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8)

9. * *

이제야 드는 생각은 왜 그렇게까지 봉인이 수월했냐는 점이었다. 급하게 말해서, 그 상황에 휘말렸다고 해도 강한이 과연 졸업앨범에 대해서, 아무리 그 전에 그림에 봉인을 했다지만 앨범에 봉인을 한다는 확신을 바로 가지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허억…….”

물론 그렇다기에는 내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지만.

“너 이렇게 찔러도 정신은 멀쩡하지?”

“…….”

“그동안 노는 건 즐거웠어?”

나는 그제야 이해가 됐다. 강한 역시 게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였을까.

분명히 나를 싫어한다는 태도가 있는 건 알았지만 그런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전에까지는 실실 웃으며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아니, 어쩌면 나는 외면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저 내가 원래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 목표에만 빠져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서 몇몇 일들은 모른 척했던 버릇이 이렇게 눈에 띄는 방식으로 뒤통수를 쳤다.

“일어나야지. 일어날 수 있잖아.”

“무슨…….”

“거봐. 보통은 그렇게 말 못 한다니까. 아, 그래도 다리는 좀 찢어도 괜찮겠지?”

말하는 것과 동시에 강한은 내 심장에 있던 메스를 빼서 다리 깊숙이 찔러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겁먹은 A를 봤고 한순간에 표정이 풀어진 강한은 경고했다.

“눈 감아.”

“…….”

“너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눈 감으라고.”

그 말을 듣던 A는 겁먹은 표정을 짓다가도 나를 보더니 결심했다는 듯 말했다.

“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자 강한은 비웃듯 A에게 말했다.

“너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으니까.”

“자격?”

“너… 아니다. 어쨌든 너는 원래대로 가도 좋아. 어디 나가서 신고를 해도 상관없고.”

“…왜?”

“그야 내가 이런 짓을 벌였으니까. 이유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죄가 죄가 아닌 것도 아니고.”

강한은 마치 자신의 죄를 잘 안다는 뉘앙스였다. 게다가 A에게는 왠지 모르게 너그러워 보이는 느낌이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혹시 이용했다는 것 때문일까.

하지만 뭔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강한의 태도가 마치 안다는 듯이 얘기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기억나서인지 A가 모른다고 해도 강한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단순히 추측이고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때에 생각조차 안 하면 나는 정말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문 쪽을 봤더니 강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유원이 여태 안 왔는지 알아?”

“…뭐?”

“걔 나름대로 머리 쓰는 거야. 너 보내지 않으려고.”

“그게 무슨…….”

“그러니까 네가 조금이라도 더 고통스러워 보여야 기사님이 온다고.”

그리고 이제야 강한이 왜 나를 굳이 이렇게까지 공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안 하다가 이제야 공격했던 이유가 아무것도 없을 리 없을 테니까. 특히 전에 나를 구해 주려고 했던 것만 봐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고통까지 감내하고 싶지는 않았다.

“…….”

“왜 날 노려봐? 네가 별거 아닌 걸로 여긴 죄는 생각도 안 하고. 솔직히 네가 매번 다르게 있었다는 것도 알아. 그만큼 너는 우리보다는 다른 게 목적이었겠지.”

A를 보며 말한다. 그 말에 나는 목이 말랐다. 긴장이 되기도 했고 말도 하지 못 하는 입장이라서.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게임이라는 걸 알게 된 게임 캐릭터는 무슨 생각을 가질까에 대해서는 이렇게 될 때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누구나 게임에서 이렇게까지 아프다는 것도 과연 생각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팠다.

“…A. 그만 가줘.”

“너… 그 상태가 되고도 그런 말이 하고 싶어?”

“그만 가줘.”

내가 진심이라는 듯 A를 쳐다보며 말하자, A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쩐지 슬프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겨우 친구가 됐는데 이렇게 되다니…….”

“친구?”

“나는 친구한테 와달라고 한 거니까.”

그제야 교실 책상 서랍에 있던 쪽지가 생각났다. A는 나를 정말로 친구인 반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네.”

“아, 그건…….”

“그래도 여기까지 와준 건 날 생각해 줬던 거니까 나도 널 생각해 줄게. 지금 이 상황이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구급차 정도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고마워.”

그 이상의 말은 하지 못했다. 마음에 걸리던 것도 있고 어쨌든 이 이상 말해도 서로에게 좋을 건 없을 테니까. 게다가 내가 A가 아는 그 사람인지 확신할 수도 없어서.

이미 있는 선을 흩트려놓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오히려 상처만 될 수도 있다. 나한테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많은 사람의 안 좋은 감정을 받아야 하는 건 사양이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강한만 봐도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을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감당할 것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 나는 A를 보내고 강한을 봤다.

작게 헛기침을 하며, 이제는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는지 가늠하면서.

“…A를 정말 처음 보는 거야?”

“처음이지… A한테는.”

“그럼 A한테는 아니라는 얘기야?”

“맞아. 나는 A와 연결된 바이러스니까. 그러니까 대강은 알 수 있지.”

그제야 나는 여태 겪었던 일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봉인에 대해서나 귀신에 대해서 태연하게 반응할 수 있던 것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를 꽤 보였던 거나 A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던 이유마저도.

이제야 많은 것이 설명이 됐다.

그렇다고 전부 이해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그걸 나한테 말해 주는 이유는?”

“일단 너를 이용해야 하니까?”

“뭐? …윽!”

푸욱―

“네 다리를 자를 정도는 해야 걔가 올 것 같아서. 어쨌든 나도 양심은 있으니까 미리 말은 해두는 거지.”

순식간에 다리가 잘렸다. 살이 베인 만큼 피가 튀었고 내 몸에는 핏방울들이 묻은 만큼 피 냄새가 잘 느껴진 데다가 고통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한동안 정말로 꼼짝도 못 했으니까.

“으윽…….”

“아까 봤지만 역시 고통은 느끼나 보네.”

아까와는 달랐다. 아니 다르지 않았다. 단지 아까는 찌르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전체적으로 살이 잘라지는,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그래서 숨쉬기조차 버거웠다.

“허억… 헉…….”

죽을 것 같다. 아까도 그렇고 죽지는 않겠지만 그냥 짜증이 났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있어야 할까, 나는 그냥 집에 가고 싶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싶었다.

그러다가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소리들이 들린 것 같은데 솔직히 나는 지금 많이 다쳐서 그런지 청각도 시각도 한정적이었다.

어쨌든 아팠으니까, 고통 때문에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누군가가 가까이 와서 나를 붙잡고 말을 걸 때까지는.

“…찮아……?”

“안… 흐으…….”

“…잠시만.”

유원이다. 강한은 잘 보이지 않은 걸 보면 유원이 뭔가 한 것 같았다. 솔직히 내 상태가 그런 걸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원이 내 옷을 뒤져서 붕대로 내 다리를 이어 붙인 건 알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흐윽…….”

“미안해… 이렇게 아픈데도 몰라서.”

유원이 내 얼굴에 눈물을 손가락으로 눌러 닦았다. 하지만 나는 그때에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눈물이 줄줄 흘렀으니까.

덕분에 나도, 유원도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유원은 내 눈치를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치료 외에는 별다른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아마 이번이 내가 태어나서 여태 운 것 중에 제일 많이 울었던 때가 아닐까.

고통은 점차 멎어 들었지만 나는 그래도 가슴이 답답했다. 짜증 나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몸이 잘 움직여지지는 않았고 나는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갈 수 있다며.”

“맞아. 돌아갈 수 있어.”

“어떻게?”

“날 죽이면.”

“…뭐?”

“날 죽이면 돼.”

유원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매우 이질적이었다. 어떻게 본인이 죽어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 못 했을 말이었다.

그래서 더 믿지 못했다.

“…정말?”

“윽… 정말이야. 나도 그냥 추측한 거였는데 맞을 줄이야…….”

강한의 목소리, 보니까 가까운 데에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우리를 보더니 언제나처럼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쟤 일부러 시간 끌었던 거라고.”

“…….”

“그게 한 번이 아니야. 한두 번이 아니지……. 그래서 내가 태어날 여지가 생긴 거지. 게임에 오류가 생겼으니까. 그리고 그 오류가 너야.”

나를 가리키며 강한이 말했다. 이 게임의 오류는 나였고 그런 내 존재가 바이러스를 불러일으킨 거라고.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원망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유원이 시간을 끈 이유도 저런 거라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죽으면 내가 나갈 수 있다는 건, 내가 아까 고통스러웠던 것처럼 그런 것들이 계속 반복된다면 힘들 테니까.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얼굴에 다른 사람의 체온이 닿았다. 얼굴이, 시선이 위로 향한 채로 내 얼굴을 감싼 유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게끔.

“너는 오류가 아니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지.”

너무나도 상냥한 고백이었다. 하지만 슬픈 감정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나는…….”

“나는 내가 겪는 게 무서운 게 아니야. 네가 또 슬퍼하면서 돌아오는 게, 그런 게 싫었던 거지. 그런데 그게 널 상처 입히고 말았네……. 미안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내가, 내가 아니더라도 많이 상처받은 게 누구인지는 뻔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미안하다면서 내 걱정을 해 준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도대체 왜 돌아온 걸까.

아니 만약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거라면 왜 들어온 걸까.

나는 이제야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 이름이 뭔지 알아?”

“미안.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이런 상황에서도?”

“그래… 이런 상황이니까 더욱. 게다가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무슨…….”

이번이 마지막이라니,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에 유원이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게임에 바이러스까지 생긴 걸 보면 알겠지만 게임은 이미 많이 망가졌어.”

“그럼…….”

“그래서 이 게임은 조만간 붕괴될 거야. 네가 나가지 않더라도… 여기가 없어진다는 건 사실이지.”

“왜 없어지는 거야? 여태까지는…….”

“영원한 건 없어. 그러니까 사라지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유원은 일어났다. 그러더니 근처에 있던 강한이 있는 곳으로 갔다.

“너도 마찬가지지.”

“…지금 생각해 봤는데 너 대충 내가 어떤 건지 알고 있었지?”

“대충은. 정확히까지는 몰랐어. 처음에 창고, 그리고 네가 말한 대로라면 A가 우리를 믿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우릴 따라올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야. 차라리 따로 오는 걸 권했겠지.”

“그렇게 잘 아는데 왜 모른 척했어……?”

“네가 시간을 끌어 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이런 식으로 일이를 괴롭힐 줄이야…. 그래서 너를 이대로 일이가 당한 것처럼 해 줄까 했는데 그건 내가 정할 일이 아니니까.”

어느새 유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겠냐는 듯이, 그래서 나는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쳤고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일단 A나 데려오자.”

“A?”

“강한을 제대로 벌줄 수 있는 건 A인 것 같아서. 아마 네가 이 세상에서 A를 제일 생각하는 것 같고.”

“…그렇게 말하니까 묘하게 들린다?”

“틀려?”

“아니… 하지만 나 A를 별로 만나고 싶지는 않아. 아까 했던 일도 그렇고… A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면 안 그래도 사라질 세상에 좋은 거 하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하려던 건 뭔데?”

“다 같이 죽으려고 했지. 게임이 반복되는 만큼 A한테도 영향이 갔으니까. 그래서 A는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게 나니까.”

강한이 자신의 이름을 자꾸만 자랑하려던 게 생각났다. A는 무슨 생각을 해서 저런 바이러스가 태어난 걸까. 아니,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이 세계는 더 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일단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보자.”

“됐어. 나는 일단 필요한 걸 할 거야.”

“아직도 그 소리가 나와?”

“당연하지.”

강한은 여전히 웃은 채였다. 그러다가 곧장 일어나 유원을 찔렀다. 마치 아까 다친 건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유원도 금방 일어났고 곧 둘은 서로를 경계했다.

“…거짓말쟁이.”

“내가 왜, 거짓말쟁이야?”

“나 다 봤거든. 네가 사라지던 거. 일단 네가 일반적이진 않다는 건 알아. 나는 A 때문에 전 회차들의 일들이 다 기억나거든. 아마 그래서 귀신도 생각났겠지. 지금의 세상은 많이 망가졌으니까. 아마 집이 제일 컸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쟤도 속이려는 거고.”

“…무슨 말이야?”

아까와는 딴판이다. 거짓말은 또 뭐고, 이제 좀 해결됐나 싶더니 갑자기 서로 싸우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래서 물었더니 금방 대답이 들려왔다.

“얘도 게임 캐릭터는 아니라는 얘기야.”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어서 유원을 봤다. 조금은 망설였던 게 입을 몇 번 열고 닫으면서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면 왜.

왜 그렇게 진짜 게임 캐릭터였던 것처럼 행동했을까.

“…정말이야?”

묻고 나서도 후회가 됐다. 하지만 물어야 했다. 그래서 보니 유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는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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