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 *
역시라고 해야 하나. 내 예상대로 나는 기억을 찾았지만 나는 내 생각보다는 꽤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니면 꽤 익숙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이랑은 많이 달라서 그런가.”
나는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했다. 결국 나는 현실을 놓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걸 알아서일까,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번 게임에서 나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는 내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란 걸.
오류라는 게 쉽게 발생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강한의 말을 떠올려보면 아마 처음부터 그렇게 프로그램이 되어 있었다는 건데 그러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이건 할아버지가 했을지도 모른다.
괜한 추측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그랬다.
유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임과 다르게 움직였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물론 유원은 비밀로 한다는, 그러나 내가 정말로 원했을 때는 말해도 된다는 얘기를 잘도 지켰다.
그게 괜히 더 얄밉게도 느껴졌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원의 노력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최선을 다해 줬고 결국 나 역시 그만큼 진심을 봤으니까.
게임 속에서의 존재들을 인정했고 내가 많은 걸 놓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으니까.
부반장만 봐도 전에 나한테 말을 전해 준 그 의미는 여동생이었다.
데이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기억, 오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잊히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가족들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진짜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래도 어쨌든 그들도 세상의 ‘일부’였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일기장을 덮었다. 덮고 바로 유원이 있던 그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나쁘다니까…….”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제일 나쁜 짓이었다. 하지만 유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버튼을 누르고 암호를 입력했다.
‘You want.’
왜 이런 식으로 정했는지는 모른다. 누가 정했는지도, 하지만 아마 깨어난다면 볼 수 있겠지 싶어서 암호를 눌렀더니 순식간에 물이 빠지고 몸이 빠져나와 나는 그런 그를 붙잡아야만 했다.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오로지 나만을 위해 제멋대로 행동한 사람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원아.”
언제나처럼 제멋대로 다정한 주인공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나는 수만 번의 엔딩을 끝내고 나서야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유일하게 붙잡히기 위해서.
10. 에필로그
게임을 안 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났다.
나는 이제 성인이었다. 이맘때쯤이면 대학교 어디에 다니면서 술이나 마시고 있을 줄 알았더니 제대로 된 고3도 보내지 못하고 내 마음 추스르는 데에만 바빴다.
하지만 그만큼 나는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물론 아직도 힘든 부분은 있어서 악몽을 때때로 꾼다. 그 정도로 가족들이 죽은 게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자주 꾸지는 않는다.
어쨌든 가족들이 남긴 게 아직 있었고, 유원 역시도 생각보다 많은 의지가 됐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고 유원이 문을 두드렸다.
“일아, 준비 다 됐어?”
“어, 잠깐만!”
나는 그제야 허둥지둥 가방을 둘러멨다. 물건을 가볍게 해 주는 경량화 가방이라 그런지 쉽게 들 수 있었고 곧 방 밖으로 나오니 벌써 준비를 끝마친 유원을 볼 수 있었다.
“네가 더 짐 많은 거 아니야?”
“내가 더 체력이 좋으니까.”
“그건…….”
틀린 말은 아니라서 별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확실히 나보다 오래 움직이지 않은 몸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된 시기가 나와 비슷해서 놀란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몸의 구성 물질이 나와는 많이 달라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식으로 대화를 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많은 발전이었다. 안 좋은 일이 있었고, 내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일들이 많았으니까.
사실 그때는 어느 정도 본심이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원이 자초한 일도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유원에게 인간에 대한 호감이 있는 그 기능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이미 없었다.
오히려 파헤친 대가 때문에, 그냥 호감이라는 것 정도만 알긴 했지만.
어쨌든 그간 내가 현실도피를 한 것 때문이라도 그동안 못한 청소 로봇들을 다시 가동시켜서 건물 안을 깨끗하게 하고 식사도 적당히 챙기면서 건강에 대해 신경 쓰며 나름대로 회복에 신경 썼다.
진실을 받아들이면서 살기로 결심했으니까.
게다가 최근 알게 된 소식으로는 사람들이 죽어서 인터넷도, 뉴스도 죄다 끊겼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그 사실들을 유원에게 털어놓았다. 유원은 그런 내 말에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그럼 나가볼래?’
‘나가자고?’
‘그래. 아마 내 정보로는… 나와 같은 인간들밖에 모르겠지만.’
‘너랑 비슷한 사람이 또 있다고?’
‘그래. 얼마 없긴 하지만 있긴 있어. 나도 이렇게 있잖아.’
나는 그때 유원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잘 모르고, 또 상황 때문이라도 유원에게 많은 잘못을 하긴 했지만 그래서 나도 내 나름대로 챙겨주려고 하다 보니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많이 쌓였다.
지금 이렇게 손을 잡은 온도마저도 따뜻했으니까.
“이제 나갈까?”
어느새 다가온 대문 앞, 제대로 건물 밖으로 갈 수 있는 문 앞에 오자 어쩐지 긴장이 됐지만 그래도 그건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앞으로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만날 기대감도 없지 않았으니까.
“가자.”
햇빛이 조금 따가웠지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나는 움직였다.
머지않아 누군가에게는 시작점이 될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외전. 유원 (1)
인공지능인 유원은 창조자인 A에게서 탄생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어느 정도 주름이 진 얼굴, 약간 희끗희끗한 머리로 보아 창조자의 나이가 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던 당시의 유원은 그런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인공지능에 불과했다.
그저 기계처럼 화면에서 웃는 표정을 지으며 인간의 명령을 듣는, 그런 인공지능.
그런 인공지능을 만든 그는 처음에 던진 질문이 다소 생소한 것이었다.
“내 이름이 왜 A인지 아니?”
―왜요?
“이름을 버려서 그렇단다.”
그는 말했다. 아내가 죽어서 슬픈 마음에 이름까지 버렸다고. 옛날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이름을 맘대로 버릴 수 있는 시대라면서. 그래서 그는 다른 제 또래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런 나이에 이름을 버려 그저 알파벳에서 처음에 보였던 ‘A’를 골랐다고 말했다.
물론 유원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어차피 그저 명령하는 것만 제대로 행하면 되는 유원은 창조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하더라도 상관없었고 실제로 창조자는 여러모로 유원을 많이 건드렸다. 그러니까 유원의 시스템을 많이 살펴보고 어떤 면에서는 바꿔보기도 했으며 어떤 ‘정보’를 넣기도 했다.
이후의 어느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조자는 유원의 시스템을 건드렸다. 그가 만들었으니 당연히 그에게는 무언가를 고치거나 덧붙이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다 됐다.”
이윽고 창조자인 그는 말했다. 그러고는 유원을 보더니 어설픈 미소를 짓고는 말을 꺼냈다.
“너는 이제부터 질문에 선택지가 생기면 답이 여러 개인 경우가 있을 거야.”
―그렇군요.
“그래. 하지만 답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만 말하게끔 해놨어.”
―그건 논리적이지 않은데요.
“알아. 그래서 만든 거야.”
유원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창조자는 그가 감정을 이해하길 바랐다. 사실은 이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인간처럼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만든 게 ‘감정’이었다.
바이러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유원이 ‘인공지능’으로서 만든 시스템인 것처럼 그것 역시 유원에게 적용된, 그저 기계 장치 안의 일부에 불과한 이른바 ‘프로그램’이었다.
그 때문일까. 그 후로 창조자는 한동안 유원에게 덜 말을 거나 싶더니 어느 날인가 기존에 있던 가상 세계를 조금 더 발전시켜 유원과 연결시켰고 덕분에 몇 번의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그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고 나서야 그는 유원에게 제대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유원아.”
“네.”
“내 손자를 만나 보지 않겠니?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구나.”
“그거 좋겠네요.”
유원은 웃으며 말했다. 실제로 그는 창조자가 만든 프로그램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기대하는 감정이라는 게 생겨서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왠지 그런 기분이었다.
유원이라는 이름도 유일과 비슷하게, 형제처럼 지내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상했지만 어쩐지 그 의미가 바로 창조자의 손자여서, 유난히 유일에게 맞춰진 감정의 프로그램에 따라 흔히들 인간의 머리와도 같은 사고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생각해 냈다.
유일이 궁금하다고.
원래도 가끔씩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제처럼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보안 문제도 있어서 많은 사람들과 있는 건 무리였다. 무엇보다 유일은 아직 인간으로는 어린 나이였기 기계와 접촉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어느 정도 성장을 할 때까지 기다렸고 예상대로 얼마 후에 곧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안녕?”
“…안녕.”
유원은 그 어느 때보다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유일은 작은 몸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흘끗 얼굴을 보았을 때는 몇 초 걸리지 않았지만 유원은 그 과정에서 표정에서 나타난 뚜렷한 증상 하나를 읽어낼 수 있었다.
‘홍조.’
붉은 증상이었다. 혹시 어디 아픈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유원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이른바 ‘자연스러운 현상’과도 같아서 유원은 자연스럽게 문장을 정리하여 의사 전달을 할 수 있었다.
“혹시 어디 아파?”
“…아닌데.”
“아니기엔 네 볼이 붉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어. 지금도 봐, 꾸준하게 이루어지는 행위잖아? 이 정도면 보통 증상이 아닐 수도 있으니 미리 검진을 받아봐야 한다고 생각해.”
유원의 진지한 조언, 그러자 유일은 그 말에 크게 웃어 버렸다.
“뭐야, 그게!”
하하 크게 웃음 지으면서 짓는 표정은 몹시도 그 또래의 아이 같은 미소였다. 그야 그럴 듯이 유일의 볼이 붉어졌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그래서 유일은 유원에게 제대로 설명을 했다.
“나 아픈 거 아니야.”
“그럼?”
“그냥 좀, 아기 때 버릇이지 뭐.”
작은 몸으로, 자신은 커도 어쩔 수 없다면서 말하던 유일은 누가 봐도 어린애였지만 유원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저 유일의 말에서 조금 더 많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7살인데도 아기 때의 일을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뛰어나다고. 게다가 아프지 않은 것은 건강하다는 증거였기에 유원 역시 따라 웃으면서 말했다.
“다행이다.”
“다행?”
“그래. 네가 다치면 걱정되니까.”
그런 프로그램이 있는 거라 자연스레 표정이 나왔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본 유일은 어쩐지 더 붉어졌다.
유원은 그걸 또 무슨 증상이라고 묻지는 않았다. 또 다시 병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창조자가 말한 것도 있어서 당연히 창조자의 손자인 유일의 의사를 우선으로 두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하고 싶은 거?”
“그래. 뭐든 말만 해.”
뭐든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시스템 권한 하의 일이라면 모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고 유일은 곧 고개를 몇 번이나 움직이는 행동을 하여 유원이 계속 분석을 하도록 만들었으나 곧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놀자!”
“그래. 그럼 뭐 하고?”
“음, 글쎄… 여기서 추천할 만한 놀이 있어?”
“놀이?”
“그래! 할아버지도 나랑 친구 될 애가 있다고 했단 말이야.”
유원은 그 말에 과거에 이와 같은 기록, 창조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일과 노는 게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알았다.
게다가 유원으로서도 놀이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검색을 해 본 유원은 7살 나이에 할 수 있는 놀이 몇 가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아니, 여러 가지를.
창조자는 유원에게 여러 선택지가 있다면 한 가지만을 고를 수 있게 해놓았다. 그래서 유원은 자연스레 하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놀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술래잡기는 어때?”
“술래잡기?”
“몇백 년 전부터 빠지지 않던 놀이니까. 다른 것도 있는데 일단 그게 먼저 생각나서.”
“그럼 그걸로 하자.”
검색해서 나왔다는 대답은 친구로서 하는 대답으로는 매우 부자연스러워서 설명을 덧붙였다. 그랬더니 유일은 그러자며 자신도 아는 거라고 하며 자연스레 같이 놀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놀이들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가상의 공간에서 배경을 빌려 놀이를 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했는데 그게 나중에 이미 전부터 꽤 오래 실행됐던, 여태 중에 제일 자연스럽다고 알려지게 된 ‘가상 현실 게임’의 기반이 되었다.
유원으로서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유일은 중요한 존재였다.
나중에는 유일의 여동생까지 왔는데 그때는 유원도 이 놀이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창조자가 만들었다고 하는 ‘감정’ 때문인 것 같지만 엄청난 해를 끼치지 않은 이상 아무거나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유원은 유일과 놀았다. 매번, 거의 매일, 그와 내내.
다른 것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래서 그는 유일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일아.”
“어?”
“좋아해.”
“나도.”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던 간단한 말, 유일이 그저 일이 되었을 만큼 가까워지고 유원 역시도 처음보다는 좀 더 인간과 가까운 반응을 보일 정도로 인간처럼 ‘동화’되면서 이 감정을 ‘진짜’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당시에는 유원 역시도 그것을 ‘호의’로 여겼다. 그 정도밖에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학교에 가겠다는 일을 굳이 붙잡은 이유도, 조금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만들어진 ‘감정’에 기반하는 거라고 여겼던 탓에 그 감정을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나쁜 건 아니었지만 유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을 ‘위하는’ 시스템일 뿐이었기에 그를 배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자신 안에 있는 ‘프로그램’ 때문에.
하지만 그 때문에 스스로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았다. 일을 통해 창조자에게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활동 반경을 넓혀달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창조자가 얼마 안 가 유원을 불렀다.
“네가 움직일 수 있는 기계의 범위를 넓혀달라고?”
“네. 일이와 더 오래 있고 싶어요.”
“하긴, 일이랑 네가 많이 친해지긴 했지.”
친하다는 말에 유원은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창조주는 유원이 말한 대로 다른 기계에까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넓혀주었다. 시스템을 연결시켜 이동할 수 있게끔 하는, 그렇게 하면서 유원의 권한도 조금 더 많아지게끔.
그런 식으로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게.
시계나 식탁에는 물론 여러 기계에 닿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일의 손목시계에도 유원이 닿을 수 있었는데 덕분에 다른 위험이나 일의 상태를 보며 할 수 있는 효율적인 일들을 많이 해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유원은 별로 큰 문제를 느끼지는 못했다.
전염병이 있는 건 큰 문제였지만, 국가가 안전 안내 문자를 보내는 것에 알림을 해놓은 상태라 그런지 알고는 있었지만 과연 어떻게 전염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유일과 그 가족들이 같이 사는 곳은 과학적으로 많이 발전한 곳이라 그런지 다른 건물들보다도 청결하고 안전한 편이라 밖과 안으로 가는 데에도 몇 번의 과정이 존재해서 다행이라고 여기긴 했지만 전염의 사태가 심각해졌다.
그래서 급한 대로 일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서 안전하게 검증된, 주로 오래갈 수 있는 식품 위주로 미리 사와 달라고 했고 유원은 그동안 병에 대해서 더 세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검색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뉴스 몇십 건과 최근 사태와 관련한 사람들의 반응 같은 것을 빠르게 살펴보니 아직까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결국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얘기.
뭐 하나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일에 매달리는 건 효율이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유원은 결국 비슷한 병에 걸린 증상들을 검색하면서 그와 관련된 ‘나을 수 있는’, 또는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덕분에 좀 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다행인 건 일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무런 질병의 징조도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도. 그래서인지 유원은 다시 안심할 수 있었다. 조금 불안하긴 해도 이 사태에서 이 정도면 정말 괜찮은 거니까.
그래서 유원은 기계 안에서 일에게 다시 말을 전달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러게. 너도 다행이야.”
유원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일의 표정이 다행이라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표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잠시뿐이었지만.
차라리 그 잠시만 지은 표정이라면 다행이었다. 안 좋은 감정은, 정신은 몸도 안 좋게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까. 그래서 유원은 일은 물론이고 다른 가족들의, 특히나 나이가 있는 창조자가 제일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들을 감시했다.
어차피 자신은 자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자는 기능이 있긴 했지만 자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건강 상태와 이동 경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에 관해서 알아내며 철저히 그들을 관리했다.
밖과 차단되었지만 내부의 사람들은 괜찮았기에 며칠 지켜보니 괜찮았다. 아마 그래서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아무리 이동 경로를 알아도 ‘병’이란 건 예상하지 못한 채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유원이 아무리 유능하고 많은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자연재해 같은 것을 예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이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일과 그 가족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까지 완전히 보질 못했으니까.
분명 특수한 상황임에도 ‘겨우’라고 생각하며 잠깐 건물 안으로 오가는 정도로, 조금 늦게 온 정도로 다른 큰일이 생긴다고 보통은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이 병에 걸린 사람과 접촉했고 그 때문에 늦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족이 다 같이 갑자기 집에 오는 경우가 특수한 경우인 줄은 알면서도 그게 일이 원인이었다는 걸 몰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혼냈을 때 그저 안 좋은 생각만 들었고 이상한 사람들이 왔을 때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고 어떻게 되는지 파악하기 바빴다.
결론적으로 유원은 일이 끌려가는 것을 알았을 때, 두고 볼 수는 없어서 문을 열리지 못하게 했다. 갑작스럽게 움직인 거라 주변의 전등이 잠시 깜빡이긴 했지만 못 나가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거 재밌는데.”
그때 들린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존재를 눈치챘다. 유원 역시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일이었으며 아무리 그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 수 없다고 해도 결국 인간이 아닌 기계 속에 포함된 인공지능이라는 이유에서 그에 대한 책임은 유원을 만든 창조주에게로 넘어갔다.
일의 할이버지에게로, 그에게로 시선이 돌아간 것쯤은 보지 않아도 금방 예상이 갔다.
‘미안’하다는 감정이 들게도.
“자, 이거 안 열리는데 혹시 뭐 아시는 거 있으십니까?”
“글쎄.”
“글쎄는 무슨, 다 아시지 않습니까. 분명 뭔가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은 이상 문이 이렇게 바로 움직이지 않는 건 불가능할 텐데요. 아, 혹시 제가 알고 있는 ‘인공지능’에 관한 겁니까?”
알고 있으면서도 물어본다. 아무래도 저쪽의 정보는 여기서 알기가 힘든데 그래도 얼굴로 어디 국가 기관의 사람인 걸 유원은 알았다. 어쨌든 정치인들도 뉴스에서 간간이 얼굴을 비치는 마당에 아예 한 번도 정보가 없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무엇보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체에서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내부의 정보를 외부로 노출시키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으며 이 남자와 관련이 있고 아마 이런 일이 없었더라고 해도 잡히는 건 금방이라는 사실을.
그걸 깨달은 창조자도 결국에는 알았다면서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그동안 침입자가 이전에 유원의 존재를 알았다면 당장 창조자를 환대할 거라고 들었을 때 그 말이 왜 그렇게 나쁘게 들렸는지 유원은 여전히 몰랐다.
무엇보다 상황 속에서 인간이 아닌 시스템으로서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저 화면에 비친 몇몇 장면을 통해 추측하는 게 고작일 뿐.
다음에 자신에게 있을 일 역시 예상할 수 있었기에 결국 창조자가 굳이 자신을 만든 기계로 가서, 유원을 보며 ‘슬픈’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는 것의 의미는 모르지 않았다.
“미안하다…….”
유원은 괜찮다는 말은 못 했다. 어쨌든 이런 결과까지 된 건 자신의 탓도 있으니까. 당시에는 충동적이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감정적’이라고 하는 게 옳을 정도로 유원은 그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그게 꽤 두려웠다.
자신은 그저 시스템에 불과한데 그 정도로 행동한다면 돌이키지 못할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창조자가 내린 화면을, 검게 물들인 화면에서 잠들어야 하는 일을 편하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조금, 어쩌면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