. 마침 그는 또래 중에서는 당할 자가 잘 없는 솜씨 좋은 무인이기도 하지요.”
대공이 바란을 돌아보았다. 비로소 가증스러운 웃음이 내걸렸던 입술이 일자로 뚝 떨어졌다. 바란은 눈썹을 찌푸리고 그 이상한 증오의 감정을 받아냈다.
* * *
마흔여덟의 구더기는 왕국 남부, 용의 도시 체첼그람에서 태어났다.
체첼그람은 지상의 마지막 고대룡 체첼드롭이 잠든 자리에 지어진 도시로 고왕국의 파괴된 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그 역사가 깊었다. 샤머니즘을 받드는 정통 집시들이 전체 인구의 3할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또 이곳은 수십 년 전부터 꾸준히 들려오는 고대룡의 재림과 관련한 무수한 소문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물론 이 소문은 수없이 많은 신비주의 집시들이 출처 불명의 예언을 거듭하며 퍼뜨려놓은 이야기였다.
‘고대룡 체첼드롭이 눈을 떴다고? 내 나이가 열일곱이구만, 그 소리는 내 짧은 생애 벌써 다섯 번도 더 들어봤어.’
어려서부터 별 읽는 눈을 깨우친 구더기는 사이비라면 질색을 했다. 나라가 어지러웠던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종말론이 들고 일어나 길바닥을 허무주의 종말론 호외로 가득 채웠다. 미련한 백성들은 매번 거기에 속아 넘어갔다.
구더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별 읽는 능력을 정의와 대의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치기가 더해져서 그 당시에는 얼마나 요란한 오지랖을 부리고 다녔는지 몰랐다. 특히 이런 뿌리 없는 소문이 몰아칠 때면, 영광스러운 용의 백성권을 받으라며 노인들 쌈짓돈이나 훔치고 다니는 사기꾼들을 쳐부숴 뒤엎고 다니기 바빴다.
그러니 그녀가 무엇보다 존경하는 우두머리 샤먼, 구더기의 어머니 막쉬롭이 그런 사기꾼들과 같은 예언을 들고 나섰을 때 열이 뻗쳤던 것은 당연했다.
“어머니, 제정신이에요?”
고대룡 체첼드롭을 위해 완성된 제단에 향을 올리던 막쉬롭이 구더기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 넘겼다.
“어머니도 체첼드롭, 그 죽은 용 팔아먹어서 뭐, 용의 나라 시민권 장사라도 하시게요? 이건 미친 짓이에요. 집시의 긍지도 없어요?”
“귀청이 나가겠구나. 조용히 좀 하렴.”
“어머니가 정신을 차려야 조용하든 말든 하지!”
구더기가 소리를 꽥 지르며 제단 쪽으로 다가왔다. 공물을 엎으려고 하는 참에 막쉬롭의 가녀린 손이 다가와 구더기의 가슴팍을 확 밀쳤다. 그러자 그 가녀린 손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힘이 나와 구더기를 단상 아래에 구르게 만들었다.
“아악!”
“성격 급한 건 지 애비를 닮아서, 나 참.”
“고대룡의 재림 같은 헛소리를 엄마 같은 진짜배기 샤먼도 하고 다닐지 몰랐다, 정말! 요즘 벌이가 시원찮아서 그래?”
“말을 삼가거라. 체첼드롭은 동면에 든 용이야. 죽었던 적이 없으니 당연히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오지.”
“하늘의 반구에는 고대룡의 별이 뜬 적 없어!”
“별 읽는 자들은 항상 크고 작은 오류를 만들어내. 너 그리고 존댓말 쓰랬지.”
구더기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오류라는 게 무슨 소린데요?”
“요컨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아집이 생긴 순간부터 해석이 항상 조금씩 어긋나게 된다는 거지. 너 자신을 맹신하지 말아라, 딸아. 별은 틀리지 않지만, 인간은 틀리기 마련이거든.”
막쉬롭은 조심스럽게 향불을 피우고 합장해서 예를 올렸다. 제단 양옆으로 쌓인 수많은 먹거리와 금은보화는 천민 취급받는 일개 집시 집단이 모아 놓은 거라고는 믿기 힘든 수준이었다. 구더기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제단 위 음식에 손을 대려던 순간 막쉬롭이 그 손을 모질게 쳐냈다. 빨간 손자국이 났다.
“손대기만 해.”
“치사하게.”
“정결한 것만 올릴 수 있어서 그런 거야. 고대룡은 입맛이 까다로워. 인신공양도 숫처녀와 숫총각만 받으니까.”
“인신공양?”
불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막쉬롭은 더 이상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는 단 한 차례도 의무에 앞서 상냥했던 적이 없다.
산마루에 의식과 함께 바친 공물은 어느 날 갑자기 씻은 듯 사라졌다. 제사를 받아들인 것은 재림의 증거라고 했다.
그 말대로 산제물을 넣어둔 커다란 갈대 바구니는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있었다. 구더기의 떨리는 눈동자가 아주 오래토록 그 빈 자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세상에 변한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구더기가 화를 내고 물으니 막쉬롭은 고대룡처럼 현명하고 예민한 생명체가 그 모습을 대대적으로 드러내 피곤한 일을 만드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체첼그람을 비롯한 남부 국경도시는 남쪽으로부터 몰려든 마수의 대침입에 맞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야 했고, 그 난리통에 막쉬롭은 그녀를 따르는 집시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북서쪽의 영험한 도시 잣자후로 둥지를 옮겼다. 변변한 탈 것조차 없이 이어진 이 여정은 일 년 하고도 육 개월이 꼬박 걸렸다.
여정 가운데 만난 노예상들에게 납치를 당해 무리에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철새처럼 옮겨 다니는 집시들의 우두머리인 막쉬롭은 책임감이 강한 운명론자였다. 실제로 그녀는 운명을 읽을 수 있기도 했다. 어쩌면 구더기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막쉬롭이 이끄는 집시 무리는 구더기를 찾아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겨울이 오기 전 안전하게 강을 건너는 일을 택했다.
구더기는 북부 도시를 전전하며 그렇게 삼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자유로운 탈출을 꿈꾸던 것은 잠시였고, 이어진 폭력과 겁간, 질병으로 가득 찬 삶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점차 암흑과 침묵으로 물들었다.
별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밤하늘이 마냥 어둡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신이 점지한 운명의 궤도가 속속들이 읽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구더기의 눈에 밝고도 초라한 별 하나가 띄기 시작했다.
‘나그네 별….’
고루한 내전 가운데 떠오른 저 새 별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게다가 그 별이 점차 구더기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참을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별 읽는 재주가 있나?”
그리고 구더기는 더러운 마구간 안에서 니카를 만났다. 하늘과 운명에 예정된 대로.
* * *
‘생각처럼 편리한 재주가 아니라니까, 정말로.’
구더기는 바쁘게 움직이며 숨을 할딱였다. 사난타 성을 점령하리라는 사실은 미리 읽지 못했다. 자신이 별 하늘에서 본 단편적인 사실을 얽다 보면 어머니 막쉬롭이 경고한 대로 정말 엉뚱하게 빗나간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었다.
예언이라는 이름의 편견은 그녀의 오감과 민첩한 다리를 둔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쉰에 가까워서도 못 고치고 있으니, 나쁜 버릇이라는 건 참 지독히도 고치기 힘들었다.
왕자군의 깃발이 나부끼는 모습을 광증에 걸린 사람처럼 환희에 가득 차 바라보던 니카는 단박에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그것도, 구더기가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니카가 훌쩍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비명을 내질렀던 구더기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태연하게 달리고 있는 니카의 그림자를 보며 걱정을 단번에 삼켰다. 시비가 붙었을 때 귀신처럼 타격 없이 싸우던 니카의 모습이 겹쳐졌다. 위험이라는 단어와 세상에서 가장 먼 사람이 저 니카일 것이다.
‘알아서 잘 하실 분이야. 걱정할 이유가 추호도 없어.’
구더기는 층계 아래에서 소란스러운 기색이 들리면 발코니를 건너 지면으로 뛰어내리기도 했다. 왕자의 표식이 그려진 갑옷을 착용한 병사들은 왕자 밑에 있는 용병단과 협력하여 유곽에 있는 귀족들을 색출해내고 있었다.
민간인에게는 그래도 예의 있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약탈자들과는 확실히 질이 달랐다. 앙살라테 왕자가 틀림없는 성군의 재목이라고 백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온 이유가 눈에 보였다.
‘그분을 걱정할 때가 아니라, 코쿤을 찾아야 해.’
점령은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엄격했으나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졌다. 덕택에 누가 봐도 귀족과는 큰 차이가 있는 구더기가 방해받는 일은 잘 없었다. 그녀는 나이가 찬 여인이었고, 문신을 새긴 집시여서 그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왕자의 병사들은 그녀가 달음질치는 것을 곁눈질로 보아 넘겼다.
“이거 놔라! 이거 놔! 이 무지렁이 같은 새끼들이 내가 감히 누군 줄 알고…!”
“누구시긴?”
랜달 백작을 둘러싼 용병들이 이 말에 한바탕 웃었다.
“속옷도 못 여미고 꽁무니 빼던 게 대체 누구시냐는데, 얘들아!”
“와하하!”
“이익… 이거 놔!”
유곽에서 밤을 즐기고 있던 사난타의 성주 랜달 백작은 시중드는 소년의 옷을 억지로 빼앗아 걸치고 유곽에서 빠져나가려 시도하던 그대로 붙잡혔다. 말라깽이 같은 몸은 덜 자란 아이들이 입는 옷에 꼭 들어맞았다. 점잔빼려고 기른 콧수염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그는 모욕감에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용병들에게 붙들려 끌려나가야 했다.
구더기는 소란스러운 웃음에 시끌벅적한 그 사람들 틈에서 아는 얼굴을 찾아 눈을 부릅떴다. 랜달 백작이 입은 저 옷은 코쿤이 입는 것과 같은 복장이었다. 유곽에서는 수염이 안 난 어린애들이 술 시중을 거들었는데, 몸을 팔지 않는다는 표시로 검은 천을 가슴에 꿰매어 아이들을 보호했다.
구더기는 씨근덕대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좌우로 휘청이다가 똑같은 옷을 입은 시종아이 하나의 뒤통수를 발견했다.
“얘, 얘, 얘야!”
“아, 아줌마.”
면식이 있는 아이였다. 코쿤과 곧잘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처음 겪어보는 습격에 적잖이 놀란 시종 아이는 구더기가 다그치듯 코쿤의 소재를 물어도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수 차례 아이를 달래어 물으니 코쿤이 두 시간 전에 퇴근했다고 대답해주었다. 두 시간 전이라니. 구더기는 이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마 민박으로 돌아가 밀린 잠을 청하고 있겠지 싶었다.
“그런데요, 아줌마, 저기….”
얼른 치마폭을 걷어 잰걸음으로 층계를 내려가는데 아이가 왕자군의 지시에 따라 한 켠으로 이동하다 말고 그녀를 불렀다.
“코쿤 걔요, 오늘 저하고 근무 바꿀 때 그랬거든요. 뺏긴 돈 찾으러 갈 거라고….”
“돈?”
“네, 되찾아야 된다고-”
“거기, 조용히 해!”
“이크….”
“아줌마도 얌전히 찌그러져 있어. 지금 장난하는 줄 알아?”
왕자의 병사들이 시퍼런 날붙이를 들고 구더기를 위협해왔다. 좋게 타일러서 통제하지 못하면 살생도 무릅쓸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인 군주라고 해도 전쟁은 무조건 피비린내를 뒤집어쓰기 마련이다.
구더기는 두 손바닥을 들어 적의가 없음을 보였다. 곁눈질로 층계 아래를 살폈다. 이 아래가 바로 1층이었다. 시종들이 쓰는 통로를 통해 나가면 곧장 저잣거리였다.
‘코쿤은 집시 주방장에게 뺏긴 패물을 되찾으러 갔을 거야.’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면 그 골목에도 금방 다다를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계획이 완벽한 지도로 바뀌었다. 마른침을 삼켰다. 병사들이 혀를 차며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는 순간 구더기는 난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사뿐한 착지는 아니었다. 발목에 부담이 갔지만, 계단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덕택에 그런대로 버틸 만 했다. 절뚝이면서도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녀 뒤로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쫓아 나왔다.
“잡아!”
보통 이런 상황에서 달음질을 쳐 달아나는 것들은 찔리는 구석이 있어 보이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멈춰 서서 논리적인 설득을 한대도 쉬이 들어먹힐 리 없었다. 노여움과 의심이나 더 안 사면 다행이리라. 그저 죽어도 잡히지 않겠다는 각오 하나로 무진장 뛰었다. 때마침 저잣거리에 가득한 병사들이 추격자의 앞길을 막아주었다.
의외로 길바닥에는 시체가 잘 없었다. 사난타 성에는 원래 침입자에게 대항할 만한 장정이 잘 없었으니 극단적인 반항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민들 중 목숨을 빼앗긴 자가 없었다.
귀족들은 대개 포로로 붙잡혔고, 이렇게 되면 검으로 다스려야 할 것은 대공의 표식을 단 병사들밖에 남지 않았다. 그나마도 사난타의 유흥에 놀아난 오합지졸들이 전부였다.
명색이 병사라는 자들이 싸움에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골목에 숨어있던 대공군의 병사 여럿이 도망치려고 눈치를 살피다 말고 구더기가 뛰어들자 깜짝 놀라 뒤집어졌다.
“저 집, 집시 년이-”
“깜짝 놀랐잖아, 씨팔.”
욕설에도 구더기의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흘끗 골목 안을 훑어보았다. 눈에 익은 허름한 나무문 앞에 구더기가 끔찍이 아끼는 코쿤이 배를 깔고 널브러져 있었다.
“급해 죽겠는데 별 쥐방울 같은 게 지랄이야!”
발길질을 퍼붓던 예의 남부인이 코쿤 위로 가래침을 탁 뱉었다.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의 심장이 지면 아래로 푹 꺼졌다. 곧 코쿤이 꼬물대며 움직였다. 깜짝 놀랐던 심장이 다시 위로 튀어 오르며 꽉 막혔던 숨이 터졌다.
“코쿤. 얘야!”
구더기는 비척이는 걸음으로 다가서서 앓는 듯이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안심하고 나니 비로소 온몸에 현실감이 돌아왔다. 접질린 발목이 욱신욱신 저리고 다리가 풀려 바르르 떨렸다.
“코쿤. 코쿤….”
“아줌마?”
코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맞은 건지 코는 내려앉아서 피를 뿜고 있고, 눈에는 벌써 새빨간 멍이 들어 부어올랐다. 말을 잇지 못하는 구더기의 모습에 코쿤은 경솔한 행동으로 그녀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과를 했다. 그런 꼴로 사과를 해봤자 용서는커녕 안쓰러움과 분노만 더할 뿐이었다.
“나, 나는, 우리가 강을 건너려면 그 돈이 필요하니까….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얼른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으려는데 뒤에서 소란이 밀려왔다. 아마 구더기가 본체만체 넘긴 대공의 병사들이 살인 멸구 하러 뒤를 쫓아왔을 것이다. 바짝 긴장한 구더기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는 코쿤의 낯빛이 질렸다.
구더기는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때, 구더기의 귀 뒤로 누구 것인지도 모를 숨결이 닿아왔다. 겁이 치밀었다.
“아, 염병. 나는 이런 그림 존나 질색이란 말이오. 내가 또 누나가 다섯에 여동생이 둘 있어서, 여자나 아이 괴롭히는 놈들은 가만두고 싶지가 않지 뭐야.”
“누, 누구….”
“그러니까 아줌마는 잠깐 빠져 있어 봐. 내가 해결할 테니까.”
인기척이 거리를 두고 멀어진 다음에야 구더기는 비로소 낯선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용기가 났다. 어린 나이와는 다르게 굳은살이 험악하게 박인 코쿤의 단단한 손을 붙잡아 당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작고 단단한 몸, 그을린 피부색과 흉터 가득한 앳된 얼굴이 먼저 보였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나 낡은 가죽으로 얼기설기 엮은 방어구는 남자가 용병임을 드러냈다. 가죽 경갑의 흉부에 어설프게 인두로 지져놓은 왕자군의 문양이 눈에 띄었다.
‘왕자의 용병?’
남자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앞에 성큼 나섰다. 그다음부터 이어진 정의로운 폭력은 일방적이고도 처참했다.
왕자의 표식을 가진 남자가 끼어든 시점부터 일이 잘못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대공군 병사들은, 더 깊은 골목 안쪽으로 숨기 위해 꽁무니를 빼다가 저지당했다.
“오호라. 쥐새끼들이 이런 곳에 숨어있었어?”
용병 남자의 휘하에 있는 왕자군 용병들이 각자 개성이 강한 무기를 휘두르며 침을 찍 뱉었다. 이것으로 대공군 병사들의 퇴로는 완벽히 가로막혔다.
“사, 살려… 으아악!”
“목숨만은….”
“크아악!”
비명이 이어지고 구더기의 뺨에 붉은 피가 튀었다. 깡마른 꼬마 코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남자들이 똑같은 폭력 앞에서 고깃덩이로 변모했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쇠몽둥이로 대공군의 머리를 터트려 죽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구더기의 존재 자체를 까먹은 것처럼 신이 나서 날뛰던 용병 남자는 어느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심약한 아낙처럼 생겨서 눈을 태연하게 치뜨고 있는 것에 호기심이 동한 모양이었다.
“이보쇼, 아줌마.”
숨이 붙어 간신히 흙바닥을 기어 다니던 대공의 병사 하나의 목에다 도끼를 처박은 남자가 가래침을 탁 뱉으며 구더기를 불렀다.
골목길을 밝힌 횃불이 넘실거리며 남자의 머리카락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집시라면 아줌마도 남부 출신일 텐데. 이렇게 엿같이 추운 날씨를 어떻게 견뎠나 몰라? 난 정말 이러다 얼어 뒤지지 싶어.”
말을 마치면서 남자가 몸서리를 쳤다. 왕국 북부의 추위는 남부인들에게 있어서 평생 활자와 뜬소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남부 출신 구더기도 북부의 추위에 익숙해지기까지 삼십 년이 걸렸다.
“…….”
구더기는 상황을 재며 입을 다물었다. 소탕을 끝마친 왕자의 용병들이 하나둘 남자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근데 쟤는 아줌마 애 아니지?”
“제 아들 맞습니다.”
“이제야 입을 떼시는구만. 하지만 말 같은 소리를 했어야지. 저 애새끼는 누가 봐도 북부인이잖아.”
“아들이나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전쟁고아지만 제가 길렀어요.”
“우리가 말이야….”
혹여 코쿤에게 무슨 해라도 끼칠까 아이의 어깨를 부여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구더기가 목소리를 높이니 남자는 무심히 자리에 쪼그려 앉아 구더기와 눈높이를 맞췄다.
“우리가 나쁜 놈들은 아닌데 말이오. 정의로운 앙살라테 왕자를 지지하니까, 알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수단 방법 가릴 거 없이 대공의 끄나풀과 귀족 나리들을 잡아 가두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저는 한낱 집시인데,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과 연관될 수가 있겠어요? 그냥 잣자후로 가려고 사난타를 거쳤을 뿐입니다. 유곽에서 삯일을 한다고요.”
“그래. 나도 아줌마 말 믿어! 믿고말고. 그런데 이 꼬마는, 글쎄. 요만한 애들이 유곽에서 일하면서 정보통 노릇을 많이 하거든. 아니면 섬기는 귀족이 있든지 말이야.”
남자의 번득이는 눈동자가 궤도를 옮겼다. 구더기는 풀려나고 대신 올가미 같은 두 눈에 코쿤이 옴짝달싹 못하고 붙잡혔다.
“야, 꼬맹아. 너 뭐 숨기는 거 없냐? 수상한 놈 숨기고 있으면 지금 얘기해, 귀찮은 일 없게 순순히 말하면 어디서 이렇게 처맞진 않게 해주마.”
“그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설 눈치를 보는 코쿤에게서 위험한 기색을 감지한 구더기는 대신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그녀의 입술 위로 피투성이가 된 용병 남자의 손이 다가와 거세게 틀어막았다.
‘안 돼!’
입이 가로막히자 구더기는 코쿤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아이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구더기를 마주 보았다. 가로젓는 고개를 따라 설레설레 움직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던 아이는 끝내 구더기의 기대를 저버렸다.
“용인… 에게 붙잡혀 있어요, 저희는 여태껏-”
“용인?”
“나리, 잠시만요. 그게 아닙니다!”
위험한 흥미를 내비치며 남자가 싱긋 미소 지었다. 비로소 구속에서 풀려난 구더기가 다급히 막아섰으나 때는 너무 늦었다.
“거 참, 아줌마는 좀 조용히 있어 봐! 야, 뭐라고? 용인이 뭘 어쨌는데?”
“그게….”
“한번 입을 뗀 이상은 의심이 거둬질 때까지 낱낱이 일러주셔야지 않겠어? 나 잡아 가쇼, 하고 말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코쿤을 겁박하는 것 같은 이 말은 기실 구더기를 향한 화살이었다. 여유 만만한 미소가 구더기의 혀를 묶었다. 허리춤에서 예리한 단검을 뽑아내 손장난을 하는 남자는 천진하고도 위험하게 보였다.
“그, 그 용인은… 검을 가졌는데…. 제가 지내던 여관 사람들을 다 죽이고…. 힘이 어찌나 센지….”
횡설수설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가 싶던 용병은 갑자기 손바닥을 내밀어 코쿤의 이야기를 멈추게 했다. 코쿤이 어깨를 떨고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허, 그것참 흥미로운 얘기로구만.”
“아이들은 과장을 하기 마련이지요. 나리, 애가 겁을 집어먹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겁니다. 용인들은 대개 지능이 온전하지 않아서 검술을 못 배운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제가 앞으로 단단히 주의를 시키겠습니….”
“왕자군 앞에서 헛소리로 정신을 흐리게 만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죄가 막중한데, 감당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
남자가 빙긋이 웃을수록 구더기의 얼굴은 반대로 얼어붙어만 갔다.
“이를테면. 얘 목을 여기서 따버린다든가.”
“그런-”
“그냥 예시야, 예시.”
하릴없이 입이 꾹 다물렸다.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자 용병은 험악하게 협박하던 일이 까마득한 백일몽이라는 듯이 천진하게 몸서리치며 낄낄 웃었다.
“나도 남부 출신이라 용인 여럿 보고 자랐지. 그래서 이 꼬맹이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잘 알고 있다구.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거든. 내가 또 마침 검을 존나 잘 쓰는 용인을 하나 알지 뭐야… 존재 자체가 반칙 같은 새끼를 말이지. 내가 그 재수 없는 얼굴 갈아버리기도 전에 벌써 뒤졌다고 들었는데.”
혼잣말과 함께 감상에 잠겼던 용병 남자는 손을 움켰다가 펼쳤다 하며 들끓는 환희와 호승심을 제어했다. 그가 살포시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구더기는 남자의 두 눈 안에서 불꽃이 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리 그럼, 이다음 얘기는 자리를 옮겨서 계속해볼까?”
의중을 파악하려고 혼란스러운 머리를 굴리는데, 남자가 부하들을 보며 턱짓했다.
“얘들아, 감옥에서 제일 고급스런 아랫목으로다가 모셔라.”
<2권 끝. 다음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