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이상하게도 요란한 아침이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진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른 시간임에도 꽤 밖이 시끄럽다. 블라인드를 내려둔 창을 한 번 돌아본 진은 확인하는 것도 귀찮아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서려 했다. 순간 옆에서 오늘도 다 벗고 잠든 블리스가 팔을 뻗어 허리를 잡아끈다.
본능적인 그 행동에 블리스를 돌아본 진은 곤히 잠든 블리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잘 때는 어릴 때 그대로였다. 처음 만났던 날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그 얼굴에 진은 조심스레 손끝으로 블리스의 얼굴을 더듬어갔다.
두근거림은 없다. 그런데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다. 그냥 편안했다. 손길이 닿으면 편하고 행복하다. 다정하고 성의 넘치는 사랑스러운 친구, 그리고 형 같고 동시에 동생 같던 친구. 가장 힘들었던 시절 옆에 있어주었던, 지금은 옆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해진 친구. 그 편안함이 사랑이 되었고, 옆에 있으면 심장이 떨려 죽을 것 같은 욕망이 아니라, 옆에 없으면 허전하고 슬픈,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마 블리스와 헤어져야 한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당연한 듯 그 자리에 있었던 그가 없다면, 아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친구이길 선택한 건 그런 이유였다. 연인으로서는 옆에 있을 수 없으니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영원히 함께 하길 선택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순간 깨어져버렸다. 블리스가 진심으로 다가서는 순간, 그의 애정을 확인한 순간 기쁘기보다는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모든 노력들이 헛수고가 되어서가 아니다. 그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도 아니다. 말하지 않은 것은 서로 마찬가지니까. 서로 포기하려 했던 건 똑같다. 함께 자라서인지 그런 점에 있어서만은, 똑같다. 블리스는 거울 안의 자신 같았다. 생각하는 것도 행하는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정 반대였다. 자신의 외손이 그의 오른손이고, 그의 왼손이 자신의 왼손이듯 살아가는 세계가 다르기에,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나아갈 뿐 블리스와 자신은 꼭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니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도 당연하다. 이렇게나 같은데, 그렇게나 긴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는데 사랑하지 않을 리가 없다. 정 반대이면서 하나와 같은 그와 자신이 서로를 원하게 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와 자신 사이에 있는 유리였다. 서로를 비쳐주는 것이지만, 서로의 세계를 가르고 있는 유리 한 장이 그와 자신을 가르고 있다. 그 경계를 깨트리는 게 너무 두려웠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그 유리막이 깨진 순간 그와 자신의 정반대의 세계가 뒤섞이는 순간의 혼란을 겪고 싶지 않았다.
너무나 빠르고, 순식간에, 정신없이 환경이 바뀌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수없이 이름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었다.
만약, 자신의 세계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 너머의 세계 속에서도 자신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그런 확신이 없다.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존재 가치가 무엇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감정도, 환경도, 심지어는 자신이 살아있는가도 불확실할 때가 많았다.
자신은 수많은 존재가치를 담고 있는 것과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무가치한 인간이기도 했다. 동시에 살아있으면 죽어있기도 했다. 대부분은 진 케이먼지이지만 자신은 가끔은 서영진이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진 메이어이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진 에클린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이름이 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 늘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던 게 블리스였다. 그는 늘 확신을 갖고 자신을 ‘진 케이먼’으로 대해주었다. 태어나 9년을 서영진으로 다시 4년을 진 메이어로, 그리고 또 다시 7년을 진 에클린으로 살았다. 그리고 이제 진 케이먼으로 산 지 10년이 되었다.
블리스처럼 자신에게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두 개의 세계가 뒤섞인다 해도 의연하게 버틸 수 있다. 확고한 신념과 의지, 그리고 그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 그렇게나 수없이 가쉽란을 장식하면서도 블리스가 뻔뻔스러울 수 있었던 건, 블리스 본인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한 탓이었다. 사람들의 잔인한 호기심이나 시선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스스로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자신감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조차도 없다. 스스로를 믿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수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 애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다. 늘 가방을 싸두는 습관은 주변의 사람들을 온전히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상징이기도 했다. 언제 떠날지 모르니까,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르니까 애초에 마음을 닫고 형식적으로 대하는 것뿐이다.
그런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겁쟁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일주일의 연애는 그런 자신에 대한 시험이었다. 마음 놓고 사랑하고 응석부린 뒤,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은 거다.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을 얻고 싶은 거다.
만약 그 기간 동안 확신을 얻을 수 있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블리스와 이별을 하더라도, 그 추억으로 살아갈 자신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도 얻을 수 있다.
클랜의 결혼식을 근사하게 성공시키고, 블리스와의 남은 시간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만약 그 증명을 받는다면 그때는…….
“뭘 그렇게 멍하니 쳐다 봐?”
어느새 눈을 뜬 블리스가 뚫어져라 그를 내려다보는 진을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는다. 파란 눈동자가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아 유리구슬처럼 빛난다. 상냥한 그 빛에 진은 웃으며 블리스의 이마를 툭 쳤다.
“일어나. 출근해야지.”
“출근을 왜 해?”
“왜 하긴? 놀면 공짜로 월급 주냐?”
“휴가잖아.”
그제야 진은 블리스에게 다시 복귀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난 출근이야. 이 상황에서 휴가 내봐야 솔직히 나만 손해지.”
“뭐?”
“너라면 클랜 결혼 일주일 앞두고 쉴 수 있겠냐? 괜히 휴가 때 불려나가서 휴가만 까먹느니 그냥 일할래. 넌 어떻게 할래? 일할래, 말래? 에반이 네 일정 취소 안 했을 것 같은데.”
모르긴 해도 아마 에반은 자신이 출근하면 블리스도 출근할 거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뻔한 일이라 어쩔 거냐고 묻자 블리스가 방금 전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린다.
“너, 에반하고 짰지?”
“아냐. 어디 짤 시간이나 있었냐? 네가 내 입장 돼봐. 오늘부터 내 사무실에서 결혼준비 해야 돼. 초대장은 제대로 들어갔으니 마무리해야지. 다른 일정들도 있고.”
하기 싫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어차피 휴가 중에도 해야 하는 일이라 진이 휴가를 반납한 것도 이해하는 바라 블리스는 순순히 일어나 앉으며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럼, 휴가는 언제 낼 건데?”
“클랜 결혼식 끝나고.”
“……맞춰야겠군.”
“아, 그리고 이 김에 말하자. 나한테 비서 두 명만 붙여줘.”
진의 그 말에 블리스가 황당하다는 듯 웃는다.
“비서 주제에 비서를 붙여달라고?”
“누가 내 비서를 붙여 달래? 일 좀 가르치고, 휴가 좀 내려고 그러지. 그리고 클랜 결혼식 때문에 여기저기 심부름 보낼 데가 많아. 내가 과로사하길 바라는 게 아니면 두 명만 붙여줘.”
“당연히, 그런 건 안 바라지. 잘 생각했어.”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 진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씻고 나올게. 너 집에 들렀다 가야지?”
“됐어. 로이한테 아파트에서 옷 좀 챙겨다 달라면 돼.”
그게 낫겠다 싶어 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는데 블리스가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 열더니 다시 덮는다.
“진, 핸드폰 좀. 배터리가 나갔나 봐.”
그 말에 막 방에서 나가려던 진이 자신의 핸드폰을 찾아들다 꺼진 걸 보곤 머리카락을 긁적인다.
“내 것도 나갔다. 배터리 찾아줄게. 잠깐만.”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와 사이드 테이블 서랍 안에 있던 핸드폰의 스페어 배터리를 찾은 진은 서둘러 배터리를 바꿔 끼고 전원을 눌렀다. 삐리리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켜지고 막 전원이 켜진 순간이었다.
전원이 켜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부재 중 메시지와 문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끄러울 정도로 울려대는 그 소리에 진은 기겁을 해 핸드폰 액정을 쳐다봤다.
“뭐야? 누구 죽었어?”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알림음에 손도 대지 못한 채 핸드폰 액정 화면을 빤히 바라보던 진은 한참을 계속되던 소리가 멈추자 그제야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첫 번째 메시지를 확인하려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에반이었다.
“응. 나. 왜?”
「블리스 어디 있어?」
스페인 억양이 강해 원래도 딱딱하고 화가 난 듯한 에반의 음성이 이번에는 진짜 심하게 격앙돼 있었다. 진짜 누가 죽기라도 했나 싶어 진은 놀란 음성으로 답해주었다.
“블리스? 우리 집에. 왜?”
「왜 전화를 안 받아?」
“어? 아, 배터리가 나갔었나 봐. 블리스도 나도. 왜? 누구 죽었어? 아니면 우리 회사 망했어?”
놀란 듯 물으며 진이 블리스를 돌아보자 침대에서 내려선 블리스가 셔츠를 입으며 진을 돌아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도 모른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너희, 신문 안 봤어?」
“지금 막 일어났는데, 왜?”
시간을 확인하니 6시 30분경이었다. 늦은 시간은 아니다.
「가서 신문 가져다 본 뒤에 텔레비전 켜. 그리고 사태 확인해. 그 뒤에 나한테 전화해. 나말고도 지금 너희 찾는 사람 넘쳐흐르니까. 오늘 하루 종일 전화 받을 각오해.」
어쩐지 협박 같은 그 말에 진은 놀란 듯 눈을 껌뻑거리며 에반에게 되물었다.
“뭐야? 블리스가 또 사고 쳤어?”
「사고도 대형 사고지.」
“별일 없었어. 이틀 내내 나랑 있었는데 왜?”
「너도 같이 쳤어.」
“내가? 난 사고 안 쳐!”
「……신문 보고 말해.」
“그러니까 무슨 신문이냐고? 내가 보는 건 두 개뿐이야. 회사에 나가야 나머지 오고.”
「아무거나 봐. 전부 다 났으니까. 블리스한테 축하한다고 전해줘. 전 세계에 얼굴하고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날 테니까.」
그 말에 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다 나지 않았어? 뭘, 새삼.”
「보통 스캔들이 아니니까, 그렇지. 블리스는…… 아니다. 너희 일단 회사로 와. 다른 데 가지 말고 일어나서 정상적으로 출근은 하되, 다른 데 들르지 말고 회사로 곧장 와. 와서 얘기하자.」
“대체 뭔데 그래?”
「직접 봐. 상황 파악하려면 말로 듣는 것보다 보는 편이 나으니까.」
에반의 말에 진은 슬슬 불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저 잔소리장이가 직접 보고 판단하라고 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혹시, 우리 회사 망했어?”
「……회사가 하루아침에 망하는 일은 없어.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블리스랑 내가 어떻게든 막지, 그냥 두겠냐?」
“그럼 뭔데 그래? 에반이 그러니까 무섭잖아.”
「어떻게 보면 엄청난 일이고,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일도 있으니까, 지레 겁먹지 말라고 말 안 해주는 거야. 일단 보고 와. 와서 얘기하자. 블리스는 각오하고 오라고 해. 에이먼도 이쪽으로 먼저 온다고 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남의 일에는-심지어는 가족들의 일이라 해도- 절대 신경 쓰지 않는, 자칭 마이 페이스 타칭 냉온동물 에이먼까지 직접 나설 정도면 진짜 뭔가 터져도 엄청나게 터진 거다. 불안한 마음에 진은 서둘러 방을 나서 현관 쪽으로 향해 갔다.
“알았어. 일단 회사로 갈게.”
그 사이 다시 핸드폰 수화부에서 대기 중 전화 소리가 들려왔다.
“끊을게. 전화 들어온다.”
「계속 올 거야. 다 받지 말고, 아는 번호, 아니 애클랜드 가 사람들 번호만 받아. 절대 모르는 번호 받지 마. 그리고 지하주차장으로 나와서 재빨리 회사로 와. 사람들 조심하고.」
마치 몰래 빠져나오라는 듯한 에반의 말에 진은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뭐야? 사람들이 우리 찾아? 블리스가 뭐 사기라도 친 거야? 횡령을 할 리는 없으니…… 무슨 큰일 벌였어? 사이비종교라도 만들어서 테러라도 했대?”
「차라리 사기가 낫다. 아니, 이게 나은가? 모르겠다. 하여간 빨리 와. 와서 얘기하자.」
“아, 진짜 뭔데? 뭔지 말을 해줘야지!”
「네 눈으로 직접 봐.」
그렇게 말한 뒤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에반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재빨리 현관문을 열고 문 앞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주워든 진은 서둘러 에반과의 전화를 끊고 대기 중이던 통화를 연결했다.
“네, 진 케이먼입니다.”
「축하해, 진.」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온 원인 모를 축하의 말에 진은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도 상대가 누군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넌 또 뭐야, 클랜?”
「뭐긴 뭐야? 축하한다는 거지. 형하고 같이 있지? 형한테도 축하한다고 전해줘. 아주 제대로 엎어놨던데? 역시, 형이 나보다는 한 수 위야.」
물론, 블리스는 늘 클랜보다 한 수 위였다. 애클랜드 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의 대부분은 클랜이 저지르는 일이지만, 그런 클랜을 뒤에서 사주하는 게 블리스였다. 클랜이 대놓고 사고를 치고 반항하는 타입이라면, 블리스는 뒤에서 조용히 눈치 채이지 않게 교묘하게 사람 속을 뒤집어엎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저 말썽장이 블리스를 대놓고 한 수 위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에 진은 진심으로 불안을 느꼈다.
클랜이 ‘제대로’라고 할 정도면 대체 블리스가 무슨 사고를 친 걸까? 상상도 하기 싫다.
“대체 뭐야? 에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제대로 설명을 해! 블리스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어라? 아직 신문 안 봤어?」
그 말에 진은 클랜의 웃음소리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신문을 펼쳐 들었다.
“아직 안 봤어. 방금 깼어. 그리고 보통 이 시간에는 말이…….”
이 시간에는 말이다, 보통 일어나서 신문을 보지는 않아, 라고 말하려던 진은 주워온 두 개의 신문 상단에 커다랗게 뜬 사진과 타이틀을 읽고는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아직도 안 본 거야? 새벽부터 전화통 불났을 텐데?」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 수화부에서 클랜이 계속해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은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멍한 얼굴로 신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신문에 난 사진은 아주 멀리서, 그것도 준비 없이 찍은 듯 초점이 잘 맞지 않아 한눈에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한 명은 뒤통수만 보이고, 한 명은 모자를 쓴 채 그 뒤통수에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가려진 채라 그 모자에 쓰인 로고를 보지 않았다면 진도 그게 누구인지 몰라봤을 것이다.
“……이게 뭐야?”
너무나 멀어서, 그리고 잘 나오질 않아 진은 그게 처음엔 뭔가 했다. 그냥 어렴풋이 두 사람이 키스를 하는구나라고 생각만 했지만 이내 그 모자가 자신이 어제 블리스에게 씌워놓은 모자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눈을 부릅뜨고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신문의 타이틀은 거창했다. 『Bliss Bless Kiss With Man』블리스가 평소에 쓰는 향수의 이름을 빗대어 비꼰 기사였다. 거기다 그 옆에는 자신의 뒤통수가 커다랗게 확대되어 나오면 친절하게도 『블리스 애클랜드의 비서이자 예일대 시절 같은 기숙사 방을 썼던 진 케이먼.』이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덤으로,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한국인 입양아라는 설명까지 더해 놨다.
나라 망신이다.
「진, 뭐해? 충격 받아서 쓰러졌어?」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클랜의 목소리에도 진은 다시 핸드폰을 들 생각을 못한 채 아래에 있는 다른 신문을 펼쳤다. 이번에도 역시 1면에 대문짝만하게 자신의 뒤통수가 나와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얼굴보다 뒤통수가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것 같다. 뒤통수가 잘생겨서 다행이다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진은 타이틀을 읽었다. 이번에는 좀 호의적이었다.
“……블리스 애클랜드의 순애. 10년 된 연인을 보호하기 위한 스캔들. 그의 여성편력은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며 연인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었다……. 육갑을 떨어라.”
꿈보다 해몽이 좋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신문사 사장이 게이 인권 단체 간부였다. 그래서 그 동안 블리스에 대해 일부러 안 좋은 소식만 내보내더니-블리스의 남성 1미터 접근 금지령을 가장 먼저 보도하며 분개해, 애클랜드 가의 공식 사과를 강력하게 요청하던 신문이었다.- 지금은 아주 신이 나 스캔들을 퍼트리고 있다. 확실히 너무 답다는 생각이 드는 게, 블리스의 남성 1미터 접근 금지령에 대해 다시 언급하며 다양성을 훼손하며 게이들의 욕망을 자가 억제시키도록 만든 이 사회의 시스템을 강하게 비판하며 블리스에 대한 연민의 정을 풀어놓았다.
“이건 뭐…… 연인을 연인이라 부르지 못하고, 게이를 게이라 말하지 못하고…….”
아주 자기 좋을 대로 온갖 사실들을 날조해놓은 신문들을 돌아보며 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에반이 화가 나 전화할 만하다. 그리고 클랜이 신이 나 깔깔거릴 만도 하다.
아니, 에반과 클랜이 문제가 아니다. 다들 얼마나 신났을까. 블리스 애클랜드가 게이라는 의혹이 담긴, 아무도 믿지 않을 기사가 나간 지 열흘이다. 워낙에 여성편력이 화려한 데다, 본인이 입을 열지 않으니 흐지부지되어 사라진 그 기사가 다시 이 사진 한 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해 온갖 라디오쇼와 방송에서 아주 골수를 뽑아낼 정도로 우려내고 우려내고 또 우려내며 씹어대겠지. 언론뿐 아니라 사람들도 만나기만 하면 블리스의 이름을 먼저 꺼낼 것이다.
기도 안 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인터뷰할걸. 천만 달라 준다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았다. 지금 천만 달라고 인터뷰고가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열심히 현실 도피를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저 사진은 분명히 백화점 주차장에서 찍힌 거다. 하도 멀리 있어 인기척도 못 느끼고 있었던 거다.
미쳤다. 아무리 될 대로 되라고 해도 어떻게 그런 공공장소에서 저런 대범한 짓을 했을까.
아니, 사실은 괜찮을 줄 알았다. 안이했다. 엘레나뿐 아니라 백화점 직원들까지도 자신과 블리스가 엘레나의 새로 온 보디가드 내지 에이전시 소속의 매니저들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 정도로, 어제 블리스의 분장은 완벽했다. 염색을 한 것도 렌즈를 낀 것도 분장을 한 것도 아니지만 완벽하다 자신할 수 있었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10달라짜리 티셔츠를 입고 5달라짜리 모자를 쓰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분장이다. 아니, 그 정도면 완벽한 변장이다. 절대 알아봤을 리가 없다. 시계로 벨트도 지갑도 없었다. 블리스가 든 거라곤 핸드폰 하나뿐이었고, 계산은 전부 자신이 했다. 게다가 어제 몰고나간 차도 자신의 오래된 캐딜락이었다. 절대 블리스라는 걸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사실 블리스가 가쉽란에 하고 얼굴이 올라 알려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연예인이 아닌 이상, 그렇게 잘 알아볼 리가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걸까. 게다가 하필 왜 이 사진이 찍힌 걸까.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뒤통수만 보고 자신이 블리스의 비서라는 사실까지 유추해낸 걸까?
“무슨 일이야?”
진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상황을 정리하는 사이 옷을 걸친 뒤 방에서 나온 블리스가 바닥에 떨어진 진의 핸드폰을 주워들고는 흘깃 진을 바라본다.
“왜 그래?”
끊어진 전화를 보곤 폴더를 덮은 블리스는 진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너무 머리가 복잡해 진은 말로 하기보다 자신의 앞에 놓인 신문을 들어 블리스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뭐가 어쨌다고?”
블리스 역시 그 저질 사진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다 타이틀을 읽고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이게 뭐야?”
“내가 아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진은 겨우 마음을 가다듬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며 욕실로 향했다.
“우선 사무실로 가자. 에반이 당장 나오래. 에이먼도 온다니 로이한테 전화해서 네 양복하고 구두 그쪽으로 가져오라고 해.”
일단 에반과 에이먼을 만나 뒤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진은 욕실 문의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거실에 멈춰선 블리스는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리스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나처럼 침착하고 냉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블리스의 푸른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차갑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한 진은 가방에 팜과 핸드폰, 그리고 서류들을 챙겨 넣고는 블리스와 함께 부지런히 집을 나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머리카락도 제대로 말리지 않은 채 나선 진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자신의 캐딜락으로 갈까 하다, 블리스와 함께 썬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차를 타기가 꺼려져 주차장에 세워둔 블리스에게 받은 람보르기니 쪽으로 가 차 문을 열었다. 서둘러 나온 덕에 아직 7시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핸드폰에 질려 아예 전원을 꺼둔 채 시동을 건 진은 그대로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블리스는 기분이 상했는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그리고 진 역시 딱히 할 말이 없어 막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라디오를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하얀 섬광이 스쳤다. 놀라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은 진은 사방에서 터지는 후래쉬에 놀라 눈을 가렸다. 그리고 거의 그것과 동시에 온 상태가 된 라디오에서 경박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엄청난데요? 오너와 비서의 사랑이라? 거기다 이 비서가 애클랜드 가에서 후원하던 한국인 고아라던데. 블리스 10일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고 넘긴 가쉽이 기정사실이 되었네요. 애클랜드 가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럽겠는데요?』
『애클랜드 가보다 블리스의 옛 연인들이 더 곤혹스러울 겁니다. 저라면 당장 이름 숨기고 피검사부터 하겠어요.』
낄낄거리는 남자의 음성에 진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자 블리스가 재빨리 라디오를 끈다. 그리고는 사나워진 투로 차갑게 내뱉는다.
“밟아.”
“응?”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그 말에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정면을 본 진은 차를 가득 에워싼 취재진의 모습에 기가 질린 듯 경악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와 마이크를 잡고 들이대는 기자들, 그리고 차 안을 찍으려 창가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카메라맨들까지.
아수라장이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기자와 파파라치에게 둘러싸인 진은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거 뭐야?”
진짜 이 상황이 뭐냐고 묻기보다는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그 질문에 블리스가 차가운 음성으로 답한다.
“액셀 밟아.”
“어떻게 밟아? 저 앞에 사람들이 저렇게 가득한데. 으아, 좀비떼들 같아.”
조지 로메오 감독의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차 밖의 광경에 진은 진저리를 쳤다. 썬팅이 짙게 된 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회색빛으로 보인 탓에 더욱 그러했다. 게다가 그들의 얼굴은 죽은 채로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달려드는 좀비떼들 같았다.
“너랑 나랑만 살아있는 거고, 저 사람들 죽은 거 아냐? 28일 후, 뭐 그런 거냐?”
“그냥 치어서라도 밟고 가. 여긴 도로야. 도로 점거한 것들이 병신이지.”
“어떻게 그래?”
애클랜드 가에서 15년을 자랐어도 몇 년 전만해도 파파라치가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고, 다름 애클랜드 가에서도 진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하게 진의 인적사항이나 얼굴은 숨기며 공식적인 자리에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도록 배려해준 덕에 진이 이런 난감한 상황에 처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애클랜드 가의 사람들이야 그게 타고난 숙명이고, 그들이 갖고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특혜에 대한 대가로 사생활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지만, 진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진은 순간, 이런 상황 속에서 사는 스타들이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그저 소일거리로 떠들어대며 웃고 마는 가쉽 한 자락에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몇 명은 이런 일을 당해야 한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시에 진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방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두렵다는 생각을 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냥 밟아.”
“말이 쉽지, 이걸 어떻게 해?”
진이 곤란하다는 듯 말하며 옆을 돌아보는 순간 블리스의 잔뜩 굳은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블리스의 조각 같은 얼굴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그건 공포나 놀라움의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위로 늘 상냥하고 다정하던 푸른 눈동자가 얼어붙은 듯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도저히 감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꾹꾹 내리누르는 얼굴이었다. 블리스와 15년을 알아왔지만, 블리스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억누르며 화를 참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너, 왜 그래?”
평소의 블리스답지 않은 얼굴에 진이 살짝 기가 죽은 듯 작게 묻자 블리스가 여전히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답한다.
“너한테 화난 거 아냐.”
“그럼?”
“나한테 화가 나서 그래. 그냥 밀고 가.”
“……블리스, 너…….”
진이 막 뭐라고 반박하려던 순간 뒤에서 시끄러운 경적 소리가 울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막 뒤에서 빠져나온 차가 어서 비키라는 듯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건물의 주차장 출구에서 도로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가로막은 채 진이 안절부절못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던 블리스가 안전벨트를 풀려한다.
“왜? 내리려고?”
“…….”
“뭘 그래? 오늘만 이러다 말걸. 차라리 경찰을 불러. 교통경관도 안 지나가나?”
혹시나하는 생각에 진이 블리스의 팔을 잡아 말리며 주변을 돌아보는 사이 파를 포위한 취재진들이 조금 웅성거리며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 교통경찰이라도 온 건가 해 진이 목을 빼자 취재진들을 밀쳐내는 네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보였다.
“어, 로드 아저씨다!”
네 명의 남자 중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남자를 본 진은 반가운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해병대 출신의 보디가드로, 대통령 경호 및 국빈들을 경호하던 로드는 5년 전까지만 해도 클레어의 보디가드를 맡았던 남자였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은퇴를 했지만, 애틀랜드 가 전체와 친하게 지내며 대넌의 포커 게임 친구이기도 했다. 인상은 무섭고 덩치는 엄청나 진도 처음에는 좀 무서워했지만 마음을 터놓으면 아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반갑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그가 데리고 온 검은 양복을 입은 무리들에 의해 길이 뚫리자 진은 그에게 손을 흔들며 재빨리 액셀을 밟았다. 에이먼인 보낸 듯했다. 자신이 그 집에 들어갔을 때엔 로드는 클레어의 보디가드를 맡고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에이먼을 자식처럼 키워주던 보디가드였다고 들었다. 클레어가 여자고 또 위험부담이 커 에이먼이 특별히 부탁해 로드에게 클레어의 보디가드를 부탁했지만 사실은 거의 15년 동안을 에이먼을 옆에서 지켜보며 키운 로드는 에이먼을 친자식처럼 여기며 아껴주었다. 그 덕에 에이먼이 서른세 살이나 먹은 지금도 아직도 에이먼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며, 에이먼의 부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사람이었다.
“에이먼이 보냈나 봐. 다행이다.”
진은 대수롭지 않은 듯 그렇게 말하며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사실 기사를 보고 너무 당황스럽고 또 잠시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사실 가쉽이라는 게 워낙에 급물살을 타고 사방으로 흐르는 거라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을 굳힌 채였다. 솔직히 지금도 상당히 껄끄럽고 이상한 기분이긴 하지만, 어차피 가쉽은 가쉽이다. 10일 전의 그 사건처럼 아무도 그 스캔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연히 사라진다. 무엇보다 자신은 뒤통수밖에 나오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라 믿었다.
“블리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스캔들이잖아.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좀 크긴 하지만 잘 마무리될 거야.”
“…….”
“야, 말 좀 해라. 괜히 내가 미안해지잖아.”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정면을 노려보는 블리스의 표정이 하도 험악해 진이 그를 달래주려 하자, 블리스가 여전히 이쪽을 보지 않은 채 작게 중얼거린다.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너랑 시작해보겠다고 했을 때 이런 각오도 안 했을 줄 알아? 지금까지 망설인 데에 이런 게 무서웠던 것도 포함은 되지만…… 그래도 내가 한 번 괜찮다 한 건 괜찮아. 각오했던 바니까 미안해하지 마. 내가 널 모르는 것도 아니고, 네가 누군지 뻔히 알면서 내가 하겠다고 한 거니 미안해하지 마. 나 바보 아냐. 그렇게 둔하지도 않고, 순지하지도 안하. 네가 미안해하면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거야.”
“……그래도 미안해.”
“어차피 가쉽이야. 다들 신나게 떠들고 비웃다 다음 주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전혀 모르는 얼굴들을 할 거야. 내가 상처 안 받으면 돼. 나도 모르는 척 귀 닫고 버티면 돼. 별거 아냐.”
지은 부드러운 투로 그렇게 블리스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입술을 꾹 다물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려들지 않았다. 핸들을 잡은 채 옆을 돌아본 진은 블리스의 옆얼굴에 불안을 느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다.
사무실에 도착해 들어서자마자 곧장 에반의 호출이 이어졌다. 이른 시간이라 텅 빈 사무실 복도를 지나 회의실로 들어선 진은 미리 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에이먼과 클랜을 보곤, 일이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구나 싶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바쁘네, 에이먼.”
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에이먼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얼굴로 진을 바라보며 전혀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건넨다.
“아침부터 바쁘게 해줘서 고맙다. 클랜, 진하고 좀 나가있어. 아침 아직이지?”
분명히 앉혀두고 잔소리를 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에이먼은 달랐다. 에반도 에이먼이 그렇게 말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난 나가 있어도 돼?”
이상한 분위기에 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묻자 클랜이 블리스를 힐끗 보더니 탁자 위에 올려둔 커다란 종이 봉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진은 별 상관없는 일이야. 형이 벌인 일이니 형한테 알아서 하라고 하고, 우린 아침 식사나 하자.”
다른 때와 달리 유독 싹싹하게 상냥한 클랜의 태도에 진은 의심스러운 듯 클랜을 한 번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돌려 블리스를 돌아봤다. 블리스는 오는 내내 침묵했고 와서도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아무래도 진짜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블리스, 나 나가 봐도 돼?”
가벼운 블리스의 성격 상 이렇게 화난 게 오래 가는 일이 드물기에 진이 애써 웃으며 다시 묻자 블리스가 진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클랜하고 아침 식사부터 해.”
블리스는 억지로 웃어 보이고 있었다. 입가는 부드럽게 휘어지지만 눈빛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차게 빛나는 그 눈빛에 진은 불안한 듯 블리스를 바라보다 다시 에이먼을 돌아봤다. 그러자 에이먼이 블리스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진에게 말을 한다.
“나가 봐. 걱정 말고. 클랜이 사라 집에서 차랑 음식이랑 좀 준비해왔어.”
“그래, 가자.”
클랜이 그렇게 말하며 봉투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진의 어깨를 뒤에서 밀며 회의실에서 빠져나간다. 얼결에 그에게 밀려 회의실을 나서며 진은 계속해서 블리스를 돌아봤다. 하지만 블리스는 자리를 잡으며 이쪽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 아팠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블리스를 바라보는 기분이 너무나 이상했다.
탁- 하며 회의실을 나온 클랜이 진의 어깨를 밀던 손을 내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작게 중얼거린다.
“우와. 심장 떨려 죽는 줄 알았네…….”
“왜?”
“왜긴? 진짜 열 받았잖아. 아, 골치 아프네. 블리스가 화나면 피해가 막대한데.”
“화야 많이 났지만, 뭐 피해가 막대할 것까지야 있겠어?”
복도를 가로질러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기던 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쉬운 듯 다시 회의실을 돌아봤다. 어쩐지 블리스가 화난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블리스와 빽빽거리고 투닥거리는 거야, 블리스가 진짜 화를 낼 리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저렇게 화를 내면 주눅이 들고 만다. 전부 자신이 잘못한 것 같다.
“하긴, 진은 우리 형 화내는 거 본 적 없지? 진짜 다행인 줄 알아. 어쩐지 에이먼이 당장 식사거리 챙겨들고 오라더니.”
“블리스 먹이려고 한 거 아냐? 혈당치 낮아지면 짜증나잖아.”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가 문을 연 진이 먼저 들어서자 클랜이 그 뒤를 따라 들어서 진의 책상 위에 커다란 봉투를 하나 내려놓는다.
“뭐, 그런 생각도 있었을걸. 블리스 화난 거 보고 같이 회의실에서 먹을지, 진만 따로 먹일지 결정한다고 했으니까.”
양복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들고 책상으로 온 진은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블리스가 지랄이거든.”
어느새 끌고 온 의자를 책상 앞에 두고 앉은 클랜이 짤막한 답을 해주자 진은 여전히 이해 못한다는 얼굴로 클랜을 바라본다.
“지랄이라고?”
“열 받으면 지랄이라고. 형제고 아버지고 없어. 나도 20년 만에 보는 건데도 살 떨리네. 하여간, 일단 뭐라도 먹어.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파라치까지 찍히느라 고생했어.”
방금 전까지 하얗게 혀를 내두르던 클랜이 재빨리 웃으며 시비를 걸자 진이 아무 말 없이 클랜을 바라본다.
“……너, 이게 재미있냐? 웃을 일 아냐, 이거.”
“알아. 하지만 걱정하지 마. 형들이 알아서 할 거야. 아버지랑 클레어도 열 받아서 날뛰는 중이니까 그냥은 안 넘어갈걸. 그 파파라치 불쌍도 하지.”
막 봉투에서 꺼낸 과일 샐러드와 팬케익을 책상 위에 늘어두며 클랜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으로 불행해질 파파라치를 동정한다. 팬캐익이 든 종이 팩을 열며 진은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클랜에게 되물었다.
“블리스도 그렇고 다들 왜 그래? 그냥 가쉽이잖아. 뭐 웃고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심각할 거 뭐 있어? 내일이면 사라질 텐데.”
“가쉽은 가쉽이지만 그게 우리 집에서는 좀 난감한 문제거든. 우리 가족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진이 가쉽에 얼굴 나온 건 다들 용서 못할걸.”
“뒤통수만 나왔는데?”
시럽을 들고 막 팬케익 위에 뿌리려던 진이 자신의 머리통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클랜이 신나게 웃음을 터트린다.
“어쩐지 괜찮아 보이더라니. 그래서 그런 거였어?”
“얼굴 나왔으면 당장에 고소했지.”
“역시! 난 이래서 진이 좋다니까.”
“좋아하지 마. 네가 좋아하면 기분 나빠. 난 너랑 과가 다르거든? 어, 메이플 시럽이다.”
좋아하는 시럽을 확인하곤 환하게 웃는 진을 보며 클랜 역시 그냥 웃고 말았다. 사실 오기 전까지 블리스보다 진을 더 걱정했는데 진은 괜찮아 보였다. 아니, 그보다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잘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뒤통수만 나왔으니 아직은 안도할 만하다. 오후쯤엔 기겁하겠지만, 미리 안 좋은 걸 알려줄 필요는 없을 듯해 클랜도 조용히 사온 커피를 손에 들며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먹어. 뭘 먹어야 머리가 돌아가니까.”
그리고 화도 덜 낼 테니까.
“그런데 20년 전에 블리스가 화를 냈다는 건 뭐야? 20년 전이면 열 살 때일 텐데 화를 내봤자지.”
뭘 그런 걸로 아직도 떠냐는 듯 진이 말하자 클랜이 커피를 손에 들며 거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진이 그때 형을 못 봐서 그래. 진짜 건드리면 나도 죽일 기세였어.”
막 팬케익을 잘라 먹던 진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뭘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해? 너라면 당연히 죽이고 싶었겠지.”
“진, 나라고 어릴 때부터 이랬던 건 아냐.”
“그럼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데?”
“20년 전부터.”
말도 안 되는 그 말에 진이 시럽을 뿌리다 기가 차다는 듯 받아친다.
“모든 비극의 시작은 20년 전이라는 거냐? 그때 핵폭발이라도 일어났어? 아니면 외계인이 와서 너희 집 수영장에 약이라도 탔어?”
“엄마가 죽었거든.”
담백한 그 말에 진은 조금 놀란 듯 클랜을 바라봤다.
“설마, 블리스가 무섭게 화를 낸 게 그것 때문인 건 아니겠지?”
“맞아. 자세한 건 나중에 형한테 들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 거니까.”
“……왜? 무슨 난리를 쳤길래 겨우 열 살짜리가?”
“겨우 열 살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지. 난 그때 아버지랑은 원수를 져도 절대 블리스랑은 원수지지 말자고 결심했었거든. 우리 형이지만, 뭐랄까…… 무서웠어. 그리고 진짜 비열하기도 했고.”
블리스가 비열하다라, 라고 중얼거리던 진은 어쩐지 상상이 되질 않아 클랜에게 물었다.
“어떻게 했길래?”
“형한테 직접 들어. 그 이상은 나도 말 못하니까. 그때 형이 열 살이니까 그 정도로 넘어갔지……. 지금은 아마 절대 그렇게 안 넘어갈걸.”
“궁금하게 왜 그래? 말을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형한테 들으라니까. 우리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건 절대 금기야. 죽는 순간까지 다신 입에 담지 않기로 한 거니까, 형한테 물어봐.”
자세한 사정이 알고 싶긴 했지만 클랜이 그렇게 말하며 샐러드 통을 여는 통에 진은 입을 꾹 다물고 자신의 팬케익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해봐.”
진과 클랜이 나간 뒤 에이먼이 오늘 아침 발간된 신문과 타블로이드의 1면에 나온 블리스와 진의 기사들을 스크랩한 북을 집어던지며 그렇게 말하자 그걸 받아든 블리스가 그 기사들을 읽어 내려가며 냉랭한 음성으로 내뱉는다.
“형이 먼저 말해.”
“상황을 알아야 우리도 대처를 하지.”
“사진 찍은 거 누구야?”
“……캐니 워커.”
악명 높은 파파리치들 중에서도 악질적이기로 유명한 남자의 이름에 블리스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페이지를 넘겼다.
“헐리웃 전문이 왜 뉴욕까지 온 거지?”
“브리트니 스피어스랑 린제이 로한이 드디어 속옷을 입기 시작한 모양이지. 아니면 이제 바지를 입거나.”
캐니 워커는 헐리웃 여배우와 가수들의 속옷 찍기로 유명한 파파라치였다. 속옷이 안보이면 카메라를 치마 속으로 멀어서라도 찍고, 아무리 가리려 해도 목숨 걸고 보디가드를 밀치고 들어와 은밀한 부위를 찍는다. 게다가 크레인까지 동원해 여자연예인들의 저택이나 빌라 안을 들여다보며 샤워 후나 일광욕 중인 장면을 포착해낸다. 저택 안에서는 의외로 누드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걸 노린 술수였다.
지금까지 그가 찍은 여자 연예인들의 노팬티씬에 애초에 속옷을 안 입는 게 문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드레시의 옷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속옷을 못 입게 되는 경우가 있다. 유난히도 속옷 라인이 드러나 보이는 옷감이 있는 탓이다. 그걸 선택한 게 죄라면 죄겠지만, 굳이 그걸 찍겠다고 치마 속으로 카메라를 넣는 인간은 관음증 변태다.
캐니 워커도 지금까지 교묘하게 공공장소에서만 찍었다며 우겨대며 소송을 피해갔지만 아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긴 힘들 것이다.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블리스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본 에이먼은 애써 블리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평소에 잘 하지도 않는 조크를 쳤지만 그의 말에 웃기엔 블리스가 너무 심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에이먼이 하는 조크는 웃기지도 않는다. 너무나 심각하고 정중한 투로 말해 오히려 사람들을 당황하게만 만든다.
“에이먼, 같잖은 농담하지 마. 왜 이 인간이 이 사진을 찍은 거지? 기척을 전혀 못 느꼈는데.”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몰라. 알아낸 건 캐니 워커가 최근 엘레나 네브즐린의 뒤를 따라다닌다는 것뿐이야. 엘레나가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졌는지 한 건 올리려고 따라다니다 너희가 걸린 거겠지. 거리도 멀고, 캐니도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엘레나를 쫓다 너흴 잡은 게 맞는 것 같아.”
블리스는 대강의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아닌 이상 24시간 파파라치들이 따라다니는 건 아니다. 파파라치가 붙는 건 대부분 연예인들과 있을 때거나 파티에 참석할 때였다. 혹은 어떤 소문이 퍼졌을 때 그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이지, 자신에게는 전문적으로 따라다니는 파파라치는 없었다. 노먼이 한 동안 질기게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노먼은 지금 진에게도 연락을 못할 정도로 출판 사인회로 바쁠 터였다.
“……이렇게 멀리서 찍혔으니 몰랐겠지. 가까이 있었다면 알았을 거야.”
어린 시절부터 온갖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자라다 스무 살 때부터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파파라치들에게 둘러 싸여 다닌 블리스가 파파라치의 기척을 못 알아챘을 리가 없다. 보통은 파파라치를 이용하는 편이기에 얼마든지 따라와 보라고 내버려두는 편이지만, 파파라치가 붙어서는 안 될 경우에는 철저하게 뒤처리를 해둔다. 그런 블리스가 인기척을 모를 정도였다면 꽤 먼 거리였다는 소리다. 그래서 사진도 그 모양으로 나온 거다.
“캐니 워커 뒷조사는?”
당연한 듯 나온 블리스의 질문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에반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나라는 의미의 한숨이었다.
“지금 진행 중이야.”
에반을 돌아본 블리스는 이번엔 에반을 향해 물었다.
“이 사진에서 진이라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어떻게 이 뒤통수를 보고 알아낸 거냐고?”
“저번 주에 나간 신문 있잖아. 노먼이 찍은 사진. 거기서 보고 유추해냈겠지.”
그건 블리스도 알고 있다. 문제는 진이 뒤통수에 자기가 한국인 고아에 입양아고 파양을 두 번이나 당한 예일대 졸업생이라고 쓰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나 금세 인적 사항이 퍼진 걸까 하는 것이다.
“내 말은, 진의 자세한 인적 사항이 어떻게 퍼졌냐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는 그가 보고 있던 기사를 펼쳐 에이먼에게 던졌다. 거기에는 진에 대한 아주 상세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두 번의 파양을 겪고 애클랜드 가의 후원을 받게 된 것부터 시작해, 예일대 영문과 출신으로 블리스와는 대학 때 같은 기숙사의 한 방을 쓴 친구이자 현재의 비서이고 그가 하는 일들, 그리고 노먼 맥캐인의 책 첫 장에 나온 헌사에 쓰인 것도 진이라는 사실까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진이 공인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이렇게까지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일부러 찔러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건 우리도 모르지. 그쪽 신문사 기자를 따로 불러 얘기해볼 생각이야. 너무 자세해서 우리도 놀랐어. 얘기가 어디로 퍼진 건지 알아봐야지.”
물론 이야기를 퍼트릴 사람은 넘치고 흐른다. 대학 시절 같은 기숙사나 같은 과 친구들은 블리스와 진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파베타감마 클럽이 한 짓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들 머저리들 같긴 하지만 절대 형제들에 대해 함부로 퍼트리거나 위해를 가할 이들은 아니다. 애초에 블리스가 얌전히 알파베타감마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들과 인연을 쌓아두면 앞으로의 긴 인생에 있어서 그들의 덕을 볼 일이 많은 탓이었다. 그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같은 클럽의 형제들이 실수를 한다면 목숨을 걸고 적을 쓰러트려 보호해줄망정 형제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노먼이 예외이긴 했지만, 노먼 역시 치명적인 스캔들을 노출시키진 않았다. 전부 수습이 가능한 선에서 일을 벌일 뿐,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가진 않는다. 클리샤 사건 역시 친절하게 클리샤가 성인임을 더해준 게 가장 확실한 예였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찍힌 사진 역시 이틀을 가지 못하는 가쉽의 습성을 잘 알고 있기에 반 장난으로 친 사고일 뿐, 악의는 없었다. 악의가 있었다면 블리스가 진즉에 그를 잡아 요트 모터에 매달아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같은 과의 동기들이라는 소리다. 노먼의 신간 이야기까지 나온 걸로 봐선 진과 같은 영문과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기자 쪽으로 빠진 이들도 상당수니 얼마든지 가능하다.
“각 신문사들 대상으로 예일대 출신 사람들 알아봐. 노먼 이야기까지 나온 걸 보니 예일대 영문과 출신일 가능성이 커. 얘기가 어디서 퍼졌는지부터 시작해서 기자들부터 싸그리 불러 모으고 내일부터 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 나가게 단속시켜. 형이라면 할 수 있지?”
에이먼을 돌아보며 블리스가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자 에이먼이 조금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썼다. 감히 형한테 하라 마라 명령을 한다고 뭐라고 따지려다, 괜히 저 더러운 성질머리 건들까 에이먼은 참기로 했다. 블리스는 지금 최선을 다해 참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데엔 한계가 있어. 물론 아버지도 어떻게든 손쓰시겠지만, 타블로이드 중에 우리 손이 못 미치는 신문사도 있어.”
“그래도 해.”
“블리스, 아무리 나나 아버지라 해도 언론 제재를 하는 데엔 한계가 있어.”
“한계까지 압력을 줘. 그리고 당분간 진한테 로드 붙여줘. 보디가드도 둘 정도 더해서. 그리고 아파트를 옮겼으면 하는데.”
예상대로의 반응에 에이먼이 냉정한 투로 블리스에게 충고를 시작했다.
“블리스, 네가 그럴까 봐 내가 온 거야. 그냥 둬. 이건 스캔들이야. 일주일 뒤면 잊혀질 거라고. 좀 크게 터지긴 했지만 오히려 예민하게 반응하면 그쪽에서 꼬리를 물고 늘어질 거야. 평소처럼 일하고, 평소처럼 생활해. 아버지도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기세니까.”
에이먼은 언제나 하던 것처럼, 스캔들에 대처하는 현명한 방법을 알려줬지만 블리스는 에이먼의 말을 아예 무시했다.
“캐니 워커에 대해 전부 다 알아내. 그가 찍은 사진부터 시작해서 키우는 개 이름, 전적, 애인, 부모님이나 가족들 직업까지 전부. 그리고 보디가드 붙여.”
“블리스, 너만 진 걱정하는 거 아냐. 내가 왜 움직인다고 생각해? 네 문제면 나도 신경 안 써. 진이 엮였으니까 내가 움직이는 거야. 내가 하는 대로 둬. 다행히 진도 그다지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으니까.”
차분한 에이먼의 설명에 블리스가 팔짱을 끼며 앞에 앉은 에이먼을 바라본다. 무표정하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한 그 얼굴에 에이먼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에이먼이 걱정하던 것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았다.
“괜찮겠지. 그 녀석도 가쉽에 대해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아니까. 그래, 오늘은 뒷모습만 나왔어. 그런데 내일은 사는 아파트 주소부터 회사 출퇴근 하는 사진에, 먹는 음식, 들고 다니는 가방 브랜드까지 다 나올 거야. 그런데 나더러 그냥 있으라고? 그 녀석 얼굴 찍는 거 일도 아냐. 보디가드 붙이고 보안 철저한 아파트 수배해.”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 이쪽에서 괜히 예민하게 나가면 그쪽도 사실이구나 싶어 더 달려든단 말야.”
“하기 싫으면 관둬. 내가 처리할 테니까. 한 번은 당해줬어. 그래도 두 번은 안 당해.”
의미심장한 그 말에 에이먼이 정색을 하며 블리스를 바라봤다.
“너 아직도 신경 쓰는 거야?”
“…….”
“적당히 잊어. 그리고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라. 그런 일은…… 그래, 그런 비극은 한 번이야. 그냥 여러모로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에이먼은 그럴듯한 태도로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걸 뻔히 알기에 블리스는 침착한 시선으로 그의 냉정하고 고지식한 형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내버려뒀어. 얼마든지 찍어대고 얼마든지 떠들어대라고. 쓰러진 여자의 손만 잡아 일으켜도 그 여자는 순식간에 내 연인이 되니까. 재미있어서 내버려뒀어. 그게 우리 숙명이니까. 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블리스는 잠시 말을 끊은 뒤 천천히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진은 아냐.”
그 말에 에이먼은 자신을 많이 닮은 동생의 푸른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냉정하게 이 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애초에 진을 끌어들인 게 너야.”
순간 블리스는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에반 역시 수없이 경고했던 바였다. 그리고 블리스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래서 10년을 끌었다. 내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상처주기 싫었으니까.
“알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그럴 거였다면 차라리 내가 포기했을 거야. 하지만 포기가 안 돼서, 지금까지 왔어. 지금은 어떻게든 막을 힘이 있으니까. 비열하게 사기를 칠 자신도 있으니까.”
“네가 아무 준비도 없이 일을 터트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충분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진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을 다 만들어뒀을 거라는 건 믿어. 하지만 모든 일이 네가 예상하던 선 안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냐. 네가 손쓸 수 없는 선에서 일이 벌어질 경우에 대한 각오도 했어야지. 그런 각오도 없었다면, 네가 이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본 거야. 그리고 이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거라 생각해. 아무리 우리라도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 20년 전에는 네가 어리니까 그냥 넘어갔어.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었던 때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냐. 욱한다고 함부로 움직이지 마. 냉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해. 단 한 번의 실수가 너뿐 아니라 진의 인생까지 끝낼 수 있어.”
“…….”
블리스의 침묵에 의자에 기대앉은 에이먼이 느긋한 투로 입을 열었다.
“네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알아?”
이번에도 블리스는 답하지 않았다. 고집 세고 제어가 되지 않는 어린 시절의 블리스로 돌아간 듯한 그 모습에 에이먼은 강한 어조로 블리스의 약점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넌 언제나 안 되는 걸 모른다는 게 문제야. 불가능이라는 전제를 둔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뭐든 네 마음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네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야. 그런 면에서 진은 현실적이야. 그 애는 이 세상에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게 많다는 걸 아니까, 너보다는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대처할 줄 알아. 문제는 너야. 어머니 일은 아주 특이한 경우였어.”
에이먼이 다시 한 번 확고한 어조로 언행에 조심하라고 충고를 하자 블리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번 생긴 일은 두 번도 생겨. 다시는 그런 일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딱 한 번이라는 건 없어.”
“너무 앞서가지 마. 아버지도 나도, 클랜도 클레어도 마찬가지야. 이대로 두진 않아. 그러니까 괜히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고. 넌 욱하면 뒷일 생각 안하고 덤비니까.”
“형의 말대로 우리 일이라면 괜찮아. 하지만 이건 그냥 못 넘어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건들면, 나도 그만큼 갚아줄 거야.”
“블리스.”
그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못 알아먹는 거냐고 에이먼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블리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문을 향해 걸으며 빠르게 지시를 내린다.
“형은 그만 돌아가. 로이가 옷 가져오면 갈아입고 일해야 하니까. 에반, 내 스케줄 다시 정리해서 알려줘. 그리고 두 명 정도 자리 교체해서 진한테 보내. 당분간 밖에 나가는 일은 그 사람들한테 지시하라고 해. 아버지한테도 연락해서 아버지 개인비서 세 명 정도 파견해달라고 하고.”
“블리스, 너 기어이 그렇게 일을 만들겠다는 거냐?”
“그래. 뒤처리는 형이 해줘. 형이랑 아버지라면 어떻게든 하겠지.”
더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블리스의 태도에 에이먼은 그냥 포기해버렸다. 애클랜드 가의 네 남매 중 가장 뛰어나면서도 사교성 좋고 유연한 게 블리스지만, 대신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나 돌아가신 어머니도 못 말린다.
“……알았어. 단 신중히 생각하고 행동해. 그리고 너 진한테 평소처럼 대해줘. 네가 굳어 있으니까 진이 네 눈치를 보잖아.”
그 말에 막 회의실 문을 열려던 블리스가 천천히 에이먼을 돌아본다. 그건 마치 에이먼을 비난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형이 나라면 지금 진 얼굴 보고 웃을 수 있겠어? 진이 제일 드러나기 싫어하는 부분들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게 만들고, 그 녀석 얼굴을 볼 수 있겠어?”
“걱정 마. 진은 괜찮을 거야. 너보다는 영리해. 그리고 그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에 이 정도 각오도 없이 너한테 키스한 건 아닐 거야. 기본적으로 소심하지만, 각오한 바에 대해서는 너보다 훨씬 대범해. 한다면 하는 성미인 거 알잖아.”
“…….”
“네 태도나 조심해. 괜히 문제 크게 만들지 말고. 캐니 워커는 맡겨둬. 내 동생을 건든 녀석을 그냥 두진 않아.”
동생들의 일에 대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블리스는 그의 형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 다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블리스가 나간 뒤 곧 문이 닫히자 에이먼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내젓는다.
“일이 커지겠군.”
에이먼의 탄식 섞인 말에 에반이 그를 위로한다.
“괜찮을 거야. 블리스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어린애가 아니니 문제지. 열 살 때도 악랄했던 놈이야. 서른 살에는 얼마나 악랄할지 솔직히 상상이 안 된다.”
돌덩어리 같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고,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일도 없는-심지어 자기 이마에 총이 겨눠줘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에이먼의 말에 에반은 신기한 얼굴을 해보였다.
“대체 블리스가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사람들은 전부 블리스가 날개 꺾인 천사라고 알고 있는 사건이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모르는 게 좋아. 알면 같이 일하기 싫어질 테니까.”
그 말에 에반은 조금 질린 얼굴을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온 블리스와 일하기 싫어질 정도라면 대체 어떤 일이 있었을 걸까. 그것도 겨우 열 살짜리가 말이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그래?”
“나중에 얘기하자. 나도 출근해야겠다. 오늘도 수고.”
에이먼도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는 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에반도 더는 묻지 않고 에이먼의 뒤를 따라 문으로 향했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에반의 기척을 느낀 에이먼은 에반을 돌아보며
“아, 진 좀 잘 달래줘. 블리스 저런 거 보고 기죽었을 거야. 자기가 미안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해.”
“알았어.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
간단한 잡담을 나눈 뒤 에이먼이 먼저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는 에이먼을 보며 에반도 천천히 회의실을 나서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갔다.
새벽에 신문을 봤을 때만 해도 에반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블리스도 어느 정도 각오는 했을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사실 블리스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이 많이 놀랐을 거라 여기고 걱정했는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놀랐을 거라 생각한 진은 침착했고, 오히려 블리스가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을 해온다.
사실은 블리스가 오자마자 단단히 한소리를 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어떤 가쉽이 생겨도 1면에만 나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던 블리스의 신경질적인 반응이 놀라운 한편, 진이 거론되자 화를 내는 게 납득도 가고, 또 그 정도로 진을 아끼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어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상당히 복잡해져버렸다.
***
오늘 도착했다는 예복을 입히기 위해 클랜을 돌려보낸 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거래처에 주문전화를 하던 진은 계속되는 상대의 질문에 웃으며 친절하게,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해주었다. 사실, 진은 자신이 진짜 거짓말을 못 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코너에 몰리자 아주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거짓말을 해대는 자신에게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하하, 저도 놀랐어요. 거기가 니먼 마커스(Neiman Marcus) 백화점 지하였는데 어떤 바보가 그런 짓을 해요?”
공개적인 장소에서 뻔뻔한 짓을 하고 나니 얼굴에 철판을 뒤집어씌운 모양이다.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도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진은 책상 위의 펜 위로 계속해서 ‘바보(idiot)’라는 단어를 적고 있었다. 철부지 십대들도 아니고 진짜 머저리 같은 짓을 했다.
「그래요. 그럼 구두는 가봉되는 대로 보내줄게요.」
“네, 수고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진은 이번엔 병원에 입원했을 때 꽃과 선물을 보내준 사람들에게 보낼 카드를 적기 시작했다. 리스트는 전부 뽑아놓은 상태였으니 감사의 말과 함께 간단하게 꽃을 보낼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보내는 것보다는 고급 장미 한 송이가 나을 것 같아 꽃집에 배달 주문을 하고 다시 카드를 쓰려는데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네.”
짤막하게 답을 한 뒤 다시 카드를 적으려는데 문이 열리며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 살아있나?”
짓궂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진은 상대가 누군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내 파파라치 찍으러 온 거면 돈 내고 찍어. 내 얼굴 값 비싸.”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들던 진은 앞에 턱하니 내려오는 커다란 봉투에 눈을 껌뻑거렸다.
“뭐야? 도시락 폭탄이야?”
“폭탄은 무슨. 점심 먹어야지.”
의자를 끌어다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 놓고 앉는 노먼의 얼굴에 진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피곤한 듯 미간을 눌렀다.
“점심까지 사무실에서 먹으라고? 내 유일한 휴식 시간까지 사무실에서 보내야 하는 거냐?”
“그럼, 나가서 먹으려고 했냐?”
“응.”
“너 간 커졌다.”
“왜?”
“이 근처에 파파라치들이 진치고 있는 거 몰라? 네 뒤통수만 나와서 앞통수 찍으려고 벼르는 중이야.”
이미 알고 있던 바라 진은 이를 갈며 응수했다.
“앞통수 찍기만 해봐. 다들 고소해버릴 테니까.”
그 말에 노먼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넌 진짜 의외성의 인간이야. 지금쯤 부들부들 떨며 신경증에 걸려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네?”
“아직은 뒷통수만 나왔거든.”
“네 이름, 프로파일 전부 드러났는데도 괜찮아?”
“내가 어디 가서 사기를 쳤냐, 강간을 했냐,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냐? 세금 체납 하나도 없이 지금까지 떳떳하게 살았고, 누구한테 흠 잡힐 구석 없어. 내가 해외입양아라는 거 아는 사람 다 알고, 파양 당한 건 내 잘못 아니니까.”
진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노먼이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친다.
“진 케이먼, 드디어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거야? 축하해야겠는 걸?”
진을 잘 아는 노먼의 축하 말에 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것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그보다는 포기한 거지. 남의 얘기 떠들어봐야 사흘이고. 다음 주면 내 이름도 다 까먹을 테니까. 블리스랑 어느 정도 관계 진척이 있을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야.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니 포기할 수밖에.”
“하긴, 넌 한 번 한다하는 일에 대해서는 과감하니까. 그 간극이 매력적인 거 알아?”
싱긋 웃으며 다시 작업을 걸어오는 노먼을 보며 진은 봉투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너한테 매력 있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너 시간 괜찮아? 요즘 출판 기념 사인회로 바쁘지 않아? 엘리가 네 책 열심히 홍보해줬던데.”
진이 앞에 놓인 봉투에 든 종이 팩을 꺼내며 그렇게 묻자 노먼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다.
“그 얘기 하지 마.”
“왜?”
“덕분에 신나게 불려 다니는 중이야. 엘레나 네브즐린 만나면 내가 가만 안 둔다고 전해.”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투와 눈빛이 상당히 살벌했다. 그렇게 열 받았나 하는 생각이 진은 종이팩을 풀며 노먼에게 되물었다.
“왜? 수퍼모델과의 염문설인데. 걔 예쁘잖아.”
“절대 사양한다. 엘레나 네브즐린 새대가리라는 거 은근히 소문 퍼지고 있어. 덕분에 파파라치들이 엘레나가 무슨 짓을 하나 예의주시하는 중이야.”
“하는 건 멀쩡해. 꼬리 잡힐 거 없어. 말하고 쓰는 게 문제지.”
“하긴 입만 안 열면야.”
다른 종이팩을 꺼내 노먼에게 건넨 진은 안에 든 일회용 포크를 꺼내 크림 스파게티를 둘둘 말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일이야?”
“괜찮은가 해서.”
“괜찮아.”
“그래 보인다. 다행이네.”
“네가 내 걱정하니까 이상하다?”
“반은 네 걱정이고 반은 내 걱정이야.”
“왜?”
“네 기분 최악이면 너한테 죽을 것 같았거든.”
그 말에 막 스파게티를 입에 넣으려던 진이 손을 멈칫한다. 이 또라이가 직접 사과까지 하러 왔다면 또 무슨 일인가 두렵기까지 하다.
“또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사진 네가 찍은 거냐?”
“그건 아닌데…… 네 정보 흘린 게 아무래도 나인 것 같아서.”
순간 진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져 내렸다.
“……뭐?”
“게빈 기억하지?”
물론 기억한다. 같은 영문과 출신으로 수업을 몇 개 같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그 놈하고 술 마시다 책에 네 이름 넣은 거 말했거든. 그리고 네가 파양 당한 것도. 그 녀석이 해외 입양아들의 실태라는 소재로 무분별한 입양과 안이한 입양관리국의 태도에 대한 칼럼을 쓴다기에 너 취재해보라고 했는데, 네 정보가 연예란으로 넘어간 것 같다. 미안.”
“……너였냐, 결국?”
“응.”
진심 어린 노먼의 사과에 진은 떨어트린 포크를 줍고는 책상을 더럽힌 면을 휴지로 닦았다. 그리고는 스파게티를 포장한 종이팩을 조용히 닫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의 움직임은 아주 조용하고 신속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그 움직임을 보던 노먼은 불길한 예감에 슬슬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리고 바로 1초도 지나지 않아 노먼의 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노먼 맥캐인!”
책상을 넘어 자신에게 달려드는 진을 피해 일어난 노먼은 빠른 속도로 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돌려 열고는 복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너, 거기 안 서?”
벼락같은 진의 고함 소리와 함께 앞서 달리는 노먼의 머리통으로 생수병이 날아왔다. 재빨리 허리를 숙여 물병을 피한 노먼은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로 달려 들어갔다. 닫히려던 문을 강제로 열고 엘리베이터에 선 노먼은 진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진정되면 말하자.”
싱긋 웃으며 닫힘 버튼을 누르는 노먼을 보며 막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간 진은 바로 눈앞에서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보곤 발로 그 옆의 벽을 걷어찼다.
“너 잡히면 죽을 줄 알아!”
온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진의 고함소리에 막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려 준비 중이던 사원들이 놀라 진을 바라본다. 평소에는 더없이 조용하고 차분한 진이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걸 처음 보는 데다 ‘죽여 버린다.’라는 말을 하는 걸 믿을 수 없다는 얼굴들이었다.
“넌 내 일생의 원수야! 걸리기만 해봐!”
여전히 분이 안 풀린 듯 쾅- 하니 엘리베이터 문을 한 번 더 주먹으로 내리친 진은 씩씩거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책을 받고 헌사까지 써준 덕에 노먼 맥캐인이 조금이나마 근사해 보이려던 찰라 아주 제대로 깨줬다.
그럼 그렇지. 노먼 맥캐인이 그렇게 멀쩡한 짓들만 할 리가 없었다. 물론, 고의는 아니었지만 하여간 실수한 건 실수한 거다. 어쩐지 너무 자세히 써 있더라니 노먼이 사단이었다.
“저 새끼는 저 입하고 손이 문제야. 아주 다 잘라 버려야 돼.”
다음에 만나면 이번에야 말로 사단을 내겠다고 결심하며 돌아서던 진은 앞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사람을 보곤 손을 들어 웃어 보였다.
“블리스, 식사하러 가?”
“……응.”
답이 지나치게 짧다. 거기다 블리스는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반도 같이네. 손님 접대?”
진이 애써 웃으며 뒤에 선 에반에게 묻자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 답해준다.
“뭐, 그런 거지. 너, 점심은?”
“갈아먹을 자식이 일단 사왔어.”
“노먼?”
“응. 아, 그 기사 우리 동기가 쓴 거래. 악의는 없고, 그냥 내 정보 얘기하다 새나간 건가 봐. 대체 칼럼에 쓸 내 인적사항이 왜 그쪽으로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노먼이냐?”
“일부러 그런 건 아냐. 다른 얘기하다 나간 건가 봐. 식사하고 와. 나도 점심 먹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진은 다시 블리스를 바라봤지만 블리스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선 채 뚫어져라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금단지라도 숨겨놨나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진력이 난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달라붙더니 오늘은 또 완전히 남인 척 구는 게 짜증나 진이 블리스를 불만스러운 듯 노려보고 있자, 에반이 진의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툭 친다. 그리고 아주 안쓰럽다는 눈빛을 하곤 다정한 음성으로 걱정을 한다.
“몸 상했는데 너무 무리하지 마. 아직 얼굴색도 안 좋다. 쉬엄쉬엄 해.”
에반답지 않은 친절하고 상냥한 태도에 진은 우두두 돋는 소름에 경악한 듯한 눈으로 에반을 쳐다봤다.
“……혹시 나 죽을병이래? 의사가 나한테만 말 안 한 거야?”
“응?”
“아니, 나 뭐 암이나 그런 거냐고? 에반이 갑자기 다정한 척 구니까 이상하잖아. 아니면, 에반이 죽을 병 걸렸어?”
그 말에 블리스의 옆에 서 있던 로이가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특유의 고집 세고 퉁명스러운 듯한 억양도 억양이지만 에반 브루너는 기본적으로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걱정을 해도 상대가 잘못한 점을 따박따박 지적하며 그러니까 그 꼴이 되었다라고 하거나, 칭찬을 해도 실수한 점을 요목조목 짚어 이런 건 고쳐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동료 중 누가 과로로 쓰러져도 피곤하면 알아서 스케줄을 정리했어야 한다고 무리하게 일하는 것 자체가 폐라고 따끔하게 충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너무나 다정한 투로 무리하지 말라니 진이 이상해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호의를 무시당한 에반으로서는 상당히 화가 나는 듯했다.
“너 말이다. 사람이 걱정을 하면 걱정으로 알아먹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평소처럼 시비를 거는 듯한 에반의 어투에 그제야 진은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그래, 이거야! 이게 에반이야.”
나름 진을 걱정해 상냥한 태도를 보였던 에반은 이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냥 하던 대로 하기로 했다. 에이먼의 당부도 있었고 블리스가 하루 종일 진을 피해 다니는 통에 걱정이 돼 좋게 대해주려고 했더니 진은 아주 멀쩡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너, 다 나았구나? 진짜 완벽히 회복한 모양이니, 하는 김에 회계 시스템 분석이나 해봐. 저번에 올린 프로그램 연동 확인하라고. 오늘 내로 나한테 보고서 제출해.”
사감이 듬뿍 담긴 에반의 지시에 진이 팔짱을 끼며 짜증을 낸다.
“이런 보복성 지시는 삼가 해줄래? 자꾸 그러면 고소할 거야.”
“고소해. 그럼 내가 널 짜를 테니까.”
“내 고용주는 에반이 아니거든? 그리고 블리스도 그런 이유로 나 짜르면 고소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진은 다시 블리스를 쳐다봤다. 제발 이렇게까지 이쪽을 한 번이라도 봐달라는 듯 애원하는 시선으로 블리스를 쳐다봤지만 블리스는 이내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블리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에반은 다시 한 번 진의 어깨를 툭 치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힘내라는 그 무언의 지시에도 진은 계속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블리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좀 돌아보라고, 이쪽 좀 봐달라고 간절한 눈빛으로 블리스를 돌아봤지만 블리스는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블리스가 무슨 생각인지는 안다. 아침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블리스는 그 때문에 자신의 인적사항이 드러났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또 자신에게 미안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알고 있다. 너무나 오래 알아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블리스가 다른 건 몰라도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도, 또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거나 하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블리스가 그러면 그럴수록 미안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항상 그랬었다. 어떤 이유로든 그가 먼저 돌아서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두려워지는 건 자신뿐이다.
천천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 틈 사이로 아무리 바라봐도 블리스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윽고 은색의 문이 완전히 닫히자 진은 손을 들어 셔츠 속의 쇄골 사이에 있는 반지를 손끝으로 덧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소심한 자식…….”
진한테 전화라도 좀 해.”
오후의 일정까지 끝낸 뒤 주차장으로 향하던 에반이 그렇게 말을 걸자 블리스가 아무 말 없이 주차된 차를 향해 간다. 결국 하루를 못 갈 게 뻔한데 저렇게 고집을 피우는 꼴이 웃기고 또 안쓰럽기도 해 에반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었다.
“진은 괜찮다는데 네가 왜 그래? 걔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야.”
그럼에도 여전히 블리스는 침묵했다. 고객들과의 상담과 이어진 식사까지 블리스는 깔끔하고 완벽하게 그들을 상대해냈다. 언제나처럼 유쾌하고 즐겁게, 오늘 가쉽란을 장식한 일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조차 웃으며 그게 사실일지 아닐지 내기를 하자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모두들 별일 아니라고, 그 가쉽은 역시나 가쉽이라고 웃으며 넘어갔다. 블리스의 태도가 하도 교묘해 에반조차도 사실은 그게 날조된 기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자리를 벗어나자 블리스는 입에 본드라도 바른 듯 다시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에반이 아무리 귀찮게 하며 말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야, 말 좀 해라. 뭘 그렇게 소심하게 그래?”
“먼저 들어갈게. 다음 스케줄 있지?”
그의 차에 도착한 블리스는 로이가 열어주는 차의 뒷좌석에 올라타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그 말에 에반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들어가라.”
개인 고객과 저녁 약속이 있던 터라 에반은 그의 차에 올라타 손을 흔들었다. 뒷좌석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든 블리스는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하곤 로이에게 어디로 갈지 지시를 내린 뒤 차게 기대앉았다.
에이먼의 말대로 다른 날과 같이,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라는 건 알고 있다. 자신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못할 것도 없다. 한두 번,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모르는 척 무시하는 건 일도 아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스캔들을 화제로 삼아 내기를 걸고, 오히려 그 스캔들에 스캔들을 더해주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오늘만은 아니다. 짓궂게 오늘 난 스캔들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요트를 걸고 내기를 하자는 말을 건네며 스스로에 대한 환멸에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에이먼의 말대로 자신은 단 한 번도 실패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게 이렇게나 쓰디쓴 결과를 안고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
멍하니 차 안에 앉아 한참을 달려가던 블리스는 메시지 음에 폴더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온 문자를 보곤 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왜 전화 안 받아?」
사실 회의 중이라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다. 진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빤히 핸드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자 잠시 후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6일 남았어. 너 자꾸 이따위로 굴면 나가는 길에 하수구에 반지 집어던질 거야.」
너무나 진다운 말에 액정을 바라보며 웃고 있자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도착한다.
「3분 안에 답신 없으면 나 세르게이랑 데이트한다? 내가 얼마나 인기 많은지 모르지?」
그 말에 드디어 블리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눈을 보고 얼굴을 보고 말하는 건 어려운데 이렇게 보니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편안하다.
그간 두 사람 사이에 문자를 보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항상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거나, 통화를 하는 게 전부였다. 메모를 남기거나 문자를 보내는 건, 둘 사이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미안할 때는 이런 것도 괜찮다.
서서히 마음이 풀려가는 듯했다. 송신탑을 통해 전해지는 짤막한 몇 개의 문장이 이렇게나 큰 힘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대화를 할 때와는 달리 어울리지 않게 아양까지 떠는 진이 마음에 들었다.
진이 이렇게까지 정성을 보이는데 더는 무시할 수 없어 블리스는 재빨리 답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도 열이 안 내렸냐?」
농담처럼 장난 같은 문자를 보내자 곧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너, 지금 나 질투하는 거지?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데?」
툭툭거리며 가벼운 장난을 치는 듯한 그 말에 블리스는 다시 답문을 보냈다.
「조류한테 인기 있어서 뭐하게?」
문자를 적고 막 send버튼을 누르는데 차가 멈췄다. 짙게 썬팅이 된 차창 너머를 바라보자 검은색의 팬츠 정장에 검은색의 번쩍거리는 스팽글이 달린 슬리브리스 티셔츠를 입은 다니카가 긴 머리를 하나로 단정히 올리고는 커다란 백을 들고 차로 다가와 문을 열고 올라탄다. 역시나 오늘도 시커먼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 시커먼 차림 속에서도 번쩍거리는 스팽글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잊지 않은 게 너무나 다니카다워 웃음이 삐져나올 정도였다.
딱 그녀다운 그 모습에 블리스는 옆에 올라타는 다니카를 보며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까마귀, 아직도 검은 옷만 입냐?”
“너, 자꾸 까마귀라고 할래? 이게 도와주는 사람 생각은 안 하고.”
다니카가 그렇게 말하며 살벌하게 웃는다. 다니카가 검은색의 정장 재킷을 입은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우람한 근육을 숨기기엔 최적의 의상이었다.
“드디어 마돈나를 밴치마킹하기로 한 모양이지?”
“우리 언니가 어때서?”
톡 쏘는 그 말에 블리스는 웃으며 “누나겠지.”라고 정정해주다 다니카에게 한 대 맞았다.
“못 본 사이 더 우람해졌는데? 좀 있으면 G.I 제인을 넘어서겠어. 어때? 세계 평화를 위해 입대를 고려해보는 건?”
“난 반전주의자야. 회사로 갈 거지? 가서 진 얼굴 좀 보자.”
그 말에 블리스는 로이에게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차도에 멈춰 섰던 차가 매끄럽게 빠져나가자 다니카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창밖을 돌아본다.
“뭐 이렇게 더워? 올해는 유난하네.”
“시커멓게 하고 다니니까 그렇지. 물건은?”
그렇게 말하며 블리스가 손을 뻗자 다니카가 혀를 찬다.
“무슨 암거래 하냐?”
“비슷하잖아.”
“누가 보면 마약이라도 거래하는 줄 알겠다.”
“마약은 흥미 없고 총기가 있으면 연락해줘.”
“총 사서 파파라치들 다 쏴버리려고? 진은 괜찮아?”
다니카 역시 오전 신문을 본 모양이었다. 오늘 만나는 사람마다 하루 종일 그 이야기인지라 블리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의외로 의연히 받아들이더군.”
“그래? 하긴, 대범할 때는 또 대범하니까. 그거 게빈 짓이야.”
“게빈?”
“게빈 랜더스라고 영문과 친구 하나 있어. 나한테 전화했더라고. 연예부 기자가 게빈이 진의 동문이라는 말을 듣고 은근히 찔렀나 봐. 노먼이 달려와 죽일까 봐 부들부들 떨고 있더라.”
아무래도 예일대 출신 학생들은 무슨 일만 있으면 다니카에게 보고를 하고 위안을 얻는 모양이다. 참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었다.
“진 말로는 노먼 짓이라던데?”
“아냐. 게빈이야. 노먼은 나름대로 게빈 보호하려고 한 거고. 괜찮은 애거든. 쓰레기 같은 기자들하고는 틀려. 잠깐 말실수한 거야. 괜히 불똥 튀게 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걔는 그냥 넘어가. 진도 괜찮다고 했다며?”
하긴, 노먼 맥캐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진에 대해 그렇게 떠들고 다닐 리 없다고는 생각했다. 친한 친구가 얽혀들었으니 아예 자기가 먼저 나서 총대를 멘 거다. 자신이 그 뒤를 캘 게 뻔하니 먼저 방어막을 친 거다. 노만이 한 짓이라면 진도 결국 화를 내다 말 테니까. 그리고 진이 그렇게 넘어간다면 자신도 넘어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노먼도 너도 무슨 오지랖이 그렇게 넓어? 너희가 인류를 구할 셈이냐?”
“쓰레기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진주 하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거지. 진한테는 미안하다고 직접 전화한댔어. 그냥 해프닝으로 넘겨.”
다든 같은 말들이었다. 그냥 가벼운 접촉 사고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라, 과잉 반응하면 오히려 더 좋지 않다. 심지어 진조차도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 넘겼지만 자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같은 사건에서 느끼는 체감도가 이렇게나 다를 줄 몰랐었다.
블리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자 다니카가 블리스를 돌아보며 어깨를 툭 친다.
“그래도 괜찮아 보여 다행이다.”
“왜?”
“아까 통화했을 때엔 기분 영 아닌 것 같아서 걱정했거든. 진이 괜찮다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어차피 내일 일면은 다른 사건으로 꽉 찰 테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이었던 기분이 진의 메시지를 받고 조금 좋아진 채였다. 그렇다고 다니카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하긴 귀찮아 블리스는 손을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진이나 내놔.”
“아, 사진. 이거, 실물 크기 사진이야. 이 정도면 돼?”
다니카가 건넨 서류봉투를 받아든 블리스는 그 안에 든 사진들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속에는 찬란하게 광채를 뿜어내는 블루 다이아몬드가 보였다. 상품 자체도 우수하지만 우아하면서도 섬세한 세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괜찮다. 눈에 차는 물건이었다.
“400캐럿 정도 되는 거야?”
“응. 중동 쪽을 파서 겨우 구해낸 거야. 하여간 넌 운도 지지리 좋아. 어떻게 딱 맞게 이런 상품이 나오지?”
“승리의 블리스니까.”
블리스가 고등학교 시절 럭비 팀의 쿼터백으로 있을 때 붙여진 별명을 입에 담으며 싱긋 웃자 다니카가 씁쓸한 웃고 만다.
“잘났다. 중동 석유 갑부들이 이런 상품을 꽤 많이 갖고 있어. 암시장을 통해서 거래된 모양인데 어때?”
“좋아. 이걸로 해.”
“오케이. 그럼 내가 당장에 날아가서 받아오지.”
“침 묻히지 마.”
“침 안 묻혀!”
“너 보석만 보면 침 질질 흘리잖아.”
반박할 수 없는 그 말에 다니카는 잠시 이걸 죽여, 살려 라는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자 블리스가 짓궂게 말을 돌린다.
“그렇게 열렬하게 쳐다봐도 소용없어. 넌 내 취향 아냐. 이 세상에 너랑 단 둘이 남아도 너랑 난 아냐. 미안하지만 날 향한 연심은 적당히 버려.”
블리스의 그 말에 문득 전 세계 멸망 후 블리스와 둘만 살아남은 자신을 떠올린 다니카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너랑 둘이 사느니 그냥 널 죽이련다.”
“외로울 텐데?”
“상관없어. 너랑 같이 살아남느니 차라리 혼자 사는 쪽을 택하는 게 정신 건강 상 좋아.”
딱히 안 맞는 건 아니지만, 아니 사실은 기가 차게 잘 맞는 쪽이지만 다니카와 블리스는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기는 하지만 둘 다 기가 센 타입이라 만나기만 하면 싸우다 끝나니 사이가 좋아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블리스는 나름 다니카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니카는 진짜 거물이 될 녀석이었다.
“진은 이제 퇴근할 시간이지?”
“응.”
“그럼 나랑 같이 회사에 올라가자. 진하고 저녁 먹고 얘기 좀 하게.”
“그래. 난 나머지 일 정리하고 나가야 하니까 네가 같이 있어줘. 잘 됐네. 네가 있으면 보디가드는 필요 없을 테니 진하고 내 아파트로 가 있어.”
마치 고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듯한 블리스의 어투에 다니카가 팔짱을 끼며 노골적으로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너 날 뭘로 생각하는 거냐?”
“람보.”
“어이.”
“싫어? 그럼 터미네이터.”
“너 이 보석 다른 데로 빼돌리는 수가 있어? 나오기만 하면 거둬들일 사람들 수두룩한 거 내가 널 위해서 빼낸 거 몰라?”
“알아. 그래도 넌 람보야.”
“이왕이면 사라 코너라고 해줘!”
“사라 코너는 미인이야.”
“야!”
별 의미 없는 잡담을 하며 두 사람은 천천히 다시 블리스 사를 향해 달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뭐야?”
모처럼 문자를 보냈나 했더니 다시 답이 없는 블리스가 야속한 듯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진이 퉁명스레 말하자, 앞에 앉아 있던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진, 무슨 일 있어요?”
그제야 진의 사무실에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 두고 회의 중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진은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아뇨. 개인적인 일이에요. 그럼, 식장 조감도 확인해서 배치도 다시 짜주세요. 일단 이 정도면 끝난 것 같네요. 내일 나올 메이드복 확인해주시고요.”
진이 체크된 목록들에 대한 지시를 내리자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방송국 쪽 일은 캐인에게 맡기면 되는 거죠?”
“네. 부탁드릴게요. 그럼, 이만 퇴근하죠.”
진이 앞에 놓인 스케줄 첩과 노트북을 정리하며 그렇게 말하자 상대 역시 들고 온 팜과 스크랩북들을 정리해 일어선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수고하셨어요.”
그녀가 사무실에서 빠져나가자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과 스케줄 첩을 제자리에 두곤 당장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찾으러 가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짤막하게 답하며 막 재킷을 입으려는데 예상대로 커다란 덩치의 로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폴로 티셔츠에 검은 면바지를 입은 로드는 희끗희끗 샌 머리 덕에 편안한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였다.
“어서 오세요. 아침에 감사했어요.”
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로드가 다가와 진을 안아 어깨를 두드려준다.
“뭘. 네가 고생이 많구나.”
“뭘요. 아저씨가 더 고생이죠. 블리스가 때 쓴 거죠?”
“아니, 에이먼 부탁이야. 나도 오랜만에 나오니 좋다.”
“모처럼 쉬시는 분인데 죄송해요.”
“아냐. 지금 퇴근하니?”
“네. 시간 맞춰 오셨네요. 저랑 같이 저녁 식사해요.”
블리스는 어차피 일정이 빡빡하니 저녁 늦게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6일 남았는데 바빠서 얼굴 볼 새도 없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휴가를 반납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니, 어차피 자신의 성격에 반납을 안 했더라도 일이 신경 쓰여서 안절부절못했겠지만 그래도 조금 아쉽다.
진지 재킷을 제대로 입고 가방을 들고 나서자 로드 역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진의 옆에서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일은 할만 하고?”
“그럼요. 저야, 딱 적성이죠.”
“다행이구나.”
“전원생활은 마음에 드세요? 손자들 보는 재미 좋죠?”
“뭐, 그렇지.”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선 진은 계속해서 로드와 대화를 나누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 버튼을 눌렀다. 그때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아침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서는 잊은 듯했다. 사무실 사람들도 오전에만 조금 술렁거렸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블리스와 진을 보고는 이내 그 소문 자체가 헛소리라며 무시하고 넘어갔다.
이대로면 내일 정도면 쓸데 없는 소문들은 모두 사라질 듯했다. 항상 그랬듯이 하루, 아니 길면 사흘을 넘지 못한다. 요 사흘만 조심하면 된다.
치잉-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엘리베이터의 도착과 함께 열리기 시작한 문에 진은 멀리서 다다다 달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해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앞이 하얘졌다.
“안녕하세요! 신나는 테러블 트라블(Terrific Terrible Trouble) 채널 가쉽의 맥 커먼입니다. 진 케이먼 씨죠?”
순간 옆에 있던 로드가 재빨리 진의 팔을 잡아끌고는 진의 얼굴을 그의 손으로 가렸다. 과연 전직 보디가드다운 재빠른 행동이었다.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그 실력은 어디 안 갔다.
하지만 아무리 로드가 무서운 얼굴로 바라보며 진을 감싸며 카메라를 가기려해도 상대 리포터는 막무가내였다.
“아주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됩니다. 진 케이먼 씨, 오늘 오전에 난 블리스 애클랜드와의 열애설에 대해 좀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스스로를 리포터라 밝힌 남자는 아주 어려 보였다. 게다가 케이블 연예 채널의 리포터답게 말투가 지나치게 경박스러웠다. 귀에 거슬리는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잘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 옷차림도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인 걸로 봐서는 유명 케이블 채널이 아닌 작은 지방 케이블 채널인 듯했다.
끈질기게 진을 따르며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 행동에 로드가 계속해서 카메라를 손으로 가리자 카메라맨이 이리저리 피하며 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다.
“애클랜드 가에서 후원하던 고아라고 하셨는데, 블리스와는 언제부터 그런 관계가 된 거죠? 사실은 10년이 넘은 사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블리스 애클랜드의 강요는 아니었나요? 아니면, 성상납?”
기가 막힌 말에 진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 리포터를 바라보고 말았다. 눈이 마주치자 신이 난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정면에서 진의 얼굴을 잡는 사이 저 멀리서 익숙한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익숙한 그 차체에 진은 경악한 얼굴로 재빨리 리포터를 피해 자신의 차 쪽으로 다가갔다. 블리스와 이 사람을 마주치게 하면 진짜 오늘 큰일 치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앞에서 들이대는 카메라와 리포터,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온 조명 담당 외의 두 세 명의 사람들을 무시하고 막 차 앞으로 가는데 리포터가 경악할 만한 발언을 이어간다.
“이 차는 블리스 애클랜드의 차로 등록돼 있는데 이것도 선물로 받은 건가요? 역시 통이 크네요. 람보르기니라니. 여러분들, 모두 부러우시죠? 이래서 돈이 많은 게 좋은 모양이네요. 제게는 꿈의 차인데 말이죠? 그 외에 또 뭘 받으셨나요? 재벌 애인의 선물 자랑도 좀 해주시요?”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계속하는 리포터의 태도에 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바로 옆에 로드가 있고, 또 카메라가 있고 저 멀리 블리스의 차도 있어서 진은 참았다. 참자. 참은 인 자가 셋이면 생명을 구한다. 무조건 참자. 생각 같아서는 저 리포터의 머리통을 돌려차기로 후려 차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아야 한다. 서둘러 이 주차장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인간이 아닌 것들은 상대하는 게 아니다. 블리스가 내리기 전에 떠나야 한다.
화를 참으며 간신히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쥔 채 차를 향해 가는데 운 나쁘게도 블리스의 차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차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은색의 양복을 입은 블리스가 내려선다. 순간 인기척을 알아챈 리포터가 블리스를 돌아보자 카메라 역시 빠르게 블리스의 쪽을 비춘다.
“오우, 여기 오늘 오전 미국을 뒤흔들어놓은 두 분이 동시에 나타나셨네요. 이제 블리스 애클랜드와도 인터뷰를 해보겠습니다.”
지금 자기 목숨이 간당간당한 것도 모르고 신이 나 방방 뜨는 리포터를 보며 진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 사이 블리스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느긋한 걸음으로 이쪽으로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차에서 내린 다니카가 블리스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오! 과연 블리스 애클랜드! 혼자는 안 오는군요. 오늘도 여인을 대동하고 오셨는데 오늘은 그다지 미인이 아닌 걸요? 여자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니시나 봅니다, 요즘은? 애인은 남자? 보디가드는 여자? 역시 탁월하군요.”
저 놈의 주둥이는 왜 쉬지도 않냐 싶을 정도로 정신이 없이 슬랭어를 섞어 저속한 말들을 내뱉는 리포터를 경악한 눈으로 돌아본 진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블리스의 무시무시한 기운에 질려 걸음을 멈췄다. 저 리포터는 입만 살았지 눈은 썩어버렸는지, 저렇게 너 죽었어라는 오라를 발산하는 사람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용감하다고 보기엔 지나치다. 그냥 바보인 것 같다.
자신이라면 도망간다. 당장에 신발 벗어들고 도망친다.
“오! 블리스! 아메리칸 스윗하트의 등장입니다. 자, 블리스. 한 마디만 해주세요. 어떻게 진을 사로잡았죠? 역시 돈인가요? 아니면 정력? 혹시 성희롱이었나요? 아니면 후원하는 집안의 아들로서 강제는 아니었나요? 어떻게 꼬셨나요? 역시 돈?”
온갖 비어와 은어를 섞어 쨍알쨍알 아주 빠른 속도로 블리스를 향해 해선 안 될 말만 골라서 하는 리포터를 입을 쩌억 벌리고 바라보던 진은 바로 그 너머로 블리스가 싱긋 웃는 걸 보고 말았다.
차갑게 얼어붙은 눈동자로 앞에 선 리포터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짓는 모습은 마치 화보에서 빠져나온 듯 근사했지만, 눈에서는 광선이 나올 것 같았다. 딱 세르게이 네브즐린이 그를 찍는 기자들을 갈아먹을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던 그 얼굴이었다.
순간 진은 위험을 감지했다. 블리스의 분노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저 병신 리포터는 왜 하필 지금 나타났냐 하는 한탄을 하며 로드를 돌아본 진이 어떻게 좀 하라는 듯 눈짓을 하자, 로드가 진의 옆에서 벗어나 블리스에게 다가간다.
“……하하, 화가 많이…… 나셨나 보네요.”
리포터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어설픈 웃음과 함께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맥이 빠진 음성으로 작게 중얼거린다. 하지만 블리스의 분노는 그 정도에 풀릴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블리스가 살짝 입술 끝을 올려 웃는 게 불길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매력적인 푸른 눈동자. 그리고 조각 같은 미모 위로 냉랭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 진은 끝장났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저 리포터는 오늘 관 짜야 할 것 같다. 아니, 관도 아니다. 시체도 찾기 힘들 테니 그냥 화장하는 쪽이 낫다.
“얘기를 듣고 싶나?”
진이 걱정을 하든 말든 블리스가 부드러운 저음으로 말을 걸자 움찔했던 리포터가 다시 기가 살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 물론이죠! 전 국민이 원하고 있습니다!”
저 리포터는 아무래도 일 해먹기는 글렀다. 저능아가 아닌 이상, 블리스가 한 ‘얘기가 듣고 싶은가?’라는 말이 친절하게 상황 설명을 해주겠다는 말이 아니라는 건 다 알아 들었을 거다. 블리스의 말은 말하기 전에 널 작살내겠다는 의미였다.
“자, 다들 두근두근하시죠? 블리스 애클랜드의 심경 고백! 애클랜드 가에서 후원하는 고아를 어떻게 침대로 끌어들이신 거죠?”
순간 블리스의 얼굴 위로 살기가 스쳤다. 끝장이다.
하지만 이어진 리포터의 말에 블리스의 신경이 먼저 끊어지기 전에 진의 신경이 먼저 끊어져버렸다.
“혹시 침대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려보낸다고 협박한 건가요?”
참으려고 했다. 진짜 어떻게든 참으려고 침착하게 자신을 다스리며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또 눌렀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거다. 아무리 막되 먹은 인간이라도 해서는 될 말과 안 될 말은 구분해야 한다. 블리스와 자신이 눈물겹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 따위로 함부로 떠들어댈 정도로 가벼운 감정은 아니다. 더더군다나 다른 것도 아닌 블리스의 인격과 애클랜드 가 전체를 모독하는 그 말은 참아줄 수 없었다.
순간 진은 저런 건 인간 대접해줄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 너 안 닥쳐?”
몸이 붕 뜬다는 감각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고함을 내질렀다는 감각도 있었다. 하지만 의식은 없었다.
예전에도 딱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식당에서 노먼이 자신을 하니라고 불렀을 때, 딱 지금 같았다. 이성은 사라지고 몸만 움직이는 상황.
지금이 딱 그랬다.
온 방 안이 브라운관으로 가득 찬 사무실에 앉아 대형 텔레비전을 바라보던 에이먼은 커다란 브라운관 안으로 아주 근사하게 돌려차기를 한 방 날리는 진을 보고는 커피를 마시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역 케이블에서 오전부터 요란하게 블리스의 연인을 찾아간다는 광고가 나와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생방송이라며 신나게 블리스 사가 있는 건물 지하로 몰래 들어가, 바닥을 구르고 난장을 피우던 어린 리포터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을 향해 달려갈 때는 알아서 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단 3분도 지나지 않아 사단이 났다.
“……근사하군.”
에이먼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세르게이가 우아한 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케이블 방송의 방송 사고를 보고도 세르게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에이먼도 눈은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할 뿐이다.
“……감탄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에이먼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어차피 사단이 날 줄은 알았다. 블리스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걸 본 순간 경박스러운 리포터가 살아서 저 건물을 벗어날 수 없을 걸 예감하긴 했다. 그래서 잭에게 변호 준비를 해달라고 전화를 하려던 참이었던 터라 이 사건이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놀라운 건 블리스가 아닌 진이 그 리포터의 머리통을 날아 찼다는 사실이었다.
“역시 마음에 들어. 어때, 에이먼? 저 녀석 나 주지 않겠어?”
계속해서 진을 달라고 요구하는 세르게이에게 에이먼은 진은 사람이니 스카웃하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고 거절해왔지만 지금은 그 말조차 듣기 귀찮았다.
“……좀 닥쳐주시죠, 세르게이 네브즐린 씨?”
침착한 태도로 찻잔을 내려둔 에이먼이 다시 브라운관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한 방에 나가떨어진 리포터의 앞에 선 진이 자세를 잡으며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내지른다.
『너 한 번만 더 내 앞에 나타나 봐! 당장에 고소할 거야! 테리픽 테리블인지 트래픽 테러인지, 거기 채널도 마찬가지야! 내 얼굴 찍고 싶으면 돈 내! 내 얼굴 비싸! 어딜 내 허락도 없이 얼굴을 찍어!』
미국 시민권자로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상식인 다운 진의 발언에 세르게이가 우아하게 웃으며 박수를 친다.
“성격 있군. 점점 더 마음에 드는 걸?”
어느 때고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세르게이의 속 모르는 발언에 에이먼은 이를 갈 듯 응수한다.
“좀 닥치라니까…….”
『다음에는 이 정도로 안 끝날 줄 알아! 그리고 너 영어나 제대로 배우고 리포터 해! 웬 새대가리들이 이렇게 많아?』
쓰러진 리포터를 발로 툭 차며 말을 마친 진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뒤 다시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태도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다시 휙 하니 카메라를 바라보더니 싱긋 웃어 보인다. 사람들이 모두 인상 좋다고 하는, 유난히 해맑고 밝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진이 카메라맨을 향해 조용히 주먹 쥔 왼손을 들어 올리곤 중지를 펼쳤다. 그리곤 마지막으로 아주 또렷하고 선명해 우아하기까지 한 발음과 음성으로 마지막 인사말을 던진다.
『좆까!』
상쾌한 미소와 함께 마지막 한 방을 날린 진이 휙 돌아서 그의 차로 돌아가 차 문을 여는 모습이 여실히 브라운관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블리스의 뒤로 다가오던 다니카가 신이 나 그 까마귀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온갖 잡음을 멀어지게 하는 그 요란한 웃음소리에 블리스가 인상을 쓰는 장면이 그대로 화면에 잡힌 뒤 그 장면을 보던 세르게이가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걸작이군! 시트콤도 이렇게는 못 나오겠어! 과연 신나게 끔찍한 사고 채널이야.”
세르게이는 이게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신이 나 떠들어댔지만 에이먼은 조금도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진이 저렇게 막 나간다는 건, 진이 지금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 녀석…… 이게 생방인지 모르는 거야.”
알았다면, 저 소심한 성격에 저렇게까지는 못했을 거다. 아니, 어쩌면 했을 수도 있다. 진도 한 번 성질 나오면 앞뒤 안 재는 타입이다.
“이거, 케이블 역사상 길이길이 남겠는걸. 마음에 들어. 보면 볼수록 내 타입이란 말야.”
“세르게이, 당신은 좀 닥쳐.”
어지간하면 흥분하지 않는 에이먼도 이번만은 어쩔 수가 없었던 듯 머리를 싸맸다. 케이블 채널을 맡고 처음으로 했던 생방송 요리 쇼에서 폭탄 머리를 한 리포터의 머리에 불이 붙었을 때보다 더 난감한 상황이었다.
분명히 진은 이게 생방인지 모른 거다. 그러니 적당히 편집할 줄 알고 한 짓이겠지만, 지금 진의 ‘좆까’는 생방송으로 뉴욕 전역에 퍼져버렸다. 그냥 카메라를 향해 한 욕이 아니라, 비록 그 채널이 소규모의 인기 없는 케이블 채널이라 해도 일단 진은 뉴욕 시민들 전체를 상대로 욕을 한 거다.
“미치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에이먼은 머리를 감싸 쥔 채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삐- 소리도 없이 적나라하게 나간 욕과 진의 단아하고 상쾌한 얼굴, 그리고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우아한 말투와 음성이 기가 막히게 언발란스해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간다. 유순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동안에, 상냥하고 밝은 어조. 마치 잘 교육 받고 자란 부유한 귀족가의 도련님 같은 얼굴을 하고 신나게 돌려차기를 하고는 웃으며 ‘좇까’라니.
거기다 그 정신 사납고 막말을 하는 어린 리포터에게 영어나 제대로 배우라는 침착한 충고까지 곁들였다.
너무나 진다웠다. 너무나도 진 케이먼다워 웃음만 나온다. 파파라치도 파파라치지만 저런 저질 케이블 방송의 리포터들도 문제인데 진이 한 방을 제대로 날려줬다.
“난 진이 진짜 마음에 들어. 블리스와도 저렇게 됐으니 내가 데려가면 안 되나?”
“세르게이, 당신, 헛소리 좀 그만해. 진은 우리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마찬가지라는 거지, 일단 가족은 아니잖아.”
“곧 가족도 되겠지. 하여간, 변호사부터 찾아야겠군.”
“그러는 게 좋겠어. 저 리포터가 고소하면 복잡해질 테니.”
그렇게 말하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리포터가 나오는브라운관을 세르게이가 턱으로 가리키자 겨우 웃음을 삼킨 에이먼이 자세를 바로 해 앉으며 정색을 한다.
“그래도 우리가 이겨. 감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드물게도 고압적인 에이먼의 태도에 세르게이가 의자에 기대앉으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거린다.
“흐음, 첫째의 책임감이라는 건가? 내 동생들에게 손을 댔으니 끝장이라는?”
“그런 거지.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난 너처럼 과보호는 안 해.”
“그렇겠지. 동생을 이용한다면 모를까. 동생 준다고 파닉스 사서는 당신이 썼지?”
재빨리 돌려 공격을 하는 에이먼의 태도에 세르게이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다시 공적인 대화로 돌아갔다.
“……그 얘기는 안 들은 걸로 하지. 캐니 워커는 그대로 처리하면 되는 건가?”
“그대로만 해줘.”
“이걸로 너도 나한테 약점 잡힌 거야. 괜찮겠어?”
남한테 지는 거 싫어하고, 기대는 것도 질색이고, 가끔은 인간 혐오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냉랭하고 고지식한 에이먼의 성격을 잘 알기에, 세르게이는 이 거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에이먼의 태도는 확고했다.
“상관없어. 당신이랑은 오래오래 같이 일할 테니까. 그리고, 당신은 날 위해서라면 뭐든 해줄 거잖아?”
그 사이 노트북을 열고 인터넷으로 방금 나온 방송에 대한 반응을 찾는 에이먼이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요염하게 웃는다. 평소에는 더없이 딱딱한 인간이 이럴 때에만 저렇게 교태를 부리는 꼴에 세르게이는 작게 혀를 찼다.
잘못 걸려도 제대로 잘못 걸렸다. 평소에는 여왕님처럼 오만하고 장군처럼 고집 세고 고지식한 녀석이 가끔은 창녀처럼 교태롭고 또 가끔은 정치가들처럼 교활하며 어떨 때엔 변호사들처럼 악독하기까지 하다. 아주 골치 아픈 상대를 만나버렸다. 그게 에이먼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지만, 솔직히 아주 상대하기 버겁다. 그 주제에 또 사람은 싫어한다. 저 지독한 개인주의와 인간혐오증의 저반을 파헤치고 싶어지는 건 아마, 세르게이 타고난 본능 탓이다.
“이럴 때는 진짜 네가 싫어, 에이먼 애클랜드.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이용만 하려드는 거, 최악이잖아.”
“그 고약한 악필부터 고치고 와. 그럼 생각해볼 테니.”
“악필을 고치려면 진이 필요한데, 말야?”
“당신 때문에 블리스와 원수질 수는 없어. 당신이랑은 원수 져도 그 놈하고는 원수 안 져.”
“귀엽던데?”
“평소엔 귀엽지. 웃고 있으면 천사 같고. 그런데 열 받으면 인정사정 없거든. 진도 알고 있어. 그래서 자기가 먼저 사고 친 거야. 진이야 저런 사건 생기면 동정을 받으면 받았지, 비난 받을 이유가 없으니까.”
“눈물겹군. 연인을 위해 법정까지 갈 각오를 하다니…….”
세르게이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기사를 검색하던 에이먼이 다시 세르게이를 바라보며 말을 끊었다 잇는다.
“아마, 그건 아닐걸.”
“그럼?”
“아마 돌려 차는 순간에는 별 생각 없었을 거야. 그냥 열 받으니까 후려친 거지. 쟤도 가끔 나사 풀리면 무섭거든. 평소에 얌전한 만큼 열 받으면 폭발력이 엄청나. 거기다 깐깐하기까지 하지.”
“진짜 매력 있다니까.”
“매력 타령은 그만하고, 내일 나갈 신문 보도 내용이나 뿌려줘. 내가 뿌리는 데엔 한계가 있으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타블로이드에 압력을 줘.”
“어떻게?”
“타이틀은, 『블리스 애클랜드의 연인은 다니카, '형님'이라 부르는 그녀.』”
“……형님?”
“블리스 뒤에 있던 여자, 다니카 메를랜드. 예일대 시절의 동창이고 칼리스타 다이아몬드의 후계자야. 나랑도 데이트했었는데 동기들 사이에서는 ‘형님’이라고 불리지. 팔근육이 엄청나거든. 블리스와 함께 있는 다니카의 뒷모습만 본 누군가 실수로 그런 말을 했다고 해. 그걸로 블리스 게이 설은 마무리해. 그리고 그 뒤는 칼럼리스트들 총동원해서 케이블 방송 이대로 괜찮은가. 리포터의 기본 자질부터 따지고 들어가서 공인이 아닌 일반 시민의 권리까지 침해한 파파라치와 케이블 채널. 다이아나 비의 비극을 일반인들에게까지 전염시킬 셈인가, 라는 식으로 기사를 끌어내고. 전국적으로 사생활 침해의 위험도에 대해 성토하는 기사들을 뿌려. 그리고 뉴욕에서만이라도 유명인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 관렵 법규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프레스를 넣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서 동시에 내일 나갈 기사들까지 전부 창작해낸 에이먼을 보며 세르게이는 혀를 내둘렀다.
“……넌 그런 생각밖에 안 하고 사는 거냐?”
“그렇게 자랐으니까. 캐니 워커는 깨끗하게 처리해. 내 동생들을 건든 녀석이 두 다리 멀쩡하게 거리를 활보하게 두지는 않을 테니까.”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폭군이다. 과연 애클랜드 핏줄은 어딜 가도 바뀌질 않는다. 방금 전 생방송 프로에서 리포터를 향해 걸어오던 블리스를 보곤 보통 물건이 아니라고 여기며 에이먼을 슬쩍 봤었는데 확실히 형제는 형제다. 외모뿐 아니라 그런 점까지 꼭 닮았다. 거기다 이 폭군과 저 성격 나쁜 동생 위에는 이 애송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넌 애클랜드까지 있다. 확실히 저 집 형제들을 건드리는 건 상당히 비생산적인 일이다.
확실히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느긋하게 앉아 다시 화면을 돌아보자 화면에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다니카의 웃음소리에 블리스가 짜증스러운 듯 말을 던지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시끄러워, 까마귀.』
『너, 자꾸 까마귀 까마귀 할래?』
『그럼, 람보라고 불러줘?』
『이게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화면에 잡힌 다니카가 들고 있던 커다란 백을 바닥에 집어던지며 입고 있던 재킷을 벗는다. 순간 드러난 우람한 근육에 세르게이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여자의 근육이 아니었다.
막 수화기를 들던 에이먼 역시 그 장면을 보곤 혀를 찬다.
“저 녀석들, 아직도 생방인 거 모르고 있어.”
진짜 그런 듯했다. 케이블 화면을 통해 그들의 대화가 낱낱이 보여 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 다니카와 블리스는 나름 다정하게 투닥거리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 좀 어떻게 해.』
『내 웃음소리가 어때서?』
다니카가 항의하듯 받아치자 블리스가 상쾌한 웃음을 날린다. 아메리칸 스윗하트라고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달콤한 미소였다.
『다니카.』
『뭐?』
『넌 진짜 근사한 녀석이야.』
그 말과 함께 다니카가 비명을 내질렀다. 한 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한 기분에 세르게이는 의아한 눈으로 에이먼을 돌아보며 물었다.
“저 여자, 드랙퀸인가?”
너 남자랑 데이트했냐, 라는 듯한 그 질문에 에이먼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답한다.
“……순종 여자야. 다니카…… 너까지 이러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내저은 에이먼은 내선번호를 누르고는 잠시 기다렸다. 변호인단을 부르는가 해 에이먼을 바라보던 세르게이는 에이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다시 한 번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렸다.
“Terrific Terrible Trouble 채널 인수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