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세탁소에 들러 회사로 돌아온 진은 오늘 목록에 있는 손님들에게 일제히 카드와 선물들을 발송한 뒤 클랜과 클레어의 결혼식 뒤 피로연에서 쓰일 요리 목록과 샴페인 명단 등을 확인한 뒤 예복 가봉 날짜와 시간을 정리하곤 그에 따른 지시들을 내리느라 분주했다.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점심시간에는 에이먼이 애지중지하는 인형옷의 신상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아 그쪽에도 들러야 한다. 결혼식에 쓰일 꽃들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근처의 플로리스트의 사무실을 들르는 김에 들러야겠다고 스케줄첩을 정리하던 진은 전화벨 소리에 재빨리 환한 음성으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블리스 사입니다.”
「진, 이거 네 짓이지?」
시간을 보니 슬슬 사라의 어머니와 언니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예상했던 바라 진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사라, 뭐가? 문제 있어?”
「어머니랑 언니 부른 거 말야. 대넌이 갑자기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가보니 공항에 언니랑 엄마가 와 있잖아.」
“전화한 건 제가 맞지만, 지시한 건 대넌이야. 전용기까지 보내줬다니까. 내가 마음대로 대넌의 전용기를 쓸 수 있나?”
물론, 쓸 수 있다. 지금 애클랜드 가에서 전용기를 갖고 있는 건 대넌과 에이먼뿐이었는데, 진은 그들의 전용기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스에 있는 그들의 고급 빌라도 마음껏 쓸 수 있다. 애초에 필요하면 쓰라고 내준 것도 그들이었다. 딱히 그런 걸 쓸 시간적 여유가 없어 고사하긴 했지만 쓸 수 있긴 하다.
「진, 시치미 떼지 마. 저 둔하기 짝이 없는 대넌이 이렇게 쓸만한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아.」
“사라, 이제 그만 용서해줘. 대넌이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사라를 진짜 사랑하잖아.”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 용서를 하지.」
“임신한 거 얘기해. 대넌이 아주 좋아할 거야.”
「……그건 좀 더 두고 보고.」
“그러다 배부르면 어쩌려고?”
「배가 산처럼 불러도 모를 남자야. 비만이라고 다이어트 하라고 할걸.」
“설마…….”
「17년을 살았어. 그 남자는 그런 남자야.」
“그래도 사랑하잖아.”
「그 놈의 사랑. 막 입덧 시작하려고 해서 힘들었는데 엄마랑 언니가 와서 다행이야. 마음도 더 편해졌고 좋다. 고마워, 진.」
“뭘, 당연한 걸. 몸조심하고 다른 데는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안정해야 돼. 고령 임신이라 무슨 일 생길지 모르니까 간호원 하나 꼭 대동하고. 내가 브렛에게 얘기해서 한 명 보내줄까?”
「브렛은 안 돼. 그럼 대넌이 금방 알 거야.」
“하긴, 그럼 다니던 병원에서 한 명 보내달라고 해.”
「알았어. 그럼 끊을게. 아, 저녁에 시간 돼? 같이 저녁 했으면 좋겠는데.」
사라의 제안에 진은 자신의 스케줄첩을 내려다봤다. 딱히 다른 스케줄은 없다. 하지만 오늘은 블리스의 저녁 스케줄도 빈 채라 사라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좀 바쁠 것 같은데.”
「그럼 어쩔 수 없지. 아, 그리고 어제 멋졌어. 대넌도 아주 극찬을 하더라. 브루스가 오늘 퇴원하는데 결혼 전에 시간 내서 가족들끼리 식사하자고 했대. 너한테 한 턱 내고 싶다더라. 킴이랑 재키한테도 이제 됐으니 집에 들어오라고 했대. 다 잘 됐어.」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불독, 아니 브루스가 드디어 그 충격을 털고 일어난 건 아주 기쁜 일이고, 애클랜드 가 사람들과 식사를 하겠다 청한 건 결혼을 정식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니 클랜과 클레어뿐 아니라 대넌을 위해서도 아주 잘된 일이긴 하지만 그 이유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라, 그런 걸로 칭찬받아도 조금도 기쁘지 않아. 제발 어제 그 생방은 기억에서 지워줘.”
「왜? 얼마나 통쾌했는데. 잘했어, 진. 할 때는 확실히 해주는 거야.」
“내 왼손 중지를 잘라내 버리고 싶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자고.”
「그래. 그럼, 시간 나는 대로 알려줘.」
“알았어.”
어머니와 언니가 와서인지 평소보다도 활력이 넘치는 사라의 목소리에 안도하며 막 전화를 끊으려던 진은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울리는 벨소리에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네, 블리스 사입니다.”
「뭐가 필요하냐? 경비행기는 좀 그러니까 전용기를 사줄까?」
대뜸 나온 대넌의 말에 진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역시나 대넌답다.
“제가 전용기 있어서 뭐하게요. 됐어요. 제발 이대로 사라 기분이나 잘 맞춰주세요.”
「하하하, 아주 신났어. 저 사람이 저렇게 애처럼 기뻐하는 건 처음 본다. 어머니랑 언니가 한국 음식을 잔뜩 싸들고 와서는 지금 먹고 싶다고 난리야. 식탐은 없는 사람인데 어머니 음식이 그리웠다네. 자, 뭐든 말해라. 이탈리아에 있는 별장을 줄까? 아니지, 한국에 별장을 사줄까? 아니지, 뉴욕에 있는 빌딩 하나를 줄까?」
너무나 통이 큰 대넌의 선물에 진은 갑자기 이게 무슨 복이냐 하는 생각에 벙찐 얼굴을 했다. 요 며칠 새 왜 이렇게 집 사주겠다는 사람이 많은가 모르겠다. 이 김에 부동산 투자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집 사주겠다는 사람이 넘쳐흐른다. 이게 복인지 화인지도 잘 모르겠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그보다 사라 기분이나 잘 맞춰주세요.”
「그건 걱정마라! 여기 빌라에서 잠시 지내게 하다 클랜 결혼식만 끝나면 어머니랑 언니랑 같이 요트여행을 하라고 하려고. 좋아하겠지?」
그건 아마 절대 무리일 거다. 임신 중에 요트 여행이라니, 사라를 잡으려고 작정을 했나, 이 사람이.
“대넌, 부탁인데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말고요. 플로리다 주에 있는 별장에서 휴가나 즐기라고 하세요. 그게 좋을 거예요.”
「그래? 사라가 그게 좋대?」
“네. 아마 요트 여행보다는 좋아할 거예요. 제가 시간이 나면 함께 가면 좋겠지만, 지금은 좀 그러니까 한국어 잘하는 한인 1.5세 중에 관광가이드 잘하는 사람 불러서 사라의 가족들 뉴욕 관광이나 제대로 시켜주세요. 리무진 내주시고요. 그 분들 선물은 제가 따로 준비해서 보내드릴게요. 옷도 준비해오셨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사라가 자주 다니는 매장에서 옷을 보낼게요. 거기서 골라 입으라고 하세요. 대넌이 준비한 것처럼 선물해주세요.”
「오오, 그렇지 않아도 5번가에 비서를 보낼까 했는데 내가 고르는 것보다는 네가 낫지. 부탁하마.」
“네. 그리고 제발 부탁인데 말하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하고 말하세요. 다된 밥에 재 뿌리지 말고요.”
「알았다. 너만 믿는다.」
저만 믿지 마시고 좀 알아서 해보세요, 라고 하려다 진은 알겠다고 답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대넌과 사라는 대강 정리가 되는 듯했다. 진짜 둔해서 쓸모없는 남자가 대넌이지만 사라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것만은 사실이니, 도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저 사악한 애클랜드 가 사남매가 무슨 계획을 짜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자신이라도 도울 수밖에.
“일단 한 건 처리됐고. 결혼식 전에 클랜하고 클레어가 사고만 안 치면 원이 없겠다.”
일단 준비는 아주 순조로웠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줄줄이 데리고 일을 하니 자신도 편하고, 일 진행도 아주 매끄럽다. 사소한 일들은 전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고, 감당할 정도의 능력들이 되니 자신은 최종 관리감독만 하면 되니 이 이상 좋을 수 없다.
문제는 그 결혼식 당사자들이었다. 이렇게나 모든 것이 순조로운데 그 초저가 세트 둘 때문에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 농담이 아니라, 결혼식 당일 뭔가 사고를 쳐도 칠 것 같은 녀석들이다.
“내가 그 녀석들 때문에 제 명을 못 살아.”
그 녀석들과 계속 안면 트고 살다가는 총각 딱지도 못 떼고 고혈압으로 인한 뇌졸중을 일으켜 유명을 달리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을 역순으로 뽑자면 취하위가 세금 체납, 그 다음이 권총, 그 다음이 쇠고랑-장물보유 및 교통사고, 혹은 법규 위반으로 인한-이고, 가장 두려워하는 건 실직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래도 실직 위에 하나가 더 추가될 듯했다.
클랜과 재키.
이 두 녀석이야 말로 진정으로 천하무적들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블리스의 말대로 둘을 하나로 묶어 프랑스 상공에다 내던져버리는 쪽이 나을 것 같다. 둘뿐 아니라 둘 사이에서 곧 아이도 태어날 걸 상상하니 차라리 프레디 대 제이슨 영화 속으로 뛰어들고 싶을 정도다.
귀신들은 그것들 안 잡아가고 뭐하나 모르겠다.
“Knock, Knock!”
진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뇌하는 사이 문 쪽에서 블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블리스를 바라보자 환하게 웃으며 문 앞에 서 있던 블리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어떤 애절한 사랑도 식게 하는 표정이군. 얼굴 좀 풀어. 웬 삼백안이야?”
“네 동생 때문에 그러잖아.”
“클랜이 또 사고쳤어?”
“지금은 아니지만 어째 이번 주 안에 거하게 칠 것 같다. 사고를 치려면 차라리 빨리 쳐줘. 조용하니 더 불안해.”
“그 놈도 뇌가 있을 텐데, 또 사고를 치겠어?”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선 블리스가 등 뒤로 문을 잠근다.
“너, 문은 왜 잠가?”
“왜 잠그긴. 존이 시간을 당긴 덕에 30분 정도 여유가 생겼으니 잠그지.”
“아, 만난 건 얘기 잘 됐어?”
“물론, 승리의 블리스잖아.”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오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문득 아주 안 좋은 추억을 떠올리곤 눈썹을 휘었다.
“너 자꾸 그 말하는데 내 앞에서는 삼가 해라.”
“왜?”
“내가 그 ‘승리의 블리스’에 아주 안 좋은 추억이 있거든?”
무슨 소린가 하며 진을 바라보던 블리스는 뭔가 떠오른 듯 순간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거.”
“알면 말하지 마.”
“그건 미안했어. 설마 네가 그걸 못 받을 줄 몰랐지.”
“죽고 싶냐? 쿼터백이 온 힘을 다해서 던진 공을 받으면 내가 럭비부에 들어갔지.”
“난 사랑을 담아서 던진 거야.”
“그놈의 사랑 두 번만 받았다간 코뼈 부러지겠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 고등학교의 럭비부 쿼터백이던 블리스는 졸업 직전 투톱을 달리던 네바다 주의 고등학교와 맞서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그 전해에 상대 학교에게 우승컵을 내줬던 블리스는 학창시절 마지막 시합을 우승으로 이끌겠다 다짐했고 갈비뼈가 부러져가면서도 투혼을 발휘해 결국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문제는 우승 후 헹가래를 받던 블리스가 기쁨에 넘쳐 관중석에 있던 진을 바라봤고 진에게 엄지를 근사하게 들어 보이며 럭비공을 있는 힘껏 던졌다는 사실이었다.
블리스의 갑작스러운 세레머니에 클랜과 클레어와 함께 응원을 가 두 손을 들고 “Go! Bliss!”를 외치던 진은 정면에서 날아오는 럭비공을 자신의 얼굴로 받아버렸다.
때마침 블리스를 비추던 전광판은 블리스의 손과 공을 따라 진을 화면에 비췄고, 진은 그 거대한 럭비 경기장 전광판 위로 쌍코피를 흘리는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여 버렸다.
그 뒤로 진은 ‘승리의 블리스’라는 말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켰다. 한 동안 안 들어 잊고 있었는데 또 시작됐다.
“그건 미안했어. 그래도 코뼈는 안 부러졌잖아.”
“차라리 부러졌으면 성형이라고 했지. 내가 그 사건 때문에 코가 가라앉은 거 알아?”
진이 손끝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키며 불만을 토로하자 블리스가 고개를 내젓는다.
“설마. 원래 낮았어, 네 코는.”
“네가 내 코 높이 재봤어?”
“안 봐도 알지. 몇 년을 보고 살았는데.”
그 말에 진은 반박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다. 자신도 블리스의 엉덩이에 있는 점 갯수도 알고 있다. 왼쪽 엉덩이에 앙증맞게 수놓아진 삼각형의 점을 보고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
“너, 나가라. 나 바쁘다.”
“어이, 하던 거 마저 해야지.”
“그래, 나 하던 일 마저 해야 돼. 점심 시간에 밥이나 먹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나, 시간 외 근무 수당 줘야 돼.”
“알아서 청구해. 그보다 하던 거 말야.”
블리스가 사무실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목소리를 낮게 깔자 진이 인상을 쓰며 블리스를 올려다본다.
“사무실에서?”
“응.”
“미쳤냐?”
“못할 거 있어?”
“있어. 어딜 사무실에서.”
“왜? 난 하고 싶은데.”
“……밤에 해, 밤에. 너도 저녁 스케줄 비었잖아.”
“내 스케줄까지 확인했어?”
“네 스케줄은 원래 꿰고 있어. 네 데이트 스케줄도 다 꿰고 있었어. 더 말해줘?”
네가 누구랑 어디서 데이트 했었는지 난 다 알고 있다, 라는 듯한 투의 진의 말에 블리스가 웃으며 두 손을 들어올린다.
“아니, 거기까지. 그럼 키스만.”
그 말에 슬쩍 문을 바라본 진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확인하곤 블라인드를 내렸다. 재빠르고 정확한 그 동작에 블리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소심한 듯해도 하겠다 마음먹은 일에는 빠르고 대범하다.
블라인드를 내리자 다소 어두워진 사무실 안에서 진은 블리스의 앞으로 다가와 결심을 굳힌 듯 비장한 얼굴로 블리스의 어깨를 잡으며 말한다.
“키스만이야.”
전쟁에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얼굴을 한 진의 얼굴에 블리스가 먼저 가볍게 키스를 한 뒤 진이 조금 긴장을 풀자 본격적인 키스에 들어갔다. 진의 허리를 안고 입을 맞추며 살짝 벌어진 진의 입술 사이로 혀를 넣은 블리스는 천천히 혀를 빨아들이며 타액을 교환했다.
“으응…….”
숨이 막힌 듯 진이 비음이 섞인 신음을 흘리자 블리스는 살짝 방향을 바꿔 진에게 숨을 쉬도록 해주었다. 살짝 떼었던 입술을 다시 겹치며 블리스가 다시 깊이 혀를 넣자 진은 블리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농염한 키스에 진은 멍한 눈을 한 채 블리스의 어깨에 매달렸다. 그 사이 블리스가 자신을 책상 위에 눕히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키스에 열중하던 진은 머리가 딱딱한 상판 위에 닿자 그제야 놀란 듯 블리스를 밀어내려 했다.
“쉿. 25분 남았어.”
“25분 동안 뭘 하려고?”
“역사는 2분 30초로도 충분해.”
“너, 조루냐?”
“분위기 깨는 말 하지 말라니까.”
진의 조루 발언에 블리스는 불쾌한 듯 이맛살을 찌푸리곤 재빨리 진의 넥타이를 풀고는 셔츠를 벌리려 했다.
“야, 너 진짜 할 거야?”
“못할 건 뭐야?”
블리스는 진짜 할 생각이었다. 서둘러 재킷을 벗어던지는 블리스를 보며 얼결에 허리를 꺾은 채 책상에 누운 진은 경악한 듯 블리스를 올려다봤다.
“25분 동안 뭘 하려고?”
“하면 한다니까.”
드디어 넥타이까지 느슨하게 한 블리스가 자신의 벨트에 손을 대는 걸 본 진은 잠시 어쩔까 망설이다 그냥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까짓 거 장소가 대수냐. 첫 경헌으로는 분위기고 뭐고 없지만, 클랜과 클레어 때문에 뇌졸중으로 사망하기 전에 할 건 하자는 심정으로 벨트를 푸는 블리스의 손을 돕기로 했다.
그 순간이었다.
“진, 블리스 여기 있지?”
에반의 목소리와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이내 철컥거리며 문이 열리려 한다. 진과 블리스가 동시에 문 쪽을 돌아보자 계속 문을 열려던 에반이 고요한 노성을 내뱉는다.
“너희, 문 잠그고 뭘 하는 거야?”
철부지 딸내미가 남자를 끌어들여 방문을 잠갔다는 사실을 알아챈 아버지의 음성처럼 조용하지만 분노로 떨리는 듯한 그 음성에 진과 블리스는 동시에 이 안타까운 순간을 개탄하며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셋 셀 때까지 문 열어. 안 열면 열쇠 찾아온다.”
진짜 아버지다. 딱 아버지의 음성과 말투였다.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킨 블리스는 넥타이를 다시 매며 진이 흐트러진 옷자락을 정리하는 사이 문으로 다가가 잠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험악한 얼굴로 에반에게 되묻는다.
“대체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은? 너희 뭐하던 중이야?”
“뭐하던 중이든? 당신이 우리 보호자야? 아니 보호자라 해도 말이지, 우리 이미 서른이거든? 성년 지난 지 10년 지났거든? 키스를 하든 섹스를 하든 그룹섹스를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진짜 화가 났는지 블리스는 이를 갈며 쉴 새 없이 다다다 내뱉으며 에반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꿈쩍한 에반이 아니었다.
“서른이면 다야? 사무실에서 뭐하는 거야? 그것도 이런 아침에.”
“하여간, 그래서 뭔데? 우리 회사 주식이 갑자기 바닥으로 내꽂혔어? 아니면 거래하던 회사 하나가 도난을 했어? 아니면 누가 죽었어? 죽었더라도 누가 죽었는데? 우리 가족 죽은 거 아니면 가만 안 둬.”
으르렁거리는 듯한 블리스의 태도에도 에반은 침착한 태도로 알리러온 사항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웃기고 있네. 빨리 나와. 회의실에 다 모여 있어.”
“그러니까 왜 모여 있냐고?”
“존하고 얘기하고 왔다며? 30분 앞당겼다길래 다들 간신히 30분 빠져서 미팅 대기 중이야. 시간 있을 때 해결하자고 아침 스케줄 다 취소하고 기다리는 중인데 이게 무슨 짓이야? 진, 너도 그래. 블리스가 그러면 말려야지. 좋다고 달려들어?”
상사인 동시에 절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안하무인 딸 남자친구 블리스에게서 시선을 뗀 에반은 그의 권역 하에 있고 말 잘 듣고 소심한 딸 진에게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역시나 착한 딸 진은 재빨리 옷을 정리하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남자친구에게 돌렸다.
“난 말렸어. 블리스가 막무가내로 밀어부친 거야. 난 아무 죄 없어.”
분명히 거부했었다. 막판에 벨트를 푸는 걸 도왔던 건 자신이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손이 한 거다. 그러니까 본능이 한 짓이니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듯 진이 모든 책임을 블리스에게 전가하자 블리스가 진을 돌아보며 기가 차다는 듯 소리친다.
“진, 너!”
“미팅 가. 어서 가. 일해야지. 블리스, 성공한 남자가 근사한 거야. 남자의 섹시함은 자신의 일에서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패기와 열정, 그리고 자신감이라고. 고, 블리스! 고고!”
두 주먹을 꽉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하는 진을 보며 블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쩌억 벌렸다.
“너만 빠져나가겠다 이거냐?”
당연히 혼자만 빠져나가겠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에반은 블리스의 파트너지만 자신에게는 상사다. 입장이 다르다. 그리고 블리스야 에반이 무슨 소리를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성격이지만, 자신은 아주 소심하니 어쩔 수 없다.
“아니지. 난 명백히 거절했어. 에반, 블리스 어서 데리고 나가. 나도 일해야 돼. 아, 바쁘다. 바빠.”
서둘러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 진은 다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안경까지 꺼내 쓰곤 분주히 마우스를 움직였다. 자신의 태도에 블리스가 열 받았다는 건 알지만,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원래 이런 거다.
시치미를 뚝 떼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진의 모습에 에반이 블리스에게 턱짓으로 재킷을 가리킨다.
“블리스, 어서 따라 나와. 재킷부터 입고.”
“진, 너 두고 봐.”
은근한 협박이 담긴 블리스의 말에 진은 여전히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얄밉게 대꾸했다.
“상사가 개인적 감정을 품고 보복하려고 들면 직권 남용으로 고소할 거야.”
“직권남용만 안 하면 된다 이거지? 그럼, 밤에 보자고.”
재킷을 걸쳐 입으며 마지막 인사를 남긴 블리스는 상쾌한 미소를 띤 채 에반과 함께 진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블리스의 마지막 선언에 진은 조금 등골이 오싹하긴 했지만, 이내 공포를 떨쳐냈다. 에반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블리스를 상대하는 쪽이 낫다.
선물 목록과 고객 명단을 주루룩 훑어보던 진은 뭔가 떠오른 듯 보고 있던 명단을 끄곤, 폴더를 뒤져 Bliss란 파일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그 파일을 드래그해 엑셀로 연 뒤 차례차례 그 명단을 확인해 보였다.
“백스물다섯…….”
곰곰이 그 숫자를 되새기던 진은 여자의 이름과 나이, 생년월일, 직업과 특이사항들을 훑어보곤 흐뭇한 듯 미소 지었다.
“백스물다섯보다 내가 낫단 말이지…….”
인종, 국적, 학벌, 나이(일단 성인이기만 하면), 직업, 집안 등의 외부 요소는 전혀 상관없이, 가히 우주적이라 할 정도의 포괄적인 여성 취향을 자랑하는 블리스가 그 십 년의 세월을 이 많은 여자들을 거쳐 자신에게 왔다는 사실에 진은 만족했다. 양다리나 바람 따위는 절대 허용하지 않는 블리스의 고지식한 성품에 이제 와 바람을 피울 리도 없으려니와, 좋은 집안 태생의 고학력 미녀들을 전부 걷어차고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건 꽤 자신감이 생길만한 일임은 분명했다.
이 여자들 모두 사교계에서 내로라라는 정보통이거나 각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에 오른 여걸들이었다. 배우나 모델, 가수나 디자이너 같은 엔터테이너뿐 아니라 기자나 사업가, 의사, 그리고 검사보나 변호사들 같은 전문직종의 여성들도 수두룩했다. 음악가들도 있었고 발레리나도 있었으며 화가나 조각가 등과 같은 예술가들이나 교수, 학자들 같은 지성인들도 수두룩하다. 모두 사회적 지위에 있어 블리스와 결혼을 한다 해도 조금도 밀리지 않을 조건의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모두 블리스와 결혼은커녕 이 삼 주간의 만남 후 헤어졌다. 물론, 그들 중 절반은 현재 블리스의 고객들이고, 절반은 블리스와 친구로 남아 연락을 주고 받으며 고급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일례로 클랜과 클레어의 이 무식한 결혼식이 아무 문제없이 준비되고 있는 것도 블리스의 옛 연인 겸 현재 친구들인 그녀들의 도움이 컸다. 기혼녀들도 있고, 약혼자가 있기도 하고, 아직 싱글인 여자들도 있었지만 그녀들 모두 블리스를 친구로서 인정하고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블리스 역시 그녀들에게 그만한 대가를 돌려주고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결국 감정적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적인 느낌이 더 강한 관계지만, 하여간 그런 여자들을 모두 자신이 이겼다는 생각에 스스로에게 조금이나마 자신감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조금, 아니 사실은 많이 좋았다.
국제 미아에, 고아에, 두 번이나 파양을 당했지만 자신을 버리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아니, 적어도 블리스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건 믿고 있었다. 이런저런 핑계로 빠져나가려 애를 쓰긴 했지만 블리스 애클랜드라는 인간을 잘 아는 만큼 믿고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서로를 알아왔고 그 성장 배경까지 훤히 아는 만큼, 사소한 습관 차이로 다투거나, 서로의 말이나 행동을 잘못 이해해 오해를 하거나, 혹은 서로에게 질려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의 장단점을 훤히 아는 만큼, 단점은 감싸며 장점으로 바꾸도록 개선해줄 것이고, 장점은 칭찬하며 인정해줄 것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투닥투닥거리며 싸워도 금세 잊고 다시 화해하고, 자신의 습관에 짜증내지 않고 따라 와주며, 자신 역시 그의 취향을 인정하고 따라가 줄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새로운 커플들이 몇 년에 걸쳐 싸우고 화해하길 반복해 겨우 얻어낼 수 있는 배려와 이해를 이미 갖고 있다.
어떻게 보면 블리스와 자신은 이상적인 관계였다. 같으면 같은 대로 문제이고 다르면 다른 대로 문제가 생기지만, 블리스와 자신은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짝이 맞는 거울 속의 자신과 같은 짝이었다.
멍하니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던 진은 시선을 돌려 책상 서류 위에 놓여 있는 노먼의 책을 바라봤다.
아직 끝까지 읽지 못한 소설은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성장소설이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던 부모는 소년을 방치했고, 마약 중독자인 아버지의 폭력과 창녀인 어머니 아래에서 학대받던 소년은 어느 날 다락방에 있는 오래된 거울을 발견한다. 마치 이끌리듯 거울을 바라본 소년은 거울 속의 자신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에 그에게 말을 걸고, 그러다 어느 순간 거울 속의 소년은 또 다른 개체가 되어 살아 움직이며 소년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소년에게 거울 너머의 세계로 오라고 손짓한다. 하지만 소년은 현실 세계를 저버릴 수 없어 계속 망설인다. 거울 속의 소년은 상냥하고 따뜻하지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소년은 그 소년의 호의와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하염없이 거울을 바라보며 그 소년을 바라볼 뿐이다.
우울한 소년의 성장기에 진은 차마 불안해하는 소년의 심리에 동화되어 그 소설의 마지막 장은 읽지 못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사랑하는데, 그 소년과 함께 하고 싶은데, 사랑받을 줄을 몰라서, 그리고 거울 속의 소년에게 자신이 짐이 될까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는 모습과 그 불안하고 어두운 심리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차마 완결을 펴볼 수가 없었다.
엘레나 덕에 홍보가 되어 이미 각 매체에서 책에 대한 평이 쏟아지고 있는데 전부들 호평들이었다. 21세기를 대표할 섬세한 감각의 신인작가가 혜성처럼 나타났다며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노먼의 대단한 점은 진짜 흔하고 흔한 소재를 그 특유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감성에 결부시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인공에게 완벽하게 동조해 주인공의 감정을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묘사나 은유보다는 짤막하고 쉬운 문체로 사람들의 감성을 이끌어낸다.
처음에는 단지 노먼의 글 속에 자신이 빠져들었다고만 여겼다. 그만 만들어놓은 정교한 덫에 빠져 소년과 자신은 동일시한다 여겼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 속의 소년은 자신이었다. 노먼은 애초에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간 거다. 거울 속의 소년은 노먼일 수도 있고 블리스일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망설임이었다.
보통은 누구든 남의 문제에는 냉정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문제가 되면 객관성을 잃고 구차한 감정적 변명을 둘러대게 마련이다. 냉정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본 진은 너무나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왜 그 끔찍한 현실을 버리지 못해 망설이냐고, 거울 속의 소년의 손을 잡으라고 외치고 싶었다.
완결이 어떻게 날지 몰라 아직 뒷부분을 보진 못했지만 지금까지 본 소설만으로도 진은 객관적인 눈으로 자신에게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블리스의 손을 잡으라고. 더 이상 외로움에 허덕이며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지 말라고.
잠깐 잠깐 틈이 날 때마다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푹 빠져 있던 책을 돌아본 진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노먼이 이 소설로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이미 알고 있다. 망설이지 말고 원하는 것을 위해 뛰어들라고, 다른 건 보지 말고 행복해지라고, 노먼은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더없이 가볍고 즉흥적이고 속도 없는 녀석 같지만 더없이 속이 깊고 예민한 친구였다.
진은 피로한 듯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그 얇은 유리막 너머의 세계는 반짝거리면서도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구차하고 비굴하더라도 익숙해진 공허와 외로움을 버리고 저 거울 너머의 따스하지만 낯선 세계로 뛰어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블리스와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자신이 왜 지금까지 이렇게 달려왔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이 사는 세계가 옳은 것인지, 저 너머의 세계가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 있다. 지금의 세계가 옳다면 어떤 고난이라도 버텨 이겨내야 하지만 만약 지금의 세계 자체가 잘못된 거라면 또 다른 기회를 줄 수 있는 저 너머의 세계로 가는 것이 옳다.
소설 속의 소년 역시 거울 속 소년의 애정과 믿음보다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절실하다. 결국 거울에 비친 소년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일 뿐, 결국은 자기 자신일 뿐이니까. 믿을 수 있는 것도 믿어야 하는 것도 자신뿐이다. 필요한 건 자신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사랑에도 무감각하다. 그리고 그 애정을 믿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러니까, 결국 뛰어넘을 건 유리막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자신은 지금 이대로 사아갈 수도 있다. 편안한 고독과 적막 속에서 시끄러운 매스미디어를 벗 삼아 공허하지만 큰 변화 없는 삶을 이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손을 뻗어 저 유리막 너머로 건너간다면 험난하지만 고독하지 않은, 홀로 앉아 멍하니 브라운관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삶에 대한 대가가 무엇일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괴로울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후회할 수도 있다. 많이 상처 받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 길을 택해야 할지, 아직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행복해지고 싶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행복해지고 싶다.
***
점심시간이 되자 재빨리 나서 플로리스트들을 만나 최후 도안과 3D로 만든 배열을 확인한 마지막으로 꽃의 양을 좀 더 늘려달라는 말을 하곤 사무실을 나와 곧장 에이먼이 거래하는 인형 가게로 향했다. 주문했던 옷과 소품들을 확인한 진은 명품 옷처럼 상자에 넣어 고이고이 포장을 하는 점원을 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
오늘 도착한 옷을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드레스와 헤어밴드, 그리고 망사 스타킹이었다. 에이먼이 일본 옥션에 나온 곳을 보고 눈독을 들이고 있다, 제작자에게 특별히 제작해 오늘 공수 받은 소품들이었다.
에이먼의 취미야 취미로 인정한다지만 이런 스타일이 취향인가 하면 고개가 절로 갸웃한다. 블리스의 취향이야 전 우주적이라지만 에이먼의 취향은 고정되어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데이트하던 여자들을 하나씩 되돌려 보자면 아주 완벽하게 취향이 눈에 들어온다. 갈색 머리카락에 집안 좋고, 우아하고 지적인 여자. 외모보다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 그리고 전공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여자들이었다. 옷 스타일도 모두 전문직 여성다운 검은색의 원피스나 투피스, 혹은 정장형의 쓰리피스 형에 레이스와 망사와는 거리가 먼 타입들이었다. 자신의 외모를 꾸미기보다는 강한 주관과 신념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달려가는 여자가 에이먼의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그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했던 게 대니였다. 문제는 대니는 너무 완벽해 에이먼을 압도했다는 것뿐이다. 데이트를 하거나 결혼을 해 그녀의 가능성을 막고 싶지 않다고 했다. 확실히 대니는 분명 거물이 될 타입이었다. 결혼을 하기보다는 원하는 일을 하며 그녀의 미래를 넓게 열어두는 쪽이 좋긴 하다. 물론, 그건 주변인들의 바람으로 그녀 자체는 소박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원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UN군에 들어갔으면 딱인데.”
진은 아쉬운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대니가 UN군에 들어간다면 세계 평화가 지켜질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UN 친선대사로 활약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국회에 나가는 것도 좋다. 만약 그녀가 지금이라고 마음을 먹고 나선다면 하원위원은 따놓은 당상이고 곧 상원으로 올라가 언젠가는 미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그녀를 지지하는 기반은 아주 탄탄하다. 대학 동기들부터 시작해 선후배들, 그리고 그 집안 사람들과 그녀가 거래하고 있는 각분야의 인사들까지. 모두들 그녀를 신뢰하고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녀는 거침이 없고 강하며, 신념이 굳다. 블리스에게는 자주 흥분을 하긴 하지만 그건 블리스가 하도 성질을 긁어서 그런 것일 뿐 다른 사람들에겐 상냥하다. 사실 블리스와 대니는 진짜 상극이다. 붙여놓으면 안 된다.
문제는 그녀 본인이 그런 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클랜의 꿈은 작가였지만 다른 쪽으로 재능이 넘치고 글에는 재주가 메주라 포기한 것처럼, 그녀 역시 그녀의 능력과 희망이 전혀 따로 논다. 보석에 대해서만은 재능과 흥미와 취미와 환경이 완벽하게 받쳐주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니의 꿈은 가정주부였다. 물론, 그러다 보석 소식이 들리면 프라이팬 집어던지고 달려나갈 성격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이먼이라면 그도 용납해줬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에이먼과 결혼을 했다면 대니가 프라이팬을 손에 들 일이 없을 거라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여기, 다 됐습니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조심조심, 마치 값비싼 보석을 다루듯하는 점원의 손길에 진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 가게를 단골로 삼은 건 잘한 일이었다. 어떤 물건이든 고객을 상대로는 최선을 다 하는 게 예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상이 들어오시면 알려주시겠어요?”
“물론이죠. 새 제품이 들어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수고하세요.”
생글생글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마친 진은 곱게 포장된 상자를 조심스레 들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바로 가게 문 앞에 주차해놓은 자신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불법 주차 아닌데?”
아주 잠깐 들르는 거라 키도 차 안에 두고 비상등을 켜놓고 내렸었다. 주차는 아니라 정차였다. 끌려갈 이유가 없다.
“뭐지?”
갑자기 주정차 단속반이라도 떴나 해 주변을 돌아보던 진은 혹시 딱지라도 붙어 있나 싶어 가로등을 살펴봤다. 하지만 딱지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불이 들어왔다.
“도난이다…….”
어떻게 가게 앞에 정차해놓은 차를 훔쳐 가냐 싶어 씩씩거리며 거리를 돌아보던 진은 저쪽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검은색의 리무진을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 리무진 뒤에 자신의 차가 따라오는 게 더욱 불길하다.
빠른 속도로 블록을 한 번 돌아 자신의 앞으로 온 리무진에서 기사가 내리더니 재빨리 진의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다.
“진 케이먼 씨 맞으시죠?”
“네, 그런데요?”
“저희 오너께서 잠시 보셨으면 합니다.”
기사치고는 유난히 좋은 덩치에 검은 정장과 검은 선글라스, 혹시나 해 흘깃 뒤를 돌아보니 자신의 차를 몰고 온 남자 역시 이상하리만치 덩치가 좋다. 순간, 진은 그들의 오너가 누구인지 알아채버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물었다.
“누구신데요?”
“세르게이 네브즐린 씨요.”
역시나였다. 어차피 오늘 그를 찾아가 무서운 빨간 덩어리를 돌려주려던 참이었던 터라 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빨간 덩어리를 어디 두기도 무서워 가방 안에 넣고 하루 종일 들고 다녔다. 마침 때가 좋다. 빨리 건네주고 어깨가 좀 가벼워졌으면 하는 생각에 진은 남자가 열어주는 리무진의 뒷좌석에 올라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야 말로 그 이상한 남자와 확실히 결판을 지을 셈이었다.
약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어마어마한 저택 정원 안에서 진은 조금 기가 질린 듯 주변을 돌아봤다. 애클랜드가의 저택도 굉장하긴 하지만, 이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 집 상당히 수상하다. 왜 정원 곳곳에 이상한 바위들이 놓여 있는 걸까? 게다가 나무들의 분재 상태도 좀 이상하다. 저 바위 안에는 폭탄이나 기관총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해 인상을 쓰던 진은 차문이 열리자 곧장 가방과 상자를 챙겨들고 차에서 내렸다.
“따라오십시오.”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이상한 분재들-그러니까 일반적인 형태의 분재가 아니라 나무들이 좀 묘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뱀이라든가, 사자의 머리라든가 하는 좀 이상한 형태들이었다.-을 주욱 돌아본 진은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기사의 안내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은 일반 저택과 같이 들어서자마자 홀이 보이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보통 저택과 구조는 같았다. 다만, 인테리어가 좀 이상하다.
“……주인께서 독특한 취미를 갖고 계시는군요…….”
홀의 벽면을 따라 주르륵 나열된 유리진열장에는 각종 권총과 기관총, 그리고 긴 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단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벽면에는 이상한 팔괘 같은 게 붙어있다. 예전에 태국 공포 영화에서 보았던 중간에 유리가 붙은 묘한 형태의 팔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일직선상으로 사슴의 박재된 머리통이 달려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사슴 아래에는 거대한 철망이 있었는데 작은 인공정원처럼 꾸며놓은 그 안에는 보아뱀 두 마리가 스스스 거리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참 청명한 날씨임에도 이 집안은 묘하게 한기가 들 정도로 뭔가 차갑고 음습한 인테리어였다.
집안을 쭈욱 한 번 돌아본 진은 그제야 세르게이의 그 기묘한 선물들이 이해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 이런 취향이었던 거다. 박재와 뱀, 총, 그리고 팔괘까지. 다른 건 몰라도 적들을 새벽에 초대하면 딱 심장마비 일으키게 하기엔 취적의 인테리어였다. 거기다 더 엽기적인 것 하나를 더 하자면 뱀의 목에 샤넬 로고가 새겨진 개목걸이가 걸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건 분명히 엘레나 짓이다.
미치겠다.
“따라오십시오.”
“……네.”
조용히 남자를 따라 홀 안쪽으로 들어선 진은 긴 복도를 걸어 활짝 열린 방 앞에 선 채 안을 들여다봤다. 그 방은 응접실인 듯했다. 정원으로 나 있는 커다란 창이 활짝 열려 있고,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세르게이가 있었다. 집안에서 입는 편안한 옷차림의 세르게이는 오늘도 여전히 근사했지만, 방 안은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저렇게 비싼 가구들도 잘못 배치하면 조잡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저 가구를 만든 디자이너라면 소송 건다.
“도착했군. 어서 와. 앉지.”
진을 알아챈 블리스가 그렇게 말하며 손끝을 까닥거리자 진은 재빨리 그의 앞으로 가 자리 잡고 앉았다. 그러자 진은 안내해준 남자가 문을 닫고는 사라진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고 했었는데 차까지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은 이건 납치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진은 애써 예의 바르게 인사치레를 했다. 사실 이젠 이 남자가 별로 무섭지 않아 미쳤냐고 다다다 따질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일단, 마피아다.
“그래? 다행이군. 서로 마음이 통한 모양이야. 날 만나려 했다는 건 내 청혼에 좋은 답을 주기 위해서겠지?”
내가 미쳤냐고 하려다 진은 영업용 미소를 띤 채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돌려드릴 게 있어서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열어 세르게이가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건 왜? 너무 작은가?”
순간 진은 이게 작다고 말하는 세르게이를 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혹시나 했었다. 엘레나야 워낙에 세상 물정 모르는 애니 그러려니 했지만 설마 이 남자까지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아닙니다. 제겐 과분한 물건이라서요.”
“부담 가질 것 없어. 우리 집에는 넘쳐나는 물건이니. 이게 마음에 안 들면 더 큰 것도 있는데?”
“샤넬 클래식 2.55 사이즈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극구 사양하겠습니다.”
“아, 엘리가 벌써 말했나 보군.”
“네.”
“그 녀석은 통이 큰 면은 날 닮았단 말야.”
그렇게 말하며 세르게이가 나른하게 웃는데 진은 속으로 그 말을 정정해주었다. 통이 큰 게 닮은 게 아니라 두 남매의 개념이 동시에 안드로메다로 출장 간 게 똑같다, 고.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이야기하신 청혼은 정식으로 거절하겠습니다.”
“왜? 내가 마음에 안 드나?”
직설적인 세르게이의 질문에 진은 변화구를 구사하기보다 직구 승부로 나가기로 했다.
“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던 짓과는 달리 의외로 순순히 물러서는 세르게이를 보며 진이 안도하려는 찰라 세르게이가 망발을 내뱉었다.
“그럼, 엘레나는 어떤가?”
갑자기 나온 이름에 진은 의자에서 튀어오를 정도로 놀라 세르게이를 바라봤다.
“예?”
“엘리가 자네에게 관심이 많던데? 반했다더군. 어때? 내 동생이지만 예쁘고 성격도 괜찮아. 머리가 좀 빈 게 흠이지만, 그런 점이야 자네가 채워주면 되지 않나?”
“엘리는 열다섯 살입니다만?”
“4년만 기다려. 지금은 약혼부터 하고 성인이 되는 즉시 결혼식을 올리지. 아, 그래. 성인식과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군.”
“저랑 열다섯 살 차이에요!”
“상관없지 않나? 남자들이란 원래 여자가 어리면 어릴수록 좋아하잖아. 게다가 내 동생이지만, 그 녀석 액면가는 스물다섯이야. 부담 갖지 마.”
아주 부담 된다. 러시아 마피아의 막내딸에 세계적인 수퍼모델이다. 일단 언론에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둘째로 네브즐린 가의 적에게 자신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 이전에 자신은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양심도 없이 열다섯 살이나 어린, 사고만 빨리 쳤으면 자기 자식뻘인 미성년자와 결혼을 하려들 정도로 얼굴에 철판 깔고 사는 인간은 아니다.
자신을 순식간에 롤리타 콤플렉스에 빠진 파렴치범으로 모는 세르게이를 보며 진은 턱을 빼고 그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 떠도는 의문을 던지고 말았다.
“지금, 당신 여동생 얘기입니다만?”
“엘리가 내 여동생이라는 건 미국하고 러시아 사람들은 다 알아. 뭘 새삼.”
“아니, 이제 겨우 열다섯 살 된 당신 여동생을 서른 살 먹은 아저씨에게 시집을 보내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무슨 정략결혼도 아니고!”
“정략결혼이라고 봐도 좋지. 하지만 엘리는 진짜 자네를 좋아해. 그 녀석이 위치 추적까지 해달라고 한 남자는 자네가 처음이니까.”
그딴 거 하지 마, 라고 하려다 진은 갑자기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돌렸다.
“뜻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엘리는 좋아하지만 결혼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게도 제 결혼상대를 결정할 자유 정도는 있습니다.”
이상하게 이 남매만 만나면 힘이 빠지는 듯해 진이 매가리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세르게이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진에게 되묻는다.
“어린 여자 좋아하지 않나?”
“싫습니다!”
“그럼 남자를 좋아하나?”
“왜 얘기가 거기로 튑니까?”
이 남자랑은 평생 가도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진이 서둘러 이 대화를 접고 일어서려하자 세르게이가 테이블 위에 있던 잡지를 하나 꺼내 진의 앞에 던진다.
“얘는 어떤가?”
잡지는 러시아 잡지였다. Vanity show라는 영문 아래에 러시아어로 뭔가 빼곡하게 적힌 잡지의 표지에는 근사한 은발의 남자가 하얀색 셔츠를 입은 채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진을 유심히 바라본 진은 기겁했다. 세르게이였다. 세르게이가 러시아 잡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이렇게 생긴 남자가 또 하나 존재할 수는 없다. 저 험악한 눈빛까지 아주 똑같다. 이 잡지는 마피아 특집 잡지인가 해 진은 넋 나간 얼굴로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러시아에서는, 마피아 전문 잡지도 나오나요?”
“설마. 그 녀석은 내 동생 알렉세이 네브즐린이야. 러시아에서 배우로 활약 중이지. 나이는 서른. 자네랑 동갑이야.”
순간 진은 안도했다. 아무리 막 나가도 아직 마피아 잡지까지 발행하는 나라는 없는 모양이다. 진짜 다행이었다.
“나랑 가장 많이 닮은 녀석이지. 어때? 마음에 안 드나?”
“……저, 알렉세이라는 이 사람도 당신이 자길 팔아먹으려 한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 그래도 내 말이면 들을 거야.”
역시나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세르게이의 발언에 진은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럼, 얘는?”
이라며 이번엔 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사진을 내민다. 조금 더 어려보일 뿐 엘렉세이와도 똑같이 생긴 남자였다. 이 집 남자들을 찍어내는 모양이다. 아니 찍어내는 정도가 아니라 카피해서 낳는 모양이다. 붕어빵 틀에 넣고 찍어내도 이렇게 닮을 수는 없다. 세쌍둥이다.
“이반 네브즐린. 지금 러시아에서 복역 중이지만, 곧 나올 거야. 어떤가? 스물일곱이야.”
“……무슨 죄로요?”
“장기매매.”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배우에 이어 장기매매 알선자까지 나섰다. 돌아버리겠다, 진짜.
“그냥, 얌전히 복역 마치신 뒤 갱생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럼 얘는 어때?”
라며 또 다른 사진을 내미는데 이번에도 역시 똑같은 얼굴이었다. 마치 세르게이의 성장과정을 보는 듯한 사진들의 나열에 진은 기겁했다. 어쩌면 이렇게 형제들의 얼굴이 똑같을까. 애클랜드 가의 남매들도 참 많이 닮았다 생각했는데 그 집은 이 집에 댈 것도 아니다. 이 집은 독한 눈빛까지 꼭 닮았다. 가족들이 모이면 레이저 쇼를 해도 될 정도다.
“이 사람은 또 누군데요?”
“니콜라이. 우리 집 넷째지. 지금 갓 스무 살이 됐어. 파릇파릇하지. 어린 여자가 싫다면 어린 남자는 어때?”
“이 사람은 또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아직 가업에는 뛰어들지 않았어. 방황하는 중이지만 곧 집으로 돌아올 거야.”
돌아오지 마, 절대로 돌아오지 마, 라고 사진 속의 남자를 응원하며 진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마음에 안 드나? 그럼 얘는 어때?”
라며 마지막 사진을 내미는데 이번에야 말로 진은 기절할 뻔했다. 엘레나보다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기였다. 열일곱, 열여덟이 갓 됐을까 말까 한 애기였다. 물론 아주 작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른 살이 된 진의 눈에는 아주 애기 같아 보였다. 통통한 볼 살하며 인형 같은 외모가 아주 예쁘장하다. 세르게이가 어렸을 때엔 꼭 이랬을까 싶어 유심히 사진을 바라보는데 세르게이가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 녀석은 알렉산드르야. 엘레나 바로 위의 오빠지. 아직 발육이 더뎌 어려 보이지만 우리 집 남자니 다 크면 봐줄만 할 거야. 게다가 성격도 아주 당차지. 성격이 날 꼭 닮았어.”
진은 조금 귀엽다는 듯 사진을 보고 있었지만 그 말에 사진을 툭하니 테이블 위로 떨어트렸다. 외모도 카피해놓은 듯한데 성격까지 똑같다면 한 마디로 상종 못할 인간이라는 소리다. 생긴 건 귀여운데 길에서 만나면 피해가야겠다.
“아주 귀엽지? 크게 될 놈이야. 내가 장담하지. 나 다음으로 제일 성공할 거야.”
자신의 남동생 사진을 보고 귀엽다는 듯 싱긋 웃는 세르게이를 보며 진은 진심으로 세르게이의 정신 감정을 의뢰하고 싶었다. 대체 지금 뭐하는 짓이냐.
“죄송하지만, 지금 도저히 당신의 의도를 모르겠는데요? 형제 자랑하시는 게 아니라면, 왜 제게 이러시는 거죠?”
“우리 집 가족이 되었으면 하는 거지. 우리 집 남자들이 얼굴은 모두 괜찮은데?”
“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닙니다.”
“그래? 그럼 막내를 성형을 시킬까? 블리스 같은 타입이 좋다면 금발로 염색을 하면 괜찮겠나? 코도 조금 낮추고, 눈은 렌즈를 끼면 되고. 턱을 좀더 깎아야 하나?”
“……알렉산드르는 당신이 자기 성형수술 시키려는 거 알고 있습니까?”
“알 리가. 그래도 내가 시키면 할 거야.”
“미쳤군요.”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간 진심에 세르게이의 눈이 순간 파랗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은 이제 더 이상 그가 무섭지 않았다. 멀리 있을 때는 무서웠지만 이 남자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읽고나자 전혀 두렵지 않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진짜 두려운 건 미지의 생물체란 소리다. 익숙해지면 전혀 무섭지 않다.
“동생들 팔아먹을 생각은 마시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십시오. 외모들이 출중하니 다른 사람들이라면 좋다고 달려들 겁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건 자넨데?”
“조상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전부 러시아 황제들의 이름을 따서 지으신 것 같은데, 조상들 이름에 먹칠하지는 마시죠?”
“……황제? 누가?”
“엘리랑 당신을 제외하면 전부 로마노프 황가의 황제들 이름이잖아요?”
“……그런가?”
의외라는 듯한 세르게이의 얼굴에 진은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모르셨습니까?”
“그래. 왜 난 뺀 거지?”
순간 세르게이의 눈빛이 번쩍했다. 마피아 주제에 황제 이름이 아니라고 아버지 멱살이라도 쥘 기세다.
“아버지께 여쭤보시죠.”
“그래야겠군.”
“그럼, 전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 잠깐.”
더 이상 피곤한 건 싫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진은 세르게이의 음성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시죠.”
진이 진중한 태도로 세르게이를 바라보고 있자 세르게이 역시 아주 진지한 얼굴로 큰일 날 소리를 내뱉는다.
“어린 남자가 싫다면 우리 아버지는 어떤가?”
동생들을 팔아먹다 못해 이젠 아버지까지 팔아먹으려는 세르게이를 보며 진은 “너 미쳤냐?”라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겨우 겨우 목소리를 낮춰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 절 그렇게 가족으로 들이려고 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고학력의 우수한 인재를 원하거든. 알다시피, 내 선물을 받고는 아끼던 부하가 자살을 해서 말야.”
아무리 봐도 그건 학력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의 문제다. 아니, 그보다는 섬세함과 이 집안 전체의 이상한 감각이 문제다. 당신 집은 학력을 높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머리부터 어떻게 해야 된다고 소리치려다 진은 다시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럼 비서를 고용하시죠.”
“그래서 스카웃 제의를 했는데 거절했잖아?”
분명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죄송하지만, 전 직장을 옮길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시죠.”
내가 미쳤다고 정원에 폭탄이 터지는 집안의 비서로 일을 하냐?
“고용해봤지만 다들 한 달을 못 넘기고 도망쳐서 말야. 배짱이 두둑한 사람이 필요해. 폭탄 하나 터졌다고 도망나가니 감당이 돼야 말이지. 거기다 가끔 다치기도 하고, 납치가 돼 사라지기도 하니까.”
진은 세르게이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폭탄이 터지는 집에서 일할 뿐만 아니라 다치고 납치를 당하는 일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그 말에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쳤다.
“전 소심합니다.”
“어제 방송을 보니 전혀 안 그렇던데?”
“그건 10년에 한번씩 있는 사고고요. 하여간 전 네브즐린 가와 어떤 인연을 맺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진짜 고학력의 남성이 필요하신 거라면 다른 사람을 구하십시오. 전 그냥 예일대 영문과 졸업생일 뿐입니다. 수석은 노먼이었습니다.”
“노먼?”
“노먼 맥캐인이요. 엘리고 들고 나왔던 책을 쓴 친구요.”
“그 친구가 수석이었다고?”
“네.”
진이 진지한 얼굴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사이 세르게이의 눈이 번뜩인다.
“……그거 괜찮군.”
“……예?”
“괜찮겠어, 진짜. 파파라치 출신이니 배짱도 두둑하겠다, 그 집이 거대 로우펌을 운영하고 있지? 괜찮군. 진짜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는 세르게이를 본 순간 진은 노먼이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진은 애써 자신의 양심에서 두 눈을 돌려버렸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시간내 좋은 정보를 줘서 고맙네.”
“천만에요.”
노먼이 이 사실을 안다면 이번엔 자신을 죽이려 달려오겠지만, 어쩔 수 없다. 누누이 말하지만 인생이란 원래 이런 거다.
“그럼, 이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를 챙겨든 진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세르게이는 배웅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은 채였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 남자의 배웅 같은 건 받고 싶지도 않다.
“내 팔자는 왜 이래, 대체…….”
블리스의 말대로 걸려드는 인간들이라고는 모조리 저런 것들뿐이다. 부모 복 없는 인간은 이렇게도 인간 복도 없는 걸까.
빠른 걸음으로 막 다시 홀로 나와 그 저택을 빠져나가려던 진은 홀로 나오자마자 들린 “꺄악!”이라는 감탄사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엘레나가 오늘 오전에 봤던 차림 그대로 뱀의 우리 앞에 서서 자신을 보곤 놀라고 있었다.
“진, 나 만나러 왔어요?”
“……아니. 너희 큰 오빠.”
“세르게이가요? 아, 약혼 준비한다더니……. 어떻게 해!”
라며 얼굴을 가리며 웃는데, 대체 이 집안 인간들은 왜 당사자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약혼 준비를 한다는 걸까. 오늘 안 왔으면 내일 신문 지상에서 엘레나와 자신이 약혼했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를 보고 주말에 클랜이 아니라 자신이 식장에 끌려들어갈 뻔했다. 그냥 두면 결혼에 애까지 줄줄이 만들어줄 사람들이다. 그것도 세르게이랑 똑같이 생긴 아이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진은 소름이 끼친 듯 몸을 떨었다. 세르게이랑 똑같이 생긴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며 ‘아빠’라고 부른다면 자신은 그대로 기절해 유명을 달리할 것이다. 공포 목록 위로 클랜과 클레어 위로 세르게이 주니어라 랭크되었다.
“약혼은 깨졌어. 난 이만 간다.”
손을 들어 딱딱하게 인사를 한 진이 뒤돌아서자 엘레나가 진의 팔을 잡고 매달린다.
“어어? 왜요?”
“엘레나, 너 열다섯 살이야. 앞으로 만날 남자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왜 벌써 약혼을 하려고 해?”
“약혼은 약혼이잖아요.”
“……4년 뒤에 보자. 그때까지 근사한 남자가 안 나타나면 나도 생각해볼게.”
“기다려줄 거예요?”
“봐서.”
“아, 하여간 가지 말아요. 제 방 보고 가요.”
“……고마운데 지금 다음 스케줄이 있어. 벌써 1시간이 딜레이 됐어. 미안하지만 방 구경은 다음에 하자.”
다음에 또 이 집에 온다면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진이 휙 돌아서려하자 엘레나가 진의 팔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잡아끈다.
“안 돼요. 온 김에 제 방 보고 가요.”
“나 바쁘거든?”
“잠깐요, 잠깐만요.”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가 진을 질질질 잡아끌고 계단으로 올라선다. 상대는 열다섯 살 짜리 여자애였다. 뿌리치려 한다면 뿌리칠 수 있다 여기고 진은 팔을 흔들었지만 엘레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삐쩍 마른 애가 웬 힘이 이렇게 세냐, 싶어 진이 놀란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보는 사이 엘레나가 계단을 올라서며 계단 아래의 음침한 곳에 있는 뱀들을 보며 인사를 한다.
“안녕, 코코, 칼. 이따 보자.”
순간 진은 진심으로 궁금한 게 하나가 생겼다. 그리고 진은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코코는 알겠는데…… 칼은 설마, 그 칼이 아니겠지?”
“무슨 칼요?”
“……칼 라거펠드(Karl Lagerfeld -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맞아요. 칼 아저씨가 절 예뻐해 주시거든요.”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에게 아저씨라 부르는 이 맹랑한 아가씨를 올려다본 진은 진심으로 그 아저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칼 라거펠드는 모델을 꽤 총애하는 디자이너였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베이비 페이스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는 데본 아오키를 보고는 그녀가 자신의 무대에 서지 않으면 시즌을 포기하겠다고 데본 아오키의 부모를 설득했을 정도로 모델 하나에 대한 애정이 지대한 남자였다. 요즘은 그가 엘레나를 총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엘레나가 그의 이름을 뱀에게 붙여줬다고 해도 총애할 수 있을까…… 는 잘 모르겠다.
대체 그 할아버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보아 뱀에게 자신의 이름을 내줘야 했던 걸까.
“제 방 여기에요.”
진을 질질 잡아끌고는 2층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쪽으로 데리고 간 엘레나는 문을 열고는 그 안으로 진을 밀어 넣었다. 엄청난 힘에 등이 떠밀려 방 안으로 들어서 햇살이 가득 든 분홍빛의 방을 본 진은 처음에는 자신의 눈이 이상해졌나 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엘레나가 방을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방 예쁘죠?”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선 엘레나가 슬금슬금 침대 옆으로 가더니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브래지어를 발로 툭툭 차 침대 속으로 넣는다. 그리고는 그 옆에 떨어져 있던 팬티를 구둣발로 즈려 밟아 감춘다.
방은 나름 괜찮았다. 그나마 이 집안에서 제일 센스가 있는 게 엘레나인 듯 핑크색과 화이트가 절묘하게 조화된 전형적인 여자 아이의 방이었다. 문제는 가구마다 뿌옇게 쌓인 먼지와 방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매니큐어와 화장품들, 그리고 속옷과 스타킹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문제인 건 새하얀 카펫 위에 남아 있는 음료수의 얼룩과 과자부스러기였다.
처참하기까지 한 광경을 목도한 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엘레나를 돌아봤다. 그 험악한 시선에 엘레나가 천진한 얼굴로 웃어 보인다. 난 아무 것도 몰라요, 라는 얼굴이었다. 엘레나의 얼굴은 너무나 해맑아 그녀의 뒤로 보이는 방의 비참한 몰골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손님을 데리고 오려면 최소한 청소하는 척이라도 해야 정상이 아니냐, 여자애 방이 이게 뭐냐, 너희 집에 청소해주는 사람이 네 방만 일부러 안 치우는 거냐, 속옷은 제 때 제 때 내놔라, 하는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지만 진은 그 모든 걸 한 마디로 요약해 깔끔하게 내뱉었다.
“청소해.”
오! 일어나, 센! 계속 그대로 있으면 안 돼!”
“일어나, 일어나!”
엘레나의 침대에 나란히 앉은 진과 엘레나는 앞에 놓인 커다란 PDP화면에서 하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A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을 감상하던 중 먹던 팝콘까지 내뱉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엘레나의 방 청소를 돕던 진은 에반 저리 가라할 정도로 잔소리를 퍼부어댔고, 1시간여 만에 깨끗해진 방에서 엘레나가 미안하다며 들고 온 DVD를 틀어놓고 팝콘과 나초를 먹으며 두 주먹 불끈 쥔 채 영화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이전에도 두 번인가 봤었지만 다시 보니 새롭다.
“휴, 겨우 도망쳤어.”
“응. 다행이다.”
이마에 땀을 닦으며 진지하게 몰입하는 엘레나의 옆에서 진 역시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꾸했다. 다행히 DVD에 영문 자막뿐 아니라 더빙판이 있어, 영문으로 녹음된 화면을 보느라 엘레나도 완전히 몰입한 모양이었다.
진이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신기했던 것 중 하나가 이 나라 사람들은 자막을 읽기 싫어한다는 사실이었다. 진짜 지독하게도 자막을 싫어한다. 김윤진이 LOST에 출연계약을 할 당시 한국인 대사조차 모두 영어로 처리되어 있어, 이건 말이 안 된다고 한국어로 대화할 테니 자막을 넣으라고 했을 때 관계자들이 그럼 사람들이 채널을 돌릴 거라고 할 정도로, 미국인들은 자막을 싫어했다.
그렇게 문맹률이 높은가 하면 그 정도는 아니다. 사실 발리우드(Bollywood, 인도의 영화 산업의 중심지인 뭄바이의 옛 엉어 지명인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의 경우 자국 영화의 어마어마한 점유율을 자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부탄의 94% 문맹률에 이은 58%에 달하는 문맹률 때문이었다.(물론, 그들 특유의 뮤지컬적 요소를 가미한 영화에 대한 절대적인 호응과 비극은 절대 보지 않는다는 점도 상당 수 작용한다. 타이타닉의 경우 인도에서만은 주인공들이 가장 행복한 부분에서 영화를 끝내, 타이타닉이 해피앤딩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정도다.) 그 나라 사람들은 아예 자국어 자막도 못 읽는다. 미국 역시 문맹률이 21%에 달하긴 하지만 사실 영화까지 전부 자막을 깔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미국인들은 자막을 싫어한다. 문화 우월주위인지, 단순히 남의 나라 영화를 자막까지 깔아서 볼 이유가 없다는 오만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더빙판이 판을 친다. 덕분에 엘레나 같은 경우는 아주 편한 것 같다.
“우와, 아프겠다. 저 용, 죽을 것 같아요.”
“그러게.”
신이 나 함께 영화를 보던 엘레나는 주인공 소녀가 새하얀 용을 타고 약재가 가득한 방에 있는 장면을 보며 조마조마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 역시 진지한 얼굴로 그 장면을 보고 있는데 용의 입에서 튀어나온 검은 것을 주인공이 밟고는 손을 동그랗게 만드는 장면에서 엘레나가 휙하니 진을 돌아본다.
“저거 뭐예요?”
“뭐가?”
“저기 손 동그랗게 하는 거.”
“내가 아냐?”
“당신 일본인이잖아요.”
순간 진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엘레나를 돌아봤다. 얘가 지금까지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건가, 해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누가 그래?”
“그럼 중국인?”
얘, 진짜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몰랐나 하는 생각에 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돌렸다.
“나 한국인이야.”
“한국이 뭔데요?”
“……중국하고 일본 사이에 있는 반도국가(Peninsula).”
진의 설명에 엘레나가 기겁을 한다.
“페니실린(Penicillin)이요?”
이젠 이런 엘레나의 반응이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일상용어가 아닌 단어를 알아들으면 놀라지, 못 알아듣는다고 놀라진 않는다.
“……그건 약이고. 한반도야.”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국제 입양.”
“예?”
“입양됐어. 한국에서 미국인한테.”
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말했지만 엘레나는 상당히 처연한 얼굴을 하며 진이 들고 있던 나초 접시 위로 자신의 나초를 하나 들어 건네주었다. 엘레나가 먹을 걸 주다니 자신이 어지간히도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고생 많았겠네요.”
“별로.”
“막 다락방에 가두고 밥도 안 주고 그랬죠? 불쌍해라.”
“누가 그러디?”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세계 명작 특선. 인어공주(little mermaid).”
그 말에 진은 조용히 눈만 돌려 엘레나를 돌아봤다. 인어공주(little mermaid)가 고아라는 얘기는 듣다 듣다 처음 듣는다. 그럼 그 언니들은 뭐냐? 계모의 딸들이냐? 왜 계모의 딸들이 인어공주를 위해 머리카락을 내주고 칼을 얻어왔겠냐?
“인어공주(little mermaid)가 아니라 소공녀(little princess)겠지.”
“하여간요.”
“엘리,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너도 텔레비전 좀 작작 봐라.”
블리스가 자신이 엉뚱한 말을 할 때마다 텔레비전을 당장 박살내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만화나 보자.”
그렇게 말하며 진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막 주인공 소녀가 전차를 타는 장면이 나왔다.
“오, 간다.”
“어? 진짜.”
신이 나 눈을 반짝거리는 두 사람은 다시 영화에 몰입해 들어갔다. 전차를 탄 주인공과 쥐 한 마리, 그리고 파린지 뭔지 모를 정체불명의 날개 달린 곤충과 얼굴 없는 귀신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두 번이나 본 터라 뒷내용을 알고 있지만 진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막 일행이 전차에서 내리는 순간이었다. 기다린 듯 핸드폰이 울려왔다.
옆에 둔 자신의 재킷을 찾아 핸드폰을 꺼낸 진은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너, 어디야?」
별 생각 없이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며 답한 진은 순간 수화부에서 터져 나온 고함소리에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블리스? 어, 나…… 엘리랑 있는데 왜?”
「엘레나랑?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회의 소집해놓고 안 나타나고 뭐하는 거야?」
버럭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블리스의 음성에 진은 순간 방 안에 있는 시계를 보곤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으아…….”
3시 40분이었다. 점심시간에 잠깐 볼 일을 보고 돌아가 2시 30분에 미팅을 잡아두고는 3시 40분까지 미친 듯 청소를 하다, 엘레나랑 시시덕거리면서 DVD까지 보고 말았다.
너무 청소에 열중해버렸다.
“미안. 미안해! 지금 나갈게. 깜빡했어. 시말서 쓸게.”
「시말서가 문제가 아니잖아! 안 그러던 녀석이 연락 하나 없이 미팅에도 안 나타나니 사고라도 난 줄 알고 놀랐잖아. 문자 하나 못 보내? 대체 뭘 한 거야?」
블리스는 진짜 화가 나 있었다. 어지간하면 큰소리도 안 내는 녀석이 버럭 소리를 내지른 것부터가 안 좋은 징조였다. 어쨌든 자신이 잘못했기에 진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 동안 한 일을 이실직고했다.
“……청소.”
뒤에 와야 할 DVD감상은 뺐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엘레나랑 DVD감상하고 놀았다고 말하면 수화부에서 블리스의 손이 나와 자신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뭐? 청소?」
“엘레나 방 청소하다 보니…….”
「너 그 집에 메이드로 취직했냐? 네가 왜 걔 방을 청소해?」
“너무 더러워서 나도 모르게 그만…….”
참을 수 없는 그 꼴에 결국 온 열정을 다해 방안을 깨끗하게 치워버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시간이 지나 있었고 그러다 엘레나가 가져온 DVD에 푹 빠져 버렸다. 점점 자신이 엘레나와 같은 급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지금 갈게. 지금 들어가면 40분 정도 걸릴 거야. 미안해. 진짜, 미안!”
「멀쩡하면 됐어. 일단, 사람들 각자 자기 일 보라고 보내놨으니까 천천히 와.」
“빨리 갈게. 기다려.”
서둘러 재킷을 들고 일어선 진은 엘레나에게 손을 흔들며 가방과 상자를 챙겨들고 재빨리 엘레나의 방에서 달려 나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오늘 오후 일정을 자신이 모조리 꼬아버렸다. 하루, 한 시간도 모자랄 판에 오후를 꼬박 버렸다.
“미치겠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간 진은 그대로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때마침 정원에 서 있는 자신의 차를 본 진은 재빨리 저택을 나서 자신의 차로 달려갔다. 다행히 키는 와이퍼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열쇠를 꺼내 락을 풀고 막 차문을 열려는데 저택 안으로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들어온다. 은색의 재규어 XK컨버터블이었다.
“와우.”
차 볼 줄 아네, 라고 중얼거리던 진은 서둘러 차를 타 안전벨트를 했다. 그와 함께 저택 앞에 선 차에서 한 남자가 내려선다.
은발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에 빛이 날 것 같은 새하얀 셔츠, 그리고 물이 빠진 청바지, 그리고 보잉 선글라스. 막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 근사한 모습이었지만, 어디서 많이 본 체형이었다. 그리고 많이 본 이목구비였다. 그러니까 방금 보고 나온…….
“……세르게이 주니어다.”
알렉세인지 이반인지 니콜라인지 모르겠지만-나름 귀여운 알렉산드르는 제외- 하여간 세르게이의 쌍둥이였다.
보자마자 기함을 한 진은 재빨리 기어를 바꾸고 재빨리 악셀을 밟았다. 도망쳐야 한다. 어서 저 세르게이 소굴에서 멀리로 도망쳐야 한다.
“진짜 환장하겠네…….”
***
다소 위험한 속도로 차를 운전해 사무실로 돌아온 진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블리스에게 달려가 두 손을 모으고 싹싹 빌었다. 일정을 엉망으로 만든 것도 문제지만 블리스가 자신이 걱정이 돼 고객과의 상담 약속까지 취소했다는 말에 진심으로 백배 사죄하는 마음이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잊고 청소를 할 수 있었을까.
“미안. 미안해! 진짜 미안.”
블리스의 사무실로 뛰어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자 블리스가 보던 서류를 내려두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소집된 사람한테 미안해야지.”
“사과할게.”
진이 진짜 축 쳐져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블리스가 진에게 다가서며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준다.
“내가 돌아온 게 세 시였으니까 다들 30분이 넘게 기다리고 있었어. 혹시나 해서 계속 전화를 해도 넌 전화도 안 받고 해서 아무래도 퇴원한 지 얼마 안 돼 쓰러진 것 같으니 다들 돌려보냈어. 사과 전화를 하되 청소하다 늦었다는 말은 하지 마. 그거 진짜 사람 열 받거든? 현기증을 일으켜서 잠시 쉬었다고 해.”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지 않아?”
“기다리던 사람들 놀려? 남의 집에 가서 청소하다 늦었다고 하게? 상대방 기분도 생각해. 다들 이해해주는 분위기니까.”
“알았어. 너한테도 미안. 넋이 나갔었나 봐.”
그건 진심이었다. 세르게이랑 똑같은 남자의 사진을 줄줄이 보고 나니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그들의 그 독한 눈빛은 사진으로도 영력을 발휘하는 건지도 모른다.
진짜 그 집하고 연결돼서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고 괜스레 남을 원망하던 진은 자신의 머리를 끌어안는 블리스의 손길에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껌뻑거렸다.
“됐어. 무사했으면 됐어.”
다정하고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어투에 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눈을 감았다.
블리스가 화가 났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는데 화가 풀린 걸 보자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행이었다. 진짜, 다행이었다.
“미안해, 걱정시켜서.”
“괜찮아.”
다정하게 속삭이는 블리스의 말에 진은 손을 뻗어 블리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서로를 끌어안은 채 잠시 그 상태로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그 안으로 에반이 들어섰다.
“진.”
차분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은 블리스에게서 살짝 떨어져 뒤를 돌아봤다.
“에반, 걱정했지?”
괜스레 모두에게 미안해져 진이 진심으로 사과를 하자 에반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길게 한숨을 내쉰다.
“당연히 걱정했지.”
“다신 안 그럴게. 미안.”
“미안한 줄 알면 됐어.”
터벅터벅 걸어 블리스의 책상 앞으로 다가선 에반은 들고 있던 두꺼운 서류철을 블리스의 책상 위에 올려두곤 진을 돌아봤다.
“그보다, 진.”
어깨를 툭 치는 힘에 진은 웬일로 에반이 조용히 넘어가나 해 눈을 반짝이며 블리스를 바라봤다. 그 순간 에반에게서 여지없이 그다운 말이 터져 나왔다.
“시말서 써.”
***
“그래, 쓴다, 써! 내가 못 쓸 것 같아?”
밀려 있는 일들을 하는 와중에도 진은 이를 갈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설마 그 상황에서 에반이 진짜 시말서를 쓰라고 할 줄은 몰랐다. 거기다 “시말서 세 번이면 감봉이야.”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 말이다.
“너무한 거 아냐, 진짜? 물론, 내가 잘못했으니 쓰긴 쓴다고. 나도 쓸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블리스도 블리스다. 그러면 자기 편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파트너의 말이니 시말서를 쓰라며 자기는 슬쩍 빠져나가버렸다. 통화를 할 때엔 분명 시말서가 문제가 아니라느니, 걱정했다느니 라고 잘도 떠들어대더니 에반이 뭐라고 하자 당장에 혼자만 내빼다니.
“나 사랑하는 거 맞아?”
오른손으로 부지런히 마우스를 움직이며 회계 프로그램을 체크하던 진은 마지막 파일을 정리하곤 프로그램을 닫은 뒤 에이먼이 보내준 조감도를 열어 좌석 배치를 확인했다. 카메라와 조명의 위치와 신부와 신랑 대기실, 그리고 손님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최대한 섬세하게 좌석을 배치해야 한다. 이미 다 해놓은 배치도와 조감도를 같은 배율로 맞춰 확인하던 진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돌려 폭죽이 터지는 위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나?”
준비는 완벽했다. 진짜 너무나 순조로워 무서울 정도였다. 다시 한 번 위치를 확인하던 진은 마이크를 보이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곧장 에이먼에게 전화를 걸어 예식장을 장식할 꽃들 사이에 마이크를 넣기로 결정을 내렸다.
당장 급한 일들을 끝내고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블리스가 같이 퇴근을 하자고 했는데 일단 급한 불들은 모두 껐으니 갑자기 무슨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정시 퇴근도 가능할 듯했다. 이게 다 오른손엔 마우스, 왼손엔 전화기를 들고 3시간가량을 미친 듯 일한 결과였다.
“역시 난 대단해.”
스스로의 업무 능력에 자화자찬을 하던 진은 기다렸다는 듯 문 안으로 들어선 블리스를 보곤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일정 다 처리.”
“벌써? 10시에 퇴근할 각오 했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뒤에 들고 온 봉투를 진의 책상 위에 내려둔다.
“뭐야?”
“저녁. 중국 음식이야.”
“와, 웬일이냐? 네가 이렇게 쓸만한 짓을 다하고?”
“밤늦게나 끝날 줄 알고 그랬지.”
“그럼 먹자. 먹고 나가자.”
“그럴까?”
“응. 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거든. 배고팠는데 잘됐다.”
진의 책상 앞에 앉은 블리스가 봉투에 있던 음식들을 하나씩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놨다. 잘 포장된 종이 팩들을 뜯어 늘어놓자 음색 냄새가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운다.
“맛있겠다.”
다른 데에 집중하고 있을 때엔 몰랐지만 막상 음식 냄새를 맡자 허기가 돌기 시작했다. 침을 꿀꺽 삼킨 듯 막 젓가락을 집으려던 진은 핸드폰 벨소리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진, 여기 좀 와야겠다.」
사라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아 있었다. 오전에 전화를 할 때는 날아갈 것 같더니, 지금은 다 죽어간다.
무슨 일인가 싶어 블리스를 바라보자 블리스가 입 모양으로 “누구야?”라고 묻는다. “사라.”라고 역시 입 모양으로만 답해준 진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아쉬운 듯 바라보며 사라에게 되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오후에 재키 웨딩드레스가 왔는데…….」
“오늘 나온다고 얘기 들었어. 드레스에 문제 있어?”
웨딩드레스정도라면 별일 아니다 싶어 진은 젓가락으로 블리스가 펼쳐놓은 음식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니. 드레스는 완벽해. 너무 예뻐. 황홀할 지경이야.」
“그럼 왜? 웨딩슈즈 때문에? 그건 좀 걸려. 내일 오전 중에 나올 거야.”
「아냐, 구두는 괜찮아. 웨딩슈즈야 급한 대로 어떻게 처리하면 되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
진이 의아한 듯 그렇게 묻자 사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답한다.
「재키 살이 문제야.」
사라가 따로 살림 차려나온 빌라의 응접실에 앉은 진은 이 순간 진심으로 재키의 신경줄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란 모름지기 백이면 백이 결혼식 전에 살이 쪽쪽 빠진다 들었다. 그래서 웨딩드레스 역시 가봉을 할 때 피팅을 할 때보다 조금 더 작게 만든다고 들었다. 그래야 당일 신부의 몸에 탄력 있게 들어맞는다. 임신 중인 여자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3개월이라면 배가 눈에 띄게 나올 때도 아니고, 이것저것 신경을 쓰는 데다 입덧까지 하게 되면 살이 쪽쪽 빠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왜 재키는 저렇게나 살이 찐 걸까. 그것도 배가 아니라 옆구리와 허리에 말이다. 더 신기한 건 임신 중임에도 재키의 가슴은 여전히 등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결혼식 5일 전에 살이 찔 수가 있지? 그것도 전체적으로 한 사이즈 정도가 늘다니. 진짜 경이롭다.”
여자란 원래 남자보다 섬세하고 예민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라는 생각을 하며 진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저것들이 식전에 사고를 칠 건 예상했던 바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5일 전에나 쳐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도 겨우 살찐 정도로 말이다.
“저 드레스는 못 입겠네. 클레어나 입으라고 해야겠다.”
바티칸의 성직자들이 입는다는 천연 섬유로 만든 주세페 파피니의 완벽에 가까운 라인을 자랑하는 백색의 드레스를 보며 진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뱉었다. 일이 이쯤 되자 식의 완벽함이나 화려함은 포기한 지 오래다. 길이길이 남을 세기의 결혼식 따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아무 사고나 없이 치렀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일 결혼식만 치를 수 있다면 좋겠다.
“애초에 임신 중에 주세페 파피니의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긴 했어.”
사라가 애써 죽어가는 진을 위로해준다. 그냥 웨어(Wear)라기보다는 예술 작품에 가까운 주세페 파피니의 드레스는 소화하기도 힘들뿐더러 몸의 라인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디자인이기 때문에 살집이 있는 재키에겐 애초에 무리였다.
그래도 설마 설마 했다. 진짜 결혼식 전에 살이 찔 줄이야.
“이제 와 드레스를 새로 주문 수도 없고…… 큰일이네. 가봉만 사흘은 걸리는데. 저 드레스 공수해준 담당자한테 면목이 없네.”
“살이 찐 걸 어쩌겠어.”
“그렇지.”
매도 맞을수록 맷집이 는다더니 이젠 저 두 녀석이 무슨 짓을 해도 화가 안 난다, 진짜. 이제 적당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매카니즘은 어찌나 훌륭한지 처음에는 당황하고 놀라고 화를 내지만, 두 번째엔 그보다는 조금 덜 화낸다. 그리고 세 번째 쯤 되면 무감각해진다. 베버의 법칙이란 물리에서뿐 아니라 정신에서도 작용한다. 한 번 반응한 자극에는 두 번째로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자극에만 반응하게 된다.
“진, 별로 화 안 내네.”
아예 지퍼가 올라가지도 않는 웨딩드레스를 벗고 나온 재키가 조심스레 그렇게 묻는다. 그래도 일단 진이 화를 낼만한 일이라는 자각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미 찐 살을 어쩌겠어. 일부러 찌운 것도 아닐 테고, 일부러 찌운 거라 해도 임산부를 굶겨가며 다이어트 시킬 수도 없고.”
진은 어쩔 수 없는 일에는 포기가 빨랐다. 이제 와 고칠 수도 없는 일이 힘을 빼봐야 자신만 손해니, 서둘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현명하다. 사막에서 길을 잃으면 주저앉아 울기보다 사막을 파 물을 찾아라, 라는 게 진의 신조였다.
진이 진짜 괜찮아 보였는지 재키가 진의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다.
“그럼, 클랜 올라오라고 해도 돼?”
“왜?”
“진이 화낼 거라고 도망갔어.”
어쩐지 클랜이 안 보인다 했다. 하나로는 도저히 인간 구실 못해 짝이 된 두 놈 중에 한 놈이 사라져 무슨 일인가 했더니, 자신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망친 모양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안 돼?”
“올라오라고 해.”
지친 음성으로 그렇게 말한 진은 속으로 ‘너, 잘 걸렸다.’라고 중얼거렸다. 임산부에게는 차마 짜증을 낼 수 없었으니, 클랜이 올라오는 대로 한바탕 퍼부어줄 셈이었다. 사실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아예 화가 안 난 거 아니다. 단지 허탈함과 경악이 너무 커, 분노가 저 멀리 숨어 있었을 뿐이다. 이제 슬슬 허탈함도 인정했고 경악은 가셔가니, 분노가 기어 나올 차례였다.
“그런데 웨딩드레스는 진짜 어쩌지? 어디서 대여라도 해야 하나?”
사라와 킴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을 걸자 진이 고개를 내젓는다.
“어설픈 드레스는 안 입느니만 못해. 몸에 안 맞는 드레스를 억지로 입히는 것도 안 되겠지만, 예산만 삼천만 달라에 달하는 결혼식에 기성복 드레스를 입힌다는 건 말도 안 돼. 그건 내가 용납을 못해.”
그랬다간 꼴이 말 그대로 우스워진다. 애초에 소박하게 하는 결혼도 아니고 그렇게 돈을 처바르고 드레스는 기성제품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최고가 아니면 최선이어야 한다. 그럴 듯한 사연을 가진 드레스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사라,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 있어?”
“있긴 한데, 난 제로 사이즌데.”
“그럼, 킴은요? 재키의 외할머니 드레스라도 없나요? 클랜의 할머니라도.”
진의 물음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킴이 눈을 반짝인다.
“아, 내 드레스 있어. 조금 구식 디자인이긴 하지만 하이웨이스트의 심플한 디자인이라 괜찮을 거야.”
하이웨이스트면 더욱 좋다. 바로 명치 부분부터 퍼져나가니 허리나 옆구리 살을 감추기는 더없이 좋다. 그리고 수선을 하더라도 일단 바스트 부분만 손을 보면 된다.
“가슴 사이즈는요?”
“당연히 재키보다는 크지.”
재키의 가슴이 절벽인 게 오늘처럼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없는 천을 늘이기는 힘들지만, 있는 천을 줄이는 건 간단하다.
“잘 됐네요. 그럼 그걸로 하죠. 어설픈 기성복 드레스를 입느니 어머니 드레스를 물려 입는 게 보기에 훨씬 나아요. 가슴 사이즈 조절만 하면 되니, 티아라는 주문한 대로 가고, 디자인 보고 면사포를 바꾸죠.”
“오, 그럼 되겠네. 전화해서 어서 가져오라고 해야겠다. 그래도 그 드레스 베르사체가 직접 제작해준 거야.”
“그럼 상당히 화려하겠는데요?”
“그렇지. 지르콘이 층층이 달려있긴 한데. 볼래?”
“일단 가져오라고 하세요. 베르사체 드레스라면 30년 전 거라도 믿을 만하니까요.”
“보관 상태는 좋을 거야. 언젠가 아이들이 결혼할 때 입고 싶어 하면 물려주려고 진공 팩에 보관해뒀거든. 매해 꺼내고 손질해놨으니 다른 문제는 없을 거야.”
“진짜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게 좀 길이가 긴데.”
“얼마나요?”
“드레스 뒷자락이 5미터 정도인데…….”
“앞은요?”
“앞은 살짝 끌리는 정도인데 점점 퍼지는 형태야. 그리고 면사포도 3미터 정도 끌릴걸.”
“뒤에 아무도 못 오게 해야겠네요.”
재키라면 반드시 엎어진다. 절대로 장담할 수 있는데 엎어진다. 3센치 이상 굽이라면 롤러블레이드밖에 신어보지 않은 재키다. 구두와는 거의 원수에 가까운 사이라, 매일 하이힐을 신겨 교육시키라고 해놨는데, 드레스 자락까지 길다면 절대 엎어진다. 진짜 생각 같아서는 하이힐로 위장한 새하얀 롤러블레이드를 태워 식장에 들여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구두를 어쩐다…….”
잔화를 신기엔 클랜과 키 차이가 심하고, 웨딩슈즈는 기본적으로 굽이 있어야 한다. 웨딩슈즈는 기본적으로 드레스에 가려지는 게 원칙이지만 신부가 살짝 드레스 자락이 들렸을 때 그 아래로 플랫슈즈가 보인다면 완전 깬다. 간혹 신랑과 키가 비슷한 경우엔 플랫을 신기도 하지만, 클랜보다 무려 26센치나 작은 재키가 플랫을 신고 식장에 나타난다면 말 그대로 고목나무에 매미다. 거기다 재키가 워낙에 동안이라 기본적인 나이 차에 그 정도까지 키 차이가 난다면 성인 남자가 열서너 살 소녀를 신부로 맞이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클랜의 발목을 잘라낼 수도 없고, 재키의 다리를 잡아 뺄 수도 없고…….”
그래서 부득의하게 웨딩슈즈를 12센치의 플랫폼 슈즈로 주문을 했는데 그게 잘한 일인지 진짜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플랫도 따로 주문해놔야 할 것 같다.
“일단 드레스 가져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수선은 사라가 맡겨주세요. 전, 이만 퇴근할게요.”
진이 재킷을 들고 일어서며 그렇게 말하자 사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수고했어. 가서 쉬어.”
“응. 사라도 쉬어. 킴도 오늘은 푹 쉬세요.”
내일부터 지옥도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라고 속으로만 말하며 진은 웃으며 돌아섰다.
“진, 잘 가.”
“그래. 그리고, 재키.”
“응?”
“결혼식 전 사고는 여기서 끝내. 오늘까지는 어떻게 감당이 되지만 내일부터 치는 사고는 수습 못해. 클랜한테도 똑똑히 전해. 오늘 이후로 치는 사고는 나도 책임 못 져. 결혼은 너희가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거든?”
진이 모처럼 진지한 투로 설교하듯 말을 하자 재키는 알아들었는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명심할게.”
“그래, 꼭 명심하길 바란다. 난 이만 간다.”
“조심해서 가.”
“너희가 사고만 안 치면 조심할 것도 없어.”
재킷과 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사라의 빌라를 나선 진은 그대로 1층으로 내려와 차를 몰고 자신의 집으로 향해갔다. 원래는 블리스가 그의 아파트로 오라고 하며 저녁 준비를 하겠다고 먼저 갔지만 그 집까지 갈 기운이 없었다.
일단, 집에 가서 좀 자야할 것 같았다.
블리스와의 약속이고 뭐고, 지금은 좀 쉬고 싶었다. 낮에 남의 집 청소까지 해주고 왔더니 삭신이 쑤신다.
그래도 일단 연락은 해둬야 할 것 같아 막 핸드폰을 꺼내들던 진은 울리는 벨소리에 재빨리 send 버튼을 눌렀다.
“나, 지금 나왔어.”
당연히 블리스라 생각하고 그렇게 말했지만 안에서 뜻밖의 한국어가 나왔다.
「저, 서영진 씨 맞으신가요?」
“아, 네. 누구시죠?”
「아, 저 기억하려나 모르겠네요. 그때 우리 고아원에 있었는데…….」
“예. 아, 제가 저번에 연락드렸었어요.”
「그 연락 받고 전화한 거예요. 통화가 돼서 다행이네요. 지금 통화 가능한가요?」
“네. 괜찮습니다.”
근처에 보이는 건물 쪽으로 차를 돌려 세운 진은 정차 등을 켜곤 두근두근하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저번에 연락하신 일말인데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 차분히 가라앉아있던 심장이 갑자기 거세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네. 말씀하세요.”
「그게…….」
거기서 들려온 것은 전혀 예상도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였다.
치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은 멍하니 자신의 아파트로 가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에 가 앉아 스르르 소파에 기대 누웠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소식이었다. 간절하게도, 그녀의 전화 한 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양기관인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자신이 있던 고아원을 찾았지만, 그 고아원은 2년 전 한국 정부에서 시행한 정책으로 등록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라져, 20년 전 그 고아원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찾느라 몇 달을 허비했다.
한국에 있었다면 당장에 자신이 뛰어다니면 찾았겠지만 고아원의 원장이 죽고 아들은 일본으로 이민은 간 후라 그 이상의 정보를 찾아내기 힘들었다.
단서는 하나뿐이었다. 사진 한 장과 그 뒤에 적힌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
딱히 이제와 가족들을 찾아 원망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어릴 때는 사실 원망도 했고 미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냥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멍하니 부유하며 떠돌아다니는 자신을 지상에 내려줄 끈을 원했을 뿐이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켜지지 않은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바라보던 진은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지갑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사진을 꺼내 그 안에 있는 작은 소녀의 얼굴을 더듬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있었다. 그래서 꼭 만나고 싶었다. 하얀 자갈길을 걸어 자신을 따라오던 작은 소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저 공허할 뿐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가끔 꿈을 꿀 때엔 그렇게나 슬펐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이 들 뿐이다.
왜 그녀는, 어머니는 자신만 버린 걸까. 왜 자신만 살려둔 걸까. 왜 여동생을 데리고 간 걸까.
왜 그랬을까.
자신만 버린 걸 이젠 감사해야 하는 걸까.
가슴이, 심장이 삭막하게 메말라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위잉 하며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멍하니 소파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진은 멍한 채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아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틀었다. 화면 위로 금발의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귀가 멍멍하다. 조용한 게 싫어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여전히 귓가는 너무 고요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아무 소리도 안 들렸던 것 같다. 귀가 먹은 듯 멍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는 사이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주방을 돌아본 진은 개수대 쪽을 바라보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분명히 물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개수대는 고요하다. 물을 튼 흔적이 없다. 윗집에서 물을 흘렸나 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런 소리가 아니다.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다. 뜨거운 태양 아래 차갑고 맑은 물이 흐르는 소리다. 그리고 그보다 가까운 곳에서 자박거리며 자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 멀리서 지나가는 차의 둔탁한 소음.
그리고 작은 여자아이의 노랫소리…….
그립고 그리운 소리.
그 날의 광경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소리만은 너무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소녀의 재잘거리는 목소리, 노랫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자갈들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
그리고 손을 마주잡아 오던 작은 소녀의 체온.
『오빠』라고 불렀었다. 하나로 머리를 묶은 작은 아이가 자신에게 달려와 손을 잡고 그렇게 불렀었다.
그 작은 아이가 이제는 세상에 없다고 한다. 그 작고 작은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어떻게 자랐는지 보고 싶었다. 아직도 그렇게나 손이 따뜻한지, 여전히 사랑스러운지, 지금도 자신을 보며 ‘오빠’라고 불러줄지.
뭐가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어디가 잘못된 건지, 아무도 모른다. 그 이유를말해줄 사람이 사라진 이상, 누구도 알 수 없다.
이젠 왜, 어째서, 라는 의문도 들지 않는다. 그냥 허망할 뿐이다.
그저 슬플 뿐이다.
“불도 안 켜고 뭐하는 거야? 문도 안 잠그고.”
멍하니 앉아 눈을 감고 기억 속의 소리들을 듣고 있던 진은 갑자기 환해진 집안과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곤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봤다.
바로 눈앞에 키가 큰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하는데 그 말은 자신이 모르는 나라의 언어였다.
“진, 왜 그래? 어디 아파? 아직도 안 좋은 거야?”
“…….”
“뭐야? 전화도 안 받고, 사라는 아까 나갔다고 하던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길래 혹시나 해서 온 거야. 왜 그래? 또 청소했어?”
“……누구…….”
남자의 말은 전혀 모르겠는데 자신의 입에서 자신이 모르는 언어가 흘러나갔다.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이상한 말을 사용하고, 이상한 남자를 보고 있다.
“누구? 어이, 너 지금 날 몰라본다는 건 아니겠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든 맑고 푸른 눈동자에 한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삐딱하고 얄미운 말투와 표정도, 그리고 그 익숙한 얼굴과 너무나 좋아하는 푸른 눈동자까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주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블리스…….”
진의 작은 중얼거림에 블리스가 진의 옆에 앉으며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그래. 나야.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
“……동생이…….”
“동생이?”
“……그 애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리는 진을 바라보던 블리스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진을 바라보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됐어. 말 안 해도 돼.”
“…….”
“몰랐으면 했는데, 알아버렸구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블리스의 목소리에 진은 눈을 들어 블리스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10년 전쯤에 사라의 외가에 부탁해서 찾은 적이 있어. 사라의 아버님께서 고위직 공무원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네 이름과 생년월일로 찾아냈어. 지금까지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았어. 거기서도 넌 모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안 알려준 건가 봐.”
“……그랬구나. 어쩐지…… 입양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닌데……. 집도 찾았고, 학교도 찾았는데……. 왜 그렇게 서둘러서 입양을 시켰을까. 지금까지 그런 건 생각도 못 했어. 엄마를 찾았는데, 분명히 살아 있는데…… 영영 못 찾은 것도 아니고 양육권 포기 각서를 쓴 것도 아닌데, 왜 날 그렇게 쉽게 입양을 시켰던 걸까, 하고 의심도 안 해봤어. 알고 있었나 봐. 무의식적으로, 그냥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건가 봐. 입양이, 그것도 국제 입양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닌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모님이 살아 있는 이상은 입양이 쉬운 게 아니다. 집을 찾지 못했다면 몰라도 다니던 학교와 집을 찾았다면 다른 가족이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입양을 보낸 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부모가 죽지 않은 이상은 확인이 된다면 부모의 양육포기각서가 있어야 한다.
왜 그걸 이제야 생각할 걸까. 한국이 미국보다는 덜 까다롭겠지만 적어도 부모님의 행방을 찾은 아이를 그렇게 빨리 입양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어렸으니까 몰랐던 게 당연한 거야.”
“엄마도 고아였대. 그래서…… 여동생은 데리고 갔나 봐. 그런 것 같아. 선생님 말이 그러네.”
무표정한 얼굴로 진은 오늘 들었던 내용들을 그대로 블리스에게 전해주었다. 담담하고 차분한 진의 목소리에 블리스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눈물은 안 나. 그냥, 그래. 아무 생각도 없어.”
“진…….”
“자꾸만 물소리가 들려. 개울가에서 울리는 물소리랑 동생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소리가, 계속 귀에서 울려.”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다정한 손길에 진은 멍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죽을 때까지 생각날 것 같아. 아니, 죽어서도 생각날 것 같아. 그 소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아냐. 괜찮아질 거야. 전부 괜찮아질 거야.”
“그 애가 보고 싶어. 너무, 너무 보고 싶어.”
“알아.”
“그 아이가 자란 걸 보고 싶었는데……. 만나면 꼭 영은이라고 불러주려고 했는데.”
“……울어도 돼. 진, 울어도 되니까…… 울어.”
블리스의 입술과 따뜻한 호흡이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두피를 통해 전해지는 습하고 따뜻한 그 호흡에 진은 왈칵 눈물을 터트렸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속수무책이었다. 계속해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에 블리스가 손을 들어 진의 뺨을 닦아주었다.
“괜찮아. 울어도 돼.”
다정한 블리스의 태도에 진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블리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진을 안아주며 블리스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래, 울어. 마음껏 울어도 돼.”
블리스의 품에 안겨 통곡하며 진은 참고 있던 눈물을 쏟아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진짜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자신이 냉혈한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는데,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블리스의 품이 따뜻해서 그리고 그의 체온이 너무나 다정해서, 그의 품 안에 그 동안의 설움과 슬픔을 모두 쏟아내 버렸다. 밤이 흐르고 아침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울기만 했다.
서서히 해가 떠오고 있었다. 해가 잘 통하지 않는 거실 안으로도 빛이 들 정도로 해가 떠 있었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블리스는 가벼운 진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내 진이 자신이 누워 있는 소파의 테이블 옆에 뭔가를 내려두는 소리를 들었지만 블리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진의 발걸음이 멀어진다. 그 소리를 듣던 블리스는 자꾸만 눈이 떠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진이 뭘 하려는지 알고 있다. 진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하고 있었다. 절대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만은 하지 않던, 그 고지식하고 깐깐하던 녀석이 태어나 처음으로 그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려하고 있었다.
이제 훨훨 날아갈 때였다.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 원하는 곳에 머물다 다시 돌아올 것이다.
잡고 싶었다. 간절하게 가지 말라고 잡고 싶었지만, 이번만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 날개가 더 강하게 날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날개를 꺾어 내려앉힐 수는 없다.
타악- 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휴가다. 진이 이제까지 받지 못했던 아주 짧은 휴가다.
그러니까, 기다리면 된다.
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서서히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걸 듣던 블리스는 그제야 겨우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낯선 방의 천장을 돌아본 블리스는 다시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와 열쇠를 보았다. 열쇠는 이 아파트의 현관 열쇠였다.
그리고 종이에는 아주 짤막한 말 한 마디만 적혀 있었다.
『Thank you.』
진도 자신이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모를 리가 없다. 서로의 사소한 습관이나 숨소리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이였으니까.
이제 진의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블리스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 괜찮을 것이다. 모두 괜찮아질 것이다.
이건 터닝 포인트였다.
진이 드디어 스스로를 뛰어넘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자신은 그냥 기다려주기만 하면 된다.
이 자리에서 그냥 기다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