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28)

25. * *

그 뒤로는 별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학교에서 진짜 경찰이라도 부른 건지 몇 가지 말에 대답해 주었고 나와서 일을 봤지만 일은 별로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

일이 굳이 ‘비어 있는 시간’에 왔던 골목에 왜 왔는지도 알 것 같지만 유원은 그것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귀신이 있는 가게에 들려 부적을 가져오거나 ‘우리 집’에 들리는 것도 예상 범위였다.

집에 불을 지르는 건 사실 일이 이걸 없앤다면 무언가 해결이라도 된 것 같다고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달라질 건 없었다.

전과 비슷하게 병원에 오고, 병원에 있던 누군가와 만나서 밑으로 내려갔다. 그 밑이 일에게 항상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는 장소였지만 일은 잠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마 본인은 몰랐겠지만.

그래도 유원은 그 이유를 알았다.

유원만이 아는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게임에 익숙해진 모습이 일이 이상하다고 여긴 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로서는 더 뭘 하기도 어려웠다. 일을 지키는 일도 있고 앞으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까지 여러모로 바빴으니까.

그래서 다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늦게 알았지만 이미 누군가를 구하기에는 힘든 손으로 유원은 선택해야 했다.

일에게 다친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숨겼지만 들켜 버리고 만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 그거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뭐냐고.”

“…그냥. 아까 좀 다쳤어. 근데 어차피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겨우 이런 데서 다친 게 무슨 상관일까. 별거 아닌 상처일 뿐인데, 물론 고통이야 느껴졌지만 일의 고집은 강해서 결국 요구했다.

“손 줘봐.”

그 목소리에 바로 손이 나가야 할 텐데 쉽게 나가지는 않았다. 그만큼 망설인 탓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유원은 일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빨갛네.”

“괜찮아.”

“안 아파?”

“금방 나아… 윽!”

금방 낫는 건 사실이었지만 보이는 상처 역시 사실이었다. 그래서 유원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는데 그걸 일이 보고 말았다는 생각에 한숨을 쉴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아프면 말을 해.”

“하지만 진짜로 괜찮은걸. 그보다 넌 안 다쳤어?”

“덕분에.”

덕분에 안 다쳤다니 이보다 좋은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원은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레 미소 지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일이 싫어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게 유원으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또 그만큼 일은 제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이렇게.

“난 네가 헷갈려.”

“그래?”

“그래. 네가 나쁜지 착한지 알 수 없으니까.”

“나쁜지 착한지로만 사람을 나눌 수가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안 그래도 유원 자신도 게임을 끝내고 싶으면서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일에게 무엇이 답이라고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넘어간 대화는 어쩌다 다쳤는지에 대한 걸로 이어졌는데 결국 일이 기둥에 있을 때 다쳤던 것을 알아버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괜히 걱정할까봐 일부러 미움받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일은 그를 내쫓지 않았다.

필요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유원은 몇 번 말렸다. 말리기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이 게임을 계속하면 안 된다는 듯이 계속 힌트를 던져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에는 A에게 말한 장소까지 왔을 정도로.

예상이라고 했지만 사실 예상하고 있던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에 유원은 일부러 강한과 일을 방 안으로 보내고 귀신에게 협력했다.

“인질이 되겠다고?”

“그래. 나를 이용해.”

사실을 알면 일이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일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일을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말했고 귀신은 그대로 유원을 이용했다.

말하자면 협력 관계, 하지만 귀신은 정말로 순순히 협력하지는 않았고 강한이 유원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해 버려서 결국 그는 귀신을 잡는 방향으로 다시 태도를 바꿨다.

유원은 그걸 굳이 급하게 쫓지는 않기로 했다. 그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상황에 집중해서 최선의 방향을 생각하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게임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일이 다시 게임이 아닌 ‘현실’의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가까워졌다. 그 사실이 초조해졌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현실에서의 일의 마지막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유원은 일과 잠시 떨어지기로 했다.

얼마 동안 지켜본 것뿐이었지만 강한의 생각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았다. 그래서 아마 일에게 해를 끼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마 A가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일단은 상황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A……?”

갑자기 A가 보여서 붙잡은 것은 우연이었다. 급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게다가 A 역시 마찬가지로 유원을 보자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일이가…….”

“일이? 일이가 왜?”

“그게…….”

A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유원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졌지만 그럴 만한 일이라 별로 대수롭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일에 있어서 유원은 이상한 태도라는 것은 A 역시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나 유원이 말한 것 때문에라도.

“구급차를 부르지 말라고?”

“그래. 지금 바로 부르지는 말고 웬만하면 몇 분 있다가 해 줘. 그리고 조금 있다가 아까 있었던 데로 다시 와줬으면 좋겠어.”

“왜?”

A의 의문은 타당했다. 구급차를 부르고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편하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 때문에.

그 때문에 유원은 A에게 거짓말을 했다.

“사실 아까 그 애, 귀신이 됐던 적이 있거든.”

“귀신이라고?”

“그래. 그래서 현실이랑은 좀 다르게 인식하고 있어.”

조금은 동정심이 들도록 말했다. A는 특히 귀신에 당했던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 말을 하고는 바로 일에게 달려갔다.

더 늦으면 후회할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늦었다는 걸 몰랐다.

일은 심장이 찔리고 다리가 잘려 있었다. 강한이 뭔가 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A가 보는 데도 이 정도로 할 수 있다는 건 그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단번에 강한을 밀치고 일에게 갔다.

뭐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본능적으로 일을 치료하려고 했다. 괴로워하는 일을 외면하지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치료하는 것밖에 그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흐윽…….”

“미안해… 이렇게 아픈데도 몰라서.”

정말로 몰랐다. 이 정도가 됐음에도 몰랐다는 사실이 정말로 원망스러울 정도로. 그래서 유원은 일이 원망하는 표정을 지어도 그럴만하다고 여겨 최후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돌아갈 수 있다며.”

“맞아. 돌아갈 수 있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태처럼 부정할 수 있었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일이 게임의 끝에 올 정도로 원했으니까.

“어떻게?”

“날 죽이면.”

“…뭐?”

“날 죽이면 돼.”

물론 죽이면 다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야 나가지 않을 테니까.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아서.

정말이냐고 묻는 일은 믿기 어려운 것 같았다. 하지만 강한은 무슨 생각인지 웃으면서 그 말에 동의했다.

“내가 말했지? 쟤 일부러 시간 끌었던 거라고.”

“…….”

“그게 한 번이 아니야. 한두 번이 아니지…. 그래서 내가 태어날 여지가 생긴 거지. 게임에 오류가 생겼으니까. 그리고 그 오류가 너야.”

일을 가리켰다. 그게 일부러라는 걸 유원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일은 애당초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완전하게는 모르겠지만 대강은 추측할 수 있었기에, 아니 일이 짓는 표정이 좋지 않은 그 상태로 고개만 숙이고 있어서 그는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아 있는 그대로의 말로 강한이 했던 말을 반박했다.

“너는 오류가 아니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지.”

아마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최후의 고백, 유원은 일에게 고백하면서 어느 쪽이 나은지 모르겠다 여겼지만 일이 게임을 진행하면서 하려고 했던 일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말했다.

일이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나는 내가 겪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네가 또 슬퍼하면서 돌아오는 게, 그런 게 싫었던 거지. 그런데 그게 널 상처 입히고 말았네……. 미안해.”

누구보다 솔직한 진심을 얘기했다. 물론 전부를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섣불리 일의 기억을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게임을 끝내려 했다.

“게임에 바이러스까지 생긴 걸 보면 알겠지만 게임은 이미 많이 망가졌어.”

“그럼…….”

“그래서 이 게임은 조만간 붕괴될 거야. 네가 나가지 않더라도… 여기가 없어진다는 건 사실이지.”

“왜 없어지는 거야? 여태까지는…….”

“영원한 건 없어. 그러니까 사라지는 거야.”

말하면서 깨달았다. 일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이대로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생각을 해서 강한에게도 비슷하게 말했다. 너도 마찬가지라면서.

그걸 강한은 역시 알고 있었다는 듯이 수긍했다. 조금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었지만 유원이 자신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유원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게다가 일이 당한 일도 있어서 일에게 처분을 맡겼지만 일은 정작 A를 찾았다. 그러나 강한의 태도는 어쩐지 변하지 않았고 유원을 거짓말쟁이라 했다.

유원 역시 게임 캐릭터가 아니었다면서.

그것을 콕 집어낸 바람에 일의 시선을 받았지만 긍정했다. 그러면서 A를 불러왔다. 복수라면 복수였고 한편으로는 마지막에 대한 선물이기도 했다.

덕분에 강한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내기도 했다. 예상대로 A의 안에서 만들어진 인공지능과 흡사한 바이러스였다. 물론 그걸 바이러스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하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둘이 알아서 빠져준 덕에 그는 일과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를 시간을.

“넌 대체 뭐야?”

일은 그렇게 물었다. 어쩌면 이제야 제대로 물은 걸지도 모르지만 그 물음이 유원에게는 꽤 반갑게 느껴졌다.

“글쎄… 너처럼 진짜인 사람은 아니야. 그렇다고 게임 캐릭터도 아니지만.”

“그럼 아까 강한처럼…….”

“바이러스도 아니지.”

“…그럼 뭔데?”

뭐라고 답해야 할까. 유원은 그걸 몰랐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그는 더 좋은 대답을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무엇인지 정의 내릴 수 없었으니까.

“…나한테 말해 줄 수 있는 건 뭔데. 여태 날 속인 거야?”

“의도는 아니었지만… 네가 그렇다고 느꼈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말해 주고 싶어.”

“뭘.”

“네가 여기로 나가는 게 더 위험하다고.”

실제로 그랬다. 언제나 힘든 표정을 지었으니까. 예전에는 좋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때는 지났다. 가족도 없다면서 스스로 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것만큼 잔인한 일이 없을 테니까.

일이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그와 약속했으니까.

“…근데 게임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일은 당연히 반박했다. 그 말에 유원은 조금은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역시 일은 목숨을 걸어도 밖에 나가는 게 좋을까 싶어서.

그래서 게임이 아니라고 가상 현실에 있는 것도 제안했다. 물로 소용은 없었지만.

“돌아가는 건 어떻게 하면 되는데?”

“아까 말했듯이 나를 죽이면 돼.”

“…넌 그래도 괜찮은 거야?”

“괜찮아. 나도 꽤… 지치기도 했고.”

몇 번이나 해온 게임, 게임을 잃었음에도 항상 선택하는 건 게임의 끝이었고 그 과정과 끝에서는 항상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 건 아니었다.

유원은 이미 많은 과정을 통해 단 한 번의 ‘포기’를 선택해야 했으니까.

“…꼭 내가 죽여야 되는 거야?”

“그래. 너 외에 다른 사람은 찔러도 소용없거든.”

“대체 왜…….”

“글쎄, 왜일까.”

이 게임을 계속 진행하는 게 유원이었다. 여태 귀신이 죽어도 게임이 끝나지 않은 건 그 탓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으면 원래 진행하려던 게임이 끝난다.

그저 그뿐이었다.

“…넌 진짜 이대로 끝나도 괜찮아?”

조심스레 묻는 기색은 어떻게 보면 유원을 생각해 주는 거였지만 그럼에도 이미 선택한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란 걸 알았다. 그래서 유원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이제는 포기해야 하는 때라는 걸 알았다.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라면, 그렇다면 일을 기억을 찾아도 용서해 주지 않을까.

용서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괜히 자신이 마음을 바꾸고 행동할지도 몰라 일을 재촉했다. 칼을 쥐게 해서 자신을 찌를 수 있도록.

비록 떨고 있을지라도, 어차피 수만 번 후회할 거면 딱 한 번 후회하는 게 나을 테니까.

“내가 도와줄까?”

“…아니. 하지만 난… 너한테 정말로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왜 없어? 네가 내 눈앞에 이렇게 나를 생각해 주고 있는데.”

최근에는 정말로 일이 유원을 생각해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유원은 예전의 일을 기억한다. 밝게 웃으면서 여러 가지를 해 주려던 그저 평범했던 한 소년을.

“마지막으로 해 줄 건 없어?”

“글세… 그러면 내가 맘대로 너 만져도 돼?”

“그건…….”

“농담이야. 그냥 안아줘.”

언제나처럼 무언가를 받으면 꼭 무언가를 해 주려고 했던 것 같이 굴었다. 그게 무언가 생각나게 했다. 무엇보다 일은 말했다.

고맙다고.

무엇 때문에 고맙다고 한 걸지는 모른다. 하지만 유원은 이 말이 언제가 되더라도 쉽게 잊기 힘들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키스를 했다. 그냥 아는 대로, 원하는 만큼을 탐내려다가도 일의 흔들리는 눈에 금방 포기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하아… 하아….”

“…그러니까 함부로 허락하지 말랬잖아.”

허락해 버리면 어디까지 갈 줄 모른다. 이미 감정에 휩쓸려서 자제는 잘 모르니까. 하지만 유원은 ‘마지막’이라는 이유 때문에라도 좋게 끝내고 싶은 마음에 멈췄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꺼지지 않았지만.

“빨개졌네.”

“…너 때문이잖아.”

“그래. 그러니까 이제 날 죽이면 돼.”

그 말 그대로 자신을 찔렀다. 당황한 일 때문에 오히려 차분해진 유원은 설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은 진정할 수 없었지만.

“…왜…….”

“하나 더 말해 주면 너는 언제나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어. 그래도 너는 여기보다는 밖이 좋을 테니까… 그러니까 약속을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어겼네. 미안해.”

왜냐는 물음에 답해 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유는 설명했다. 어쩌면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을지 몰라도, 그래도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그걸 깨달은 그는 일이 무언가 하려고 한 걸 그대로 모른 척하며 전부터 계속 궁금해했던, 단 한 가지의 진실을 말했다.

‘유일아.’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존재가 하나는 있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싶어서.

그렇게 그는 눈을 감았다.

절대 일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용서받기 힘든 짓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절박했다.

그래서일까. 그 절박함이 정말로 기적을 일으켰다. ‘어쩌면’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가능성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일아.”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유원은 일을 보며 이름을 불러 보았다.

그는 이제야 ‘유원’이었다.

(공포 게임 탈출기 완결)

공포 게임 탈출기 2권<완결>

전자책 발행 : 2019년 5월 15일

지은이 : 중임무황태

편집 : 김혜진, 송은주

표지 일러스트 : 류은립

표지 레이아웃 : 유성아

발행처 : (주)조아라

서울특별시 금천구 가산디지털1로 131

BYC하이시티 B동 2104호

(http://www.joara.com)

등록번호 :

제331-2007-000002호(2007.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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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 2,500원

ISBN : 979-11-327-5504-3 05810

ISBN : 979-11-327-5502-9 (set)

Copyright(C) 2019 중임무황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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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외전. 할아버지와 가족

외전. End and

외전. 할아버지와 가족

세상에는 모든 것이 제각기 시간을 지닌 채로 살아간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 역시 그렇게 느꼈다. 그는 세상의 일부였다. 또한 세상 자체이기도 했다. 어릴 때도 부족한 것이 없어 부유했고 특히 천재적인 면모로 과학자가 되었을 때는 부모나 친구들 모두가 자랑스러워했다.

그만큼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바쁘긴 했지만 덕분에 상도 받고 좋은 사람도 만나 결혼했다.

그만큼 기뻤던 일도 없었다.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아이가 점차 성장하고 그것을 아내와 함께 지켜보는 일은 가끔 곤란한 일도 있기야 했지만 즐거운 일이어서 여자와 함께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가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 무렵, 그의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주변 사람들에 비해서 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앞으로 최소 5년에서 10년 정도는 같이 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도 제법 나이가 들었기에 언제 갑자기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내가 떠난 것은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하루는 굶다가도 자신의 아이, 아들 부부 때문에라도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아내는 떠났지만 소중한 가족들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괜찮아 보이려고 노력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들과 더 많이 있어 보려고 하기도 했고 연구에도 때때로 매진하면서 보내다 보니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괜찮게 지낼 수 있었다.

손자가 태어난 건 그런 때였다.

“우응…….”

“아기 봐요. 예쁘죠?”

“그러게.”

유리벽 너머로 본 아이, 마치 제 아들이 태어났을 때 같아서 감회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아내가 떠나가고 나서 처음으로 본 ‘태어난’ 생명이었다.

그 때문일까. 왠지 모를 특별함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쳐다봤더니 아들 부부는 그것을 보고 속닥거리다가 이내 그의 며느리가 말을 꺼냈다.

“아버님, 아버님이 아이 이름을 지어 주실래요?”

“아이 이름을?”

“네. 잘 지어 주실 것 같아서요.”

그 말에 그는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들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렇게 크게 고민하실 것 없어요. 부를 때 이상한 별명이 안 되는 정도만 되면 괜찮고, 정 이상하다 싶으면 나중에 개명하면 되고요.”

하나하나 해오는 말에 그는 어김없이 떠오르는 과거를, 그리고 현재의 웃고 있는 가족들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딱 하나 단어를 끄집어냈다.

“…유일.”

“유일이요?”

“그래. 하나뿐인 내 손자니까.”

“그거 좋은데요?”

“그러게요.”

웃으면서 좋다고 말할 정도로 그 이름은 모두가 즐겁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에게는 정말로 특별한 선물처럼 되어 버렸다.

마치 죽음과 맞바꾸어 태어난 생명 같아서.

인공지능 하나를 완성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원래는 오래도록 하던, 아내를 잊기 위한 개인 연구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아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만든 게 계기였지만 덕분에 아내와는 전혀 다른, 오히려 손자와 비슷한 또래의 이미지를 가진 인공지능이 화면에 비칠 때는 기분이 이상했다.

여자보다는 남자로, 어른보다는 아이인 이미지를 가진 인공지능은 사실 너무나 무뚝뚝해서 처음에 인사할 때는 웃음기는 있었지만 다른 인공지능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무언가 다른 거라도 기대했던 걸까. 왠지 그 인사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 위로가 됐다.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족들에게는 우울하다는 말을 들을까 봐, 혹은 슬프게 만들까 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내 이름이 왜 A인지 아니?”

―왜요?

“이름을 버려서 그렇단다.”

―그렇군요.

물론 대답은 정말로 기계적이었지만. 그렇지만 그는 계속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기분이 무척이나 편했으니까.

“내 이름은 아내가 죽은 다음 날에 버렸단다. 왜 그랬냐면… 내 아내가 있었다는 걸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그는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다. 밖에 공기가 좋지 않아도 굳이 나가서 꽃을 보려 했고, 나무를 사랑해서 둘이서 자주 나가서 해가 지는 것까지 본 적이 있었다.

그 쌀쌀한 바람의 기운과, 따뜻했던 기분을, 너울너울 넘어가는 풍경을 누가 감히 똑같이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때밖에 할 수 없는 거라고, 그러니까 이름도 단 한순간으로 결정해 버린 일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명예 따위 죽으면 무의미하니까.

가족들이 조금 반대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얼굴이 진심으로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많이도 수척해져 있어서인지 쉽게 허락을 받았다. 그래서 이름을 버려 새 이름을 구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어도 다른 사람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을.

A라고.

겨우 알파벳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두고 싶은 이름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름은 죽은 아내를 위해, 그녀가 가지고 가줬으면 했으니까.

물론 인공지능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많은 것을 들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특별한 존재였다.

특별함은 결국 의미를 낳았다.

손자와 같은, 그러나 다른 의미의 특별함이었다. 무엇보다 유일이 태어난 시기와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니까.

그래서 다른 기능을 추가했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인간처럼’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성장의 가능성이 있는 기능을.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별로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혹시 모를 때에 대비해서 인간에게는 거역하지 못할 정도의 제어는 둔 채로.

누군가가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해도.

“다 됐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손본 뒤에 그는 말했다. 완성된 것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화면에 비친 유원의 모습을 보면서.

“너는 이제부터 질문에 선택지가 생기면 답이 여러 개인 경우가 있을 거야.”

―그렇군요.

“그래. 하지만 답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만 말하게끔 해놨어.”

―그건 논리적이지 않은데요.

“알아. 그래서 만든 거야.”

꼭 논리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에게 이제 논리적이라는 것은 꼭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감정적으로 변해야 할 인공지능에게 말을 걸기로 다짐했다.

말을 많이 할수록 그 감정을 자각하는 범위가, 선택이 아닌 선택을 하는 경우가 늘어날 테니까.

그러니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이름을 붙여 주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유원이란다.”

유원, 그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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