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4.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4/12)

4. 어째서 나를 깨우는가


꿈자리가 사나웠다. 식은땀에 젖어 눈을 뜨고 옆자리를 더듬으니 침대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바란은 평소에도 바빠서 마냥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마 이른 아침부터 소화해야 할 일정이 있었으리라.

니카는 빈 침대에서 깨어난 허탈함을 이성적으로 달래려 애썼다. 아침식사나 며칠 전 서재에서 꺼내 온 바랑가의 시집을 떠올리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활자가 읽히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온통 바란에게 가 있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와 미소가 필요했다. 지금 당장.

결국 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렇지만 바란에게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러 갈래로 나뉜 복도와 수없이 많은 문, 종종 들리는 시녀의 발소리 사이에서 니카는 홀로 광야에 버려진 아이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발길이 닿는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오다가다 눈길이 마주친 사람들도 니카가 어딜 가든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곧 무모한 용기로 이어졌다. 니카는 여태껏 탈타미오 성에서 지내면서 감히 발을 들이지 못했던 깊숙한 곳까지 갔다. 바란이 어디 있겠거니 하는 계산 같은 것도 없었다.

층계를 마주치면 기분에 따라 오르거나 내려가기도 했다. 한참을 걸어 창문이 하나도 없는 어두컴컴한 복도에 들어서고 나서부터는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어림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발자국소리가 크게 울렸다. 니카가 더 나아가 발을 디딘 곳에는 천장이 높은 공동이 있었다. 높은 곳에 비스듬히 뚫린 천창으로부터 희끄무레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빛살에 들뜬 먼지가 춤추며 낯선 침입자를 반겼다. 니카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볼품없이 세월의 흔적에 잠겨있는 공간을. 언젠가 저 곡선을 가뿐히 그리는 층계에 붉은 휘장을 내걸고 화려한 꽃과 등불로 치장해서 무도회를 개최했을지도 모르겠다. 악단이 올랐을 법한 턱이 높은 자리도 발견했다. 말라비틀어진 꽃바구니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손잡이가 다 삭았다.

여태 걸어온 길을 한번 돌아보고 어물쩍거리던 니카는 길을 잃었다는 자각이 들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소름 끼치도록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 가운데 니카는 홀로 우뚝 서 있다. 한동안 바란의 빛 부스러기를 먹으며 사느라 잊고 있었던 감정이 밀려들었다.

‘응달의 음습한 어둠과 고독한 고요. 먼지와 곰팡이. 익숙한 것들. 악취. 내가 태어나고 속한 곳.’

니카는 진저리를 쳤다. 바란이 필요했다. 곁에 바란이 없으면 언제든 니카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둠이란 놈들이 그랬다. 먹잇감의 이마에 평생 지워지지 않는 표적을 남겨두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게 놈들의 취미였다. 

지금도 머릿속 한구석에서 니카를 고통스럽게 하는 온갖 의심의 목소리가 거듭 메아리치고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바란은 네 더러운 욕망을 감당하지 못해서 도망친 거야.’

‘그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자취를 감췄겠어?’

‘정말 너를 좋아한다면, 미리 귀띔은 해줬겠지. 안 그래?’

‘간밤에 잠깐 갖고 놀았더니 그새 질려버린 건 아니고? 귀족들은 원래 빨리 질리잖아. 더군다나 너처럼 시시한 것에는 그 흥미가 얼마나 가겠어.’

더 어두운 곳으로 향하는 복도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심란한 틈을 타 평생 인연 없는 모험심이라는 녀석이 머릿속까지 비집고 올라왔다. 니카는 떨리는 어깨에 힘을 꼭 주고 휘장 너머에서 은근히 꼬리를 내보이는 문짝을 열어젖혔다. 빛 한 점도 없는 어두운 복도가 나타났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니카는 안으로 발을 디뎠다.

복도 안은 온통 어두컴컴해서 도무지 안쪽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껄끄러운 목구멍과 콧속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이 먼지투성이 공간이 오래토록 방치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신발코가 이 빠진 바닥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니카는 무심코 벽면을 짚었다. 

꺼끌꺼끌한 촉감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올라갔다. 올록볼록하고 매끄럽게 굳은 붓 자국이었다. 동물의 분변을 말린 것 같이 고약하고도 희미한 냄새가 났다. 물감 냄새. 보육원이 위치한 신전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화공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니카는 용인의 후각으로 멀리서도 이 냄새를 맡았던 적이 있다. 벽에 달린 것은 과연 니카가 짐작한 대로 기술자에 의해 전문적으로 그려진 초상화였다. 희끄무레한 볕이 드는 복도 바깥으로 커다란 그림을 끌어냈다. 먼지와 거미줄 따위가 어지럽게 얽혀 그림을 거의 다 좀먹고 있었다. 색채도 선도 무척 훌륭한 그림인데 왜 이렇게 관리를 안 했을까. 

니카는 생각했다. 

이곳이 탈타미오 성임을 감안하면 이것이 누구의 초상화인지는 대강 때려 맞출 수 있었다. 바란에게는 전형적인 인상이 있었다. 마치 왕자님 같은 그 인상은 니카가 알 길 없는 어릴 적에 바란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 거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귀여운 장밋빛 볼과 씰룩이며 올라가는 사랑스러운 입술, 천사 같은 곱슬머리를 한, 누구나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소년이었겠지.

‘그가 이 그림 안에 있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 해사한 분위기는 좀처럼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강한 입김을 불어 먼지를 다 떨어내고 초상화 속 인물들의 면면을 낱낱이 살폈다. 인자한 미소를 띤 부부와 각각 왼편 오른편에 선 두 명의 소년. 하나는 금발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갈색 고수머리를 하고 있었다. 둘 다 검을 배웠는지 허리춤에 화려한 검자루가 보였다.

한참이나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금발 소년의 이목구비는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지금의 바란처럼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칼도, 화려한 옷가지와 자신만만한 표정도 없는 점잖은 귀족 소년의 모습이지만, 분명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니카는 조심스레 소년의 옷깃을 더듬어 올라가 그가 아는 바란의 얼굴을 덧씌워 보았다.

“아.”

작은 탄성에 잇따라 가벼운 미소가 어렸다. 찾았다. 그 사소한 발견 하나에 온통 눅눅했던 기분이 환하게 살아났다. 니카는 바란의 얼굴 위를 매만졌다. 먼지가 물씬 묻어나왔다.

화폭 위를 누비던 손가락이 무심코 바란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갈색 고수머리 소년에게로 미끄러졌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니카는 그 소년을 더 면밀히 살폈다. 구도와 차림새로 미루어 바란의 형제일 성싶으니 얼굴이 닮은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낯이 익다니 이상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나? 어디선가….’

* * *

클라텐 탈타미오는 아직 약관도 넘기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나 사관학교 교육까지 받은 유망주가 삿된 사상놀음에 감화되어 제 이름도 버리고 민란에 가담한 것은 사교계에서 큰 화젯거리였다. 무지렁이들 사이에 체계적인 병법을 배운 인물이 흔치 않았으니 클라텐 탈타미오는 오래 지나지 않아 반란군의 우두머리 격으로 격상되었다.

기실 그저 계획 없는 봉기로 시작되었던 움직임이 이리 오래 살아남은 것은 클라텐의 활약이 컸다. 대공과 왕자가 서로를 견제하느라 병력을 많이 이끌어낼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두 세력의 경계선인 사난타 성에 똬리를 튼 것도 기발한 판단력이었다. 앙살라테 왕자는 이 소년을 공공연히 비운의 인재라고 불렀다.

“죽여라.”

소년이 침을 탁 뱉었다. 그의 머리채를 꽉 붙들고 있던 니카의 얼굴에 끈적거리는 게 튀었다. 니카는 태연히 눈을 깜빡였다. 이깟 싸구려 도발은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당해왔다.

“뭘 망설여, 씨팔…. 왕과 귀족들 밑에서 톱니바퀴 노예처럼 사느니 자유롭게 죽겠다.”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천민들과 뒤섞여 살아온 클라텐 탈타미오는 근묵자흑이라고 어린 나이에도 입이 걸었다. 그에게 아직 남아 있는 귀족적인 구석이라곤 저 총명한 파란 눈이 다였다.

“죽이라니까 이젠 청개구리 짓이냐, 이 지랄 맞은 튀기 새끼야!”

가만 살펴보면 과연 잔악후작의 혈육이라고, 악에 받친 표정이나 시원스런 입매가 닮았다. 감상하는 것 같은 침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클라텐이 발버둥을 쳤다. 니카가 지긋하게 눌러 밟는 것만으로 저항이 잦아들고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니카는 강했다. 특히 육체적인 능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런 어린애의 모가지 따위는 손아귀를 꽉 쥐면 쉽사리 비틀어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니카는 반항하는 클라텐의 무릎을 힘주어 밟았다. 무릎뼈가 으스러졌다. 비명을 내지르며 바르작대는 것이 발아래서 느껴졌다. 

이쯤 되면 슬슬 나이가 예순을 넘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귀족 양반들 입술에서도 살려달라는 애걸이 나오곤 했다. 경험에 의해 판단하건대 고작 열여덟이나 됐는지 모를 아이의 정신력으로 버틸 고통이 아니었다.

“아악! 흐…윽!”

클라텐은 이를 악물고 몸을 추슬렀지만, 니카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형형한 눈빛에는 조금의 굽힘도 없었다.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니카는 ‘형제끼리 신음소리마저 닮았군.’ 하고 싱겁게 생각했다.

“반란주동자 클라텐 탈타미오. 합당한 왕좌의 주인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의 명령에 따라 처단하겠다.”

“흐, 허억, 내 이름에서, 좆같은 탈타미오는 빼.”

“…….”

“너한테 마지막 자비라는 게 있다면, 용인기사. 내 몸뚱이를 전부 뼈도 못 추리도록 불살라줘. 부탁이다.”

바람 빠지듯이 웃는 소리가 났다. 죽음을 앞두고 웃을 수 있는 초연함이 저 깡마른 몸 어디서 나오는지 니카는 궁금해졌다. 클라텐은 엉망으로 풀어헤친 제 고수머리를 한 손으로 그러쥐고 볕에 벌겋게 탄 목덜미를 드러냈다.

클라텐은 니카의 검이 내리쳐야 하는 곳을 정확히 들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니카가 언급했던 ‘처단’을 얌전히 기다렸다. 니카가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순간에 소년이 문득 그를 돌아보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리고 바란 탈타미오 그 개자식 손에 내 잿가루 한 줌도 쥐여주지 마.”

“하나뿐인 형제 아닌가?”

“하하. 그 새끼는 가족과 맞바꿔서라도 반드시 갖고 싶은 게….”

검을 내리쳤다. 목이 잘린 채 클라텐의 입술이 잠시 뻐끔댔다.

‘있으시다더군.’

반역자 클라텐. 클라텐 탈타미오. 잔악후작의 아우. 니카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회랑에서 끄집어낸 탈타미오 가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를 내려다보았는데, 어느새 날 선 검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여기가 어디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더 이상 사난타 성곽의 시쳇더미 곁이 아니었다.

‘백일몽이라도 꾼 것일까?’

그런데 아까 전부터 지독한 피 냄새가 나고 있었다. 니카는 곧 자신의 값비싼 면직 셔츠에 점점이 묻어나는 붉은 핏자국을 눈치챘다. 무심코 코 밑에 손끝을 대니 흥건하게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흐르는 핏줄기를 소매로 무심히 닦아내지만 멎을 생각을 안 하고 자꾸만 신선한 피가 뿜어져 나온다. 눈앞이 까무룩 어두워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견딜 수 없는 현기증이 찾아왔다.

“윽….”

니카는 몸이 휘청거리는 대로 몇 발짝 걸었다. 겨우 벽에 기대어 시야가 밝아지기를 기다리는데 이번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그를 괴롭혔다. 니카는 고통을 속으로 삼키며 벽을 더듬었다.

그가 복도로 나섰을 때, 다행스럽게도 성안에 몇 없는 시녀들 중 두 명이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다. 그들은 니카가 피 칠갑을 해서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니카 경!”

“내가 부축할게. 넌 어서 의원을 불러와!”

둘 중 더 젊은 시녀가 복도에 소란스러운 발소리를 내며 달려나갔다. 니카가 헛구역질을 할 정도로 어지러움을 호소하자 시녀는 그를 벽에 기대어 앉혔다. 그리고 니카를 북돋우기 위한 온갖 말들을 지껄였지만, 이것들은 전부 다 니카의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니카는 그녀가 뭐라고 계속 성가시게 말을 붙이는 것을 손을 흔들어 멈추게 했다.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을 감추며 물었다.

“형제…. 바란에게 형제가 있었나?”

“니카 경, 조금만 더 버티시면 의원이….”

“바란에게 형제가 있냐고 물었잖아!”

시녀가 대답을 애매하게 회피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니카가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소리치는 순간에 드러난 니카의 뾰족하게 찢긴 동공과 얼굴에 들러붙은 까만 파충류의 비늘들, 이상한 울림을 가진 째진 목소리는 무력한 시녀 한 명을 겁주기에 충분했다.

마틸다의 지시에 따라 바란의 가족사항에 대해 함구하려고 노력하던 그녀는 니카가 “이름을 말해.” 하고 명령하자 본능적 공포와 의무 사이에서 갈등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었다. 니카가 날숨을 내쉴 때마다 뱀이 속삭이는 듯한 바람 소리가 났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시녀가 뒷걸음질 쳤다.

“이름을, 말해라.”

니카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갈색 머리카락, 볕에 그을렸고, 목이 잘린 남자애.”

“흐…윽.”

“바란의 하나뿐인 형제, 저 초상화 속에 같이 있는 애 이름이 뭐냐고!”

“클라텐… 클라텐 탈타미오예요!”

니카가 손을 거두자 시녀는 제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식은땀과 함께 눈물이 뒤섞여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녀가 엉덩이 걸음으로 뒤로 물러나 거친 숨을 몰아쉬는 동안 니카는 머릿속에서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두었던 기억들과 마주했다. 마치 둑에 난 아주 조그만 틈으로 바닷물이 터져 나와 니카를 휩쓸어가는 듯했다. 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탈진할 듯 숨이 거칠고 정신이 까마득했다. 세상은 그를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고 싶은 것일까?

* * *

깨어진 꽃병과 뜯어져 바닥에 구겨진 커튼, 바닥에 나뒹구는 책들이 고풍스러운 방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의 발톱이 할퀴고 간 자국이었다. 니카는 한참 동안 분에 못 이겨 날뛰다가, 찢겨져 솜털을 공중에 날리고 있는 침대 위로 무너져 내렸다.

북서향 창으로 드리운 빨간 오후의 햇살이 침대의 휘장을 뚫고 니카의 위로 드리웠다. 바싹 말라 껍질이 일어난 입술 틈으로 기나긴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니카는 팔을 들어 물기에 찬 눈을 지그시 눌렀다. 깨끗하게 갈아 입혀진 셔츠 소매에 짙은 눈물이 점점이 찍혔다.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었을까!

‘당신 이름이 뭐죠?’

‘니카입니다, 왕녀님.’

어떻게? 그가 어떻게?

‘니카. 썩 어울리는 이름이잖아.’

니카는 칠 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는 여인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선홍색으로 물들인 외투와 머리를 감싸는 세련된 손뜨개 모자 차림이었다.

그 순간의 공기, 보육원 그늘에 앉은 더럽고 초라한 고아에게 내어준 곱디고운 뽀얀 손끝, 스치듯 닿은 모직 겉옷의 감촉과 찰랑거리는 붉은 머리칼에서 풍기던 은은한 장미 향. 니카는 언제든 눈을 감으면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된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수백 수천 번이나 속으로 돌이키고 재구성했던 기억이었다. 감히 이것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는 게 비참하도록 한심하고, 또 화가 났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중심이 되는 뼈대가 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칠 년간, 왕녀의 기사로 살아오면서 니카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뼈대이자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 바로 수리 왕녀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니카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고, 불길에 뛰어들거나 산을 옮길 자신조차 있었다.

‘잘 알고 있겠지만, 일국의 왕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기회는 흔히 오지 않아요. 니카 경, 괴물로 태어나서 괴물로 길러졌겠죠?’

‘그렇습니다.’

왕녀가 니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미소란 신비했다. 이목구비가 보통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고 구겨져서 완전히 다른 얼굴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아주 친근하고 사랑스러웠다. 

니카는 사람들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잘 없었다. 그래서 미소가 가진 힘에 늘 쉽게 매료당하고는 했다. 왕녀의 웃음도 그런 종류였다. 어린 니카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을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기사로서 살아가요. 나를 위해서.’

니카에게 일생 처음으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준 사람이 누구던가. 낯을 가려 말도 형편없이 더듬던 무지렁이에게 학문을 가르친 건? 괴물이어도 괴물인 채로 쓸모가 있으니 비관하지 말라고 달래어주던 것은.

니카는 언젠가 왕녀가 그의 삶의 전부라고 감히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 그 말 대로였다. 다 죽어가는 삶에 새 목적을 불어넣은 것이 그녀이니, 온전히 왕녀에게 속하는 목숨이고 삶이었다. 살아도 그녀의 뜻대로, 죽는 것도 그녀의 뜻대로여야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입 맞췄지? 누구와 사랑을 속삭이고, 누구와 동침했던가.

“아아! 아아악!”

니카는 흐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나면 가슴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온몸에 구멍이 뚫려서 활력이라는 것이 전부 다 빠져나간 듯 허무하고 아프기만 했다.

“하아, 흑, 흐으….”

니카의 심지를 이루고 있던 강건한 순결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다른 이도 아닌 잔악후작이었다. 힐벤 대공의 충직한 개! 대공이 인간사냥을 계획하면 옆에서 유민들을 사로잡거나 인신매매를 해서 값을 치르는 게 이 남자의 일이었다!

지난 밤 일을 생각하니 절로 몸이 떨렸다. 빈속에 의미 없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니카는 온통 욱신대는 몸을 뒤틀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니카 경? 정신이 드셨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의원은 필요 없다.”

“예? 하지만….”

니카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마틸다가 걱정스레 몰려든 시녀들을 물리고 니카의 뜻대로 홀로 들어섰다. 마틸다는 난장판이 된 방을 둘러본 다음 바닥에 드러누워 가슴우리를 들썩이는 니카를 발견했다.

“니카 경!”

“…….”

“세상에, 괜찮으십니까? 진찰을 받으셔야 합니다. 피를 쏟은 뒤 어지럽다고 하시고는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한나절은 잠든 채 계셨고요. 무슨 병일까 봐 염려됩니다. 후작님께서도 분명 걱정하실 겁니다.”

그녀는 니카의 눈가를 가린 소맷귀가 물기를 먹고 짙은 색으로 물든 것을 보고 곤혹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천성이 인자한 사람이었다. 니카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시선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니카의 거칠게 튼 입술에서 먼저 말이 나왔으므로 마틸다의 고민을 더 이어지지 않았다.

“…바란은?”

그런데 니카의 기세가 이상했다. 마틸다는 눈치를 보았다. 니카는 여태 바란의 이름을 부를 때 늘 황홀함과 벅찬 마음을 또렷이 드러냈었는데, 지금의 말씨는 무서울 정도로 불안정한 분노에 차 있었다. 마치 진작 터졌어야 할 폭탄 위로 얄팍한 껍질을 둘러쳐 놓은 것 같았다. 외부로부터 아주 작은 충격이 가해지기만 하면 큰일이 날 성싶었다. 

마틸다는 니카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졌다.

“후작님께선 이른 아침에 잠시 성을 비우셨습니다. 경의 아침잠을 구태여 방해하고 싶지 않다 하셨습니다.”

“언제 돌아오지?”

마틸다는 니카가 피를 쏟으며 시녀를 겁박한 일에 대해 전해 듣고 어렴풋한 짐작을 했었다.

언젠가 올 것을 각오했던 순간이었다. 바란이 연출한 무대에서 마틸다는 기꺼이 아들같이 소중한 후작이 원하는 대로 연극을 벌였다. 

의원은 기억이 아예 돌아오지 않은 사례는 흔하지 않다고 몇 번이고 그녀에게 귀띔했었다. 모두 알고도 그렇게 했다. 바란은 마틸다의 간언은 신경 써서 듣는 편이었으니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다면 비극적인 상황은 닥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었던 것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탈타미오 가에 헌신하고 있는 그녀의 세상에서 바란의 행복보다 값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기만의 죗값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그때는 그녀도 책임을 질 작정이었다.

“니카 경.”

마틸다는 부드럽게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바란 만큼은 아니어도 니카 역시 그녀에게 있어서는 어린 청년이었다. 비록 마수의 피가 섞여 꺼림칙한 인상을 주기는 해도, 딱딱한 겉껍질과는 달리 속이 조갯살처럼 약하다는 것을 마틸다는 알았다. 괜히 끼어들어 상황을 망쳐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주름진 손으로 니카의 꽉 말아 쥔 주먹을 감쌌다.

“오늘, 내일 안으로는 돌아오실 겁니다.”

니카는 마틸다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 그녀의 눈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늙은 시녀 역시 모든 전말을 알고도 니카를 기만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허탈한 웃음만 났다. 니카는 여태 그녀를 썩 좋아했었다. 배신감 역시도 그만큼 컸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분만 같아서는 그녀를 훌쩍 밀쳐버리고 싶었지만 늙은 인간들은 까딱 잘못하면 황천길을 건너기 십상이었다. 

니카가 힘쓸 것 없이 미지근하고 축축한 마틸다의 손은 곧 떨어져 나갔다. 마틸다를 물끄러미 보던 니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숨이 막힌다. 벌집처럼 제왕을 위해 돌아가는 이깟 잔악후작의 소굴을 왜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라고 생각했을까? 기억이 없다고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인가?’

사사로운 감정을 털어냈는데도 평소보다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마 돌아온 기억의 무게일 것이다. 왕녀에게 헌신하던 니카 경의 기억이 여기서 거짓으로 점철된 기반 위에 쌓은 그깟 감정들보다 무겁다는 증거였다.

아직도 머릿속에서는 어떤 사실을 상기해내면 그것과 연결된 기억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련의 과정이 무수히 반복되고 있었다. 그 탓에 머리가 견딜 수 없이 지끈거렸고, 또 주의는 얼마나 산만해졌는지, 옆에 누가 서 있는 것도 자꾸만 잊어버렸다.

마틸다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 다 괜한 소리처럼 공기 중에 흘러 다녔다. 니카가 건성으로 손짓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마틸다는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시인해야 했다.

발밑에 조각난 도자기 화병이 차였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니카는 울화가 치솟아 그것을 거세게 걷어찼다. 단단한 벽면에 부딪혀 이미 조각났던 것이 더 작은 조각으로 깨어졌다. 

방을 정리하겠다는 시녀들에게 니카는 특유의 가라앉은 신경질을 쏟아냈다. 당장 니카가 이성적으로 굴어주는 것만 해도 마틸다는 감지덕지할 따름이었다. 그녀는 순순히 시녀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니카에게 여태 보이지 않던 진실들이 스며들었다. 자신이 북녘의 탈타미오에 사로잡혀있다는 것, 곧 겨울이 드리우면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험한 날씨가 몰아칠 거라는 것, 그 밖에 기억을 잃은 니카가 여상하게 보아 넘겼던 것들이 니카 경에게는 모조리 다 족쇄로서 재해석되었다.

니카는 그가 기억을 잃게 된 정황을 잘 떠올릴 수 없었다. 이것도 기억상실의 영향인 것 같았다. 왕녀와 그 일행을 먼저 보내고 뒤에 남아 시간을 끌던 것, 대공의 기사에게 한쪽 어깨를 깊게 베였던 것, 돌연 나타난 잔악후작이 그를 도와 기사들을 처치했다는 사실 이후로는 그저 까무룩 기억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대체 왜 사사바란 공작의 기사를 다 죽이면서까지 나를 도왔지?’

그 자리에 니카를 처치하려고 칼을 빼든 기사가 열다섯이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니카는 용케도 목숨을 부지했을 뿐만 아니라 사지 멀쩡히 살아남아 여기 탈타미오 성에 있다.

‘나는 너의 연인이야.’

이 모든 촌극의 중심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란 탈타미오. 니카가 사난타 성에서 죽인 클라텐 탈타미오의 하나뿐인 형제. 대공의 심복. 세간에서 잔악후작이라고 불릴 만큼 대공의 인간 사냥에 앞장을 섰던 남자. 어린아이, 여자와 노인까지도 자비 없이 죽이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자. 니카는 늘 그에게도 감정이라는 것이 있는지 궁금했었다.

‘널 좋아해. 네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니카는 이를 꾹 악물었다. 그 따뜻한 눈길이 마음속에 어떤 파문을 남겼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니카가 이 말이 온전히 거짓이었을 거라 확신하는 이유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었다. 바란에게는 니카를 증오할 동기가 있고,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었으니까.

니카는 설령 그것이 왕실의 명령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그의 동생을 죽였고, 마주칠 때마다 경멸을 숨기지 않고 면전에서 모욕을 퍼붓곤 했다. 온실 속에서 불쾌한 말장난으로 왕녀를 모욕한 바란에게 니카가 으르렁대며 서로를 처음 알았다. 

첫 단추가 그렇게 꿰이고 그다음에는 마주치는 족족 칼부림이 났건만 그 안에 어떤 낭만을 기대할 수 있을까?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 소리인지는 구태여 저울에 달아볼 필요도 없이 명백했다. 왕녀의 최측근 기사를 사로잡고 그의 뿌리 깊은 애정결핍을 공략하여 얻어낼 만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니카의 마음을 얻는 과정이 다소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워낙 괴짜인 잔악후작이 이것을 마치 유희라도 되는 듯이 도전과제로 삼고 덤볐다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바란이 여태 꽤 그럴싸한 얼굴로 기억을 잃은 니카에게 사랑을 속삭이기는 했다. 눈빛도, 입맞춤도,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와 하잘것없는 몸짓마저도 마치 정말로 니카를 사랑하는 것처럼 꾸며냈다.

‘거짓말을 많이 했다며 눈 가리기 식으로 털어놨었지. 비겁하기 그지없다. 죄책감을 피하거나 나를 조롱하려고 그랬을까?’

자연스레 떠오르는 해사한 웃는 얼굴에 니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니카의 안에는 바란과 함께 시간을 보낸 기억이 전부 남아 있었다. 바란의 기만에 온 몸에 피가 가시는 것 같은 환멸과 배신감이 드는 한 편, 우습도록 어리석은 희망도 상자 안에 갇힌 불빛처럼 제 존재감을 뽐냈다.

열여덟 살 니카의 조각이었다. 니카는 이 두 가지 마음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이 못내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의 존재 속에서 애정에 열광하는 그 어리숙한 부분만 도려내 내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의 니카.’

귓가가 간질거려서 괜히 귀 언저리에 부는 바람을 손을 휘저어 밀쳐냈다. 그러다가 이내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그 잘난 입술로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나 보자. 무슨 생각으로, 또 얼마나 비위가 좋아서 그런 건지. 그는 무슨 낯으로 대답을 할까? 나는 정말로 전부 다….’

니카는 이를 꼭 악물었다. 움킨 손아귀에 새빨간 손톱자국이 박혔다.

‘전부 다 처음이었는데.’

* * *

상단의 인원과 규모는 정찰병이 전해온 정보대로였다. 용병이 일곱, 노예는 다섯, 상인이 둘 있었고 고대룡의 뼈를 어디에 감췄는지 모르게 짐 나귀 셋과 운송용 마차 둘을 끌고 있었다.

“저 중에 어디에 뼈가 들었는지 어떻게 알지?”

“일제히 공격하는 수밖에 없을 성싶습니다.”

“이상하군.”

검은 옷가지와 진흙으로 위장한 바란 일행은 시야가 트인 언덕배기에서 기사 셋과 잘 훈련된 기병 열을 거느리고 은밀히 상대를 뒤쫓았다. 검은 복면 위로 드러난 바란의 반듯한 눈썹이 찌푸려졌다.

“정말 이상해. 생각보다 인원이 너무 적지 않으냐.”

“은밀히 움직이느라고 그랬을 겁니다.”

바란은 적절한 시점에 수신호를 보내 기사 셋을 각기 위치로 가도록 지시했다. 일행이 미리 지시된 작전대로 갈라져 언덕 아래로 말을 달렸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나타난 화적떼에 상인들은 얼른 용병과 노예들을 앞세우고 안으로 물러났다. 탈타미오의 기사 하나가 마차의 연결부를 끊고 말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핏자국?’

천으로 골조 위에다 지붕을 씌운 운송용 마차에는 붉은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바란은 이상한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화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와중이었다.

머리칼을 반쯤 면도한 용병이 전투용 도끼를 들고 덤벼들었기 때문에 바란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비쩍 곯은 몸매가 도드라졌다. 상단의 노예들이 맨몸으로 바란에게 한꺼번에 달라붙더니 그를 힘껏 밀쳐댔다. 

그 탓에 말 위에서 굴러떨어진 바란은 가까스로 험악한 용병의 공격을 피했다. 돈 받고 사람을 죽이는 이들치고는 실력이 형편없었다. 바란은 이상한 표정으로 싸구려 가죽 경갑을 걸친 용병의 가슴을 찔러 죽였다. 

상황은 싱거울 만큼 빠르게 정리되었다. 작전대로 막다른 골짜기까지 몰아내서 습격하는 단계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잘 훈련된 탈타미오의 사병은 별다른 부상자조차 없이 용병들을 죽이고 상인과 노예들은 겁박해 사로잡았다.

“흐어억!”

짐 마차에서 물건을 수색하도록 보낸 병사가 숨넘어가는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

줄곧 위화감에 시달리던 바란이 화들짝 놀라서 검을 고쳐 잡고 외쳤다. 그에 응답하듯 마차 안으로부터 의외의 인물이 걸어 나왔다. 온통 검붉은 색으로 맞춘 멋스러운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바란은 멈칫 어깨를 떨었다. 갑옷이나 검집에 세밀한 세공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결코 한낱 용병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병사의 목을 한 손으로 틀어쥐고 가볍게 공중에 들어 올렸다. 가히 초인적인 힘이었다. 바란은 그것만으로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떻게? 왜?’

등 뒤로 식은땀이 흥건하게 흘렀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바란은 제일 먼저 탈타미오 성안에 남아 있을 니카를 생각했다. 니카는 간밤에 까무룩 잠이 들었을지 몰라도 바란은 벅찬 환희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천장과 잠든 니카의 얼굴만 번갈아 보다가 밤을 지새웠다.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듯 어른거리는 니카의 부끄러워하는 얼굴, 그리고 두개골 안에서 부딪치고 굴러다니며 영 빠져나갈 기미가 안 보이는 그 울먹거리는 음성까지. 꿈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려고 수없이 허벅지를 꼬집고 잠든 그 얼굴을 어루만졌다.

왜 하필 지금이어야 했을까? 바란은 생각했다. 니카는 마침내 그를 사랑하게 됐다! 그 오랜 시간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시점이었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니카가 그랬던 것처럼 초겨울에 늑장을 부려 피어난 들꽃들을 꺾어다가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니카는 수줍게 입을 맞추며 웃어줬으리라. 마른 입술이 깨물리자 곧장 비릿한 맛이 배어져 나왔다. 바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다. 귓등에 새빨갛게 열이 올랐다.

‘이번에 내린 임무 자체가 날 떠보려는 함정이었군.’

“이것 참, 후작보다 내가 한발 빨랐네요.”

투구 너머로부터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니 확신이 섰다.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바란은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가는 병사를 위해 흙바닥에 부복했다. 바란의 낯도 죽음의 문턱에 선 병사보다 나은 상태는 아니었다. 바짝 마른 입술을 핥은 바란은 다급히 머리마저 조아렸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부디 아랫것의 무지를 용서하십시오.”

“뭘 또 우리 사이에 무릎을 꿇기까지 해요.”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낮게 웃으며 거품을 물고 기절한 병사를 바닥에 팽개쳤다. 아랫것들에게 조롱하듯 말을 높이는 괴상한 취미는 여전했다. 그가 곧 투구를 벗었다. 짐 마차로부터 무장한 다섯 기사가 나와 대공의 뒤에 도열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바란이 대기명령을 내리자 화적떼로 위장한 탈타미오의 기사와 기병들이 즉시 검을 거뒀다.

“오랜만이죠, 후작.”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전하.”

“놀란 표정이네요?”

“이렇게 뵙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기별도 없이….”

“친서를 썼지요.”

바란이 받은 적 없다고 답하려던 참에 대공이 품속에서 잘 봉인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런데 난 항상 비둘기들이 믿음직스럽지가 않았거든. 내가 직접 가는 게 차라리 더 빠를 것 같았어요.”

그는 연서를 전하는 어린 청년처럼 수줍게 바란의 품에다가 친서를 찔러 넣었다. 말간 미소를 띤 대공의 얼굴은 마치 세상의 모든 선하고 유약한 것들을 모아다가 사람으로 빚어낸 듯이 섬세했다. 힐벤 대공이 미소 짓는 순간에 드라코슨 혈통 특유의 분가루를 바른 듯 뽀얀 금발이 눈부시게 흩날렸다.

“겸사겸사 후작 얼굴도 보고 말이죠.”

“상인과 용병들을… 회유해서 함께 오신 겁니까?”

“비슷해요. 나머지 상단을 다 죽인 뒤에 살아남은 용병들에게는 네 배의 값을 치르기로 약속했어요. 신용이니 뭐니 저들끼리 사달을 벌이고 결론을 냈더군요.”

바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랬다간 용병길드에서 제명이 될 텐데요. 징계도 있을 테고.”

“글쎄요. 뭐, 위험은 이만 저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가 오손도손 살아가려는 환상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니까. 후작은 가끔 그런 상상 안 하나요?”

“…….”

바란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미묘한 미소를 머금은 대공의 모습에 조마조마한 불안감이 커져만 갔다.

탈타미오와 롱가든을 잇는 길목은 예로부터 바람골로 유명했다. 곱게 기른 머리채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휘날리자 대공은 귀찮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꽂으려고 수없이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고운 미간을 찡그리더니 욕지거리를 했다.

대공은 거리낌 없이 손을 뻗어 바란이 허리춤에 찬 장검을 뽑아냈다. 벼락처럼 뽑혀나가는 검에 놀란 바란이 움찔 뒷걸음질을 쳤다. 누구에게 그 검 끝이 향하게 될지 추리하느라 바란의 파란 눈동자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포로들을 갖고 놀았으면 갖고 놀았지, 편하게 보내줄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뽑아든 검이란 말인가? 

고민에 빠진 바란의 모습을 본 대공은 어린아이를 곯리는 것처럼 짓궂게 웃었다. 바란은 대공이 웃을 때마다 늘 그 안에 깊숙이 박힌 가식을 느끼곤 했다. 찜찜한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검이 괜찮네요.”

바란의 검을 허공에서 몇 차례 휘두르던 대공은 검을 내리꽂아 두고 긴 머리카락을 끌어모아 한 손에 움켰다. 이쯤 되면 바란도 대공이 하려는 괴벽스러운 짓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해하려는 노력은 겉치레로라도 들지 않았다.

대공은 다른 손에 검을 집어 들었다. 그는 곧이어 자신의 결 좋은 머리칼을 단번에 잘라냈다. 고귀한 드라코슨의 머리카락이 황량한 먼지 바람을 타고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한 움큼 자른 것을 물끄러미 내려 보던 대공은 별안간 바란에게 다가와 그 머리카락 자른 것을 바란의 위에다가 뿌렸다. 가느다랗고 하늘하늘한 가락들이 온 몸과 머리채에 들러붙는 것이 마치 벌레가 오르는 듯 간지럽고 불쾌했다.

“…기르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하얀 궤적을 따라 바란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한순간에 애물단지가 되면, 여태 애지중지하던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윽!”

“나는 인간들이랑 달리 미련이나 온갖 어설픈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요. 후작.”

백면서생 같은 얼굴과는 달리 우악스럽게 커다란 손바닥이 갑자기 바란의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머리가죽이 딸려 올라가 머리카락이 왕창 빠져버릴 것처럼 아팠다. 바란은 고통스럽게 고개를 젖혔다. 여전히 점잖은 목소리로 대공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살거렸다.

“싸구려 남창처럼 새빨갛게 염색해대는 거 그만뒀나 보군요. 난 마음에 들었는데, 아쉽게 됐어요.”

힐벤 대공은 친근하게 달라붙어 바란의 목덜미와 어깨를 가린 검은 옷가지를 들춰보았다. 

“개한테 물린 건 좀 괜찮아요? 여기 붕대 둘러놓은 게 물린 상천가?”

“이제는 많이 아물어서 괜찮습니다.”

“괜찮다니.”

바란의 머리칼을 놓아준 대공은 짐짓 부드럽게 다독이는 양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빗어 내렸다. 감촉만으로는 니카의 것과 비슷하게 투박하고 울퉁불퉁한 손이었다. 바란에게 주는 감상으로 따지자면 하늘과 땅 만큼이나 판이하게 다르니 우습기도 했다.

“친히 병문안을 왔더니 환자가 멀쩡히 두 발로 돌아다니고 있으면 내 꼴이 뭐가 돼요.”

‘병문안? 상단을 공격해서 용의 뼈를 빼앗으라고 지시해 놓고?’

항상 그렇듯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애초에 상단을 습격하라던 은밀한 임무도 바란을 떠보고자 잘 파둔 함정이었다는 쪽으로 바란의 의견이 기울었다. 

탈타르에서 탈타미오까지 오는 길은 밤낮으로 말을 달려도 일주일이 걸렸다. 바란이 부상을 당했다고 알린 것이 고작 이 주일 전인 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했다는 소리였다. 잇따른 승전보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올랐다지만 이런 시점에 전선을 비우는 것은 아주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직접 살피러 찾아와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오시는 줄 알았다면 성대히 준비를 해뒀을 것을요.”

“성대한 준비? 다리 벌리고 침대에 누워 있었을 거라는 말인가요?”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바란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익숙한 모멸감이 바란을 공격했다. 대공은 정작 비역질에는 질색을 하는 주제에, 칠 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바란이 남창이라는 단어에 큰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하며 일부러 이런 식의 음담패설을 일삼곤 했다.

대공의 기사들은 칼솜씨만 좋은 게 아니라 대공의 심기를 맞춰주는 솜씨도 탁월했다. 우직하게 무게를 잡는 저 뒤의 사사바란 경을 빼곤 다들 눈치를 봐 가며 박장대소 중이었다. 바란은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봐두었다. 몸을 떨며 웃던 대공이 문득 무표정한 바란을 내려다보며 정색을 했다.

“씨발, 왜 농담에 보조 하나를 못 맞춰요. 재미없게.”

묵묵한 눈동자 때문에 대공은 심기가 더 상했다. 변덕스러운 심기는 바로 주먹질이 되어 나타났다. 뱃가죽을 후리는 주먹 탓에 바란의 머리가 아득해졌다. 멀건 위액이 울컥 올라오는 것을 토해냈다. 

바란은 속으로 수없이 욕지거리를 했다. 가쁘게 숨을 내쉬다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올려다보니 대공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 것이 그 증거였다. 그가 폭력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는 순간에 더없는 희열을 느낀다는 것을 바란은 잘 알았다.

종잡을 수 없는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며, 바란은 복부를 감싸 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통보다도 초조한 마음의 압박감이 더 컸다. 대공이 니카의 존재를 알아서는 안 됐다. 

말머리를 돌리기 전에 바란은 행동이 은밀하고 민첩하며 기마에 재능이 있는 병사에게 눈짓을 했다. 성으로 가서 대공의 행차를 알리라는 것이다. 성과 그다지 멀지 않은 지점이니 별다른 변수만 없다면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레이먼드가 소식을 받아보고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병사가 예를 취하고 말을 몰아 성으로 달려가려는 참에 대공이 훼방을 놓았다. 저의를 알 수 없는 모호한 눈빛에 바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슨 낌새를 챘나?’

“뭐하러 괜한 고생을 시켜요. 대단한 대접 바라고 온 거 아닌데.”

“시장하실 테니 미리 차려놓도록 해야지요. 그래야 재료도 알맞게 조달을 할 겁니다.”

“음… 후작 말도 일리가 있네요. 많은 인원이 한번에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건 주방장에게 실례지요. 아무래도 입을 좀 줄여야겠는걸.”

바란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칠 년 간 대공을 겪어온바, 그는 이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대공은 사로잡은 상인과 노예들의 포박을 풀어준 뒤 어서 도망들 가지 않고 뭘 하냐고 부추겼다. 흙바닥을 손톱으로 할퀴며 허겁지겁 달려나가는 이들의 뒤통수에다 대고 대공이 활시위를 겨눴다. 평소 인간 사냥을 즐기는 대공인지라 달아나는 이들의 뒤를 겨누는 자세는 능숙하기까지 했다.

거센 바람에 처음 한두 발 화살은 도망치는 노예와 상인들을 비껴갔다. 당장 싫증을 낼 줄 알았는데, 대공은 오히려 일이 재밌어지지 않았냐며 천진난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흙 한 줌을 공중에 뿌려 바람을 재고 나서부터, 대공의 화살은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여섯 명까지 무리 없이 쏘아 맞추고 나서 돌풍이 불었다.

“이런.”

대공은 가장 발이 빠른 노예 하나를 놓쳤다. 곤란하다는 듯 뺨을 긁적이던 대공이 곁의 기사를 시켜 노예를 끌고 오라고 지시했다. 저항하는 것을 힘으로 굴종시키는 것에서 쾌감을 찾는 대공을 잘 알기에, 바란은 도망칠 기회를 주는 척 포로들을 풀어주었을 때부터 이 유희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고 있었다. 바란이 지시하자 옆에서 말을 붙잡고 있던 기병이 대공의 기사에게 말을 내주었다.

“후작, 그러고 보니까.”

“말씀하십시오, 전하.”

바닥에 무릎 꿇린 노예에게 활을 겨누며 대공이 웃었다. 문득 생각난 말을 나누고 싶어 하는 친근한 태도였다. 바란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노예를 보며 대공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무식하게 센 힘으로 이 거리에서 화살을 쏜다면 머리를 거의 관통하다시피 할 것이다.

‘저도 모르는 사이 죽을 수 있으면 차라리 형편이 낫지.’

“같이 이러고 있으니 옛 생각나지 않아요? 와, 그간 우리가 바쁘기는 바빴나 봐. 마지막으로 사냥 나갔던 게 벌써 한 일 년은 됐겠는데요.”

“살려주세, 살려, 살려주세, 나으리….”

“늘 후작이 사냥감을 몰아오면 내가 이렇게… 아, 이런. 실수.”

실수처럼 문득 활시위를 놓자 굽었던 활이 거세게 튕기며 노예의 폐부에 처박혔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바람 소리를 내며 노예가 피를 토했다. 교묘한 솜씨로 급사를 피했다. 바란은 잠자코 얼굴에 튄 핏방울을 소매에 닦아냈다. 대공은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활대로 노예의 급소를 후리고 가랑이 사이를 밟으며 조롱했다.

“히힉, 힉, 뭐야. 이 새끼 이것도 못 견디고 죽었어요. 후작! 후작, 이것 좀 봐요. 보라니까?”

이름도 모르는 천것의 죽음에 어떤 감상을 느끼기에 바란은 이미 지은 죄가 많았다. 그는 내심 살생이 필요악이라고 여겼으며, 대공의 신뢰를 위해 불필요한 목숨을 앗았던 전적도 있었다.

사실 요 칠 년간 대공의 곁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바란에게 영향을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바란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이미 짜인 각본을 읊는 듯이 말에 기운이 없었다.

“정말 그렇군요, 전하. 천출이라서 나약함은 숨길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인간의 양심이 도화지라면 바란의 것은 수없이 많은 글자가 빽빽이 적히다 못해 온통 검게 물들었을 터다. 이 노예의 이름을 그 위에 적어놓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이다음에 죽고 나서 지옥에서의 형량이 약간 더 늘어날 뿐이었다. 

대공이 바란의 뺨 위에 미처 닦지 못한 핏자국을 문질러 없애주었다.

“됐다. 이제 깨끗하네요.”

대공은 물끄러미 눈을 올려 뜬 바란의 턱을 움켜쥐었다. 좌우로 돌려가며 샅샅이 살피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 *

니카는 눈을 감고 청력을 돋워 귓가에 들리는 온갖 소리에 집중했다. 그는 꾸준한 단련 덕택에 용인의 신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저 멀리 성벽 너머로부터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뿔피리 소리가 났으며 이내 성문을 여는 도르래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왔군. 드디어. 드디어!’

번쩍 눈을 뜬 니카는 침실의 창문을 통해 성문을 응시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여태 잘난 듯 지껄여 왔던 기만과 거짓부렁이 전부 다 들통났다는 사실을 마주하면 바란이 어떤 표정을 할까 궁금했다. 아마 본색을 드러내고 그 꿍꿍이도 제 입으로 실토하게 되리라.

니카는 붙박은 듯 창가에 서서 그 잘난 면전에 대고 어떤 말을 쏘아붙일지 생각했다. 그러나 습관이란 무서웠다. 바란을 떠올리고 나니 이 모든 배신감이 어디로부터 기원했는지 깡그리 잊어버릴 정도로 마음 한 켠이 달아올랐다. 

목줄을 보면 산책을 나가려는 줄 알고 꼬리를 치는 강아지처럼 니카도 그렇게 훈련이 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 체취를 맡으면 손발이 따뜻해지고, 멀찍이에서 요상하게 뒤섞인 그 머리색을 본 것 같기라도 하면 심장이 신이 나서 내달렸다. 

그래, 한동안 니카에게 있어 바란의 이름은 행복의 동의어였고, 그 말소리는 세상에서 달리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시였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용서를 구한다면 어떻게 하지?’

잘 숨겨왔던 미약한 가능성이 적대감이 약해진 틈을 타 슬그머니 고개를 디밀었다. 바란이 했던 모든 말이 사실이라면? 잔악후작이 거짓말을 곁들여 니카를 우스운 꼴로 만들긴 했거니와 그 안에 진실한 감정이 있었던 거라면.

반쯤은 망그러진 수레국화 줄기를 손가락에 끼우고 저녁 내내 그것을 들여다보던 바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곁에서 니카가 무슨 말을 붙여도 그 하찮은 꽃반지에서 시선 한번 떼어놓기가 어려웠다. 

바란은 그 흔한 미사여구 하나 입에 유창하게 물지 못하고 하염없이 그깟 꽃송이를 보며 니카가 좋다고 말했다. 잘 배운 시인 같던 사람이 형편없이 상투적인 말을 몇 번이고 주워섬겼다. 그것 말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팔랑이는 속눈썹 아래로 갈피를 잡지 못한 눈동자가 소란스러운 탈타미오 성을 내려다보았다. 만약이라는 단어는 새카만 색소 같아서, 단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물잔 안에 온통 그 색이 퍼져나가 흔적이 남았다.

‘그래, 우선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고 나서….’

진흙과 검댕으로 위장한 볼품없는 차림새를 하고 바란 휘하의 기사와 기마병들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의 머릿수를 헤아리는 도중 위화감이 들었다. 북부의 기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림을 한 이질적인 자들이 무리에 섞여 있었다.

선두에서 말을 몰던 남자가 성안에 이르러 고삐를 잡아당겼다. 투구를 벗자 눈이 시리도록 밝은 백금색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투구 안에서 서린 입김과 이마에 옅게 맺힌 땀방울 탓에 잔머리가 살갗에 달라붙었다.

‘드라코슨 왕가의 금발.’

니카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어 남자의 얼굴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가슴이 소란스럽게 뛰었다. 틀림없는 힐벤 대공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이 인간의 껍질을 입은 것 같은 제 1왕위계승권자. 앙살라테와 수리 드라코슨의 적. 바란 탈타미오가 섬기는… 주군.

대공이 두 팔을 호쾌하게 널찍이 벌리고 곁에 선 바란의 어깨를 끌어안는 것이 보였다. 전부터 대공이 변덕스러운 성미치고 바란 탈타미오 후작을 끔찍이 아낀다는 것은 공공연히 돌던 얘기였다.

창틀을 굳게 붙잡고 현기증을 버텼다. 몸은 분명히 이 위에 버티고 있건만 정신이나 영혼, 니카의 모든 의식은 창문 아래로 아득히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영혼이라는 것이 공중에서 낙하한 뒤 바닥에 부딪어 깨어졌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니카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대공을 탈타미오 성으로 데려온 거지?’

의문이 드는 것과 동시에 대답이 떠올랐다. 전선을 이탈하여 겨울이 다가오는 북녘 영지까지 대공이 직접 나설 만큼 주목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기억을 잃은 니카의 존재 말고 또 있을까? 비록 니카와 같은 천출기사가 몸값이나 주요 인물과 교환할 만한 포로는 못 되어도, 왕녀의 최측근 기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문을 통해 얻어낼 정보는 차고 넘쳤다.

마음속 모든 것들이 얼어붙어서 팽창하고 터지며 얼얼한 고통을 안겼다. 언젠가 바란이 했던 소꿉놀이라는 말은 결국 정말이었다. 니카를 놀리고 싶어서였든 무슨 이유에서였든 간에, 바란은 니카의 존재를 그의 배경에 얼기설기 꿰매어 붙여두고 사랑이라는 상투적인 소재를 가지고 홀로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셈이었다.

니카는 이것이 연기인지도 모르고 불같이 빠져들어 미련한 꼭두각시로 이용이나 당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소꿉놀이는 정말 끝나버렸던 것이다. 미움과 경멸보다도 먼저 자조의 헛웃음이 나왔다.

“한심하긴.”

벽을 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면서, 니카는 자신의 안에 쌓아올린 기대감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단번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다. 말이야 얼마나 그럴듯했는가, 변명을 들어보고 판단할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니. 

그깟 하찮은 기대감 탓에 결국 니카는 맨정신으로 왕녀와 스스로의 강직함을 저버리는 선택을 한 꼴이 됐다.

‘잔악후작더러 박쥐 같은 작자라고 욕할 게 아니었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니카가 되찾은 기억의 무게는 그런 것이었다.

* * *

종탑에서 정각을 알리는 종을 쳤다. 바란의 손톱이 아주 빠른 박자로 냅킨이 덮인 무릎을 두드렸다. 긴 식탁 끝, 보통 니카가 앉던 자리에는 포크도 쓰지 않고 나이프만 사용해서 솜씨 좋게 덩어리 고기를 썰고 찍어 먹는 힐벤 대공이 앉았다.

그는 바람에 휘날리는 게 성가시다고 충동적으로 머리를 잘라낸 탓에 머리칼 끝이 비대칭으로 비스듬히 잘린 채였다. 산발을 하고도 그 나름대로의 품위가 느껴지다니 왕족의 피라는 게 정말 별난 것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앞에는 미친놈.’

보통 비어있는 바란의 양 옆자리부터 힐벤 대공의 옆자리까지 우락부락한 대공의 기사들이 자리를 채웠다. 워낙 격식을 안 차리는 대공의 분위기를 아랫사람들이 그대로 배워놔서 다들 식사예절은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었다.

‘옆에는 짐승들이라.’

“후작님.”

와인으로 타는 목을 축이는 바란에게 시녀 하나가 다가와 귓전에 대고 속삭이며 말을 전했다.

“니카 경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침실, 서재, 정원까지… 모두 다 찾아보았는데요.”

대공의 시선이 느껴졌다. 바란은 가슴속이 초조하게 내달리는 것을 숨기려고 애를 썼다. 대화의 마침표처럼 질문을 틀어막는 웃음을 내걸었다. 상석에 앉은 대공 역시도 뜻 모르게 화사한 웃음으로 회답했다. 귀족사회에서는 입술이 미끄러지는 작은 각도만으로도 웃음의 의미가 달라지곤 했다. 바란은 속으로 대공의 심산을 알아내려 갖은 애를 썼다. 

니카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것은 이걸로 세 번째였다. 상황은 전보다 더 나빴다. 또 그 새까만 혈통마를 타고 성 밖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레이먼드가 성곽 밖에 믿을 만한 전령을 대기시켜 두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니카가 그를 만나면 중간에 충분히 빼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바깥이 아니라, 탈타미오 성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다면?’

지켜본 바에 의하면 니카는 우울할 때 방랑벽이 생기곤 했다. 정처 없이 길을 걸으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들이야 세상에 많았다. 바란은 니카의 그런 면이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대공이 머무르는 동안에는 곤란했다.

만약 붙잡힌다는 상황을 가정하면, 바란은 대공의 곁에서 함께해온 시간에 힘입어 허튼 이유를 붙여서라도 변명할 수 있었다.

‘만약 변명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어.’

바란 탈타미오란 삶에 가진 미련이라고는 니카 하나뿐인 기형적인 욕망 덩어리였다. 니카로 인한 죽음은 바란을 한 끗도 두렵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맹목적인 마음에 걸맞은 아름다운 대단원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니카는…. 니카는 상황이 달랐다. 그리고 바란은 대공이 어디까지 잔혹해질 수 있는지 가장 곁에서 지켜봐 온 인물이었다. 속이 불에 닿은 것처럼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타고 남은 자리에 남는 공허한 구멍이 점차 넓어져 갔다.

“마구간, 연무장.”

바란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속삭였다.

“어디든 더 찾아봐 줘. 제발 부탁이야.”

시녀가 조용히 절하고 뒤로 물러났다. 대공이 방금 나눈 대화에 관해 관심을 갖기 전에 바란이 선수를 쳐 싱긋 웃었다.

“유일하고 합당한 왕을 모시는 형제들이여,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주방장 말이 식사가 끝나면 곧 특별한 디저트를 내오겠다는군요.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우리 다 함께 건배를 하면 어떻습니까?”

“헬린 힐벤, 지상의 용!”

힐벤 대공의 왼편에 앉은 사사바란 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늙은 뱀 같은 사사바란 공작의 둘째 아들 되는 사람이었다.

“용의 자손! 용의 자손!”

기사들이 주석으로 된 포도주잔을 테이블 위에 두드렸다. 쿵! 쿵! 쿵! 쿵! 박자에 맞춰 둔탁한 소리가 울리고 진동을 못 이겨 바닥에 떨어진 포크가 시끄럽게 울었다.

‘용의 자손.’

바란은 속으로 되뇌었다.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폭력적인 광증에 시달리는 힐벤 대공이 중앙귀족의 압도적인 지지와 군사력을 빌어 앙살라테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그 혈통의 덕이 컸다. 헬린 힐벤 대공은 드라코슨이 근친혼으로 지켜온, 지상에서 가장 용에 가까운 남자였다.

애초에 당시 그가 갓난애만 아니었다면 새미언 왕 대신 선왕 자리에 앉았어야 했다. 고대룡의 후손이 반만년 간 다스려온 왕국엔 전통적으로 용의 혈통에 대한 뿌리 깊은 집착이 있었다. 

200여 년 전, 권력을 잡은 드라코슨 왕가가 대대적인 숙청을 벌이면서부터 더는 가망성이 없는 소리지만, 그 시절에는 용의 피가 더 짙기만 하다면 신관들의 공언 아래 하루아침에 왕조가 바뀌기도 했다. 

심지어는 천출에서 왕좌에 앉은 전례도 있었다. 고대룡이 지상에서 절멸하면서부터 신전이 나서 신화화 작업에 착수했고, 현재에 와서는 이런 신비주의와 고대룡 숭배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내 형제와도 같은 수족들이여. 우리를 맞아준 탈타미오 후작을 위해서도 건배할까요.”

의자를 밟고 높게 일어선 대공이 음식 접시 사이사이를 밟고 걷어차거나 깨뜨리며 식탁 위를 거닐었다. 마침내 바란의 접시 앞에 섰을 때, 그가 바란을 굽어보면서 외쳤다.

“탈타미오의 선택은 영원을 누리리라!”

기사들은 시끄럽게 수염과 입안에 포도주를 거칠게 들이부었다. 바란도 대공의 타는 듯한 시선에 못 이겨 포도주잔을 높게 들었다. 빛나는 금속으로 된 잔의 바닥이 보일 때까지 술을 뱃속에 털어 넣고 나서야 얼굴을 뚫을 듯 형형한 시선이 가라앉았다.

* * *

바란은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잔을 비울라치면 도로 가득 포도주를 채운 뒤 강제하는데 재미가 들린 대공에게 된통 당했을 뿐이었다. 대공은 무언가에서 재미를 느끼면 보통 그것에 질릴 때까지 끈질기게 붙잡고 깔깔대는 어린애 같은 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와요?”

대공이 말을 붙였다. 복도에서 바란을 기다리던 시녀에게 먹구름을 비롯해 마구간의 말이 사라지지 않은 것과 성문에서 니카를 본 적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아직 성안에 그가 남아있을 거라는 안 좋은 소식을 전해 들은 참이었다. 

술기운에 알딸딸하면서도 안색은 푸르죽죽하게 질린 바란의 모습은 기묘했다. 대공이 한참이나 바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뒷간을 잠깐.”

바란은 간신히 대답하고 고개를 숙여 떨리는 한숨을 땅으로 뱉었다. 술에 취해 그런지 감정을 조절하는 게 평소보다 힘들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한 줄 알면 다음부터 손잡고 가든가요.”

“…….”

“농담.”

칠 년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이렇게 살가운 척하는 말씨 뒤에는 뭔가 충격적인 행동이 뒤따랐다. 바란은 마음을 단단히 했다.

“아, 나도 조금 지나치게 마셨는지 어지럽군요.”

‘개소리.’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란은 이것을 목소리로 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아 입술을 잠깐 매만졌다. 다행히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방에 데려다줘요. 좀 쉬어야겠어요.”

바란이 토할 것 같은 기세로 포도주를 목구멍에 퍼붓는 동안 줄곧 지켜보면서 술을 권하기만 한 작자였다.

‘정작 입에 술은 대지도 않은 주제에.’

대공은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 방까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바란은 우선 얌전히 대공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층계를 올라 최종 목적지로 보이는 복도까지 입을 다물고 걷던 바란은 못 견디고 입을 열었다.

“전하, 이곳은.”

“나도 알아요. 후작의 방이지요.”

태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바란은 막연히 불안한 직감 탓에 문고리를 돌리는 것을 잠시 망설였다. 바란은 무슨 변명을 해서든지 대공의 눈초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공 전하께서 머무르시기엔 번잡하고 정리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대공은 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두 번 말하지 말라는 의사표명이었다. 대공은 바란의 방문을 다짜고짜 열어젖히고 들어섰다. 바란은 피곤한 표정으로 비척이며 뒤를 따랐다.

“좀 씻고 싶어요.”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대공이 바란을 돌아보며 말했다.

* * *

‘여기서 도망쳐야 해.’

복도로부터 소란스러운 대화와 수선을 피우는 발소리가 들렸다. 헬린 힐벤과 바란이 손을 잡고 탈타미오로 입성하는 것을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본 순간부터 니카는 늘 고상하게만 느껴지던 성의 모든 것들로부터 싫증이 났다. 도자기 장식들이나 화병에 꽂은 절화들은 사치스럽고 가식적이기만 했다. 네모반듯한 벽돌이 교차하는 무늬도 못 견디게 답답했다.

니카의 방이 자리한 곳은 서쪽 탑의 최상층이었다. 본래 요새와도 같이 숨 막힐 듯 방어적인 구조를 지닌 탈타미오 성은 후작내외의 방에 관해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중앙 계단을 거쳐 좁고 외진 데다 헷갈리기까지 하는 갈림길을 지나서 나선형 계단을 재차 올라야만 이 방들이 있는 복도가 나왔다. 침입자의 발길에 제약을 걸고 그 사이에 도망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니카는 누군가 대공의 명령으로 그를 찾으러 오기 전에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가슴이 소란스러워도 그깟 감정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잔악후작에게야 짧은 유희였는지 몰라도 이쪽은 목숨이 달렸기 때문이었다.

‘당장 도망칠 수 없다면, 숨기라도 해야….’

바삐 주변을 돌아보며 창문의 높이와 이웃한 방들을 떠올렸다. 옷장과 화장대, 침대 밑이나 커튼 뒤를 꼼꼼히 확인했지만 그럴싸한 묘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니카는 이대로 탈타미오의 하수인들이 들이닥친다면 몇 명까지 맨몸으로 상대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시녀들뿐이라면 가능해. 그 집사는 약골이고, 하지만 대공이 거느리고 온 정예기사들과 탈타미오 가의 병사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니카가 왕국에서 가장 솜씨 좋은 검사로 손꼽힌다 해도 압도적인 머릿수 차이에는 당할 수 없었다.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머리를 쥐어짜던 니카의 뇌리에 번득이며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오래된 성에는 반드시 비밀통로가 있어.’

니카는 고개를 홱 돌려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연무장으로 레이먼드의 눈을 피해서 마실 나갔을 때, 바란은 니카에게 탈타미오 성의 비밀통로를 알려준 적이 있었다.

‘사용인들 중에서도 통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손에 꼽아.’

연무장까지 통로를 통해 지나던 길에 썩은 나무판자로 된 자잘한 출입구들을 수도 없이 마주쳤었다. 니카가 짐작하건대 생각보다도 더 많은 장소가 이 거대한 통로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마치 성 안에 또 다른 성이 하나 더 들어 있는 것처럼 복잡하고도 판이했다. 

니카는 기억에 의존해 벽과 붙박이 책장을 의심스레 더듬었다. 긴박한 상황에 발견한 단 한 가지 묘책이라는 것이 니카가 제대로 아는 바도 없는 성의 비밀통로라니 허탈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것이 사용인들조차 알지 못하는 통로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뾰족한 방도가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한번 걸어볼 만했다. 그것이 잔악후작의 수많은 거짓말 중 하나가 아니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최소한 중앙계단으로 내려가 정문으로 빠져나간다는 발상보다야 현실적이었다.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가 어떻게 했더라? 이걸 어떻게 열었지?’

니카는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다가 머리를 붙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기억을 되짚는 시선이 어지럽게 공기 중을 떠다녔다.

‘통로를 열기 전에…. 촛대를 집어 들었고.’

니카는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은촛대와 부싯돌을 훑어보았다.

‘그런 다음에는 나를 돌아보며 웃었어….’

니카는 바란이 익살스럽게 곁들였던 사소한 움직임까지 더듬어나갔다. 마치 가시가 돋친 줄 알면서도 꽃을 꺾기 위해 들장미줄기를 꼭 움켜쥐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이윽고 손을 붙잡아 끌던 따뜻한 온기가 떠올랐다. 고개를 내저어 감상을 떨쳐냈다.

‘불을 붙인 뒤에, 책꽂이를 옆으로 밀었다.’

책장이 열리던 방향을 생각하면서 니카는 책장의 옆구리에 살짝 패인 홈에다 손가락을 댔다. 이것을 앞으로 살짝 당긴 뒤 벽을 향해 비틀어진 각도로 꾹 밀어 넣자, 책장이 거짓말처럼 가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닫이와 미닫이가 교묘하게 섞인 형태였다.

‘됐다!’

전에 겪었던 대로 안쪽에는 먼지와 거미줄, 숨은 벌레와 쥐가 가득했다. 발을 들이니 이것들이 와르르 더 깊은 곳으로 도망치는 게 느껴졌다. 소름이야 돋았지만 상황이 급한 니카에게는 소스라칠 여유조차 없었다. 

니카는 다급히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입구의 반절을 틀어막은 책꽂이에는 바깥을 내다볼 수 있게 아주 작은 틈이 나 있었다. 의도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인 듯 테두리가 아주 반듯했다. 니카는 그것으로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방 안을 내다보았다. 

얼마 안 있어 문고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다. 시녀들이었다. 통로를 여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시녀들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는 이상은, 그 길로 붙잡혀서 잔악후작과 힐벤 대공의 앞으로 끌려갔겠지. 설사 주먹질을 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거고.’

보는 눈이 많을수록 은밀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좋았다. 몰려든 졸음과 피로로 사람들의 감시가 느슨해지기 때문이었다. 용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유달리 밝은 편이니 움직이는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상황을 봐 가며 요령껏 숨어서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훔쳐 남서쪽으로 향하면 수리 왕녀가 있는 잣자후로 갈 방법이 있었다.

성문을 나서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저번에도 니카는 연무장에 굴러다니는 금속 투구로 얼굴을 숨겨 기사인 양 하고 영주성을 빠져나간 전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마침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잘 알지 못하는 대공의 기사들이 성 안에 여럿 들어와 있는 참이었다. 

캐묻는 소리에 니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신분의 진위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경을 치기 싫어서 문을 열어주고 말 가능성이 높았다. 본래 검문이라는 것이 안에서 밖으로 내보내는 때에는 비교적 소홀해졌다.

‘대공씩이나 되는 작자가 홀로 움직였을 리는 없다. 입성할 때 뒤에 거느린 기사들만 해도 십 수 명이 넘었지. 못해도 그중에 그의 정예기사가 열 명은 될 것이다.’

수중에 검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전장에서 분명히 쥐고 있던 검이니 모르긴 해도 후작이 맡아 보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니카는 이를 악물었다. 서임식 때 일생 단 한 번 받을 수 있는 왕국 기사의 검은 니카가 가진 보물이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찾으려고 나섰다가는 괜한 시간을 끌게 될 테니, 안타까운 마음은 뒤로 하고 우선 검 없이 이곳을 나서는 것이 현명했다. 니카는 짙은 한숨으로 마음을 달래어 보려고 노력했다. 잔악후작이 명예를 아는 남자라면 나중에라도 검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생각의 맥이 끊겼다. 잔악후작의 이름을 떠올리기만 하면 니카를 이루는 톱니바퀴들이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질끈 쥔 손바닥 안으로 땀이 차올랐다. 성안 사용인들의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한동안 시끄러웠다.

“어떡하죠? 서재는 이미 다 둘러보았는데요.”

“더 계실만한 곳은?”

“연무장… 후작님과 종종 대련을 하곤 하셨으니까.”

니카가 성안에서 갈 법한 곳은 다섯 손가락 안으로 추릴 수 있었다. 몇 없는 후보 중에서 이미 두 곳이나 제외된 셈이니, 찾으려면 골치가 아프기도 할 터였다. 시녀들은 곧 종종걸음으로 니카를 찾아 방을 나섰다. 마지막까지 방 안에 남아 미심쩍은 한숨을 흘리던 마틸다마저 사라지자 니카는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 어두운 통로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을까. 사람들의 기척이 잠잠해져 이제 움직여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 즈음이었다. 니카가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어두운 시야 탓에 더욱 민감해진 귓가에 복도로부터의 발소리가 들렸다.

두 명, 니카는 어렵지 않게 유추해냈다. 신발 굽이 바닥에 불규칙적으로 부딪는 소리로 미루어 원래 괴상하게 걷는 사람이거나 술기운이 오른 것 같았다. 니카는 통로 안에서 모퉁이를 두 차례 돌았다. 피부에 근지럽게 와 닿는 감촉은 거미줄이 분명했다. 발소리로부터 멀어지려는 의도와는 다르게 점차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반대 방향으로 돌아 나가려는데, 저 구석에서 새어드는 새하얀 빛줄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니카의 방 책꽂이에 달렸던 것과 같은 감쪽같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숨을 죽이고 방 안을 엿보았다. 기억을 잃은 니카가 처음 눈을 떴던 그 방이었다. 바란이 지내고 있는 탈타미오 후작의 방. 이윽고 예고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며 두 명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헬린 힐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건…. 니카는 바란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어젯밤이었으니 바보 같은 감상이었다. 

당장 얼굴을 마주하기만 해도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오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니카의 마음은 잠잠했다. 뜨거워지기는커녕 머리가 오히려 한없이 차갑게 식었다.

‘두 사람이 왜 같이 있지? 무슨 얘기를 하려고?’

대공이 문을 바깥으로 팽개치다시피 젖혀 열었다. 거센 힘을 못 견디고 문짝이 바깥으로 쭉 벌어졌다가 벽을 치고 돌아와 닫혔다.

“씻고 싶어요.”

힐벤 대공은 크고 작은 전장에 빠지는 일이 없던 이름난 장수이니만큼 생긴 것과는 달리 격식이 없었다. 언젠가 수리 왕녀와 앙살라테 왕자가 동석했던 식사자리에서 은식기를 다 바닥에 팽개치고 맨손으로 게걸스레 칠면조 요리를 뜯어 먹었던 일을 떠올리면 알 만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남의 방에 들어와서 목욕물을 들이라고 할 줄은 몰랐다. 니카의 시선이 대공의 뒤를 따르는 바란의 파리한 낯으로 옮아갔다. 술기운 때문인지 걸음걸이는 비척거렸고 당장이라도 구토를 쏟을 듯 안색이 나빴다.

시녀들이 뜨겁게 끓인 목욕물과 온도를 맞추기 위한 물 항아리를 옮겨두었다. 허리를 꾸벅 접어 절한 시녀 하나가 곁에서 목욕가운을 들었다. 대공은 손사래를 쳐서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괜찮아요. 시중들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한갓 시녀에게까지 말을 높이고도 왕위계승자를 자칭하다니, 정말이지 니카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였다.

“그렇지요, 후작?”

“…나가봐라.”

바란이 시녀를 내보내며 향유가 담긴 설화석고 항아리를 넘겨받았다. 언젠가 바란과 함께 흙바닥을 나뒹굴고 흙투성이가 되어 밤중에 시녀들에게 혼쭐이 나 가며 목욕을 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시녀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려 하는 것이 못내 곤혹스러웠던 어린 니카가 도망을 다녔고, 바란이 가운 한 장 걸친 차림으로 구경을 왔었다. 시녀들을 전부 내보내고 대신 향유를 풀어 목욕물을 봐주던 바란의 모습을 니카는 기억하고 있었다.

‘익숙해 보이시는군요.’

‘으응.’

뱃속이 들끓는 이 불덩이 같은 느낌을 말로써 어떻게 형용해야 할까? 분노…, 그래. 니카는 견딜 수 없이 화가 났다. 자연스럽게 겉옷을 벗어던지는 대공 곁에서 소매를 걷어 올리고 목욕물 온도를 맞추거나 향유를 넣고, 비누거품을 낸 해면으로 대공의 살갗을 문지르는 잔악후작의 모습을 보니 불덩이라도 삼킨 것 같았다.

“후작은 참 내 기분을 잘 맞춰요. 말해 봐요, 내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아도 척척 대령하는 비결이 뭐죠? 물이 얼마나 뜨거웠으면 좋겠는지, 어떤 향유를 쓰고 싶은지 나는 한마디도 한 적이 없는데. 또 이렇게 다 완벽하게 준비해두잖아.”

“전하를 모신지 오 년이나 되었으니까요.”

“기분 좀 내려는데 또 딱딱하게 군다.”

생김새와 어울리는 구석이 없는 험악한 근육질의 몸을 뜨거운 욕조에 담근 대공이 나른하게 웃었다. 바란이 비록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것처럼은 보였으나 대공이 젖은 손을 들어 바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대공의 남첩이라는 소문은 바란이 솜털이 덜 가신 애송이였을 적부터 지금까지 무성했다. 니카는 여태 그 뜬소문이 진실일 가능성에 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특정한 의견을 가졌다고 하기보단 잔악후작의 사생활에 관해서 신경을 끄고 살았다는 말이 더 맞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잔악후작과 보낸 시간이 니카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니카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그들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유추해내느라 진땀을 뺐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에서는 이미 가능성을 셈하여 온갖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눈꺼풀을 감고 귀를 틀어막고 싶은 유약함이 고개를 들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어요?”

대공이 두 가지 색깔의 머리카락이 맞물리는 부분을 손끝으로 훑으며 물었다.

“쓸데없는 짓인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하하, 수리 그 년 따라 하던 거 얘기예요?”

바란은 침묵을 지켰지만 니카는 그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니카도 최근 들어서야 눈치챈 것이지만, 그가 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잔악후작은 거짓말에 능통한 자는 아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 무심코 눈을 피하려 드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왕녀님을 따라 한다는 건 무슨 말이지?’

때때로 소심해지곤 하는 바란이 멋쩍게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어차피 다 너 때문이었어.’ 하던 소리가 기억이 나는 참에 니카는 정말로 종잡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아무리 매도하고 내쳐도 너무 많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바란이 그를 사랑한다는 단서는 일상 속 작은 숨결이나 말장난에까지 너무도 많이 남아있어서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는 정도였다. 이를테면, 그 머리칼. 그 입맞춤. 그 눈빛. 부드러운 목소리. ‘나의 니카’ 하고 부르던.

‘아니야.’

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명백히 놀아나고도 이런 환상 하나 못 이겨서 끙끙 앓는 꼴이라니! 바란이 그에게 줬던 것은 그래 봤자 싸구려 장난질일 뿐인 것을!

‘착각하지 말자.’

바깥에서 쏟아지는 빛살에 닿은 분노 서린 눈동자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머릿속에서 ‘움직여.’ 하는 충고가 맴돌았지만 그게 다였다. 뒤돌아 떠나버리면 될 텐데 니카는 끝내 발을 뒤로 빼지 못했다.

대공은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란의 머리카락을 구겨 쥐었다. 그리고 바란의 머리를 단번에 거품이 가득한 목욕물에 처박아 넣었다. 니카는 깜짝 놀라 방 안을 엿보던 구멍에서 눈을 뗐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바란의 안위만 한 번 더 확인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욕조 안에서 바란의 숨결이었던 공기들이 방울져 거품처럼 오르고 있었다. 니카는 덜덜 떨리는 어깨를 손으로 붙잡고 문지르며 충격을 태연한 척 삼켰다.

‘그래 봐야 잠깐의 심술일 것이다.’

바란은 숨이 모자라 대공의 팔뚝을 본능적으로 할퀴며 반항했다. 그러나 그 머리통을 힘껏 누르고 있는 용의 혈통을 가진 남자의 손이 어찌나 억센지, 바란의 몸부림은 단지 바르작거리는 무의미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안간힘을 쓰는 바란을 한 손으로 짓누른 대공은 심지어 뒤틀린 심기를 반영한 조소를 띠고 있었다.

“후작.”

“으읍!”

“간이 많이 커졌네. 대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말을 해요.”

탈타미오의 이름값은 그리 가볍지 않으니 저러다 말고 끝날 것이다. 니카는 이를 악물었다. 대공의 손속이 잔혹하다는 것은 왕국 전체가 다 알았다. 오체분시를 당하는 것도 아니고 목욕물에 고개를 처박히고 조금 버티는 것뿐이다. 하지만 희뿌연 목욕물에서 올라오는 기포가 점점 없어지고 나서도 대공이 바란의 머리채를 잡은 채 있자 니카의 안에서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났다.

‘인간은 나 같은 용인과 달라. 조금만 잘못 힘을 주면 죽어버릴 수도 있다. 후작도 마찬가지야. 숨을 저렇게나 오래 참지는 못할 텐데.’

니카는 통로의 출입구를 굳센 손으로 매만졌다. 악물린 어금니에서 이빨이 맞물려 눌리는 매서운 소리가 났다. 전혀 상관없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스스로가 우습기 그지없었다. 니카는 얼른 손을 떼어냈다. 

이대로 돌아서 마구간이나 연무장으로 가서 계획한 바대로 움직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바란이 반항하느라 목욕물 첨벙이는 소리가 언젠가부터 끊겨 있었다.

‘잔악후작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지? 그리고 지금 나가서 대공에게 모습을 보였다간 탈출 계획이 전부 다 물거품이 될 것이다. 만일 사로잡혀 포로가 된다면 왕녀님께 폐만 끼치게 돼.’

니카는 애써 시선을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머리의 명령이 움직임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너무 많은 생각이 니카의 안에 있어서, 머리로부터 행동을 지시하는 도로가 꽉 틀어 막혀 체증을 겪고 있는 듯했다.

‘…살아남아서 왕녀님 곁으로 가야 한다. 이깟 날 기만한 남자 하나 때문에 적진에서 개죽음당할 수는 없어.’

이성이 말하는 바와는 다르게, 니카는 일그러진 얼굴로 구멍 너머를 다시 한 번 훔쳐보았다. 그 순간, 바란의 몸이 낚싯바늘에 꿰여 낯선 지상으로 끌어올려진 물고기처럼 무력하게 파드득 떨었다. 곧 바란의 몸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여전히 숨을 못 쉬도록 욕조에 머리를 처박힌 채였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렀다. 뇌리에 아주 많은 생각이 서로 스쳐 지났고 텅 빈 것 같은 가슴에 남은 것은 단 하나, 아주 순수한 공포였다.

“안 돼.”

니카는 이해타산을 단번에 내려놓았다. 들개에게 물려 열이 들끓던 바란을 무력하게 지켜봤던 때와 비슷했다. 용맹한 기사인 니카는 순식간에 잡배들보다도 겁쟁이가 되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은 강력한 동기가 되어 굳은 다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머릿속이 그저 새하얬다.

‘안 돼, 안 돼, 안 돼!’

니카는 저도 모르게 발로 입구를 거세게 걷어차 부수다시피 열었다. 방에 잘 어우러지는 그림 액자의 한구석이 동강 나며 길이 열렸다. 힐벤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 마디뼈가 도드라진 손에 새빨갛고 지푸라기 같은 질감의 머리채가 한 움큼 가득 잡혀 있었다. 

니카를 발견한 힐벤이 비로소 바란의 머리채를 욕조에서 끄집어 올렸다. 대공의 동그란 눈동자가 수차례 말없이 깜빡였다. 니카가 그 손아귀에 아직 붙들린 바란을 흘긋 보니, 눈은 조용히 감겼고 낯이 파랗게 질렸다. 뺨에 송골송골 맺혀서 굴러떨어지는 옅은 빨간 염색약이 핏방울처럼 보여서 니카는 가슴이 선뜩했다.

“뭐야?”

대공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거 참… 둥지에다 뭘 숨겨뒀나 했더니 생각보다 대단한 위인이 튀어나오셨군. 죽었다고 말이 자자한 왕녀의 용인기사 아니십니까.”

그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더니, 바란을 바닥으로 무심히 내던졌다. 마치 못 속의 잉어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것처럼 무심하고도 시혜적인 태도였다. 대공의 시선은 그를 경계하는 니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당장 달려들 생각은 없는 듯, 대공은 욕조 모서리에 팔을 올려놓고 얼굴을 괴어 니카를 빤히 노려보았다. 대공이 움직일 때마다 입욕제가 들어간 목욕물이 찰랑이며 이름 모를 좋은 향기가 코를 찔렀다. 

니카는 쓰러진 바란을 얼른 받쳐 안았다. 코 밑에 손가락을 대거나 가슴팍에 귀를 대어 보니, 바란은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 아직 살아 있었다. 니카의 온몸에 힘이 빠졌다.

‘다행이야.’

대공의 빤한 시선에 살갗이 타는 것 같은 때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다니 이상했다. 복잡한 마음이 다 씻은 듯이 사라지고 크나큰 안도가 니카의 온몸을 따스하게 감쌌다. 가슴을 압박하며 “바란.”하고 목멘 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곧이어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바란이 연신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눈시울에 고통에서 비롯된 물기가 그렁그렁 어렸다. 

니카와 그 뒤에 있는 대공을 한 시야에 담고 나서야 바란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바란은 먼지투성이가 된 니카의 옷자락을 붙잡고 가슴팍에다 헛구역질 같은 잔기침을 쏟아냈다. 이러다 안에 든 장기라도 뱉어낼 지경이었다. 무심코 바란의 등을 두드려주려던 니카의 억센 손이 대공의 흥미로운 눈초리가 닿자 멈칫 허공에 떴다.

* * *

“콜록! 콜록! 윽… 흐으.”

비누거품 섞인 물이 입안에 향기로운 쓴맛을 남겼다. 방을 밝힌 촛불로부터 쏘아진 빛살이 젖은 속눈썹에 부딪혀 얼룩처럼 부서졌다. 바란은 현기증을 호소하며 시선을 들었다.

강인한 턱과 굳게 다물린 입술, 창백한 낯, 토룡의 비늘과 검은 속눈썹까지.

‘니카다. 내 니카. 성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는데, 왜 여기에 있지. 왜 하필 이곳에, 이 시점에.’

맥이 풀려 흐물흐물한 몸을 가누려고 애를 쓰면서 바란은 세상에 둘도 없는 좌절을 맛보았다. 여태 니카와 함께 지내는 동안 불안한 마음을 덮어놓고 달래던 습관적인 낙관주의의 장벽이 무너졌다.

‘니카가 여기 있어서는 아, 안… 되는데.’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상태의 비밀통로, 그리고 나른하게 그를 지켜보고만 있는 대공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갑게 굳은 연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바란은 그가 무슨 말이든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했다.

바르작대는 바란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니카의 입술이 잠시 서로 떨어졌다가 도로 엄숙히 닫혔다. 바란은 그가 무슨 말을 틀어막았는지 궁금했다. 바란이 알던 니카라면 괜찮으냐고 물으며 걱정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시선이 바란의 뺨을 길게 핥으며 지나갔지만 그 안에는 그 어떤 정제된 형태의 위로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왈칵 두려움이 치밀었다.

‘…니카?’

입술을 뻐끔대며 돌덩이 같은 니카의 무릎 위 올려진 손에 무게를 실었다. 천 너머로 미적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따뜻한지 아닌지 헷갈리는 딱 그 정도의 온기. 요 몇 개월 간 바란에게 아주 익숙해진 니카의 온기였다. 

니카의 커다란 손이 바란의 손 위를 지붕처럼 덮었다. 차가운 손인데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바란의 물기 가득한 눈동자에 잠시 희망의 이채가 서렸다가, 이것이 기실 바란의 손을 떨구어내기 위해서였음을 깨닫고 나자 까마득한 절망에 잠겨들었다.

“아….”

잔뜩 쉰 목소리는 그 어떤 말도 되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 한없이 깊은 절망을 드러냈다. 바란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니카를 만지려고 손을 뻗었다. 신기루를 만지려는 여행자처럼 덧없고 또 간절했다. 곧장 매서운 손짓으로 니카가 바란을 뿌리쳤다.

‘…싫어.’

바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코끝과 두 뺨에 뜨거운 열기가 올랐다. 바란은 빛 한 점 없는 아주 깊은 곳으로 침잠되어 익사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정말 익사하기 직전이었던 방금 전과 비교하더라도 훨씬 거대한 고통이 닥쳤다. 바란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듣기 싫은 쉰소리를 빼고는 아무런 말도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싫어. 싫어! 빼앗아가지 마. 나는 아직 못한 말이 많단 말이야. 못해본 것도…. 나는….’

니카의 눈빛은 차가웠고 낯은 창백했다. 여느 전장에서 만났을 때와 다름없는 적대감, 그리고 경멸이 무방비한 상태의 바란에게 몰아닥쳤다. 바란은 니카의 발치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는 환상에 빠졌다.

‘내가 어리석었어. 전부 다 오만이었어요. 니카가 나를 미워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건 다 잘난 체에 불과했다고요. 신이시여, 제가 틀렸어요. 니카를 빼앗아가지 말아주세요. 죽어버려요.’

끝없는 고통의 나락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어 바란을 삼켰다. 

‘죽어버려요, 나는.’

“이 새끼 죽었댔잖아요. 응?”

대공이 손끝으로 바란을 불렀다. 기껏해야 어린아이나 고양이 따위를 부르는 듯한 손짓이었다. 바란은 의식 저편의 머나먼 곳에서 현실의 거센 인력에 이끌려 날아와 땅에 발을 붙였다. 파란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헬린 힐벤. 이가 갈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니카의 존재는 이미 대공에게 노출되었다. 바란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란은 머릿속으로 니카를 상처 입히지 않으면서 그의 안전도 확보할 만한 방법을 헤아렸다. 대공이 데려온 정예기사는 고작해야 다섯, 성내의 비전투인원이 많으나 영지의 사병과 기사들을 끌어모으면 머릿수로는 어떻게든 압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작.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요. 지금 많이 참고 있으니까.”

벌거벗은 채로 별다른 무기도 없이 방심하고 있다고 해서 바란이 대공을 제압할 수 있을까? 용의 후손은 한 손으로 장정의 목을 비틀며 어지간한 상처에는 아픔을 호소하지도 않는 두꺼운 가죽과 생명력을 가졌다. 

용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었다. 왕국 제일의 검사라 불리는 니카 경 정도가 아니고서는 힐벤의 손에 당장 목 졸려 살해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헬린 힐벤의 인내심은 벼룩보다도 작았다. 게다가 이 인내심이 한번 깨어지면 불똥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제멋대로 폴짝이는 벼룩과 닮은 바가 있었다. 

바란은 몸을 바르게 곧추세웠다. 질식의 문턱에서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이 풀려버린 채 말을 듣지 않는 사지가 짐스러웠다.

“계집애 같은 낯짝이니 비역질에 취미가 있을 줄은 진작 알았지만, 그 상대가 왕녀의 용인기사였을 줄이야.”

“소, 송구하게도 왕녀의 기사인 니카 경이 맞습니다, 대공 전하. 하지만 비역질이라니 천부당만부당 한 말씀이십니다. 영지 근처에 시체 같이 널브러진 것을 제가 찾았습니다. 예의 부상으로 기억을 다 잃었더군요. 저는 단지 그를 살려두는 게 더 가치가 있을 거라 판단했을 뿐입니다….”

대공이 바란에게 빈정대며 면도칼이 놓인 협탁을 턱짓했다. 순종적이고 잠잠하던 바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내가 후작의 그 솜씨 좋은 입술을 꽤 총애하기는 합니다만….”

바란이 떨리는 손으로 면도칼을 쥐고 대공의 머리맡에 섰다.

“이렇게까지 독단적으로 숙적을 거두고 입히면서 내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다니요. 이것이 반역에 준하는 행위인 것은 잘 알고 있지요?” 

바란은 면도칼의 날을 비스듬히 눕혀 면도 거품을 바른 대공의 턱 언저리를 매끄럽게 다듬었다. 어차피 말간 피부에 돋아난 새하얀 수염이라 솜털처럼 눈에 잘 띄지는 않았으나 나름대로 억센 구석이 있어 손에 꺼끌꺼끌한 촉감을 남겼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믿음이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바란은 니카를 곁눈질했다. 마침내 눈이 마주쳤으나 불투명한 눈동자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믿었던 연인의 입술이 배반과 기만을 토로할 때 어린 니카는 어떻게 행동할까? 

바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분노는 권력의 표출이었다. 아무리 마음이 들끓고 환멸이 나더라도 니카는 기껏해야 눈물을 일렁이는 게 고작일 것이다. 니카의 위치에서 가능한 가장 극적인 감정표현은 그게 다였으니까. 그리고 바란은 그 눈물을 닦아주거나 끌어안고 위로의 말을 속삭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너를 위해서 하는 일인데, 너를 울리는 게 다 무슨 소용일까?’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는 말은 개살구 같은 위선에 불과했다. 이미 바란은 니카의 마음을 엉망진창으로 할퀴어 놓았다. 바란은 욕심의 거품을 모두 걷어내고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렸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내 손에서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을…. 더 이상 니카를 데리고 있을 수 없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왕녀의 곁으로 돌려보내야만 한다.’

바란은 심호흡을 거듭했다. 이렇게 비참할 데가 있을까? 긁힌 상처만 나도 마음이 미어지도록 애달픈 연인인데, 그의 방패막이 되어주기는커녕 가슴을 헤집는 말이나 뱉어야 하다니. 

여유를 부리는 것 같아도 대공은 잘 벼려진 감각과 이성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바란은 날카로운 눈빛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나긋나긋한 손길로 대공의 턱에 묻은 비누거품을 가볍게 씻어냈다.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제 선에서 처리해 확실한 성과를 가지고 아뢴다는 것이 그만 오만이 되었습니다.”

“성과?”

그 대단한 게 뭔지 들어나 보자는 투로 대공이 픽 웃었다.

“잣자후에 주둔하는 왕자군의 작전을 추궁해내고자 했습니다. 정신적으로 착란을 일으킨 상태의 용인이라면 어려운 상대는 아니니까요.”

바란은 의식적으로 니카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니카의 존재는 바란을 끊임없이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같아서, 뱃머리를 아무리 돌려보아도 결국은 제자리였다.

“하.”

대공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소꿉놀이를 하셨겠다?”

대공이 웃으면서 고개를 움직이는 바람에 엉겁결에 살갗에 날이 꾹 눌려 생채기가 났다. 대공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메마른 벌판 같은 바란의 마음에는 불씨가 당겨지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죽일 수 있다면? 바란은 생각했다. 이 고루한 전쟁을 끝장낼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보다 완벽한 순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손가락에 뻣뻣한 힘이 들어갔다.

‘할 수 있을까?’

곧 두려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바란을 뒤덮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마른 침을 삼켰다.

‘나야 뭐 즉결처형 되거나 간자인 것이 들통 날 때까지 문초를 당할 테지. 하지만 니카는…. 내가 뒤를 봐줄 수 없는 신세라면, 니카는 필연적으로 대공의 포로로 남게 돼.’

뒤에서 “후작.” 하고 부르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니카였다. 얌전히 얼굴을 내맡긴 채 눈을 감고 있던 대공 역시도 이 소리에 주목했다. 몸을 일으키는 움직임에 떠밀려 면도날을 든 손이 뒤로 조금 물러났다. 

“…나에게 줄 수 있는 진실이 단 한 가지 있다고 말했는데, 기억합니까?”

바란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어리숙하던 어린 니카의 말씨에 냉소가 섞여 있었다. 바란이 위화감의 원인을 완벽히 파악하기도 전에 대공이 먼저 낌새를 채고 픽 웃었다. 니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바란의 어수룩한 시선이 니카를 따라 위로 올라갔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당신 손에 들린 건 날붙이고, 저 개자식이 내맡기고 있는 건 목이라고요!”

“어라…. 개자식이라니, 무엄한 소리를 하는군요. 당신이 섬기는 왕녀도 이 핏줄인 걸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용인.”

“닥쳐라!”

니카가 이를 드러낸 들개처럼 공격성을 내비치자 대공은 목소리를 높여 사사바란 경을 불러들였다. 고된 행군 뒤에 처음으로 주어진 휴식에도 술에 취하거나 일찍 잠드는 일 없이 버틴 충견이었다. 여태 대공의 은밀한 명에 따라 발소리를 죽이고 방문 앞에 진을 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사바란 경은 문을 열고 방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허리춤에 있는 왕국 기사의 검을 뽑았다. 최고급 강철을 왕실의 유일한 대장장이가 수없이 담금질해 만든 검으로, 어린애 손에 들어가도 장정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도는 수준의 걸작이었다. 맨손으로 버티고 선 니카와의 실력 차이를 어느 정도 메꿀 법하다는 소리였다.

사사바란의 검이 사정없이 니카의 오른 어깨를 내리쳤다. 니카가 몸을 조금 트는 것만으로 검의 궤적이 그를 비껴갔다. 팔을 단번에 동강 낼 수도 있는 힘이었다. 니카는 단단한 주먹에 힘을 실어 사사바란의 안면을 강타했다. 기억을 잃은 동안 단련에 소홀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니카는 압도적인 차이를 보였다. 과연 천출에서 기사서임까지 받은 실력이었다.

‘니카의 말이 맞아. 어쩌면 지금, 이 손으로….’

바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면도칼 아래 내맡겨진 대공의 목덜미를 훔쳐보며 급소를 가늠했다. 아무리 두꺼운 용의 가죽을 가졌다 해도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단번에 경동맥을 잘라낸다면 버틸 도리가 없을 것이다. 서늘한 기온에도 불구하고 진땀이 배어 나왔고 안구에 핏발이 섰다. 평정을 잃지 않도록 아랫입술을 간간이 깨물었다.

“바란 탈타미오, 뭘 멍청히 서 있는 거냐! 해치워버려!”

사사바란을 상대하던 니카가 노성을 내질렀다. 격렬한 움직임에 헝클어진 머리칼 너머로 드러난 왼쪽 얼굴 위, 토룡의 비늘이 흥분한 파충류처럼 와르르 부풀어 일어섰다. 본능적인 혐오감이 치미는 광경이었다. 

니카의 목소리에 섞인 메스껍도록 강한 압박감에 바란은 움찔 몸을 떨었다. 대공의 빈틈만 엿보고 있던 서슬퍼런 긴장이 단번에 깨어졌다. 명령조라니? 바란의 어린 니카는 결코 함부로 말을 낮추지 않았다. 저렇게 죽일 듯한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러니 눈앞에서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대공의 호위 사사바란 경과 호각을 다투며 싸우는 저 남자는 어린 니카일 리 없었다.

‘기억이…!’ 

거세게 떨리는 팔뚝을 다른 손으로 꾹 붙잡아 억눌렀다. 바란의 눈동자도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기억을 찾았으며, 여태 아닌 체 바란을 놀려왔던 것일까? 

수많은 의문이 잇따랐다.

무슨 현상이든 간에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전조라는 것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반면에 이건 너무도 갑작스럽다. 바란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이 마주한 이 상황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에 밟히는 구석도 일부러 깊게 고려하지 않으려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니카는 분명히 최근 악몽에 시달리며 신경이 날카롭게 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열여덟의 니카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던 냉소적인 말버릇도 일삼고는 했다. 이 모든 일은 이전부터 차근차근히 쌓아올린 불행이었다. 불안감에 가슴을 졸이면서도 바란은 늘상 믿고 싶은 대로만 니카를 비추어 봤으니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맙소사. 난 정말 구역질 나오도록 이기적이야.’

눈앞의 니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왕녀의 기사였다. 더 이상 바란이 말장난 같은 소유격을 붙여 일컬을 수 없는 사람. 입바른 소리만 하는 벽창호 같은 기사. 맨손으로 사사바란의 검격을 상대하던 니카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바란이 놀라 뛰어들려는 순간에 니카의 다리가 사사바란의 정강이를 걷어찼고, 너무나도 빠른 시간에 일어난 이 공격 때문에 사사바란은 볼썽사납게 자리에 엎어져야 했다.

니카는 이글거리는 눈을 들어 바란을 노려보았다. 만일 저 분노에 타오르는 눈길로 글자를 쓸 수 있다면, 니카는 분명히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게 분명했다. 

‘왜 가만히 있지?’ 하는 말.

혹은 더 핵심으로 들어가서, ‘나를 사랑한다며?’ 하는 말. 어느 쪽이건 간에 바란이 대답을 해줄 수 없는 말들이었다.

“후작.” 하고 낮은 목소리가 바란을 불렀다. 화들짝 놀라 내려다보니 대공의 거친 손이 바란의 손목을 타고 오르며 온기를 남기고 있었다. 찰나 동안에 거대한 갈등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바란을 덮쳤다. 경련하는 입술을 애써 사리물고 감췄다. 

대공의 웃음소리와 함께 저만치서 무기도 없는 결투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보전하며 발악하는 니카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네가 했던 말을 기억해라! 분명히 나에게 한 가지 진실을 주겠다고 했어!”

“그거 재미있군요.”

대공은 손가락 두 개로 바란의 팔뚝을 거닐어 올랐다.

“무슨 삼류 소설도 아니고, 숙적끼리 기억이라느니 진실이라느니 아주 열렬하시군. 후작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직 대공은 바란의 손아귀에 급소를 내맡기고 있었다. 바란은 그가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파랗게 질린 입술을 떠는 바란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며 대공은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혀차는 소리를 냈다.

“나는 적어도 후작이 그렇게 시시한 놈이 아니라는 확신은 있거든요.”

바란은 면도칼을 붙잡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깟 도박에 걸어보기에는 저 니카라는 판돈이 너무 거대했다. 바란은 만에 하나라도 니카를 잃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니카가 했던 말을 인용하자면, 니카에게 왕녀의 존재가 그렇듯이 바란에게 있어서는 니카야말로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니카를 위험에 빠트리느니 이 자리에 고꾸라져 죽는 게 나았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전하. 사실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제 동생이 밤마다 꿈에 나와서 복수를 부르짖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충동적으로 벌이게 된 일입니다. 그 아이가 누구 손에 유명을 달리했는지는 전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니카의 시선이 느껴졌다. 신 앞에 나아온 죄인처럼 바란은 몸을 떨고 식은땀을 냈다.

“기회가 찾아오자 머리가 돌아버리겠더군요. 눈을 뜨곤 기억을 잃었다며 가련한 척을 하는데, 아, 그 순간 저는 저 피도 눈물도 없는 용인기사가 원수와도 같은 이 탈타미오의 품에서 애정을 갈구하며 우짖는 꼴을 꼭 봐야겠다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바란은 다시 한 번 비겁하지만 안전한 길을 답습했다. 면도칼이 바닥에 떨구어졌다. 니카의 시선이 물끄러미 바닥을 구르는 날붙이에 달라붙었다. 아무렴 돌팔매에 머리가 깨져 죽어가는 부모를 길바닥에 버려두고 홀로 헐레벌떡 달아나던 비겁한 바란 탈타미오가 달라졌을 리 없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생각했지요.”

오랜 시간을 들여 쌓아온 둘만의 비밀 암호, 농담거리나 좋아하는 것들, 소소한 카드게임, 벽난로 불, 온기. 바란은 일 분 일 초가 흐르는 것이 애틋하고 아쉽기만 하던 선물 같은 일상을 되새겼다. 대책 없는 욕심이 얻어낸 성과로는 만족스러운 편이다. 추억할 것이 이렇게나 많아서 다행이었다. 니카가 그를 보고 웃어줄 일은 다시 없을 테니까. 

바란은 뻣뻣이 고개를 세웠다. 더없이 매력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용인 기사에게 이런 순진한 면모가 있는지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잡종과 기꺼이 함께하려는 사람이 정말로 존재할 거라고 믿다니. 저야 뭐 딱 질색입니다만, 전하의 여흥 거리나 되었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뭐, 아무튼….”

바란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마다 니카의 가슴을 거세게 할퀴고 지나갔다. 니카는 거칠어진 숨으로 가슴을 들썩거리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극독 같은 말을 머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입술이었다. 

저 입술이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열여덟의 니카는 그것으로 발음하는 모든 단어마다 사랑할 수 있다 자신했었다.

“사랑하는 아우의 목을 자른 작자에게 제가 진심이 될 리 있겠습니까?”

그렇게 자신했던 적이 있었다.

* * *

탈타미오 성의 지하에는 견고한 감옥이 있었다. 예로부터 전쟁 포로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장소였던 까닭에 탈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미로와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입구에 발을 들이면 곧장 등골이 서늘한 습기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었다. 

입구부터 가장 안쪽의 독방까지 굴러다니는 인간의 유해와 온갖 불쾌한 오물들, 벌레, 생쥐들이 부지기수였다. 니카는 그를 포박한 쇠심줄처럼 질긴 굵은 밧줄이 감옥을 향해 당겨지자 몸부림을 쳤다.

“잔, 악, 후작…!”

씹어뱉듯 나온 소리에 바란이 발길을 멈추었다. 앞장서서 태연한 낯으로 횃불을 밝히던 바란의 얼굴에 금이 갔다. 감정이 거세된 그의 시선이 분노가 깃든 니카의 얼굴을 한 차례 쓸었다. 망연히 서 있는 바란을 유심히 지켜보던 대공이 코웃음을 치며 횃불을 낚아채고 그를 앞질러 걸었다.

“기억을 잃었다니, 증명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요. 차라리 잘 구슬려서 한번 갖고 놀았다는 말이 더 믿을 법하겠어요.”

니카를 붙잡은 기사들의 행렬이 그 뒤를 따랐다.

“잔악후작. 잔악후작!”

목구멍을 가로막았던 것이 단번에 터져나가 없어진 듯이 니카가 점차 목청을 높였다. 바란을 뒤돌아보는 니카의 새카만 동공이 뾰족하게 갈라졌다. 스산하고 괴기스러운 생김새는 왕국군이 남쪽 국경 바깥까지 몰아낸 마수의 존재를 직접 마주하는 듯한 본능적인 혐오와 공포를 주었다. 

대공의 정예 기사들은 내심 질겁했을지언정 니카를 붙잡은 손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용인의 괴력에 니카의 왼팔을 붙들고 있던 기사 하나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대공의 곁을 지키고 있던 사사바란 경이 달려들어 다른 기사들과 협력하여 모진 손길로 니카를 지하로 끌어내렸다.

“사사바란 경. 비켜요.”

대공이 손짓했다. 사사바란 경은 대공이 하명하기만 하면 뭐든 되묻는 법이 없었다. 그는 잠자코 니카의 멱살을 붙든 손을 풀어낸 뒤에 곁으로 비켜났다.

“주제를 좀 알고….”

대공의 주먹이 니카의 뺨을 후려갈겼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다. 양옆에서 기사들에게 사지가 결박되어 있으니, 니카는 반항하거나 주먹에 맞아 계단 아래로 구르는 일 없이 축 늘어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대공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더니 뻐근한 손목을 두어 차례 돌렸다.

“토룡이면 토룡답게 흙바닥이나 기어요. 용인.”

목소리가 불퉁했다. 바란은 대공의 목소리가 띤 불만스러운 음색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대공은 방금 때린 것의 반대쪽 뺨을 찢어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갈겼다. 니카의 고개가 때리는 대로 힘없이 움직였다. 기사들은 저항이 약해진 니카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계단을 내려갔다. 바란은 수차례의 심호흡 끝에야 떨리는 마음을 아주 깊은 곳으로 감출 수 있었다.

“처음에 정신을 잃었을 적부터 잡아 가둬놓았다면 좋았을걸. 복수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군. 나한테 협력을 구했다면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죽지도 못하고 영겁의 고통 속에 허우적대게 만들어줄 수도 있었어요.”

“…래먼 자작의 외동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말씀이십니까.”

“용케 기억하는군요. 그래요. 내가 또 그런 취미가 있거든. 그 새끼 고추 자를 때 얼굴이 아주 봐줄 만했지.”

대공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했다. 바란이 간신히 태연을 가장하며 발을 뺐다.

“복수라는 것이 제살깎아먹기라고 하더니만 이 말뜻을 이제 알겠습니다. 저치 얼굴을 보는 것만 해도 이제는 신물이 오르는군요. 저는 이제 되었습니다. 천한 용인이긴 해도 명색이 왕녀의 최측근이니 말끔하게 두고 추궁하신다면 나중에 몸값은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속 보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떤 맹점을 짚어내든 간에 바란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말 것을 짐작한 대공은 이것을 지적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턱을 문질렀다. 추궁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 시점에서 꺾어 내거나, 아니면 보아 넘기거나….

“난 후작이 변명할 때 짓는 표정이 참 좋아요.”

검을 잡느라 박인 굳은살이 손의 모양을 해괴하게 변형시켰기 때문에, 대공의 손은 니카의 것과 비슷한 정도로 울퉁불퉁했다. 바란의 목덜미를 타고 거친 손가락의 감촉이 닿아왔다. 곧 거센 악력이 바란의 두 뺨을 움켜쥐었다. 살며시 미소 짓는 얼굴과는 달리 두 눈에 드리운 살기가 짙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식이지요. 이렇게 두려울 것 없이 배짱부려 가며 지껄이면 누군들 무심코 믿어버리지.”

“…저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전하.”

바란의 건조한 중얼거림에 대공이 어지럽게 잘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두려운데요?”

바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광기가 번들대는 대공의 눈동자는 예로부터 죽음이나 두려움과 같은 원초적인 감정에 깊은 흥미를 나타내곤 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바란은 이 남자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구체화시키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그것에 기대어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은 체득했다.

“전하의 노여움이 두렵지요.”

바로 마지막 용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도록 드높은 그의 자의식에 의존하는 일이었다. 힐벤 대공의 입술이 천천히 당겨져 올라가는 궤적을 시선으로 쫓던 바란은 살며시 두 눈을 감았다. 

창살 너머에서 바란을 꼬챙이로 꿰뚫을 것처럼 사나운 니카의 시선이 쏘아졌다. 곧 죽여 버리겠다느니 하는 험한 소리가 바란이 가장 사랑하는 입술로부터 터져 나와 지하 감옥의 공동을 시끄럽게 울렸다.

* * *

헬린 힐벤은 그런 기질을 처음부터 타고났다. 그의 아비는 미친 왕이라고도 불린 캐멀롯 드라코슨이었고, 어미는 얄렌의 성녀라 명성이 자자한 캐멀롯의 사촌 누이였다. 그녀는 드라코슨 혈통을 생산할 수 있는 귀중한 여인이라는 이유 아래 나이가 쉰에 가까워진 캐멀롯 왕의 후처로 들어가야 했다. 

현숙한 여성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태중에 들어선 아이는 머리칼만 허여멀건 앙살라테 왕자와는 달리 짙은 용혈을 가지고 있었다. 신전과 백성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 헬린 드라코슨은 그녀에게 자랑과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 작은 행복이 깨어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상에서 가장 용에 가까이 태어난 헬린 왕자는 걸음마를 뗄 때부터 가엾고 작은 동물들을 우악스러운 악력으로 터뜨려 죽이기 시작했다. 마치 먹고, 마시고, 잠을 자고, 번식하려는 욕구가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어린 힐벤에게는 파괴와 살육이 주는 쾌감에 대한 본능적인 추구가 있었다. 달콤한 젖 줄기에 갓난애의 위장이 요동치는 것처럼 피와 육을 갈구하는 원초적인 욕망이 있었다.

용의 신관들은 그것을 보고 고대룡의 용맹한 기질이라며 박수를 쳐댔다. 고대룡 신앙이 가진 인신공양의 역사는 뿌리 깊었다. 진노와 살육은 용으로서 당연히 타고난 성질일 테니 나무라선 안 된다는 게 그 치들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어미의 대처는 달랐다. 그녀로부터 훈육의 회초리가 날아들어 헬린 드라코슨의 여린 종아리를 찢어놓은 것이 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감하고 슬퍼할 줄 알라 했다. 헬린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대꾸했다. 아파서 나뒹구는 휘핑보이를 보면 동정심을 느껴야 마땅하다고 했다. 

헬린은 그 아이가 바닥을 나뒹굴다 못해 피를 토해 죽어버리더라도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했다. 모자 사이의 대화는 이해가 결여된 평행선을 내달렸다. 용의 살과 피를 해쳤다 하여 용의 신관들이 그녀를 못 끌어내려 안달을 냈다.

‘놔둬라. 사람은 만들어 놓아야지 않겠느냐?’

캐멀롯 왕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그녀를 싸고돌았다. 비웃는 듯이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치던 날 힐벤은 아버지라는 작자의 심중을 훤히 꿰뚫게 되었다. 단지 그가 양립할 수 없는 가치 사이에서 고통받는 꼴을 보는 것이 달가웠을 뿐임을 깨달았다.

영역 동물인 고대룡들은 예로부터 두 마리 이상의 개체가 서로 만나면 목을 물어뜯어 죽여 버릴 기세로 살벌한 싸움을 이어나간다고 했다. 캐멀롯 왕은 헬린을 증오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헬린 드라코슨 왕자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버지 캐멀롯 왕이 가장 증오하는 상대였다. 

곁에 있으면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고, 품위를 내다 버리고 마구 물어뜯어 살점을 삼키고 싶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깟 늙은이는 몇 번이나 온갖 방법으로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저들이 너를 용이라 부를지 몰라도, 아가.’

‘너는 인간이다.’

그가 태어났을 적부터 어미가 귓가에 줄곧 속삭여 온 세뇌와도 같은 이 겨자씨만 한 말들이 어느새 싹을 틔우고 뿌리를 단단히 내려 그의 마음속에 고통을 심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용. 얄렌의 성녀는 태중에 고대룡의 씨앗을 품었을 때부터 꿈꾸던 일을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다. 

아들이 줄곧 이 간극에 시달려 반쯤 미쳐버리든지 말든지 정의에 눈먼 성녀는 대의를 위했다. 대공의 욕망은 점차 은밀한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드러나지 않는 낮은 곳, 사창가, 난민촌, 부랑자들, 아이와 노예…. 

품격 높은 귀부인인 얄렌의 성녀는 신분이 유별함을 책임과 의무로 가르쳐왔다. 조금만 비틀어보면 한 사람의 목숨이 힐벤의 것만큼이나 중하지 않다는 논리적인 맹점이 있었다. 이것이 어린 힐벤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모자랐다. 연약한 어린 새와 같은 귀족 영양들을 해사한 미소로 끌어내 목 졸라 죽이기 시작했다. 

사건마다 각기 다른 용의자가 처형당했다. 시시한 삶에 톡 쏘는 맛이 조금 달라붙었나 했더니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조카 놈이 들고일어났다. 형님이란 작자가 지병으로 급사한 이후의 일이었다.

“당신처럼 악행과 살육을 일삼는 자를 용으로 만들어 왕좌에 앉혔다간 미래가 불 보듯 뻔하지.”

앙살라테는 용이 된다는 것이 무얼 뜻하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었다. 인간의 마음과 용의 심장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멍청한 선왕을 닮아 처진 눈을 치켜뜨고 위엄을 갖추려고 애를 쓰는 한심한 젖먹이에 불과했다.

“대신에 이 앙살라테가 왕이 된다.”

앙살라테는 그의 파렴치한 행각들이 온 왕국에 공공연히 소문이 나 있다고 했다. 나열하는 것을 들어보니 과연 전부 기억에 있는 일들이었다. 힐벤은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아무렴 어떤가. 왕국의 백성들은 용의 통치를 줄곧 꿈꿔왔다. 미친 왕과 그 전, 그 후의 왕이 백성들에게 선사하지 못했던 강력한 용의 통치를. 다시금 이백 년 전 왕국이 가졌던 부국강병을 이룩할 미지의 힘을. 헬린 힐벤은 그것을 줄 수 있었다.

“사난타 성에서 일어난 민란의 우두머리가 제 아우입니다, 대공 전하. 아우는 전하를 더러 세상의 모든 악함이 육신을 입고 지상에 발을 디딘 것과 같다고 하더이다. 죽이고, 빼앗고, 겁탈하고, 고문하는 것….”

싸구려 남창처럼 물들인 새빨간 머리칼이 한바탕 실내에 휘몰아친 바람을 타고 흐트러졌다. 힐벤은 처음 바란을 보았을 때 심드렁하게 턱을 괴었던 일을 기억했다. 기생오라비처럼 섬세한 생김새나 갓 성인이 되어 자리를 잡은 티가 나는 풋풋한 표정…. 

데리고 비역질이라도 하려면 모를까 탈타미오의 새로운 후작이라는 젊은이는 대공의 눈에 차는 구석이 없었다.

“악함과 공포야말로 용의 본질이라고 하지요.”

“멍청한 신관 놈들하고는 다른 견해를 가졌군요.”

대공이 대꾸했다.

“종교를 일로 삼은 작자들은 늘 보기 좋은 포장지에 골몰하지요. 평화, 사랑…. 인간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단어들은 정해져 있기 마련입니다. 대부분 허울 좋은 헛소리죠. 전하, 저는 감히 고대룡을 악의 화신이라 부릅니다. 악이란 통제할 수 없는 강대한 힘에게 붙은 이명입니다.”

그 순간에 바란 탈타미오는 아주 굳센 신념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처럼 보였다. 자신의 생각에 무게를 싣는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것들을 거세게 끌어당기기 마련이었다. 대공은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저 몸뚱이와 매끄러운 혀가 다인 어린애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왕국이 필요로 하는 것이 유약한 양심입니까? 연약한 통치자? 천만에요. 우리는 많은 왕들을 겪었습니다. 200여 년 전 용의 혈통이 모조리 숙청이 된 뒤에 드라코슨은 고대룡의 핏줄기를 근친혼 없이 지켜내는데 실패를 거듭했고, 살아남은 혈통들이 얻은 것은 대체 보기 좋은 금발 빼고 뭐가 있습니까?”

바란의 말들이 오랜 죄책으로부터 대공을 자유롭게 했다. 이 말을 오래토록 기다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미언 왕은 남쪽 제국의 스스로 황제라 지칭하는 자에게 고개를 숙여 격년으로 조공을 시작했고, 캐멀롯 왕은 롱가든 동쪽의 세 개 성을 연맹국에 넘겼습니다. 다르탈루 강 상류에서 물길을 막지 못하도록 북쪽의 소왕국연합에는 매년 삼각주에서 난 기름진 곡식을 넘깁니다.”

창틀에 걸터앉아 줄곧 병사들의 행렬을 구경하던 대공은 어느새 바란이 부복한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 곱상한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란이 고개를 들었다. 섬세한 황금색 속눈썹과 가까이에서는 새파란 회오리처럼 보이는 홍채가 힐벤의 눈동자를 끌어당겼다. 

힐벤은 상대의 심산을 한번 재어보는 들짐승처럼 살며시 바란과 이마를 맞댔다. 이어서 코끝이 맞닿았다. 바란이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개살구 같은 도덕이겠습니까, 전하?”

힐벤은 말갛게 웃으며 한손으로 바란의 목을 움켜잡았다. 서서히 힘이 들어가 숨통이 조여들었다. 파리해진 낯으로 신음을 뱉으면서도 바란은 입꼬리를 바들대며 웃었다.

* * *

‘복수.’

몸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의 정수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분노의 불씨가 더는 태울 힘이 없어 세력이 약해지고 나니 니카의 안에는 타고 남은 재만 남았다.

‘결국 그런 이유였나. 너무 명쾌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군.’

니카는 기침을 했다. 얻어맞은 곳이 아리고 목이 아주 말랐다. 그간 얼마나 편안한 생활을 영위했다고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 있으니 금방 몸이 배기고 불편했다. 니카는 족쇄가 차였고 손목이 튼튼한 밧줄로 묶인 뒤 바란이 안내한 철장 너머로 내던져졌다. 대공의 기사들은 두셋씩 조를 짜 돌아가며 니카를 감시했다.

시계는커녕 작은 창문조차도 없어 외부의 빛이 차단되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뒷간을 가느라 기사들이 자리를 교대하는 것으로 미루어 대충 얼마나 되었겠거니 짐작하는 것이 다였다.

니카가 몸을 뒤척이다 녹슨 철창을 살며시 걷어차니 널따란 지하 감옥 전체에 요란하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의 기사 하나가 다가와 철창 사이로 침을 뱉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검을 밀어 넣고 휘저어 니카를 위협했다. 

“조용히 있어, 튀기 새끼.”

니카는 희미한 불길에 의지해 눈을 굴렸다. 저 바깥에만 귀한 기름불을 밝혀준 덕분에 니카의 움직임은 다소 자유로워졌다. 사위가 어두우니 다른 감각이 날카롭게 살아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니카가 헤아리기로는 두 번인가 기사들이 교대를 거듭했을 때였다. 기사들 가운데에도 성향의 차이라는 게 있어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정말 니카만 노려보는 이가 있는가하면, 큰 기척이 없으면 니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는 이도 있었다.

한결같은 고요와 악취 가운데 아주 조심스럽게 낯선 소음이 얽혀들었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숨을 죽인 가볍고 날랜 발걸음이었다. 두껍고 푹신한 옷자락이 서로 스치는 소리도 났다. 바로… 그의 등 뒤로부터.

‘적의는 없다.’

괜한 움직임으로 소음을 만들어 기사들의 시선을 끌어와서는 곤란했다. 니카는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생쥐 하나가 돌벽을 갉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니카가 그 부분을 손끝으로 더듬어 확인해보니 작은 직사각형을 이루는 벽돌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손을 대고 있으니 바깥에서 살며시 두드리는 박자가 느껴졌다.

‘똑. 똑똑, 똑.’

뒤를 돌아 기사들의 눈치를 봤다. 카드게임에 열중이었다. 직무태만이라고 나무라기엔 인간적인 이해가 갔다. 감옥이 너무도 튼튼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니카는 잠시 눈치를 보며 검지를 조금 세워 아주 근처의 돌벽을 두드렸다. 예민한 청각에 조금 더 울림통이 큰 소리가 잡혔다. 감촉 역시 차이가 있었다. 묶인 손을 힘겹게 위로 올리니 손가락을 바짝 올릴 수 있도록 기다랗게 파인 홈이 느껴졌다. 붙잡아 당겼다. 싱겁도록 가벼웠다.

“이쪽으로.”

검은 로브로 모습을 감춘 자가 통로 안쪽으로부터 손짓했다. 니카가 그 안으로 한 발짝 발을 들이니 짤랑거리는 열쇠를 조심스레 꺼내어 족쇄를 벗겨내 주었다. 이것을 감옥으로 도로 밀어 넣은 뒤, 두 사람은 통로 안에 몸을 숨겼다.

‘바란?’

로브로 가려진 뒷모습을 보며 잠깐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사실을 겪어내고도 여전히 이 이름을 생각해낸다는 사실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 성안에 이 정도의 작은 체구를 가진 것은 시녀들을 제하면 단 한 명뿐이었다. 마구간지기의 아들.

‘빈스라고 했던가.’

빈스는 니카가 발을 들인 입구를 은폐하는데 시간을 썼다.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 빛이 샐 수 있는 틈새마다 미리 이겨놓은 진흙을 두껍게 바르는 식이었다. 니카가 도우려고 했더니 아이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경을 도와 바깥으로 은밀히 내보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서두르셔야 해요. 마구간에 먹구름을 매어뒀어요. 안장에 달린 주머니 안에 허기를 때울 건량과 노잣돈을 챙겨뒀으니 그 길로 갈고리자리 별을 따라 북서쪽으로 말을 달리세요. 추적을 피하려면 울루 고원을 지나셔야 해요. 안장에 누비옷을 한 벌 뒀는데, 제 것이라 꽉 끼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나을 거예요.”

“누구의 명령을 받았지?”

“그건…. 비밀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빈스는 촛대를 들고 앞장섰다. 성의 비밀스러운 통로를 꿰고 있는 어린애를 시켜 탈타미오의 숙적과도 같은 왕녀의 기사를 탈출시킨다는 발상을 할 만한 인물…. 그리고 실제로 그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해보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를 회피하면 할수록 그 이름만은 잘 닦은 명패처럼 선명해졌다.

‘바란 탈타미오. 이건 또 무슨 농간이지?’

어금니가 꼭 맞물리며 아드득하고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니카는 개미집 단면처럼 얽힌 복잡한 미로를 손바닥 보듯이 안내하는 빈스의 뒷모습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 아이를 보내고, 내가 대공의 눈을 피해 달아나도록 돕는 이유가 뭘까?’

벼려진 물음표가 속을 헤집는 듯한 불쾌함이 니카를 덮쳤다. 차가운 옥 안에 갇힌 동안 치가 떨리는 배신감과 싸워 어느 정도 어지러운 심기를 다스렸다고 생각했는데,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의 생각만으로 도로 뒤엉키고 흐트러졌다. 어금니가 아드득 맞물렸다.

“경? 시간이 없어요. 어서 이리로 오세요!”

“…묶인 걸 먼저 풀어다오.”

밧줄로 포박된 두 손목의 매듭은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다급히 다가와 그것을 살피던 빈스는 매듭을 손가락으로 휘저어보다가, 어둠이 드리운 통로 안에서 이것을 손으로 풀어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판단해 허벅지에 붙여둔 단검을 뽑아들었다. 날이 잘 서 있었다. 단검의 날에 대고 슬금슬금 비비니 밧줄은 오래 걸리지 않아 끊어졌다.

“윽!”

바로 그때, 니카가 빈스의 손을 잡아 비틀었다. 검술에 능하지 않고, 용인을 이길 악력도 없는 빈스는 무력하게 손안의 단검을 놓쳤다. 니카는 그 손잡이를 밟아 당긴 뒤 반대쪽 손으로 집어 들었다. 짧은 탄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칼자루를 쥔 사람이 바뀌었다. 왕국 제일의 검사라는 이명에 모자람이 없는 솜씨였다.

“누구의 지시인지 말해.”

“안 돼요!”

빈스가 비명처럼 대답했다. 눈을 질끈 감고 한번 대든 것만으로 아이의 용기가 다했다. 성안에서 나고 자란 빈스는 다른 백성들보다 전쟁에 거리감을 느꼈다. 겁박당하는 것에 익숙할 리 없었다. 단검이 목젖 가까이 드리우자 아이가 사시나무 떨듯 몸서리를 쳤다. 당찬 척 해봤자 어린애였다. 니카의 입맛이 썼다.

“목숨을 걸고 얻은 기회인데 왜 자꾸 시간을 끄시는 거예요? 이렇게 꾸물대다가 대공에게 붙잡히면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 정말 몰라서 그래요?”

“이게 그 자식이 파놓은 함정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확신하지?”

단검이 위협적으로 살갗에 파고들었다. 얕게 베인 상처에서 왈칵 피 냄새가 배어 나왔다. 따끔거리는 아픔이 아이를 겁먹게 했다. 말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서 그런지 몰라도 아이 역시 겁이 많았다. 불빛을 반사하는 눈알이 물기에 젖어 반들반들했다.

“함정 아닌데. 정말 아니에요!”

“그럼 누가 지시한 건지 말해.”

“그건…. 레이먼드 집사님이….”

기억이 돌아오고 난 이후 니카는 그 이상한 집사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언젠가 한번 얼굴을 마주했던 적이 있는 듯 어렴풋한 친밀감이 들었다. 

앙살라테에게는 믿을 만한 간자가 몇 있었다. 니카에게 도움을 주려 하다니, 함정이 아니라면 이 집사도 그 간자들 중 하나일지 몰랐다. 충분히 믿을 만하지는 않더라도, 니카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니카는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구간으로 안내해.”

“…….”

“대신 중간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이 보이면 찌르겠다. 진심이다. 너와 소풍을 나갔던 물렁한 멍청이와 헷갈리지 마라.”

빈스는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곤 비척거리며 몸을 돌렸다. 니카는 아이를 붙들고 있던 왼팔을 거두었다. 니카의 힘을 버티느라고 잔뜩 수축한 채 긴장했던 몸이 그 관성 때문에 휘청거리며 튀어 올랐다. 넘어지면서 바닥을 짚은 빈스의 손바닥에 더러운 구정물이 묻었다.

“빨리 일어서라.”

빈스는 불가항력으로 길을 안내했다. 아이의 조마조마한 마음이 어두운 곳에서도 경직된 어깨나 보폭이 좁은 걸음을 통해 전해졌다. 니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단검의 선단을 등 뒤로 꾹 눌러서 걸음을 재촉했다. 빈스의 뒷목은 언젠가부터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 * *

저지른 일이 발각된 직후부터 감시가 붙었다. 복수라고 그럴싸한 이름을 붙였다 해서 죄의 무게가 덜어지지는 않았다. 군법으로 즉결처분할 수도 있으나 자비를 베풀어 탈타르에서 회의에 부치겠다고 했다. 

그래서 바란은 반쯤 죄수취급을 받으며 대공의 심복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붙어 있어야 했다. 달틴 사사바란은 대공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로, 도무지 꾀를 부리는 일 없이 맡긴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우직한 사람이었다.

“이미 저지른 일은 저지른 일인데, 지금부터 감시하면 뭐가 나아지기라도 해?”

그는 시시한 말상대였다. 바란이 꼬리를 세운 고양이처럼 사뿐한 걸음으로 의자에 정좌한 그의 주변을 걸어 다녀도 눈길 한번 주는 일이 없었다.

“제가 전에는 수도의 경비대장으로 일을 했었는데, 죄 한번 지었던 놈들은 꼭 몇 번이고 거듭 잡혀 들어오곤 했지요.”

“오, 날 꼴통으로 아시는군?”

“허튼짓 말게 감시하라는 게 전하의 뜻이십니다. 애초에 후작이 괴짜 짓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없었을 거 아닙니까. 탈타르에서는 처벌을 면치 못할 겁니다.”

창틀에 걸터앉아 바깥을 초조하게 내다보던 바란이 이 말을 듣고 이를 드러냈다. 사사바란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꼿꼿이 자리를 지켰다. 둘 사이에 오갈 만 한 화제도 딱히 없으니 바란이 손톱으로 창틀을 딱딱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니카에 관한 것을 자꾸 떠올리다 보니 온갖 염려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바란의 마음을 온통 채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검일 게 분명한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잠시 들렸다가 잠잠해졌다. 허공에서 바란과 달틴 사사바란의 시선이 맞물렸다. 바란이 창밖을 삿대질하며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사사바란이 손바닥을 앞으로 뻗어 저지했다.

“안 됩니다.”

“내 성이야! 내 사람들일 거고!”

“지금 용인기사 일로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넌 네 집 앞마당에 불이 난 걸 뻔히 알면서도 안 달려가고 버틸 수 있겠어?”

“감정에 호소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는 늘-”

“전하, 전하! 시끄러워서 못 들어주겠네!”

무엄한 소리에 어떻게 호통을 칠지 고민하느라 사사바란이 잠깐 입술을 깨문 동안 바란이 기세를 바꾸어 그를 살살 꼬드기기 시작했다.

“롱가든으로 가는 길목에는 늘 화적떼가 출몰하고, 전하께서는 상단을 공격해 앙살라테가 노리던 고대룡의 뼈를 빼앗기까지 하셨지. 당장 탈타미오를 노리고 달려들 만한 놈들을 두 손 가득 꼽을 수 있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 만약 적의 습격이라면, 헬린 힐벤의 용맹한 기사인 달틴 사사바란이 응당 제일 먼저 파악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 말은 안 통합니다.”

‘잘만 통하는 것 같은데?’

사사바란이 슬그머니 다리를 떨기 시작한 것을 보며 바란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 역시도 검사로서의 자존심이 있을 테니, 무기도 들지 않은 니카에게 된통 당해 존경하는 대공 앞에서 꼴불견이 되었던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목석같은 사사바란 경이라도 만회하고 싶다는 욕구가 속에서 치밀었으리라. 이런 충동질이 쉽게 먹혀드는 것도 당연했다.

레이먼드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거든 니카의 안위와 탈출을 부탁한다고 말해뒀으니 니카는 지금쯤 감옥에서 벗어났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 바깥의 저 소란인즉슨 니카에게 위험이 닥쳤다는 뜻이었다.

달틴 사사바란은 소란스러운 소음이 잦아들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창문 아래를 내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휑한 바람이 불었고 마당으로부터 짙은 피 냄새가 몰아쳐 올라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 분명하군.”

바란이 곁에서 팔짱을 끼고 부채질했다. 곧 사사바란의 귓가에 대고 같이 가서 감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구슬리기까지 했다. 달틴은 타고난 성미가 단순하여 대공을 향한 충성심을 종종 지나친 열의로 드러내곤 했다. 그는 잠깐 고민을 거치고는, 곧 삐걱대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만 파악하고 도로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안 됐지만 허튼 생각 못하도록 손은 묶겠습니다.”

‘단순한 놈을 곁에 붙여줘서 다행이군.’

바란은 기꺼이 두 손목을 모아 내밀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 * *

빈스는 니카를 마구간의 뒤편으로 이어진 출구로 안내했다. 지하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이 출구는 평상시에 말똥과 짚이 뒤엉켜 완벽히 봉쇄되어 있었다. 별안간 바닥이 솟아오르며 수상한 남자가 둘이나 나타나니 밤중에 졸던 말들이 겁을 먹고 투레질을 하며 날뛰었다. 잠시간의 소란은 말들과 얼굴이 익은 빈스가 후드를 젖히고 말의 목을 매만져주면서 가라앉았다. 

니카는 그러는 동안 출구 주변에 짚을 끌어다 덮고 발로 밟아가며 도로 봉쇄했다. 단검을 거둔 니카가 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스는 식은땀이 흥건한 이마를 팔뚝으로 씻으며 한숨을 돌리더니 맹한 웃음을 지었다. 니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왜 나를 돕는 거지?”

“후작님과 집사님께는 목숨을 빚졌어요. 하란토 탈타미오에게 영주성을 빼앗겼을 때…. 그때 아버지랑 제가 죽을 뻔했던 것을 살려주셨죠.”

니카도 이 이야기를 알았다. 상단으로 큰 부를 축적한 선대 탈타미오 후작의 이복 아우가 후작위를 노리고 용병을 사 진군했던 일화는 유명했다. 실제로 바란 탈타미오는 영주성에서 쫓겨나 일 년인가를 숨어 지내다가 사람을 모아 성을 탈환한 뒤 정식으로 후작 직위를 세습했다.

바란 탈타미오는 작위를 되찾는 과정에서 앙살라테 왕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기반이 잡히고 나자마자 왕자와 척을 졌다. 그래서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은혜를 모르는 박쥐 같은 작자라 하면 세간에서 제일 먼저 회자되는 인물이 바란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짐승도 보은을 한다고, 짐승보다 못한 놈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셨어요.”

빈스가 그런 후작을 대단한 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회상하자 니카는 상당히 아연해졌다. 게다가 빈스가 레이먼드와 바란을 뭉뚱그려 한 세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 니카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니카를 돕고 있는 것이 대체 누구인지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 초가 급한 와중에 철저히 따지고 들기엔 니카도 속이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빈스는 늘씬한 흑마를 어렵사리 끌어내고 니카의 수중에 고삐를 넘겼다. 니카가 멈칫 단검을 들고 망설이니 그것도 가져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

니카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성에서 그에게 진실하게 대해준 사람이라고는 이 소년이 유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정체 모를 인기척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빈스가 뭐라고 더 힘없는 소리로 지껄이는 것이 귓바퀴를 스치고 지나갔다. 니카가 허공을 강렬히 응시하자 빈스는 얼른 어깨를 움츠렸다.

“왜, 왜 그러세요?”

“쉿.”

겁먹은 빈스는 소맷귀를 입에 물고 달달 떨었다. 옷깃 부시럭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적막을 깼다. 니카는 고개를 저어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고는, 바깥에서 들리는 복수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 둘, 셋…. 철걱이는 소리로 미루어 이건 경비를 돌거나 낌새를 채고 니카를 찾아 헤매는 탈타미오의 병사들임에 분명했다. 니카는 다급히 빈스를 밀쳐냈다.

“넌 다시 비밀 통로로 들어가라. 여기부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하지만 집사님께서는 제가 경을 데려가서 신호를 줘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성문을 열어둔다고 했어?”

니카의 초조한 질문이 몰아쳤다.

“성문이 아니에요. 이목이 너무 많이 끌릴 테니 그쪽으로 가실 수 없어요. 대신 하수도의 갓길은 말 한 마리가 지나갈 정도의 폭이 돼요. 중간에 높은 턱이 있지만 먹구름 정도의 말과 경의 마술이라면 별문제 없이 뛰어내릴 수 있을 거예요. 아랫것들은 공공연히 그 길로 마을에 다니곤 하죠.”

빈스는 영주성만 벗어나고 나면 탈타미오 성을 빠져나가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했다. 계획을 속삭이는 사이 병사들의 기척이 더 가까워졌다. 니카는 마구간의 뒤쪽 문으로 빈스와 함께 물러났다. 

먹구름은 언제나처럼 니카를 잘 따르며 별다른 소음을 만들지 않았고, 그 덕택에 은밀히 움직일 수 있었다. 뒷문을 닫아 행적을 갈무리하기가 무섭게 문 너머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렸다.

‘마구간 안으로 들어왔군.’

니카는 메마른 싸리나무 곁에서 웅크린 걸음으로 걸으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뒤의 빈스를 확인하려고 돌아선 순간이었다. 그가 경계하던 앞쪽이 아니라 뒤로부터 낮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빈스의 목소리였다.

“아악!”

‘뒤에도 있었나!’

벼락같이 단검을 뽑아든 니카는 달빛에 번쩍이는 병사의 검을 간신히 튕겨냈다. 요란한 금속성이 공기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니카의 유별난 악력이 아니었다면 이 공격을 받아치기는커녕 바닥을 나뒹굴거나 단검을 놓쳐버렸을 것이다. 상대를 살펴보니 과연 탈타미오의 문양을 갑주에 새긴 탈타미오의 사병이었다.

“뒤편이다!”

“여기야!”

한번 소란이 일고 나니 겨우 따돌렸다 생각한 병사들도 니카의 위치를 알아내고 달려들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마구간 뒤편의 좁은 공간에 몰려 있으니 말 그대로 궁지에 몰린 쥐 형국이었다.

“흐압!”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드는 병사의 검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니카는 어쩔 줄 모르고 떨고만 있는 빈스를 잡아당겨 밀치는 동시에, 퇴로를 막고 있는 병사의 다리를 걸어 중심을 무너뜨렸다.

“앗!”

단검으로는 급소를 찌르는 것 이상의 공격을 하기 어려웠다. 목덜미에 박아 넣은 검을 힘주어 빼내자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며 병사의 몸뚱이가 무너져내렸다.

“방향은?”

“이대로 쭉 직진이에요. 서쪽이요!”

“올라타라.”

니카가 말안장을 턱짓하며 죽은 병사의 장검을 재빨리 빼앗아 들었다.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을 반대로 생각하니 니카에게 위기가 아닌 기회였다. 길이 좁은 탓에 병사들이 니카에게 한번에 달려들어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빈스가 말 위에 기어오를 때까지 검을 좌우로 흔들어 다수의 병사들을 폭넓게 견제하던 니카는, 곧 제일 앞에 있는 병사의 검을 무식한 힘으로 밀어붙여 떨구고 그의 배를 걷어찼다. 병사 하나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니, 그 뒤에서 기회만 엿보던 다른 병사들까지 뒤엉켜 한꺼번에 뒤로 넘어갔다.

“달려!”

니카가 신호를 주자 빈스는 즉각 먹구름의 배를 찼다. 니카는 먹구름이 움직이는 대로 함께 달린 뒤 고삐를 잡아채고 달리는 말 위에 올라타는 곡예에 가까운 기술을 보여주었다. 니카가 뒤로 올라타면서 그의 단단한 몸에 얻어맞다시피 한 빈스가 “아야야.” 하는 곡소리를 냈다. 니카의 코웃음이 뒤따랐다.

“서쪽, 어디?”

“앗! 앞에 사람 있어요!”

사위가 어두웠다. 빈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간신히 알아냈다. 반면에 동공이 인간의 것과는 성능이 다른 동공을 가진 니카는 짧은 순간에 상대방을 정확히 파악해냈다.

‘달틴 사사바란 경. 그리고 곁에 서 있는 것은….’

니카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바란 탈타미오. 예상외의 조우였다. 수십 가지의 감정이 뒤엉켜 거대한 파도를 이루고, 이 파도는 곧 니카의 이성의 둑을 삼킬 듯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바란의 인영만이 칼로 파 도려낸 자국처럼 눈에 띄는 것은 아마 그를 줄곧 떠올리지 않으려던 부단한 노력의 부작용인 듯했다.

등 뒤에서 서슬 퍼렇게 이 가는 소리가 나자, 빈스는 놀라서 거북처럼 목을 구겼다. 달리는 말 앞에 뛰어든 사사바란이 왕국기사의 검을 뽑아 든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커다란 덩치와 우렁찬 음성이 그를 강건한 철옹성처럼 보이게 했다. 언뜻 말라보이는 니카의 체형과 나란히 놓고 본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었다. 빈스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멈춰라!”

“겨, 경, 정말 멈추시게요? 아니죠?”

사사바란의 검날에 반사된 희읍스름한 달빛이 니카의 두 눈을 때렸다. 니카는 고삐를 당겨 먹구름을 멈춰 세웠다. 말이 두 다리를 공중에 구르며 위협적인 콧김을 내뿜었다. 공기가 차가워서 하얀 김이 올랐다. “오, 맙소사!” 하는 빈스의 짧은 탄식이 니카의 귓등에 스쳐 사라졌다.

바란은 짧은 감상에 젖어 들었다. 작명일 때 니카가 말없이 이 먹구름을 몰고 외출해서 바란을 애먹였을 때도 꼭 이런 구도에서 니카를 올려다봤었다. 그리고 니카는 말 등에서 뛰어내려 얼른 바란을 쫓아왔었다. 

바싹 마른 목구멍이 불에 타는 듯 아파왔다. 바란은 마른침을 삼키며 니카를 올려다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잘 안 됐다. 죄의 무게가 바란의 머리 위에 달라붙어서 그를 보거나, 말을 붙이거나, 면죄부가 될 법한 그 어떤 변명도 피력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어둠에 묻힌 너를 또렷이 볼 수 없는데, 네 차가운 눈빛만큼은 온 피부로 느껴진다.’

바란의 삶에 그런 일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가령 니카의 미소나 일그러진 얼굴, 평정을 찾지 못해 어지럽고 화가 난 모습이나 행복에 겨운 입맞춤 같은 것들. 미적지근한 바람이 검은 머리카락을 잔뜩 뒤엉키게 만들던 일이나 모닥불의 빨간 빛이 덧그린 얼굴 윤곽선에 머릿속이 단번에 아찔해지는 경험. 그런 일들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대체 앞으로 살아갈 순간들 중에서 어느 시점에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란은 말라죽기 전에 기약이나 받았으면 했다. 백 밤이라면 백 밤을 헤아리고, 천 밤이라면 또 그것을 헤아릴 텐데. 기다리는 것에 진력이 나긴 했어도 그건 바란이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만약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몇 밤을 기다린들 그의 팔에 안겨볼 기회가 있기나 했을까? 하지만 또 반대로, 제자리에서 지켜만 보았다면 이리도 차가운 경멸의 시선을 받아낼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바란은 아직도 무엇을 후회하면 좋을지 몰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섰다.

‘너는 언젠가 내게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었지. 아, 사랑스러운 니카. 나야말로 네 눈 아래 엎드려 미워하지 말아 달라 애걸하고 싶구나.’

입맛이 썼다. 바란은 입술을 당겨 웃었는데, 니카에게 그 미소가 보였을지 보이지 않았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용인기사. 다시 얌전히 감옥 안에 처넣어주지!”

사사바란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의식하고 있는 것은 이 자리에 빈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바란과 니카는 서로를 바라보며 묵언의 대치상태를 이어갔다. 마음이 급해진 빈스가 니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릴 때까지 이 망중한은 계속되었다.

“손목이 묶인 채로 무슨 복수를 하겠다는 거지?”

니카가 마침내 입을 뗐다. 뒤에서부터 횃불을 든 병사들이 소란스럽게 몰려들고 있는데, 이 말을 하기까지 시간을 꽤 끌었다. 그나마도 사사바란의 도발에 대한 대답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면전에서 몇 번이고 무시를 당하는 달틴 사사바란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대귀족의 차남으로 자라나 탄탄대로를 걸어온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어지럽게 수염이 난 두 뺨이 씰룩이고 그 위로 못마땅한 골이 패였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용인기사. 네놈에게 복수해서 지난날을 설욕하려는 자는 탈타미오 후작 말고도 있다!”

악에 받친 사사바란이 바란을 포박한 줄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말린 생선처럼 새끼줄로 양 손목을 동여맨 바란이 맥없이 휘청거렸다. 과묵한 용인기사의 눈길이 그때서야 바란에게서 떨어져나와 사사바란을 향했다.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 시야 안에서 용인기사의 그림자는 더욱 어두운 검정색이었다. 사사바란은 니카가 검도 들지 않은 채 그와 호각, 아니 실은 그 이상으로 싸웠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진한 땀이 관자놀이를 따라 미끄러졌다. 굳은살이 가득 박인 두 손이 검을 고쳐잡았다.

사사바란은 바란을 구석으로 밀쳐두었다. 이길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같은 검의 길을 걷는 자로서 니카가 자신과는 아득한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발을 잡는 정도라면 최선을 다해볼 만했다. 그가 섬기는 단 하나의 주군, 헬린 힐벤 대공을 위해서. 

곁눈질로 보니 부지런히 뒤를 쫓아오던 병사들이 금방이라도 들이닥쳐 용인기사를 포위하려는 참이었다. 그는 검을 반듯하게 치켜들었다. 

곧 니카가 말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몸무게를 실은 일격을 가했다. 귀를 찢을 듯한 금속성이 어두운 밤의 적막을 갈랐다. 사사바란의 어금니가 서로 맞물려 듣기 싫은 마찰음을 냈다.

‘왕국 제일이라는 말이 입바른 소리는 아니군. 이 힘, 이 속도! 얼마 견디지 못할 거다.’

검을 든 니카는 저번에 대공의 앞에서 맨몸으로 사사바란의 검을 피하기만 했던 것과는 급이 다른 수준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사사바란이 어림짐작하거나 각오했던 실력 이상이었다. 그가 마음먹고 공격 태세로 몰아치기 시작하니 사사바란은 주눅이 든 채로 자꾸만 걸음을 뒤로 물려야 했다.

니카가 몸을 한번 크게 뒤트는가 싶더니, 사사바란은 어느 틈엔가 멱살을 잡히고 다리가 걸려 무게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거구의 기사가 흙바닥에 부딪치며 거대한 소음을 냈다.

“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게 무슨 기사인가. 경은 기본에 더 정진해야겠군.”

“으윽…!”

빈정대는 소리에 열이 뻗쳐올라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엎어진 사사바란의 몸통을 니카가 짓누르자 마치 커다란 바위에 몸이 끼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니카의 손이 사사바란의 욱여쥔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냈다. 검을 빼앗으려는 의도가 투명했다. 사사바란은 악을 쓰며 버텼다. 조금 떨어뜨려 놓으면 다시 얼른 달라붙는 통에 니카에게도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니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사바란을 내려다보았다. 지척에 다다른 탈타미오의 병사들을 보며 빈스가 조바심을 냈다.

“경, 빨리요!”

“크아악!”

니카는 검을 쥐고 나자빠진 사사바란의 손아귀를 발로 짓이겨 밟아 손가락뼈를 으스러뜨리고 난 다음에야 그 손안에서 왕국기사의 검을 빼앗을 수 있었다. 니카의 것과 생김새가 좀 다르기는 해도, 왕실의 대장장이가 연마한 최고의 검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였으니 아쉬운 대로 챙기는 것이었다.

“죽이려는 거야?”

“…….”

손안에서 검을 몇 차례 돌리고 가늠하던 니카가 이 목소리에 멈칫 고개를 들었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던 바란이 무릎걸음으로 흙바닥을 걸어 다가왔다. 그는 곧 무릎을 세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두 손이 뒤로 묶여서 벌레처럼 꿈틀대는 꼴이었다. 지하 감옥에 던져졌던 니카보다도 더 죄인 신분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저항하지 않는 적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 수리 왕녀의 신조 아니었나?”

기만자의 입술에서 왕녀의 이름이 나오자 니카에 황량한 마음에 불길이 번졌다. 이가 악물리다 못해 서로 미끄러져 갈리는 소리가 났다. 

“용인, 투항해라!”

니카가 뭐라고 입을 떼려던 와중이었다. 간신히 니카를 따라잡은 탈타미오의 병사들이 니카를 둥글게 둘러싸고 날붙이를 겨눠 포위망을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사사바란의 목을 잘라낼 것처럼 들이댔던 검이 거두어졌다. 

니카는 발밑에서 최후의 힘을 끌어내려고 바르작대는 사사바란의 머리를 걷어차서 기절시키는 길을 택했다. 기실 바란의 말마따나 무력한 이의 생명을 뺏는 것은 오랜 세월 자선활동을 이어온 수리 왕녀의 원칙에 반하는 일이었다. 노인이나 어린애처럼 약자 취급을 받은 사사바란이 모멸감을 느끼기도 전에 정신을 잃었다. 뇌진탕과 같은 후유증이 남을지는 몰라도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었다.

“하하, 이런. 시간을 너무 끌었나 보네, 니카. 윽!”

말간 웃음을 흘리기가 무섭게 니카의 검 끝이 바란의 목젖을 겨누었다. 바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바란은 니카의 검로에서 아주 작은 망설임이라도 찾아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주인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겠지.”

니카는 그에게 달려든 것이 대공에게 봉급을 받는 기사들이 아닌 탈타미오의 사병임을 알고 머리를 썼다. 병사들은 탈타미오 후작의 목숨이 위협 받자 별수 없이 걸음을 뒤로 물려야 했다. 어느 정도 거리를 확보한 니카는 인질로 잡은 바란까지 말에 태워 의기양양하게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다.

악취로 뒤덮인 수로에 숨어들기까지의 과정 역시도 복잡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그래도 추적자에게 따라잡혀 막다른 길에 몰리는 일은 없었다. 성안 지리를 누구보다 잘 꿰고 있는 빈스가 그들이 마치 다른 방향으로 향한 것처럼 기척을 꾸며낸 다음, 상상도 못할 입구로 그들을 인도했기 때문이었다.

그 입구는 바로 뒷간이었다. 그곳을 통과하는 동안 세 사람 중 코를 틀어쥐지 않은 이가 없었다. 먹구름조차도 손가락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지하수로는 영주성으로부터 마을까지 이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오물로 틀어막힌 길에도 괘념치 않는다면 탈타미오 성 밖으로 곧장 향할 수조차 있었다. 비록 그 출구가 성벽 위 감시병에게 완전히 노출이 되어 있기는 했으나 재빨리 말을 달려 빠져나간다는 가정 하에는 가장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는 경로가 이것이었다. 

마을을 지나 성벽 바깥으로 나가려는 니카는 걸음을 서둘러 지하수로의 더러운 면면을 모두 다 맞닥뜨려야만 했다. 먹구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떨었다. 니카가 바란을 훌쩍 낚아채어 달리는 바람에 졸지에 남자 셋을 달고 달음질친 셈이니 지치기도 했을 것이다.

니카가 지시한 대로 단검을 들고 바란의 뒤를 지키던 빈스는 그만 명령 체계에 혼란이 와서 어쩔 줄 모르고 덜덜 떨었다. 바란이 당장 뒤를 돌아 서서 단검을 뺏으려 들면 그대로 그것을 갖다 바칠 기세였다.

“지, 집사님은 니카 경을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후작님께서 인질로 붙잡힌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어떻게 행동하긴. 그 잘난 후작님 모가지가 붙어있도록 저 니카 경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수밖에.”

바란이 “안 그래?” 하고 잰걸음으로 앞서 걷는 니카에게 물었다. 얄팍한 웃음은 곧 곰팡내 나는 종이처럼 희끄무레하게 빛이 바랬다. 바란은 아직까지도 니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말이야 가벼운 체 붙였지만 그 밑으로는 맥박이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대공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뒤에서 갈팡질팡하는 어린애 하나를 없는 셈 치면 이 어둡고 축축한 지하수로에는 니카와 바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간섭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이 바란을 좀먹기 시작했다.

사실은 전부 다 너를 구하기 위한 술책이었어. 바란은 속으로 대사를 연습했다. 어떤 대꾸가 날아오게 될지 예상해보았다. 껍데기 같은 상상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그럴싸한 순으로 정렬되었다.

‘너는 뜸을 들일 거고, ‘그래서?’라고 되묻겠지. 그러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질 거야.’

오랜 거짓말은 각기 씨실과 날실을 이루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피상적인 사실을 알리겠다고 거기서 실 한 가닥을 뽑아낸들 태피스트리를 형편없는 구멍투성이로 만들 뿐이었다.

밑바닥까지 긁어내 초라한 모습을 다 보여주거나, 아니면 여태까지처럼 함구하거나.

선택의 여지라는 게 있을까? 어차피 왕자와의 기밀서약이 바란의 입술을 틀어막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 니카의 동정 한 꼬집을 구걸하던 말라깽이 꼬마로 돌아가는 건 바란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방향이 명확하다면, 니카를 대하는 태도 역시도 명확히 정해야만 했다. 의미심장한 단서를 남겨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애송이 짓거리엔 취미가 없었다.

“수리 왕녀라면….”

잘 벼린 낱말을 골라 니카의 가장 여린 과녁에 대고 힘껏 시위를 당겼다. 잘 벼린 말이 뻗어 나가 가슴에 꽂히고 나면, 피보라 대신에 경멸이 뿜어져 나와서 바란의 옷깃까지 흠뻑 적시게 되리라.

“왕녀가 알면 뭐라고 할까? 내 말은, 정말 웃기잖아. 네 상황. 우리 상황 말이야.”

그래도 괜찮았다. 바란이 주는 상처 따위 니카는 오래지 않아 잊을 테니까. 바란의 존재가 니카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어차피 정해져 있으니.

“네가 이 바란 탈타미오와 놀아나느라고 수개월이나 허튼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면 대체 그 침울한 낯에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지 않나?”

괜찮다. 아프지 않다. 이죽거리는 말에도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니카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돌아서서 바란의 왼쪽 뺨에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광대뼈가 나앉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무시무시한 타격소리가 들렸다. 거센 힘에 몸을 가누지 못한 바란은 하릴없이 바닥을 뒹굴며 나가떨어졌다.

“아프… 잖아. 너무 아파.”

바란은 일순간 골을 뒤흔드는 현기증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풀썩 주저앉았다. 관자놀이를 받치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숨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숨소리라는 것을 눈치채기까지는 잠깐 시간이 걸렸다.

짭조름한 맛이 났다. 입안의 연한 살이 따끔거렸다.

“입 닥쳐라.”

니카가 주먹을 휘두른 것에는 그 어떤 구실이라도 붙일 수 있었다. 그를 기만했다는 사실은 무수히 많은 이유들 중에서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구태여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바란은 볼을 찢고 흐르는 핏줄기를 핥아 마셨다. 목구멍으로 삼켜진 핏방울이 불씨로 변모해 뱃속에 고인 끈적끈적한 감정들을 태워 뭉게구름을 올렸다.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했으면서. 나를 사랑할 거라고 했으면서.’

곧 극독 같은 감정의 폭풍이 바란을 덮쳤다. 죄를 모두 시인하는 모범적인 죄수였던 바란은 문득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염치없다거나 피장파장이라고 불릴 만한 생각들이 그를 가득 채웠다. 분노, 억울함. 자기방어.

‘왜 너는.’

이기심, 질투, 후회, 원망.

‘나와 함께한 시간이 전부 다 실수에 불과했다는 듯이 말하지? 너의 순결한 삶 속에서 지워야 하는 한 치의 오점이 나인 것처럼.’

“왕녀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듯이 말하지 말란 말이다.”

“정말 잘난 척 지껄이는 게 누군데?”

반대쪽 뺨에 주먹이 꽂혔다. 입안이 터져 얼얼했다. 침을 탁 뱉었다. 혀뿌리에서 올라온 쇠 비린내 섞인 짠맛이 진동을 했다.

“퉤! 열여덟 니카에게 맞은 적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주먹 하나는 확실히 성숙하시군. 응?”

한여름 밤의 짧은 꿈같던 상냥한 바란 탈타미오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녹아 사라지고 니카가 경멸해 마지않는 잔악후작의 목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니카는 분이 풀리지 않아 바란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붙잡힌 셔츠에서 연약한 바느질이 툭툭 터지는 소리가 났다.

“기억을 되찾고 나니 기분이 어떻던가? 한심하고 죽을 것 같지는 않았나? 이 잔악후작에게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울며 애걸했던 건 기억하고 있나?”

“닥쳐라…!”

“이 몸이 입을 닥쳐줬으면 좋겠나 보지, 잡종. 그런데 어쩌지? 하하, 하…. 저번에 보니까 네 그 말랑한 고추로는 내 입 틀어막기 어림도 없겠던데.”

고통스러운 울분이 니카의 뱃속 깊은 곳에서 끓어올라 온몸에 열감을 주었다. 바란 탈타미오와의 미화된 기억들이 단번에 갈가리 찢겨나갔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잘난 얼굴에 또 한 번 주먹을 날렸다.

“묵사발을 내 버리면 더 이죽거리지 못하겠지!”

주저앉은 후작의 옷깃을 말아 쥐고 끌어올려 주먹을 한 차례 더 날리려던 참에 빈스가 팔에 매달리며 중재를 했다.

“지금 이럴 시간 없다고요, 이러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아무렴. 그건 얘 말이 맞지, 니카아.”

“그렇게 부르지 마….”

더러운 것을 떨쳐내듯이 니카는 붙잡은 옷자락을 떨구었다. 억센 힘을 따라 바란의 몸이 힘없이 출렁였다. 니카가 모든 음절을 꼭꼭 씹어뱉듯 말했다.

“잔악후작!”

바란은 평소처럼 그 가벼운 입술을 나불대지 않고 잠시간 못 박은 듯이 서서 니카를 바라보았다. 사위가 어두운데도 새파란 시선이 절로 느껴졌다.

“왜….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데? 내가 수리 왕녀 면전에서도 버릇처럼 네 이름을 부르는 게 싫어서, 그래서 미리 막아두는 건가?”

왕녀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니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너 따위가 함부로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왕녀, 왕녀, 왕녀! 아주 신물이 나는군! 내가 그녀에게 까발릴까 봐 무서워? 네가 왕녀를 저버리고 이 몸을 얼마나 열렬히 사랑했는지, 입 맞추고 동침했던 거, 그런 게 겁이 나나?”

니카는 여전히 표정이 굳어 있었지만 여태 눈앞이 빨갛게 되어 뵈는 것 없이 바란을 흠씬 두들겨 패던 것에 비하면 꼬리를 만 강아지 같았다. 그는 바란을 상대하지 않으려는 듯이 말고삐를 잡아 끌며 길을 재촉했다.

“아, 그렇지. 겁쟁이셨지, 니카 경은. 어떤 여자가 너무 좋아서 칠 년 넘게 곁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입 한번 벙긋한 적이 없잖아. 배려? 존중? 그런 빛깔 좋은 이름을 걸어놓고 안으로는 무슨 추잡한 생각을 했을지 어떻게 알아?”

분노로 머리꼭지가 돌아버린 바란은 그 뒤를 과격한 걸음으로 뒤쫓으면서 니카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디밀고 계속 신경을 긁었다.

“너 숫총각이지? 수리 왕녀한테 바칠 생각으로 순결을 고이 간직해왔을 게 안 봐도 눈에 선하군. 아, 그게 아니면 왕국 안에 잡종이랑 자려는 여자가 없어서 그랬나?”

질끈 이를 악문 니카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상처를 입히고 싶어 안달이 난 말들 가운데에서 의도라는 것을 찾으려고 거듭 시도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왕녀가 수간에 취미를 두지 않고서야 너랑 자줄 일 없어. 알잖아, 왕녀는 너 같은 거 고작해야 목줄 채운 개로밖에 여기지… 윽.”

바란은 말하다 말고 피를 한 움큼 토했다. 경악에 잠긴 시선이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 손잡이가 꽤나 바짝 붙어있었다. 고통에 찬 신음을 터뜨려야 마땅한 것은 바란이었는데 귀로 들리는 거친 숨소리는 니카의 것이었다.

뱃가죽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었다. 놀란 빈스가 바닥에 단검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요란한 소리가 온 지하수도 안에 울려 퍼졌다. 암흑 속에서 가득 차오른 피 냄새가 불안감이 되어 이들을 덮쳤다. 니카는 사람을 처음 죽였을 때처럼 손을 떨었다.

“흐… 아, 헉, 허억, 헉.”

“후, 후작님! 괜찮으세요?”

“왕녀, 왕녀님을…나를… 그런 식으로….”

바란이 겁쟁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니카는 헛구역질이 올라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고작해야 익숙한 피 냄새에 불과했다. 기사로 서임을 받은 후, 니카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보낸 날이 드물었다. 그 익숙한 피 냄새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에 심장이 터질 듯 조마조마하고 구토가 치밀다니 이상했다.

잔악후작은 검상을 입은 뱃가죽을 손으로 꾹 틀어막고 바닥에 무너져내렸다. 짧은 순간 그가 보이는 모든 움직임이 니카의 눈에 아주 느릿하게 재생되었다.

“비, 빈, 스….”

“네. 네 후작님! 괘, 괜찮으신가요? 어떠, 어떻게 해야 하죠? 지, 집사님께 여쭤봐야…. 어떡하지….”

그는 깜부기불처럼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몸을 들썩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빈스가 그 곁에서 이 부딪는 소리를 내며 달달 떨고만 있었다.

“다, 단검….”

아주 작은 데다 앓는 신음과 분간이 안 가는 목소리긴 했어도 니카 역시 그 소리를 들었다. 그보다 가까이 있던 빈스가 이 목소릴 못 들을 리 없었다. 의도를 짐작하거나 추호도 의심하는 일 없이,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그 날붙이를 주워다 잔악후작에게 바쳤다. 

니카는 본능적으로 그가 벌이려는 일을 깨달았다. 입 안에 ‘안 돼.’ 하는 소리가 감돌았다. 그러나 잔악후작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빈스의 턱밑 급소에 건네받은 단검을 찔러 넣어 아이를 죽이는 순간까지, 니카는 결국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흐, 하아, 하아, 흑….”

단검이 돌바닥에 댕그렁하고 내던져졌다. 잔악후작은 힘을 다하고 무력하게 널브러졌다. 흙바닥에 뺨을 짓누르고도 니카를 향해 두 눈동자를 빛냈다. 등줄기를 내달리는 전율 같은 소름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니카는 구역질이 오르는 입을 손바닥 아래 틀어막았다. 

그러나 곧 손에 흥건히 묻어난 잔악후작의 피 냄새가 몰려오는 것을 알고 기겁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저게 진짜 모습이다. 자비와 분별없이 죽이고, 악담을 짖어대고, 피와 살을 취하는 저 모습이! 

니카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온화하고 또 가끔 어리숙하던 바란 탈타미오 후작은 이제 없는 사람이다. 아니,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었겠지. 오랜 시간을 들이고 나니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신기루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저 반반한 껍데기 안에는 결국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잔악후작 말고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개자식….”

간신히 니카의 입술 너머로 온갖 감정에 절여진 욕설이 비집고 나왔다. 개자식. 개자식. 개자식! 점차 목소리가 커졌다. 마지막에 가서 니카는 거의 악을 쓰고 있었다.

손과 옷가지에 흥건히 묻은 잔악후작의 피가 마치 독극물처럼 느껴졌다. 그의 피에 닿은 부분이 벌겋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지옥에나 떨어져, 잔악후작!”

그것이 니카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악물린 입술을 통해 우짖는 소리와 비슷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수로를 나서는 동안 바란의 신음이 계속 니카의 고막을 맴돌았다. 

바란의 몸뚱이는 빈스의 피가 먼지와 뒤섞여 진흙으로 이겨진 흙바닥 위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운이 나쁘다면 이것이 잔악후작의 최후가 되리라. 니카는 생각했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이냐. 그가 여태 스러지게 만든 수없이 많은 목숨들처럼, 잔악후작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허무하게 고꾸라져 죽는들 뭐가 잘못됐다고?’

시원하게 비웃어주려는 마음과는 달리 피로 물든 찬 바람이 불어 코의 점막을 쑤실 때마다 니카는 머리가 어찔해졌다. 코뚜레가 뚫려서 밧줄이 묶인 주변을 맴돌 수밖에 없는, 가엾도록 길들여진 가축이라도 된 것처럼.

‘뭐가….’

바란이 웃던 모습이 뇌리 가득히 떠올랐고, 니카는 곧장 초연한 낯을 식은땀으로 물들이며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그는 먹구름 위에 올라타 힘없이 매달렸다. 빈스가 짚어준 지하수로의 높은 턱에서 지표까지 겁먹은 말을 달래어 풀쩍 건너뛰었다. 

횃불이 탈타미오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점점이 타오르는 것을 돌아보던 니카는 말의 옆구리를 거세게 찼다. 탈옥수의 난동을 알리는 경종소리로 소란스러운 성을 뒤로했다. 수로로부터 이어진 더러운 물결이 개울가로 떨구어지며 침착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박자를 맞추며 울려 퍼졌다.

마음의 혼란을 못 이겨 말머리를 안다시피 하여 체중을 내맡기고 있던 니카의 곁으로 길 잃은 화살이 날아들었다. 땅 위에 와 박힌 것인데 그 과정에서 다리를 스쳤는지 말이 깜짝 놀라 날뛰었다.

“워, 워!”

다급히 진정시키려는 참에 두 발째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초겨울이라 바람이 거셌다. 두 번이나 화살이 비껴갔다. 천운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황폐한 대지 위에 낯선 그림자가 드리웠다. 니카는 어스름으로 가려진 인영이 누구의 것인지 눈치챘다.

‘헬린 힐벤…!’

“벌레 새끼가.”

희미한 목소리였다. 적막을 깨고 나온 이 작은 소음은 예민한 용인의 청각에 충분히 잡혔다.

“잘 가둬둔 줄 알았는데, 팔자 좋게 승마나 즐기고 있다니요?”

“윽, 어떻게….”

대공이 건조하게 웃으며 바닥에 무엇인가를 내던졌다. 나무토막 같았다. 니카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여태 니카를 향해 쏘아대던 활이나 화살통을 바닥에 쏟아낸 것이었다. 이윽고 서늘한 금속성이 났다. 두말할 것도 없이 검이었다. 그 어떤 비유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긴장감이 뒤따랐다.

“어떻게라니? 뭐 이런 전형적인 수법이야 간파해내지 못하는 쪽이 등신 아닌가요. 게다가…어지간히 화려하게 헤집고 다녔어야지요. ‘나 여기에 있어요.’ 하고 일부러 관심 끄는 줄 알았잖아요?”

니카는 이를 악물고 사사바란 경에게서 빼앗은 검을 뽑아들었다. 달틴 사사바란은 힘 위주로 밀어붙이는 공격적인 성향의 기사였기 때문에 검 역시도 다소 투박한 맛이 있었다. 니카도 힘으로는 어떤 인간에게든 밀리지 않는 검사이지만 검술의 성격에 있어서는 정교함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손아귀에 붙는 검 손잡이는 묵직하고도 낯설었다. 같은 장검임에도 길이 역시 좀 달랐다. 그저 그런 상대와 싸우는 일에는 대단치 않은 요소들이지만, 상대가 헬린 힐벤 대공일 때는 달랐다.

니카는 그의 위명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고대룡의 피를 짙게 타고난 남자. 무시무시한 악력과 두꺼운 거죽. 전장에서 유명하던 잔인하고도 비할 데 없는 검 솜씨까지.

‘부하들을 두고 혼자 성 밖으로 나서는 배짱을 부린다는 건…. 오만하거나, 아니면 그에 걸맞은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대공을 응시했다. 대공의 경우에는 그 두 가지 조건이 모두 해당되었다. 순한 양이나 다름없이 얌전한 군마에게서 훌쩍 뛰어내린 힐벤은 검날을 바닥에 질질 끌거나 허공에서 한 바퀴 돌리며 손장난을 했다.

“하하, 그럼 왕국 제일의 검사라는 놈 솜씨 한번 보죠. 이 이상 날….”

“윽…!”

힐벤은 산들바람처럼 보드라운 태도를 단번에 집어던지고 니카에게로 쇄도해 검을 휘둘렀다. 검이 달빛에 반짝이는 순간 먼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들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든다는 것이 운이 좋았다. 검날이 서로 맞물려 공격을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다.

하얀 금발이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공기 중에 어지러이 나부꼈다. 니카는 문득 바란이 애써 기른 손톱만 한 길이의 금발에 핏물이 들어 붉게 변해가던 광경을 떠올렸다. 질겁하여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어 버텼다.

“실망시키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대공이 비로소 문장을 끝냈다. 서로 검에 걸리는 끔찍한 압력을 느끼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뒤로 훌쩍 거리를 벌리며 떨어졌다. 한 합을 주고받았을 뿐인데 분위기가 더욱 살벌하게 식었다. 

온 왕국에 이름이 자자한 실력자들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실력이 쉽게 우열을 가르기 힘들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채고 난 뒤, 상대의 약점을 궁리하느라 긴장감 넘치는 침묵을 자아내고 있었다.

먼저 달려든 것은 니카였다. 더 시간을 끌어봤자 니카의 손해였다. 지금에야 오만을 부려 구태여 홀로 니카를 상대하고 있다지만 언제 그 변덕스러운 심기가 바뀌어 병사들을 보내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내 것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검격에 맞서 검을 가로로 눕힌 대공이 악문 잇새로 말했다.

“윽, 데려갔다고 들었는데.”

“네 것?”

“바란 탈타미오. 어디에 뒀지요?”

되묻는 말에 ‘바란’이라는 이름이 불현듯 튀어나왔다. 반갑지도 않은 의외의 흐름이다. 니카는 견딜 수 없이 속이 쓰렸다. 어두컴컴한 통로 안에 빈스의 시체와 함께 나뒹굴고 있을 잔악후작을 생각했다.

“대가를 치르게 했다.”

니카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런 기분이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차 있던 잔악후작은 그 불씨를 니카의 가슴으로 옮겨붙게 만들었다. 그것도 하필, 니카가 가장 경외하며 소중히 여기는 부분을 겨눠서. 그러니 그렇게 된 것도….

‘어쩔 수 없었어.’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합리화를 집어삼키며 벌벌 떠는 손끝을 고정하려고 힘을 주었다. 검을 주고받는 도중에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것은 곤란했다.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동작이 주춤하거나 커지면서 빈틈이 드러나게 된다. 대공은 그걸 놓칠 만큼 어리숙한 검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힐벤 대공의 심내는 니카의 대수롭지 않은 체 던진 말에 요동치고 있는 듯했다. 망설임 끝에 터져 나온 반문이 이것을 증명했다.

“대가라고?”

“…배를 찢어놓았지.”

팽팽하게 호각을 이루던 전세가 잠깐 무너졌다. 대공은 멈칫 지하수도 방향을 돌아보느라 커다란 빈틈을 만들었다. 무의식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늦게 눈치채고 도로 니카를 견제하기 위해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니카가 휘두른 검은 대공의 옆구리를 스치듯이 베었다. 달틴 사사바란의 검은 니카가 사용하던 같은 왕국기사의 검보다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가 짧았다. 손안에 느껴진 감각에 의하면 이 공격은 고작해야 옅은 생채기에 그쳤다. 

대공이 용케도 검로를 눈치채고 발길을 뒤로 물려 몸을 건사했기 때문이었다. 니카는 여기서 더 뜸을 들이는 대신, 옆에서 담대히 버티고 서 있던 먹구름의 안장 위로 발판도 없이 뛰어올라 고삐를 쥐었다. 허리를 뒤틀어 대공을 견제하면서도 서둘러 말의 옆구리를 찼다.

먹구름은 기수의 심정에 잘 반응하는 영민한 말이었다. 기다란 다리가 땅 위를 박찼다. 대공 역시도 얼른 말에 올라타 니카를 뒤쫓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못 박은 듯 서서 니카를 보다가, 이내 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니카의 뒤를 쫓아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니카는 본능적으로 헬린 힐벤이 지하수도로 향할 거라고 깨달았다. 그러나 어떻게 그 안으로 들어가 바란을 살리겠다는 말인가? 이가 절로 부딪으며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니카는 수로 깊숙이 바란을 버려두고 왔다. 

그래, 버려두고 왔다. 피가 강을 이루어 오물과 뒤섞이고 사랑하던 그 몸뚱이가 붉은 빛으로 절여지는데도 그냥 두었다. 대가를 치르게 만들었다. 마침내 그를 기만한 잔악후작에게 복수를 했다!

“흐, 흐윽, 흑….”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흐느낌이 마치 끓는 냄비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김처럼 갈 곳을 모르고 머리꼭지까지 올라가 시끄럽게 빽빽대더니, 마침내 입술을 뚫고 나왔다. 니카가 탈타미오에 발을 들인 지 어언 넉 달이 지난 어느 새벽이었다. 부쩍 다가온 겨울의 기세가 사방천지에 등등했다.

* * *

남자는 원탁 위에 놓인 지도를 유심히 관찰했다. 어깨 위로 하얀색에 가까운 옅은 금발이 쏟아졌다. 그가 허공에 손을 튕기자 뒤에 선 시종이 다가와 허리를 굽혀 절하고는 머리끈으로 긴 머리칼을 느슨히 동여매 주었다.

좌중의 입술에서 끝없는 침음성만이 흘러나왔다. 남자, 앙살라테 드라코슨 왕자가 입술을 굳게 일자로 다물었다가 무겁게 떼어냈다.

“적진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다르탈루 강을 가로지르는 ‘거인의 돌다리’는 대공 세력이 거의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강 이동지역까지 진군할 묘책이 있는 게 아니라면 부담이 너무도 큽니다.”

“게다가 겨울이 오고 있지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여러 가지 말들이 날아들었다.

“흠, 구라는 치지 않겠습니다. 저희 남부인 용병들은 북부의 바람에 약하죠.”

“구라가 다 뭔가? 거짓말이라고 고쳐 말하게!”

“영감은 왕국어도 엉망진창이면서 뭘 격식을 따지래. 왕자님도 가만 계시잖아!”

앙살라테는 등용에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았다. 원탁에 둘러앉은 이들 중에는 여자와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 노인, 외국인과 천출도 섞여 있었다. 자신의 발밑으로 누구 하나 착취당하는 일 없이 살 만한 천하를 만들겠다는 앙살라테의 철학은, 평소 구제활동에 힘을 쓰던 수리 왕녀의 도움에 힘입어 백성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지방 토호들과 귀족들은 대개 앙살라테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르탈루 강의 대패도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다만 젖줄인 강 너머까지 밀려나면 더 이상 승산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계란으로 바위를 쳐 봤을 뿐이었다.

“차라리 연맹국 상단과 다시 접촉하여 보급로를 틀어쥐는 작전에 다시 착수하면 어떻습니까?”

“정보가 새고 있어. 니카 경을 어떻게 잃었는지 알잖아.”

연맹국 출신자가 손을 들고 발언하자 앙살라테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붙잡아 누르며 대답했다. 담판만 잘 지었다면 지금쯤 승기가 이쪽 손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수리 왕녀는 담판에 실패했고 그녀의 가장 큰 전력이던 용인기사마저 잃었다. 그 일은 수리에게 있어서도 커다란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었다. 마침 왕녀가 손을 들고 발언했다.

“제가 용인기사를 거기에 남겨두고 오신 일을 다들 기억하실 겁니다. 연맹국과의 담판에 실패하고 탈타미오 인근을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이미 우리의 경로를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사사바란의 기사가 떼를 지어 기다리고 있더군요. 용인기사가 뒤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멀찍이 도망을 치는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상심이 크신 것 잘 압니다.”

“그래요.”

수리의 눈동자가 빨간 속눈썹에 가려졌다. 육 년 전 부마를 잃은 왕녀는 헤아릴 수 없는 눈물로 밤을 지새워 눈두덩이 붉게 침착되었고 우울한 인상이 생겼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볼살을 살짝 깨물었다. 가녀린 뺨이 움푹 들어갔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왕녀가 사난타 성에서 강을 건너 돌아왔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겠지.”

“사난타? 그거 오륙 년 전엔가 백성들이 들고일어났다가 묵사발 난 성 아닙니까?”

남부인 용병이 과장되게 원탁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앙살라테가 턱을 끄덕이며 펼쳐진 지도 위에 대공군의 말을 집어 하나씩 올려두었다. 대공군 주둔지를 의미하는 이 붉은 말들은 대개 그들의 거점인 탈타르와 ‘거인의 돌다리’ 지역에 걸쳐 있었다. 왕자는 방금 전 언급된 사난타 성에도 작은 말 하나를 올려두었다.

“사난타는 대공의 손안에 있다. 하지만 멍청한 귀족들이 이곳을 환락의 위성도시로 만들면서부터 공공연한 무법지가 됐지. 주둔하고 있는 대공군의 주된 임무가 치안 관리인 것을 보면 기강이 얼마나 해이해져 있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나?”

“잠깐, 그래서 사난타를 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전하?”

“거긴 북쪽 도시잖아요. 얼어 뒤질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거기는 유속이 빨라서 강을 건너려면, 실례, 개고생해야 됩니다.”

남부인 용병이 벌써부터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수리 왕녀가 고개를 들어 유리알처럼 반짝거리는 갈색 눈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대신 강폭이 가장 좁은 지점이기도 하지요.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북쪽 도시들은 월동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대공의 관심도 소홀해졌을 테죠. 암만 궁지에 몰린 쥐라도 북쪽으로 쳐들어올 거라고는 보통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 저번에 그쪽 책사가 지껄이는 꼴을 보니 틀에 박혀 고루하고 고지식한 전략이나 짤 게 빤하더군요.”

“수리, 헐뜯지 말고.”

잠자코 듣던 왕자가 주의를 줬다.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인들 못할까요?”

“네 아버지의 20년 지기 친구 되시는 분이다.”

“우리한테서 돌아섰는데 그런 겉치레가 다 무슨 상관이죠? 아무튼 사난타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에요. 우리 전력으로 그나마 비벼볼 만한 성이라고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사난타…. 왕녀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여태 침묵을 지키던 늙은 여인이 처음으로 입술을 뗐다. 거짓말처럼 소란스럽던 이들이 다 그녀의 쏙 들어가고 주름진 입술에 시선을 주었다. 어두컴컴한 로브를 뒤집어쓴 채라서 바깥에 드러난 것은 그녀의 입술뿐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얼굴에 빼곡한 넝쿨 문신이 그녀가 남부의 집시임을 알려주었다.

“마침 저 역시도 사난타에 관한 미래를 보았습니다.”

쉭쉭 대는 목소리가 찬성을 표하자 다들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잣자후의 집시 중에서도 우두머리 샤먼으로, 점성술과 꿈해몽 등 토속적인 예언 능력이 있어서 지난 전투에서는 신탁을 통해 적군의 공격방향을 맞춘 일도 있었다. 

게다가 앙살라테 왕자가 그녀의 의견을 늘상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에 애초에 집시 노파가 입을 열기 시작한 이상 진군 여부는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좌중의 시선이 전부 사난타 위에 놓인 적군의 빨간 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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