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 - 1. 만약 꿈속에서 (1/12)

1. 만약 꿈속에서


“참으세요, 후작님. 지금 무슨 생각 하시는지 잘 아는데, 그거 안 됩니다.”

피로 물든 난전을 내려다보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은 집사 레이먼드가 조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침착해서, 귀에는 칼 부딪는 소리, 또 콧속으로는 피비린내만 가득한 상황과는 무척 동떨어져 있었다.

가죽고삐를 손안에 질끈 쥔 바란 탈타미오 후작이 그의 집사를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인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눈이 이글이글하거든요.”

바란은 당장이라도 이성을 배반하고 쏘아져 나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누그러뜨렸다. 가슴이 들썩이고 홉떠진 파란 눈에는 핏발이 섰다.

‘가장 소중한 것이 눈앞에서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보고만 있어야 하다니?’

“어허. 안 된다니까요.”

바란이 속으로 무슨 충동에 시달리는지 단번에 알아차린 레이먼드가 다급히 팔을 곁가지처럼 뻗었다. 팔뚝이 생각과 다짐의 흐름을 끊으며 바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하세요.”

그 말 대로였다. 세간에서 대공의 번견이라 불리는 잔악후작 바란 탈타미오라면 응당 유리한 전세를 뒤집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여태 칠 년간 노력해서 쌓아올린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바란은 자기최면처럼 ‘괜찮을 거야.’하고 속으로 뇌까렸다. 그러나 결국 야트막한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혈전에서 시선을 떨어뜨려 놓을 수는 없었다.

결과가 불 보듯 뻔한 싸움이었다. 열 명이 채 못 되는 데다 여인까지 여럿 껴있는 남루한 일행에게 사사바란 공작의 정예기사 십 수 명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일행은 수적인 열세는 물론이고 비전투인원을 지켜내며 싸워야 하는 난관에 직면해 있었다.

일행은 긴 붉은 머리칼의 여자를 보호하려는 듯 그녀를 중심으로 둥글게 섰다. 잘 알려진 얼굴이었다. 중심에 선 여자는 바로 앙살라테 왕자의 최측근 수리 왕녀로, 연맹국 상단과의 담판에 실패하고 비밀리에 귀국하는 길이었다.

바란에게까지 정보가 퍼진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저 믿음직한 일행 중에도 대공이 심어둔 간자가 있을지 몰랐다.

‘간자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냉소가 절로 치밀었다.

불안을 감추지 못한 바란의 경직된 허벅지가 말의 옆구리를 조였다.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라 기수가 담대하게 버티고 있지 않으면 금방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거품을 물기도 했다. 

그는 힘차게 맥동하는 명마의 목덜미를 건성으로 도닥였다. 서슬퍼런 두 눈은 골짜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에 못 박힌 채였다.

일행의 선두에 선 남자가 조금의 지체도 없이 연신 검을 휘둘렀다. 그 솜씨를 당해내지 못하고 벌써 사사바란의 기사 둘이 겨드랑이나 목처럼 갑옷의 연결부가 있는 급소에 칼을 맞아 고꾸라졌다.

검 솜씨 하나로는 왕국에 이름이 자자한 남자였다. 바란은 물론 그를 잘 알았다. 왕녀가 부리는 천출 혼혈인기사.

‘니카.’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사랑하는 니카.

니카의 은빛 검이 거뜬히 기사 몇의 허리를 가르고 목을 베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전장에서 신선한 핏줄기에 휩싸이면 더욱 아름다운 남자였다. 바란은 살인광이라도 되는 것처럼 피의 향연에 황홀한 얼굴을 하고 싶지는 않았건만 니카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레이먼드의 찜찜한 시선이 뺨을 뚫을 듯 다가왔으나 바란은 의식하지 않고 니카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니카는 그럭저럭 잘 버텨내고 있었다. 그는 묘기에 가까운 검술로 몇 사람을 더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니카가 마수혼혈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 지치지 않고 날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이어 기사 하나가 니카의 어깨를 크게 베어내면서 바란이 가장하고 있던 평정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졌다.

팔이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상처가 깊어 보였다. 단면에서 새빨간 핏줄기가 울컥울컥 솟았다. 바란의 낯이 순식간에 파리해졌다. 기도나 주문에 가까운 욕설이 입술 틈으로 횡설수설 비어져 나왔다.

“가시면 안 됩니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바란의 모습에 레이먼드가 미리 그의 팔다리를 붙들었다. 새빨간 바란의 머리칼이 어지러이 흩어져 그 사이로 분노로 뜨겁게 달궈진 파란 눈이 번쩍거렸다.

“놔! 저 새끼들이 감히 니카를…!”

“당신은, 후작님!”

레이먼드는 바란이 발버둥 치는 것을 붙들어 안느라고 제멋대로 휘적거리는 주먹에 턱을 몇 대 얻어맞았다. 그의 표정이 더는 어두워질 수 없을 때까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저 흉측한 니카는 당신 적이란 말입니다. 오히려 형편없이 당하고 있는 기사들이 당신 아군이고요. 지원을 하라고까지는 안 합니다. 그래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지는 말아야 할 거 아닙니까?”

“아군은 무슨, 엿이나 먹으라지!”

바란은 손톱을 물어 뜯으며 불안을 역력히 드러냈다. 일개 집사에 불과한 레이먼드가 거기다 대고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참 처절한 짝사랑 나셨네요!”

레이먼드는 한껏 일그러진 바란의 옆얼굴을 흘겨보며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일부러 신경을 건드리려고 뱉은 가시 돋친 소리지만 소용은 없었다. 바란의 귓등을 휑하니 스쳐 지나가고 말았으니까.

바란의 시선을 뒤쫓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먼드도 그 끝에서 왕녀의 기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원래부터가 눈에 띄는 존재였으니 굳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찾을 것도 없었다. 거센 바람에 뒤엉킨 검은 머리카락이 비늘로 얽힌 남자의 왼뺨 위에 들러붙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얼굴의 흉물스러운 저 비늘. 남자는 천출이고, 혼혈인인 데다, 왕녀에게 이미 그 목숨을 바친 걸로 온 왕국에 유명했다. 험악할 정도로 청렴하고 벽창호 같은 성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레이먼드는 다시금 제 주인을 돌아본다. 정말이지 범인의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연정이었다. 저치가 남자라는 사실은 레이먼드가 들 수 있는 수많은 이유들 중 가장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천덕꾸러기 왕국기사 니카 경을 미남에 젊은 고위귀족인 바란과 견주어보면 하찮다 못해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뒤에서 레이먼드가 깊은 한숨을 쉬든 말든, 바란은 몸을 긴장으로 바짝 굳힌 채 상황을 살펴보았다.

대공이 보낸 기사들을 등지고 니카를 돕는 행위는 물론 배신으로 간주될 것이다. 배신에 뒤따르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게 내전 중인 이 나라를 지배하는 법칙이었다. 신중해야 했다.

‘그렇다고 보고만 있으라고? 나한테는 그깟 처벌이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가슴속에서 모닥불 타는 소리를 내며 소란을 피우던 연정이 갑자기 잠잠해졌다. 장작에 들러붙은 습기와도 같은 잡념을 다 살라버리고는 이내 굳건한 결심을 했기 때문이었다.

건조한 먼지 바람이 한바탕 불어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이 먼지들이 다 걷히고 사방을 식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전세는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니카만 두고 다들 도망치는 거지?”

돌연 일어난 전투의 변화에 바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동료라느니 죽고 못 살 때는 언제고! 대체 왜 니카를 버리는 거야?”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걸요.”

곁에서 반박이 날아왔다.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고개를 돌린 바란이 더 말해보라고 재촉했다. 역 팔자로 사납게 치켜 올린 눈썹과 분노에 떠는 주먹에서 풍기는 기세가 무척 흉흉했다.

“방금 현명이라고 했어?”

“콩깍지 벗고 생각을 좀 해보세요. 수리 왕녀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니만큼, 저들 입장에선 동료 하나를 버리더라도 시간을 끌어서 말 타고 달아나면 끝이에요. 나이트를 버리고 퀸을 지키는 전술이죠.”

“지랄 맞은 체스! 난 그런 거 몰라. 아무튼 니카가 위험해진다는 소리잖아!”

바란은 악물린 잇새로 이 가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레이먼드가 빈정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쪽도 이쪽만큼이나 비련의 주인공이 되셨네요.”

니카 경의 공공연한 은애는 사교계에서 유명한 이야기였다. 왕녀의 옷자락과 스치기라도 하면 어찌나 애절한 표정을 짓는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서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게 다 무슨 꼴인가, 니카. 네가 사랑한다고, 지켜주고 싶다고 말한 왕녀는 결국 널 남겨두고 떠나는걸.’

니카는 달려드는 기사 둘의 뱃가죽을 힘주어 벤 뒤, 자신을 두고 달아나는 왕녀 일행을 흘긋 돌아보았다. 안도와 자포자기로 가득한 눈빛에서 헤아릴 수 없는 애정이 흘렀다.

이렇게나 구제불능의 사랑에 빠져 있는 남자였다. 그런 사람을 또 짝사랑하고 있는 바란의 마음이 썩 좋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두 사람분의 외사랑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의 성격으로 봐서는 자진해서 남겠다고 했겠군요. 안 된 일입니다. 아무리 마수의 피가 섞였다 한들 저 수적 열세에서 살아남긴 힘들겠어요.”

“내 생각도 그래, 레이먼드.”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미안하게 됐다고.”

낌새를 챈 레이먼드가 다급히 바란을 돌아보았을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바란은 가파른 경사를 타고 니카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언덕 아래로 말을 몰았다.

레이먼드가 입만 쩍 벌리고 있는 사이 바란이 탄 말은 거센 투레질을 두어 번 하며 주인의 뜻에 따라 난전 속으로 달려갔다. 백색 말의 갈기털과 바란의 붉은색 머리칼이 제멋대로 펄럭거리며 흙먼지 사이로 파묻혔다.

 “후작님, 맙소사! 다 망칠 작정입니까!”

레이먼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명처럼 경고했지만 사랑에 눈먼 바란에게는 이깟 말들이 들릴 리 없었다. 결국 레이먼드는 한숨을 폭 내쉬며, 뒤로 늘어선 후작가의 기사들을 이끌고 바란의 꽁무니를 쫓아 내려갔다.

바란은 말의 속도를 그대로 실어 검을 휘둘렀다. 고깃덩이와 뼈로 이뤄진 인간의 몸은 너무도 순식간에 동강이 났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나타난 돌연한 지원군에게 니카의 어리둥절한 눈길이 닿았다.

니카에게 달려들던 또 다른 기사가 갑자기 검을 떨구며 고꾸라졌다. 목 정중앙을 찔렸다. 피거품이 공기 중에 흩날리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새빨간 머리칼이 나부꼈다.

미처 가리지 못한 바란의 얼굴에 니카의 시선이 닿았다. 니카의 새까만 눈과 마주치자 바란은 집고양이처럼 샐쭉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니카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렸다.

“잔악후작…?”

일행을 습격했던 기사들은 이미 다 죽어 나자빠졌다. 니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땅에 발을 붙이고 선 것은 후작의 기사 세 명과, 그 뒤로도 기병이 수 명…. 승산이 있는지 재어보는 눈빛이 매서웠다.

“윽….”

흉흉하게 전의를 불태우던 니카에게 불 같은 고통이 덮쳤다. 그는 몸에 잠깐 균형을 잃었다. 기사의 검을 땅에 박아 넣고 몸을 지탱한 니카는 잠시 후 힘겹게 검을 치켜들었다.

힘없이 겨눈 검 끝에 잔악후작이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가소롭다는 듯 웃는 대신 눈살을 구겼다. 마치 안타깝다고 유감을 전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봤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바란이 보내는 모든 표현은 니카에게 있어 전부 모욕으로 느껴졌다.

“대체 무슨 속셈이냐, 잔악후작! 왜….”

악에 받쳐 거칠게 소리치는데 갑자기 어찔한 현기증이 니카를 덮쳤다. 그는 검에 베여 벌건 살이 드러난 어깨를 움키고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바란은 니카를 가까스로 받아 안았다. 약한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잠깐 정신을 잃은 걸로 보였다. 맥박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뱉는 바란에게 레이먼드가 후작가의 기사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대체 생각이 있으십니까?”

“걱정 마. 대공은 내가 후작령에 머물러있는 줄 알 테니까. 일정을 조금 조작해서 보고했거든. 당장 대공에게 들킬 염려는 없어.”

“그래요, 그건 됐다고 치더라도.”

레이먼드는 마냥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스스로의 가슴팍을 연신 두드리며 말했다. 

“그 용인, 아니, 니카 경은 어떡하시려고요! 그는 앙살라테 왕자의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그가 수리 왕녀의 기사라는 게 뭘 뜻하는지 말입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달라, 레이.”

바란은 쓰게 웃으며 니카를 고쳐 안았다. 그는 이 모든 일이 불가항력인 것처럼 굴었는데, 사랑의 포로라는 비유가 무색하지 않았다.

“알잖아, 난 그를 해칠 수 없어. 내버려 둘 수도 없어.”

“이유는 말씀 마세요. 아주 신물이 나니까.”

“그래, 질릴 만도 하지.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으련만.”

바란이 니카를 안은 팔에 뻣뻣하게 힘을 주다가 가볍게 웃었다.

“이리 와서 날 좀 도와줘. 니카를 말에 태워야 해.”

니카는 바란의 성으로 옮겨져 최고의 치료를 받았다.

그는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정신적 피로와 혈액부족으로 인해 회복을 위해 잠에 빠졌으리라는 게 의원의 소견이었다.

의원은 용의 혼혈은 환자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 확신이 모자란다고 말했고 바란은 나날이 그가 미심쩍어졌다. 신체엔 별 타격이 없으니 잠이 들었다가 깨어날 거라 말한 것과 달리 니카가 사흘째 미동도 없는 탓이었다.

“후작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넌지시 던져진 레이먼드의 물음에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레이먼드는 방문을 힘주어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일이 얼마나 밀렸는지 짐작은 가시고요?”

레이먼드는 침상에 니카를 눕혀 놓고 그 곁에 온종일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 바란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인기척에 바란이 고개를 들었다. 잘생긴 얼굴이 몇 끼니 굶었다고 여위어 못쓰게 되는 일은 없었다. 탈타미오 후작이 머리칼과는 달리 금색인 속눈썹을 팔랑이며 레이먼드를 돌아보았다. 심심하게 눈을 깜빡이는가 싶더니 다시 시선이 침상에 누운 니카에게로 돌아갔다.

“용의 신전에서 간만에 신탁이 내렸는데.”

이 말은 바란의 흥미를 끄는 것에 성공했다.

“드라코슨은 용이 될 수 없다 했답니다. 그러면 대체 왕좌에 앉을 것이 누구겠냔 말입니다. 온 왕국 민심이 술렁이고 난리가 아닙니다.”

자물쇠라도 건 듯이 다물려 있던 바란의 입술이 마침내 서로 떨어졌다. 너무 오래토록 말을 하지 않아서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왕자랑 대공은 둘 다 드라코슨이잖아?”

“혈통을 따지면 그렇지요. 하지만 캐멀롯 왕에게 하사받은 대공의 성은 힐벤이니까, 이름을 두고 보면 왕자만 드라코슨이라는 겁니다.”

“하긴 싸움판 돌아가는 꼴만 봐도 왕자에게 별 기회는 없어 보여.”

바란은 콧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화제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태도였다.

“사실 별로 상관없어, 누가 되든.”

“후작님!”

레이먼드가 비명을 내지르듯 나무랐다. 이단의 속삭임을 들은 신관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고 서슬 퍼런 눈으로 바란을 노려보았다.

뺨이 뚫릴 것 같은 기분에 더는 레이먼드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바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쭉 켰다. 얼마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니카만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니카가 깰 수도 있으니 조용하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니카를 깨울 수 있게 더 큰 소리로 말해 보라고 해야 하나?”

오똑한 코가 장난꾸러기처럼 찡긋했다. 이내 무서운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는 레이먼드 탓에 농지거리를 하던 김이 팍 샜다.

바란은 대화가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레이먼드의 엄격한 분위기에 맞춰 등을 곧추세우고 표정을 굳히기는 했다. 그래 봤자 넋을 저 멀리 빼놓은 듯한 태도는 여전했다. 레이먼드가 흘긋 보니 단추를 엇갈려 채워서 셔츠의 맵시조차 엉망이었다.

짙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레이먼드는 갈색 머리칼을 한번 쓸어넘기고 나서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것 같은 한숨을 또 한 차례 내쉬었다. 바란의 눈썹 한 쪽이 불만스럽게 치켜 올라가는 줄을 알면서도 보란 듯이 그랬다.

이윽고 손을 뻗어 잘못된 부분을 가늠한 뒤에 바란의 셔츠 단추를 끄르고 꿰기를 반복했다. 레이먼드의 손을 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란의 모습이 단정해졌다.

“후작님. 저 용인을 대체 어떻게 하시려는-”

“니카.”

평정을 되찾은 것 같던 레이먼드는 이를 꾹 악물고 성호를 그었다. 턱뼈의 각이 진 부분에서 평소에 드러나지 않는 근육이 질끈 수축했다.

“그래요, 니카! 안 가르쳐주셔도 잘 알고말고요! 매일 같이 니카, 니카, 니카. 정말이지 저 작자 이름 때문에 환장할 지경인데,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내 삶에 중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려줘?”

레이먼드는 손바닥을 내밀어 바란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한마디라도 더 뱉었다간 가만 두지 않겠다는 뜻을 눈빛으로 전달했다. 그는 신경쇠약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하며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격렬한 거부반응에 아랑곳없이 바란이 손가락을 세 개 꼽으며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니카, 니카, 니카. 그러니까 이제 날 좀 내버려 둬. 이미 일어난 일이야. 내가 저질렀으니, 내가 책임질게. 아무튼 나중에 얘기하자고, 지금은 얘기할 기분 아니니까.”

“이…구제불능….”

“잘 알고 계시는군, 집사님.”

바란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니카를 관찰하는 일에 골몰했다. 레이먼드가 성을 내고 펄펄 끓어 날뛰다가 요지부동인 바란에게 항복해 방을 나설 때까지, 바란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알아서 하세요! 전 분명 경고했습니다.”

레이먼드가 방을 나서자마자 여유만만하던 얼굴이 힘을 잃고 일그러졌다. 도드라진 무릎을 세워 그사이에 힘없이 턱을 올렸다. 벅찬 숨이 무릎에 부딪혀 돌아와 낯가죽에 축축한 물기를 남겼다.

“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꿈이라고 해도 믿겠구나.”

바란은 니카가 왕녀가 아닌 다른 모든 것에 얼마나 감흥 없는 얼굴을 하는지 익히 알았다. 다른 이들이 길에 기어 다니는 개미나 감상적인 구석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구름조각을 올려다보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바란은 니카를 볼 적마다 가슴이 거세게 두방망이질을 쳐 그대로 안으로부터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갈 지경이었는데, 반면에 그를 보는 니카의 시선은 항상 그렇게 아무런 온도도 없이 무감하기만 했다. 그는 아마 발치에서 바란이 돌연 피를 토한 후 고꾸라져 죽어도 아랑곳 않고 서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잠들어 있는 게 바란에게는 훨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바란은 생각을 뚝 끊었다.

“미안, 니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을 했네. 감히 널 은애한다고 말할 자격도 없구나.”

반성과 사과의 말에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바란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슬픔에 잠긴 어깨가 떨었다.

“더는 욕심 부리지 않을 테니, 눈을 뜨기만 해다오.”

바란은 니카의 검고 결 좋은 머리칼을 잠깐 쓸었다. 상상했던 그대로의 감촉이었다. 이렇게 한번 손끝이 닿고 나니 더 큰 욕심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오들오들 떠는 손가락이 조심스레 니카의 고운 이마를 쓰다듬었다. 오뚝한 콧날을 따라 짙은 눈썹, 움푹 들어간 눈두덩, 그가 언제나 머리칼로 가리고 다니는 토룡의 비늘이 돋친 왼쪽 얼굴도 만져보았다.

바란이 보기엔 어디 한 구석 빠짐없이 예뻤다. 도무지 뭘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알 길이 없을 만큼.

목구멍으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커다랗게 들렸다. 바란은 벅찬 숨을 가슴에 가두었다. 항상 분에 넘쳐 생각조차 닿지 못하던 니카의 입술까지만 만져보자고 생각했다.

니카의 입술은 거칠었다. 물기가 닿은 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입술에 껍질이 하얗게 다 일어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입술을 건드렸다. 코에서 쏟아진 미약한 숨결이 손등에 닿았다.

‘살아서, 여기에 있어.’

바란은 문득 니카의 입술에 닿았던 제 손에다 경건히 입을 맞췄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럼과, 비할 데 없는 비참함이 솟았다. 시선이 하염없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 * *

바란은 오래 전의 꿈을 꿨다.

소년의 앙상한 몸뚱이를 가진 바란은 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숲속을 헤맸다. 불안하게 뻗은 손끝에 거칠거칠한 나무의 표면이 만져지면 재빨리 그 뒤로 숨었다. 수차례 같은 방식으로 몸을 옮겼다.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간지러웠다. 훔칠 새도 없이 바쁘게 눈을 깜빡였다. 눈을 뜨는 것과 감는 것에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저녁 시간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해도 이상했다. 바란은 눈을 팔뚝에 대고 비볐다. 물체의 흐릿한 윤곽선이라도 보였다면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 보여.’

여기저기서 피어오른 횃불이 숲 곳곳을 밝히며 돌아다녔다. 불빛을 든 추격자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눈이 멀어 알아차릴 방도가 없으니 인기척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요란했다. 바란은 얼어붙은 채 그를 가려주는 나무 밑동을 움켰다. 숲에 사는 벌레가 손등을 타넘는 듯 소름 끼치는 간지럼증이 도졌다.

“아, 이 쥐새끼 같은 게 그 새 어디까지 간 거지.”

목소리가 가까웠다. 다급히 입술을 틀어막았다.

“쉿! 큰 소리 내지 마. 숨어서 우리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거면 어떡해?”

한바탕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 이거 순 겁쟁이 아냐. 못 들었어? 하란토 경께서 눈 머는 약을 먹였다 하셨잖아. 장님이 돼서 잘도 그러겠다. 얼마 가지 못했을 테니 찾기나 해!”

그들이 지껄이는 소리 하나하나가 바란의 귀와 뇌와 심장에 꽂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둔한 귀 하나에 의지해서 인기척이 드문 방향으로 무작정 뛰었다. 나무뿌리를 밟고 휘청거리거나 몸이 갈퀴 같은 나뭇가지에 온통 긁혔다.

“꼬마! 그만 도망가고 이만 나와. 숙부님께서 부르시는데 얼른 가야 착한 아이 아니냐, 응?”

거친 숨을 손바닥 안에 틀어막았다. 비린 맛이 혀끝부터 목구멍 안쪽까지 진동했다.

“죽이지 않고 양도 각서만 받으시겠단다. 씨팔, 그만 좀 번거롭게 해라…. 그만 좀!”

바란은 그런 소리에 넘어갈 만큼 멍청이도 어린애도 아니었다. 서출인 숙부가 탈타미오를 탐낸다는 사실은 코흘리개 영지 꼬마도 다 알았다.

언젠가 일이 터질 거라 어렴풋이 예상은 했다지만 그게 아버지의 장례 후 단 두 달 된 시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멍청하긴.’

혼자가 된 바란에게는 숙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검은 속내를 진작 알아보았지만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이용하고 내칠 작정이었다. 그러나 바란의 치기 어린 솜씨에 놀아나기에 숙부 하란토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굴렀다.

새미언 왕이 사경을 헤매고 앙살라테 왕자가 군사를 모으는 폭풍전야의 시기였다. 애송이보다는 서출 장사꾼을 데려다 앉히는 게 더 낫겠다는 가신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용병을 살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수없이 부딪히고 넘어져 가며 어떻게든 숲의 저지대로 내려갔다. 발이 접질려 넘어졌다. 바란은 이제는 꽤 멀리서 은은하게 들리는 추격자들의 소리에 숨을 몰아쉬었다. 발을 다시 디뎠으나 예상 못한 통증이 발목으로부터 척추까지 단숨에 올랐다.

이것을 못 견디고 끝내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거칠게 구르던 몸뚱이는 앞의 나무둥치에 부딪혀서야 겨우 멈췄다.

허리를 뒤틀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벌레처럼 꿈틀대며 이를 악물었다. 새된 신음소리가 두개골 안에서 쨍하고 울리다가 입술이 벌어진 것을 틈타 새어 나왔다.

“흐….”

눈물이 났다. 지상에 자신과 함께 남겨진 모든 일들이 끔찍했다. 죄의 무게가 살갗에 달라붙으니 어디를 걷든 지표 아래에서 몸을 쑥 잡아당기는 힘이 있는 듯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을 초래했다는 건 너무도 명백해서 바란 자신도 이견이 없었다. 침을 뱉고 집을 나선 아우 클라텐을 떠올리면 마음이 더욱 미어졌다. 자괴감이 너울파도처럼 그 높이를 불려 바란의 의식을 쓸어갔다.

‘차라리 죽어버려라, 바란 탈타미오. 죽어서 편하게 썩어 문드러지자. 너무 지쳤어. 후계자고 뭐고 너무 힘들어. 숙부 놈한테 복수 못한 건 통탄할 일이지만 어머니 아버지도 그 정돈 이해해주실 거야. 지금 함성을 한번 빽 내지르면 저 놈들이 날 찾아내서 꼬챙이에 찔러 죽이리라. 그럼 내 몸은 아파도 곧 편해질 거야.’

…웬 발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이미 죽음을 결심한 바란은 그 인기척의 주인이 제 심장에 칼을 꽂든가, 어떻게든 저를 죽여주기만을 미동 없이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빤한 시선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어떤 살의도 곤두선 바란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다.

심판을 기다리던 바란은 그가 저를 일으키려는 낌새를 보이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체 누가 죽음을 각오한 바란에게 이토록 손을 내민단 말인가? 상황을 모르거나 잘난 자비심에 겨워 사리분별 못하는 인간일 게 분명했다.

“이봐, 누군지 모르겠지만 당장에 죽일 게 아니라면 날 내버려 둬. 뭘 안다고 나서는 거야?”

바란은 모든 상황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오래토록 고뿔을 앓는 사람처럼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에 불꽃 같이 타오르는 분노가 잔뜩 녹아 있었다. 바란은 추격자들이 그를 찾아내든 말든 더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오늘 여기서 죽어! 그게 누구를 위해서든 좋은 일이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날 못 본 척 두고 가.”

낯선 이는 바란이 다그치는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묵묵히 그를 안아 올렸다. 단단한 팔뚝이 힘 풀린 허벅다리를 지나 오금에 자리 잡았다. 맨 살갗이 맞닿았다.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뾰족한 어깨가 바란의 뱃가죽을 찔렀다. 속이 안 좋았다. 머리로 피가 쏠렸다.

“이거, 놔. 놓으라고!”

바란은 마구 발버둥을 쳤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예측할 수 없는 이 낯선 남자의 모든 움직임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살려서 데려가려고 한단 말인가? 숙부의 추격꾼을 제외하면 이 숲에 있을 법한 인간은 땔감을 주우러 드나드는 백성들이 다였다. 그나마도 해가 저물었으니 요원했다.

“…괜찮다.”

낯선 목소리가 속삭였다. 초조하게 몸서리치던 것이 일시에 멎었다. 두려움이 불러일으킨 상상력이 점차 거품을 터뜨리고 고요히 가라앉았다.

남자는 바란의 넓적다리를 두어 차례 담백하게 도닥였다. 다리에 닿은 손길이 유난히 차가웠다. 손이 차면 맘이 따뜻하다던 어린애 같은 미신이 떠올랐다.

“숨죽여 울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가자.”

바란은 그때서야 자신의 볼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거칠고 커다란 손이 어깻죽지를 투박하게 쓸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 감촉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주 서툴고 울퉁불퉁한 손이었다.

* * *

어깨에 느껴지는 울퉁불퉁한 손….

바란은 그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암흑만 가득하던 멀어버린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 있는 건 손을 붙잡혀 당황해하는 니카였다. 바란은 주위의 풍경을 멍하니 한 번 보고 이곳이 자신의 침실임을 깨달았다. 

‘꿈을 꾼 건가? 니카를 처음 만났던 날의….’

그러나 꿈에서 깬 게 맞는지, 아니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중인지 도통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니카가 침대에 앉아서 눈을 굴리며 바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당당한 니카 경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이유도 없을뿐더러, 태도상의 위화감을 차치하더라도 바란과 단 둘이 침실에 있는 상황은 또 뭐란 말인가?

자신의 상상력에 감탄하다 말고 위화감에 못 이겨 비쭉 웃었다. 단계적으로 꾸는 꿈이라니 들은 적도 없다. 아무튼 바란은 마저 깨어나려고 노력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는데도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여전했다.

바란은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제 볼을 한 번 꼬집다가, 니카의 시선에 무안해져서 얼른 손을 놓았다. 얼굴이 절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정없이 늘어났던 뺨이 아릿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잃은 니카를 침상에 두고 꾸벅꾸벅 졸던 일이 생각났다. 주먹을 말아쥐고 입술에 댄 채 헛기침을 했다.

“니, 니카 경. 일어났구나.”

니카는 대답이 없었다. 침묵은 언제나 폭풍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바란의 안에서 불안감이 내달렸다.

‘설마 몰래 만져본 걸 들켰나? 혹시 니카가 그때부터 벌써 깨 있었는데 아닌 척 의뭉이라도 떨었단 말인가?’

바란은 니카가 잠들어 있던 동안 수 십 수백 번 생각해 온 갖가지 변명을 머릿속에 쭉 펼쳐놓았다. 대충 반응을 재어본 뒤에 가장 그럴싸한 것으로 골라다가 맞출 심산이었다. 홀쭉한 뱃가죽에 바짝 기합이 들어갔다.

 “여긴 내 침실이야. 어디까지 기억하지?”

 “당신은….”

니카는 바란의 말에 한참 혼란스럽게 침을 삼키고 말을 더듬었다. 평소에 본 적 없던 모습이었다. 바란은 이다음에 무언가 충격적인 말이 따라오리라고 본능적인 각오를 하고 있었다. 손을 힘주어 꾹 쥐고 귀를 기울였다.

곧이어 니카가 입술을 열었다. 바란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목소리가 전혀 기억에 없는 어리숙한 말투로 기어 나왔다.

“당신은 누구죠?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바란은 잠시 니카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폈다. 살아온 삶이 평탄하지 않다는 것은 그의 절제된 음성에서 언제나 잘 느껴지곤 했는데, 방금 들은 니카의 음성은 평소와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저 말간 눈동자.

당혹감이 기름 부은 불길처럼 훅훅 일었다. 니카가 단 한 번이라도 바란에게 저런 눈빛을 보여준 적이 있던가? 없다. 바란이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었다. 니카는 항상 무관심과 경멸 사이 그 어딘가의 감정으로 바란을 대하곤 했었다.

바란은 니카를 한참 눈여겨 보았다. 그는 오래토록 니카를 은애의 눈으로 바라봐 온 까닭에 당장에 눈꺼풀을 감고도 니카의 평소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굳은 입매도, 창백한 얼굴빛도, 모두 여느 때의 니카와 다름없건만 무엇인가가 달랐다.

사고처럼 니카와 시선이 부딪치자 벼락이 내리꽂힌 것처럼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바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무안해졌다. 방문 근처에서 서성이며 “의원, 의원을 불러와!” 하고 외치고 괜히 시녀를 못살게 굴기까지 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용인을 진찰해본 전력이 없는지라 확신은 드리지 못합니다만….”

머리가 하얗게 센 의원은 그렇게 운을 뗐다.

“다만,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그는 기억 상실로 보입니다.”

바란은 저도 모르게 숨 쉬는 걸 뚝 멈췄다. 

“기억을 잃어.”

한숨 같은 말이 간신히 터져 나왔다. 다그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기억을 잃었다고?”

바란은 의원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푸른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니카를 돌아보았다.

니카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겁먹은 소년 같이 오그리고 있었다. 목석같던 남자가 불안해하는 모습에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바란의 굳은 표정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정확히 기억상실 증세를 판단하는 것은 몇 가지 문답을 거친 뒤입니다, 후작님. 그러면….” 

의원은 바란에게 양피지와 펜, 잉크를 빌리기를 청했고 바란은 기꺼이 그러도록 했다. 침실에는 비치된 책상이 없어서, 의원은 볼품없게도 두터운 책 한 권을 밑에 받친 채 엉덩이도 못 붙이고 문답내용을 작성해야 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환자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의원이 물어도 니카는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고 눈치만 살폈다.

“이름 말입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니카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의원의 소견이 제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중대한 기억상실로 기울었을 때, 바란은 니카의 곁에 조심스레 앉아 눈을 맞췄다. 니카는 움찔 짜부라들었다. 바란보다 한 뼘은 키가 큰 니카인데 그렇게 구겨져 있으니 바란이 오히려 더 크게 보였다.

“이봐,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바란은 어린 동물을 놀래킬까 염려하는 것처럼 느릿하게 손을 뻗어 니카의 손에 겹쳤다. 니카의 손은 그에게서 바란이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었다. 굳은살로 감촉이 엉망인 데다 울퉁불퉁한, 그리고 차갑기까지 한 손이 바란의 손아귀에 저항 없이 갇혔다. 바란은 전에 없던 희열감을 느꼈다.

“오히려 그 반대지. 날 믿어, 나는 널 지키려는 거야.”

바란이 상냥하게 말하자, 니카가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그 말의 어느 부분에 마음이 동했는지 몰라도 검은 눈동자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의원이 몇 가지 질문을 할 거야. 대답해줘.”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니카. 성은 없습니다.”

“그러면, 가족관계나 친한 사람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말해보세요.”

“저는 고아라 어릴 적부터 부모 없이 신전의 보육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니카는 거기까지 말하고 문득 바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난처하게 일그러진 아미가 어린애 같고 귀엽다. 자꾸만 바란의 눈치를 보는 것이 굳이 이런 것까지 얘기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모양이었다.

“친인이 아무도 없습니다. 벗이라 할 만한 사람도 없고요.” 

하며 대답하는 목소리는 너무도 작고 애처로웠다.

니카가 언제나 홀로 고고한 사람처럼 굴었기에 바란은 그도 외로움을 탈 줄 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마수혼혈인이 어릴 적부터 어떤 방치와 폭력에 노출되는지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안쓰러움으로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절로 올라가려는 위로의 손길을 애써 막으며 바란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 이후로도 문답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흘러가는 것을 들으며, 바란은 생각에 잠겼다. 니카는 문제없이 어제 먹은 것, 마을의 지리 따위의 기억력 문항들에 답을 하고 있었고 그건 기억상실이라는 단어를 무색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화감이나 바란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들은 어떻게 된 걸까? 

의원은 난처한 얼굴로 안경을 추어올리며 마지막 질문을 했다.

“환자분 본인의 나이는 몇이죠?”

“열여덟….”

곧장 돌아오는 대답에서야 실마리를 잡아낸 의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란도 놀라서 니카를 빤히 쳐다보았다.

바란이 칠 년 전에 니카를 처음 만났을 적에도 그는 이미 약관을 넘긴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알려진 바 없어도 지금은 서른이 다 되었을 것이다. 장성한 사내의 입에서 열여덟 소리가 나오니 얼빠진 기분이 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니카만이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 눈을 깜빡였을 뿐이다.

의원은 헛기침을 두어 차례 하더니 턱짓으로 바란을 방 바깥에 불러냈다. 정신적인 착오를 겪고 있는 환자 앞에서 증상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은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라고 했다. 바란도 팔짱을 끼고 동의했다.

“부분 기억상실입니다. 그는 열여덟 이후의 일은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내전에 대한 건 모두 잊어버렸다는 소리군.”

이상한 안도감이 고개를 들었다. 내전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니카. 이 땅을 휩쓴 잔혹한 전쟁이 지속된지도 햇수로 칠 년이 되었다. 니카는 그간 고통스럽고 더러운 꼴을 수도 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 불쾌한 기억들을 잊는다는 건 차라리 행복한 일일지 모른다. 그는 내전도, 왕자와 대공도, 바란 탈타미오의 존재나 그 밖의 모든 인물들에 관해 깡그리 잊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니카는….

“왕녀에 관한 것도 잊었을 거야.”

니카가 왕녀를 은애한다는 건 너무도 명백한 일이라 세상천지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는 수리 왕녀 본인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니카가 왕녀의 옆얼굴을 훔쳐보며 애틋한 표정을 할 때, 왕녀는 희귀한 장식품을 뽐내는 것처럼 일부러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는 했다.

부군의 죽음 이후 신전의 선행에 마음을 붙인 왕녀는 자선사업에 열을 올렸다.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행사를 개최하고 부호들의 동정심을 얻으려 온갖 솜씨를 부렸다. 그녀의 보살핌 아래 기사의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마수혼혈인 니카 경의 존재는 이런 그녀에게 있어서 아주 적당한 표본이었다.

왕녀가 만일 주머니가 두둑하고 위선이 두터운 귀족 관중 앞에 서서, 신의 자비 아래 개과천선한 무지렁이 용인 행세를 해달라고 말했다면, 니카는 그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서 기꺼이 그렇게 행동할밖에는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바란은 생각했다. 왕녀를 위해서라면 한낱 명예 따위는 당장에라도 내다 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니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니카가 더 이상 왕녀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바란의 속에서 시커먼 속내가 설설 기어 나왔다. 

“기억이 돌아올지 어떨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충격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일어난 기억 장애일 확률이 더 높습니다. 이런 식으로 보고된 환자들은 대체로 얼마 안 지나서 기억이 저절로 회복되곤 했습니다.”

“…….”

“안정을 취하며 기억을 되돌릴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탕약을 조제해 올리겠습니다.”

“너는 이 일을 비밀에 부쳐라.”

바란은 의원에게 단호한 입단속을 시킨 뒤 일단 물러가도록 두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억눌렸던 생각들이 다시금 솟아올랐다.

니카는 언젠가 왕녀가 그의 삶의 전부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니카가 그걸 기억할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바란은 잘 알았다. 니카의 감정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기 때문에, 아마도 평생토록 니카의 마음을 저에게로 돌리는 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바란은 그때를 떠올렸다. 빨간 태양이 타는 늦봄의 전쟁이었다. 갑옷 속에서 흥건하게 흘러내리던 땀 줄기는 전쟁을 갑절은 더 힘들게 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니카는 날씬한 흑마를 타고 있었다. 바란은 어지럽게 병장기가 부딪치고 팔다리가 부서져 내리며, 피와 살점이 흩날리는 한가운데에서 니카를 보았다.

언제나 그를 지켜보는 것이 바란의 일이었지만 그 날은 유달리 신경질이 났다. 니카가 품에 끌어안다시피 한 붉은 머리칼의 여인 때문이었다. 바란은 전에 느껴본 적 없던 살의로 그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그녀를 죽일 수 있는 모든 수단이 곁의 니카까지 해치게 될까 두려워서 결국 아무런 공격도 취하지 못했다. 

기사들의 화살세례에 니카의 말이 끝내 무릎을 꿇고 고꾸라졌다. 기사들은 사기충천하여 니카와 왕녀에게 달려들었다. 바란이 그들을 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하지.”

적장을 지휘관이 나서서 해치운다는 그림은 썩 그럴싸하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모든 기사들은 그들의 지휘관인 바란을 위해 니카의 목을 벨 권리를 넘겼다.

“잔…악…후작, 대공의 개!”

니카가 들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씹듯이 바란을 불렀다. 바란은 그만 상황도 잊고 황홀해졌다. 헐뜯음도 멸시도, 그 마법 같은 입술을 통하면 그 어떤 고귀한 말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 니카 경. 바로 나야!”

바란은 모욕적인 호칭으로나마 니카에게 불렸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황홀하게 웃었다. 미친놈 보듯 하는 시선이 돌아왔다.

“대공 전하께서 원하시는 건 왕녀뿐이니, 그녀를 넘기면 너는 무사할 거야.”

바란은 조금 웃었던 걸 기억한다. 그 말이 너무 터무니없었기 때문이었다. 니카가 결국 왕녀를 넘기지 않으면 어떡하겠단 말인가? 바란은 니카를 상처입힐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가 그리 하는 걸 지켜볼 수도 없다.

결국 칼은 니카가 쥐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모르는 일이겠지만.

“왕녀님을 배신하느니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

그리고 니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칼을 누구보다 능숙하게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바란은 왕녀를 향한 열정에 찬 그의 표정을 볼 적마다 무력감에 젖는다. 그저, 그조차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에 잠기면서.

하지만 그렇게도 사랑하던 그녀를 잊은 니카는…. 바란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들었다.

그녀를 잊은 지금의 니카라면 그런 표정을 다시 한 번 보여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이번에는 그녀가 아니라, 바란을 위해서. 그저 약간의 거짓말과 기만만 곁들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바란의 안에 남아있던 양심과 또 순수한 연정이 반기를 들었다. 네가 감히 그런 기만으로 니카를 사랑한다고 지껄여? 네가 감히, 네가 감히.

‘그의 마음을 갖고 노는 거나 다름없어.’

바란은 제 침실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방에 들어서기가 망설여지는 건 이상한 경험이다.

‘…그는 기억이 돌아오면 날 경멸하게 될 거야.’

문을 열었다.

‘경멸이라, 그는 원래도 나를 경멸했는걸. 대공의 개라 멸시하고 박쥐 같은 작자라고 불렀지. 더는 잃을 게 없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가 내게 한 번만 웃어준다면, 그다음에는 날 죽도록 미워하거나 없는 놈 취급하거나 해도 괜찮아.’

침대의 휘장이 보였다. 잠자리 날개 같은 게 몇 겹이나 둘러쳐져 있다. 아직 몸상태가 호전되지 않은 니카는 여전히 안정을 취하며 거기에 누워 있었다. 바란은 휘장 너머의 실루엣을 보며 얼굴을 울듯이 일그러뜨렸다.

‘난 그럴 자격 있어. 저 남자를 무려 칠 년 동안 짝사랑해왔다고….’

혼잣말로 불편한 속을 계속 달랬다. 자기연민이 샘물처럼 솟아 자신이야말로 니카의 연인이 되기 마땅하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바란의 파리하던 낯빛이 합리화로 회복되었다. 그래, 그는 니카로 인해 고통받아온 만큼이나 그의 사랑을 받아 마땅했다. 이제 드디어 보상을 받을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니카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누구십니까?”하고 악의 없이 물어왔을 때, 바란은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알갱이가 바닥으로 우스스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죄책감이라는 다각형이 마음속을 뱅뱅 돌며 제 뾰족한 모서리로 바란의 가슴을 너덜너덜하게 찢었다.

“나는, 니카.”

바란은 입술을 짓씹으며 이 모든 욕심을 돌이키려고 무진 애썼다. 아니, 거짓말이다. 정말은 죄책 따위에 밀려 기회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 니카가 휘장을 걷어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에 참지 못하고 거짓말을 쏟아내 버렸다.

“나는 너의 연인이야.”

비겁한 기회주의자 바란 탈타미오. 거짓말쟁이에, 비열하고, 이기적이기까지 해. 바란은 속으로 생각했다. 니카는 나 같은 건 영원히 좋아해주지 않을 거야.

얼굴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니카는 놀라서 침대에 앉은 채로 바란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나는 너의 연인이야, 니카.”

바란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웃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달콤한 꿈을 꾸게 해준다면 충분하다. 바란은 그러면 몇 번이고 거짓말을 할 것이다.

* * *

“나는 네 연인이야.”

남자가 말했을 때, 니카의 모든 사고는 잠시 멈췄다.

방금 전 눈을 떴을 때부터 니카는 온통 낯선 것들 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고급 시트의 감촉과 시야, 약초 냄새, 따뜻한 실내의 공기나 격자무늬 창살. 그의 삶 속에서 언제나 거리가 있던 것들.

그중에서도 니카가 생각하기에 가장 낯선 것은 눈앞에서 울 듯이 미소 짓는 남자였다. 불타는 것 같은 빨간 머리가 잘 안 어울리기는 해도, 그는 누구나 선망하는 동화책 왕자님 같이 생겼다.

자신이 그를 알던가? 떠올리려고 했으나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켰다 풀렸다 하며 두통이 일었다. 신음하는 사이 누군가 니카의 못생긴 손가락을 붙잡았다. 니카는 따뜻한 체온이 닿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또 있을까. 

남자의 환한 웃음이 꽃망울 터지듯 번졌다. 빨간 머리칼이 쏟아져 내려 흰 얼굴을 조금 가렸다. 또 그의 녹아내릴 것 같은 눈빛에 대해 말하자면, 그건 여태까지 경멸과 혐오의 눈빛만 받고 살았던 니카가 난생처음 만나본 다정함이었다.

대체 그가 누구이길래 이렇게 니카를 따뜻한 눈으로 볼까? 자신이 비늘로 뒤덮이고 천박한 혼혈인임을 알기는 할까? 얼마 안 있어 그걸 알아차리고는 저 아름다운 얼굴을 멸시로 굳히며 돌아설 게 아닌가?

고민하던 니카의 눈이 빛줄기로 선뜩 간지럽다. 창문으로 스민 오전의 햇빛이 남자의 뺨을 말간 빛으로 때리며 부서지고 있었다. 남자는 니카의 거친 손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니카가 다급하게 붙잡힌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괜찮아.” 하고 그가 니카를 도닥이자 마법처럼 몸이 딱 굳었다.

그는 그다음엔 “그래. 착하지.” 하고 조금 웃었다. 니카가 겪어본 적 없는 나긋나긋하고 다정한,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이런 간지러운 감정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니카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고 그 어떤 거부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햇살에 옷을 벗은 나그네처럼 니카의 날 선 껍질이 힘을 못 쓰고 차근차근 녹아내렸다.

“널 좋아해. 네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아, 나의 니카.”

남자가 니카를 그의 것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소유하고 싶은 욕구 만큼이나 소유 당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힌 인연의 끈에서 언제나 배제되어 왔던 니카에게는 상투적인 소유격에 대한 뿌리 깊은 동경이 있었다.

‘당신의 니카?’

그래, 솔직히 말해서, 니카는 문득 그 입술의 말을 모두 믿어버리고 싶었다.

* * *

나의 니카.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란은 자조했다. 니카는 그의 삶 단 한 순간도 바란의 것이었던 적이 없다.

기억이 없으니 이것에 관해 뭘 알겠느냐만, 니카가 구태여 의문을 표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는 게 바란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죄책감 사이에서 기쁨이라는 하얀 싹이 움텄다. 이 자리에서 거꾸러져 죽어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니카는 한참이 지나서야 어렵사리 입을 뗐다.

“제가 당신의 연인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니카의 입에서 바란의 거짓말이 한 번 더 언급되었다. 바란은 그 되물음이 유독 심문관의 다그침 같다고 느꼈다. 기억이 나기라도 한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바란은 반대로 더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고개를 위로 젖히고 팔을 뒤로 뻗은 채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니카의 시선이 머뭇대며 밑으로 가라앉았다.

‘저 자신 없는 표정. 아직까지 내가 아는 니카 경이 아닌 건 확실하군.’

니카는 바란을 이리저리 눈치껏 살펴보면서 고개를 일으켰다. 바란은 니카가 더 누워서 안정을 취했으면 했지만, 그는 바란이 다가갈수록 오히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하게 된 것은 바란이었다.

그는 니카가 이불을 말끔히 걷어내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옷깃을 단정하게 가다듬을 때까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진땀을 뺐다. 곧 제 발이 저린 변명이 흘러나왔다.

“니카, 놀란 거 이해해. 나 같아도 기억에 없는 사람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연인이라고 나선다면-”

“왜 나 같은 것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십니까?”

니카의 작은 목소리에 바란은 뚝 말을 멈췄다. 그는 속으로 몇 번이고 니카의 목소리를 곱씹었다.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니카는 눈을 애매하게 피한 채 입술을 짓씹었다. 바란이 무언가 대답을 하려는 참에 니카가 뾰족한 투로 순서를 가로챘다.

“당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압니다. 돈 많은 귀족도련님, 잘생긴 외모에 화려한 화술…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을 텐데 왜 다른 누구도 아닌 고작 나 같은 것에게 거짓말을 하십니까?”

“거짓말?”

“날… 좋아한다거나 하는 말이요.”

고개를 든 니카의 눈길을 제일 먼저 사로잡은 건 바란의 눈동자였다. 평민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빛깔이었다. 새파란 빛깔임에도 타오를 것처럼 뜨겁다. 견딜 수 없이 분노한 기색이지만, 니카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대노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 왈칵 겁이 났다.

이 도련님의 손짓 한 번이면 니카 같은 고아는 단번에 모가지가 달아나고 말 것이다. 그가 아무리 니카에게 줄곧 꽃 같이 웃어주며 관대하게 굴고 있더라도 신분의 본질이란 그런 것이다.

바란이 니카의 멱살을 움켜쥐고 당겼다. 움직임이 거칠었다. 힘없이 딸려 올라가면서, 니카는 속으로 지금이라도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곧이어 다가온 바란의 잘생긴 입술은 분노로 벼린 험한 말들을 쏟아내기는커녕, 파충류의 비늘이 돋아난 니카의 왼쪽 뺨에 가벼운 친애의 키스만을 남기고 멀찍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 키스를.

니카의 온 몸이 얼어붙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그 감촉이, 누구나가 경멸하던 비늘 위로 내려앉은 따뜻한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다. 너무 간지러워서 손으로 벅벅 긁고 싶었다. 가려움에는 전염성이 있었다. 대치 상태가 계속되자 어느 순간부터는 식도와 뱃속, 심장, 모든 것들이 간질간질했다. 피가 너무 빨리 돌고 있었다.

니카는 바란을 멍청히 올려다보았다. 바란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분한 숨을 씨근덕거렸다.

“나를 철없는 도련님 취급하거나, 비겁한 자로 치부하거나, 그런 건 괜찮아. 나에 관해선 얼마든지 네 마음대로 생각해.”

“…….”

“하지만 내 마음이나 너 자신은, 낮잡아 말하지 마.”

그리고 저가 외려 더 상처받은 듯한 목소리. 저 따뜻한 목소리. 니카는 조심스레 제 왼쪽 뺨을 매만지며 바란의 입맞춤이 내려앉았던 걸 돌이켜 떠올려봤다.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했던 입술.

니카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바란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반이나 감추었다.

니카는 울지 않았지만 온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얼굴이 일그러져서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다. 열여덟이라더니 과연 표정이나 목소리에 평소와는 다른 치기가 있어 바란을 즐겁게 했다.

바란은 한참 그런 니카를 지켜보다가 주름이 진 윗옷을 가지런히 다듬어주곤 물러났다. 방을 나서려는 낌새를 알아챈 니카가 다급히 물었다.

“이름, 당신 이름은요?”

이름. 바란은 이전의 니카가 제 이름이 어떻건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었음을 기억한다. 어차피 ‘개자식’이나 ‘잔악후작’ 같은 잘 알려진 칭호로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니카가 제 이름을 묻다니….

바란은 가슴 속에 묻어둔 기억을 꺼내 들었다.

‘내 이름은 잔악후작도, 대공의 충견이나 개자식도 아니야. 바란 탈타미오지.’

그는 물론 니카의 입술에서 나온 건 뭐든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그날 이렇게 투정처럼 입을 뗐던 것은 가끔 아쉬운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답 대신 매서운 검격만 날아왔다.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힘을 힘겹게 흘리며 웃었다. 웃음을 보이니 니카의 기세는 훨씬 더 흉흉해졌다. 그는 그대로 두 발짝 물러서며 감정 없는 말을 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잔악후작.’

니카가 검을 고쳐잡았다. 무서운 눈빛이다. 바란은 항상 저 경멸 섞인 눈빛이 두려웠다. 무관심보다는 미움을 받는 게 낫겠다니, 말이야 참 그럴싸했다. 정작 화살촉처럼 잘 벼려진 혐오가 살갗에 스칠 때면 바란은 문득 입술을 열고 애원하고 싶어졌다. 아프다고, 제발 그만해달라고.

‘어차피 부를 리 없을 테니까.’

스스로에게 수없이 지껄였던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바란은 괜찮지 않았다. 니카에 맞서기 위해 검을 움킨 팔이 맥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좋아해달라는 과분한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이름을 한번 불러주었으면 했다. 떨리는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 달라진 점이 있을까? 바란은 자신의 입술이 얼마나 기괴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지 손끝으로 더듬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며 바란의 세상을 점점이 끊어 놓았다. 모두 다. 바란은 대답했다. 모두 다 달라졌어.

“바란, 바란 탈타미오.”

바란은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니카가 어차피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을 적과는 사뭇 다른 감상이 밀려왔다.

* * *

“믿기지가 않아.”

바란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같은 얘기를 수없이 늘어놓았다. 그의 흰 손가락이 마호가니 책상을 경쾌하게 두드리며 누볐다.

“니카가 내 이름을 불러줬어. 이건 정말 처음 있는 일이야. 그리고 조금 눈을 피했는데, 또 고맙다고도 했어.”

바란은 제 침실을 홀린 듯이 나서서 레이먼드가 있는 집무실에 다다르기까지 거의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레이먼드가 조심스럽게, “후작님?” 하고 그를 지칭하자마자 잇새로 몰아쉬는 날숨이 터져 나왔고, 그 이후로는 줄곧 저 상태였다.

바란처럼 고립된 고위귀족에게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토로할 상대가 많을 리 없다. 결국 이 되풀이되는 경험담을 인내하는 것은 오롯이 집사 레이먼드의 몫이었다. 그는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서 조잘거리는 바란을 눈엣가시 같다는 식으로 흘겨보았다. 바쁜 서류작업을 도맡은 걸로도 모자라 애 보기까지 곁들여진 기분이라니.

“기억도 없는 놈이 뭐가 고마운지 온전히 알기나 할까요?” 

레이먼드의 목소리는 절로 불퉁하게 나왔다. 바란은 그 말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으로 레이먼드의 말씨를 타박하지 않고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해가 안 가긴 해. 그가 내게 고마울 게 뭐가 있다고?”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죠.”

레이먼드가 바쁘게 움직이던 깃펜을 잠시 내려두고 손가락을 차례로 꼽았다.

“전장에서 아군을 죄다 죽이면서까지 구해준 것, 그걸 또 말에 몰래 태워 성으로 데려온 것, 의원을 붙여 밤낮으로 치료하고 돌본 것. 마지막으로, 대공에게 들키면 모가지 뎅겅 할 각오로 유아 퇴행한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점 모두 각골난망 해야 마땅하죠.”

“유아 퇴행이라니, 말조심해. 기억상실 같은 고상한 병명이 있는데.”

바란이 레이먼드에게 단호히 주의를 주었다. 레이먼드는 코웃음을 칠 뿐 정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 주인이 기쁜 마음을 감당 못 해 들떠있는 꼴을 보고 짧게 혀를 찼다.

붉게 달아오른 뺨과 열병이 오른 저 눈빛이라니. 그는 꼭 첫사랑을 앓는 십 대 소년처럼 굴고 있었다. 그 잔악후작 바란 탈타미오가 이렇게 사랑 앞에 얼뜨기가 되는 줄을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놀라워할까?

헛웃음도 잠시, 레이먼드는 얼굴을 굳혔다. 그건 결단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짧게 문질러 지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 기억상실증이라니 일이 복잡하게 되어버렸잖습니까.”

불리한 화제가 나오자 바란이 한껏 올라갔던 입매를 일자로 꾹 다물었다. 공중에 붕 떠올라 있다 말고 돌연 찬물을 뒤집어쓴 표정이었다.

“주인 있는 사냥개를 기를 순 없어요. 아시잖아요.”

레이먼드는 요 며칠간 한숨이 부쩍 늘었다. 그는 속으로 정수리 언저리에 새치도 한 움큼 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복이 되는 대로 성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왕녀나 왕자 쪽으로 바로 넘겼으면 좋겠지만, 요즘 날이 서 있는 대공의 눈을 피해 접촉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어떻게 하죠?”

바란은 레이먼드의 지적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왕녀, 더 크게 보아서 왕자 측 사람인 니카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대공파에서 그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리란 건 자명했다.

바란은 이를 꾹 악물었다. 절로 힘이 들어간 손톱이 손바닥의 연한 살을 파고들었다.

무엇보다, 근 육 년간 갖은 고초를 견뎌가며 가까스로 얻어낸 대공의 신뢰를 잃게 되리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바란의 안에 남아있는 이성이 무얼 고민하느냐고 자기주장을 폈다. 여태까지의 노력을 단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셈이야?

‘그리고, 여기에 머물러 있는 건 니카에게도 하등 좋을 게 없지. 지금 당장은 기억이 없어서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는 더 나아. 아무튼 내가 데리고 있어서는 곤란해.’

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의 한가운데에서 잔악후작 바란 탈타미오가 감당하고 있는 역할은 누구보다 거대했기 때문에,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체스판의 전세가 뒤집혀버릴 수도 있었다.

‘니카를 내보내야 해. 이 또한 니카를 위해서다.’

니카의 체력이 회복되기만 하면, 노잣돈을 두둑이 챙겨준 채 영지 바깥으로 향하도록 쫓아내야 할 것이다. 열여덟 이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남자를. 홀로 따돌림당하던 삶만을 기억하고 있는 가련한 그의 사랑을. 

‘그렇지만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니카를 성 바깥으로 내보낸다고 하면, 그가 당장에 갈 곳이 있기나 할까? 고아로 자라나 친인도 없는 혼혈인이 어디 몸을 의탁할 수나 있을까. 혼자 헤쳐나가기에 그는 어리고 요령이 없어.’

불안의 탈을 쓴 이기적인 합리화가 연이어 피어올랐고 바란의 낯빛은 창백해져만 갔다. 그 낌새를 눈치챈 레이먼드가 충심을 다해 간언해왔다.

“제발, 그 보모 같은 눈빛 좀 집어치우세요. 후작님. 당신이 대공의 신임을 얻으려고 온갖 더러운 일에 휘말리곤 했던 거 잊으셨습니까? 그걸 버텨온 게 모두 무엇 때문이었는데요?”

어린 후작이라 하여 업신여겨지고 도축과도 같은 학살을 도맡으며 조롱당하던 일들. 앙살라테 왕자에게 은혜를 입고도 등 돌렸다며 배신자 소리를 듣고 살았던 것도. 대공의 남첩이라는 공공연한 뒷소문. 아우 클라텐의 쓰레기를 보듯 하는 시선, 또 사랑하던 니카의 경멸을 견디던 일까지도.

그걸 버텨온 게 모두 무엇 때문이었냐고 묻는다면. 바란은 잠시 돌이켜 생각해본다. 

* * *

“이봐, 일어나. 그 정도 잤으면 충분하잖아.”

바란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번쩍 눈을 떴다.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낯선 천장과 호화로운 실내 샹들리에였다. 그는 처음 보는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고, 베갯잇에서는 낯선 향기가 났다.

바란은 숙부의 병사들에게 쫓기다가,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에게 몸을 의탁하고서 탈진하듯 정신을 잃었던 걸 어지러운 머리로 가까스로 기억해냈다. 그런데 대관절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꼬마, 어리버리하지 말고 날 보라고.”

옆에서 들리는 건 방금 바란을 잠에서 깨운 오만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더니, 색소가 옅은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구김 없이 다림질된 실크로 차려입었고, 또 고귀한 신분이 짐작되는 곱상한 생김새였다.

바란은 그를 처음 보았지만, 이 남자가 어두운 숲속에서 그를 구해주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은 단번에 알았다. 바란이 경계심을 세우며 눈을 가늘게 뜨자, 남자는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뭐야, 조그마한 게 다 죽은 생선 눈깔을 해가지고…. 니카 경, 이런 고깃덩이 같은 놈을 대체 어디에 쓰려고 주워 왔어? 사람 주워오는 건 수리만으로 충분하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남자는 바란을 깨워놓고도 별로 대화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대신에 바란의 존재를 이유 삼아 니카라는 사람을 핀잔주었는데, 바란은 이게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잠시 망연하게 있었다. 남자 이외에도 한 명이 더 곁에 서 있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다른 한 명의 남자가 깔끔하게 대답했다. 이 사람이 바로 니카일 것이다. 바란이 그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챈 데는 이유가 있었다. 거추장스럽게 늘어뜨린 휘장에 가려 그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목소리는 기억에 있다. 죽게 내버려 두라며 어린애처럼 울고 고집 피우는 바란을 품에 안고 달래던 그 목소리다. 이 너머에 있는 게 바란을 구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그 사람일 것이다. 그의 옷깃에 얼마나 눈물을 문질러 닦았는지 떠올리니 뒤늦은 부끄러움이 온몸을 잠식해 귓등까지 달아올랐다.

“…아직 어린아이이기에, 눈앞에서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니카가 짧게 덧붙였다.

어린아이라니. 바란은 지난주에 이미 열여덟이 되었다. 사정상 성인식을 치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성인의 나이가 되어서 아이 대접을 받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다만 최근 피죽도 못 먹은 채 숙부에게서 줄곧 달아나느라 볼품없이 살이 빠져서 그렇게 보인 것 같았다.

니카라고 불린 남자는 구차한 변명을 붙이지 않고 이만 입을 꾹 다물었는데, 바란은 문득 그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에 익사할 것처럼 울던 자신을 서툴게 도닥이던 진중한 목소리가 어떤 입술에서 나왔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힘겹게 꿈틀거리며 침대의 캐노피를 힘겹게 걷어냈던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언제나 하찮도록 짧은 순간의 일이다. 바란은 멍하니 눈꺼풀을 깜빡였다.

잠자리 날개 같은 새하얀 휘장이 자리를 비키며, 그 사이로 까만 시선이 바란을 마주 보았다. 음침하게 늘어뜨려 반쪽 얼굴을 다 가린 머리칼이나, 다소 신경질적인 눈매, 무뚝뚝하게 다물린 입술, 그런 건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바란은 그 순간을 평생토록 기억하기로 정했던 것 같다.

니카는 바란과 눈이 마주치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누군가는 운명을 느낀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흥이 없는 여느 때와 같다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그가 바란이 정신을 차린 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반갑거나 기꺼워하는 기색을 내비쳐 주었다면 정말 기뻤을 테지만,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 건 오직 바란만의 사정이었고, 니카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바란이 우왕좌왕 시선을 옮기는데, 니카가 말을 걸어왔다.

“눈을 뜨지 않아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나.” 하고.

그게 다였다. 그 이상 어떤 시시한 위로의 말도 없이 니카는 곧 방을 나갔다. 끔찍하리만큼 말솜씨가 없는 남자였다.

바란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니카와 같은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건 저택의 주인인 앙살라테 왕자가 허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란을 흔들어 깨웠던 그 남자가 알고 보니 왕자였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놀라웠지만 적응이 되니 금방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왕자는 첫인상 그대로 오만한 사람이었지만 고대룡의 피를 이은 왕족 씩이나 되어서 그 정도 오만하지 않기도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또 기민하고 영리해서, 바란의 연심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그가 되었다. 바란은 연무장 구석에서 니카를 훔쳐보는 일을 들킨 이후로 짓궂게 괴롭히는 왕자를 피해 다니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일방적으로 몸을 의탁한 관계에 변화가 온 것은 왕자의 제안 때문이었다. 기를 써 가며 숨기고 있던 제 성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왕자는 어느 날 문을 거칠게 밀고 들이닥쳤다.

“꼬마! 네가 탈타미오의 적자였을 줄이야. 이제 보니 니카 경이 혜안이 있어 너를 주워왔던 모양이군.”

니카가 온전히 선의로 행한 일을 혜안이니 계산이니 해 가며 얼룩지게 만드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바란은 왕자가 니카를 치하하는 말을 늘어놓자 기분이 상했다. 

“앙살라테 드라코슨의 이름을 걸고, 본래 네 것인 자리를 되찾도록 도와주마. 대신에 너는 내 가장 귀한 장기말이 되는 거야. 곧 일어날 전쟁에서 너는, 대공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그를 기만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해.”

내전에 대비한 간자로서 바란을 적진에 욱여넣겠다는 소리였다. 바란 그 자신은 어린 소년에 불과하거니와 탈타미오 후작가의 이름이 붙는다면 이용할 데가 있다는 얘기다.

바란은 제 부모님도 더는 없고 아우는 떠났으며, 숙부가 저를 죽이면서까지 탐하던 가문의 이름이지만, 그럼에도 왕위 다툼에 판돈으로 걸고 싶지는 않았다.

망설이는 소년 하나 구슬리는 것쯤은 능구렁이 왕자에게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앙살라테는 고상하게 웃으며 지푸라기 같은 어린 바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언젠가 내가 대공의 목을 잘라 개선할 때에 너에게 내 오른편 자리를 주겠어. 약속해. 그리고 노고의 대가로 네가 바라는 일을 무엇이건 하나 들어줄 거야. 네가 칙칙한 눈깔을 하고 있긴 해도 원하는 거, 갖고 싶은 거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응? 갖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것이요?” 

앙살라테 왕자는 구전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속살거렸다. 갖고 싶은 게 있냐는 말에 곧장 떠오르는 게 있어 망설이게 됐다. 왕자가 흔들리는 바란의 눈동자를 보고 달콤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처음에 고깃덩이니 생선 눈깔이니 하면서 무안을 줬던 건 없는 일이라는 듯이 천연덕스러운 웃음이었다.

왕자는 바란이 이 제안을 거절할 리 없다는 듯이 말했고, 그의 말마따나 바란은 그를 단호히 내칠 수 없었다. 바란은 입술을 몇 번 허투루 끔뻑이다가 그 어둠이 내렸던 날, 숲속에서, 자신을 한참 끌어 안아준 손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묻어버렸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왔다.

“저는, 제가 갖고 싶은 건….”

* * *

“내가 왕자와의 엿 같은 거래를 견딘 이유가 뭐였냐면, 레이먼드.”

바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망설임과 고뇌가 말끔히 씻겨나가 일견 개운하게도 보였다. 반듯한 얼굴에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감이 있을 적에만 떠오르는 미소였다.

“어떻게 해서든 갖고 싶은 게 있었거든.”

니카를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바란은 사랑이란 게 아름답고 신성한 일이라고 찬미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의견이 달랐다. 지금처럼 니카 본인과 니카를 사랑하는 본인의 연심 사이에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바란은 칠 년간의 고뇌 끝에 결국 자기 자신을 선택했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당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레이, 사람들이 짝사랑을 왜 정신병이라고 부르는 줄 알아?”

“학구적인 근거를 들라고 말씀하신다면, 글쎄요. 하지만 눈으로 보고 납득하게 된 바는 있죠.”

“하하.”

바란은 집사의 뼈 있는 말에도 건조하게 웃었다. 턱을 괴고 비뚜름하게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며 의연하게 말했다.

“니카는 기억을 찾고 나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그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뒤에 탈타미오 성안에 가둬둘 생각이거든. 이걸 내 인생 마지막 소원이라고 해도 좋아.”

레이먼드는 처음엔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바란의 파란 눈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미간을 형편없이 구겼다. 바란이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창백히 질린 얼굴로 숫제 대단하다는 듯 혀를 찼다. 

“당신 사랑이란 거 진짜 신물 나요.”

그리고 더 말이 없는 걸 보니, 바란이 마음 바꿀 생각이 없는 것도 아는 모양이었다.

“과찬의 말씀.”

어깨를 으쓱이는데 시중인이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라 말하니 조심스러운 태도로 문을 열고는 예의 그 의원이 탕약을 만들어 니카에게 전달했다고 말했다. 의원의 말로는 니카의 경우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원인일 가능성이 있어 심신이 안정을 취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말로 미루어 그 탕약이란 틀림없이 농후한 진정제일 것이다. 바란은 그런 종류의 약들을 안다. 마시고 얼마 안 있어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면, 손끝 발끝이 나른하게 무뎌지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쯤이면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낯선 장소에서 홀로 혼란스러울 니카의 곁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아무래도 도로 니카를 보러 가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바란이 방문을 나서려고 하자 레이먼드가 기겁을 했다.

“뭐야? 후작님 간만에 집무 보러 오신 줄 알았더니, 왜 벌써 가세요?”

“수고해, 내 집사.”

귀족가에서는 듣기 힘든 상스러운 말들이 집무실로부터 쏟아지는 것을 들으며 바란은 킥킥 웃었다. 그리고 니카를 만나러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곧장 그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정갈하게 걷던 발걸음의 박자가 점차 빨라졌다. 두 발이 재게 교차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바란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복도를 채운 몇 안 되는 시중인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아렸지만 바란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멀리 복도 끝에 침실 문이 보였다.

니카가 있다. 저 너머에.

‘공기마저 황홀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너는 왜 항상 내 세상을 통째로 바꿔놓을까.’

문 앞에 다다르자 바란은 뛰던 걸음을 느릿하게 늦췄다. 문 너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말 이미 잠이 든 건지 고요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노크를 하면 방해가 될 것이다. 바란은 문고리를 쥐고 망설이다가 이내 조용히 문을 밀었다. 열린 문 틈새를 조심스레 엿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 바란이 잠들던 곳인데 마치 처음 오는 장소처럼 생경했다.

그런데 노크조차 하지 않고 숨죽여 들어온 것이 민망하게도, 니카는 깨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 안에 우뚝 서 있기까지 했다.

바란의 기척이 느껴지자 문 쪽을 홱 돌아본 니카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니카가 바란의 이름을 기억하고 무심결에 “바란.” 하며 소리내어 불렀다는 점이었다. 바란은 그 입술에서 제 이름이 발음되는 걸 듣고 몸을 움찔 떨었다.

바란은 우두커니 서서 한동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입술이 몇 차례 꿈틀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렸다. 평소에 너무도 사랑하던 니카의 진중하고 낮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발음한 순간, 바란의 가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파문이 일었다.

‘내 이름을 불렀어.’

바란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그러니까 좀 전에 이름을 알려달라고 한 거, 고맙다고 한 것도, 모두 꿈이 아니었다고. 니카가 나를 ‘바란’하고 불러줬어.’

바란은 별종처럼 보이기 전에 눈시울에 맺힌 물기를 얼른 말리고 털어냈다.

“미안해. 네가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바란은 감격에서 간신히 벗어나 변명했지만 니카의 눈빛이 오히려 매서워지자 혀를 깨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다고 무작정 문을 여는 것은 무례한 짓이지. 알아. 나는 그냥 네 잠든 얼굴만 확인하고 도로 나가려고 했어.”

니카가 털을 쭈뼛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하던 태도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바란은 자신이 아무런 적의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두 손을 들어보이며 니카에게 다가섰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니카의 검은 머리칼, 강건한 몸, 딱딱한 입매와 경계심 많은 성격까지도 모두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표정이었는데, 바란이 그에게로 한 발짝 다가갈 때마다 니카의 표정이 안절부절못하고 요동치는 것은 쉽게 구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이시여. 바란은 속으로 신을 찾았다. 니카가 입술을 깨물거나 그 어린 짐승 같은 까만 눈으로 바란을 비출 때마다 뜨거운 피가 위로 치솟으며 머리가 팽팽 돌았다.

“니카, 마시지 않았구나.”

바란은 침대 옆 협탁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약사발을 보고 니카에게 말했다. 조금 타이르는 투였는데, 그건 니카에게 아주 낯설고 간지럽게 들렸다.

“마셔도 소용없었을 겁니다.”

바란이 약사발을 집어 드는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던 니카가 말했다.

“어지간히 강한 약이 아니라면 나에게는 듣지 않으니까요.”

“정말로?”

“용인은 그렇습니다.”

이건 몰랐던 사실이다. 바란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니카를 바라보았다. 약이 듣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더 권하기도 애매한 일이었다. 사실 약이 듣는다고 해서 처음 보는 사람이 먹이는 약을 순순히 목구멍으로 삼킬 니카가 아니기도 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니카였다. 바란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약을 가져다준 의원이 거울을 보여주더군요.”

니카는 주먹을 꾹 움켜쥐고 굳은살과 흉터로 가득한 손을 내려다보면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바란으로서는 그가 느끼는 감정이 어떤 종류일지 유추할 수 없었다.

“거울을 보고 놀랐습니다. 나이가 많아 보였어요. 또, 키도 커졌고….”

심각한 고민에 잠긴 니카의 모습이 귀여워서 분위기에 맞지 않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니카가 매섭게 노려보았기 때문에, 바란은 제 입술을 곧장 틀어막아야 했다.

무안해진 바란의 시선이 니카의 손에 닿았다. 마디가 불거진 굳은살투성이 손은 바란이 니카에게서 가장 사랑하는 부분이었다. 바란의 입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잠깐의 평화는 바란의 시선을 눈치챈 니카가 화들짝 놀라 손을 등 뒤로 감추는 바람에 깨어졌다. 니카는 문득 바란의 시선에서 냉정한 태도로 비켜난 것이 바란에게 어떤 상처라도 남겼을까 염려된다는 듯이 조금 눈치를 보았다. 성격이 훨씬 섬세하다. 안에 든 것이 과연 열여덟은 열여덟인 모양이었다.

바란은 평소 이것보다 몇 곱절은 잔인한 방식으로 뿌리쳐지기가 일상이었으므로 니카의 무심함에는 면역이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은 니카가 그걸 알 도리는 없었고, 결국 그는 얼마 안 가 바란에게 사과했다.

“…손가락이, 더 흉측해졌습니다.”

바란은 그 말을 단번에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니카는 안절부절못하다가 토로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요. 그래서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흉측하다니? 바란은 잠깐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며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그는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그 흉측한 손가락을 바란이 얼마나 매만졌는지 짐작이나 할까? 그 손가락에 입 맞출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면 바란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 상상이나 해 봤을까? 그 흉측한 손가락이, 죽음을 각오했던 그 차갑고 축축한 숲속에서, 바란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알고 있을까.

“흉측하지 않아. 내게 보여줘.”

바란이 속삭였다. 니카는 움찔 떨며 몸을 사렸다. 하지만 바란이 그의 손을 끌어다 쥐는 것에 저항하지는 않았다. 바란은 니카의 울퉁불퉁한 손등에 그의 보드라운 뺨을 괴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예뻐. 너무 예쁘다고, 니카.”

니카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을 살폈다. 점차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은 당연했다. 마수혼혈인을 배척하는 환경 속에서 천애고아로 자라나며 자존감을 갖출 수 있었다면 그게 더 신통한 일일 것이다.

니카는 항상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려 왼쪽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 너머에는 토룡의 것과 같은 검은 비늘이 드문드문 돋아 있었다. 이것이 그의 혈통을 숨길 수 없게 했다. 누구든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 니카의 정체가 두 다리로 걷는 흉측한 토룡이 인간 여자에게서 얻은 새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꼬리가 달린 다른 용인들에 비하면, 니카는 토룡의 형질이 많이 드러나지 않아 운이 좋은 경우였다. 뾰족한 동공과 왼쪽 뺨의 비늘만 잘 감춘다면 사람들은 니카가 천한 집시 혈통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당장 용인이라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물론 발각되는 순간에는 괘씸죄라는 것이 적용되어 괜히 한 대씩 더 얻어맞을 구실이 생겼다.

사람들은 상냥하게 다가왔다가도 니카가 마수혼혈인임을 깨달으면 그의 발치에 침을 뱉고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모욕하며 떠나갔다. 가끔은 니카의 앞에서 성호를 그었는데, 이는 니카에게 구원을 내려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더러운 것을 물리쳐달라는 의미였다. 바란이 알지 못하는 까마득한 예전부터 니카는 그렇게 살아왔다.

바란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니카에 대한 연민이 애틋한 감정과 섞여 아주 애절한 성격의 감정으로 변했다. 니카도 그걸 느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마법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바란은 니카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았다. 니카는 어쩐지 조금 떨고 있었다. 바란의 손가락이 니카의 왼쪽 얼굴을 덮은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걷어내는 참에 니카의 눈 속에 불꽃이 탁 튀었다. 그리고 마법이 깨졌다.

“어쭙잖은 동정심으로 찔러보는 거 그만두세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그런 식이라면?”

“예쁘다, 좋아한다, 연인. 그런 단어들! 나는 구역질이 나니까!”

바란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눈살을 찌푸릴 뿐 대꾸하지는 않았다.

“당신 같은 도련님들 심리야 뻔합니다. 약간의 호의를 보여서 환심을 산 후에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게 당신들 취미잖습니까!”

니카가 바란의 손을 붙잡아 밀쳐내며 소리쳤다.

“분명히 말하지만 당신이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 니카.”

숨을 몰아쉬는 니카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네가 화를 내지 않았으면 해. 나는 너의 모든 모습을 전부 좋아하지만, 가능하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건 나를 세상에 둘도 없이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

바란은 잠깐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네게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나? 너무 많아. 행복, 기쁨. 또 가끔은 슬픔, 분노까지도.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전부 다.”

“이해가 안 돼요.”

“억지로 이해할 필요는 없어. 나에게도 그건 힘든 일이거든. 그냥 한 가지만 알아주면 돼.”

“한 가지?”

“내가 너를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

니카는 그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뺨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새빨간 얼굴로 바란에게 “괜한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거짓말인 거 다 압니다. 그러니 그만 하세요. 그 말 무르세요.” 따위의 말을 구호처럼 계속 외쳤다.

바란은 “그래, 그래.” 하며 웃어넘길 뿐 좋아한다는 말만큼은 결코 무르지 않았다.

니카는 여전히 바란의 말을 믿지 않는다며 털을 세웠지만 그 태도가 누그러진 것은 눈에 띌 정도였다. 바란은 기뻤다. 니카와 그 사이에 무한하게 펼쳐져 있던 거리가 조금 줄어들어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바란이 꿈꿔 왔던 상황이었다.

바란은 니카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자 다시금 의원을 호출해 진찰하도록 했는데,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던 의원이 니카의 상태가 아주 정상이며, 앓았던 기색을 찾는 게 더 힘든 일이라고 했다.

어깨의 상처도 거의 붙어서 붉은 새살이 오르고 있으니, 흉이 조금이나마 덜 지도록 청결하게 관리하기만 하면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 용인의 치유력이 인간의 수십 배에 이른다고 전해 들었는데 정말 사실이었다며 놀라워했다. 그는 괜히 용인의 특이성을 언급했다가 바란의 노려보는 눈길에 움찔 놀라 쫓겨나듯 방에서 나가야 했다.

“궁금한 게 많을 테지, 니카.”

진찰을 위해 억지로 침대에 앉혀진 니카가 바란에게 시선을 주었다. 여태 귀족에게 대드는 무례한 짓은 다 해놓고서 종종 이렇게 겁먹은 눈초리로 바란을 올려다보았다. 바란은 열여덟 니카의 다듬어지지 않은 무모하고 감정적인 면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만찬을 함께 먹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

“만찬이요?”

“그래. 여태 방에서 식사하느라 탈타미오의 일품요리는 맛보지도 못했잖아, 안 그래? 내가 이따가 사람을 보낼 테니까.”

니카는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별달리 대꾸하지 않았고, 그건 바란에게 긍정의 뜻으로 비춰졌다. 이후 바란은 만찬에 얼마나 다양한 음식이 올라올 것인지에 관해 늘어놓았지만 니카는 제대로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바란이 홀로 떠드는 동안, 니카의 시선은 이따금 바란의 즐겁게 상기된 뺨을 아닌 척 살피곤 했다.

* * *

“너무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 자연스럽게 보여야 해.”

바란은 거울 속 정장을 갖춰 입은 어색한 제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공식 행사에서나 입는 옷이었다. 평상시에는 느슨한 셔츠나 튜닉을 헐렁하게 입고 들고양이처럼 쏘다니는데, 갑자기 이렇게 각을 잡으려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건 느껴지도록….”

“그럼 이렇게 하세요.”

바란이 수선 부리는 걸 구경하던 중년의 시녀가 그의 넥타이를 끌러냈다.

“넥타이는 정말 아니에요. 누가 집에서 넥타이를 하고 다닌담?”

바란은 그런 시녀에게 미심쩍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제 모습을 찬찬히 둘러보더니 “좀 낫군.” 하고 인정했다. 정갈한 바지에 면직 셔츠를 입은 것만 해도 충분히 낯선 변화다. 실제로 좀 전에 드레스룸을 거쳐 간 집사 레이먼드는 술에 취했냐며 혀를 찼었다.

니카의 눈에는 그런 어색한 점이 추호도 안 비치도록 해야 할 텐데. 바란은 팔자에도 없는 옷가지 고민에 머리가 팽팽 도는 것만 같다.

시녀가 갑자기 손을 뻗어 바란의 셔츠의 단추를 두 개 끌렀다. 인자한 웃음소리에 바란은 무슨 짓이냐고 대꾸하려다 말고 거울 안을 바라보았다. 싸구려 같은 빨간 머리를 한 청년이 고급 정장을 평소처럼 건들거리는 맵시로 입고 있었다.

“훨씬 낫네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세요. 후작님은 어릴 때부터 늘 이렇게 시정잡배처럼…. 어머나, 실례.”

바란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오래도록 부모처럼 알아온 시녀가 아니었다면 이 한마디로 해고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시녀는 불편한 표정을 한껏 드러낸 바란에게 겁먹지 않고 말을 맺었다.

“어쨌건 예전부터 늘 이렇게 느슨하게 하고 다니셨죠. 굳이 자신이 아닌 모습을 뽐내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바란 탈타미오다워요.”

바란은 그렇게 한참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비추어보며 옷을 골랐다. 시녀가 “니카 경께 안내를 보낼까요?” 하고 물어오지 않았더라면 드레스룸에서 하루종일도 보냈을 법 했다. 바란은 시녀의 말에 그러도록 지시하면서 마지막으로 겉옷을 걸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 걸치고 방을 나섰다.

식사 홀은 성의 1층에 있었다. 국경에 근접한 탈타미오 성은 예로부터 잦은 전쟁을 겪어와서 성곽이 튼튼하고 투박한 만큼 구획도 실용적이었다. 공성전을 할 적마다 무너지면 다시 지어야 했으니 괜한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먼저 홀에 도착한 것은 바란이었다. 그는 지시한 대로 촛불이며 꽃이며 낭만적으로 구성된 식탁보까지 꼼꼼하게 살피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흠이 있었다. 식탁이 너무 길었다. 그게 예법이기는 하지만,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마주 보고 앉으면 니카가 너무 멀다. 표정이라도 어렴풋이 살필 수 있으면 다행인 거리였다.

식탁보를 매만지는 바란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가라앉았다. 아쉬운 마음에 어떤 핑계를 대야 의자 배치를 가깝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바란은 결국 니카와의 동석을 포기해야 했다. 기분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처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니카 경은?”

“아직 당도하지 않았습니다. 마틸다가 맡아 모셔오겠다고 하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바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틸다라고 하면 탈타미오 가에서 일한 지가 벌써 스무 해가 지난 믿음직한 시녀였다. 바란이 대공에게 거짓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왕자의 비밀스러운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을 무렵, 탈타미오 성안의 모든 고용인들은 입이 무겁고 신뢰가 가는 자들만 남기고 모두 해고되었다. 가족이 있는 자들은 협박에 쉽게 굴복한다 하여 거진 잘렸다.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니카는 재킷을 어색하게 고쳐 입었다. 소매가 좀 짧았다. 명백하게도 그 남자, 바란 탈타미오의 옷일 것이다. 딱딱하게 풀을 먹인 옷깃이 서걱이며 살갗을 쓸었다.

니카는 탈타미오 성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뻣뻣하게 걸었다. 먼지 한 톨 없는 공간에 유일한 이물질이 되어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탈타미오 성은 투박하지만 두텁고 웅장했으며 위로부터 니카를 짓눌러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이쪽입니다, 경.”

탈타미오 가의 시녀가 니카를 이끌었다. 한갓 천민에게 대하는 것 치고는 너무도 공손한 태도였다. 니카는 이런 공손한 대접이 익숙지 않아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시녀가 만찬 홀의 거대한 나무문을 밀어젖혔을 즈음에 니카는 거의 바닥으로 꺼질 것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주인님, 니카 경입니다.”

중년의 하녀는 쭈글쭈글한 손을 앞치마 밑으로 받치며 예의 바르게 말했다. 홀 안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식탁과 맛있는 향기, 또 따뜻한 조명을 맞닥뜨리자 니카는 그나마 남아있던 현실감을 모두 잃어버렸다.

잘 꾸며진 식탁 앞에 서서 꽃병 안의 백합을 정돈하던 새빨간 머리칼의 청년이 인기척을 느끼고 다급하게 니카를 돌아보았다.

“니카.”

바란은 니카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이미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니카는 무심코 감탄했다. 정말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웠다. 좀 전과는 달리 지금은 근사하게 차려입기까지 했다. 바란은 정말 영락없는 왕자님처럼 보였다.

‘저런 사람이 왜 나를 볼 때 저렇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웃을까? 주머니에 꾹 욱여넣고 참았던 웃음이 결국 바느질이 연약한 틈으로 툭 터져 나오는 것처럼.’

니카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옷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막상 내 눈으로 보니 상상 이상이야. 정말 예뻐.”

바란이 팔자에도 없는 고급 옷을 입은 니카를 보며 꿈꾸듯이 말했다. 그는 니카가 그 소리에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보고는 기겁해서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했다.

“아차, 예쁘다는 말하지 말랬지. 미안해.”

바란이 정말로 더 이상의 칭찬은 그만두고 입을 다물자 의외로 더 무안한 기분이 드는 것은 니카였다. 그는 워낙 말솜씨가 없어서 능숙한 대답은커녕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바란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런 행동이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자, 서서히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이리로 와, 니카.”

다행히 니카가 더 고민하기 전에 바란이 의자를 빼며 자리를 인도해주었다. 니카가 순순히 그 자리에 앉자 의자의 둥그런 귀퉁이를 아쉽게 매만지던 손가락이 느지막이 떨어져 나갔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니카! 네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우선은 식사를 좀 하자고. 너도 줄곧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으니 많이 시장할 거고 말이야.”

바란은 모처럼 얻은 꿈결 같은 순간이 기계적인 분위기에 물드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말을 돌렸다.

니카는 좀 불만스러웠지만 항상 굳은 듯 똑같은 표정 덕택에 딱히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란이 도피로써 이뤄낸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니카가 음식들은 본체만체하고 자꾸만 질문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 나이가 얼마입니까?”

“…….”

“또 주변에서 자꾸만 저를 경이라고 부르더군요. 그건 기사들에게나 주어지는 칭호가 아닙니까?”

바란은 깨작이며 샐러드를 뒤적이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무심한 사내 같으니. 분위기를 못 읽는 무정한 성격은 그가 열여덟이건 몇 살이건 관계없이 아주 똑같다. 바란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는데 마음처럼 태연한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니카가 이런 식으로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바란은 애써 움켜쥔 보물이 고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는 것 같았다. 이기적인 감상이었다.

“궁금한 게 너무 많습니다.”

니카는 바란의 짧은 한숨소리를 멋대로 해석했다. 바란이 그의 반복된 질문을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 귀찮게 굴어 죄송합니다. 저따위의 보잘것없는 혼혈인에게 이미 많은 친절을 베풀어주신 줄은 압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말랬잖아.”

바란이 힘없이 웃으며 니카가 초조하게 말을 덧붙이는 것을 막았다. 그는 고민에 잠겨 무릎 바로 위에까지 늘어지는 식탁보의 치렁치렁한 프릴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려면 좀 가까이 앉는 게 좋겠어.”

니카를 근처에 앉힐 만한 핑곗거리가 생겼다. 바란의 표정이 좀 풀렸다.

“열여덟 이전의 기억만 갖고 있다고 했던가? 사실 네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나 역시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아. 너는 과거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무척 꺼렸거든. 하지만 어른이 된 너의 삶에 관한 이야기는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어.”

바란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란은 한순간이라도 니카의 모습을 놓치지 않도록 눈꺼풀을 바짝 들어 올렸다. 니카는 팔랑이는 바란의 속눈썹이 붉은 머리칼과는 다르게 황금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너를 ‘니카 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물론 네가 기사이기 때문이야. 너는 약관의 나이에 왕국 기사가 되어 변경지역에서 혁혁한 공을 쌓았어. 국왕 전하께서는 유명해진 너를 불러들여 직접 왕실의 기사로 삼았지. 일개 기사로서는 정말 특별한 일이야.”

바란은 위인전에나 나올 법한 달콤한 이야기를 부풀려서 늘어놓았다. 바란의 말에 따르면 니카는 왕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기사 중 하나였고, 그가 불의로부터 구해낸 목숨은 왕성부터 대륙남부의 사막까지 줄을 세우고도 남았다.

“너의 삶은 완벽했어. 누구든 널 부러워했지. 그런데 이번에 북부 야만인을 소탕하다가 놈들의 비겁한 술수에 당해서 머리에 상처를 입은 거야. 의원은 네 기억상실이 두부에 가해진 충격 때문이라고 했어.”

거짓말은 항상 시작이 어려울 뿐 조금 있으면 아주 유창한 진실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바란은 티끌 없이 웃었다. 그는 니카를 혼혈인이라며 경멸하는 왕국민들이나 그의 연심을 알고도 이용하는 왕녀, 또 내전상황에서 니카가 보아 온 온갖 추악한 꼴을 일깨워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이 거짓말이 얼마나 이어질지 몰라도, 바란은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로나마 행복을 흉내내어 보여주고 싶었다. 니카는 그가 자라온 환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단어들이 바란의 입술에서 나열되자 썩 당황한 눈치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내게 믿으라는 겁니까?”

“하지만 정말인걸. 너는 왕국 제일의 검사이니 그런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야.”

“왕국 제일의 검사?”

바란이 니카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빨간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귓바퀴를 조금 덮었다.

“너는 어릴 적부터 검에 재능이 있었지, 그렇지?”

그러자 집중해서 듣고 있던 니카가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뺐다. 바란은 얼굴이 씰룩이며 미소 짓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지만 뒤늦게 웃음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니카의 뺨이 장밋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바란의 상냥한 표정을 곁눈질로 살피며 이것이 과연 믿어도 좋은 이야기인지 가늠했다. 어릴 적부터 검에 일상을 쏟아부으며 노력해온 니카에게 검 한 자루로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는 건 일생의 꿈을 이뤘다는 소리만큼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혼자서 그만큼의 성취를 내는 건 어지간한 천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난 당장에라도 훌륭한 가정교사를 끼고서 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귀족을 열 명도 더 꼽을 수 있어. 그거 알아? 너는 말이야, 니카….”

니카가 바란의 올곧은 칭찬을 받아내지 못하고 맥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머리카락이 쏟아지면서 니카의 새빨간 귓등이 바깥에 드러났다. 바란은 맥락 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무진장 쏟아내고 싶은 기분을 참느라 느릿하게 속으로 열까지 세었다.

감정을 꼭꼭 눌러 담아 조금 거칠어진 목소리가 끝내 한 줄기 새어 나왔다.

“넌 정말 특별해.”

진정 마법 같은 말이었다. 니카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 * *

어릴 적의 일이었다. 니카는 그날도 같은 보육원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신전의 뒷마당 그늘진 곳에 홀로 앉아 있었다. 거기서는 조잡한 목검으로 칼싸움을 하는 사내애들이나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흙장난하는 여자애들이 모두 보였다.

니카는 내심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무리에 끼어들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곁에 얼쩡거리며 관심을 호소했다간 용인 따위가 주제를 모른다 하여 뺨을 맞고 흙바닥에 나뒹굴게 될 것이다. 음침한 구석에서 구부정하게 쪼그려 앉아 눈치를 살피는 것이 니카에게는 최선이었다.

니카가 그런 식으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아이들은 종종 수다에 너무 빠져들면 정신을 멀찍이 잃어버리곤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다. 한자리에 앉아서 거의 한 시간 내내 떠들던 여자애들 중 하나가 옆구리에 곱게 끼고 온 동화책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그만 깜빡 잊은 것이다. 니카는 그들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으니 그 애가 책을 놓고 가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는 아이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양지로 살금살금 기어나가 빈자리에서 그 책을 주웠다.

책은 흔히 보던 시시하고 낡은 보육원 기증품이 아니었다. 드물게도 깔끔하며 가죽으로 덧댄 표지를 가지고 있었다. 니카는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러면서 한번 말을 붙여보거나 감사인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동시에 과연 이 책이 어떤 내용일지 호기심이 들었다. 잠깐 들춰본다고 책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니카는 슬그머니 책장을 넘겨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글을 배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간이 무척 오래 걸렸다.

그건 낭만소설이었는데, 어린 여자애들이 읽는 소설 중에서는 드물게도 특이한 주인공이 나왔다. 그건 몸집이 집채만큼 거대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왕자의 이야기였다.

왕자는 사악한 마녀의 독에 당해 비척이며 숲속을 헤매이다가, 숲에 숨어 사는 커다란 아가씨 이너머스의 도움으로 살아나 왕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이너머스의 고운 심성에 반해 다시 한 번 숲으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왕자는 놀랍게도 이너머스의 거대한 모습을 보고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정말 특별하군요.”

니카는 그 대목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해가 꼴딱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서 아이들이 하나둘 저녁을 먹으러 사라질 때까지 몇 번이고 읽었다.

끝내 니카는 그 책을 훔쳐서는 그의 낡은 침대 골조 사이에 숨겨두기까지 했다. 도둑질은 니카의 어린 가슴이 불안함과 죄책으로 무너질 만큼 뛰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욕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 그 어릴 적부터 특별하다는 단어에는 그의 가슴을 때리는 묵직함이 있었다. 그건 니카를 혼혈인도, 용인도, 한낱 고아도 아닌 단지 니카로서 존재하게 만들어줄 마법의 주문 같았다. 

머지않아 니카가 그 말을 동경하게 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이들과 사제들에게 핍박받고 모욕을 당할 때마다, 니카는 곰팡내 나는 보육원의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그 말을 떠올렸다. 당신은… 정말로… 특별해.

자기 자신이 끔찍해서 죽을 것 같을 때마다 누군가 귓전에 대고 저렇게 속삭여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얼굴에 돋아난 혐오스러운 비늘을 진물이 날 때까지 벅벅 긁어 떼어낼 때도, 종종 날카롭게 서는 동공에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때도. 보육원 애들에게 반항 없이 구타당해 흙바닥을 뒹굴거나 응달에 쪼그려 앉아 혼자 울음을 삼킬 때도. 내심 누군가 그의 혐오스러운 면들도 실은 특별한 부분에 불과한 거라고 말해주기를….

“넌 정말 특별해, 니카.”

바랐다.

* * *

“울지 마, 울지 말라니까. 응? 제발.”

바란은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들썩였다. 니카의 두 뺨이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줄기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니카가 돌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을 때 바란은 꼭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니카를 만난 이후 우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인 데다가, 바란이 워낙 이기적이기는 했어도 니카가 슬프기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니카가 슬플 바에야 그가 고통스러운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미안해.”

바란은 다만 그가 니카를 울렸다는 생각에 풀이 죽어서 영문도 모르고 사과했다. 니카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사과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조금 놀라서.”

니카는 말을 잇다가도 흐느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입을 막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때 니카의 눈앞으로 한 손이 뻗어왔다. 니카는 멍하니 그 손안에 엉망으로 박힌 굳은살과 흉터, 또 손가락 끝에 작은 점이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손끝, 팔, 셔츠의 소맷귀, 더 나아가니 바란의 고운 얼굴이 보였다. 표정은 다소 침울해졌지만 이너머스를 사랑한 왕자처럼 화려한 이목구비는 감상적인 분위기에 젖으면 더 아름다웠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어.”

바란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니카의 턱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닦아냈다. 그리고 거기까지 미끄러진 눈물 궤적을 타고 살며시 기어 올라갔다. 뺨이 간지러웠다. 니카는 아주 짧고 재채기처럼 들리는 웃음을 픽 터뜨렸다. 이윽고 따뜻한 온기가 니카의 왼쪽 뺨을 감싸 안았다. 왼쪽 뺨. 니카는 불에 덴 듯이 놀랐다.

“더럽습니다.”

니카는 왼쪽 얼굴에 돋은 비늘이 바짝 일어서 바란의 손바닥에 오톨도톨한 질감을 남길 것만 생각해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바란의 태도가 돌변하기라도 할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바란을 뿌리치려고 했다.

“손을 떼세요. 만지지 마십시오.”

사실은 정말로 바란을 뿌리치려고 했으면 이미 나가떨어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이 용인의 근력에 대항해 버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바란은 제 손목을 붙잡고 떨궈내려는 듯이 뭉그적거리는 니카를 보며 설핏 웃음 지었다.

“있잖아.”

그러다가 니카의 순한 검은색 눈과 시선이 맞닿았을 때, 바란은 정말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니카가 말하는 대로 손을 떼어내는 대신 나머지 한 쪽 손으로 반대편 뺨도 감싸 올렸다.

석고상같이 창백한 니카의 얼굴이 바란의 두 손 사이에 붙들렸다. 눈물은 어느새 그치고 무척 놀라 눈이 휘둥그레 했다. 바란이 나직이 물었다.

“입 맞춰도 되나?”

* * *

바란은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더 참을성 있게 굴어야 했다. 거의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보여서 무심코 욕심을 내버렸다. 사실은 한참 더 참을 수 있었다. 또 그래야만 했다. 평소에 니카의 멸시를 견딘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는데, 순간의 이기심이 결국은 일을 낸 것이다.

성급한 접근에 길고양이는 달아나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다. 길고양이와 니카는 닮은 데가 있다. 니카가 바란의 마음을 가벼이 여겨 다시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바란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촛불이 타들어 가는 오붓한 식사자리에 니카는 이미 떠나고 그 홀로 앉아 있었다.

사실은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분위기와 이기심에 휩쓸려 니카를 배려하는 방법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바란은 몇 번이고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멍청한 바란 탈타미오.’

니카가 식겁하여 달아나는 것도 당연했다.

니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참 동안 바란을 노려보더니 결국 도망쳐버렸다. 바란은 처음에 니카를 따라나서려고 했으나 그 단호한 뒷모습에 예전의 무정하고 또 잔인했던 그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울컥 겁이 치밀었다. 그래서 바란은 니카를 뒤쫓아가지도 못하고 무너지듯 자리에 도로 주저앉았다.

“너무 우쭐했군. 또 조금 초조했고….”

바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앞이 캄캄하게 가려졌다.

“그를 손안에 넣었다는 착각을 했나. 갈 데 없는 니카의 상황을 이용해서 고립시키는 주제에.”

축축한 자기혐오의 늪이 바란의 머리꼭지까지 차올랐다. 폐부로 진흙이 밀려들어 숨을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온통 먹먹했다. 바란은 제자리에 움츠러들었다.

“니카는, 나 같은 건 영원히.”

무력감이 온몸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손끝 발끝에까지 힘이 쭉 빠졌다. 그런데 이렇게 앉아 있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에 대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고, 바란은 즉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니카는 아직 차갑고 잔인한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또한 아직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았고, 바란은 한번 거짓말을 시작한 이상 뭐가 되든 결과를 보아야 했다.

“멍청이 같이 얼어붙어 있을 시간 없어. 니카는 언제든 기억을 되찾을 수 있고, 그러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나를 증오하게 되겠지.”

바란은 어렴풋하게 증오로 가득 찬 니카의 시선을 상기했다. ‘그것보다 더?’하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났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바란은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이며 걸었다. 곧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는 “안 되지, 안 돼.” 하고 중얼거리며 옷맵시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정돈한 다음에 반듯하게 서서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 * *

왜 이렇게 지독할 정도로 사랑하게 되었느냐면, 우선은 그 말이었다.

‘괜찮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깨를 보듬어 안는 서툰 손길. 그다음은 어색하게 건네준 걱정했다는 말. 다행이라는 말. 바란 같이 어린 외부인의 시시껄렁한 잡담마저도 진지하게 경청하던 그 태도라거나. 또 어린 짐승처럼 순수한 두 눈동자….

바란이 그에게 반한 수 없이 많은 순간들을 모두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뒤에서 몰래 지켜본 니카의 수련하는 모습도 그중 하나였을 것임은 틀림없었다.

앙살라테 왕자가 그의 세력을 모으며 머물고 있던 저택에는 기사들의 수련을 위해 마련한 연무장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니카는 꼭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지 않고 정원 한구석에서 검술을 연마하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사들 사이에서도 은근한 따돌림이 있지 않았겠는가 싶다.

어쨌든 한밤중에 니카가 검을 휘두르는 우아한 모습을 독점할 수 있었으니, 바란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바란은 밤마다 정원으로 나가 정원수 사이로 니카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한 번은 관목 뒤에 웅크려 앉아서 멍하니 니카의 검날이 은빛으로 반사되는 것을 보다가 들켜버린 적이 있었다. 멍청하게도 욕심을 부려 너무 가까이 앉아버리는 바람에, 니카가 능히 기척을 느낄 만한 거리에 있었던 까닭이었다.

“누구냐.”

니카는 바란의 턱밑에까지 검을 들이밀었다가, 곧 구름이 걷히고 내리 쬐이는 달빛에 드러난 바란의 얼굴윤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렇게 볼품없이 마르고 지푸라기 같은 머리칼을 한 꼬마는 기억에 있었다. 니카는 바란에게 접근하거나 깊게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여기까지 데려온 책임감을 느끼기는 했다.

니카가 멋쩍게 검을 거두며 어린애를 대하듯이 자상하게 말했다.

“너로구나.”

워낙에 무뚝뚝한 목소리라서 그 자상한 기색이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바란은 그 차가운 얼굴과 목소리에서도 속이 간지러울 만큼 따뜻한 위로가 느껴져서 몸이 절로 꼬였다.

“왜 나와 있지?”

바란은 사실상 니카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단둘이.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그것도 달빛 아래서 나누는 대화라니. 이제야 겨우 청년의 나이로 들어선 바란에게는 태연한 척 이겨내기 너무 힘든 시련이었다.

바란은 가장 분위기 있고 그럴싸한 대답을 찾아내느라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던 것을 기억한다. 니카에게는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한참이 걸려서, 대답을 하기는 했다. 멍청하게 말머리를 더듬으면서 말이다.

“꽃을… 꽃을 보려고요.”

“꽃을?”

니카가 의아하게 물었다.

“이 밤에 말인가?”

바란은 허가 찔리자 그만 어쩔 줄 모르고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데 니카는 더 이상 이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주변의 꽃나무들을 살며시 돌아보았다. 바란을 무안 주지 않으려고 한 행동일 것이다. 그의 고요한 눈길이 숙부로부터 도망쳐 나온 깡마른 꼬마 바란을 향했다.

“그런가. 많이 좋아하는가 봐.”

꽃을 좋아하느냐는 의미였다. 이해했다. 바란은 영리했으니 그깟 문맥을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바란은 잠깐 입술을 열었다가, 또 닫고, 몇 번이고 망설이며 뻐끔대었다. 니카는 차분히 그것을 기다려주었다. 바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좋아해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파란 눈이 니카의 창백한 얼굴을 오롯이 마주 보았다.

* * *

“니카, 여기에 있어? 있다면 제발 대답을 해줘.”

바란은 무작정 정원을 헤맸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 때문에 니카가 정원에 있을 것이란 근거 없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그 밖에도 홀을 나오면 바로 정원이 펼쳐지는 탈타미오 성의 구조 상 이쪽으로 오는 것이 합리적이기도 했다.

“니카?”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말로 니카가 정원의 어두컴컴한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것이다. 그는 흙바닥에 웅크려 앉은 채 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었다. 바란은 그 곁에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니카에게 손을 대도 좋을지, 아니면 먼저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바란은 니카와 조금 떨어진 바닥에, 그와 비슷한 자세로 웅크려 앉았다. 니카는 얼굴을 팔에 파묻고 있었다. 바란은 엉거주춤하게 니카를 계속 지켜보았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바란이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직 초가을이지만 밤공기가 차가워. 네가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이 돼. 이만 안으로 들어가자.”

“용인은…. 감기에 걸리지 않습니다.”

“나는 그래도 걱정할 거야.”

바란이 제 팔에 입술을 파묻으며 대꾸했다. 입술이 눌려서 어눌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니카가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바란은 제자리에서 꼬물거리며 넌지시 니카의 허락을 구하기 시작했다.

“네 옆으로 다가가서 앉아도 될까? 그러면 조금 더 따뜻할 텐데. 싫은가?”

“…….”

“그러면 아주 조금만 다가가는 것도 안 돼?”

니카가 조금 시선을 들어 바란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빛 안에서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바란은 그 감정을 낱낱이 나누고 분석해서 니카의 속을 전부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니카는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안 됩니다.”

“…….”

“왜 다가오시죠?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니카가 꼼지락거리며 앉은 자리에서 한 발짝씩 다가오는 바란에게 사납게 일갈했다.

“제 의견은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행동하시는군요. 방금처럼요.”

그 말에는 바란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질렸다. 사위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낯빛이 질린 것을 보았으면 니카는 바란이 어딘가 아픈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안해.”

“…뭐가요.”

“입 맞추려고 한 것.”

니카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대화를 거부하는 것처럼 제 팔에다 다시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어쩐지 시무룩하게 보였다. 바란은 무언가 말실수를 했었는지 고민스럽다.

“어차피 알고 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구역질이 났을 겁니다. 내 동공은 종종 세로로 길게 찢기고 또 비늘이 바짝 설 때면 영락없는 파충류처럼 보입니다. 예, 면전에서 토악질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대단하다고 할 만하군요.”

“넌 아름다워.” 

“또래 도련님들과 용인을 속이는 걸로 내기를 하기라도 했다면 그들에게 가서 당신이 이겼노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좋아.”

니카가 순식간에 덮쳐들어 바란의 멱살을 잡아 찍어눌렀다. 그는 분노에 못 이겨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쌕쌕하는 숨소리가 바란의 귀에 커다랗게 들렸다. 바란은 등 뒤로 느껴지는 푹신한 잔디와 뺨을 간질이는 니카의 머리카락 사이에 끼어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다. 니카가 악문 잇새로 애걸하듯 말했다.

“제발 그만 하세요. 부탁입니다.”

“…….”

“나는 가진 적도 없던 것을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바란은 옷깃을 움켜쥔 니카의 강인한 주먹을 제 손으로 덮었다. 바란의 손이라고 마냥 부드럽고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 나름대로의 인생을 헤치고 온 거친 손이었다. 온기가 닿자마자 니카는 불에 덴 듯 손을 놓았다.

“너도 그만해.”

“무얼 말입니까?”

“내가 입 맞추기를 바랐다는 듯이 말하고 있잖아.”

니카가 바란의 위에서 휘청이며 물러났다. 바란은 니카의 손목을 억세게 잡아챘다.

“잘 들어. 너에게 사과하는 이유는 내가 너무 제멋대로 굴었기 때문이야. 너를 좋아한다고 몇 번이고 말한 주제에 너를 배려하지 않았지. 정말 미안해. 하지만 오해하지는 마.”

“…….”

“나는 언젠가 너에게 입 맞출 거야. 단지 그걸 내 마음대로 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는 거라고. 알아들어? 나는 네가 괜찮다고 생각하고 또 정말로 그걸 바랄 때, 그때 비로소 다가갈 거란 말이야.”

“왜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왜 나 따위에게 맞춰서 자신의 권위를 자꾸만 낮추죠?”

바란이 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가 붙잡은 니카의 울퉁불퉁한 손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건 아주 신사적인 행동으로 보였다.

“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니카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고를 수 있다면 지금 당장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커다랗게 부풀어서 배꼽 주변이나 목젖 주변까지 간지럽혔다.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니카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고 그대로 떨리는 손을 들어 어렵게 바란의 빨간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어둠이 내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에 스치는 거친 머릿결은 확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 내려가 반듯한 이마를 타고 손을 미끄러뜨렸다. 날렵한 콧대와 보드라운 피부가 손끝으로 느껴졌다.

“내 연인이라고 했죠.”

“그래.”

니카가 바란의 보드라운 입술에 손을 댔다가, 그 감촉에 놀라 화들짝 바란을 밀쳤다. 바란은 제자리에서 휘청이다가 결국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여전히 안 믿습니다.”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군.”

“…내가 싫어졌나요?”

“조금은.”

니카는 눈치를 보듯 말이 없어졌다. 바란이 픽 웃었다.

“그런데 방금 그 두 배 만큼 좋아졌어.”

* * *

“세상에, 주인님. 그리고 니카 경까지. 어린아이처럼 뒹굴며 흙장난이라도 하신 겝니까? 전쟁 중의 피난민보다 꼴이 더하시군요. 지금 제가 거울을 보여드릴 수 없는 것이 통탄스러울 뿐입니다.”

마틸다가 호들갑스럽게 야단을 쳤다. 바란은 거의 그녀의 아들뻘이고, 또 그녀와 평생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으므로 상하관계를 엄격히 따지고 들기가 어려웠다.

바란은 앓는 소리를 내며 마틸다의 불같은 시선을 피하다가 니카와 눈이 마주쳤다. 니카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길로 바란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바란은 니카의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것이 신경 쓰여서 마틸다의 말을 자르고 슬그머니 이야기를 마치려고 했다.

“마틸다. 지쳐서 이만 쉬고 싶은데.”

“그 난리를 쳤으니 피곤하기도 하시겠지요.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 두 분 모두 침실로 가 계세요.”

마틸다는 눈을 흘기면서도 바란이 원하는 대로 이만 그들을 놓아주었다.

“니카 경께선 시녀들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침실을 따로 마련해두었으니까요. 상황을 고려해 주인님과 가까운 곳을 머무실 곳으로 정하였으니, 부디 편히 지내셨으면 합니다.”

그가 정신을 잃고 누워있을 적처럼 바란의 침실을 둘이 나눠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란은 아쉬운 마음을 감출 길 없이 묵묵히 걷는 니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니카는 결국 바란을 연인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바란은 정원에서의 짧고 전쟁 같았던 대화를 통해 막연히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곧 어떤 확신으로 변했다. 니카의 깊은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한 발짝 뗐다는 그런 확신. 니카가 언젠가는 마음을 열어주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언젠가라는 단어로는 안 된다. 바란은 초조한 숨을 삼키며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이쪽입니다.”

시녀가 니카를 이끌었다. 니카의 방은 놀랍게도 바란의 침실 바로 맞은편이었다. 마틸다가 신경을 쓴 것이었다. 사실 그 방은 예로부터 후작부인이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바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영문을 모르는 니카는 고분고분히 시녀를 따라 후작부인의 침실로 사라졌다.

“마틸다는 늙은 여우야. 니카에게 안주인의 방을 자연스럽게 내어주는 그 말솜씨 너도 들었지? 정말 능청스럽다니까.”

바란은 김이 오르는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며 목욕시중을 드는 시녀들에게 투덜거렸다. 보안상의 이유로 신뢰할 수 있는 시녀들만 성안에 남긴 까닭에, 목욕시중을 드는 시녀들도 나이가 지긋한 여인들뿐이었다. 그녀들은 잠자코 시중을 들다가 바란의 말에 공손히 대답했다.

“마틸다는 주인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을 파악한 것뿐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험담을 하실 게 아니라 칭찬을 하시는 게 마땅합니다.”

“정말이지 바른 소리만 하는군…. 어쨌건 나도 험담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

바란이 웃으며 욕조 끝에 비스듬히 상반신을 기대었다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니카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바란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염려하며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목욕가운을 걸친 채 복도에 나왔다. 니카의 침실은 문이 반쯤 열린 채였고 안쪽에서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경, 목욕시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귀족가의 법도입니다. 처음에는 어색하실지 몰라도 몇 번만 익숙해지신다면 곧장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내치시면 안 됩니다.”

시녀들이 보송보송한 수건과 비누 등 온갖 목욕용품들을 각자 손에 들고 니카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니카로 말할 것 같으면 여인들이 상대라 차마 강경하게 거부하지 못하고 소파 뒤의 구석진 자리에 구부정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니카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낯선 여인들 앞에서 알몸이 되어 목욕시중을 받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법도라고 해도 니카에겐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랑이를 벌이던 니카와 시녀들이 바란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그가 참다못해 맑은 웃음소리를 터뜨린 후였다. 시녀들은 깜짝 놀라서 “주인님!” 하고 외쳤는데 말씨에 꾸짖는 기색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바란은 목욕을 하다 말고 욕조에서 나와 맨몸에 가운을 한 장 걸쳤을 뿐이었다. 물기로 축축하게 젖어서 가운이 몸뚱이에 납작하게 달라붙었다. 몸의 굴곡과 가슴, 맨다리가 훌쩍 드러나 보였다.

“니카, 목욕시중이 불편한 건가?”

“…….”

“왜 눈을 피해?”

바란이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여인들이 있어서 쑥스러워 그런 것 같았다. 바란은 시녀들을 물렸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어.”

텅 빈 방에 단둘이 남았다. 마틸다가 다급히 정리한 방 안에는 연한 향수 냄새가 감돌았다. 오랜 기간 비어있던 후작부인의 방에서 먼지와 곰팡내를 몰아내려 했을 것이다. 바란은 아직 물기가 남은 맨발로 폭신한 융단 위를 걸었다. 눈으로는 정돈된 침대와 내부 장식들을 살펴보았다.

니카를 머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무렵, 니카가 말문을 텄다.

“대체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사실 니카의 말은 투덜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바란은 처음에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랬더니 니카가 목소리를 높였다.

“나에게 감기 걸리겠다고 걱정을 늘어놓고서 정작 본인은 꼴이 그게 뭐냔 말입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맨몸이 훤히 다 보입니다.”

“뭐야. 왜 화가 났어?”

니카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당황한 바란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니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본래 낯빛이 창백한 편이니 조금만 분기가 올라도 얼른 드러난다. 그런 면도 귀여웠다.

“우선은 허리끈부터 제대로 좀 여미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니카가 홱 돌아서서 바란을 등졌다. 바란은 잠깐 천장과 벽지의 무늬를 바라보고, 또 침대와 소파 따위의 가구에 시선을 주었다가, 마지막으로 니카의 아름다운 검은 머리칼을 보았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발가락부터 어깨선까지 단번에 타고 올라왔다. 전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너 지금 내가 헐벗었다고 부끄러워 한 거야?”

그는 자신의 희멀겋고 흉터로 가득한 몸을 이리저리 내려다보다가 문득 터져 나오는 웃음을 그대로 두었다.

“하하, 내외하는 거 같아서 재미있네. 또 귀엽고….”

니카의 까만 머리카락이 머리가 움직이는 대로 춤을 추었다. 지금의 경우에는 가로로 살랑거린다.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봤자 니카의 비언어적인 모든 수단, 이를테면 표정과 목소리, 눈빛 하나와 소파를 짚은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떠는 행동들이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란은 그런 니카가 너무도 귀여워서 무심코 등으로부터 꼭 끌어안았다. 옆구리로 든든한 팔을 끼우고, 니카의 가슴팍 앞에서 양손을 꼭 맞잡으니 거의 포박한 것 같이 되었다.

니카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바람에 바란은 거의 따귀를 맞을 뻔했다. 니카로서는 기습을 당한 셈이니 그 정도에서 끝난 것만 해도 다행이기는 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니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안 돼?”

바란은 니카의 탄탄한 등에 가슴팍을 기대며 온기를 느꼈다. 니카가 몸을 뒤틀었다. 그가 정말로 원한다면 바란이 이렇게 버티고 서 있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아니, 어쩌면 니카는 모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정도는 봐줘. 나는 오늘 너에게 입 맞출 기회도 모두 포기했는데….”

“정말이지!”

니카는 암만 입막음을 하려고 노력해봐도 바란에게서 낯간지러운 말이 거의 습관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깨닫자 혀를 깨물고 싶다는 표정을 했다.

그는 등과 가슴이 맞닿아 있는 자세는 도무지 못 견디겠다며 바란에게 몇 번이고 떨어지라고 소리쳤다. 바란은 무엇이든 니카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 니카가 호통을 친 지 얼마 안 되어서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에 계실 겁니까? 저도 몸을 씻어야 하고, 그리고 당신도 목욕물이 식어버리기 전에 돌아가야 하지 않습니까?”

니카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니카는 몸에 어색한 고급 셔츠와 꼭 달라붙는 가죽바지를 당장에라도 벗어버리고 김이 뜨끈하게 오르는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시녀들이 바깥으로 밀려난 사이에 혼자 목욕을 끝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바란이 도와주지 않았다. 그는 계속 니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묻기까지 했다.

“시녀들이 불편한 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필요 없습니다.”

“혼자 씻겠다는 얘기야?”

그는 니카가 긍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혀를 찼다. 아쉬운 감정이 너무도 역력해서 니카의 양 볼이 불을 붙인 듯이 달아올랐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너는 법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시녀들에게도 말해둘 테니까.”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는 니카의 예상과는 달리 바란은 순순히 이만 가보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멈칫 니카의 욕조물 안에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더니 뜨거운 물을 더 부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녀 하나를 불러들여 더운물을 더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화려한 설화석고 용기를 넘겨받았다. 바란은 능숙하게 목욕물에 향유를 두 스푼 떠 넣고 휘저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허브 냄새가 났다.

“시녀가 돌아와서 온도를 맞춰주면 들어가. 지금은 물이 많이 식었으니까.”

그렇게 설명하는 바란의 모습은 평소처럼 귀족적이지 않았다. 목욕물을 준비하는 허드렛일 따위에 대해 잘 아는 듯이 설명하는 것은 별로 품위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니카가 아연한 시선으로 바란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어?”

“…익숙해 보이시는군요.”

“응.”

그는 니카에게 무언가 대답을 할 적에, 보통 거기에 얽힌 일화나 소소한 개념까지 전부 다 긁어내서 설명해주고 싶어 했는데, 이 질문에 대해서는 웬일로 말을 아꼈다.

“그래.”

바란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니카를 뒤로하고 방에서 나왔다. 문이 닫히고 니카의 까만 눈동자도 그 너머로 묻혀버렸을 때, 비로소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힘없이 떨리는 손끝으로 꾹 주먹을 쥐었다.

* * *

청명한 하늘 아래 나팔소리가 한바탕 시끄러웠다. 개선행렬을 반기는 나팔이었다.

탈타르의 대로에 양옆으로 도열한 대공파 귀족들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말굽이 달각대는 위로 축복의 꽃잎을 뿌렸다. 이 행렬은 해자 위로 내린 튼튼한 다리를 건너서 탈타르의 영주성 안으로 이어졌다. 버선발로 나와 헬린 힐벤 대공을 안으로 맞이한 탈타르 영주 뒤로 한껏 거드름 피우는 노인이 서 있었다. 다름 아닌 사사바란 공작이었다.

“감축드립니다, 힐벤 전하! 과연 예언에 합당한, 진정한 용이십니다.”

사사바란 공작이 흐뭇한 박수소리로 힐벤 대공을 반겼다. 머리가 다 벗겨진 늙은이는 젊은 대공에게서 왕국의 미래를 보았다. 다섯 아들과 작위, 가문 대대로 벌어온 자금과 영지를 모두 걸고 확신할 만큼이나 충성을 바쳤다.

기대가 무색하지 않게 대공은 잇따른 승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왕국의 젖줄 다르탈루 강에서 먼 동쪽으로부터 시작된 접전은 어느 새 서쪽으로 더 치우쳐 있었다. 칠 년간의 내전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투구를 벗은 대공이 긴 머리칼을 고쳐 묶으며 씩 웃었다. 제 사람에겐 생김새만큼 나긋하게 구는 남자였다.

“공, 먼 길 왔군요.”

짧은 치하에 감격한 노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대공이 건틀렛을 벗고 있었다면 그 위에 입이라도 맞췄을 기세였다. 대공의 곁에 있던 우직한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대공의 최측근 수하인 달틴 사사바란은 사사바란 공작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냐, 이 자식아. 전하는 잘 모시고 있느냐. 이 미진한 아들놈이 전하께 폐를 끼치지는 않는지 아비로서 늘 걱정입니다.”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달틴 사사바란 경은 내가 가진 최고의 기사입니다.”

“하하하! 그리 말씀하시니 마음이 좀 놓입니다.”

공작은 지병이 있어 대개 남동쪽의 영지에 틀어박혀 있곤 했는데, 이번에 대공이 다르탈루 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개선을 보러 무리하게 탈타르까지 나아온 참이었다.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대공이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아, 예언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듣자 하니 남쪽 집시들이 용의 혈통이 따로 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고 다닌다던데요.”

“참으로 어이없는 뜬소문이지요. 제가 남부인으로서 말씀드리건대, 고대룡 재림은 백 년 전부터 연례행사처럼 돌았던 소문입니다. 집시들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샤먼인지 뭔지, 그런 구시대적인 선무당 놀음에 휘둘려서는… 쯧쯧.”

대공은 종자들이 달라붙어 갑옷을 벗겨주는 대로 가만히 서서 공작의 말을 들었다. 남부인답게 지나치게 떠벌리는 경향이 있기는 해도 공작은 믿을 만한 정보통이었다.

공작이 좋을 대로 지껄이게 두고 보던 대공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연이은 전투로 쌓인 피로와 욕구를 잠시 다스렸다. 영양가 없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는 도중 종자 아이 하나의 하얀 목덜미에 눈길이 갔다. 딱지가 앉기 시작한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어쩌다가 상처가 났지요.”

“저, 그, 전하. 송구합니다. 대련을 하다가….”

손을 뻗어 그 위를 꾹 누르며 무심히 속삭여 물었다. 벌레를 아무런 의도 없이 꾹 눌러 죽일 수 있는 순진무구한 잔인성이 대공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피와 상처는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다. 상처를 터트리고 좌우로 잡아 뜯어서 그 속을 낱낱이 보려던 참에 공작의 시끄러운 함성이 산통을 깼다. 대공은 살풋 눈썹을 찌푸렸다.

“샤먼의 예언은 다 개소립니다.”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건 말건, 침을 튀기며 예언이 지목한 용혈, 왕좌에 합당한 유일한 자가 헬린 힐벤 대공임을 역설하던 사사바란 공작이 시원한 결론을 내렸다. 물론 종자의 목덜미에 난 상처에 관심을 온통 기울이고 있는 대공에게는 이것도 별 감흥 없는 소리로 다가왔다. 그나마 사사바란 공작을 보고 싱긋 웃어준 것이 최선이었다.

“아시겠지요? 그런 사이비 예언자 집시들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전하. 껄껄!”

“그거 잘됐군요.”

대공은 공포로 얼어붙은 종자에게서 용혈의 예민한 후각으로 피 냄새를 흠뻑 맡았다. 술기운에 취하는 것 같은 알딸딸한 감각이 밀려왔다. 대공의 동공이 좁혀들었다. 그는 웃음을 흘리며 종자의 귓가에 바람결보다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따 내 막사로 들어와요.”

무력한 사냥감이 오들오들 떠는 모습을 막간의 여흥으로 즐기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