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
날이 밝았다.
호텔은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원래대로 해놓고 주차장을 찾아갔다. 유원이 언제 가져왔을지 모를 차 키는 이미 가방에서 꺼내 버튼을 눌렀고 다른 버튼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그렇지만 일은 그 차를 바로 타지는 못했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차 불편해?”
“그건 아니야. 그냥… 별거 아니야.”
일은 어색한 웃음으로 넘겼다. 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던 탓이었다. 그는 아직도 국가를 위해서 자신이 당한 일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막상 차를 보니 국가가 지원해 줬다는 사실에 예전 일이 불쑥 떠오른 탓이었다.
그것을 유원은 대충 짐작했다. 일이 저런 표정을 짓는 이유라고 하면 몸이 괜찮다면 결국 정신적인 문제일 테니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유원은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걱정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어디 안 좋으면 미리 말해 줘야 해. 알았지?”
“알았어.”
바로 답하는 말에 그제야 유원이 안심하듯 웃어 보였다. 일 역시도 그런 유원의 말이나 표정에 묘하게 안도감을 느끼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유원은 일의 상태가 걱정돼서 뒤에 넓은 데서 누워 있는 게 낫다고 말했지만 일은 괜찮다면서 너만 피곤할 수는 없다며 같이 차를 타고 갔다.
몇 시간이 되는 길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정말 하나도, 심지어 고속도로에도 지나가는 차 하나도 보이지 않은 그런 상황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래서 휴게소도 쉽게 들렀다.
가게 문은 닫혀 있었지만 화장실이 없는 건 아니었고 미리 적당히 먹을 걸 챙겨 와서 그것들을 먹으면서 쉬면서 움직이니 생각보다는 편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무들이 주변에 꽤 많은 곳이.
물론 그래봤자 얼마 없었지만. 이미 몇백 년 전에도 파괴는 안 된다면서 차 사용도 줄이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데 과연 식물들이 점차 오염되는 환경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나마 남아 있는 몇 종은 국가의 실험 하에 관리하여 몇 가지 품종만이 살아남았고 나머지 바깥에서는 어떤 환경이든 잘 살아남을 수 있는 식물들만 심어놓은 상태였다.
다행히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지만.
물론 그 식물들도 뜨거운 햇빛 때문에라도 물을 주면서 어느 정도 관리를 해야 했지만 관리하지 않은 지금 어느 정도 시들어 있었다. 그게 뻔히 보였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런 환경에서 억지로 살게 하는 것이, 굳이 그렇게까지 살아남으려고 하는 게 옳은 것일까.
무엇보다 모든 세계의 식물을 다 관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스쳐 가는 정도로 볼 뿐 주소를 확인하며 집이 맞는지 알아보았다.
“여기 맞는 것 같은데.”
“그래?”
“어. 문 옆에 써져 있어.”
문 옆에 써 있는 도로명 주소, 물론 자세히 적혀 있는 건 아니고 적당히 일부만 적혀 있는 정도였지만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덕분에 일 역시 제대로 확인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어서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아마 다른 집에도 사람은 없겠지.”
묘한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오면서 보고 겪은 일들이 헛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유원은 그 말을 부정했다.
“있을지도 모르지. 아직 제대로 본 건 아니잖아.”
“그건…….”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잖아. 우리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자.”
놀려고 온 건 절대 아니었다. 둘 다 이런 상태에서 이런 심정으로 놀고 싶은 건 아니니까. 특히 일은 깨어난 이후로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나마 살려고 한 것은 가족들이나 유원 때문이었지만 막상 사니까 좋은 생각이 쉽게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다.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노력은 해 보자고.
일은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없는 세상, 혼자는 아니라도 가족의 빈 자리는 너무나도 크게, 쓸쓸하게 느껴졌으니까.
아무리 유원이 있다고 해도 완전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아서.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쓸데없는 말을 했다. 그것을 유원의 말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을 했는지를.
“문은 어떻게 열까?”
유원에게 의견을 구했다. 사람이 없는 만큼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문을 열려고 살펴보다가 문고리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물으니 유원이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문을 보다가 왼쪽으로 밀었다.
그제야 제대로 된 문이 보였다.
“뭐야, 이거…….”
“미닫이문이야. 옛날에 일부 건물에 많이 사용했던 방식이지.”
“그건 나도 알아. 근데 왜 이렇게 되어 있냐는 건지 궁금해서.”
“보안 때문이겠지. 이렇게 사람 별로 없는 곳이라고 인심 있는 세상은 이미 예전 일이 됐으니까. 지금은 어떤 지역이든 거기서 거기기도 하고 아무래도 집주인이 주인이다 보니 그런 것도 있겠지.”
“하긴.”
그 점에서는 공감했다. 그가 살았던 과학 기관 역시 이중 삼중으로 문이 있어서 제대로 확인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번호를 입력하는 문은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아서 멈칫했는데 곧 유원이 팔을 잡아 일의 손가락을 번호를 누르는 버튼 밑의 지문 인식을 하는 곳에 손가락을 누르게 해서 일은 무척이나 놀란 눈으로 유원을 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금방 열릴 테니까.”
그리고 그 말 그대로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야 이거…….”
당황한 표정이다. 그럴 만했다. 보통 낯선 사람의 지문을 인식하는 경우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유원은 문이 열린 일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했다.
“저 문은… 그러니까 사람이 죽어서 주인이 없는 집과 같아.”
“주인이 없는 집?”
“그래. 죽으면 새 주인이 올 때까지는 주인 없는 ‘빈집’이 되는 거지. 대중적인 건 아니지만 몇몇 사람들이 쓰고 있는 거니까.”
“아…….”
그제야 일은 그 구조가 예전에 나온 광고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독거노인이 혼자 아무런 도움 없이 죽는 경우 때문에 생긴 장치였던 걸로 기억했다. 만약 상태 이상의 노인이라면 맥박 수 상태를 측정하는 시계와 함께 연결된 도어락.
특히 요즘은 구급차에도 연락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지만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진작 데리고 갔거나 아니면 다른 경우일 거라는 얘기였다.
그 가능성을 생각하면 조금 긴장이 됐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문을 열었다.
달칵.
생각보다 쉽게 열린 문, 그리고 안쪽에 들어가자마자 바람이 불었는데 나머지 공간에서 빠져나가는 것까지는 일반 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곧 밖에 있을 때 두르는 복장을 해제하고 제대로 된 집 안을 들어가 보니 복도가 훤하게 보였다. 특히 짙은 고동색 바닥은 왠지 모르게 게임에서 본 바닥을 연상케 했다.
물론 그것과는 다르게 좀 더 깨끗하고 튼튼했지만.
하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사치스럽고 환경 파괴적인 바닥이라니 너무 이상했다. 그래서 더 이질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더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이건…….”
“죽었나 본데.”
“…그러게.”
나이가 든 얼굴, 척 보기에도 방 침대에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누워 있는 모습은 그를 도저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은 잠시 멍하니 그런 그를 보기만 했다.
얼핏 할아버지가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후…….”
“일아,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이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면 내가 더 신경 쓰는 것 같잖아.”
“…미안.”
“됐어. 어쨌든 네가 날 걱정해 줬다는 건 아니까.”
유원이 얼마나 생각해 줬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너무나 뚜렷했다. 결국 헛걸음을 했다는 소리니까.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까지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런 일을 유원은 그저 기다렸다.
여태 그런 것처럼 계속해서, 또 그만큼 일을 생각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나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여태 많이 했던 생각을 해서 또 한 번 끄집어냈다.
“일아.”
“왜.”
“찾자.”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일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뭐?”
“좀 더 주변을 둘러보자. 뭔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딱히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과학자잖아. 근데 그런 흔적이 하나도 없어 보이다니 좀 이상하지 않아?”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그 말이 맞았다. 이상하게 생긴 바닥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일반인 집 같았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곳에 온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몇 시간이었다. 다시 돌아갈 때도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여기서 하루 묵고 가는 게 나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두 사람은 곧 지하실을 찾아냈다.
“설마하니 시체 밑에 공간이 있을 줄이야…….”
“거긴 안 건들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누가 생각해도 꺼림칙할 것 같기도 하고.”
그곳에 있다는 걸 알아낸 건 일이었다. 일도 머리가 좋은 편인 만큼, 또 과학자가 무언가를 남겨놨다고 생각한 만큼 관련되어 있는 곳을 제일 먼저 뒤졌고 나오지 않자 바로 생각난 것은 시체였다.
할아버지가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일을 위해 남겨놓은 게, 그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 기억으로 찾아냈다. 시체가 있는 침대 밑에 흔들거리는 바닥, 그 밑에는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그 구멍에 꽂는 열쇠는 배게 밑에 있었는데 꺼낼 때 꺼림칙했지만 죽기 직전의 사람이 과연 편안한 표정을 지은채로 잠들면서 그런 곳에 열쇠를 숨길 이유가 뭐가 있었을까.
결국 둘은 열쇠를 조심스레 꺼내 바닥에 있던 구멍에 열쇠를 꽂아 생긴 문을 열어 공간을 찾아냈고 그 안에는 사다리가 있는 것 같았다.
“…괜찮을까.”
“글쎄… 일단 손전등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이야.”
일은 가지고 있던 시계를 꺼냈다. 그리고 그 시계는 켜서 특정 버튼을 누르자 금방 불이 켜져 안을 환히 보이게 만들었다.
그 범위를 통해 일은 밑을 확인했다.
“바닥이 있는 것 같아.”
“그렇구나. 다행이네.”
“그러게.”
만약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면 줄 같은 걸 가져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닥이 튼튼할지 어떨지도 모르니 일은 적당히 유원이 가져온 의자 하나를 떨어뜨렸는데 전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둘은 움직였다.
유원이 먼저 내려가고 일이 그다음으로 오는 것으로.
아무래도 유원의 몸은 인간과 같았지만 자체적으로 인간은 아니었기에 불안해서 먼저 간다고 할 때 일이 말리긴 했지만 그의 고집은 강했다. 어찌 됐든 일이 다치는 건 두고 보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을 때 별다른 일이 없다는 게 제일 다행이었다. 일 역시 그 후에 내려왔는데 손전등 기능을 여전히 작동한 채라 충분히 내부를 볼 수 있었다.
불을 켜는 버튼을 찾을 수 있을 만큼.
탁.
“…여기에는 뭔가 있을 것 같은데.”
“확실히, 과학 기관이랑 비슷한 걸 보니 그런 것 같아.”
환해진 지하 내부는 누가 보더라도 지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깔끔한 벽과 바닥, 그리고 세 개 정도의 방이 보였는데 한 곳은 오래된 책들과 기계들이 가득한 방이고 두 번째가 여러 가지 약품이 있는 곳, 그리고 세 번째 방은 여러 가지 실험을 했던 곳인지 유리 기둥들과 함께 그 안에는 눈알이라든지 뇌 같은 게 보여서 일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멈춰 있는데 유원이 곧 일의 앞으로 가서 방의 좀 더 안쪽을 향했고 그 안에는 누워있는 유리관과 함께 남자 하나가 잠들어 있었으며 근처에는 한 여인이 눈을 감고 있었다.
단단한 표정을 가진 여인이.
무엇보다 손가락이 결코 인간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쇠로 만든 게 보여 로봇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건들지 않으려 했지만 관을 건드린 순간, 그녀가 눈을 떴다.
“아, 안녕하십니까.”
고개를 돌리며 하는 말, 정확히도 일을 향해 보며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제대로 질문했다.
“무슨 일이신가요?”
처음보다는 자연스러운 어조로. 그녀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마치 자신이 해가 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그렇기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점도 존재했다. 왜 굳이 이곳에 로봇이 있을까, 로봇이 있을 만한 이유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서 일은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혹시 사람 도우는 일 관련해서 도움받을 게 있을까 해서요.”
“어떤 목적이시죠?”
“그건…….”
“해로운 목적이면 제공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목적이시죠?”
금방이라도 취할 것 같은 자세는 싸우려는 것 같았다. 이 상태에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눈치챘을 것이다.
유원 역시도.
“전염병 관련해서 왔습니다. 실제로 이쪽이 과학자의 가족이죠.”
“그럼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번엔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눈에서 나오는 빛이 일의 몸을 순식간에 스쳐 갔고 그 순간에 모든 데이터가 입력됐다.
“확인됐습니다. 유일님.”
순식간에 얼굴 인식을 통해 확인을 마쳤다. 그러고는 그녀는 자신의 데이터에 있는 명령대로 그다음 얘기를 꺼냈다.
“이제부터는 제가 천천히 안내를 해드릴 겁니다.”
“안내는 왜…….”
“그야 창조자께서 명령하셨으니까요. 누군가가 이곳에 먼저 온다면 그 사람은 후계자의 자격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자격 없는 자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잠시 실례를 저지른 점, 사과드립니다.”
바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계 같은 동작이나 말 같은 게 너무 사람 같지 않아서 일은 그게 사과 같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이런 곳을 준비해 둔 건 나름대로 중요한 걸 숨기고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섣불리 대답을 못 하는데 유원이 옆에서 말했다.
“용서할 필요 없어.”
“…원아.”
“저쪽이 잘못한 거잖아.”
그는 자신도 기분 나빴다고 했다. 자신은 전혀 신경도 안 썼다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오히려 자신이 더 기분 나쁜 일일 텐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어쩐지 일은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유원의 위로에 왠지 모르게 위로되는 구석도 있어서 복잡한 마음으로 로봇이 소개하는 곳을 따라갔다. 전반적으로 방의 구조를 포함하여 안에 뭐가 있는지 어떤 부분이 어떤 부분으로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지막으로 갔던 방이었는데 정말 놀랄 만한 사실을 그녀는 말했다.
“여기에 있는 건 전부 창조자의 복제인간을 이용해 실험한 흔적입니다.”
“실험이요? 그걸 왜 굳이 이렇게…….”
“실험은 약을 위한 연구였죠. 저희 창조자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셔서 전염이 일어나던 초기에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들은 전부 저렇게 장기의 일부만을 남기는 결과를 발생시켰죠.”
그녀는 말했다. 유리 기둥에 있던 장기들의 일부들이 전부 복제 인간을 이용해 전염병을 막기 위한 거였다고. 원래는 이런 식의 실험을 할 계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많이 죽는 것은 보기 싫다면서 실험한 것이 이런 거였다.
“그럼 실험은 성공한 건가요?”
“아뇨. 실패했습니다.”
단칼에 대답했다. 하지만 금세 이어지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들과 하는 실험이 필요한 겁니다.”
“뭘요?”
“이 시간까지 여기까지 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면역 체제가 있을 테니까요.”
쾅!
그 말을 끝으로 문 앞이 순식간에 벽에 가로막혔다. 게다가 로봇은 총을 잡고 있었다.
“도망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녀가 총을 잡고 일을 향해 들었다. 당연히 그 때문에 유원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했다. 어쨌건 그녀는 로봇이었다. 처음에는 깨어나지도 못했으니 분명 멈출 방법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유원은 조금 더 주변을 보았다.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 그럴 수 있는 상태가 될 만한 것을.
그리고 하나, 유일하게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는 생각해 냈다.
단 하나, 이곳에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생명을.
그것을 순식간에 다가가 깨뜨렸다.
쨍그랑!
“…유리여서 다행이야.”
그는 웃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으니까. 그녀는 아마도 이걸 지키기 위한 존재였다고 유원은 생각했다.
특히 아까 관을 건드렸을 때 그녀가 깨어났으니까. 그러니 유원은 그 유리관 속에 있는 복제인간으로 추청되는 남자를 순식간에 유리 조각과 함께 찔러 버렸다.
그러자 그녀를 멈출 수 있었으며 일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에게 있어서는 다행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다행이 아닐지라도.
일은 달렸다. 또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금방이라도 유원에게로 뻗는 손이, 움직이는 다리가 비이성적이었다. 그런 것들을 느낄 수조차 없었으니까.
그저 유원이 또 자신을 위해 제 몸을 망쳐버린 것에 화가 나 그를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
“왜 또 이런 거야! 너 진짜 미쳤어?”
“괜찮아…….”
“괜찮긴 뭐가! 너 피 엄청 나잖아…….”
가짜도 아닌 진짜 유리였다. 그게 피에 쓸려서 엄청난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 소리쳤지만 유원은 그냥 웃었다. 그러다가도 관 안쪽을 보다가 일을 보더니 물었다.
“넌 괜찮아?”
“야, 지금 네가 다쳤다니까?”
자기 걱정 말고 너나 걱정하라는 말을 하자 유원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괜찮은 건 알아.”
“그럼 뭔데.”
“내가 이 사람 죽였는데. 그런데도 괜찮아?”
“…뭐?”
“아마 복제인간 같지만 어쨌든 인간이니까. 저 로봇이 널 죽이면 어쩔 수 없어서 그랬어… 이렇게 말해도 상식 외의 일이니까.”
유원은 일이 원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만히 쳐다보니 일은 그제야 시신을 봤다. 붉게 물든 피와 죽은 사람, 과연 그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있을까.
하지만 그가 살기 위함이었다.
“…원망은 안 해. 애초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내 탓이고.”
일이 만약 묻고, 온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유원 역시 여기에 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게임에서도 느꼈지만 그는 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비록 자기희생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안타까웠다. 예전의 유원은 이렇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많은 게 달라졌다. 그 원인에 일 본인이 큰 영향을 줬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도 망가졌으니까.
그러니 그 곁에 있던 유원이 망가졌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아마 더 좋은 환경에서 쭉 같이 있었다면 이런 일조차 생길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원에게 어느 정도 책임감도 느꼈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미안.”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우선 내 팔 치료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면 붕대 같은 거 가져와 줄 수 있어?”
“잠시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행인 건 유리 파편이 유원의 팔에 박혀 있지 않았다는 거다. 게다가 생각보다 금방 회복되는 것 같이 보이는 몸은 보통이 아니었다.
“이거 보니까 전에 생각난다.”
“전에?”
“응. 네가 치료해 줬을 때.”
“…그걸 생각하면서 누가 이렇게 다치래.”
“그러게 말이야.”
유원의 웃음은 솔직히 말하면 좋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숨을 내쉬면서도 치료를 계속하는데 덕분에 유원은 다른 곳도 보다가 문득 관에 있는 걸 보고는 놀란 듯 말했다.
“…이 사람 안 죽은 것 같은데.”
“뭐?”
“여기 봐. 상처가 낫고 있어.”
가리키며 말하자 일의 고개가 돌아갔다. 확실하게도 관 안에 사람을 찔렸던 곳이 말끔하게 나아서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어느새 왔는지 다가온 로봇은 아까와 다름없는 태도로 말했다.
“눈치채셨군요.”
흠칫.
둘이 거의 동시에 그녀를 돌아봤다. 그러자 그녀는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걸 안 이상 공격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걸 알아서? 왜?”
“그야 고작 그 정도로 사람을 믿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멀쩡하게 살려 보내지도 않았겠죠.”
그녀의 말에는 악의가 없었다. 하지만 섬찟한 말이었다. 그래서 일이 긴장한 상태로 굳어있자 유원이 무언가를 생각한 듯 말을 꺼냈다.
“혹시 이게 치료제인 건가?”
“네. 하지만 너무 효과가 좋죠. 그래서 실패라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과학자가 새로운 실험을 하기에는 충분하죠. 그걸 맡기기 위한 후임이기도 하고요. 아니면 그저 전달자가 되겠죠. 무엇보다 이 외에 인간들이 없다면 그냥 사라지는 게 낫다고도 했으니까요. 어쨌든 혼자 남는 건 좋지 않다고도 해서 저는 당신의 의사가 필요합니다.”
이 장소를 만든 과학자는 그런 것까지 고려했다. 나쁜 침입자를 막으면서도 후임자를 정해야 하는 일을, 더 최악의 상황인 경우에는 폭발하게 되어 있지만 다행히 그리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유원이 아닌 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일은 긴장한 채로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얘한테는 안 묻죠?”
“그야 제 인식 대상에 확인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당신의 말밖에 들을 수가 없죠.”
다른 인간도 안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인간이 아니라서 안 된다는 말 같아서 일은 뭐라고 쏘아붙여 주려던 것을 멈추고 유원을 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나?”
“그래.”
“그거야… 일이 원하는 대로.”
“나는 그런 거 싫어. 네가 원하는 걸 말해.”
유원이 답한 말에 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 물었다.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유원은 생각해 냈다. 일이 원할 만한, 일에게 좋은 결과를 줄 수 있는 방법을.
“그럼 나는 일단 다른 인간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이걸 전달해 주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과연 있을까?”
진심이 깔려있는 물음이었다. 그 안에 두려움 같은 게 느껴졌다. 적어도 유원은 그 말의 의미가 대충 무엇인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나야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그리고 없다고 해도 우리끼리 여행 갈 수 있는 거니까.”
“이런 상황에 여행이라니…….”
“이런 상황이니까 가야지. 우리나라에 없다면 다른 나라라도.”
그는 일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끝까지 찾는 노력이라도 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목표가 생긴다면, 희망을 마음속에 심어놓는다면 뚜렷한 의지로 행동할 수 있을 테니까.
또 그만큼 오래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
일을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에게 말했다. 전염병이 나을 수 있는 걸 전달하겠다고. 그러자 그녀는 서랍 한쪽에 있던 상자를 꺼내 그것을 일에게 주었다.
“이건…….”
“약입니다.”
“약?”
“네. 마지막으로 실험체에게 했던 것들을 농축한 약이죠. 아무래도 정보만 전달하는 건 상대 쪽에게서도 믿음을 주지 못할 테니 이것을 챙겨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알았어.”
이제 존댓말은 하지도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약을 받았다. 정말로 누군가 아직까지 살아 있고, 나을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편이 나을 테니까.
“그럼 다시 시동을 중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돌아오신다면 관을 건드려주시면 됩니다.”
무뚝뚝한 목소리,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처음 본 그대로 잠들었다. 일 역시 별 대답은 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유원을 봤다.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유원을.
“…가자.”
“그래.”
그대로 손을 내밀어 일은 유원을 부축하듯 일으켰다. 다행히 팔이 금방 회복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아무래도 금방 어디를 가는 건 무리일 거라는 생각 때문에 결국 그 집에 하루 정도는 더 머물기로 했다.
“팔은 이제 괜찮아?”
“…괜찮아.”
“그럼 저녁이나 먹자.”
“그래.”
안 그래도 출출하던 찰나였다. 그래서 둘은 식사를 준비했다. 냉장고 안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과학자가 남겨놓은 식량이 있었지만 그것을 둘은 쓰지 않고 가져온 배낭 안에 있던 음식을 먹고는 조금 쉬기로 했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더 하기에는 둘 다 어느 정도 지친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위층에 침대가 있는 데서 누워 있는데 유원이 일을 보며 불렀다.
“일아.”
“…왜?”
“넌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야말로.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든데.”
“그건 미안.”
유원이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말해도 또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일은 결국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나는 말이야… 유원 네가 다른 사람도 만나 봤으면 좋겠어.”
“…나?”
“그래. 아무래도 나밖에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일은 생각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유원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유원이 다른 사람을, 주변을 못 보는 게 아닐까 하고. 그러나 유원은 그의 얼굴을 순식간에 붙잡고 제대로 마주 보며 말했다.
“아니야.”
확실하게 부정하면서.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절대 그건 아니야. 난 널 좋아해. 너도… 너도 알잖아.”
외면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일은 그 사실에 입을 다물었다.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애매한 만큼의 감정이 지금 상태에 대한 부작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겁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일아… 울어?”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아?”
“힘들면 안 되지. 안아 줄까?”
유원이 팔을 뻗어 그를 감쌌다. 따뜻하다고 일은 생각했다. 이걸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울음 때문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너무 어렸다.
전염병이 생기고, 가족이 순식간에 죽어 혼자 남은 것 같은 불안감이 겹쳤을 때 의지할 곳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외면할 정도로 그는 터무니없이 어리고 여렸다.
다른 생각을 할 만큼 도와줄 사람도, 그런 환경도 되지 못한 채로 순식간에 성인이 되어 버린 지금 필요한 건 하나밖에 없어서.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으니까.
“원아… 미안해.”
“…왜 그래. 또.”
유원은 다정하리만큼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건 그 누구도 아닌 유원의 위로 방식이었다. 또한 그만큼 그는 일을 알았다. 일이 무언가를 무서워하는지도.
“그렇게 힘들면… 그냥 나 안 좋아해 줘도 돼.”
“그건 너무… 이기적이잖아.”
“하지만 괜찮아. 어쨌든 내가 좋아하고 일이 너도 어쨌든 적어도 나를 의지해 주는 건 나름대로 좋은 일이니까.”
아무것도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듯이 말했다. 언제나처럼, 하지만 이걸 언제나처럼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버틸 수 없었다.
“…원아.”
“그래. 이제 좀 괜찮아졌어?”
“덕분에… 그리고 할 말도 있어.”
“뭔데?”
“나… 나도 너 좋아해.”
말하니까 단숨에 숨고 싶어졌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갈 수 없었다.
어쨌건 고백이었으니까.
그 달게 들리는 말에 유원은 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나도 좋아해. 고마워.”
“근데 나머지는 좀 기다려줘. 나 아직 준비가 안 됐어.”
“그 정도는 알아. 그리고 일아, 고마워.”
“…아까 고맙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아까고. 이건 지금의 고마움?”
웃으면서 유원은 일의 얼굴을 보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일이 울어서 이리저리 얼룩진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유원은 좋아한다고 말하며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그것을 일은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과 만난다고 해도 두 사람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러니 서로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관계의 시작으로서.
(공포 게임 탈출기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