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오늘은 일찍 퇴근할 거야.”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떡- 하니 앞을 막아선 에반을 보자마자 블리스는 귀찮다는 듯 툭하니 말을 내뱉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해갔다. 멀뚱하니 그의 뒤를 따르던 진은 또 자기만 남겨두고 튀어버린 블리스를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너, 나 좀 보자.”
“……그만 좀 보지. 오늘 하루 동안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냐, 우리? 그러다 정분날라.”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슬쩍 빠져나가려는데 에반이 진의 팔을 확 잡아끈다.
“까불지 말고 들어와.”
“왜 또 나한테만 그래?”
“저 녀석은 말이 안 통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무식한 사람이 최고다. 상식 있고 개념 있는 사람들만 손해 보는 세태를 저주하며
에반의 사무실로 끌려들어간 진은 그의 사무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이건 내 잘못 아냐.”
“너 새대가리냐? 아침에 내가 한 말을 그새 까먹고 억지 쓴다고 오냐 하고 달라붙어?”
“……손 다쳤잖아.”
“오른쪽 손목 기브스한 게 뭐? 그 정도로 안 죽어. 일하는 데도 지장 없고.”
“그렇긴 한데, 워낙에 까다롭잖아. 로이가 옆에 있으면 불편하다고 해서.”
“너 넘어간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뭐가?”
“그 손이 진짜 다친 건지 알게 뭐야?”
오늘 하루 동안 아무 일도 못하고 그 일만 생각하던 에단은 악에 받친 듯 중얼거리다 아차 했지만,
진은 그 말의 의미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기브스까지 했잖아. 브렛이 그냥 기브스를 했겠어? 다쳤으니 했겠지.”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 너 회계학 들었었지?”
“응. 블리스가 수학이 하도 꽝이라 같이 들었었는데?”
“너 CPA(Certified public accountant-공인회계사) 딸 생각 없어?”
“갑자기 웬 CPA?”
“문득 생각난 건데, 실력 썩히기 아깝잖아. 사교 관리도 중요하지만,
너도 그 동안 발 꽤 넓혀뒀고 우선 CPA로 시작해서 MBA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떨까 해서.
경력도 있고 너도 돈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한 채니까.”
에반이 오늘 하루 종일 앉아 내린 결론이 그거였다.
어떻게든 진을 위해 블리스에게서 떼어놓긴 해야겠는데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일단 블리스가 쉽사리 그렇게 두질 않을 것이다. 오늘만 해도 자신이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로이와 진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원래는 매니저인 자신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멋대로 인사를 처리한 블리스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런다고 쪼르르 따라다니는 진도 문제는 있다.
그러니까, 합리적인 이유를 걸어 둘을 떼어놔야 한다.
CPA를 준비하고 따는데 최소 3년에서 5년이고 MBA까지 따면 앞으로 못해도 7년가량은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다.
진은 아직 젊고 경력도 있으니 해볼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블리스도 반대할 수 없을 거다.
“난 별로 그럴 생각은 없는데…….”
“잘 생각해봐. 언제까지 블리스 비서 노릇만 할 건데? 네 일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네 쪽에서 일할 전문가들은 많아. 회계학 성적도 좋았던 걸로 아는데 아깝잖아.
난 애초에 네가 영문과보다는 경제학부 쪽에 더 맞을 것 같았거든. 진지하게 생각해봐.
공부 더 하고, 더 높은 자리를 향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너 정도 재원을 썩히는 것도 아깝고.”
딱 잘라지는 에반의 설명에 진은 조금 기가 죽은 듯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진의 연봉이 팔만 달라였다.
사교 담당 비서라는 게, 의외로 그 조건에 부합할만한 능력과 노하우를 가진 이들이 드문데다 사교계의 거물들을
상대하는 일이라 꽤 고급 전문 직종이라 여겼는데 에반의 눈에는 그게 한심해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선물과 카드를 고르고 기념을 맞추는 섬세한 작업이라 대부분 고학력 중산층 이상 출신의 여성들이 하는 일이니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에널리스트라는 지위를 갖고 하루에만 몇 억 달라의 돈을 이리저리 돌리는 에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들이 우스울 만도 하다.
하지만 진은 나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블리스에게 필요한 인맥을 연결하는 건 결국 자신이었고,
그들과 블리스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게 자신의 일이었던 지라, 정보가 가장 중요한 블리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여겨왔었다. 지금 에반의 말은 그 자부심을 산산이 깨부수는 말이었다. 그게 조금 섭섭했다.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별거 아닌 거야?”
“그런 건 아냐. 네가 하는 일은 진짜 중요해. 하지만 네가 마흔이 돼서도 그 일을 할 거는 아니잖아.
그리고 블리스가 결혼을 하면 그건 부인의 몫이 될 거야. 네가 하는 일 중 절반 이상이 부인의 몫으로 돌아갈 일이라고.
물론, 내조만 하는 부인의 경우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의 어깨가 축 쳐졌다. 그러고 보니 그도 그렇다.
파티 관리나 중요한 손님들의 기념일이나 선물을 챙기는 건 그의 부인이 할 일이었다.
지금은 대신 할 사람이 없어 자신이 챙기는 것뿐이다. 대넌의 사교 관리를 하는 것도 결국 사라였다.
“……알았어. 생각해볼게. 난 거기까진 생각을 안 해봐서…….”
“평생 블리스 뒤치다꺼리만 하다 끝낼 생각이 아니면 너도 네 길 찾아. 지금 상태 좋지.
하지만 블리스가 이 회사에서 계속 일할 건 아니잖아. 부동산 쪽은 블리스가 맡게 될 거야. 클레어는 역부족이야.”
블리스의 형인 애이먼은 현재 결혼 후 언론 쪽의 일을 하고 있었고,
블리스의 바로 아래 동생인 클랜은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는 딱히 사업에는 관심이 없는 듯 작가가 될 생각이라고
한 터라, 부동산 쪽은 클레어가 돕고 있었다. 하지만 대넌이 늘 블리스가 부동산 쪽을 맡아줬으면 하는 눈치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Bliss사도 제법 규모가 있지만, 애클랜드 가 소유의 부동산 컨설팅 회사와는 비교가 되질 않는다.
전국 지사부터 시작해 하루에 오가는 금액만 해도 천문학적이다.
그곳에 가면 블리스에게 따라붙은 전문 비서만 7명가량이다. 더는 자신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그래. 하여간 너 자꾸 블리스에게 놀아나지 마. 그 자식은 재미로 그러는 거야.”
“알아. 그래도 친구인 걸.”
“그래, 그 놈의 친구……. 그게 문제지.”
두 녀석이 동시에 친구타령을 해대는 통에 에반은 이제 ‘친구’라면 신물이 날 정도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에반이 말을 끊은 사이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린 뒤 벌컥 하니 문이 열렸다.
“둘이 무슨 역적모의를 하는 거야? 날 회사에서 내쫓으려고?”
에반의 사무실에 저렇게 예의 없이 들어올 인간은 블리스밖에 없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며 그쪽을 돌아봤다.
그 새를 못 참고 또 쳐들어온 블리스에게, 에반이 툭하니 말을 내쏜다.
“그래. 일은 안 하고 도망 다니는 오너 쫓아내자고 작당하던 중이야.
난 새벽 3시에야 집에 들어가는데 넌 벌써 퇴근한다고?”
원성이 가득 담긴 에반의 말에 블리스가 오른손을 들어 보인다.
“환자잖아.”
“겨우 그 정도 갖고 엄살이야?”
“겨우 그 정도라니. 골절이라고. 진, 가자.”
문 앞에 선 블리스가 먼저 돌아서자 진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며 양복자락을 정리한다.
“알았어. 그럼, 갈게. 에반,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일찍 퇴근해.”
“그래. 내가 말한 거 잘 생각해보고.”
“알았어.”
에반에게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나오자 뚱하니 복도에 선 블리스가 사무실 안쪽을 슬쩍 보더니 진에게 묻는다.
“무슨 얘긴데? 뭘 생각해?”
“별거 아냐.”
“별거 아니면 말해도 되잖아. 뭔데?”
“CPA 따볼 생각 없냐고 해서.”
블리스의 말에 답하던 진은 그제야 가방을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는데
블리스가 왼손에 들고 있던 서류가방을 내밀며 묻는다.
“CPA?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뭐……. 비서 일만 하다 끝낼 수는 없고, 또 나 회계학 좋아했거든.
애널리스트 일 해보는 게 어떠냐고 해서. 너랑 에반이 가르쳐주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서류가방을 받아든 채 블리스의 옆에서 복도를 걷기 시작한 진은 지나가는 직원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해보였다.
블리스 역시 인사를 건네는 사원에게 고개를 까딱해 인사를 하곤 퉁명스럽게 받아친다.
“안 돼. 힘들어. 신경 쓸 일도 많고.”
“왜 안 돼? 너도 하는데.”
“나는 나고, 넌 아냐. 하루에 서너 시간 자고 살아야 돼. 고객 관리도 그렇고, 보통 일이 아냐.”
“그 정도는 나도 해. 못할 거 없어. 그리고 고객관리는 너보다 내가 잘할걸.”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선 채 진이 툭하니 말을 던지자 블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진을 내려다본다.
“뭐야? 진짜 애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어?”
“그건 아니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잖아.”
“미래를 생각한다면 내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아. 너 주식으로 꽤 불렸잖아.”
처음 입사한 뒤 1년 간 모은 돈을 자기에게 맡기라는 그 말에 순순히 삼만 달라를 건네자 블리스는
그 돈을 일 년 만에 열 배로 불려주었다. 그리고 그 돈에 사만 달라를 더해 맡기자 다시 일 간 열 배로 불려줬다.
보통 만 단위는 돈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블리스였지만 자신만은 특별히 맡아 자산 관리를 해준 덕에 지금 자산은 상당하다.
문제는 그게 블리스의 능력이지 자신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그거랑은 다르지. 그건 네 능력이고. 평생 너한테 빌붙어 살 수는 없잖아.”
“나 같은 친구를 둔 것도 능력이야. 너, 인맥이라는 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아직도 몰라?”
“그건 능력이라기보다는 운이지. 그냥, 운이 좋았던 거야.”
“운 같은 건 없어. 블리스 애클랜드가 널 선택한 건 운이 아니라, 네 능력이야.
네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해주지도 않았어.”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으로 먼저 들어서며 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블리스의 말대로였다.
블리스는 고객과 친구 사이를 정확히 구별 짓는 성격이었다. 고객들을 친구처럼 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친구가 되진 않는다. 그가 아는 대학 친구들이나 사적으로 친한 친구들의 경우는
아무리 울며 매달려도 돈을 버린 셈 치고 빌려주기는 할망정, 투자 관리나 자산관리를 해주지는 않는다.
오로지 자신이었기에 블리스가 자산관리까지 해주는 거다.
그건 인정한다. 블리스에게 자신은 진짜 특별한 친구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역시 블리스는 특별하다.
“그런데 벌써 퇴근해도 돼? 너무 이른 거 아냐? 일 없어?”
막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진이 묻자 블리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환자잖아.”
“겨우 손목 부러진 걸로 환자 행세하려고?”
“교통사고라고. 교통사고 후유증이 얼마나 큰데. 특히 나처럼 쉴 시간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특히 더해. 푹 쉬어줘야 돼.”
“급정거가 교통사고면 파리도 새다.”
주차해놓은 차 앞으로 걸어간 진은 락을 풀고 차 뒷문을 열어 가방을 던져 넣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자 조수석에 올라탄 블리스가 그의 가방을 뒷좌석에 던지며 웃는다.
“내 차가 재규어가 아니라 1970년 산 캐딜락이었다면 대형 사고 났어.
제동거리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급정거한 순간 차가 코앞에 있었어.
제로백(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닿는 시간)이 5.3초밖에 안 되는 차를 끌고 막 액셀을 밟는 순간
앞에서 차가 멈췄다고. 조금만 늦었으면 대형사고야.”
“그래, 라이언스경(윌리엄 라이언스-재규어의 전신인 더 스왈로우&카우치 빌딩 컴퍼니의 창시자 겸 디자이너)에게 감사해라.”
이미 시동이 걸린 차의 핸들을 쥐고 부드럽게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린 뒤 기어를 바꾸자 춤을 추듯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실 블리스의 억지를 받아들인 이유 중 하나가 이 재규어 때문이었다.
블리스의 차는 스물여덟 대였는데 그 중 다섯 대가 재규어였고, 블리스가 가장 애용하는 차 역시 재규어였다.
그리고 진은 블리스의 재규어를 아주 좋아했다.
“내가 차를 갖고 가긴 그러니까 너 먼저 집에 내려주고 택시 타고 집에 가야겠다.”
“집에 가게?”
“응. 몇 블락 안 되니까 걸어가도 되겠네. 날도 좋으니 산책이나 해야겠다.”
다른 때보다도 이른 퇴근이라 진은 집에 돌아가 뭘 할까 고민 중이었다.
보통 사무실에서 저녁 식사까지 마친 뒤 8시에서 9시 사이에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면 10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그럼 곧장 세탁물을 맡기고 샤워를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은 저녁 식사도 하지 않은 채 6시 퇴근이라 뭘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우선 맡겨놓은 세탁물을 먼저 찾아다두고, 그 뒤에 가볍게 저녁 식사를 해야 한다.
시간이 많으니 영화라도 보러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망상은 다음 이어진 블리스의 말에 산산이 깨어져버렸다.
“환자 혼자 두고 집에 가겠다고?”
“……뭐라고?”
“말이 그렇잖아. 내 손이 이 모양인데 날 혼자 두고 집에 돌아간다고? 저녁은 어떻게 하라고?”
“배달 시켜.”
“샤워는?”
그 질문에 차를 몰고 막 지상으로 빠져나가던 진은 자기도 모르게 급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나한테 샤워까지 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냐, 너?”
“그럼?”
“오른손이 부러진 거지, 너 병신된 거 아니거든?”
“오른손이 이래서 머리를 어떻게 감아?”
“왼손으로 감으면 되지.”
“찝찝해.”
“참아. 그러게 누가 급정거를 하래? 나도 오늘은 집에 가서 할 일 많아.”
“뭘 할 건데?”
“이것저것.”
“청소하고 세탁물 찾고 텔레비전 보고 앉아 있으려고?”
정확히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지적하자 진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오래된 친구는 좋지 않다. 자신에 대해 너무나 세세히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네가 집에 가봐야 할 일이 집안일밖에 더 있냐는 듯한 그 말투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조금 오기를 부렸다.
“……나갈 거야.”
“어딜?”
“……영화 보러.”
“누구랑?”
“친구랑.”
“친구 누구?”
“친구 누구라면 네가 알아?”
“너한테 내가 모르는 친구가 있어?”
없다. 아마 없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라 칭해지는 이들은 모두 블리스의 친구들이기도 했다.
그와 항상 딱 붙어 다니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사실, 사람들을 사귀기를 꺼려하는 성격이다 보니
블리스를 통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기가 꺼려졌다. 그러니까 블리스는 자신의 방어선이었다.
블리스가 이 사람은 괜찮아, 라고 하면 사귀어도 된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안 돼, 라고 하면 사귀어선 안 된다.
처음으로 블리스의 조언을 무시하고 사귄 게 노먼 맥캐인이라는 녀석이었는데 그 뒤로 후회하고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절대 블리스가 저 녀석은 안 돼, 라고 하면 사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자신의 친구들은 모두 블리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블리스가 모르는 친구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오기가 생겼다. 없어도 있다고 우겨야 할 것 같았다.
“있어. 네가 모르는 친구.”
“누군데?”
“……하여간 있어.”
“노먼 맥캐인?”
갑자기 나온 그 이름이 그렇지 않아도 오늘따라 노먼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던 진은 진짜 놀라
핸들을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먼을 떠올리자 다시 퍼지는 살심과 블리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 자식은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릴 놈이야. 왜 기분 더럽게 걔 얘기를 꺼내?”
“아직 연락하나 해서.”
“연락 오면 당장 너한테 갖다 바칠 테니 걱정 마. 네가 죽여주면 나야 고맙지.”
“……진심이야?”
“진심이지, 그럼.”
“그럼 다행이고.”
노먼에 대한 이야기가 이 이상 나올까 진은 침묵한 채 조용히 차를 운전해갔다.
아직 러시아워에는 들지 않는 시간이라 꽤 수월하게 차가 나갔다.
몇 번 신호에 걸리기는 했지만 얼마 걸리지 않아 블리스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진은 차 문을 열어주는
어턴던트를 보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사이 블리스는 안전벨트를 풀곤 뒷좌석에 있는 가방을 찾아들었다.
어턴던트가 차문을 열자 진은 내일 일정에 대해 물었다.
“그럼, 나 주차해놓고 갈게. 내일 아침 8시 30분까지 오면 되지?”
“그래. 아…….”
막 차에서 내리려던 블리스의 몸이 가볍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차 문을 잡고 기대며 힘겨운 듯 몸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어턴던트가 그를 부축하자 진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블리스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좀 현기증이 나서…….”
“병원 갈까? 머리 다친 거 아냐?”
“그건 아냐. 그냥 좀 현기증이 나서 그래.”
아무리 작은 사고라도 블리스라면 분명 병원에 간 김에 전신 엑스레이를 찍고 MRI검사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블리스 애클랜드가 골절상을 입었는데 병원에서 그냥 내보냈을 리가 없다.
“진짜야? 진짜 괜찮아?”
“응. 나 부축 좀.”
“그래.”
서둘러 뒷좌석에서 가방을 꺼내 든 진은 차 열쇠를 주차 요원에게 맡긴 뒤 블리스의 가방까지 받아들고
그를 부축해 아파트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아파트지 블리스가 사는 아파트는 센트럴파크 남서쪽에 위치한
60층짜리 빌딩으로 한 층이 240평가량이 되는 넓이의 초호화 아파트다.
일반 매매 거래가가 삼천만 달라에 이르는 고급 주택인 만큼 경비와 보안이 엄격했다.
진짜 피곤한 듯 옆에 기대선 블리스를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가 서자 블리스가 카드 키를 하나 꺼내 건넨다.
키를 들어 엘리베이터 버튼 옆의 카드 슬롯을 긁자 멈춰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축 쳐진 블리스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서서 다시 한 번 카드 키를 긁자 자동적으로 58층에 불이 들어온다.
“진짜 괜찮아? 숨소리가 거칠다.”
“가서 쉬면 좀 좋아질 거야.”
말은 그렇게 하는데 블리스답지 않게 얼굴색도 유난히 붉고 몸이 뜨거운 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어깨에 걸친 팔에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블리스는 평생 감기도 모르고 살던 건강체였다.
지금까지 그를 15년이나 알아왔지만 호흡이 이렇게 거칠어지거나 몸에 열이 나는 일은 우동 후가 아니면
거의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아니 대학 시절에는 몇 번 있긴 했지만, 그때도 거의 하룻밤 앓고 가볍게 넘어간 정도였다.
“너, 열나는 것 같아. 몸이 뜨거워. 감기 걸린 거 아냐?”
진이 걱정이 되는 듯 그의 이마를 짚어주며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이젠 아예 진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린다.
“그런가 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했는데 지금 블리스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높고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 갑작스러운 변화에 진은 진심으로 블리스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야, 너 진짜 이상해. 왜 이렇게 숨소리가 거칠어?”
그 사이 어느새 58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워낙에 보안이 철저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문과 현관문이 아예 이어진 터라 블리스를 부축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은 그대로 문을 밀어 열고 들어가 보안 장치를 끄고 그를 응접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물 가져올게.”
유럽풍으로 시원하게 꾸민 하얀 응접실 안의 소파에 블리스를 앉혀둔 진은 가방을 먼저 내려두고 서둘러 주방을 향해갔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생수 병을 꺼내들고 막 응접실로 달려오는데 블리스가 보이지 않았다.
“블리스?”
이상하게 고요한 응접실을 돌아봤지만 그 안에는 블리스가 없었다.
침실로 간 건가 해 그쪽으로도 가봤지만 역시나 침실 역시 텅 빈 채였다.
“야, 어디 있어?”
말이 240평이지 이 안을 뒤지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어차피 몸도 좋지 않은데 멀리까지 가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서재나 다른 방들을 확인하기 위해
막 침실을 나서려는데 침실과 연결된 욕실 쪽에서 샤워 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반투명으로 바뀌는 욕실 문 너머로 우뚝 선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색감을 보니 아무래도 양복을 입은 채 달려 들어간 모양이었다.
“블리스, 열나는데 목욕하면 안 돼!”
하지만 저 불투명 유리 안쪽에서는 아무런 답도 들리지 않았다.
진짜 어디가 심하게 아픈 건가 해 진은 우선 양복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푼 채 구두까지 벗어
만반의 준비를 한 채 욕실 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는 안을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블리스, 그러다 진짜 큰일 나.”
예상대로 블리스는 양복을 입은 채 샤워기 앞에 서 있었다.
위에서뿐 아니라 샤워 바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에 블리스는 이미 흠뻑 젖은 채였다.
블리스의 나쁜 버릇 중 하나가 아주 가끔씩이지만 몇 만 달라에 달하는 고급 양복을 입고 몸에 열이 나면
그대로 샤워기로 돌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대학 졸업 후에 없어졌다 했는데 아직도 못 고친 모양이다.
그것도 꼭 찬 물 속으로 뛰어들어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너, 감기 든다니까.”
옷이 젖은 건 질색이기에 조심조심 안을 살피며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가 그제야 이쪽을 돌아본다.
물줄기 아래에 선 그는 지독하리만치 섹시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진은 화보 같은 광경에 매혹당하기보다
그가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블리스, 어서 나와.”
“……몸이 뜨거워.”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쏟아졌다. 목이 잠긴 듯, 그리고 피로에 절은 듯한 음성이지만 동시에 열기가 느껴지는
음성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픈 건가 싶기도 하고, 또 아픈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기도 해 진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나와. 너 지금 몸이 안 좋은 거야. 기브스까지 하고 그게 뭐야?”
샤워 룸 한쪽에 비치된 바스 가운을 들고 진이 블리스에게 다가가며 그렇게 말을 걸었지만
블리스는 샤워기를 끌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어차피 샤워는 해야 하는 거고,
또 이미 젖은 채인지라 진은 바스 가운을 다시 걸어두고 샤워기 옆으로 다가갔다.
순간 얼음물처럼 내리꽂히는 찬물의 한기에 몸을 떨며 진은 서둘러 센서 버튼을 눌러 온수로 바꿨다.
진은 한여름에도 반드시 온수로 샤워를 하는 타입이었다. 찬물은 질색이다.
“옷부터 벗어. 그리고 씻은 뒤에 식사하자. 왜 그래? 애들처럼.”
열이 난다고 무작정 찬물 속으로 뛰어드는 게 너무 아이 같은 발상이라 진은 물에 젖은 블리스의
양복 재킷을 벗겨주려 손을 뻗었다. 아마 오른손의 기브스 때문에 옷을 벗기 번거로워 또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오른손을 못 써서라기보다 기브스에 소매부분이 걸려 잘 벗겨지지 않은 듯했다.
“팔 들어. 벗겨줄게.”
진은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지만 서서히 온수의 온기가 차 습도로 울리기 시작한 욕실 안에서
그 말이 상당히 묘한 의미로 들린 듯 블리스가 웃으며 농담을 한다.
“너, 욕실에서 그런 말 하면 얼마나 섹시한 줄 알아?”
“섹시 같은 소리 하네. 너랑 나랑 그럴 섹시 찾을 사이냐? 물 좀 꺼. 벗기기 힘들다.”
“……너, 이렇게 근사한 남자를 욕실에서 보고도 아무 생각도 안 들어? 달려들고 싶다거나 안기고 싶다거나?”
“네 입으로 근사하다는 말 하지 마. 넌 수치도 모르냐?”
블리스의 양복 재킷을 먼저 벗긴 뒤 한 팔에 건 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블리스의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 손길을 바라보며 블리스는 젖은 금발을 뒤러 쓸어 넘겼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뱉는다.
젖은 넥타이를 다 푼 진은 “실크라 다신 못 쓰겠다.”라고 중얼거리며 이번엔 블리스의 셔츠자락을 풀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 손길에 블리스는 조바심이 나는 듯 한 걸음 앞으로 가
진을 샤워룸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자 진이 인상을 쓰며 뒷걸음질치다 고개를 든다.
“뭐야?”
진의 검은 머리카락이 습기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진도 물을 맞아 온몸이 젖은 채였다.
물에 흠뻑 젖은 그 모습에 블리스는 아찔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진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그리고는 조금 들뜬 음성으로 진에게 묻는다.
“나, 남자들한테도 꽤 어필하는 스타일인 줄 알았는데? 날 보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
갑작스레 뺨을 감싸 쥔 블리스의 손길에 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태연하게 대꾸해주었다.
“좋은 친구지. 근사하고 다정하고. 넌 멋있어. 누구나 널 사랑할 거야. 그건 장담해.”
“너는?”
“나도 널 사랑하지, 당연히. 뒤로 돌아봐. 셔츠 벗어야지.”
귀찮다는 듯 무성의하게 답하며 블리스를 재촉하는 진의 말투에 블리스는 돌아서지 않고 진지한 눈으로 진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한 걸음 더 다가선다. 그에게 밀려 얼결에 벽에 등을 대고 선 진은 이건 또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보다 순간 열에 들뜬 듯 뜨겁고 강렬한 시선에 숨을 멈췄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못되었다.
알 듯 말 듯 묘한 상황에 진은 일부러 그 눈빛을 외면하고 돌아서려했다.
하지만 이번엔 블리스의 두 팔이 진이 기대고 서 있던 벽을 짚고 가로막는다.
“날 사랑한다면 증명해봐.”
무거운 음성이었다. 언제나의 그답지 않은 어조와 이상한 대사.
욕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서서히 선명하게 그려지려하자 진은 재빨리 웃으며 블리스를 바라봤다.
“널 사랑하면 이 아파트에서 떨어지라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네 대신 엘레나의 총을 맞아달라거나?”
억지로 웃으며 농담을 건넸지만 블리스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언제나 파란 하늘처럼 맑게 빛나던 눈동자가 무거운 바다 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진은 그런 눈이 싫었다. 가볍고 유쾌하고 즐거운 친구,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가끔은 형 같고,
또 가끔은 귀여운 동생 같은 친구. 그게 블리스 애클랜드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그는 자신이
아는 블리스가 아니다.
“샤워하고 나와. 식사 준비해줄게. 머리 감을 수 있어?”
“…….”
“나 먼저 나갈게. 양복은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넥타이는 버려야겠다. 그러게 왜 비싼 옷을 입고 이런 짓을 해?”
진이 다시 시선을 돌리며 돌아서려하자 블리스의 손이 진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손의 움직임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기에 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불과 10분 전 만해도 즐거운 하루였다. 에반에게 욕 좀 먹고 타조 머리가 사고를 쳐 상황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타블로이드판 날조 기사 따위야 늘 있었던 일이고, 기면 기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딱히 문제될 게 없는 하루였다. 블리스가 조금 다쳤고 또 아주 조금 복잡한 인수인계 문제가 있다는 것 외엔
아주 좋았다.
하지만 지금 순간은 태어나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블리스, 너 왜 이래?”
진이 조금 놀란 듯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묻자 이번엔 블리스가 싱긋 웃는다. 억지로 웃는 얼굴이었다.
눈가와 입매가 잔뜩 굳어 있다.
“……내가 원하면 뭐든 해줄 수 있어?”
“같이 죽자는 거 빼곤 다 해줄 수 있어.”
사실은 같이 죽자고 해도 죽어줄 의향이 있었다. 블리스의 부탁이라면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일부러 농담처럼 그렇게 말을 자르자 블리스가 강제로 턱을 들어올린다.
다시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진은 몸을 흠칫 떨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뜨겁고 애절해 두려울 정도였다.
방금 전부터 시끄럽던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진짜 위험한 상황이었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댄다.
여기서 더는 안 된다. 이 이상 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도망쳐야 한다. 서둘러 이 안에서 저 밖으로 도망쳐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는 달리 몸은 잘 움직이질 않았다.
사방에서 거세게 쏘아대는 물줄기에 금세 욕실 안은 뿌옇게 흐려졌다.
전신 저울도 샤워룸 안의 불투명한 유리문도 전부 뿌옇게 흐려진 채였다.
“만약에…… 만약에 내가 널 안고 싶다면 내게 안겨줄 수 있어?”
쿵하며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전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었기에,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읽힌 듯 수치스럽고 당혹스러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금 이 말이 진담일 가능성은 단 0%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장난이고, 농담일 것이다.
아주 가끔, 진짜 아주 가끔씩 블리스는 이런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그의 그런 태도에 자신이 놀라 심각하게 반응하면 블리스는 곧 웃으며 얼굴을 풀고 그걸 믿었냐는 듯 놀려댄다.
그러니까 넘어가면 안 된다. 언제나와 같은 질 나쁜 장난이다.
다시 한 번 기억을 되새기며 진은 자신을 달래도 또 달랬다. 넘어가면 자신만 손해다. 자신만 상처 받는다. 늘 그랬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진은 정면으로 블리스의 눈을 바라보며 드물게도 진지한 투로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블리스, 네가 원하면 난 너랑 잘 수 있어. 하지만 넌 안 그럴 거야. 사라와 넌 내겐 유일한 가족이니까.”
딱 잘라지는 그 말에 블리스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을 가로 막고 있던 팔이 툭하니 떨어지자 진은 재빨리 젖은 블리스의 옷을 들고 샤워룸을 나가
욕실문 앞에 놓인 바스켓에 블리스의 옷을 집어던졌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요란하다. 너무 요란해서 귀청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심장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다시 혼자 남은 샤워룸에서 블리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접근하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이 초조해 밀어붙인 게 화근이다.
“멍청하긴…….”
진이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고 있다. 아닌 척하지만 진의 마음 속에는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버림받을까, 또 다시 언제 혼자 남겨질까, 늘 그런 생각을 하고 두려워하며 사람들을 배척하고 있었다.
깔끔하고 영리하고 성격 좋고, 세심하며 섬세하고 다정해 보이지만 진은 기본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게 서툴고,
남에게 어리광도 부릴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선물 하나를 건네도 그 선물에 대한 대가를 어떻게 치를까 전전긍긍하며,
기분 나쁜 기색만 보여도 그가 잘못한 게 아닐까, 뭔가 실수를 해 상대의 심기를 거스른 게 아닐까
가슴 졸이며 애를 태우는 녀석이다. 그런 녀석에게 갑자기 다가서면 무서워 도망칠 게 뻔했다.
그래서 천천히 시작해볼 생각이었다. 아주 천천히, 확신이 생겼을 때 물처럼, 공기처럼 스며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초조해진다.
10년이었다. 딱 10년이라고 자신에게 유예기간을 주었다.
만약 이 감정이 10년 뒤에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확신을 갖고 대쉬하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었다.
만약 진짜 10년 동안 자신이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게 영원할 테니,
그때는 진심으로 그에게 다가서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다시 상처주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변덕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기에,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와 진에게 한 맹세였다.
그러니까 그건 막 대학에 입학했던 첫 해의 일이었다.
「노먼 저 자식 좀 누가 내쫓아줘!」
샤워를 마친 진이 짧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투덜거리며 방으로 걸어들어왔다.
유난히 높고 화가 난 듯한 진의 태도에 옆을 돌아보자 진이 온몸이 새빨개진 채 화를 내고 있었다.
옷도 조금 젖은 채였다. 샤워를 한다고 가서는 젖은 채로 나온 그 꼴에 심장이 떨려 모른 척 책으로 시선을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
「왜 또?」
「샤워 중에 쳐들어와서 장난을 치잖아. 갑자기 온수를 최고로 트는 바람에 화상 입을 뻔했어.」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기숙사에는 또라이 둘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노먼 맥캐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진 케이먼이었다. 두 번째 또라이는 무시무시한 수학능력을 자랑하며 영문과에 있던 탓에
또라이보다는 괴짜로 알려져 있었지만, 첫 번째 또라이는 케이블 방송의 유명 프로 ‘Loosers(머저리들)’에나
나올 법한 또라이 중의 또라이라 모든 이들로부터 경외시 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 또라이가 아무래도 진에게 관심이 지대한 듯했다.
기숙사 입소 첫날 있었던 알파베타감마 클럽의 신고식 때 기숙사에 불을 낼 뻔하다 술독에 빠져-
진짜 커다란 술통에 녀석을 집어넣고 술을 들이부었다.- 죽을 뻔했던 녀석을 진이 살려놓자,
그 뒤로 노먼은 진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간섭을 하고 챙겨주고,
또 가끔씩 욕실에까지 쳐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다. 진은 그게 단지 괴롭힘이라고 여기는 듯했지만,
자신이 보기엔 아니었다. 그건 또 다른 관심의 표명이었다.
또라이 중의 상 또라이지만 거대 로우펌 Jack&Clide의 파트너인 잭 맥캐인의 아들이자 지방 판사와 검사보만
일곱 명을 배출한 법조계의 명문가 맥캐인 가의 장남인 까닭에 그를 이 기숙사에서 쫓아낼 사람은 없었다.
또라이 클럽이라 불리지만 알파베타감마 기숙사는 기본적으로 정재계뿐 아니라 법률과 언론,
방송계의 거물들의 아들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클럽이었다.
진이 처음 이 기숙사로 들어올 때는 자신이 하인까지 데리고 입소한다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모두들 나름 진의 실력과 장래를 유망하게 보고 자신의 장래 보좌로 보고 친절하게 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노먼 맥캐인이었다.
「무시해. 네가 상대해주니 더 난리잖아.」
책을 슬쩍 내리고 옷장을 열고 옷을 꺼내는 진의 다리를 힐끔 훔쳐봤다.
탄력있고 긴 다리가 쭉 뻗은 채 아른거리자 또 다시 숨이 가빠왔다.
처음에는 기숙사에서 둘만 살면 좋겠다 싶어 들어왔지만 하루하루가 고문이었다.
차마 건들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보고만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특히나 저렇게 무방비하게 옷을 벗고 설칠 때는 차라리 다 포기하고 일을 저질러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 바라보다가는 진짜 사고를 칠 것 같아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자꾸만 진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언젠가 날 잡아서 한 번 죽여놓을 거야. 장난도 한두 번이라야 참지.」
「원래 그런 녀석이잖아.」
「원래 그런 녀석이면 내가 안 이러지. 그 녀석이 쓴 소설을 보고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데.
그거 그 자식이 쓴 거 맞기나 해? 어디서 사온 거 아냐?」
진이 노먼 맥캐인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이유는 알고 있다.
영문학 수업 중에 그가 제출한 단편 소설 때문이었다. 처음 그 소설을 낸 게 노먼 맥캐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던
진은 외로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흐르는 듯 부드럽고 은유적인 문장들이 최고라며,
이런 녀석이 같은 학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며 몸부림을 쳤었다.
하지만 곧 그 소설을 낸 학생이 노먼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그 소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는 곧 다시 찾아가 소설을 다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노먼과 진의 사이에는 통하는 게 있었다.
그렇게나 사람을 싫어하는 진이 저렇게 끈덕지게 달라붙어 괴롭히는 노먼을 차마 내치지도 못하고 받아줄 정도로, 말이다.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은 아니라고 하지만 분명 노먼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게 우정인지 존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진의 감정은 어떤지, 혹은 노먼이 그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툭하니 미끼를 던졌다.
「그 자식이 널 사랑하나 보지.」
젖은 옷을 벗어두고 청바지와 흰 티셔츠로 갈아입은 진이 그 말에 대경실색한 얼굴로 받아친다.
「돌았냐? 무슨 사랑이 그 따위야?」
「그러지 않고는 너무 끈질기잖아.」
「아서라. 그런 사랑 줘도 하나도 안 고마워. 그딴 장난에 휘둘릴까 봐?」
「장난이 아니라 진심이면?」
「지나가던 개나 주라고 그래. 난 연애는 안 할 거야.」
뜻밖의 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두고 진을 바라보자 진이 그의 책상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이쪽을 바라본다.
언제나와 같은 태연한 얼굴이지만 그 표정 안에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진심으로 연애를 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기쁜 반면, 또 불안해졌다. 아무와도 연애를 안 한다니 건들지도 못하고 버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자신에게는 횡재인 셈이지만, 그렇다는 건 자신과도 연애는 안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고 돌진해버린다 해도
진은 받아줄 의향이 없다는 뜻이다.
혹시 진짜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연애를 안 하다니? 왜?」
「그냥 적당한 나이 되고 자리 잡히면 에반의 어머님이 소개해주시는 한국 여자랑 결혼할 거야.
연애는 안 해. 연애 같은 거 하면 헤어지잖아.」
무슨 순결 선언도 아니고, 조신한 귀족가문의 아가씨 같은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이 터졌다.
대체 몇 세기에 살고 있는 거냐, 이 녀석은?
「너, 결혼해도 이혼이 성립한다는 걸 모르냐?」
「그래도 싫어. 종신계약 아니면 난 안 해.」
「어이, 잠깐. 연애가 무슨 보험이냐? 너, 연애를 무슨 생명보험으로 생각하는 거야?」
「나한테는 비슷해. 헤어질 거면 연애도 사랑도 안 해. 사랑하다 버림 받으면 어떻게 살아?」
「그건 무슨 헛소리야? 사람이 만나다 헤어질 수도 있지. 연인과 이별한다고 죽는 사람은 없어.」
어쩐지 그 동안 여자 친구 하나 없이 잘 버틴다 했더니-덕분에 진이 게이라는 소문이 고교시절 내내 따라다녔지만-
그런 이유였다니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연인에게 버림 받았다고 죽었다는 사람은 지금까지 못 봤다.
아니, 적어도 자신은 들어보지 못했다. 언젠가, 혹시라도 자신이 그에게 고백할 때를 대비해 베이스를 깔기 시작하자
진이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팔짱을 끼고 앉으며 말한다.
「넌 버림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몰라. 버림 받지 않고 버리기만 하던 사람은, 그 기분이 어떤 건지 몰라.」
「진, 너…….」
「하여간 그래. 버림 받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돼. 내가 나쁜 아이라서 그런가, 내가 잘못해서 그런가,
내가 뭘 잘못 했을까,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인가.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
이제 그런 생각하기 싫어. 지금까지 지겹도록 해왔어. 떠나는 사람 등 쳐다보고 있는 것도 싫고,
나 싫다고 버린 사람 생각하며 죄책감에 몸부림치는 것도 싫어. 한 번 더 버림 받으면 난 진짜 죽을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
5년을 진과 친구처럼 가족처럼 살아왔지만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단 한 번도 그늘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던 진이다. 늘 웃으며, 파양당한 아이 특유의 비굴함이나 어색함을 보이지 않아
가족들 모두 그의 낙천적인 성품을 칭찬하고 좋아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있긴 했었다. 상대가 과한 호의를 보이면 반드시 그에 대한 인사를 하고 어떻게 답례를 할까
늘 고민하며, 그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들은 철저하게 배척했다.
그게 단지 진이 워낙에 원리원칙에 강하고 보수적인 성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거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공부를 하고 학교 생활 중에서도 흠 잡힐 것 하나 없이
완벽한 모범생이었던 이유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틈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오기와 조금이라도 실망을 시키면 누군가 그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이었던 거다.
「한국 속담 중에 참을 인(忍)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어. 세 번은 참을 수 있다는 말이야.
그리고 보통 사람도 세 번이상은 안 건들지. 두 번, 세 번까지는 건드려도 네 번째는 포기하니까 세 번만 참으면
어지간한 고난은 지나간다는 뜻이야. 나도 세 번을 참았어. 세 번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 하지만 네 번째는 아냐.
네 번째는 못 겨딜 거야.」
「……그래서 연애를 안 한다고?」
슬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던 진은 그 질문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그런 거지. 그럴 시간이 없기도 하고. 블리스, 넌 다 가지고 있으니까 모르겠지만…….
난 네가 갖고 태어난 모든 걸 내 스스로 얻어야 돼. 애초에 없는 가족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성취하고 얻어내야 돼. 돈도 직장도 가정도 모두 마찬가지야.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에 나무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막막하고 기가 차는 일인지 넌 몰라.
너는 리무진을 타고 라스베가스를 달리겠지만, 난 맨발로 물길을 뚫어 나무를 심고 황무지를 일궈야 돼.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연애 같은 거 할 여유가 없어. 넌 달릴 때 난 걸어가야 돼.
감정의 소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그리고 난…… 아마 사랑을 하면 그걸로 끝일 거야.
딱 한 번만 할 거야. 내가 날 알아. 난 두 번 사랑은 못해. 무서워서. 그러니까 내 인생의 사랑은 한 번뿐이어야 돼.
종신보험밖에 없어.」
「네가 그런 생각하고 있는 줄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난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네가 될 수 없어.
그리고 너도 내가 될 수 없어. 그런데 어떻게 네가 날 알겠어? 나도 아직 널 모르겠는데.」
진의 말대로 자신은 그를 모른다. 하지만 분명 진도 자신을 잘 모른다. 자신이 그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지금 그 말로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자신과 그 사이에 있는 벽을 두껍게 쌓고
그 벽을 절대 넘어설 수 없다는 선언을 하는 순간,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을 따라 달려오겠다는 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단 한 번의 영원한 사랑을 원한다는 진을 위해 모든 감정들을 꾹꾹 노르고 참아야 했다.
섣부른 혈기로, 순간적인 충동으로 진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어설픈 감정으로 시작했다가는 진도 자신도 끝장이었다.
그래서 10년을 자신에게 주었다. 10년 간 만약, 10년 뒤에도 자신의 감정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도 여전히 진을 사랑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는 사정없이 들이받겠다고.
그때까지 자신의 감정이 유효하다면 그건 영원한 것이니, 그때는 제대로 고백을 하고 그를 자신의 리무진에 태워가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그리고 사흘 전 정확히 그 날로부터 10년이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확신과는 별개로 진은 여전히 자신을 친구로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초조했다. 15년 간이나 자신의 옆에서 묵묵히 친구의 자리를 지키며 바라보던 진을 설득하는 게 가장
큰 문제라는 사실을 이제야 인식한 것이다.
인정한다. 자신은 진을 지나치게 만만하게 생각했었다.
열정적으로 대쉬하고 다가서면 진의 성격에 곧 자신에게 넘어올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진의 가슴 속 깊이 박힌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을 치구로서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큰 난관은 사회적 지위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자신의 미래도 아니었다.
진짜 가장 큰 문제는 진 케이먼의 마음을 여는 일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블리스는 축 쳐진 채 샤워를 마치고 나와 드레스룸으로 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리 진이라도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을 것이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멀쩡한 팔에 기브스까지 하곤 조급함에 시작하자마자 일을 망쳐버렸다.
처음 병원으로 쳐들어가 멀쩡한 팔을 기브스해달라고 했을 때 브렛이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거의 “너 미쳤냐?”라는 얼굴을 하는 그에게 좀 쉬어야겠다며 사정을 설명하고 겨우 겨우 오른손에 석고를 바를 수 있었다.
일주일 후에는 반드시 떼겠다는 약속을 한 뒤 진을 부르고 겨우 집에까지 끌고 왔는데, 그걸 참지 못해 일을 그르쳤다.
애초에 부축을 해달라고 한 게 화근이었다. 쉽사리 집까지 따라오지 않을 것 같아 머리를 쓴 건 좋은데,
진이 가까이 다가서면 흥분한다는 사실을 계산에 넣지 못했다. 그동안 이골이 날대로 나 이젠 괜찮다 여겼지만,
진의 피부가 닿고, 그의 체취가 느껴지자 미칠 것 같았다.
어떤 남자가 10년이나 참고 참으며 지켜만 보던 상대가 바로 눈앞에서 무방비한 채로 있는데 참을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진도 그 점만은 인정해줘야 한다. 평생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을 것 같은 그 녀석은 모르겠지만,
그와 한 방을 쓰고 나란히 붙어 다니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그리고 그걸 이겨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꼭 알아야 한다. 거기다 스스로에게 맹세한 대로 10년이나 참았으니,
그 점도 인정해줘야 한다.
물론, 진과 연인 관계가 된 후의 일이지만.
“어떻게 냉장고가 텅텅 비었냐?”
한숨을 내쉬며 응접실로 가는데 주방에서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놀라 주방 쪽을 들여다보자 냉장고를 뒤지던 진이 툴툴거리며 계란과 베이컨을 꺼내든다.
그새 샤워를 했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채였다. 그리고 옷도 이 아파트에 가져다놓은 편안한 차림이었다.
“너, 뭘 먹고 사는 거야? 아무리 집에서 아침만 먹는다고 해도 심하잖아. 메이드는?”
분명히 돌아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이 멀쩡한 얼굴로 요리를 하고 있자 블리스는 어안이 벙벙한 듯 멍하니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막 프라이팬을 꺼내던 진이 이상하다는 듯 블리스를 쳐다본다.
“귀신 봤어? 얼굴이 왜 그래?”
“아니……. 그냥 주문하지?”
“오래 걸리잖아. 가볍게 먹자. 약은?”
진이 블리스의 오른쪽 손목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블리스는 대강 “뭐, 약은 안 좋으니까.”라고 얼버무렸다.
멀쩡한 팔에 기브스를 하고 진통제까지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부러진 거면 고통이 상당할 텐데, 괜찮아? 진통제나 소염제 처방 안 해줬어?”
“주사 맞았어. 커피는 내가 내릴게.”
서둘러 말을 돌린 블리스는 넓은 아일랜드식 주방의 한쪽 구석으로 가 커피 메이커 앞에 섰다.
그리고 커피 메이커가 있는 위쪽 선반을 뒤져 일회분이 포장이 돼있는 원두커피를 찾아 들었다.
어설픈 동작으로 물을 받고 커피를 넣다, 블리스는 어떻게든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아, 존 에스터가 굉장히 좋아하던데. 뭘 보낸 거야?”
“그냥 화분.”
“화분을 좋아하던가? 원예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냥. 그런데 왜?”
“존이 날 별로 안 좋아하잖아. 그런데 오늘 그 까다로운 존이 주말에 사냥을 하러 가자고 하더라고.
퇴원하는 대로 자기 별장으로 초대하겠다고. 너도 데리고 오라던데.”
이제 블리스가 보내는 선물과 카드는 블리스가 아니라 진이 처리한다는 건 사교계 내의 모든 이들이 아는 비밀이 되어버렸다.
서덜랜드 회장도 그렇지만 존 에스터라는 거물까지 대놓고 그렇게 나오자 블리스도 더는 속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어차피 블리스는 그들을 형식적이나마 챙겨주는 것뿐이고, 그들 역시 블리스가 보내는 선물에 관심이 있는 것이니까.
사실 그런 것들을 못마땅해 하던 거물들-특히 존 에스터-도 종종 있었지만,
그들도 이젠 블리스의 아래에 그 정도의 능력이 있는 부하 직원이 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는 듯했다.
“대체 뭐라고 한 거야? 존 에스터가 친절하게 주말 초대까지 하고 말야.”
“그냥, 시를 보내줬지.”
“뭐라고?”
“Nine hundred and ninety-nine can`t bide the shame or mocking or laughter.
Nut the thousandth man will stand by your side. To the gallows-foot- and after.”
진이 읊어준 시의 한 구절에 블리스는 커피 메이커의 버튼을 누르곤 팔짱을 끼며 돌아섰다.
“키플링?”
“응.”
“그거 너무한 아부 아냐?”
“아부?”
“그래. 내가 평생 당신 편이 되어주겠소, 이런 거 아니냐고? 존이 아부에 약한 줄은 몰랐는데?”
순간 베이컨을 굽고 막 계란을 깨넣으려던 진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네 얘기 하냐.”
“그럼?”
“지금 에스터 그룹 동반 창시자인 그렉 위블리의 철강 산업 부실 경영 문제로 난리잖아.
대주주인 존은 입장 상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워낙에 친한 친구이고,
또 에스터 그룹을 같이 일군 사람이라 난감해하고 있는 상황이잖아. 그것 때문에 쓰러진 것 같길래, 시를 보내준 거야.”
그제야 알겠다는 듯 블리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렉을 버리지 말라는 뜻이야?”
“그건 그 사람이 판단할 몫이지. 하단에 간단하게 썼거든.
당신의 인생 끝에 무엇이 가장 큰 재산으로 남았는지 묻는다면 뭐라고 할 거냐고.”
“그건 너무 건방진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죽는 최후의 순간 떠오르는 게 뭘까 생각해보니 너밖에 없더라고.
그리고 그게 내 인생 최대의 축복이자 최대의 자산이니까. 돈이나 명예를 죽어서 갖고 갈 건 아니잖아.”
진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말이었지만, 지금 블리스에겐 그 말이 곱게 들리질 않았다.
방금 전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가고도 너무나 멀쩡하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친구 운운하는 진이 어쩐지
야속하고 또 뭔가 알아채고 미리 방어막을 치려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너 뭘 알고 이러는 거야?”
“뭐가?”
“내가…….”
“네가 뭐?”
“……내가…….”
“엘레나랑 자주 만나더니 너까지 문맹이 됐냐? 왜 말을 더듬어?”
접시 두 개를 꺼내 반숙으로 익힌 계란과 베이컨을 담고 튕겨져 나온 토스트 두 개씩을 담은 진은
옆에 있던 트레이 위에 접시 두 개를 내려두고 냉장고를 열어 그 안에 있던 개별 포장이 된 치즈와 버터를 꺼내 올렸다.
“커피는?”
진의 물음에 뒤에 있던 커피 메이커를 돌아본 블리스는 딱 두 잔 분량 정도가 내려진 포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됐어.”
“잔 꺼내줄게.”
수납장을 뒤지던 진은 하얀색의 평범한 머그 잔 두 개를 꺼냈다. 하지만 그걸 본 블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응접실에 있는 잔을 써.”
“어, 그건 아니잖아.”
“상관없어.”
블리스는 짤막하게 그렇게 답한 뒤 포트만 들어 트레이 위에 올린 뒤 트레이를 밀고 주방을 빠져나갔다.
진은 멀뚱한 얼굴로 그런 블리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거’라 함은 애클랜드가에서 특별 제작한 식기 중 하나로,
독일의 명인이 블리스를 위해 제작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부부 찻잔 세트였다.
셀레브리티들이라면 응당 에르메스, 라리끄, 로얄코펜하겐을 쓸 거라 여기지만 진짜 셀레브리티들은 브랜드가
아닌 개인에게 테이블 웨어를 주문한다.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명인의 손으로 만든,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테이블웨어를 원하는 거다.
로얄코펜하겐 급은 파티에나 가볍게 내놓는 제품들이다.
블리스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가구를 비롯한 가방과 식기들, 그리고 옷과 향수까지-
오로지 그 한 사람만을 위해 최고의 명인들이 만들어낸 이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들이었다.
갑부들은 향수조차 명품이라 불리는 것들이 아닌 프랑스의 향수 업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만든다는 걸
열여덟 살 때 처음 알았다. 블리스 역시 사각형의 긴 병에 ‘Bliss Bless kiss’라는 이름이 새겨진 향수를 사용한다.
물론, 그 향수는 이 세상에 오로지 그 한 병뿐이고, 블리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오일과 샤워코롱 역시 수작업으로 제작된 천연제품만 사용한다.
보통은 명인이 제작한 수공예품이라도 고유넘버를 적기 마련인데, 블리스가 쓰는 것들은 모두 그 아래 명인의 이름과
함께 블리스의 이름만 적혀 있을 뿐, 다른 식별 코드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나 그 부부 찻잔은 찻잔 아래 백금으로 블리스의 이름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탐낼 정도로 가치가 있는 상품이었다. 블리스의 말로는 그 장인이 만든 마지막이자 최고라 칭해지는
찻잔이었던 탓에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라고 한다.
경매에 내놓으면 백 만 달라 이상은 너끈히 받을 거라 자신의 앞에서 자랑을 하며 유난히 아껴 늘 응접실의 장식장 안에만
놓아두던 그 찻잔을 쓴다니, 이상하다기보다 충격적이었다.
혹시나 설마 하는 것들이 자꾸만 가슴 속에서 요동을 친다. 블리스의 태도가 너무 이상하다.
그가 하는 행동들, 그리고 말투 모든 것들이 이상하다. 다른 건 따지지 않더라도 당장에 그가 트레이를 끌고
간 것부터가 충분히 이상하다 칭할만하다. 물건을 떨어트려도 절대 스스로 먼저 줍는 법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고 자랐다. 처음 블리스를 만나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과 타인에게 하는 행동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경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저택 안에 있는 가정교사 중 자세를 교정해주는
이들의 교육 방법을 듣고는 기절할 뻔한 기억도 난다.
인사를 해도 절대 허리를 숙이지 않고 고개만 15도 정도로 숙일 것,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절대 시선을 피하지 말 것,
의자에 앉을 때에도 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등을 편 채 목을 곧게 세울 것.
시선을 움직일 때 역시 목이 아닌 눈동자로 부드럽게 움직일 것. 절대 먼저 상대에게 악수를 청하지 말 것.
물건을 떨어트려도 먼저 줍지 말고 상대가 주어주길 기다릴 것. 상대가 아무리 짐이 많아도 짐을 들어주지 말 것.
아무리 귀한 선물이나 연인에게 선물할 꽃이라 해도 손에 짐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지 말 것. 스스로 문을 열지 말 것.
일반적인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 교육 방법에 진은 기함했다.
물론, 아이를 대할 때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다거나 여자를 에스코트할 때는 절대 먼저 앉지 말 것과 같은
상식적인 것들도 있었지만, 과반수이상이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과는 다른 것들이었다.
그리고 블리스는 배운 대로 행했다. 자신의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가벼운 티파티에서도 상대를 대할 때엔
늘 압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에이먼이나 클랜, 클레어도 마찬가지였지만 체구나 분위기나 블리스만큼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는 이는 없었다.
그런 블리스가 트레이를 끌고 갔다는 사실을 진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블리스는 다른 건 몰라도 뭔가를 들고 다니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짐이 흘러넘쳐도 도와주는 일이 없었다. 책이나 짐을 들어준 건 오히려 노먼이었지,
블리스는 절대 자신의 짐을 나눠들지 않았다. 기억하기로 블리스는 그의 가방과 식판 외엔 절대 손에
뭔가를 드는 일이 없었다. 교제중인 여성을 아무리 여왕처럼 대해준다 해도 그녀의 작은 클러치 한 번 들어준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줄 선물도 전부 배달시켰고, 꽃조차도 수행비서인 로이에게 들게 했다.
데이트 시에도 늘 비서를 함께 데리고 다녔기에 데이트 중인 여자에게 차 문을 열어주는 것도 비서의 몫이었다.
그래, 블리스는 그런 녀석이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블리스의 태도가 영 마음에 걸린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해?”
트레이를 끌고 나간 블리스를 따라 나온 진이 당혹스러움을 그대로 담아 그렇게 묻자 블리스가
뭐 그리 대수냐는 듯 슬쩍 진을 바라보곤 트레이를 끌고 응접실로 향한다.
“안 하던 짓이라니?”
“네가 트레이 끌고 다니니까 진짜 이상해.”
“난 원래 친절한 남자야. 와인 한 잔 할래?”
“커피 끓여 나와서 와인 얘기를 하냐? 그리고 토스트랑 베이컨에 웬 와인이야? 냉장고 좀 채워 놔.
우유랑 계란뿐이잖아. 샐러드도 없고.”
“채워둘게. 집에서 식사할 일이 거의 없어서 비워둔 거야.”
식당이 아닌 응접실로 트레이를 밀고 온 블리스가 접시를 옮겨놓는 걸 보며 진은 어쩔 수 없이
테이블 앞의 하얀색의 의자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하긴, 그렇긴 하다. 네가 집에서 식사할 일은 거의 없지.”
“그래도 채워둘게. 네가 자주 와.”
“내 집 놔두고 왜 너희 집엘 와?”
“너희 집이라니? 너랑 나랑 집 구분할 사이냐?”
당연히 그럴 사이다. 사적으로는 친구라 해도 공적으로는 오너와 고용인의 관계다.
아니, 그런 건 차치하더라도 그와 자신은 네 거 내 거 구분 안하는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정서적인 거리는 가깝더라도 물리적인 거리는 멀다. 아니, 그렇게 유지해야 한다.
“찻잔 꺼내올까?”
“내가 꺼낼게.”
어차피 메이드가 매일 조심스럽게 꺼내 닦아 넣어두는 것이기에 딱히 세척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블리스가 직접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이상했다.
“그럼 내 잔 가져올게. 깜빡하고 내 걸 안 가져왔다.”
“여기 있잖아.”
“됐어. 한 벌에 오십 만 달라씩 하는 거 불안해서 어떻게 써?”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어. 난 칠칠치 못해서 잘 깨먹는다고. 커피 잔 하나에 내 6년 치 연봉을 날릴 생각은 없어.”
찻잔뿐 아니라 식기와 가구, 그리고 작은 장식품 하나하나까지 전부 수공예품들이었다.
이 집은 두고 내부만 털어도 수백만 달라는 나올 거다, 라는 생각에 진은 문득 ‘돈 급하면 이 녀석 집이나 털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블리스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시계와 넥타이 몇 개만
집어가도 몇 만 달라 어치다. 할 만한 짓이다. 물론, 소심한 자신의 성격 상 진짜 행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자기가 지금 앉아있는 의자는 얼마짜리일까 상상하는 사이 블리스는 어느새 진열장으로 다가서 있었다.
“내 거면 네 거기도 해. 자기 걸 깨는데 누가 뭐래?”
유리 장 안쪽에 진열된 찻잔을 꺼내 들고 오는 블리스를 보며 진은 불안한 듯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블리스도 자신의 태도와 어제와 오늘 확 다르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진이 보기에 낯설고 이상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10년 간 참아오던 것들을 터트리자 제어가 되질 않는다. 지난 10년 간 일부러 진에게 더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건 사실이다.
그렇게라도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수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온갖 여자들을 다 만나봤고-사실은 남자도 만났었다.- 대학 졸업 후엔 거리를 두기 위해 일부러 필라델피아까지
날아가 워튼 스쿨에 입학했다. 진이 그런 자신의 태도에 섭섭해 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건 나름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이래도 잊지 못하는지 두고 보자고, 이렇게 해서도 안 되면 할 말 없는 거다, 라고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한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준 10년 동안 진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잊기 위해 노력했고,
그래도 안 된다면 그건 운명이라고 여기고 순응하겠다 결심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결국 포기가 안 되었으니 그간 못해준 걸 다 해주고 싶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진은 그에 응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애초에 남이 주는 건 사탕 하나라도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조금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뭐가 그렇게 이상해?”
두 개의 잔을 들고 테이블로 돌아와 그 위에 내려둔 블리스는 우아한 움직임으로 포트를 들고 잔에 커피를 따랐다.
커피를 따르는 모습조차 완벽한 자세로 교정 받고 자란 이가 하면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블리스가 하니까 근사한 건지도 모르겠다. 손의 움직임이나 팔을 드는 각도라든가,
그 사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시선의 중심이나, 모두 우아하고 품위 있다.
오른손에 기브스를 한 채인데도 물 흐르듯 부드럽고 유연하다.
문득 기브스를 한 블리스의 팔을 바라본 진은 진짜 진지한 얼굴로 블리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진지한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블리스, 병원 가보자.”
막 진의 찻잔에 커피를 따르던 블리스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진의 눈을 바라봤다.
“뭐?”
“너, 아무래도 오른손이 아니라 머리를 다친 것 같아.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진짜 크대.
다친 순간에는 몰라도 나중에 보면 점점 이상한 짓을 한다잖아. 병원 가자.”
진은 진심이었다. 아주 진지했다. 그렇지 않고는 블리스가 저럴 리가 없다.
하지만 블리스는 진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진의 반응이 참 참신하고 재미있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자신을 의심하는 걸 보니 도저히 웃을 기분이 되지 않는다.
“……머리는 안 다쳤어. 걱정 마.”
“아냐. 내가 보기엔 너 많이 다친 것 같아.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보면 다쳤을 거야.
MRI도 다 잡아내는 거 아니다, 너? House M.D를 보니까 아주 작은 종양은 못 잡아낸대.”
교통사고에 이어 이젠 자신을 뇌종양 환자로 모는 진을 보며 블리스는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너, 집에서 텔레비전 좀 그만 봐. 넌 지나치게 매스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어.”
호러 영화에 로맨스 영화에, 시즌마다 드라마들을 줄줄이 챙겨보는 진의 생활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현실이 싫어 가상 세계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건 이해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거다.
“하여간. 가보자, 응?”
“머리엔 전혀 이상 없어. 그만하고 식사나 해.”
“아냐. 난 정말 걱정 돼.”
오전에는 엘레나가 교회에 하자더니 오후엔 진이 병원을 가잔다.
이러다간 진까지 엑소시즘하자고 난리칠 것 같아 블리스는 베이컨 한 조각을 포크에 찍어 진의 입 안에다 넣어주었다.
“먹어.”
“……먹긴 하겠는데…….”
“일단 먹자.”
포크를 내려두고 왼손으로 커피 잔을 들어 마시며 블리스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진과의 사이가 더 이상 어색해지지 않은 건 좋은데, 아무래도 이 관계를 한 번쯤은 전복시킬 필요성이 절실히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다.
10년 간 절제를 위해 정해놓은 원칙을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그 긴 시간의 극간을 뛰어넘는 게 얼마나
힘들지를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게 문제였다. 시간의 강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