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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겨운 예감 (3/12)

3. 역겨운 예감


오감이 고열의 불꽃으로 지져져 마비된 것 같은 상태에서도 니카는 방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이윽고 침대에 드리운 캐노피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간신히 뜬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토라진 것 같은 불평이 날아들었다.

“용인은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했잖아.”

니카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변명하려다가 메마른 목구멍으로부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침입자는 한참이나 니카의 대답을 기다리며 버티고 서 있다가 곧 문제점을 눈치채고 물 한 잔을 대령하는 호의를 보였다. 그래 봤자 그가 한 일이라곤 침대 옆 협탁에 이미 준비된 양철 컵에 물주전자를 기울이는 게 다였지만.

“네 창백한 얼굴이 용광로처럼 뜨겁게 열을 내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어? 항상 용인이라는 사실로 날 안심시켜 놓고는.”

“바란….”

바란이 흘려 넣어준 물기가 목젖을 적시자 다 쉬어버린 목소리가 소리 내는 기관을 온통 할퀴듯이 고통을 남겼다. 

“다친 곳은 괜찮습니까? 의원에게 보였나요?”

“그 꼴을 하고서도 내 걱정을 먼저 하면 어떡해. 나 자신이 한심해서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 들게 만드는 거, 그만하면 안 돼?”

바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난 치료 다 끝났어. 의원 말이 꾸준히 회복을 도와주는 탕약이나 달여먹으면서 요양하면 금세 나을 거라더군. 흡혈귀한테 물린 것 같은 흉터 자국이야 남겠지만 그건 그런대로 멋있을 거야. 그러니까 넌 네 걱정이나 해. 하루 종일 불덩이같이 열이 났다고.”

“감기라던가요?”

“그래, 어지간히도 독한 놈이라더군.”

“걱정하셨겠군요.”

니카는 캐노피를 걷어낸 바란이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와 그의 몸 위에 웅크리는 것을 반항도 못 하고 지켜보았다. 장정 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푹신한 침대가 벌써 아래로 두 배는 더 내려앉았다.

조금만 비틀어도 얻어맞은 것처럼 아픈 몸을 그대로 두고 시선만 간신히 내리깔았다. 바란은 빨간 머리카락을 니카의 가슴팍에 약간 얹어놓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이불 속에 온몸을 완벽히 은신했다. 배꼽 약간 위에서 바란의 오똑한 코와 더운 입김이 느껴졌다. 뱃속에 나비 떼가 들어찬 것처럼 간지러웠다. 

모닥불 빛과 빗소리로 가득 차 있던 동굴 안에서 그들은 꼭 지금처럼 부둥켜안고 체온을 나눴다. 자신의 품 안에 피와 살로 이루어진 누군가의 몸이 꼭 맞게 들어찬 감각은 한계까지 높아졌던 감정의 파도를 잠재웠다. 목덜미에 바란의 날숨이 부서질 때마다 니카는 평온함을 배웠다. 그리고 가슴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긍정적인 사랑의 감정 덕택에 한없는 기쁨에 잠겼다.

솟아나는 행복감으로도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기침을 삼킬 수는 없었다. 니카는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두어 번 콜록거렸다. 갈라진 목구멍과 메마른 혓바닥에서 비릿한 맛이 났다. 혀를 굴리자 말라붙은 입안에 혀가 붙었다 떨어지면서 간지러움이 거세어졌다. 

바란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여 지레 겁을 먹고, 비가 다 멎지도 않았는데 무리해서 성으로 돌아온 것이 화근이었다. 비바람을 맨몸으로 뚫는 무모한 행위에 지난 피로가 중첩이 되어, 니카는 몸살감기 판정을 받았다.

니카는 제 위에 올라타 이불을 뒤집어쓰고 꼬물거리는 바란이 귀여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애써 엄숙한 목소리를 냈다.

“이러다간 옮습니다. 나가 계세요.”

“싫어.”

사방이 틀어막힌 탓에 평소답지 않게 어물거리는 목소리였다.

“너하고 있을래.”

바란이 이런 식으로 어린애처럼 떼를 쓰기 시작하면 막을 길이 아주 없었다. 니카는 이토록 독한 감기를 옮기기라도 할까 봐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나가라며 몰아내는 것은 그만두었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 무늬만 보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느니 바란이 꼼지락거리는 모양을 구경하는 게 훨씬 낫기도 했다.

가슴팍에서 어지러이 흩어진 빨간 머리카락을, 서툰 손짓으로 빗질하며 매만졌다. 바란의 머리칼은 마냥 보드랍지만은 않았다. 진한 붉은색과 옅은 붉은색이 얼룩진 머리카락에는 명백히 주기적으로 염색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면밀히 살펴보니 뿌리는 예쁜 금색이다. 

붉은색이 바란의 날카로운 생김새와 잘 어울리긴 했지만, 니카에게는 연인의 다양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었다.

“원래 빨간 머리가 아니지요?”

“으응.” 

대답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은 침음성을 내며 바란이 이불 속으로 더욱 가라앉았다. 머리칼을 감추려는 것이다. 

“봤어?”

“원래는 금발인 것 같던데요.”

“…….”

바란은 잘못을 들킨 어린애처럼 쭈뼛거리며 이불 밖으로 나왔다. 멋쩍어하며 손빗으로 뒤엉킨 머리를 빗는데, 니카가 말한 대로 위로부터 손톱 길이만큼의 머리카락은 꿀을 바른 듯한 황금색이었다. 바란의 황금색 속눈썹을 보면서 니카가 항상 상상해오던 바로 그 색.

“놀리려는 건 아닙니다만, 이렇게 예쁜 금발을 빨갛게 염색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보육원에 있었을 때… 주근깨가 있는 빨간 머리 여자애가 있었거든요.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지만. 아무튼 그 애의 소원은 순금을 뽑아낸 듯한 황금빛 머리칼을 갖는 거였죠. 매일 밤마다 기도하는 소리가 제 침대에까지 들렸어요.”

바란이 물끄러미 니카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어떻게 말입니까?”

“좋아하냐고, 금발…. 빨간 머리보다 말이야.”

니카는 눈을 깜빡였다. 이 질문, 그리고 새파란 바란의 시선까지. 어쩐지 전에 한 번 겪어본 듯한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 * *

대공의 밑으로 들어가 처음 참석하게 된 티파티는 바란에게 가시방석이었다. 수다스러운 귀부인들 사이에 유일한 남자로 끼어있다는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이유였다. 

주변은 리본, 프릴, 인조향수 냄새 등 바란이 싫어하는 것들투성이였고, 주최자인 수리 왕녀는 화제를 니카에게 몰아가는 데 열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얘기를 주고받던 귀부인들이 왕녀의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왕녀님, 세상에! 그 흉측하기로 소문난 용인기사를 거두셨다면서요.”

“정말 용감하세요.”

“이 은혜를 그 용인도 알아야 할 텐데요. 서약을 바칠 레이디가 없어서 기사라는 이름을 헛되이 그르칠 신세인데 왕녀님께서 구원해주신 꼴이 아닙니까.”

앙살라테 왕자가 시종으로 부리던 용인을 기사로 키우겠다며 후견인으로 나선 것은 이전에도 큰 이슈였다고 했다. 다만 용인을 기사로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일이 왕자의 노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왕국에서 진정한 기사는 기사도에 입각하여 심신을 바칠 레이디를 정하면서부터 그 작위를 인정받게 되는 공공연한 관습이 있었던 탓이다.

니카에게는 꿈과 같은 이야기였다. 레이디를 섬기는 것은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 당사자의 허락이 필요했다. 거느린 기사의 평판과 능력은 레이디의 가치를 대변했다.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을 각오하고 니카와 같은 천한 혼혈인을 슬하에 받아줄 레이디는 없었다. 그런데 앙살라테 왕자의 이복 여동생 수리 왕녀가 니카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나선 것이다. 수리 왕녀는 탐스러운 붉은 머리칼을 모아 어깨너머로 넘기며 품위 있게 웃었다.

“왕가의 일원으로서, 불쌍한 백성을 연민할 줄 알아야지요.”

“세상에! 혼혈인을 두고도 백성이라 말하시는군요.”

“그 누구도 혼혈인에게 이렇게 인도적으로 행동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왕녀께서는 곧 혼혈인 고아들을 위한 보육원 설립을 위해 모금 활동을 벌이실 거라고 들었어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왕녀님을 적극 지지하겠어요.”

“감사해요, 부인. 낮은 자들을 바른길로 이끄는 것이….”

왕녀의 눈동자가 분노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 직전인 바란을 흘겨보았다. 그를 모욕한 적도 없건만, 바란은 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문 채 식탁보만 하염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이 바란의 온 몸을 지배했다.

“그게 우리 왕국민의 도리 아니겠어요?”

그리고 왕녀는 조금 웃었다. 앙살라테 왕자가 용인의 뛰어난 신체능력과 검술에 감명을 받아 그를 전력으로 삼고자 기사로 들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왕자와 대공 간의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왕녀는 왕자 쪽에 몸을 의탁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녀가 니카의 레이디가 되어준 것도 그녀의 자비가 아니라 왕자가 지시한 사항일 것이다. 또, 선한 이미지를 위해 살뜰히 니카를 팔아먹고 다니는 것은 수리 왕녀의 수완일 테고.

‘둘 다 재수 없기는 매한가지군. 남매 아니랄까 봐.’

“왕녀님, 저하로부터 급한 전언입니다.”

유리 온실의 문을 열고 방금 전까지 좋을 대로 떠들어대던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들어섰다. 바로 니카다.

“저번에 일임하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정말 긴밀한 이야기라면 왕녀의 귓가에 대고 속살댔을 것인데, 이렇게 들으라는 듯이 얘기하는 것으로 보아 왕녀의 소속을 귀부인들의 목전에서 확실시하려는 속셈이다. 왕자, 아니면 왕녀의 지시일까? 바란의 굳은 얼굴이 조금 풀렸다. 

반대로 니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미 그녀들이 주고받는 소리에 적잖이 모욕감을 느낀 까닭일 것이다. 용인의 청력은 그깟 유리 한 장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혈인이니 낮은 자들이니 어쩌니 하며 멋대로 지껄이던 소리를 모두 들었을 게 분명했다.

좌중을 훑던 니카의 시선이 잠깐 바란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앞에 앉은 미끈한 청년 후작과 매일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던 깡마른 꼬마를 연관 짓는 것은 확실히 힘든 일이었다. 

바란은 조금 머쓱하고 부끄러운 기분과 실망감이 섞여서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하기는 그 저택을 나온 후 일 년 동안 키가 많이 자랐고 검술을 수련하면서 체격이 몰라보게 든든해졌다.

“그런데 탈타미오 후작께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오늘의 디저트가 꽤 훌륭한데도 손을 대지 않으시는군요.”

바란은 말머리가 자신에게 돌아오자 문득 시선을 돌려 좌중을 돌아보았다. 원탁에 둘러앉은 여인들 모두가 유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부채를 부치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바란은 줄곧 니카에게 집중하느라 왕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바란이 곤혹스럽게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지요?”

“어머, 숙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시다니. 후작께서는 생각보다 무례하시군요.”

“괜찮아요, 부인. 줄곧 저의 용인기사를 보고 계시더군요. 신기하신 모양이에요. 우리 모두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죠. 잡기단에서 기르는 기이한 짐승을 처음 볼 적에 신경이 온통 그 짐승에게 쏠리곤 하잖아요?”

왕녀는 그녀가 가진 도구를 뽐내는 듯한 말씨로 물었다.

“용인을 보는 건 처음인가요?”

바란은 왕녀가 그렇게 질문하는 순간에도 그녀가 아닌 니카를 보고 있었다. 니카의 얼굴이 모멸감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곧 바란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는데 바란이 생각하기로는 방향이 아주 틀린 분노였다. 

하기는 차마 사랑하는 왕녀에게 그 화살을 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니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신발코에 닿도록 내리깔았다. 분노를 가라앉히는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였다.

티파티가 있던 그 날은 우연히도 니카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함께 온실을 거닐며 수리 왕녀의 원예지식에 적절한 맞장구를 쳐 주던 와중이었다. 왕녀가 여자들끼리만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꽃잎 차를 공유하겠다면서 거기 모인 귀부인들만 이끌고 저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무시당하는 것은 질색인 바란이지만 은근한 눈길로 바란과 니카를 멀찍이 따돌리는 저 귀부인들 틈에서 버티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비밀스럽게 팔다리를 주물럭대는 손길과 부채질로 연막을 친 은근한 희롱이 성가시고 따분했던 참이다.

“니카 경은 붉은색을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좀 전부터 붉은 장미만 계속 바라보고 계시던데요.”

“…….”

뒷짐을 진 채로 니카를 향해 빙긋이 웃는 바란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같았다. 니카는 눈이 마주친 동안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긍정의 뜻으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니카는 아치형 구조물을 타고 넝쿨을 친 줄장미를 어루만지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를 상념에서 불러낼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하찮게 느껴졌는지. 바란은 니카가 바라보는 새빨간 장미와 그가 떠올리고 있을 한 여인에 관해 생각했다.

“기왕이면 금발이 낫지 않아요?”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 금발 쪽이 더 근사하다고 생각하지 않냐고요. 보통 그렇거든요. 빨간 머리에 주근깨라니, 그런 촌스러운 조합이 또 어디 있겠어요.”

니카는 바란을 바라보며 검 손잡이를 질끈 움켰다. 왕녀의 손님이 아니었다면 벌써 수 번은 더 베어 넘겼으리라는 듯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니카의 빈축을 살 것이야 진작에 알았다. 그래도 그의 앞에서 왕녀를 낮잡아 말하는 것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바란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틀린 말 아니잖아요.”

“목숨이 아깝다면 입을 놀릴 때 좀 더 주의하셔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말입니다만, 그쪽의 난봉꾼 같은 금발보다는 왕녀님의 붉은 머리칼이 훨씬 낫습니다.”

니카가 말했다. 아, 홀로 느껴야 했던 좌절감이란. 

* * *

“지금 당장은 빨간 머리가 좋습니다만….”

니카는 연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 별 의미는 없습니다. 당신이 머리칼을 다른 빛깔로 물들인다면, 그때는 또 그 색을 가장 좋아하게 될 테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게 당신이지, 당신 머리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말은 까다로운 연인의 심금을 울리는 데 성공했다. 바란은 몇 번이고 속으로 곱씹다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 감정적인 자극을 받으면 처음에만 그 효과가 크고 점차 무뎌지기 마련인데, 바란의 경우엔 아니었다. 니카로부터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여상하게 넘기지 못하고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했다. 신이 나서 꿈틀대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흔들리는 이불을 통해 여실히 느껴졌다. 

니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귀여워. 어지러운 와중에 이렇게 생각만 했는지 아니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 빨간 머리 그만할래, 나는.”

“그래요.”

“어차피 너 때문이었어. 내 금발이 난봉꾼 같이 보인다고 했었잖아.”

“설마요.”

농담인 줄 알고 옅게 웃던 니카는 바란의 진득한 시선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정말로 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글쎄. 어떨까?”

이불 바깥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바란은 슬그머니 니카의 몸을 타고 올라와 배 위에 앉았다. 담백한 손길로 니카의 허벅지와 골반뼈 사이를 짚는 바란의 행동마다 니카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우냐고 바란이 물으니 그냥 감기 탓에 열이 나는 거라 했다.

폭풍우 속에서 체온을 나누려 한참이나 부둥켜안았던 기억 탓일까? 바란의 대범함이 한껏 자랐다. 부끄러움에 익사할 지경이 된 니카의 눈치를 살피던 바란이 샐쭉 눈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따뜻한 키스가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니카는 바란이 너무 귀엽게 구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는 새 이성을 잃고 키스를 해버린 건 아닌지 짧은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가 니카의 아랫입술을 살며시 핥았다. 잘록한 옆구리에 조여드는 바란의 두 넓적다리가 은근한 간지러움을 주었다. 

구겨진 셔츠를 입은 바란이 내쉬는 떨리는 날숨까지, 모든 것들이 다 명백한 성애의 표현이었다. 당황을 감추지 못한 니카가 바란의 어깨를 떠밀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란은 순순히 떠밀려 나가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자, 잠깐만요.”

물기로 촉촉하게 젖은 니카의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바란이 불만을 가득 담아서 촉촉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가 “잠깐만 없어.” 하고 막무가내로 입술을 들이미는 것을, 니카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어버렸다. 

입이 틀어막히자 무슨 말을 해도 진동이 손바닥 안에서만 감돌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니카는 자신의 손등 위에 짧게 입맞춤을 남기며 엄격하게 말했다. 두 사람의 콧방울이 가볍게 부딪혔다.

“잠깐만이라고 했잖아요. 감기 옮습니다. 이걸로 대신해요, 오늘은.”

“흐….”

니카가 손등 위에 한 번 더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춘 뒤 손을 치웠다. 두 번째 입맞춤이 지나간 뒤에 바란은 더욱 얌전해졌다. 풀죽은 목소리가 슬그머니 기어 나왔다.

“…미안, 한심하지. 참을 수가 없어서.”

바란은 떼를 쓰던 게 무색하게도 두 손을 내보이며 항복을 선언했다. 미적지근하게 달아오른 분위기도, 애매한 자세로 뒤엉켜 앉아있던 상황도 곧 방 안에 바란을 찾아 들어 온 레이먼드가 나타나자 말끔히 정리되었다. 

그는 아랫것들이 보는데 망측하게 붙어서 뭘 하냐고 귀 따가운 핀잔을 쏟아냈다. 죽는 표정을 한 바란이 양 귀를 틀어막고 니카를 보며 혀를 빼문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이먼드가 바란을 거의 반강제로 끌고 나간 뒤, 니카는 협탁에 올려두고 본체만체 하고 있던 탕약에 손을 뻗었다. 용인의 몸에 약이 잘 듣지 않는다곤 해도 사소한 도움이나마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마셔줄 수 있었다. 얼른 나아야 했으니까.

* * *

첫사랑을 시작한 사춘기 어린애들 같은 두 남자의 모습은 레이먼드의 성질을 무척 건드렸다. 그는 안 그래도 연회에 불참하게 된 바란에게 탐탁지 않은 마음을 품은 상태였다.

레이먼드는 니카의 방에서 벗어난 뒤부터 마음껏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지푸라기처럼 윤기 없는 머리카락과 거멓게 내려온 눈그늘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서려 있었다. 거의 있는 줄도 몰랐던 죄책감이 바란의 마음속에서 슬슬 기어 나와 자진납세를 할 만큼 못 봐줄 꼴이었다.

“겨우 제 발로 나가준 것을 굳이 쫓아 나가서 데리고 들어올 줄이야.”

레이먼드가 침실의 커튼을 닫으며 불평했다.

“아니지, 말은 바로 합시다. 데리고 들어오긴커녕 니카 경에게 들러붙다시피 안겨 오셨죠. 어깨에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부상을 입은 채로 말이에요.”

“들개 무리였어. 족히 열 마리가 넘었다고.”

“아무튼 개한테 물리신 거잖아요! 기왕 들짐승에게 당해서 불참하시려면 좀 그럴싸한 놈들이라도 고르실 것이지, 개떼가 다 뭐람.”

레이먼드가 히스테릭하게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비명을 질렀다. 대공에게 보낸 고용주가 들개에게 물려서 돌아오다니 이게 웬 개 같은 경우냐고 했다. 거친 언사에 바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는 그래도 양심껏 분노를 참아냈다. 

“가벼운 마음으로 불참할 자리가 아니었다고요, 이번엔! 아시잖아요.”

“그래,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레이먼드가 떽떽거리면서도 어깨의 붕대를 새로 감아주었다. 완전히 아물기 위해선 시간이 아직 많이 필요했다. 바란은 맨 몸에 가운을 대충 걸치며 물었다.

“대공에겐 뭐라고 했어?”

“뭐라 말하긴요. 못 간다고 인장 찍어서 전서구 띄웠지요. 가는 길에 들짐승에게 습격당해 정신을 잃었다고 겨우 변명을 했습니다.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 성격에 알 만하죠. 그래도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겁니다. 노스월만큼은 아니어도 탈타미오 역시 혹독한 북쪽 영지 아닙니까.”

이 말에 바란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게다가 올해는 예년보다 추위가 빨리 찾아올 것 같던데요.”

오래토록 누워있느라 작은 발걸음에도 현기증이 도졌다. 바란은 휘청이며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 무렵 보통 그렇듯 황량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성안의 고용인들은 하나 같이 초겨울부터 입는 누비옷을 꺼내입었다. 옷가지 덕택에 몸집이 다들 두 배씩은 불었다. 저번에 본 마구간 지기네 아들이 목을 놀란 거북처럼 움츠리고 종종걸음치는 것을 보던 바란이 픽 웃었다.

“그래. 과연 겨울이 오는 냄새가 나는군.”

“그리고 후작님, 대공에게서 지시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막 도착했어요.”

“말해.”

바란은 관심 없는 투로 창가에 몸을 깊숙이 기울이며 대꾸했다. 잠시간의 고요가 흐르자 레이먼드가 전하려는 소식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대공의 번견인 탈타미오 후작은 그가 원하는 대로 운용되는 검이었다. 종종 이런 식으로 뜬금없는 편지를 날려 명령을 하달하고는 했다.

“이번엔 어디로 가래?”

바란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탈타미오…. 라는 데요.”

바란이 눈썹을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편지에 코를 묻고 기본적인 철자법조차 안 지킨 대공의 편지를 열심히 해석해나가던 레이먼드가 이내 피곤한 얼굴로 제 콧등을 매만졌다.

“정확히는 탈타미오에서 롱가든으로 향하는 길목입니다. 앙살라테가 연맹국의 상단으로부터 고대룡의 뼈를 수입한다는군요. 일주일 뒤에 상대가 지날 예정이니 실수 없이 해치우고 뼈를 탈취하라네요.”

“웩, 드라코슨 놈들은 하여튼 이상해. 다 낡아빠진 뼈를 가지고도 이를 드러내며 싸운다니까.”

“용들의 무덤에서 혈통을 증명할 때 조금이라도 더 정당성을 얻겠다는 거죠. 뭐, 왕위계승서열이라는 게 다 명분 싸움 아니겠습니까.”

바란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먼드는 그런 줄 알라며 뒤통수를 긁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업무하라고 들볶기에는 아직 바란의 몸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짐작한 모양이다. 바란은 픽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다.

* * *

‘좋아하니까 안아달라는 건데, 뭐가 나빠?’

바란이 그렇게 첫마디를 떼고부터, 니카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에 익사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무리 꿈이라는 것이 꾸는 사람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다지만, 또 다른 말에 따르면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기도 했다. 니카는 내심 이런 상황을 상상했던 것일까?

‘옷, 옷차림이 왜….’

앓는 소리를 내다 말고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미안합니다, 바란. 이런 꿈을 꾸다니…. 항상 이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건 아니었어요.’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는 바란의 뽀얀 몸이 반투명한 옷가지 너머로 비쳐 보였다. 무희들이 연회장에서 문란한 공연을 할 때나 걸치는 있으나 마나 한 의상이다. 바란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니카의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앉아서 핏줄이 맥박치는 니카의 목줄기를 타고 오르며 입을 맞췄다. 

니카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었다.

‘나는 맹세코 당신을 더럽힐 생각은 없었어요.’

‘니카, 안아주지 않을 거야?’ 

발그스름한 입술과 잘 생긴 콧날이 니카의 여며진 단추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배꼽 아래에 비벼졌다. 충동과 양심 사이에서 가슴이 쪼그라드는 고통이 들이닥쳤다. 아랫배와 허리에서 전기가 찌르르 오르며 배설감이 들었다. 

“…….”

왈칵 꿈에서 깨어나 고요하고 텅 빈 천장을 보았을 때, 니카는 혀를 깨물고 싶은 자괴감에 잠겼다. 얼룩진 시트와 속옷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막막했다. 매일 같이 이부자리를 살피는 시녀들이 이 일을 모르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수치심에 고개도 못 드는 니카의 방문에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침 같이 들러 옷가지와 목욕물을 받아다 주는 마틸다였다. 니카는 마틸다가 고작 자신 같은 용인 한 사람을 위해 매일 아침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위치의 시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해서 이 사태가 수습이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분수에 안 맞는 허드렛일을 섬겨주는 마틸다에게 큰 실례가 될 것이다. 니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들어오라며 기척을 냈다. 

마틸다는 수십 년간에 걸친 시녀 생활을 통해 비상한 눈치를 길렀다. 수치심에 상기된 니카의 모습을 본 늙은 시녀는 목욕시중을 들기 위해 그녀의 뒤에서 줄지어 선 다른 시녀들을 전부 물렸다. 방 안에 그녀와 니카, 단둘만 남았을 때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니카였다. 창피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다 숨기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마틸다.”

“별말씀을요.”

마틸다는 참다못해 인자한 웃음을 부스러기 같이 흘렸다.

“좋은 꿈 꾸셨겠지요?”

“그런 게 아니라….”

탈타미오 가의 도련님 두 사람을 어릴 때부터 길러온 여인이었다. 마틸다는 니카가 대꾸도 못 하고 빨갛게 익어서 얼굴을 감추고 옅게 흐느끼는 소리를 내는 동안 민망하지 않게 수습을 전부 마쳤다. 목욕물의 온도도 알맞게 맞춘 뒤 다시 예의 그 웃음을 흘렸다.

니카는 흉터투성이 몸으로 욕조에 들어가 앉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나신을 드러내는 것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다만 마틸다가 가진 그녀 특유의 푸근하고 담백한 분위기가 예외로 작용한 경우였다. 니카는 해면으로 비누거품을 내어 그의 몸에 칠하는 마틸다의 눈치를 보았다.

“비밀로 해주실 거지요.”

“후후. 경,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더군다나 그 누가 자기가 꿈을 꾸려고 생각하고 꿨겠습니까.”

니카의 입술이 조금 당겨졌다. 안도의 미소였다. 마틸다는 니카를 안심시키고 하등 죄책감 가질 필요가 없음을 최선을 다해 역설했지만, 그것이 워낙 순결한 성정을 가진 니카에게는 잘 들어먹히지 않았다. 

여느 때나 그러하듯이 바란이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읽는 데 열중한 니카를 찾아왔을 때, 니카는 그만 평소와는 다른 태도로 화들짝 놀라며 매몰차게 굴고 말았다.

“니카. 나 조금 어지러워. 네 감기가 옮았나 봐.”

문을 벌컥 열어젖히면서 제 머리에 힘없이 손등을 올리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니카는 안쓰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란은 어떻게든 자신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려고 제자리에서 어지럼증으로 그러는 것처럼 빙글 돌아 보이기까지 했다. 익살스러운 구석이 귀여웠다. 니카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바란이 니카의 허리를 더듬어 안고, 애교스럽게 그를 올려다보는 참이었다. 잘생긴 얼굴이 간밤에 야한 옷을 입고 그를 유혹하던 꿈속의 바란과 겹쳐 보였다. 아랫배에 바짝 당기는 느낌이 났다. 하체가 묵직해지기 전에 황급히 바란을 밀쳐냈다. 연인과의 달콤한 포옹 도중에 거센 힘으로 떠밀려 문간으로 밀려난 바란은 얼떨떨하게 눈을 끔뻑였다.

“왜…. 왜 그래? 나 또 뭐 잘못한 거 있나?”

“…아닙니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니카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던 참에 놀라서 둥그렇게 뜨인 바란의 파란 눈이나, 니카가 아무래도 좋다는 말을 한 뒤로부터 다시 염색하는 일 없이 손가락 한 마디 만큼 기른 금색 머리칼이 눈에 들어오니 가슴이 떨리고 입이 절로 다물렸다. 

결국 니카는 그럴싸한 변명이라고는 한 글자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제정신이라면 감히 그의 구원자에게 추잡한 욕정을 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니카는 자신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바란 탈타미오는 용인 니카에게 있어서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감사한 존재였다. 너무도 소중해서 가끔은 신성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아름답고 순결한 장미, 한 발짝도 밟힌 흔적이 없는 새하얀 눈밭, 그 밖에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을 가져다가 빚어낸 사람이었다. 바란을 묘사할 때면 니카는 늘 자신의 어휘력이 아쉬웠다.

그의 옆에 서서 사소한 버릇들을 관찰하고 이따금 사랑한다는 과분한 말을 듣기만 해도 충분했다. 이미 너무 행복해서 무서운 정도였다.

‘나의 니카.’

그거면 충분하잖아. 분수를 알아야지. 니카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욕심을 낼 필요도 없었다. 바란은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거짓말 중에서도 그것만큼은 진심이라고 했다. 만족할 줄을 알아야 했다. 

무저갱에서 자라난 비참하고 악취 나는 소유욕을 실수로라도 드러내서는 안 됐다. 말끔하고 좋은 면만 바란에게 보여줘야 했다. 바란이 제 속을 열어보고 생각보다 곪아있으니 내팽개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잘 알면서.’

니카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잘 알면서, 음심을 품다니.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꿈을 꾸고. 나는 정말 최악이야.’

“니카아.”

바란은 이목을 끌고 싶어 하는 집고양이처럼 니카의 눈치를 살살 살필 적에 꼭 이렇게 말꼬리를 늘였다. 왠지 모르게 야한 느낌이 있었다. 니카의 귓등이 새빨개졌다.

“나 니카 보려고 레이먼드도 따돌리고 온 건데.”

“죄송, 죄송합니다. 바란.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낫겠습니다.”

저 사랑스러움에 면역이 생길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니카는 결국 다급한 축객령으로 바란을 쫓아내 버렸다. 숨을 고르는데 자꾸만 “니카아.” 하던 그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까지, 그리고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된다. 머리가 아뜩해질 지경으로 숨을 참았다.

밤마다 너무 많은 꿈이 그의 머리를 엄습해서 니카는 이제 아침에 일어나기만 하면 두통이 서릴 지경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보통 전장을 누비거나 화려하게 치장된 성안에서 검을 차고 있었다. 오늘은 두 가지가 조금 섞인 경우였다. 

니카는 화려하고 웅장한 성곽을 날렵하게 타고 올라가 병사들을 도륙했다. 병사들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잘 갖춰지지 않은 이들이었다. 검을 바르게 쥐고 옆으로 설 줄조차 몰랐다. 훈련도 받지 못한 농민들이 틀림없었다.

피 냄새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선명했다. 꿈 주제에 마치 정말 겪어보기라도 한 일처럼 그의 시선이 닿는 작은 부분들마저도 섬세하고 견고하게 보였다. 아지랑이처럼 툭하면 일렁이고 바뀌기 십상인 평범한 꿈자리와는 달랐다.

어느새 니카의 손에는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수급이 들렸다. 아직 생명이 가졌던 온기가 남아있다. 니카가 움켜쥔 갈색 고수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목에서 나온 핏줄기에 흠뻑 젖어서 마치 바란의 물들인 빨간 머리처럼 붉었다. 감기지도 못한 새파란 눈동자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온 죽은 혀.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도 머리채를 꾹 욱여잡은 손아귀에 힘을 풀지는 않았다.

“우두머리인 클라텐 놈의 모가지를 잘랐으니 금방 정리가 될 거요.”

“한몫했군. 용인기사.”

주변에서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말들을 던지며 그를 지나쳐 갔다. 니카는 이름도 모를 누군가의 목을 잘랐다는 사실만으로 남들의 박수를 받는 것이 의아하기만 했다. 

이미 소탕이 끝나고 시체만 산처럼 쌓인 성의 입구에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기사 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방문객을 향해 활을 겨눴다.

“신분을 밝혀라!”

“그를 알아.”

꿈속의 니카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자 기사는 아니꼽게 침을 퉤 뱉고 활을 거두었다. 니카는 말을 달려온 금발의 청년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동안 우두머리의 수급을 종자가 가져온 상자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목전까지 도달한 청년을 돌아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희끄무레해서 도무지 식별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가 슬픔에 잠겨있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악물린 잇새에서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네 아우는 살려달라고 애걸하지도 않더구나.”

제 입술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서야 니카는 그가 죽인 것이 이 남자의 아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에 묻은 피가 불로 달군 낙인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남자가 새파란 시선을 들어 니카를 응시했다. 꿰뚫려 죽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평온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죽이는 건지 위로인지 분간이 잘 안 가는 말을 듣고 남자가 어떤 표정을 했을지 모르겠다. 니카는 잠에서 깨어났다.

* * *

니카가 매일 밤 알 수 없는 꿈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한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대체로 악몽이었고, 때로는 바란에게 가진 음습한 욕망을 반영한 끔찍한 꿈이었다. 두 개가 교묘히 섞여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었다. 폭력과 욕망은 나날이 니카의 정신을 좀먹었다. 

이 탓에 신경이 한층 예민해진 니카는, 본래 가진 그 강퍅한 기질에 힘입어 바란을 향한 스스로의 애욕을 매도하고 못 견뎌 했다. 끊임없는 자기학대의 늪은 혼혈인인 니카가 빠지기 가장 쉬운 오류였다. 

그는 바란의 모든 말과 행동에 마음이 들끓는 것을 괴로워했고, 바란은 반대로 이것을 지켜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말을 붙일라 하면 겁 많은 소라게처럼 꽁무니를 빼는 마당에 얘기 한 번 섞기가 쉽지 않았다.

“얼굴 보기가 힘드네.”

은 식기가 접시에 부딪혔다. 바란은 냅킨을 들어 괜히 입가를 두드려 닦았다. 눈짓으로 살그머니 니카를 살폈다. 눈이 마주치자 니카는 얼굴을 애처롭게 일그러뜨렸다가, 곧 그것을 교묘하게 감췄다.

“서재에도 잘 안 가고.”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의원을 부를까?”

“하는 거라곤 용인 타령이 다인 그 늙은이 말입니까?”

바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태연하게 나이프를 들고 품위 있게 닭다리를 떼어내던 니카는 자신이 한 말을 뒤늦게 곱씹고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내며 눈살을 찌푸린다. 방금 한 말은 정말 ‘니카 경’ 같았다. 바란은 생각했다. 그렇게 한번 생각하고 나니 그게 진짜인 것처럼 느껴졌다. 바란의 시선에 의구심이 서렸다.

“…최근 꿈자리가 사나워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입니다. 바란, 걱정하지 마세요. 용인들은 원래 토룡의 기질을 이어받아서 날이 추워질 때 몸 상태가 가히 좋지 않습니다. 익숙해지면 곧 나아질 겁니다. 게다가…. 아무튼 그 의원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니까요.”

그리고는 이만 일어나보겠다고 했다. 니카 경의 그림자에 압도된 바란은 감히 니카를 막지 못했다. 니카는 바란의 얼굴이 창백한 빛으로 질린 것을 보면서 대체 무엇이 저리도 두려운 것일까 궁금해졌다.

바란은 니카를 늘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행동거지 하나하나마다 그것이 어떤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는지 견주어보고 놀란 토끼 눈을 하거나 안도의 미소를 띠거나 했다.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대면할 준비가 안 된 것일 터다.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한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니카의 생각은 아직도 변함없었다. 바란의 말마따나 그 말이 가진 의미를 아직 다 짐작하지 못하긴 하거니와 이 마음의 무게 역시 가볍게 달아볼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심려되는 것이 있다면. 니카는 피투성이 꿈을 하나씩 되새기다가, 말을 달려와 숨을 몰아쉬던 금발의 남자를 떠올렸다. 연이어 꾸는 꿈들은 마치 현실 같이 생생하고 끔찍했다.

‘만일 이게 꿈이 아니라면? 이것이 전부 다 니카가 잃어버렸던 ‘니카 경’의 기억이라면?’

짧은 의심이었지만 신빙성과 감정적 근거가 충분했다. 바란이 말했던 영광된 미래가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꿈속에서 니카 경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명령에 따라 사람을 죽였고, 아군은 승리로 이끌었고, 그럼에도 천대를 받았다. 열여덟의 니카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어둠이 니카의 생각에 잠긴 눈동자 안에 드리웠다.

모퉁이를 도는데,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누가 생각에 잠긴 니카의 어깨에 세게 몸을 부딪히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란이 매번 혀를 내두르는 잔소리쟁이 집사 레이먼드였다. 

그가 니카에게 썩 상냥하게 굴지는 않아도 니카는 업무에 충실한 그가 싫지 않았다. 기억을 잃기는 했어도, 그의 뾰족한 소리에 별다른 악의가 없다는 점은 능히 알 수 있는 나이였다.

“니카 경.”

집사가 다짜고짜 한숨을 쉬더니 따지듯이 물었다.

“요즘은 또 뭐가 불만입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후작님 말입니다.”

니카가 부자연스럽게 눈을 굴렸다.

“덕분에 업무 수행에 큰 차질을 빚고 있거든요. 맨날 당신 마음이 식은 거면 어떡해야 하겠느냐고 물으시다가, 집시들한테 이상한 이름점 보는 방법이나 배워서 양피지에다가는 온통 니카, 니카, 니카 적어대고…. 적당히 얼굴 보고 풀어드리거나 하십시오, 예? 둘이 얼싸안고 좋다고 난리를 부릴 적은 언제고 요즘은 대체 왜 그래요? 누가 대주는가 가지고 시비라도 붙었습니까?”

니카의 살벌한 눈초리에 레이먼드는 혀를 잘못 깨물고 딸꾹질을 했다. 어느 경지에 이른 검사들은 검날만큼이나 서슬 퍼런 눈동자로 사람을 제압할 줄 알았다. 레이먼드는 니카의 시선에서 이것을 느꼈다. 과연 검으로는 왕국에 이길 자가 없다는 용인기사였다. 숨이 턱 막혔다.

“무례하군.” 

무감정한 목소리는 레이먼드가 아는 열여덟의 기억상실에 걸린 니카 경과 거리가 있었다. 레이먼드는 얼떨떨하게 얼버무렸다.

“예? 아니, 예. 죄송합니다, 경. 제가 천출이라 입이 좀 걸어서요.”

영리한 레이먼드는 얼른 화살을 바란에게로 돌렸다. 과연 사람 하나 잡을 것 같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그…. 아무튼 내일이 후작님 이름 받으신 날인데, 둘이 오붓하게 분위기도 잡고 좀 그러십시오.”

“바란의 작명일이라고? 내일이?”

니카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렇다니까요. 아시다시피 별난 구석이 좀 있으셔서 작명일 날에 연회를 여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가족 초상화 회랑을 돌아보거나 제단에 향을 피우는 것을 빼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보내시거든요.”

왕국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7일간 이름을 붙이지 않고 길렀다. 워낙 갓난이들이 많이 죽으니 이 아이가 살겠는가 재어보기 위함이었다. 8일째 되는 날 부모가 이름을 짓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관습이었다.

귀족가에서는 유독 이것을 화려하게 지키느라 매년 작명일을 기념해서 크게 연회를 베푸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연회를 연 적이 없다니. 마음이 불편하게 가라앉았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거리를 뒹굴며 작명일도 없이 자라난 이름 없는 고아 니카는 제 주제는 생각도 못하고 다만 바란이 안쓰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언제나 행복하고 눈부시게만 자라왔어야 했다. 바란 탈타미오는 그래야 마땅한 사람이니까. 니카는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겼다.

작명일. 바란이 바란으로서 정해진 날. 세상에 니카가 그 이상 기념해야 하는 날은 또 없을 것이다. 니카는 바란을 이루는 모든 알갱이들을 사랑했다.

최근 꿈의 영향으로 접촉을 피하는 버릇이 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바란이 홀로 속상해하는 것을 살피지 못했다. 니카는 레이먼드의 귀띔을 되씹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바란이 입술에 미소를 머금도록 활기찬 작명일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물론 세상일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충만한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잘 없었다. 복도와 정원을 한참 누비고 다니던 니카의 표정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딱딱하게 굳었다. 작명일 선물이라니! 그런 것을 평생 누구에게라도 줘본 일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보니 있기는 있었다. 어릴 적에 보육원에 함께 살던 남자애의 작명일 선물로 아끼던 예쁜 조약돌을 들고 갔다가, 처박혀서 시야에 들지 않는 것만이 네가 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먼지 나게 맞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바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할까.’

선물이란 기본적으로 주는 이가 가진 것을 받는 이에게 전하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니 가진 것 없이 바란에게 몸을 의탁한 신세에서 니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선물의 폭은 넓지 않았다. 게다가 니카는 늘 바란의 의중을 헤아리는 것이 힘들었다. 무엇을 주면 기뻐할지 알 방도가 없었다.

“경이 주시는 거라면 그게 돌덩어리라고 해도 끌어안고 입 맞출 작자예요.”

낮잡아 이르는 호칭에 니카가 눈살을 찌푸리자 레이먼드는 “실례.”하고 먼저 자진납세를 했다. 품에 안았을 때 다치지 않도록 모서리가 둥근 돌이라도 찾아보라는 게 레이먼드의 조언이었다. 그다지 도움 되는 구석이 없는 말이었다.

“후작님께선 갓 구운 애플파이에 시나몬가루를 듬뿍 올려 드시는 것을 좋아하신답니다. 어릴 때부터 그러셨죠. 나이를 암만 먹어도 귀엽던 도련님의 입맛은 그대로라서 입에 쓴 것은 거들떠도 안 보세요. 디저트를 만들 때는 설탕을 꼭 두 스푼 씩은 더 넣어야 하죠.”

마틸다는 바란의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하면 꼭 저렇게 어머니 같은 표정을 했다. 다른 시녀들을 거느리고 성의 청결상태를 점검하던 중이었던 마틸다는, 손에 들린 장부를 잠시 창틀에 올려놓고 턱을 괴며 후후 웃었다. 그녀를 통해 바란이 좋아하는 것을 알았으니 수확이 있었다. 니카는 들떠서 되물었다.

“애플파이요?”

“네, 그걸 제일 좋아하세요. 안 그래도 주방장이 올해 작명일에는 테이블만큼이나 큰 파이를 구워야겠다고 요란입니다.”

그나마 알게 된 정보가 다른 사람의 선물 계획이라면 별달리 소용이 없다. 니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참 기대된다고 대답했다.

“그 밖에 준비하고 계신 게 있습니까?”

“없지요. 없고말고요. 애플파이야 만찬이 끝나고 난 뒤 디저트인 양 올리고 시치미를 뚝 뗀다지만, 그 밖의 축하에는 학을 떼시거든요. 그게, 다름이 아니라 후작님 작명일에….”

시녀 하나가 무슨 얘기를 꺼내려다 말고 저지당했다. 다른 늙은 시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모두들 표정이 어두웠다.

“얘. 그 얘기는 말아.”

어쨌건 시녀들이 입을 모아 하는 소리를 들으니 바란은 자신의 작명일을 반기지 않는 듯했다. 사용인들이 작명일을 챙기려는 낌새를 보이면, 탈타미오 후작은 이것을 사전에 다 파투내며 축객령을 내린다고 했다. 

간략히 축하라도 건넬라치면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 안 사람들은 작명일의 ‘명’ 자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분위기였다. 돼지치기부터 정원사까지, 사람들은 니카가 조용히 말을 걸자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용건을 묻다가도 작명일 얘기를 꺼내면 곤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자연히 선물에 관해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니카는 쌀쌀한 초겨울 바람을 견디며 훅 숨을 내쉬었다. 뽀얀 입김이 살짝 모습을 내비쳤다가 공기에 녹아 사라졌다.

“안 돼, 안 된다구! 먹구름, 너 그러다 정말 혼난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나 바늘을 세운 침엽수 가지를 무심히 살피며 정원길을 거닐던 와중이었다. 요란스러운 으름장이 들려 고개를 드니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이 안 가겠다고 버티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마구간 지기네 아들이었다. 말의 늘씬한 자태와 검은 빛깔이 눈에 익다 싶더니만, 저번에 니카가 도둑질하듯이 타고 나갔던 그 혈통마였다.

“정말이지 콧대만 높아서는…. 앗! 기사님.”

소년은 서글서글한 표정만큼 붙임성이 있었다. 말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는 것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던 와중에 곁에 서 있던 니카를 발견하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 성안 사람들은 혼혈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경우가 없었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눈길이 가끔 선뜩하고 차가운 거야 어쩔 수 없다 쳐도, 겉으로는 누구든 니카에게 사근사근했다. 니카는 그들이 바란의 으름장을 신경 쓰느라 그러는 줄 눈치챘다.

“이 녀석을 다른 마구간으로 옮겨야 하는데 어쩌다 한 발짝 가면 딴청을 부려요. 힘이 장사라서 끌고 다니기도 힘에 부치고요. 기사님께서는 저번에 이 먹구름을 타신 적이 있죠?”

“아….”

소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니카는 지레 마음에 걸리는 바가 있어 “미안.” 하고 사과부터 했다. 저번에 말을 묶어둔 줄을 잘라내고 빼돌렸던 전적 때문이었다. 

뜻밖의 사과를 받아낸 소년은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저었다. 애초에 기사님의 말이나 다름없는 것을 좀 타셨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되물었더니 소년은 공동재산이라는 얘기를 꺼냈다.

“공동재산?”

“네엡.”

소년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후작님의 것이 곧 기사님의 것과 다름없다는 말이지요. 아버지 말이 원래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다 나눠 갖는 거래요.”

니카의 귓등이 확 붉어졌다. 옆에서 먹구름이 투정을 부리며 콧김을 씩씩 내뿜었다. 제자리에서 편자를 달그락거리고 요란을 부리다가 니카를 기억하는 모양인지 그의 근처로 와서 길쭉한 콧등을 들이밀었다.

니카는 투박한 손을 들어 말의 목덜미와 콧잔등을 어루만져주었다. 신경질이 나 있던 먹구름이 마법처럼 얌전해졌다. 니카의 말 어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을뿐더러, 이 먹구름이란 놈은 니카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평소와는 달리 아주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작명일 선물 말입니다만.”

갈기털을 매만지던 니카는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괜히 한번 뒤통수를 어루만지고, 말의 갈기를 건드리다가 무심한 척 여상히 입을 열었다. 아이는 니카가 망설이는 기색을 단번에 읽더니 옆으로 조르르 와서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입가에 받친 주먹에 반쯤은 가로막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보통 무엇을 주고받는지 잘 모르겠어서….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요.”

“작명일 선물이요? 혹시 후작님의?”

니카가 검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고 조심스레 턱을 한번 끄덕, 했다.

“나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그런데 우선 먹구름을 마구간에 집어넣어야 해요. 그리고 나면 저도 자유 시간이 좀 있는데, 같이 후작님 작명일 선물을 고민할 수 있을 거예요. 오후에 망아지들 목욕시간 전까지는요.”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군요.”

마구간 지기네 아들 빈스는 좋은 생각이라며 박수를 짤깍짤깍 쳤다. 니카가 고삐를 잡고 이끌자 말이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터벅터벅 뒤를 쫓았다.

* * *

바란은 초상화 앞에 서 있었다. 단란한 가족의 초상이었다. 클라텐과 바란은 허리춤에 작달막한 가검을 하나씩 차고 그럴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입술을 당겨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선대 후작과 후작부인의 얼굴을 조심스레 누볐다. 먼지가 내려앉은 것을 닦아내고 나니 세필 붓으로 그려넣은 그들의 생기 넘치는 눈동자가 바란을 지긋이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왔어요.”

텅 빈 회랑에 바란의 인사가 공허하게 흩어졌다.

‘골목으로 숨거라. 겉옷을 버리고, 구정물을 뒤집어쓴 뒤 역사로 달려가야 해. 하란토의 이름을 대면 관리인이 말을 내줄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하지만, 아버지….’

‘바란. 네가 누구더냐?’

그는 바란의 마른 어깨를 투박하게 두드렸다. 묵직한 감촉이 가진 무게가 느껴져서 바란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너는 탈타미오의 적장자다.’

아버지는 폭도들의 발길질에 머리가 깨지던 마지막 순간까지 당당하던 강건한 사람이었다. 아이가 두려움의 냄새를 맡지 못하도록 겁에 질린 어머니의 새파란 손끝을 꾹 눌러 잡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가라.’

그렇게 말하는 눈짓에 면죄부를 얻은 겁먹은 꼬마는 꽁지가 빠져라 달음질을 쳤다. 살아야지. 나는 살아야지. 미련하게 부모님을 구하겠다고 달려들어서 괜한 희생을 만들지 말고, 나 혼자만이라도 안락한 성으로 돌아가 다시 고결한 탈타미오로서 살아가야지.

견딜 수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란은 그저 작명일 선물이 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 책 속에서 읽은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다. 백성들은 오랜 내전으로 배를 곯다 못해 새로 만든 무덤을 파내기까지 한다는데 동쪽 바다를 보려고 국경 너머까지 외유를 나가는 것은 안전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았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어머니에게 동그란 눈을 뜨고 졸랐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조금 웃었고, “그래, 그러자꾸나.” 했다.

‘또 형만 데리고 가겠단 말이에요? 아버지도 따라가시고?’

‘클라텐. 바란의 작명일이잖니. 너희 아버지께선 작년에 수도에 머무르느라 바란의 작명일을 못 챙겨줬던 일이 마음에 걸리시는 것뿐이야. 너희 둘을 똑같이 사랑하신단다.’

‘알아요, 안다구요. 누가 질투한대요?’

클라텐이 볼을 불룩하게 부풀렸다.

‘형. 그러면 나도 데려가면 안 돼?’

‘로잘린 영애의 티파티에 가기로 했다면서! 너도 걔가 영 싫은 눈치는 아니던데. 잘 해보지그래.’

‘이런 젠장! 걔는 그냥 나한테 접근해서 형 얘기를 물어보려는 것뿐이란 말이야.’

바란이 낄낄 웃으며 놀리자 클라텐이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란의 어깨를 툭 친다.

‘세상에 태어난 걸 축하해, 형. 잘 갔다 와.’

하지만 그들은 국경을 채 벗어나지도 못했다. 민심이 얼마나 뒤집혀있는지를 간과하고 기사 셋을 대동한 채 영지 바깥으로 나온 것 자체가 문제였다. 구휼정책을 꾸준히 베풀어 백성들의 불만이 덜한 탈타미오와는 사정이 달랐다.

탈타미오 영지를 지나 롱가든에 진입했을 때였다. 롱가든의 영주가 종탑 꼭대기에 매달려있고 그 주변에 시체 파먹는 까마귀가 꼬인 꼴을 보면서 다급히 마차를 물리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배고픔과 분노로 피가 끓은 백성들은 조직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았을 때 누릴 수 있는 더 많은 이득에 대해서 언급할 정도로 현명한 이 역시 없었다. 

단지 귀족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바쁜 롱가든의 백성들이 날붙이를 찔러 귀족의 피로 입술을 적시고 옷가지를 벗겨냈다. 금색과 붉은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머리카락 위로 공기 중에 자욱한 먼지가 내려앉았다.

“죄송해요. 실망시켜드려서.”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사죄밖에 없다는 게 서글펐다. 스스로 선택한 길인데도 그랬다. 입술을 짓씹으며 곁에 피운 촛불을 불어 껐다.

“미안하구나. 클라텐.”

* * *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해가 일찍 저물었다. 석양이 지평선에 붉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열린 창문에서 스민 서늘한 바람이 바란의 머리를 온통 헤집어놓았다. 

니카가 또 성을 벗어났다고 했다. 바란이 가족들의 초상화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회랑을 나섰을 때였다. 레이먼드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듯이 니카의 외출을 알렸다.

“그래. 성안에만 머무르기가 답답했나 보구나.”

바란은 기나긴 침묵 끝에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럼요. 열여덟이면 한창 들끓을 나이인데. 동네 아낙들만 봐도, 예? 아주 불끈불끈하고 그럴 때라고요.”

“좀 닥쳐. 끓기는 무슨. 니카는 그런 추잡한 거 없어.”

얼씨구? 혼기가 차다 못해 기울어가는 후작님 입에서 들은 말치고는 너무 숫총각 같다. 바란의 반응에 기가 찬 레이먼드가 비밀스럽게 말한다고 고개를 기울여서 바란의 귓전에다가 속삭였다.

“아니, 아직 못 하셨어요? 좋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고서는. 기회가 왔을 때 홀랑 잡아 드셨겠거니 했는데.”

“그 순진한 니카를 두고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하겠어? 손만 잡아도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니카 생각을 하니 또 사르르 표정이 녹는다. 중증 환자를 보듯 레이먼드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계속 기다릴 거야. 입맞춤이 익숙해지고 나서야 생각해볼 일이지. 꼭 들고양이를 길들이는 일 같아. 시간을 두고 애정을 보여줘야 하는 거야… 니카는 수줍음이 많으니까. 물론 그런 면도 사랑스럽지.”

뒤통수에다가 대고 구역질하는 시늉을 한 레이먼드가 자리를 비켰다. 혼자 남으니 태연하던 가면에 금이 갔다. 파란 눈에 초조한 감정이 들어찼다. 

“그래.”하고 여상스럽게 대답했다지만, 속에서 부푸는 불안감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던 니카를 쫓아가 애걸하고 데려온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최근 니카가 보이던 행동들은 많든 적든 그에게서 ‘니카 경’의 기억이 움트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눈 밑에 까만 그늘이 져서 늘 피곤해하기에 최근에는 말도 잘 못 섞어봤다.

‘성에 줄곧 머무르는 동안 지루한 기색은 안 보였는데. 무슨 일로 밖에 나갈 마음이 들었을까? 혹시 이대로 영영 내게는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닐까?’

입 밖으로 내어 묻기엔 집착적인 연정이 너무도 고스란히 묻어나는 고민이었다. 

‘만약 기억이 났다면. 수리 왕녀를 기억해낸 거라면.’

창가를 서성이던 바란은 결국 니카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면서 성문 앞에 버티고 서 있기로 했다. 그 딴에는 마중을 나간 셈이었다. 얄팍한 튜닉 한 장 걸친 것이 스산한 바람에 사방으로 펄럭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줄기 나부끼는 깃발이 된 것 같았다. 괴팍한 바람을 그대로 맨몸으로 받고 서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뜩해졌다. 그래도 니카는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그래도 완전히 저녁 어스름이 내리지는 않은 시점이었다.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며 성벽에서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도르래를 돌려 성문을 열었다. 검은 혈통마를 탄 니카가 매끄럽게 말을 몰아 성안으로 들어섰다. 

저 말의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고 마구간 지기로부터 전해 들었건만, 니카는 발끝과 손, 고삐를 몇 차례 잡아당기는 것만으로 그가 원하는 지점에 말을 매끄럽게 멈춰 세웠다. 

푸르릉. 바란의 코앞에서 먹구름이 입술을 떨었다. 바란이 손을 뻗어 턱을 만지니 홱 고개를 돌린다.

“바란!”

니카는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머리칼이 바람에 뒤섞여 엉망이 돼서 보통 가리려고 애를 쓰는 왼쪽 얼굴의 비늘이 다 드러났다. 창백한 뺨이 바람결에 발갛게 터 있었다.

“죄송합니다.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게 너무 길어졌어요. 걱정했습니까?”

바란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그가 진실로 걱정했던 것이 니카의 안전인지 혹은 이 관계에 대한 것인지 확신이 안 섰던 까닭이었다. 번화가에서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부모를 버리고 줄행랑쳤을 적부터 바란의 간사함은 여전했다. 

바란이 채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니카가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던 눈길이 너무도 쉽게 비껴나는 것을 보니 심장이 내려앉았다.

“…….” 

바란은 뭐라고 입술을 움틀대다 말고 꼭 물었다. 니카는 마구간 지기의 아들이 검은 말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것을 손을 뻗어 돕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바란의 두 눈이 어둡게 젖어 들었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마구간 아이를 데리고 단둘이 외출을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저 아이는 왜 니카에게 저렇게 친근하게 웃고 서스럼없이 손을 붙잡는단 말인가? 속에 불이 났다. 가만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그래서 니카가 당황할 것을 알고도 투정 부리듯이 괜히 발걸음을 돌린 것이었다.

“바란? 잠시만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래, 아직 니카의 안에서 그가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도록. 바란은 아주 천천히 걷다가, 니카가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확신이 서자 점차 발걸음을 빨리했다. 뒤에서 몇 번이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바란, 바란.”하고. 

바란은 그 소리를 다섯 번쯤 더 듣고 나면 멈춰 설 작정이었다. 그런데 바란을 찾는 가냘픈 소리가 얼마 안 가서 뚝 멎었다. 속으로 바란이 셈하기로는 단 세 번 부른 뒤였다. 

“바란.”

이걸로 네 번. 바란은 숫자를 하나 더 헤아렸다. 그러느라 니카의 목소리에 연한 흐느낌이 담긴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왜…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네? 바란.”

태어나서 단 한번, 바란의 사랑만을 받아 본 남자였다. 니카는 그의 무관심을 견딜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바란이 토라진 체 등을 돌리는 것은 니카에게 있어 하잘것없는 질투가 아니라 순수한 폭력이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바란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데 두 뺨이 온통 눈물로 젖었다. 볼이 찰 텐데. 스스로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지 그렁그렁 물기가 들어찬 두 눈은 바란의 모습을 살피느라 끔뻑이지도 않는다.

“미워하지 마세요.”

니카가 빌었다.

“제발, 미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리 언질주지도 않고 나가서 미안합니다. 걱정을… 했을 텐데.”

바란은 스스로가 한심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왕녀에게 깊은 연심을 품어 날마다 애절한 시선을 보내는 용인기사와 그의 감정을 시험하듯이 얼토당토않은 명령을 내리는 수리 왕녀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조합이었다.

자신에게 그를 사랑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꿀을 바른 듯한 입술로 매일 같이 사랑의 말을 속삭이고, 가장 좋은 비단과 손바느질 한 신으로 감싸서 고운 꽃송이처럼 안아 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왕녀가 바란으로 바뀌었다뿐이지, 니카의 모습은 아주 똑같다. 

이런 것을 원한 게 아니었다. 니카의 연정을 이용해서 관계의 권력이나 주도권 따위를 틀어쥐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이야말로 니카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자부했었는데. 결국은 같은 짓을 하고 있다니. 자기혐오로 손끝이 떨렸다.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하지만 배려보다도 제 안의 욕망을 앞세우는 추악한 감정으로 대체 무슨 행복을 가져올 수 있을까? 바란은 변한 것이 없다. 부모를 잃었던 어릴 때로부터 지금까지. 혼자서만 구렁텅이에서 기어 나와 도망치기가 일쑤인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바란은 니카의 얼음장 같이 차가운 뺨을 닦아주었다. 그가 사랑하는 니카의 울퉁불퉁한 손아귀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얽어왔다. 바란이 숨소리라도 내면 화들짝 놀라서 떨어져 나갈 것처럼 바짝 몸을 굳혔다.

‘사랑하는 니카, 어린 짐승 같은 나의 니카.’

바란은 맞잡은 손을 잡아당겨 손가락 마디마다 짧은 입맞춤을 했다.

“미안해, 니카. 내가 놀라게 했어?”

“…아주 많이요.”

“많이?”

경련하는 니카의 어깨에 든든한 팔뚝을 두르고 꼭 당겨 안았다.

“그래, 많이 놀랐구나. 미안해. 쉬이…. 네가 너무 좋아서 잠깐 멍청한 생각을 했어.”

바란은 니카를 안심시키고 이기적인 마음을 떨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머리를 야금야금 좀먹으며 단번에 세력을 키웠다. 눈이 반쯤 내리 감겼고, 파란 눈에 탁한 빛이 감돌았다.

소유욕이라는 건 마치 마음에다 끈적끈적한 기름때를 흠뻑 먹인 것 같아서 아무리 문질러 닦으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만지면 만질수록 검게 때가 타고 묻어나왔다. 애써 막아왔던 괴팍한 감정은 니카의 작은 숨결이 목덜미에 닿아서 바스라지는 순간마다 서서히 기어 나왔다.

언제까지 니카가 그를 떠날까 봐 전전긍긍해야 한다는 말인가? 기억을 되찾기 전에 그를 성 속 깊숙이 가둔다면 어떨까? 친절한 사람들이 바란 탈타미오 말고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에 말이다. 그렇게 하면 바란은 그가 가진 유일한 빛이 될 수 있으니.

‘상냥하게 대해주기만 하면,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사랑했을까?’

품 안에서 흐느끼듯 심호흡하는 니카를 보며 바란은 생각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두려움이 차올랐다. 지금의 바란이 누리고 있는 것이 기억상실로 얻은 선점의 혜택일 뿐이라면…. 나중에 니카의 안에서 두 가지 연정이 충돌했을 때 니카는 왕녀를 등지고 그를 선택할 수 있을까?

아무리 염색을 해도 진짜배기 빨간 머리는 따라갈 수 없었던 것처럼, 통째로 사라진 니카의 기억에 숨어 있을 수리 왕녀의 무게 역시도 바란에 비할 것이 아니었다. 바란의 칠 년은 니카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칠 년이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니카의 안에서는 그녀를 연모할 만한 수많은 이유가 매일 같이 생기고 깊어졌을 것이다. 상처입고, 아물고, 흉터가 졌을 것이다. 흉터는 자국이 되어 그녀를 아로새기는 상기물이 되었을 거고.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비가 퍼붓던 밤, 세상에 온통 둘만 남은 것 같던 동굴 안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능숙하게 말을 타던 모습이나, 알려준 적 없는 식사예절에 통달한 점, 바뀐 말투와 표정. 니카는 자신의 모습을 나날이 찾아가고 있었다.

짧은 여름밤의 꿈에서 깨어나고 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니카 경은 잔악후작에게 검을 들이밀 것이고, 바란은 사랑하는 이가 왕녀의 발치에 엎드려 애정을 구걸하는 모습이나 지켜봐야 하겠지. 

그때였다. 코끝으로 은은한 향기가 끼쳤다. 바란이 눈을 뜨고 살펴보니 니카의 팔 안에 한 아름 가득 들꽃 다발이 들려있었다. 억센 줄기로 투박하게 묶은 꽃다발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마디가 불거진 커다란 손은 꽃의 톱날 같은 잎사귀와 가시넝쿨에 긁힌 상처들로 엉망이었다. 

니카는 망그러지지 않도록 풍성한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안아올려 바란에게 건넸다. 바란은 멍청하게 꽃을 받아들었다.

“날이 추워져서, 꽃을 찾는 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란.”

“꽃이라니?”

“당신 작명일이잖아요.”

바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란의 작명일이자 부모님의 기일이기도 했다. 챙기지 않은 지가 어느새 7년이나 되었다. 누군가가 축하의 말만 건네어도 못 견디도록 끔찍한 기분이 들곤 했다.

“뭔가 선물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내게 있어서 얼마나 축복인지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지 알 길이 없더군요. 그래서 빈스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마구간 아이 아시죠.”

그래서 저 너른 들판까지 나가서 부쩍 추워진 날씨에 몇 송이 찾아보기도 힘든 꽃들을 맨손으로 꺾고 다녔단 말인가? 미련하도록 순수한 니카. 긁힌 상처가 가득한 손을 바라보는 시선이 흐려졌다.

바란이 그렇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서 꽃다발을 내려다보고 있을 적에 니카가 꼼지락대며 새파란 수레국화 한 송이를 꽃다발에서 빼냈다. 그리고 바란 더러 왼손을 내밀고서 잠시만 눈을 감아보라고 했다. 

이때까지 바란은 머리가 온통 불에 타서 하얗게 날아가 버린 것처럼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바란은 니카가 말한 대로 했다. 손가락에 뭔가를 걸고 꿈적이는 게 눈을 감고도 다 느껴졌다.

“됐어요. 이제, 눈 떠도 돼요.”

“이건….”

별다른 것은 아니었다. 수레국화 줄기를 바란의 왼손 약지에다가 대고 동그랗게 말아서 두 번 매듭 지어놓은 게 다인 단순한 꽃반지였다. 그런데 이것이 손가락에 걸린 것을 보는 순간 마음이 온통 무너지는 듯했다.

공교롭게도 왼손 약지라서 괜한 설레이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과대망상을 하고 있는 거라고, 바란은 스스로를 일깨워주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말을 모두 짓누르고 “예쁘네.” 간신히 한마디 했다. 

“당신 눈동자 색이랑 같아요.” 

니카가 대답했다. 니카는 머리칼을 괜히 매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실은 반지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은데….”

이때 니카를 바라보지 말았어야 했다. 눈이 마주치자 니카의 검은 눈이 사르르 접히며 예쁜 초승달 모양이 됐다. 눈물이 다 마르지도 않아서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있다. 그게 어여쁘고 또 처연했다.

“형편없죠. 미안해요. 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시들어버리는 거 말고, 제대로 된 반지로 선물해드리겠습니다. 약속해요.”

숨 쉬는 법을 잠깐 잊어버리는 바람에 한 박자 건너뛰어 들이쉰 숨결이 허파 안에 갇혔다. 다음 번이라니? 그건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거라는 확신이 있는 사이에서나 쓰는 단어였다. 반지는 또 어떻고. 니카는 지금 결혼이라도 하자는 것일까?

어쩌면 저렇게 바란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복잡한 생각들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처럼 뒤엉켰다. 가슴이 답답한데, 동시에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바란은 손가락에 묶인 파란 꽃송이를 한번 쳐다보고, 아주 낯선 표정으로 니카를 본 다음, 볼이 둥글어지도록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앞뜰 정원에, 차갑게 부서지는 숨과 매서운 바람 사이로 니카가 그를 보며 서 있었다. 늘 상상해왔던 것처럼 낭만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사위는 어둡고 황량했다. 그런데도 온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니카는 무언가 마음에 남을 만큼 거창한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게 별다른 말솜씨가 없다는 사실은 온 세상이 다 알았다. 여태 읽어온 낭만 소설이나 시집 중에 인용할 만한 멋진 어구가 있을까 생각하며 도르르 굴러가던 눈이 얼뜨기 같이 열 오른 표정을 지은 바란을 보고 말갛게 웃었다. 

결국 수많은 선택지를 제치고 니카다운 담백한 말이 나갔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바란이 대꾸 없이 달려들어 거세게 입을 맞췄다. 낭만적인 감사의 말은 채 다 뱉지도 못하고 입술 안으로 삼켜야 했다.

* * *

비바람에도 무너지지 말라고 바란이라 지었다 했다. 폭풍의 시인 ‘바랑가’의 이름을 딴 것은 평소에 시집을 즐겨 읽던 어머니의 솜씨였고, 뒤에 ‘란’으로 어여쁜 영애 같이 마무리 지은 것은 의외로 아버지의 의견이었다. 

어머니의 이름에도 ‘란’이 들어가니 그렇게 정했다고 들었다. 아버지는 감정표현이 서툴어도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후작부인에 대한 사랑이 항상 극진했다. 클라텐보다 바란을 조금 더 아꼈던 것도 기실 바란이 어머니의 굽실대는 금발과 파란 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예쁜 이름이네요. 그 시인의 시집이 서재에 있습니까?”

“바랑가 말이야? 그럼. 어지간한 건 전부 다 있어. 경매에 나왔던 습작 노트도 아버지께서 사들이셨거든. 그건 아마 지하 보존서고에 있을 거야. 가격이 꽤 나가는 물건이라서.”

니카는 흥미롭다는 듯이 턱을 끄덕이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홀짝였다기보다는 입술에 잠깐 갖다 댔다는 말이 더 맞았다. 혀로 핥아서 쌉싸름한 맛을 본 뒤에는 이것을 계속 마실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때때로 바란으로부터 열여덟 어린애 취급받는 것에 불만이 있던 니카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고양이처럼 술을 핥아 마셨다.

“왕국의 작명법은 무척 제멋대로야. 뜻도 우기기 나름이고. 북부 도시의 잘난 체 떨기 좋아하는 놈들 사이에서 한껏 더 유행을 탄 것 같아.”

“그런가요?”

“응. 네가 나고 자란 남부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었을걸? 요즘은 개성시대라고 해서 북부 사교계에서 먹고 들어가려면 특이한 이름을 짓는 게 괜찮은 전략이거든. 그래서 온갖 단어를 음절과 형태소별로 잘라다가 어감이 괜찮도록 붙인 다음에 그럴싸한 의미를 부여하는 거야.”

“예를 들면?”

의자에 비스듬하게 누워서 왼손 약지에 낀 꽃반지를 만지작거리던 바란이 훌쩍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니카는 썩 진지한 표정이다. 침대 옆 협탁에다 처음과 양이 거의 변하지 않은 포도주잔을 올려두고 바란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 뒤에 팔을 얹어 몸을 기울였다.

바란이 장난스레 고개를 위로 젖히자 얼굴이 맞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니카의 머리카락이 바란의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꽃봉오리(니로)와 골짜기(카크).”

니카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자 까만 머리카락이 같이 춤을 춘다. 바란의 뺨까지 쓸어내리며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간지럽혔다. 바란이 되갚아주겠답시고 손을 뻗어 니카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니카가 어깨를 움츠렸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러면 요즘 탈타르에서 유행하는 입술보호제 나칸도르에서 ‘나카’를 따 온 다음,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에서 ‘니’를 가져오지 뭐.”

“정리하면 무슨 의미가 되는데요?”

“몰라. 바닐라 맛이 나는 입술?”

니카는 못 말리겠다며 웃었다. 시원찮은 농담을 들었을 때 헛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과 비슷했다. 어쨌건 바란이 앙큼하게 술수를 부린대로 입을 맞춰주기는 했다. 뜨거운 바란의 혀가 입천장을 야릇하게 핥는 것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조금 닿기만 해도 하체가 묵직해지는 니카의 고민을 모르는 바란은 나직하게 싫으냐고 물었다. 니카가 곤혹스럽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니 지레 그런 줄 알고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요즘 날 피한 거야? 자꾸 입 맞추는 게 불편해서?”

“안 피했어요.”

“거짓말하지 말고.”

그렇게 말해놓고 바란은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물론, 내가 거짓말을 훨씬 더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건 차치하고 말이야.”

상황을 회피하려고 니카는 내려둔 포도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유리잔의 가느다란 목을 잡고 돌리자 안에서 붉은 포도주가 소용돌이를 그렸다. 술냄새가 은은하게 타고 올라와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미 취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네가 싫으면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약속해. 그러니까 곁에 있어 주면 안 돼?”

니카가 멀찍이 떨어져 선 것이 아쉬워 애원을 하니, 그는 못 이긴 척 바란의 곁으로 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니카의 왼쪽 어깨에 머리를 기댄 바란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니카가 가만 생각을 해보니 결혼식 때 불리는 입장 노래 가락이다.

니카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큼지막한 손바닥으로 덮고 식히건 말건, 바란은 꽃반지가 끼워진 왼손을 공중으로 높게 치켜올리고 요리조리 살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쏙 들었다. 좁쌀 같은 파란 꽃송이가 둥글게 모인 것이나, 줄기가 거칠게 뜯겨나가서 매듭지어진 모양까지, 전부 다.

“작명일 챙기는 걸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응.”

바란이 픽 웃었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지요?”

“하하. 내 그 말 할 줄 알았지. 상냥한 나의 니카.”

슬그머니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는 니카에게 바란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웃음이 내걸린 입술은 자꾸만 비쭉대며 그가 얼마나 신이 났는지, 작은 선물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니카도 그 표정을 보고는 이내 안심하고 따라 웃었다.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닌데.”

바란이 뺨을 긁적이며 말문을 열었다.

“내 작명일은 부모님 기일이기도 하거든. 잔치를 벌이기엔 염치가 없잖아, 안 그래?”

괜히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을까 봐 니카가 다시 납죽 사과했다. 심각한 표정을 한 니카의 눈썹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 펴주었다.

“네가 미안해할 게 다 뭐야. 그냥 사고였어. 벌써 칠 년이나 지났고.”

침실 안은 무척 조용했다. 잔에 포도주를 다시 한 번 채워서 목을 축인 바란이 말을 돌렸다.

“네 작명일은 언제더라?”

질문을 들은 니카는 조금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고 머릿속에서 무슨 과정을 거친 건지 곧 홀로 수긍하며 주억거렸다. 바란이 추측하기로는 ‘왜 그것도 모르느냐.’에서 ‘바란이 모를 수도 있지.’로 변한 것 같았다.

동굴 안에서 기실 바란이 니카에 대해 아는 것이 잘 없다는 사실을 미리 토로하지 않았더라면, 작명일을 몰라줬다는 사실이 서운해서 예민한 성정에 울컥 화를 냈을지도 몰랐다.

“간난애 적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다들 새해 첫날을 작명일인 셈 치고 나이를 헤아립니다.”

“그럼…. 선물도 주나?”

“아니요. 대신 배식할 때 특별히 간식을 하나 더해주곤 했습니다. 대단한 건 아니고 감자를 한 알 더 주거나 하는 식으로요.”

집단적인 괴롭힘에 시달리던 니카의 손아귀에서 그 특별한 간식이 얌전히 자리를 지킨 적은 없었지만. 니카는 그럴싸한 부분까지만 언급하고 그만두었다. 

바란이 자신을 위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화를 내는 건 즐거운 일이었으나 때때로 사람이 그렇게 극적인 감정변화를 겪는 게 건강에 좋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껄렁한 잡념으로 니카가 혼자 미소 짓는 동안 바란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제 턱을 매만지며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그러면 오늘로 하자.”

“뭐라고 하셨습니까?”

웅얼거리는 소리에 니카가 되묻자, 그 짧은 사이에 확신이 생겼는지 바란이 무릎을 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오늘로 하자고! 내가 방금 이름 뜻을 지어줬잖아. 그럼 그게 작명일이나 다름없는 거 아니야?”

“오늘을 제 작명일 삼으시겠다고요?”

니카가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그래.”

‘니카’라는 이름에 담긴 썩어 문드러진 괴물을 뜻하는 음절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단 한마디로 ‘꽃봉오리 골짜기’처럼 거듭날 수 있다니. 마냥 말장난이나 하는 것 같았던 바란의 입술 두 쪽이 만들어낸 변화 치고는 의미가 깊었다. 니카는 제자리에서 입술을 물었다 뗐다 하며 작명일이 갖는 의미에 관해 생각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마법적인 행위였다. 어떤 단어로서 불리우다 보면 결국 그 단어로 스스로를 정의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름이란 일종의 주술이었다. 니카는 여태껏 괴물이라 불려왔다. 그래서 어느새 스스로도 괴물이 되었다.

그런데 바란이 그에게 다른 의미를 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다름 아닌 스스로의 작명일에, 괴물이 아닌 삶을 살 수 있도록. 비록 익살스러운 말이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마음 한 켠이 불로 달군 듯이 뜨거워졌다. 

그 순간 니카는 바란이 너무 좋아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걸 입 밖에 내면 식상하게 들릴까봐 염려되어 속으로만 좋아한다는 말을 수십 번 삼켰다.

시시각각 변하는 니카의 표정을 읽고자 애쓰던 바란이 예고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또 뭔가 엉뚱한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니카가 망연히 쳐다보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난 바란은 침대 시트를 쭉 끄집어내서 몸에다 둘렀다. 보자기에 싸 놓은 아기처럼 얼굴만 시트 밖으로 내밀고 몸을 다 감쌌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니카가 눈짓으로 물으니 두 뺨을 볼록하게 올리며 경쾌한 미소를 짓는다.

“예쁘게 포장한 작명일 선물이야. 뭐가 들었는지 알겠어?”

“바란…. 당신 대체.”

“바로 맞췄어. 내가 선물이야.”

바란은 침대 시트를 양팔로 붙잡아 나비 날개처럼 벌렸다. 무뚝뚝한 니카의 입술에서도 하릴없이 웃음이 터졌다. 바란이 잘생긴 눈을 올려 뜨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니카가 순순히 그 품에 안겨주었다. 

그러자 바란은 다시 이불을 꽉 오므려서 니카까지 함께 둘러쌌다. 이불 속으로 서로 살갗이 닿았다. 유난히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콧잔등에 퍼붓는 키스 세례를 잠자코 받던 니카는 바란의 촉촉하고 발그레한 입술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며 위험을 감지했다.

“당신 취했어요.”

당황한 니카가 이렇게 말하며 조심스레 포옹의 늪에서 빠져나오려던 참이었다.

“아냐, 안 취했어. 그런데 안고만 있는 것도 안 돼?”

바란이 말로는 허락을 구하면서 등 뒤로는 손깍지를 단단히 꼈다. 얼굴을 니카의 가슴팍에 대니 귓가에 콩콩 뛰는 심장의 뜀박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끌어안긴 니카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처음에 바란은 니카가 긴장해서 그랬겠거니 생각했다. 한 발짝 다가가서 다리가 서로 얽히자 얼른 질겁해서 뒤로 한 발짝 빠지려 든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적극적으로 꿈틀거리던 바란은 결국 니카의 사타구니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것을 아랫배에 닿는 감촉으로 알아챘다. 두 사람 다 잠시 말을 잃었다. 

부끄러움이 엄습할 때 으레 그렇듯 얼굴을 가리려던 니카는 두 팔이 전부 시트 안에 갇혀 있는 바람에 대신 바란의 어깨 위로 풀썩 고개를 떨어뜨렸다. 쥐구멍이 있다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기나긴 침묵이 흐르고, 그럼에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 사람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당신을 상대로…. 이상한 생각을 하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 꿈을 꾸었는데…. 당신이 나왔습니다.”

숨 막히는 침묵을 깨고 니카가 사죄했다.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니카는 중죄를 짓고 고해성사하는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요는 그가 세속적인 욕망으로 소중한 사람을 욕보였으니 면목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걸로 니카가 최근 들어 말을 붙이면 우물쭈물하고 자꾸 바란을 피하려 들었던 것이 단번에 설명되었다.

바란은 입을 헤 벌리고 두 눈을 끔뻑였다. 니카가 귀엽기도 하고, 또 가엽기도 해서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마냥 수줍어서 그럴 거라고만 짐작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바란은 문득 니카가 이렇게 강박적으로 금욕하려 드는 게 신전에서 학대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인지 궁금해졌다. 

“한번 당신 꿈을 꾸고 나니 자꾸만 생각이 나서 떨쳐낼 수가 없더군요. 끔찍하고 더럽다 여기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 나가라 하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바란, 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인데 그런 생각을 하다니. 더럽고, 추잡하죠. 한심하다고 느끼셔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니카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떨고 있었다. 곧 바란의 숨결이 코끝에서 부서지는 것을 느끼고 실눈을 떴다. 웃지도 않는데 웃는 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기색으로 바란이 물었다.

“내 꿈을 꿨어?”

“흐….”

“내 생각을 했고?”

바란이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니카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침대에 막혀 더 이상 몸을 뒤로 물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니카는 피할 길 없이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말하는 법도,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방법도 얼떨결에 다 잊어버린 것 같았다. 

가련히 떠는 니카는 꽁꽁 뭉쳐서 일렁이다가 실수로라도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물방울을 쏟아내는 아슬아슬한 수면 같았다.

“끔찍하다고 말하십시오. 내가 역겹다고 해요.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지 말아요.”

순간의 침묵조차 니카에게는 얼마나 폭력적인지. 시트에 감싸인 몸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애걸하는 니카의 일그러진 미간에 짧게 입 맞추고 떨어져 나간 바란은 미끄러지듯 내려가 니카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말이든 해줘요, 바란. 괜찮다거나…. 그런 건 기대하지도 않지만, 아무 말이라도.”

바란의 포옹에서 벗어나니 땀이 식으며 오한이 돋았다. 경직된 몸이 떨리다 못해 이빨이 덜그럭대며 부딪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났다. 바란은 겁먹은 열여덟의 니카를 위로하듯이 허벅지를 살그머니 쓰다듬었다. 

옷 너머로 불룩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성기가 그 손길에 더 기세를 불렸다. 바란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니 니카는 정말로 혀를 깨물 것 같이 괴로워했다.

“쉬이, 내 눈에 너는 늘 예쁘기만 해서 문제인데, 뭘. 역겨우면 이런 짓 안 해. 알잖아?”

바란이 겁먹은 니카를 달래며 바지의 여밈을 풀고 속옷을 벗겼다. 붉은 살덩이가 끄덕거리며 튕겨져나와 바란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바란이 한쪽 눈을 살짝 찌푸렸다. 창백한 피부와는 대조되게 선홍색을 띠는 성기는 크기가 몹시 컸고 이미 뻣뻣하게 서 있었다.

“와아…. 진짜 크잖아.”

니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더, 더러워요! 만지지 말아요!”

바란의 손길이 우뚝 멎었다.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더럽지 않아. 좋아하면 안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래도 네가 싫다고 하면 만지지는 않을게.”

바란이 대답할 때마다 니카의 성기에 숨이 닿았다. 그것마저도 견딜 수 없이 커다란 자극으로 느껴졌다. 아랫배가 간지럽고 묵직했다. 정말 자신이 한 말을 지키려는 듯, 바란은 니카의 대답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빤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맥없이 노출된 성기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빳빳했다. 니카가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억지로 어울려줄 필요 없어요. 실망하지 않으셨습니까? 적잖이 그러셨을 거 압니다. 다, 당신은 기억을 잃은 혼혈인 천애고아를 입히고 먹이면서 자비와 은혜를 베풀었는데, 돌아오는 게 고작 이런 싸구려 욕정이라니….”

“자비나 은혜라는 말 한번 더 하면 여기를 깨물어버릴 거야.”

농담하는 게 아니라고 으름장을 놓기 위해서 바란은 니카의 귀두 끝에 짧게 입맞춤했다. 찰나의 순간 닿았는지 말았는지 헷갈릴 정도로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그런데도 니카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고,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뺨을 가로지르면서 눈물이 한 방울 굴러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였다. 놀라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제 손등을 꾹 깨문 니카의 모습이 바란의 망막을 때렸다. 입안의 침이 바짝 말랐다. 바란은 아랫도리가 묵직하게 달아오른 것을 느끼며 입안으로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그것을 또 기민하게 주워들은 니카는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보았다.

“더, 더럽다고 했는데… 당신 입, 입술이…. 어떡해, 어떡하지.”

니카는 다급히 손가락을 뻗어서 바란의 입 언저리를 닦아내듯 훔쳤다. 묻어나는 것도 없으니 괜한 행동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란.”

“만지는 게 안 되면, 핥는 건 괜찮아?”

“핥는 거라니요?”

바란의 말을 따라 하던 니카는 멍한 와중에 이 단어의 뜻을 곧장 생각해내지 못했다.

“싫다고 말하면 멈출게.”

“흑! 아! 잠깐만, 이, 입으로…!”

바란의 붉은 입술이 다급하게 선단을 집어삼켰다. 어찌나 두터운지 벌써부터 턱이 다 아렸다. 흥건한 타액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쿨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의 살결에서 단맛이 날 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달았다. 바란은 혀를 굴려 요도를 쑤시고 둥근 귀두의 모양을 차근차근 더듬어나갔다. 니카가 반사적으로 그의 머리채를 잡고 아프지 않을 정도로 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아, 바란… 읏…!”

“조아?”

발음이 샜다. 오른쪽 뺨에다 성기를 반쯤 쑤셔 넣고 올려다보니 니카가 또 울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이 열 여덟에 멈췄다지만 ‘니카 경’이 이렇게 숫총각처럼 성기를 빨리면서 울고 있다니. 놀리는 말이 절로 나왔다.

“하하. 니카는 울보.”

“울보 아닙니다. 당신이 이렇게… 앗, 입에 넣고 말하지… 흐읏!”

발갛게 물든 얼굴로도 꼬박꼬박 반박하는 것이 괘씸해서 바란은 볼을 홀쭉하게 만들어 성기를 깊숙이 빨아올렸다. 울컥하고 비릿한 액체가 터져 나왔다. 사정이 생각보다 너무 일렀다. 

바란은 휘둥그레 놀란 얼굴로 얼떨결에 그것을 꿀꺽 삼켜버렸다. 헛기침이 터졌다. 놀란 니카가 다급히 성기를 빼냈다. 급히 빼내느라 오므린 바란의 입술에 선단이 걸려서 붉은 입술에도 흰 정액이 점점이 튀었다.

“…….”

니카의 얼굴이 흐리다. 대성통곡하기 일보 직전이야, 바란은 생각했다. 그리고 뭔가 달래는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오물댔는데, 타액과 정액으로 더럽혀진 입술에 시선을 주목시키는 바람에 역효과가 난 것 같았다.

“죄송… 합니다.”

니카는 얼굴을 고통스럽게 찌푸리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사과했다. 펑펑 울 줄 알았던 바란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아냐, 뭐…. 끔찍한 맛이긴 한데…. 니카 거라고 생각하면 못 삼킬 것도 아니고… 어라?”

“일부러 그런 말을 골라 하시는 겁니까?”

예상을 뒤엎는 반응을 하나 더 보여주기는 했다. 니카가 바닥에 앉은 바란의 옆구리를 잡고 안아 일으켜서 침대 위로 끌어 올렸던 것이었다. 바란은 거센 힘에 무력하게 끌려와 침대에 눕혀졌다. 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 니카의 얼굴이 다가왔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바란은 단번에 파악이 되지 않았다.

“무, 무슨 말?”

“날 흔드는 말들….”

니카는 잠깐 바란을 죽일 듯이 노려봤는데, 아직 눈이 물기로 그렁그렁해서 귀여운 앙탈처럼 느껴졌다. 그가 돌연 아래로 물러났다. 무슨 심산인지 궁금해진 바란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사타구니 쪽에서 손길이 느껴졌다.

“니카? 뭐 하는 거야?”

“당신도….”

니카는 신기한 것을 보듯이 바란의 사타구니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죄책감으로 푸르죽죽했던 낯빛이 바란의 발기한 아랫도리를 보면서 조금 나아졌다.

“당신도 섰군요.”

“내가 방금 좋아하는 사람 고추를 빨았는데, 안 섰을 리가 있겠어?”

“야한 말.”

니카는 바란의 입을 막으려고 입술 위에 가볍게 손가락을 올려 덮었다. 시도가 무색하게도 바란이 입술을 조금 움찔거리자마자 손가락에 닿는 감촉을 견디지 못해 얼른 떨어져 나갔다.

“당신 연인, 원래 이런 말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이야.”

바란이 팔을 뻗어 니카의 목을 끌어안고 야살스러운 눈웃음을 쳤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도 내 거 빨아주려고?”

면역이 없는 니카가 듣기엔 너무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귀를 홱 틀어막는 게 귀엽다. 혼자서만 생각한다는 게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뱉어졌다. 니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귀엽지 않습니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십시오.”

“열여덟이잖아. 몸이 어른이라도 마음은 아닌걸, 뭐.”

“열여덟이면 성인이에요. 게다가 오늘을 작명일 삼았으니, 이제 열아홉입니다.”

“그래애?”

바란은 놀리듯 물었다. 즉각 니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바란의 앞섶을 서투르게 헤치기 시작했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더니 어떻게든 바란의 발기한 성기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정작 눈앞에서 그것을 맞닥뜨리자 니카는 말이 없어졌다. 마른침을 삼키며 바란의 사타구니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운 바란이라도 이 눈빛에는 민망한 감정을 느꼈다. 물기에 젖은 붉은 입술을 흰 윗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재촉인지 나무람인지 모를 말을 했다. 목소리가 애가 끓는 듯이 갈라져 있었다.

“왜 보기만 해? 이것도 괴롭히는 방법이야?”

니카는 막상 분홍색 남근을 정면에서 마주하고 나니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어지러워졌다. 분홍색…. 포피가 벗겨져 굴곡진 귀두를 드러내고 있는 어른의 성기인데도 빛깔이 무척이나 옅었다. 금색의 굽실굽실한 음모 사이로 우뚝 서서 마치 니카의 손길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얼른…. 열아홉 니카가 얼마나 거칠어졌는지 알려줘, 응?”

바란이 마음 먹고 조르면 순진한 니카는 버틸 재간이 없다. 성급히 입술을 먼저 갖다 댔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본다. 바란은 설핏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어린 니카의 자존심을 크게 자극한 것 같았다. 이윽고 니카는 바란의 것을 한입에 반 정도나 삼켰다.

“으읏! 아, 뜨거워어….”

입안에서 얌전히 있던 혓바닥이 낯가림하듯이 망설이며 바란의 남성을 할짝였다. 체온이 낮은 니카지만 입 안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아… 하아앗! 데인 것 같은 감각에 신음했다. 화들짝 놀란 니카가 얼른 성기를 뱉는다. 아프냐고 연신 묻는 것을 보니 앓는 소리에 놀란 게 분명했다.

“으응? 하아…. 아픈 거 아냐. 니카가 입으로 해주니까 좋아서 소리 낸 건데.”

어린애를 놀리는 기분이었다. 바란은 니카의 손을 끌어다가 제 성기를 살며시 주물렀다.

“이렇게, ‘아앙!’ 하고.” 

과장된 신음에 니카가 놀라서 파드득 떨며 손을 뗐다. 

“놀리지 마세요.”

“놀린 거 아냐. 좋았다니까.”

“나는 좋으면, 말도 못 하고…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데. 바란은 계속 말만 잘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당신이 달변가처럼 구는 거 싫습니다.”

“하하, 이젠 조용히 할게. 정말로. 약속해.”

달래어 보았자 늦었다. 니카는 이미 토라져서 가자미눈을 뜬다. 소리 내서 웃으면 더 큰일이 날 판이었다. 바란은 입술을 꾹 깨물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계속하라고 고개를 연신 끄덕이니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린다. 타액으로 젖은 성기에 다시 뜨거운 혓바닥이 닿았다. 요의와 비슷한 성감이 치밀었다.

“흐…으음, 니카. 좋아.”

니카의 검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듯 자꾸만 매만졌다. 처음에는 간질간질하기만 하던 쾌감이 점차 벼락처럼 변해 등골을 타고 오싹오싹 올랐다. 허리가 절로 움찔거렸다. 얼쩡거리는 긴 두 다리가 방해되었는지 니카는 바란의 허벅지 안쪽을 큼직한 두 손으로 붙잡고 우악스럽게 벌렸다.

“으읏, 아?”

손에 눌린 탄탄한 살갗에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가 이내 붉게 물들었다. 바란은 갈피를 못 잡고 공중에서 휘젓던 팔을 내려 뜨끈뜨끈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물기에 젖은 파란 눈으로 니카를 내려다보며 간청했다.

“부…끄러워…. 니카….”

무릎 근육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보통 남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훤히 공기가 들고 연인이 얼굴을 처박고 있으니 가슴 속에서 수치심이 내달렸다.

“다, 리, 내려줘….”

바란이 못 견디고 드물게 우는소리를 했다.

“으음. 음… 춥… 추웁….”

이 애걸하는 소리에 니카가 뭐라고 대답을 하긴 했다. 목구멍까지 바란의 성기를 채워 넣고 오뚝한 코를 음모가 무성한 가랑이에 비비느라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심술을 부려 바란의 허벅지를 더 넓게 벌리는 것을 보니 분명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졸지에 고환이 공중에서 니카가 움직이는 대로 덜렁거리는 꼴이 되었다.

“아! 진, 짜, 너! 심술…쟁이잇, 응…! 흣….”

니카는 이빨을 세우지 않는 법을 알 정도로 성교에 익숙하지 않았다. 니카가 성기를 입속 깊숙이 담고 앞뒤로 서툴게 흔들어댈 때마다 기둥이 이빨에 갉작갉작 긁혀서 따끔한 자극이 되었다.

“나…나와. 나와아…! 니카, 그만!”

사정감이 치밀어 얼른 니카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않고 버텼다. 바란은 그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만 하라니까…!”

“추웁…쭙…쪽쪽….”

“으응…, 아!”

젖 빠는 소리 같이 탁한 소리를 내며 니카가 거세게 바란의 것을 빨았다. 결국 니카를 떼어내려다가 까만 머리칼을 한 움큼 쥔 채 파정해야 했다.

“흐으, 아아앗…!”

“윽.”

바란이 한 대로 정액을 삼킨 니카가 이상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걸 어떻게 삼켰죠?”

“뱉어, 이 심술꾸러기야…. 아하하!”

진이 다 빠진 채 바란이 웃음 부스러기를 흘렸다. 눈을 나른하게 내려뜨고 니카를 내려다본다. 서투른 어린애 보듯 하는 시선이다. 니카는 무너지듯 바란의 옆자리에 누웠다. 그러자 바란도 니카를 마주 보려고 옆으로 몸을 돌렸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지만 충만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너무 좋았는데, 너는?”

니카는 편안한 혼란 속에 잠겼다. 그는 바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느끼는 충동, 감정, 전부 다…. 싸구려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지? 내 소중한 니카.”

바란이 손을 뻗어 니카의 머리카락을 예쁘게 정돈해 뒤로 넘겨주었다. 그저 상냥한 행동이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니카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만 같아 단번에 기분이 상했다. 다 저 아련한 시선 때문이었다. 바란의 시선은 이따금 저렇게 니카를 앞에 두고도 까마득히 먼 곳을 보는 듯이 어둡고 망연해지고는 했다.

니카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을 뿌리치려다가, 모질게 굴기엔 너무도 어여쁜 손이라서 가만히 붙잡아 내리고 말았다. 대신에 검과 펜의 굳은살이 잡힌 바란의 손가락 끝마다 담백한 입맞춤을 했다.

“이상하죠. 나는 이미 어른인데,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니.”

“…….”

“기억이 얼른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바란의 새파란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래.” 하고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바란이 대답했을 때, 니카는 이미 노곤한 숨소리를 내며 잠기운과 싸우고 있었다. 

바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불씨 같은 잠기운에 숨을 불어넣듯이 단단한 어깨를 살며시 도닥여주었다.

* * *

꿈은 여느 때와 같이 예고도 없이 니카를 찾아왔다. 흙먼지가 빗줄기에 잠잠해졌다. 성문 바깥에는 내전과 재해, 토룡과 같은 마수의 침략으로 고향을 떠난 피란민들과 그들이 세운 난잡한 막사가 즐비했다. 쇠파리가 날갯짓하는 소리와 탄식 소리만 가득했던 자리에 낯선 소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민한 영양처럼 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저만치부터 땅이 요란하게 울렸다. 처음에는 말발굽 소리였다. 그다음에는 비명소리. 또 다른 비명소리, 그리고 비명소리.

난민들을 도륙하는 병사들은 앙살라테 왕자의 표식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니카가 뒤늦게 소식을 접해 사태를 진압하려 나왔을 때는 이미 절반 이상의 난민이 고깃덩어리처럼 죽어 널브러져 있었다. 이상한 것은 온통 왕자의 표식을 두른 이들만 가득했다는 점이었다.

니카가 다급하게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거세게 투레질하며 발을 굴렀다.

“소속을 밝혀라! 앙살라테 왕자의 이름을 사칭한 자가 누구냐!”

“니카 경! 피아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말의 안장까지 똑같이 달았습니다!”

“제길!”

난전이 불가했다. 속수무책으로 멀찍이서 불구경하듯이 서 있어야 했다. 소문으로 민심을 조종하려는 속셈일 테니 전부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살육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고, 피와 고깃덩이로 가득한 틈바구니에서 생존자들이 하나 둘 씩 고개를 들었다. 왕자의 이름을 사칭한 무리는 피로 젖은 검을 늘어뜨리고 난민들을 위협하듯 제자리에서 말을 탔다. 

어린 소년이 죽은 어미의 시체 밑에서 발버둥을 쳐 빠져나왔다. 입을 벌리고 서럽게도 우는데, 병장기 부딪는 소리가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니카는 그 아이가 물고기처럼 뻐끔거리는 것만 보였다. 아이를 구하러 다급히 말을 달렸다.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서둘렀음에도 선수를 뺏겼다. 아이의 머리가 니카의 목전에서 뎅겅 잘려나가 흙바닥을 뒹굴었다. 목청껏 우느라 피가 쏠렸던 혈관이 힘껏 피를 뿜었다.

“니카 경, 오랜만이군.”

니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을 때리는 새빨간 머리칼, 그리고 감정은 있을까 궁금한 저 시리도록 차가운 한 쌍의 눈동자. 대공의 짓일 줄이야 진작에 짐작했지만 생각보다 거물이 나섰다. 탈타미오 후작. 니카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잔악후작!”

니카가 멸시를 담아 씹어뱉듯이 남자의 호칭을 꺼내 들었다.

“그 아이는 죽일 필요 없었잖아!”

“애가 자꾸 울잖아, 시끄럽게….”

익살스레 웃는 것에 머리가 홱 돌았다. 니카가 검을 뽑아들고 쇄도하자 탈타미오 후작이 재빨리 대응했다. 검이 맞붙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힘의 절대적인 차이에 이를 악문 것은 잔악후작이었다.

“여전히 무식한 힘이야. 여전히, 강해.”

“목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그렇게 넉살을 부릴지 궁금하군!”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너는 항상 내 얼굴만 보면 그렇게 화를 내더라.”

후작이 두 발짝 물러서서 잘생긴 얼굴을 처연하게 일그러뜨렸다. 니카는 그의 가증스러움을 바라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내가 많이 싫은가?”

“네가 대공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몰살한 일이 몇 번이지? 어리거나 늙고 약한 자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한 건? 왕녀님을 모욕한 것은? 이 니카를 혼혈인이라 낮잡아 보았던 게 몇 차례인지는 기억하고 있나?”

이를 갈던 니카가 검을 공중에서 한번 거칠게 털었다.

“네가 싫으냐고 물었나. 그래, 딱 질색이다. 너처럼 앙살라테의 곁에서 감언이설로 환심을 사다가 얼른 시류에 따라 갈아탄 박쥐 같은 작자는 더욱이 말이다.”

탈타미오 후작은 대공의 지시라면 더러운 일도 마다치 않고 수행해, 젊은 나이에 권력을 거머쥔 남자였다. 잔악후작이라는 괴상한 별칭으로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며 팔아넘기라는 그릇된 지시를 별다른 간언도 없이 다 소화해낸 까닭이다.

니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욕심이 많은가 하면 매사에 초탈해 보였고, 원래가 부유한 가문 태생이었다. 승계권 다툼으로 말이 돌기는 했어도, 후작은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걸 감안하면 괜찮은 배경에서 번듯이 자라난 편이었다.

“이게 대체 너에게는 다 무슨 소용이지? 잔악후작.”

그런 후작이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지금에 다다라야 했던 이유는 대체 뭘까?

“싸우고, 죽이고, 너를 이용하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게?”

입 밖으로 내어 물어보고 나니 정말로 견딜 수 없이 궁금해졌다. 후작가의 장자로 태어났고, 사지가 멀쩡하며, 왜 싸구려처럼 새빨갛게 물들이고 다니는지는 몰라도 남자는 본디 희귀한 금발에 미남이기까지 했다. 

혼혈인 고아로 자라난 니카와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다. 삶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니카의 것과 견주어보면 명백히 더 나았을 것이다. 시선을 낮추고 분수를 안 채 살아가면 그런대로 행복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본디 타고난 성정이 잔악해서 살생을 즐기는 부류인가? 니카는 생각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전장을 누비며 살육광들을 여럿 보았다. 탈타미오 후작의 담백한 표정은 즐기는 자의 모습으로 치부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니카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니카의 검 끝을 비껴낸 바란이 숨을 몰아쉬었다. 니카를 노려보는 후작의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애처로웠다.

“난 그냥 뭘 하나 갖고 싶었을 뿐이야.”

“뭘 말이지?”

“…….”

후작이 보통 빈정거리는 데만 쓰는 입술을 얼뜨기처럼 벙긋거렸다. 곧 후작은 고개를 가볍게 젓고 물러섰다. 그는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과장되게 검을 휘둘렀다. 허점투성이였다.

안장 위에서 자세를 잡은 후작이 니카가 돌격하는 순간에 몸을 기울여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니카는 귓등에 뜨거운 입김이 닿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봐, 용인기사. 니카 경.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이 좆같은 판에 스스로 발을 들였지? 그 정도 힘이면 외국으로 망명해서 여염집 일을 돕고 일삯을 받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저 잘난 탈타미오가 왕국이 경멸하는 용인기사를 보며 더 나은 선택이나 운운하고 있다니. 치미는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팔꿈치를 휘둘러 후작의 투구를 때렸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스쳐 지나갔다. 니카는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것을 감수하고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후작은 예상했다는 듯이 공격을 부드럽게 피했다.

“개소리!”

“오…. 아니면.”

니카는 이를 사리물었다. 검풍이 일 정도로 거세게 휘두른 검을 후작이 가까스로 막았다. 힘을 다 흘리지 못해 손목에 무리가 갔을 것이다. 후작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너도 갖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목숨을 노리고 검을 치켜든 순간에 잔악후작이 물었다. 니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친 표정의 후작이 누군가와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니카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목구멍에 어떤 말이 가로막혀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하고 그 안을 뱅뱅 돌아 다 할퀴어놓았다.

니카의 기억이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던 꿈의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지축이 흔들리고 하나의 구심점에 만물이 빨려 들어가 이내 새까만 암흑만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니카는 눈을 깜빡였다. 따가운 햇살이 눈꺼풀 위로 내리쬐어 다홍색 빛을 투과시키고 있었다.

<1권 끝. 다음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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