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28)

26. * *

시간이 제법 흘렀다.

아들 부부에게 첫째만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둘째인 예쁜 딸이 태어났다. 물론 그는 그 작은 아이 역시 귀여워했다.

아이는 조금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지만.

“하라버지는 왜 오빠만 예뻐해?”

“뭐? 아니 너도 예뻐하는데.”

“하지만 하라버지는 오빠부터 보자나! 나부터 바!”

한참이나 어린 여자애는 너무나 솔직했다. 하지만 그만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볼 줄 알아서 그가 손녀보다는 손자에게 마음이 더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걸 그는 그제야 제대로 인식했다.

“…미안하구나.”

그는 그날 그래서 손녀에게만 몰래 간식거리를 사다 주었다. 둘만의 비밀이라고 약속하면서, 어설픈 사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때때로 그는 손녀에게 무언가를 사다 주었다.

가끔 들키면 손자가 삐치기는 했어도.

그래도 공평하게 해 주려 노력했다. 덕분에 둘은 가끔씩 투닥거려도 사이좋은 남매로 자라났다. 유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반에는 그가 거의 말을 걸어주다가 나중에는 가족들, 일 역시도 가상 체험 공간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모든 일이 원만했다.

때때로 아내가 생각나면 우울한 감정도 들었지만 그만큼 기뻤다. 그녀가 없어도 그녀가 남긴 흔적은, 남은 가족들의 행복을 그녀에게도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아쉽더라도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좀 더 길었으면 좋았겠지만.

하지만 그리 길지는 못했다. 세상에는 전염병이 발생했다. 원인도 모르고 생긴 전염병, 보통 국가가 해결해 줄 거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달랐다.

해결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한 척을 했다. 안 그래도 아이들도 학교에 다니는데 괜히 불안감을 심어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조차도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는 소용이 없었지만.

무엇보다 일이 끌려갔다. 손자가, 그에게 결코 특별하지 않은 적 없는 소중한 가족이 국가라는 이름의 끔찍한 이들에게 끌려갔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적에게 협력당하는 것밖에는.

심지어 일이 데려가지던 그때에 유원이 움직여서인지 들키고 말았다. 덕분에 유원의 기능을 바꿔야만 했다. 하지만 무조건 다 들어줄 수는 없었기에 말했다.

“먼저 우리 유일이를 보게 해 주게.”

“좋습니다. 어차피 협력을 위해서는 좀 더 편안한 환경이 좋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감시하는 사람들을 풀지 않았다. 그걸 눈치챘음에도 그는 당당하게 굴었다. 다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혹시 몰라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괜찮았으면 좋겠으니까.

음식을 가져간다거나 옷을 챙겨주는 것 역시 안 된다고 막혀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막 손자를 봤을 때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반가움만 들었다.

“일아!”

“할아버지!”

보자마자 서로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는 두 손을 잡아 주었는데 다른 데는 몰라도 두 손의 끝이 유독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긴장을 많이 한 증거였기에 그는 손을 눌러주면서 말을 꺼냈다.

“여기 와서 뭐 이상한 일 당한 건 아니지?”

“네.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구나.”

그럼에도 혹시 몰라 몸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다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일에게 무슨 짓을 했나 싶어서 살펴보면서도 이것저것 말을 꺼냈다.

유원에 대해서 얘기한 것 역시 그런 때였다. 시계의 경우 차는 정도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아니 그 역시도 인터넷 연결이 제대로 닿지 않게 해서 대체적인 일들은 사용이 불가했지만 유원은 달랐다.

물론 기능은 들켜서 많이 줄이고 확인도 받았지만 그 기능을 아예 사라지게 하지는 않아서 다행히 유원은 무사히 일의 시계로 옮겨갈 수 있어서 그 사실을 말해 주었고 다행히 머리가 좋았던 일은 그것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다만 가족들의 일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시간 다 됐습니다.”

“…정말 칼 같군.”

그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 이상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그들 중에서 그의 며느리이자 일의 어머니인 그녀는 일에게 나중이라도 꼭 나오게 할 거라고 말했다.

우리는 걱정 말라면서.

사실은 그들이 걱정했지만.

의외로 일은 태연한 표정이라 그 모습이 그는 오히려 슬프게 느껴졌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애당초 일을 붙잡은 이들은 ‘국가’였고 그만큼 힘이 발휘되는 기관이었다. 그러니 현재로서는 어려웠다.

특히 일을 두고서는 도망칠 수도 없을 테니까.

가족 모두가 동의했다. 그래서 일이 태연한 만큼 그들도 태연한 척을 했다.

곧 주사를 맞더라도.

“다들…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지?”

같은 곳에서 주사를 맞았다. 아마도 일은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해서 걱정을 더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택한 그들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했었다. 몇 명이라도 외국으로 떠나 있어도 좋다고. 자금은 충분하다면서.

물론 그가 이렇게 피를 뽑히는 것처럼 다른 가족들 역시 고집은 만만치 않았지만.

“당연하죠.”

“할아버지도 참, 이게 뭐 별거라고.”

“맞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일이는 제 아들인 걸요.”

서로 보며 웃어 버렸다. 모든 가족이 다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서로가 애틋했다. 이 상황이 반가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의지할 가족이 있었으니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피를 내줄 때 버틸 수 있는 것도 서로가 있어서였다.

당연히 일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애당초 그들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일에게 굳이 그런 생각까지 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가족 하나가 끌려갔다. 하지만 이게 보통 이유로 끌려간 것도 아니고 ‘국가를 위한’ 전염병을 낫게 하기 위한 일이었으니 그들 역시 피를 어느 정도 뽑힐 수밖에 없었다.

대신 일에게 넣을 피를 적게 할 수 있도록 문서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면서.

피의 양까지 철저하게 계산해서 합의했기에 가족들은 피를 뽑혀도 별말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 함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팔이 조금 욱신거릴 때면 인상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그는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씩 느려지는 몸, 때때로 나는 현기증 같은 것들이 무언가를 짐작하게 했다.

그것이 두려웠지만 다행히 아들에게는 말해 놨다. 자신의 몸이 힘드니 만약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달라고.

그리고 그 할 수 있는 일들을 위해 그는 여러모로 준비를 해두었다. 식량을 정리한다거나 병에 관해서, 혹은 또 다른 무언가를 위한 준비.

유원의 인간화 계획이었다.

스스로도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인간 같은 인공지능 로봇은 충분히 존재해왔다. 단지 조금씩 어색했을 뿐이지 많은 발전으로 충분히 될 수 있는 단계였다.

단지 위험해서 쉽게 시도하지 못했을 뿐.

이미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였다. 이렇게 일찍 시도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래서 유원이 감정을 없애 달라고 했을 때 제법 놀라기도 했다.

그것도 자신이 사람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를 대면서.

그런 유원을 어떻게 다시 평범한 시스템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일의 형제로, 가족으로 생각해서 그는 굳이 인간처럼 되지 않는다고 해도 유원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유원은 그저 유원일 뿐이니까.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결정이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 버렸다. 몸에 대한 설계도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으니 이대로 만든다면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믿었다. 무려 몇십 년의 세월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다만 그것을 완성시키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았다.

그 사실이 그의 뼈를 아프게 했다. 살을 떨게 하고, 가슴이 시리게 만들 정도의 두려움을 만들게 했다.

공포라는 이름의 병으로.

다행히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짧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미 일을 찾으러 갔을 때 일의 몸은 끔찍하다고도 모자랄 지경으로 몸 이곳저곳이 멍들어 있었으니까.

저절로 인상이 써질 수밖에 없을 정도라 그는 차마 일을 세게 잡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입을 쉽게 다물지 못했다. 일은 이미 기절해 있었다. 당연히 그의 부모는 일을 몇 번이나 부르면서도 어찌 하냐는 듯이 그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는 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손녀의 눈을 가려주려 했지만 이미 그의 키와 큰 차이가 나지 않게 자라버린 소녀는 퉁명스런 태도로 그의 손을 치우며 말했다.

“전 괜찮아요.”

“하지만…….”

“그리고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요.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최소한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녀는 아직 한참 보호받을 나이였다. 그럼에도 성숙한 태도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음을, 그의 모습을 처음에 봤을 때의 표정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그는 어른으로서, 아니 그녀의 할아버지로서 그 모습도 받아주고 싶었다.

“그래. 하지만 너무 오래 보지는 말고.”

“알아요. 저도 그 정도는.”

“우리 손녀가 많이 자랐구나.”

“저는 원래 많이 컸다고요.”

부러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 마주하며 웃었다. 오래가지만은 않을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들은 일을 옮겨 치료를 한 뒤 안정적이게 될 적에야 방 침대로 옮겨 놓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으니까.

일에게는 익숙한 곳이 편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게다가 점차 안정되는 상태는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 같았고 며칠 뒤, 정말로 일은 눈을 떠서 한 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할아버지?”

“일아… 괜찮니?”

뚝뚝 흘리는 눈물에 그는 오히려 그가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사실은 괜찮다며 웃고 싶었음에도 눈물이 쉽게 그치지 않아 그는 그제야 자신이 안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걱정했음을 알았고 두려워했음을 알았다.

그는 너무나도 겁쟁이였으니까.

가족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건지, 저보다 짧게 산 아이들이 오래 살길 바랐다.

그러나 세상은 병들어 있었고 많은 사람은 미쳐갔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낫지 않은 병에 매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식량에 신경 쓴 건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에게 몸을 신경 쓰라고 주의시켰다.

처음에 죽을 먹게 한 것도 나름대로 좋은 걸 넣어서 만든 것으로 일은 그것도 열심히 먹었다. 맛있다면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기특했는지 먹은 다음에 살짝 밥도 먹고 싶다는 말도 흘려듣지 않은 그는 다음 날 가족끼리 다 같이 식사를 하게끔 했다.

오랜만에 갖는 식사 자리는 너무나 충만했다.

그것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여태보다 더 환해진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으니까.

게다가 도움을 준 유원에게도 빠르게 일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더 빨리 보게 해 주고 싶었지만 일의 상태도 그랬고 유원 역시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리려고 노력했던 거니까.

그런 식으로 주변이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건 병이 일어나기 전의 ‘일상’과도 같아서 그는 조금 편해졌다.

한편으로는 몸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나서 주변을 더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일을 낫게 하려고 했다. 일의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됐지만 정신적으로는 괜찮지 않았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때때로 사람이 다가갔을 때 놀라는 것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친 것은 상처가 지워진다고 하더라도 상처가 났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제 손자를 위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가상 게임을 응용해서 만든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게임을 만들기로.

특히나 일을 위한 것이니 일이 친근하게 여길 만한 것으로, 그가 기억할 만한 그나마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것을 고르려 하니 ‘공포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이 역시 고민이 됐다. 아무리 일의 정신적인 부분의 안정을 위해서라지만 이런 식으로 자극하는 게임이 과연 괜찮은 걸까 하고.

제 상태 역시 괜찮지 않았으니까.

“윽…….”

토할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끔찍한 통증이 단번에 찾아왔다. 하지만 괜찮아야 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

그의 아들이었다. 그를 바로 붙잡을 정도로, 그렇게나 애타는 표정으로 보는 아들을 이런 모습으로 보게 되는 건 얼마나 비참한 마음인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이 말했다.

“몸이 안 좋다면 안 좋다고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건…….”

“알았다면 아버지 이렇게 고생하게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참는 걸 알았다면… 얼마나 속상한지 알아요?”

울 것만 같은 얼굴, 그에 그는 차마 더 무언가를 말할 수 없었다. 분명 해명하려고 했을 텐데도 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하나의 감정만이 자리 잡았다.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제발 말 좀 해 주세요.”

간절하다는 듯이 봤다. 그래서일까, 그는 부쩍 아내가 생각났다. 아내처럼 자신이 떠나 버린다면 아들에게 또 다른 슬픔이 될지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이렇게까지 말하지 못한 걸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그후로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아들에게 제 상태에 대해 말하기로 했다.

“일단 움직이는 데에는 크게 문제는 없단다. 가끔만 이럴 뿐이야.”

“그 가끔이 문제죠.”

“…그건 그렇지.”

따끔하게 지적하는 말에 그는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아들이 한숨을 쉬는 것을 알면서도 별말은 못 해 말하는 것을 듣기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이 묻어나는 말들을.

“아버지, 꼭 건강 조심하세요. 물론 나이라는 게 무시할 건 못 되니까 어쩔 수 없는 게 있지만 그래도 저희가 돈도 그렇고 다른 걸 잘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병원이야 지금 같은 상황에는 어렵긴 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연락해 볼게요.”

“그래.”

하는 말 모두가 진심인 걸 알았다. 실제로 병원들이 전염병 때문에라도 도저히 그를 받아줄 수 있는 상황이 안 되거나 병원 문을 닫은 상황이라 어려운 것도 그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말하는 게 고작이었다.

고맙다고.

게다가 아는 지인의 지인의 지인까지 끌어들여서 약 몇 개는 처방받았다. 물론 의사가 직접 온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겠지만 나가는 게 두려운 상황이니까.

그들에게도 서로의, 혹은 서로의 가족의 목숨이 제일 중요했으니까.

무엇보다 자신을 위하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살 수 있는 데까지는,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그렇게 생각하니 게임을 만드는 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약을 먹었더니 전보다 통증은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해서 더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원도 상당히 도와주었는데 실제로 일과 제일 많이 놀기도 해서 여러모로 참고가 되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유원은 그를 보며 묘한 질문을 꺼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뭐가?”

“굳이 이렇게까지 일이에게 해 주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유원의 그 질문에 그는 유원이 역시 최근 들어 감정적인 부분이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가족으로 받아준 것 같은 기분에,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는 웃으며 답했다.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사랑, 말함으로서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보다 아이를 많이 생각했음을.

그러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정으로 사랑하니 아픈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서, 그래서 그는 웃는 모습으로 끝내고 싶었다.

게임처럼.

모든 게 거짓은 아닐지라도 자신이 죽는 것을 한순간의 슬픔으로만, 적어도 마지막은 아픈 모습이 아닌 좋은 모습으로 끝내고 싶어서.

그래서 그는 게임에서 마지막을 보내기로 했다. 다른 가족들 역시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것 같았지만, 실제로 몸이 거의 한계일 정도로 손이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누구도 말리지 않은 건 그의 고집을 알아서였다. 결심한 이상 어떻게든 하려 할 테니까.

무엇보다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면 정말로 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임 속에서 그는 손자를 발견하자마자 속에서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욱하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오지는 않았지만.

굳이 게임을 하면서 이곳까지 오는 이유가 손자가, 일이 일부러 온 것을 알았다. 어릴 때부터 돌본 것도 있었고 같이 있던 시간이 적지 않았으니까. 일이 제 할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 그는 놀란 일을 보면서도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왜 선생님이에요?”

“글쎄다. 너를 항상 지켜보고 싶어서?”

그가 굳이 게임 캐릭터로 가족들이 참여할 수 있게 만든 이유가 있었다. 모두를 기억하고 싶었고 함께 있었다는 흔적을 남겨 놓고 싶었으니까.

즐거운 추억은 남겨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테니까.

비록 죽는 것이, 그 사람과 연관된 일이 모두 슬퍼 보이게 되더라도 슬프게 남기는 것보다 기쁘게 남기는 것이 나중에는 문득 생각나게 하는 그 조각 같은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자체로 소중한 일이라는 건 그 역시도 예전에는 잘 몰랐다.

물론 지금도 잘 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보다 한참은 어린, 앞으로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아이에게 쓸모없는 모습의 어른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어서 울 듯한 표정으로, 애써 눈물을 참으며 미소 짓고는 일을 끌어안았다.

“이제 다 컸네…….”

“그럼요 저 키 180이라고요.”

“맞아. 그리고 누굴 닮아서 잘생겼는지.”

“할아버지 닮아서 그래요.”

웃는 모습이 어딘가 닮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퍽 우스우면서도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몸이 멈췄던 것 같지만 그런 것은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모습을 다시 못 볼 수 있다는 게 무척이나 씁쓸했다.

그래서였을까.

일이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따 봐요.”

마치 금방이라도 다시 볼 것처럼, 일상과도 같은 그 말에 그는 웃어 버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래.”

일이 해 준 말은 그를 안심시키게 했다. 그러니까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아내가 언제나 그와 함께했듯 그 역시 가족들과 함께 있을 테니까.

이 역시 소중한 풍경일 테니.

“또 보자.”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는 잠들어 버렸다.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오래된 잠을.

보이지 않은 슬픔은 느끼지 않은 채로 그는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 남아버린 것은 하나의 추억이었다.

외전. End and

둘이서 같이 밖으로 나간 것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밖은 여전히 위험했다. 공기는 여태 그랬듯 좋은 적이 딱히 없어서 결국 일은 국가에서 준 옷을 입는 수밖에 없었다. 가방이야 가볍게 되어 있었으니 딱히 무리는 없었지만 가는 길 동안 아무 사람도 보이지 않은 건 너무 이상했다.

아무리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도.

세상에 전염병이 퍼져서 사람들이 많이들 죽어 나갔다고 해도 설마 이 정도까지인지는 몰랐다. 길거리에는 정말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벌레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유원이 다른 쪽에서 ‘인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것 때문에 목적지는 분명했지만 너무 멀었다.

“오늘은 이만 쉴까?”

“그래.”

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무거운 건 아니었지만 몸을 회복한 지 그렇게 많이 지나지도 않은 상황, 아직은 그렇게 오래 움직일 정도의 체력은 아니었기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충 근처에서 묵으려고 하다가 때마침 근처에 호텔이 보여서 묵기로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탁.

손목시계에 달려 있는 손전등을 켜면서.

“…역시 여기도 어둡네.”

“아무래도 때가 때니까 전기를 아껴야겠지.”

“그건 그렇긴 하지.”

이미 바깥과 차단되면서 먼지는 덜 들어오긴 했지만 전기가 일부 되지 않게 된 곳에서 옷의 먼지를 전부 털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바깥보다는 안이 낫긴 했지만.

계산도 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런 사태에 호텔에 사람이 없다면 그런 기계 장치가 과연 쓸모 있는 일일까.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만, 그것도 필요한 곳에만 전기가 나올 거였고 실제로 유원은 그런 곳을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통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는 괜찮은 것 같아.”

유원이 근처 센서에 손을 대자 곧 불이 켜져 예상대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빛을 따라 안으로 들어온 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엌?”

“그래. 아마 만약을 대비한 거겠지.”

부엌은 실제로 식수나 식량 같은 걸 생각해도 필요한 장소였다. 그래서 그들은 제일 먼저 물이 나오는지 확인하고 냉장고 안을 살펴보았다.

냉장고 안은 제법 재료가 많았다.

그래서 보자마자 바로 꺼냈다. 특히 어느 정도는 가방에 넣었는데 식량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많은 쪽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금방 상할 만한 것들은 넣어두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거나 몇 개는 오늘 먹을 것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그래서 적당히 고기와 야채를 이용해서 음식을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프라이팬을 꺼내려고 하는데 유원이 이미 들고 있는 상태로 그를 말렸다.

“내가 할게.”

“네가?”

“그래.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럼… 그러든지.”

솔직히 그로서는 요리를 별로 한 적이 없으니 유원에게 맞기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고기를 익히는 정도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 하는 게 더 제대로 될 테니까.

물론 일도 놀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식기를 찾아서 근처 테이블에 세팅을 해놓고 유원이 요리하는 근처에 접시 두 개를 가져다놓은 등 나름대로 제 할 일을 했으니까.

그렇게 완성된 요리는 과일이나 야채도 적당히 얹어져서 제법 식욕을 돋게 하였다.

“먹자.”

“그래.”

호텔 안의 레스토랑, 하지만 아무도 없는 둘만이 있는 자리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나름 호텔이라 초 같은 게 있어서 식사에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둘만 있는 상황이 이렇게나 이질적일 수 있다니, 그런 생각에 일은 웃고 말았다.

이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여전히 익숙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 있을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은 유원이 비슷하게 웃으면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배할까?”

“그럴까?”

어느새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옆에는 와인이 있었는데 그것도 무척이나 비싼 와인, 게임에서 봤던 그 와인은 아니지만 일은 그 와인을 보고 어쩐지 손이 가서 가져온 거였는데 유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었을 뿐.

유원은 애당초 일이 무엇을 하든 좋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죽으려고 하지도 않고 무언가를 하려는 게 정말 사람처럼 사는 것 같이 느껴졌으니까.

제대로 함께 있는 것 같아서.

게다가 때때로 신경 써주는 그 시선이 유원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좋다 생각하니 느긋하게 웃으며 와인을 따랐다.

그 움직임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워서 일은 물었다.

“와인 따르는 법 알고 있었어?”

“대충은.”

인간이 된다면 이것저것 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알아본 것 중에 하나였다. 와인이야 평소에 잘 관리하던 거라면 코르크 마개만 조심하면 크게 상하는 일은 없고 확인하고 대강 자신의 잔에 먼저 조금만 따라서 이상한지 아닌지 판별하고 난 뒤에서야 그는 두 잔에 동등하게 와인을 따랐다.

맛은 조금 쌉싸름하면서도 달았다.

특유의 냄새와 분위기는 고요한 분위기에 어울렸다. 챙 하고 부딪치는 잔의 소리가 그들 사이에 울리면서 식사가 시작되는데 서두르는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시간이 많았으니까.

일 역시 예전만큼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조금은 슬펐지만, 그럼에도 넘어가는 와인이나 고기의 육질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보며 유원이 새삼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우리 술 처음 마시는 거네.”

“그러게.”

게임이야 실제 몸이 아니었으니 그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마시는 술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일이 픽 웃어 버리자 유원은 그를 잠시 동안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는데 덕분에 일은 나 쳐다보지 말고 먹기나 하라며 핀잔을 놓았다.

생각보다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일은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평화가, 아무도 없어 보이는 이 도시가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너무나 일상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된 자신조차도 너무 이질적이라서.

모든 것이 이상한 것투성이였으니까.

그러니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이렇게 식사를 하는 것도, 유원과 둘이 있는 상황도.

유원 역시도 익숙하게 식사를 하고 찾은 빈방에 같이 갔고 방의 전기나 수로에 관해서는 하루 정도는 쓸 수 있게끔 유원이 적당히 손을 봤다.

애당초 호텔 자체를 갈아엎는 게 아니라서 다시 쓸 수 있게 해놔서 유원이 금방 손볼 수 있었다. 덕분에 샤워도 하고 침대에서 편하기 누울 수 있었다. 그래서 유원에게 먼저 씻으라고 했지만 그는 일에게 양보했다. 안 그래도 피곤했을 거라면서.

결국 일은 누군가의 고집 때문에라도 먼저 씻었고 유원 역시 씻고 왔는데 그는 나오자마자 생각했던 얘기를 꺼냈다.

“내일은 차로 가는 거 어때?”

“차?”

“그래. 아무래도 우리가 가는 시간이 적게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나마 같은 나라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둘이 이렇게 움직이는 데에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움직일 리는 없었다. 그나마 최근 뉴스를 봤던 유원이 일에게 그 관련 정보를 어느 정도 전달해 주었고 일은 대강 상황을 알아냈다.

이제 이 나라에는 사람이 없을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일이 갇혀 있을 당시에도 절반 이상이 이미 사망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시간이 지났다면, 해결 방법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병에 걸렸을 때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기적을 확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랄 수는 있는 거 아닐까.

그래서 일은 유원이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믿었다. ‘어쩌면’이라고 했으니 믿는다는 말도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면 찾아보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곳은 일의 할아버지 이전의 유명했던 천재 과학자가 빠르게 은퇴하며 잠적하고 있던 곳이었으니까.

만약 이런 사태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지도 모르지만 유원은 일 때문에라도 뭔가 목표가 될 만한 걸 찾아야 했다. 다행히 그는 컴퓨터를 잘 다루었고 실제로 기계 안에서 살았으니 그 내부에서 내부로, 다른 것들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런 정부가 움직이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쪽 관련해서도 정보를 뚫을 수가 있었다.

애당초 허술한 보안이었으니까.

그래서 전염병과는 먼 곳, 최근까지 소식이 닿은 곳 위주로 찾아봤으며 이번 사태에서 정부가 그 과학자를 찾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실종됐다는 사실도.

그러니까 모르는 거였다. 살아 있을지 아닐지는.

유원은 그의 나이를 짐작하며 사망 쪽에 더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지만 일에게 굳이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일 역시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가능성을 하나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굳이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을 테니까.

상처받는 모습을 또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일은 여전히 체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 걸을 수 있지만 딱 그 정도, 어느 정도 회복됐다고 해도 예전만큼의 체력은 아직 없었으니 적당한 차를 골라 탈 것을 제안했다.

그에 일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나 면허 없는데.”

“괜찮아. 자동 운전 기능 있잖아.”

요즘 차는 거의 자동이었다. 면허 없는 사람도 탈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이 달려 있어서 가능했다. 덕분에 택시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택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과학이 발전한 만큼 편해졌지만 또 그만큼 기계가 인간의 명령을 듣는다면 악용되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게다가 차는 여전히 비쌌다. 그래서 택시는 여전히 있었다. 차를 사기에는 비싸고 대중교통도 이용하기 어려울 때 그만한 게 없으니까.

그러나 일이 그것을 말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 봤자 그 기능도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안 되잖아.”

차는 시동이 걸려서야 비로소 움직인다. 그러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일은 곤란한 얼굴을 한 거였다.

그러자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된 유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거라면 문제없어.”

“뭐?”

“문제없다고.”

“…왜?”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하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게다가 이런 곳이니까 차 한두 개 정도는 숨길 수 있었겠지.”

은근히 뱉은 말은 묘한 의미가 숨어져 있었다. 유원이 굳이 호텔에 온 이유, 그리고 아래에 있는 주차장은 순식간에 일에게 어떠한 결론을 연상시켰다.

“설마…….”

“아마 예상하는 게 맞을 거야.”

“하지만… 부모님이나 할아버지가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있었어?”

가족들은 바빴다. 물론 일이 없었던 때가 있긴 했지만 그들 역시도 누군가의 감시 아래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일은 국가가 더는 일에게 간섭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풀려났을 때 가족들을 지켜봤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갔고 또 힘들게 헤어졌던 만큼 오래 함께 있었다.

그러니 가족들이 준비할 틈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연구원들 중에 몇몇이 준비한 차들이 있어. 그걸 타면 돼.”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마. 국가에서 지원받은 거니까. 너희 할아버지도 그렇고 여러모로 한 게 있으니까 국가가 지원해 준 거지. 그러니까 공용이라서 문제는 없어.”

마치 일의 심정을 짐작한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일은 남의 것을 훔쳐 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망설인 것도 없지 않았다. 이런 세상이니까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겨우 현실에 와서 무너지고 싶지는 않아서.

그동안 많이 무너졌다. 현실도피로 게임만 했었고 겨우 정신을 차린 상태에서 그런 짓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은 유원의 말이 다행이라 여기며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정말?”

“그래.”

일은 자신이 너무 부정했나 싶었다. 그래서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다가도 금방 자라는 유원의 말에 제대로 누워 이불을 덮었다.

그랬더니 유원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잘 자.”

일은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까 꽤 많이 움직였으니까, 안 그래도 여러 가지로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앞을 감싸는 팔이나 등 뒤로 들리는 심장 소리를 애써 모른 척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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