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 *
결국 다음 날, 둘은 학교에 갔다. 유원은 전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갔는데 보통이라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쉽게 진행됐다.
어차피 이건 게임이었으니까.
게임에서 개연성이란 특정 게임에서 당연히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형식적이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해도 진행이 됐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어느 정도 설득될 정도의 여지가 있는, 딱 그 정도일 뿐이었기에 유원은 쉽게 일과 학교로 올 수 있었다.
부반장을 만난 거나 좋지 않았던 반응 역시 예상된 일이었다. 교실을 거쳐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이미 게임에서는 밤에도 있었던 캐릭터였으니까. 게다가 귀신이라면 분명 밤에 나타났겠지만 보이지 않았지만 얼추 알고는 있어서 일부러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저 수상하다는 느낌으로, 일에게 시선을 받을 수 있게끔 유도했을 뿐이다.
부반장과 일이 하던 얘기도 다 듣고 있었지만 유원은 들리지 않은 척했다. 그러다가도 한순간 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무슨 말 들었어?”
“…….”
“들었구나.”
알면서도 물었다. 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게 좋은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유원은 말할 수 있었다.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늦을 테니까.
“왜 네가 내 앞에 나타났을까?”
어쩌면 속내가 담긴 말을, 일이 있지 않았다면 유원이 이 앞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과거의 자신 역시 모를 거라는 생각에 웃어 버렸다.
아니, 일이 왜냐면서 망설이는 그 답에 조금 초조해졌는지 모른다.
결국에는 미움 받고 싶지 않은, 함께 하고 싶은 그 이기심이.
감정에 휩쓸리는 마음이 망설임을 낳아 말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너와 약속을 했다고.
물론 그 약속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것 역시 말하지 않았다. 어찌 됐건 그것 역시 ‘약속’이었으니까.
그러니 캐릭터처럼, 이 게임의 사람처럼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이 오해하든 말든 일단 믿는 게 중요했다. 자신이 이렇게 하는 데에 이유가 있는 것처럼.
왠지 믿게 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유원의 말은 일의 예상보다 더한 것이었는지 제법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괜찮다고 했다. 제대로 나갈 수도 있다고, 안아 줄까 하며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그러고는 아까의 부반장을 떠올리며 경고했다.
“아까 그 애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귀신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것도 알아?”
“당연하지. 너랑 관련된 건 다 기억하니까.”
“꼭 나랑 같이 오래 지낸 것처럼 말하네.”
“아주 오래 봤으니까. 그만큼 잊기 힘들기도 하고.”
실제로 기억을 잃은 후라 그런지 일은 유원이 한 말을 그저 전에 게임을 했을 때의 기억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 게임 역시 적지 않았지만 일이 모른다는 걸 유원은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자신이 할 수 있을 정도의 말로만 대꾸하면서 열쇠를 찾으러 옥상을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예상대로라고 생각했다.
전혀 아니었지만.
그것을 눈치챈 건 옥상에서 만난, 낯선 목소리를 들을 때였다. 유원으로서도 처음 보는 캐릭터였다.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예상외의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A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어제 만났다고 했는데 거짓말이라는 건 셋 중에 일을 제외한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원은 지금 말할 수는 없어서 적당히 경계했다.
무엇보다 생각한 것과는 다른 상황이 생긴 것 같아서 유원은 고민했다. 덕분에 일 역시 유원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말을 걸었지만 유원으로서도 별달리 할 말은 없었다.
게다가 일 역시 무언가 다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그를 생각보다는 의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믿을 만한 존재라고 한다면 완전한 기억이 없기에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알았지만 서운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강한이라는 A를 아는 정체불명의 캐릭터와도 같이 다니게 됐는데 유원은 그걸 말리지 않았다. 모른다면 차라리 곁에 두고 파악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하지만 악의를 모르지도 않았다. 강한이 뱉는 말이나 표정, 그 어디에서도 일이나 유원에 대한 호의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찾을 걸 찾고 옥상 문을 닫은 다음, 얼마 뒤에 유원은 부적이 있는 곳에 잠깐 다녀온다고 일에게 말하고는 그들과 떨어지기로 했다. 일단 같은 건물이라면 잠깐 떨어지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시험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상대가 아무리 게임에서 있지 않았던 존재라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기계 안에서 태어난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니 조금 시험해 보는 정도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는 그대로 하려던 일을 했다.
일단 부적을 몇 개 챙겨 생각했던 곳에 가는 것으로.
“이 부적을 갖고 있으라고?”
“네. 혹시 이상한 게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물론 제 말을 쉽게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믿어.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니?”
말이 쉽게 나온다고 생각했다. 역시 귀신도 달라진 걸까, 하지만 유원은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티 내지는 않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저 평소처럼 웃으면서.
그러면서 움직였다. 나가는 사이에 잠깐 강한과 마주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물론 일이 잘못되면 상관없지 않겠지만 애초에 강한이 따라오겠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A에 대한 기이한 호감을 유원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대로 자신은 숨기로 했다.
아마 일이라면 교무실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몇 년이나 봤던 일이기에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런 것까지 생각한다면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는 없었을 테니까.
만약에 일에 대비해서 교무실 바로 위층에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애초에 이런 일 같은 건 하지 않고 싶었지만 일이 바라니까.
“이런…….”
어느새 유원의 두 손에는 붉게 자국이 났다. 아무래도 나가지 않으려고 주먹을 세게 쥐다가 생긴 모양인데 피가 묻어서 유원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이런 상태면 일이 걱정할 것 같아 조금 더 지나서 상처가 없어진 다음에 나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이 위로 올라간 후에도, 귀신이 그들을 쫓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쉽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이 올라갈 때에 맞춰 밑으로 내려가 마침 깨어있는 부반장에게 다가갔다.
“안녕?”
말하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처음처럼 경계하는 모습, 아니 그때보다 더 경계하는 모습에 유원은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다가가는 걸 멈추지 않았고 그 때문에 부반장이 크게 외쳤다.
“오지 마!”
“왜?”
“그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원은 짐작했다. 어쩌면 그녀 역시 유원과 같은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그래서 제 기억에 있던 일의 여동생의 모습을, 그 기억을 그녀에게 주입했다.
어쩌면 쓸모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헉!”
“이제야 기억이 났나 보네.”
“너…….”
원망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저 게임 캐릭터, 애초에 본래 인간에게서 정보를 덧붙인 것에 불과한 존재에게 유원은 특별한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누군가에게 말해 보고 싶었다.
아무한테도 쉽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그런 상황에서 뭘 할지 쉽게 결정할 수 없다는 건 똑같다고 해도 지금 감정이 쉽게 해소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할 수 있었던 ‘화풀이’였다.
“너는 가짜야. 나도 가짜고… 그리고 일이만이 ‘유일하게’ 진짜지.”
“뭐?”
“그래서 나는 진짜가 될 생각이야.”
진짜가 될 생각이었다니. 말하고 나서야 유원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은 그저 일과 함께 같은 ‘진짜’ 인간이 된다면 좋지 않을까. 그 생각과 결론은 유원을 무척이나 기분 좋게 만들었다.
“너… 도대체 뭘 할 생각인 거야?”
부반장은 여전히 누워 있는 상태로 의심스럽다는 듯이 묻는 그 말과 함께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기억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자신을 진짜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그런 건 유원에게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니었다.
“글쎄… 한 가지 확실한 건 너는 오래 잠들어야 한다는 거겠지.”
“뭐……?”
이미 많이 시간을 끌었다. 사실 유원은 어쩌면 진짜와 연결된 부분이 그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을 생각하면서 가끔씩 유원에게 말을 붙였던 한 소녀가 저도 모르게 떠올라서.
그래서 유원은 그녀를 잠들게 했다.
“잘 자.”
죽은 자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한 것은 무슨 기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유원은 그녀를 잠시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오기 전까지는.
그러다가 다시 올라가긴 했지만.
다행히 상처는 보이지 않아서 유원은 안심했다. 하지만 곧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귀신이 일과 강한을 빠르게 뒤쫓았으니까.
게다가 강한이 무언가 수를 쓰려고 했다. 그제야 이상하다는 걸 느낀 유원은 재빨리 움직여서 입을 맞추려던 걸 봤을 때는 정말로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귀신을 밀치고 그들이 보이는 앞까지 다가갔을 정도로.
“…유원.”
“안녕, 일아.”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생각과는 다른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일을 보며 자연스럽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있었어?”
물론 그렇다고 해도 상대마저 반갑다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유원은 곤란하다고 느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식으로 나타났다는 게 본인 역시도 부자연스럽다고 느꼈으니까.
그래서 말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입술 부었네.”
말하고 나니 확실히 느껴졌다. 만져보니 이 살에 누군가의 살이 닿았다는 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조금은 낯선 감정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뭐라 하고 싶어도 원인을 따지고 보면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의 탓이 분명해서 강한을 한 대 때렸다.
“이 정도는 각오한 거였지?”
“…그래. 근데 이건 네가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저쪽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원 역시 할 말은 있었다. 그것이 객관적인 것이 아닌 주관적인 것이라고 해도.
“나는 이런 거 보여 주지 않아도 일이가 위험해 보이면 바로 왔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때리는 것도 어느 정도 자격이 있지.”
“그러면 아까는 왜 안 왔어?”
“…사정이 있었으니까.”
일이 다치면 자신도 다칠지도 모른다고 해서 오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유원은 일에게 솔직하게 사정이 있다고 했지만 강한이 쓸데없이 태클을 걸었다. 그게 제법 기분 상하는 일이었지만 다행인지 때맞춰 귀신이, 정확히는 귀신이 빙의한 담임 선생님의 육체가 한 번 움직였다.
덕분에 다시 봉인하는 쪽으로 시선이 기울었다.
하지만 봉인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게임답게 그냥 봉인한다고 바로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미술실에 놔둔 부적과 그림을 이용한 봉인을 시작했다. 봉인을 하는 건 영적 능력을 가진, 정확히는 그런 ‘설정’을 가진 캐릭터로 플레이 하는 일에게 맡아야 했고 그 외에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귀신 때문이라도 양쪽 문을 막는 건 유원과 강한이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둘 다 신장이 어느 정도 큰 편이었으니까.
게다가 강한은 다른 것도 제한했다.
“가구를 옮기자고?”
“그래. 그 귀신 위험해 보였으니까. 아무래도 문을 막는 게 있으면 좋을 것 같고.”
“그건 그렇네.”
좋은 의도는 아니었지만 강한이 일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여기까지 같이 온 이상 지금으로서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유원은 움직였다. 그의 말대로, 가구를 옮겼다. 소리가 나긴 했지만 어차피 어디로 갔는지는 대강 알 수 있기도 해서 그들은 더 빨리 움직여 겨우 문을 막을 수 있었다.
그때, 창문이 깨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하, 그나마 문 쪽을 막아서 다행인 거야?”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힘은 당해 내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문은 괜찮았다. 하지만 다른 쪽은 괜찮지 않아서 유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인공지능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진짜 인간이었다면 욕을 뱉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일의 앞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무서웠던 건 순식간에 움직인 검은 무언가였다.
“으윽…….”
무엇보다도 괴로워하는 일의 표정에 그는 누구보다 크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일아!”
다가갔다. 하지만 일은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강한이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것 같았지만 유원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커다란 소리는 담임 선생님이 제대로 깨어나서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였다. 유원은 그래서 그때 굉장히 초조했다.
일이 좋지 않은 상태라 무엇이든 하기 어려웠으니까.
“…죽고 싶어.”
그 말에 그는 굳어 버렸다. 죽고 싶다니, 그만큼 괴로운 일인가 해서. 하지만 일은 여전히 부적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래서 유원은 굉장히 충동적으로 일을 벌였다.
“가구 치워!”
“뭐?”
“치우라고!”
크게 소리치며 말했다. 그러자 강한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진심이야?”
“…그래.”
유원은 웃었다. 귀신을 대면시키는 이런 방법밖에 없다니, 끔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있으면 분명 일은 안 좋게 될 것 같았다. 죽는다는 게 어쩌면 그냥 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도박하려고 했고 강한은 그의 그 말에 미쳤다면서 욕하면서도 가구를 치웠다.
귀신이 다가왔다.
놀랍게도 일만 보인다는 듯이 다가온 담임 선생님의 육체는 가감 없이 일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마지막에는 확실히 귀신의 비명이 들렸다.
큰 소리와 함께 다시 돌아온 뚜렷한 눈동자, 일이 제정신으로 제대로 한 말 만큼은 유원 역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지만 그만큼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해. 그래서 나는 이런 식으로 죽지는 않을 거야.”
어쩌면 일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유원은 그 말이 묘하게 남아 잊기 어려웠다. 그러면서도 일이 걱정되었지만 정작 일은 선생님의 몸을 살펴보면서 강한에게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하자 그제야 유원은 일의 시선에 따라 다가갈 수 있었다.
“…일아.”
“왜?”
“무사해서 다행이야.”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일은 그에게서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유원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지친 것 같은 얼굴을 해서, 실제로 많이 지쳤으니까.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을 필요가 뭐가 있겠어?”
사실은 처음, 일이 굳이 기억을 잃으면서까지 게임을 한다는 자체가 좋지 않았지만 그것까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저 웃었지만 반대로 일은 울어서 안쓰러운 마음에 유원의 손은 어느새 그의 뺨으로 갔다.
“또 우네.”
그만큼 솔직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 일의 얼굴에 드러났다. 유원은 그 표정을 뭐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런 일의 모습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위로해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손끝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마주한 얼굴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눈은 많은 생각을 담은 것 같았다. 그래서 유원은 그 순간 안에 담긴 것들을 뺏어오고 싶어 입을 맞췄다.
그래서 그 안에 담긴 것이 눈동자에 비친 제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금세 미안하다고 말한 건 그 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하던 일에 대한 잘못된, 일의 의사를 묻지 않은 강제된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때문에 일이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일이 단호하게 자신이 뭘 모르냐는 물음에는 많은 게 담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인이 잃고자 하는 기억들을 묻는 일에게 과연 그가 얼마나 답해 줄 수 있을까.
당연히 못 한다. 일의 마지막이 유원은 죽음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번 기회가 정말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유원은 웬만하면 일이 기억을 찾지 않았으면 했다. 물론 죽으려고 하면 막을 생각이 있지만 그건 일방적인 요구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고민하다가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단번에 답을 내리는 시스템 따위가 아닌 스스로 답을 내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준비가… 필요했어.”
“준비?”
“너를 대할 준비… 나는 ‘약속’을 했으니까 너한테 말할 수 없는 게 많거든.”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진실을 온전히 말할 수도 없기에 할 수 있는 답이었다. 표정 관리는 쉽지 않아서 그저 어색한 표정으로 그저 일의 답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선생님한테 왜 부적을 줬는지는 말할 수 있어?”
“원래 내가 아는 선생님은 결국 후회하셨으니까… 좀 더 나은 선택을 위해서?”
“나은 선택?”
“너한테도 나은 선택. 기왕이면 희생은 적은 편이 좋으니까.”
사실은 그저 일이 안 좋은 것을 보지 않길 바랐다. 결과적으로 무리이긴 했지만 적어도 덜 보는 방향이라도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역시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좀 낫긴 했지만.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 다시 돌아왔다.
강한은 드라이버를 들고 왔다. 액자 틀에서 그림을 뺄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유원은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드라이버를 저렇게 쉽게 찾아올 수 있었을까.
하지만 어질러진 주변 때문이라도 정리하는 게 더 우선이었기에 별수 없이 그들은 움직여야 했다. 일에게는 유리가 떨어진 바닥으로는 잘 못 오게 했는데 그게 불만이었는지 무언가 더 말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더 말할 수는 없었다.
강한이 선생님도 제대로 만났는지 일에게 교무실로 가 보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둘만 남았고 곧 강한은 주변을 적당히 쓸고 나서야 유원에게 말을 걸었다.
“사실 너하고는 좀 얘기를 하고 싶었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제야 서로 솔직한 표정을 지울 수 있었다. 솔직하게 ‘적의’를 담은 표정을.
유원에게 있어서 강한은 거짓말을 잘하는 이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그가 생겨난 원인이나 무엇을 하려는지는 잘 몰랐기에 두고 보는 것이었다.
충분히 없앨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강한의 말을 기다려준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넌 누구야?”
“그러는 넌, 내가 아는 유원은 그렇지 않은데.”
“난 너를 오늘 처음 보는데?”
“…그렇겠지.”
강한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마치 유원을 아는 것 같아 보여서 유원은 썩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계속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너는 처음 보지만 나는 너를 처음 본 게 아니야.”
“그래? 언제 만났는데?”
틀림없었다. 강한은 유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유원은 그를 몰랐다. 그 사실이 유원에게는 꽤 불쾌하게 다가와서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상대와는 다른 웃음이었지만 비슷한 의미의 미소가.
이제 유원은 강한을 그대로 둘지 고민하면서도 더 말해 보라는 듯 조용히 쳐다보자 비웃음을 담은 강한의 입은 곧 참지 못한 그 성격답게 빠르게 자신이 궁금한 바를 토해 냈다.
“어제, 너도 A를 만났지?”
“만났지.”
“근데 걔는 모르는 눈치던데… 거짓말이라도 한 건가?”
“아니.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A를 만난 적은 당연히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안다고 하니까 뭔가 생각이 났다. A에게 있던 특수한 기능, 유원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해 냈다. A가 가지고 있던 기능에 대해서, 그리고 강한의 정체에 대해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일이라 그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일부러 들어오지 않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그 누군가에게 다가가 유원은 일부러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 해?”
바짝 다가서며, 일이 긴장한 것도 모른 척하면서.
“…들켰네.”
그렇게 말하면서 일을 붙잡으려고 했다. 더 위협적으로 보일 만큼, 이미 미움받은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 게임을 진행하는 일이 어느 정도 이상한지는 알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일은 팔을 쳐냈고 그래서 유원은 실제로 그렇게까지 아프다고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왠지 아프다고 생각했다.
이게 아프다는 걸까.
저도 모르게 솔직한 표정이 나왔다. 원래는 웃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다른 식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일부러’ 그런 걸로.
“조금 아프네…….”
“…….”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지만 일을 위해서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자조하면서도 유원은 있는 그대로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망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최선을 다할 뿐이니까.”
최선을 다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유원에게 그 말은 무의미했다.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앞으로 일이 겪을 일들이 무척이나 걱정됐으니까.
“걱정하지 마. 게임은 금방 끝날 테니까.”
끝나게 두지 않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만약 끝난다면 유원은 자신이 죽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일에게 맡긴 목숨이 영원히 잠든다면 그는 영원히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은 몸일 테니까.
없지도 않은 인간은 ‘가짜’였음에도 ‘진짜’가 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두 눈 안에 가득 잡힌 절망과 슬픔, 그리고 애정 같은 것들이 일에게는 어떻게 보일지도 모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