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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그대만이 필요하다 (2/12)

2. 나는 그대만이 필요하다


“대공이 다르탈루 강 전투에서 대승해 전선을 무너뜨렸답니다. 왕자군은 강 서쪽까지 후퇴했고요. 솔직히 말해 왕자님께서 궁지에 몰린 게 사실이군요. 이 기세로 계속 밀렸다간 서쪽 국경까지 가겠어요.”

레이먼드가 지도를 펴 놓고 전세의 변화를 설명했다. 작년에 용의 신관들이 드라코슨은 용이 되지 못하리라는 의미심장한 예언을 한 뒤로 거짓말처럼 승기는 대공의 손에 머물렀다. 대공 역시도 캐멀롯 왕의 아들로서 직계 드라코슨이라지만 다른 가문의 깃발을 달았으니, 세간에서는 이 예언이 결국은 대공의 승리를 예언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바란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가 호되게 호통을 들었다.

“후작님. 듣고 있기는 한 겁니까?”

“귀청 떨어지겠다.”

“듣는 척이라도 좀 하세요. 연락이 왔다고요.”

바란이 자세를 고쳐 반듯이 앉았다.

“어디에서? 왕자, 아니면 대공?”

“둘 다요.”

레이먼드는 책상 위에 두 가지 편지를 가지런히 놓았다. 한쪽은 종이에 금박을 박아 넣었고 또 다른 한쪽은 놀랍게도 쓰던 종이를 이면지로 재활용해서 친서라고 보냈다. 바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음과 같이 평했다.

“정말 개성이 뚜렷한 작자들이야.”

바란은 그나마 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앙살라테 왕자의 친서부터 집어 들었다. 왕족이 보내는 친서답게 금박이 입혀졌고 용의 혈통을 뜻하는 드라코슨(Dracoson) 왕가의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바란은 편지를 뜯기 전에 촛농 위에 생생하게 붙은 고대룡의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있지, 레이먼드.”

“또 왜 그러십니까? 싱거운 말이면 애초에 꺼낼 생각을 마세요.”

“이상하지 않아? 토룡의 혼혈이라는 것만으로 온갖 핍박을 견디며 사는 사람이 있는데, 누군가는 고대룡의 피가 섞였다고 왕족이라니. 토룡이건 고대룡이건 어차피 날개가 달린 것 빼고는 비슷하게 생겼잖아.”

레이먼드가 정색을 하고 낯빛을 바꾸었다. 바란도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비스듬히 의자의 팔걸이에 가슴팍을 기대며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하나, 둘 다 파충류. 둘, 초월적인 힘. 셋, 왕국어에서는 둘 다 용이라고 줄여서 부르잖아.”

“위험한 발언인 건 아시죠? 들켰다간 신성모독으로 즉결처형입니다.”

레이먼드가 마른세수를 하며 말했다.

“그리고 지능도 없는 괴물 도롱뇽이랑 건국신화에 나오는 위대한 용이 같아요? 아무리 사랑이 좋아도 구분할 건 구분 해야지요.”

“흠….”

바란은 레이먼드의 수다스러운 기질이 더 발휘되기 전에 얼른 편지를 뜯었다. 앙살라테 왕자의 유려한 필체가 보였다. 꼬마 후작에게…. 첫 문장을 읽었을 뿐인데 바란의 아미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뭐라고 써 있습니까?”

“별거 아니야. 다음 군사회의 때 꼭 참여해서 정보 좀 캐 오라는 독촉장이지. 어지간히도 급박한가 보군.”

바란은 편지를 레이먼드에게 넘겨주었고, 레이먼드는 한번 훑어본 후 책상을 밝히는 촛불가에 가져가 편지를 남김없이 태웠다. 잿가루가 날렸다. 왕자의 열렬한 지지자인 레이먼드 앞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짚고 넘어가지 않았지만, 왕자는 이 편지에서 니카에 관해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레이먼드도 그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바란이 왕자에게 바치는 충성은 니카라는 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니카의 안위에 문제가 생겼다면 왕자는 이것을 바란에게 알려야 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었다. 입안이 무척 쓰고 배신감에서 비롯된 신경통이 바란을 괴롭혔다. 머릿속 한 구석에서는 이해가 되었다. 도덕적인 의무를 따지기에 왕자는 너무 많은 목숨을 등에 지고 싸우는 중이었다. 니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나면 그의 충실한 장기말,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제어를 벗어나 멋대로 굴게 될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레이먼드가 곁에서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왕자의 대응이 실망스럽기는 해도 니카는 멀쩡히 살아있다. 그것도 바란의 곁에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노력하며 바란이 과장되게 어깨를 떨었다.

“문제는 대공이네. 읽기도 겁난다.”

“얼른 열어보세요.”

종이가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접혀 있어서 열어보는 데만 해도 시간이 꽤 걸렸다. 바란이 짐작하기로 최근 다른 대륙에서 온 잡기단에게 손수 배웠다는 종이접기 방법인 것 같았다. 해괴하게 접힌 종이를 열어보자마자 제멋대로 소문자와 대문자를 왔다 갔다 하는 글씨가 골치를 아프게 했다.

“썅…. 글씨 더럽게 못 쓰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네가 좀 읽어봐.”

바란은 결국 해독을 포기하고 레이먼드에게 친서를 넘겨주었다. 레이먼드는 품에서 안경을 꺼내 반짝거릴 때까지 닦아 착용했다. 손톱으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면서 해독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요즘 얼굴이 잘 안 보여서 아쉽고 외로우시답니다.”

레이먼드가 소리내어 읽어주다 말고 침음성을 냈다. 바란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얼른 편지를 돌려주었다.

“더 이상은 음담패설로 가득해서 읽어드릴 수가 없군요. 다만 마지막에 이 내용이 의미심장합니다. 탈타미오 영지 근처에서 왕녀 일행을 붙잡으려다가 사사바란 공작의 기사 열 다섯이 전부 죽었다는데 이것도 그 신통한 용인 기사의 짓이냐는 겁니다.”

“벌써 거기까지 얘기가 갔어?”

바란이 지친 얼굴로 물었다.

“아무렴요.”

“그리고 뭐래?”

“걔도 너처럼 꼴리게 생겼던데 벌써 죽어버리다니 아깝게 됐답니다.”

“아악! 비역질이라곤 질색하는 새끼가 왜 농담은 이딴 식으로 해!”

바란이 꽥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저 새끼를 죽이는 게 다름 아닌 나이기를!”

레이먼드는 바란의 발작적인 비명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헛기침을 했다.

“후작님. 여기서 주목하셔야 할 것은 ‘벌써 죽어버리다니.’하는 대목입니다. 제가 사람을 풀어 알아본바, 니카 경은 공공연히 죽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기사 열다섯 상대로 덜렁 버려두고 갔으니,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살아남았을 것 같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레이먼드는 바란에게 그런 식으로 자꾸만 이를 갈면 젊은 나이에 이가 상할 거라고 경고했다. 바란은 진정하기 위해 심호흡을 들이켰다. 연애편지라도 되는 양, 향수까지 꼼꼼히 뿌려서 보낸 대공의 괴짜 친서를 가만 들여다보던 레이먼드가 나직이 경고했다.

“조심하십시오.”

“걱정하는 척하긴.”

바란이 낮게 웃었다. 레이먼드는 그 말에 무언가 대꾸하려고 하다가 바란이 “너도 결국은 내 사람이 아니라, 앙살라테의 사람이면서.” 하고 거리를 두자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레이먼드의 창백하게 굳은 얼굴을 바란은 묵묵히 응시했다. 그들은 더없이 가깝게 지내다가도 별안간 서로의 거리가 사실은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을 깨닫곤 했다. 그러는 순간마다 바란은 오랜 친우처럼 살가운 집사를, 또 레이먼드는 속이 깊고 친밀한 주인을 잃었다.

“…잊어버려.”

바란이 뒤늦은 후회로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나는…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니카가 기다리거든, 서재에 데려가기로 했어.”

“그래요. 며칠 새 꽤 가까워지셨군요.”

니카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바란과 레이먼드를 감상적인 분위기에서 끌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바란의 경우에는 그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 우울한 기분을 살라버리는 쪽이었고, 레이먼드의 경우에는 니카의 이름만으로 심란한 마음이 샘솟아서였다.

바란은 말갛게 웃으며 집무실을 나갔다. 이윽고 침묵에 싸인 방 안을 레이먼드의 한숨이 가득 채웠다.

* * *

“고작 삼 분 늦었는걸!”

“오 분입니다.”

바란이 항변하려는 것을 막은 니카가 방 벽면에 고정된 괘종시계를 가리켰다. 바란이 들어오는 그 순간에 시곗바늘이 5분을 가리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본래 바란이 오기로 한 시간은 여덟 시였다. 바란은 저택에 있는 다른 시계들보다 이 방의 시계가 이 분 빠르다고 반론했다. 그런데 증거가 충분하지 못해서 설득에는 실패했다.

“…물론 오 분 정도야 봐 드릴 수 있습니다.”

니카가 너그럽게 말했다.

“무리하게 시간을 내신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이해심 깊은 말인데도 바란의 마음은 오히려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할 것이라고는 침대시트 위에 누워 천장의 무늬 규칙을 발견하는 게 다인 침실 안에서 니카는 오래토록 바란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지루했을까? 고작 삼 분이라고 말할 게 아니었다.

“무얼 그리 보십니까?”

“너.”

니카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바란은 그가 기분이 상했는지 아니면 단지 쑥스러워서 그러는 건지 고민되었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칼에 덮여 있는 니카의 귓불을 보고 싶다. 귓볼을 보면 금방 분간할 수 있다. 부끄러워하는 거라면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테니까.

“책이 정말 많군요.”

서재의 규모를 본 니카가 감탄했다.

그는 책을 좋아했다. 과거에도 지금에도 다르지 않은 사실이었다. 바란은 앙살라테 왕자의 저택에 몸을 의탁하며 지냈을 때, 저택의 서고에 가면 절반 정도의 확률로 니카를 마주쳤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머지 절반의 확률이 앙살라테 왕자와의 조우였다는 점은 안타까웠지만, 어쨌건 바란은 그때부터 책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를 썩 좋아하게 되었다.

“대대로 내려온 고서들도 있지만, 대개는 아버지 대에서 사 모은 거야.”

바란이 대답했다.

“아버지는 영지를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학구적인 바탕이 필수적이라고 했어. 사치를 줄이고 그 돈으로 온갖 책을 사들였지. 덕분에 어지간한 도서관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가 된 거야. 일반적인 귀족 서재에서 이런 사다리를 찾아보는 게 얼마나 드문 일인지 알아?”

바란이 높은 곳에 꽂힌 책에 닿을 수 있도록 설치된 바퀴 달린 사다리에 올라탔다. 그는 사다리에 매달린 채로 멋들어지게 책장 끝까지 미끄러졌는데, 그 모습이 아주 극적으로 보여서 니카도 잠깐 웃음을 지었다.

“네 마음대로 읽어도 좋아.”

바란이 사다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니카의 앞까지 걸어왔다. 니카는 벽면의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을 멍하니 둘러보다가 바란을 응시했다.

“너는 책을 좋아하잖아.”

“그걸 어떻게….”

“말했잖아. 나는 너의, 읍.”

바란은 연인이라는 단어를 한 번 더 언급하려다가, 그 단어를 먼저 눈치채고 손으로 막아버린 니카 탓에 입을 다물었다. 파란 눈이 불만스러운 기색도 없이 동그랗게 뜨였다.

입술에 닿는 거친 감촉은 틀림없이 니카의 손이다. 바란의 눈매가 서서히 휘어지다가, 별안간 활짝 웃었다. 급한 김에 손으로 입술을 막아버렸던 니카는 그 웃음에 놀라 손을 부리나케 떼어냈다. 막는 것이 없어지자 곧 영롱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재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거 모르십니까?”

니카는 당황해서 괜한 핀잔을 주었다. 그래도 바란의 웃음이 쉽게 잦아들지 않자 분주하게 서재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그는 무언가 찾는 시늉을 하며 책장 사이로 도망가버렸다. 자꾸만 달아나는 니카를 따라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 * *

니카는 폭신한 소파에 앉아 책에 정신이 팔렸다. 지금 읽고 있는 것 외에도 수 권의 책이 옆의 협탁에 줄을 서 있었다. 처음에는 열중한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다가도, 그가 눈길 하나 주지 않자 점차 심통이 기어올랐다. 바란은 괜히 말을 붙여보았다.

“고왕국 시대의 유명한 정령사 아일만 호프셔는 어릴 적에 벽난로에서 불의 정령을 처음 보고 계약했대. 유명한 얘기인데 혹시 들어본 적 있어?”

니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얼굴 앞까지 바짝 들고 있던 책을 잠시 무릎 위로 올려두었는데, 바란에게 집중하겠다는 표현이었다. 바란은 간지러운 느낌에 귓불을 긁었다. 때 이른 벽난롯불은 조금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빨간 빛에 그을린 니카의 윤곽을 보는 일은 즐거웠다.

“나는 어릴 적에 그 얘기를 듣고부터 멍하니 벽난롯불에 넋을 팔아버리는 버릇이 생겼어. 어린 마음에 나도 언젠가 벽난로에서 정령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한 번은 불 안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한 적도 있었다니까.”

“맙소사. 다치진 않았습니까?”

“어? 아니. 다치지는 않았어.”

“다행이군요. 화상은 아주 고통스럽고 흉터가 크게 남습니다.”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건만 니카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는 심각하게 바란의 이야기를 듣다가, 당시 바란의 놀이담당 시녀였던 마틸다가 어린 바란을 재빨리 낚아채는 대목을 듣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바란은 멍청하게 헤실헤실 풀려버릴 것 같은 입매를 억지로 붙들었다.

“뭐야, 그래 봤자 어릴 때 얘긴데 걱정을 다 해주네.”

“…당신을 걱정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 어린아이가 사고로 화상을 입는다면 안타깝게 여길 것입니다. 딱 그 정도의 마음입니다.”

“그래, 그래.”

바란이 건성으로 긍정하자 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꿀이 듬뿍 들어간 밀크티 잔에 얼굴 반쪽을 묻어버렸다.

그는 이후 한참 동안 바란이 말을 다시 걸어오지 않으니 웬일인가 하는 마음에 옆을 돌아보았는데, 바란은 줄곧 넋을 빼고 니카를 지켜보고 있던 거였다.

‘넋을 뺐다’라는 관용표현 그대로, 그 모습이 가관이었다. 빨간 머리카락은 뒤엉켜있고, 턱을 괸 오른손이며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까지. 그 모양을 하고도 눈이 마주치자 아주 예쁘게 웃었다.

니카는 열정적인 눈길을 모른 체하며 책을 한 권 펼쳐 들었지만, 얼마 안 가 책을 거꾸로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목 위로 온통 새빨개져서 책에 머리를 박고 끙끙대기 시작했다. 일생토록 이렇게 오롯한 시선을 받아본 일이 없었을 테니 어색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 읽어?”

바란은 니카가 무안하지 않도록 말귀를 돌려 책에 관해서 물어보았고, 니카는 대답 대신 그가 읽고 있던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바란이 휘적휘적 가까이 다가가서 책을 들여다보았다. 어깨가 맞닿았다.

“동화책이네.”

“네. 어릴 때 보육원에서 읽어본 적이 있는데… 제발 조금 떨어져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바란이 어깨를 으쓱이며 넘겼다. 니카의 눈이 가늘어졌지만 신세 지는 주제에 단호한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바란이 삽화에 그려진 익살스러운 늑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곰팡이 먹은 종이 냄새가 끼쳤다.

“늑대네. 동화책에서는 늑대가 대부분 악당이잖아. 그렇지?”

“이건 아닙니다.”

“그러면. 착한 놈이야?”

니카가 조금 고민하는 듯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욕심이 많지도 없지도 않은, 그냥 평범한 늑대죠.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뭘 하나 갖고 싶어 했다는 겁니다.”

“뭘 갖고 싶어 했는데?”

니카가 다음 장을 넘겨 다른 삽화를 보여주었다. 두 줄기로 갈라진 괴상한 지팡이를 든 목동이 있었다. 곱슬머리를 한 목동은 다리를 교차해서 땅을 딛으며 경쾌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목동의 갈라진 지팡이를 따라 새끼 양이 우리로 드나들었다.

“목동을.”

“잡아먹으려고?”

“상상력이 부족하시군요. 아니면.”

니카는 ‘낭만이 부족하시든지요.’ 라고 이죽이려다가 얼른 입술을 깨물었다. 바란이 얼마나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잘 하는지 기억해낸 것이다.

“어쨌든, 이 늑대는 목동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싶어 한 거고요.”

니카는 중간 내용들을 건너 뛰고서 마지막 페이지를 폈다. 거기에도 삽화가 있었다. 삽화 속에서 늑대는 마치 집 지키는 개처럼 떡갈나무 밑에 오그려 앉아 혀를 빼물고 있었다. 목을 길게 빼고 오솔길 너머를 쳐다보는 게, 바란이 짐작하기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란이 유추해낸 사실을 물어보기도 전에 니카가 결론을 이야기했다.

“결국 가지지 못합니다.”

니카는 조금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로 말했다.

“목동은 새끼 양을 지키려고 늑대를 길들입니다. 우선은 양고기를 못 먹게 했지요. 그리고 강아지처럼 짖게 만들고…. 그리고 늑대가 그를 너무나 사랑해 앓게 되었을 즈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니카가 바란과 시선을 맞췄다.

“기다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옴짝달싹하면 안 돼. …물론 목동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멍청한 늑대만 계속 손해보다 끝나는 이야기이지요.”

니카가 잠시 뜸을 들였다.

“사실 어릴 적에도 별로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늑대가 너무 바보같이 구니까요.”

바란은 동화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아주 깊은 감상에 잠겼다. 사랑이라는 강력한 동기를 멋대로 이용하는 작자들에 관해 알고 있다. 니카의 연정을 이용하던 왕녀, 그리고 바란의 연정을 이용하는 앙살라테 왕자….

‘연정에 눈이 멀어 니카를 기만하고 있는 내가 그들을 비판할 입장은 아니지만.’

속으로 실소를 머금는 찰나 니카의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고, 바란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바란.”

“응, 미안. 왜 그래?”

“클라텐 탈타미오라는 게 누구입니까?”

니카의 입술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이름이 발음되었고 바란의 얼굴이 곧장 창백하게 굳었다. 니카는 바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고 책의 표지 안쪽에 쓰인 글을 손톱으로 짚어가며 읽었다. 

“사랑하는 클라텐 탈타미오에게….”

바란이 다급하게 책을 낚아채 가져가 버려서 그다음 문장은 읽을 수가 없었다. 니카는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까닭에 글 읽는 게 느렸고 철자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신과 성이 같군요. 부인입니까?”

“나는 부인이 없어. 그건 말도 안 되지.”

“귀족들은 보통 당신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다고 들었습니다.”

“내 연인은 너야. 얘기했잖아.”

니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 더 물으려는 참에 바란이 말을 돌렸다. 뺏어 든 책을 움켜쥔 두 손이 무안했다. 서재의 분류방법을 모두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빈자리에 책을 꽂아버렸다.

니카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란은 빨간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그럴싸한 변명을 고민했다.

“시시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그래. 카드놀이를 하자. 카드 해본 적 있어?”

얼버무리려는 수작에 니카는 순순히 넘어가 줬다. 테이블 서랍에서 카드곽을 꺼내어 보여주니 신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앉아.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게.”

그래도 니카는 쉽사리 자리에 앉지 않았다. 바란의 상냥한 태도와 방금 무언가 얼버무리려던 행동을 견주어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바란이 “얼른.”하고 웃으며 보채자 얼굴을 살풋 찌푸리더니, 결국은 의자에 앉았다.

* * *

바란은 클라텐을 떠올렸다. 낯설고도 그리운 이름을.

장밋빛 뺨과 뻐기는 태도, 정갈하게 기름으로 넘겨 빗은 갈색 머리칼이 귀엽던 하나뿐인 형제. 언젠가 클라텐도 장수풍뎅이를 한 손에 꾹 욱여잡는 바란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다녔던 때가 있었다.

“난 꼭 형아처럼 될래.”

어설픈 발음으로 그렇게 말하며 동경에 젖은 눈망울을 어떻게 빛냈는지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사근사근한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태도가 변한 건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부터였다.

부모님은 롱가든의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성난 민중의 돌팔매질에 맞아 죽었다. 함께 있던 바란은 분노의 시선이 부모님께 몰린 틈을 타 달음박질을 쳐 겨우 살아난 경우였다.

클라텐은 바란에게 침을 뱉고 가문을 나갔다. 바란은 유일한 가족인 그 애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걸했던 일도 기억하고 있다. 클라텐마저 곁에 없다면 죄책감으로 만든 거대한 괴물이 바란을 한 입에 꼴깍 삼켜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릎을 흙바닥에 대고 벌벌 기면서 가지 말라고 무척 울었다. 그런데 그 애가 뭐라고 했더라?

“나가 뒈져버려, 바란 탈타미오!”

그래서 바란은 정말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넋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에 숙부는 세력을 갖췄고 바란의 자리를 한 입에 삼켜버렸다. 물 위에 뜬 버들잎처럼, 바란은 풍파를 따라 여기저기 흘러다니다가 죽음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마른 쭉정이 같던 바란에게 누군가 울지 말라고, 또 괜찮으냐고 해준 것이다. 니카. 바란은 그 이름을 마른 입술로 속삭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혈육이든 부모든 상관없을 정도로 가슴을 뛰게 하는 그 사람만 있다면.

“바란 탈타미오, 이 개자식아!”

바란은 감은 눈을 떴다. 기억보다 마르고 성숙해진 클라텐이 책상을 거칠게 두드리며 바란의 면전에서 소리를 꽥꽥 질렀다. 그는 평생 형편에 없을 것 같았던 낡은 평민의 옷을 걸쳤으며 피부는 거칠게 텄고 험한 일을 하느라 손가락 마디가 무척 투박하게 굵어졌다. 나만 그 꾀죄죄한 몰골 속에서 바란과 꼭 같은 파란색 눈만은 총총하게 빛이 났다.

“힐벤을 왕으로 지지하겠다고? 부모님을 그 꼴로 죽게 만들어놓고도 아직 모자라? 나라를 된통 무저갱에 빠뜨려야만 그 마음이 풀리겠느냐고. 대공은 백성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귀족 나부랭이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야. 유민들을 숲에 풀어 인간사냥을 즐기는 건 예삿일이고 영지민들에게 허튼 트집을 잡아 목 졸라 죽여놓거나 세금을 교묘히 올려받기 일쑤라고.”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클라텐이 분노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버지는 영지민들을 항상 먼저 생각하라고 하셨어. 너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잖아. 곧 전쟁이 일어날 거야. 우리는…. 우리만은 귀족들의 이권 다툼에 놀아날 게 아니라, 백성에게 신경을 써야 한다고. 그들은 당장 먹을 음식이 없어서 배를 곯고 죽어가고 있어. 제기랄! 당장에도 죽어가고 있단 말이야!”

“숙부로부터 후작위를 되찾아준 게 네가 말하는 백성들은 아니지.”

클라텐은 충격에 경련하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히 쓸어올렸다.

“후작위라고. 그딴 게 너한텐 정말 그렇게 중요해?”

“그래.”

바란은 대답했다.

“네가 계몽이니 평등이니 하며 백성들을 선동하는 이상한 운동을 하고 다닌다는 거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클라텐. 네 형으로서 하는 말이니 잘 들어. 대공과 왕자는 얼마 안 있어 불온세력을 칠 거야. 그러면 너는….”

“걱정하는 것처럼 지껄이지 마. 나는 형 같은 거 없으니까.”

“…….”

“더군다나 이런 좆같은 귀족새끼는 평생토록 단 한번도 가족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고.”

클라텐은 언젠가처럼 바란의 면전에 무례하게 침을 뱉고 나가버렸다. 바란은 멍하니 뺨을 닦았다. 그게 바란이 본 클라텐의 마지막이었다.

클라텐은 사난타 성을 점거해 민란을 일으킨 반역자 중 한 명으로, 민란을 제압하던 왕국군에게 목이 베여 효수되었다. 아수라장 가운데에서 클라텐의 갈색 고수머리를 한 손에 움켜잡고 그 하얀 목덜미에 칼을 박아넣은 것은.

‘니카.’

그 이름은 항상 바란에게 구원과도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만은 아니었다. 바란은 심장이 무척 깊은 곳으로 곤두박질쳐 끈적끈적한 어둠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느꼈다. 침이 바싹 마르고 손끝에 힘이 쭉 풀렸다.

클라텐을 죽인 것은 니카였다.

* * *

“뭐야, 말도 안 돼.”

바란이 앓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얼굴을 박았다. 니카는 완벽한 카드 패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뒤 태연하게 밀크티를 홀짝였다. 바란만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의 패와 니카의 것을 번갈아 확인했을 뿐이다.

“해본 적 없다고 했잖아?”

니카가 눈짓으로 긍정했다.

“너무 잘 하는데.”

불평하듯이 입이 동그랗게 말린 소리였다.

“너무 잘 하잖아.”

“제가 잘하는 게 아니라.”

니카가 단호히 대답했다.

“당신이 도통 집중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간만에 떠오른 클라텐의 이름은 바란의 마음에 한껏 파문을 일으켜놓았다. 바란의 힘없는 손끝이 카드의 모서리를 긁으며 미끄러졌다.

툭. 힘없는 소리를 내며 손목이 탁자 위에 놓였다. 니카는 생각에 잠긴 바란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자신의 차례였지만 바란은 그 사실을 잊어버린 듯이 멍하니 손안의 카드 패만 바라보고 있었다. 니카가 언급하기 전에 바란이 그의 카드를 탁자 위에 내려두고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몹시 피로한 안색이었다.

“네 말이 맞아.”

“…….”

“집중 못하겠어. 미안해.”

바란이 사과하자 니카는 더욱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니카도 탁자 위에 카드 패를 정갈히 내려놓았다.

바란이 푸스스 웃으며 “운이 좋았네. 너한테 조커가 있었으니 아마 이번 판도 졌을 거야. 기권해서 다행이다.” 하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다.

“바란.”

“으응.”

“내가….”

바란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니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정말 당신의 연인이었다면, 이럴 때 어떻게 하곤 했는지 알려줘요.”

“이럴 때라니?”

“당신이 우울해할 때.”

바란이 영롱한 웃음소리를 냈다. 우울하게 내리깔린 눈매와 입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오더니 예쁜 미소를 만든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니카는 잠깐 혼란스럽게 바란을 쳐다보았다.

“너는 그냥 거기 있기만 하면 돼. 너를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니까.”

“가만히 있으라고요.”

“내키면 입 맞춰주든가. 어때? 하하. 싫다고 할 줄 알았어.”

서재의 조용한 침묵 가운데 바란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와 아늑한 벽난로 불빛이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니카는 발그스름한 불빛에 한쪽 얼굴의 윤곽선이 빨갛게 달아오른 바란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면 니카는 언젠가 이런 풍경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차를 마시며, 연인과 함께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풍경을….

‘연인이라니.’

니카는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털어내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는 사이에 탁자 위에 무너지듯 기댄 바란이 하트가 그려진 카드는 전부 끄집어내어 니카 앞에 쭉 늘어놓았다. 바란의 손가락이 꾸물대며 카드 위 하트모양을 콕콕 두드렸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한번 웃어주기만 하면 나는 저절로 기분이 좋아질 거야.”

니카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 파란 눈을 마주 보았다.

* * *

시간은 꽤 빨리 흘렀다.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 즈음 니카의 몸은 흉터 하나도 없이 완전히 회복되어서 의원을 부르기 민망해질 정도였다.

바란은 믿을 만한 재단사를 불러 니카의 체격에 맞는 옷을 몇 벌이나 주문했다. 니카는 이제 귀공자 같은 모습으로 거듭나 있었다. 굽은 등은 반듯하게 펴졌고, 눈치를 살피던 버릇도 거의 사라졌다. 누구도 그를 보고 보육원 응달에 웅크리고 있던 외톨이 용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니카는 바란에게도, 바란과 함께하는 생활에도 익숙해졌다. 그래도 그들 사이에는 아직 어색한 정도의 거리가 존재했다. 바란은 가능하면 니카의 곁에 꼭 붙어 그 거리를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그도 후작씩이나 되는 인사이니 업무가 많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란이 아무리 애를 써도 바쁜 일정을 당해낼 수가 없어서, 니카는 하루의 대부분을 홀로 보내야 했다. 책장을 넘기다 말고 테이블 위에 고개를 묻었다.

‘너는 아름다워.’

‘정말 특별해.’

‘흉측하지 않아.’

바란 탈타미오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 입술에서는 따뜻한 말만 나왔다. 바란을 만나기 전까지 니카는 세상에 아름다운 말들이 그렇게나 많이 있다는 것을 감히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 입술을 통해 나오면 니카의 이름마저도 아름답게 들렸다.

‘니카’는 본디 왕국 남쪽의 사투리로 괴물을 일컫는 단어였다. 이는 흉측하다는 의미의 ‘이카’라는 단어에 부패했다는 뜻을 가진 접두어 ‘느’가 합쳐진 것이다. 형태소 단위까지 쪼개어도 니카의 이름에는 본디 한 끗의 좋은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바란이 가슴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미소와 같이 그 이름을 부르면, 부르기만 하면….

‘어쩌면 그는 정말 나를 좋아하는지도 몰라.’

니카는 턱을 괴고 서재에서 가져온 책더미를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내걸리는 미소를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이제는 익히 알잖아. 내가 녹아서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면서 손가락이라도 닿을라치면 얼굴을 붉힌다고. 그는 나를 정말로….’

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조금 괜찮게 느껴졌다. 바란은 그에게 예쁘다고 수도 없이 말했었다. 그러고 보면 그의 말대로 구역질이 치밀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니카는 토룡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지 않은 운 좋은 경우다. 비늘이 조금 돋았고 동공이 찢기기는 했지만 이건 머리카락으로 가리거나 어두운 곳에서 보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정도였다.

니카는 유리창 곁으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다른 사람과 별다를 바 없이 눈도, 코도, 입도 전부 달렸다. 그런데 키는 조금 큰 편이다. 보통 키가 큰 남자는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그러면 자신도 어쩌면 조금 괜찮은 축에 들지 않을까?

고민하던 니카는 바란의 모습을 떠올렸다.

바란은 키가 크고, 윤기 있는 곱슬머리에 총총한 파란 눈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왕자님보다 왕자님 같은 생김새인데 이목구비가 무척 시원스럽고 아름답다. 전에는 그런 사람의 곁에 설 자격조차 안 된다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신장이 비슷해서 같이 세워놓으면 길이는 제법 잘 맞을 것이다. 머리카락도, 빨간색과 검정색은 조합이 꽤 괜찮다.

전에 없던 일들이다. 니카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자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란이 자꾸만 아름답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바람에 어느 새 정말 그런 것 같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 * *

“바란.”

“니카! 좋은 아침.”

니카는 침실에서 읽은 책 몇 권을 서재에 도로 가져다 놓기 위해 복도를 지나가다가,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바란과 마주쳤다.

바란은 무척 서두르는 기색이었는데도 눈앞에 니카가 보이자 멈춰 서서 활짝 웃었다. 니카는 어색한 입매로도 마주 웃어주기는 했다.

“잘 잤어?”

“예. 바란은….”

“나는 네 생각하느라.”

이렇게 나오면 단번에 숨이 턱 막히고 대꾸할 말이 없어진다.

“못 잤어, 별로. 그래서 지금 되게 피곤해.”

“가서 좀 주무시면 어떻습니까.”

“와아.”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바란이 문득 감탄사를 흘렸다.

“이제 내가 이렇게 말해도 꼼짝않네.”

“좀 익숙해졌으니까요.”

바란은 그 말을 되씹어 생각해보더니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네, 서로 익숙해진다는 거.”

“제가 니카 경에게 감사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갑자기 등장한 서늘한 목소리가 니카와 바란 사이를 갈랐다. 니카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바란은 체념한 듯 입술을 깨물며 마른세수를 했다. 바란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챈 것은 연이은 밤샘업무로 귀신 같은 몰골이 된 레이먼드였다.

“집무실 상황을 보신 분이 어떻게 도망칠 생각을 해요?”

“유능한 부하 좋다는 게 다 뭐야, 레이먼드.”

“내가 진짜 어지간하면 입 닥치고 있으려고 해도, 이번에는 진짜 아니에요. 너무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당신 영지 보고서를 왜 내가 읽어야 되느냔 말이에요. 이러니까 백성의 삶이 궁핍하고 나아지는 게 없지.”

레이먼드는 죄인을 끌고 가는 간수처럼 바란의 옷깃을 잡고 뒤로 질질 끌었다. 매일 펜대만 잡고 있는 집사에게 이런 억척스러운 힘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발버둥치던 바란이 자포자기하고 니카에게 눈짓으로 이별을 고할 즈음 갑자기 레이먼드를 가로막는 손길이 있었다.

“…….”

“…니카?”

니카가 끌려가는 바란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이다. 니카 스스로도 부지불식 간에 일어난 일인지 제 손을 혼란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레이먼드가 악을 쓰고 바란을 당기니 덩달아 마주 당기기 시작했다.

바란은 이러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얼른 상황을 정리했다.

“니카.”

난처하게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니카는 눈치가 빠르니까. 과연 니카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팔을 놓았다. 그런데 어쩐지 화가 난 기색이었다.

바란은 의아한 마음에 몇 마디 더 말을 붙여보려고 했는데 레이먼드가 자비 없이 잡아당기는 통에 니카와 이미 너무 멀어지고 말았다.

* * *

“대공께서 반드시 참석하라십니다.”

“미쳤어, 내가. 거길 제 발로 기어들어 가게. 보나 마나 별 용건도 없을 게 뻔한데.”

“용건이야 딱히 없어 보이긴 합니다만…. 이번에 다르탈루 강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려고 연회를 크게 베푸신다는데요. 어지간한 인사들은 다 참석할 겁니다. 그 엉덩이 무거운 사사바란 공도 참석 의사를 밝혔다니 후작 신분에 불참하기에는 눈치가 보이지요.”

모든 상황은 바란이 대공의 연회에 참석해야만 하는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었다. 바란은 더 반박할 거리가 없을 때까지 반론을 제기하다가 결국 할 말이 떨어져서 입을 꾹 다물었다.

“용인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압니다.”

“…….”

“후작님. 왕자 전하와의 계약을 기억하세요.”

레이먼드는 바란의 풀 죽은 모습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거리에서 제시간에 당도하려면 적어도 이틀 안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이틀은 너무 짧다. 바란은 혹시나 하여 연회에 도착하기까지 말을 달려 걸리는 시간을 스스로 셈해보았다. 그래 봤자 산술에 빠른 레이먼드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대공이 임시 거점으로 둥지를 튼 탈타르 영지까지는 도착까지 꼬박 말을 달려도 이레는 걸린다. 그러면 이틀 안에 출발하되, 갔다가 돌아오는 데까지 하면 드는 시간이 총 보름. 손가락을 다 꼽아도 셀 수 없는 밤 동안이나 니카를 볼 수 없게 될 텐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주인의 모습이 자꾸만 신경이 쓰였던지 레이먼드는 헛기침을 했다.

“아까, 표정이 안 좋던데요.”

“응?”

“용인, 니카 경 말입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바란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래. 바란의 옷자락을 놓아주던 니카의 손길이 머뭇거렸고 눈빛은 매서웠다. 바란은 그걸 알아채고도,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마음으로 달랠 생각도 없이 레이먼드를 따라나서지 않았던가. 바란은 남겨진 니카의 심중을 헤아리며 난처하게 머리칼을 뒤로 쓸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아직 낙엽이 구르며 본격적으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내기엔 시기가 일렀다. 그래도 제법 가을다워진 날씨다. 오후의 한창 볕 좋은 시간을 지나면 오싹할 만큼 차가운 바람도 이따금 불었다.

급박한 업무를 마치고 니카와 함께 늦은 시간이나마 함께 보내기 위해 니카의 방에 들어선 참이었다. 레이먼드가 귀띔해준 바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니카는 보통 이 시각에 책에 코를 묻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만은 달랐다. 그는 반듯하게 앉아서 눈을 한껏 내리깔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바란은 몇 마디 일상적인 화제로 말을 붙여보려다가 도무지 대꾸가 돌아오지 않아 포기했다.

“무슨 일 있어? 좀 전부터 아무 말이 없네.”

눈치를 보던 바란은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니카의 침묵이 내린 방 안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정적인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커튼을 젖히고 실내로 들어와 안정된 공기를 한바탕 휘저었다. 찬 공기를 깊숙이 들이키니 마음이 좀 나아졌다.

“생각을 했습니다.”

니카가 말을 꺼냈다. 얼마나 간만에 입술을 떼는지 쩌억하고 바싹 마른 혀 차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무슨 생각. 내 생각?”

“…….”

니카의 침묵은 가장 함축적인 답변이었다. 대개 입 밖으로 꺼내기 곤란한 긍정이 침묵의 형태를 취했다. 바란은 창밖을 내다보던 시선을 돌렸다. 팔짱을 끼고 돌아선 얼굴이 심각했다.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내가 뭔가 섭섭하게 했어?”

“제 문제입니다. 당신에겐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곧장 바란에 대한 지적이 들어왔다.

“아니, 있다고 한다면…. 그 무책임한 태도겠지요.”

“무책임.”

“그래요.”

바란은 니카가 일부러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니카는 말을 좀 더듬었다.

“난 당신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인형이나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은 꼭 그런 것처럼 굴었죠. 내게 제한된 공간을 주고 그 안에서 당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라는 듯이…. 당신이 오전에 날 두고 집사에게 가버렸을 때만 해도 꼭 그랬습니다.”

“니카, 나는-”

“고달픈 일입니다. 아니요,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지금 이 생활도 이전의 나로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것들이니까.”

니카가 조용히 고개를 드는 순간 바란의 마음이 요동쳤다. 일렁이는 눈동자는 클라텐의 머리를 베어내었던 때나, 태연한 얼굴로 바란의 마음을 뒤흔들던 그 냉랭한 ‘니카 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울 듯이 일그러뜨린 표정과 꾹 말아쥔 주먹은 다름 아닌 열여덟의 니카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귀여운 면이었다. 바란의 꾹 다문 입술이 씰룩이며 호선을 그렸다.

“그래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몸을 의탁한 신세에서 하기엔 너무 염치없는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지만요. 그렇지만 내가 연인이라고 말했던 건 다름 아닌 바란 당신입니다.”

“으윽.”

“나는 고립되어 있고 매일 당신하고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와 다릅니다. 얼마든지 혼자서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돌아다니며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까…. 바란, 왜 웃습니까? 뭐가 우습지요?”

바란이 참다못한 웃음을 터뜨리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더니 팔을 뻗어 니카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의 압력은 애정표현치고 투박했고 또 무척 강했다. 어지간한 사람 같았으면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하하, 사랑해.”

“갑자기 무슨-”

“사랑해.”

바란은 니카가 식은땀을 흘리면서까지 짜낸 혼신의 용기를 애교나 앙탈 비슷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불쾌감을 느껴야 마땅했다. 니카는 무언가 따지고 들어야만 했다. 니카는 노력했지만 할 수 있는 반항이라고는 허공에서 손가락을 좀 꿈틀대는 것이 다였다.

예기치 않게 바란의 목덜미에서 훅 끼치는 체취를 맡았더니 혀가 입천장에 붙어버린 듯했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온몸의 감각세포가 예민하게 바란을 느꼈다. 바람과 풀냄새가 뒤섞인 독특한 체취. 맞닿은 보드라운 살갗. 숨소리… 목소리의 울림. 그의 존재.

그의 존재. 

니카는 이만 입을 꾹 다물었다. 얼굴이 새빨간 것에 더해 머리칼에 가려진 귓바퀴까지도 붉힌 채였다. 그가 바란을 마주 안아주는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뿌리치는 일도 없었다. 

* * *

“질투했지.”

“아닙니다.”

“했잖아, 질투. 귀엽게도 왜 너를 두고 집사와 갔느냐고 직접 언급하기까지 했어. 이래도 아니라고 할 거야?”

“…아닙니다.”

“아니라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는 뜻이야?”

바란이 웃었다. 무척 들뜬 콧소리를 냈다.

“하여튼 네 말은 이해했어. 요컨대 내가 너에게 너무 소홀했다는 이야기잖아. 하기는 매일 같이 서재에 홀로 처박혀 있는 일이 지루하기는 했겠어. 왜 생각을 못했을까?”

니카는 제 불평을 다시 주워들으려니 볼이 화끈대는 모양이었다. 바란은 니카의 기분을 어떻게든 환기시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쭈뼛거리는 팔을 붙잡아 이끌게 된 것이었다.

후작부인의 방에서 다짜고짜 책꽂이 한구석을 붙잡아 당긴 바란은 니카를 그 안의 수상한 공동으로 안내했다. 입을 꼭 다문 채 토라진 태도를 유지하던 니카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안으로부터 꿉꿉한 먼지와 곰팡이냄새가 그들을 덮치며 비어져 나왔다. 바란은 극적인 동작으로 꾸벅 절했다.

“이건….”

“비밀통로.”

“비밀통로요?”

“오래된 성에는 반드시 비밀통로가 있어. 귀족이란 켕기는 구석이 많은 족속이니까.”

거미줄이 신발에 잔뜩 묻은 니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걸 저한테 알려주셔도 되나요?”

“원래는 안 되지. 말 그대로 비밀이거든. 사용인들 중에서도 통로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손에 꼽아.”

손에 촛대를 들고 뒤를 돌아본 바란은 발밑을 경계하느라 어기적대며 걷는 니카를 보고 숨죽여 웃었다. 작게 키득이는 소리가 통로 안의 벽돌에 부딪혀 반사되었다.

통로가 좁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걸었다. 수 분에 한 번꼴로 니카가 대체 어디를 가는 거냐고 물었지만 바란은 묵묵부답이었다. 힌트를 조금 흘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깜짝 선물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말만 반복했다. 외울 수도 없는 갈림길을 몇 번이나 지났을까, 니카는 그들이 어렴풋이 아래층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밀통로 안에는 쥐가 많았다. 날파리가 꼬인 늙은 쥐의 사체를 지날 때는 악취가 올라 코를 틀어막고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바란은 마냥 예쁘장한 샌님처럼 생겨서 비위가 좋았다. 그는 무심히 발끝으로 사체를 구석에 쭉 밀어두었다.

니카가 굳이 이 길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자 바란은 곤란하게 볼을 긁적였다. 혹여나 니카의 존재에 대해 말이 새어 나올까 두려워 니카를 가둬두고 있다는 말이 쉽게 나올 리 없었다. 결국 바란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생각보다 니카의 비위가 좋지 않다는 점을 미처 고려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싱거운 사과였다. 바란은 건조한 목을 헛기침으로 가다듬었다.

“저번에 한밤중에 서재에 간다고 레이먼드한테 잔소리 듣는 거 봤지?”

“야단이 아니고요?”

“걘 너무 간섭이 심하다니까. 어쨌든 안 들키고 나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

“그러면 대체 어디를 가는 건데요?”

영문도 모르고 바란에 대한 신뢰감 하나로 이 수상한 통로를 누비던 니카는 바란의 미소에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바란은 좀 전부터 다 왔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다 왔다.” 만큼은 정말이었다. 바란은 갑자기 니카의 손을 꼭 붙잡고 내달렸다. 나머지 벽돌과 다름없던 어떤 한 부분을 잡아 당기자 도저히 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위치에서 문이 나타나 열렸다.

바란도 웬만큼 단련이 된 몸이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단숨에 달리면 숨이 찼다. 반면 용인인 니카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날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을 사소한 움직임에 불과했기 때문에, 앞장 서 이끌어 온 사람이 더 지친 표정을 짓는 이상한 형국이 되었다. 잠시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고르는 바란에게 니카가 괜찮냐고 말을 붙였다.

“괜찮아.”

“그런데 이곳은….”

니카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주 넓군요. 텅 비었고요.”

“여긴 연무장이야. 사병들의 훈련시간이 한참 전에 끝났으니까 지금은 비어 있는 거지. 잠깐만, 이 멍청이들이 정리를 제대로 안 한 모양이군.”

훈련용으로 준비된 무구는 유지관리를 위해 훈련이 끝난 후에 항상 실내로 들여놓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워낙 번거로운 작업이다 보니 날씨가 흐려지지 않는 한은 커다란 나무 그늘에 대충 밀어놓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평소 사병들의 훈련상황을 자주 살피지 않던 바란은 잠깐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놈들 다 교육이 필요하겠는데.”

옅은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니카와의 시간을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바란은 곧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들고 온 촛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잔잔한 바람을 따라 일렁이는 촛불 그림자가 주변을 희미하게 밝혔다.

니카는 아리송하게 촛대와 자리에서 일어나 무구더미를 뒤지는 바란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뭐, 덕분에 건물 안까지 이걸 가지러 들어갔다 나오는 수고는 덜었지.”

니카는 바란이 하는 말을 곧장 알아듣지 못했다. 바란은 거치대에서 묵직한 장검을 뽑더니 검집째로 니카에게 던졌다. 하마터면 가슴께를 맞을뻔한 니카는 빠른 반사신경으로 검을 낚아챘다.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바란은 매끄러운 동작으로 검을 뽑고 니카에게로 쇄도했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었다. 바란이 휘두르고 있는 건 의심할 여지 없이 시퍼렇게 날이 선 진검이었고, 검격을 내지르는 기세에는 봐주는 기색조차 없었다. 변함없이 예쁘게 빛나고 있는 파란 눈만 아니었다면 거의 죽이려고 달려드는 줄 알았을 것이다.

니카는 당황했지만, 엉겁결에 검집째로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묵직한 소리가 났다.

“전장을 누비던 기사님을 온종일 서재에만 갇혀있게 만들다니 나도 참 멍청하지. 안 그래?”

바란이 한 걸음 물러나 자세를 잡으며 무척 신이 난 투로 소리쳤다.

“실력 좀 보여주라고. 니카 경.”

니카와 이렇게 직접 검을 맞대어 본 것은 아주 오래전 전장에서 이후 처음이었다. 니카나 바란이나 순수하게 검을 겨루기엔 자질구레하게 가진 직함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니카와 맞붙은 전장에서야 질 것이 뻔한 싸움이었으므로, 바란은 늘 사사로운 연정만 가지고 군의 사기가 걸려있는 대장전에 자원할 수 없는 신세였다.

검이 맞붙으면서 귀를 찢을 듯한 금속성이 났다. 니카의 힘에 밀려 검이 잘게 떨었다. 바란은 낯익은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 * *

“고작 이 정도인가?”

바란은 저만치 날아가 버린 제 애검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몸이 바닥으로 무너진다. 잔꾀나 기교를 무색하게 만드는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제대로 흘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손아귀를 떠난 검이 공중을 날았다. 악력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바란의 손안은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겨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적장은 바란의 상처 따위에 아랑곳하는 자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수리 왕녀의 기사 니카는 무심한 눈길로 흙바닥에 나뒹구는 잔악후작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약골이로군. 잔악후작.”

“…….”

“이제는 나불거릴 힘도 없나?”

니카는 남을 조롱하는 데 대단한 재능이 없다. 이깟 악당 같은 이죽이는 대사를 해도 목소리가 듣는 사람을 영 약 올리지 못한다. 무뚝뚝한 목소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충실하고 신의 깊은 기사의 서약처럼 들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런 면도 사랑스럽지. 바란은 두 눈을 둔하게 깜빡였다. 저 입술로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악!”

니카가 군홧발로 바란의 가슴팍을 힘주어 밟았다. 바르작대던 움직임이 일시에 멎었다.

“흐윽, 윽. 하하. 아하하.”

“왜 웃지.”

“이유를 말하면 갈빗대 하나로는 안 끝날 텐데.”

이 대답이 얄미웠는지 니카의 표정이 뾰로통해졌다. 이번에는 옆구리를 거세게 걷어차였다.

* * *

“바란, 제가 이겼습니다.”

바란은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니카의 검이 목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검 끝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눈빛 역시도 평온했다. 바란이 익히 알고 있는 왕녀의 기사일 적 모습 그대로였다. 차가운 두려움이 맥박을 타고 집채만큼 커졌다.

‘검을 매개로 해서 기억을 되찾기라도 한 건 아닐까….’

“중간부터 움직임이 둔해졌습니다. 저에게 집중하지 않으셨군요.”

니카가 불평하며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끝을 흐리는 어눌한 말투는 그가 아직 열여덟의 니카라는 증거였다. 바란은 비겁한 안도를 느끼며 간신히 부스러기 같은 웃음을 입에 물었다.

대련 중에 한눈을 팔다니 새파란 어린애도 하지 않을 실수였다. 물론 한눈을 팔았건 집중을 했건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졌어! 졌다. 도무지 못 당하겠네. 기억을 잃었으니 검 솜씨도 열여덟 꼬맹이나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임기응변을 잘 해?”

“글쎄요.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니카는 검에 관해 이야기하자 평소보다 수다스러워졌다.

“하지만 당신이 마지막에 내 어깨를 짚었을 때는 무척 당황해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기사인 나였다면 그런 바보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요. 당신 말마따나….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소감은 어때?”

니카는 검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볼에 장밋빛 생기가 돌았다.

“즐겁습니다.”

“천생 검사로군.”

바란은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이렇게 하자. 매일 이 시간에 너와 대련해줄게. 그러면 좀이 쑤시는 일도 없지 않겠어?”

니카는 망설였다. 잠깐 검을 휘두른 것만으로 처음 겪는 환희가 온몸을 이루는 알갱이에 가득 들어찬 느낌이 들었다. 매일 같이 이렇게 검을 잡을 수 있다면 꽤 행복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바란의 바쁜 일과에 대련까지 더하게 된다면 그는 말 그대로 과로로 앓아누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만으로 한순간에 내 무책임한 면이 상쇄되지는 않겠지만…. 노력할 거야. 약속해.”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습니까.”

“그럼. 네가 처음으로 해준 불평인데.”

“딱히 불평이었던 건….”

니카는 말을 흐렸다.

“이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무척 바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괜한 소리를 한번 해본 겁니다.”

“아니. 무척 기뻤어, 그런 말 해줘서. 날 마음속에 받아들였다는 거니까. 아니야?”

니카가 푹 수그린 고개를 들었다. 바란은 니카를 물끄러미 바라볼 적에 으레 그렇듯이 배실 배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둘은 이만 검을 거치대에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가 뜨끈한 거품목욕을 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잠옷을 입고 서재에서 모이기로 작당했는데, 평소 레이먼드가 침실을 두고 서재에서 자는 심리가 뭐냐며 호통을 쳐댔으므로 이번에도 비밀 통로를 통해 이동해야 했다. 니카는 그 지저분한 곳을 지나려면 거품목욕이 다 무슨 소용이겠냐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있잖아, 이 말 하면 또 놀라서 달아날 것 같긴 한데.”

고요한 밤공기 속에서 니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닐던 중이었다. 바란이 속삭였다.

“무슨 말 말입니까?”

“나 지금 키스하고 싶거든. 아주 많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 잘 확인할 수 없지만 니카의 창백한 얼굴이 불붙은 듯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속이 묵직하고 행복감이 가득 섞인 전율이 올랐다. 바란은 갑자기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짐짓 심각한 체 말했다.

“아무래도 못 참겠는데. 니카, 입 맞추게 해줘.”

“…지금 말입니까?”

“응. 안 돼?”

니카는 골치가 아픈 듯 옅은 앓는 소리를 냈다. 어쨌건 니카가 놀라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 바란은 어차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니카가 난처할 때까지 밀어붙여서 곤란해하는 모습을 한껏 즐기는 게 목표였을 뿐이다. 곤혹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눈과 경직된 어깨는 무척 귀여웠으니까.

그런데 바란이 예상치 못한 바가 있다면, 그건 예와 달리 니카의 예민하고 강퍅한 면이 많이 가라앉았다는 점이었다. 바란이 하는 말들을 죄다 꼬아 듣던 사춘기 소년 같은 니카는 바란의 관심 속에 시간을 보내면서 차분하고 또 강건해졌다. 바란에게 제 불만을 또박또박 얘기하던 모습만 봐도 알 만한 일이었다.

“그러면, 가만히 계십시오.”

그러니 바란이 니카의 말과, 또 이다음에 이어진 행동의 맥락을 곧장 따라가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니카가 제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뺨을 감싼 거친 손가락과, 입술에 닿은 보드라운 감촉이 재빨리 떨어져 나간 다음이었다.

* * *

어떤 이민족 신화를 다룬 책에서 읽은 바로는 입술이 영혼의 출입구라고 했다.

니카는 멍하니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 말에 따르면 니카는 바란에게 입술을 맞대는 순간 영혼을 빼앗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지고 심장이 무진장 두근거렸다. 마땅히 몸 안에 있어야 할 영혼을 빼앗겨버렸으니 몸이 열을 내고 앓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지난 밤 바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충동적인 입맞춤 뒤에는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니카는 맞닿았던 입술의 온기를 떠올릴 수록 민망한 기분이 되어 귓불을 긁적였다. 침묵 끝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바란의 얼굴이 어땠더라?

“바, 방금. 방금.”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바란이 더듬으며 입을 뗐다.

“너 나한테…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이런 꿈이라면 평생토록 꾸어도 좋은데. 아야. 꿈이 아니잖아.”

바란은 제 볼을 꼬집어보더니 얼떨떨하게 말했다. 곧 다급히 손을 뻗어 니카의 목덜미를 그러안고 애원했다.

“니카, 잠깐 정신을 빼앗겨 있느라 잘 못 느꼈어. 너무 순식간이었다고. 이건 불공평해. 그러니 한 번만 더-”

“두 번은 못 합니다.”

딱딱한 거절의 말이 나오자 울상이 되어서는 온갖 공약을 늘어놓는다. 니카가 좋아할 법한 동화책을 더 사다 들여놓아 주겠다거나, 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게 해 주겠다든가 하는 잔머리를 잘 굴린 유인책들이었다. 마지막엔 키스 한 번에 후작위를 넘겨주겠다는 터무니없는 말도 했다.

“지금 아무 말이나 하시는 겁니까?”

니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아무 말이라니. 나는 너에게, 언제나 가슴이 무너지도록 진심이야.”

바란은 제법 귀여운 탄식도 했다.

“제길!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시간을 몇 번이고 돌려서, 너에게 수백 번은 키스를 받았을 텐데.”

니카는 기실 별것도 아닌 행위에 어쩔 줄 몰라 끙끙대는 바란의 모습이 우스웠다. 우습고, 또 귀엽고. 가슴속이 간질거렸다. 이 잘난 남자를 고작 입맞춤 하나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어깨가 무거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바란 만큼이나 니카도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 

“어쩌지. 어떡하면 좋지. 이대로 온몸이 부풀어서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야. 어디에든 소문내고 싶어. 네가 내게 키스했다고 외치면서 온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싶어.”

“그런 짓은 생각도 마십시오.”

“알겠어. 알겠어, 걱정 마.”

질색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 니카를 보며 바란이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바란은 손바닥에 입술을 묻으며 눈매를 예쁘게 휘었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니카는 그 순간의 단상을 떠올렸다. 잎새에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나뒹굴고, 정원의 풀벌레 우는 소리가 은은한 가운데, 별빛 아래를 거닐며 콧노래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 놀란 숨결이 입술에 닿아 부서지던 그 느낌. 노랫가락 같은 사랑 고백. 소맷부리부터 더듬어 올라 맞잡은 미지근한 손가락.

그 마법 같은 순간, 니카는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감정의 무더기에 그만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어떤 짧은 단어가 뇌리에 떠올라 모든 감각에 이름을 박아넣었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어렴풋한 깨달음이 그를 지배했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이 엄습했다.

‘실은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지. 맨 처음부터.’

보드라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니카는 생각했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어. 그 미소, 부드러운 목소리와 지긋한 시선을.’

잠에서 깨어나, 그 아름다운 남자의 입술에서 “나의 니카.” 하는 말을 들었을 적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니카의 손이 시트를 꾹 움켜쥐었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바란을 만나기 위해 살아온 거라면 이 삶을 전부 견딜 수 있다. 무심결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태양.”

니카는 중얼거렸다.

“내 어두운 세상을 밝게, 온통 밝아지게 해….”

* * *

어미의 자궁에서 미약한 태동을 만들던 것이 니카가 가진 가장 최초의 기억이었다. 다홍빛으로 물든 공간에서 따뜻한 양수를 휘저으며 미약한 부유물처럼 단지 표류했던 때를 떠올린다.

빠르게 성장한 그를 죽일 듯이 압박하던 산도를 타고 세상에서 첫 숨을 들이켰을 때, 얼굴도 보지 못한 어미의 손길이 그를 사납게 내치던 일, 그녀의 신경질적인 비명, 보통 산모들이 그렇듯이 그를 포근히 안는 대신 탯줄도 떼지 못한 흉물스러운 갓난이를 썩은 생선 대가리 더미 위에 올려둔 일.

‘그것의 자식이니 이대로 두어도 너는 살아남을 테지. 그렇다고 손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구나. 이것이 네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행운이 되기를.’

‘아가. 불행해라.’

그리고 그 음울한 목소리.

“헉, 허억… 하아….”

이불을 거세게 젖히며 잠에서 깨어난 니카가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콧잔등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꿈….”

누가 두려움은 대개 상상으로 이루어진다 했던가. 니카는 그의 온전한 기억만으로도 잘 구성된 악몽을 꾸기 충분했다. 기구한 인생이라는 자기연민이 떠오르려는 것을 고개를 저어 떨쳐내 버렸다.

간신히 진정해서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컴컴한 밤중이었다. 침대에 눕던 시점과 별다를 바 없이 보여서 자신이 눈을 붙인 게 한 시간은 되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도로 침대에 누웠으나 도무지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직도 가시지 않은 두려움으로 손발이 잘게 떨렸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 관한 기억을 꿈으로 다시 마주하는 날에는 잠들지를 못해 온종일 고생하곤 했다. 

꿈과 현실의 괴리감이 니카의 마음속에 불안감을 키워냈다. 어느 쪽이 꿈이었지? 둘 중에 꿈결 같은 쪽을 꼽으라면 바란과 함께 지내는 현실이 아니던가? 손끝이 달달 떨며 침대시트를 짚었다.

‘지금 바란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얼굴을 보면 금방 괜찮아질 텐데. 아니야. 너무 늦은 밤중이라 곤히 잠들어있을 게 분명하다. 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잠깐 가서 자는 얼굴을 한번 보고 나오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니카는 망설임 끝에 사그락대는 캐노피를 걷어내고 바닥에 발을 디뎠다. 밑창이 포근한 신발은 고요한 와중에 소음을 내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건너편에 있는 것이 바란의 침실이었다.

기실 두 방 사이에도 비밀스럽게 이어진 통로가 있었지만, 니카는 한번 들여다본 게 다인 그 음침한 통로에 대해 좋은 인상도 받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방향을 몰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대신에 니카는 정직하게 정면에서 문을 열고 숨어 들어갈 생각을 했다.

‘자는 얼굴만 확인하고 바로 나오자. 기척을 내지 않는 데는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데 니카가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경첩 소리 하나하나에 주의하며 이동한 것이 모두 무색하게도 바란은 방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둠이 내려 시곗바늘을 볼 수는 없지만 니카의 느낌 상으로는 새벽 두세 시쯤 된 것 같았다. 구겨진 흔적도 없이 정돈된 바란의 침대 시트를 혼란스럽게 만지작거리던 니카는 복도를 돌아다니며 바란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감각에 의존해 까무룩한 성 안을 누빈지 얼마나 지났을까, 모퉁이 너머로 희미한 불빛과 말소리가 느껴졌다. 쉰 소리로 속삭이는 음성이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바란의 목소리였다.

“건강한 말들로 준비해줘. 이번에도 달리다 말고 거품 물고 쓰러져버리면 곤란하니까.”

“젊어서 부리는 객기에도 정도가 있지요. 밤낮으로 말을 달려가면 후작님의 그 대단하신 몸이 남아날 것 같습니까?”

“잔소리는.”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말을 구해달라니, 어딘가로 떠나겠다는 뜻인가?’

니카는 벽에 바짝 기대어 레이먼드의 빈정대는 소리와 바란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엿들었다. 한동안 펜촉이 종이를 긁어대는 소리가 나더니 바란이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레이먼드의 또 다른 핀잔이 즉시 날아들었다.

“전해 듣기로는 대련을 하셨다고요. 용인을 데리고.”

“그 용인이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할 수 없나?”

“예, 그럴 수는 없겠습니다. 후작님께서 요즘 자꾸만 총기를 잃은 듯이 행동하시니, 당신을 일깨워드리기 위해서라도 저만큼은 그 치와 간격을 유지해야지요.”

레이먼드가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대체 그 기억도 없는 열여덟 살짜리 데려다 놓고 하는 사랑놀음은 언제까지 하실 작정입니까? 이게 무슨 어린애들이 하는 소꿉놀이도 아닌데요.”

니카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저 용인이라 함은 자신을 칭하는 것이 틀림없으므로 이 대화도 전부 니카 자신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대화의 맥락을 전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사랑놀음, 소꿉놀이라는 건 다 뭐지?’

아직 꿈을 연달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 무례한 말에 득달같이 호통을 쳐야 마땅한 바란 탈타미오가 건조한 웃음소리만 내고 있을 리 없으니까. 바란이 거듭 말해왔던 대로 절실히 니카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저런 말에는 모욕감을 느껴야 정상일 텐데. 니카는 생각했다.

바란이 건조한 투로 다시 한 번 입을 연 순간,

“곧 끝내야겠지.”

의문부호로 가득 차 있던 니카의 마음이 아득히 추락하며 온통 검게 물들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가슴 우리 안에서 힘차게 뛰던 근육 덩어리가 아래로,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리고, 무거운 방망이가 뱃가죽을 마구 때리는 듯한 감각이 오랫동안 그를 지배했다.

배반당했다는 감정은 니카에게 무척 낯선 것이었다. 배반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적이 없는 니카에게는 순전히 사치스러운 상실로만 보여지던 단어였다. 가진 것이 없었던 만큼이나 니카는 다른 누구에게 어떤 감정적인 보상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바보 같으니. 미련하고 미련하다.’

그런데 왜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믿어버렸을까? 왕자님 같은 사람이 토룡의 혼혈에게 다가와서 너는 특별하다느니 사랑한다느니 쏟아내는 명백한 기만을 언제부터 가슴에 담아왔을까? 왜 이 모든 것을 유추했으면서도 가시를 세우는 일을 게을리했단 말인가?

집채만 한 아가씨를 사랑한 왕자 같은 게 현실에 존재하리라고 사실은 믿고 싶었던 것일까? 이리도 흉측하게 태어나서는 제 주제를 모른 채 감히,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 모든 대화가 악몽의 연장이었는지도 몰라. 괜한 조바심에 꿈을 꾼 거지. 지금도 봐, 바란이 얼마나 말갛게 웃는지 한번 보라고. 어떻게 거짓으로 저 얼굴을 꾸며낼 수 있겠어?’

“표정이 안 좋아. 니카.”

바란이 상냥하게 물으며 니카의 어깨를 도닥였다.

“…….”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그것 봐. 그가 나를 기만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파란 눈이 걱정스레 니카를 올려다보는 때에는 마음속에 의기양양한 기세가 돌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란. 오늘은 일이 바쁘지 않습니까? 줄곧 내 곁에 붙어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니카는 황급히 말을 돌렸으나 불안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저번처럼 속상한 게 있다면 내게 곧장 알려줘야 해.”

명백히 둘러대는 니카의 말에 걱정으로 콧잔등을 찌푸리면서, 바란은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레이먼드에게 부탁해서 오후 일정을 다 비워두도록 했거든. 일도 간밤에 앞당겨 처리해버렸고…. 저녁때까지는 너랑 있고 싶어서.”

바란은 니카가 일생토록 만나온 사람들의 어떤 유형에도 포함시킬 수 없는 이였다. 니카를 멸시하지도, 이용하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에게 무관심한 부류도 아니었다. 게다가 어제 검을 맞대고 또 가볍게 입을 맞췄을 때, 니카는 둘 사이에 무언가가 이어져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운명이나 그 밖의 온갖 허울 좋은 말들로 치장할 수 있는 무언가가.

그러니까 바란이 조금만 더 그에게 확신을 준다면, 지난밤의 일은 그대로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란의 말에 니카가 저답지 않은 꼬투리를 잡아 응석을 부리려 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안전한지 수없이 찔러보고 나서야 몸을 뉠 자리를 고르는 야생동물처럼, 니카는 다소 편집증적인 어투로 캐물었다.

“그렇다면 저녁때 이후에는요? 그 이후에는 저를 혼자 두실 겁니까?”

말을 뱉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니카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투정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렸을 것이다. 어쩌면 이 한마디에 바란이 자신에게 질려버렸는지도 모른다. 다 큰 사내의 어리광을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하얗게 굳어버린 낯을 본 바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무언가 달갑잖게 꺼내놓아야 할 말이 떠오른 듯, 바란의 손가락이 꿈틀대고 눈꺼풀이 부산스럽게 펄럭거린다. 그리고 나서는 한숨. 니카가 원치 않았던 무거운 한숨이 바란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자그마한 틈으로 기다랗게 흘러나왔다. 니카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미안해.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니카의 모든 기대와 합리화를 깨부수며 바란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실은 다녀올 곳이 있어. 여기서는 꽤 거리가 있는 곳이야. 너를 혼자 두고 떠나기가 마음에 걸려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결국 오늘 저녁에 급하게 출발해야 시간에 맞출 수 있을 지경이 됐거든.”

“…….”

“네 말대로, 오늘 저녁 이후로는 같이 있을 수가 없어. 하지만 보름이면 다시 돌아올 거야.”

“보름.”

“약속할게.”

무겁게 입술이 닫혔다. 니카는 안절부절못하는 바란을 배려하기엔, 전에 없던 불안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간밤에 엿들었던 대화에서 내비치던 떠나려던 기색이 결국은 사실이었다. 니카를 사랑한다고 매일 같이 속삭여서 순하게 길들여놓고 정작 니카는 모르는 곳으로 말을 달려 떠나려는 거다.

‘그러면, 그 말. 사랑놀음을 곧 끝내겠다던 그 말도, 전부 진심이었나.’

머리가 아찔하다. 뺨을 호되게 얻어맞거나 발길질을 당한 것보다 더욱 아프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들끓었다. 저 순진한 눈망울로 여태 자신을 거짓으로 사랑한다 속삭여왔다고 생각하면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고 진저리가 난다. 니카는 망연히 바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보름 동안 줄곧 밤입니다.”

“니카.”

“너무 어두워서 고개를 들거나 소리치지도 못하겠지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숨을 죽이고, 또 무릎에 얼굴을 묻을 겁니다. 무력했던 그 모습 그대로. 당신은 나를 좌지우지해요. 나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사실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가지 마십시오. 니카는 갈라진 목소리를 벌벌 떨면서 문장을 맺었다. 그리고 바란의 철회를 기대하듯이 지긋한 눈길을 주었다.

물론 진득한 감정의 깊이가 느껴지는 이런 말은 바란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기 충분했다. 그러나 곤혹스럽고 사랑에 빠진 얼뜨기 같은 표정을 번갈아 짓던 바란은, 끝내 니카의 곁에 남아있겠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그 딴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괜히 입 밖에 내지 않으려는 심산이었겠지만 니카는 ‘그러면 그렇지.’하고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를 멍청한 늑대로 만들었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어.”

바란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무슨 추궁을 쏟아내기도 전에 니카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귀를 단단히 막아버렸다. 저 차가운 눈빛은 바란에게 줄곧 증오를 보내오던 니카 경과 닮아 있었다. 바란은 손을 뻗었다. 그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다가, 결국 니카가 설핏 상처받은 기색으로 자리를 뜨기까지 그 눈빛에 압도되어 못 박은 듯 서 있어야 했다.

‘기억이 돌아온 걸까? 아니야. 그랬다면 나에게 실망했을 게 아니라 나를 죽이려 들었겠지.’

이런 와중에도 그의 기억이 돌아왔을까 하는 염려가 가장 먼저 고개를 드는 자신에게 바란은 신물이 났다. 안장의 매듭을 살피던 바란은 니카의 방이 있는 성의 서쪽 탑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니카는 저 안에 틀어박혀 있을 것이다. 웅크리고 있을 모습을 생각하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말이 제자리에서 발굽을 번갈아 디뎌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니카도 이 투레질 소리를 듣고 있을까? 바란이 그를 달랠 새도 없이 이제 곧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바란은 주저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레이먼드, 나 아무래도 니카를 잠깐 만나서….”

“그 치의 얼굴을 보고 당신이 무슨 말을 꺼내어 달래든 상처만 더 벌려놓을 텐데요. 또, 그를 보는 순간에 기껏 여장 꾸려놓은 것을 다 집어치우실지도 모르고요.”

“으음.”

레이먼드의 지적은 능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바란은 반박할 여지가 없어 민망한 침음을 냈다.

니카는 바란에게 가지 말라고 애걸하기까지 했다. 니카답지 않은 태도였다. 언제나 모든 요구와 자아를 죽이고 그늘진 데 숨어 남들 비위를 먼저 생각하는 열여덟의 니카는 이런 식의 어리광을 좀처럼 부리지 않았다. 바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도 대공의 연회고 뭐고 다 젖혀두고 성문을 닫은 채 둘이서만 오손도손 지내고 싶었다. 바란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그것 외에 또 뭐가 있을까? 하지만 이 비밀스러운 나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가 최근 두문불출하는 것에 대한 대공의 의심을 피해야 했고, 그 때문에 이번 방문을 필히 감수해야 했다.

대공의 시선을 사지 않도록. 바란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니카는 돌아와서 달래줄 수 있다.

‘오는 길에 좋아할 만한 선물을 잔뜩 안고 오자. 그러면 마음이 상한 것을 어느 정도 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실 바에야 당장이라도 출발해서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시면 어떻습니까?”

“그래. 그래야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능숙하게 말에 올라탄 바란은 공중에 손을 뻗었다.

“바람이 눅눅하군. 비가 오려나.”

“요즘 가을치고 한창 더웠던 것이 비구름 올리느라고 그랬나 봅니다.”

“날씨가 가물다가도 한번에 몰아쳐서 못살게 구는군.”

바란이 혀를 찼다.

“나라 꼴이 난장판이니 하늘도 노하신 건지.”

그렇게 말하고 나니 그게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언제쯤 이 피바람이 끝이 날는지, 또, 모든 것이 정리가 되고 난 다음에도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남아있을지, 바란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면 니카를 잘 부탁해.”

바란은 집사가 아닌 오래토록 알아온 친인 레이먼드에게 그의 연인을 부탁했다. 레이먼드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경질이나 죽겠지만 후작님 부탁이니 어쩔 수 없이 잘 섬기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말 한 필은 아직인가?”

마음이 급해진 바란이 태양의 고도를 어림하며 레이먼드에게 물었다. 작정하고 말을 달릴 각오였기 때문에 말을 하나만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나머지를 기다리느라 발이 묶인 참이었다.

“빈스가 끌고 오는 중입니다. 좀 늦는군요.”

“빈스라고?”

“마구간지기네 아들 말입니다.”

“걔가 몇 살이나 됐는데, 벌써 말을 끌지?”

의아해하는 바란의 이 말에 레이먼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열다섯이 되었습니다. 또 그 애가 코 흘리고 다니던 어린 시절이나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사람들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후작님. 모두들 생각한 것보다 금방 자라난다는 말입니다.”

바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이먼드의 아니꼬운 저 말이 실은 누굴 겨냥하는지 능히 알아차릴 수 있는 까닭이었다. 저 말 뒤에 ‘후작님 빼고는 다 그렇다고요.’하고 덧붙이려다 말았을 것이다.

멋쩍은 기분에 머리칼을 뒤적이다가, 저만치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아이를 보고 팔을 내렸다.

“후작님! 후작님!”

성안에 이리 앳된 아이는 얼마 없었다. 옷에 지푸라기가 묻고 말똥 냄새가 밴 것으로 보아 이 아이가 빈스일 것이다.

“도둑맞았습니다. 말을 도둑맞았어요.”

“뭐라고?”

레이먼드가 앞으로 나서 아이를 다그쳤다. 기세가 흉흉한 것이 적잖이 울화가 치민 듯했다.

“자세히 설명해봐.”

레이먼드의 매서운 눈매가 아이를 겁줄까 염려하여 바란이 나섰다. 레이먼드에게 눈짓하자 그는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바란의 귓전에 매달려 그 비싼 말을 경매가로 얼마를 주고 들여온 지 아시냐며 속살거렸다. 아랫것들 눈치를 보느라 바란에게 대놓고 신경질 부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 눈치다.

“마구간에 갔더니만 문이 아주 활짝 열려있더라고요. 부리나케 들어갔는데 그 애가 흔적없이 사라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집사님이 들여오신 그 비싼 혈통마 말이에요! 말뚝에 묶어두었던 고삐는 날카로운 것으로 잘려 끊어져 있었고…. 아버지가 안장을 얹고 채비를 다 해두었으니, 누군가 그대로 타고 사라진 게 틀림없어요.”

성안에 침입자가 숨어들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진단 말인가? 바란은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이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시녀 하나가 레이먼드의 귀에다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두 사람 다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아하니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고삐를 꼭 붙잡은 바란이 긴박한 시선을 교환하는 두 고용인들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잠시 망설이던 레이먼드가 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입을 뗐다.

“후작님. 니카 경이….”

* * *

바란은 주변 경관이 속도감에 빗발쳐 뒤로 밀려 사라지는 것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피며 고삐를 당겼다. 이내 기다란 투레질 소리를 내며 말이 앞발을 공중으로 굴렀다 가까스레 멈추어 섰다. 말은 흥분한 콧김을 쏟아냈다. 바란은 당장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자괴감에 시달렸다. 마음이 온통 조각이 나서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니카 경이 사라졌답니다. 같은 시점에 말을 도둑맞았다는 건 아무래도….’

이건 다 그의 책임이었다. 니카가 그에게 감정을 내보여주었다고 금방 자만했다. 성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금은보화와 같은 당연한 자산처럼 취급했다. 연인 놀이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자신이 정말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됐던 것이다. 

“멀리 가지 못했을 거야. 성문은 닫으라고 지시했고, 열여덟의 니카는 말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를 테니까. 이 주변을 찾아보면…. 아니야. 그는 검도 능숙히 다뤘지. 기마술 역시도 몸이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바란은 성문 앞에서 서성이며 파랗게 질린 안색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를 찾아내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돌아와달라고 애원을 해? 아니면 강제로 붙잡기라도 할 건가? 무슨 권리로.’

영지 내에 저마다 촌락을 이루고 사는 주민들은 잔악후작의 행차에 다들 화들짝 놀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어리둥절해서 창밖을 기웃거렸다. 그 악명높은 영주가 단신으로 말을 달려와 돌연 망연히 서 있는 이유가 뭘까? 탈타미오의 서쪽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 역시도 오래간만에 영주성 바깥으로 나온 그들의 주인을 알아보고 앞에 다가와 부복하며 성문을 열어야 할지 물었다.

바란은 잠깐의 침묵 끝에 그러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빠져나간 자가 있냐고 물으니 기사들이 그의 눈치를 보며 본래 이맘때 성 안팎으로 왕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다. 다만 눈에 띄던 것은 명마를 탄 남자 하나가 상인들 무리 드나드는 틈에 섞여 있더니만 성문을 지나고 즉시 앞질러 나가더라는 것이다.

그 남자란 니카일 게 틀림없었다. 인상착의를 캐물으니 더욱 확신이 섰다. 성 안으로 들이는 것에 비해 나가는 것은 검문이 시원찮으니 붐비는 틈을 타 함께 빠져나가면 되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바란은 입술을 깨물며 농경지를 가로질러 관문 밖으로 무작정 말을 달렸다. 건조한 풍압에 볼이 온통 발갛게 텄다.

‘언젠가 이 관계에 끝이 찾아오는 상상을 아주 많이 했지.’

바란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어.’

* * *

정처 없이 한 방향으로만 말을 달리던 도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내리는 비였다. 새카만 구름들이 밀려든 꼴이 어지간한 비로는 끝나지 않을 듯했다. 눅눅한 데다 돌연 기온이 뚝 떨어져 드러난 맨 살갗이 시렸다. 니카는 뺨의 비늘이 바짝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흥분으로 맥이 거칠게 뛰는 말의 목덜미를 투박한 손으로 도닥여 진정시켰다.

“얼마 달리지 않았는데, 금방 멀어졌군.”

뒤를 돌아보니 한동안 그를 둘러싼 거대한 세상 같았던 탈타미오 성이 엄지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우습지만 마음 한 켠이 무척 쓰기도 했다.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저 장소에 오래토록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니카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곧 끝내야겠지.’ 

어디선가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카가 사랑해 마지않는다고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과연 그 짧은 환청조차도 마음을 단번에 일렁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나. 끊어내야지 하면 단번에 끊어버릴 수 있는 마음이었나.’

돌연 손발에 무기력증이 돌았다. 바란의 건조한 음성이 가슴을 여러 갈래로 찢고도 계속 귀청에 울렸다. 니카는 갈 곳 잃은 아이처럼 주변을 어지럽게 둘러보았다. 여름이 지나 땅거미 지는 시간이 빨라졌으므로 사위는 이미 어두웠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메마른 땅 위에 빗방울이 점점이 자국을 남기며 떨어져 내렸다. 안장 위를 꼭 붙들고 있는 니카의 단단한 넓적다리에도 빗물이 흠뻑 내렸다. 바란이 손수 지시하여 준비했다던 옷가지가 엉망이 되어가는 모습은 니카를 묘한 감상 가운데 젖어 있게 만들었다.

이윽고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온몸을 흠뻑 적셨다. 뺨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니카의 눈동자는 아주 어둡게 침잠되었다.

‘어디로. 누구에게로.’

니카는 망연한 머리로 생각했다. 머무를 곳을 잃은 박탈감이 가슴을 불현듯 떨게 만들었다. 니카는 스스로에게 오한이 들어 그렇다는 변명을 주워섬겼다. 결단코 어떤 상실감 때문이 아니라는 자기최면의 연속이었다.

그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능숙하게 고삐를 붙잡았다. 말은 니카가 원하는 대로 굳건한 다리를 움직여 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이 젖은 흙을 내치는 소리가 둔탁하게 퍼졌다.

세상 모든 것은 어느 정도 힘을 소모하고 나면 소강상태에 접어들기 마련이건만 퍼붓는 빗줄기에는 그런 면이 아예 없었다. 니카는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퍼붓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멈춰 세웠다.

사람 손이 닿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난 수풀 저편에 비를 피할 만한 동굴이 있었다. 뛰어난 시력으로 용케 그 입구를 발견해낸 니카는 그곳에서 밤을 보낼 생각을 했다. 아니면 비가 잦아들 때까지만이라도 좋았다. 한 방울마다 살갗을 얻어맞는 것처럼 아픈 굵은 비를 뚫고 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동굴은 입구가 커다랗게 뚫려 있는 것이 단점이었지만 안쪽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다. 그래도 덕분에 말을 끌고 들어올 수 있었다. 짐승의 냄새가 나지 않는지 샅샅이 뒤지려던 중에 동굴 한구석에 놓인 상자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부싯깃이나 종이에 싼 건량, 곰팡내가 나는 옷가지 등이 놓여있었다. 사냥꾼 무리가 종종 사용하던 흔적일 것이다.

니카는 마른 부싯깃에 대고 불을 붙이려고 한참 시도했다. 이런 방법을 니카는 마치 오랫동안 해 왔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떠날 채비를 갖춰놓았던 말은 옆구리에 야영을 도울 만한 간단한 물품을 담은 주머니를 차고 있었는데, 그 안에 편자 모양으로 다듬어진 부시와 부싯돌이 들어 있었다.

눅눅한 와중이라 수 시간을 소요했지만 끈기 있게 부딪은 끝에 매캐한 연기를 내는 데 성공했다. 이윽고 부싯깃 속에서 빨간색 조명이 점차 올라와 불길을 만들어냈다. 붉은 조명이 고요한 동굴 안에 감돌기 시작하자 겁 많은 말이 놀라서 길게 울었다.

젖은 옷가지를 벗어서 비틀어 짰다. 보드라운 직물은 착용감이야 좋았지만 거센 손길에는 살아남을 방도가 없었는지 금방 구겨져 버렸다. 불가에 널어두고 몸을 말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바란 생각을 했다. 왜 일이 이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쉴 새 없이 떠올렸다.

그러다가 그냥 자신이 내색하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자신을 원망하기 시작하니 막을 수가 없었다.

‘바란을 추궁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그저 말갛게 웃으면서 있었더라면, 그러면 머물 자리가 사라지지는 않았을 텐데. 바란은 여전히 예쁜 얼굴로 사랑한다고 속삭여줬을 것이고, 이 혐오스런 입술에도 키스해줬을 것이다. 울퉁불퉁 못난 손을 만지며 특별하다고 해줬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그것이 거짓말인들 뭐 어떤가. 세상에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다. 온전히 거짓으로 이루어진 말들이라도 니카를 살아가게 해 준다면 그것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런 거짓말이라도 선사해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바란 탈타미오 단 한 사람밖에는 없다. 사랑받기에는 니카의 모든 것이 너무도 역겹고 혐오스러운 탓이다.

‘분해, 너무 분하고.’

니카는 가쁜 숨을 쉬었다.

‘가슴인지 뱃속인지가 묵직하게 아파. 내가 지금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것일까? 머리가 아찔하고 온몸이 차가워.’

형편없이 젖은 몸을 말리는 동안 감정에 북받친 머리가 차차 식으며 두려움이 엄습했다. 니카는 온전히 혼자였다.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지만, 바란과 지내는 동안 고독에 대한 면역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한 번 맛보았던 것에 대한 박탈감이 마음을 옥죄는 듯했다. 무작정 도망쳐버린 일이 후회되었다. 만일 자신이 바란에게 한마디라도 물어보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하찮은 조바심과 오해가 끼어들어 판단을 흐린 것은 아닌가? 곱씹을수록 화살은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지금쯤 떠났겠지. 급한 일인 것 같았으니까, 나 같은 거 하나에 아랑곳할 시간은 없었을 거야. 돌아간다고 해도 바란이 말한 대로 정말 보름이나 지나고 나서 그를 볼 수 있겠지.’

니카는 젖은 갈기를 터는 늘씬한 말을 올려다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명마다.

‘하지만 말을 훔쳤어. 돌아갈 수 있을 리 없다. 바란은 이미 내게 신물이 났을 것이다. 그냥 용인이라면 몰라도, 오만한 데다 도둑질을 일삼는 용인은 그로서도 견디기 힘들 테니까.’

얼굴에 묻은 물기가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동굴 천장에서 비가 내리고 있을 리는 없는데 웬 유난 없는 물방울인가 싶다. 니카는 얼굴을 손끝으로 더듬다가 자신의 뺨을 구르는 눈물 줄기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선잠에 들었던 것 같다. 이상한 꿈을 꿨다. 니카는 흙먼지가 뒹구는 전장 가운데에서 등 뒤에 붉은 머리칼의 여인을 보호하며 서 있었다. 지금의 니카는 그때의 감정이나 맥락 같은 것은 추호도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아주 필사적이었다는 사실은 이해했다.

“그렇게 소중해.”

맞은편에 우뚝 선 남자가 니카에게 말했다.

“그렇게나?”

‘누구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도 니카가 그를 별달리 중요한 인물이라 여긴 적 없기 때문일 것이다. 먼지구름 사이로 드리운 남자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니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팔꿈치를 꼭 붙드는 압력에 돌아보니 아름다운 여인이 긴장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니카는 덩달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남자의 건조한 웃음이 바람 소리와 함께 니카의 귓전에 맴돌았다. 다시 살펴보니 남자는 날이 시퍼렇게 선 검을 들고 있었다. 그 검 끝은 니카와 여인을 겨누고 있었으니 남자는 니카를 포위한 기사들과 한 패로, 그의 적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니카는 남자의 사나운 검날에서 아무런 적의도 읽을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곧 검 끝을 바닥으로 떨구어버렸다. 예의 그 바싹 마른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도 참 지독하구나.”

그리고 그는 칼끝을 돌려 니카가 아닌 주변의 기사들을 차례로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니카는 희미한 영상들 속에서 번쩍 눈을 떴다. 머리는 꿈결에 젖어 아직 몽롱했다. 공허한 남자의 목소리나 간절한 여인의 눈길로 머릿속이 꽉 찼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거짓말처럼 다 흩어져 사라졌다. 소리에 민감한 말이 놀라 귀를 쫑긋대며 푸르릉 입술을 떨었다.

발간 모닥불이 미치지 않는 바깥은 아주 어두컴컴했고 아직도 빗줄기 소리가 우렁찼다. 니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밖을 내다보았다. 들개들이 짖는 소리가 났다. 들개가 아니라면 늑대일 수도 있다. 

어쨌든 떼로 몰려다니며 여행객들을 습격하고는 하는 악질적인 짐승들이 이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니카가 피운 불길이 주목을 끌었을까? 조금 더 집중해보니 인기척이 함께 들렸다. 금속성과 거친 숨소리, 발자국소리 같은 것이었다. 

저 개떼들이 니카를 노리고 다가와 짖어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불행한 여행자 하나를 물고 늘어지느라고 이리도 소란스럽게 짖는 것이다. 도와주려고 나서기에 니카는 수중에 무기랄 것이 없어 망설여졌다.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조심스레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입구가 넓은 탓에 밖으로 새어나간 모닥불 빛이 희미하게나마 상황을 비추어주었다.

비척이는 걸음으로 굶주린 들개들을 상대하는 여행객은 젖어서 볼품없이 들러붙은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눈에 익은 붉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능숙하게 검을 휘두르는 늘씬한 팔뚝이나 걸음걸이는 모두 눈에 익었다.

“바란.”

니카는 중얼거렸다. 입술이 파르르 떨었다. 지면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보다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저만치서 들짐승들을 떨구어내던 바란은 단번에 니카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나의 니카.”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바란의 입술이 꼭 그런 모양으로 움직인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짐승의 본능으로 바란의 주의력이 흐트러진 것을 눈치챈 들개들이 커다란 몸뚱이를 맹렬히 던져 바란을 덮쳤다. 

송곳니에 어깻죽지를 꿰뚫린 바란이 내는 고통에 찬 신음과 들개들이 사납게 짖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고, 이윽고 선명한 피 냄새가 사방을 가득 채운 물비린내 틈에 섞여들었다. 진흙탕 속에 어지러이 젖어 드는 빨간 머리칼을 보면서 니카는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짓말.’

머리가 아찔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니카는 이미 차갑게 식은 바란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고 있는 참이었다. 시원한 빗소리가 의식의 틈을 헤집고 들어와 귓전을 때렸다. 애써 불을 피워 말려둔 니카의 맨몸은 이미 흠뻑 젖어 든 채였다. 암만 팔을 잡아당겨도 바란이 몸을 잘 가누지 못하자 니카는 커다란 손을 등에 받친 후 끌어안다시피 해서 일으켜 세웠다. 

남 속도 모르고 바란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니카에게 무너지듯 안겨들었다. 빨간 머리칼이 창백한 피부에 볼품없이 들러붙어 바란의 파란 시선을 조금 가렸다. 사위가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벅찬 감정 사이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니카의 얼굴을 바란은 볼 수 없을 테니까.

들개들은 니카가 바란을 감싸고 선 이후부터 기가 죽어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말고 하나둘 꽁무니를 뺐다. 개중에 바란의 피 냄새를 맡고 유독 흥분한 수 마리는 그들의 주변에서 맴을 돌며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으나 끝내 무리를 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위협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이 들개들이 지레 겁을 먹고 사라지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 기묘한 일에 신경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바란의 상처를 살피는 것이 급선무였다. 자세히 보니 다행히 상처 자체는 급소를 비껴갔으나, 어깨에 선명한 이빨 자국은 좀 과장해서 관통상이라 이름 붙여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깊었다.

니카는 벗어 둔 셔츠의 아랫단을 물어뜯어 틈새를 만들어낸 뒤 힘을 주어 길게 찢었다. 깨끗한 헝겊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직 덜 마르기는 했어도 이것이 최선이었다. 그걸로 바란의 상처부위를 압박해 동여맸다. 소독을 할 수단이 없어 무엇보다 감염이 걱정이었다. 짐승에게 물렸을 때, 운이 나쁘면 살이 썩어들어가거나 광증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기절하듯 잠든 바란의 젖은 몸은 얼마 안 가 열로 들끓기 시작했다. 비를 너무 많이 맞아 체온이 떨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물린 상처 때문에 앓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니카는 끔찍한 무력감을 견뎌내며 바란의 옆자리를 지켰다.

화가 났다. 그 화를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걱정으로 가슴이 조마조마 안달 나는 게 분하기도 했다. 왜 들개가 나타나서는. 왜 자신을 찾으러 쫓아와서. 왜….

니카는 원망의 인과를 타고 올라가다가, 결국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를 쫓아 먼 길을 달려오지 않았더라면 변을 당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멈출 기미가 없는 폭풍우 속에서 은은한 천둥소리마저 섞여 들릴 무렵이었다. 가늘게 떨던 바란의 눈꺼풀이 팔랑이며 뜨였다. 니카는 기나긴 날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이 여태껏 들뜬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마냥 상처 주려고 안달이 나서 뱉는 모난 말은 아니었다. 니카는 진심으로, 바란이 그가 도망을 치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 망연자실한 얼굴을 보고 바란이 대답없이 눈을 깜빡였다. 아직 열이 다 내리지 않아 바란의 두 뺨은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지러워.”

바란이 비몽사몽 간에 투정을 부리며 맥을 끊었다.

“나의 니카.”

니카는 조용히 손을 뻗어 바란의 머리칼을 쓸어내고 잘 생긴 이마의 온도를 가늠했다. 불덩이 같던 수 시간 전보다야 분명 호전되었지만 여전히 정상 체온보다는 뜨거웠다. 니카의 커다란 손이 이마의 열을 재는 동안 얌전한 소년처럼 가만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바란은 거센 바람이 동굴을 울림통 삼아 내는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는 웃통을 벗은 채 자신을 줄곧 간호하고 있던 니카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몸을 조금 움직였다고 즉시 어깨에서 올라오는 불같은 고통에 신음소리가 먼저 났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무척 아프지만.”

반사적으로 대답한 바란은 길게 찢은 천으로 응급처치가 된 자신의 어깨를 매만졌다.

“견딜 만한 정도야. 다 네가 한 거야?”

니카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 말에도 마찬가지로 별다른 대답 없이 아주 느릿하게,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열이 다 내리지 않았던데요. 누워서 좀 더 쉬십시오. 지금 당장 이 비를 뚫고 탈타미오 성으로 돌아가시는 건 무리일 겁니다. 제가 타고 온 말을 돌려드릴 테니, 여기서 밤을 보내고 날씨가 갠 후에 출발하시는 게 낫겠습니다.”

“니카. 왜 나를 바로 보지 않지?”

니카는 이만 대화를 피하고 싶은 눈치였다.

바란은 그의 이목을 끌기 위해 다소 비열한 술수를 썼다. 들개에게 물린 상처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이 수는 놀라울 정도로 먹혀들었다. 너무 대단한 효과를 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상처를 감싼 바란의 손등 위로 굳은살이 잔뜩 박인 니카의 손이 내려앉았다.

“바란. 바란, 괜찮습니까? 많이 아픈가요?”

슬쩍 고개를 드니 파리하게 질린 얼굴의 니카가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 상처를 압박하고 있었다. 목덜미와 어깻죽지 사이를 투박하게 지압하는 손은 무척 커다랗고 차가웠다. 바란은 겹쳐진 손을 꾹 욱여잡았다.

그때서야 니카는 바란이 엄살을 부렸다고 깨달은 듯했지만 미간에 시름 깊은 주름만 잡을 뿐 나무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바란이 샐쭉 웃으며 니카의 손등에 짧은 키스를 했다.

“이제야 나를 봐주는구나.”

입술이 닿은 곳으로부터 불에 덴 듯한 열기가 일었다. 니카는 바란의 손을 뿌리치려고 손을 뒤틀었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바란이 니카의 손에다 슬며시 손깍지를 끼더니 말갛게 웃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니카는 무장이 전부 해제된 듯 힘을 쓸 수 없었다.

“만지지 마십시오.”

반항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이깟 말투정이 다였다.

“다가오지도 말고, 말을 붙이지도 마세요.”

고작 뾰족한 말 몇 마디였지만 바란을 물러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바란은 언제나 니카가 내켜 하는지, 내키지 않아 하는지를 살피곤 했으니까. 

지금도 눈치를 보다가 얌전히 놓아주려고 하는 바란을 도로 다급한 손길로 붙잡은 것은 오히려 니카 쪽이었다. 바란은 아연한 기색이었지만 굳이 니카의 모순을 지적해서 무안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만. 잠깐만 이대로 있어요.”

니카는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깊은 날숨에는 숨기지 못할 울음기가 섞여 있어서 바란은 고열에 머리가 아찔한 와중에도 어쩔 줄 몰라했다. 니카는 늘 창백하던 낯빛을 붉게 물들였다. 꾹 깨물린 입술이 몰아치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경련했다. 

애써 막아둔 둑 너머로 물살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곧이어 그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이 구르는가 싶더니, 하염없는 눈물이 소리도 내지 않고 연신 뚝뚝 떨구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두고 집사와 하던 얘기를 들었습니다.”

눈물이 너무 많이 서리는 바람에 바란의 상이 마구 일그러져 보였다. 니카는 바란을 조금이라도 더 또렷이 보고 싶어서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렇게 떨구어내도 눈물은 금방 차올랐다.

“어,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늘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소꿉놀이라든가…. 끝을 내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드디어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는 선고를 받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원래 당신이 내게 싫증을 내거나 하면 겸허히 받아들이고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처럼 잘 안 되더군요.”

암만 눈물을 닦아내도 도무지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니카는 흉하게 일그러졌을 표정이나마 가리려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이 내가 태어나서 가져 본 유일한 행복이라서 그렇습니다. 가지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버리는 일에 비할 바는 아니더군요. 이제 나는 당신이 없으면 정말로 줄곧 밤일 텐데, 그 긴 밤을 버틸 자신이 도무지 없어서.”

“…….”

“그래서 떠났습니다.”

바란은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다 이기심의 대가였다. 어린 니카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연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커다란 의미가 될지 짐작할 수 있었으면서, 당장의 갈증을 해소하기 급급해 내뱉은 거짓말의 대가. 니카가 치러서는 안 되었던 것. 바란이 고통과 자기혐오에 뒤덮여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니카가 조심스레 시선을 들었다. 고통 속에서도 버리지 못한 구제불능의 연심이 니카의 입술을 열게 했다. 여전히 울고 있는데, 입술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로. 온전히 기쁨도 슬픔도 아닌 감정의 풍파에 시달린 눈빛으로.

“나를 찾아와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였다. 지난번에 한 선택을 무마할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바란은 생각했다. 곁에 앉은 니카는 눈물을 문질러 닦으며 모닥불에 습기 먹은 땔감을 한 줌 더 집어넣었다. 불씨가 튀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바란은 잠시 불꽃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니카에게 함께 돌아가 달라고 애걸하거나, 혹은 아주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던 것처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었다. 더 나은 길이 예비 되어 있었다. 원래가 수리 왕녀의 사람이었고, 의원도 니카의 기억이 차차 돌아오게 될 거라고 말했다. 여태 바란과 지내면서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왕녀에게 돌아가게 된다면 자신에게 익숙했던 환경 속에서 빠른 회복을 보일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니카 경’으로서 살아가게 되겠지.

‘결말을 알고도 계속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바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커다란 응어리가 틀어막혀서, 수많은 생각들이 말이 되지 못한 채로 뱃속에 갇힌 듯했다. 니카의 지긋한 시선 속에는 기대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다. 그 순진한 감정은 바란이 시간을 끌수록 까맣게 타들어 갔다.

“너에게 거짓말을 많이 했어.”

적어도 바란이 여태 말해온 달콤한 거짓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은 니카가 바라던 바가 아닐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바꿀 단 하나의 거짓말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 모든 단서가 거미줄처럼 얽혀있으니 네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럴싸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지어내야 했어. 나중에 가서는 얼마나 습관적으로 했는지, 너와 보낸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 하나가 전부 거짓말이었지. 아주 사사로운 것들조차도. 예를 들어….”

바란은 말하다 말고 분위기에 맞지 않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을 잃기 전의 네가 북부식 풀뿌리 수프를 끓일 줄 알았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야. 네가 서재에서 낡아빠진 향토 요리 서적을 찾아서는, 북부에서는 아침저녁으로 먹는다는데 너도 끓일 줄 알겠느냐고 물었잖아. 내심 당황했지. 나는 네가 북부 야만인 소탕을 위해 노스월 영지에 머물렀을 때 배웠을 거라고 말했었는데, 너는 사실 북부에 간 적이 없으니까.”

“내가 북부에 간 적이 없다고요? 하지만 당신은 분명 내가 기억을 잃었던 것이-”

“두부에 가해진 충격 때문이라고 했었지. 왜, 야만인의 나무 몽둥이에 이렇게…. 얻어맞아서 기억을 잃은 거라고. 니카,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보통 너에 관해 거짓말을 많이 했지.”

살그머니 제 뺨을 어루만지려 다가오는 손을 니카는 반사적으로 뿌리쳤다. 근육으로 잘 짜인 니카의 어깨가 호흡에 따라 위아래로 들썩였다.

“너에 대한 나의 무지를 숨기려고.”

“나한테, 바란….”

니카는 말을 꺼내다 말았다. 사실 그 뒤에 뭐라고 더 말을 하기는 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울먹이는 혀뿌리가 말을 다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낭패였다. 겨우 울음을 그친 열여덟 살짜리 니카를 다시 눈물바다에 빠뜨리고 말았으니. 

바란은 다시 뿌리쳐질 것이 두려워서 눈물을 닦아주지도 못했다. 동굴 안에 바깥의 바람결이 자꾸만 밀려 들어와 모닥불이 크게 기울고 우뚝 서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니카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자꾸만 그 모습을 바꿨다. 눈앞에 앉은 것은 여태 알던 사람이기도 했고, 또 새로운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니카에게 바란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전부를 사랑해줄 수는 없겠지.’

“나한테. 나한테 한 말은 그럼 전부 다 거짓인가요? 단 한 번이라도…. 진심이었던 적은 없었단 말입니까?”

거짓과 진심은 왜 같은 말일 수 없단 말인가? 바란은 생각했다. 거짓을 말할 때조차도 언제나 진실했었는데. 니카의 연인이 되고 싶었던 마음도,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싶었던 것도 모두 진심이었다. 

바란은 바닥을 짚던 손바닥에 모난 흙먼지가 알알이 박혀 든 것을 조심스레 털어냈다.

“너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말을 타고 이 길로 서쪽으로 가는 거야. 탈타르 인근에는 대공군이 사방에 깔려있을 테니 그 이북의 도시를 경유해 다르탈루 강 상류로 우회하는 게 낫겠지.”

“…….”

“고된 길이 될 거야. 하지만 서쪽의 잣자후 성에는 네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어. 널 버리는 말 취급하고 이용만 해대는 작자들이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네가 필요해. 최선을 다해서 네 회복을 돕겠지. 모든 것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거고.”

“마음대로 결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내 옆에 남아 있으려고?”

니카가 얼굴을 굳혔다. 바란은 늘 장난기를 부릴 적에 그러던 버릇 그대로 입꼬리를 말아 올린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니카에게 얼굴을 디밀었다. 

“너의 동료도, 주군도, 네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는 너의 미래도, 다 버리고 말이야?”

니카는 엉덩이를 뒤로 물리려 했지만 동굴 벽이 뒤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럴 수 있어?”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을 잊고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바란은 돌연 현기증을 느꼈다. 사위가 어두워지며 어지럼이 몰려들자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 못해 니카의 어깨에다 머리를 그만 툭 떨구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입술이 맨 살갗에 꾹 눌렸다. 

본의 아닌 이 입맞춤에 니카는 크게 놀랐지만, 제 몸을 뒤틀다시피 떨면서도 힘없이 무너지는 바란의 허리를 다급히 안아 올려 부축했다.

“바란?”

두어 번 눈을 끔뻑인 바란은 제 코앞에 자리한 니카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 니카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색이 연한 저 입술이었다. 저번에 잠시 맞닿았을 때는 그렇게 뜨겁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마치 그게 누구였냐는 듯이 새초롬한 빛이다.

“모든 것을 돌이킬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잘 생각하고 선택해. 왜냐하면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진실은 고작 한 가지뿐이거든.”

바란은 조심스레 니카의 젖은 머리칼을 얼굴 뒤로 쓸어 넘겼다. 니카는 이번에는 바란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게 바란을 들뜨게 만들었다. 파랗고 검은 파충류의 비늘이 얼룩덜룩 돋아난 왼쪽 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란은 새가 쪼는 듯한 입맞춤을 니카의 얼굴 여기저기에 남겼다. 그럴 때마다 바란의 허리를 둘러 안은 니카의 팔에 점점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지, 그렇지?”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니카를 간절히 올려다보던 바란의 파란 시선은 금세 속눈썹에 가려 사라졌다. 사랑을 애걸하는 스스로의 행동에 진저리가 난 것이다.

“미안해. 강요하거나 동정을 구걸하려던 건 아니었어. 선택은 네 뜻대로 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렇게 한심할 데가. 보내주어야지 마음먹고서도 순간적으로 미련을 저버리지 못해 꼴사나운 소리를 해버렸다. 바란의 차가운 손끝이 니카의 가슴팍을 슬며시 밀어냈다. 

이때, 낯선 열기가 바란을 잡아먹을 듯이 덮쳐들었다. 입안을 거칠게 헤집는 불덩어리 같은 게 니카의 혀라고 깨닫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놀라서 부릅떠진 눈에 가득 잡히는 것은 흥분으로 길게 찢어진 니카의 동공뿐이었다. 뒤통수를 거칠게 붙잡고 누르던 니카의 커다란 손은 점점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귀 뒤와 목 뒤편의 예민한 피부로 자리를 옮겼다. 손끝이 들개에게 물린 상처 위를 스치자 엄습하는 고통에 바란이 크게 펄쩍였다.

“흐윽!”

“나의 바란.”

맹수의 목울음이 뒤섞인 것처럼 거칠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니카가 바란을 불렀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모든 언어가 니카의 입술에 삼켜졌다. 숨이 막혀서 입술을 비틀라치면 느릿하게 아랫입술을 빨아온다. 끈질긴 키스였다.

“그걸로 충분해.”

니카의 체온은 보통 낮은 편인데 지금은 흥분으로 미적지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당신이 날 사랑한다면. 그때 우리가 한 시시한 입맞춤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내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시간들이 거짓이 아니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말이 가진 무게도, 네가 정말 무엇을 포기하려 하는지도.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겁쟁이. 당신은 나만큼이나 겁이 많군요.”

버둥거리는 바란의 몸을 거세게 끌어안으며 니카가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마법처럼 바란의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결정은 내가 합니다. 설령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내 결정에 대한 대가는 책임지고 치를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날 사랑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넌 그 대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당신이야말로 모르지 않습니까. 나는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따뜻한 양수 속에서 헤엄치던 때조차도 말입니다. 끔찍한 압력에 떠밀려 안락한 자궁을 떠나 썩은 생선 더미 위에 내팽개쳐졌을 때…. 처음 겪어본 세상의 공기라는 건 너무 차갑고 메말라 있었습니다. 손발이 저리도록 차가웠죠.”

“…….”

“그때로부터….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단 한 순간도 따뜻했던 적이 없습니다.”

더 이상 바란이 무슨 노력을 해야 했을까?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꾹 깨물어 참느라 아랫입술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는 참이었다. 니카는 상처가 난 위에다 짧은소리를 내며 몇 번이고 키스했다. 

“미래의 내가, 당신이 말하는 ‘니카 경’이라는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고 있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내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을 거고, 기사가 되었으니 지켜야 할 숙녀와 신념도 있었을 테지요. 하지만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이상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까,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바란은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확신에 찬 니카의 눈을 마주하자 입술은 다만 벙긋거릴 뿐 그 어떤 말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니카가 그를 더러 거짓말쟁이, 겁쟁이에다 울보이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냐고 귓가에 속삭였을 때였다.

니카는 바란의 머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니카가 숨을 쉴 때마다 뺨에서 날숨이 부서질 만큼 가까이 안겨있는 것은 꿈을 꾸는 듯이 비현실적이었다. 니카의 가슴에 바짝 붙인 한쪽 귀에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느껴졌다. 바란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전도, 왕녀나 대공도, 언젠가 자신을 경멸하게 될 니카 경의 눈빛도. 

니카의 옅은 빛 입술은 어느새 진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귓바퀴에 내려앉는 그 입술은 무척 뜨겁다.

“그러니, 바란. 나를 사랑해줘. 그것만 거짓이 아니면 돼.”

* * *

대공파 귀족들이 대거 머무르고 있는 탈타르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환락적인 연회가 하나 둘 씩 열리곤 했으나, 대공의 개선으로 열리게 된 이번 연회의 규모는 내전 이전의 왕실 연회를 떠오르게 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사사바란 공작의 통 큰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료한 기색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헬린 힐벤 대공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요?”

되묻는 말에 무슨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경박한 웃음소리가 먼저 한바탕 소란을 피워 전령의 말문을 막았다. 헬린 힐벤 대공은 끅끅대며 웃음을 안쪽으로 싸매어 넣으려다가 실패했다.

“난생 이렇게 웃긴 얘기는 또 처음이네. 다시 한 번 말해줘 봐요. 탈타미오 후작이 뭘 어쨌다고요?”

“들개 떼에게 습격을 당해서 큰 부상을 입었다 합니다.”

“개떼! 개떼라니! 경, 저 소리 들었어요?”

뒤에서 장식품처럼 서 있던 달틴 사사바란이 허리를 반쯤 굽히고 대공의 귓전에다 “예, 들었습니다.”하고 무뚝뚝한 대답을 해 산통을 깼다. 대공은 대번에 손을 내저으며 신경질을 냈다. 모처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는데 싱거운 반응에 김이 다 샜다는 것이다.

대공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단이 음악을 뚝 멈추었고 왁자지껄하던 연회 분위기가 단번에 침묵에 잠겼다. 사사바란 경은 그의 심중을 파악하고자 옆에서 잠자코 물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탈타미오로 가야겠어요.”

“예?”

“내 개가 다른 개한테 물려서 사경을 헤맨다잖아요. 주인 된 도리로 꼴이나 한번 보러 가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 가서 말과 여장을 준비시켜요. 일행은… 가만있자. 경까지 해서 다섯 명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하, 하지만, 전하!”

사사바란은 보통 대공의 변덕에 익숙해져 토를 다는 법이 없지만 이 말에는 당황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전투에서 승리의 단맛을 본 시점이었으나,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었다. 하물며 지휘관인 대공이 전선을 떠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사바란은 바쁘게 대공의 뒤를 쫓았다. 성큼성큼 걸어 연회장 한가운데에 우뚝 선 대공은, 사람들의 시선을 태연하게 받으며 지나가던 시종에게서 포도주를 건네어 받았다. 우두머리라는 사람이 검증되지도 않은 음식을 손닿는 대로 입에 대다니, 독이 잘 안 듣는 용의 자손이 아니었다면 부리기 힘든 배짱이었다.

“여러분, 이번 겨울은 우리의 봄이 될 겁니다. 왈츠를 추는 것이 좋겠군요!”

대공이 포도주잔을 높이 치켜들자 화려한 드레스와 연미복을 갖춰 입은 귀족들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에 화답해 잔을 들었다.

“왕국에 용의 가호를.”

유한 웃음을 지으며 대공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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