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이건 또 뭐야?”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들고 또 다시 매스미디어의 세계로 탈출하려던 진은 브라운관을 켜자마자 나오는 자신의 욕설 장면에 마시던 맥주를 뿜어 버렸다. 그 장면만으로도 충격적인데 화면 하단에 아주 친절하게도 ‘1시간 전 방송된 TTT채널의 생방송 장면’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었다.
“생방이었냐…….”
갑자기 눈앞에 아득해지고 머리가 텅 빈 그 느낌에 들고 있던 맥주를 놓친 것도 모른 채 진은 입을 헤에 벌린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자신의 왼손 중지가 멀어지며 밝고 경쾌한 인상의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왼손 중지 앞에 선 채 웃음을 터트린다.
「와우, 대단한데요? 진 케이먼. 생방송 중에 저런 사고가 나다니. 욕설도 욕설이지만 무술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네요. 역시 태권도의 나라!」
그건 대체 무슨 개소리냐, 라고 할 정도로 정체불명의 멘트를 날리는 남자의 옆에 선 여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진짜 엄청난 방송사곤데요? 생방으로 보신 분들 아주 즐거우셨겠네요. 와우 블리스는 오늘도 근사한데요? 저렇게 근사한 남자라면 여자에게 주기 아까우니 남자라도 좋아요.」
아리따운 여자의 뒤로도 자신의 중지가 계속 잡히고 있었다. 오늘 아침 자신의 뒤통수에 이어 오후에는 자신의 왼손 중지가 만방에 악명을 떨치고 있다. 얼굴이 아닌 게 얼마냐, 싶다가도 왜 하필 저거냐, 하는 생각에 맥주에 코 박고 죽고 싶어졌다. 내일부터는 자신의 왼손만 봐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 것 같다. 왼손을 아예 기브스해 버릴까.
「제니, 안 됐지만 그 희망은 접으시는 게 좋겠어요.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이 있습니다. 자료 보시죠.」
그 말과 함께 한 장의 사진이 화면 전체를 덮었다. 블리스와 그 뒤에 선 다니카가 잡힌 프레임이었다. 다행히도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있었다. 고소해버리겠다는 자신의 외침이 통했는지 자신의 얼굴과 다니카의 얼굴은 잘 가려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사이 다시 남자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블리스 애클랜드, 월요일 아침을 화려하게 장식한 배드 가이의 진짜 연인은 누굴까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멈춰진 프레임이 확대되며 블리스의 뒤에 서 있는 다니카를 줌인한다. 그리고는 다니카의 얼굴 위로 동그라미가 그려지며 남자가 설명을 계속한다.
「이 여성은 블리스의 대학 동기로 동기생들 사이에서는 ‘형님’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딱 보기에도 체격이 대단하죠? 블리스는 그녀를 사랑스러운 듯 ‘까마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가끔은 ‘람보’라고도 부르고요.」
지금까지 블리스가 다니카를 까마귀라고 부른 적은 수없이 많지만 그 어투가 다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체, 그 살벌한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면 다정한 거냐? 귓구멍이 썩었냐?
진이 어이가 없어 턱을 빼고 바라보는 사이 다시 한 번 사진이 바뀌며 검은 재킷을 벗은 다니카의 근육질 몸매 사진이 나타난다. 저건 어떻게 찍은 거야, 라고 진이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이 다니카의 어깨 근육을 일부러 울퉁불퉁하니 확대하며 남자가 짓궂은 투로 말을 잇는다.
「오우, 진짜 람보 같죠? 실버스타 스텔론이 울고 가겠는데요?」
얄밉기 짝이 없는 그 말투에 진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대니한테 난 죽었다…….”
저 우람한 팔로 한 대만 맞아도 즉사다. 큰일이다.
「아무래도 이 여성 덕분에 게이라는 소문이 퍼진 게 아닐까 하네요? 아니, 단지 소문이 아닐지도 모르죠. 드랙퀸일지도요.」
땡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자 진은 하염없이 화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어쩌면 이렇게 지지리도 운이 없냐?”
그래도 스르르 소파위로 기대던 진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손을 뻗어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오전부터 꺼둔 핸드폰을 켜보니 역시나 화면이 켜지자마자 미친 듯 메시지 알림 음이 울려댄다. 아침에 온 것도 다 못 봤는데 지금 또 난리가 났다.
차라리 메시지 함이 다 차서 아예 메시지를 안 받는 쪽이 좋겠다 하며 액정을 바라보고 있자 핸드폰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보니 클랜이었다. 진짜, 죽도록 받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단 한 명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니, 이게 다 꿈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응.”
「근사했어! 역시 최고야!」
“……닥쳐.”
그럼 그렇지. 클랜이 자상하게 전화를 해 괜찮으니 걱정 말라고 해줄 리가 없다.
「왜 그래? 진짜 멋졌어. 사라랑 킴이랑 다 같이 봤는데, 진 진짜 근사하대. 다들 환호성을 외쳤다니까? 입원 중이던 브루스는 그거 보고 좋아서 날뛰다 또 쓰러졌나 봐.」
“……브루스도 당했냐?”
「응.」
“다 건들고 다니는 애구나.”
「그렇다니까. 역시 진이 최고야.」
클랜의 신나는 웃음소리에 진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죽고 싶어졌다. 완전 클랜과 같은 과로 찍힌다. 생방으로 강렬하게 욕 한마디를 남긴 것보다 그게 더 절망적이었다.
클랜에게 근사하다는 말을 듣다니. 최악이다.
「진, 너무 상심은 하지 마. 오늘 진짜 멋졌어.」
“제발 좀 닥쳐라.”
「뭐 어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야. 지역 케이블이었잖아.」
“진짜 이민 가고 싶다. 내일부터 어떻게 얼굴을 들고, 아니 어떻게 왼손을 보이고 다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브라운관을 보자 여전히 깔깔대는 사회자들 뒤로 자신의 왼손 중지가 적나라하게 보이고 있었다.
화면 좀 바꿔라.
「이민 가봐야 소용없어. 저거 이미 유튜브에 쫙 퍼졌어. 생방송 사고, 어이없는 리포터 태권청년에게 한 방 먹다.」
“나 죽으라고 아예 고사를 지내라.”
「괜찮다니까. 뒤처리는 걱정 말고 쉬어. 아, 나도 처음부터 보고 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하더라고. 저 프로가 원래 막가는 프로로 유명하거든. 저 리포터 일부러 유명인들 찾아다니면서 저런 식으로 폭언을 퍼붓고 사람들이 화내고 욕하는 모습 찍는 거 전문이야. 브루스도 생긴 게 불독 상이니 머니 하는 소리 듣고 들고 있던 서류 집어던졌거든. 당한 사람들 모두 속 시원하다고 좋아할걸.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저 리포터 머리통부터 총으로 갈기겠다고 한 사람들이 여럿이야. 물론, 진처럼 생방송 중에 머리통을 걷어찬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며 클랜이 다시 화통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점점 우울해진다.
“진짜 죽고 싶다.”
「괜찮다니까. 이제 유명인이잖아. 인생을 즐기라고. 내가 장담하는데 저 리포터한테 당한 스타들과 거물들이 진을 자기 저택에 초대하려고 줄을 설걸. 진, 다시 봤어. 존경해.」
“……그 말 들으니 진심으로 목매달고 싶다.”
「즐겨, 그냥 즐겨. 에이먼이 저 채널 인수 준비 중이야. 블리스도 저 채널 주식 미친 듯이 사 모으고 있고. 오전부터 예감이 안 좋길래 나도 있는 대로 그쪽 주식 다 사놨거든. 일단 채널 인수하면 끝이야. 아, 녹화한 거 빌려줄까? 생방 DVD로 녹화해뒀는데?」
“……꺼져.”
그렇게 말한 뒤 진은 재빨리 폴더를 접고는 다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어느새 사회자들은 새로 개봉하는 영화의 시사회 장면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의 왼손은 사라지질 않는 걸까.
“손가락을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다시 핸드폰을 꺼두고 샤워를 하고 나온 진은 바스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맥주를 꺼내들고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텔레비전 리모컨을 손에 들려다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자기 손가락만 볼 것 같아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디오 세트로 가 라디오를 틀었다.
「……리스 애클랜드의 연인으로 알려진 진 케이먼이 생방송…….」
순간 진은 재빨리 주파수를 돌렸다.
“그렇게 방송할 게 없냐?”
하루면 없어질 걸 자신이 한 한 달은 떠들게 만들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냥 두면 될 걸, 거기서 열 받아 리포터 머리통을 까버린 게 문제다.
“난 왜 이럴까…….”
대학 시절이야 노먼이니까 그냥 넘어갔지, 저 리포터는 자신을 진짜 고소할지도 모른다. 고소하면 끝장이다. 돈만 받아먹는 멍청한 변호사가 자신을 구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역시 돈을 좀 더 주고라도 유능한 변호사를 고문으로 고용했어야 한다. 한국에서 12년이나 살다 보니 한국에서는 나름 소수의 상류층으로 통하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나름 존경하고 있었다. 거기다 애클랜드 가의 변호사들이 하나 같이 유능한 사람들이라 다 그런 줄 알고 있다. 자신의 고문 변호사를 선정한 뒤로 이 나라의 변호사 자격증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잭 맥캐인처럼 뛰어난 변호사도 있다. 하지만 대형 로우펌이 아닌 작은 개인 사무실을 가진 변호사들은 자신보다도 법률지식이 전무한 경우가 많았다. 이 나라의 특성은 한국과는 달리 라이센스가 있어도 그 라이센스 값을 못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는 것과-라이센스 취득도 한국보다는 상당히 쉽다.- 같은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경력과 능력에 따라 수임료가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었다. 잭 맥캐인의 경우 시간당 상담료만 3000달라가 넘어가는데, 자신의 변호사는 200달라 안팎이다. 그나마 싸서 고용했는데 이 인간하고 한 시간 상담하고나면 한 달을 열 받아 몸져눕는다. 그래도 사람이 좋아 지금까지 참고 있었는데, 그것도 한계다.
“난 수갑 싫다고…….”
생방송에서 자신이 리포터를 팬 장면이 고스란히 나갔으니 고소를 당해도 싸다. 형사소송뿐 아니라 민사소송도 가능하다.
“내가 먼저 쳐버려?”
초상권 침해와 사생활 침해, 그리고 미리 생방송이라는 점도 밝히지 않은 채였고, 명예 훼손도 충분히 가능하다.
“노먼…….”
노먼한테 연락해서 잭의 로우펌 소속 중 이쪽 전문을 소개받을까 하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기자인가 해 경계를 하며 문으로 다가선 진은 작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구세요?”
“나.”
블리스였다. 블리스가 왔다는 사실에 진은 재빨리 문을 열고는 앞에 선 블리스를 보곤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사고 쳤어.”
풀이 죽은 진의 얼굴에 문 앞에 서 있던 블리스가 살짝 눈웃음을 친다.
“알아.”
“걔가 먼저 잘못한 거거든? 나 끌려가는 거야? 형사 소송하면 나 수갑 차는 거야?”
놀란 얼굴로 진짜 겁에 질린 진을 보며 블리스는 사랑스럽다는 듯 진의 머리통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걱정 마. 다 처리됐으니까.”
“……진짜야?”
“지금 에이먼하고 통화하고 왔어. 생방송이었다고?”
“응.”
“걱정 마. 얼마 안 봤을 거야. 소규모 지역 채널이었으니까. 물론, 정규방송에서 신이 나서 재방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진의 왼손 중지만 집중적으로 말이다.
“그게 문제라고…….”
“걱정 말라니까. 에이먼이 정규채널에서 전부 빼라고 지시했으니까. 내일부터는 안 나올 거야.”
그렇게 말하며 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블리스가 진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는 안으로 들어선다. 그러다 문득 울리는 음악 소리에 진을 돌아본다.
“텔레비전 대신에 라디오냐? 좀 꺼.”
“싫어. 뭐라도 소리가 나야지. 너무 조용하면 이상해.”
그 시끌벅적한 애클랜드 가에서 나와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진은 조용한 걸 못 참는 성향이 있었다. 충분히 이해하는 바라 블리스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소파를 향해갔다.
“그런데 멀쩡하네. 다니카가 널 가만뒀어?”
만약 그 방송이 뉴욕 전역에 퍼진 걸 안다면 그 성질에 가만있었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진이 신기한 듯 물었다. 아마 다니카도 당시엔 생방인 걸 몰랐으니 넘어갔지만 지금쯤은 알았을 테니 가만 안 있을 거다.
“내일쯤 죽이러 올지도 모르지. 로드한테 부탁해서 간신히 쫓아냈거든.”
“……난 안 죽인대?”
“일단 나부터 죽일걸. 내 애인이라고 소문났으니까.”
그 말에 진은 소파로 다가가 앉으며 진지한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며 내뱉었다.
“당분간 너랑 다니지 말아야겠다. 같이 있다가 나까지 죽는 거 아냐?”
다니카가 블리스라면 얼마나 질색을 하는지 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너무 똑같아서 상극이다. 너무 똑같아서 죽이 잘 맞을 때는 기가 찬 호흡을 자랑하지만 한 번 수틀리면 한쪽이 나가 떨어질 때까지 싸운다.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 보니 의견 일치를 볼 때는 빠르고, 서로의 능력과 열정을 존중하고 존경하기에 좋은 동료는 될 수 있어도 한 번 부딪치면 서로 끝장을 보기 때문에 한 번 대립할 시엔 무조건 떨어트려 놔야 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서로 서로 피해 가는데, 이렇게 딱 걸렸으니-거기다 대니는 얼결에 드랙퀸 누명까지 썼다.-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내일 쯤 애지중지하는 연장들을 들고 나타날지도 모른다.
“내 잘못도 아니고, 거기에 나타나서 재킷 벗어젖힌 자기 잘못이지. 사실은 나도 상당히 불쾌해. 어딜 인간이 없어서 까마귀랑 스캔들이 나?”
블리스가 재킷을 벗어 소파 등에 걸며 진짜 기분 나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클레어가 둘이 사귀라고 말했을 때 블리스와 다니카 둘이 미친 듯 화를 내던 게 떠올랐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연애대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를 불쾌해했다. 블리스가 이 정도니 대니는 아마 더할 것이다.
“대니, 진짜 열 받았겠네.”
“내가 더 열 받았어.”
“내가 보기엔 대니가 더 불쾌해할 것 같은데?”
“까마귀 주제에 영광이지.”
“……내가 보기엔 대니가 아까워. 너보다 훨씬 근사해.”
진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가 휙하니 진을 돌아본다.
“나보다 대니가 근사하다고?”
“응.”
“어이, 네 애인은 나야.”
“그렇지, 일단은. 그런데 대니가 더 멋지긴 해.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뭐야?”
“당연하지.”
“어이. 너 말이지, 이런 사고를 쳐놓고 나보다 까마귀가 더 멋있다고? 내가 그 사고 수습하느라 오후 스케줄 다 놓친 것도 모르고?”
“에이먼이 다 처리했던데, 뭐. 네가 왜 공치사를 해?”
“그 리포터 녀석 브렛의 병원으로 보냈다고.”
“응?”
“쪽팔린 건 아는지, 안 일어나고 끙끙대길래 브렛한테 전화해서 실어가라고 했지. 브렛 아래 다이안이라고 알지?”
물론, 알고 있다. 다이안은 브렛의 병원에서 가장 경력이 꽤 오래 된 간호사로 원하는 대로 고통을 조절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 간호사였다. 주사뿐 아니라 혈압 체크와 링거 투여 과정까지 뭘 하든 마음에 드는 환자에게는 고통을 못 느끼게,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환자들에게는 백배의 고통을 느끼도록 하는 능력이 있어, 처치곤란으로 말 안 듣는 환자에게만 파견하는 베테랑이었다. 그녀에게 찍힌 환자는 그녀가 나타나면 바닥에 뱉어낸 물약까지 재빨리 핥아먹는다고 할 정도로, 악명과 명망이 높은 간호사이기도 했다. 진도 그녀에게 예방접종을 맞는데 진은 마음에 들었는지 주사 바늘이 들어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주사를 잘 놔준다. 대신 클랜이 그녀를 만나면 비명 소리가 난무한다.
“다이안 담당으로 넣은 거야?”
“응. 간 김에 미안하니 아예 건강검진을 다 하라고 했지. 검사 끝나고 나오면 아마 넝마가 돼있을걸.”
“저런…….”
진은 진심으로 그 리포터에게 애도를 표했다. 자신에게 맞은 건 맞을 만했으니 상관없지만 다이안에게 걸렸다면, 그건 꽤 불쌍하다. 병 고치러 들어갔다 병은 더 들고 성질만 고쳐 나올 거다. 그러고 보니 그 리포터는 인간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긴 하다. 아무리 시청률 올리려고 별 망발을 다 한다지만 정도가 있는 거다.
“리포터 일은 걱정하지 마. 다행히 몸에는 전혀 이상이 없대. 골절도 타박상도 없어. 쓰러져서 못 일어난 건 쇼가 확실하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MRI랑 CT 촬영에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그리고 혈관조영까지 전부 해보라고 했어. 하는 김에 심장의 상태와 긴장 상태 시의 심장 박동도 알아보라고 했지. 스트레스 지수를 늘려서 말야. 미친 듯이 런닝 머신 뛰고 있을걸.”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블리스를 보며 클랜이 블리스와는 원수 지고 싶지 않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대장 내시경은 상당히 괴롭다. 거기다 혈관조영술까지 한다면, 진짜 도망치고 싶을 거다.
갑자기 그 영어 못하는 리포터가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좀 덜 아프게 찰 걸 그랬다.
“어쩔래?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싶으면 해도 돼. 에이먼이 잭의 로우펌에서 그쪽으로 가장 유능한 변호사들 셋을 대기시켜놨어.”
“그건 좀 지켜보고.”
사실은 당장에 고소하려고 했는데, 다이안에게 끌려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고소까지 하는 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 게다가 몸에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쪽도 이쪽을 고소할 빌미가 없으니 괜찮긴 할 거다. 그쪽에서 어떻게 나오나 본 뒤 방향을 정해도 늦지 않다.
물론, 그 검진이 다 끝난 뒤에도 살아있다면 말이지만.
“그나저나, 오늘 근사했어. 난 설마 네가 거기서 그럴 줄은 몰랐지.”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진의 얼굴을 감싸 쥔다. 따뜻한 그 손의 감촉에 진은 기분 좋은 듯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웃자 블리스가 진의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남긴다.
“나 때문에 그런 거지?”
블리스의 푸른 눈동자가 밝게 빛난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이었다. 상냥하고 부드럽고 다정한, 진이 너무나 좋아하는 그 눈빛이었다. 하루 종일 자신을 바라보지 않아 그렇게나 안달 나게 하더니 드디어 자신을 바라봐줬다. 그 리포터는 진짜 죽이고 싶지만, 하여간 블리스가 다시 자신과 눈을 마주친다는 사실에 아주 조금이나마 리포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 리포터가 내뱉은 말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블리스가 자신을 다시 돌아봤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오랫동안 안 본다 해도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은 그대로이고, 또 섭섭할 일도 없지만, 그렇게 뒤돌아서면 불안해진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블리스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가슴이 떨리고 안절부절못한다.
두근거림보다는 편안하고 옆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었다. 단지 익숙함이 아닌, 없으면 살 수 없는, 외면당하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건 분명 사랑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사랑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블리스를 보는 게 이렇게 힘들면서, 그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깨닫게 되었다.
너무나 오래 그 자리에 있어 그 자리에 자리를 잡아버린 그 감정을 자신은 사라졌다 여기고 있었다. 그게 그 자리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워 그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그 사랑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네가 그런 건 의외였지만, 기뻤어.”
다정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말에 진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네가 안 왔으면 그냥 조용히 집에 돌아왔을 거야.”
“알아.”
“그래. 그래도 벌여놓고 나니, 한심하다. 나 같은 건 죽어야 돼. 난 왜 욱하는 걸 못 참냐…….”
“벌써 죽으면 곤란하지. 이제 막 사랑이 타오르는데 죽으면 어쩌자고?”
“글쎄…… 타다 다 꺼져가는 건지, 알 게 뭐야?”
“아니, 그 불은 꺼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슬슬 진의 위로 덮쳐오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눈으로 진이 블리스를 바라보고 있자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진짜 보석 같은 눈이었다. 블리스의 눈동자 속으로 수 만 개의 에메랄드가 들어찬 듯 찬란하게 빛난다.
“왜 자꾸 가까이 와?”
“너, 내가 올 줄 알았지?”
“뭐.”
“그래서 목욕 재개하고 기다린 거야?”
“응?”
“그렇게 급했어?”
라며 슬쩍 블리스가 진의 허벅지 안으로 손을 넣자 진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피한다.
“뭐하는 짓이야?”
“뭐긴? 스킨십이지.”
“넌 스킨십이 허벅지로 시작하냐?”
“당연한 거 아냐?”
“웃기지 마.”
“오, 노래도 딱 맞는 게 나오거든?”
그 말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저거 내 재규어 송인데?”
그 반응에 블리스가 쾌활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게 무슨 노랜지 몰라?”
라디오에서는 비트가 강한 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노래는 진이 잘 아는 노래였다. 그리고 아주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했다.
“Shut up & Drive.”
“빨리 올라타라고?”
“응?”
come on now what you waiting for, for, for.
my engine's ready to explode, explode, explode.
so start me up and watch me go, go, go.
마침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에 진은 아연해졌다. 리한나(Rihanna)의 이 곡을 상당히 좋아하지만 가사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재규어 송이라고 불렀는데, 블리스의 어투에서 이 노래 가사의 이중적 의미를 알아채버렸다.
진이 진지하게 그 가사들을 되씹는 사이 블리스는 어느새 진을 소파 코너로까지 몰고는 진의 다리 사이로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짜 올라탈 것 같은 기세에 진은 자기도 모르게 순간 나온 노래 가사를 내뱉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난 페라리가 아냐.(Ain't no ferrari, boy I'm sorry.)”
“하지만 리무진보다는 부드러울걸.”
“캐딜락 57이라니까!”
점점 위에서 몸을 내리누르는 블리스를 보며 점점 뒤로 눕던 진은 머리가 소파의 팔걸이에 닿자 아연해졌다. 블리스가 위에서 덮쳐오니 피하려 한 거였지만 완벽하게 역효과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진은 서서히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별 생각 없이 블리스를 집안으로 들였고 평소와 같은 대화 중이었는데, 상황이 갑자기 이상해져 버렸다. 게다가 절대 자신이 불리하다. 샤워를 한 뒤 귀찮아 속옷도 입지 않고 바스 가운만 걸친 채였다.
가운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는 블리스의 손에 진이 창백하게 질리자 블리스가 싱긋 웃으며 상냥하게 웃는다.
“저 노래 제목이 뭐라고?”
“닥치고 운전해?”
“원한다면 얼마든지.”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진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너 운전하는 거 싫어하잖아!”
“다른 차라면 거절하지만 너라면 좋아. 커브도 돌 수 있어. 난 꽤 훌륭한 드라이버거든.”
왜 하필 이 상황에 저 노래가 나오는 건데, 라며 한탄을 해봐야 이미 늦었다. 블리스가 끄랄 때 그냥 끌 걸, 괜히 라디오를 틀어 놨다.
“저기, 우리 이러는 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전혀 안 빨라. 그 동안 그렇게 참았으면 되잖아? 그리고 몸의 상성이라는 건 연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거거든.”
“그거야, 그렇지만…….”
순간, 시원스러운 리한나가 큰일 날 소리를 내뱉는다.
So step inside and ride.
순간 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노래 가사가 이렇게 야한 줄 몰랐었다. 그 얼굴에 블리스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서서히 몸을 내린다. 그리고 진이 입고 있던 바스 가운의 허리띠를 풀려는 순간이었다.
“블리스 애클랜드! 너 여기 있는 거 알아! 나와!”
문을 부룻 듯 쾅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다니카의 고함소리에 진과 블리스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대니다.”
드디어 다니카가 그게 생방인 줄 안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녀와 블리스가 스캔들이 났다는 것도 안 모양이다. 문을 두드리는 게 보통 기세가 아니다. 발로 걷어차는 것도 같다.
“……어쩌지?”
“없는 척해.”
“음악소리가 나는데?”
“켜놓고 잤다고 해.”
“불도 환한데?”
“불도 켜놓고 잤다고 해.”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려던 진은 절대 이 상태에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블리스의 팔 아래로 휙하니 빠져나와 문으로 달려갔다. 블리스는 딱 좋은 순간에 방해하러 온 다니카를 저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진짜 도움이 안 된다.
다다다 거리며 재빨리 문으로 달려가 문을 연 진은 반가운 마음에 활짝 웃다, 이내 귀신같은 다니카를 보곤 표정을 굳혔다. 아까와는 달리 검은색 슬리브리스 셔츠에 검은색 카고바지 차림인 걸로 봐선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다. 다행히 연장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을 산발한 걸로 봐선 큰일 난 것 같긴 하다.
“블리스! 이 자식, 너 거기 안 서?”
뭔가 휙하니 지나간다 했더니 순식간에 집안으로 뛰어든 다니카가 당장에 블리스에게 달려들자 블리스가 재빨리 소파 뒤로 피한다. 그리고는 소파를 사이에 둔 채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너랑 엮여서 불쾌한 건 나야.”
“네가 뭐가 불쾌해! 영광이지! 내가 너랑 애인? 거기다 날 드랙퀸으로 만들어?”
그게 제일 화가 났는지 고함을 내지르는 다니카를 보며 일단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온 진은 진심으로 다니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니카가 좀 심하게 근육질인 건 사실이지만, 사실 다니카는 개성적인 미녀 축에 끼는 얼굴이었다. 오목조목하니 고전적인 미인형은 아니지만 친근하고 건강한 미인형이다. 블리스가 아메리칸 스윗하트라면 다니카는 전형적인 걸 넥스트 도어 타입이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퍼기(Stacy Ann Ferguson-Black eyed peas의 보컬) 스타일이다. 그러고 보니 퍼기도 지나치게 건강미가 넘쳐 드랙퀸이라 오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미인은 미인인데, 가끔 찍히는 파파라치 사진에서 남성미가 물씬 풍길 때가 있다.
“까마귀, 아무리 열 받아도 말은 바로 해야지. 그건 내가 만든 게 아니지. 그건 전부 네 잘못이야.”
“야!”
“누가 뭐래도 그건 네 잘못이야. 근육을 그렇게 키우지 말았어야지.”
블리스는 전부 네 탓이라는 듯 잘라지는 투로 아주 얄밉게 답을 해주었다. 태연자약한 그 답에 진은 다니카가 블리스를 죽여도 절대로 다니카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블리스는 가끔 사람을 너무 약 올린다.
“대체 왜 내가 너 같은 거랑 엮인 거야?”
보통은 대범하고 어른스러운 다니카도 블리스의 이죽거림에는 못 당하겠는지 비명을 내질렀다. 음악 소리에 쿵쾅거리는 소리에 두 사람의 고함소리에 진은 귀가 찢어질 것 같아 서둘러 오디오로 달려가 일단 라디오를 껐다. 그 사이 블리스가 팔짱을 끼며 다니카에게 충고하듯 말한다.
“까마귀, 지금 네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건 아주 불합리한 일이야. 먼저 친구하자고 한 건 너였어. 그리고 내가 장담하건대, 너랑 내 스캔들은 에이먼 짓이야. 열 받으면 에이먼한테 가서 따져. 시시비비는 확실히 가려야지.”
“가리기 전에 너부터 죽일 거야!”
“날 죽이기 전에 에이먼한테 가서 따져.”
“애클랜드 세 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한이 서린 다니카의 외침에 진은 슬금슬금 블리스의 뒤에 숨으며 궁금한 바를 물었다.
“대니, 거기에 나 포함된 거 아니지?”
“넌 아냐!”
다행이다, 라고 작게 안도하는 사이 또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 소리가 옆집에 들린 건가 싶어 진은 재빨리 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잡고 돌리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조용히 시킬게……. 엘리?”
굽신거리며 사과를 하던 진은 문 앞에 우뚝하니 선 엘레나를 보곤 환하게 웃었다. 옆집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하도 뛰고 소리를 질러대서 따지러 온 줄 알았다.
“웬일이야?”
긴 생머리를 풀고 베이비돌의 퍼프소매 원피스를 입은 엘레나가 웬일로 수줍게 미소를 짓는다.
“오늘 생방송 봤어요.”
“어? 아……. 그래?”
“저기, 이거.”
그렇게 말하며 엘레나가 들고 있던 검은색 주머니를 건넨다.
“이게 뭔데?”
“마음의 선물이에요.”
라며 발그레한 얼굴을 하는데 진은 우두두 돋는 소름에 뒷걸음질쳤다. 쟤가 미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엘레나 네브즐린이 수줍은 미소라니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열어봐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라며 두 손을 모아 들고 입가를 가리며 붉어진 얼굴로 속삭이는데 진은 진심으로 강한 공포를 느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져 엘레나에 대한 공포감은 사라졌다 여겼는데, 그래도 여전히 진의 머릿속에 있는 엘레나는 사다코였다. 사다코가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웃는다니, 이건 뭔가 다른 쪽으로의 공포였다.
“고, 고마워. 들어올래?”
그래도 예의 상 들어오라고 말을 걸자 엘레나가 얼굴을 감싸며 꺄악거린다.
진짜 얘가 미쳤나 보다.
“남자 혼자 있는 집에 어떻게 들어가요.”
“……전에 들어왔잖아.”
“그래도요. 어서 열어보세요.”
그 말에 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검은색의 주머니를 내려다봤다. 무게감이 꽤 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머니 안을 들여다본 진은 순간 그 안에서 나온 찬란한 300캐럿 가량의 다이아몬드를 보곤 그대로 굳어버렸다.
투명한,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는 다이아몬드였다. 엑셀런트 컷으로 커팅이 된 다이아몬드는 어둠 속에서도 자체 발광을 한다 싶을 정도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의심할 바 없는 다이아몬드였다. 그것도 품질로는 세계 최고라 칭해지는 센터너리를 능가할 정도의 상품이다. 투명도도 이쯤이면 FL급에 컷팅이며 다이아몬드 자체의 품질이며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거기다 크기도 떨어지지 않는다. 센터너리의 보험금만 일억 달라에 달하는데 이 물건은 그에 비해 조금도 뒤쳐지지 않는다.
“너희 집 광산 하니?”
큰오빠는 400캐럿짜리의 레드 다이아몬드의 원석에 막내딸은 300캐럿 가량의 최고품의 다이아몬드를 선물이라고 가져오다니. 광산을 하더라도 이런 짓은 못한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집에 이런 거 많아요.”
라며 발그레한 얼굴로 엘레나가 웃는 걸 본 진은 몸을 떨며 멍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머리끝부처 발끝까지 한 번 훑어보는 것만오 한참이 걸릴 정도로 길고, 한 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정도로 인상이 강한 미녀가, 거기다 액면가는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미녀가 소녀처럼 두 손을 모르고 부끄러워하는 건 뭔가 상당히 기분이 묘했다.
진이 멍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자 얼굴이 빨개진 엘레나가 아주 수줍은 소녀처럼 작게 중얼거린다.
“그 리포터랑 파파라치는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아빠한테 죽여 달라고 했어요. 아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한대요.”
그제야 진은 다시 한 번 엘레나가 미하엘 네브즐린의 딸이라는 사실이 실감되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얘는 마피아 딸이다. 그리고 얘 오빠가 세르게이 네브즐린이다. 아주 잠깐 잊고 있었다.
“엘리,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돼. 절대로 안 돼. 법의 힘을 빌려야지,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그냥 말로 죽여 버린다, 라는 게 아니라 폭탄을 터트리든 기관총을 쓰든 어떻게든 진짜 죽여 버릴 것 같아, 진은 엘레나를 뜯어말렸다. 죽이는 건 미하엘 네브즐린의 부하들이 하겠지만 사주는 자신이 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진짜 죽이면 쇠고랑 차는 건 자신이다.
기겁을 한 진의 상태를 전혀 눈치 못 챈 엘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죽이지 말아요?”
“그래.”
“그럼, 팔 다리 하나 부러뜨리는 거는요? 아니 자르는 건요?”
“……안 돼.”
“그럼, 눈알 파내는 거 안 돼요?”
“……그것도 안 돼.”
“좋아요. 그럼 혀만 뽑을게요.”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딱 그 짝이다. 저 천진한 얼굴로 혀를 뽑고 눈알을 파내겠다는 말을 하다니. 진짜 저 집 남자들은 교육 좀 받아야겠다. 애 앞에서 대체 무슨 소리들을 지껄이는 거냐.
“엘리, 그 일은 대강 정리 됐어. 그러니까 넌 신경 안 써도 돼.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
“왜요?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데.”
“괜찮아. 이미 정리됐어.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럼, 보석은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는 드는데, 이건 그냥 가져가는 게 좋겠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우리 집에 그것보다 더 큰 것도 있어요! 샤넬 2.55만한 것도 있어요. 그거 갖다 줄까요?”
단위조차가 센치, 인치가 아닌 샤넬이 기준인 아가씨를 바라보며 진은 들고 있던 주머니를 엘레나에게 돌려주었다.
“작아서 못 받는 게 아니라, 너무 커서 그래. 나한테는 과해.”
“왜요?”
“쓸데도 없고, 또 너무 비싼 물건이야. 과분해. 이런 건 남에게 함부로 선물로 주는 게 아냐, 엘리.”
“오빠는 진한테 레드 다이아몬드 줬잖아요!”
“아, 잘됐다. 그것도 가져가. 이건 내가 보관할 게 아냐.”
“안 돼요. 제 것도 받아요.”
“아니, 내가 이걸 어따 쓰라고?”
“팔아서 점심 사먹어요. 하여간 받아요. 내가 주고 싶어서 주는 거니까 받아야 돼요!”
“잠깐…… 이걸로 무슨 점심이야, 점심은? 너 이게 얼마짜리인지나 알고 있는 거야?”
“100달라요.”
순간 진은 다이아몬드가 모조인가 하는 착각을 했지만, 절대 아니다. 그리고 모조라 해도 저 정도 퀄리티의 물건이 100달라일 리가 없다. 모조라 해도 저 투명도와 무게감 커팅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다. 모조면 100만 달라이고, 진품이면 100억 달라다.
“누가 그래?”
“아니에요?”
“100달라가 아니라 100억 달라일 걸.”
그 말에 엘레나는 잠시 갈등하는 듯했지만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진의 손바닥 위에 주머니를 건네준다.
“하여간 받아요. 내가 주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그냥요.”
“그냥 이런 걸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씨! 내가 반해서 준다고 꼭 말을 해야 돼요?”
버럭 내질러진 그 목소리에 진은 순간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뭐라고?”
경악한 눈으로 엘레나를 바라보고 있자 엘레나가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고는 돌아선다.
“아, 난 몰라. 오늘 너무 멋있었어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는 엘레나를 보며 진은 진심으로 대체 뭐가 멋있었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대체 뭐가 멋있었는데?”
전국 방방 곳곳에 방송된 왼손 중지가 멋졌다는 걸까 싶어 진이 멍한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보자 차마 자신과 눈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옆으로 돌아선 엘레나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다. 얼굴이 하도 작아서 한 손으로도 충분히 가려질 것 같다.
“아, 부끄러워. 나 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후다닥 복도를 달려간다. 자신의 손 안에 남은 보석을 본 진은 이미 멀리로 사라진 엘레나를 불렀다.
“야! 보석 갖고 가.”
하지만 진이 소리를 치는 순간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든 엘레나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뭐야?"
갑자기 사라진 엘레나 덕에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뒤에서 블리스가 다가선다.
"엘레나야?"
"응."
"왜 왔대?"
"……몰라. 이거 주고 갔어."
그렇게 말하며 진은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블리스의 앞에 내밀었다. 하도 충격이 커 머리가 텅 빈 채라 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이거 진짜지?"
거의 울 듯한 얼굴로 진이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이아몬드를 내려다보더니 이내 검은 주머니에 넣고는 딱 잘라 말한다.
"모조야."
세르게이가 준 원석과 같이 모조라는 답을 내린 블리스가 진의 손에서 주머니를 빼앗으려 하자 블리스의 뒤에서 다가온 다니카가 재빨리 블리스에게서 주머니를 빼앗는다.
"모조는 개뿔. 진품이야. 이거 어디서 난 거야?"
"엘레나가 가져왔는데……."
진이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블리스가 다니카에게서 주머니를 빼앗으려 했지만 다니카는 옆으로 휙 피해 주머니를 다시 열고 그 안의 보석을 꺼내 밝은 빛 아래 비춰 보았다.
"이거 진품이야. 이 정교한 커팅, 에 불순물 하나 보이지 않아. 현미경으로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진짜 상품인데, 대체 이런 게 어디서 나온 거야?"
"……몰라. 네브즐린 가가 요즘 땅도 파나 봐……."
쇼 비지니스로는 만족 못해 드디어 땅을 파기 시작했나 싶어 진이 창백한 얼굴로 답하자 보석을 찬찬히 보던 다니카가 놀란 얼굴로 진을 돌아본다.
"네브즐린? 그 네브즐린?"
"응."
짤막한 진의 답네 다니카가 어이 없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어쩌다 걔네랑 엮였냐?"
"몰라."
"하여간, 이건 진품 맞아. 끝내주는데? 최근에 본 물건 중에 최고야."
다니카가 슬슬 흘러나오는 침을 꼴딱 삼키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다니카가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보통 물건이 아니다. 확실히 그 전율감은 딱 맞아 떨어졌다.
"나 어떻게 해? 사람들이 막 나 노리고 잡아가려고 하는 거 아냐? 보석 사냥꾼들이 내 집 터는 거야?"
"일단 이건 따로 보관하는 게 좋겠다. 대체 이런 물건이 어딜 굴러다니고 있는 거야?"
"……걔네 집에 많대."
"집에?"
"응."
"아, 역시 마피아."
마피아라고 해도 이런 걸 갖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긴하지만 상대가 네브즐린이다 보니 다니카는 그렇게 납득한 듯했다. 하지만 진은 그렇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하나로도 무서운 것이 집에 두 개나 생겨버렸다.
"……대니, 나 어떻게 해?"
"내가 아냐?"
"대니! 뭐라고 조언을 해줘! 괜찮다고 말해줘! 네가 괜찮다고 하면 마음이 놓인단 말야!"
다니카가 형님이라 불리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믿음직하고 이성적이고 냉철한 다니카는 늘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하면 괜찮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그래서 모두가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는 거다.
물론, 다니카는 그걸 아주 싫어했다.
"……하여간, 정 마음이 안 놓으면 이건 내가 들고 가서 감정해볼게.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이건 돌려주는 게 나을 것 같다."
다니카가 그렇게 말하며 보석을 손에 들고는 돌아서 진의 어깨를 툭 두드린다.
"걱정 마. 일단 감정해본 뒤에 연락해줄게. 하지만 진품인 건 확실해. 돌려줄 때 연락해. 내가 가져나갈게. 너한테 맡겨두면 잠도 못 자겠다."
맞는 말이었다. 레드 다이아몬드 원석을 그렇다쳐도 저 보석은 다른 사람도 아닌 다니카가 진품이라고 확인을 해준 물건이니 집에 둘 수 없다. 아마 저걸 앞에 두고 부들부들 떨다 잠도 못 잘 거다.
"제발 가져가줘."
"그래. 그럼 연락할게."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를 든 다니카가 신이 나 문을 열고 달려나간다. 방금 전 길길이 날뛰며 블리스를 죽인다 살린다 난리를 치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보석을 보자마자 달려나가는 모습에 진은 허망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이 진의 뒤로 다가선 블리스가 짜증스럽다는 듯 내뱉는다.
"그런 걸 왜 받아?"
"억지로 떠넘기고 간 거야. 진짜 뭐야, 저 집은? 진짜 광산업이라도 하나?"
"모르지. 그나저나 하던 거나 마저 하자."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뒤에서 안아오는 블리스를 진이 툭 하니 쳐 떨어트린다.
"기운 다 빠졌어. 왜 쟤만 만나고 나면 이렇게 기운이 없냐?"
이상하게도 엘레나와 통화를 하거나, 만나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별로 힘든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힘들다.
진이 터벅터벅 소파로 가 앉자 블리스가 뒤를 따르며 퉁명스레 내뱉는다.
"그럼, 내 아파트로 가자."
"움직일 기운도 없어."
"그럼 이사를 해. 왜 이렇게 수시로 찾아와?"
"몰라."
소파에 아예 드러누우며 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자 옆으로 다가온 블리스가 진의 머리를 들어 올리더니 그 자리에 앉아 그의 무릎 위에 진의 머리를 내려놓는다. 그 자연스러운 동작에 진이 환하게 웃는다.
"오랜만이다, 이런 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정말 오랜만이었다. 기분 좋은 듯 진이 웃으며 눈을 감자 블리스가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그래. 진짜 오랜만이다."
"응. 편해."
그렇게 말하며 진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하루의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는 듯했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
점점 가라앉는 의식 너머로 블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답할 새도 없이 진은 서서히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따뜻하게 몸을 감싼 기온에 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람의 신체라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눈을 뜨면 딱 그 시간이다. 언제나와 같은 시간, 언제나와 같은 장소에서 눈을 뜬 진은, 평소와는 다르게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따뜻한 피부의 감촉에 눈을 뜨곤 슬쩍 미소 지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자고 일어났을 때, 누군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게, 그리고 이렇게 체온을 전해준다는 게 낯설면서도 너무나 좋았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아침에 진은 일어나기 싫어 다시 눈을 감았다.
사람의 체온이라는 게 주는 감동을 알지 못했었다.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체온과 감정과 타인에게서 받는 에너지라는 게 어떤 건지 미처 몰랐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살아와서, 그런 걸 느꼈던 게 언제인지도 아득해서, 지금 이 감촉을 놓치기가 싫었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진은 모처럼 따뜻하던 기분을 깨는 블리스의 손길에 다시 번쩍 눈을 떴다.
“블리스, 너 어딜 만지냐?”
바스 가운만 입은 채 잠들었던 진은 가운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아랫배와 가슴을 만지는 블리스의 손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그 행동에 슬슬 아래쪽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아침이라 특히 더 그랬다.
“블리스, 손 좀 치워. 아침부터 이러고 싶냐?”
가슴을 더듬다 이내 아래로 내려와 당당하게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는 그 손길에 진이 진저리를 치자, 등 뒤에서 진을 안고 있던 블리스가 진의 목에 입을 맞추며 살벌한 기세로 답한다.
“당연하지. 너 내가 어젯밤에 그렇게 깨우는데도 안 일어났지?”
한이 서리서리 쌓인 듯한 블리스의 말에도 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그랬냐?”
“그래. 내가 아무리 흔들고 일어나라고 난리를 쳐도 안 일어났잖아.”
목소리가 살기등등한 게 진짜 열 받은 듯했다. 하지만 진도 할 말은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뭐가 그럴 수도 있어?”
“나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다.”
“……그래도 멀쩡하잖아. 너, 깨있으면서 일부러 자는 척한 거지?”
슬금슬금 허벅지 안쪽을 훑던 손이 아침이라 반쯤 발기한 성기를 콱 쥐자 진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야, 놔! 내가 너냐? 난 잤어. 기억 안 나.”
“……거짓말.”
“네가 사기 친다고 다른 사람도 사기 친다고 생각하지 마. 난 분명히 자고 있었어. 전혀 기억 안 나.”
어스레하게 블리스가 어깨를 흔들며 깨우던 기억이 살짝 나긴 하지만 분명히 선명한 건 아니다. 분명히 자신은 그때 푹 자고 있었다. 완전 자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자신은 자고 있었던 거다.
“진짜 아무 것도 모른다고? 너 눈 뜬 거 봤는데?”
“……잘못 본 거겠지.”
“웃기지 마.”
“잘못 본 거야.”
“너 눈 떴었어. 그러다 나 보고 다시 감았어.”
“아냐. 난 잤어. 네가 잘못 본 거야.”
눈을 떴다니 뜬 것 같기도 하지만 하여간 기억 안 난다. 꿈결에 한 짓이니 기억이 나도 무효다.
“손 놔. 일어나야 돼.”
자꾸만 예민한 부분을 자극하는 손길에 진이 블리스의 손을 잡자 블리스가 손을 떼며 진의 손목을 잡아 내리누르며, 진의 위로 올라탄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속삭인다.
“어제 하던 거 마저 해야지.”
“뭘 해?”
“해야 할 거. 너 자는 중에도 계속 나한테 달라붙은 거 알아? 내가 좀만 엇나갔어도 그대로 해버렸을걸.”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너 저번에도 거짓말했잖아.”
“내가 언제?”
“하긴 뭘 해? 내가 애냐? 딱 보면 한 건지 안 한 건지 몰라?”
“알았어?”
“그래.”
진은 부아가 치민 듯 그렇게 말했지만 그럼에도 블리스는 뻔뻔스러웠다. 이제 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위에서 내리누르는 블리스를 본 진은 경악한 얼굴로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위에선 내리누르는 사람을 밀쳐내기란 불가능했다.
“블리스, 비켜.”
“비키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이건 확실히 해두자. 날 원하지 않아?”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가 아냐. 넌 나한테 더 이상 두근거림이 없다고 했지만 난 아냐. 난 이런 의미로도 널 원해. 넌 안 그래?”
방금 전의 장난스러운 기운을 걷고 블리스가 드물게도 진지한 어조로 그렇게 물어왔다. 자신을 대하는 평소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진중한 어조와 진지한 태도에 진은 모처럼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사귀겠다고 한 뒤로도 늘 편안한 친구 같기만 하던 블리스가 지금 굉장히 낯설고 섹시해 보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 감각에 진은 순수하게 감탄사를 흘렸다.
“야, 너 조금 섹시해 보이는 것 같아.”
침대 위에 누워 다 벌어진 바스 가운만 입은 채 신기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진을 보며 블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진을 내려다봤다.
“그럼 얼굴을 붉히거나 한숨을 쉬거나 하란 말이다. 넌 대체 왜 그렇게 긴장감이 없는 거야?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분위기가 살아?”
“……사실대로 말했는데?”
“사실대로 말하는 건 좋은데, 분위기 좀 보라고.”
타박하는 듯한 블리스의 말에 진은 설핏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 타령하기엔 지나치게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한 집 안에서 5년을 살았고, 대학시절 4년이나 같은 방을 썼다. 9년이나 옆에 바싹 붙어 지내다보면 볼 꼴 못 볼 꼴 다 보게 된다.
“분위기는 무슨. 하여간 너 섹시해보였어.”
“그럼 섹시한 김에 끝까지 가볼까?”
“지금?”
“그래. 싫어?”
“싫은 건 아닌데, 아침부터 이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출근해야 하는데.”
진이 턱으로 시계를 가리키자 블리스가 시간을 보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이내 다시 진을 바라보며 웃는다.
“괜찮아. 네 오너는 나야. 아침 스케줄 좀 미루지, 뭐.”
이럴 때는 참 직권남용을 잘한다 싶어 진은 쓰게 웃으며 블리스에게 그 직권남용으로도 넘지 못할 현실을 알려주었다.
“난 미뤄도 넌 못 미룰걸. 오늘 아침에 오찬 있잖아.”
“과로사 했다고 해.”
“복상사겠지.”
“하여간.”
“존 에스더의 초대잖아. 나가봐야지. 모처럼 좋은 관계가 된 건데.”
반박할 수 없는 진의 설명에 블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원한이 그득한 얼굴로 진을 바라본다.
“그러게 왜 휴가를 취소해?”
“이 상황에서 휴가가 되냐? 애초에 네 발상이 이상했던 거야.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눕기는커녕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자리를 내주곤 휴가를 받으라니, 그건 나한테 쉬지 말라는 소리 아냐? 애초에 클랜 결혼식을 서두른 것도 너야. 알아?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너라고.”
진이 딱 잘라 원인을 따지고 들자 블리스가 순순히 인정한다.
“그래, 그건 인정해. 미안해. 너한테 무리하게 일을 모는 게 아닌데, 네가 제일 믿을 만해서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이건 확실히 말할게. 넌 진짜 유능해.”
그 말에 진의 눈이 번쩍 뜨인다.
“진짜?”
“그래. 아주 유능해. 있는 대로 부려먹고 싶어질 정도로.”
끝말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하여간 유능하다는 그 말에 진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실하게 해주는 말에는 더없이 약한 진이었다.
“나 진짜 필요한 거야?”
“말이라고 해? 사적인 감정 빼고도 어디 빼앗길까 무서운 직원이야. 넌 진짜 유능해.”
“에반보다 더?”
“에반이 유능하긴 하지만, 그 정도 되는 애널리스트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하지만 너처럼 글씨 잘 쓰는 비서는 구하기 힘들지. 거기다 섬세하고 영리하고, 착하고.”
찬사를 늘어놓으며 블리스는 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곤 살짝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어간다.
“거기다 돌려차기도 잘하고. 욕도 끝내주게 잘하고.”
이어지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에 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이, 너 그거 칭찬 맞아?”
진의 반발에 블리스가 싱긋 웃는다.
“네 중지 진짜 끝내줬어. 이상한 인간들만 안 끌어들이면 딱 좋을 텐데 말야.”
“내가 언제 이상한 인간들을 끌어들였다고 그래?”
“노먼, 다니카, 엘레나, 세르게이. 또 말해?”
“그건, 너 때문에 엮인 거지. 막말로 내가 너 아니었으면 엘레나랑 엮였겠냐? 그리고 세르게이는 엘레나 따라온 거고. 게다가 다니카는 네 친구야.”
“하여간 전부 네가 끌어들인 거야. 그것들 어쩔래?”
“어쩌긴 뭘 어째?”
“떼어내. 이건 뭘 할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슬쩍 하체를 밀어붙이는데 허벅지 사이로 닿는 그 감촉에 진은 슬슬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블리스가 옷을 다 벗고 자는 건 죽어도 못 고칠 습관이라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험악하게 세우는 건 좋지 않다. 불안한 마음에 슬쩍 눈을 내려 블리스의 성기를 눈으로 확인한 진은 기겁을 하며 블리스를 밀어내려했다.
“야, 비켜. 아침부터 그 짓 하다간 나 오늘 출근도 못 하겠다.”
“부드럽게 해줄게. 난 유능한 드라이버니까.”
이건 운전자의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차 자체가 너무 무지막지하다. 이건 마치 불도저로 소형차를 일어붙이는 격이다.
“유능하고 뭐고 그걸로 한다는 게 말이 되냐? 너, 너무 무자비한 거 아냐?”
“이 튼실한 게 네 거라고. 감사히 여겨.”
“하나도 안 감사해. 할 거면 내가 위로 갈 거야. 그게 일리에 맞아.”
“뭐?”
“사실 그렇잖아. 서로 즐기자고 하는 건데, 한 사람이 골병 나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작은 쪽이 넣는 게 합리적이야. 그게 맞아.”
진지한 진의 설득에 블리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대신 확실히 해야 돼.”
“……응?”
“좋다고. 하자고. 단 이번뿐이야. 이번에 제대로 못하면 다음에 뭐라고 하든 내가 할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지금 시간도 없는데.”
“아직 6시 30분이야. 오찬은 8시니까 한 시간 여유 있어. 샤워하는 데에 20분 잡고, 정확히 40분. 해봐.”
“야…….”
“자, 해봐.”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진의 손목을 놓고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진의 허리를 잡아 끈다.
“야, 잠깐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좀 준비를 하고 해야지.”
“섹스는 본능이야. 준비 같은 게 뭐가 필요해?”
“아, 그래도 남자끼리는 뭐가 다를 거 아냐? 난 공부도 제대로 안 했다고.”
“상관없어. 그냥 하면 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왜 말이 안 돼? 해봐.”
블리스가 아예 진의 허리를 잡아 끌어다 자신의 위에 앉혀놓으며 재촉하자 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마음을 다졌다. 못할 것도 없다. 말 그대로 섹스는 본능이다. 교육 받아서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실 블리스에게 일방적으로 리드 당하는 것도 상당히 자존심 상한다.
“좋았어. 내가 못할 것 같아? 그래, 한다. 해.”
블리스의 허리 위에 올라탄 진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블리스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췄다. 가볍고 부드러운 그 키스에 블리스가 웃으며 진의 목을 안고는 응해준다. 그리고 동시에 이미 발기한 채인 블리스의 성기가 더욱 딱딱하게 굳어지며 진의 엉덩이 아래쪽에 닿고 있었다. 잔뜩 흥분한 채 뜨거워진 것이 엉덩이에 닿자 진은 입술을 떼며 불만을 토해냈다.
“야, 잠깐. 네 아들 진정 좀 시켜라.”
“이미 다 선 놈을 어떻게 해?”
“이건 뭐 키우는 맛이 있어야지. 벌써부터 그러면 나한테 어쩌라고?”
진이 진짜 이건 불공평하다는 얼굴로 불만을 토로하자 블리스가 웃으며 바스 가운을 안쪽으로 손을 넣어 진의 가슴을 쓰다듬는다. 손바닥 전체로 문지르듯 천천히 피부 위를 자극하는 그 손길에 진은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위로 오긴 왔는데 하는 건 여전히 블리스가 리드하고 있다.
“블리스, 가만 좀 있어 봐.”
“그럼 네가 잘해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잘.”
싱긋 웃으며 얄밉게 구는 블리스를 내려다본 진은 어떻게든 가슴을 훑는 블리스의 손길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곱게 자란 남자의 손이 피부 위를 스치자 점점 몸이 달아오른다. 심장이 거칠게 뛰어오르는 게 아무래도 할 준비는 끝난 듯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진이 이 다음 과정을 어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블리스가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숙여 봐.”
“왜?”
“핥아줄게.”
노골적인 그 말에 순식간에 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넌 좀 고상한 언어를 쓸 수 없냐?”
“더 고상하게 말해줘? 유두를 물고 빨아줄 테니 숙이라고.”
“야!”
“분위기 없긴.”
“네가 더 없어. 사실 이런 것도 좀 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꽃이나 와인이나, 영화를 본다거나. 좀 더 매력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지, 이게 뭐야?”
“분위기 밝히는 녀석이 내가 그렇게 깨우는 데도 퍼자냐?”
“피곤하니까 그렇지.”
“하여간 숙여봐.”
그 말에 진은 두근두근하며 상체를 숙였다. 푹신한 베개를 양 손으로 내리누르며 상체를 내리자 블리스가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슴의 돌기부분에 입을 맞춘다. 그 감촉에 찌릿하며 허리가 울려오는 기분이었다.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자극적인 느낌에 진이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블리스가 진의 허리를 잡아 내린다.
그 손길에 이끌려 다시 블리스의 얼굴 위로 가슴을 내린 진은 유두를 자극하는 블리스의 혀에 낮은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분명히 자신이 리드하겠다고 위로 올라온 건 맞는데, 상황이 좀 이상해지고 있었다.
“야, 이거 좀…….”
“좋다고?”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살짝 유두 끝을 깨물자 진은 허리를 뒤로 휘며 겨우 팔을 지탱해 버텨냈다.
“이상해.”
“좋은 거겠지.”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은근슬쩍 진의 허리를 안은 채 휘익하니 몸을 돌려 그가 위로 올라탔다.
“너 지금 진짜 섹시해.”
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귓가에 속삭이며 블리스는 진의 귓불을 살짝 물고는 귓가로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 느낌에 진이 어깨에 힘을 주자 목덜미를 핥으며 서서히 손을 내려 진의 가운을 완전히 벌인 채 진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다리를 벌린다. 다른 손으로는 진의 가슴의 돌기를 슬슬 문지르며 손톱 끝으로 그 부분을 핥자 점점 유두가 뾰족하게 서간다.
그에 만족스러운 듯 블리스는 몸을 내려 진의 쇄골과 가슴, 그리고 배에 입을 맞추며 계속해서 아래를 향했다.
그때였다.
“진! 일어났지?”
쾅쾅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에 진이 그대로 블리스를 발로 걷어차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 나가! 나가!”
다 흘러내린 가운을 주워 입으며 재빨리 문을 열고 나서는 진을 보며 바닥을 구른 블리스는 침대 옆의 시계를 확인했다. 6시 50분이었다. 빌어먹게도, 블리스가 로이에게 양복을 챙겨오라고 한 시간 10분 전이었다.
“왜 이럴 때만 부지런을 떨고 난리야?”
로이는 낮의 약속시간은 잘 지키는 편이지만 아침잠이 많아, 오전 7시까지 오라면 7시 20분이나 30분에 출근을 하는 남자였다. 블리스도 아예 그걸 예상해 7시 30분에 출근을 해야 한다면 7시라고 먼저 말을 하는데, 오늘은 저 느림보가 웬일로 시간을 정확히 맞춰 왔다. 아니, 10분이나 빨리 왔다.
이럴 수는 없다. 7시에 오라면 7시 반이라고 철떡 같이 알아먹을 것이지, 왜 6시 50분이냐.
잔뜩 발기했던 것이 순식간에 푸욱 꺼져버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블리스를 뒤로 하고 문을 열고 나선 진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로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시뻘게진 얼굴로 막 달리기라도 하고 온 듯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진을 보며 로이가 멀뚱하니 들고 온 양복을 건넨다.
“이거 블리스 양복. 그런데 왜 그렇게 땀을 흘려?”
“어, 아냐. 운동 좀 하느라.”
하여간 그것도 운동은 운동이다 싶어 진이 억지로 웃으며 답을 하자 로이가 들고 있던 신문을 마저 건네며 딱딱한 어조로 말한다.
“신문 챙겨. 존이 전화해서 시간을 좀 당기자고 하더라고. 7시 반까지 나가야 하니까 블리스한테 어서 준비하라고 해.”
그 말에 진이 빼액 소리를 내지른다.
“7시 반?”
진의 과한 반응에 로이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럼 미리 전화를 하지.”
이제 막 달아오르려던 참인데 방해 정도가 아니라 뚝 끊어야 한다는 생각에 진이 로이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며 따지자 로이가 혀를 찬다.
“둘 다 전화 꺼놨잖아. 연락이 돼야 뭘 하지. 존 에스터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나도 새벽같이 달려온 거야. 블리스한테 어서 준비하고 나오라고 해. 난 지하 주차장에 있을 테니까. 혹시 모르니까 기자들 있나 둘러보고 있을게. 핸드폰 켜 놔.”
그제야 진은 어제의 난동으로 사건이 정리가 된 게 아님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정리가 되기는커녕 더 복잡해져버렸다. 진짜 빌어먹겠다. 왜 그 생각은 전혀 안 한 걸까. 어제 생방의 여파가 너무 커서 스캔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엘레나가 아니라 자신이 새대가리다.
“……알았어. 블리스한테도 핸드폰 켜두라고 할게.”
“7시 25분까지 내려오게 해.”
“알았어. 수고.”
“너도 수고.”
손을 들어 인사를 마친 로이가 엘리베이터로 향해가는 걸 본 진은 쾅하는 소리가 나게 문을 닫으며 다시 집안으로 들어섰다. 분위기고 뭐고 없었지만 잘 나가던 차에 쪽박이 깨져버렸다.
“하여간 뭐 되는 일이 없어.”
연한 보라색의 드레스 셔츠와 은색의 양복 세트를 든 진은 투덜거리며 양복을 소파 등받이에 올려두곤 방으로 들어가 블리스를 찾았다.
“야, 빨리 준비해. 존이 시간을 좀 당기자고 했대. 7시 25분까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란다.”
다시 침대에 올라가 심기일전하던 블리스가 진의 말에 빽하니 비명을 내지른다.
“누구 마음대로?”
“존 마음대로. 빨리 준비해. 난 좀 늦게 나가도 되니 너부터 샤워하고 나와. 커피 내려줘?”
그 말에 블리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짜증을 내면서도 침대에서 일어선다.
“어쩔 수 없지. 커피 줘.”
“응. 거실에 양복 있어.”
“그래.”
먼저 일어서 방을 나서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서둘러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로 갈아입고는 주방으로 가 커피 포트 앞에 섰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물줄기 소리를 감상하며 포트에 물을 부운 진은 포트를 작동시키곤 식탁으로 가 신문을 훑어봤다.
다행히도 오늘 1면은 각자 다른 기사로 꽉 차 있었다.
“와…… 대범하네.”
운이 좋았는지 타이밍 죽이게 굉장한 사건이 하나 터졌다. 유명 여배우와 선박 재벌인 유부남의 스캔들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좀 강도가 세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극구 모르는 관계라 부인하던 두 사람의 키스씬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었다. 남자는 부인까지 둔 석유재벌 후계자였다. 불륜에는 꽤나 냉담한 미국 언론들이 거의 폭격 수준으로 두 사람에 대한 뉴스를 다루며 둘의 관계에 맹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이야, 아무리 관대한 미국이라도…… 이건 좀…….”
미국인들의 기본 사상은 공은 공, 사는 사다.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해도-마약이나 섹스 스캔들, 혹은 음주 운전 같은- 사적인 부분은 그냥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불륜은 조금 문제가 다르다. 섹스 스캔들이야 거의 그 대상이 된 연예인들의 사생활 유출로 보니 동정하는 측면이 강하고-사실은 조금 비웃으며 고소해하기도 한다.- 마약이나 알콜 중독은 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니 이를 극복한다면 박수를 보내지만, 불륜은 그 자체가 도덕성의 잣대가 되기 때문에 배우 이미지에 치명적이다.
“으아, 어떻게 하냐.”
분위기로 봐서는 이 여배우는 남자가 이혼을 하고 자신과 결혼해줄 거라 믿은 모양이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아이가 넷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공연한 불륜이 이유가 되어 이혼을 하게 되면 혼전 계약서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부인에게 주는 위자료뿐 아니라 양육비가 무시무시할 게 뻔하다. 남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부인과 이혼하지 않는다. 진이 재벌가 남자들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낀 것 중 하나가, 미국의 재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건 이혼이었고, 그 이유는 명예의 실추 같은 게 아니라 위자료와 양육비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대부분의 재벌들-혹은 대부분의 헐리웃 스타들-은 결혼 전에 모두 혼전 계약서를 작성한다. 대표적인 예로 탐크루즈와 케이티 홈즈만 해도 이혼 시의 위자료뿐 아니라 이혼 사유, 그리고 이혼 뒤 절대 결혼 생활에 대한 책이나 인터뷰를 하지 말 것 등을 명시하고 들어간다. 아이를 한 명 낳을 때마다 위자료 액수에 추가 금액이 얼마씩 붙는다는 것까지 명시할 정도로, 백만장자들의 결혼은 복잡하다.
혼전 계약서를 쓰지 않으면 만약의 경우 이혼을 하게 되면 아주 더러운 개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위자료와 양육비도 문제지만 출판물 외의 인쇄물 등의 매스미디어 전체에 그 기사를 팔아먹을 수도 있으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가끔은 아이들조차 양육비를 타내려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이들도 있어, 진짜 더러워도 그렇게 더러울 수가 없는 꼴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혼전 계약서가 있다고 해도 더러운 꼴은 볼 수 있다. 어차피 혼전계약서도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니까.
“그러고 보니, 클랜하고 재키는 혼전 계약서를 썼으려나…….”
두 사람이야 워낙에 비등비등한 집안이고 서로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니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대부분의 경우 혼전 계약서는 작성하고 시작하게 마련이다. 특히나 재키와 클랜처럼 개성 강하고 똑부러지는 성격들이라면 미리 이것저것 준비를 해둘 것이다. 물론, 두 녀석이야 당연히 ‘이혼 없음. 할 거면 위자료도 없음. 양육권은 애가 원하는 대로. 대신 애가 선택하면 깨끗하게 물러설 것. 더럽고 치사하게 굴면 법정에서 봅시다.’이라고 쓸 게 뻔하긴 하다. 뭐 그래봐야 청교도 집안에서 타고 나란 재키가 이혼을 할 리도 없거니와, 자신이 보기엔 두 사람은 천생연분이었다. 아마, 오래도록 길이길이 잘 살 거다. 주변 사람들만 불쌍하지.
“커피.”
진이 찬찬히 신문을 다 훑어보는 사이 블리스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며 그렇게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은 재빨리 커피를 잔에 따라 블리스에게 건넸다.
“뭘 그렇게 봐?”
“오늘 신문. 블리스 너 오랜만에 일면 내줬다. 끝내주게 운 좋아.”
그렇게 말하며 진이 신문을 들어올리자 블리스가 싱긋 웃는다.
“터질 게 터진 거지.”
“그래도 타이밍이 기가 막히잖아. 넌 진짜 운이 좋아.”
“승리의 블리스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자기 잔을 들고 다시 식탁에 앉은 진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블리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고 거실로 가 로이가 꼼꼼하게 챙겨다준 속옷을 걸친다.
“그래도 타이밍이 너무 좋지 않냐? 저번 주까지만 해도 아니라고 박박 우기면서 숨어서 만나더니. 키스씬이 딱 걸렸네.”
어느새 머리카락은 말리고 나온 블리스가 셔츠를 걸치며 무뚝뚝하게 답한다.
“응. 내가 시켰거든.”
“……응?”
“그 남자가 거기서 약속 있다길래 파파라치 몇한테 정보 좀 흘렸지. 불륜이라니, 그런 짓을 하다니. 당해도 싸지. 애들이 넷에 부인이 눈 멀쩡히 뜨고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어디서 아니라고 해?”
그렇게 말하며 빠른 속도로 바지까지 입은 블리스는 셔츠의 소매 단추를 채우곤 넥타이를 들어 목에 걸었다. 그 사이 컵을 든 채 멍청한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던 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다.
“어이. 이거 네 짓이라고?”
“내 짓은 아니고, 난 사주만 한 거지. 아, 커프스 링. 진, 내 셔츠에서 커프스 링 좀.”
빠른 손놀림으로 분홍색의 실크 타이를 하프윈저노트로 묶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재빨리 어제 블리스가 입었던 셔츠가 있던 소파 옆으로 가 커프스 링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 건 토파즌데? 셔츠랑 안 어울려. 넥타이 핀도 마찬가지야.”
“그럼?”
“터키석 없어?”
“집에 있지만, 지금 여긴 없는데? 토파즈는 좀 뜨지?”
“응. 잠깐만. 내 것 중에 에메랄드가 있을 거야. 분홍색에 토파즈는 진짜 아냐. 양복도 은색인데.”
“그래, 그렇긴 하다.”
블리스가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사이 서둘러 자신의 침실로 들어선 진은 사이드 테이블 서랍에서 푸른색의 에메랄 듯 커프스 링 세트를 찾아들고 나와 블리스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해.”
사라에게서 저번 생일 때 선물 받은 에메랄드 커프스링 세트를 건네며 진은 블리스의 넥타이를 잡고 넥타이 핀을 꽂아주었다. 늘 맞춤 커프스만 쓰던 블리스지만 그래도 다행히 대넌처럼 자신의 이니셜을 커프스나 넥타이 핀에 새길 정도로 자의식 과잉형은 아니라 괜찮을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넥타이 핀이나 커프스링 하나도 절대 명품의 기성제품을 쓰지 않는다. 닐 레인 급의 보석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다이아몬드나 보석을 받은 플래티넘 제품을 사용하는데, 그걸 티내려는지 꼭 자신의 이니셜을 생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넥타이 길이가 좀 안 맞는다. 연보라 셔츠에 분홍색 실크 타이는 정석이긴 한데, 다음에는 하늘색 드레스 셔츠로 입어봐. 그리고 양복도 새로 바꿔야겠어, 너. 저거 유행 지났어. 요즘은 힙라인 위로 살짝 떠야 돼. 그리고 셔츠도 좀 더 피트되는 걸로 바꿔. 안감도 좀 더 부드러운 게 좋겠다.”
양복도 은근히 유행이 있었다. 여자들은 여자들의 옷만 트랜드가 있다고 여기지만 남성복의 경우 아주 작은 차이로 트랜드가 정해진다. 힙라인이나 셔츠가 피트 되느냐 마느냐, 그리고 셔츠의 깃 모양이나 양복의 소매 길이, 버튼의 위치, 바지의 전체 라인이나 길이 등에 아주 미묘한 변화가 있다.
진은 딱히 그 유행에 맞춰 양복을 새로 살 정도로 패션에 민감한 편은 아니지만, 선물 하나를 해도 전부 활용도가 높은 것들을 해야 하기 때문에 트랜드는 전체적으로 알아두고 있었다.
진이 넥타이를 고정시킨 뒤 시계를 찾아 건네자 블리스가 시계를 손목에 차며 살짝 미소 짓는다.
“이거 좋은데?”
“뭐가?”
“이젠 내 옷 내가 일일이 안 챙겨도 되는 거. 나보다는 네가 센스가 더 좋으니까.”
“나더러 네 양복까지 챙기라고? 나 과로사하는 꼴 보고 싶냐?”
퉁명스레 내뱉으며 조끼와 재킷까지 챙겨준 진은 그래도 영 기분이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 건넨 진이 로이의 당부를 그대로 전한다.
“핸드폰 챙기고 지금 켜 놔. 이따 10시에 회사에서 보자.”
“분부대로 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진의 입술에 살짝 키스를 남긴 블리스가 시간을 확인하곤 돌아서 문을 향해 간다. 진이 강아지처럼 그 뒤를 조르르 따르자 문을 열고 나서던 블리스가 뭔가 생각난 듯 진을 돌아본다.
“진, 너 오늘 실패했어. 그러니 다음은 내 차례야.”
“네 차례고 내 차례고 끝까지 가보기나 했으면 원이 없겠다. 내가 장담하는데, 우리 한 번 하기 힘들 거야.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진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어젯밤에도 그다지 싫지 않았다. 까짓 거 못할 거 뭐냐, 하고 있는데 대니가 찾아왔고 엘레나까지 와 기운을 쭉 빼버린 통에 어제는 실패했다. 그리고 오늘은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었고, 애무만으로도 꽤 좋아 끝까지 가자고 다짐하는데 로이가 들이닥쳤다.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필연이다.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진의 이런 불길한 예감은 늘 잘 맞아떨어지곤 했다.
“걱정 마. 어떻게든 하게 될 테니. 그럼.”
마지막으로 진의 이마에 키스를 남긴 블리스가 집은 나서는 걸 본 진은 블리스의 옷들을 정리하며 자신도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진의 불길한 예감은 딱 맞아 떨어졌다.
샤워를 한 뒤 블리스의 셔츠와 자신의 옷들을 세탁소에 맡기기 위해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진은 자신의 차 위에 있는 정체모를 꽃 덩어리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또 세르게이의 짓인가 해 차문을 열고 뒷좌석에 먼저 옷들을 넣은 진은 본네트 쪽으로 다가가 운전석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그득 차 있는 장미꽃 다발을 보곤 확실히 세르게이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무식한 짓을 할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다.
“또 뭐야?”
오늘은 확실히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해 세르게이에게 받은 보석도 들고 나온 차였다. 만나서 돌려주는 김에 다시는 이런 꽃도 보내지 말라고 얘기해놔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꽃을 치우려는데 그 맨 위에 꽂힌 카드가 보였다.
별 생각 없이 카드를 꺼낸 진은 그 안에 적힌 삐뚤삐뚤한 영어를 보곤 용의자를 세르게이에서 엘레나로 바꿨다. 역시 남매다.
「I sink you.」
짤막한 문장이었지만, 보는 순간 진은 힘이 쭈욱 빠지는 기분이었다.
“날 물 속에 처박고 싶다는 거냐…….”
대체 왜 이 아이의 영어 실력은 이렇게나 좋아지지 않는 걸까. 분명히 가정교사를 백 명은 넘게 붙여줄 수 있는 집에서 왜 얘를 그냥 두는 걸까.
갑자기 두통이 스며드는 기분에 꽃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주차장 안을 돌아보자 저 멀리 주차장의 기둥 뒤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엘레나가 보였다.
저러고 있으면 자기가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갑자기 한숨이 터져 나와 진은 핸드폰을 꺼내 엘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삐리리 하는 온 주차장을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엘레나가 서둘러 핸드폰을 찾아들더니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답을 한다.
「꽃 마음에 들어요?」
“……응, 고맙다.”
「꺄악, 다행이다.」
기둥 뒤에서 폴짝 뛰며 비명을 지르는데, 어차피 자신이 그녀를 본 걸 뻔히 알면서 왜 안 나오는 걸까 싶었지만 진은 굳이 그걸 따져 묻지는 않았다. 자꾸 까먹지만 하여간 아직 15살의 소녀였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갖다 주고 무식한 꽃다발을 보내는 게 약간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하여간 열다섯 소녀의 순정이었다. 저렇게 숨어서 훔쳐보는 것도 나름 순정이니 굳이 정정하라 말해주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열다섯 소녀의 순정이 원래 이렇게 소름끼치는 거였던가…….
“고맙게 받을게. 하지만 다시는 이렇게 보내지 마.”
「왜요? 마음에 든다면서요?」
“선물은 고맙지만 난 꽃 별로 안 좋아해. 그리고 이렇게 큰 꽃다발은 어디 둘 데도 없어. 굳이 주고 싶으면 한 송이로 해. 한 송이라면 받아줄게.”
「한 송이를 어따 써요? 뽀대가 안 나잖아요.」
“엘리, 선물은 크기가 아니라 마음이야.”
「아뇨, 크기에요. 내 마음만큼 큰 걸 보내야죠!」
“엘리, 난 네게 꽃이나 보석은 바라지 않아.”
「그럼요? 집 사줘요?」
저 방향으로 튀는 건 저 집안 유전인가 보다.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딱 하나뿐이야.”
「뭔데요? 뭐든 할게요.」
“너한테 제대로 된 카드 한 장 받는 거. 철자 하나도 안 틀린 거.”
마지막 말에는 살짝 감정이 들어갔다. 그 동안 받은 문자들이 머릿속을 스쳐가며 그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냈던 고난의 시간들이 흘러간 탓이다. 게다가 오늘은 자신을 잠수시키겠다고까지 했다. 다른 사람이 그러면 농담으로 넘어가겠지만 엘레나가 저러면 잘못 쓴 건 줄 알면서도 진짜 다리에 돌 달아 강 한 가운데 던져버릴 것 같아 무섭단 말이다.
「영어 공부하라고요?」
“그래. 말은, 아니 카드 한 장은 똑바로 써야지.”
「알았어요. 할게요.」
“그리고 너 왜 학교 안 가니? 이제 등교 시간이잖아.”
「갈 거예요.」
“갈 거면 그 수상쩍은 선글라스 빼고, 스카프도 풀어. 무섭다.”
「나의 넬이 어때서요! 나한테 안 어울려요?」
‘나의 넬’이 순간 뭔가 고민하던 진은 이내 엘레나가 그 작은 머리통에 휘감은 스카프의 하단에 커다랗게 적힌 샤넬 로고를 보곤 납득했다. 쟤는 진짜 샤넬을 사랑한다.
“너의 넬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네 코디 자체가 문제야. 너의 넬은 목에 두르고 선글라스는, 그래…… 넬만 풀면 괜찮겠다.”
「학교 갈 때는 그러려고 했어요.」
“그래, 얼른 학교 가라.”
「네.」
부끄러운 듯 답을 한 엘레나는 전화를 끊고는 진이 슬금슬금 뒷걸음을 쳐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눈이 마주치고 진이 그녀의 스카프와 선글라스에 대해서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이 그녀를 봤을까 걱정하는 움직임이었다.
“애가 머리는 안 나쁜 것 같은데…….”
대체 왜 저러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던 진은 진한 향을 풍기는 장미꽃다발을 돌아보곤 그냥 웃고 말았다. 외모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하는 짓은 남매가 똑같다. 사람을 놀라게는 하지만 미워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